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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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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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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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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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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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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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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 주신 말씀_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신앙생활의 중심 중의 중심이며 핵심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자 통로로서 하나님께 ‘플러그인’ 되는 고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듯이 기도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도 기도로 하나님께 상달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체로 창조하셨고 하나님 자신도 지극히 인격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크신 뜻에 합하고 옳은 것이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야 그것이 믿음의 실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세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적’으로 응답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상적 일이기에 언제나 가능함이라! 그러면 어떻게 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까? 그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기도하라’고 산상수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가르쳐 주셨다. 모범 기도문을 말씀(마 6:9~13) 하시고 난 뒤 다시 한번 핵심 요점으로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의 필요를 능히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는 ‘나’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의’가 땅 위에 실현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성경 전체의 ‘핵심 과제’를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나’의 문제는 고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결해 주신다는 약속이 전제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모범 기도문을 깊이 의미해 봄으로써 올바른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주기도문’을 암기를 해서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상에서 기도할 때 이런 아젠다와 ‘핵심’이 들어있는 내용으로 하라고 모범 기도문을 알려 주신 것이리라! ‘주기도문’의 주목할 핵심 단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데 여기서 ‘아버지’의 본래 뜻은 헬라어인 ‘파테르’라는 말로 아랍어, 아바 곧 ‘아빠’라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버지의 호칭의 의미는 같지만 사뭇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왜 ‘아빠’라 부르라 하셨을까?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해도 늘 ‘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모든 것을 기대고 해결해 주며 보호해 주는 무조건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내 아빠’이시면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에 죽음 직전까지도 하나님을 항상 ‘아빠’로 부르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두 번째 주목할 말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세상은 모두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우리가 내 필요와 내 사욕을 위해 ‘하나님의 손’을 구하기만 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를 ‘복’ 그 자체로 창조하셨다. ‘죄’가 복을 가려서 그렇지 예수님이 ‘죄’를 도말 하신 이상 우리는 다시 ‘복의 근원’, 곧 복덩어리가 된 것이다. 내가 복 그 자체인데 내 뜻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과 꿈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라는 말이다. 크리스천은 공동체로서 각 지체 간 ‘형제’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공동체로서의 필요와 질서로서 하나를 이루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역시 내 것, 내 문제, 내 자식, 내 필요의 중심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여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이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내 주변, 우리 교회, 우리 나라, 세계 인의 공통의 문제 등에 대한 기도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거나 진정이 부족하였다. 매우 졸렬하고 병든 기도였음을 이 시간 회개한다. 다음, 용서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런 용서를 받은 자로 우리는 누구든 얼마든지 잘못도 용서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세상 사는 동안 마귀는 끝없이 우리를 시험과 유혹으로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시험은 예수님도 받은 것으로 말씀으로 반드시 이겨내야 하지만 ‘유혹’은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는데 그러면 기도는 얼마나 하여야 하나?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들만큼 우리는 (나는) 기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부끄러울 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심은 늘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일상에 적용하며 호흡함과 같이 살아가란 것이다. 기도는 먼저 나를 바꾸는 일이며 열방을 가슴에 두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고 기도하는 자는 늘 ‘기쁨’에 충만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넘쳐나면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멘.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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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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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주신 말씀_ 시편 103:1~5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남이 더없이 가볍고 즐겁다. 아무런 근심과 걱정거리가 없으니 또 하루가 ‘기대’로 시작된다. 오늘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없으니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자는 내가 없는 그리스도의 향내를 품은 자로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사모하여 사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내 남은 삶에 오직 그리스도의 자취를 남기고 그의 풍성하신 은택을 찬송하며 살리라. 