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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_ 칼빈의 마지막 안녕
    Lesson XXIII 칼빈의 마지막 안녕 Calvin’s Final Farewell 칼빈의 만년(15551564)에 그의 권위는 실제로 겨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다른 국제적인 평판을 누렸습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2006, pp. 161164)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Last illness In late 1558, Calvin became ill with a fever. Since he was afraid that he might die before completing the final revision of the Institutes, he forced himself to work. The final edition was greatly expanded to the extent that Calvin referred to it as a new work. The expansion from the 21 chapters of the previous edition to 80 was due to the extended treatment of existing material rather than the addition of new topics. Shortly after he recovered, he strained his voice while preaching, which brought on a violent fit of coughing. He burst a blood-vessel in his lungs, and his health steadily declined. He preached his final sermon in St. Pierre on 6 February 1564. On 25 April, he made his will, in which he left small sums to his family and to the collge. A few days later, the ministers of the church came to visit him, and he bade his final farewell, which was recorded in Discours d'adieu aux ministres. He recounted his life in Geneva, sometimes recalling bitterly some of the hardships he had suffered. Calvin died on 27 May 1564 aged 54. At first his body lay in state, but since so many people came to see it, the reformers were afraid that they would be accused of fostering a new saint's cult. On the following day, he was buried in an unmarked grave in the Cimetire des Rois. The exact location of the grave is unknown; a stone was added in the 19th century to mark a grave traditionally thought to be Calvin's. 1558년 칼빈은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에 매달렸습니다. 마지막 판은 그것이 새 저작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양이 늘어났습니다. 이전 판의 21장에서 새로운 주제들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현존하는 자료를 광범위하게 다루어 80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병 회복 직후라 칼빈은 발작적인 심한 기침을 유발하는 설교를 할 때 목소리를 억제했습니다. 그는 폐의 피를 한 통이나 쏟았고 그의 건강은 꾸준히 나빠졌습니다. 그는 1564년 2월 6일 세인트 피에르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4월 25일 그는 가족과 대학에 약간의 돈을 남기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교회 목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목사들과의 고별 대화(Discours d'adieu aux ministres)에 기록된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의 그의 생활을 조목조목 말하면서 그가 겪은 고통과 역경을 간간히 씁쓸하게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유해가 공개적으로 안치되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묘지를 보러 오는 바람에 개혁자들이 새로운 성자숭배를 조장한다는 비난이 생길까 두려웠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시메티에르 데 루아(Cimetire des Rois) 공동묘지에 표시가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무덤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릅니다. (300여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으로 칼빈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무덤 하나에 돌을 하나 세웠습니다. 칼빈은 느보산의 모세처럼 그 무덤을 아는 자 없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신명기 34:1-6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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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십 계명 탐욕
    Lesson XXII 제십 계명 탐욕 Tenth Commandment Greed 제발 좀 더 주세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성이 안 찬 표정으로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무엇이라구. 범블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노려보았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는 1837년에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묘사한 굶주림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즉 굶주림은 고아원에 있는 소년들처럼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만듭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는 허기를 메우기 위해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 상속권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음식에 굶주린 사람이 용감해지듯 돈에 허기진 사람도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돈을 갈구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이래 최악의 부패 스캔들로 불리는 화룽자산그룹의 라이샤오민전 회장 집에서 무려 3톤에 달하는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중국 매체들은 역대 발견된 현금 은닉 재산 중 최고액이라고 전했습니다. 주요 일간지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財新)은 2018년 8월 10일 중국 최대 자산관리회사인 화룽자산그룹의 전 회장 라이 샤오민의 수사 뒷얘기를 전했다. 이달 초 있었던 화룽그룹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라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중국 사정 당국이 라이 전 회장 소유의 집 여러 곳을 급습했을 때 방 곳곳에 쌓여 있던 현금 다발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곳에 모으면 무려 3톤에, 부피로는 3㎥에 달하는 양이었다. 중국 100위안(약 1만6500원)짜리 지폐 한 장의 무게는 약 1.15그램이다. 위안화뿐 아니라 외화도 섞여 있어 총 금액은 2억7000만위안(약 444억4000만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택에 은닉한 재산의 최고액을 경신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2014년 4월 국가에너지국 석탄사(司)의 웨이펑위안 부사장(副司長) 집에서 발견된 2억3000만위안(약 378억6000만원)이 최고액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수사관들이 지폐를 세기 위해 지폐계수기 16대를 동원했는데 이 중 4대가 과열로 고장이 났을 정도였다. 중국 매체들은 라이 전 회장의 집에서 3t 분량의 현금을 압수했지만 이는 전체 횡령 금액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라이 전 회장은 금융업계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로 그가 화룽그룹의 회장직을 맡은 2009년 회사의 순자산은 156억위안(약 2조6000억원)에 불과했지만 작년 순자산은 1826억위안(약 30조550억원)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탐내지 말라는 제십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enth Commandment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HOUSE,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WIFE NOR HIS MAN-SERVANT, NOR HIS MAID-SERVANT, NOR HIS OX NOR HIS ASS, NOR ANYTHING THAT IS THY NEIGHBOUR'S. 49. The purport is: Since the Lord would have the whole soul pervaded with love, any feeling of an adverse nature must be banished from our minds.