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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편집 2025-04-0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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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이고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 12월 21일 ~ 1886년 5월 23일)의 "모든 시대는 신(GOD)에게 이어진다"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의 기원전 404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아테네의 융성과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경과를 기록한 이 책은 전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후의 대전으로 기원전 405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해권을 잃어 곡물 수입과 해외 영토 연락이 끊겨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와 법원에 갑질하다 자멸할 자처럼 아테네는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한영우(1938~2023)는 저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현대사 서술에서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당신의 국제적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결단을 안 내렸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두 사람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문정송 장로의 기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간구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 많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저희를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이곳 광신대학교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우리들의 입술로 죄짓지 않도록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주중앙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 섬기며 한기승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빌라델피아 교회의 본을 받아 우리의 가지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의 예비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개혁 정통 보수 신앙으로 부활 승리 신앙으로 광주중앙교회를 아름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임을 고백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바른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케 하시고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님께 영력, 지력, 체력을 더하셔서 영육이 강건함으로 목양,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사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살아나셨다. 주 예수 부활하셨다. (회중 아멘)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이 중대한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 승리 신앙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성령 임재를 체험하는 삶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중 아멘) 솔로몬 왕에게 주셨던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셔서 개혁 정통 보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중 아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성가대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마귀 세력이 떠나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나는 승리의 찬양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요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큰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성가대가 문정송 장로의 기도대로 "예수 다시 사셨네"를 찬양했다. 사회자 김기택 목사가 요한복음 5:24-29 봉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기승 목사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회중 아멘)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저와 여러분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아닌가요. (회중 아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아멘인가요. (회중 아멘) 이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문 28절,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회중 아멘)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교주가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자리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지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회중 아멘)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중 아멘)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확신을 믿습니까. (회중 아멘)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의 총회가 되기를 불철주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2023년 4월 부활의 봄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했던 한기승 목사의 부활과 건재가 2025년 4월에도 볼 수 있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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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2
  • [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와 큐티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된 2019년 11월 17일 장봉생 목사는 이런 말씀을 전했다.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습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습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저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제6대 담임목사로 2019년 현재 19년째를 맞이했습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큐티 책을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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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6
  • [더굳뉴스] 이병철 사업 보국과 한기승 목사 신앙 보국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4년간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직과 사단법인 신아세아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상우(李相禹, 1938년 4월 16일~)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말인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부활 신앙이 없이 1987년 타계하신 이병철 회장과 달리 한기승 목사는 2023년 4월 9일 믿음의 부활을 전하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교단과 국가에 기여한다. 광주 무등산 불의 혀 한기승 목사는 외쳤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우리 대한민국을 반도체 대국으로 일군 이병철 회장도 모두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총회와 대한민국이 되기를 불철주야 기도하겠습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았던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푸르른 호국의 계절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계절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2-18
    • G.MISSION
    • G.SERMON
    2025-02-18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그것이 신학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소강석 목사처럼 채워야 할 욕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삶과 믿음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는 2025년을 코앞에 두고 2024년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명창의 ‘새타령’을 듣고 전율하듯 흔치 않은 설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꺼질 듯이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곧장 날카로워져 심령을 벨 듯한 그의 소리에 그만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목소리의 힘은 강력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쟁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감사할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조선의 천재 집단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과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 1446년(세종 28년) 가을. 젊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체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속에서 발견된다. 단서는 사자가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과 몸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금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주상의 침전에 출몰하는 귀신, 저주받은 책들의 공동묘지.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다. 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 강채윤은 참혹한 죽음과 위험한 음모에 점점 빠져든다. 집현전 학사는 왜 우물 속에 처박혔는가. 사라진 금서는 어디에 있는가. 살인자의 정체를 쫓아 궐 안의 미로를 헤매던 채윤은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오리무중 속에 감춰져 있던 이들은 바로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그들의 수장인 주상 세종 대왕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 사대부들의 거대한 음모.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들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추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세종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연쇄살인의 이면에는 뛰어난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주인공 채윤이 마주한 세종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하고 오랜 허물을 벗으려 하는 문명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종 시대는 육백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백성들이 쓰기 편한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 사대부들의 대립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안사고를 접하고도 갈 길을 잃어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만 99세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가 2023년 백수연 축하 미사에서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99세 신부가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는 모습에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62세 소강석 목사가 인도하는 새에덴교회 2025년 신년축복성회가 2024년 12월 29일 주일 저녁 7시부터 2025년 1월 3일 금요일 오후 9시까지 매일 저녁 진행됐다. 이 집회는 35년 넘도록 이어온 집회다. 그런데 새해를 사흘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7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제주항공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생존자 2명을 제외한 모든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승무원 이모(33) 씨는 목포지역 병원으로 후송된 뒤 ‘어디가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여객기 후미 쪽에서 승객 서비스를 맡았던 이 씨는 왼쪽 어깨 골절과 머리 등을 다쳤으나 의식이 뚜렷한 상황이고 맥박도 정상이며 보행도 가능하다고 병원 측은 진단했다. 그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가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며 한쪽 엔진에서 연기가 난 후 폭발했다는 목격담을 구조대에 남겼다. 함께 구조된 20대 여성도 목포 중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50분 새에덴교회 신년축복성회2에서 62세 소강석 목사는 제목 ‘온리 원을 위한 신앙개혁’ 온리 원(only one)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을 위한 것 같이 본문 역대하 34:29-32 성경을 읽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소강석 목사는 철문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안 비행기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회중 아멘). 1분 동안 묵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이러한 재난과 재앙이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한숨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게 해주시고 아버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회중 큰 아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부족한 종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발뒤꿈치 상처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시고 여러분 누구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 소 목사를 보고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회중 아멘) (소 목사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나니... 