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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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LA 칼빈 박헌성 목사 제109회 총회 국제개혁신학교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우리 LA '열린문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 2024년 9월 24일 울산 우정교회 제109회 총회(총회장 김종혁) 미주서부노회 총대로 참석 IRUS(국제개혁대학교) 현황 보고 프랑스에서 이주한 제네바의 칼빈같이 한국에서 이주한 LA의 칼빈이라 할 수 있는 박헌성 목사는 누구일까. 독일 출생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Karen Horney, 1885.9.16 – 1952.12.4)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기독교 신학자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노용(Noyo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칼빈(Gerard Calvin)은 부모가 경영하는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도제 교육을 받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후에는 시청 서기와 교구의 서기 임무를 거쳐 교구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가 됨으로써 귀족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잔느(Jeanne Le Franc)도 음식점을 경영했던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로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칼빈은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나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는데,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2시간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그리고 8-10시까지는 오전 강의,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3시까지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다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그리고 기도회를 가진 후, 다시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인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는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살의 칼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가 재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보면, 법조계로 나가는 것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5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현자는 삶을 갖는 동안만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삶이 필요한 동안만 산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의 <관용론> 주해서도 출판했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었다.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년 ~ 기원전 271년)의 영향을 받은 세네카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에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한다. 1533년경에 칼빈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1533년 11월 1일에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취임 연설의 원고를 칼빈이 작성하게 되는데,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파리 남서부 400km에 위치한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세상 편하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 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다. 1534년 스물다섯의 칼빈은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칼빈도 결국 망명자가 되어 고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Guillaume Farel, 1489년-1565년 9월 13일)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빈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1534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프랑스 사람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칼빈은 참으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칼빈의 저술이나 설교에 대해 트집 잡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미사 대신 예배를 갱신해 나갔으며, 어른은 물론 어린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어린이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27세인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한 2년 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바젤로 갔다.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설립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죽자 1540년 8월 6일에 칼빈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1542년 7월 28일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자끄(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주제별로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의 탁월한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를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저술로 칼빈은 종교개혁시대의 유일한 신학자로 꼽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틴 루터가 행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실천해 나갔다면, 칼빈은 개혁신학을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개혁자였다. ‘기독교강요’를 비롯, 그의 탁월한 저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종교개혁은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고, 시대를 초월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개혁교회라는 말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1531년 10월 11일)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을 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비롯된 말이다.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칼빈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해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교회중심(Church-centered)이란 개혁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에게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이 주창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의 성격을 지닌다. 이제 그러한 노정에 선 목회자 한 사람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오전 6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지하철역 윌셔 앤 버몬(Wilshire/Vermont) 근처에 있는 나성열린문교회(LA Open Door Presbyterian Church; 1993년 2월28일 설립, 3281 W. 6th st. Los Angels, CA 90020) 새벽기도회. 주일 대예배처럼 성가대 찬양이 끝나고 담임 박헌성 목사가 1층 예배실을 가득 채운 회중과 누가복음 20장을 교독했다. 박 목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좋은 면을 보십니다. 좋게 보면 항상 좋고 나쁘게 보면 늘 나쁘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공관복음 전체를 보면 항상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성도는 항상 선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매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22절에서 묻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런 말은 함정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고 바치라 하면 반민족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가 담긴 속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지혜로우신 대답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악한 간계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논쟁하는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박 목사의 강론에 회중은 자주 아멘으로 화답했다. “사단에게 빠진 사람과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만 힘들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믿음의 지혜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직자가 세금을 바쳐야 되냐 안 바쳐야 되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미국은 성직자들이 대부분 바칩니다. 80년대 미시시피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 다닐 때 반 올랜이라는 교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시면서 강의시간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냐’ 물었습니다. 미국은 거의 다 바칩니다. 그런데 그분도 바치는 게 좋다 말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성직자가 세금을 안 바친다고 제재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싫은 사람은 안 바쳐도 됩니다. 이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거의가 세금을 바치죠. 국가에 세금을 안 바치면 혜택을 못 받습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장애인 주차석이 있고 성직자 주차석도 있었어요.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미국은 돈에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고 새긴 나라지만 무신론자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이 성직자에 대한 혜택이나 예우를 없애자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중부나 동남부 쪽으로 가면 보수 성향이 강합니다. 미국은 성직자의 세금 문제는 자율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직원은 세금을 떼는 걸 원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장 차림을 해 로스앤젤레스의 랍비라는 별명을 가진 단정한 모습의 박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금을 떼는 게 정상입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국가의 의무를 피하는 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성도는 국가의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 모든 의무를 감당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 가진 사람은 미국의 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런 게 성직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일들을 담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똑같이 사회와 국가의 의무를 똑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우리는 천국시민이기 때문에 교회일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장로나 권사나 집사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까. 세상은 일을 하면 보수를 받는데 교회는 일을 해도 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훨씬 힘든 삶을 삽니다. 한 세상의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을 등한시할 수도 없고 저 세상의 일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저 세상의 일을 모르니까 한 세상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보고 기도해 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두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도 우리는 늘 힘들다 생각을 안 합니다.” “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는데 국가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국가가 미국 같은 선한 정부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가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어 선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와 교회 간에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 같은 국가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지 않으니까요. 중국 같은 국가는 선교사를 감시하고 추방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선한 정부입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좋은 세상에 와서 사는 겁니다. 정부가 신앙을 압박하면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면 안 믿으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세상마다 다 좋은 나라가 아니라 조금씩 다르고 억압하는 나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에 협조한다든가 무조건 반대한다든가 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장점은 감사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그러나 국가가 단점이 있고 신앙을 핍박하면 당연히 맞서야 합니다. 교회사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절 1938년 제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1941년 제30회 총회(총회장 최지화)는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 날 아침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님은 면직을 당하고 투옥을 당해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자기들이 우상한테 절해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겠다는 목사를 벌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거 잘했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회개했습니다. 지금 주기철 목사님은 추앙받고 순교자로 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절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나중 잘못했다고 회개하셨습니다.” “미국을 보면 동쪽은 그래도 양반들이 좀 사는데 서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가 여기 살기는 하지만 여기는 교회 건축을 하면 세금을 붙여요. 동쪽에는 세금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기 살기가 좋으니까 자꾸 몰려와요. 동쪽에 있는 교회는 5천명이 모여도 남자들이 다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정장을 해요. 여기는 더워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미국은 아직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미국이 하나님 더 잘 섬기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아요.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문제가 저절로 잘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남자가 남자끼리 살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둘 중에 하나는 여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앙으로 살면 그런 문제로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태어나길 그러니 불쌍하다는 겁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남자는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는 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연극을 해보면 여자 역을 잘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지 삶을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되겠어요. 체질적으로 그렇게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살면 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정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지 이것저것 섞어서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 유대주의가 제일 싫어하는 게 혼합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하고 세상 것이 들어오면 버려야지 갈등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이라면 탁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박헌성 목사는 총신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와 공부를 하고 부목사로 사역을 한 뒤 38살 되던 1993년 2월28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장 중심지인 윌셔에 나성열린문교회(The Los Angeles Open Door Church)를 개척 설립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 교육, 선교, 봉사라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나성열린문교회를 설립해 3천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로 크게 부흥시킨 탁월한 목회자다. 2001년 교인수 3500여명으로 성장한 나성열린문교회는 LA 동쪽 끝자락인 6가와 보니브레아 스트리트가 만나는 부지에 2011년 3월 LA한인타운 인근 최대 규모의 한인교회 성전이 건축 10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000만달러가 투자된 건축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풋볼구장(5만8000스퀘어피트) 2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12만6000스퀘어피트 부지위에 빌딩 11층 높이의 성전이 솟아있다. 타운 인근 한인교회 예배당 중 가장 크다. 건물 외벽과 강단 계단도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2001년 1월 성전 부지와 현재 예배장소인 교육센터를 540만 달러에 구입하고 공사는 2005년 5월 시작했다. 땅 매입부터 따진다면 꼭 10년이고 공사는 6년 걸렸고 공사비만 5000만 달러 투입됐다. 본당은 1층과 2층 합해 2000석, 친교실은 1000석, 주차장은 500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파킹장에 실내 체육관까지 완비한 예배당이었다. 본당은 빌딩 11층 높이로 천장이 높아 시원하고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과 외벽과 강대상 계단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을 입혔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을 띈다. 본당 정면 벽에는 관이 22개인 대형 파이프 오르간도 놓여진다. 타운 한인교회로는 가장 컸다. 그 완공을 몇 달 앞두고 박헌성 목사는 2011년 3월 1일 당시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건축의 소명에 대해 말했다. "지난 18년간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교인이 많아졌고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장소를 찾다보니 LA 한인타운 내 대형집회를 열 만한 예배장소가 하나도 없더군요. 기도 중에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눈물어린 어려움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융자금 이자만 매달 16만달러다. 공사가 한달 연기되면 7~8만달러 추가된다. 난 집이 없다.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냈다. 성도들의 눈물로 기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11년 5월말 입주 예정이던 교회는 7년간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성전을 차압당했다. 당시 은행 측이 밝힌 차압 이유는 8개월간 180만 달러의 융자 페이먼트를 연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2년 9월 사용 중이던 건물에서도 퇴거를 당하고 채권은행인 ‘기독교 신용조합’(ECCU) 측과 2016년 지금까지 소유권을 놓고 소송 중에 있다. 박헌성 목사는 교회 성장과 교회 건축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이제 61세가 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박헌성 목사는 힘차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 학교를 맡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 125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4)라는 어엿한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되어 지난 38년 동안 이민교회에 필요한 개혁주의 지도자를 배출, 양성해 왔다. 총신대 총장을 지낸 김의환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이진태 목사를 초대 학감으로 시작된 이 신학대학은 1987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정식학위 (B.A., M.A., M.Div., D.Min.)를 줄 수 있는 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97년 미국 국토안보부로부터 F-1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연방정부교육부가 인정하는 신학대학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정회원 인준을 받았다. 2016년 2월달에는 연방정부 교육부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BACM (교회음악 학사) MACM (교회음악 석사) MAC (상담학 석사) 학위과정을 인가받았다. 현재는 총장에 박헌성 박사가 섬기고 있다. IRUS는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이 지향하는 신학을 교회와 세상에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취함에 있다. 본교는 칼빈주의 유산인 하나님 주권, 하나님 중심적 예배, 성경중심적 교육과 교회중심적인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열린교육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침으로 실질적인 사역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세계선교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이제 박헌성 목사는 어느 목회자도 감당하기 힘든 성장과 역경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태에서부터 60여년의 신앙의 삶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으로 제네바의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처럼 LA의 개혁주의자 칼빈 박헌성 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한국의 칼빈주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리라 믿는다. 랜드마크(landmark) 또는 경계표(境界標)는 원래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 그 뜻이 더 넓어져 박헌성 목사가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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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5
  • [더굳뉴스] 이승만과 전광훈의 광복절
    1998년 안기부장이 되고,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자 초대 국정원장이 되었던 이종찬 광복회장이 ‘밀정’ ‘일진회’ 같은 단어를 동원해 윤석열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성향 인물을 임명한 것이 갈등의 도화선이 됐다. 8·15 광복절 기념식이 따로 열렸고, 정치권에선 낯 뜨거운 친일 공세가 재점화됐다. 가치와 사실이 구별되지 않고 앞뒤가 뒤바뀐 권선징악적 역사관이 판을 치고 있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가 지나는 첫 번째 정차 역은 전 총신재단이사장 김기철 목사가 목회하는 정읍의 1946년 6월 3일이었다. 그 날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정부 세우자’고 연설한 정읍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 훌륭한 역사적 용단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또래의 목사일지라도 우파와 좌파가 만난다면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이 오갈 수 있을 것 같다. “6·25 터지니깐 국민들 보고 안심하라 방송해놓고 다리 끊고 도망쳤는데 뭘 잘해?” “전쟁 나면 당연히 ‘우리 군이 잘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방송하지 ‘큰일 났으니 도망가세요’라고 방송하냐? 갑자기 밀고 내려오니깐 반복해서 틀어주던 라디오도 못 끄고 화급히 후퇴한 거지. 한강 철교도 이승만이 끊으라고 한 게 아니고 군에서 안 되겠다 싶어 끊은 거야.” “이승만은 반민특위(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를 해산시킨 친일파잖아.” “그때는 국민 80%가 글도 못 읽고, 제주 4·3 여순 사건 터져서 혼란스러운데 정치인들끼리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였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같이 했다고 관료들 다 내쳐버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이승만은 일본이 반대해도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주장하면서 대한해협에서 고기 잡던 일본 어선들 막 잡아들였어. 이래도 이승만이 친일파냐? 네 말대로면 이승만보다 친일파 훨씬 많이 기용한 김일성도 친일파겠다.” “미국 꼭두각시 노릇 하느라 민족이 분열되고 전쟁까지 했는데?” “남한에서 선거도 하기 전에 김일성은 이미 소련 지원 받아서 군대 만들고 정부 만든 상태였어. 이런 상황에서 김구랑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봐야 협상이 되겠냐? 난 전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조그만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전혀 순종적이지 않았어. 오히려 빨리 휴전하고 싶은 미국이 이승만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권 세우려 했을 정도지. 굴하지 않고 직선제 개헌해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불리하게 진행되는 휴전 협상을 뒤집으려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 끝 전술을 썼어. 그렇게 미국한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 대한민국 침범은 곧 최강대국 미국 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라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 문제를 해결해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거야. 우크라이나 봐. 미군이 주둔했다면 감히 러시아가 쳐들어오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를 전광훈처럼 옹호하냐?” “뜬금없이 전광훈은 왜 나오냐. 이승만은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당선 확정이었어.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사람들이 장난친 거지. 독재자는 말이야, 국민의 재산을 국유화해놓고 제 맘대로 해. 김일성이 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바로 그거야. 맘대로 매매·상속도 못 하는데 뭔 분배? 독재 강화 수단이지. 이승만은 유상 몰수, 유상 분배해서 국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늘려줬어.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줘서 6·25 때 용감히 싸울 원동력이 된 거야. 그리고, 세상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 좌파가 칭송하는 등소평이 천안문에서 한 것처럼 탱크로 밀어버리지. 이승만은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에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어. 게다가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부족한 재정에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 이승만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을까.” “그래도 초대 대통령은 목숨 바쳐 무장 투쟁한 김구였어야 해!” “당신은 왜 잘사는 대한민국에서 문재인처럼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건국에 몸 바친 이승만은 싫어하고 김구만 좋아하냐? 국제정세를 잘 알고 활용한 이승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김씨 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었을 거야. 