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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봉생 목사의 간구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선언한 지 1년이 지났다. 1억2000만 명이 넘는 감염자와 270만 명의 사망자,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내고 있다. 큰 위기를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혁신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유엔을 창설했다.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자유무역, 미 달러 중심 통화 체제, 저개발국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낳은 ‘브레턴우즈 체제’도 고안해 냈다. 대한민국이 번영한 것은 이 체제에 올라탄 덕이고 북한이 허덕이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탓이다. 이 험난한 시대 2021년 9월 2일 오후 2시 익산 북일교회에서 열린 호남 중부지역 장로회협의회(회장 원태윤 장로) 장로 세미나에서 서대문교회 장봉생 목사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제목의 설교로 우리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부회장 조길연 장로 기도 후 부회장 송하정 장로가 야고보서 5:16-18 성경을 봉독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장봉생 목사가 강단에 섰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설교를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소리를 듣곤합니다. 주일 설교 여섯 번 하고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제 아내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여섯 번 설교 듣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것은 부담입니다. 붙들고 기도해야 하고 지녀야 하는 확신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의인이냐. 나도 의인이냐. 물론 '칭의' 하나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에 신분상 의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 의인이냐' 물으실 때는 괜히 생각이 많아집니다. 간구,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구해야 간구입니까. 지금까지 내 기도의 응답을 보니 수많은 시간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받은 게 몇 개나 될까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비가 안 내렸는데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렸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8장에 아무리 찾아봐도 엘리야가 비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비오기를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일곱 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해서 안 오던 비가 내리게 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나 우리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기도하면 비가 내리고 누구는 안 내립니까. 시나이반도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십니다. 그런 엘리야도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 은혜로 의인 됐다 하는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데 그거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기도했길래 무슨 말이었길래 무엇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에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서대문교회가 72년 됐는데 황해도 신천의 깡패 출신 신유 부흥사 김익두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 넘어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종로 바닥에서 만나 그때 시작한 교회가 지금 서대문교회입니다. 제가 20년 전 부임했을 때 1세대 어르신 몇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늘 얘기하시는 게 목사는 김익두같이 해야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 물어보니까 손만 대면 병이 나았대요. 기도만 하면 사람들이 푹푹 쓰러졌대요. 그래서 제가 아이고 이 교회 잘못 왔구나... (회중 웃음) 어쩌다 내가 걸려 가지고 나는 이제 죽었다 생각했습니다. 옛날 어른들과 목사님들은 그랬어요.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났어요. ... 제가 전도사 때 학생들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과 18장을 설교한 다음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회 마당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나무를 모아 오라고 했습니다. 담이 없는 교회 마당이라 장작을 쌓아 놓고 얘들을 불러모으고 ‘지금부터 기도해서 불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도 불을 내렸는데 왜 지금 불이 안 내리겠느냐. 사도행전에 말씀하기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했다. 그렇듯 사도행전 역사는 지금도 일어난다,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회중을 보며) 장로님들 불이 내렸겠습니까 안 내렸겠습니까.” 앞자리의 원태윤 장로가 대답했다. “내렸습니다. (회중 웃음)” “(원태윤 장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그러니까 회장을 하시지. 여러분 기도하면 불이 내린다. 그런데 불이 안 내렸어요. 아무리 한 시간 정도 비지땀 흘리며 애들 다 동원해 기도하는데도 불이 안 내리니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얘들이 ’저 전도사 영력도 없는 게 괜히 폼만 잡고 말이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보따리 싸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얘들한테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때가 아닌가 보다. 나중에 한 번 더 하자. 그런데요. 얘들이 일어나지를 않는 겁니다. 불이 내렸어요. 그 장작더미에 불이 내린 게 아니라 아이들의 가슴에 불이 내렸습니다. (회중 아멘) 얘들이 기도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인데도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 아이들을 통해 큰 부흥을 하도록 경험을 시켜 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우리 생애에 내 젊은 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감사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하나님 앞에 갈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세월을 아끼라 하셨는데 이때에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과 내 기도가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의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장로님들 되시면 (회중 아멘) 우리 교회들이 다시 믿음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회중 아멘) 불붙이는 사람, 비 내리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오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다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두 손 들고 기도하십시다.” 찬양 후 장봉생 목사의 인도로 ’주여 삼창‘을 외친 뒤 불을 받은 장로들의 뜨거운 통성 기도가 이어졌다. 훗날 총회에 모인 총대들도 이런 불이 내리는 기도가 그가 선 단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은 소망의 불이 타올랐다.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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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1
  • 시인 소강석 의 겨울
    늦게 자신의 정체성 위해 시를 쓰기 시작1995년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 젊음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지나가 결론은 살아 있는 순간 하나님 사랑해야 이선희 ‘영원한 건 없으니까’ 노래하지만 영원한 게 있어 주님을 사랑하는 게 영원 시 시인 소강석 목사는 사실 사도 바울 가장 많이 닮고 그 말씀 가장 많이 실천하는 목회자 세계 여러 곳의 테러와 제천의 재난이 겹치는 이 겨울 사랑과 죽음과 가난의 진솔한 고백을 듣고 나면 지나온 나날은 먹먹하고 남은 나날은 막막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항상 늙은 기분으로 살았을까. 마흔에도 그랬고 서른에도 그랬다. 그게 우리가 살아본 가장 많은 나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가 늘 전도사이거나 목사라서 그랬을까. 그런데 지금은 우리가 살아갈 가장 적은 나이라는 생각이 드는 간명한 이치. 우리 믿음은 아주 곧고 생각 또한 그래서(아마도). 예수의 마지막 고행처럼 우리의 어떤 하루는 우리의 삶 모두를 삼키고 흔들겠지만, 예수 탄생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처럼 우리 인생의 매일매일은 단단하게 지속될 것이다. 사실은 나에게도 작은 트리가 있다. 거실 테이블 한쪽에 놓아두고 연말이면 불빛이 반짝이게 켜둔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의 사랑을 느꼈다면 나이든 세월의 믿음은 잠들었고 이제 트리의 불빛도 소등할 시간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이대로 떠나도 괜찮은가 우리 목사들 모두 자문할 날이 왔다. 이는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물음이며 그것이 크리스마스 기사가 담긴 성경의 책장을 덮은 직후라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작년에 자란 믿음 새로 자란 믿음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믿음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믿음. 창세 전 하나님 선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믿음의 모습. 우리 믿음의 존재들은 누구나 새로 자라는 믿음으로 하나님 허락하신 한생을 받아 살고 간다. 다른 생의 존재 유무는 과학이나 학문으로는 알 길이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산 믿음들 사이에 작년에 자란 믿음이 더불어 산다. 믿음의 세계에서 금생의 믿음은 전생의 믿음을 알아보고 내생의 삶을 확신한다. 믿음이 있는데도 아득하지만 창세(創世) 전의 하나님 선택을 못 본다면 그건 믿음이 부족한 거다. 믿음은 안 보이는 것에 대한 묘사이고 묘사란 보이는 것에 대한 상상이다. 다시 말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그래서 선진들이 이로써 전생과 내생의 증거를 얻었다. 과학이나 학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닌 까닭이다. 1985년 1월 25일 밤 지금 숙명여대 국문과 교수이고 작가(‘간사지 이야기’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낙타의 겨울’)인 용산고 후배 최시한이 쓴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내 나이 서른다섯 딸 셋을 키울 때였다. 지난 주 옛 메모를 정리하다 발견한 400자 세로 원고지에 만년필로 걸어가듯 또박또박 쓴 그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영배 형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의 짧은 만남은 이제까지의 형과의 만남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많이 겸손해졌다”는 형님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저는 새겨들었습니다. 조금 차갑고 건방진 제게 형이 보여 주신 사랑 때문에 저는 그 몇 년간의 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은 정말 어떤 결단에 이르는 과도기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어떤 결단에 이르는 과도기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정말로 값진 과도기가 되게 되었습니다. 형님의 그 ‘겸손한’ 마음의 상태와 그에 따른 결단 때문에. Jung과 그 제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지녔던 힘의 원천 그러나 다시 찾고자 하는(아니면 처음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힘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삶에의 경건함’입니다. 자기의 마음과 세계의 모습에서 진솔하고 끈기 있게 눈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형님의 말씀으로 하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그것이 가능한 길을 찾아 실현하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그러는 행동의 최선의 모습은 경건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형님의 지닌 어떤 거칠음과는 가까워지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실상 저의 속 좁고 고지식함 때문이라는 게 맞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지난 만남에서는 형님에게서 그런 면을 보기 어려워 마음이 기뻤습니다. 형님은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이신 것 같고 이루어 놓은 것을 새삼 제대로 보게 되실 수 있게 된 것 같고 해야 할 일과 만나신 것 같았습니다.TV와의 인터뷰에서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던 이들은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시도 자기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모든 상황을 안나푸르나 정복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TV에서 미국에서 성공한 사진작가는 자신의 성공비결은 “다만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며 그것을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공이 따랐는데 수십 년이 금방 지난 것 같다는 것입니다. ...형님 저는 쓰기 위해서 지금 자꾸 뒤척이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그런 뒤척임을 한 단계 끝내신 듯 싶습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끊임없는 노을 속에서 듣지 못하던 것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자기가 정말 투명한 존재이며 ‘하나’인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면 저의 글쓰기와 형님의 공부 또는 믿음이 무에 다르겠습니까. 마음이 고동치며 흐릅니다. 시간이 멀리 가버립니다. 간절한 무엇이 칼 같은 상처를 내며 가슴으로 지나갑니다. 이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붙들기 위해 모든 것을 집중해야 합니다. 일순간 지나가버린 그것을 재생시키고 아주 내가 그것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좋아서 무엇을 선택하지만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할 때 우리는 그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진리는 곧 사람이요 그게 삶 자체입니다.형님. 형님의 거칠음이 그러한 삶을 보여 주는 자의 거칠음 참으로 놀랍고 경배스러운 거칠음이 될 날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을 믿습니다. 