이정명(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상상해서 추가해 작품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팩트(fact 事實)에 근거한 픽션(fiction 虛構)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종(世宗, 1397∼1450) 대왕은 강인하고 뭐 굉장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야, 세종대왕도 그렇게 참 나약한 부분이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세 달 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이 살인사건 이면에는 조선의 최고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가 뭔 줄 아세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다. 한글이란 이름은 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1914년 7월 27일)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사건) 이후에도 강습소 활동과 문법 연구, 사전 제작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쓰던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갑작스런 복통을 겪고 병사하였다. 사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주시경의 생전 숙원을 이뤘다. "여러분 세종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유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책력‘册曆’에 관한 연구를 하는 역학‘曆學’의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고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조선의 향악(鄕樂; 당악‘唐樂’에 대하여 조선 고유의 음악을 일컫는 말)을 바로 잡았는데요. 아악(雅樂;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궁정용 고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라고 할지라도 중국을 사대(事大;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화하족(華夏族) 또는 제하(諸夏)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이다.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 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화'(华)와 중화민국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상 한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길게 논하기 위해서 한나라 때 형성된 전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의 한족들은 선비족·몽골족·만주족·동남아인 등 근방 민족들과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화'(华)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현재는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 섬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한 문자를 만든다 이건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최만리(崔萬理, 1398년 ~ 1445년 10월 23일; 1444년 2월 20일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던 여러 대신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를 필두로 유학자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예우하면서 세계문자 역사상 가장 높이 인정되는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친히 참여하였고, 그 이외에 공이 큰 사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의 말미에 기록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8명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얼마나 병약한 존재였는가. 세종은 30대에 요즘 말로 당뇨병인 소갈증을 앓아 물을 한 동이씩 먹었다고 합니다. 물을 많이 먹고 또 소변을 자주 보고 특별히 합병증으로 시력이 약해집니다." 세종의 건강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눈병 12번, 허리통증 6번, 무릎통증 3번, 목마름 증상 2번, 살 빠지는 증상 1번이 언급돼 있다. 나이대 별로 분석하면 허리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해 30대 때 심해졌다가 낫기를 반복했다.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했다가 역시 좋아지다가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이 병들 때문에 세종대왕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여러분 42세(세종 21년) 때 신하들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각장애인에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세종 23년 1440년이죠.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신사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큰 소리로) 전하, 불가함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왕위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은 지혜롭고 늠름하고 지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백성의 안위를 돌보고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종은 좋은 책은 백번 읽었대요. 머릿속에 거의 암기할 정도죠.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문자. 여러분 영어보다 더 복잡한 뭐... 똑같은 발음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 한글이 있잖아요. 세계 최고의 문자. 뭐 누구는 그랬다고 하잖아요. 캐나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세종대왕에게 이름을 물어봤대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가나다'라 해라, 하셨다잖아요. (회중 박장대소) 조크입니다. 4군 6진(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이 '가나다'라 '캐나다' 이름을 지었다는 말처럼 피식 웃게 해주는 조크가 분명해도 저런 말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한다.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 30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歐蘇手簡;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글)이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병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아 부왕 태종이 모든 서책을 감추게 했는데,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아 있던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30번 넘게 읽었으며, 즉위 후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총명과 호학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널리 전했다. 구양수는 정치가로 호를 취옹(醉翁), 또는 육일 거사(六一居士)라 했고,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는데,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둘 다 66세를 살아 ‘구소’로 흔히 병칭된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廟號, temple name;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당대 조선의 모든 분야, 즉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 백성의 복지 수준도 향상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넓힌 임금.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재 군주로, 광개토대왕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민중에게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단 둘뿐인 군주이다. 우리 시대의 기이한 시인 성직자 소강석 목사의 only one 오직 하나뿐인 설교가 이어진다. 길선주, 한경직 등의 설교자를 뛰어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한글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암초를 만나도 파선을 당하지 않고 풍랑을 만나도 인생의 배가 뒤집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요 똑같은 사건을 만나도 팍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풍풍 뛰어 올라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시련을 만나도 폐인이 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신사임당에게는 좀 유감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5만 원짜리가 나오기 전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최고였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세종대왕에게는 끝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긍정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민족을 위하여 선한 정치를 할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민족이라는 이런 긍정 언어가 세종대왕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운 것은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세종대왕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모르셨음에도 그에게는 도전과 긍정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씨건 김 씨건 박 씨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처럼 도전정신과 긍정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세종대왕이 온리 원(only one)의 역사를 이루고 온리 원의 꽃을 피워낸 사람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오늘 병원에 갔는데요. 손님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분 입장에서는 손님이지만 그건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회중 웃음) 여러분 모든 사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스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적 설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창조적인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없는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 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은 현재도 할 일이 있고 미래도 할 일이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결별을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그분이 분명히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거룩함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 오셔서 살다가 그냥 다시 올라가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역대하 34:31-32 2025-02-15
    • G.MISSION
    • G.SERMON
    2025-02-15
  • [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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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9
  • [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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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이고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 12월 21일 ~ 1886년 5월 23일)의 "모든 시대는 신(GOD)에게 이어진다"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의 기원전 404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아테네의 융성과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경과를 기록한 이 책은 전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후의 대전으로 기원전 405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해권을 잃어 곡물 수입과 해외 영토 연락이 끊겨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와 법원에 갑질하다 자멸할 자처럼 아테네는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한영우(1938~2023)는 저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현대사 서술에서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당신의 국제적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결단을 안 내렸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두 사람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문정송 장로의 기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간구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 많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저희를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이곳 광신대학교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우리들의 입술로 죄짓지 않도록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주중앙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 섬기며 한기승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빌라델피아 교회의 본을 받아 우리의 가지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의 예비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개혁 정통 보수 신앙으로 부활 승리 신앙으로 광주중앙교회를 아름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임을 고백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바른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케 하시고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님께 영력, 지력, 체력을 더하셔서 영육이 강건함으로 목양,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사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살아나셨다. 