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no thought be permitted to insinuate itself into our minds, and inhale them with a noxious concupiscence tending to our neighbour’s loss. To this corresponds the contrary precept, that every thing which we conceive, deliberate, will, or design, be conjoined with the good and advantage of our neighbour. But here it seems we are met with a great and perplexing difficulty. For if it was correctly said above, that under the words adultery and theft, lust and an intention to injure and deceive are prohibited, it may seem superfluous afterwards to employ a separate commandment to prohibit a covetous desire of our neighbour's goods. The difficulty will easily be removed by distinguishing between design and covetousness. Design, such as we have spoken of in the previous commandments, is a deliberate consent of the will, after passion has taken possession of the mind. Covetousness may exist without such deliberation and assent, when the mind is only stimulated and tickled by vain and perverse objects. As, therefore, the Lord previously ordered that charity should regulate our wishes, studies, and actions, so he now orders us to regulate the thoughts of the mind in the same way, that none of them may be depraved and distorted, so as to give the mind a contrary bent. Having forbidden us to turn and incline our mind to wrath, hatred, adultery, theft, and falsehood, he now forbids us to give our thoughts the same direction.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십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49.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도(意圖)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입니다.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뚤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에 기울어 끌리는 것을 금하신 그는 지금 우리의 생각을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로마 제국에서 부유층은 흥청망청 연회를 벌여 1인당 3kg의 숭어를 먹어 댔지만, 물고기의 진가는 도시 시장과 군대 식당에서 발휘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일 때는 고등어 같은 하급 어종이 선원이나 군인의 식사 메뉴였는데, 가벼워서 대량으로 운반하기가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어부와 어부가 잡은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파라오는 피라미드를 세우지 못했을 테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도 웅장한 위용을 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초기 문명은 대부분 강어귀, 호수, 연안 아니면 대양에 접근하기 쉬운 자리에서 꽃피었습니다. 작은 무리에서 마을, 도시, 제국, 국가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중요한데 강어귀나 호수 등은 어부들이 식량원을 지속해서 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곡물을 재배하기 전까지 인류는 사냥, 채집, 고기잡이로 식량을 획득했습니다. 이중 사냥과 채집은 인류가 발전하면서 각각 목축과 농경에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고기잡이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식량 획득 수단으로서 위상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농경과 목축이 인간의 정착을 이끌었다면, 고기잡이는 탐험, 교역, 항해 등 인간의 이동 생활을 자극했습니다. 물가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나 조개 등 바다 식량원이 고갈되거나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부터 식량 처가 훼손되면 풍요로운 어장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또 고기잡이에 수반된 기술, 특히 배와 관련된 기술은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고 대양을 건너 더 먼 곳에서까지 무역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북돋웠습니다. 게다가 물고기는 건조하거나 염장 처리하면 가벼우면서도 영양분이 풍부한 식품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춰 교역자, 탐험가, 정복자 등에게 이상적인 식량원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도 이 고기잡이와 엄격한 관리로 군사들의 식량을 해결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물고기를 마구 잡고 있고 어획량은 걷잡을 수 없이 급감했습니다. 저자는 "풍요로웠던 바다를 사막화시키고 싶지 않다면 인류의 탐심을 자제해야 바다에서 계속해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제십 계명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도 가장 계시적입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마음에 관한 율법의 내적인 성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악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탐심이 모든 다른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주님께서도 이 죄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이 말씀이 교훈하고 경계하는 것은 물질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지게 됩니다. 탐심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탐심을 조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것을 쌓았어도 오늘 밤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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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구 계명 거짓말
    The Feast of Absalom, Niccolo Tomioli, 17th century Lesson XXI 제구 계명 거짓말 Ninth Commandment Lie 사상 최대의 거짓 인생을 산 사람의 하나가 미국의 페르디난드 왈도 테마라(1921~1982)였습니다. 그는 타인 이름을 훔쳐 신학자, 심리학자, 철학박사, 교도관, 교사, 그리고 의사로서 행세하며 일생을 사기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로 행세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의관으로 세운 공로로 캐나다의 국민 영웅으로까지 칭송을 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악당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1941년 12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터라 그는 이름을 바꿔 프레드 W. 테마라라는 이름으로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테마라는 승선 근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무 학교의 훈련생으로 지원했습니다. 훈련 뒤 그는 버지니아의 노퍽 인근의 해군대대에 위생병으로 배속됐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공식 서류들을 잔뜩 훔쳤습니다. 그는 아이오아 주립대학교의 졸업 앨범에서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꾸미고 사진을 붙여서 해군 의무장교 복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복무 결정서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테마라는 위조 신분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뒤 그는 스탠퍼드 출신 심리학 박사 로버트 린턴 프렌치를 입증하는 서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고향 로렌스로 돌아가서 교구의 신부 사무실에서 빈 서류더미를 훔쳤습니다. 테마라가 노퍽에 있는 해군부대로 돌아왔을 때 보안 조회가 끝나는 대로 장교로 임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보안 조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겁을 먹고 그 날 밤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메인의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물학자 C. B. 해먼으로 변신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의사 조셉 시르 박사의 모든 신상 정보를 훔쳐냈습니다. 테마라는 조셉 시르 박사라는 신분으로 캐나다 뉴브런즈윅의 세인트존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립 캐나다 해군의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이 되었습니다. 어떤 여자와 사랑에도 빠졌습니다. 그는 군인 복무를 마친 뒤 결혼해서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에서 개업하고 정착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달콤한 생활에 젖어있던 그에게 구축함 카유가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테마라를 태운 구축함은 한국을 향해 유유히 출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부두에서 눈물에 젖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군의관 테마라는 감기나 배탈 같은 가벼운 질병만 치료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상당한 한국군 세 명을 태운 배가 카유가 호에 다가왔습니다. 중상을 입은 이 세 명을 테마라가 치료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심장 부근에 총알까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외과 수술 경험은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군의관 테마라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한국군 병사는 며칠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다른 한국군 두 명도 적절한 치료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테마라 자신도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기적이 그에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캐나다 해군의 홍보 담당자는 이 소식을 캐나다 신문에 자세하게 게재하였습니다. 함장은 그에게 표창을 주기 위해 해군본부에 그의 이름을 상신했습니다. 