아멘. 문득 생각해보니 요즘의 내 삶은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즐거움 그 자체인 듯하다. 모든 무거웠던 짐이 다 내려진 듯하고 마음의 쉼과 여유가 삶을 즐겁게 누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자식 걱정이 없어졌고 돈을 벌어야 산다는 중압감도 없으며 주변에 나를 옥죄이던 사회적 책임에도 벗어나 있다. 육십여 평생을 보내면서 어느 노교수의 말처럼 인생의 황금기가 이때인 듯하다. 지난 몇 년간 내 인생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때를 극복하고 지금 평안, 여유, 기쁨, 안정, 감사, 행복, 사랑이라는 좋은 단어만을 만끽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다윗의 시는 내 영혼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시’이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크신 은택을 잊지 말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 내 주 하나님을 영원토록 송축할 것이다. 아멘.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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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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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 주신 말씀_ 욥기 1:20~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우리 주님은 돌아가실 때 남겨 놓으신 재산은 얼마였을까? 참 어리석은 물음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은 십자가에서 알몸으로 모든 부끄러움을 안고 돌아가셨다. 걸치고 다니셨던 한 벌의 겉옷마저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누고 (요 20:24)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편히 쉴 거처 한 곳도 마련한 적 없으셨고 가장 천한 말구유 위로 오셨다가 가장 험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신 주님인 것이다. 어차피 인생들은 이승에서 얼마의 부를 쌓았든 못 쌓았든 알몸으로 돌아가는 게 운명이라 욥이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 한 첫 고백이 ‘내가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라는 말이었고 오히려 예배하며 주님을 찬송하였다. 이 고백과 욥의 행동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을 사는 동안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재물에 집착하고 부를 쌓는 일에 열중한다. 당장 내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신앙의 척도는 세상을 지배하는 물질이라는 공중권세와 같은 우상 앞에서 얼마나 저를 무시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욥의 고백처럼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라는 말은 당연한 진리로서 항상 잊지 말고 가장 귀한 보배를 담은 질그릇답게 내가 마침내 돌아갈 곳 ‘천성’을 향하여 하루하루 나아가야 하리라! 아멘. 202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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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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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 주신 말씀_ 하박국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환난 날에 내게 말씀하셨던 하나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의 대적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드러내 주셨으며 저들의 날들이 잠깐임을 확인케 하셨던 하나님! 나의 가난함을 부요함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뵙기를 사모하였더니 삼라만상 속에 풍요하신 신성을 보여주신 하나님! 어느 순간 내 마음도 내 삶도 풍요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 하박국의 노래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을지라도 내 마음에 넘쳐나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풍요로움으로 말미암아 나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로다. 아멘.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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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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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 주신 말씀_ 이사야 41:8~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그만큼 외면당하시고 무시당하셨으며 아무리 호소해도 말 안 듣는 백성이라면 하나님도 이제는 돌아서시고 버릴 법도 하신데 하나님은 끝내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신다고 하신다.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은 무던히도 깊은 죄악에 물들어 있다. 남과 북을 통틀어 몇몇 ‘다윗의 길’을 간 왕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갔고 우상을 온천지에 깔아 놓았으며 죄악에 버무려진 장아찌같이 변하여 버렸다. 지금 저들은 앗수르 바벨론 등 외세의 침공으로 삶의 소망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잘된 일 아닌가! 벌을 받아 마땅한 백성임에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은 또다시 저 백성들에게 위로의 손을 내미시며 구원의 약속을 하고 계신 것이다.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고 정겹게 부르시며 ‘너를 괴롭히던 자들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며 너와 다투었던 자들을 멸망할 것’(사 41:11~12) 이라고 약속하시며 끝내 구원해 주실 것이란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두려워 말라...’ 위 격려의 말씀은 말씀의 앞뒤 정황을 고려함 없이 내게 비추어 나의 지난 힘든 날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의지였고 용기였으며 불안을 떨쳐낸 담대함이 되었으며 결국,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내 평생에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안 계셨으면 단연코 말하건대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 아멘.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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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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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 주신 말씀_ 룻기 4:10~12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하나님을 떠나서 참담한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던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꿈은 한 의롭고 믿음의 사람이었던 보아스에 의하여 극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한편의 동화와 같은 사사 시대에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보아스의 위로 어머니 ‘라합’이 있어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을 계승하고 율법을 지켜온 신앙의 명문 가문이 있었고 모압 지방에서 겪은 고난으로 인해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난 나오미 및 하나님과 시어머니를 믿고 따른 그 시대의 효부 룻의 삶이 아우러진 가운데 하나님의 꿈인 인류 구원계획이 이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기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슴을 뭉클하게 밀려오는 교훈은 첫째는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믿음과 효심이다. 