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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믿음에 맞는 산비탈과 먼 교회들에 불을 밝히시고 가까운 곳에서 내가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소망마저 그 자리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해가 뜨는 거친 곳으로 보내소서. 많은 진리 가운데 위대한 좁은 길을 선택하여 그 뜻을 알게 하소서. 기도는 언제 필요할까. ‘감사의 기도’라는 말은 있지만, 행복할 때 기도는 의외로 짧게 끝난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붙잡을 것이 없을 때, 기도의 힘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때, 견뎌서 다시 일어날 힘을 구할 때, 기도는 찾아온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그들의 아이큐는 70~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고 한다. 2023년 11월 12일 9:30 한국 교회에 모범이 될 삼일교회 2부 예배 성찬식 뒤 송태근 목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영상을 하나 볼텐데 아시는 것처럼 지난주 선교팀하고 케냐를 다녀왔습니다. 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첫 번째는 절대 물이 부족한 아니 물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어린 소녀들이 가족 식수를 위해서 수십 킬로를 왕복을 해야 됩니다. 걸어서 가다가 들판에서 못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이런 처참한 곳이 케냐 전역에 널려있습니다. 이 물 문제는 한두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몇천만 원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문제는 케냐 북단에 가면 세계 최대 난민촌이 있습니다. 카푸마라는 지역인데 덩치가 한 도시 규모이다 보니 네 군데로 흩어 놨어요. 한 30만 명이 7만여 명씩 네 캠프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유엔 관리하에 각 나라에서 온 식량을 배급받는데 저걸 먹고 어떻게 사나 할 정도입니다. 정말 안 죽을 만큼만 배급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나마 그거라도 있죠.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캠프 밖의 케냐 원주민들입니다. 그게 부러워 캠프를 습격하고 싸우고 그럽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손 놓고 방치돼 있어요. 모든 기간 산업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처참해요. 인권이고 뭐고 없어요. 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요. 난 세상에 없다 없다 해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 봤어요. 지난번 바라나시가 지옥이었다면 이곳은 생지옥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간 데가 학교인데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실을 향해) 영상을 좀 띄워주세요." 영상이 떴다.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인 케냐 어린이들의 '날 세우시네 You Raise Me Up' 영어 합창 소리가 울렸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수용 교실 건물만 온전한 모습이고 여기저기 파인 돌투성이 운동장과 턱없는 외부 화장실이 보였다. 송태근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 학교를 저희 교회 출석하시는 정인희 권사님이 계속 섬겨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력이 없어서 거의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 학교의 구체적인 상태를 볼까요. 5000명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인데 운동장 상태가 저 모양이고 채석장에 지은 학교입니다. 아마 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교 운동장인데 턱이 지고 비탈입니다. 또 볼까요. (화면이 바뀐다) 학교 운동장 상태가 어떤 줄 아시겠죠.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뛸 수도 없고 많이 다친다고 해요. 5000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상태가 저렇습니다. 열악하고 비참합니다. 웬만하면 말로 설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표현하기 어려워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 인권이라는 건 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 추수감사 헌금은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이 될 겁니다. 아이들 운동장을 트랙터로 갈아엎어 평평하게 만들고 다치지 않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화장실을 보수하고 증축하는데 사용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닿는 한도 안에서 추수감사 헌금에 동참해주시고 이렇게 선하게 사용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좌우 인사를 나눌까요." 교우들이 좌우 교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는 하나님께서 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첫째가 앗수르, 둘째가 유다, 셋째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 나라 심판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연약한 자들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악한 법을 만들어 짓밟는 패역한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텐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1장에 넘어오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설명해 드릴 텐데 이사야서 강의는 다음 주로 마무리가 될 겁니다. 1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이새의 줄기에서' 앞을 보실까요.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줄기'는 무슨 뜻입니까. '가문'을 말합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그 뜻입니다. 이사야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식물로 비유해 표현한 게 굉장히 많아요. 우리 기억나나요.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포도가 맺혔죠, 들포도. 들포도는 쓰고 시어 먹을 수 없습니다. 결실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결실이라고 했을 때는 주인이 심은 의도대로 열매 맺는 게 결실입니다. 그게 진짜 열매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농산물과 식물로 하나님의 경영과 마음을 묘사한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가문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것은 어떤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것을 좀 더 강화하는 측면에서 '그 뿌리에서' 뭐가 나요. '한 가지가 나서' 무얼 할 것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직접 손대시는 농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경영하시는 역사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결실할 것을 확고하게 방점을 찍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일은 어떤 중간에 인간의 변수에 따라 결과에 변수가 생긴다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결실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확고하신 하나님 의지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결실하시는 분이십니다. (회중 아멘) 그 언약에 여러분과 제가 붙들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2절을 잘 보시면 '그 위에' 누가? '여호와의 영'이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같이 하신다는 얘기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놀랍게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씨'가 나요. 앞으로 이 씨는 누구로 열매 맺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으로 열매 맺을 거예요. 그러면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여기 한꺼번에 등장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예. 성부 하나님 혼자 이거 못 하시나. 이렇게 다른 위격, 성령 하나님의 손을 빌리셔야 되나. 예, 그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이든지 함께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참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 땅에 설립하신 것도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함께, 성도끼리 함께 하나님과 교회가 함께 세상 경영을 우주적 경영을 만들어 성취하고 이루어가시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生活 樣式)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해야 해요. '아냐 다 귀찮아 나 혼자 할 거야. 난 고독한 게 좋아.' 이건 잘못된 거예요. 우리 다 '함께 합시다'라고 인사합시다. (회중 모두 좌우를 보며 '함께 합시다.') 한번 더 '함께 갑시다.' (회중 모두 웃고 좌우를 보며 '함께 갑시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옆에 앉았나 이러면 안 되겠죠. (일동 웃음) 함께 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만 바로 되어 있다면 교회 공동체만큼 행복한 곳이 없어요. (그의 비겁한 전임자 시절만큼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수많은 분들이 내 어머니고 내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이 땅 어디에 있겠습니까. 케냐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북극 끝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예수님 깃발 아래라면 모든 사람이 형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흥겨움으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본성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하세요.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 혼자 하셨어요?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같이 하셨어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뭔 일도 혼자 하면 효율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효율보다 함께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성경을 볼까요.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이사야서 9장에 보면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통치권)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지혜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라고 표현이 되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런데 이 전능하다는 말은 어떤 개념을 전제하고 있을까요. 전쟁 개념입니다. 오늘 이사야 11장 2절을 보시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데 이것은 재능에 능하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한 아기가 나와서 우리를 위해 영적인 거대한 전쟁을 누구와 맞붙으실 건가요? 사탄과 맞붙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9장 6절에서 그렇게 설명했죠.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그런 의미가 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자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 여러분. 이게 본업이라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기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를 즐겁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성숙과 우리의 완성이에요. (회중 아멘) 그걸 예수님이 아셨어요. 자기 목숨을 내어서 그의 아버지를 즐겁게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지식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다. 잠언 1:7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죠. 유명한 구절인데 (영상실을 향해) 띄워주세요. (회중을 향해) 여호와를 시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뭐예요. 근본, 즉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 뿌리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좀 더 실제 적으로 그 지식이라는 뿌리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도대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뭘까요. 이게 막연하잖아요. 추상적이지 않아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게 뭡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형상을 담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어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구분해 놓은 어떤 계급과 제도를 다 걷어내고 온전히 뭘로 만나야 되요. 그 사람을 높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만날 때 그 태도가 바로 누구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예요. 우리는 이 땅의 질서와 가치에 따라 구분되는 세상에 계층에 따라서 우리 태도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건 올바른 신학적 태도도 아니고 신앙적 모습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짜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실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손을 벌려 주고 함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냐에 다녀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무슨 고백이 삐져 나왔는지 아세요. '한국은 너무 잘살아. 한쪽은 배터져 죽고 한쪽은 대한민국 온 나라가 살 뺀다고 다이어트 열풍에 빠져 있고 말이 안되요. 케냐 그 들판에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면 빼짝 말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이나 난민 처지에서 정착촌으로 옮긴 아이들이나 보면 먹지를 못해 가지고 피부도 검은데 더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만 타도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요. 한국이 5000년 반만 년 역사 속에 이렇게 넘치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은혜들을 쌓아 두고, 모아 두고, 고여 놓아서는 안 돼요. 흘려보내고 나눠 줘야 돼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오늘 성경을 잘 보세요.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무슨 얘기냐면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만 '법이잖아' 그 법이 어떤 법입니까. 이사야 10장 절 2절을 보세요. 유다 고관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보세요.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게 세상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고루고루 살도록 설정해 놓은 법이 아니예요. 더 잘사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법을 고위층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어디 부동산 정보나 빼갈려고 그러고 그런 걸 미리미리 다 알아 가지고 미리 땅을 사 놓고 남의 잠자리 다 빼앗고 투기 바람이 불어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값이 폭등을 하고 모든 젊은이가 희망을 잃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안 먹고 안 써도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집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인 안정감을 주는 공간 아니겠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하든 서울 안에서 버텨라.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또 엉뚱하게 김포까지 서울로 만들려고 하지를 않나. 그건 어느 머리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정책을 뱉어내니 나라가 안정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치에 소망이 없어요. 제가 목사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문제가 많아도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회중 아멘) 하나님이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꿈꾸신다고요. (회중 아멘) 내가 교회에 소속돼 있고 그리스도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게 얼마나 특권이고 은혜인지 아세요. 그게 복인지 아세요. 놀라운 일입니다. 두 달에 한 번 오후 5시에 모이는 전체 리더 청년들 모임 시간에 말했어요. '여러분들 참 복입니다. 주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청년 때의 특권입니다.'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이 땅을 제대로 판결하고 정의롭게 심판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결론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11장 6절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절 다 같이 시작.”(회중 일동 합독)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자 이건 문학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떤 초점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평화! 힘이 유지해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런 힘이 없어도 유지되는 진정한 평화, 약자를 돌봐주고 함께 해주고, 그리고 진정한 조화를 지닌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장 처참한 현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는 겁니다. 그 나라를 꿈꾸기 위해서 힘이 받쳐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지막 구절. 다 같이 시작." 회중이 이사야 11:9을 다 같이 읽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론으로 뭐라고요. (회중 묵묵부답) 아이 5분도 안됐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기억나시죠. (회중 '네') 자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는 뭐라구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께해주고 돌봐주는 것! (회중 아멘) 그 얘기죠. (그 말을 매주 했던 모양) 한 주는 거를 수 없나. (회중 웃음) 안돼요. 매주 해도 잊어버리잖아요. (회중 웃음)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게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믿습니까? (회중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이예요. 할렐루야! (회중 아멘) 이것이 겨레가 이 땅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남은 순례길을 걸어가는 이유고 호흡하는 이유고 살아내는 이유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물이 바다 덮음같이' 찬양합시다." 삼일교회 회중이 일어서 아말렉을 대적하는 여호수아의 군대같이 찬양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같이 송태근 목사가 믿음이 바다를 덮음같은 삼일교회 회중을 향해 홍해 앞의 모세같이 양손을 들어 축복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높고 깊으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삼일 권속들 해외와 군대 멀리 출타해 있는 가족들 그리고 태중의 생명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송태근 목사는 성경을 읽고 듣고 은혜받는 신자에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과 성경을 통해 연결시켜 채워주는 병렬 설교에 능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기 때문이리라...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21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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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교회를 다니며 내가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나는 아주 행복하다. 총회장이 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나는 주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 끝과 시작.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것이다. 十字架 _ 윤동주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2023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창성교회 본당 함성익 목사가 성경 마태복음 5:1-12 봉독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복의 본질'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과 테러 집단 하마스 간의 전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끝나는 축제의 안식일 새벽 6시 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예상 보유량을 넘는 수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면전 수준의 도발이었다. 하마스는 지상으로도 직접 침투,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아 가자지구에 억류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은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 50주년 다음 날이었다. 당시 아랍 연합군의 공격 징후를 놓쳐 패배 직전까지 갔던 이스라엘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만큼 하마스가 이번 공격을 오래 준비했고 상징성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처럼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날이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알카에다에 기습적으로 당했던 9·11테러를 소환했다. 이어 '9·11(나인 원 원)'처럼 '10·7(텐 세븐)'이란 고유명사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가자(Gaza)에서 벌어지는 피의 분쟁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해양 민족 블레셋인이 맞붙었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에 세운 도시였다. 구약의 유대인 사사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천 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딱 맞지 않는다. 용맹한 블레셋인은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에게 저항하다가 패퇴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블레셋의 후예가 아니란 뜻이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유대인 반란을 평정한 뒤 징벌로 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게 한 게 시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 전쟁으로 서안 지구(West Bank)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두 곳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여기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가 불붙었다. 하지만 가자와 서안 지구는 그 후 다른 길을 갔다. 인티파다로 자치권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은 파타와 하마스로 분열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테러 단체 하마스가 승리하고 파타가 불복하면서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수중에 떨어진 가자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고 물과 전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를 시작했다. 가로 10㎞, 세로 40㎞인 강원도 크기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싸움이 격화되면 이스라엘 초정통파 유대교 세력의 팔레스타인 궤멸 논리가 힘을 얻고, 이슬람 극단주의 하마스가 이스라엘 소멸론을 주장하며 이란을 포함하는 반시오니스트 연대를 강화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상대를 배척하는 종교의 교리가 담긴 종말론 즉 아마겟돈의 서사(敍事)다. 이 서사는 현실이 되면 안 된다. 비유로만 남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 사태 설명을 끝내고'행복의 본질' 설교를 이어갔다. "이스라엘 전쟁은 종교적인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모든 갈등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집안, 내 가족이 어울려 살기 위해 벌어진 다툼입니다. 어쨌거나 전쟁은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팔복의 말씀 역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죠. 유대인의 탈무드(미쉬나-Mischna, 반복/가르침-와 게마라-Gemara, 보완/보충-가 합쳐진 책이다. 미쉬나는 토라인 타낙<히브리 성경>에 대응되는 구전 토라로 AD 200년경 편집된 최초의 권위 있는 종교적 법규 모음집이다. 게마라는 미쉬나에 관한 랍비들의 논구와 해설들의 전승을 지칭하며 이 게마라가 미쉬나와 합쳐져서 탈무드를 형성)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중병을 얻어 눕게 됩니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나 차도가 없고 점점 몸만 더 나빠집니다. 어느 날 자녀들이 랍비를 찾아가게 됩니다. 당시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랍비가 가르쳐 주기를 '나는 정말 행븍합니다'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외투를 빌려 아버지를 덮어주라. 그러면 당신 아버지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산중의 한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굴속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안식에 들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굴에 들어가 그의 외투를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사는 외투는커녕 걸치고 있는 옷이 속옷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병을 어떻게 고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녀들이 그때 깨우친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역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물질로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목사님 저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진정한 행복의 교훈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행복은 갈릴리에 있는 소위 팔복산으로 가야 할 겁니다. 팔복산은 가버나움에서 한 10킬로 떨어진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아주 작은 산입니다. 그 산에 팔복 기념교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둥근 천장 중앙 팔각형 안의 여덟 개 창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창문들에는 라틴어로 팔복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 이스라엘 관광을 제일 많이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라틴어 팔복 말씀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그림 같은 갈릴리 바다가 펼쳐집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 장소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행복의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원문 성경에 보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행복의 본질을 말씀해주시면서 제자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님이 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팔복의 교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자신을 따르는 예수님 제자들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본질이 이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참된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이 팔복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심령의 상태 즉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만 아니라 두 번째 복, 애통함도 마음의 상태, 세 번째 복 온유함도 마음의 상태,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름도, 다섯 번째 복 긍휼히 여김도 따지고 보면 다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행복은 결코 외적인 상태 즉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다스림에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조금만 더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넓은 집을 가지게 되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출세하고 조금만 더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허상의 바램 속에서 제각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강조해주고 계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가난해지면 마음이 청결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사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우리 가운데 새벽에 늘 나오는 분이 계세요. 폐가 안 좋으신데 저하고 얘기할 때 숨을 가쁘게 쉬십니다. 그런데 매 주일 감사헌금을 내면서 ‘하나님 한 주간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새벽기도 나와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가십니다. 하루하루와 매시간이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두 번째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입니다. (회중 아멘)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팔복은 복이 ‘있도다’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축복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영어로 블레스(bless)입니다. 어원은 블리드(bleed) ‘피 흘리다’ 입니다. 이 단어는 피의 제사에서 유래된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피 흘려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말씀했습니다. 팔복이 바로 이런 하나님하고의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마음의 덕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죄지은 것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표준만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 ~ 2018년 10월 22일)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성경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로부터 상을 받은 책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풀어준 책에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회중 아멘) 애통하는 자의 복,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회중 아멘)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맛에 당기는 자는 복이 있다. 평생에 너희 음식이요 음료로다. (회중 아멘) 참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늘 애곡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으로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배부름을 얻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의지하고 거기서 경험하는 것을 영적인 만족으로 추구하는 이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는 창성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세 번째 행복의 본질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의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의 마음부터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팔복에는 이웃과의 관계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뭐죠. (회중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중요한 강조점이고 팔복의 핵심입니다. 이웃 사랑이 팔복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다섯 번째 복과 일곱 번째 복을 보십시오. 다섯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정성을 들여 돌보는 너희는 돌봄을 받는다. 화평케 하는 자,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은 내 이웃을 배려해주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은 행복에 관해 이런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말입니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뭘 하라? 이발하라. 우리가 이발소나 미장원에 다녀오면 하루는 깨끗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한 주간 행복하려면 여행해라.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들뜨고 행복합니다. 신바람이 납니다. 여행 가서 일주일 지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집 생각이 나죠. 한 달 행복하려면 새집으로 이사 가라. 새집으로 이사 가도 수리하고 뭐하고 해도 한 달밖에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 해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뭐 처녀하고 총각끼리 평생 사느니 죽느니 해도 결혼하고 일 년 사니까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회중 웃음) 그러나 일생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생 행복하다는 겁니다. 때로 어려움도 있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러분 예수님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섬기시면서 자신도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 예수님은 행복하게 사신 겁니다. (회중 아멘) 이 땅의 사명을 완수하시면 떠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여러분 인간 가운데 마지막 순간 ‘다 이루었다’ 하고 떠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분이 있다면 시인 윤동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십자가’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 참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삶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섬김에는 아픔과 고통도 따르지만, 그 섬김의 건너편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희열과 놀라운 행복이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을 붙잡고 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마음이 가난하셨던 분이요 인류의 죄 때문에 애통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붙잡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행복은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옵니까. 주님을 영접할 때 옵니다.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모든 삶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회중 아멘)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섬기며 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회중 아멘) 저는 우리 창성교회 교우들이 팔복을 붙잡고 팔복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며 팔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회중 아멘)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음을 알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창성교회 교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큰 아멘) 데뷔 50주년을 맞은 홍콩 배우 주윤발(1955-), 그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여전히 ‘따거(大哥)’로 불리며 지금껏 뭇 남성들의 낭만적 존경을 받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했다. 현재 기준 약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왜 기부를 결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남자는 “아내가 했다”라고 대답했다.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배우가 이웃인 남을 살리는 것. 나는 이것이 함성익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 팔복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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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살아 있음에는 ‘그냥’이 없다. ‘그냥’ 살라치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이가 남기고 가는 깨달음의 선물이다. 우리는 후회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때 용기를 내서 사랑하거나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어렵게 보이는 무엇이었건 간에. 가을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날들 속에서 ‘문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들을 세어보자.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햇빛에 여문 밤송이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의 도움으로 툭 떨어지듯.’ 