이 와중에 진짜 조셉 시르 박사가 신문을 보고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테마라의 의사 행세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정착을 하려던 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랑하던 여자도 눈물 자국 없는 메마른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떠났습니다. 데마라는 캐나다로 송환되어 파면되고 국외 추방명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담을 잡지사 라이프에 팔아 많은 돈을 번 다음 유랑하던 그는 마침 텍사스주의 휴스톤에서 교도소 직원 모집 광고를 보자 응모했다. 벤 W.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기가 전에 썼던 수많은 이름으로 신원보증을 섰습니다. 교도관으로서의 그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수감자를 위해 쓰기공부반을 만들고 체육의 날을 만들자는 그의 구상이 텍사스주 교도행정국장 엘리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흉악범을 수용한 헌츠빌 교도소의 개혁안을 맡기까지 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이 잡지에 실리자 어느 수감자가 그가 가짜임을 알아냈습니다. 결국 그는 교도소를 떠났습니다. 그를 고용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엘리스 교도소 행정국장도 그가 진짜 증빙서류만 갖추고 돌아온다면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교도관으로 일한 사람 가운데 최고였다는 거였습니다. 테마라처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어째서 정식 자격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런 질문을 받자 “순전히 악당 근성 때문이지”라고 쾌활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기 이름으로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 있는 한 병원에서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테마라의 이 마지막 직업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습니다. 그는 61세 때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저서 『거짓말의 전략』에서 거짓말 방법의 원칙은 ‘모호함을 피하라’는 것이고 거짓말로 생긴 관계의 원칙은 ‘적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침대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남으로써 시작하고, 30분 뒤에 사람들은 우리를 침대에 다시 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침대로 돌아갑니다. 피곤하거나 매우 슬플 때 우리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다 어느 멋진 날 우리는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숨과 산책, 달콤한 말들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친척들이 개입하고, 급기야 옷들, 속옷들, 가구들, 주방용품들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수의를을 입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 위에 누운 채 우리는 그 총체적인 혼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감정들을 전혀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미소를 띨 것입니다. 거짓말로 형제 왕자들을 잔치에 초청해 죽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바로 그 미소를 갖고 태마라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람들을 속였고 또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심장발작으로 죽을 때 그는 진짜 목사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구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THY NEIGHBOUR 47.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since God, who is truth, abhors falsehood, we must cultivate unfeigned truth towards each other.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we must not by calumnies and false accusations injure our neighbour's name, or by falsehood impair his fortunes; in fine, that we must not injure any one from petulance, or a love of evil-speaking. To this prohibition corresponds the command, that we must faithfully assist every one, as far as in us lies, in asserting the truth, for the maintenance of his good name and his estate. The Lord seems to have intended to explain the commandment in these words: “Thou shalt not raise a false report: put not thine hand with the wicked to be an unrighteous witness." "Keep thee far from a false matter”(Exod. 23:1, 7). In another passage, he not only prohibits that species of falsehood which consists in acting the part of tale-bearers among the people, but says, “Neither shalt thou stand against the blood of thy neighbour,"(Lev. 19:16). Both transgressions are distinctly prohibited. Indeed, there can be no doubt, that as in the previous commandment he prohibited cruelty unchastity, and avarice, so here he prohibits falsehood, which consists of the two parts to which we have adverted. By malignant or vicious detraction, we sin against our neighbour's good name: by lying, sometimes even by casting a slur upon him, we injure him in his estate.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you suppose that formal and judicial testimony is here intended, or the ordinary testimony which is given in private conversation. For we must always recur to the consideration, that for each kind of transgression one species is set forth by way of example, that to it the others may be referred, and that the species chiefly selected, is that in which the turpitude of the transgression is most apparent. It seems proper, however, to extend it more generally to calumny and sinister insinuations by which our neighbours are unjustly aggrieved. For falsehood in a court of justice is always accompanied with perjury. But against perjury, in so far as it profanes and violates the name of God, there is a sufficient provision in the third commandment. Hence the legitimate observance of this precept consists in employing the tongue in the maintenance of truth, so as to promote both the good name and the prosperity of our neighbour. The equity of this is perfectly clear. For if a good name is more precious than riches, a man, in being robbed of his good name, is no less injured than if he were robbed of his goods; while, in the latter case, false testimony is sometimes not less injurious than rapine committed by the han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47.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십니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십니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합니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거짓 맹세가 내포됩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 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항상 성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합니다(마 5:48).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 2:21).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십니다(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눅 18:27). 주님이 말씀해 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19 2021-01-1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1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팔 계명 도적질