이승만이 원자력을 육성했으니깐 이렇게 싼값에 고속열차도 탈 수 있는 거지. 물론 이승만이 잘못한 점도 있었지만 넌 구구단도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미적분 할 수 있냐? 미국도 1965년에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한테 처음 투표권 줬어. 식민지를 막 벗어나서 모든 게 취약했던 나라의 첫 지도자가 생존 문제를 해결했으면 잘한 거 아니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게 ‘정읍 선언’이야. 이승만이 옳았다고!” “와, 너 고등학생 때는 안 그랬을 것 아니야. 이해찬과 달리 같은 용고 나온 놈이 어쩌다 극우로 변해버렸냐.” “이승만 존경하면 다 극우냐? 3대 대통령 선거 때 보면 오히려 대구가 좌익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전라남도가 이승만을 72% 지지했어. 전라도가 우파의 본산이었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달리 무능하고 비굴한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돼 1899년 1월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1875년 전주이씨 몰락, 양반의 ‘6대 독자’로 출생하여 아버지 종교인 유교와 어머니 종교인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을 위해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를 배워 출세할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미감리회 선교부가 설립한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영어공부에 몰두하였고 선교사와 토착 전도자들이 전하는 기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구 국가의 정치적 기본 개념인 ‘자유와 평등’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관여, 급진적 정치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일로 1899년 수구파에 의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혔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가 기억나면서 기도를 하였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절대자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종교적 개종을 하였다. 그런 이승만이 1904년 2월 7일 수감 된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12일 뒤인 2월 19일부터 넉 달 동안 비장한 심정으로 '독립정신'(獨立精神, The Spirit of Independence)을 저술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및 대한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저술하였으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서구 열강이 기독교에 기초하여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것을 서술하면서 한반도에 기독교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등 이상 사람이나 한문깨나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대한의 장래가 맨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승만은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순 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집필 중 이승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읽혔으며 탈고한 1904년에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경 때문에 대한제국 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이후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서문에서 그는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함은 외국이 침범함을 두려워 함도 아니요, 정부에서 보호하지 못함을 염려함도 아니요,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구성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0장에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11~25장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를, 26장부터는 국제정세를 기록했다. 주요 내용은 외국의 침범이나 정부의 무능보다 더 큰 문제는 백성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 곧 인민의 심성에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다. 인민이 독립심을 갖기 위해선 스스로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강렬한 믿음 위에서만 백성은 권리를 가진 근대적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은 모든 것의 근본을 기독교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근대 구미 문명의 기초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몽된 개인(enlightened individual)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된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고선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세워질 수 없음을 내다보았다. 조선은 한때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0~40%를 넘어섰던 신분제 사회였다.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기층 민중은 신분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노예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이 준 인권을 갖고 태어난 자유인임을 자각해야만 국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익히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면의 절대자 하나님과 직면하고 스스로 독립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전향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사에 머물 수 없다. 이따금 한 사람의 온전한 전향은 역사적 큰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1945년 분단 이래 북한의 지도부는 공산주의 명령경제, 폐쇄적인 고립주의, 반민주적 집단주의, 일인 지배 수령유일주의, 공격적 종족주의를 채택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난한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으로 남아 있다. 정반대로 남한의 지도부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개방적 시장 경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창의적 개인주의, 경쟁적 다원주의, 범인류적 국제 연대를 추구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 10위권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해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을 만든 악마적 이념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건전한 국가 철학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모택동이라는 독재자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좀비 떼처럼 날뛰었다. 마찬가지로 1980-90년대 대한민국에도 김일성의 홍위병을 자처했던 주사파가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과 한국의 주사파는 과연 왜 그토록 어리석은 개인숭배의 노예가 되고 말았나? 독립정신을 버린 채 좀비 정신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립심을 잃은 개인은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전체주의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청년 이승만이 7년 감옥살이에서 깨달은 진리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했던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 새로 책방을 열은 모양이다. 그 책방 맨 앞 진열대에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놓아두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사의 방법론으로 ‘실증주의 비판’ ‘식민 사관 비판’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의 하나로 도입한 실증주의를 비판하면 역사 연구가 이념 지향적으로 흐르기 쉽고, 이념 지향적 연구는 가치와 사실의 구별을 어렵게 한다. 또한 ‘식민 사관 비판’은 대한제국이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눈을 감는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롬 8:31-32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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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더굳뉴스] 강진상 목사 제자훈련
    거룩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푸른 바닷속으로 뜨겁게. 바닷가에 선교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흑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저 은혜로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저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이렇게 황홀하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년 2월 17일 - 1968년 10월 1일)는 말했다. "삶과 나이에 따르면, 모든 하루하루는 단 한 번밖에 오지 않기에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얻는다. 존중받지 못할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없다. 순간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강렬한 긴장을 느낀다. 이런 긴장 없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다가온다. 때론 상실감과 후회 속에서 공허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또한, 과르디니는 인생엔 여러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 여행은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의 단계를 밟아 죽음에 이른다. 시기마다 반드시 해결할 과제가 있고 이룩할 가치가 있으며 넘어야 할 위기가 있다. 하나의 시기를 완전히 살아내지 못하면, 즉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성취하며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물러남을 받아들이고 평생 이룩한 가치를 지켜낼 때, 노년의 삶은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진정한 것과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 속에서 통찰, 용기, 평정, 자존 같은 고상한 가치를 실현하는 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좋은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고 위기를 건너며 가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누구도 삶의 달콤함, 그 눈부신 기쁨을 알 수 없다." 1968년 10월 1일 로마노 과르디니는 83세로 지인들 기도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다음날 지인들이 모여 그의 부고 문구에 어떤 호칭을 사용할지 논의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개혁자였다. 하지만 그 어느 호칭도 그의 활동과 인물됨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오랜 논의 끝에 지인들은 '로마노 과르디니-주님의 종(Diener des Herrn)'으로 결정했다. 한평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살았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4시 무렵 양산의 평산교회 카페 비 마이 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에 앉아 있었다. 쾌적한 카페의 창가 햇살을 받으며 지용길 기자와 핫초코를 홀짝였다. 아파트 단지 초입 대로변에 세워진 평산교회는 4면이 각기 다른 모습을 내는 독특한 구조로 건축됐다. 정형화되고 고착화된 교회 이미지를 탈피하고 주민들에게 거부감 없는 교회로 다가서기 위한 세심한 관심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산교회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시설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한 배려도 있다. 그것은 교인과 지역 이웃을 향한 목회자의 애정과 사랑이 교회건축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누구든 언제나 교회시설을 이용하거나 지나갈 수 있도록 사방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 바로 뒤편 아파트단지 주민의 주차장 이용과 교회시설 이용 편의를 돕기 위해 교회 마당과 아파트를 잇는 계단도 별도로 설치했다. 교회 후문을 통해 1층 교회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황토찜질방이 있다. 성인 10여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황토찜질방은 여느 찜질방 못지않은 좋은 황토와 탈의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주민들이 휴식하며 교제할 수 있는 카페도 마련돼 있다. 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본당은 극장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교인들에게 편안한 예배와 기도 목적 외에도 평일에는 지역주민을 위해 결혼식장과 발표회 등의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3층 유아실은 아이들이 편히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 전용 화장실과 모유 수유를 위한 별도의 수유실도 마련했다. 4층에는 헬스장도 있다. 이 역시 지역주민을 위한 체력단련장으로 무상 제공되고 있다. 강진상 목사는 교회 설립 당시 평산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역을 품는 교회 사명을 위해 문화와 복지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역을 섬기는 노력 이상으로 선교와 전도를 위한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5시 강진상 목사와의 대담 시간이 돼 카페를 나와 교회에 들어서니 당회장실로 안내를 받았다. 평산교회는 3월 18일 토요일 교회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퇴식에 강진상 목사도 포함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의 은퇴는 아직 3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강진상 목사의 은퇴가 아니라 목회에 대한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부산과 울산 두 개의 광역시를 사이에 둔 경남 양산시에 지역 최대 규모의 교회가 있었다. - "와서 보니 목사님 큰 역사를 이루셨네요." 강진상 목사 - "아니 뭘." -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는데 목사님 은퇴식으로 잘못 알고 미리 찾아뵙게 됐습니다. 지금 평산교회에 몇 년 되신 겁니까." 강진상 목사 - "올해 35년 됐습니다." - "아. 그러시구나. 그럼 평산교회만 35년 되신 거죠." 강진상 목사 - "네 그렇습니다. 이 교회 개척을 35년 전 1988년에 했습니다." 지용길 기자가 촬영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목사님 평산교회가 이렇게 귀한 모습으로 부흥이 된 것, 참 놀랍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겸손한 웃음을 지었다. - "총신 몇 회세요." 강진상 목사 - "저는 총신을 좀 늦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86회입니다. 제 또래 목사들은 76회죠. 저는 10년 늦게 시작한 거죠." 사모님이 차를 내오셨다. - "어떻게 평산에 평산교회를 시작하시게 됐습니까." 강진상 목사 - "제가 본래 여기 있기 전에 월평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인데 교회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부산의 전포중앙교회 오세광 목사님 그분이 담임으로 계실 때 제가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강 전도사 선교에 대한 열정도 있는데 이 지역에 교회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분이 그런 도전적인 말씀을 하셔서 계기가 된 것입니다. 5년 뒤 주인이 집을 내달라고 하고 그린벨트이고 수원지 보호지역이라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이쪽으로 오게 된 겁니다." 그는 1988년 1월 전도사 시절, 양산군 정관면 월평리 280번지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했다. 1992년 2월 24일 현재의 양산시 평산동으로 교회 건물을 신축·이전하면서 이름을 평산교회로 바꿨다. 부산시 전포동 소재 전포중앙교회의 점잖게 잘생긴 담임 오세광 목사의 권면과 후원으로 시작됐다. 평산교회는 개척 초창기부터 제자훈련을 실시하며 알찬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교인 구성원 70% 이상이 초신자들의 회심으로 이뤄져 있을 정도로 건강한 교회상을 세웠다. 강진상 목사의 목회관은 예배하는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 교육하는 공동체,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난 2013년 9월 1일, 한국일보가 주최한 ‘2013 대한민국 자랑스런 한국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양산시 인재육성장학재단에 장학금 기부, 지역봉사 활동 등 지역공동체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종으로서의 헌신적인 목회를 일관했다. 강진상 목사는 기도로 교회를 세우고 한평생 나눔과 섬김을 실천했다. 지용길 기자가 물었다. - "신학을 늦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 전에 다른 일을 하셨습니까." 강진상 목사 -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이 강희성 목사님이셨고 저는 좋은 평신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부산의 모 교회 안수집사로 있다가 신학을 하게 됐습니다. (아들은 군목 중령으로 연무대교회 담임목사이고 딸은 결혼해 미국 워싱턴장로교회 출석하고 있다.) 늦게 교회를 개척하면서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평신도를 훈련해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지역을 섬기는 사역을 많이 해왔습니다. 노인대학, 지역아동센터, 장애아 사역, 교회 앞 카페도 기아대책(飢餓對策, Food for the Hungry, FH), 공정무역(개발도상국의 농가에게 덤핑가격이 아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여 해당 국가의 농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 운동) 카페 3호점 ‘비마이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입니다. 선교사들 파송해서 커피콩을 거두어 오면 우리가 공정무역 패어 트레이드(fair trade)라고 해서 팔아서 남는 이익금을 선교하는 목적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 행사들이 있으면 저희 교회에서 후원을 많이 합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라 불교권 파송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밖에 모르고 목회만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노회장을 하고 교회 연륜이 있다 보니까 노회도 섬겨야 되고 총회도 섬기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총회도 가게 되고 총대가 아니라도 영남지역 총신 운영이사로 갔을 때입니다. 우리 노회에 유명한 분들 많이 계시잖아요. 정연철 목사님, 배광식 목사님, 이성택 목사님, 다 총회 일하신 분들 가서 총회 일 하시도록 보내드리고 우리는 노회 섬기고 그랬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총신 운영이사장을 하게 되면서 총회를 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지역 정서도 부정적이라서 교회나 목사의 존재는 뭐랄까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마음속에 의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불교와 다른 차별화 스님과 목사가 뭐가 다른가. 교회 다니는 권사님과 장로님하고 절에 다니는 보살이 뭐가 다른가. 좀 차별화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 하기 힘든 지역봉사를 참 많이 해왔죠.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인식을 새롭게 할 일을 많이 했습니다." 1988년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기도로 교회를 시작한 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불교 영향력이 큰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미 타 교단에서 몇 번이나 교회를 세웠다가 철수를 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이라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강진상 목사는 25년 전 불모지와 같던 경남 양산 월평리에 내려와 부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남편 신대원 학비를 벌기 위해 할머니들과 밤늦게까지 채소를 다듬으며 농촌 지역의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고 이 마을 출신인 강 목사는 어른들을 만나기에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주민이 된 부부에게 다행히 마을 어르신들은 안 나와도 아이들이 교회 다니는 것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교육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92년 선교원을 시작으로 처음 사역이 어린이 전도였다. 당시 월평초등학교 전교생 80명 중 72명이 교회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 주일학교 아이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이루어 청년부를 이끌었다고 한다. 잠시 알프스에서 자라는 13가지 허브 추출물이 들어있다는 맛이 깔끔한 리콜라 허브차를 나누었다. - "실례지만 교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강진상 목사 - "코로나로 좀 침체됐지만 장년은 7백 명 정도이고 주일학교는 3백 명 정도입니다. 교세가 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회복은 됐지만 저희 교인 70프로는 전도돼서 오신 분들입니다. 수평 이동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전도해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 "처음 보고 규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터를 잡으신 건 언제입니까." 강진상 목사 - "네 번 옮겨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짓고 입당을 했죠. 땅은 주차장까지 해서 2천 평입니다. 2013년에 비전센터를 지었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지은 뒤 2013년 평산교회 비전센터의 완공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120평을 지역사회에 기부해 2~3층에서 강의실과 지역사회를 위한 결혼식장, 주민자치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지용길 기자가 물었다. - "총회를 섬기신 일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진상 목사 - "총회를 위한 일이라면 총신 운영이사회를 10년 넘게 섬겼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운영이사회 이사 노회 1년 분담금이 그 당시 3백만 원이었습니다. 그걸 낼만한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노회에서 지원해주지 않거든요. 자비 부담해야 되는데 선배 목사님들이 저한테 총신 운영이사회 좀 섬기라고 등 떠미는 바람에 떠밀려 하게 된 겁니다. 이사로 섬기다 이사장도 맡게 됐습니다. 요즘 총회를 위해 하는 일은 정치부 부장입니다. 총회다음세대운동본부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처음 생겼지만 세계개혁주의부흥협회 위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단과 교류하고 세계교류협회가 있지만 친선관계라면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주거나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기구입니다." 지용길 기자가 말했다. - "우리 총회를 위해서 정말 매우 중요한 부분들인데 총신운영이사장이라든지 중요한 직책을 잘 감당해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강진상 목사 - "미력하지만 그래도 호불호가 있지만 권순웅 총회장님 이번 3월 18일 토요일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그분은 총신(김영우가 총회와 총신을 분탕질하던 2010년대) 문제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삶에서 실현될 때 개혁이 되는 것이며 부흥이 되는 것'이라 외친 제102회 총회) 서기였고 제가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이라 그때부터 같이 비전과 꿈을 갖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총회장 되시면서 제가 정치부서기를 맡게 됐죠." - "권순웅 목사님 그 당시 참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셨죠." 강진상 목사 - "돌이켜보면 민감한 부분이지만 그 당시 개인 돈을 써가면서 TF팀을 30회 이상 모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SRT 고속열차 한 달 요금이 2백만 원 정도였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울산역에 주차하고 서울 올라가서 일보고 내려오고 했습니다.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는데 전계헌 총회장이 항상 외부에 갔다오면 하신 이야기가 교단 쪼개진다고 걱정할 정도로 사실 위기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이 그대로 가면 자칫하면 교단 쪼개질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총신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 "총신이 사유화되는 거였습니다." 강진상 목사 - "결론적으로 그 당시 (김영우를 상대로 한) 총신 문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했죠.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총신이 그대로 있고 총회가 갈라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사실 당시 김영우가 총회 부총회장 출마를 안 했거나 아니면 총장 사표라도 냈다면 총신 사유화 되는 거였다. 난공불락의 꾀돌이가 박무용에게 건넨 제 꾀에 빠져 법정 구속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진상 목사 - "역사가 훗날 평가하겠지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장군을 역적으로 모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해한다고 남들은 다 풀어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사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에 임시 이사가 들어오는 건 맞지만 정관이 살아 있으면 우리 교단의 목사 장로로 이사를 세울 수밖에 없어요. 사분위(사립학교에서 구성원 간 분쟁 등으로 인해 학교법인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 교육부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한 후 정상화하여 정이사 체제로 환원하는데 그 과정에서 임시이사의 선임과 해임 등을 심의하는 정부 기관)도 그 정관을 넘어설 수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앞에 있었던 구 이사들(김영우 지지 이사)이 김영우와 정관을 개정하면서 교단의 목사 장로 조항을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자로 바꾸자 여자 이사가 들어오게 되고 아무나 이사가 될 수 있게 됐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문구가 이사 선정 기준이 되니 너무 모호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는) 문호를 열어버리게 된 겁니다. 모든 책임은 운영이사회가 지게 됐죠. 사실 제 입장에서 너무 억울하죠. 그것은 운영이사회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정관을 고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분위가 그 정관대로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 거죠." - "사실 김영우가 주도한 거죠. 어쨌든 김영우가 무너지고 이렇게 된 것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 거죠." 강진상 목사 - "무엇보다도 당시 학내 소요로 신학생들이 양분되어 있었잖아요. 김영우 반대하고 수업 거부하며 데모한 학생들 또 수업받는 학생들. 그래서 그때 제가 수원 라비돌에서 칼빈, 대신, 광신 학생들까지 모아놓고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사이좋게 살다가 헤어졌다. 큰아들은 아빠 따라가고 작은아들은 엄마 따라갔다. 그건 자식들 책임이 아니다. 총신 사태도 마찬가지다. 김영우 반대하는 학생 측이 있고 찬성하는 측도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훗날 졸업하면 같은 기수 동창생인데 친일파, 반일파처럼 서로 상처를 가지게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전부 라비돌에 모아놓고 후원도 받고 자체 경비로 해결하면서 먹이고 재우면서 화합을 촉구했습니다. 학생들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2년 동안 고시부에 들어가서 그 학생들 다 강도사 고시 보고 목사 고시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총신에 가서 학생들 만나면 총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총회 믿고 싸우다 희생 당하면 책임지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데모를 충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회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총회가 책임질 것이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내가 져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고시부에 지원해 들어가서 고시부에서도 안 된다는 학생들을 실력이 아나라면 정치로는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변호했습니다. 