또한 그 때에는 저도 형님의 뒤나 가까운 옆에 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985. 1. 25. 밤 시한 올림. 후배 최시한 박사의 글의 바람과 달리 나는 그의 한참 뒤에 서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성공비결은 “다만 열심히 쉬지 않고 일하며 그것을 생활화하는 것”이라고 말을 전한 후배의 편지에서처럼 맨땅에 머리를 부딪고 일어선 소강석 목사는 교인들을 감동의 눈시울을 붉게 하고 하나님의 축복에 겨워 교회에 헌신하게 한다. 그리고 목회생태계를 위해 시인 소강석 목사 자신도 몸과 마음을 바쳐 높고 낮은 정치인들을 설득한다. 2017년 11월 26일 12시 새에덴교회 프라미스홀 3부 예배 사회자 박주옥 목사가 설교본문 디모데후서 4:19-22 통독을 알렸다. 본당을 가득 채운 성도가 한 목소리로 성경을 읽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이어서 호산나 찬양대(지휘 류형길)가 ‘본향을 향하네’(김희보 작사 김두완 작곡)를 여러 성부로 나뉘어 서로 화성을 이루면서 다른 선율로 궁궐처럼 웅장한 듯 폐허처럼 쓸쓸한 듯 노래를 했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 때 환란의 궂은 비바람 모질게 불어도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여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하나 그 괴롬 인하여 천국 보이고 이 세상 지나는 동안 괴로움이 심히 심하나늘 항상 못 부르나 은혜로 이끄시네. 생명 강 맑은 물가에 백화가 피고 흰옷을 입은 천사 찬송가 부르실 때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아쓰겠네. 이 세상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 인생의 거친 들에서 하룻밤 머물고천국의 순례자 본향을 향하네 본향을 향하네. 시인 소강석 목사가 설교단에 서 ‘저희 교회 예배 드림을 감사합니다. 집중적으로 말씀을 받는 그런 날이 되게 해 주소서. 성령 충만한 은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기도한 후 ‘겨울이 오기 전에’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미국의 매카트니 목사님처럼 11월 마지막 주간이 되면 저는 어김없이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말씀을 증거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11월 넷째 주가 돼서 겨울이 오기 전에 참 세월 빠르죠. 여러분 벌써 외투를 입고 왔잖아요. 우리 교회도 겨울 준비를 위해 월동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데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오라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너는 겨울 전에 오라는 말씀은 인생의 컴컴한 영적인 겨울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 디모데에게 월동준비를 위해 겨울 전에 오라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1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회중 봉독) 이 말씀은 실제 겨울을 가리키지만 인생의 캄캄한 영적인 겨울을 두고 썼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는 순교의 때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6입니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회중 봉독) 바울에게만 죽음의 계절이 온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죽음의 계절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서 오늘 본문은 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우리는 죽음의 종착역을 향해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허무를 노래했습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왕국의 아침을 열고 그 절정을 누린 사람입니다. 절대권력 절대쾌락 절대영광을 누린 사람입니다. 부인 몇 명 거느리기도 힘든데 천 명을 거느렸습니다.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한 두 명 정도는 괜찮지 않겠나 하는 생각은 해봅니다. 그런데 천 명이면 가정예배만 드리려고 해도 얼마나 힘들겠습니까(회중 웃음)... 그런데 그가 행복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전도서 1:2 이하 시작.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젊음도 쾌락도 한때이고 부귀영화도 한때입니다. 모든 게 금세 지나갑니다... 베드로는 우리 인생을 풀과 꽃에 비유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24 보세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우리 인생에도 영광이라는 꽃이 있습니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집니다. 된서리 맞으면 다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만인이 찬양하고 높일지라도 그 풀과 그 꽃은 반드시 시들고 떨어집니다. 옛날에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했는데 지금은 권불이년(權不二年)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이 얼마나 무상합니까. 죽음 앞에 서면 내가 지금까지 무슨 차를 타고 왔나 하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슨 학교를 나왔나 사회적 지위나 위치 다 의미가 없습니다. 이게 다 잠간 보이다 사라지는 안개입니다. 모두 죽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인생을 마치게 되는 거죠. 이게 인생의 겨울입니다. 이 인생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인생은 얼마나 헛됩니까. 그러나 참 다행스럽게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자는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죽음은 천국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천국의 계단입니다. 죽음의 계단이. 최지우의 ‘천국의 계단’(2003년 12월 3일부터 2004년 2월 5일까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는 네 남녀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을 완성하는 이야기를 그린 SBS 드라마)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최지우(김지수 역)가 권상우(차승주 역)에게 (소 목사 최지우의 목소리와 몸짓을 흉내 내며) ‘오빠~’ (회중 웃음) (소 목사 권상우의 흉내를 내며) ‘응~’ 우리 집사람이 저한테 ‘오빠~’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회중 박장대소) 여러분 우리의 죽음은 천국의 계단이요 통로인고로 우리의 겨울은 절망이 아닙니다. 희망이요 소망이요 하늘가는 밝은 길이 우리 앞에 있으니 우리는 죽음이 소망입니다. 천국의 계단입니다. 천국의 과정입니다. (오르간 반주 소 목사 찬송 회중 찬송)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뭘 잘해야 되느냐. 겨울 준비 영적 월동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이것이 월동 준비하는 겁니다. 권력도 명예도 다 지나갑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사람만이 영원합니다. 요한1서 2장 17절 보십시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다 지나갑니다. 영광도 부귀도 다 지나갑니다. 인생 자체도 다 지나갑니다. 겨울이 되니 제 서재에 이미 벽난로를 피웠습니다. 벽난로 앞에서 제가 시집을 본다든지 원고를 쓴다든지 곡을 쓴다든지 성경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목사로서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들어오면 먼지 걱정을 하며 염려합니다. 아니 내가 내 서재에서 내 마음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내는 아이고 먼지 아이고 연기 냄새 이럽니다. 나무 타는 냄새 얼마나 좋습니까. 옛날에 그렇게 군불 때고 살았어요. 나는 너무너무 행복하거든요. 인생을 좀 관조해보자하는 자세로 불꽃을 바라보곤 합니다. 언젠가 집사람이 들어오길래 옆에 앉아보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착한 남자처럼 노래를 하나 불러주었습니다. (특유의 몸짓을 짓고 손과 입을 오므리며) ‘모닥불 피워놓고...’ (박인희의 모닥불 간주가 흐른다) ‘...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따라서 웅얼거리는 성도들)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목사님 예배시간에 이런 노래 불러도 돼요 하는 사람이 있어요. (소 목사 표정과 몸짓에 회중 박장대소)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노래로)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이 노래 누가 잘 불렀어요. 박인희 씨가 잘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듣다보면 옛날 어린 시절이 생각나요. 이제 제가 50대 중반이 지났습니다. 몇 년 있으면 환갑입니다. 농담 아닙니다. 회갑 잔치는 안 하지만 축의금은 받거든요. (회중 큰 웃음) 저의 젊은 시절 타오르던 장작불도 다 사그라졌어요... 신학교 전도사 시절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만 했어요. 버스 타고 다니며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 외웠습니다. 지금도 그 단어들 기억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때 공부했기에 지금도 핼라어 히브리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부하며 살다가도 중독성 강한 음악이 나오면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탁 입력이 됩니다. 광주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학교를 다닐 때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갔다가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내려가요. 그떼 공부하다가 버스에서 들었던 노래가 떠오르는데 조용필 씨 노래입니다. 조용필 씨 노래 들으면 머리에 팍팍 들어오는 겁니다. 그 다음 듣기 시작한 노래가 이선희 씨 노래입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끝내주죠. 그리고 여러분 아세요. ‘아 옛날이여’ 들으니 정말 노래 잘 합디다. 이 유명한 노래들 라디오로 들었지 사실 텔레비전을 못 봤어요. 지금 그런 노래 들으면 환상적입니다. 제 예술적 감성과 문학적 로맨스를 자극하는 겁니다... 중년이 되니까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 겁니다. 이게 건전한 늦바람입니다. 다시 말해 바람을 잘못 피우면 강남 제비가 되는 거죠. 저는 다행히 건전한 늦바람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윤동주 시인 100주년을 맞이해 제가 윤동주 문학상(한국문인협회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을 받은 거 아니겠어요. 이 상을 받으려고 제가 얼마나 시를 열심히 쓴 줄 아십니까. (회중 웃음) 이렇게 노래를 해도 다 지나갑니다. 다 함께 합시다. ‘다 지나갑니다.’ (회중 복창) ‘모닥불’ 불렀던 박인희 씨나 ‘허공’ 불렀던 조용필 씨나 ‘J에게’ ‘그 중에 그대를 만나’를 부른 이선희 씨를 만나본들 다 지나가는 일입니다. 저는 다행히 건전한 늦바람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여러분의 젊음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결론은 살아 있는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이것만이 남고 천국에 영원히 기록되는 것입니다. 내 남은 인생 주님을 사랑하는 게 금보다 귀하고 잠시 지나갈 세상 바라보지 말고 주님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여러분 눈동자 촉촉하게 적시게 되죠.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음악이 흐르고 소 목사 노래하고 교인들 눈시울 붉어진다) ‘손에 있는 부귀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이슬같은 목숨보다 주를 더 사랑하는가 사랑의 빛 잃어 가면 주님 만날 수 없어 헛된 영화 바라보면 사랑할 수도 없어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인생의 귀한 것 추억을 더듬으면서도 타는 잿불을 바라보며 이게 우리 인생이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본향을 향하여 주님만을 사랑하겠다고 눈물 젖은 목사. 이게 소 목사의 모습입니다. 목가적이고 서정적 감성이 있지만 말씀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니 이게 목사의 의무이고 여러분의 행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보화입니다. 이것이 영원히 남는 겁니다. 저는 다행히 건전한 늦바람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의 젊음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결론은 살아 있는 순간에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선희는 ‘영원한 건 없으니까’ 노래하지만 영원한 게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게 영원합니다. 영원히 존재합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1995년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해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문단사 최초로 윤동주 평전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을 출간하여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로부터 12월 20일 대한민국예술인센터에서 제33회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다. 세상을 약간 개선하고 싶다면 집중과 결단이 필요하듯 교단과 교계를 개혁하는 데도 집중과 결단이 필요하다. 한 분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 인접 가능성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면 된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바로 그러한 인물일 것이다. 오고 있는 겨울에 출간된 소강석 목사의 시가 담긴 에세이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을 가고 있는 겨울에야 읽었다. 그만큼 우편물도 많고 일상도 괜히 분주한데 그럴수록 믿음의 내면은 더 목마르다. 목사 누군들 아니 그러하랴. 시인 소강석 목사가 후쿠오카 감옥에 갇혀 있던 윤동주의 마음속에 들어가 시로 쓴 그의 고향 명동 겨울은 이렇다. 명동촌의 겨울 명동촌 산야에 겨울이 오면하야 소쿠리 동네 안으로 살금살금 다가오고멧돼지들이 씩씩거리며 달려올 때 겁도 없는 아이들나뭇가지 꺾어 들고 소리 지르며 뛰어갔지요.나도 토끼 잡고 싶어서멧돼지 구경하고 싶어서맨 앞에서 숨이 차도록 달리고 또 달렸어요. 그러나 지금 나는 조롱에 갇힌 새가 되어후쿠오카 감옥 창살 사이로 몰아치는하얀 눈보라를 젖은 눈으로 보고 있어요. 비록 내가 불새가 되어현해탄을 날아 명동까지 간다 해도토끼를 잡으러 뛰어갔던나의 하얀 발자국은 남아 있을까요. 내가 지우지 않아도바람과 이슬과 안개가 아닐지라도누군가가 지웠겠지요, 그러나 하얀 설원에 찍었던 나의 발자국과 채취는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나는 오늘도 명동의 겨울로 가고 있다가그리고 언젠가 저 하늘의 새가 되어겨울을 넘어 더 멀고 기나긴 겨울로 날아가게 되면나의 지친 날개명동촌의 겨울산 어느 나뭇가지라도 좋으니그 위에서 잠시만 쉬게 해주세요. 이 시에서는 침묵에 가까워야 드러낼 수 있는 목소리들이 들리고 눈감아야만 보일 듯한 목숨들을 지닌 시인들 윤동주와 소강석이 하나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시인은 내면을 창조했다는 말도 있다. 어떤 대상이든 소강석 시인의 영혼에 사로잡히는 순간 즉각적으로 신앙화된다. 예술 작품이라는 게 다소간 내면화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 것이겠지만 목사 소강석 시인의 작품처럼 우리의 마음을 일거에 모든 제한을 벗어나 하나님의 무한 속에 노닐게 하는 작품은 드물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시인 윤동주 다큐 촬영을 위해 일본에 가서 느낀 것은 일본의 밤하늘엔 윤동주의 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추천사를 쓴 강희근 교수(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는 이렇게 말했다. “소강석 목사의 가슴에서 윤동주의 별을 보았다. 