저 멀리서 샬롬의 축복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제107회 제108회 총회장 이·취임 감사예배가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새로남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예배는 새로남교회 성가대 장엄한 아멘송으로 열렸다. 서기 김한욱 목사가 사도행전 2:25-28 다윗의 성시를 낭독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회중 아멘)" 신앙고백 후 새로남교회 연합성가대가 독창 · 중창 · 합창과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장엄한 칸타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로 예배당을 6분 동안 은혜와 감동으로 채웠다. 감격한 회중은 우렁찬 박수와 아멘으로 화답했다. 조용하고 티나지 않는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가 강단에 섰다. "오늘밤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15장 28절 29절입니다. 말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회중 아멘) 사회자 김한욱 목사가 설교자를 소개했다.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시고요. 아마 우리 총회장님의 영적 멘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두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헬라어를 강의했던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부축을 받고 강단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의 말씀처럼 목사는 성경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평생 실천한 목회자였다. 이제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96세 그가 새로남교회에서 휠체어에 앉아 명징한 얼굴 모습을 산마루에 걸린 보름달처럼 강단에 드러냈다. 회중이 뜨거운 박수를 쳤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온 회중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고 잔잔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는 주후 50년에 모였는데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령과 우리는' (좀 있다 다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서북 어투로)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님은 제쳐놓고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거! 묘하지요.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성령님을 같이 모시고 회의를 했습니다. (회중 큰 아멘) '성령과 우리는' 거 참 묘한 모임이지요. 보통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예루살렘 공회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는 '성령과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30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얼마나 섭섭합니까. 이사야 시대의 회의는 그들이 맹약을 맺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제쳐놓고 뭐요 그들이 어떤 결정을 지어도 하나님의 성령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모였던 겁니다. 이사야 시대의 모임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지자 호세야 시대 때도 그랬더군요. 호세아 8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이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일 다 잘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한 가지 크게 실수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기브온 족속이 있어요. 여호수아에게 점령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족속이 꾀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곰팡이 난 음식을 가지고 여호수아 앞에 왔습니다. ‘여호수아여 우리는 당신의 점령 지역 안에 있는 족속이 아닙니다. 하도 길이 멀어서 고향을 떠날 때는 깨끗한 옷을 입었고 따끈따끈한 음식을 가지고 떠났는데 오는 중에 옷이 다 떨어지고 음식이 다 곰팡이 났습니다. 우리는 당신 점령 지역 안에 있지 않으니 우리하고 화목합시다.’ 여호수아서 9장 14절에 보니 여호수아가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중요한 계약을 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덜컥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후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생각을 더듬느라 2분 20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의 중간에 ‘성령과 우리는’의 의미를 말없이 되새기며 회중의 박수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회중 박수) (침묵이 끝나고)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회의를 할 때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회의를 할 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15장 30절에 그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회중 아멘) 야 참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의를 잘 했구나.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노.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둘째로 사도행전 16장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라 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결정을 하니까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어졌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런데 어느 한 교회만 믿음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그 소식을 들은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어요. (회중 아멘) 또 그 다음에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여러 교회가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수가 확 늘어났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날마다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제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오늘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내일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모레도 늘어나고 날마다 늘어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가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가’ 같이 모일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기뻐하였고 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 믿음이 굳어지고 어제, 오늘, 내일, 날마다 수가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이 자리가 총회가 모인 자리인 줄 아는데 우리 교단의 총회가 모일 때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총회가 되지 않고 ‘성령과 우리는’ 이러한 총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가’ 모여서 결의하고 그 결의한 결의가 전국 교회 위에 공포될 때 야! 이번 총회가 잘 결의했구나! 하는 소식을 듣는 모든 교회가 기뻐하고 (회중 아멘) 교회가 이 결의들을 행할 때 많은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또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날마다 수가 더하는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또 이 총회 장소가 오정호 목사님 시무하시는 새로남교회인데 우리 오정호 목사님 목회하실 때 미안합니다. 오 목사님 혼자 목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목사님’ 목회해서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고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날마다 수가 더하는 (회중 큰 아멘)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네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고 성령님을 모시고 회의할 때 그 결과를 듣고 많은 사람이 기뻐했고 (회중 아멘) 모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진 것 같이 교인과 오 목사가 성령님과 동행해서 역사함으로 (회중 아멘) 온 교회가 기뻐하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아멘)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게 하옵소서. (회중 큰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회중의 큰 박수 속에 박희천 목사 부축을 받으며 강단을 내려왔다. 총회 108년 되는 삼일 밤 예배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예배였던 것 같다. 96세 박희천 목사의 설교 ‘성령과 우리는’이 전하는 은혜와 축복의 결과 제108회 총회 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전했다.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샬롬 부흥' 전도 운동에 힘입어 성도 숫자는 전년 대비 59,151명 증가한 2,351,896명(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팬데믹 전인 2019년 2,556,182명에서 2년 사이 26만여 명이 감소하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성장을 기록했다. 칼빈주의를 따르는 우리 교단의 교인 증감률은 2019년 -6.8%에서 이듬해 -3.8%로 줄어든 데 이어 이번에 +2.6%로 다시 증가세로 반전했다. 특별히 5년 연속 교인이 줄고 있던 흐름을 바꾼 것이 개혁적인 은혜와 샬롬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어려움을 겪던 미자립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으며 감소세를 보이던 교회도 1년 사이 11,262개에서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에서 11,920개로 658개 증가하며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제108회 총회(총회장 오정호)는 보고했다. ‘성령과 우리’가 샬롬부흥운동본부(본부장 김진하 목사) 임역원의 수고에 함께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문어의 아이큐는 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 그렇듯 말씀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지고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능하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예증할 수 있겠는가. 아마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이 들 수 있는 적절한 실례는 빛, 열, 공기일 것이다. 당신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본다면 바로 거기에 빛과 열과 공기가 각기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은 빛을 통하여 자신의 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일지라도 그곳에는 여전히 빛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와 손 사이에는 열이 존재한다. 그 열은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손을 휘저으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요점은 빛과 열과 바람 이 세 가지가 각각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각기 자신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을 각각 분리해서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가운데 다른 두 가지가 없이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이 실례가 지닌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 세 요소를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바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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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들/어/가/는/말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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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생 목사의 샌프란시스코
마약에 절어 몰락의 길을 걷는 美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는 외쳤다.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됐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이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2073년 6월 미국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 로널드 디온 디샌티스(Ronald Dion DeSantis, 1978년 9월 14일 ~) 플로리다 주지사는 쓰레기와 벽면 낙서가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배경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홍콩 누아르 영화 같은 1분짜리 홍보 영상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말했다. “한때 훌륭한 도시였던 샌프란시스코는 더 이상 활기차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대소변을 보고 헤로인을 사용하고 크랙 코카인(흡연 형태의 강력한 코카인)을 피우는 걸 봤습니다. 이곳은 좌파 정책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2023년 7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 정문 앞에는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모두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에 취한 사람들이었다. 근처에도 반나체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들, 초점 없는 눈으로 인도에 걸터앉은 사람이 가득했다. 라 코치나는 2021년 비영리 시민단체와 샌프란시스코시, 미 연방정부가 ‘도시 재생’을 외치며 낡은 우체국을 개조해 시작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슬럼화되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살리겠다는 취지였다.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에 예산과 기부금 495만 달러(약 63억 원)를 쏟아부었지만 오는 9월 운영을 중단한다. 운영비가 매월 20만9천 달러인데 벌어들이는 수익은 2만4천 달러에 불과해 적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라 코치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모니르 바로울(46) 씨는 “당신이라면 마약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이곳에 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겠습니까”라고 했다. 지역 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미국 전역에서 화제를 모으고 공무원까지 총동원된 사업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주일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가 설교했다. 제목은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12:40-42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 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샬롬 부흥' 표어가 새겨진 강단에서 본당과 중강당을 가득 메운 회중을 향해 시대의 설교자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430년 만에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나왔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군대는 아닙니다. 숫자가 많은 것 빼고는 무기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다. 군인 정신은 더더욱 없는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에서 모세는 그 무리를 군대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먼저 군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7장 4절에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내 군대'라고 하셨을까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사람에게 세 가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첫째: 창조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녀를 낳고 번성해서 가정과 민족 공동체로 가득 채우라는 창조 명령입니다. 둘째: 문화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합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문화 명령입니다. 셋째: 영적 전쟁 명령입니다. 영적 전쟁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이미 마귀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 내려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있는 전쟁 명령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하와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고 사탄은 죄와 죽음의 세계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후 역사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시간들로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전쟁을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끝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사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군인을 영육하는 교회를 세우시죠.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한 민족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광야에서 엄격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어두움을 용납하지 않고 계명에 철저히 복종하는 군대를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사탄의 소굴로 잡다한 우상 신들과 음란한 문화로 가득 찬 가나안을 상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군대' '여호와의 군대'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 군대가 나중에 도저히 군대답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본인들조차 우리는 해골처럼 말라 죽은 뼈들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실 때 마치 인자되신 예수님을 소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5절과 6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생기에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뼈가 들어맞고 살과 근육이 붙으면서 엄청난 군대가 일어났습니다. 말하자면,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만들어지는 환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16절에 역사적인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란 마귀가 사탄과 귀신들이 이 땅의 모든 세력을 궁극적 목표, 지옥까지 끌고 가는 권세를 말합니다.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그 권세, 이길 수 없는 그 권세를 제압하는 내 교회 내 군대를 이 땅에 세우겠다고 하신 겁니다. 하늘의 권세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회중 아멘)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너희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음부 지옥의 사탄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내 군대가 되어라' (회중 아멘)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이 땅에서 영생을 가진 행복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이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집해서 이날에 그날이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주님이 주신 열쇠를 가지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거룩한 군대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우리 교회 비전선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군대로서 거룩과 회복을 경험하는 예배부흥, 예수님을 닮은 제자 삼는 거목 양성, 그리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입니다. 가족 선언이고 군대 선언인 것입니다. 바다 건너 거라사 무덤에 거하는 한 사람 속에 귀신이 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이름이 뭐냐' 하시니까 ‘군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군대다. 한번 붙어보자는 거지요. 결국,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다 수장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귀신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고 하셨겠습니까. 요한계시록도 영적 전쟁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교회의 보호가 펼쳐집니다. 결국, 악한 영적 세력과 사탄도 무저갱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나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섭리의 두루마리를 떼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내신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적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군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성도가 '영적 싸움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인간적인 고난을 무릎 쓰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왜 세력을 규합해서 정치 권력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을 모아 거리 운동을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더 근본적인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집 명령에 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영적 전쟁에 부대를 세우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나라가 청소년 자살률 1위를 비롯해서 드러난 어둠의 통계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단순히 시대정신이고 윤리의식의 결여이며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애매한 말로 덮어버릴 것입니까? 사람의 의식 속에도 사회 제도 속에도 사탄은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려 합니다. 평등의 포장 아래 차별금지법안 발의를 계속 시도합니다.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세 개의 법률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폐지 논의 중이지만 다른 시, 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 인권 조례도 있습니다. 퀴어축제의 폐해도 있습니다. 몇 번 여행을 갔던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입니다.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서울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이 군대로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시길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 기도가 무엇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까. 무너져가는 이 땅에서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이 아쉬움을 드러내시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받고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강력한 전투력을 지녀야 합니다. (회중 아멘)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회중 아멘) 이웃을 위해 우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사이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영적인 사이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 소소(so so)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큰 아멘)" 중창단의 힘찬 인도로 회중이 함께하는 '하늘 군대' 찬양이 군가처럼 울려 퍼졌다. 샌프란시스코 도심 텐더로인 지구. 두 남성이 기다란 철제 도구를 들고 길가에 세워진 낡은 파란색 승용차로 향했다. 한 명이 도구를 유리창 안으로 끼워 넣어 위아래로 흔들자, 오래된 차량의 문이 ‘딸깍’ 하고 열렸다. 이들은 차량 안에 있던 옷가지와 가방들을 챙기면서 “오늘도 한탕 건졌다”라고 자신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소설 쓴다는 이재명처럼 웃었다. 대낮에 차량 도난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고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범죄가 발생한 거리 인근에는 한 픽업트럭이 유리 창문을 검은색 테이프로 꽁꽁 싸맨 채 주차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 넘게 거주한 한 한인 교민은 “최근엔 아예 승용차 트렁크를 열고 주차하는 사람도 많다”라며 “차량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 털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관용’의 상징으로 통한다. 2004년 동성애 부부에게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줬고 2014년엔 950달러(약 120만 원) 이하 절도는 경범죄로 취급해 기소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됐다. 2019년에는 경찰과 정부 기관들의 안면인식 기술 사용을 미국 최초로 금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실리콘밸리의 다양성이란 가치를 대표하는 도시다. 도시의 태생부터 그렇다. 샌프란시스코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상륙해 스페인 땅이 됐다가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멕시코 땅이 됐다.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이름도 가톨릭 성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of Assisi, 1181년 또는 1182년 ~ 1226년 10월 3일)의 이름을 딴 스페인식 발음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 영토로 편입됐다. 여러 국가 소유를 거치고 미 서부의 대표 항구로 성장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는 히스패닉, 노예 해방 뒤 정착한 흑인, 아시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온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몰려들었다. 미 서부에 금광이 발견된 후 발생한 ‘골드러시’로 더 많은 사람이 방문했고 1930년대 금문교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들이 대거 잔류하면서 다인종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제법 규모가 큰 재팬타운,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한 곳도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말은 ‘자유’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2차 세계 대전 후 군 내부 성 소수자들을 이곳에서 강제 전역시킨 것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성 소수자의 도시가 됐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내 동성애자와 성전환자, 양성애자 비율은 18% 수준이다. 10명 중 2명이 성 소수자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로 불리며 전 세계 관광객과 혁신가를 불러 모으던 샌프란시스코가 마약과 범죄로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약으로 사망한 사람은 공식 집계된 사례만 406명에 이른다. 인구 천 명당 범죄율은 48.94건으로 미국 평균(19건)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코로나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한 대량 해고와 홈리스 급증이 마약 사용과 범죄를 부추기고 있지만, 공권력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AP통신은 “샌프란시스코는 도심이 어떤 모습이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라고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 19:24-25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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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식탁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쌍 나란히 올려두고 감사의 감동을 기다릴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평안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기댄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믿음이 두 입술에 나란히 맴돈다.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나란히 다독일 때 한 끼가 영원과 나란하다.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 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에 내 마음이 박힌다. ‘어? 여기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이 외로운 지구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게 된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게 놓여 있는 하루의 끝. 지쳤으나 겸허하게 마주 잡은 손. 허기가 안식을 돕고 안식이 허기를 돌보는 다행스러움이 이 소박한 시를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그러나 가장 감사한 우리의 모습 아닐까. 특히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아픈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대단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란히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나란히 옆 사람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참 다행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2022년 1월 2일 경기도 용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린 허위의 귀재 이재명 대통령 후보 앞에서 현 정권이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소 목사는 이날 ‘퍼스트가 되어라’는 설교에서 말했다고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언뜻 보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어감 때문에 아주 매혹적인 법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법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독소조항이 많고 제정되면 다수가 역차별을 받게 되며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커지게. 됩니다. 이 후보께서 지난달(2021년 12월) 한교총에 왔을 때 국민적 합의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교계에선 이 후보의 입장이 변함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교계의 목소리를 잘 듣고 국민화합에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날 아내와 동석한 허위의 귀재 이재명 후보의 말을 조선일보에서 나와 차린 '최보식의 언론'의 서범준 기자가 2022년 1월 3일 발 빠르게 전했다. “오랜만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2022년 3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의 예측과는 다르게 제5대 대통령 선거(1963년 10월 15일 직접 선거 방식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꺾고 당선)의 15만 6천 26표 차이 이후 24만 7천 77표라는 역대 2번째 최소 득표 차로 정치 초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결정됐다. 민주화 이후 최소 득표 차를 기록한 허위의 귀재 선거의 달인 이재명이 패배한 선거로 기록되었다. 비율로는 0.73%p 차이로 제15대 대통령 선거(기호 2번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기호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의 1.53%p를 경신해 역대 최소 득표율 차를 갱신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라는 이재명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최종적으로 기호 2번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이어져 오던 보수-민주당계 정권 10년 주기설을 깨고 단 5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선거다. 문재인 정부는 6공 수립 이래 처음으로 단 5년 만에 야당에 정권을 내준 정부라는 불명예를 안은 순간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엄청난 핸디캡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한 정부가 5년 만에 심판론에 놓이고 전광훈의 광장의 외침까지 더해 정치 경험이 1년도 되지 않는 0선의 신생 정치인 윤석열에게 패한 것이라 민주당으로서는 아주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2023년 4월 3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 소강석)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이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이사장 소강석 목사, 원장 안준배 목사) 주관으로 열렸다. 서울기독대학교대학원에서 역사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문학평론가 안준배 박사가 개회사를 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을 개회하겠습니다. 1988년 3월 27일 그해 부활절 다음날 아침 40대 목사 19명이 중심으로 모여 세계성신클럽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역 중에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광장에서 이틀 동안 연인원 백만 명이 참여하는 성령 운동, 성령으로 인도하는 그런 기도성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우리 본회 34년 역사 속 세계 성령 운동사에 표지가 되시는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영훈 목사를 내세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승계하게 하셨고 또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을 정리해 이끌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를 내세워 성령 운동과 말씀전파를 통해 한국 교회를 연합하고 견인해나가는 그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세계 성령 운동 역사 34년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사역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이 2백 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테너 박주옥 백석대 교수가 언제부터인지 꽃씨가 시랑스러워 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소강석 작사 작곡 '꽃씨'에 이어 요즘 교회마다 애창하는 '은혜'를 열창했다. 대회장이고 주제 강연자인 단국대 명예문학박사 소강석 목사가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곁들인 화려한 강연을 펼쳤다. "어제 정말 바쁜 부활주일을 보내시고 쉬시는 날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격려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설교학자도 아니고 설교를 연구하는 전문교수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뛰는 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준배 목사께서 이런 강연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제를 주신 겁니다. '나는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전한다.' 제가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혹적이고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비롯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워낙 목회자가 바쁘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탈고를 했지만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목회자에게는 설교하면 강해 설교가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강해 설교 창시자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년 3월 21일 - 2017년 7월 22일)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에 출생하여 미국의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달라스 신학교, 써던 메쏘디스트 대학교에서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설교학의 대가로 2006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해 설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의 강해 설교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탐구해 오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돼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의 강해 설교 교본으로 알려진 저서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는 전 세계 목회자들이 탐독했으며 현재도 120개가 넘는 학교에서 설교학의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하면 설교의 구성 방식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3대지냐 4대지냐, 혹은 구절을 풀어 설교할 것이냐(주해설교), 그리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대부분 한국 목회자는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해 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목사이며 청교도 신학자 조엘 비키(Joel R.Beeke, 1952년- )의 저서 '설교에 관하여(Reformed Preaching)'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해 설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구성 요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청중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 설교 내용이 전달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contents)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달방식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문화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인지성향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준배 박사가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관해 말했다.