영웅 대접할 필요도 없지만 역적 대접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먼 훗날 졸업하고 단독 목회를 하게 되면 기수가 동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서로 반대하고 상처받고 나가면 치유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당시 111회, 112회 목사 된 사람들 가끔 만나요. 만나면 그들이 먼저 인사하고 그때 고마웠습니다, 합니다. 총회장은 1년이고 총장은 계속 있으니 학생들은 총회 믿을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죠." 목사 강진상은 평산교회와 양산 주민을 위한 주님의 종인 것처럼 주님의 종이 될 총신 졸업생들을 위해 헌신한 주님의 종도 됐었다. 평산교회는 지난 2021년 4월 18일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 씨엠립 분원 건축을 위해 2천만 원의 헌금을 전달했다. 신학생들의 안정적인 교육을 위해 장학금 5백만 원도 별도로 지원했다.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총장 김재호 목사)는 144개 교회, 292개 기도처, 7899명의 청장년 성도, 1만8436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다. 캄보디아 북부의 중추 도시인 씨엠립의 목회자 양성과 훈련을 위해 장로교신학교 지난 2017년 9월 27일에 분원을 개교했다. 총회군선교회는 제23차 정기총회를 2022년 5월 26일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서 갖고, 신임회장에 강진상 목사를 선출하는 등 새 임원진을 조직했다. 강진상 신임회장을 비롯한 총회군선교회 회원들을 대한민국 전 부대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사명 아래 군선교에 더욱 진력하기로 다짐했다. 2022년 10월 25일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가 첫 번째 회의를 총회회관에서 열고 사업 방향을 논의했다. 임원 조직으로는 위원장에 강진상 목사가 세워졌다. 회의에 참석한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는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단은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순절이 은사 중심이라면 우리 개혁주의는 말씀과 기도, 전도 중심 운동으로 전 세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적임자가 바로 위원장 강진상 목사님이십니다.” 제자훈련에 있어 양육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평산교회는 교육공동체로서 행복아카데미와 제자대학 그리고 주일학교가 활성화 되어 있다. 확신하는 삶, 회복의 삶, 행복한 삶, 축복의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평산노인대학은 지역내에서 유명세를 탈 만큼 많은 노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증진을 위한 소외계층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교육인적자원부와 함께 저소득자, 저학력자, 고령자, 장애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자활기회 부여와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농촌의 특성상 노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평산노인대학은 다른 지역에서도 벤치마킹하고자 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평생학습도시 만들기를 희망하는 기초자치단체와 지역교육청과 협조, 그동안의 노하우를 컨설팅해주기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발굴, 지원하는 일로 이를 타 지역에도 보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산교회의 또 다른 주력 사역으로는 봉사하는 공동체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활동이다. 바로 지역 섬김을 실천하는 것으로 5년 전부터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내 돌봄이 필요한 아동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교육시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기 위한 일로 비전센터를 세우면서 29명을 50명까지 확대했다. 토요일 전면 휴무제가 시행되면서 사각지대에 놓인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토요창의학교도 운영 중이다. 여기에다 2010년부터는 행복한 나눔가게도 운영, 웅산 지역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평산점을 오픈하였다. 기증받은 물품들을 지역민들에게 싸게 공급하고 그 수익금으로 해외 굶주린 이웃과 지역사회를 돕는 기아대책에 지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목회자 자녀로 가난하지만 영성과 섬김의 정신을 배운 강진성 목사는 말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살면서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사회적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모두 중요한 부분이지만, 인생의 길을 안내받고 또한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평신교회를 만남으로 끝을 맺게 된다는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 시인 소강석 목사가 사랑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른 윤동주 시인이 초 한 대 같은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를 위해 노래했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재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성경은 말씀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7:27-29 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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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4
  • [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설교 십계명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바(娑婆)세계라고들 한다. 그게 불교 용어라고 생각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바는 감인(堪忍), 곧 ‘잘 참아야 한다’는 뜻을 지닌 인도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견디고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참으라는 것인가? 괴로움만 아니라 즐거운 것도 참아야 한다. 괴로움을 참으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즐거움을 참으라는 말은 좀 생소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참기 어려운 것이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참는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쾌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됨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에 대해서도 푹 빠지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싫은 것에 대해서도 인내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인욕(忍辱)과 인내(忍耐)다. 그런데 흔히 인욕이라면 남한테 당한 것을 잘 참는 것만 생각할 수 있다. 참을 인(忍)은 남한테 당하는 것만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나쁜 버릇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나의 급한 성질, 고집, 신경질을 잘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고무줄이나 용수철은 당기면 늘어나고 놓으면 오므라든다. 이것처럼 사람도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면 세상을 살면서 상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사바세계를 탈 없이 살아가는 지혜란 괴로움도 참고, 즐거움도 참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장창수 목사의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서는 그 은혜에 참지 않고 빠져들어야 한다.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목사의 삶은 성경을 연구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푹 잠겨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즐겁게 감내하며 즐기는 총회 큰 빛 장창수 목사의 이슈는 자신이 고안한 '설교 십계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설교 준비의 10가지 과정이다. 시인이기도 한 발행인 박종구 목사의 교계 최장수 잡지 '월간 목회'에 실린 장창수 목사의 글을 요약했다. 하나님의 소리를 전달하다. 담임목사로 섬긴 지 어느덧 20여 년이 되었지만 설교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다. 그러나 역시 설교만큼 가장 영향력 있고 설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가 성도들의 삶에 깃드는 설교를 하기 위해 나는 어떠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는가. 설교 준비의 10가지 과정 1. 관찰 첫째, 설교 준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관찰(Observation)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다. 박사과정 설교학 지도교수 하워드 핸드릭스와 해돈 로빈스 박사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관찰의 시간이었다. 어떤 경우는 한 구절에서 30가지 이상의 관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통해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성도의 삶에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2. 원문 연구 둘째, 성경 본문에 충실하려고 성경 원문에 대한 해석과 공신력 있는 학자들 견해를 살펴본다. 3. 회중의 입장 셋째, 가르치고 지적하는 목회자의 입장이 아닌 설교를 듣는 회중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Thougtfulness)와 따뜻함(Warmth)'을 우선한다. 4. 하나님 중심 넷째,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하나님 중심의 설교'(Theocentric Sermon)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5. 원포인트 다섯째, 대지 구분은 있지만 한 지붕 세 가족 설교가 아니라 설교 제목에서 던지는 몇 가지 질문이나 생각에 대한 구체적 해답으로 흘러가는 '원포인트'((one-point) 즉 '한 가지 처방' 설교를 지향한다. 6. 적용 여섯째,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성경적 강해 설교'(Biblical Exipository Preaching)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해석과 적용이 있다. 그 가운데 성도들에게 초점을 두고 고민하는 부분은 '적용'(Application)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성도들 입장이 되어 생각을 많이 한다. 적용이 없거나 약한 설교는 강해 설교의 본질과 목적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본문의 핵심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현실을 사는 성도의 삶에 적용시켜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성경 본문의 해석과 적용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해석에 치우치면 신학 강의로 흘러가기 쉽고 적용만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칫 인간적인 의견 제시나 충고의 곁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7. 예증과 예화 일곱째, 예증과 예화는 설교의 수단이 아니라 설교 그 자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예화 예증 자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을 위해 일간지 3, 석간지 1, 월간지 5, 그리고 각종 단편적인 글이 실린 글들을 읽고 일반 서점의 다양한 코너의 책을 구입해 읽는다. 더 나아가 여행이나 특별 행사나 일상생활 속에서 깨우침을 얻게 되면 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 여섯 가지 원칙에 따라 기록해 남겨 놓는다. 8. 적절한 유머 여덟째, 회중의 긴장을 풀어주고 설교자에게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적절한 유머(Humor 우스개)도 가끔 고민한다. 단, 절대로 성경 본문을 잊어버릴 만큼의 강한 것이나 썰렁한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간혹 성도들이 가볍게 활짝 웃고 넘어갈 정도의 유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성도들이 말씀의 메시지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유머(humor)는 몸 안에 흐르는 체액을 뜻하는 라틴어 후모르(humor)에서 왔다고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남을 웃기는 기질이 그 사람의 체액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학용어인 유머가 일상용어인 유머 우스개를 뜻하는 언어가 됐다. 9. 간결한 원고 아홉째, 간결체를 사용한 작가로는 헤밍웨이가 있다. 헤밍웨이는 간결체를 '스타카토 스타일'로 불렀다. 뉴스 원고와 신문 기사에도 간결체를 쓴다. 정보 전달용 글은 가독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결체는 작문의 기본이 되는 수사법이다. 문학적 작문과 학술적 작문 모두 간결체가 기본이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간결체를 즐겨 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역시 간결체이다. 그는 라틴 문학계에서 재치있는 간결체로 유명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 원고는 철저히 간결해야 할 것이다. 글을 ‘간결히’ 쓰는 것과 ‘짧게’ 쓰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말이다. 짧게 쓰는 것은 분량을 줄이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다. 반면에 간결히 쓰는 것은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면서도 말을 아껴야 하므로 상당한 내공을 필요로 한다. 설교문을 간결히 쓰기 위하여는 문장의 ‘내용’과 ‘어법’ 및 ‘설교문의 체계’, 세 가지가 모두 간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문장이 길고 복잡한 설교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간결한 언어의 설교는 회중에게 쉽고 명료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있다. 두 가지만 알아도 간결체를 쓰기 쉬워진다. 하나.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사실만 쓴다. 둘. 압축해서 쓴다. . 10. 열린 결말 열 번째, 원저자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거나 권위적으로 도전하는 일반적인 닫힌 결말은 정해진 결말을 제공한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상상력을 차단하는 것에 비해 열린 결말은 성도들이 토론할 '화제'를 던져주고 주로 질문을 통해 성도 스스로 답을 떠올려 적용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이 혼자서, 혹은 다른 성도들과, 혹은 설교자와 소통하며 의견을 주고받음으로써 설교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토론을 계속함으로써 설교의 효과를 넓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자발적 순종과 결단과 헌신을 유발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고 싶은 바람이다.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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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4
  • [더굳뉴스] 시인 소강석 목사
    ‘동양의 신비한 사상을 서양의 세련된 기법을 통해 마스터한 화가’라는 평을 듣는 서양화가 남관(南寬, 1913년 ~ 1990년 3월 30일)은 파리에서 자신의 처참한 생활을 반영하듯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태양을 받은 환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작품 '허물어진 고적'(古跡)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어둠에 파묻혀 있던 어떤 거대하고 고귀한 존재를 의미한다. 가치 있지만 가려져 있던 것, 그것이 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남관은 감춰진 의미, 다시 말해 비의(秘義)를 내비치는 게 예술의 힘이자 역할이라 생각했다. 예술은 정신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신비한’ 영역이다. 남관은 잔혹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악착같이 생을 이어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비참한 인간상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다고도 했다. 실은 남관 자신이 그런 인간이었다. 어둠과 고독에 파묻혀 있던 인간. 그러나 영원히 빛나는 것을 향해 나아갔던 예술가. '서울의 예수' '시인 예수' 저자 국민시인 정호승(1950- )은 그의 시 '고래를 위하여'를 애송하는 시인 소강석 목사에 대해 말했다. “소강석 목사님의 시에는 예수님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가 절망과 고통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일어나 걸어라!’ 하신 예수님의 그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과 고뇌가 깃든 시인 소강석 목사님 시집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안아주시고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말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꽃이 필 때도 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폭설에 갇혀 길을 잃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한다면 그 모든 날이 상처의 계절이 아닌 사랑의 계절이 되어 감싸주리라 믿습니다." 생전의 청빈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한경직(韓景職, 1902년 12월 29일 ~ 2000년 4월 19일) 목사 이후 대한민국의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는 소강석 목사일 것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예술가 남관처럼 견딘 그의 믿음의 삶을 시로 노래한다. 눈앞의 꽃 지고 나면 세상 모든 꽃 다 진줄 알았더니 일어나 눈을 들어보니 사방 천지가 다 꽃이었다 꽃 한 송이 졌다고 울지 마라 눈 한 번만 돌리면 세상이 다 꽃이다. 나는 몰랐다 저 하늘의 별이 차마 마주치지 못한 눈빛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저 지상의 꽃들이 차마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저 창문 밖으로 스치는 바람이 차마 지우지 못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1-6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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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더굳뉴스] 대신대학교 발전 세 기둥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가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1954년 4월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야간신학교로 개교한 이후,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거쳐 대신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정규대학 인가를 받고 오늘날 총신대(총장 박성규)와 더불어 총회를 떠받치는 대표하는 목회자 양성의 모판(seminary)이 됐다. 2000년 신학대학원과 2001년 일반대학원을 잇따라 설치하면서 도약하게 됐다. 이 무렵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한 김신길 장로가 부친 김추호 장로를 이은 엄청난 헌신을 보이면서 대신대학교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한국에선 의사라고 하면 수술하고 약 처방하는 치료(임상) 의사밖에 모른다. 미국 등 선진국엔 의사 과학자가 많이 있다. 의사 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고 새로운 치료법과 의약품, 의료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 사람이다. 의학, 과학, 공학 융합 연구 역량을 갖춰야 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 과학자다. 나머지는 생물학자, 생화학자 등이다. 치료만 해온 의사 중 수상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 의대에 수재가 다 모여도 노벨 의학상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세계 교회 역사상 의사로서 신학을 발전시킨 영국의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년 12월 20일-1981년 3월 1일)처럼 의사이면서 신학을 발전시킨 대신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암 전재규 장로가 있다. 백암 전재규 박사의 평전 '향기 짙은 인생 여정' 출판기념회가 2023년 3월 15일 대신대학교 인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향기 짙은 인생 여정'은 전재규 명예총장의 삶과 신앙을 오랜 친구인 만호 류재양 장로(대신대 명예이사)가 한 권의 책에 담아 편찬한 것이다. 전재규 박사는 “평전에 담긴 것처럼 저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출간이 이루어지기까지 애쓴 여러 동역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총회 정치가 류재양 장로도 저자 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높은 이상을 품고 계속해서 전진해온 백암의 삶을 평전으로 알리게 되어 몹시 기쁘다”라면서 “백암의 꿈인 청라 정신의 구현과 기독교 선교 역사기념관 건립을 반드시 함께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최대해 총장 사회로 진행된 감사예배는 재단부 이사장 김재국 목사 기도,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다니엘 12:2-4의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 ‘별과 같이 빛나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전재규 장로에 대해 “아름다운 인생이 보여주는 귀한 본을 우리도 따르자”라고 전했다.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 같은 혁신적인 리더는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사소통을 한다. 프레젠테이션, 설교, 강연, 회의, 자료 공개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총회나 노회나 교회의 목적을 강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이어 전 총회 역사위원장인 박창식 목사는 서평을 통해 “백암과 만호가 지닌 신실한 신앙과 따뜻한 인간애를 만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교훈이 담긴 서적” 대신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암 전재규 장로(대구서현교회)의 평전 '향기 짙은 인생 여정'은 87년 세월을 믿음의 사람, 충성 된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온 한 인생의 성장 과정 그리고 교회와 지역사회와 조국을 위한 헌신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평전의 필자는 전재규 장로의 막역지우이자 긴 세월을 함께 동역해 온 총회 유력 정치인 류재양 장로이다. 두 사람은 같은 대구 땅에서 성장하며 1980년 대신대학교 야간부를 나란히 졸업한 후 평신도지도자로서 총회와 지역 교계를 함께 섬겨왔다. 특히 모교인 대신대학교에서 지금도 전 장로는 명예총장으로, 류 장로는 명예이사로 자리를 지키며 학교 발전을 열심히 돕고 있다. 대구기독교의 정체성을 축약한 ‘청라 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도 두 사람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끌고 밀어주는 사이다. 의사 출신 장로의 신분으로 어떻게 해서 선지 동산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 또한 대구지역은 물론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상대로 선교 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에도 나서게 되었는지를 이 책은 세세하고 치밀하게 증언한다. 이미 본인의 회고록을 집필한 적이 있는 전 장로가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세상에 소개하게 된 것도 류 장로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라며 말했다. “40년간 저의 모든 것을 지켜본 만호가 세상을 위해 다음세대들을 위해 제 평전이 꼭 나와야 한다고 강권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대학교 개교 6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022년 4월 12일 학교 인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전재규 명예총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전재규 명예총장은 제5~6대 총장을 연임하며 학교의 기틀을 세우는 데 물심양면으로 앞장섰다. 대구서현교회에서 31년간 시무장로로 헌신한 전 장로는 경북 칠곡 동명에서 태어나 미션스쿨인 계성학교와 경북대 의대를 거쳐 미국에서 마취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동산기독병원의 간절한 요청으로 귀국한 전 장로는 계명대 의과대 학장, 대한마취과 학회장, 대한통증학회 학회장, 대한호스피스협회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복음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쓰임 받았다. 전재규 장로는 신앙인과 의료인 외에도 역사가로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했다. “나는 직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붙들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깊은 구렁으로 빠질 뻔한 곳에서도 나를 잡아주셨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오랜 세월 속에서도 내 가족들과 내 생활을 지켜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생명 나의 주님이십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점철된 삶을 산 전재규 장로는 대신대 5대, 6대 총장재임 시기, 30억 원을 학교 발전을 위해 기증한 바 있다. 전재규 장로의 헌신으로 대신대는 학교부지 확장, 종합관 건립, 도서관 이전, 기숙사 리노베이션 등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전 장로가 장학금으로 기탁한 3억 원을 ‘백암장학금’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전재규 장로는 2021년 1월 20일 또 다시 대신대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전 장로는 이날 대구시 북구 산격동 소재 본인과 미국에 거주하는 딸 명의의 부동산을 대신대에 증여했다. 이 부동산은 현재 시가로 27억 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전 장로가 증여한 부동산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매각절차를 밟는다. 매각대금 가운데 일부 조교수 급여보전 용도 외에 전액 장학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는 증여자인 전재규 장로의 뜻에 따른 것이다. 전재규 장로는 “총장 재임 때부터 학교가 살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하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라며 증여 배경을 설명했다. 대의명분이 있는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기쁜 마음으로 헌신해 온 전 장로는 대신대에 대한 남다른 신념과 가치가 있다. 전 장로는 “영남지역 복음화와 특히 대구가 제2 예루살렘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을 파수하는 대신대학교가 든든히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라고 했다. 대신대학교는 지난 2009년 7월 의학박사인 전재규 장로(대구서현교회 원로·80세)를 제5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전재규 장로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신대는 본격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시유지 5160평을 매입한 데 이어 진입도로 건설, 종합관 건립 등 거침없는 인프라 구축이 2013년 6월 30일 전재규 장로가 6대 총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이뤄졌다. 이를 위해 전 장로는 약사인 아내와 평생을 모은 거액의 사재를 대신대에 조건 없이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총장재임 시절 지급되던 급여와 판공비 일체를 받지 않고 직임을 감당했다. 전재규 장로에게 대신대는 어떤 의미인지 말했다. “의사로 한창 바쁜 시기에 대신대 야간학부에 들어가 신학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8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교수로, 재단이사와 감사, 심지어 총장까지 맡으면서 대신대와 함께 해 왔습니다. 신학 공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호스피스 협회를 처음으로 조직했고, 치유선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대신대 덕분이었습니다. 