나는 소강석 목사를 볼 때 마다 또 다른 윤동주를 본 것 같다. 그는 진심으로 윤동주를 사랑하는 시인이다. 그가 윤동주를 기념하는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평전시집을 집필하더니 이번에는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이라는 에세이식 평전을 썼다. 이것은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시 해설이 아니다. 윤동주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그의 가슴과 눈동자와 발걸음으로 쓴 글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사실 사도 바울을 가장 많이 닮고 그 말씀을 가장 많이 실천하는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린도전서 9:23-25 적어도 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중요한 혁신이 다수의 과학자들에 의해 동시 발견의 형태로 이뤄진다. 그러나 때때로 시간 여행과 유사한 도약을 이뤄내는 개인이나 연구팀이 있다.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방법은 만능이지만 약간은 순환적인 성격을 띤 '천재'론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세기에 헬리콥터를 상상해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라는 미스터리한 설명을 제외하고 시간 여행자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이 활동하던 분야의 주변부를 연구하거나 매우 다른 분야들이 겹치는 부분을 연구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체로 다양한 취미를 즐겼다. 또한 그들은 다양한 전문 분야를 '상호 교잡'하는 데 대단히 뛰어나다. 성경과 시와 노래와 목회와 정치를 '상호 교잡'하는 천재 시인 소강석 목사처럼.우리 시대 위대한 혁신가인 스티브 잡스는 유명한 스텐포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창의력과 새로운 경험의 관계에 대한 일화들을 전해줬다. 대학을 그만두고 서예 교실에 앉아 서체를 배웠던 경험이 훗날 매킨토시의 그래픽 인터페이스에 영향을 줬고 서른 살의 나이에 애플에서 쫓겨난 덕분에 픽사(Pixar)를 만화영화 제작사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다. 잡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공이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을 조금은 덜어낸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덕분에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내 삶에서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한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2020-11-30
    • G.MISSION
    • G.SERMON
    2020-11-30
  • 영광대교회 한국교회 회복의 날
    교인이었던 그는 어디 있을까. 아직 교회 안에 있을까. 아님 사라졌을까. 교회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그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2020년 5월 21일 오후 5시 100주년 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한국교회총연합 사회정책위원회(위원장 소강석 목사) 주관으로 “포스트 코로나19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관련 교계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한국교회 목회 생태계 보존과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 위원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와 주셔서. 간략하게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선포 배경과 취지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가 큰 소용돌이 속을 지나는 듯합니다. 세계가 펜데믹으로 마비되고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당국의 신속한 대응과 의료인들의 창의적이며 헌신적인 희생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동참으로 진정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고 없이 닥친 질병으로 지난 10주간 동안 큰 혼란을 경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준비 없이 생명을 걸고 지켜왔던 주일예배가 중단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있어 주일예배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도 중단되지 않았던 순교 신앙의 유산입니다. 사회적으로 감염병 집단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던 시기에 몇몇 교회가 정부의 권고를 무시한 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공영방송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교회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기는 따로 있습니다. 사태의 장기화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기간 동안 ‘교회와 예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가 해결된다 해도 ‘한국교회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감을 인지하고 한국교회총연합은 상임회장 회의를 통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길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오는 5월 31일 주일을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날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내부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둘째, 대사회적으로 한국교회의 응집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에서는 ‘포스트 코로나19’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국가와 사회, 교회의 변화와 대응방안을 계속 찾아 노력할 것입니다.” 2020년 5월 31일 11시 영광대교회(김용대 목사)는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 예배를 드렸다. 김용대 목사는 ‘예배자의 삶’을설교했다. 본문은 요한복음 4:19-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이었다. 본당은 교인들로 가득했다. “... 아파트에 살면 따뜻하잖아요. 그런데 이사 간 우리 아파트는 추워요.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집을 나갈 때 보일러 전원 버튼을 끄고 나갔습니다. 외출 버튼을 끄고 나가야 아파트 온도가 일정 수준 유지합니다. 그래야 돌아와 다시 버튼을 정상화 시키면 예열이 되어 있어서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아예 꺼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이 공동체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의 예열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로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지을 것 다 짓고 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냉랭한 심령이 되어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공동체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전에 개인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매 순간 주님만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심장은 다 얼어버리고 맙니다. 악한 생각, 악한 언어와 악한 행동 모두 다 내려놔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감격 적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배자의 삶은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것 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성령강림절 크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변화했고 그리고 비로소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예배 회복의 날로 지키는데 교회와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출발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초대교회가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것 안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교회와 성도는 모두 오직 예수님만 바라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공동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배 회복의 날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로 나아와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로 나아오기 전에 우리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신랑 되신 우리 주님 맞이하는 성결한 신부, 신실한 신부, 순결한 신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온 회중이 머리 숙였다. 설교자의 간구가 낮게 울렸다. “거룩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간구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죄악을 벗어버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아멘.” 찬송이 울려 퍼졌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말라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축도 후 교인들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질서 있게 퇴장했다. 당회장 실에서 김용대 목사와 물을 부은 컵라면과 김밥을 두고 마주 앉았다. 식사를 나눌 때 김용대 목사는 낮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총회가 기다려져요. 오늘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도 소강석 목사가 주창했다고 하는데 그는 늘 업데이트가 되요. 총회 후 소강석 목사가 어떻게 업데이트가 될지 사뭇 기대되요. 그 지식, 식견, 비전이 정말 놀라워요. 나이는 나랑 같은데 신학교는 4년 선배지만...” 2020년 5월 30일 오후 3시 22분(한국 시각 31일 새벽 4시 22분) 미국 플로리다주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우주비행사 두 명을 태운 우주선이 발사됐다.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유인우주선 '크루 드래건'이 '팰컨9' 로켓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다. 1969년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유인(有人)우주선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렸는데 이날은 민간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팰컨9 로켓은 1·2단 발사체가 성공적으로 분리되며 크루 드래건을 우주 궤도에 올렸다. 스페이스X는 재활용 로켓인 팰컨9의 1단 발사체도 바다에서 회수했다. 우주선은 31일 오전 10시 30분(한국 시각 31일 오후 11시 30분) 지구 상공 400㎞에 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결합)했다. 스페이스X의 무인 화물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하는 전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됐다. 스페이스X는 우주에 사람을 보낸 첫 민간기업이 됐다. 우주를 향한 첫 도약 배경에는 이 회사 창업자 머스크가 있다. 외신들은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에 대해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돈키호테식 무모한 도전이 미국 우주개발의 탐험 정신을 되살렸다"고 평가했다. 머스크는 지난 30일(현지 시각) 하루 자신의 성과를 총망라해 자랑했다. NASA의 두 우주인은 머스크가 세운 자동차 업체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모델 X'를 타고 발사장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이후 스페이스X의 재활용 로켓 '팰컨9'에 실린 우주선 '크루 드래건'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날아갔다. 일론 머스크는 197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1995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인터넷 결제 업체 페이팔을 창업했다. 그는 2002년 페이팔을 매각해 받은 1억6500만 달러(약 1800억 원)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 등을 세웠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현재 그의 재산은 410억 달러(약 50조 원)에 달한다. 머스크는 어릴 적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 '파운데이션'을 읽고 우주 탐험의 꿈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이스X를 세우며 "화성으로 이주하겠다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우주를 향한 머스크의 꿈은 어릴 적부터 읽었던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이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머스크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아이작 아시모프의 연작 공상과학 소설 ‘파운데이션’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운데이션’은 미래 우주에서 거대 행성 간 제국의 몰락과 재탄생을 다룬 소설이다. 테슬라는 작년 한 해 동안 전기자동차 약 37만대를 팔았다. 그런데 같은 기간 242만대를 판 포드 그룹의 주식가격은 6달러가 채 안 되는 반면, 테슬라는 한 주에 무려 822달러다. 이 정도의 가격은 자동차 회사 주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식가격은 성장 가능성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가 있다. 왜냐하면 주주들이 테슬라를 자동차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디지털 테크 기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다. 테슬라는 제조부터 판매, 판매 후 관리까지 전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서 빅3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가령 네바다주에 있는 공장 ‘기가팩토리’는 정북향으로 지어졌다. 공장 내부의 로봇들이 GPS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배치한 것이다. 판매는 딜러망 없이 온라인으로 하고 구매자에게 자동차를 배달한다. 테슬라를 자동차가 아닌 디지털 제품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구매 후의 경험이다. 테슬라 자동차 소유자들은 차를 구매한 후로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 더 좋아진다.” 마치 스마트폰처럼 끊임없는 소프트웨어 자동 업데이트로 차가 샀을 때보다 더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기인 소강석 목사도 호남의 묵직한 지도자 김용대 목사가 말하듯 늘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것은 목사로서 교회와 나라를 사랑하는 소강석 목사의 남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원대한 비전'과 그를 뒷받침하는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 회복의 날’과 같은 '단기 실행 능력'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모든 종교를 강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수천 년 내려온 절기의 전통을 중단시켰다. 순례객으로 그득해야 할 바티칸과 예루살렘은 적막하다. 소중한 전통과 제의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신도들은 상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소강석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위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본질 회복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걸고 지키려 해 온 신앙의 가치가 성지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신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김용대 목사의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설교처럼 담담히 성찰할 때가 아닐까. 그렇기에 비어 있는 메카의 모스크와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과 로마 베드로 성당 그리고 세계 곳곳 교회의 모습은 묘한 감동을 준다. 물리적으로는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다. 빈 공간은 사람의 안전을 위한 공동 노력을 상징한다. 신도 간 거리 두기와 공간의 비움을 통해 유월절의 해방과 부활절의 생명 그리고 믿지 않는 자와의 연대를 교회가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리 두기의 비움이 곧 교회 발전의 씨앗이 될 영성일 수도 있는 요즈음이다.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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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 류광수 ‘오직 전도’
