[더굳뉴스] 이억희 목사의 칼빈 선교신학
나라의 재난과 총회 사명
인상파가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건 당대의 화가들이 단순히 빛의 색채와 질감에 매혹되어서가 아니라 ‘빛의 인상’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표현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상파 중에서 세잔의 엄격한 화풍에 대비되는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화려한 멋을 보인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 ~ 1919년 12월 3일)가 말했다.
“빛이 시시각각 바뀌어서 올리브나무를 그리기가 참 어렵다.”
그들에게 빛이 쏟아지는 풍경은 축복이자 자극임과 동시에 더 잘 그려내고 싶은 도전이기도 했다.
그렇게 남프랑스 혹은 프로방스라고도 불리는 곳의 인상파 화가들처럼 칼빈대에서 평생을 칼빈주의 발전에 바친 사람이 있다. 이억희 목사는 2024년 10월 30일 예담교회 카페에서 나누는 커피와 온수의 향기를 나누며 칼빈에 대해 말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불살라지고 내 몸이 불태워져도 폐하께 바칩니다. 그런데 불태워질 것에 대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글들을 제네바의 학생들에게 무두 나눠줬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가톨릭 옹벽을 뚫고 나가서 각 나라에 그 내용이 전파돼습니다. 결국 이것은 칼빈의 선교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문서선교이기도 하죠. 그리고 제네바 대학의 전신 제네바 아카데미를 운영했죠."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빈을 의장으로 하여 생 피에르 교회(St. Pierre Cathedral)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여기에서 발전한 제네바 대학교(Université de Genève)는 스위스의 공립대학교이다. 제네바에 위치해 있고, 불어를 사용한다. 1559년 종교개혁자 칼빈(Jean Calvin)이 신학, 법학, 인문 교육 기관으로 창설한 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1873년에 종합대학교가 되었다. 오늘날, 제네바 대학교는 스위스에서 두 번째로 큰 대학교이다. 이억희 목사는 계속 말했다.
"칼빈은 사회 복지선교를 했죠. 지금도 하고 있잖아요. 그의 선교 세계는 가는 곳미다 예수만 전했잖이요. 칼빈만큼 선교에 전념한 인물이 없어요. 그래서 칼빈을 선교의 선구자(pioneer)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신학을 배우기 전에 목회와 성경신학과 선교를 배우지 않고 조직신학부터 배웠기 때문에 싸움만 하는 겁니다. 우리 총회처럼. 신학가지고 싸우잖아요. 결국 잘했다 잘못했다 이거믄 신학에서 나오는 거고 긍휼과 사랑은 목회와 선교에서 나오죠. 총회 드나드는 목사마다 신학만을 말하니까 싸움만 해요. 싸워서 이겨야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칼빈은 그걸 진리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복음과 생명의 능력을 이 땅 끝까지 가서말하냐 선교의 열매를 맺느냐 하는 걸 말했습니다.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는 신학의 목적은 가톨릭에 대한 저항과 개혁이거든요. 그래서 기독교 강요는 가톨릭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하는 변론서 아닙니까. 그래서 개혁주의가 나온 것이고 수많은 순교자가 나와도 가톨릭과 선을 긋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 종교개혁을 이루지 않았습니까."
종교개혁이라는 기적이 필요한 시간. 그렇다. 인간의 대응 능력을 뛰어넘는 예측 불가능한 2024년 11월 1일 1년여 이스라엘과 회교도 세력의 분쟁과 2년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쩌면 기도뿐일 것이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적뿐일지도 모르겠다. 기적이 필요한 바로 지금 이 순간 결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1931년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가 펴낸 "산업재해 예방: 과학적 접근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A Scientific Approach"이라는 책에서 인류가 겪는 재난에 대한 법칙을 소개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하인리히는 미국의 트래블러스 보험사(Travelers Insurance Company)라는 회사의 엔지니어링 및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다.