대신대는 6.25전쟁 도중 1952년에 시작되었으며, 영남지역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해 온 학교로, 공적 차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대구의 청라정신 회복을 부르짖으며 대구·경북 일대 근대역사문화 보존과 계승에 앞장서는 대신대 명예총장 전재규 장로. “대구를 다시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세우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대신대학교 명예총장인 전재규 장로에게는 가족 말고도 평생 동안 지극한 애정을 보낸 대상이 둘이나 더 있다. 하나는 ‘교회’이고 하나는 ‘대구’이다. 이 둘을 조합한 ‘대구의 교회’는 따라서 전 장로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릴 적 담쟁이 넝쿨 우거진 청라언덕 대구 선교부 주변을 거닐며 자랐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을 통해 사람들이 문맹에서 벗어나고 목숨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6·25 때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함께 예배하고 전도하는데 앞장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열심히 전도하며 외친 구호가 바로 ‘대구를 제2의 예루살렘으로’였다. 실제로 북쪽의 평양과 남쪽의 대구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선도한 대표적 도시들이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을 거쳐 대구에 찾아온 1896년 이후, 대구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일대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됐다. 평균 한 달에 한 교회씩 세워졌다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복음이 퍼져나갔다. “청라정신의 계승은 이 땅에 들어온 복음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우리 시대에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물려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동참과 기도가 절실합니다.” 한편, 백암 전재규 박사는 계성중·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클리브랜드 병원에서 전문의를 수료했다. 대한마취과 학회장, 대한통증학회 학회장, 한국의료윤리 교육학회장, 세계마취과학회 상임위원, 대한호스피스협회 초대 이사장,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대신대학교 총장, 동산의료원 박물관장, 대구3·1독립운동 재연 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마취과학』(1994) 등의 의학 전문서 및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2022, 우리 시대) 등 40여 권의 저서를 저술했다. 대신대학교를 발전시킨 세 기둥을 꼽는다면 재단이사장 김신길 장로 제5대 총장 전재규 박사 그리고 총회와 대신대 막후에서 활약하는 총회 정치가 류재양 장로를 말할 수 있겠다. 현 대신대 총장 최대해 박사는 개혁신학과 신앙적 경영 경륜을 갖춘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향후 총신대에 버금가는 대신대학교 발전을 이룰 큰 기동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은 말씀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2-3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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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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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LA 칼빈 박헌성 목사 제109회 총회 국제개혁신학교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우리 LA '열린문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 2024년 9월 24일 울산 우정교회 제109회 총회(총회장 김종혁) 미주서부노회 총대로 참석 IRUS(국제개혁대학교) 현황 보고 프랑스에서 이주한 제네바의 칼빈같이 한국에서 이주한 LA의 칼빈이라 할 수 있는 박헌성 목사는 누구일까. 독일 출생 정신분석가 카렌 호나이(Karen Horney, 1885.9.16 – 1952.12.4)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주의 기독교 신학자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노용(Noyo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칼빈(Gerard Calvin)은 부모가 경영하는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도제 교육을 받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후에는 시청 서기와 교구의 서기 임무를 거쳐 교구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가 됨으로써 귀족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잔느(Jeanne Le Franc)도 음식점을 경영했던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로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칼빈은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나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는데,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2시간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그리고 8-10시까지는 오전 강의,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3시까지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다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그리고 기도회를 가진 후, 다시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인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는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살의 칼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가 재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보면, 법조계로 나가는 것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5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현자는 삶을 갖는 동안만 산다고 생각하지 않고, 삶이 필요한 동안만 산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 65년 4월)의 <관용론> 주해서도 출판했다.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었다.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년 ~ 기원전 271년)의 영향을 받은 세네카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인간은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한 잘 살 수 없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에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한다. 1533년경에 칼빈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1533년 11월 1일에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취임 연설의 원고를 칼빈이 작성하게 되는데,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파리 남서부 400km에 위치한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세상 편하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 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다. 1534년 스물다섯의 칼빈은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칼빈도 결국 망명자가 되어 고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Guillaume Farel, 1489년-1565년 9월 13일)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빈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1534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프랑스 사람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칼빈은 참으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칼빈의 저술이나 설교에 대해 트집 잡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미사 대신 예배를 갱신해 나갔으며, 어른은 물론 어린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어린이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27세인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한 2년 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바젤로 갔다.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설립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죽자 1540년 8월 6일에 칼빈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1542년 7월 28일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자끄(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주제별로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의 탁월한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를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저술로 칼빈은 종교개혁시대의 유일한 신학자로 꼽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틴 루터가 행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실천해 나갔다면, 칼빈은 개혁신학을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개혁자였다. ‘기독교강요’를 비롯, 그의 탁월한 저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종교개혁은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고, 시대를 초월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개혁교회라는 말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지도자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1531년 10월 11일)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을 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비롯된 말이다.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칼빈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해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교회중심(Church-centered)이란 개혁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에게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이 주창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의 성격을 지닌다. 이제 그러한 노정에 선 목회자 한 사람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오전 6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지하철역 윌셔 앤 버몬(Wilshire/Vermont) 근처에 있는 나성열린문교회(LA Open Door Presbyterian Church; 1993년 2월28일 설립, 3281 W. 6th st. Los Angels, CA 90020) 새벽기도회. 주일 대예배처럼 성가대 찬양이 끝나고 담임 박헌성 목사가 1층 예배실을 가득 채운 회중과 누가복음 20장을 교독했다. 박 목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좋은 면을 보십니다. 좋게 보면 항상 좋고 나쁘게 보면 늘 나쁘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공관복음 전체를 보면 항상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성도는 항상 선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매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22절에서 묻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런 말은 함정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고 바치라 하면 반민족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가 담긴 속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지혜로우신 대답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악한 간계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논쟁하는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박 목사의 강론에 회중은 자주 아멘으로 화답했다. “사단에게 빠진 사람과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만 힘들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믿음의 지혜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직자가 세금을 바쳐야 되냐 안 바쳐야 되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미국은 성직자들이 대부분 바칩니다. 80년대 미시시피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 다닐 때 반 올랜이라는 교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시면서 강의시간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냐’ 물었습니다. 미국은 거의 다 바칩니다. 그런데 그분도 바치는 게 좋다 말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성직자가 세금을 안 바친다고 제재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싫은 사람은 안 바쳐도 됩니다. 이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거의가 세금을 바치죠. 국가에 세금을 안 바치면 혜택을 못 받습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장애인 주차석이 있고 성직자 주차석도 있었어요.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미국은 돈에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고 새긴 나라지만 무신론자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이 성직자에 대한 혜택이나 예우를 없애자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중부나 동남부 쪽으로 가면 보수 성향이 강합니다. 미국은 성직자의 세금 문제는 자율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직원은 세금을 떼는 걸 원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장 차림을 해 로스앤젤레스의 랍비라는 별명을 가진 단정한 모습의 박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금을 떼는 게 정상입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국가의 의무를 피하는 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성도는 국가의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 모든 의무를 감당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 가진 사람은 미국의 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런 게 성직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일들을 담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똑같이 사회와 국가의 의무를 똑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우리는 천국시민이기 때문에 교회일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장로나 권사나 집사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까. 세상은 일을 하면 보수를 받는데 교회는 일을 해도 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훨씬 힘든 삶을 삽니다. 한 세상의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을 등한시할 수도 없고 저 세상의 일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저 세상의 일을 모르니까 한 세상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보고 기도해 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두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도 우리는 늘 힘들다 생각을 안 합니다.” “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는데 국가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국가가 미국 같은 선한 정부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가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어 선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와 교회 간에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 같은 국가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지 않으니까요. 중국 같은 국가는 선교사를 감시하고 추방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선한 정부입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좋은 세상에 와서 사는 겁니다. 정부가 신앙을 압박하면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면 안 믿으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세상마다 다 좋은 나라가 아니라 조금씩 다르고 억압하는 나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에 협조한다든가 무조건 반대한다든가 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장점은 감사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그러나 국가가 단점이 있고 신앙을 핍박하면 당연히 맞서야 합니다. 교회사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절 1938년 제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1941년 제30회 총회(총회장 최지화)는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 날 아침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님은 면직을 당하고 투옥을 당해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자기들이 우상한테 절해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겠다는 목사를 벌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거 잘했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회개했습니다. 지금 주기철 목사님은 추앙받고 순교자로 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절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나중 잘못했다고 회개하셨습니다.” “미국을 보면 동쪽은 그래도 양반들이 좀 사는데 서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가 여기 살기는 하지만 여기는 교회 건축을 하면 세금을 붙여요. 동쪽에는 세금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기 살기가 좋으니까 자꾸 몰려와요. 동쪽에 있는 교회는 5천명이 모여도 남자들이 다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정장을 해요. 여기는 더워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미국은 아직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미국이 하나님 더 잘 섬기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아요.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문제가 저절로 잘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남자가 남자끼리 살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둘 중에 하나는 여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앙으로 살면 그런 문제로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태어나길 그러니 불쌍하다는 겁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남자는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는 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연극을 해보면 여자 역을 잘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지 삶을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되겠어요. 체질적으로 그렇게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살면 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정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지 이것저것 섞어서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 유대주의가 제일 싫어하는 게 혼합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하고 세상 것이 들어오면 버려야지 갈등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이라면 탁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박헌성 목사는 총신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와 공부를 하고 부목사로 사역을 한 뒤 38살 되던 1993년 2월28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장 중심지인 윌셔에 나성열린문교회(The Los Angeles Open Door Church)를 개척 설립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 교육, 선교, 봉사라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나성열린문교회를 설립해 3천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로 크게 부흥시킨 탁월한 목회자다. 2001년 교인수 3500여명으로 성장한 나성열린문교회는 LA 동쪽 끝자락인 6가와 보니브레아 스트리트가 만나는 부지에 2011년 3월 LA한인타운 인근 최대 규모의 한인교회 성전이 건축 10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000만달러가 투자된 건축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풋볼구장(5만8000스퀘어피트) 2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12만6000스퀘어피트 부지위에 빌딩 11층 높이의 성전이 솟아있다. 타운 인근 한인교회 예배당 중 가장 크다. 건물 외벽과 강단 계단도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2001년 1월 성전 부지와 현재 예배장소인 교육센터를 540만 달러에 구입하고 공사는 2005년 5월 시작했다. 땅 매입부터 따진다면 꼭 10년이고 공사는 6년 걸렸고 공사비만 5000만 달러 투입됐다. 본당은 1층과 2층 합해 2000석, 친교실은 1000석, 주차장은 500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파킹장에 실내 체육관까지 완비한 예배당이었다. 본당은 빌딩 11층 높이로 천장이 높아 시원하고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과 외벽과 강대상 계단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을 입혔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을 띈다. 본당 정면 벽에는 관이 22개인 대형 파이프 오르간도 놓여진다. 타운 한인교회로는 가장 컸다. 그 완공을 몇 달 앞두고 박헌성 목사는 2011년 3월 1일 당시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건축의 소명에 대해 말했다. "지난 18년간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교인이 많아졌고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장소를 찾다보니 LA 한인타운 내 대형집회를 열 만한 예배장소가 하나도 없더군요. 기도 중에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눈물어린 어려움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융자금 이자만 매달 16만달러다. 공사가 한달 연기되면 7~8만달러 추가된다. 난 집이 없다.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냈다. 성도들의 눈물로 기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11년 5월말 입주 예정이던 교회는 7년간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성전을 차압당했다. 당시 은행 측이 밝힌 차압 이유는 8개월간 180만 달러의 융자 페이먼트를 연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2년 9월 사용 중이던 건물에서도 퇴거를 당하고 채권은행인 ‘기독교 신용조합’(ECCU) 측과 2016년 지금까지 소유권을 놓고 소송 중에 있다. 박헌성 목사는 교회 성장과 교회 건축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이제 61세가 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박헌성 목사는 힘차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 학교를 맡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 125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4)라는 어엿한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되어 지난 38년 동안 이민교회에 필요한 개혁주의 지도자를 배출, 양성해 왔다. 총신대 총장을 지낸 김의환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이진태 목사를 초대 학감으로 시작된 이 신학대학은 1987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정식학위 (B.A., M.A., M.Div., D.Min.)를 줄 수 있는 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97년 미국 국토안보부로부터 F-1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연방정부교육부가 인정하는 신학대학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정회원 인준을 받았다. 2016년 2월달에는 연방정부 교육부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BACM (교회음악 학사) MACM (교회음악 석사) MAC (상담학 석사) 학위과정을 인가받았다. 현재는 총장에 박헌성 박사가 섬기고 있다. IRUS는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이 지향하는 신학을 교회와 세상에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취함에 있다. 본교는 칼빈주의 유산인 하나님 주권, 하나님 중심적 예배, 성경중심적 교육과 교회중심적인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열린교육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침으로 실질적인 사역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세계선교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이제 박헌성 목사는 어느 목회자도 감당하기 힘든 성장과 역경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태에서부터 60여년의 신앙의 삶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으로 제네바의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처럼 LA의 개혁주의자 칼빈 박헌성 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한국의 칼빈주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리라 믿는다. 랜드마크(landmark) 또는 경계표(境界標)는 원래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 그 뜻이 더 넓어져 박헌성 목사가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 13:23 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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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25
  • [더굳뉴스] 이승만과 전광훈의 광복절