    소망이 보여서 계속 전도하는 게 아니라 계속 전도해야 소망이 보인다. 텍사스에는 100년에 한 번 분침이 움직이도록 설계된 만년 시계가 있다. 이 시계가 설치된 장소를 소유한 베이조스는 2011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시계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먼저 사라질 겁니다. 모든 문명이 흥망성쇠를 거칠 테고, 새로운 정부 시스템이 발명될 겁니다. 이 시계가 경험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현재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듯 총신을 졸업하고 우리 교단 목회자였다가 다락방 전도 창시자가 된 류광수 목사의 메시지는 언약의 무한함과 인간의 유한함 그럼에도 교계가 무어라 말하든 믿음으로 세계 복음화를 위해 분투하는 전도자의 각오와 의지를 느끼게 한다. 2020년 2월 9일 오후 4시 30분 예수사랑교회(김서권 목사) 서초동 본당에서 드린 입당과 장로 안수집사 귄사 임직 감사예배에서 류광수 목사(세계복음화 상임위원회 총재 겸 임마누엘교회 당회장)가 설교했다. 김서권 목사가 사회를 본 1부 예배에서 김만제 목사(생명의교회)가 설교 본문 로마서 16:25-27을 봉독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김서권 목사가 설교자 류광수 목사를 소개했다. “이 시간 10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 여러분 앞에 드디어 나타나신 분입니다. (큰 웃음) 반드시 예수사랑교회가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면 오시겠다고 하신 분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고 내 생명을 드릴만큼 사랑하고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전도자, 진실로 복음만을 전하시는 우리 류광수 목사님에게 힘을 다하여 열렬한 박수로 환영하겠습니다.” 아주 긴 뜨거운 환성과 우렁찬 박수 속에 중국을 변화시킨 등소평 체구 같은 유광수 목사가 ‘하나님의 절대 계획’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환한 미소로 걸어 나왔다. 다락방 전도 창시자로 알려진 류광수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완전히 북한 같습니다. (일동 웃음) 북한 복음화를 원합니다. (일제히 아멘) 하나님이 많은 교회를 불러 축복하시는 가운데 영세로부터 예수사랑교회를 하나님이 틀림없이 응답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런 좋은 교회에서 중직자를 세우게 돼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자마자 하신 말씀이 ‘너로 능히 당할 자 없게 하겠다’였습니다. 또 예수님이 마지막 하신 말씀이 ‘하늘과 땅과 모든 권세를 가지고 너와 함께하겠다’였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들은 실제로 공주나 왕자입니다. 공주가 아닌 사람이 공주라고 하면 공주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일동 웃음) 왕자가 아닌 게 왕자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보고 왕자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전도 안 했는데 여러분을 보고 나도 예수 믿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딸 공주이고 하나님의 아들 왕자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면 여러분에게 세 가지가 옵니다. 응답을 받는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노력을 했다거나 최선을 다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성경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받는 응답은 하나님의 절대 계획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절대라는 것은 누가 줄 수도 없고 빼앗아 갈 수도 없습니다. 그 절대 계획 안에 있으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16장 25절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교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잡아야 응답이 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절대 계획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무리 여러분을 방해해도 못 막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절대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전도 운동은 그 누구도 못 막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계획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에 복음 전하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는 오직 복음입니다. 성경은 ‘복음 전하는 자’가 쓴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 전하는 자’가 쓴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구원으로 응답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때부터 위에서부터 내리는 권세가 함께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기서 은혜 받는데 하나님은 밖에서 역사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절대 계획입니다. 영세 전부터 영원히 있는 것은 성삼위 하나님. 여러분의 신분. 그 위에서 내리는 권세. 그리고 하나님은 여러분 사업에 역사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뭐가 나옵니까. 절대 계획 속에 절대 언약이 나옵니다. 이것이 로마서 16장 26절 27절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나타납니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무엇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나라. 무엇이 나타납니까. 성령의 능력의 역사. 이게 언약입니다.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성령의 역사가 나옵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부지런한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막 설쳐가지고 실패하는 사람이 많은데 진짜 똑똑한 사람은 뭘 할 것이 아니라 뭘 안 할 것이냐를 압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돈 벌 것이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돈 많은 사람은 뭘 안 하고 관리할 것이냐를 생각합니다. 진짜 대통령이면 뭘 해야 될지가 나와 있는 것입니다. 안 해야 될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절대 예정 안에 삽니다. 그게 오늘 27절에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다고 했습니다. 옛날에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가장 어려울 때 지혜를 가르쳐주어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심부장 등을 뽑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분담해 담당하게 했습니다. 모르드개가 조카 에스더에게 말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지금 이스라엘인은 다 죽게 됐다. 네가 만약에 이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다른 손을 통해서 하실 것이다. 그렇죠. 절대 하나님이시니까.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그때 에스더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왕후가 됐을 때 모르드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말라.’ 유다인임을 밝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다인이 다 죽게 됐는데 에스더 4장에 보면 ‘가서 지금 말하라’ 합니다. 뭔 말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직분자로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이 정말로 필요로 하실 때 응하라는 것입니다. 제가요. 부산에도 교회가 있고 서울에도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는 500억에 샀는데 1000억이 됐어요. 제가 갖고 있는 걸 다 팔았습니다. 지난달에는 제가 오래 동안 교보생명에 보험을 들은 게 있어요. 교보에서 나에게 생명주는 거 아니잖아요. (회중 웃음) 제가 회개했어요. 그걸 깨서 헌금하기로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걸 필요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내 생명을 거는 겁니다. (회중 아멘) 내가 빚을 지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실 때 원하시는 것을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은 전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전도입니다. (회중 강하게 아멘) 기억하셔야 합니다. 모든 교회가 복음을 전도하지 않습니까. 그것 가지고는 세계 복음화 못 합니다. ‘오직 복음’ ‘오직 전도’입니다. (회중 아멘) 그거라야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회중 아멘)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회중 아멘) 하나님은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불신자는 모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왜 여러분을 한국에 태어나게 하셨나. 하나님 주권입니다. 왜 예수사랑교회의 신자냐. 하나님 주권. (회중 아멘) 나는 언제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가느냐. 하나님 주권. (회중 아멘) 이의 없어요. 이 속에서 나온 게 절대 계획입니다. 거기에서 절대 응답이 와요. 그리고 절대 언약 속에 절대 계획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메시지를 하나님 나라로 이사를 갈 때까지 매일 생각하세요. (회중 아멘) 여러분이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 능력의 기도를 안다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응답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고.’ 다윗을 보세요.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 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보세요.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말했습니다. 다니엘 죽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행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진 언약적인 믿음입니다.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오늘부터 바꾸세요. 나에게 주업(主業)은 예수사랑교회 중직자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매일 일하러 간다. (회중 아멘) 그게 부업(副業)입니다. 아시겠죠. 나는 예수사랑교회 세계복음화가 내 주업이기 때문에 내일부터 부업이 하나 있어야 되니까 사업하러 간다. (회중 아멘) 아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대통령을 하든 무엇을 하든 다 부업입니다. 주업은 세계복음화하는 일입니다. 제가 40년 동안 받은 놀라운 응답 중의 응답이 여러분을 만난 것이 응답 중의 응답입니다. (회중 강하게 아멘) 그리고 김서권 목사 만난 것도 응답 중의 응답입니다. (회중 큰 웃음) 기이한 인물입니다. 만나면 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식당에서 사람을 칭찬해도 시적으로 합니다. 내가 김서권 목사 시를 듣고 울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 장례식에 와서 시를 읽는데 나도 모르게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나는 겁니다. (회중 큰 웃음) 어디서 울었느냐 하면요 ‘산의 17번지 계단을 올라가실 필요가 없다’는 대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전도자와 여러분을 만나게 해주셨으니 최고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강하게 아멘)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오늘부터 주업과 부업을 완전히 바꾸는 당연히 응답받는 절대 제자되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중 강하게 아멘) 2020-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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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8
  •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롬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롬3:21-4:25, 갈3:6-14, 약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 (롬3:21-4:25) 바울은 롬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5:1절에서“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稱義)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한다(롬2:13,8:33,갈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6:11)과 미래의 사건(살전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요」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다.(「기독교강요」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 G.MISSION