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나 인격person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연극이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라는 말이 있는데 가면이라는 뜻도 있고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삼위 3person)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감독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작품 '살인의 추억' 이후 오스카상은 받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 감독의 페르소나(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선호하는 배우를 뜻한다)로 배우를 썼는데 송강호입니다. 이 배우는 감독의 모든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 연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용기 목사를 그 시대의 성령의 페르소나로 사용하셨고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소강석 목사를 성령의 페르소나로 세우셨습니다. 소 목사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설교를 하든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합니다. 저는 소 목사님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중에 '상 파울교회'에서의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들었는데 그 현장을 딱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합니다. 그다음에 2017년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대회 때 소 목사님이 주 강사로 설교를 했는데 '말씀의 근원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와 영 관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은 어느 현장, 어떤 대회, 어떤 형식의 모임이 됐든 거기에 딱 맞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2017년 12월 소 목사님과 대만에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대만 까오씽이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열차로 타이페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책을 갖고 다니는데 덩리쥔(鄧麗君, 1953년 1월 29일~1995년 5월 8일 대만 출신 가수)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안 목사님은 이선희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덩리쥔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화권이 사랑하는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이 노래를 부른 덩뤼쥔이라고 그랬죠. 그러니 소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나는 이선희야. 이선희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회중 웃음) 소 목사님은 별을 참 좋아하세요. 이선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날 저녁 때 타이페이에 5천 명 모이는 따워줘이라는 대만 최고의 교회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소 목사님이 나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 덩뤼쥔의 노래 '첨밀밀' (蜜蜜 '티엔미미' 달콤해요)' '니 샤오 더 티엔미미(笑得蜜蜜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달콤해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대만 사람들이 음악으로 대단히 감동을 했어요. 대만 사람이 사랑하는 덩뤼쥔 자기들 노래로 불러주니까 감동을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한 8천 명 수용할 수 있는 대만에서 제일 큰 허핑체육관에서 열린 성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소 목사님이 그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하모니카로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을 연주하니까 대만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니 소 목사님은 우리 대만인이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끼더라고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소 목사님은 시대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감사예배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소천하신 이후인데 그때 '고래를 위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라는 시를 인용한 설교였습니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라고 설교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회 고래였고 그 고래가 국민일보를 낳았고 또 이영훈 목사를 낳았고 또 조민재 국민일보 회장을 낳았고 또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낳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고래'라는 시적 언어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때도 이선희 노래를 불렀는데요. (회중 웃음) '그 모든 것 기적이었네. 은혜였네. 눈물이였네. 이렇게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 목사님 그 음악을 그 현장에 맞게끔 사용하면서 참, 소 목사처럼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예배에 딱 맞게끔 하면서 설립자 조용기 목사 그리고 이영훈 목사와 국민일보 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이렇게 해박하고 탁월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이 시대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유럽에도 같이 가서 성회를 지켜봤고 춘천순복음교회 성회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성령 포럼을 통해서 소 목사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잘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앞서 안준배 박사가 그 자질을 실제 목격하고 증언했다. 그렇듯 “이 세상의 광대들도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기 위해 그토록 애틋함과 애절함을 갖고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애틋함과 애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스스로 광대임을 밝히고 그것을 실제로 입증해 성공한 광대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설교관을 세 가지로 압축해 말했다.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합니다. 2.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합니다. 3. 성경을 이야기로 전합니다." 유럽 역사에는 다른 민족과 접촉·교류·전쟁을 통해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이 언어다. 오늘날 영어에는 영국을 침략했던 로마·게르만·바이킹이 남긴 단어와 영국이 침략·점령했던 민족과 국가에서 묻혀온 단어가 숱하게 많다. 언어 흔적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서 아무리 빨고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Society)·경제(Economy)·자유(Liberty)·개인(individual)·종교(religion)·존재(being)·권리(right)·그(he)·그녀(sh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모두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낯선 영어·네덜란드어·독일어와 씨름하며 한자어를 사용해 번역한 것이다. 법학·정치학·경제학·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 등 근대 과학 용어 거의 전부에 일본 손때가 묻어있다. 일본 농기구(農器具) 이름에는 한반도 언어의 파편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 선진(先進) 벼농사 방법과 농기구가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성숙(成熟)이란 ‘나’와 ‘남’ ‘우리’와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발전의 한 단계다. ‘남’과 ‘그들’은 ‘나’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은 나에게 득(得)이 된다. 상대를 부정확하게 아는 지도자는 지형(地形)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낙하산병(落下傘兵)과 같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도자의 성숙과 직결돼 있다. ‘기억의 감옥’에 갇히면 ‘기억의 포로(捕虜)’가 되기 십상이다. 모든 통치자 턱 밑 어딘가에는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었다. 왕조 시대에는 이걸 역린(逆鱗 용의 몸에 붙어 있는 81개 비늘들 중 딱 하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 있다는 비늘)이라 불렀고, 건드리면 자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역린이란 단어의 의미는 많이 확장되어 윗사람의 약점(아킬레스건, 콤플렉스, 흑역사) 혹은 윗사람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권한을 뜻한다. 그래서 통치자 비서들도 정보기관 보고도 믿고 의지해 온 평생 선배 원로들도 언급을 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린이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도 교회 초창기의 목사를 기억하는 교인은 수군거리는데 교만해진 당회장 귀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힘 있는 자가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대하면 그날부터 교회와 교단과 교계가 달라질 것이다. 교인들이 기도하고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 4:12-14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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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믿음에 맞는 산비탈과 먼 교회들에 불을 밝히시고 가까운 곳에서 내가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소망마저 그 자리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해가 뜨는 거친 곳으로 보내소서. 많은 진리 가운데 위대한 좁은 길을 선택하여 그 뜻을 알게 하소서. 기도는 언제 필요할까. ‘감사의 기도’라는 말은 있지만, 행복할 때 기도는 의외로 짧게 끝난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붙잡을 것이 없을 때, 기도의 힘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때, 견뎌서 다시 일어날 힘을 구할 때, 기도는 찾아온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그들의 아이큐는 70~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고 한다. 2023년 11월 12일 9:30 한국 교회에 모범이 될 삼일교회 2부 예배 성찬식 뒤 송태근 목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영상을 하나 볼텐데 아시는 것처럼 지난주 선교팀하고 케냐를 다녀왔습니다. 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첫 번째는 절대 물이 부족한 아니 물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어린 소녀들이 가족 식수를 위해서 수십 킬로를 왕복을 해야 됩니다. 걸어서 가다가 들판에서 못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이런 처참한 곳이 케냐 전역에 널려있습니다. 이 물 문제는 한두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몇천만 원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문제는 케냐 북단에 가면 세계 최대 난민촌이 있습니다. 카푸마라는 지역인데 덩치가 한 도시 규모이다 보니 네 군데로 흩어 놨어요. 한 30만 명이 7만여 명씩 네 캠프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유엔 관리하에 각 나라에서 온 식량을 배급받는데 저걸 먹고 어떻게 사나 할 정도입니다. 정말 안 죽을 만큼만 배급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나마 그거라도 있죠.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캠프 밖의 케냐 원주민들입니다. 그게 부러워 캠프를 습격하고 싸우고 그럽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손 놓고 방치돼 있어요. 모든 기간 산업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처참해요. 인권이고 뭐고 없어요. 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요. 난 세상에 없다 없다 해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 봤어요. 지난번 바라나시가 지옥이었다면 이곳은 생지옥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간 데가 학교인데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실을 향해) 영상을 좀 띄워주세요." 영상이 떴다.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인 케냐 어린이들의 '날 세우시네 You Raise Me Up' 영어 합창 소리가 울렸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수용 교실 건물만 온전한 모습이고 여기저기 파인 돌투성이 운동장과 턱없는 외부 화장실이 보였다. 송태근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 학교를 저희 교회 출석하시는 정인희 권사님이 계속 섬겨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력이 없어서 거의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 학교의 구체적인 상태를 볼까요. 5000명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인데 운동장 상태가 저 모양이고 채석장에 지은 학교입니다. 아마 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교 운동장인데 턱이 지고 비탈입니다. 또 볼까요. (화면이 바뀐다) 학교 운동장 상태가 어떤 줄 아시겠죠.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뛸 수도 없고 많이 다친다고 해요. 5000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상태가 저렇습니다. 열악하고 비참합니다. 웬만하면 말로 설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표현하기 어려워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 인권이라는 건 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 추수감사 헌금은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이 될 겁니다. 아이들 운동장을 트랙터로 갈아엎어 평평하게 만들고 다치지 않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화장실을 보수하고 증축하는데 사용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닿는 한도 안에서 추수감사 헌금에 동참해주시고 이렇게 선하게 사용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좌우 인사를 나눌까요." 교우들이 좌우 교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는 하나님께서 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첫째가 앗수르, 둘째가 유다, 셋째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 나라 심판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연약한 자들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악한 법을 만들어 짓밟는 패역한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텐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1장에 넘어오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설명해 드릴 텐데 이사야서 강의는 다음 주로 마무리가 될 겁니다. 1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이새의 줄기에서' 앞을 보실까요.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줄기'는 무슨 뜻입니까. '가문'을 말합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그 뜻입니다. 이사야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식물로 비유해 표현한 게 굉장히 많아요. 우리 기억나나요.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포도가 맺혔죠, 들포도. 들포도는 쓰고 시어 먹을 수 없습니다. 결실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결실이라고 했을 때는 주인이 심은 의도대로 열매 맺는 게 결실입니다. 그게 진짜 열매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농산물과 식물로 하나님의 경영과 마음을 묘사한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가문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것은 어떤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것을 좀 더 강화하는 측면에서 '그 뿌리에서' 뭐가 나요. '한 가지가 나서' 무얼 할 것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직접 손대시는 농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경영하시는 역사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결실할 것을 확고하게 방점을 찍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일은 어떤 중간에 인간의 변수에 따라 결과에 변수가 생긴다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결실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확고하신 하나님 의지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결실하시는 분이십니다. (회중 아멘) 그 언약에 여러분과 제가 붙들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2절을 잘 보시면 '그 위에' 누가? '여호와의 영'이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같이 하신다는 얘기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놀랍게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씨'가 나요. 앞으로 이 씨는 누구로 열매 맺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으로 열매 맺을 거예요. 그러면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여기 한꺼번에 등장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예. 성부 하나님 혼자 이거 못 하시나. 이렇게 다른 위격, 성령 하나님의 손을 빌리셔야 되나. 예, 그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이든지 함께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참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 땅에 설립하신 것도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함께, 성도끼리 함께 하나님과 교회가 함께 세상 경영을 우주적 경영을 만들어 성취하고 이루어가시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生活 樣式)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해야 해요. '아냐 다 귀찮아 나 혼자 할 거야. 난 고독한 게 좋아.' 이건 잘못된 거예요. 우리 다 '함께 합시다'라고 인사합시다. (회중 모두 좌우를 보며 '함께 합시다.') 한번 더 '함께 갑시다.' (회중 모두 웃고 좌우를 보며 '함께 갑시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옆에 앉았나 이러면 안 되겠죠. (일동 웃음) 함께 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만 바로 되어 있다면 교회 공동체만큼 행복한 곳이 없어요. (그의 비겁한 전임자 시절만큼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수많은 분들이 내 어머니고 내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이 땅 어디에 있겠습니까. 케냐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북극 끝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예수님 깃발 아래라면 모든 사람이 형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흥겨움으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본성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하세요.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 혼자 하셨어요?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같이 하셨어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뭔 일도 혼자 하면 효율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효율보다 함께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성경을 볼까요.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이사야서 9장에 보면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통치권)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지혜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라고 표현이 되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런데 이 전능하다는 말은 어떤 개념을 전제하고 있을까요. 전쟁 개념입니다. 오늘 이사야 11장 2절을 보시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데 이것은 재능에 능하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한 아기가 나와서 우리를 위해 영적인 거대한 전쟁을 누구와 맞붙으실 건가요? 사탄과 맞붙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9장 6절에서 그렇게 설명했죠.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그런 의미가 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자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 여러분. 이게 본업이라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기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를 즐겁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성숙과 우리의 완성이에요. (회중 아멘) 그걸 예수님이 아셨어요. 자기 목숨을 내어서 그의 아버지를 즐겁게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지식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다. 잠언 1:7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죠. 유명한 구절인데 (영상실을 향해) 띄워주세요. (회중을 향해) 여호와를 시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뭐예요. 근본, 즉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 뿌리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좀 더 실제 적으로 그 지식이라는 뿌리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도대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뭘까요. 이게 막연하잖아요. 추상적이지 않아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게 뭡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형상을 담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어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구분해 놓은 어떤 계급과 제도를 다 걷어내고 온전히 뭘로 만나야 되요. 그 사람을 높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만날 때 그 태도가 바로 누구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예요. 우리는 이 땅의 질서와 가치에 따라 구분되는 세상에 계층에 따라서 우리 태도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건 올바른 신학적 태도도 아니고 신앙적 모습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짜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실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손을 벌려 주고 함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냐에 다녀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무슨 고백이 삐져 나왔는지 아세요. '한국은 너무 잘살아. 한쪽은 배터져 죽고 한쪽은 대한민국 온 나라가 살 뺀다고 다이어트 열풍에 빠져 있고 말이 안되요. 케냐 그 들판에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면 빼짝 말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이나 난민 처지에서 정착촌으로 옮긴 아이들이나 보면 먹지를 못해 가지고 피부도 검은데 더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만 타도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요. 한국이 5000년 반만 년 역사 속에 이렇게 넘치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은혜들을 쌓아 두고, 모아 두고, 고여 놓아서는 안 돼요. 흘려보내고 나눠 줘야 돼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오늘 성경을 잘 보세요.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무슨 얘기냐면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만 '법이잖아' 그 법이 어떤 법입니까. 이사야 10장 절 2절을 보세요. 유다 고관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보세요.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게 세상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고루고루 살도록 설정해 놓은 법이 아니예요. 더 잘사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법을 고위층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어디 부동산 정보나 빼갈려고 그러고 그런 걸 미리미리 다 알아 가지고 미리 땅을 사 놓고 남의 잠자리 다 빼앗고 투기 바람이 불어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값이 폭등을 하고 모든 젊은이가 희망을 잃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안 먹고 안 써도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집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인 안정감을 주는 공간 아니겠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하든 서울 안에서 버텨라.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또 엉뚱하게 김포까지 서울로 만들려고 하지를 않나. 그건 어느 머리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정책을 뱉어내니 나라가 안정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치에 소망이 없어요. 제가 목사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문제가 많아도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회중 아멘) 하나님이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꿈꾸신다고요. (회중 아멘) 내가 교회에 소속돼 있고 그리스도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게 얼마나 특권이고 은혜인지 아세요. 그게 복인지 아세요. 놀라운 일입니다. 두 달에 한 번 오후 5시에 모이는 전체 리더 청년들 모임 시간에 말했어요. '여러분들 참 복입니다. 주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청년 때의 특권입니다.'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이 땅을 제대로 판결하고 정의롭게 심판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결론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11장 6절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절 다 같이 시작.”(회중 일동 합독)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자 이건 문학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떤 초점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평화! 힘이 유지해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런 힘이 없어도 유지되는 진정한 평화, 약자를 돌봐주고 함께 해주고, 그리고 진정한 조화를 지닌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장 처참한 현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는 겁니다. 그 나라를 꿈꾸기 위해서 힘이 받쳐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지막 구절. 다 같이 시작." 회중이 이사야 11:9을 다 같이 읽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론으로 뭐라고요. (회중 묵묵부답) 아이 5분도 안됐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기억나시죠. (회중 '네') 자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는 뭐라구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께해주고 돌봐주는 것! (회중 아멘) 그 얘기죠. (그 말을 매주 했던 모양) 한 주는 거를 수 없나. (회중 웃음) 안돼요. 매주 해도 잊어버리잖아요. (회중 웃음)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게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믿습니까? (회중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이예요. 할렐루야! (회중 아멘) 이것이 겨레가 이 땅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남은 순례길을 걸어가는 이유고 호흡하는 이유고 살아내는 이유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물이 바다 덮음같이' 찬양합시다." 삼일교회 회중이 일어서 아말렉을 대적하는 여호수아의 군대같이 찬양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같이 송태근 목사가 믿음이 바다를 덮음같은 삼일교회 회중을 향해 홍해 앞의 모세같이 양손을 들어 축복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높고 깊으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삼일 권속들 해외와 군대 멀리 출타해 있는 가족들 그리고 태중의 생명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송태근 목사는 성경을 읽고 듣고 은혜받는 신자에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과 성경을 통해 연결시켜 채워주는 병렬 설교에 능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기 때문이리라...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21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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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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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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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교회를 다니며 내가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나는 아주 행복하다. 총회장이 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나는 주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 끝과 시작.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것이다. 十字架 _ 윤동주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2023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창성교회 본당 함성익 목사가 성경 마태복음 5:1-12 봉독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복의 본질'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과 테러 집단 하마스 간의 전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끝나는 축제의 안식일 새벽 6시 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예상 보유량을 넘는 수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면전 수준의 도발이었다. 하마스는 지상으로도 직접 침투,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아 가자지구에 억류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은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 50주년 다음 날이었다. 당시 아랍 연합군의 공격 징후를 놓쳐 패배 직전까지 갔던 이스라엘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만큼 하마스가 이번 공격을 오래 준비했고 상징성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처럼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날이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알카에다에 기습적으로 당했던 9·11테러를 소환했다. 이어 '9·11(나인 원 원)'처럼 '10·7(텐 세븐)'이란 고유명사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가자(Gaza)에서 벌어지는 피의 분쟁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해양 민족 블레셋인이 맞붙었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에 세운 도시였다. 구약의 유대인 사사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천 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딱 맞지 않는다. 용맹한 블레셋인은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에게 저항하다가 패퇴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블레셋의 후예가 아니란 뜻이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유대인 반란을 평정한 뒤 징벌로 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게 한 게 시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 전쟁으로 서안 지구(West Bank)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두 곳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여기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가 불붙었다. 하지만 가자와 서안 지구는 그 후 다른 길을 갔다. 인티파다로 자치권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은 파타와 하마스로 분열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테러 단체 하마스가 승리하고 파타가 불복하면서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수중에 떨어진 가자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고 물과 전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를 시작했다. 가로 10㎞, 세로 40㎞인 강원도 크기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싸움이 격화되면 이스라엘 초정통파 유대교 세력의 팔레스타인 궤멸 논리가 힘을 얻고, 이슬람 극단주의 하마스가 이스라엘 소멸론을 주장하며 이란을 포함하는 반시오니스트 연대를 강화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상대를 배척하는 종교의 교리가 담긴 종말론 즉 아마겟돈의 서사(敍事)다. 이 서사는 현실이 되면 안 된다. 비유로만 남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 사태 설명을 끝내고'행복의 본질' 설교를 이어갔다. "이스라엘 전쟁은 종교적인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모든 갈등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집안, 내 가족이 어울려 살기 위해 벌어진 다툼입니다. 어쨌거나 전쟁은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팔복의 말씀 역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죠. 유대인의 탈무드(미쉬나-Mischna, 반복/가르침-와 게마라-Gemara, 보완/보충-가 합쳐진 책이다. 미쉬나는 토라인 타낙<히브리 성경>에 대응되는 구전 토라로 AD 200년경 편집된 최초의 권위 있는 종교적 법규 모음집이다. 게마라는 미쉬나에 관한 랍비들의 논구와 해설들의 전승을 지칭하며 이 게마라가 미쉬나와 합쳐져서 탈무드를 형성)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중병을 얻어 눕게 됩니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나 차도가 없고 점점 몸만 더 나빠집니다. 어느 날 자녀들이 랍비를 찾아가게 됩니다. 당시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랍비가 가르쳐 주기를 '나는 정말 행븍합니다'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외투를 빌려 아버지를 덮어주라. 그러면 당신 아버지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산중의 한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굴속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안식에 들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굴에 들어가 그의 외투를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사는 외투는커녕 걸치고 있는 옷이 속옷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병을 어떻게 고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녀들이 그때 깨우친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역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물질로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목사님 저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진정한 행복의 교훈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행복은 갈릴리에 있는 소위 팔복산으로 가야 할 겁니다. 팔복산은 가버나움에서 한 10킬로 떨어진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아주 작은 산입니다. 