    1998년 안기부장이 되고,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자 초대 국정원장이 되었던 이종찬 광복회장이 ‘밀정’ ‘일진회’ 같은 단어를 동원해 윤석열 정부를 맹렬히 비판했다. 독립기념관장에 뉴라이트 성향 인물을 임명한 것이 갈등의 도화선이 됐다. 8·15 광복절 기념식이 따로 열렸고, 정치권에선 낯 뜨거운 친일 공세가 재점화됐다. 가치와 사실이 구별되지 않고 앞뒤가 뒤바뀐 권선징악적 역사관이 판을 치고 있다.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가 지나는 첫 번째 정차 역은 전 총신재단이사장 김기철 목사가 목회하는 정읍의 1946년 6월 3일이었다. 그 날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정부 세우자’고 연설한 정읍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 훌륭한 역사적 용단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또래의 목사일지라도 우파와 좌파가 만난다면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이 오갈 수 있을 것 같다. “6·25 터지니깐 국민들 보고 안심하라 방송해놓고 다리 끊고 도망쳤는데 뭘 잘해?” “전쟁 나면 당연히 ‘우리 군이 잘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방송하지 ‘큰일 났으니 도망가세요’라고 방송하냐? 갑자기 밀고 내려오니깐 반복해서 틀어주던 라디오도 못 끄고 화급히 후퇴한 거지. 한강 철교도 이승만이 끊으라고 한 게 아니고 군에서 안 되겠다 싶어 끊은 거야.” “이승만은 반민특위(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를 해산시킨 친일파잖아.” “그때는 국민 80%가 글도 못 읽고, 제주 4·3 여순 사건 터져서 혼란스러운데 정치인들끼리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였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같이 했다고 관료들 다 내쳐버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이승만은 일본이 반대해도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주장하면서 대한해협에서 고기 잡던 일본 어선들 막 잡아들였어. 이래도 이승만이 친일파냐? 네 말대로면 이승만보다 친일파 훨씬 많이 기용한 김일성도 친일파겠다.” “미국 꼭두각시 노릇 하느라 민족이 분열되고 전쟁까지 했는데?” “남한에서 선거도 하기 전에 김일성은 이미 소련 지원 받아서 군대 만들고 정부 만든 상태였어. 이런 상황에서 김구랑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봐야 협상이 되겠냐? 난 전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조그만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전혀 순종적이지 않았어. 오히려 빨리 휴전하고 싶은 미국이 이승만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권 세우려 했을 정도지. 굴하지 않고 직선제 개헌해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불리하게 진행되는 휴전 협상을 뒤집으려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 끝 전술을 썼어. 그렇게 미국한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 대한민국 침범은 곧 최강대국 미국 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라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 문제를 해결해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거야. 우크라이나 봐. 미군이 주둔했다면 감히 러시아가 쳐들어오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를 전광훈처럼 옹호하냐?” “뜬금없이 전광훈은 왜 나오냐. 이승만은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당선 확정이었어.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사람들이 장난친 거지. 독재자는 말이야, 국민의 재산을 국유화해놓고 제 맘대로 해. 김일성이 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바로 그거야. 맘대로 매매·상속도 못 하는데 뭔 분배? 독재 강화 수단이지. 이승만은 유상 몰수, 유상 분배해서 국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늘려줬어.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줘서 6·25 때 용감히 싸울 원동력이 된 거야. 그리고, 세상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 좌파가 칭송하는 등소평이 천안문에서 한 것처럼 탱크로 밀어버리지. 이승만은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에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어. 게다가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부족한 재정에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 이승만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을까.” “그래도 초대 대통령은 목숨 바쳐 무장 투쟁한 김구였어야 해!” “당신은 왜 잘사는 대한민국에서 문재인처럼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건국에 몸 바친 이승만은 싫어하고 김구만 좋아하냐? 국제정세를 잘 알고 활용한 이승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김씨 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었을 거야. 이승만이 원자력을 육성했으니깐 이렇게 싼값에 고속열차도 탈 수 있는 거지. 물론 이승만이 잘못한 점도 있었지만 넌 구구단도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미적분 할 수 있냐? 미국도 1965년에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한테 처음 투표권 줬어. 식민지를 막 벗어나서 모든 게 취약했던 나라의 첫 지도자가 생존 문제를 해결했으면 잘한 거 아니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게 ‘정읍 선언’이야. 이승만이 옳았다고!” “와, 너 고등학생 때는 안 그랬을 것 아니야. 이해찬과 달리 같은 용고 나온 놈이 어쩌다 극우로 변해버렸냐.” “이승만 존경하면 다 극우냐? 3대 대통령 선거 때 보면 오히려 대구가 좌익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전라남도가 이승만을 72% 지지했어. 전라도가 우파의 본산이었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달리 무능하고 비굴한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돼 1899년 1월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1875년 전주이씨 몰락, 양반의 ‘6대 독자’로 출생하여 아버지 종교인 유교와 어머니 종교인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을 위해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를 배워 출세할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미감리회 선교부가 설립한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영어공부에 몰두하였고 선교사와 토착 전도자들이 전하는 기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구 국가의 정치적 기본 개념인 ‘자유와 평등’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관여, 급진적 정치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일로 1899년 수구파에 의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혔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가 기억나면서 기도를 하였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절대자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종교적 개종을 하였다. 그런 이승만이 1904년 2월 7일 수감 된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12일 뒤인 2월 19일부터 넉 달 동안 비장한 심정으로 '독립정신'(獨立精神, The Spirit of Independence)을 저술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및 대한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저술하였으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서구 열강이 기독교에 기초하여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것을 서술하면서 한반도에 기독교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등 이상 사람이나 한문깨나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대한의 장래가 맨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승만은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순 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집필 중 이승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읽혔으며 탈고한 1904년에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경 때문에 대한제국 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이후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서문에서 그는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함은 외국이 침범함을 두려워 함도 아니요, 정부에서 보호하지 못함을 염려함도 아니요,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구성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0장에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11~25장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를, 26장부터는 국제정세를 기록했다. 주요 내용은 외국의 침범이나 정부의 무능보다 더 큰 문제는 백성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 곧 인민의 심성에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다. 인민이 독립심을 갖기 위해선 스스로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강렬한 믿음 위에서만 백성은 권리를 가진 근대적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은 모든 것의 근본을 기독교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근대 구미 문명의 기초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몽된 개인(enlightened individual)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된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고선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세워질 수 없음을 내다보았다. 조선은 한때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0~40%를 넘어섰던 신분제 사회였다.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기층 민중은 신분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노예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이 준 인권을 갖고 태어난 자유인임을 자각해야만 국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익히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면의 절대자 하나님과 직면하고 스스로 독립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전향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사에 머물 수 없다. 이따금 한 사람의 온전한 전향은 역사적 큰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1945년 분단 이래 북한의 지도부는 공산주의 명령경제, 폐쇄적인 고립주의, 반민주적 집단주의, 일인 지배 수령유일주의, 공격적 종족주의를 채택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난한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으로 남아 있다. 정반대로 남한의 지도부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개방적 시장 경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창의적 개인주의, 경쟁적 다원주의, 범인류적 국제 연대를 추구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 10위권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해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을 만든 악마적 이념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건전한 국가 철학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모택동이라는 독재자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좀비 떼처럼 날뛰었다. 마찬가지로 1980-90년대 대한민국에도 김일성의 홍위병을 자처했던 주사파가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과 한국의 주사파는 과연 왜 그토록 어리석은 개인숭배의 노예가 되고 말았나? 독립정신을 버린 채 좀비 정신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립심을 잃은 개인은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전체주의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청년 이승만이 7년 감옥살이에서 깨달은 진리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했던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 새로 책방을 열은 모양이다. 그 책방 맨 앞 진열대에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놓아두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사의 방법론으로 ‘실증주의 비판’ ‘식민 사관 비판’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의 하나로 도입한 실증주의를 비판하면 역사 연구가 이념 지향적으로 흐르기 쉽고, 이념 지향적 연구는 가치와 사실의 구별을 어렵게 한다. 또한 ‘식민 사관 비판’은 대한제국이 스스로 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눈을 감는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롬 8:31-32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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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26
  • [더굳뉴스] 강진상 목사 제자훈련
    거룩한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푸른 바닷속으로 뜨겁게. 바닷가에 선교사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흑발의 젊은이와 백발의 늙은이가. 늙은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저 은혜로 쉬게 되리라. 이렇게 편안히. 젊은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죽을 때도 저 영광의 광채가 내리기를. 이렇게 황홀하게.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이자 작가,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 1885년 2월 17일 - 1968년 10월 1일)는 말했다. "삶과 나이에 따르면, 모든 하루하루는 단 한 번밖에 오지 않기에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함을 얻는다. 존중받지 못할 순간도 의미 없이 지나가는 순간도 없다. 순간의 존엄함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의 삶을 온전히 누리려는 강렬한 긴장을 느낀다. 이런 긴장 없는 삶은 단조롭고 지루하게 다가온다. 때론 상실감과 후회 속에서 공허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위험도 있다." 또한, 과르디니는 인생엔 여러 단계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인생 여행은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의 단계를 밟아 죽음에 이른다. 시기마다 반드시 해결할 과제가 있고 이룩할 가치가 있으며 넘어야 할 위기가 있다. 하나의 시기를 완전히 살아내지 못하면, 즉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고 가치를 성취하며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물러남을 받아들이고 평생 이룩한 가치를 지켜낼 때, 노년의 삶은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진정한 것과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 속에서 통찰, 용기, 평정, 자존 같은 고상한 가치를 실현하는 현자의 삶을 살 수 있다. 좋은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을 견디고 위기를 건너며 가치를 이룩하지 않으면 누구도 삶의 달콤함, 그 눈부신 기쁨을 알 수 없다." 1968년 10월 1일 로마노 과르디니는 83세로 지인들 기도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다음날 지인들이 모여 그의 부고 문구에 어떤 호칭을 사용할지 논의했다. 그는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개혁자였다. 하지만 그 어느 호칭도 그의 활동과 인물됨을 모두 담아낼 수 없었다. 오랜 논의 끝에 지인들은 '로마노 과르디니-주님의 종(Diener des Herrn)'으로 결정했다. 한평생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받들어 모시며 살았던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4시 무렵 양산의 평산교회 카페 비 마이 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에 앉아 있었다. 쾌적한 카페의 창가 햇살을 받으며 지용길 기자와 핫초코를 홀짝였다. 아파트 단지 초입 대로변에 세워진 평산교회는 4면이 각기 다른 모습을 내는 독특한 구조로 건축됐다. 정형화되고 고착화된 교회 이미지를 탈피하고 주민들에게 거부감 없는 교회로 다가서기 위한 세심한 관심이 없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평산교회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시설은 물론 지역사회를 위한 배려도 있다. 그것은 교인과 지역 이웃을 향한 목회자의 애정과 사랑이 교회건축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누구든 언제나 교회시설을 이용하거나 지나갈 수 있도록 사방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 바로 뒤편 아파트단지 주민의 주차장 이용과 교회시설 이용 편의를 돕기 위해 교회 마당과 아파트를 잇는 계단도 별도로 설치했다. 교회 후문을 통해 1층 교회 건물 내부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쪽에 황토찜질방이 있다. 성인 10여 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황토찜질방은 여느 찜질방 못지않은 좋은 황토와 탈의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 주민들이 휴식하며 교제할 수 있는 카페도 마련돼 있다. 천 명이 예배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진 본당은 극장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이는 교인들에게 편안한 예배와 기도 목적 외에도 평일에는 지역주민을 위해 결혼식장과 발표회 등의 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3층 유아실은 아이들이 편히 사용할 수 있는 어린이 전용 화장실과 모유 수유를 위한 별도의 수유실도 마련했다. 4층에는 헬스장도 있다. 이 역시 지역주민을 위한 체력단련장으로 무상 제공되고 있다. 강진상 목사는 교회 설립 당시 평산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지역을 품는 교회 사명을 위해 문화와 복지와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해 지역을 섬기는 노력 이상으로 선교와 전도를 위한 교회의 본질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2023년 3월 15일 오후 5시 강진상 목사와의 대담 시간이 돼 카페를 나와 교회에 들어서니 당회장실로 안내를 받았다. 평산교회는 3월 18일 토요일 교회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은퇴식에 강진상 목사도 포함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의 은퇴는 아직 3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강진상 목사의 은퇴가 아니라 목회에 대한 대담을 나누게 되었다. 부산과 울산 두 개의 광역시를 사이에 둔 경남 양산시에 지역 최대 규모의 교회가 있었다. - "와서 보니 목사님 큰 역사를 이루셨네요." 강진상 목사 - "아니 뭘." - "장로 은퇴식과 직분자 임직식을 앞두고 있는데 목사님 은퇴식으로 잘못 알고 미리 찾아뵙게 됐습니다. 지금 평산교회에 몇 년 되신 겁니까." 강진상 목사 - "올해 35년 됐습니다." - "아. 그러시구나. 그럼 평산교회만 35년 되신 거죠." 강진상 목사 - "네 그렇습니다. 이 교회 개척을 35년 전 1988년에 했습니다." 지용길 기자가 촬영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목사님 평산교회가 이렇게 귀한 모습으로 부흥이 된 것, 참 놀랍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겸손한 웃음을 지었다. - "총신 몇 회세요." 강진상 목사 - "저는 총신을 좀 늦게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86회입니다. 제 또래 목사들은 76회죠. 저는 10년 늦게 시작한 거죠." 사모님이 차를 내오셨다. - "어떻게 평산에 평산교회를 시작하시게 됐습니까." 강진상 목사 - "제가 본래 여기 있기 전에 월평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인데 교회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저는 부산의 전포중앙교회 오세광 목사님 그분이 담임으로 계실 때 제가 전도사로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이 저희 집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강 전도사 선교에 대한 열정도 있는데 이 지역에 교회가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분이 그런 도전적인 말씀을 하셔서 계기가 된 것입니다. 5년 뒤 주인이 집을 내달라고 하고 그린벨트이고 수원지 보호지역이라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어 이쪽으로 오게 된 겁니다." 그는 1988년 1월 전도사 시절, 양산군 정관면 월평리 280번지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했다. 1992년 2월 24일 현재의 양산시 평산동으로 교회 건물을 신축·이전하면서 이름을 평산교회로 바꿨다. 부산시 전포동 소재 전포중앙교회의 점잖게 잘생긴 담임 오세광 목사의 권면과 후원으로 시작됐다. 평산교회는 개척 초창기부터 제자훈련을 실시하며 알찬 성장을 거듭했다. 또한 교인 구성원 70% 이상이 초신자들의 회심으로 이뤄져 있을 정도로 건강한 교회상을 세웠다. 강진상 목사의 목회관은 예배하는 공동체, 선교하는 공동체, 교육하는 공동체, 봉사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지난 2013년 9월 1일, 한국일보가 주최한 ‘2013 대한민국 자랑스런 한국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양산시 인재육성장학재단에 장학금 기부, 지역봉사 활동 등 지역공동체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종으로서의 헌신적인 목회를 일관했다. 강진상 목사는 기도로 교회를 세우고 한평생 나눔과 섬김을 실천했다. 지용길 기자가 물었다. - "신학을 늦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 전에 다른 일을 하셨습니까." 강진상 목사 -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이 강희성 목사님이셨고 저는 좋은 평신도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부산의 모 교회 안수집사로 있다가 신학을 하게 됐습니다. (아들은 군목 중령으로 연무대교회 담임목사이고 딸은 결혼해 미국 워싱턴장로교회 출석하고 있다.) 늦게 교회를 개척하면서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평신도를 훈련해 사역을 같이 했습니다. 지역을 섬기는 사역을 많이 해왔습니다. 노인대학, 지역아동센터, 장애아 사역, 교회 앞 카페도 기아대책(飢餓對策, Food for the Hungry, FH), 공정무역(개발도상국의 농가에게 덤핑가격이 아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여 해당 국가의 농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 운동) 카페 3호점 ‘비마이프렌드’(Be My Friend 나의 친구가 되어라)입니다. 선교사들 파송해서 커피콩을 거두어 오면 우리가 공정무역 패어 트레이드(fair trade)라고 해서 팔아서 남는 이익금을 선교하는 목적으로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역 행사들이 있으면 저희 교회에서 후원을 많이 합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라 불교권 파송 선교사라는 마음가짐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목회밖에 모르고 목회만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노회장을 하고 교회 연륜이 있다 보니까 노회도 섬겨야 되고 총회도 섬기게 됐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총회도 가게 되고 총대가 아니라도 영남지역 총신 운영이사로 갔을 때입니다. 우리 노회에 유명한 분들 많이 계시잖아요. 정연철 목사님, 배광식 목사님, 이성택 목사님, 다 총회 일하신 분들 가서 총회 일 하시도록 보내드리고 우리는 노회 섬기고 그랬습니다." 강진상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총신 운영이사장을 하게 되면서 총회를 섬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양산이 불교가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교회에 대해 지역 정서도 부정적이라서 교회나 목사의 존재는 뭐랄까 무시하고 하찮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마음속에 의분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뭔가 불교와 다른 차별화 스님과 목사가 뭐가 다른가. 교회 다니는 권사님과 장로님하고 절에 다니는 보살이 뭐가 다른가. 좀 차별화를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전통적인 교회에서 하기 힘든 지역봉사를 참 많이 해왔죠. 교회나 목회자에 대해서 인식을 새롭게 할 일을 많이 했습니다." 1988년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기도로 교회를 시작한 그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불교 영향력이 큰 지역이라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미 타 교단에서 몇 번이나 교회를 세웠다가 철수를 하는 어려움을 겪었던 지역이라 지역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강진상 목사는 25년 전 불모지와 같던 경남 양산 월평리에 내려와 부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이었다. 사모님은 남편 신대원 학비를 벌기 위해 할머니들과 밤늦게까지 채소를 다듬으며 농촌 지역의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고 이 마을 출신인 강 목사는 어른들을 만나기에 바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주민이 된 부부에게 다행히 마을 어르신들은 안 나와도 아이들이 교회 다니는 것은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교육하는 공동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92년 선교원을 시작으로 처음 사역이 어린이 전도였다. 당시 월평초등학교 전교생 80명 중 72명이 교회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 주일학교 아이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이루어 청년부를 이끌었다고 한다. 잠시 알프스에서 자라는 13가지 허브 추출물이 들어있다는 맛이 깔끔한 리콜라 허브차를 나누었다. - "실례지만 교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강진상 목사 - "코로나로 좀 침체됐지만 장년은 7백 명 정도이고 주일학교는 3백 명 정도입니다. 교세가 천 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이 회복은 됐지만 저희 교인 70프로는 전도돼서 오신 분들입니다. 수평 이동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전도해서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 "처음 보고 규모에 깜짝 놀랐는데 여기에 터를 잡으신 건 언제입니까." 강진상 목사 - "네 번 옮겨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짓고 입당을 했죠. 땅은 주차장까지 해서 2천 평입니다. 2013년에 비전센터를 지었습니다." 2005년 본당을 지은 뒤 2013년 평산교회 비전센터의 완공은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 활동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120평을 지역사회에 기부해 2~3층에서 강의실과 지역사회를 위한 결혼식장, 주민자치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지용길 기자가 물었다. - "총회를 섬기신 일을 소개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강진상 목사 - "총회를 위한 일이라면 총신 운영이사회를 10년 넘게 섬겼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운영이사회 이사 노회 1년 분담금이 그 당시 3백만 원이었습니다. 그걸 낼만한 교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노회에서 지원해주지 않거든요. 자비 부담해야 되는데 선배 목사님들이 저한테 총신 운영이사회 좀 섬기라고 등 떠미는 바람에 떠밀려 하게 된 겁니다. 이사로 섬기다 이사장도 맡게 됐습니다. 요즘 총회를 위해 하는 일은 정치부 부장입니다. 총회다음세대운동본부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처음 생겼지만 세계개혁주의부흥협회 위원장도 맡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개혁주의 신앙을 갖고 있는 교단과 교류하고 세계교류협회가 있지만 친선관계라면 우리 교단이 갖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을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보를 주거나 함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기구입니다." 지용길 기자가 말했다. - "우리 총회를 위해서 정말 매우 중요한 부분들인데 총신운영이사장이라든지 중요한 직책을 잘 감당해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강진상 목사 - "미력하지만 그래도 호불호가 있지만 권순웅 총회장님 이번 3월 18일 토요일 오셔서 설교하십니다. 그분은 총신(김영우가 총회와 총신을 분탕질하던 2010년대) 문제 때문에 ('하나님 말씀이 삶에서 실현될 때 개혁이 되는 것이며 부흥이 되는 것'이라 외친 제102회 총회) 서기였고 제가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이라 그때부터 같이 비전과 꿈을 갖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총회장 되시면서 제가 정치부서기를 맡게 됐죠." - "권순웅 목사님 그 당시 참 열정적으로 뛰어다니셨죠." 강진상 목사 - "돌이켜보면 민감한 부분이지만 그 당시 개인 돈을 써가면서 TF팀을 30회 이상 모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SRT 고속열차 한 달 요금이 2백만 원 정도였습니다. 일주일에 이틀씩 울산역에 주차하고 서울 올라가서 일보고 내려오고 했습니다. 맡은 일에는 책임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서 그랬는데 전계헌 총회장이 항상 외부에 갔다오면 하신 이야기가 교단 쪼개진다고 걱정할 정도로 사실 위기였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이 그대로 가면 자칫하면 교단 쪼개질 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총신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 "총신이 사유화되는 거였습니다." 강진상 목사 - "결론적으로 그 당시 (김영우를 상대로 한) 총신 문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했죠. 여러 가지 과정이 있었지만 총신이 그대로 있고 총회가 갈라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 은혜였습니다." 사실 당시 김영우가 총회 부총회장 출마를 안 했거나 아니면 총장 사표라도 냈다면 총신 사유화 되는 거였다. 난공불락의 꾀돌이가 박무용에게 건넨 제 꾀에 빠져 법정 구속되는 바람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진상 목사 - "역사가 훗날 평가하겠지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장군을 역적으로 모는 경우가 있습니다. 