    Constant Wauters, The Caught Thief Servant Lesson XX제팔 계명 도적질Eighth Commandment Robbery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비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은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발성기관 생리학을 연구하고 농아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876년 2월 14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서 3주 뒤 특허를 받았습니다. 독일의 물리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가 1861년에 고안한 전화기가 아직 특허를 받을 만큼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벨의 특허권 획득은 정당했습니다. 라이스의 전화기는 코맹맹이 소리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 1808 ~ 1889)가 발명한 전화기는 문제가 다릅니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메우치는 벨보다 5년 앞서 그 전화기로 벌써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우치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1876년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벨이 고용한 유능한 변호사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남자 사이의 소송은 한없이 이어졌습니다. 1896년 메우치가 한이 맺혀 숨을 거둘 때까지도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벨이 속이고 기술을 훔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였습니다. 그레이는 우선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시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걸 갖고 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처음 열린 전화기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이크로폰과 금속진동판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에 명시된 기술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벨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과학역사가들 사이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벨이 특허를 취득한 전화기의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레이가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무려 100건이 넘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레이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벨에게는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종 판결에서는 승리를 얻었지만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찬반 동수로 엇갈렸다. 어쨌든 벨은 두 번의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22년 벨이 숨을 거두자 미국의 전화국들은 1400만 전화회선을 1분간 정지시키고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반면에 그레이는 백과사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라 있고 메우치는 그 이름마저 잊혔습니다. 벨은 자신의 행적에 어울리는 말을 남겼습니다. “What this power is I cannot say; all I know is that it exists and it becomes available only when a man is in that state of mind in which he knows exactly what he wants and is fully determined not to quit until he finds it.”나도 이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전부는 이 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는 완전한 결의를 마음속에 가진 사람에게만 쓸모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팔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5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STEAL 45. The purport is, that injustice being an abomination to God, we must render to every man his due. In substance, then, the commandment forbids us to long after other men's goods, and, accordingly, requires every man to exert himself honestly in preserving his own. For we must consider, that what each individual possesses has not fallen to him by chance, but by the distribution of the sovereign Lord of all, that no one can pervert his means to bad purposes without committing a fraud on a divine dispensation. There are very many kinds of theft. One consists in violence, as when a man's goods are forcibly plundered and carried off; another in malicious imposture, as when they are fraudulently intercepted; a third in the more hidden craft which takes possession of them with a semblance of justice; and a fourth in sycophancy, which wiles them away under the pretence of donation. But not to dwell too long in enumerating the different classes, we know that all the arts by which we obtain possession of the goods and money of our neighbours, for sincere affection substituting an eagerness to deceive or injure them in any way, are to be regarded as thefts. Though they may be obtained by an action at law, a different decision is given by God. He sees the long train of deception by which the man of craft begins to lay nets for his more simple neighbour, until he entangles him in its meshes--sees the harsh and cruel laws by which the more powerful oppresses and crushes the feeble--sees the enticements by which the more wily baits the hook for the less wary, though all these escape the judgment of man, and no cognisance is taken of them. Nor is the violation of this commandment confined to money, or merchandise, or lands, but extends to every kind of right; for we defraud our neighbours to their hurt if we decline any of the duties which we are bound to perform towards them. If an agent or an indolent steward wastes the substance of his employer, or does not give due heed to the management of his property; if he unjustly squanders or luxuriously wastes the means entrusted to him; if a servant holds his master in derision, divulges his secrets, or in any way is treacherous to his life or his goods; if, on the other hand, a master cruelly torments his household, he is guilty of theft before God; since every one who, in the exercise of his calling, performs not what he owes to others, keeps back, or makes away with what does not belong to him.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팔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45.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출 13:7).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입니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가로채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습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습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기 수단으로 보십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법을 보십니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꼬임을 보십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입니다. 자기가 소명 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체포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19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 표준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도적질하는 것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적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슴 여미는 고백이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명예와 정절을 훔치고 그녀의 남편의 생명까지 뺏었음에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장발장처럼 빵을 훔치지 않거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부인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제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훔치는 방법과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돈 시간 명예 재능 또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비난하시고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합니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실례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25:35-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들도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020-01-0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0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칠 계명 간음