그 산에 팔복 기념교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둥근 천장 중앙 팔각형 안의 여덟 개 창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창문들에는 라틴어로 팔복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 이스라엘 관광을 제일 많이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라틴어 팔복 말씀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그림 같은 갈릴리 바다가 펼쳐집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 장소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행복의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원문 성경에 보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행복의 본질을 말씀해주시면서 제자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님이 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팔복의 교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자신을 따르는 예수님 제자들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본질이 이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참된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이 팔복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심령의 상태 즉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만 아니라 두 번째 복, 애통함도 마음의 상태, 세 번째 복 온유함도 마음의 상태,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름도, 다섯 번째 복 긍휼히 여김도 따지고 보면 다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행복은 결코 외적인 상태 즉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다스림에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조금만 더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넓은 집을 가지게 되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출세하고 조금만 더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허상의 바램 속에서 제각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강조해주고 계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가난해지면 마음이 청결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사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우리 가운데 새벽에 늘 나오는 분이 계세요. 폐가 안 좋으신데 저하고 얘기할 때 숨을 가쁘게 쉬십니다. 그런데 매 주일 감사헌금을 내면서 ‘하나님 한 주간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새벽기도 나와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가십니다. 하루하루와 매시간이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두 번째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입니다. (회중 아멘)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팔복은 복이 ‘있도다’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축복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영어로 블레스(bless)입니다. 어원은 블리드(bleed) ‘피 흘리다’ 입니다. 이 단어는 피의 제사에서 유래된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피 흘려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말씀했습니다. 팔복이 바로 이런 하나님하고의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마음의 덕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죄지은 것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표준만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 ~ 2018년 10월 22일)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성경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로부터 상을 받은 책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풀어준 책에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회중 아멘) 애통하는 자의 복,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회중 아멘)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맛에 당기는 자는 복이 있다. 평생에 너희 음식이요 음료로다. (회중 아멘) 참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늘 애곡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으로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배부름을 얻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의지하고 거기서 경험하는 것을 영적인 만족으로 추구하는 이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는 창성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세 번째 행복의 본질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의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의 마음부터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팔복에는 이웃과의 관계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뭐죠. (회중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중요한 강조점이고 팔복의 핵심입니다. 이웃 사랑이 팔복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다섯 번째 복과 일곱 번째 복을 보십시오. 다섯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정성을 들여 돌보는 너희는 돌봄을 받는다. 화평케 하는 자,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은 내 이웃을 배려해주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은 행복에 관해 이런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말입니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뭘 하라? 이발하라. 우리가 이발소나 미장원에 다녀오면 하루는 깨끗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한 주간 행복하려면 여행해라.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들뜨고 행복합니다. 신바람이 납니다. 여행 가서 일주일 지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집 생각이 나죠. 한 달 행복하려면 새집으로 이사 가라. 새집으로 이사 가도 수리하고 뭐하고 해도 한 달밖에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 해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뭐 처녀하고 총각끼리 평생 사느니 죽느니 해도 결혼하고 일 년 사니까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회중 웃음) 그러나 일생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생 행복하다는 겁니다. 때로 어려움도 있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러분 예수님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섬기시면서 자신도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 예수님은 행복하게 사신 겁니다. (회중 아멘) 이 땅의 사명을 완수하시면 떠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여러분 인간 가운데 마지막 순간 ‘다 이루었다’ 하고 떠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분이 있다면 시인 윤동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십자가’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 참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삶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섬김에는 아픔과 고통도 따르지만, 그 섬김의 건너편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희열과 놀라운 행복이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을 붙잡고 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마음이 가난하셨던 분이요 인류의 죄 때문에 애통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붙잡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행복은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옵니까. 주님을 영접할 때 옵니다.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모든 삶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회중 아멘)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섬기며 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회중 아멘) 저는 우리 창성교회 교우들이 팔복을 붙잡고 팔복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며 팔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회중 아멘)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음을 알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창성교회 교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큰 아멘) 데뷔 50주년을 맞은 홍콩 배우 주윤발(1955-), 그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여전히 ‘따거(大哥)’로 불리며 지금껏 뭇 남성들의 낭만적 존경을 받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했다. 현재 기준 약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왜 기부를 결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남자는 “아내가 했다”라고 대답했다.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배우가 이웃인 남을 살리는 것. 나는 이것이 함성익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 팔복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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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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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 살아 있음에는 ‘그냥’이 없다. ‘그냥’ 살라치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이가 남기고 가는 깨달음의 선물이다. 우리는 후회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때 용기를 내서 사랑하거나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어렵게 보이는 무엇이었건 간에. 가을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날들 속에서 ‘문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들을 세어보자.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햇빛에 여문 밤송이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의 도움으로 툭 떨어지듯.’ 저 멀리서 샬롬의 축복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제107회 제108회 총회장 이·취임 감사예배가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새로남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예배는 새로남교회 성가대 장엄한 아멘송으로 열렸다. 서기 김한욱 목사가 사도행전 2:25-28 다윗의 성시를 낭독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회중 아멘)" 신앙고백 후 새로남교회 연합성가대가 독창 · 중창 · 합창과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장엄한 칸타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로 예배당을 6분 동안 은혜와 감동으로 채웠다. 감격한 회중은 우렁찬 박수와 아멘으로 화답했다. 조용하고 티나지 않는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가 강단에 섰다. "오늘밤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15장 28절 29절입니다. 말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회중 아멘) 사회자 김한욱 목사가 설교자를 소개했다.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시고요. 아마 우리 총회장님의 영적 멘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두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헬라어를 강의했던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부축을 받고 강단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의 말씀처럼 목사는 성경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평생 실천한 목회자였다. 이제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96세 그가 새로남교회에서 휠체어에 앉아 명징한 얼굴 모습을 산마루에 걸린 보름달처럼 강단에 드러냈다. 회중이 뜨거운 박수를 쳤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온 회중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고 잔잔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는 주후 50년에 모였는데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령과 우리는' (좀 있다 다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서북 어투로)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님은 제쳐놓고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거! 묘하지요.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성령님을 같이 모시고 회의를 했습니다. (회중 큰 아멘) '성령과 우리는' 거 참 묘한 모임이지요. 보통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예루살렘 공회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는 '성령과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30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얼마나 섭섭합니까. 이사야 시대의 회의는 그들이 맹약을 맺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제쳐놓고 뭐요 그들이 어떤 결정을 지어도 하나님의 성령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모였던 겁니다. 이사야 시대의 모임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지자 호세야 시대 때도 그랬더군요. 호세아 8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이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일 다 잘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한 가지 크게 실수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기브온 족속이 있어요. 여호수아에게 점령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족속이 꾀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곰팡이 난 음식을 가지고 여호수아 앞에 왔습니다. ‘여호수아여 우리는 당신의 점령 지역 안에 있는 족속이 아닙니다. 하도 길이 멀어서 고향을 떠날 때는 깨끗한 옷을 입었고 따끈따끈한 음식을 가지고 떠났는데 오는 중에 옷이 다 떨어지고 음식이 다 곰팡이 났습니다. 우리는 당신 점령 지역 안에 있지 않으니 우리하고 화목합시다.’ 여호수아서 9장 14절에 보니 여호수아가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중요한 계약을 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덜컥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후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생각을 더듬느라 2분 20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의 중간에 ‘성령과 우리는’의 의미를 말없이 되새기며 회중의 박수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회중 박수) (침묵이 끝나고)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회의를 할 때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회의를 할 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15장 30절에 그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회중 아멘) 야 참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의를 잘 했구나.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노.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둘째로 사도행전 16장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라 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결정을 하니까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어졌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런데 어느 한 교회만 믿음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그 소식을 들은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어요. (회중 아멘) 또 그 다음에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여러 교회가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수가 확 늘어났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날마다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제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오늘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내일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모레도 늘어나고 날마다 늘어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가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가’ 같이 모일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기뻐하였고 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 믿음이 굳어지고 어제, 오늘, 내일, 날마다 수가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이 자리가 총회가 모인 자리인 줄 아는데 우리 교단의 총회가 모일 때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총회가 되지 않고 ‘성령과 우리는’ 이러한 총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가’ 모여서 결의하고 그 결의한 결의가 전국 교회 위에 공포될 때 야! 이번 총회가 잘 결의했구나! 하는 소식을 듣는 모든 교회가 기뻐하고 (회중 아멘) 교회가 이 결의들을 행할 때 많은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또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날마다 수가 더하는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또 이 총회 장소가 오정호 목사님 시무하시는 새로남교회인데 우리 오정호 목사님 목회하실 때 미안합니다. 오 목사님 혼자 목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목사님’ 목회해서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고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날마다 수가 더하는 (회중 큰 아멘)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네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고 성령님을 모시고 회의할 때 그 결과를 듣고 많은 사람이 기뻐했고 (회중 아멘) 모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진 것 같이 교인과 오 목사가 성령님과 동행해서 역사함으로 (회중 아멘) 온 교회가 기뻐하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아멘)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게 하옵소서. (회중 큰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회중의 큰 박수 속에 박희천 목사 부축을 받으며 강단을 내려왔다. 총회 108년 되는 삼일 밤 예배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예배였던 것 같다. 96세 박희천 목사의 설교 ‘성령과 우리는’이 전하는 은혜와 축복의 결과 제108회 총회 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전했다.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샬롬 부흥' 전도 운동에 힘입어 성도 숫자는 전년 대비 59,151명 증가한 2,351,896명(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팬데믹 전인 2019년 2,556,182명에서 2년 사이 26만여 명이 감소하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성장을 기록했다. 칼빈주의를 따르는 우리 교단의 교인 증감률은 2019년 -6.8%에서 이듬해 -3.8%로 줄어든 데 이어 이번에 +2.6%로 다시 증가세로 반전했다. 특별히 5년 연속 교인이 줄고 있던 흐름을 바꾼 것이 개혁적인 은혜와 샬롬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어려움을 겪던 미자립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으며 감소세를 보이던 교회도 1년 사이 11,262개에서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에서 11,920개로 658개 증가하며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제108회 총회(총회장 오정호)는 보고했다. ‘성령과 우리’가 샬롬부흥운동본부(본부장 김진하 목사) 임역원의 수고에 함께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문어의 아이큐는 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 그렇듯 말씀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지고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능하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예증할 수 있겠는가. 아마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이 들 수 있는 적절한 실례는 빛, 열, 공기일 것이다. 당신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본다면 바로 거기에 빛과 열과 공기가 각기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은 빛을 통하여 자신의 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일지라도 그곳에는 여전히 빛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와 손 사이에는 열이 존재한다. 그 열은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손을 휘저으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요점은 빛과 열과 바람 이 세 가지가 각각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각기 자신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을 각각 분리해서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가운데 다른 두 가지가 없이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이 실례가 지닌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 세 요소를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바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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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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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 들/어/가/는/말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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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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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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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생 목사의 샌프란시스코
- 마약에 절어 몰락의 길을 걷는 美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는 외쳤다.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됐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이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2073년 6월 미국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 로널드 디온 디샌티스(Ronald Dion DeSantis, 1978년 9월 14일 ~) 플로리다 주지사는 쓰레기와 벽면 낙서가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배경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홍콩 누아르 영화 같은 1분짜리 홍보 영상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말했다. “한때 훌륭한 도시였던 샌프란시스코는 더 이상 활기차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대소변을 보고 헤로인을 사용하고 크랙 코카인(흡연 형태의 강력한 코카인)을 피우는 걸 봤습니다. 이곳은 좌파 정책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2023년 7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 정문 앞에는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모두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에 취한 사람들이었다. 근처에도 반나체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들, 초점 없는 눈으로 인도에 걸터앉은 사람이 가득했다. 라 코치나는 2021년 비영리 시민단체와 샌프란시스코시, 미 연방정부가 ‘도시 재생’을 외치며 낡은 우체국을 개조해 시작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슬럼화되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살리겠다는 취지였다.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에 예산과 기부금 495만 달러(약 63억 원)를 쏟아부었지만 오는 9월 운영을 중단한다. 운영비가 매월 20만9천 달러인데 벌어들이는 수익은 2만4천 달러에 불과해 적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라 코치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모니르 바로울(46) 씨는 “당신이라면 마약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이곳에 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겠습니까”라고 했다. 지역 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미국 전역에서 화제를 모으고 공무원까지 총동원된 사업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주일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가 설교했다. 제목은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12:40-42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 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샬롬 부흥' 표어가 새겨진 강단에서 본당과 중강당을 가득 메운 회중을 향해 시대의 설교자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430년 만에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나왔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군대는 아닙니다. 숫자가 많은 것 빼고는 무기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다. 군인 정신은 더더욱 없는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에서 모세는 그 무리를 군대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먼저 군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7장 4절에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내 군대'라고 하셨을까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사람에게 세 가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첫째: 창조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녀를 낳고 번성해서 가정과 민족 공동체로 가득 채우라는 창조 명령입니다. 둘째: 문화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합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문화 명령입니다. 셋째: 영적 전쟁 명령입니다. 영적 전쟁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이미 마귀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 내려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있는 전쟁 명령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하와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고 사탄은 죄와 죽음의 세계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후 역사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시간들로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전쟁을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끝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사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군인을 영육하는 교회를 세우시죠.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한 민족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광야에서 엄격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어두움을 용납하지 않고 계명에 철저히 복종하는 군대를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사탄의 소굴로 잡다한 우상 신들과 음란한 문화로 가득 찬 가나안을 상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군대' '여호와의 군대'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 군대가 나중에 도저히 군대답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본인들조차 우리는 해골처럼 말라 죽은 뼈들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실 때 마치 인자되신 예수님을 소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5절과 6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생기에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뼈가 들어맞고 살과 근육이 붙으면서 엄청난 군대가 일어났습니다. 말하자면,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만들어지는 환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16절에 역사적인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란 마귀가 사탄과 귀신들이 이 땅의 모든 세력을 궁극적 목표, 지옥까지 끌고 가는 권세를 말합니다.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그 권세, 이길 수 없는 그 권세를 제압하는 내 교회 내 군대를 이 땅에 세우겠다고 하신 겁니다. 하늘의 권세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회중 아멘)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너희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음부 지옥의 사탄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내 군대가 되어라' (회중 아멘)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이 땅에서 영생을 가진 행복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이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집해서 이날에 그날이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주님이 주신 열쇠를 가지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거룩한 군대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우리 교회 비전선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군대로서 거룩과 회복을 경험하는 예배부흥, 예수님을 닮은 제자 삼는 거목 양성, 그리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입니다. 가족 선언이고 군대 선언인 것입니다. 바다 건너 거라사 무덤에 거하는 한 사람 속에 귀신이 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이름이 뭐냐' 하시니까 ‘군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군대다. 한번 붙어보자는 거지요. 결국,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다 수장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귀신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고 하셨겠습니까. 요한계시록도 영적 전쟁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교회의 보호가 펼쳐집니다. 결국, 악한 영적 세력과 사탄도 무저갱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나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섭리의 두루마리를 떼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내신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적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군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성도가 '영적 싸움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인간적인 고난을 무릎 쓰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왜 세력을 규합해서 정치 권력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을 모아 거리 운동을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더 근본적인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집 명령에 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영적 전쟁에 부대를 세우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나라가 청소년 자살률 1위를 비롯해서 드러난 어둠의 통계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단순히 시대정신이고 윤리의식의 결여이며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애매한 말로 덮어버릴 것입니까? 사람의 의식 속에도 사회 제도 속에도 사탄은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려 합니다. 평등의 포장 아래 차별금지법안 발의를 계속 시도합니다.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세 개의 법률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폐지 논의 중이지만 다른 시, 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 인권 조례도 있습니다. 퀴어축제의 폐해도 있습니다. 몇 번 여행을 갔던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입니다.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서울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이 군대로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시길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 기도가 무엇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까. 무너져가는 이 땅에서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이 아쉬움을 드러내시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받고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강력한 전투력을 지녀야 합니다. (회중 아멘)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회중 아멘) 이웃을 위해 우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사이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영적인 사이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 소소(so so)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큰 아멘)" 중창단의 힘찬 인도로 회중이 함께하는 '하늘 군대' 찬양이 군가처럼 울려 퍼졌다. 샌프란시스코 도심 텐더로인 지구. 두 남성이 기다란 철제 도구를 들고 길가에 세워진 낡은 파란색 승용차로 향했다. 한 명이 도구를 유리창 안으로 끼워 넣어 위아래로 흔들자, 오래된 차량의 문이 ‘딸깍’ 하고 열렸다. 이들은 차량 안에 있던 옷가지와 가방들을 챙기면서 “오늘도 한탕 건졌다”라고 자신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소설 쓴다는 이재명처럼 웃었다. 대낮에 차량 도난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고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범죄가 발생한 거리 인근에는 한 픽업트럭이 유리 창문을 검은색 테이프로 꽁꽁 싸맨 채 주차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 넘게 거주한 한 한인 교민은 “최근엔 아예 승용차 트렁크를 열고 주차하는 사람도 많다”라며 “차량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 털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관용’의 상징으로 통한다. 2004년 동성애 부부에게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줬고 2014년엔 950달러(약 120만 원) 이하 절도는 경범죄로 취급해 기소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됐다. 2019년에는 경찰과 정부 기관들의 안면인식 기술 사용을 미국 최초로 금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실리콘밸리의 다양성이란 가치를 대표하는 도시다. 도시의 태생부터 그렇다. 샌프란시스코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상륙해 스페인 땅이 됐다가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멕시코 땅이 됐다.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이름도 가톨릭 성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of Assisi, 1181년 또는 1182년 ~ 1226년 10월 3일)의 이름을 딴 스페인식 발음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 영토로 편입됐다. 여러 국가 소유를 거치고 미 서부의 대표 항구로 성장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는 히스패닉, 노예 해방 뒤 정착한 흑인, 아시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온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몰려들었다. 