화해한다고 남들은 다 풀어 영웅으로 만들어 놓고... 사실 잘 아시겠지만 총신에 임시 이사가 들어오는 건 맞지만 정관이 살아 있으면 우리 교단의 목사 장로로 이사를 세울 수밖에 없어요. 사분위(사립학교에서 구성원 간 분쟁 등으로 인해 학교법인의 기능이 마비되는 경우 교육부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한 후 정상화하여 정이사 체제로 환원하는데 그 과정에서 임시이사의 선임과 해임 등을 심의하는 정부 기관)도 그 정관을 넘어설 수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앞에 있었던 구 이사들(김영우 지지 이사)이 김영우와 정관을 개정하면서 교단의 목사 장로 조항을 개혁주의 신학을 가진 자로 바꾸자 여자 이사가 들어오게 되고 아무나 이사가 될 수 있게 됐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문구가 이사 선정 기준이 되니 너무 모호하잖아요. 그런 것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는) 문호를 열어버리게 된 겁니다. 모든 책임은 운영이사회가 지게 됐죠. 사실 제 입장에서 너무 억울하죠. 그것은 운영이사회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정관을 고쳤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분위가 그 정관대로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 거죠." - "사실 김영우가 주도한 거죠. 어쨌든 김영우가 무너지고 이렇게 된 것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 거죠." 강진상 목사 - "무엇보다도 당시 학내 소요로 신학생들이 양분되어 있었잖아요. 김영우 반대하고 수업 거부하며 데모한 학생들 또 수업받는 학생들. 그래서 그때 제가 수원 라비돌에서 칼빈, 대신, 광신 학생들까지 모아놓고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엄마 아빠가 사이좋게 살다가 헤어졌다. 큰아들은 아빠 따라가고 작은아들은 엄마 따라갔다. 그건 자식들 책임이 아니다. 총신 사태도 마찬가지다. 김영우 반대하는 학생 측이 있고 찬성하는 측도 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훗날 졸업하면 같은 기수 동창생인데 친일파, 반일파처럼 서로 상처를 가지게 될 것 같더군요. 그래서 전부 라비돌에 모아놓고 후원도 받고 자체 경비로 해결하면서 먹이고 재우면서 화합을 촉구했습니다. 학생들이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2년 동안 고시부에 들어가서 그 학생들 다 강도사 고시 보고 목사 고시 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왜냐하면 총신에 가서 학생들 만나면 총회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총회 믿고 싸우다 희생 당하면 책임지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데모를 충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총회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총회가 책임질 것이다.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내가 져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고시부에 지원해 들어가서 고시부에서도 안 된다는 학생들을 실력이 아나라면 정치로는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변호했습니다. 영웅 대접할 필요도 없지만 역적 대접할 필요도 없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에게도 말했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먼 훗날 졸업하고 단독 목회를 하게 되면 기수가 동기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서로 반대하고 상처받고 나가면 치유 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당시 111회, 112회 목사 된 사람들 가끔 만나요. 만나면 그들이 먼저 인사하고 그때 고마웠습니다, 합니다. 총회장은 1년이고 총장은 계속 있으니 학생들은 총회 믿을 수 없다 하는 겁니다. 그런 말을 입버릇처럼 했죠." 목사 강진상은 평산교회와 양산 주민을 위한 주님의 종인 것처럼 주님의 종이 될 총신 졸업생들을 위해 헌신한 주님의 종도 됐었다. 평산교회는 지난 2021년 4월 18일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 씨엠립 분원 건축을 위해 2천만 원의 헌금을 전달했다. 신학생들의 안정적인 교육을 위해 장학금 5백만 원도 별도로 지원했다. 캄보디아 장로교신학교(총장 김재호 목사)는 144개 교회, 292개 기도처, 7899명의 청장년 성도, 1만8436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캄보디아장로교 독노회가 운영하는 신학교다. 캄보디아 북부의 중추 도시인 씨엠립의 목회자 양성과 훈련을 위해 장로교신학교 지난 2017년 9월 27일에 분원을 개교했다. 총회군선교회는 제23차 정기총회를 2022년 5월 26일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서 갖고, 신임회장에 강진상 목사를 선출하는 등 새 임원진을 조직했다. 강진상 신임회장을 비롯한 총회군선교회 회원들을 대한민국 전 부대에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사명 아래 군선교에 더욱 진력하기로 다짐했다. 2022년 10월 25일 세계개혁주의부흥협의회가 첫 번째 회의를 총회회관에서 열고 사업 방향을 논의했다. 임원 조직으로는 위원장에 강진상 목사가 세워졌다. 회의에 참석한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는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교단은 가장 큰 장로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계교회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순절이 은사 중심이라면 우리 개혁주의는 말씀과 기도, 전도 중심 운동으로 전 세계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적임자가 바로 위원장 강진상 목사님이십니다.” 제자훈련에 있어 양육과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평산교회는 교육공동체로서 행복아카데미와 제자대학 그리고 주일학교가 활성화 되어 있다. 확신하는 삶, 회복의 삶, 행복한 삶, 축복의 삶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평산노인대학은 지역내에서 유명세를 탈 만큼 많은 노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회적 통합 증진을 위한 소외계층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교육인적자원부와 함께 저소득자, 저학력자, 고령자, 장애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자활기회 부여와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하고자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농촌의 특성상 노인들이 많다는 점에서 평산노인대학은 다른 지역에서도 벤치마킹하고자 할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평생학습도시 만들기를 희망하는 기초자치단체와 지역교육청과 협조, 그동안의 노하우를 컨설팅해주기도 하고 있으며 우수한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발굴, 지원하는 일로 이를 타 지역에도 보급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산교회의 또 다른 주력 사역으로는 봉사하는 공동체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활동이다. 바로 지역 섬김을 실천하는 것으로 5년 전부터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지역 내 돌봄이 필요한 아동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교육시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기 위한 일로 비전센터를 세우면서 29명을 50명까지 확대했다. 토요일 전면 휴무제가 시행되면서 사각지대에 놓인 결손가정 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 토요창의학교도 운영 중이다. 여기에다 2010년부터는 행복한 나눔가게도 운영, 웅산 지역에 이어 두 번째로 탄생한 평산점을 오픈하였다. 기증받은 물품들을 지역민들에게 싸게 공급하고 그 수익금으로 해외 굶주린 이웃과 지역사회를 돕는 기아대책에 지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목회자 자녀로 가난하지만 영성과 섬김의 정신을 배운 강진성 목사는 말한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며 가장 본질적인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살면서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도,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도, 사회적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도 모두 중요한 부분이지만, 인생의 길을 안내받고 또한 영혼구원을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평신교회를 만남으로 끝을 맺게 된다는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 시인 소강석 목사가 사랑하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른 윤동주 시인이 초 한 대 같은 주님의 종 강진상 목사를 위해 노래했다. 초 한 대 -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재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성경은 말씀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으로 종에게 허락하셨사오니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 7:27-29 2023-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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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4
  • [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설교 십계명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사바(娑婆)세계라고들 한다. 그게 불교 용어라고 생각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바는 감인(堪忍), 곧 ‘잘 참아야 한다’는 뜻을 지닌 인도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견디고 참아야 한다’는 뜻으로 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 이 세상임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런데 무엇을 참으라는 것인가? 괴로움만 아니라 즐거운 것도 참아야 한다. 괴로움을 참으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즐거움을 참으라는 말은 좀 생소하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참기 어려운 것이 즐거움에 빠지지 않고 참는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쾌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됨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것에 대해서도 푹 빠지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싫은 것에 대해서도 인내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실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인욕(忍辱)과 인내(忍耐)다. 그런데 흔히 인욕이라면 남한테 당한 것을 잘 참는 것만 생각할 수 있다. 참을 인(忍)은 남한테 당하는 것만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서 일어나는 나쁜 버릇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나의 급한 성질, 고집, 신경질을 잘 참아낼 줄 알아야 한다. 고무줄이나 용수철은 당기면 늘어나고 놓으면 오므라든다. 이것처럼 사람도 신축성이 있어야 한다. 이러면 세상을 살면서 상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사바세계를 탈 없이 살아가는 지혜란 괴로움도 참고, 즐거움도 참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장창수 목사의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서는 그 은혜에 참지 않고 빠져들어야 한다.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지닌 목사의 삶은 성경을 연구하는 즐거움과 괴로움에 푹 잠겨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삶을 즐겁게 감내하며 즐기는 총회 큰 빛 장창수 목사의 이슈는 자신이 고안한 '설교 십계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설교 준비의 10가지 과정이다. 시인이기도 한 발행인 박종구 목사의 교계 최장수 잡지 '월간 목회'에 실린 장창수 목사의 글을 요약했다. 하나님의 소리를 전달하다. 담임목사로 섬긴 지 어느덧 20여 년이 되었지만 설교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다. 그러나 역시 설교만큼 가장 영향력 있고 설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가 성도들의 삶에 깃드는 설교를 하기 위해 나는 어떠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는가. 설교 준비의 10가지 과정 1. 관찰 첫째, 설교 준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관찰(Observation)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것이다. 박사과정 설교학 지도교수 하워드 핸드릭스와 해돈 로빈스 박사가 가장 강조한 부분이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관찰의 시간이었다. 어떤 경우는 한 구절에서 30가지 이상의 관찰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통해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전하시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고 그것을 성도의 삶에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첫 단계이다. 2. 원문 연구 둘째, 성경 본문에 충실하려고 성경 원문에 대한 해석과 공신력 있는 학자들 견해를 살펴본다. 3. 회중의 입장 셋째, 가르치고 지적하는 목회자의 입장이 아닌 설교를 듣는 회중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배려(Thougtfulness)와 따뜻함(Warmth)'을 우선한다. 4. 하나님 중심 넷째,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하나님 중심의 설교'(Theocentric Sermon)를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5. 원포인트 다섯째, 대지 구분은 있지만 한 지붕 세 가족 설교가 아니라 설교 제목에서 던지는 몇 가지 질문이나 생각에 대한 구체적 해답으로 흘러가는 '원포인트'((one-point) 즉 '한 가지 처방' 설교를 지향한다. 6. 적용 여섯째,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성경적 강해 설교'(Biblical Exipository Preaching)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인 해석과 적용이 있다. 그 가운데 성도들에게 초점을 두고 고민하는 부분은 '적용'(Application)이다. 이것을 위해 나는 성도들 입장이 되어 생각을 많이 한다. 적용이 없거나 약한 설교는 강해 설교의 본질과 목적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본문의 핵심 내용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현실을 사는 성도의 삶에 적용시켜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성경 본문의 해석과 적용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해석에 치우치면 신학 강의로 흘러가기 쉽고 적용만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칫 인간적인 의견 제시나 충고의 곁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7. 예증과 예화 일곱째, 예증과 예화는 설교의 수단이 아니라 설교 그 자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므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좋은 예화 예증 자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을 위해 일간지 3, 석간지 1, 월간지 5, 그리고 각종 단편적인 글이 실린 글들을 읽고 일반 서점의 다양한 코너의 책을 구입해 읽는다. 더 나아가 여행이나 특별 행사나 일상생활 속에서 깨우침을 얻게 되면 육하원칙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 여섯 가지 원칙에 따라 기록해 남겨 놓는다. 8. 적절한 유머 여덟째, 회중의 긴장을 풀어주고 설교자에게 친근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적절한 유머(Humor 우스개)도 가끔 고민한다. 단, 절대로 성경 본문을 잊어버릴 만큼의 강한 것이나 썰렁한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간혹 성도들이 가볍게 활짝 웃고 넘어갈 정도의 유머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성도들이 말씀의 메시지를 편하게 받아들이는 효과를 보기도 한다. 유머(humor)는 몸 안에 흐르는 체액을 뜻하는 라틴어 후모르(humor)에서 왔다고 한다. 고대 로마인들은 남을 웃기는 기질이 그 사람의 체액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의학용어인 유머가 일상용어인 유머 우스개를 뜻하는 언어가 됐다. 9. 간결한 원고 아홉째, 간결체를 사용한 작가로는 헤밍웨이가 있다. 헤밍웨이는 간결체를 '스타카토 스타일'로 불렀다. 뉴스 원고와 신문 기사에도 간결체를 쓴다. 정보 전달용 글은 가독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간결체는 작문의 기본이 되는 수사법이다. 문학적 작문과 학술적 작문 모두 간결체가 기본이다. 그래서 베스트셀러 작가들은 간결체를 즐겨 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명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역시 간결체이다. 그는 라틴 문학계에서 재치있는 간결체로 유명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 원고는 철저히 간결해야 할 것이다. 글을 ‘간결히’ 쓰는 것과 ‘짧게’ 쓰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른 말이다. 짧게 쓰는 것은 분량을 줄이는 것이어서 누구나 할 수 있다. 반면에 간결히 쓰는 것은 내용을 충분히 전달하면서도 말을 아껴야 하므로 상당한 내공을 필요로 한다. 설교문을 간결히 쓰기 위하여는 문장의 ‘내용’과 ‘어법’ 및 ‘설교문의 체계’, 세 가지가 모두 간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문장이 길고 복잡한 설교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간결한 언어의 설교는 회중에게 쉽고 명료하게 전달되는 효과가 있다. 두 가지만 알아도 간결체를 쓰기 쉬워진다. 하나.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사실만 쓴다. 둘. 압축해서 쓴다. . 10. 열린 결말 열 번째, 원저자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압적으로 몰아붙이거나 권위적으로 도전하는 일반적인 닫힌 결말은 정해진 결말을 제공한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상상력을 차단하는 것에 비해 열린 결말은 성도들이 토론할 '화제'를 던져주고 주로 질문을 통해 성도 스스로 답을 떠올려 적용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이 혼자서, 혹은 다른 성도들과, 혹은 설교자와 소통하며 의견을 주고받음으로써 설교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토론을 계속함으로써 설교의 효과를 넓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자발적 순종과 결단과 헌신을 유발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고 싶은 바람이다. 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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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24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설교 능력
    3M(맨손·맨몸·맨땅)으로 개척, 신자 3만을 구원으로 이끈 자석의 설교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비전의 영적 지도자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끄는 조용기 목사를 한신대 한국교회사 교수 연규홍 박사가 인터뷰하고 "조용기 성령의 힘"이라는 책(2011, 바이블리더스)을 펴냈다. 조용기 목사는 그 책 122쪽에서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목사마다 설교를 짓는 각자 방법이 있겠죠. 그러나 제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력 있는 설교가로 새에덴 교회 소강석 목사님이 있어요. 그 양반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유행가도 막 불러댑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당황할 정도입니다. 설교 말씀 도중에 유행가를 부르지를 않나 하모니키를 꺼내서 불기도 하고 정신이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도 저는 그 설교를 끝까지 듣거든요. 그 설교에 매력이 있단 말이에요. 매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학적으로 보면 영 아니다 싶어요. 그런데도 그 교회는 물론이고 그 분의 텔레비젼 설교 프로그램을 보는 아주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그 이유는 소강석 목사님의 설교에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강석 목사에게는 ‘맨손, 맨몸, 맨땅’ 밖에 없어 3M 목회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맨발의 소명자’로 불렸던 그는 요즘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2008년 12월호 <시사저널> 지령 1000호 기념호에서 기독교 차세대 리더를 묻는 설문조사와 2009년에 ‘목회와 신학’이 창간 20주년 기념으로 ‘10년 후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소강석 목사는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새에덴교회가 크게 성장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소강석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와 독특한 예배분위기 때문이다. 소강석 목사는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하여 여러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2007 한국기독교출판문화대상, 2008 목양문화상을 수상했다. 설교 내용을 함축한 시와 수준급 노래실력으로 설교내용과 딱 맞는 찬송가를 직접 부르며 호소하는 감동적인 설교를 한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생각한다. “설교는 철저한 소통입니다. 저는 어릴 때 잠들기 전에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한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어요. 할머니가 저한테 ‘나중에 이야기장사 할래?’라고 하셨죠. 동화와 위인전을 많이 읽었는데, 딱딱한 강해설교나 교리설교가 아니라 저는 부드러운 이야기설교를 했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성경을 감동적으로 구성하여 설교하면서 곁들여 그에 맞는 찬양도 불렀죠. 2-3년 전까지 내러티브 스피치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지금은 내러티브와 더불어 문학적 예술적 문화적 감각을 살린 아트 스피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몰랐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그걸 실천하고 있었더군요. 잘 짜인 드라마를 보거나 조용필의 열창을 들을 때면 목사도 저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를 많이 합니다.” 소강석 목사는 새에덴교회의 미래상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미국의 경영학자이자 작가인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앞으로 미국은 목회적 대형교회가 이끌어 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비영리단체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주 투명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존경을 받는 교회일 때 영향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시대를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의 본질은 영혼구원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로 성장하여 한국사회를 이끌어가고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가 목표입니다.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상황은 변합니다. 본질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길 원합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21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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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3
  • [더굳뉴스] 소강석 유쾌한 목사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 않아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적 사람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만나고 싶어 해 정곡을 찌르는 웃음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보카치오(1313-1375)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와 건축가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이다. 그는 재치 있는 응수로 사회적 지위의 경계선을 허물고 나폴리 군주와 우정을 맺었다. 어느 찌는 여름날 군주가 조토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그림을 그만 그리겠네.” 이에 조토가 이렇게 응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폐하라면 말이지요.” 세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1955)는 미주리 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며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위치한 중앙 미조리 대학교(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12년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와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책 또한 그러하다. 그는 그의 저서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에서 말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전부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 경구에 딱 맞는 유쾌한 목사가 바로 새에덴교회 소강석(蘇康錫, 1962. 2. 22 ~ )이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소강석 목사는 전 세계 교인을 사로잡는 설교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웃게 하는 유쾌한 유머로 시작해 누구나 감동하는 명쾌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2016년 3월 3일 오전 7시 서울 코엑스 D홀에서 열린 제48회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3.000여 명의 국내외 각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함께 참석해 ‘통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민족’이란 주제와 ‘성경적 섬김, 나부터 개혁, 새 마음 국민통합, 경제 재도약, 한반도와 세계 평화’라는 부제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설교자는 소강석 목사였는데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과 미래의 통일비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강석 목사의 특기인 즉흥 멘트가 박근혜 대통령을 환하게 웃게 만들었다. “세계의 몇몇 유명 여성 정치인들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완전 차별화가 되셨습니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들이지만 대부분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1963년 8월 중순 무려 25만 명의 사람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 앞에 모였다. 초대장도 없고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던 시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 1. 15. ~ 1968. 4. 4.)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인권 탄압으로 고통을 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킹 목사가 다른 인권운동가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며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걸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전파했다. 워싱턴의 여름 뙤약볕 아래 그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흑백 갈등 차원을 넘어 미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25%의 관중이 백인이었다고 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킹 목사처럼 자신의 신념을 전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본래 영성에 도취된 퓨리티(purity) 지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무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를 만나 반기독교 세력들의 전략과 공격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알게 되었다. 그 뒤부터 소강석 목사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맞서 이슬람 세력 억제와 동성애 입법 방지 등을 위한 사상전(思想戰)의 선봉장으로 교계 유니티(unity) 지향의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의 두 축 퓨리티와 유니티를 위해 한국교회를 섬기고 교계 연합을 위한 한 줌의 중보와 불씨가 되고자 헌신하고 있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삶과 설교 앞에 독자는 즐거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앉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어떤 흠이나 결이 없는 가장 유쾌한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도 아주 좋아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중 소통 매체인 시성(詩性)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2015년 천상병귀천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어느 모자의 초상〉에 이런 시가 있다. 