룻은 모압 지방에서 남편을 잃고 참담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알았고 본받아야 할 효심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다윗과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둘째는 보아스는 세상이 우상으로 들끓고 타락한 난세였으나 거기에 물들지 않고 믿음과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 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룻과 함께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게 된 복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룻과 보아스의 사랑 속에 피어난 하나님 꿈의 계승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떤 고난, 어떤 상황에 처하여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인간의 기본 도리인 부모에 대한 공경과 율법을 철저히 준행하며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섭리 가운데 크나큰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 4:17 아멘.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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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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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 주신 말씀_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신앙생활의 중심 중의 중심이며 핵심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자 통로로서 하나님께 ‘플러그인’ 되는 고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듯이 기도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도 기도로 하나님께 상달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체로 창조하셨고 하나님 자신도 지극히 인격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크신 뜻에 합하고 옳은 것이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야 그것이 믿음의 실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세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적’으로 응답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상적 일이기에 언제나 가능함이라! 그러면 어떻게 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까? 그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기도하라’고 산상수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가르쳐 주셨다. 모범 기도문을 말씀(마 6:9~13) 하시고 난 뒤 다시 한번 핵심 요점으로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의 필요를 능히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는 ‘나’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의’가 땅 위에 실현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성경 전체의 ‘핵심 과제’를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나’의 문제는 고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결해 주신다는 약속이 전제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모범 기도문을 깊이 의미해 봄으로써 올바른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주기도문’을 암기를 해서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상에서 기도할 때 이런 아젠다와 ‘핵심’이 들어있는 내용으로 하라고 모범 기도문을 알려 주신 것이리라! ‘주기도문’의 주목할 핵심 단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데 여기서 ‘아버지’의 본래 뜻은 헬라어인 ‘파테르’라는 말로 아랍어, 아바 곧 ‘아빠’라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버지의 호칭의 의미는 같지만 사뭇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왜 ‘아빠’라 부르라 하셨을까?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해도 늘 ‘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모든 것을 기대고 해결해 주며 보호해 주는 무조건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내 아빠’이시면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에 죽음 직전까지도 하나님을 항상 ‘아빠’로 부르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두 번째 주목할 말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세상은 모두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우리가 내 필요와 내 사욕을 위해 ‘하나님의 손’을 구하기만 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를 ‘복’ 그 자체로 창조하셨다. ‘죄’가 복을 가려서 그렇지 예수님이 ‘죄’를 도말 하신 이상 우리는 다시 ‘복의 근원’, 곧 복덩어리가 된 것이다. 내가 복 그 자체인데 내 뜻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과 꿈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라는 말이다. 크리스천은 공동체로서 각 지체 간 ‘형제’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공동체로서의 필요와 질서로서 하나를 이루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역시 내 것, 내 문제, 내 자식, 내 필요의 중심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여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이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내 주변, 우리 교회, 우리 나라, 세계 인의 공통의 문제 등에 대한 기도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거나 진정이 부족하였다. 매우 졸렬하고 병든 기도였음을 이 시간 회개한다. 다음, 용서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런 용서를 받은 자로 우리는 누구든 얼마든지 잘못도 용서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세상 사는 동안 마귀는 끝없이 우리를 시험과 유혹으로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시험은 예수님도 받은 것으로 말씀으로 반드시 이겨내야 하지만 ‘유혹’은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는데 그러면 기도는 얼마나 하여야 하나?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들만큼 우리는 (나는) 기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부끄러울 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심은 늘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일상에 적용하며 호흡함과 같이 살아가란 것이다. 