미 서부에 금광이 발견된 후 발생한 ‘골드러시’로 더 많은 사람이 방문했고 1930년대 금문교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들이 대거 잔류하면서 다인종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제법 규모가 큰 재팬타운,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한 곳도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말은 ‘자유’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2차 세계 대전 후 군 내부 성 소수자들을 이곳에서 강제 전역시킨 것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성 소수자의 도시가 됐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내 동성애자와 성전환자, 양성애자 비율은 18% 수준이다. 10명 중 2명이 성 소수자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로 불리며 전 세계 관광객과 혁신가를 불러 모으던 샌프란시스코가 마약과 범죄로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약으로 사망한 사람은 공식 집계된 사례만 406명에 이른다. 인구 천 명당 범죄율은 48.94건으로 미국 평균(19건)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코로나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한 대량 해고와 홈리스 급증이 마약 사용과 범죄를 부추기고 있지만, 공권력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AP통신은 “샌프란시스코는 도심이 어떤 모습이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라고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 19:24-25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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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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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생 목사의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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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 식탁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쌍 나란히 올려두고 감사의 감동을 기다릴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평안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기댄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믿음이 두 입술에 나란히 맴돈다.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나란히 다독일 때 한 끼가 영원과 나란하다.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 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에 내 마음이 박힌다. ‘어? 여기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이 외로운 지구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게 된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게 놓여 있는 하루의 끝. 지쳤으나 겸허하게 마주 잡은 손. 허기가 안식을 돕고 안식이 허기를 돌보는 다행스러움이 이 소박한 시를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그러나 가장 감사한 우리의 모습 아닐까. 특히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아픈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대단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란히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나란히 옆 사람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참 다행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2022년 1월 2일 경기도 용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린 허위의 귀재 이재명 대통령 후보 앞에서 현 정권이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소 목사는 이날 ‘퍼스트가 되어라’는 설교에서 말했다고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언뜻 보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어감 때문에 아주 매혹적인 법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법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독소조항이 많고 제정되면 다수가 역차별을 받게 되며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커지게. 됩니다. 이 후보께서 지난달(2021년 12월) 한교총에 왔을 때 국민적 합의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교계에선 이 후보의 입장이 변함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교계의 목소리를 잘 듣고 국민화합에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날 아내와 동석한 허위의 귀재 이재명 후보의 말을 조선일보에서 나와 차린 '최보식의 언론'의 서범준 기자가 2022년 1월 3일 발 빠르게 전했다. “오랜만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2022년 3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의 예측과는 다르게 제5대 대통령 선거(1963년 10월 15일 직접 선거 방식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꺾고 당선)의 15만 6천 26표 차이 이후 24만 7천 77표라는 역대 2번째 최소 득표 차로 정치 초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결정됐다. 민주화 이후 최소 득표 차를 기록한 허위의 귀재 선거의 달인 이재명이 패배한 선거로 기록되었다. 비율로는 0.73%p 차이로 제15대 대통령 선거(기호 2번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기호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의 1.53%p를 경신해 역대 최소 득표율 차를 갱신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라는 이재명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최종적으로 기호 2번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이어져 오던 보수-민주당계 정권 10년 주기설을 깨고 단 5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선거다. 문재인 정부는 6공 수립 이래 처음으로 단 5년 만에 야당에 정권을 내준 정부라는 불명예를 안은 순간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엄청난 핸디캡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한 정부가 5년 만에 심판론에 놓이고 전광훈의 광장의 외침까지 더해 정치 경험이 1년도 되지 않는 0선의 신생 정치인 윤석열에게 패한 것이라 민주당으로서는 아주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2023년 4월 3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 소강석)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이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이사장 소강석 목사, 원장 안준배 목사) 주관으로 열렸다. 서울기독대학교대학원에서 역사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문학평론가 안준배 박사가 개회사를 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을 개회하겠습니다. 1988년 3월 27일 그해 부활절 다음날 아침 40대 목사 19명이 중심으로 모여 세계성신클럽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역 중에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광장에서 이틀 동안 연인원 백만 명이 참여하는 성령 운동, 성령으로 인도하는 그런 기도성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우리 본회 34년 역사 속 세계 성령 운동사에 표지가 되시는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영훈 목사를 내세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승계하게 하셨고 또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을 정리해 이끌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를 내세워 성령 운동과 말씀전파를 통해 한국 교회를 연합하고 견인해나가는 그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세계 성령 운동 역사 34년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사역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이 2백 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테너 박주옥 백석대 교수가 언제부터인지 꽃씨가 시랑스러워 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소강석 작사 작곡 '꽃씨'에 이어 요즘 교회마다 애창하는 '은혜'를 열창했다. 대회장이고 주제 강연자인 단국대 명예문학박사 소강석 목사가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곁들인 화려한 강연을 펼쳤다. "어제 정말 바쁜 부활주일을 보내시고 쉬시는 날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격려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설교학자도 아니고 설교를 연구하는 전문교수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뛰는 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준배 목사께서 이런 강연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제를 주신 겁니다. '나는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전한다.' 제가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혹적이고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비롯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워낙 목회자가 바쁘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탈고를 했지만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목회자에게는 설교하면 강해 설교가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강해 설교 창시자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년 3월 21일 - 2017년 7월 22일)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에 출생하여 미국의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달라스 신학교, 써던 메쏘디스트 대학교에서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설교학의 대가로 2006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해 설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의 강해 설교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탐구해 오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돼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의 강해 설교 교본으로 알려진 저서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는 전 세계 목회자들이 탐독했으며 현재도 120개가 넘는 학교에서 설교학의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하면 설교의 구성 방식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3대지냐 4대지냐, 혹은 구절을 풀어 설교할 것이냐(주해설교), 그리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대부분 한국 목회자는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해 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목사이며 청교도 신학자 조엘 비키(Joel R.Beeke, 1952년- )의 저서 '설교에 관하여(Reformed Preaching)'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해 설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구성 요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청중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 설교 내용이 전달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contents)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달방식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문화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인지성향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준배 박사가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관해 말했다.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나 인격person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연극이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라는 말이 있는데 가면이라는 뜻도 있고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삼위 3person)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감독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작품 '살인의 추억' 이후 오스카상은 받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 감독의 페르소나(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선호하는 배우를 뜻한다)로 배우를 썼는데 송강호입니다. 이 배우는 감독의 모든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 연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용기 목사를 그 시대의 성령의 페르소나로 사용하셨고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소강석 목사를 성령의 페르소나로 세우셨습니다. 소 목사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설교를 하든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합니다. 저는 소 목사님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중에 '상 파울교회'에서의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들었는데 그 현장을 딱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합니다. 그다음에 2017년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대회 때 소 목사님이 주 강사로 설교를 했는데 '말씀의 근원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와 영 관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은 어느 현장, 어떤 대회, 어떤 형식의 모임이 됐든 거기에 딱 맞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2017년 12월 소 목사님과 대만에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대만 까오씽이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열차로 타이페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책을 갖고 다니는데 덩리쥔(鄧麗君, 1953년 1월 29일~1995년 5월 8일 대만 출신 가수)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안 목사님은 이선희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덩리쥔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화권이 사랑하는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이 노래를 부른 덩뤼쥔이라고 그랬죠. 그러니 소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나는 이선희야. 이선희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회중 웃음) 소 목사님은 별을 참 좋아하세요. 이선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날 저녁 때 타이페이에 5천 명 모이는 따워줘이라는 대만 최고의 교회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소 목사님이 나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 덩뤼쥔의 노래 '첨밀밀' (蜜蜜 '티엔미미' 달콤해요)' '니 샤오 더 티엔미미(笑得蜜蜜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달콤해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대만 사람들이 음악으로 대단히 감동을 했어요. 대만 사람이 사랑하는 덩뤼쥔 자기들 노래로 불러주니까 감동을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한 8천 명 수용할 수 있는 대만에서 제일 큰 허핑체육관에서 열린 성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소 목사님이 그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하모니카로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을 연주하니까 대만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니 소 목사님은 우리 대만인이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끼더라고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소 목사님은 시대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감사예배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소천하신 이후인데 그때 '고래를 위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라는 시를 인용한 설교였습니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라고 설교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회 고래였고 그 고래가 국민일보를 낳았고 또 이영훈 목사를 낳았고 또 조민재 국민일보 회장을 낳았고 또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낳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고래'라는 시적 언어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때도 이선희 노래를 불렀는데요. (회중 웃음) '그 모든 것 기적이었네. 은혜였네. 눈물이였네. 이렇게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 목사님 그 음악을 그 현장에 맞게끔 사용하면서 참, 소 목사처럼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예배에 딱 맞게끔 하면서 설립자 조용기 목사 그리고 이영훈 목사와 국민일보 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이렇게 해박하고 탁월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이 시대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유럽에도 같이 가서 성회를 지켜봤고 춘천순복음교회 성회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성령 포럼을 통해서 소 목사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잘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앞서 안준배 박사가 그 자질을 실제 목격하고 증언했다. 그렇듯 “이 세상의 광대들도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기 위해 그토록 애틋함과 애절함을 갖고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애틋함과 애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스스로 광대임을 밝히고 그것을 실제로 입증해 성공한 광대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설교관을 세 가지로 압축해 말했다.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합니다. 2.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합니다. 3. 성경을 이야기로 전합니다." 유럽 역사에는 다른 민족과 접촉·교류·전쟁을 통해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이 언어다. 오늘날 영어에는 영국을 침략했던 로마·게르만·바이킹이 남긴 단어와 영국이 침략·점령했던 민족과 국가에서 묻혀온 단어가 숱하게 많다. 언어 흔적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서 아무리 빨고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Society)·경제(Economy)·자유(Liberty)·개인(individual)·종교(religion)·존재(being)·권리(right)·그(he)·그녀(sh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모두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낯선 영어·네덜란드어·독일어와 씨름하며 한자어를 사용해 번역한 것이다. 법학·정치학·경제학·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 등 근대 과학 용어 거의 전부에 일본 손때가 묻어있다. 일본 농기구(農器具) 이름에는 한반도 언어의 파편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 선진(先進) 벼농사 방법과 농기구가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성숙(成熟)이란 ‘나’와 ‘남’ ‘우리’와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발전의 한 단계다. ‘남’과 ‘그들’은 ‘나’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은 나에게 득(得)이 된다. 상대를 부정확하게 아는 지도자는 지형(地形)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낙하산병(落下傘兵)과 같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도자의 성숙과 직결돼 있다. ‘기억의 감옥’에 갇히면 ‘기억의 포로(捕虜)’가 되기 십상이다. 모든 통치자 턱 밑 어딘가에는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었다. 왕조 시대에는 이걸 역린(逆鱗 용의 몸에 붙어 있는 81개 비늘들 중 딱 하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 있다는 비늘)이라 불렀고, 건드리면 자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역린이란 단어의 의미는 많이 확장되어 윗사람의 약점(아킬레스건, 콤플렉스, 흑역사) 혹은 윗사람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권한을 뜻한다. 그래서 통치자 비서들도 정보기관 보고도 믿고 의지해 온 평생 선배 원로들도 언급을 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린이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도 교회 초창기의 목사를 기억하는 교인은 수군거리는데 교만해진 당회장 귀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힘 있는 자가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대하면 그날부터 교회와 교단과 교계가 달라질 것이다. 교인들이 기도하고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 4:12-14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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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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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믿음에 맞는 산비탈과 먼 교회들에 불을 밝히시고 가까운 곳에서 내가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소망마저 그 자리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해가 뜨는 거친 곳으로 보내소서. 많은 진리 가운데 위대한 좁은 길을 선택하여 그 뜻을 알게 하소서. 기도는 언제 필요할까. ‘감사의 기도’라는 말은 있지만, 행복할 때 기도는 의외로 짧게 끝난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붙잡을 것이 없을 때, 기도의 힘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때, 견뎌서 다시 일어날 힘을 구할 때, 기도는 찾아온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그들의 아이큐는 70~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고 한다. 2023년 11월 12일 9:30 한국 교회에 모범이 될 삼일교회 2부 예배 성찬식 뒤 송태근 목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영상을 하나 볼텐데 아시는 것처럼 지난주 선교팀하고 케냐를 다녀왔습니다. 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첫 번째는 절대 물이 부족한 아니 물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어린 소녀들이 가족 식수를 위해서 수십 킬로를 왕복을 해야 됩니다. 걸어서 가다가 들판에서 못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이런 처참한 곳이 케냐 전역에 널려있습니다. 이 물 문제는 한두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몇천만 원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문제는 케냐 북단에 가면 세계 최대 난민촌이 있습니다. 카푸마라는 지역인데 덩치가 한 도시 규모이다 보니 네 군데로 흩어 놨어요. 한 30만 명이 7만여 명씩 네 캠프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유엔 관리하에 각 나라에서 온 식량을 배급받는데 저걸 먹고 어떻게 사나 할 정도입니다. 정말 안 죽을 만큼만 배급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나마 그거라도 있죠.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캠프 밖의 케냐 원주민들입니다. 그게 부러워 캠프를 습격하고 싸우고 그럽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손 놓고 방치돼 있어요. 모든 기간 산업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처참해요. 인권이고 뭐고 없어요. 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요. 난 세상에 없다 없다 해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 봤어요. 지난번 바라나시가 지옥이었다면 이곳은 생지옥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간 데가 학교인데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실을 향해) 영상을 좀 띄워주세요." 영상이 떴다.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인 케냐 어린이들의 '날 세우시네 You Raise Me Up' 영어 합창 소리가 울렸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수용 교실 건물만 온전한 모습이고 여기저기 파인 돌투성이 운동장과 턱없는 외부 화장실이 보였다. 송태근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 학교를 저희 교회 출석하시는 정인희 권사님이 계속 섬겨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력이 없어서 거의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 학교의 구체적인 상태를 볼까요. 5000명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인데 운동장 상태가 저 모양이고 채석장에 지은 학교입니다. 아마 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교 운동장인데 턱이 지고 비탈입니다. 또 볼까요. (화면이 바뀐다) 학교 운동장 상태가 어떤 줄 아시겠죠.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뛸 수도 없고 많이 다친다고 해요. 5000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상태가 저렇습니다. 열악하고 비참합니다. 웬만하면 말로 설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표현하기 어려워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 인권이라는 건 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 추수감사 헌금은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이 될 겁니다. 아이들 운동장을 트랙터로 갈아엎어 평평하게 만들고 다치지 않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화장실을 보수하고 증축하는데 사용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닿는 한도 안에서 추수감사 헌금에 동참해주시고 이렇게 선하게 사용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좌우 인사를 나눌까요." 교우들이 좌우 교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는 하나님께서 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첫째가 앗수르, 둘째가 유다, 셋째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 나라 심판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연약한 자들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악한 법을 만들어 짓밟는 패역한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텐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1장에 넘어오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설명해 드릴 텐데 이사야서 강의는 다음 주로 마무리가 될 겁니다. 1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이새의 줄기에서' 앞을 보실까요.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줄기'는 무슨 뜻입니까. '가문'을 말합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그 뜻입니다. 이사야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식물로 비유해 표현한 게 굉장히 많아요. 우리 기억나나요.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포도가 맺혔죠, 들포도. 들포도는 쓰고 시어 먹을 수 없습니다. 결실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결실이라고 했을 때는 주인이 심은 의도대로 열매 맺는 게 결실입니다. 그게 진짜 열매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농산물과 식물로 하나님의 경영과 마음을 묘사한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가문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것은 어떤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것을 좀 더 강화하는 측면에서 '그 뿌리에서' 뭐가 나요. '한 가지가 나서' 무얼 할 것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직접 손대시는 농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경영하시는 역사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결실할 것을 확고하게 방점을 찍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일은 어떤 중간에 인간의 변수에 따라 결과에 변수가 생긴다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결실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확고하신 하나님 의지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결실하시는 분이십니다. (회중 아멘) 그 언약에 여러분과 제가 붙들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2절을 잘 보시면 '그 위에' 누가? '여호와의 영'이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같이 하신다는 얘기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놀랍게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씨'가 나요. 앞으로 이 씨는 누구로 열매 맺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으로 열매 맺을 거예요. 그러면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여기 한꺼번에 등장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예. 성부 하나님 혼자 이거 못 하시나. 이렇게 다른 위격, 성령 하나님의 손을 빌리셔야 되나. 예, 그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이든지 함께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참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 땅에 설립하신 것도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함께, 성도끼리 함께 하나님과 교회가 함께 세상 경영을 우주적 경영을 만들어 성취하고 이루어가시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生活 樣式)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해야 해요. '아냐 다 귀찮아 나 혼자 할 거야. 난 고독한 게 좋아.' 이건 잘못된 거예요. 우리 다 '함께 합시다'라고 인사합시다. (회중 모두 좌우를 보며 '함께 합시다.') 한번 더 '함께 갑시다.' (회중 모두 웃고 좌우를 보며 '함께 갑시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옆에 앉았나 이러면 안 되겠죠. (일동 웃음) 함께 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만 바로 되어 있다면 교회 공동체만큼 행복한 곳이 없어요. (그의 비겁한 전임자 시절만큼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수많은 분들이 내 어머니고 내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이 땅 어디에 있겠습니까. 케냐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북극 끝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예수님 깃발 아래라면 모든 사람이 형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흥겨움으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본성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하세요.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 혼자 하셨어요?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같이 하셨어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뭔 일도 혼자 하면 효율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효율보다 함께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성경을 볼까요.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이사야서 9장에 보면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통치권)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지혜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라고 표현이 되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런데 이 전능하다는 말은 어떤 개념을 전제하고 있을까요. 전쟁 개념입니다. 오늘 이사야 11장 2절을 보시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데 이것은 재능에 능하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한 아기가 나와서 우리를 위해 영적인 거대한 전쟁을 누구와 맞붙으실 건가요? 사탄과 맞붙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9장 6절에서 그렇게 설명했죠.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그런 의미가 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자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 여러분. 이게 본업이라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기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를 즐겁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성숙과 우리의 완성이에요. (회중 아멘) 그걸 예수님이 아셨어요. 자기 목숨을 내어서 그의 아버지를 즐겁게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지식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다. 잠언 1:7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죠. 유명한 구절인데 (영상실을 향해) 띄워주세요. (회중을 향해) 여호와를 시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뭐예요. 근본, 즉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 뿌리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좀 더 실제 적으로 그 지식이라는 뿌리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도대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뭘까요. 이게 막연하잖아요. 추상적이지 않아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게 뭡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형상을 담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어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구분해 놓은 어떤 계급과 제도를 다 걷어내고 온전히 뭘로 만나야 되요. 그 사람을 높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만날 때 그 태도가 바로 누구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예요. 우리는 이 땅의 질서와 가치에 따라 구분되는 세상에 계층에 따라서 우리 태도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건 올바른 신학적 태도도 아니고 신앙적 모습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짜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실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손을 벌려 주고 함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냐에 다녀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무슨 고백이 삐져 나왔는지 아세요. '한국은 너무 잘살아. 한쪽은 배터져 죽고 한쪽은 대한민국 온 나라가 살 뺀다고 다이어트 열풍에 빠져 있고 말이 안되요. 케냐 그 들판에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면 빼짝 말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이나 난민 처지에서 정착촌으로 옮긴 아이들이나 보면 먹지를 못해 가지고 피부도 검은데 더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만 타도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요. 한국이 5000년 반만 년 역사 속에 이렇게 넘치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은혜들을 쌓아 두고, 모아 두고, 고여 놓아서는 안 돼요. 흘려보내고 나눠 줘야 돼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오늘 성경을 잘 보세요.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무슨 얘기냐면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만 '법이잖아' 그 법이 어떤 법입니까. 이사야 10장 절 2절을 보세요. 유다 고관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보세요.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게 세상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고루고루 살도록 설정해 놓은 법이 아니예요. 더 잘사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법을 고위층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어디 부동산 정보나 빼갈려고 그러고 그런 걸 미리미리 다 알아 가지고 미리 땅을 사 놓고 남의 잠자리 다 빼앗고 투기 바람이 불어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값이 폭등을 하고 모든 젊은이가 희망을 잃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안 먹고 안 써도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집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인 안정감을 주는 공간 아니겠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하든 서울 안에서 버텨라.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또 엉뚱하게 김포까지 서울로 만들려고 하지를 않나. 그건 어느 머리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정책을 뱉어내니 나라가 안정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치에 소망이 없어요. 