빈 의자 지하상가 개척교회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하려면 마음이 곤고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팠던 나날들 토요일 저녁이면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드렸던 기도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 하늘에 닿아 목자의 피리소리를 따라 몰려오는 양떼들처럼 구름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당신의 목동이 되었으니 아, 지하실 교회 차가운 빈 의자여 어둠 속에서 빛나던 영혼의 별빛이여 고독한 소명자의 눈물이 적신 사랑의 목마름이여 이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순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빈 의자」는 소강석 시인이 가락동의 개척교회 시절 겪은 이야기다. 소강석 목사는 1988년 가락동의 한 상가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정말 피눈물 나는 이야기다. 시인의 말처럼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들린다. 소강석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은 꼭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게 된다. 다음은 소강석 목사의 간증 중 일부이다. “저는 88년도 가락동에서 월세로 처음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함께할 개척 멤버나 경제적인 지원 없이 분당으로 옮겨와 그야말로 맨손으로 지금의 새에덴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개척 3년 만에 300명 장년 성도를 돌파하게 되었고 4년 만에 교회 건축 대지 400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1030평에 달하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1500명 성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지역적인 조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7년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눈물의 기도와 전적인 하나님 은혜일뿐입니다.” 이제는 4만여 명의 성도가 새에덴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새에덴교회가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이 시에서 보이듯 성도들을 내 부모님이나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내가 발전하고 싶은 것처럼 성도들의 발전을 돕고 그들의 미래와 행복을 같이 고민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따랐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2016년 8월 14일 새에덴교회에서 광복을 기리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물었다. -피곤하신데 사모님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키도 더 크시던데. “그건 내가 책 한 권 드릴 게요. 책에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그는 차를 가지고 들어온 사무 간사에게 〈맨발의 소명자〉라는 책을 가져오게 해 건넸다. -결혼 이야기가 이 책에 다 있나요. 그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 책에는 그의 장모 정금성 권사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있었다. 광주 신학교 시절 그는 어느 날 무등산 기도원에서 금식 겸 굶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기도하는 곳 위쪽에서 여자 성도 열대여섯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소리나 모습이 영적 고단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가 고픈 신학생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조용히 보더니 말했다. “주의 종이 되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목숨 내놓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 신학생들을 보면 한숨 나올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기도를 했다. 순간 자손심이 상한 그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쌀쌀 맞을 수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저 사람은 영통을 한게 아니라 먹통을 했구먼.’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우렁차게 기도를 했다. “주여! 나를 저런 사람보다 7배 70배 더 큰 기도의 영력을 주옵소서.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지금 이 기도에는 억울함이 배어 있다. 그런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년 11월 24일 ~ 1675년 2월 21일)는 진(眞)보다도 선(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된다. 그의 저서 라틴어 제목 〈에티카〉(윤리학')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試圖)이다. 그래서 ‘감정의 윤리학자’로 불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한 인간의 48가지나 되는 감정엔 ‘억울함’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억울함을 느끼나. 교통사고가 나도 갑자기 상사에게 혼이 나도 심지어 말싸움을 하다 이겨도 어딘가 손해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은 억울함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양인은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았다는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강석 전도사도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억울해서 씩씩거리며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 보니 아까 그분이었다. 아까는 쌀쌀 맞았는데 지금은 부드럽게 그를 대하니 그는 어리둥절했다. “기도하시는 데 실례합니다만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있는 데 말을 걸어 그만 무심코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시는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광주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기회만 있으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기도하며 이상을 키웠다. “저 넓은 서울 땅!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까. 어느 쪽에서 개척을 하게 하실까.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하나님! 저도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저의 갈 길을 보여주소서. 제가 가야 할 곳을 가르쳐주소서. 그리고 개척에 필요한 물질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이런 기도의 영감 속에 취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당시 유쾌한 전도사 소강석에게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영등포로 갈까요, 청량리로 갈까요...” 신학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개척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그는 데이트 한번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신앙생활에 너무 바쁘고 또 전남 화순군 백암리에서 개척한 백암교회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는 연애할 기회가 없었다. 그때까지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고 게다가 그것이 죄인 줄 알았다. 그는 이제는 데이트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회 개척을 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많은 목사님들의 조언도 뒤따랐다. 총각 신분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왕에 결혼을 할 거라면 개척 전에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할 대상자는 있는데 그 자매가 그하고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안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기도원에서 만나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의 딸인데,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사 사모는 절대로 안 하겠으며, 특히 소강석 전도사 같은 사람과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대로 마음까지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자매가 저에게 그토록 거부반응을 보인 이유는 어렸을 때 자기 어머니가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믿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닭을 잡아도 자녀들에게는 국물도 맛보이지 않고 목사님께 갖다드리고,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해도 교회에 먼저 갖다 바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앞장서서 교회 건축헌금을 드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목사님과 어려운 교회는 보이는 대로 도와주면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거의 신경을 못 썼단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목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절대로 엄마처럼 믿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엄마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열성파 예수쟁이 전도사와 결혼을 하라니 펄펄 뛰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키도 작고 못생기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니...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키 작은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제가 키가 작고 못났으며 가난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편지를 써도 뜯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습니다. 편지를 아무리 잘 써도 한 자도 안 읽어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녀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종합병원 옆 다방에서 7시에 기다리겠다고 편지하고 나가면 8시, 9시가 되도록 어항 옆에 앉아 물고기만 바라보다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욕세례를 퍼부으며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맞받아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욕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저와 죽어도 결혼을 안 하기 위한 쇼였습니다.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면 포기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애 경험이 없는 저는 데이트도 믿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밀어붙이니까 그녀가 이제는 해외근무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귀찮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아예 해외로 도망을 가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장모님이 되실 정금성 권사님께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딸이 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결혼 하지 않겠다고 날고뛰니 나라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차라리 어떻게 해 불소.” “예? 어떻게라고요?” “내가 방 열쇠를 줄 테니까 어떻게 해 불란 말이시...” “아, 네... 어떻게요...” 저는 그제야 어떻게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고 열쇠를 받아 장모님의 뜻을 받들어 어떻게(?)를 하기 위해 밤에 그녀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따고 들어가자마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날아 왔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며 발버둥을 치던지 어떻게는 고사하고 본전도 못 챙기고 어떻게든 도망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주일을 작정 기도하면서 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충분한 자금을 신청했습니다. 그것을 일주일 내에 주시면 제 전략이 먹혀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도 미국에 계시던 박종삼 목사님으로부터 돈이 송금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돈을 송금하면 며칠 이상이 걸리는데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를 해 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주일 후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무하는 적십자병원 앞에 저는 뭉칫돈(?)을 주고 택시 한 대를 대기시켜 놓고 잠복근무를 하였습니다. 물론 이 전락은 그녀의 어머니 정 권사님과 짜낸 지혜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잠복근무를 시작한 지 정확히 33분 후 병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에 권사님의 딸인 배정숙 자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기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지... 저는 그들을 계속 미행하였습니다. 물론 제 뒤로 멀찌감치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적십자병원에서 충정로 쪽으로 가던 중 한 여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약속이나 모임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머리 모양도 특별히 신경을 쓴 데다 양복에 구두까지 맞춰 잘 차려입은 저는 배정숙 자매 앞으로 가서 대뜸 입을 열었습니다. “정숙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나하고 1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지금 2시가 되었는데, 어디 가는 거예요? 미스 배가 먼저 나에게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간호과장과 수간호사가 있는 곳에서 평소처럼 제게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으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때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습니다. 그 순간 대기시켜 놓은 택시가 제 앞에 와서 섰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엄중한 자세로 그녀를 택시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제 일사불란한 태도에 어떻게 반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침이 마르고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당당한 모습을 지키며 어떻든 여유 있는 체하며 어떻게 밀고나갔습니다. 택시는 내장산으로 달렸습니다. 택시 안에서 침묵은 계속되었고 저는 다소곳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벌어진 것입니다. 드디어 내장산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눈에 띄는 벤치로 가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습니다. 한 1분쯤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리 꾸며진 거룩한 각본대로 일어나 정숙 씨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버렸습니다. “주여! 주의 종이 사랑하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딸에게 도장 찍어주소서. 결재하여주소서. 목사 사모로 이미 인을 쳐주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소명이 확실한 저 같은 목사 후보생 사모로 도장 찍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내 평생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안수기도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배정숙 자매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어떻게 자연스러운 데이트를 하기도 머쓱해져서 더 이상 내장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바로 차를 타고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광주로 오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여! 연애하는 데도 뜨거운 소명감이 필요하고 우직한 믿음이 필요하군요. 이제 저의 개척도 절반은 이루어졌네요.” 저는 그 당시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이나 지혜로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앞장세우고 영적 생명력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목회를 합니다. 돌아오자마자 저는 결혼 날짜부터 잡았습니다. 12월 26일! 딱 50일을 앞두고 결혼 날짜를 정한 셈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쪽 집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방 얻을 돈도 준비해놓지 않은 데다 언제 준비해서 결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하며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때마다 항상 정 권사님은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평소에 존경하던 김창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신부는 빌려서라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저는 헌 양복을 입었고, 길거리 리어카에서 산 1500원짜리 모조 반지가 결혼 예물의 전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특별한 사연이 담긴 우리의 결혼 예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선생(?)께서 특별 심방을 와 가져가버렸기 때문입니다. 1500원짜리 모조 반지라는 것도 모르고 그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요.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6년 소강석 목사는 신학교 전 과정을 수박과 오이를 팔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소명의 길을 밟은 뒤 목사안수를 받으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란 기대는 몽상이었다, 소 목사는 부교역자로 받아주는 교회 하나 없는 척박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는 하나님의 비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야 했다. 서울에서 개척한다는 믿음을 갖고 물색한 지역은 그마나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척을 할 수 있는 ‘가락동’일대였다.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8만원. 지하 23평 공간에서 소강석 목사는 첫 예배를 시작했다. 주일 낮 예배는 몇몇 주민들의 참석이 있었지만 저녁예배는 장모님과 부인 그리고 어린 자녀들만 참석해 힘겨웠다. 그나마 부인은 어린 자녀 뒤치다꺼리 하느라 뒤편에 있어서 장모님과 마주 대하는 설교시간은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하곤 한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오가는 쥐새끼들 때문에 경건해야 할 예배는 어수선 그 자체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며 낮에는 전도하면서 밤에는 교회당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작정기도 100일 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가 비로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새롭게 각성했던 시기였다.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 1988년 11월 가락동 지하에서 처음 예배를 시작한 이후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비좁은 공간 속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소강석 목사는 2001년 3월 평양을 방문할 기회를 통해 통일한국 시대의 비전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평양에 있는 창광 유치원을 방문하면서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한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북한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창광 유치원에서부터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교회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켜 통일 한국 시대를 짊어지고 갈 지도자로 배출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그 결과 3M(맨손, 맨몸, 맨땅)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창립 17년 만인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2016년 7월 27일 약속보다 반시간 늦은 오후 2시 30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도착한 새에덴교회 집무실에서 소강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늦는 바람에 점심을 여유 있게 먹었다고 웃으며 예의 그 달변의 입을 먼저 열었다. -목장 기도회 때 제 설교 들으셨나요. “광명교회에서 못 들었습니다.” -뭐냐면 지금 한국 교회가 빨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회 생태계 교회 생태계 환경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관심이 있느냐. 생태계가 무너지면 우리 생존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사막화 되고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생태계가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걸 모르니까 교단 안에서 분쟁이 잦은 겁니다. 이거 아는 사람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요. 이건 내가 국정원장을 지내신 김승규 장로에게서 배웠습니다. “명성교회 장로죠.” -네 아닙니다. 할렐루야 교회 장로죠. 그분한테 배워가지고 또 따로 전문가들한테도 배웠습니다. 제가 얘기 좀 쭉 하겠습니다. (인쇄물을 보이며) 여기 있지만 글과 말은 또 다릅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영국교회는 사상전과 영전을 하지 못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을 주도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국교회는 입법화로 가기 전에 사상전과 영전을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알고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영국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 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반대로 이슬람은 8%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도 사상전을 하고 영전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세 가지 당면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 생태계와 교회 환경을 복원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의 터보 엔진을 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회 생태계가 복원되어도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부흥하지 않으면 안 돼요. 셋째,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신앙을 계승해주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교회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생태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후변화협약까지 하며 자연 생태계 복원을 위해 목매고 있습니까? 환경, 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생명 사회가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 최고의 천재 관상가 김내경이 어느 바닷가에서 한명회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이거늘,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관상만 보았지, 보이지 않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 한국교회도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걸 보고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고 연합하여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어야 해요.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러한 사상전, 영전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각개전투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지게 된 거예요.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는 교회가 많았고 교계가 교권 싸움으로 연속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할 수 있습니까? 1)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저도 가락동 23평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지하실에서 개척해서 죽어라고 전도하여 양육해 놓으면 주변에 깨끗하고 시설 좋은 교회로 가 버리는 거예요. 저도 과거에 이런 아픔을 겪어 보았어요. 목회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는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사람이 옮겨도 또 다시 새로운 성도들이 왔지만, 지금은 더 이상 작은 교회에 교인들이 오지 않아요. 왜냐면 이런 수평이동의 선순환 생태계가 다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로칼 처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교회로 존재해야 해요. 우리 지역에도 공교회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단 안에서도, 한국교회 안에서도 공교회를 이루어야 해요. 선교신학자 랄프 네이버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은 교회가 성장할수록 자신만의 성을 쌓으려고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지역 안에 하나님의 도성을 쌓아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캐슬 빌더(castle builder)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킹덤 빌더(kingdom builder)가 되라고 하는 거예요. 2) 신앙과 신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purity)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퓨리티의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략 중의 하나가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을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정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정결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거룩(holiness)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순결(purity)이나 정결(cleaness)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이지만 거룩에 참여하고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정결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정결한 영성, 순결한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렵혀진 신부가 어떻게 신랑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정결,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없어요. 일제시대 때도 얼마나 신사참배 문제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더럽혔습니까? 영적 간음을 하게 된 것이에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들까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적 행위라고 변명하며 신사참배에 동참했어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아녀자에게 정절의 의무가 있듯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정절이 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폭압으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마저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아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예와 권력 앞에 믿음의 정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며 통회합니다. 