    Susannah accused of adultery, by Antoine Coypel Lesson XIX제칠 계명 간음Seventh Commandment Adultery 교도 계율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형무소 근처에 교수대가 서있습니다. 그 교수대 위에 한 젊은 여자가 서있습니다. 많은 구경꾼들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여자는 진홍빛 A(간음을 나타내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자를 수로 곱게 새긴 가슴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에 왔는데 암스테르담에서의 남편의 일처리가 늦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식도 없이 헤어져 있는 기간이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오래 헤어져 있는 사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간음을 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엄격한 청교도들은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녀는 한사코 간음의 상대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범한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죄의 열매인 아이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뒤 평생 간음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존경받는 젊고 학식 많은 목사 딤즈데일이었습니다. 딤즈데일은 헤스터 프린과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수해서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오래 소식이 없던 그녀의 남편 칠링월스가 아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만나지 않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의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고뇌로 쇠약해진 목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치료약이라 속이고 목사를 서서히 독약으로 중독시킵니다. 그런데 그의 복수가 무르익어 성공할 무렵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군중 앞에서 헤스터 프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시던 여러분. 나를 거룩하다고 존경해주시던 여러분. 이 자리에 죄인이 섰습니다. 나는 마땅히 7년 전에 이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씨를. 여러분은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를 가나 주위에 이 글씨의 무섭고 끔찍한 광선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수치의 표적을 보고 떨지 않은 죄인이 여러분 속에 숨어 살아왔습니다. 모든 죄를 고백한 딤즈데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헤스터는 나머지 생애를 딸을 키우며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보내다 마감합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 대신에 검은 바탕에 붉은 주홍 글씨가 새겨집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 7월 4일 - 1864년 5월 19일)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습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소설에는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1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41.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as God loves chastity and purity, we ought to guard against all uncleanness. The substance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we must not defile ourselves with any impurity or libidinous excess. To this corresponds the affirmative, that we must regulate every part of our conduct chastely and continently. The thing expressly forbidden is adultery, to which lust naturally tends, that its filthiness(being of a grosser and more palpable form, in as much as it casts a stain even on the body) may dispose us to abominate every form of lust. As the law under which man was created was not to lead a life of solitude, but enjoy a help meet for him, and ever since he fell under the curse the necessity for this mode of life is increased; the Lord made the requisite provision for us in this respect by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entered into under his authority, he has also sanctified with his blessing. Hence, it is evident, that any mode of cohabitation different from marriage is cursed in his sight, and that the conjugal relation was ordained as a necessary means of preventing us from giving way to unbridled lust. Let us beware, therefore, of yielding to indulgence, seeing we are assured that the curse of God lies on every man and woman cohabiting without marriag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 20:14 41.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합니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私通)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데 2017년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시태그 운동(Hashtag activism 해시태그 활동주의)는 단순히 홍보 수단이나 가벼운 주제를 묶어 보여주는 역할에서 확대되어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는 해시태그의 사회운동 역할을 말합니다.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고 사회운동 역할로 확장된 것입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이게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으로써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해 시민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여론입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연극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018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제칠 계명에 대한 가르침의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해줍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2020-12-2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2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15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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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07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사 계명 주일
    Lesson XVI제사 계명 주일Fourth Commandment Lord's Day 한 이백 년 전 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갔다. 소년은 그가 자란 고향 마을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웠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고 돈을 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철저하게 신앙 훈련을 받은 것 말고는 오직 인쇄 기술뿐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의 아주 큰 인쇄소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그는 밤을 새워 주일날까지 일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는 인쇄 양이 많은 일거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거리를 한 번 보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오늘 자정까지 이 일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쳐야겠군. 주일 날 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사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그럼 자네는 일자리를 잃을 텐데. 그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인쇄 원본을 사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배웠기 때문에 신앙 양심을 어기는 것보다 인쇄소를 그만 두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장은 어린 직원의 정신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장은 다시는 그 소년에게 주일날 근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미국의 가장 훌륭한 문학서들을 출판하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하퍼 앤 브라더스(Harper & Brothers) 출판사의 설립자 제임스 하퍼(James Harper 18171833)였습니다. 