제가 목사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문제가 많아도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회중 아멘) 하나님이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꿈꾸신다고요. (회중 아멘) 내가 교회에 소속돼 있고 그리스도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게 얼마나 특권이고 은혜인지 아세요. 그게 복인지 아세요. 놀라운 일입니다. 두 달에 한 번 오후 5시에 모이는 전체 리더 청년들 모임 시간에 말했어요. '여러분들 참 복입니다. 주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청년 때의 특권입니다.'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이 땅을 제대로 판결하고 정의롭게 심판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결론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11장 6절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절 다 같이 시작.”(회중 일동 합독)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자 이건 문학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떤 초점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평화! 힘이 유지해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런 힘이 없어도 유지되는 진정한 평화, 약자를 돌봐주고 함께 해주고, 그리고 진정한 조화를 지닌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장 처참한 현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는 겁니다. 그 나라를 꿈꾸기 위해서 힘이 받쳐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지막 구절. 다 같이 시작." 회중이 이사야 11:9을 다 같이 읽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론으로 뭐라고요. (회중 묵묵부답) 아이 5분도 안됐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기억나시죠. (회중 '네') 자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는 뭐라구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께해주고 돌봐주는 것! (회중 아멘) 그 얘기죠. (그 말을 매주 했던 모양) 한 주는 거를 수 없나. (회중 웃음) 안돼요. 매주 해도 잊어버리잖아요. (회중 웃음)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게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믿습니까? (회중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이예요. 할렐루야! (회중 아멘) 이것이 겨레가 이 땅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남은 순례길을 걸어가는 이유고 호흡하는 이유고 살아내는 이유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물이 바다 덮음같이' 찬양합시다." 삼일교회 회중이 일어서 아말렉을 대적하는 여호수아의 군대같이 찬양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같이 송태근 목사가 믿음이 바다를 덮음같은 삼일교회 회중을 향해 홍해 앞의 모세같이 양손을 들어 축복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높고 깊으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삼일 권속들 해외와 군대 멀리 출타해 있는 가족들 그리고 태중의 생명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송태근 목사는 성경을 읽고 듣고 은혜받는 신자에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과 성경을 통해 연결시켜 채워주는 병렬 설교에 능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기 때문이리라...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21 202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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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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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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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교회를 다니며 내가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나는 아주 행복하다. 총회장이 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나는 주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 끝과 시작.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것이다. 十字架 _ 윤동주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2023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창성교회 본당 함성익 목사가 성경 마태복음 5:1-12 봉독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복의 본질'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과 테러 집단 하마스 간의 전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끝나는 축제의 안식일 새벽 6시 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예상 보유량을 넘는 수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면전 수준의 도발이었다. 하마스는 지상으로도 직접 침투,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아 가자지구에 억류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은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 50주년 다음 날이었다. 당시 아랍 연합군의 공격 징후를 놓쳐 패배 직전까지 갔던 이스라엘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만큼 하마스가 이번 공격을 오래 준비했고 상징성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처럼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날이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알카에다에 기습적으로 당했던 9·11테러를 소환했다. 이어 '9·11(나인 원 원)'처럼 '10·7(텐 세븐)'이란 고유명사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가자(Gaza)에서 벌어지는 피의 분쟁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해양 민족 블레셋인이 맞붙었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에 세운 도시였다. 구약의 유대인 사사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천 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딱 맞지 않는다. 용맹한 블레셋인은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에게 저항하다가 패퇴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블레셋의 후예가 아니란 뜻이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유대인 반란을 평정한 뒤 징벌로 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게 한 게 시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 전쟁으로 서안 지구(West Bank)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두 곳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여기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가 불붙었다. 하지만 가자와 서안 지구는 그 후 다른 길을 갔다. 인티파다로 자치권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은 파타와 하마스로 분열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테러 단체 하마스가 승리하고 파타가 불복하면서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수중에 떨어진 가자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고 물과 전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를 시작했다. 가로 10㎞, 세로 40㎞인 강원도 크기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싸움이 격화되면 이스라엘 초정통파 유대교 세력의 팔레스타인 궤멸 논리가 힘을 얻고, 이슬람 극단주의 하마스가 이스라엘 소멸론을 주장하며 이란을 포함하는 반시오니스트 연대를 강화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상대를 배척하는 종교의 교리가 담긴 종말론 즉 아마겟돈의 서사(敍事)다. 이 서사는 현실이 되면 안 된다. 비유로만 남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 사태 설명을 끝내고'행복의 본질' 설교를 이어갔다. "이스라엘 전쟁은 종교적인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모든 갈등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집안, 내 가족이 어울려 살기 위해 벌어진 다툼입니다. 어쨌거나 전쟁은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팔복의 말씀 역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죠. 유대인의 탈무드(미쉬나-Mischna, 반복/가르침-와 게마라-Gemara, 보완/보충-가 합쳐진 책이다. 미쉬나는 토라인 타낙<히브리 성경>에 대응되는 구전 토라로 AD 200년경 편집된 최초의 권위 있는 종교적 법규 모음집이다. 게마라는 미쉬나에 관한 랍비들의 논구와 해설들의 전승을 지칭하며 이 게마라가 미쉬나와 합쳐져서 탈무드를 형성)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중병을 얻어 눕게 됩니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나 차도가 없고 점점 몸만 더 나빠집니다. 어느 날 자녀들이 랍비를 찾아가게 됩니다. 당시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랍비가 가르쳐 주기를 '나는 정말 행븍합니다'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외투를 빌려 아버지를 덮어주라. 그러면 당신 아버지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산중의 한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굴속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안식에 들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굴에 들어가 그의 외투를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사는 외투는커녕 걸치고 있는 옷이 속옷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병을 어떻게 고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녀들이 그때 깨우친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역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물질로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목사님 저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진정한 행복의 교훈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행복은 갈릴리에 있는 소위 팔복산으로 가야 할 겁니다. 팔복산은 가버나움에서 한 10킬로 떨어진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아주 작은 산입니다. 그 산에 팔복 기념교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둥근 천장 중앙 팔각형 안의 여덟 개 창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창문들에는 라틴어로 팔복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 이스라엘 관광을 제일 많이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라틴어 팔복 말씀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그림 같은 갈릴리 바다가 펼쳐집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 장소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행복의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원문 성경에 보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행복의 본질을 말씀해주시면서 제자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님이 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팔복의 교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자신을 따르는 예수님 제자들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본질이 이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참된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이 팔복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심령의 상태 즉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만 아니라 두 번째 복, 애통함도 마음의 상태, 세 번째 복 온유함도 마음의 상태,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름도, 다섯 번째 복 긍휼히 여김도 따지고 보면 다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행복은 결코 외적인 상태 즉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다스림에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조금만 더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넓은 집을 가지게 되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출세하고 조금만 더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허상의 바램 속에서 제각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강조해주고 계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가난해지면 마음이 청결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사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우리 가운데 새벽에 늘 나오는 분이 계세요. 폐가 안 좋으신데 저하고 얘기할 때 숨을 가쁘게 쉬십니다. 그런데 매 주일 감사헌금을 내면서 ‘하나님 한 주간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새벽기도 나와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가십니다. 하루하루와 매시간이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두 번째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입니다. (회중 아멘)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팔복은 복이 ‘있도다’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축복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영어로 블레스(bless)입니다. 어원은 블리드(bleed) ‘피 흘리다’ 입니다. 이 단어는 피의 제사에서 유래된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피 흘려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말씀했습니다. 팔복이 바로 이런 하나님하고의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마음의 덕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죄지은 것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표준만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 ~ 2018년 10월 22일)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성경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로부터 상을 받은 책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풀어준 책에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회중 아멘) 애통하는 자의 복,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회중 아멘)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맛에 당기는 자는 복이 있다. 평생에 너희 음식이요 음료로다. (회중 아멘) 참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늘 애곡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으로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배부름을 얻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의지하고 거기서 경험하는 것을 영적인 만족으로 추구하는 이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는 창성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세 번째 행복의 본질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의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의 마음부터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팔복에는 이웃과의 관계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뭐죠. (회중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중요한 강조점이고 팔복의 핵심입니다. 이웃 사랑이 팔복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다섯 번째 복과 일곱 번째 복을 보십시오. 다섯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정성을 들여 돌보는 너희는 돌봄을 받는다. 화평케 하는 자,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은 내 이웃을 배려해주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은 행복에 관해 이런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말입니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뭘 하라? 이발하라. 우리가 이발소나 미장원에 다녀오면 하루는 깨끗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한 주간 행복하려면 여행해라.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들뜨고 행복합니다. 신바람이 납니다. 여행 가서 일주일 지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집 생각이 나죠. 한 달 행복하려면 새집으로 이사 가라. 새집으로 이사 가도 수리하고 뭐하고 해도 한 달밖에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 해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뭐 처녀하고 총각끼리 평생 사느니 죽느니 해도 결혼하고 일 년 사니까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회중 웃음) 그러나 일생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생 행복하다는 겁니다. 때로 어려움도 있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러분 예수님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섬기시면서 자신도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 예수님은 행복하게 사신 겁니다. (회중 아멘) 이 땅의 사명을 완수하시면 떠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여러분 인간 가운데 마지막 순간 ‘다 이루었다’ 하고 떠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분이 있다면 시인 윤동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십자가’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 참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삶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섬김에는 아픔과 고통도 따르지만, 그 섬김의 건너편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희열과 놀라운 행복이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을 붙잡고 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마음이 가난하셨던 분이요 인류의 죄 때문에 애통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붙잡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행복은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옵니까. 주님을 영접할 때 옵니다.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모든 삶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회중 아멘)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섬기며 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회중 아멘) 저는 우리 창성교회 교우들이 팔복을 붙잡고 팔복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며 팔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회중 아멘)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음을 알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창성교회 교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큰 아멘) 데뷔 50주년을 맞은 홍콩 배우 주윤발(1955-), 그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여전히 ‘따거(大哥)’로 불리며 지금껏 뭇 남성들의 낭만적 존경을 받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했다. 현재 기준 약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왜 기부를 결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남자는 “아내가 했다”라고 대답했다.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배우가 이웃인 남을 살리는 것. 나는 이것이 함성익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 팔복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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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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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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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 살아 있음에는 ‘그냥’이 없다. ‘그냥’ 살라치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이가 남기고 가는 깨달음의 선물이다. 우리는 후회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때 용기를 내서 사랑하거나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어렵게 보이는 무엇이었건 간에. 가을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날들 속에서 ‘문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들을 세어보자.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햇빛에 여문 밤송이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의 도움으로 툭 떨어지듯.’ 저 멀리서 샬롬의 축복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제107회 제108회 총회장 이·취임 감사예배가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새로남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예배는 새로남교회 성가대 장엄한 아멘송으로 열렸다. 서기 김한욱 목사가 사도행전 2:25-28 다윗의 성시를 낭독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회중 아멘)" 신앙고백 후 새로남교회 연합성가대가 독창 · 중창 · 합창과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장엄한 칸타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로 예배당을 6분 동안 은혜와 감동으로 채웠다. 감격한 회중은 우렁찬 박수와 아멘으로 화답했다. 조용하고 티나지 않는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가 강단에 섰다. "오늘밤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15장 28절 29절입니다. 말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회중 아멘) 사회자 김한욱 목사가 설교자를 소개했다.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시고요. 아마 우리 총회장님의 영적 멘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두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헬라어를 강의했던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부축을 받고 강단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의 말씀처럼 목사는 성경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평생 실천한 목회자였다. 이제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96세 그가 새로남교회에서 휠체어에 앉아 명징한 얼굴 모습을 산마루에 걸린 보름달처럼 강단에 드러냈다. 회중이 뜨거운 박수를 쳤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온 회중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고 잔잔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는 주후 50년에 모였는데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령과 우리는' (좀 있다 다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서북 어투로)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님은 제쳐놓고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거! 묘하지요.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성령님을 같이 모시고 회의를 했습니다. (회중 큰 아멘) '성령과 우리는' 거 참 묘한 모임이지요. 보통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예루살렘 공회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는 '성령과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30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얼마나 섭섭합니까. 이사야 시대의 회의는 그들이 맹약을 맺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제쳐놓고 뭐요 그들이 어떤 결정을 지어도 하나님의 성령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모였던 겁니다. 이사야 시대의 모임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지자 호세야 시대 때도 그랬더군요. 호세아 8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이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일 다 잘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한 가지 크게 실수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기브온 족속이 있어요. 여호수아에게 점령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족속이 꾀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곰팡이 난 음식을 가지고 여호수아 앞에 왔습니다. ‘여호수아여 우리는 당신의 점령 지역 안에 있는 족속이 아닙니다. 하도 길이 멀어서 고향을 떠날 때는 깨끗한 옷을 입었고 따끈따끈한 음식을 가지고 떠났는데 오는 중에 옷이 다 떨어지고 음식이 다 곰팡이 났습니다. 우리는 당신 점령 지역 안에 있지 않으니 우리하고 화목합시다.’ 여호수아서 9장 14절에 보니 여호수아가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중요한 계약을 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덜컥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후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생각을 더듬느라 2분 20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의 중간에 ‘성령과 우리는’의 의미를 말없이 되새기며 회중의 박수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회중 박수) (침묵이 끝나고)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회의를 할 때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회의를 할 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15장 30절에 그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회중 아멘) 야 참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의를 잘 했구나.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노.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둘째로 사도행전 16장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라 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결정을 하니까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어졌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런데 어느 한 교회만 믿음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그 소식을 들은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어요. (회중 아멘) 또 그 다음에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여러 교회가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수가 확 늘어났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날마다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제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오늘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내일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모레도 늘어나고 날마다 늘어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가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가’ 같이 모일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기뻐하였고 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 믿음이 굳어지고 어제, 오늘, 내일, 날마다 수가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이 자리가 총회가 모인 자리인 줄 아는데 우리 교단의 총회가 모일 때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총회가 되지 않고 ‘성령과 우리는’ 이러한 총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가’ 모여서 결의하고 그 결의한 결의가 전국 교회 위에 공포될 때 야! 이번 총회가 잘 결의했구나! 하는 소식을 듣는 모든 교회가 기뻐하고 (회중 아멘) 교회가 이 결의들을 행할 때 많은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또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날마다 수가 더하는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또 이 총회 장소가 오정호 목사님 시무하시는 새로남교회인데 우리 오정호 목사님 목회하실 때 미안합니다. 오 목사님 혼자 목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목사님’ 목회해서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고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날마다 수가 더하는 (회중 큰 아멘)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네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고 성령님을 모시고 회의할 때 그 결과를 듣고 많은 사람이 기뻐했고 (회중 아멘) 모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진 것 같이 교인과 오 목사가 성령님과 동행해서 역사함으로 (회중 아멘) 온 교회가 기뻐하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아멘)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게 하옵소서. (회중 큰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회중의 큰 박수 속에 박희천 목사 부축을 받으며 강단을 내려왔다. 총회 108년 되는 삼일 밤 예배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예배였던 것 같다. 96세 박희천 목사의 설교 ‘성령과 우리는’이 전하는 은혜와 축복의 결과 제108회 총회 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전했다.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샬롬 부흥' 전도 운동에 힘입어 성도 숫자는 전년 대비 59,151명 증가한 2,351,896명(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팬데믹 전인 2019년 2,556,182명에서 2년 사이 26만여 명이 감소하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성장을 기록했다. 칼빈주의를 따르는 우리 교단의 교인 증감률은 2019년 -6.8%에서 이듬해 -3.8%로 줄어든 데 이어 이번에 +2.6%로 다시 증가세로 반전했다. 특별히 5년 연속 교인이 줄고 있던 흐름을 바꾼 것이 개혁적인 은혜와 샬롬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어려움을 겪던 미자립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으며 감소세를 보이던 교회도 1년 사이 11,262개에서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에서 11,920개로 658개 증가하며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제108회 총회(총회장 오정호)는 보고했다. ‘성령과 우리’가 샬롬부흥운동본부(본부장 김진하 목사) 임역원의 수고에 함께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문어의 아이큐는 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 그렇듯 말씀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지고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능하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예증할 수 있겠는가. 아마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이 들 수 있는 적절한 실례는 빛, 열, 공기일 것이다. 당신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본다면 바로 거기에 빛과 열과 공기가 각기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은 빛을 통하여 자신의 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일지라도 그곳에는 여전히 빛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와 손 사이에는 열이 존재한다. 그 열은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손을 휘저으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요점은 빛과 열과 바람 이 세 가지가 각각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각기 자신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을 각각 분리해서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가운데 다른 두 가지가 없이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이 실례가 지닌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 세 요소를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바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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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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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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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 들/어/가/는/말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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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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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생 목사의 샌프란시스코