주 예수 부활하셨다. (회중 아멘)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이 중대한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 승리 신앙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성령 임재를 체험하는 삶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중 아멘) 솔로몬 왕에게 주셨던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셔서 개혁 정통 보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중 아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성가대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마귀 세력이 떠나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나는 승리의 찬양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요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큰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성가대가 문정송 장로의 기도대로 "예수 다시 사셨네"를 찬양했다. 사회자 김기택 목사가 요한복음 5:24-29 봉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기승 목사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회중 아멘)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저와 여러분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아닌가요. (회중 아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아멘인가요. (회중 아멘) 이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문 28절,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회중 아멘)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교주가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자리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지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회중 아멘)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중 아멘)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확신을 믿습니까. (회중 아멘)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의 총회가 되기를 불철주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2023년 4월 부활의 봄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했던 한기승 목사의 부활과 건재가 2025년 4월에도 볼 수 있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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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SERMON
    2025-03-22
  • [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와 큐티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된 2019년 11월 17일 장봉생 목사는 이런 말씀을 전했다.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습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습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저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제6대 담임목사로 2019년 현재 19년째를 맞이했습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큐티 책을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2025-02-26
    • G.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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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6
  • [더굳뉴스] 이병철 사업 보국과 한기승 목사 신앙 보국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4년간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직과 사단법인 신아세아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상우(李相禹, 1938년 4월 16일~)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말인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부활 신앙이 없이 1987년 타계하신 이병철 회장과 달리 한기승 목사는 2023년 4월 9일 믿음의 부활을 전하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교단과 국가에 기여한다. 광주 무등산 불의 혀 한기승 목사는 외쳤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우리 대한민국을 반도체 대국으로 일군 이병철 회장도 모두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총회와 대한민국이 되기를 불철주야 기도하겠습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았던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푸르른 호국의 계절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계절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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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8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그것이 신학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소강석 목사처럼 채워야 할 욕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삶과 믿음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는 2025년을 코앞에 두고 2024년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명창의 ‘새타령’을 듣고 전율하듯 흔치 않은 설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꺼질 듯이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곧장 날카로워져 심령을 벨 듯한 그의 소리에 그만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목소리의 힘은 강력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쟁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감사할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조선의 천재 집단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과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 1446년(세종 28년) 가을. 젊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체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속에서 발견된다. 단서는 사자가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과 몸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금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주상의 침전에 출몰하는 귀신, 저주받은 책들의 공동묘지.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다. 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 강채윤은 참혹한 죽음과 위험한 음모에 점점 빠져든다. 집현전 학사는 왜 우물 속에 처박혔는가. 사라진 금서는 어디에 있는가. 살인자의 정체를 쫓아 궐 안의 미로를 헤매던 채윤은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오리무중 속에 감춰져 있던 이들은 바로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그들의 수장인 주상 세종 대왕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 사대부들의 거대한 음모.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들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추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세종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연쇄살인의 이면에는 뛰어난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주인공 채윤이 마주한 세종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하고 오랜 허물을 벗으려 하는 문명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종 시대는 육백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백성들이 쓰기 편한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 사대부들의 대립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안사고를 접하고도 갈 길을 잃어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만 99세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가 2023년 백수연 축하 미사에서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99세 신부가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는 모습에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62세 소강석 목사가 인도하는 새에덴교회 2025년 신년축복성회가 2024년 12월 29일 주일 저녁 7시부터 2025년 1월 3일 금요일 오후 9시까지 매일 저녁 진행됐다. 이 집회는 35년 넘도록 이어온 집회다. 그런데 새해를 사흘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7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제주항공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생존자 2명을 제외한 모든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승무원 이모(33) 씨는 목포지역 병원으로 후송된 뒤 ‘어디가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여객기 후미 쪽에서 승객 서비스를 맡았던 이 씨는 왼쪽 어깨 골절과 머리 등을 다쳤으나 의식이 뚜렷한 상황이고 맥박도 정상이며 보행도 가능하다고 병원 측은 진단했다. 그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가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며 한쪽 엔진에서 연기가 난 후 폭발했다는 목격담을 구조대에 남겼다. 함께 구조된 20대 여성도 목포 중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50분 새에덴교회 신년축복성회2에서 62세 소강석 목사는 제목 ‘온리 원을 위한 신앙개혁’ 온리 원(only one)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을 위한 것 같이 본문 역대하 34:29-32 성경을 읽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소강석 목사는 철문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안 비행기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회중 아멘). 1분 동안 묵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이러한 재난과 재앙이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한숨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게 해주시고 아버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회중 큰 아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부족한 종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발뒤꿈치 상처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시고 여러분 누구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 소 목사를 보고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회중 아멘) (소 목사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나니... 이정명(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상상해서 추가해 작품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팩트(fact 事實)에 근거한 픽션(fiction 虛構)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종(世宗, 1397∼1450) 대왕은 강인하고 뭐 굉장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야, 세종대왕도 그렇게 참 나약한 부분이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세 달 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이 살인사건 이면에는 조선의 최고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가 뭔 줄 아세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다. 한글이란 이름은 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1914년 7월 27일)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사건) 이후에도 강습소 활동과 문법 연구, 사전 제작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쓰던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갑작스런 복통을 겪고 병사하였다. 사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주시경의 생전 숙원을 이뤘다. "여러분 세종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유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책력‘册曆’에 관한 연구를 하는 역학‘曆學’의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고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조선의 향악(鄕樂; 당악‘唐樂’에 대하여 조선 고유의 음악을 일컫는 말)을 바로 잡았는데요. 아악(雅樂;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궁정용 고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라고 할지라도 중국을 사대(事大;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화하족(華夏族) 또는 제하(諸夏)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이다.