안식일(Sabbath sbθ)의 히브리 원어 ‘사바쓰’는 멈추다 쉬다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음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휴식하기 위하여 잠을 자듯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를 마치고 쉬셨지만 그의 말씀과 섭리로 세상을 운행하고 다스리셨습니다. 휴식은 어떤 일을 하다가 손을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 짓는 일을 하다가 거룩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문답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과 오락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은 엿새 동안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만이 세상적이라거나 신앙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신앙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과 오락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 가운데 하루는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하루는 우리의 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을 통해 몸이 쉼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28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THE SABBATH DAY TO KEEP IT HOLY. SIX DAYS SHALT THOU LABOUR AND DO ALL THY WORK: BUT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OF THE LORD THY GOD. IN IT THOU SHALT NOT DO ANY WORK, &C. 28.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that being dead to our own affections and works, we meditate on the kingdom of God, and in order to such meditation, have recourse to the means which he has appointed. But as this commandment stands in peculiar circumstances apart from the others, the mode of exposition must be somewhat different. Early Christian writers are wont to call it typical, as containing the external observance of a day which was abolished with the other types on the advent of Christ. This is indeed true; but it leaves the half of the matter untouched. Wherefore, we must look deeper for our exposition, and attend to three cases in which it appears to me that the observance of this commandment consists. First, under the rest of the seventh days the divine Lawgiver meant to furnish the people of Israel with a type of the spiritual rest by which believers were to cease from their own works, and allow God to work in them. Secondly he meant that there should be a stated day on which they should assemble to hear the Law, and perform religious rites, or which, at least, they should specially employ in meditating on his works, and be thereby trained to piety. Thirdly, he meant that servants, and those who lived under the authority of others, should be indulged with a day of rest, and thus have some intermission from labour.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8-10 28.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서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없는 특별한 고려를 하므로 해석하는 순서도 약간의 차이가 필요합니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豫示)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된 일이, 즉,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이 계명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812)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문제의 절반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해석하며,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숙고해야 합니다. 첫째로, 제 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칼빈이 ‘경건의 훈련을 받기 위해 제정하셨다’고 가르친 안식일로 주일을 삼는 문제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안식교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토요일이 구약의 안식일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에 구약의 방법과 똑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 부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의 용무는 미리 정리한 후에 세상일과 오락에 관한 말이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종일 거룩하게 쉬면서 공동예배와 기도와 구제를 행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은 이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셋째,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폐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나름의 특징을 지닌 새로운 날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날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달리 이 날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날이고 안식일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휴식하고 전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격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일은 기쁨과 활동과 기대로 넘치는 날입니다. 주일의 특징은 첫 번째 주님의 날에 있었던 사건인 부활을 기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고 성령을 주고 그리고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고 승천하셨습니다. 안식일이 폐지되고 주일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로 재빨리 대체되었습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십계명의 제사 계명이 안식일만 아니라 다른 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계명은 사실 모든 날에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듯이 엿새를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구별하여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다음 엿새를 위하여 거룩하게 쉬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2-24 202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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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30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삼 계명 하나님의 이름
    Lesson XV제삼 계명 하나님의 이름Third Commandment The Name od God 1743년 3월 23일 런던에서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가 초연되었을 때 왕이 많은 청중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할렐루야 합창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합창 가운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네 라는 가사가 우렁찬 합창 속에 울려 퍼지자 왕이 자리에 일어서고 모든 청중이 일제히 따라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왕과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할렐루야 합창이 다 끝날 때까지 서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작품이 어디에서 연주되든지 할렐루야 합창이 울리는 대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서 듣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 음악을 서서 듣는 청중들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Franz Joseph Hydn)이 죽기 일 년 전인 1808년 그의 뛰어난 작품인 천지창조 오라토리오가 비엔나에서 성대하게 공연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에 작곡가인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늙고 병약한 하이든이 휠체어에 앉아 웅장한 연주회장에 들어섰습니다. 그의 참석은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대목을 힘차게 연주하고 노래하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점점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청중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노쇠한 음악가는 안간힘을 다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손을 쳐들고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이든은 탈진해 의자에 주저앉았고 연주회장을 떠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의 주제인 하나님의 이름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극적인 태도로 표현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22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THY GOD IN VAIN. 22.