    • G.SERMON
    2020-04-09
  • 소강석 부총회장 설교준비
    설교를 연습하기 위해 강의실에 가던 신학생이 길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이 남자에게 다가가 도움을 줄까. 그냥 자기 가던 길을 갈까. 이런 질문을 받은 사람 대부분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신학생의 인품이다. 그가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다면 도울 것이다. 냉담한 레위인이라면 외면하고 지나칠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들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는 지금 바쁜가 아니면 여유 있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그의 인품보다 당시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는 데 유용하다고 지적한다. 학자들은 전자를 성향주의, 후자를 상황주의라 명명한다. 그러면 상황주의에 입각해 인간 행동이 어떤 상황에 영향 받는지 따져보자. 인간 행동에서 상황(situation)이 지닌 위력은 성경의 요셉을 제외하고 성품의 힘을 능가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황은 무엇인가를 두고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반복했다.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힌트를 받아 신학생을 대상으로 무엇이 선한 행동을 유발하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설교 연습 ‘시간에 늦은’ 학생이 쓰러진 남자에게 도움을 준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반면 ‘시간 여유가 있는’ 학생이 도운 비율은 63%에 달했다. 이 실험을 통해 신학생들을 선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한 건 각자의 성품이 아니라 여유 있는 시간이라는 상황임이 드러났다. 칠레 민중의 대변자였던 시인 네루다는 시 ‘양파를 기리는 노래’에서 양파로 허기를 달래는 민중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동감하는 시인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부엌칼에 잘리는 양파 매운 내에 담아 넌 괴롭히지 않고도 우리를 울게 했다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지만,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란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인 소강석은 분당선 지하철 출입문 위에 하늘색 바탕 액자에 흰 글자로 이런 싯귀를 담았다. 아프다고 말해 보세요 우리가 당신 곁에 있잖아요 네루다가 직설적 민중시를 뛰어넘는 언어의 마술사였다면 시인 소강석은 감성적 신앙시로 민중을 감싸고 마음을 싸매는 뛰어난 언어의 설교자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라’(롬 8:5~9)를 주제로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리조트 컨벤션센터에서 새에덴교회 장년 여름 수련회가 8월 6일 오후 3시 수석장로 서광수의 사회로 시작됐다. 오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양과 기도와 소강석 목사 말씀 선포의 향내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다. 서광수 장로가 기원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새에덴교회 2019년 장년 여름수련회를 드릴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3박 4일 집회 기간 좋은 날씨를 주시고 한 건의 안전사고 없이 인도해 주십시오. 목사님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쉼과 힘을 주시어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성령을 폭포수처럼 내려주시고 영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되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집회 기간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오며 축복 내려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83장 ‘빈들에 마른 풀같이’ 찬송 뒤 정금성 권사가 기도했다. “만 왕의 왕 되시고 만 주의 주 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해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버지 이 시간 하늘 문을 여시고 천군 천사를 내려주시어 눈동자같이 지켜주십시오. (회중 아멘) 주님께서는 한 생명을 천하보다 사랑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이제 목사님 말씀을 통해 영에 속한 사람이 되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온전히 변화 받아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이 시간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심령에 말씀과 성령의 불을 붙여 주십시오. (회중 아멘) 모든 악은 물러가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주님 예수를 보내사 구속의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이 시간 목사님 말씀을 통해 몸으로 느끼고 영혼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 역사해 주십시오. (회중 아멘) 주님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우리 성도님들 사업과 직장에 축복해 주십시오. (회중 아멘) 복의 근원 되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 살지 않게 해주십시오. (회중 아멘) 하나님 우리가 복을 받아 언제나 복을 나눠주게 해주십시오. 우리 목사님 말씀 증거하실 때 시간시간 영의 사람이 되게 해주시고 아멘 아멘 복 받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생명수 흐르는 강처럼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십시오. (회중 아멘) 목사님 말씀 전하실 때 복 주면 복 받고 저주 하면 저주 받는 아브라함의 축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수련회를 위해 봉사하는 심령들에 축복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 로마서 8:5-9 봉독과 여러 팀의 찬양 뒤 소강석 목사가 할렐루야를 외치며 설교단에 섰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박수 그리고 헌금자 기도) 하나님 앞에 영광의 박수 올려 드리겠습니다. (회중 박수) 우리가 변함없이 장년 여름수련회에 왔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눕시다. 신선하십니다. 상큼하십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이 자리에 온 것 아닙니까. 여러분. 저나 여러분 모두 하나님 은혜로 온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변이 없는 한 우리는 내년에도 여기 와서 수련회를 하게 될 텐데 전쟁이 나면 안됩니다. 북한과도 일본과도. 지진이 나도 안됩니다...” 교회사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는 가슴을 쥐어짜는 노래, 구성진 하모니카, 후련한 해학 등이 어우러져 하나님 백성이 웃고 눈물짓고 체증이 뚫리고 말씀을 통한 믿음의 각오로 숙연해지게 한다. 수련회에선 총 8회에 걸친 집회를 통해 은혜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집회가 끝난 날 그 설교준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남진, 조용필, 이선희도 큰 공연 앞두고는 은둔을 합니다. 저도 지난 수목금에 기도원에 있었습니다. 서철원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주제로 8번의 설교를 해야 하는 부담을 아시나요...” 다음날 이런 메시지가 왔다. “.. 담주는 러시아에 갑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님 기념비 세우러요...” 독일 출신의 유대계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설파한 '악의 평범성'도 상황주의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이히만이 악마여서가 아니라 나치 하의 독일이라는 환경이 그를 악마가 되게 했다는 아렌트의 견해가 바로 상황주의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가 실험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누군가 명백한 오답을 말해도 집단 내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동조하면 처음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던 이들조차 자신이 생각하는 옳은 답을 말해야 할지 망설인다. 관련 실험에서 적게는 50% 많게는 80%의 실험 대상자가 너무도 뻔한 오류를 비판하지 않고 동조해 버렸다. 그렇다면 상황은 불가항력의 힘을 갖고 우리의 삶을 좌우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사회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성공한 의사·성직자·사업가·연예인들은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하고, 우정을 쌓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더 나아가 읽을 신문과 책, 보지 않을 TV 프로그램까지 하나하나 결정함으로써 자신이 들어갈 환경을 직접 조성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은 환경을 탓하는 성향이 낮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들은 삶이 힘든 이유를 불운 즉 환경 탓으로 돌린다. 성공한 이들은 자식을 가르칠 때 책임감과 자기 통제를 요구한다. 지위가 낮은 이들은 예절과 복종, 타인과의 인화, 훌륭한 매너를 강조한다. 사람은 상황의 힘에 휘둘리지만 그 상황을 만드는 이 또한 사람이란 생각이다. 그런 사람이 소강석 목사다. 시인 소강석 목사에게서 1919년 8월 23일 이런 메시지가 왔다. “낮에는 뛰고 저녁은 독서, 시대 분석 설교준비를 합니다. 지금은 설교준비를 하죠. 이따 보내드린 설교 한번 들어보세요. 얼마나 준비하며 설교하는지요. 지금 거의 두시입니다. 11시에 들어와...” 독립 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기념비를 세우고 러시아에서 돌아온 날인 모양이다. 한국 주요 일간지에 갑자기 최재형 선생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문재인이 좋아한다는 영화 밀정의 주인공 북한 괴뢰 김원봉 대신최재형 선생은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일대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다.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모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면서 축적한 부를 토대로 무장 독립투쟁을 지원했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무기 구매에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연해주 내 한인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일제가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한 1920년 4월 순국했고 유가족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사후 42년만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다. 최재형은 1858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불리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광복일을 보진 못했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7일 일본군에 체포돼 연해주 신한촌의 벌판에서 총살됐다. 시신도 찾지 못했고 묘지도 없다. 순국 100년이 되도록 그의 이름 석 자는 국내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1869년 함경도 일대에 홍수가 나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을 때 “두만강을 건너면 비옥한 땅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 최재형 일가는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들은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차별받던 최재형은 오히려 러시아 학교를 택했다. 그는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며 연해주 최고의 갑부로 성장했다. 한인촌의 권업회장을 맡으며 그는 연해주 한인 민족운동과 의병활동을 지원했다. 최재형의 애국심과 자금력은 대단했다. 나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될 정도였다. 연해주 일대 독립운동에서 최재형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안중근이 “집집이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연해주 일대의 한인을 학살하던 4월 참변 때 최재형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새벽 일본군에 체포된 최재형은 그날로 총살됐다. 당시 62세였다. 근 100년이 지난 2019년 8월 12일 기인 소강석 목사 주선으로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사격연습을 했던 최재형의 자택(현 최재형기념관)이 있던 장소다.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소강석 목사는 자작시와 함께 기념사를 읊으며 “오늘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최재형 선생의 정신과 삶의 궤적이 민족의 가슴에 별처럼 빛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제105회 총회장이 될 총회의 별 시인 소강석 목사는 “우리가 늦게나마 이런 기념비를 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그는 “오늘 추모 건립비, 기념비를 세움으로써 애국 애족의 정신, 하나님을 위한 믿음이 민족의 광야에 별처럼 빛나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프랑스 건축가 랑팡이 골격을 설계한 계획도시 워싱턴은 가장 높은 곳에 국회의사당을, 그다음 백악관을 앉혔다. 그러나 도시의 중심은 사위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워싱턴 기념비’다. 박정양은 자신의 문집 '미행일기(美行日記)'에 썼다. "높이가 550척, 너비가 55척이며 대리석으로 담장을 마련하였는데 돌문과 8개 창을 만들고 그 가운데를 비워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이는 한 나라 인민이 그 독립의 공업을 잊지 않고 이를 새겨 놓은 것이다. 이집트 오벨리스크 형상의 새하얀 기념비를 바라보다 유월절을 떠올렸다. 유대인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이날, 이스라엘 국민은 누룩이 없는 빵과 쓴 나물만 먹는다고 했다. 애급의 노예로 살았던 쓰디쓴 고통을 곱씹으며 다시는 나라 없는 민족으로 떠돌지 않겠다는 다짐에서다. 거기, 우리의 광복절이 겹쳤다. “임정 요인 한 사람에 당이 하나씩이더라”는 독립운동가 장준하의 탄식처럼 분열과 혐오의 역사를 거듭해온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둘로 쪼개져 색출, 응징, 청산을 외쳤다. 이날만큼은 대한민국, 그 고단한 역사를 일궈낸 모든 이의 피·땀·눈물에 경의를 표할 순 없을까. 이날 하루만큼은 선동과 삿대질을 멈추고 치욕도 영광도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며 따뜻하게 안아줄 순 없을까. 소가 웃을 일인가. 링컨기념관을 향해 걷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비’를 보았다. 야전군인 듯 철모에 망토를 입고 전진하는 군인들 조각상 앞에 붉은 장미꽃이 놓였다. 이름 모를 나라에서 그들이 젊음을 불살라 지키려 했던 자유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목젖이 뜨거워졌다. 나의 짧은 미국 유학 시절 1987년이었다. 비가 쏟아졌다. 어린애 주먹만 한 우박도 떨어졌다. 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 긴 여행을 다녀오라던 친구의 충고를 떠올렸다. 용서해야만 과거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고 용서해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거였다. 