기도는 먼저 나를 바꾸는 일이며 열방을 가슴에 두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고 기도하는 자는 늘 ‘기쁨’에 충만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넘쳐나면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멘. 2023-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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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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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주신 말씀_ 시편 103:1~5 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남이 더없이 가볍고 즐겁다. 아무런 근심과 걱정거리가 없으니 또 하루가 ‘기대’로 시작된다. 오늘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없으니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자는 내가 없는 그리스도의 향내를 품은 자로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을 사모하여 사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는 내 남은 삶에 오직 그리스도의 자취를 남기고 그의 풍성하신 은택을 찬송하며 살리라. 아멘. 문득 생각해보니 요즘의 내 삶은 더없이 평안하고 행복하며 즐거움 그 자체인 듯하다. 모든 무거웠던 짐이 다 내려진 듯하고 마음의 쉼과 여유가 삶을 즐겁게 누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자식 걱정이 없어졌고 돈을 벌어야 산다는 중압감도 없으며 주변에 나를 옥죄이던 사회적 책임에도 벗어나 있다. 육십여 평생을 보내면서 어느 노교수의 말처럼 인생의 황금기가 이때인 듯하다. 지난 몇 년간 내 인생 가장 힘들었던 고난의 때를 극복하고 지금 평안, 여유, 기쁨, 안정, 감사, 행복, 사랑이라는 좋은 단어만을 만끽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다윗의 시는 내 영혼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시’이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크신 은택을 잊지 말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 내 주 하나님을 영원토록 송축할 것이다. 아멘. 202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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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내 영혼아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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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 주신 말씀_ 욥기 1:20~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우리 주님은 돌아가실 때 남겨 놓으신 재산은 얼마였을까? 참 어리석은 물음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은 십자가에서 알몸으로 모든 부끄러움을 안고 돌아가셨다. 걸치고 다니셨던 한 벌의 겉옷마저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누고 (요 20:24)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편히 쉴 거처 한 곳도 마련한 적 없으셨고 가장 천한 말구유 위로 오셨다가 가장 험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하신 주님인 것이다. 어차피 인생들은 이승에서 얼마의 부를 쌓았든 못 쌓았든 알몸으로 돌아가는 게 운명이라 욥이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후 한 첫 고백이 ‘내가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라는 말이었고 오히려 예배하며 주님을 찬송하였다. 이 고백과 욥의 행동은 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정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세상을 사는 동안 편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재물에 집착하고 부를 쌓는 일에 열중한다. 당장 내일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 것이다. 신앙의 척도는 세상을 지배하는 물질이라는 공중권세와 같은 우상 앞에서 얼마나 저를 무시할 수 있으며 자유로울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욥의 고백처럼 ‘알몸으로 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라는 말은 당연한 진리로서 항상 잊지 말고 가장 귀한 보배를 담은 질그릇답게 내가 마침내 돌아갈 곳 ‘천성’을 향하여 하루하루 나아가야 하리라! 아멘. 202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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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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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 주신 말씀_ 하박국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환난 날에 내게 말씀하셨던 하나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참으로 의로운 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나의 대적 앞에서 내게 상을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 내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드러내 주셨으며 저들의 날들이 잠깐임을 확인케 하셨던 하나님! 나의 가난함을 부요함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뵙기를 사모하였더니 삼라만상 속에 풍요하신 신성을 보여주신 하나님! 어느 순간 내 마음도 내 삶도 풍요하게 만들어 주신 하나님! 하박국의 노래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없을지라도 내 마음에 넘쳐나는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와 풍요로움으로 말미암아 나는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로다. 아멘. 202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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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없을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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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 주신 말씀_ 이사야 41:8~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그만큼 외면당하시고 무시당하셨으며 아무리 호소해도 말 안 듣는 백성이라면 하나님도 이제는 돌아서시고 버릴 법도 하신데 하나님은 끝내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신다고 하신다.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은 무던히도 깊은 죄악에 물들어 있다. 남과 북을 통틀어 몇몇 ‘다윗의 길’을 간 왕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갔고 우상을 온천지에 깔아 놓았으며 죄악에 버무려진 장아찌같이 변하여 버렸다. 지금 저들은 앗수르 바벨론 등 외세의 침공으로 삶의 소망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잘된 일 아닌가! 벌을 받아 마땅한 백성임에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은 또다시 저 백성들에게 위로의 손을 내미시며 구원의 약속을 하고 계신 것이다.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고 정겹게 부르시며 ‘너를 괴롭히던 자들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며 너와 다투었던 자들을 멸망할 것’(사 41:11~12) 이라고 약속하시며 끝내 구원해 주실 것이란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두려워 말라...’ 