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majesty of the name of God is to be held sacred. In sum, therefore, it means, that we must not profane it by using it irreverently or contemptuously. This prohibition implies a corresponding precept--viz. that it be our study and care to treat his name with religious veneration. Wherefore it becomes us to regulate our minds and our tongues, so as never to think or speak of God and his mysteries without reverence and great soberness, and never, in estimating his works, to have any feeling towards him but one of deep veneration. We must, I say, steadily observe the three following things:--First, Whatever our mind conceives of him, whatever our tongue utters, must bespeak his excellence, and correspond to the sublimity of his sacred name; in short, must be fitted to extol its greatness. Secondly, We must not rashly and preposterously pervert his sacred word and adorable mysteries to purposes of ambition, or avarice, or amusement, but, according as they bear the impress of his dignity, must always maintain them in due honour and esteem. Lastly, We must not detract from or throw obloquy upon his works, as miserable men are wont insultingly to do, but must laud every action which we attribute to him as wise, and just, and good. This is to sanctify the name of God. When we act otherwise, his name is profaned with vain and wicked abuse, because it is applied to a purpose foreign to that to which it is consecrated. Were there nothing worse, in being deprived of its dignity it is gradually brought into contempt. But if there is so much evil in the rash and unseasonable employment of the divine name, there is still more evil in its being employed for nefarious purposes, as is done bythose who use it in necromancy, cursing, illicit exorcisms, and other impious incantations. But the Commandment refers especially to the case of oaths, in which a perverse employment of the divine name is particularly detestable; and this it does the more effectually to deter us from every species of profanation. That the thing here commanded relates to the worship of God, and the reverence due to his name, and not to the equity which men are to cultivate towards each other, is apparent from this, that afterwards, in the Second Table, there is a condemnation of the perjury and false testimony by which human society is injured, and that the repetition would be superfluous, if, in this Commandment, the duty of charity were handled. Moreover, this is necessary even for distinction, because, as was observed, God has, for good reason, divided his Law into two tables. The inference then is, that God here vindicates his own right, and defends his sacred name, but does not teach the duties which men owe to men.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삼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출 20:7 22.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의 존엄성을 우리가 거룩히 받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불순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금지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하라는 명령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하며 조심하는 사고와 발언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논평할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되는 일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열심히 준수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의 존엄성에 일치하며 그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야심이나 탐욕이나 재미를 위해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경솔하게 또는 패악하게 왜곡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과 신비들에는 그의 존엄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항상 존경하며 존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련한 인간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버리고, 우리는 그의 행적 훼방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줄로 인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그의 지혜와 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긋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되고 악한 일에 남용하여 더럽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존엄성이 사라지고 점점 멸시를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기 쉬운 경솔한 태도도 심히 악하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 미신에 접신술과 무서운 저주와 불법한 제마술과 기타 악한 주문들에 악용하는 자들은 죄가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계명은 특히 맹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맹세에서는 주의 이름을 가장 가증하게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 모독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언급하십니다(참조, 신 5:11).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에 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계명이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용한 반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는 둘째 판에 미루었으며, 거기서 인간 사회를 해치는 위선과 위증을 나무라실 것입니다. 율법의 구분법으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두 판에 배열하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자기의 이름의 거룩함을 지키시지만, 인간 상호간의 의무를 가르치시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제삼 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습니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말씀하는 이 제삼 계명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권고하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권고는 제삼 계명에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속성에 걸맞게 바르고 경건하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에는 특별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엘로힘(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의 첫머리에 나옵니다. 엘 엘리온(El Elion)이라는 이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이기고 멜기세덱을 만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 야웨(Yaweh)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 자족성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자로 계시하실 때 이 이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십니다. 이 이름은 ‘준비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이 각각의 이름들이 지닌 의미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고백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생활해야 합니까. 그 방법을 야고보 사도가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이 말씀은 신자가 왜 성경을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5-18).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으로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2020-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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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16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이 계명 우상숭배