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 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화'(华)와 중화민국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상 한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길게 논하기 위해서 한나라 때 형성된 전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의 한족들은 선비족·몽골족·만주족·동남아인 등 근방 민족들과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화'(华)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현재는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 섬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한 문자를 만든다 이건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최만리(崔萬理, 1398년 ~ 1445년 10월 23일; 1444년 2월 20일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던 여러 대신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를 필두로 유학자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예우하면서 세계문자 역사상 가장 높이 인정되는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친히 참여하였고, 그 이외에 공이 큰 사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의 말미에 기록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8명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얼마나 병약한 존재였는가. 세종은 30대에 요즘 말로 당뇨병인 소갈증을 앓아 물을 한 동이씩 먹었다고 합니다. 물을 많이 먹고 또 소변을 자주 보고 특별히 합병증으로 시력이 약해집니다." 세종의 건강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눈병 12번, 허리통증 6번, 무릎통증 3번, 목마름 증상 2번, 살 빠지는 증상 1번이 언급돼 있다. 나이대 별로 분석하면 허리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해 30대 때 심해졌다가 낫기를 반복했다.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했다가 역시 좋아지다가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이 병들 때문에 세종대왕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여러분 42세(세종 21년) 때 신하들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각장애인에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세종 23년 1440년이죠.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신사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큰 소리로) 전하, 불가함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왕위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은 지혜롭고 늠름하고 지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백성의 안위를 돌보고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종은 좋은 책은 백번 읽었대요. 머릿속에 거의 암기할 정도죠.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문자. 여러분 영어보다 더 복잡한 뭐... 똑같은 발음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 한글이 있잖아요. 세계 최고의 문자. 뭐 누구는 그랬다고 하잖아요. 캐나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세종대왕에게 이름을 물어봤대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가나다'라 해라, 하셨다잖아요. (회중 박장대소) 조크입니다. 4군 6진(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이 '가나다'라 '캐나다' 이름을 지었다는 말처럼 피식 웃게 해주는 조크가 분명해도 저런 말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한다.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 30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歐蘇手簡;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글)이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병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아 부왕 태종이 모든 서책을 감추게 했는데,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아 있던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30번 넘게 읽었으며, 즉위 후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총명과 호학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널리 전했다. 구양수는 정치가로 호를 취옹(醉翁), 또는 육일 거사(六一居士)라 했고,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는데,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둘 다 66세를 살아 ‘구소’로 흔히 병칭된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廟號, temple name;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당대 조선의 모든 분야, 즉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 백성의 복지 수준도 향상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넓힌 임금.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재 군주로, 광개토대왕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민중에게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단 둘뿐인 군주이다. 우리 시대의 기이한 시인 성직자 소강석 목사의 only one 오직 하나뿐인 설교가 이어진다. 길선주, 한경직 등의 설교자를 뛰어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한글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암초를 만나도 파선을 당하지 않고 풍랑을 만나도 인생의 배가 뒤집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요 똑같은 사건을 만나도 팍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풍풍 뛰어 올라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시련을 만나도 폐인이 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신사임당에게는 좀 유감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5만 원짜리가 나오기 전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최고였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세종대왕에게는 끝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긍정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민족을 위하여 선한 정치를 할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민족이라는 이런 긍정 언어가 세종대왕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운 것은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세종대왕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모르셨음에도 그에게는 도전과 긍정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씨건 김 씨건 박 씨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처럼 도전정신과 긍정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세종대왕이 온리 원(only one)의 역사를 이루고 온리 원의 꽃을 피워낸 사람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오늘 병원에 갔는데요. 손님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분 입장에서는 손님이지만 그건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회중 웃음) 여러분 모든 사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스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적 설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창조적인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없는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 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은 현재도 할 일이 있고 미래도 할 일이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결별을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그분이 분명히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거룩함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 오셔서 살다가 그냥 다시 올라가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역대하 34:31-32 2025-02-15
    • G.MISSION
    • G.SERMON
    2025-02-15
  • [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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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9
  • [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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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3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일용할 양식
    2016년 8월 10일 오후 7시 30분 원주 오크밸리리조트 컨벤션 센터.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 센터 안 입구에는 집회 때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교인들이 의자에 앉아 길게 기다리고 있었다. 컨벤션 센터는 새에덴교회 교인들로 가득 찼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어려운 시절 말하기 어려운 이면도 솔직하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그는 솔직한 목사다. 2016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원주 오크밸리리조트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떠나라”(민 14:6-9) 주제로 열린 장년여름수련회 둘째 날 저녁집회 때 밝힌 그의 미국에서의 카지노 체험기는 참으로 유쾌하다. 7시 30분 저녁집회가 시작됐다.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라 민수기 11:4-9 유쾌한 소강석 목사가 여행 안내자처럼 입을 열었다. "할렐루야! 이 저녁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만나를 허락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늘 양식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만나로 여러분의 영혼이 오늘도 배부르게 먹고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지시길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가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한다. ♪ 내 주린 영혼 만나로써 먹여 주시니 그 양식 내게 생명 되겠네 이 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설교자 소강석 목사가 고전음악 해설가처럼 입담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지 둘째 달 15일이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지가 달포 정도가 되었단 말이죠. 그때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으니 난리가 난 거죠. 애들은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어른들도 허기를 참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올 수가 있어야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합니다. '아, 우리가 애굽 땅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그때는 아무리 중노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기 가마 곁에 있으면서 고기라도 실컷 먹었는데... 왜 우리가 광야로 나와서 이토록 고생을 하는가! 이제 양식도 다 떨어져서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애굽에서 있었으면 좋았을걸... 모세와 아론 때문에 우리가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도다! 아, 그리운 애굽이여, 그리운 옛날이여!' 이렇게 이들은 온갖 불평과 원망을 내 쏟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녁에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가 진을 덮이게 하셨고 아침에는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생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내리신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만나를 그냥 내려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의 계명과 함께 내려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를 주시면서 그냥 주시지 않고 만나를 거둘 방법과 계명까지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나님이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 그냥 주시지 않아요.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주시곤 하십니다. 처음에는 복을 좀 주셔놓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 십일조를 잘 하는가, 주일성수를 잘 하는가, 하나님이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복을 주세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가..." 소강석 목사 대중 가요 가수처럼 노래한다. ♪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왜 잊어버렸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 원하네 맨땅의 소강석 목사가 배우처럼 표정을 살리며 말을 잇는다. "그러나 백성들 가운데는 쓸데없는 탐욕이 생겨 다음날 먹을 것까지 다 가져오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된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를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실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만나를 거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안식일 전날에는 그 이튿날 먹을 것까지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절대로 벌레도 안 먹고 냄새도 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는 특별한 하늘양식인 것이죠. 