- 마약에 절어 몰락의 길을 걷는 美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는 외쳤다.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됐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이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2073년 6월 미국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 로널드 디온 디샌티스(Ronald Dion DeSantis, 1978년 9월 14일 ~) 플로리다 주지사는 쓰레기와 벽면 낙서가 가득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배경으로 어두운 분위기의 홍콩 누아르 영화 같은 1분짜리 홍보 영상을 찍어 트위터에 올리고 말했다. “한때 훌륭한 도시였던 샌프란시스코는 더 이상 활기차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에 대소변을 보고 헤로인을 사용하고 크랙 코카인(흡연 형태의 강력한 코카인)을 피우는 걸 봤습니다. 이곳은 좌파 정책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2023년 7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 정문 앞에는 허리를 숙인 사람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었다. 모두 마약성 진통제인 펜타닐에 취한 사람들이었다. 근처에도 반나체로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사람들, 초점 없는 눈으로 인도에 걸터앉은 사람이 가득했다. 라 코치나는 2021년 비영리 시민단체와 샌프란시스코시, 미 연방정부가 ‘도시 재생’을 외치며 낡은 우체국을 개조해 시작한 대형 프로젝트였다. 슬럼화되는 샌프란시스코 도심을 살리겠다는 취지였다. 대형 푸드코트 ‘라 코치나 마켓플레이스’에 예산과 기부금 495만 달러(약 63억 원)를 쏟아부었지만 오는 9월 운영을 중단한다. 운영비가 매월 20만9천 달러인데 벌어들이는 수익은 2만4천 달러에 불과해 적자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라 코치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모니르 바로울(46) 씨는 “당신이라면 마약 거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이곳에 아이와 함께 밥을 먹으러 오겠습니까”라고 했다. 지역 신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은 “미국 전역에서 화제를 모으고 공무원까지 총동원된 사업이 살아남지 못한다면 누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2023년 7월 23일 오전 10시 서대문교회 주일 2부 예배에서 장봉생 목사가 설교했다. 제목은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본문은 출애굽기 12:40-42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 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샬롬 부흥' 표어가 새겨진 강단에서 본당과 중강당을 가득 메운 회중을 향해 시대의 설교자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430년 만에 애굽 땅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그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나왔다고 합니다. 누가 봐도 군대는 아닙니다. 숫자가 많은 것 빼고는 무기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습니다. 군인 정신은 더더욱 없는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에서 모세는 그 무리를 군대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먼저 군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7장 4절에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말씀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내 군대'라고 하셨을까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사람에게 세 가지 하나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첫째: 창조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자녀를 낳고 번성해서 가정과 민족 공동체로 가득 채우라는 창조 명령입니다. 둘째: 문화 명령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말씀합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모든 만물을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개발하고 발전시키라는 문화 명령입니다. 셋째: 영적 전쟁 명령입니다. 영적 전쟁 명령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실 때 이미 마귀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 내려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은 그냥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있는 전쟁 명령이었습니다. 아쉽게도 하와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갔고 사탄은 죄와 죽음의 세계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이후 역사는 치열한 영적 전쟁의 시간들로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 전쟁을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끝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사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래서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군인을 영육하는 교회를 세우시죠. 먼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한 민족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광야에서 엄격한 훈련을 시키십니다. 어두움을 용납하지 않고 계명에 철저히 복종하는 군대를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사탄의 소굴로 잡다한 우상 신들과 음란한 문화로 가득 찬 가나안을 상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내 군대' '여호와의 군대'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나 이 군대가 나중에 도저히 군대답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본인들조차 우리는 해골처럼 말라 죽은 뼈들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은 하나님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3절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야”라고 부르실 때 마치 인자되신 예수님을 소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5절과 6절에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생기에게 명령합니다. 그랬더니 뼈가 들어맞고 살과 근육이 붙으면서 엄청난 군대가 일어났습니다. 말하자면,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님의 군대가 만들어지는 환상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때 시몬 베드로가 16절에 역사적인 대답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음부의 권세란 마귀가 사탄과 귀신들이 이 땅의 모든 세력을 궁극적 목표, 지옥까지 끌고 가는 권세를 말합니다.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그 권세, 이길 수 없는 그 권세를 제압하는 내 교회 내 군대를 이 땅에 세우겠다고 하신 겁니다. 하늘의 권세를 너희에게 줄 것이다. (회중 아멘)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너희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늘의 권세를 가지고 음부 지옥의 사탄의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내 군대가 되어라' (회중 아멘) 하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모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셔 이 땅에서 영생을 가진 행복과 기쁨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가족이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또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소집해서 이날에 그날이 올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일을 당당하게 해내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주님이 주신 열쇠를 가지고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거룩한 군대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입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우리 교회 비전선언문은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군대로서 거룩과 회복을 경험하는 예배부흥, 예수님을 닮은 제자 삼는 거목 양성, 그리고 복음으로 세상을 바꾸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겠습니다’입니다. 가족 선언이고 군대 선언인 것입니다. 바다 건너 거라사 무덤에 거하는 한 사람 속에 귀신이 떼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네 이름이 뭐냐' 하시니까 ‘군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군대다. 한번 붙어보자는 거지요. 결국,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에 다 수장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귀신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왔다고 하셨겠습니까. 요한계시록도 영적 전쟁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교회의 보호가 펼쳐집니다. 결국, 악한 영적 세력과 사탄도 무저갱 속으로 들어가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나죠.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섭리의 두루마리를 떼신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내신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올 때까지 우리는 시간 속에서 영적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군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에 성도가 '영적 싸움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인간적인 고난을 무릎 쓰고 복음을 전했습니까? 왜 세력을 규합해서 정치 권력으로 해결하고 사람들을 모아 거리 운동을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더 근본적인 적을 상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는 일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0:4절에 말씀합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소집 명령에 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각 나라마다,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시는 것은 영적 전쟁에 부대를 세우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나라가 청소년 자살률 1위를 비롯해서 드러난 어둠의 통계들이 무엇을 뜻합니까? 단순히 시대정신이고 윤리의식의 결여이며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는 애매한 말로 덮어버릴 것입니까? 사람의 의식 속에도 사회 제도 속에도 사탄은 죽음의 세계를 구축하려 합니다. 평등의 포장 아래 차별금지법안 발의를 계속 시도합니다. 동성혼을 합법화하는 세 개의 법률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에서 폐지 논의 중이지만 다른 시, 도에서 시행 중인 학생 인권 조례도 있습니다. 퀴어축제의 폐해도 있습니다. 몇 번 여행을 갔던 그 아름답던 자유의 도시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어두운 지옥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마약의 도시, 성 소수자를 위한다면서 음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사탄의 세력들입니다. 사탄을 노골적으로 예배하는 사탄교회도 있습니다. 우리 서울이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이 군대로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쓰시길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 기도가 무엇을 향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까. 무너져가는 이 땅에서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에 이 아쉬움을 드러내시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름받고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강력한 전투력을 지녀야 합니다. (회중 아멘) 거룩한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회중 아멘) 이웃을 위해 우셔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사이비가 너무도 많습니다. 영적인 사이비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 소소(so so) 좋은 게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큰 아멘)" 중창단의 힘찬 인도로 회중이 함께하는 '하늘 군대' 찬양이 군가처럼 울려 퍼졌다. 샌프란시스코 도심 텐더로인 지구. 두 남성이 기다란 철제 도구를 들고 길가에 세워진 낡은 파란색 승용차로 향했다. 한 명이 도구를 유리창 안으로 끼워 넣어 위아래로 흔들자, 오래된 차량의 문이 ‘딸깍’ 하고 열렸다. 이들은 차량 안에 있던 옷가지와 가방들을 챙기면서 “오늘도 한탕 건졌다”라고 자신의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를 소설 쓴다는 이재명처럼 웃었다. 대낮에 차량 도난 사건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그들을 신고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범죄가 발생한 거리 인근에는 한 픽업트럭이 유리 창문을 검은색 테이프로 꽁꽁 싸맨 채 주차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4년 넘게 거주한 한 한인 교민은 “최근엔 아예 승용차 트렁크를 열고 주차하는 사람도 많다”라며 “차량 안에 아무것도 없으니 털지 말라는 뜻”이라고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관용’의 상징으로 통한다. 2004년 동성애 부부에게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줬고 2014년엔 950달러(약 120만 원) 이하 절도는 경범죄로 취급해 기소하지 않는 법안이 통과됐다. 2019년에는 경찰과 정부 기관들의 안면인식 기술 사용을 미국 최초로 금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실리콘밸리의 다양성이란 가치를 대표하는 도시다. 도시의 태생부터 그렇다. 샌프란시스코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상륙해 스페인 땅이 됐다가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한 후 멕시코 땅이 됐다.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 이름도 가톨릭 성인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of Assisi, 1181년 또는 1182년 ~ 1226년 10월 3일)의 이름을 딴 스페인식 발음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 영토로 편입됐다. 여러 국가 소유를 거치고 미 서부의 대표 항구로 성장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는 히스패닉, 노예 해방 뒤 정착한 흑인, 아시아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온 아시아인 등 다양한 인종이 몰려들었다. 미 서부에 금광이 발견된 후 발생한 ‘골드러시’로 더 많은 사람이 방문했고 1930년대 금문교 건설에 동원된 중국인들이 대거 잔류하면서 다인종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제법 규모가 큰 재팬타운, 차이나타운이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가 1913년 흥사단을 창립한 곳도 샌프란시스코다. 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말은 ‘자유’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2차 세계 대전 후 군 내부 성 소수자들을 이곳에서 강제 전역시킨 것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는 성 소수자의 도시가 됐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2019년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내 동성애자와 성전환자, 양성애자 비율은 18% 수준이다. 10명 중 2명이 성 소수자인 셈이다.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로 불리며 전 세계 관광객과 혁신가를 불러 모으던 샌프란시스코가 마약과 범죄로 급격히 몰락하고 있다.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약으로 사망한 사람은 공식 집계된 사례만 406명에 이른다. 인구 천 명당 범죄율은 48.94건으로 미국 평균(19건)의 두 배를 훌쩍 넘는다. 코로나 이후 경기 침체로 인한 대량 해고와 홈리스 급증이 마약 사용과 범죄를 부추기고 있지만, 공권력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하고 있다. AP통신은 “샌프란시스코는 도심이 어떤 모습이면 안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라고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 19:24-25 202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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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생 목사의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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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 식탁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쌍 나란히 올려두고 감사의 감동을 기다릴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평안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기댄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믿음이 두 입술에 나란히 맴돈다.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나란히 다독일 때 한 끼가 영원과 나란하다.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 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에 내 마음이 박힌다. ‘어? 여기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이 외로운 지구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게 된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게 놓여 있는 하루의 끝. 지쳤으나 겸허하게 마주 잡은 손. 허기가 안식을 돕고 안식이 허기를 돌보는 다행스러움이 이 소박한 시를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그러나 가장 감사한 우리의 모습 아닐까. 특히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아픈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대단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란히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나란히 옆 사람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참 다행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2022년 1월 2일 경기도 용인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린 허위의 귀재 이재명 대통령 후보 앞에서 현 정권이 추진하는 ‘차별금지법안’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소 목사는 이날 ‘퍼스트가 되어라’는 설교에서 말했다고 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은 언뜻 보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어감 때문에 아주 매혹적인 법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법안을 꼼꼼히 살펴보면 독소조항이 많고 제정되면 다수가 역차별을 받게 되며 사회의 갈등과 혼란이 커지게. 됩니다. 이 후보께서 지난달(2021년 12월) 한교총에 왔을 때 국민적 합의를 강조한 바 있습니다. 교계에선 이 후보의 입장이 변함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위해 교계의 목소리를 잘 듣고 국민화합에 힘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날 아내와 동석한 허위의 귀재 이재명 후보의 말을 조선일보에서 나와 차린 '최보식의 언론'의 서범준 기자가 2022년 1월 3일 발 빠르게 전했다. “오랜만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2022년 3월 9일 실시된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여론조사의 예측과는 다르게 제5대 대통령 선거(1963년 10월 15일 직접 선거 방식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를 꺾고 당선)의 15만 6천 26표 차이 이후 24만 7천 77표라는 역대 2번째 최소 득표 차로 정치 초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결정됐다. 민주화 이후 최소 득표 차를 기록한 허위의 귀재 선거의 달인 이재명이 패배한 선거로 기록되었다. 비율로는 0.73%p 차이로 제15대 대통령 선거(기호 2번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기호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당선)의 1.53%p를 경신해 역대 최소 득표율 차를 갱신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섬기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서 잘 가겠습니다"라는 이재명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최종적으로 기호 2번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이어져 오던 보수-민주당계 정권 10년 주기설을 깨고 단 5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선거다. 문재인 정부는 6공 수립 이래 처음으로 단 5년 만에 야당에 정권을 내준 정부라는 불명예를 안은 순간이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라는 엄청난 핸디캡 속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출범한 정부가 5년 만에 심판론에 놓이고 전광훈의 광장의 외침까지 더해 정치 경험이 1년도 되지 않는 0선의 신생 정치인 윤석열에게 패한 것이라 민주당으로서는 아주 뼈아픈 역사가 되었다. 2023년 4월 3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 소강석)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이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이사장 소강석 목사, 원장 안준배 목사) 주관으로 열렸다. 서울기독대학교대학원에서 역사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문학평론가 안준배 박사가 개회사를 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을 개회하겠습니다. 1988년 3월 27일 그해 부활절 다음날 아침 40대 목사 19명이 중심으로 모여 세계성신클럽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역 중에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광장에서 이틀 동안 연인원 백만 명이 참여하는 성령 운동, 성령으로 인도하는 그런 기도성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우리 본회 34년 역사 속 세계 성령 운동사에 표지가 되시는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영훈 목사를 내세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승계하게 하셨고 또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을 정리해 이끌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를 내세워 성령 운동과 말씀전파를 통해 한국 교회를 연합하고 견인해나가는 그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세계 성령 운동 역사 34년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사역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이 2백 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테너 박주옥 백석대 교수가 언제부터인지 꽃씨가 시랑스러워 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소강석 작사 작곡 '꽃씨'에 이어 요즘 교회마다 애창하는 '은혜'를 열창했다. 대회장이고 주제 강연자인 단국대 명예문학박사 소강석 목사가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곁들인 화려한 강연을 펼쳤다. "어제 정말 바쁜 부활주일을 보내시고 쉬시는 날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격려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설교학자도 아니고 설교를 연구하는 전문교수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뛰는 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준배 목사께서 이런 강연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제를 주신 겁니다. '나는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전한다.' 제가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혹적이고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비롯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워낙 목회자가 바쁘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탈고를 했지만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목회자에게는 설교하면 강해 설교가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강해 설교 창시자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년 3월 21일 - 2017년 7월 22일)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에 출생하여 미국의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달라스 신학교, 써던 메쏘디스트 대학교에서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설교학의 대가로 2006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해 설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의 강해 설교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탐구해 오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돼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의 강해 설교 교본으로 알려진 저서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는 전 세계 목회자들이 탐독했으며 현재도 120개가 넘는 학교에서 설교학의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하면 설교의 구성 방식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3대지냐 4대지냐, 혹은 구절을 풀어 설교할 것이냐(주해설교), 그리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대부분 한국 목회자는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해 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목사이며 청교도 신학자 조엘 비키(Joel R.Beeke, 1952년- )의 저서 '설교에 관하여(Reformed Preaching)'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해 설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구성 요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청중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 설교 내용이 전달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contents)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달방식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문화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인지성향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준배 박사가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관해 말했다.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나 인격person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연극이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라는 말이 있는데 가면이라는 뜻도 있고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삼위 3person)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감독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작품 '살인의 추억' 이후 오스카상은 받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 감독의 페르소나(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선호하는 배우를 뜻한다)로 배우를 썼는데 송강호입니다. 이 배우는 감독의 모든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 연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용기 목사를 그 시대의 성령의 페르소나로 사용하셨고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소강석 목사를 성령의 페르소나로 세우셨습니다. 소 목사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설교를 하든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합니다. 저는 소 목사님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중에 '상 파울교회'에서의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들었는데 그 현장을 딱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합니다. 그다음에 2017년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대회 때 소 목사님이 주 강사로 설교를 했는데 '말씀의 근원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와 영 관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은 어느 현장, 어떤 대회, 어떤 형식의 모임이 됐든 거기에 딱 맞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2017년 12월 소 목사님과 대만에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대만 까오씽이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열차로 타이페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책을 갖고 다니는데 덩리쥔(鄧麗君, 1953년 1월 29일~1995년 5월 8일 대만 출신 가수)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안 목사님은 이선희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덩리쥔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화권이 사랑하는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이 노래를 부른 덩뤼쥔이라고 그랬죠. 그러니 소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나는 이선희야. 이선희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회중 웃음) 소 목사님은 별을 참 좋아하세요. 이선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날 저녁 때 타이페이에 5천 명 모이는 따워줘이라는 대만 최고의 교회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소 목사님이 나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 덩뤼쥔의 노래 '첨밀밀' (蜜蜜 '티엔미미' 달콤해요)' '니 샤오 더 티엔미미(笑得蜜蜜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달콤해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대만 사람들이 음악으로 대단히 감동을 했어요. 대만 사람이 사랑하는 덩뤼쥔 자기들 노래로 불러주니까 감동을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한 8천 명 수용할 수 있는 대만에서 제일 큰 허핑체육관에서 열린 성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소 목사님이 그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하모니카로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을 연주하니까 대만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니 소 목사님은 우리 대만인이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끼더라고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소 목사님은 시대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감사예배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소천하신 이후인데 그때 '고래를 위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라는 시를 인용한 설교였습니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라고 설교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회 고래였고 그 고래가 국민일보를 낳았고 또 이영훈 목사를 낳았고 또 조민재 국민일보 회장을 낳았고 또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낳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고래'라는 시적 언어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때도 이선희 노래를 불렀는데요. (회중 웃음) '그 모든 것 기적이었네. 은혜였네. 눈물이였네. 이렇게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 목사님 그 음악을 그 현장에 맞게끔 사용하면서 참, 소 목사처럼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예배에 딱 맞게끔 하면서 설립자 조용기 목사 그리고 이영훈 목사와 국민일보 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이렇게 해박하고 탁월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이 시대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유럽에도 같이 가서 성회를 지켜봤고 춘천순복음교회 성회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성령 포럼을 통해서 소 목사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잘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앞서 안준배 박사가 그 자질을 실제 목격하고 증언했다. 그렇듯 “이 세상의 광대들도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기 위해 그토록 애틋함과 애절함을 갖고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애틋함과 애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스스로 광대임을 밝히고 그것을 실제로 입증해 성공한 광대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설교관을 세 가지로 압축해 말했다.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합니다. 2.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합니다. 3. 성경을 이야기로 전합니다." 유럽 역사에는 다른 민족과 접촉·교류·전쟁을 통해 ‘우리 민족’ ‘우리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이 언어다. 오늘날 영어에는 영국을 침략했던 로마·게르만·바이킹이 남긴 단어와 영국이 침략·점령했던 민족과 국가에서 묻혀온 단어가 숱하게 많다. 언어 흔적은 나무의 나이테와 같아서 아무리 빨고 헹궈도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Society)·경제(Economy)·자유(Liberty)·개인(individual)·종교(religion)·존재(being)·권리(right)·그(he)·그녀(sh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 모두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인들이 낯선 영어·네덜란드어·독일어와 씨름하며 한자어를 사용해 번역한 것이다. 법학·정치학·경제학·수학·물리학·화학·생물학·지질학 등 근대 과학 용어 거의 전부에 일본 손때가 묻어있다. 일본 농기구(農器具) 이름에는 한반도 언어의 파편들이 남아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 선진(先進) 벼농사 방법과 농기구가 한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성숙(成熟)이란 ‘나’와 ‘남’ ‘우리’와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발전의 한 단계다. ‘남’과 ‘그들’은 ‘나’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은 나에게 득(得)이 된다. 상대를 부정확하게 아는 지도자는 지형(地形)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낙하산병(落下傘兵)과 같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도자의 성숙과 직결돼 있다. ‘기억의 감옥’에 갇히면 ‘기억의 포로(捕虜)’가 되기 십상이다. 모든 통치자 턱 밑 어딘가에는 비늘이 거꾸로 난 곳이 있었다. 왕조 시대에는 이걸 역린(逆鱗 용의 몸에 붙어 있는 81개 비늘들 중 딱 하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 있다는 비늘)이라 불렀고, 건드리면 자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했다. 역린이란 단어의 의미는 많이 확장되어 윗사람의 약점(아킬레스건, 콤플렉스, 흑역사) 혹은 윗사람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권한을 뜻한다. 그래서 통치자 비서들도 정보기관 보고도 믿고 의지해 온 평생 선배 원로들도 언급을 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역린이다. 대형 교회의 경우에도 교회 초창기의 목사를 기억하는 교인은 수군거리는데 교만해진 당회장 귀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교회와 교단과 교계의 힘 있는 자가 자신에게 서릿발처럼 대하면 그날부터 교회와 교단과 교계가 달라질 것이다. 교인들이 기도하고 응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 4:12-14 2023-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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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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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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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이고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 12월 21일 ~ 1886년 5월 23일)의 "모든 시대는 신(GOD)에게 이어진다"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의 기원전 404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아테네의 융성과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경과를 기록한 이 책은 전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후의 대전으로 기원전 405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해권을 잃어 곡물 수입과 해외 영토 연락이 끊겨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총회와 총신에 갑질하다 자멸한 자처럼 아테네는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문정송 장로의 기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간구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 많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저희를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이곳 광신대학교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우리들의 입술로 죄짓지 않도록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주중앙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 섬기며 한기승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빌라델피아 교회의 본을 받아 우리의 가지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의 예비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개혁 정통 보수 신앙으로 부활 승리 신앙으로 광주중앙교회를 아름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임을 고백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바른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케 하시고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님께 영력, 지력, 체력을 더하셔서 영육이 강건함으로 목양,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사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살아나셨다. 주 예수 부활하셨다. (회중 아멘)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이 중대한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 승리 신앙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성령 임재를 체험하는 삶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중 아멘) 솔로몬 왕에게 주셨던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셔서 개혁 정통 보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중 아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성가대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마귀 세력이 떠나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나는 승리의 찬양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요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큰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성가대가 문정송 장로의 기도대로 "예수 다시 사셨네"를 찬양했다. 사회자 김기택 목사가 요한복음 5:24-29 봉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기승 목사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회중 아멘)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저와 여러분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아닌가요. (회중 아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아멘인가요. (회중 아멘) 이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문 28절,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회중 아멘)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교주가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자리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지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회중 아멘)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중 아멘)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확신을 믿습니까. (회중 아멘)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큰 아멘)“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4월 부활의 봄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날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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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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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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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목사 목회 서신