멀리 포토맥강변으로 무지개가 떠올랐다. 쌍무지개. 반가운 소식 오려나. 총신 안정의 소식을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를 통해. 그러나 소강석이 우리 총회의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란다. 202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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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주석큐티 더굳뉴스 발행 축하 - 장봉생 목사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읍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읍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읍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읍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읍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읍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읍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읍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읍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읍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 있읍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나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읍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나는 제6대 담임목사로 19년째를 맞이했읍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나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큐티 책을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읍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더굳뉴스'의 김영배 목사가 작년 말 서대문교회를 방문했다가 나의 그 사역에 감동을 받고 '더굳뉴스'에 큐티를 접목시키겠다고 하더니 이제 해가 바뀌어 2019년 12월부터 ‘주석큐티 더굳뉴스’ 발행을 시작하게 된 모양입니다. 김영배 목사가 주도하는 ‘주석큐티 더굳뉴스’는 교인이 아닌 목사 중심의 목회 전문인 대상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인 나로서도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발행을 축하합니다.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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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칼빈의 신앙수업 - Lesson III 돌연한 회심 A sudden conversion
    Lesson III 돌연한 회심A sudden conversion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善)합니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침묵한 뒤에 하는 말로 이런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임에도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 멀어지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싸늘한 사랑은 추억 아래 숨고 이제는 사라진 교회의 커튼도 무심한 밤 위에 드리웁니다. 그러한 허무 속에서도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학과 믿음의 드높은 주제를 말하고 또 말함이 옳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육체의 노쇠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젊은 날 우리가 사랑하고 믿고 설교했지만 무지했음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논쟁은 때론 좋은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라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새롭게 판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용어로 풀어쓰자면 논쟁에는 ‘건강한 회의론자’(healthy skeptic)의 자세를 환기시켜 ‘증거에 기반한’(evidence-based)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배양하도록 도와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칼빈이 가톨릭 신자에서 종교 개혁 결과 생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교도, 항의자) 교도로 회심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에 칼빈의 회심에 대한 논란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Alternate theories have been suggested regarding the date of Calvin's religious conversion. In this view, his resignation is the direct evidence for his conversion to the evangelical faith. Some have placed the date of his conversion around 1533, shortly before he resigned his chaplaincy. However, T. H. L. Parker argues that while this date is a terminus for his conversion, the more likely date is in late 1529 or early 1530. 칼빈의 종교적 회심(conversion 회심, 개종, 전환) 날짜에 관하여(regarding) 서로 엇갈리는(alternate) 이론(theory)들이 암암리에 주장되어(suggest 암시합니다) 왔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지도 신부직(chaplaincy 수도회·학교·병원·고아원·교도소·군대 따위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다스리고 이끄는 사제)을 사임하기 바로 직전인 1533년 경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in this view) 칼빈의 사임(resignation)이 복음주의(evangelical) 신앙으로 그가 회심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파커(Parker, T. H. L)는 그의 『칼빈 전기』(John Calvin: a Biography, Louisville, KY 199-203. Westminster John Knox: 2006)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argue). 이 날짜가 그의 회심의 종점(terminus)이라고는 해도 1529년 말이나 1530년 초가 훨씬 더 가능한(likely) 날짜인 것 같습니다. The main evidence for his conversion is contained in two significantly different accounts of his conversion. 그의 회심에 대한 주요 증거(evidence)는 그의 두 중요한 다른 회심 사건들에 들어있습니다. In the first, found in his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Calvin portrayed his conversion as a sudden change of mind, brought about by God: 그의 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p. 67, Grand Rapids: Eerdmans, 1948) 서문(preface)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사건에서(In the first)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이 주신(brought about by God) 마음의 돌연한 변화(a sudden change of mind)로 묘사했습니다(portray): God by a sudden conversion subdued and brought my mind to a teachable frame, which was more hardened in such matters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one at my early period of life. Having thus received some taste and knowledge of true godliness, I was immediately inflamed with so intense a desire to make progress therein.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conversion)을 통해 나의 마음(mind)을 가르칠 수 있는(teachable) 구조(frame)에 복종하게(subdue)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a teachable frame)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내 인생 초기에 기대할 수 있었던 구조보다 훨씬 더 강하게(harden) 하는 구조였습니다. 참된 경건(godliness 신앙)의 어떤 맛과 지식을 이렇게 얻게 되자(Having thus received) 나는 그 속에서(therein 그 구조 속에서) 전진하고자(progress) 하는 아주 격렬한(intense) 열망(desire 욕구)에 즉시(immediately) 불타게(inflame) 되었습니다. 이 첫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참된 경건(true godliness)의 어떤 맛과 지식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경건(godliness 또는 ‘하나님 됨’)이라는 단어 godliness에 대해 『웹스터 대사전』(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godliness the conforming one’s life to the revealed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경건(godliness)은 ‘하나님의 계시된(revealed) 성품(character)과 목적(purpose)에 자신의 삶(one’s life)을 일치시키는(conform) 것입니다.’ 이 경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장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지식의 성향(WHAT IT IS TO KNOW GOD - TENDENCY OF THIS KNOWLED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or, first of all, the pious mind does not devise for itself any kind of God, but looks alone to the one true God; nor does it feign for him any character it pleases, but is contented to have him in the character in which he manifests himself always guarding, with the utmost diligences against transgressing his will, and wandering, with daring presumptions from the right path. 무엇보다도(first of all) 신앙심이 깊은(pious pis)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어떤 종류로 궁리하지(devise) 않고 참되신 하나님에게만 향합니다. 그것(하나님을 아는 것)을 좋아하는 어떤 성품(character)으로 가장하지도(feign) 않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transgress) 것을 아주(utmost) 부지런히(diligence) 그리고 감히(daring) 건방지게(presumption) 올바른 길(path)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며(guard)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manifest) 그 성품 속에서(in the character)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content). 회심의 두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정신과 마음의 고통으로 말미암은 내적 분투의 오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Being exceedingly alarmed at the misery into which I had fallen, and much more at that which threatened me in view of eternal death, I, duty bound, made it my first business to betake myself to your way, condemning my past life, not without groans and tears. 영원한(eternal) 죽음(death)을 생각하면(in view of) 내가 빠졌고 나를 아주 많이 위협했던 비참함(misery)에 극도로 놀라게 된 나는 자신의 과거 생활을 비난하면서(condemn) 반드시(duty bound) 신음하고 우는 게(not without groans and tears) 나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And now, O Lord, what remains to a wretch like me, but instead of defense, earnestly to supplicate you not to judge that fearful abandonment of your Word according to its deserts, from which in your wondrous goodness you have at last delivered me. 그리고 오 주여, 나같이 비참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변호(defense)하는 대신에(instead of) 공적에 따라(according to its deserts) 주님 말씀의 무서운 유기(abandonment)로 심판하시지 말고 마지막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your wondrous goodness)로 거기에서 나를 제발 구원해 주시라고 열심히(earnestly) 애원할(supplicate) 뿐이었습니다. Scholars have argued about the precise interpretation of these accounts, but most agree that his conversion corresponded with his break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Ganoczy 2004, pp. 910; Cottret 2000, pp. 6570; Parker 2006, pp. 199203; McGrath 1990, pp. 6972). 학자들이 이 두 사건에 대한 정확한(precise) 해석(interpretation)에 논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most) 칼빈의 회심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break)과 일치한다(correspond)는 데 동의합니다(agree). The Calvin biographer Bruce Gordon has stressed that “the two accounts are not antithetical, revealing some inconsistency in Calvin's memory, but rather [are] two different ways of expressing the same reality”(Bruce Gordon, Calvin, New Haven; London 2009, p. 34.). 칼빈의 전기 작가 고든(Bruce Gordon)은 “두 사건(account)들이 칼빈의 기억과 어떤 불일치(inconsistency)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정반대(antithetical)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stress).”