그래도 일부 욕심 있는 인간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이 머저리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범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어떻게 믿음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가나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잘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백성들에게 참 안식과 신령한 복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일을 잘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요, 교회에 봉사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이 안식을 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소강석 목사 즐거운 표정과 몸짓으로 노래한다. ♪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천하 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다 찬송부르네 소강석 목사 변호사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만나를 먹여주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어떤 것을 깨닫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만나는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첫째,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둘째,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광야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장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나를 안 내려주시면 그들은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만나는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농사를 지으면 양식을 비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일매일 만나를 딱 하루치 양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만 이틀 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냥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히 의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안 주시면 그날은 당장 굶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일주일 이상을 안 주시면 그 일주일 동안 그들은 굶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당장 굶어 죽겠죠.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만나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을 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1 그러니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냥 의지하지 않아요. 그냥 기도하지 않습니다. 간이 절이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그들은 굶어죽기 때문이죠.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 하나님 손길 떠나 버림받은 이 죄인이 하나님 은혜 없인 살 수도 없습니다 죄악과 욕심으로 병들었던 이 내 몸 황홀한 주의 은혜 이 죄인을 고치셨네 십자가 부여안고 주의 사랑 채운 마음 나의 왕 나의 임금 나의 사랑 드립니다 ♪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내일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소강석 목사 코미디언처럼 이죽거린다. "제가 일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음식은 두 가지 음식 즉 양식입니다. 다시 말해 일용할 양식과 한식은 생명의 떡입니다. 일식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40년 동안 매일매일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무척이나 광야훈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원래 저는 목사 될 사람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영적으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양극단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인간적인 면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김문기 장로 젊었을 때 도박으로 집 한 채 날렸대요(웃음). 여러분 내가 했다면 집 한 채만 날리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만약 도박을 알고 정말 그 뭡니까 카지노를 알았으면 아이고 배팅을 끝내주게 잘 했을 겁니다. 내가 배짱 있는 거 아시죠. 하나님께서 저를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셨어요. 제가 말씀드렸지만 광주 계시는 저희 문 장로님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같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습니다. 저는 카지노 슬롯머신 앞에 섰습니다. 장로님이 가자고 해서 비위 맞추느라 갔습니다. 가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장로님 돈을 계속 잃어요. 계속 잃어요. 저한테도 해보라고 돈을 주는 겁니다.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무너지게 하는 자다 계속 그랬습니다. 장로님이 또 하라는 겁니다. 또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옆의 권사님이 저보고 목사님은 복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는 겁니다(박장대소). 그런데 그게 하나님 음성으로 들리는 겁니다(웃음). 그래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장로님이 준 동전을 넣고 딱 땡겼습니다. 지가 떨어지데. 그 동전 떨어지는 소리 있잖아요. 그게 계속 떨어져야 하는데 이 작것이 계속해서 돈만 먹는 겁니다(박장대소). 장로님하고 방에 돌아갔는데 잠이 안 옵니다. 계속 짤각 짤각 소리가 나는 겁니다. 1시가 되고 2시가 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양이다(웃음). 다시 내려가 돈을 바꿔 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마누라하고 또 내려온 겁니다(박장대소) 쯧쯧. 그래서 제가 장로님 보고 회개합시다 하고 올라가서 잤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도 이런 극단적인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나고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셔서 제가 이렇게 영적인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광주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진짜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다음 달을 먹고 살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거죠. 백암교회 시절을 생각해봐도 정말 혹독한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얼마나 제가 많은 고생을 했는지. 무슨 일이든지 그냥 저절로 쉽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맨날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간이 절이도록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우리 교회가 부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는 쉽게 부흥하고 저절로 부흥하는 교회도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힘들게 부흥시키셨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은혜로운 광야 훈련이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제 목회는 마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거예요. 조금 풍족하면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또 부족하면 하나님께 간이 절이도록 기도를 합니다. 이건 권용관 장로님과 김찬호 장로님이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왜 나도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가? 왜 이렇게 영적 만나로 살아가게 하는가? 내가 누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단 말인가? 은혜로 살자. 영으로 살자.” ♪ 내가 주님 앞에 무엇입니까 마른 막대기가 아닙니까 내가 주님 앞에 쓸모없었던 타다 남은 재가 아닙니까 나를 도우소서 일으키소서 나와 동행하사 힘주시고 내 영혼 기쁨을 얻게 하시어 내 영혼 만족케 하옵소서 넷째,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통하여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또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나에는 더 중요한 의미와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여러분, 보세요.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 보좌에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또 흰 돌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은혜와 축복은 바로, 주는 자와 받는 자만 아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추었던 만나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남에게 말하기도 곤란하고 또 말해서는 안 될 은혜도 있습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내탕고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는데 내탕고를 보여준 것이 실수였잖아요? 그 내탕고는 비밀리에 간직하고 보존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까발리는 바람에 훗날 자신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을 빼앗겨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밀한 은혜는 내탕고와 같은 은혜요, 경외스럽고 신비스러운 은혜입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알고, 이런 은혜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주님을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떠납니까? 주님을 떠날 수가 없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중독성이 강한 은혜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난 못 살아요. 당신의 은혜 없이는 난 못 살아요.' ♪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 한 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이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 (회중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을 훔쳤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닫는 사람은 항상 영적인 만나로만 만족하며 삽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필요합니다. 집도 필요합니다. 힘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인 만나입니다. 우리는 만나가 없이는 못 살아요. 항상 만나의 비밀한 은혜를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믿음의 세계에서 사는 삶이요, 하나님의 세계에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녁 7시 반에 시작해 10시 넘어 집회가 끝나 총회 신령한 복음가수 김문기 장로의 안내를 받아 새에덴교회로 돌아오는 교회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리에 우리 부부와 같이 탄 성도는 용인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며 딸에게 말했다. “더 들었어야 하는데 짧아서 아쉬운 설교였어. 너무 재미있고 은혜로웠어...”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1-33 2024-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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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SERMON
    2024-12-08
  • [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인 제논(제논 호키티에우스, 기원전 335년경 ~ 기원전 263년경)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2024년 12월 2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제109회 전도부(부장 최효식 목사) 총회전도정책포럼에서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의 형 함성익 목사(전도부 서기)가 우리 교단 칼빈주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성경적 노인 전도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65세 이상 노인 연간 자살자 수가 평균 3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건 인구 십만 명당 39.9명으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2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고와 고생이 끝난 인생 말년에 자살로 마감을 한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삶의 마지막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노인 가운데 그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뭐 하냐는 생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노인복지법 제2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법으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존경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그의 경험과 연륜만으로도 어르신으로 공경과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은 노인의 가치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초고령화 시대에 교회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세대의 불균형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 간에는 자연스럽게 한 편이 되는 동질감을 갖는 반면,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 목회데이터 연구소 조사에서 나타난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항목은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또 저 자신 전통적인 목회를 해온 사람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넥타이 안 매고 티셔츠 입고 남방 하나 걸치고 설교단에 서기도 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고 목회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늘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런 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대표 기도를 하는데 청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나 단상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가세요, 장로님' (청중 웃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시험 들더라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고인이 되신 박기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우이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콤비 양복(상의와 하의가 다른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콤비를 입고 다니다니!'