    Moses Indignant at the Golden Calf by William Blake, 1799-1800 Lesson XIV 제이 계명 우상숭배Second Commandment Idolatry 색이 바랜 5센티 가량의 송곳니를 4억 불교도들이 지상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숭배합니다. 이 치아는 주전 543년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태운 장작더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뒤 실론(Ceylon)으로 그 치아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는 그 치아가 실론의 칸디(Kandy)에 휘황찬란하게 건립된 치아 사원 안의 황금 연꽃 위에 얹혀있습니다. 황금 연꽃 둘레는 수많은 루비와 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여러 나라에서 10만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이 신성한 치아를 바라보려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사원에 금과 은과 보석들의 예물들을 가지고 와 바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톨릭에서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들이 성물이라고 숭배하고 보관하는 것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나폴리와 로마의 교회들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털.- 페루기아 대성당(Cathedral Perugia)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반지.- 프라토(Prato)의 교회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거룩한 허리띠. - 나폴리의 산 가우디오소 에파트리찌오 교회와 로마의 백성들의 마리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젖 방울들. - 주님의 마지막 만찬 때 사용된 대야가 제노아의 성 로렌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면사포 그리고 안드레 사도의 두개골이 모두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돌기둥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 세마포가 투린의 세례 요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MAKE UNTO THEE ANY GRAVEN IMAGE, OR ANY LIKENESS OFANYTHING THAT IS IN HEAVEN ABOVE, OR THAT IS IN THE EARTH BENEATH, OR THAT IS IN THE WATER UNDER THE EARTH: THOU SHALT NOT BOW DOWN THYSELF TO THEM, NOR SERVE THEM. 17. As in the first commandment the Lord declares that he is one, and that besides him no gods must be either worshipped or imagined, so he here more plainly declares what his nature is, and what the kind of worship with which he is to be honoured, in order that we may not presume to form any carnal idea of him.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he will not have his legitimate worship profaned by superstitious rites. Wherefore, in general, he calls us entirely away from the carnal frivolous observances which our stupid minds are wont to devise after forming some gross idea of the divine nature, while, at the same time, he instructs us in the worship which is legitimate, namely, spiritual worship of his own appointment. The grossest vice here prohibited is external idolatry. This commandment consists of two parts. The former curbs the licentious daring which would subject the incomprehensible God to our senses, or represent him under any visible shape. The latter forbids the worship of images on any religious ground. There is, moreover, a brief enumeration of all the forms by which the Deity was usually represented by heathen and superstitious nations. By “any thing which is in heaven above” is meant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perhaps also birds, as in Deuteronomy, where the meaning is explained, there is mention of birds as well as stars(Deut. 4:15). I would not have made this observation, had I not seen that some absurdly apply it to the angels. The other particulars I pass, as requiring no explanation. We have already shown clearly enough(Book 1. chap. 11, 12) that every visible shape of Deity which man devis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divine nature; and, therefore, that the moment idols appear, true religion is corrupted and adulterate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이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17. 제일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히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이외에 다른 신들을 상상하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어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어떤 경배로 그를 공경할 것인가를 더욱 밝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가 미신적인 의식으로 모독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합당한 경배를, 즉, 자기가 친히 제정하신 영적 경배를 따르게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 범행의 가장 큰 허물을 곧 외형적 우상 숭배를 극악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계명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합니다. 둘째 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합니다. 여기서는 모독적이며 미신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만드는 모든 형상들을 간단히 열거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기타의 광명체들을 의미하며, 또한 새도 의미합니다. 신명기 4장에서는(17, 19절) 그의 마음을 피력하시면서 새와 별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각없이 이 표현을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분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제1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만드는 보이는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며 따라서 우상이 나타나면 참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칼빈은 ‘우상이 나타나면 참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고 가르칩니다. 제이 계명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섬길지라도 알맞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적 예배를 통해 섬겨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이 제이 계명과 제일 계명은 언뜻 비슷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다릅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에 대한 예배를 금하신 것입니다. 제이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되 그의 어떤 형상이든지 새겨 섬기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이 계명에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엄중한 경고가 붙을 정도로 심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형상이든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와 사도가 잘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라고 반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다(렘 10:14-15)라고 단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8-29)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것을 신앙의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할 때마다 십계명의 제이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금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를 높이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전심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이 계명은 잘못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 자들에게 세세무궁토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5-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2020-11-09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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