- 지성(intellect)과 지적 능력(intelligence)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사법시험에 일찍 합격하는 것은 지적 능력을 보장할지언정 지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지성은 어떤 사안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일반화해서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틀 속에서 한발 앞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지성보다 직관(intuition)을 중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열정적인 기독교인과 실용적인 기업가 중에는 직관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최근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보여줬듯 그것이 반지성주의와 연결되면 큰 해악이 될 수 있다. 명성교회는 지난 7월 21일 법원의 석명준비 명령을 따르기 위한 공동의회 실시에 앞서 8월 21일 저녁 7시 주일 저녁 찬양 예배를 드렸다. 성실한 연구를 통한 지성과 자신의 경건한 기도와 김삼환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영성을 갖춘 김하나 목사의 설교 본문은 사사기 10:10-16이었다. 설교 제목은 ‘마음을 돌이키심이 은혜입니다’였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무조건적인 회개였다.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15절) 이는 범죄한 것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심판까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다. 기도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이킨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신들을 제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행동까지 보였다(16절). 이날 저녁 예배는 평소보다 많은 6천4백여 명이 출석하여 본당을 가득 채웠다. 본당에 들어오지 못한 성도들은 부속 성전과 밖에서 화면으로 예배에 참여했다. 김하나 목사는 설교 초반에 지난 3년 전에 모인 숫자와 같을 정도로 출석하여 성도들이 공동의회에 대한 관심이 대단함을 언급했다. 예배 후 지난 7월 18일 서울고등법원 석명준비 명령(변론기일 전에 "재판부가 원고 또는 피고에게 이러이러한 사항의 설명을 요구할 예정이니 미리 준비하라."는 명령)에 따라 공동의회를 열었다. 유경종 목사 대리 당회장의 인도로 공동의회가 진행되었는데 사전 준비에 따라 바코드로 입장하여 교구별로 질서 있게 투표에 참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 김하나 목사 재청빙 공동의회 무기명 투표 결과 6,381명 중 6,119명 98.8% 찬성 절대다수로 통과됐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일반화해서 볼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더 큰 틀 속에서 한발 앞서 신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김하나 목사가 지난 8월 21일에 열린 공동의회에 참여한 교인들과 기도해준 교인들과 심지어 반대한 교인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도 바울의 디모데서 같은 목회 서신을 보냈다. 사랑하는 명성교회 교우님들께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아무래도 예배 중에 긴 인사를 드리는 게 적절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편지로 감사의 인사뿐만 아니라 다짐의 말씀까지 짧게 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 저녁 예배 후에 있었던 공동의회를 잘 마치게 하신 선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리며 기도로 준비해주시고 은혜로 감당해 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지만 특별히 성도님들께서 공동의회에 마음 다해 참여해 주시고 또 부족한 저를 넉넉하게 받아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덕분에 ‘공동의회’가 아니라 ‘공동은혜’가 되었습니다. 사실 공동의회를 향한 큰 우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조심스러웠던 이 일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님들의 진실 된 기도 덕분에 또 다른 감사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예배당 입장조차 쉽지 않았던 긴 줄을 마다하지 않고 예배를 드리시고 결코, 짧지 않았던 공동의회를 끝까지 지켜주시고 참여해 주셔서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의회를 준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덕과 품격을 보여주시길 간곡히 말씀드렸을 때 한마음으로 준비해주시고 임해 주신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지난 5년을 돌아보면 저는 스스로 70점을 주기가 망설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님들이 보여주신 귀한 마음은 단지 담임목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이라고 느꼈습니다. 한 개인을 향한 지지가 아니라 앞으로 달려갈 명성교회의 미래를 향한 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욱 겸허하고 낮은 마음으로 힘을 다해 교회와 맡겨주신 사명과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의 소중한 양 떼를 섬기겠습니다. 또한, 반대하신 분들도 우리 교회의 소중한 교우이심을 기억하며 부족한 부분을 반성하고 열심히 목회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명성교회가 앞으로 지금까지 해온 수많은 복음과 섬김의 사역들을 더욱 순수하고 유익하게 세워가는 일에 더욱 힘쓰겠습니다. 성도님들의 귀한 기도와 참여 그리고 하나 됨을 위한 헌신에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평안과 은혜가 모든 가정과 하시는 일과 일터 위에 모든 복된 삶들 가운데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담임목사 김하나 드림. 2022-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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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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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목사 목회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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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목사 종말론
-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조금씩 돕는 게 최선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보아야 한다. 소나기 멎자 찬송 소리 젖은 교회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기도 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찬송 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1999년 김제에서 시작된 또 한여름 2022년 또 이렇게 지나 보내는가. 그는 생각한다. 누구도 세계 최고의 지도자,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목사로서 번듯한 기록 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한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한때의 세상은 소낙비에 듬뿍 젖어 있고 다음 세상은 찬송 소리에 담뿍 물들어 있을 것이다. 이후의 세상은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채워질까. 하나님의 다정한 자연의 원리들이 있어서 이 세상을 차례차례 채우고 사라진다. 그 흐름을 고요히 보고 있는 목사는 ‘그래, 너희가 또 찾아왔구나’ 미소 짓는다. 목사의 창밖에서 만나는 비와 더위는 꼭 와야만 해서 다시 온 것들이다. 잘 왔다가 잘 가기를, 내년에 우리 또 만나기를, 그리운 아버지 김정호 목사님을 꿈에서 만나듯... 그가 부임한 교회는 1910년 7월 7일 김제 옥산리에서 옥산교회로 출발해 1925년 김제읍교회, 1929년에 김제중앙교회로 각각 명칭을 변경했었다. 그가 부임 당시 김제시 인구는 15만이었는데 2022년 7월 지금은 8만 선에 머물고 있다. 2022년 7월 17일 은퇴하는 그는 재직 기간 장례만 600건을 치렀다고 한다. 부임한 뒤 김춘식 목사와 어려울 때 함께한 800여 교인들은 예배에 대한 강한 열정과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분립으로 교회 건축을 위해 잠시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예배는 뜨겁게 이어졌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천막 하나를 치고 모인 교인이 800여 명이었다. 이러한 교인들의 예배에 대한 사모와 열정은 담임인 김춘식 목사의 목회에서 힘을 얻는다. 김 목사는 남다른 목회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한다. “목회자 자신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만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전하고 살아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카리스마는 목회자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말씀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려 하고 있다.” 그런 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은 불평 하나 없이 기쁘게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이 새로이 완공되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했다. 2009년 9월 착공하여 2010년 7월 입당한 지금의 예배당은 강도 7의 지진에도 견디는 내진설계로 시공된 너른 주차장과 부속 건물을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그는 20년째 교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목회를 했다. 교회 분열의 아픔을 딛고 새 예배당을 완공한 다음 해인 2011년 4월 7일 미국 뉴욕의 기독 언론 '아멘넷 뉴스'(USAamen.net)는 김춘식 목사의 부흥회 초청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퀸즈장로교회(장영춘 목사) 춘계부흥회의 강사가 화제가 됐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설교가 이야기의 기교나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예화 없이 진솔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2011년 4월 7일(목)부터 4일간 계속 될 퀸즈장로교회 춘계부흥회는 뉴욕 교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춘식(김제중앙장로교회)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첫날 김 목사는 요즘같이 어려운 난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목사는 누가복음 3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례 요한이 외치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파워게임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외치는 소리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의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베로 가이사가 누구인가.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또한 본디오 빌라도는. 모두 권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정신병자, 이기주의자,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우민정책을 쓰며 그들을 음란과 타락으로 몰아넣었던 인물들입니다. 바닷물의 소금은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3%가 온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은 절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왜 우리는 진실하지 못할까요. 적어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란 구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을 들어 광야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광야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개입하시고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아멘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완성되어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자유함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혹시 위험한 회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위선적인 회개를 돌아봅시다. 한순간에 지푸라기로 변하고 마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회개할 싸인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김 목사는 한 시간 동안 회개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코로나가 ‘심각한 병’에서 ‘일상의 병’으로 급수가 하향된 2022년 7월 3일 11시 김제 중앙장로교회는 맥추감사절예배를 드렸다. 맥추감사절은 유월절이 끝난후 7주가 끝난 50일째 되는 날 곡식을 처음 거두어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성도들이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찬송 후 이규수 장로가 대표기도를 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거룩하고 복된 날, 주의 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 은혜 속에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오늘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해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도 한 제단 한 제단 쌓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은 한 주간 살면서 주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오늘도 주님의 사자(使者) 목사님 단 위에 세워주셨사오니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성령으로 붙잡아 주시어 이 시간 능력의 말씀을 증거 하실 때 우리 눈이 열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귀가 열려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코로나로 인해 우리 주위를 떠난 자들이 하루속히 주의 전으로 나와 주님 앞에서 찬송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신령과 진정과 찬양으로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중앙의 일꾼들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우리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연로하신 분들 맑은 영도 주시고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원치 않는 병으로 치료 중인 우리 성도들을 일일이 기억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사의 손을 빌어 깨끗하게 치료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임마누엘 찬양대 세우시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저들이 부르는 찬양 기쁘시게 받으실 줄 믿사오며 (회중 아멘)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임마누엘 찬양 대의 기도 송이 울렸다. 우리의 기도 들어주시어 우리의 음성 영광되게 하소서 아멘 김춘식 목사가 성경을 봉독했다. “창세기 6장 5절로 8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멘. 찬양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임마누엘 찬양대가 단 앞으로 나와 정렬하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찬양했다. 김춘식 목사가 설교단에 서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믿음의 손을 가지고 은혜의 하나님 앞에 오늘도 헌금을 드렸사오니 마음의 문 열리게 하시고 진리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말씀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능력이 되게 하시고 (회중 아멘) 복이 되게 하시고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영생을 믿사오며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단이 여인의 후손 발뒤꿈치를 물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신 구주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사단의 무리를 괴롭히는 세력임을 믿고 믿음의 경고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창세기 4장 5장 6장 7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맥추감사절 말씀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을 지나가는 동안 가정에서 첫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비참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지만 불순종함으로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이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을 통해 인생이 점점 악해져 가는 모습을 창세기 4장 5장 6장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버린 인생들에게 충격과 부패와 성적 타락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4장 5장에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타락하고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런 지혜로운 일들을 하면서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들어 삽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에 가서 오래 산 사람들 얘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800년을 살고 이제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고 969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800년 900년 969세를 살았다고 하니 근 천 년을 산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 년을 살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사람들이 천 년을 살았지만 죽지 않은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장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천 년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어디 있느냐.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리고 이제 창세기 6장으로 넘어와서 보면 하나님의 인간 죄에 대한 대처방법은 크게 첫째는 심판이고 둘째는 은혜입니다. 창세기 6장 11절에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말씀합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속성을 지니고 사는 인생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회중 아멘) 이렇게 부패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을 때 대표적인 것이 성적 문란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말씀합니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과 아벨을 대신해 태어난 셋의 후손을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가능성은 천사들입니다. 두번 째 가능성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가정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녀들이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게 될 때도 세상 사람들처럼 사회 신분이나 외모나 세상 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의 특징은 4절에 나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들은 용사였고 세상 명성이 높았습니다. 네피림은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입니다.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남을 죄에 빠지게 하는 영향을 가진 자들입니다. 크고 강하고 소문났을지라도 그 은사를 가지고 죄를 짓게 한다면 파멸입니다. 그들의 대표적 특징은 폭력과 성적 문란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폭력과 부패와 성적 타락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건강하고 세상 물질이 만족스러울지라도 이것으로 죄를 지으면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것보다 본질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날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데 하나님을 속이고 불순종하고 세상과 짝하고 사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부패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신앙고백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행복하지 못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감당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종말은 두 가지입니다. 내 개인의 종말이 오고 인생 최후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고 말씀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고 자기들과 상관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심판은 있습니다.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한순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월은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심판은 나와 상관없고 죽음은 나랑 상관없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종말이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밤에 그 영혼을 거두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긴급합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심판은 긴급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짐승들이 임종과 종말이 가까운 것을 우리보다 더 먼저 알고 피합니다. 신문에서 보면 어디 화산이 터진다든지 지진이 난다든지 하면 쥐가 도망가고 짐승들이 달아납니다. 개미들이 이동을 합니다. 노아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들과 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들도 다 심판이 있는데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짐승들은 구원받은 새들은 노아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짐승도 심판의 때를 알고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남은 세계에 불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6절과 7절에 '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심판의 때에 교회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물이 넘침으로 멸망했다'라는 말씀은 노아의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이 넘침으로 다 멸망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변절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하나님이 보존해 주시는데 어렵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데 예수 믿는데 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돼지를 키워 살찌우는 것이 도살하기 위한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서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잘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이제 침공했습니다. 푸틴이 전세가 불리해 버튼만 누르면 핵전쟁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에서 너도 나도 핵을 터뜨리면 이 세상을 수천 번 폭파하고 불태워버리고 남을 폭탄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보존하셨다고 하는데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오신다면 아멘 할렐루야 찬미하며 주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한 손에 심판이 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제일 처음 쓰는 데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심판받고 멸망하는데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 멸망하는데 그중에서 노아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75억 인구(세계 인구는 특정한 시간에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전체 수)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중 아멘) 또 놀라운 사실은 7장 16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아' 넣어주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와 정결한 짐승들과 부정한 짐승들이 일곱 쌍씩 다 노아의 방주로 싹 들어가게 되니까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닫힌 문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은 하나님이 다 보존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나같이 연약하고 나같이 부족하고 나같이 부끄러움이 많은데 하나님이 날 구원해 주실까 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하나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약속입니다. 구원 받은 자녀인 것을 확신하십시요. (회중 아멘) 목사님. 예수 믿고 살아가는데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아들딸은 왜 이 모양입니까.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은 왜 이 모양입니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짐승이 비가 오는 기간만 6개월이고 다 마르게 될 때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방주 안에서 아주 많은 짐승들과 노아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노아도 하나님이 방주 속의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지 버리신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는데 답답하다고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차츰차츰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의 바람(루아흐)이라는 말은 영(spirit)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이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남편을 믿습니까. 아내를 믿습니까. 이 세상 정치인들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합니다. 홍수가 다 지나간 다음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새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초청해서 다시 번성하고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한 손에는 심판이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니 들어갔고 나오라니 나왔습니다. 이게 순종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리라 하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긴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노아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이 무어라고 한다 할지라도 간섭할 것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듣기 거북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회중 아멘) 세상 여론이 어떻고 신문이 어떻고 티브이가 어떻고 세상이 다 우리를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회중 아멘) 한국 정통 초대 장로교회의 신학을 완성하신 박형용 박사는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을 향해 세우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두 손을 땅에 대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세상 따라 살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조롱받고 멸시당할 때 노아는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죽음을 뚫고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갔을 때 비가 위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솟아나고 온 세상 천지가 높은 산꼭대기까지 다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방주에 들어가 있는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죽음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때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방주 안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천국 가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교회 일원 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 교회 떠나면 죽음입니다. 구원의 방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파멸입니다. 사는 길은 주님과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마음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모든 심판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 속에서 나도 죽은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심판에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베드로는 이 심판에 대해 노아의 홍수를 우리가 세례받는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19-20) 죽음이 다 휩쓸어 갈 때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과 그 부인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죄가 다 물에 잠겨버리고 씻음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노아가 창세기 8장 18절에서 20절에 보면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경배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내장을 꺼내고 물로 깨끗이 씻어서 불로 태워서 하나도 남김없이 향기로운 냄새의 연기로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은혜를 입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에 가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말씀합니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의 행사로 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렸던 노아처럼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진심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 감격하면서 이 맥추감사절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는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심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죽음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 진리를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스퇴르유업과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세웠던 최명재(崔明在·95) 민사고 이사장이 2022년 6월 26일 오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이사장은 1927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났다. 만경보통학교, 전주북중을 나와 경성경제전문학교(현 서울대 경영대)를 중퇴했다. 상업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더 벌겠다는 각오로 은행도 그만두고 택시 운전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얻은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운수회사(성진운수)를 세웠고, 1970년대엔 물류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모았다. 60세 되던 1987년 강원 횡성에 파스퇴르유업을 설립하고, ‘저온살균 우유’를 앞세워 기존 우유 업계를 공격하는 직설적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으며 급성장했다. 1996년에는 횡성 파스퇴르유업 공장 옆 127만2700㎡(38만5000평) 땅에 민사고를 세웠다. ‘민족 주체성 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지도자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목표였다. 1970년대 영국 이튼스쿨을 방문했을 때 넬슨 제독 전승 기념행사를 보면서 “한국에는 넬슨보다 훌륭한 이순신 장군이 있는데 이튼 같은 학교는 없다”라고 생각하며 가진 필생의 꿈을 실천에 옮겼다. 최 이사장이 파스퇴르유업 수익을 매년 30억~50억 원 민사고에 투자하면서 우수 학생을 뽑아 기숙사비를 포함, 교육비를 받지 않고 운영했다. 모두 천억 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라남도 장흥이 고향인 김춘식 목사는 2010년 7월 김제에 중앙장로교회를 세웠다. 왜냐하면 김춘식 목사가 지난 1999년 7월 16일 미국에서 전라북도 김제시의 김제중앙교회로 부임한 뒤 분쟁을 겪고 분리의 아픔을 이기고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2022년 7윌 19일 김제를 떠나는 김춘식 목사는 김제중앙교회를 거쳐 중앙장로교회를 통해 20년 목회 여정에 너른 곡창 김제에 새로운 건실한 예배당만 아니라 말씀 중심의 설교로 합동 교단에 드문 영적 교회를 세우는 업적을 세웠다.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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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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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 목사 종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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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의 설교관
- 맑은 빛 고운 햇살 소복소복 담아 두고 별들과 나눈 얘기 강물 되어 흐른다. 총신 숲 비어서 풍요롭다. 나목(裸木) 위의 까치집 돌아올 주인을 기다린다. 새해가 왔건만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포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병과 함께 살아야 하나. 그러나 양상만 달랐을 뿐 인류의 역사는 병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병보다 무서운 것이 절망이라는 정신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해는 이렇게 맞을 일이다. 면도 알러지가 있어 이따금 수염을 길러야 하는 송태근 목사는 ‘맑은 빛 고운 말씀’을 ‘소복소복 담아 두자’고 하는 믿음의 전파자다. 하나님과 얘기를 나누면 헐벗은 나무의 텅 빈 까치집도 그의 성근 수염처럼 풍요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다’라고 노래했다. 총신대 이사로 헌신을 아끼지 않는 송태근 목사는 이 겨울이 가면 새끼를 데리고 둥지를 찾아올 까치를 미리 보는 예지를 지니고 있다. 총신의 봄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치유의 새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헌신하고 견디어낸 자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본문 중심의 강해설교를 하는 송태근의 설교는 폭이 넓고 속이 깊다. 그는 신봉하는 본문 중심 강해설교 틀에다 원숙한 믿음의 관조(觀照)로 가다듬은 말씀을 심한 아픔을 견딘 삼일교회와 치유를 바라는 전국 교회에 전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강해 설교자가 성서 권위를 힘입어 자기 우상화를 시도하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강해 설교자의 권위는 그것을 청중을 섬길 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위대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진리를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으로 담아낼 때 강해설교의 진수가 밝히 보일 것입니다. 송태근 목사는 계시록 8:3-5에 의지해 외친다. 성도의 기도와 함께 올라간 향이, 제단의 기도가 제단의 불과 함께 땅에 쏟아집니다. 이것은 심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응답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둠에 잠들어가는 이 시대를 기도의 부글부글 끓는... 그래서 저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고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을 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시대의 전환점에 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의 메시지 소망대로 설교자가 청중을 섬기는 한해가 되기를···. 그리고 사회와 총회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미사일을 쏘아대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북한 앞에서 ‘멸공(滅共)’이란 구호가 문제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사라지기를···.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와 총회에 성경의 정의와 신앙의 안전이 이뤄지기를···.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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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근의 설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