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생각나서 저는 지금도 설교단에서 콤비를 입지 못합니다. (청중 웃음) 저 같은 노인들 불통 때문에 3040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젊은 세대의 이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직자 은퇴에 따른 직분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개신교는 사실 국민 22.5%가 교인이었습니다. 1146만 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예전에 1200만 명이라고 했죠. 그러나 코로나 이후 2022년도에는 774만 명 크리스챤이 인구 대비 19%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30대 감소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세 축소와 함께 원래 중직자들의 고령화로 인해서 은퇴, 소천으로 일꾼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들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제109회 총회에서 정년 연장에 관한 안건 토론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 토론에 참여해 정년 연장 주장했다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 목회자의 정년 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회자 정년 연장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중직자들의 은퇴 문제도 함께 고민했던 겁니다. 앞으로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지만 앞으로 장로님들을 포함한 많은 교회 중직자들이 70에 은퇴해버리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다수가 고령 수준에 진입했고 그 모든 분들이 은퇴 나이가 돼버린 탓에 교회 성도들은 있으나 교회 일꾼은 찾을 수 없는 현상이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교회는 그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발 빠르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초고령화 시대에 또 한가지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고령화되니까 재정이 말라요. 돈이 없어요. 교회 일할 사람도 줄어들고 성도 나이가 많아지니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니 경제활동의 미비와 수입이 거의 없는 노년 세대로 인해 교회 재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노인 세대 부양비를 적잖게 느끼는데 교회도 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헌금을 재정으로 사용하는데 초고령화 시대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함성익 목사는 초고령화 시대의 문제의 실천 가능한 성경적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노인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3:15-17)이다.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모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노인의 주체적인 역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노인의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노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수를 누리는 존재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년을 맞은 총회의 지혜자 함성익 목사는 모세처럼 말한다. "세상의 사람들도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가 100세 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품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말했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다." 그처럼 중요한 건 70이니 80이니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노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7-9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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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7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인간에게는 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은근히 의로운 척하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어요. 법에 하자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인은 에둘러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죠. 그런가 하면 도정환 시인 우리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정치하기 전에 이런 시를 썼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한 장으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배상하라 빌레몬서 1:14-18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인생의 꽃이 어디 있고 그늘이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소개되는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안에 노예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빌레몬 집사는 오네시모를 아주 총명하게 생각해 신실하게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의 삶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내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도 역시 내 가정 내 후손은 노예가 될 텐데. 그 바람에 흔들려 오네시모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돈까지 훔쳐.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한 1600킬로 이상 되는 로마로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왜 그렇게 좁습니까.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친구의 꼬드김으로 여러분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1차 투옥 시기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사람들을 영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도 바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이야기를 들었을 게 아닙니까. 오네시모는 눈동자에 빛이 났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달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는 당신의 옥바라지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복음을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쳐 나왔다’고 바울에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며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도 잠시나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렇게 훌륭한 나의 동역자, 저렇게 훌륭한 지혜자, 총명한 사람을 내가 놓치다니. 내가 모른 척하고 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가 양심에 못 이겨 돌아간다니.’ 당시 노예가 주인 몰래 물건까지 훔쳐 도망갔다면 화인(火印)은 물론이고 4대까지 벌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해도 아무리 빌레몬이 내게 복음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바울은 먼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빌레몬서 1:8-10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10-12 말씀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씀합니다. 내가 낳았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심복(心腹), 매우 요긴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 싶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통념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빌레몬서 1:10-14 내용입니다. 이뿐입니까. 다음은 빌레몬서 1:17-21까지 똑같은 말을 계속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재삼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1600킬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읽고 또 읽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빌레몬 집사님의 신의를 배반하다니. 그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그런 빌레몬 집사님을 내가 배신했으니 나는 도대체 어찌 될 것인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마에 화인을 칠 것인가. 아니면 손목을 자를 것인가.’ 아마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아마 오네시모도 별의별 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연습했을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골로새에 도착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았거든요. 전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에서 낙농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고 상업 도시인 에베소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러 가는 길에 두란노 서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칼칼한 목소리로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여러분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였든지 빌레몬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저런 쳐죽일 놈이 있는가’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언론 할 것 없이 (회중 웃음) 그냥 뭐 오네시모를 조져대는 겁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는데 물건을 훔친 저 두 손목을 자르든지 도망을 친 저 두 발목을 잘라 버릴거야, 모두가 수군거렸을 겁니다. (묶인) 오네시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빌레몬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행한 두기고에 대해 골로새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 4:7-9 두기고가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빌레몬 집사님, 오네시모가 도망친 로마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크게 회개하고 거듭나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도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인자한 주인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복음을 들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오네시모는 아무 말도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두기고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존경하는 빌레몬 집사님. 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두기고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든 바울 서신을 빌레몬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레몬이 보니 바울의 친필 서신입니다. 빌레몬은 ‘우리 은사 사도 바울이 눈이 어두우셔서 대필로 편지를 쓰시는 데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으면 친필로 서신을 감옥에서 보내셨을까’하고 감격을 합니다. 그 순간 빌레몬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토록 믿음과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인간적 노여움을 누르고 용서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비난을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친필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했다는 오네시모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몸도 흔들리고 있지만 빌레몬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을 영적 은사(恩師)로 삼았던 빌레몬이라 할지라도 오네시모를 바라보면 속이 끓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흔들리는 꽃도 제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직접 사도 바울을 섬기지 못하면 내가 섬길 자를 뽑을 사람도 누구를 뽑았겠느냐. 바로 저 오네시모를 뽑아 보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소원을 이렇게 응답하시고 연로하신 사도께서 육필로 권고하심이 이처럼 망극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연로하신 사도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만 가지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하고 스스로 찾아온 오네시모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노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네시모의 노예 증서를 불태우고 자유 시민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회중 아멘) 여러분 빌레몬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묶인 오네시모의 사슬을 풀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감탄합니다. 