위 격려의 말씀은 말씀의 앞뒤 정황을 고려함 없이 내게 비추어 나의 지난 힘든 날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의지였고 용기였으며 불안을 떨쳐낸 담대함이 되었으며 결국,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내 평생에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안 계셨으면 단연코 말하건대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 아멘. 2023-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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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 주신 말씀_ 룻기 4:10~12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하나님을 떠나서 참담한 암흑기를 살아가고 있던 사사 시대에 하나님의 꿈은 한 의롭고 믿음의 사람이었던 보아스에 의하여 극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는 한편의 동화와 같은 사사 시대에 피어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보아스의 위로 어머니 ‘라합’이 있어 어머니로부터 철저한 신앙을 계승하고 율법을 지켜온 신앙의 명문 가문이 있었고 모압 지방에서 겪은 고난으로 인해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난 나오미 및 하나님과 시어머니를 믿고 따른 그 시대의 효부 룻의 삶이 아우러진 가운데 하나님의 꿈인 인류 구원계획이 이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기묘한 섭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가슴을 뭉클하게 밀려오는 교훈은 첫째는 룻의 시어머니에 대한 믿음과 효심이다. 룻은 모압 지방에서 남편을 잃고 참담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나오미가 믿는 하나님을 알았고 본받아야 할 효심으로 하나님께 복을 받아 다윗과 예수님의 계보를 잇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둘째는 보아스는 세상이 우상으로 들끓고 타락한 난세였으나 거기에 물들지 않고 믿음과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킨 끝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룻과 함께 하나님의 꿈에 참여하게 된 복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룻과 보아스의 사랑 속에 피어난 하나님 꿈의 계승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어떤 고난, 어떤 상황에 처하여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지조를 지키며 인간의 기본 도리인 부모에 대한 공경과 율법을 철저히 준행하며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섭리 가운데 크나큰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이 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 4:17 아멘. 2023-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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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한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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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결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 주신 말씀_ 여호수아 3:15~17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결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거느린 수없이 많은 소와 양 떼,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첫 관문인 넘치는 요단강 앞에 선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6백 년간 이어져 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 현실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저 평범하게 그 약속의 땅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출애굽의 마침표를 찍고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는 터닝포인트가 홍해가 갈라지고 바닥이 마른 바다를 건넌 ‘홍해의 기적’이었다면 6백 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첫 번째 출발점은 ‘요단강의 기적’인 것이다. 요단강 지역의 곡식을 거두는 시기엔 항상 요단강이 넘쳐흐른다고 한다. 요단강의 기적은 홍해 때와 달리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을 물에 밟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물에 들어서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그쳐서 멀리 있는 아담성 변두리에 일어나 한곳에 쌓이고(수 3:16) 마른 강바닥이 되어 모든 백성이 밟으며 건너는 또한 번의 장엄한 기적의 장면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홍해의 기적과 요단강의 기적! 이 두 장면의 다른 점이 있다면 홍해의 기적 시엔 믿음이 없고 원망 중인 백성을 이끈 모세가 오직 자신만의 믿음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지팡이를 홍해를 향해 내밀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이 이루어졌었고 요단강의 기적 시엔 믿음으로 온전히 무장된 모든 백성(만나 세대)이 언약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앞세워 요단강을 복종케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온전한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자격을 갖추었음을 말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사건들을 겪어 왔는가!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서는 요단을 건너기까지 흐른 5~6백 년의 세월! 그 세월 속에 변함이 없었던 것은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꿈’이었고 ‘약속 하심’의 성취인 것이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기대하며 소망 속에 살아가고 있다. 곧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님을 고대하며 다시는 사망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존재하고 기쁨만 가득한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룻밤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즉 깨어 기다리고 갈망하노라면 요단강이 멈춰서는 그날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내 눈앞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20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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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결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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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이란
- 주신 말씀_ 레위기 19:2, 20:26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이란 ‘거룩’이란 지식백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성품’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레 19:2, 벧전 1:15~16)이다. 보통의 사전적 의미로는 ‘성스럽고 위대함’이며 비슷한 의미로는 높고 귀하다, 휼륭하다, 고귀하다, 성스럽다, 존엄하다, 등등이 있다. 성경적 의미로는 ‘구별됨’, 즉 하나님께 쓰이도록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으로 백성 된 너희는 당연히 거룩해야 된다는 말씀이고 만민 중에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별해서 세우신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는 ‘거룩’은 어떤 것일까? 