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돌연한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 하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대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근처에 사는 친구의 정원을 거닐며 로마서 13장을 읽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루터도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면서 성경을 읽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날마다 성경의 묵상을 통하여 엘더스게이트에서 열린 작은 모임에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교훈은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엇을 믿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든지 바르게 살기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든 차이가 없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인간이 바른 믿음이 없이도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8-10 둘째 교훈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올바른 행위와 실천의 열매와 결과가 없다면 참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 가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믿음이 있는 사람의 행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논쟁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당연한 것이라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새롭게 판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용어로 풀어쓰자면 논쟁에는 ‘건강한 회의론자의 자세를 환기시켜 ‘증거에 기반한’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를 배양하게 도와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의 회심을 통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을 통해 나의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구조에 복종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a teachable frame)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내 인생 초기에 기대할 수 있었던 구조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하는 구조였습니다. 참된 경건의 어떤 맛과 지식을 이렇게 얻게 되자 나는 그 속에서 전진하고자 하는 아주 격렬한 열망에 즉시 불타게 되었습니다. 3. 칼빈이 언급한 경건이라는 단어 godliness에 대해 『웹스터 대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godliness: the conforming one’s life to the revealed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경건: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과 목적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것.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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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6
  • 칼빈 신앙수업 -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 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Lesson II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프랑스 작가와 정치가 앙드레 말로(Andr Malraux 1901년 11월 3일 ~ 1976년 11월 23일)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1919년 12월 3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두어 해 전 동양어학교에 다니던 청년 말로가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여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이국적인 마르세유(Marseille)나 막 요란하기 시작한 칸느(Cannes 프랑스어)를 피해 굳이 이곳에 온 것은 고운 모래에 얕은 수심을 지닌 한적한 바다가 산악과 맞닿아 있어 훨씬 드라마틱했기 때문입니다. 여관의 벨보이가 알려주는 말에 말로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르누아르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르누아르를 어쩌면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말로는 한창 문학·미술·역사에 대한 관심이 불타올랐고 동양 문화를 탐사하기 위해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훈련하는 중이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마친 말로가 해초 냄새로 뒤덮인 벼랑 끝 오솔길을 산책하다가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한 노인의 뒤통수를 봤습니다. 노인은 잔물결 이는 바다를 마주한 채 캔버스에 몰입하는 중이었습니다. 말로는 종업원이 일러준 그 대가임을 이내 알아챘습니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지탱하고 인상주의의 한 영역을 개척한 위인을 이런 휴양지에서 단둘이 조우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말로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그의 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의 집중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위대한 미술가의 제작 과정을 보기 위해서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말로가 그의 캔버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벅찬 놀라움은 차치하고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말로는 아연실색했습니다. 바다가 그려져야 할 캔버스엔 어느 계곡을 배경으로 목욕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말로는 시선을 여러 번 그 캔버스와 그 너머 바다를 오가며 바꾸어 봤지만 그려진 장면과 그 앞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 일화는 회화의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되곤 합니다. 르누아르는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습니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입니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치 꿈과 같습니다.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강요』도 그 내용에 관한 한 수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판 서문에서 그는 그 개혁의 시간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기독교강요』 저술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쓴 그의 평생의 개혁주의(Protestantism prtstntizm) 회오(會悟)가 담긴 『기독교강요』 마지막 서문입니다. 뜻깊은 순간이니 기도하는 자세로 읽고 감동을 촘촘히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EPISTLE TO THE READER.[prefixed to the last edition, revised by the author.] 독자에게 드리는 서신[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 In the first edition of this work, having not 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which God, in his boundless goodness, has been pleased to give it, I had, for the greater part, performed my task in a perfunctory manner(as is usual in trivial undertakings); but when I understood that it had been received, by almost all the pious with a favor which I had never dared to ask, far less to hope for, the more I was sincerely conscious that the reception was beyond my deserts, the greater I thought my ingratitude would be, if, to the very kind wishes which had been expressed towards me, and which seemed of their own accord to invite me to diligence, I did not endeavor to respond, at least according to my humble ability.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조차 갖지 않은 이 저작의 처음 판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기꺼이 그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거의 대부분 형식적인 태도로 내 일을 수행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감히 결코 요하지도 않았고, 아주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어떤 호의를 거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받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대접이 내 공적에 넘치는 대우라는 것을 정말 의식하면 할수록 내게 표현해 주었고 그리고 내가 노력하도록 그들이 자발적으로 부탁하는 것 같은 아주 친절한 소망들에 최소한 내 변변찮은 능력에 맞는 보답이라도 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의 더 큰 배은망덕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This I attempted not only in the Second Edition, but in every subsequent one the work has received some improvement. But though I do not regret the labour previously expended, I never felt satisfied until the work was arranged in the order in which it now appears. 이것을 나는 제2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다음 판에서도 그 저술에 다소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들인 노동을 후회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저작이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될 때까지 만족한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Now I trust it will approve itself to the Judgment of all my readers. As a clear proof of the diligence with which I have laboured to perform this service to the Church of God, I may be permitted to mention, that last winter, when I thought I was dying of quartan ague, the more the disorder increased, the less I spared myself, in order that I might leave this book behind me, and thus make some return to the pious for their kind urgency. 이제 나는 그 책이 모든 나의 독자들의 판단에 스스로 입증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이 봉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내가 기울인 노력의 명백한 한 증거로 다음의 것을 언급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지난겨울 나흘마다 앓는 오한으로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질환이 더 심해질수록, 이 책을 내 사후에 남길 수 있고 그들 나름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경건한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보답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더 아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I could have wished to give it sooner, but it is soon enough if good enough. I shall think it has appeared in good time when I see it more productive of benefit than formerly to the Church of God. This is my only wish. 나는 그것을 더 빨리 주기를 바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지간히 좋다면 그것도 상당히 빠른 것입니다. 이 책이 하나님의 교회에 이전보다 더 생산적인 이익을 주는 걸 내가 보게 될 때 그것이 알맞은 시기에 출판되었습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And truly it would fare ill with me if, not contented with the approbation of God alone, I were unable to despise the foolish and perverse censures of ignorant as well as the malicious and unjust censures of ungodly men.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허가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악하고 불의한 비난들뿐만 아니라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고 심술궂은 비난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면, 그 일이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For although, by the blessing of God, my most ardent desire has been to advance his kingdoms and promote the public good, -although I feel perfectly conscious, and take God and his angels to witness, that ever since I began to discharge the office of teacher in the Church, my only object has been to do good to the Church, by maintaining the pure doctrine of godliness, yet I believe there never was a man more assailed, stung, and torn by calumny.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의 가장 열렬한 갈망이 주님의 왕국들을 전진시키고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후 내내 교회에서 교사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가 완전히 자각하고 있음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증거에 전념하고, 경건의 순수한 교리를 옹호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만큼 비방으로 공격받고 찔리고 찢긴 사람이 일찍이 하나도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as well by the declared enemies of the truth of God, as by many worthless persons who have crept into his Church - as well by monks who have brought forth their frocks from their cloisters to spread infection wherever they come, as by other miscreants not better than they]. 