빌레몬은 무릎 꿇은 오네시모를 안아주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사업을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제자가 되기를 부탁한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떠나시오. 한시가 급하오. 바울 사도의 건강이 걱정되오.’ 여러분, 이 교회가 성장해 골로새 교회가 되었고 이 골로새 지역은 빌레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의 제자가 됩니다. 말씀과 영성 훈련을 받아 교회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당시 가장 큰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자 이게 발단이 돼 그 유명한 폴리캅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됐고 이그나티우스도 노예에서 해방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오네시모로 인해 이 빌레몬서가 한 장밖에 없지만, 신약성경 정경이 되어가는 과정에 포함이 된 것이 복음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관대와 관용이 있고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회중 아멘) 어디까지나 교회 전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림자와 그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그림만 보고 누가 잘했다더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꼭 꽃이 피려면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바람을 통해 꽃향기가 멀리멀리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합동 포럼이 부디 이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도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합동포럼에서는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빌레몬서와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큰 역사를 행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오늘 대표회장에 취임하시는 우리 고광석 목사님, 저보다 IQ가 50 이상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분의 언변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스피치가 좋으신지. 저도 논쟁을 좀 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합동포럼이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은 아름다운 섬김의 역사를 이루면서 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이처럼 거침없는 기인(奇人) 소강석 목사가 읽는 시나, 전하는 말씀을 감동 있게 듣는 것은 사도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진지함 때문이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삶뿐만 아니라 믿음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 같은 그런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믿음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 교단에 소강석 같은 기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 있다.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쓰여있던 말이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성경은 말씀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서 1:20-21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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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대명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추수감사주일
    믿음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소망과 사랑 둘이 살고 있었네. 소망이 집을 비울 때는 사랑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슬적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소망을 줍고 있었고 위에 있던 십자가, 날개를 펴고 있었네. 날개를 퍼덕이며 십자가는 말했네. "어서 오게, 그대 집으로..." 하늘이 보내준 은혜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잎새들의 자유. 작은 마당은 산그늘에 덮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창수 목사는 자신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는 2024년 11월 3일 주일,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대명교회(1915년 11월 7일) 설립 109주년 기념과 1908년 한국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리기 위해 시편 103:1-8 본문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그날 이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자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셨는데 막상 큰 은혜를 받은 그를 찾아가 보니 완전히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을 덜덜 떨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앉은뱅이 때는 구걸하면서 살 수가 있었고 얻어먹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정상이 돼서 걷게 되니까 구걸하여 얻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인생을 원망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향해 가시는데 이번에는 한 불량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른 불량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불량자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바로 그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불량자로 살아가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가슴 아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3편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 恩澤 은혜와 덕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이 단어는 좀 특이한 단어입니다. 은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물’이라는 말인데, 보상, 공적, 행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석가 반즈(Albert Barnes 1798 12. 1 - 1870 12. 24)라는 분은 이 ‘은택’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은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로운 사역을 총칭할 때 쓰는 <게물>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숨 쉬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지금까지 온 것과 오늘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들이 은택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베푸신 모든 사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은택’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라’는 단어는 히브리 동사 ‘샤카흐’입니다. 잊지 말라는 동사 ‘샤카흐’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속에서 기억이 떠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샤카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는 산과 바다와 온 우주와 같이 넓고 크지만 우리는 그 자체를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택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뿌리라면 감사는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사의 크기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 저 사람은 참 거룩하게 보여 저 사람은 중직을 맡았어.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야.’ 이것은 그분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삶의 실생활 속에서 그분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열매를 맺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어 단어 중에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넘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에 물이 있는데,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완전히 제방을 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잔에 물이 넘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둑을 넘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가 지나칠 정도로 가득 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며 그 은혜가 마음속에 가득 차 흘러넘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노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감사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아니 저 할머니는 좀 과하게 감사를 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의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오늘 저희는 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주일과 또한 이 한 해의 추수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전 세계에서 추수 감사 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대명교회가 바로 첫 설립 예배를 드렸던 날이 11월 첫째 주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첫째 주일을 감사 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또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온 교회가 함께 그분의 은혜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온 교회가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첫째, 대명교회를 지난 109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성도는 깊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대명교회가 설립된 1915년 그 당시 1910년대는 조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였습니다. 구한말 1905년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진짜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가 1800년대 말부터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이 선교사들이 들어왔던 때가 바로 일제 치하 속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때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절망의 땅, 흑암의 땅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교회는 1915년 11월 6일에 역사적인 첫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의 경상도 장로교회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에 우리 교회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자 목회자였던 아치볼드 플레처(Archibold D. Flecher-한국명:별리추)라고 하는 선교사님이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자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평일은 열심히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업무가 토요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분이 그 피곤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신의 왕진 가방에 각종 연고와 많은 의료 약품을 가지고 무료 진료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염증 하나가 생기고 고름이 생기는 곳에 연고만 잘 발라도 나을 수 있는데, 이 간단한 조치나 약이 없어서 팔을 자르고 심각한 육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래처 목사님이 동산병원에서 가까웠던 대명동 지금의 계명대 근처에서 서부 정류장에 이르기까지(지금의 대명동과 성당동 일대) 열심히 전도하며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서 하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교사가 나누어주는 약을 바르면 낫는다. 병을 치료해 주더라.’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찾았고 선교사님은 치료와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전도 활동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분이 바로 박덕일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대명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고 나중에는 동산병원에 근무하시다가 목사님이 되는데 플래처 목사님은 박덕일 조사와 함께 매주 토요일 전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의 결실로 7명의 성도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놓고 기도했고 아마 전도 받고 처음 예배 장소가 없어서 4년에서 5년 동안은 대명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최복암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플래처 목사님은 동산병원으로 돌아가 거기에 근무하는 몇 의사분들과 간호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들은 대명리 근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해서 예배 장소를 마련합니다. 그들이 헌금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80원인데 이 돈으로 초가집 한 동을 매입합니다. 