업무 성격상 수많은 사고 통계를 접했던 하인리히는 산업재해 사례 분석을 통해 하나의 통계적 법칙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사망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인리히 법칙은 "1:29:300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즉 큰 재해와 작은 재해 그리고 사소한 사고의 발생 비율이 1:29:300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힌 것으로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 일정 기간 동안 여러 번의 경고성 징후와 전조들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다시 말하면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 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던 가슴 아픈 대형 사고를 많이 경험했는데 1990년대가 특히 그랬다. 1993년 구포 열차 사고, 아시아나 추락 사고,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8년 IMF 금융 사태, 1999년 씨랜드 화재, 인터넷 대란과 같은 재난 사고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을 때 또 다른 사고가 계속 발생했다. 사고는 왜 지속적으로 일어날까. 어떤 이는 과거 압축 성장의 부작용이라 하고, 성장 위주 경제정책으로 인한 폐해라고도 한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성장에 바빴던 우리 사회는 사회 전 분야에서 안전을 가볍게 여기고 안전을 문화로 승화시키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부가 인적 재난관리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것도 1995년 508명이 희생된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후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 통계에 따르면 1964년부터 2013년까지 발생한 사망자 10인 이상의 대형 재난 276건 중 42%가 인적 재난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인적 재난은 줄어들지 않았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등 많은 사고가 일어나자 정부는 본격적인 재난관리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소방방재청 신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수립 등 국가 안전관리 계획이 마련됐다. 그런데도 대형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2005년 양양 산불, 서해대교 29중 추돌, 2007년 허베이 스피릿호 기름 유출, 2008년 이천 냉동창고 화재, 숭례문 방화 사건,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2013년 삼성전자 화성공장 불화수소 누출 사고 등이 발생했고, 2014년 2월 경주 마리나리조트 붕괴 사고, 같은 해 4월에는 전 국민을 가슴 아프게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 고난의 단초가 됐던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은 분명히 제도적인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하겠으나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된 안전 관련 가치관 미흡과 이로 인해 형성되는 안전 문화의 부재에 있다고 판단된다.
안전은 법과 제도나 사회적 인프라 같은 하드웨어만 갖춘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가치관, 국민의 의식과 그 무엇보다 안전을 중시하는 도덕의식을 배양하는 신앙적 정직이다. 문재인식의 무책임한 발언, 이재명식의 부정직한 둘러대기, 성직자의 지역 편향이나 좌경화, 사회 구성원의 신분 여부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배금주의 등의 문제점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성경으로 돌아가 회개운동을 펼치는 길뿐이라는 자각뿐이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물론 우직한 김종혁이지만 제109회 총회가 새로운 각오로 대한민국의 정신문화를 더욱 성숙시키고 정직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되새겨야 할 인물이 있다. 그는 도산 안창호다.
도산 안창호는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로서 흥사단, 국민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분이다. 말년에 윤봉길 의사의 상해 폭탄 사건과 동우회 사건으로 5년간 옥살이를 하던 중 1938년 60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분으로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분이다. 그의 시신은 현재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도산공원에 아내와 더불어 안장되어 있다.
그의 민족 사랑의 깨달음과 신념은 어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가. 그것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구세학당과 정동학당에서 배운 기독교의 가치관과 예수 신앙이었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가 구세학당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모습과 정동학당에서 전도하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전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고 열심히 있었던지 당시 발행된 신문에 리석관이라는 하는 선비가 그 이전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하다가 안창호라는 사람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는 이후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 송만리에 학교와 교회를 세워 교육과 전도를 함께 하였다.
안창호는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널리 전파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도산은 1936년 10월 죽기 1년 반 전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청년회 연합 집회에 강사로 서게 되었다. 이날 소문을 듣고 모인 청중이 교회당 밖 뜰까지 가득 차서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이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모세가 히브리 노예 백성을 이끌고 홍해 바다를 건너 애굽으로부터 해방 받는 장면을 출애굽기 14:21-28 본문으로 선택하여 병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장장 두 시간이 넘게 말씀을 전하고 다음의 말로 끝맺었다고 한다.
묻노니 여러분이시여! 오늘 대한 사회의 주인되는 이가 얼마나 됩니까... 그 민족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감이 있는 이가 주인이요, 책임감이 없는 이는 손님입니다... 진정한 주인에게는 비관도 없고 낙관도 없고 제 일인 고로 오직 어찌하면 우리 민족 사회를 건질까 하는 책임감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아 진정한 주인이 적다 싶으면 빨리 나부터 참 주인이 되도록 합시다.
“나가자”라는 제목으로 두 시간에 걸친 그의 설교를 마친 뒤 도산은 모든 회중에게 다 기립하기를 청하고 “나가자!”는 구호를 세 번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 4:17
202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