하나님의 진리의 공공연한 원수들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 몰래 들어온 많은 무익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퍼뜨리기 위해 그들의 수도원들에서 성직자 옷들을 만들어낸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이나 다름없는 다른 이단자들에 의해서도 비방을 받았습니다. After this letter to the reader was in the press, I had undoubted information that, at Augsburg, where the Imperial Diet was held, a rumour of my defection to the papacy was circulated, and entertained in the courts of the princes more readily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독자에게 쓰는 이 편지가 신문에 실린 후에 제국 의회(제국 의회는 세 개의 계열로 나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참여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입법 기관이자 자문 기관. 가장 유명한 의회로는 제국 개혁이 이뤄진 1495년 의회,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한 1521년 의회)가 열리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내가 교황파로 변절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리고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 군주들의 궁전들에서 환대를 받았다는 확실한 정보를 받았습니다. This, forsooth, is the return made me by those who certainly are not unaware of numerous proofs of my constancyproofs which, while they rebut the foul charge, ought to have defended me against it, with all humane and impartial judges. 이것(소문)은 정말이지 내 지조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나에 대해 지어낸 보고서입니다. 한편으로 그들이 비열한 비난으로 반박하면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나를 아주 인도적이고 공평한 재판관들과 함께 변호하는 것이 당연한 증거들 말입니다(대적자들의 비난으로 활용하는 증거들이 오히려 칼빈이 반대하는 주장들을 그들의 판사들과 함께 변호해 준다는 역설). But the devil, with all his crew, is mistaken if he imagines that by assailing me with vile falsehoods, he can either cool my zeal, or diminish my exertions. I trust that God, in his infinite goodness, will enable me to persevere with unruffled patience in the course of his holy vocation. Of this I give the pious reader a new proof in the present edition. 그러나 마귀가 모든 그의 패거리와 함께 야비한 거짓말들로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의 열정을 식히거나 내 노력들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 가운데 내가 그의 거룩하신 소명을 수행하는 동안에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견딜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것에 대해 나는 경건한 독자에게 『기독교강요』 현재 판에서 새 증거를 드리고자 합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for, if I mistake not, I have given a summary of religion in all its parts, and digested it in an order which will make it easy for any one, who rightly com-prehends it, to ascertain both what he ought chiefly to look for in Scripture, and also to what head he ought to refer whatever is contained in it. 더 나아가 나는 이 저술에 있어서의 나의 목적이 성직(聖職) 후보자들이 신성한 두루마리 공부를 위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에 접할 수 있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그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한 의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든 분야의 개요(槪要)를 나는 제시해 주었고 그리고 그것(성경)을 바르게 파악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성서에서 주로 무엇을 찾아야 하고 성경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표제로 언급해야 하는지도 확인하게 해 주기 위하여 성경이 어렵지 않게 차례대로 요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Having thus, as it were, paved the way, as it will be unnecessary, in any Commentaries on Scripture which I may afterwards publish, to enter into long discussions of doctrinal points, and enlarge on commonplaces, I will compress them into narrow compass. 이렇게 하고 나니, 이를테면 불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내가 나중에 출판할 수도 있는 어떤 성경 주석서들에서 다룰 교리적 논점들에 대한 긴 토론들에 들어가고 그리고 내가 좁은 범위로 압축하게 될 인용구들에 대해 상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In this way much trouble and fatigue will be spared to the pious reader, provided he comes prepared with a knowledge of the present work as an indispensable prerequisite. The system here followed being set forth as in a mirror in all my Commentaries, I think it better to let it speak for itself than to give any verbal explanation of it. 이렇게 하여 경건한 독자는 많은 수고와 노고를 아끼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없어서는 안 될 기초 필수 과목으로 현재 저서 『기독교강요』의 지식을 갖추고 온다면 말입니다. 모든 나의 주석들에서 거울에서처럼 분명하게 설명하게 될 다음의 체계는 그것에 대한 말의 설명보다 그것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Farewell, kind reader: if you derive any benefit from my labours, aid me with your prayers to our heavenly Father. 친절한 독자여 안녕. 당신이 내 노작(labour)들에서 어떤 이익을 얻는다면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 당신의 기도로 나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Geneva, 1st August 15591559년 8월 1일 제네바 이렇게 죽기 5년 전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 서문에서 칼빈 자신의 모든 심정을 털어놓은 뒤 마지막 개정 서문을 쓰고 독자들에게 안녕(Farewell, kind reader)이라는 인사까지 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추신(追伸)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쓰기 경구(警句)를 덧붙입니다. The zeal of those whose cause I undertook, has swelled a short defense into a book. 내가 맡아서 돌보는 사람들의 주장을 위한 열정이 간단한 변호를 부풀려 한 권의 책이 되게 하였습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Augustine, Epist. 7. “나는 이익을 얻음으로 글을 쓰고 그리고 글을 씀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서한집 7. 칼빈의 추신은 믿음으로 신자들이 당하는 오해와 어려움을 변호하다보니 그게 한 권의 책이 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진실하게 변호하고 옹호했으면 우리 개혁주의의 경전이 될 『기독교강요』를 저술해 이 세상에 남기고 전하게 됐을까요. 마치 르누아르가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하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는데 말로가 보기에도 놀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신학의 시조 칼빈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어 믿음의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유익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경구라 다시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학이나 기업이 표방하는 모토 중에 영어로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어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 지성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듯 다른 사람에게 영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들려준다면 그 사람은 감격하고 당신을 올려다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 “나는 이익을 얻음으로써 쓰고 그리고 씀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칼빈 신앙수업』을 읽는 여러분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익을 얻음으로써(by profiting) 쓰고, 씀으로써(by writing) 이익을 얻는’ 그런 목사나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면서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개혁주의로 변화시키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아주 작은 성공의 기대도 없이 출발하실 수 있지만 칼빈처럼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르누아르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을 상상했습니까. 르누아르는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습니다. 2. 르누아르는 바다를 보며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습니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입니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되었습니다. 3. 『기독교강요』를 처음 발간했을 때 칼빈은 어떤 기대를 했습니까.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조차 갖지 않은 이 저작의 처음 판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기꺼이 그것을 주셨습니다. 2019-02-18 LA 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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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빈 신앙수업 - 칼빈은 누구 Who is Calvin
    Lesson I칼빈은 누구Who is Calvin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제 동창 친구 하나는 대학에 갈 때 영어가 싫어서 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다보니 교과서가 전부 영어 원서였습니다. 영어는 라틴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법이 꽤 복잡합니다. 간단한 예로 be 동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겁니다. 대략 이렇습니다. ⑴ 변칙(變則)동사(anomalous verb)의 하나로 어형(語形)변화에 특징이 있음.⑵ 의문문을 만드는 데 주어와 도치되며 조동사 do를 쓰지 않음: He is busy.→Is he busy?⑶ 부정문으로 할 때에도 do를 안 씀: That is nice.→That is not 〔isn’t〕 nice. 다만, 명령형에서는 흔히 do를 쓰며, do를 쓰지 않는 것은 옛 형태: Don’t be a fool.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마라. Be not afraid. 《고어》 두려워하지 말지어다.⑷ 강조할 때 do를 사용치 않고 be 동사를 세게 발음함: She is [-z-] kind, indeed. 그녀는 정말 친절합니다. 다만, 긍정(肯定) 명령형을 강조할 때에는 do를 씀: Do be gentle to them. 제발 그들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게나. be 동사의 문법 일부가 이러니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영어 공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비들을 잘 넘기고 복잡한 문법 체계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됩니다.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래 해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5-10억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 국민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각 나라의 엘리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 내는 정보입니다. 신문, 잡지, 도서, 학계, 인터넷 등을 통해 영어 사용 인구가 생산해내는 정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현대를 살면서 영어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봉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영어 번역본을 통해 그 진수(眞髓)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교계에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엘리트(elite) 개혁주의자이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선구자(forerunner)는 누구입니까. 칼빈(John Calvin)입니다. 칼빈은 누구입니까.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빈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목회자(pastor)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의 대표(chief) 해설자(expositor)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polemic)과 변증(apologetic) 저술가(write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seminal)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commentary)들과 신앙고백(confessional) 문서(document)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treatise)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인문주의(humanist hjːmnist) 법률가(lawyer)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 시의회의 이단(heresy)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을 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55세 소천)을 보냈습니다.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RECOLLECTION 되·새·김 1. 영어 공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2.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3. 칼빈주의는 무엇입니까.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이 포함된 견해(aspect)입니다. 2019-02-04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 G.MISSION
    • G.SERMON
    20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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