레위기 19~20장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거룩함이란 첫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믿음 생활이며 둘째,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 이 두 가지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요구하시는 ‘거룩’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거룩’이라 함은 경건하고 엄숙함, 올바르고 근엄한 자세가 생각나서 존엄하신 성직자분들이 떠오르고 나는 그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삶의 실천이 거룩한 것일 거라 생각하였으나 레위기 묵상을 통하여 깨달은 거룩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이웃 사랑의 실천함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0)고 사랑의 실천적 정의를 가르치셨고, 몸소 그 사랑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데까지 보여주셨으며 베드로 또한 ‘거룩함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행실에 있다’(벧전 1:15~16) 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내려주시면서 ‘밭 모퉁이를 남겨놓고... 포도원 열매를 다 따지 말 것이며...’ (레 19:9~10) 세부적인 실천 방법까지 말씀해 주셨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에 뿌리를 둔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을 이룰 수 있음을 깊이 깨닫는다. 아멘. 202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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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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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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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담대하고 인내하라
- 주신 말씀_ 히브리서 10:35~38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담대하고 인내하라 성경 속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는 말씀이 매우 많이 나온다. 어느 목사님은 설교에서 이 말씀이 삼백육십다섯 번이 나온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 말이 그처럼 많이 성경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늘 두려움에 도전 당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사탄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마음이며 그 두려움에 굴복당함의 끝은 실패요, 절망이며 사망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굳셀 때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이겨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갈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 하나 붙잡고 거대한 문명과 힘의 상징인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 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용기와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도 사울의 칼날을 피하고 이겨내어 결국 이스라엘 통일 국가의 왕위에 오른 것도 남다른 담대함과 용기, 인내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담대함과 인내심을 가진 자들이다. 담대함의 극치는 죽음 앞에서 나타난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 그것은 오직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삶 속에서도 담대함과 용기 있는 자가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자 이치이며 성공을 이루기까지 인내하며 참는 끈기 역시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리라. 어떤 사탄의 간계 속에 두려운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야 할뿐 뒤로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했으니 또한 인내할 뿐이로다. 아멘.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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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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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담대하고 인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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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주신 말씀_ 요한일서 4:7~9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칭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곧 빛, 진리, 말씀, 전능자, 알파와 오메가, 창조주, 처음이요 끝이 되신 분 등등...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호칭이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표현은 가장 정겹고 뭉클하게 들린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흐름 속에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단어는 ‘사랑’이 그 중심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우리 인생들의 삶 속에 있어서도 가장 소중하며 필요한 가치가 있다면 역시 ‘사랑’이다. 부부간에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사랑이며 부모와 자식 간의 천륜도 사랑에 의한 것임은 물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도 사랑이 있다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평화와 평등의 이상적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주님이 몸소 이 땅에 오셨고 실천하셨으며 끝내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이루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어 그를 화목제의 제물로 삼아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도말 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니 ‘사랑’은 오직 하나님을 칭하는 표현으로 더 이상 다른 어떤 것도 범할 수 없는 하나님 만의 독점적 가치라 함이 옳다. 이로써 사랑이 그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지 아니하는 자는 감히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삶 속에서 나타내고 실천하지 아니하는가! 또한, 하나님이 그 마음 안에 안 계심으로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사도 요한은 인생 90년의 경륜에서 얻은 결론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고 하나님을 정의하고 있다. 인간들은 많은 사랑을 노래하고 표현하고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랑에도 많은 종류가 있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도 삶을 지탱해 나가고 있는 힘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최정점에 있는 ‘십자가의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그 뒤를 따라가야 하리라. 그러면 나의 생활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사랑’의 경륜은 어디까지 왔는가 곰곰이 생각해보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지...! 아멘. 2023-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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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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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