8칸의 초가집을 매입하고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합니다. 1915년 11월 첫 주에 플래처와 박덕일 조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첫 설립과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교회의 설립자는 플래처 선교사로 하고, 최초의 당회장으로는 브루엔(Henrry Munro Buruen) 선교사님이 맡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명교회가 첫 설립이 되어서 오늘 109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집을 첫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최복암 씨가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18년 1월에 배석주 전도사님이 대명교회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을 했습니다. 1920년에 김도현 씨가 영수로 선출이 되었고 1921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하여서 일반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2년에 첫 부흥회를 하고 1932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정상적으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전도사가 있고 교역자와 장로님의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고 집사를 임명합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이때 네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데 그 집사님 중의 한 분이 서대암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나중에 저희 교회 장로님이 되셨는데 서대암 집사님이 바로 현재 저희 교회 장은환 장로님, 전무중 장로님 두 분 원로 장로님의 외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교회가 1938년까지 지속적으로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을 하고 1938년 11월에 정상용 장로님이 최초로 장로로 취임을 하며 당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때 우리 대명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커튼을 쳐서 서로 분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에 장년 35명, 그리고 주일학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1938년은 안타까운 해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예의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평양에 있는 신사에 가서 절을 하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이때 탄압으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그리고 그들의 황국 시민으로서 황제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절을 시키는 이런 종교 행위, 우상 숭배행위를 시켰습니다. 교회마다 엄청나게 협박하며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너희들이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쇳덩어리나 쌀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때에 우리 대명교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한 분밖에 없었던 정상용 장로님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교인들에 대한 압박이 있자 우리 교회 종을 자진해서 수레에 싣고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아픔이 있었음에도 대명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각오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걸려있는 동방요배를 위한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이것 때문에 1939년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명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동방요배를 하지 않고 휘장도 걸지 않자 194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경찰은 대명교회 당회를 강제로 폐쇄를 시켰습니다. 이때 일제의 핍박으로 축소된 교회도 많고 이상하게 변질된 교회도 많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로 오늘 초가집에서 시작됐던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고 7명의 성도가 3000여 명의 성도로 하나님은 부흥을 시켜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차장 출구 쪽에는 ‘Grace Chapel’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 조경이나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출차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대명교회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의미로 작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고 적벽돌 작은 교회를 지었지만, 힘들고 어려웠고 첫 시작의 미약함 속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눈물과 헌신으로 달려온 신앙 선배들의 그 지조와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시대를 달려 오며 수 많은 교회가 사라지거나 감소하였지만, 우리 대명교회는 109년이 지난 지금 100주년이 되던 해 교회 이전은 물론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신앙의 유산들을 여전히 우리 대명교회가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추수 감사 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명교회를 부임하고 지난 20여 년 얼마나 많은 감사 주일을 보내었습니까? 설교만 해도 40회 가까이 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말씀드린 것은 여전히 첫 번째 개인적 감사는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가장 큰 감격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어린이 예배 때도 제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가르치는데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문제 있는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절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서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파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트’인데, 구약에서 23번이 나옵니다. 그 뜻은 ‘죽음, 무덤, 구덩이, 함정, 지옥’ 등의 다양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과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생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로 지옥에 빠질 인생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미국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할 때에 도서관 비디오실에서 Amazing Grace 찬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찬양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미국 소년 교도소, 흉악범들이 있는 심지어 남미에 있는 포악한 수용소 속에서도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그 찬양을 부르며 곳곳의 교도소에서 눈물로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곡을 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를 팔아먹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의 나는 생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찬양을 작사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후 6주 때의 눈병 치료를 하는데 가짜 의사에게 맡겼다가 각막이 손상되고 평생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외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평생 감사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수많은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볼 수도 없고 평생 불편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로 살아가느냐?’ 그녀가 대답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정 7절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주의 은혜로 어려움 가운데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지켜주셨고 수십 번 위험한 고비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40번 이상의 위험한 일들을 맞닥뜨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늘 사랑으로 명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십니다.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격 없고 죄인이지만 인자와 긍휼로 이끌어 주시고 명예스러운 관을 씌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가난과 고통의 시간들... 연약하고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서글퍼지는데 요즘은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들어요. 지난 금요일 서울에 CBS의 올포원 크리스마스 특집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감이 안 될 정도로 분장하는 선생님도 말해요. ‘목사님 잘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분들도 ‘목사님 피부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요.’ 아나운서도 ‘목사님 손주 보셨다면서요. 청년 같으세요.’ 옆에 같이 촬영하는 여자 연예인도 ‘목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그런데 그 말들이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게 해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표현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감사 렌즈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들 수많은 삶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붉은 렌즈를 끼면 붉게 보이듯이 파란 렌즈는 파랗게 보이듯이 감사 렌즈를 끼고 살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표현의 능력』은 감사 렌즈를 끼면 4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지나간 시간 속에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둘째,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셋째,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넷째,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과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일상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일상의 은혜는 주셨습니다. 숨 쉬고 살고, 이 지구에서 공기와 물과 일용할 양식과 사랑하는 삶의 터전과 모든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영역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그것이 감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는 약 88개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도 하루에 8억 명씩이 굶고 있다고 해요. 전 세계에는 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동유럽 집회를 가보니 마실 물이 전부 석회질이에요. 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런 감사 절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쌀밥 먹는 게 소원이 아니라 덜 먹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식당에 가도 공깃밥 한 그릇 다 드시려는 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자신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일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면서 부르짖을 때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 6절에서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절에서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기도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아니요.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경험적 고백입니다. 그는 정말 건강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정맥이 왔습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전극도자절제술을 권유합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우리가 일상의 은혜를 모르고 지내는데 우리는 심장이 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는 너끈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당신을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은혜가 살아 있고 그분이 일하시기에 은혜가 일하고 그분이 중요하시기에 은혜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글 중에 ‘은혜가 우리를 찾는다!’ 이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좋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지난 10월 10일 놀라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07년 10월 30일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출간된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저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한국 작가도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 한국 문학으로서도 ‘놀라운 은혜(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바다’ 여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소망하는 믿음의 순례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순례자인 우리는 때로 그런 은혜를 ‘어쩌다’ 만나 인생의 순례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마치 109번째 감사주일을 기념한 대명교회와 제109회 총회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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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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