그리고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외치며 순교의 길을 가다가 결국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옥중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교회가 지원을 해서 일사각오라는 영화로 제작이 되어 상영이 되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주 목사님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산정현교회를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오늘날 우리의 잘못으로 목회 생태계가 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서로 연합하여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교회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뿐만 아니라 안티크리스천의 공격이 얼마나 주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공격해 오는지 몰라요. 물론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핍박과 박해로 무너뜨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보이지 않게 사상전 영전으로 공격해 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상의 기본은 신마르크스주의입니다. 신마르크스주의(Neo Marxism)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만든 것인데 한마디로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상입니다. 내용은 무신론이지만 겉으로는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의 권익보호, 공동체 등을 추구합니다. 바로 이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진보 사상과 신좌파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 권익보호 공동체 등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무신론적 사상이 끼어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성도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동성애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동성애를 통한 성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신마르크스주의를 창안한 빌헬름 라이히가 근로자들의 정신치료를 해주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었는데, 좁은 국민주택에서 사는 노동자들이 신경증이나 노이로제에 많이 걸려있더라는 거예요. 그 이유를 분석해보더니 성적인 억압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작은 집에서 부모님도 모시고 애들도 우글우글하지요,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원만한 성생활을 못해 성적 억압이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 때 그는 깨달았어요. “아, 이것이다. 사람은 성적 욕구를 잘 풀어줘야 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성적 욕구를 발산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정치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인간에겐 성적인 억압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제한받고 있는 성적문제부터 해방시켜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주장한 성정치 이론이었습니다. 성정치 이론에 의하면 억압된 성적 욕구는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적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의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자유롭게 분출할 때 개인도 행복하고 이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세상을 맞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합니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남자끼리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여자끼리도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지요. 따라서 신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공격 목표는 기존 제도권의 가정과 학교에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가정과 학교를 무너뜨리려고 해요. 그리고 교회를 공격해요. 특별히 대형교회를 공격해요. 그래서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 교육부터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의 규범과 구조에서 해방을 하도록 충동하고 선동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에서는 어떻게든지 학생들의 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안절부절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거든요. 이것이 바로 성정치와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래도 그 사람들 불쌍하니까 그냥 자기들 맘대로 살도록 놔두면 안 됩니까.” 물론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그들이 소수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들 좋은 대로 살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고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다수의 인권이 역차별을 받게 되거든요. 특별히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못해요. 이런 설교 했다간 당장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게 돼요. 그러면 목회 생태계가 저절로 파괴될 수밖에요. 또 어떤 분은 우리나라에 동성애자들이 몇 명이나 되고 영향력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느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동성애를 연구를 하다 보니까 동성애가 이슬람이나 이단, 안티 세력과도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이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말하려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슬람은 절대로 기독교를 용납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러한 세력이 안티크리스천들과 연합을 해서 한국교회를 전략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는 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런 교회라면 함께 연대해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동성애를 막아내고 이단을 막아내야 해요. 그렇게 해서 목회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해요. 물론 이 일이 어려운 일이기도는 합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퓨리티(purity)와 유니티(unity)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까 내부의 소모전을 하다가 공멸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거예요... 물론 우리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암묵적으로 교회 간의 경쟁, 교단 간의 경쟁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미국도 보십시오.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도 빌리 그래함 이후에 연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없으니까 다 개교회주의로 빠져 버렸어요. 개교회, 개교단주의에 빠지고 큰 교회 목사들 간에 스타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세상에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여러분은 〈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세상에 수업시간에 교사가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고 고소를 당해 법정까지 서게 돼요. 미국도 이런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 연합집회를 갔을 때 동성결혼법이 통과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회를 했던 교회에 7천 만이나 되는 큰 교단을 이끄는 총회장이 참석을 한 거예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이끄는 총회장이에요. 그래서 그날도 총회장 전용기를 타고 올 정도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인사말을 하는데 자기는 변호사 출신이라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성명서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듣고 하도 열이 받아서 강단에 올라가 예정에 없었던 동성애 설교를 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태어나서 이런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했던 기자들이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미국 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몇몇 교회들을 탐방하고 왔는데, 한 군데도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주보 광고나 반대 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그 총회장님께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총회장님, 성도가 7천만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함께 연합해서 동성결혼법을 막아야지요. 만약에 워싱턴 광장에서 미국 교회 성도들이 백만 명만 모여서 반대 집회를 했다면 절대로 동성결혼법은 통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총회장도 내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영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966년 런던목회자협의회에서 존 스타트목사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세웠어요.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가 너무 독선적 강의를 한 거예요. 그러자 그 후로 존 스타트 목사가 로이드 존스와 결별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가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사회적 정치적 이슈나 현안에 대해서 전혀 노터치를 한 거예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개교회 목회만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교회도 망한 것이 아닙니까? 장자교단이라면 이런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과 교리가 다르면 큰 형님이 야단도 치고 가르치면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면서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너네들은 우리와 다르니까 니들끼리만 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옛날에도 종갓집이 종갓집 역할을 잘해야 집안이 잘 되었어요. 장손이 장손 역할을 잘 해야지 무능하고 역할을 못하면 못난 동생 놈들이 육갑을 떠는 경우가 있어요. 동생들이 육갑을 떨면 집안이 자칫 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를 지키면서 함께 연대해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야 해요. 그러려면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해요. 그리고 때로는 정책적 연합을 해야 해요. 우리 교단이 좀 영향력도 발휘하고 기수가 되어야 해요. 저는 이러한 일을 10여 년 전부터 해 왔어요. 10여 년 전부터 동성애를 막기 시작했고 8-9년 전부터 이슬람을 막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을 하면서 테러 위협도 받았어요. 심지어는 어느 국가 기관에서 테러를 대비해서 신변보호를 해 준 적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회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언론 대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만나려고 국회를 들락날락했어요. 모든 제도와 문화는 사상과 철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철학은 반드시 입법화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국회를 들락날락하며 동성애법을 막고 작년에는 교회 과세 문제를 은밀하게 막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저 보고 정치목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교회 생태계를 보호하고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데, 누가 정치 목사라고 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이 목회 생태계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생태계를 지키는 일을 해야죠. 우리 교단이 자기 왕국을 세우는 캐슬 빌더가 아니라 킹덤 빌더가 되어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생태계를 복원하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1시간 40분에 걸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나만을 위한 열정적인 일인(一人) 특강이 끝났다. 오후 5시 그는 수요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는 3층 당회장실에서 교회 밖 건널목까지 배웅해 주었다. 2016년 8월 14일 광복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 뒤 교회를 방문한 문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 뒤 간신히 짬을 내 만났다. 피곤해 한숨을 쉬는 소강석 목사는 내가 물을 두 가지가 뭐냐고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는 생략하고 앞으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정말 건강관리가 제 숙제입니다. 건강에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게 제일 중요하더군요. 내가 해 보니까. 그래서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말입니다. 나는 골프도 못 치고 다른 특별한 운동도 못 합니다. 뒷산이 있어요. 뒷산 가서 장로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합니다. 때로는 혼자라도 밤에 산에 가서 명상하는 그것이 아직까지 버티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과제는 휴식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가 무리이신 것 같은데요. “아! 휴식. 지금 사실은 월요일은 뮤지컬도 가야하고 그리고 모임들 8·15 행사...” -주보에 나온 목사님 일정만 봐도 숨이 막히던데요. “또 동성애 모임 뭐라더라 아 그 지난번에 집회한 것에 대한 뒷관리...” -저는 예배드리고 뵈면서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얼마나 가시겠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지도자이신데 지쳐 계시고. 메시지에서도 강단 위에서도 너무 안타깝고... “아휴.” -목사님 설교를 세계 사람들이 보는데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이면... 설교 횟수를 좀 줄이셔야겠어요. 주일 설교를 두 번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목사들도 많던데(32명). “부교역자들이 많이 있지만 설교는 은사가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은사가 있어야 되죠. 그래도 소 목사님이 줄이시면 참석 교인이 두 배로 늘어날 겁니다. 세 번 나눠 참석하던 교인들이 두 번에 다 모여들 겁니다. 한 번이라도 쉬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1부는 중직자들이 참여해요. 세 번 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김삼환 목사도 세 번 해요. 일단은 제가 4부하고 5부는 영상예배로 드리고 축도해요. 저녁예배 때는 여섯 번 하게 되니까 정말 죽어요. 저번 수요일 오셨던가요. 그때는 여덟 번 설교했어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좀 드려야겠다 싶어 그냥 가려다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지도자는 가급적 시간과 건강을 아끼셔야 합니다.“ 2016년 8월 31일 오후 8시 70을 바라보는 김문기 장로가 르디님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수요예배 설교 중 소강석 목사는 말했다. “참 옛날에 점쟁이가 예언을 하는데 큰 아들은 관운이 많고 그렇게 만사형통을 한다는데 나는 빌어먹게 생겼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한테 빌어먹고 살고 있어요.” (양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한다. 회중 박장대소.) 세상에 소강석처럼 유쾌한 목사는 없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숨을 참고, 손을 가지런히 하고,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따위의 존재론적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다. 그러나 유쾌한 목사 소강석이 3M 목회 과정에서 자신의 벽 앞에서 취한 믿음의 자세는 내가 보기에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소설〈이름 붙일 수 없는 자〉중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는 주인공이 몸통과 머리만 남은 채 단지에 들어가 어느 식당의 메뉴판 노릇을 하면서 말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위대한 정신은 늘 임계점(臨界點) 가까이에서 그 너머를 꿈꾼다. 사상이 한 경계를 넘을 때 세계가 발전한다. 그래서 세상엔 아직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남아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와 대다수의 실망스러운 리더가 존재한다. 늘 그래왔고, 또 늘 그럴 것이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그를 즐겨 만나고 싶어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 그가 교단과 교계와 대한민국의 유쾌한 영적 지도자가 되어 우리를 유쾌하게 해 주고 우리 믿음을 명쾌하게 해 주고 대한민국을 모세처럼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10-12 2016-09-11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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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8
  • [더굳뉴스] 방성일 목사 예배 디자이너
    '지식 나눔 콘서트'나 '스타 특강쇼'처럼 요즘 TV를 틀면 흔히 볼 수 있는 강연 프로그램의 원조(元祖)가 테드 콘퍼런스다. 테드는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약자이다. 원래 테드는 1984년 건축가 리처드 워먼(Wurman)씨가 창립해 청중 800여명을 상대로 매년 한 차례씩 열린 소규모 행사였다. 그러나 2000년도에 워먼씨로부터 1400만달러에 테드를 인수한 앤더슨씨는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세계 지식산업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꿨다. 18분 강연의 기적으로 10억 명을 감동시키는 앤더슨은 말한다. “우리의 모토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의 확산(ideas worth spreading)입니다. 저희는 하나의 큰 '아이디어 기계'예요. 기계 위쪽 입구에 아이디어를 떨어트리면, 전 세계로 배급되는 거죠. 테드는 한 가지에만 집중합니다. 호기심. 그것이 이 방대한 콘텐츠를 이어주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테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대입니다. 테드는 선사시대의 캠프파이어 경험을 복원하려고 해요. 모닥불에서 불이 타고, 한 명이 물감을 잔뜩 칠한 얼굴로 앞에서 이야기해요. 또 누군가는 드럼을 치겠죠. 모두가 참여해요.” 효과적인 강연을 위한 테드의 무대 디자인 다섯 가지 규칙 가운데 두 가지 규칙 1. 이중 조명: 단선 조명은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지루하게 만든다. 무대 바닥과 천장 등에 조명을 이중으로 설치해 효과를 극대화한다. 2. 강연자는 청중석에서 무대에 올라서고 청중석으로 퇴장한다: 테드는 뒷무대가 없다. 뒷무대에서 입장하고 퇴장하면 시간이 낭비되며 청중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 꽃샘바람이 시샘하지만 그 바람이 겨울처럼 코끝을 아리게 하지는 않는 3월 4일 오후 2시 한 목회자를 대담하러 갔다가 젊은이 전도를 위해 테드의 앤더슨처럼 교회의 예배를 디자인하는 Worship Designer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하남교회의 방성일 목사다. 그의 서재는 두 면의 대형 책꽂이에 책이 빽빽이 꽂힌 것은 물론이고 바닥도 책들이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의 섬들처럼 쌓여 있었다. 커피가 나왔다. 잔에서 오른 김이 커피 내음을 실어 책 섬들 사이로 번졌다. ―어떻게 목사가 되셨습니까. 타고난 목회자로 보이시는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목사 자질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성품이나 나름대로 소양이 있었다면 목사가 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열등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목사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품행이나 모든 면에서 목사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되기 전에 다른 꿈이 있었습니까. 원래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 어른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직업은 당시의 화이트칼라인 면사무소 면서기였습니다. 농사꾼에게 가장 인기 직업이었죠. 당연히 제 부모님도 늘 제게 그런 소망을 말씀하셨어요. 공무원이 되라고요. 그래서 저 자신도 자연스레 그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세무직공무원이나 검찰직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공부도 쉽지 않은데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당시 세무직공무원 시험은 경쟁률이 120대 1이나 했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죠. ―그러면 목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했습니까. 그 당시 경북 경산의 우리 마을에 아주 잘 믿는 장로님이 담 너머 이웃집에 사셨어요. 그 집은 잘 믿는 집안입니다. 그 장로님 딸이 같이 자란 내 또래였어요. 그 영향으로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우리 부모님은 농사꾼이시니까 도시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잘하시지는 못 했지만 교회는 그냥 다니시는 수준이었어요. 누나 등에 업혀 교회 다닌 기억도 지금 나네요. 내가 목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웃집 장로님이 세상사로 시달리던 저한테 권유를 했어요. 나보고 신학을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그 권면이 제가 목회자의 길로 걷게 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목회 경력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담임목사로 미국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엘센트로 한인교회에서 이민 교회 한번 목회했고 한국에서는 하남교회가 처음입니다. 사실 총신신대원 다닐 때 하남에서 교육전도사 생활했어요. 졸업반 때 제가 대구로 내려가서 청소년교육선교회 지역총무를 하고, 교회 교육전담 교역자, 교회가 파송한 교목으로 활동을 했어요. 그렇게 청소년 사역을 6년 정도 하다가 1996년도에 미국 유학을 갔어요. ―미국 유학을 가시게 된 어떤 동기가 있었습니까. 그게 제가 미국을 처음 간 게 1995년이었을 겁니다. 한번 가서 학교를 돌아보고 돌아와서 1996년에 가방을 싸가지고 유학을 갔어요. 교육목사, 선교단체 총무, 학교 교목으로 청소년 사역을 6년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역에 대한 미래가 안 보이는 거예요. 세상은 급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정치, 교육, 경제 모든 게 미국을 따라가니까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10년 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청소년 사역을 잘하고 싶었어요. 이 아이들 사역을 잘하려면 미래를 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선겁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먼저 조사를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청소년학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알아보니까 샌디에이고에 복음주의 기독교 사립대학이 있는데 크리스찬 헤리티지 칼리지(Christian Heritage College)였어요. 지금은 이름이 샌디에이고 크리스찬 칼리지(San Diego Christian College)로 바뀌었어요. 샌디에이고 엘카혼(El Cajon)에 있는 그 학교 안에는 쉐도우 마운틴 처치(Shadow Moutain Church)라는 백인들 교회가 있는데 3,000여명 모이는 큰 교회였어요. 그 교회 담임목사가 이 대학의 설립자예요. 가보니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교가 있고 이 대학에 청소년학과가 있어요. 학부에 Youth Ministry가 있는 거예요. 게다가 1970년 1월에 설립된 이 대학의 설립 동기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근거한 창조론의 틀 안에서 교육할 수 있는 대학이 필요해서였어요. 그래서 그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3년만 있다 돌아오겠다고 아주 간 크게 보따리 싸들고 혼자 갔어요. 그런데 한 학기 지냈는데 너무 외로워서 혼자 못 살겠더라고요. 그 학교에는 당시 한국인이라곤 나뿐이었어요. 동양계도 일본인과 홍콩인 둘뿐이에요. 서른일곱이었는데 한 학기동안 기숙사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한 학기 마치고 방학 때 나와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죠. ―미국 비자가 참 어려울 때였는데요. 맞아요. 참 비자가 안 나올 때였어요. 돈도 없지 영어 실력도 짧지 비자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그냥 용기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어요. 94년 1월 겨울에 강사로 청소년연합수련회를 기도원에서 인도했어요. 그런데 새벽기도회 마치고 내 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얼마나 말씀으로 위로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시편 32:8을 통해서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산에서 내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무 감동스럽더라고요.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구나. 그래서 바로 비자 신청했어요. 그랬는데 놀랍게도 비자를 바로 주더라고요. 담당자가 바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 인도하심이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너무 쉽게 가족과 함께 미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하나님 인도하심이었어요. 11년 살다가 한국으로 왔어요. ―11년 사셨으면 미국에서 목회 사역도 하셨겠군요. 거기 가서 한인 목회를 했죠. 한인 교회 목회를 잘하다 왔어요. ―저도 시카고에 1년 있었어요. 목사님 같은 분 오시면 교인들이 좋아하죠. 제가 이민 목회를 했는데 한 5년 지나니까 그곳이 좋더군요. 사회 환경도 느긋하고 우리 가족도 다 좋아하는 거예요. 영주권은 아이 때문에 받게 됐어요. 영주권 받은 지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어요.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2007년 4월에 왔는데 2006년 봄에 가족회의를 했어요. 우리 이제 미국 살자고 말입니다. 다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민권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아이 시민권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아내 시민권이 나오고 나는 맨 나중 12월에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달 뒤 해가 바뀐 1월에 하남교회에서 청빙이 온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사실 2006년 가을 대구의 한 교회에서 청빙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교회가 나를 9 10 11월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연말에 들르겠다고 말해 놓으니까 그 교회는 계속 다른 사람을 설교시키면서 나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보내신다는 마음의 감동이 전혀 없어요. 불안하고 그래요. 그래서 계속 못 갔죠. 그러다 미국 시민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교회에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 교회가 1월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연락했어요. 그 교회 청빙 문제를 그렇게 다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인가 이 하남교회에서 청빙 연락이 온 겁니다. 나는 너무 놀랐죠.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남교회는 실제로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참 이야기가 긴데 제가 신대원 시절 하남에서 3년여 모시고 있던 분이 김윤규 목사님(하남예일)이세요. 월간목회 편집장을 오래 하셨죠.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여기 추천해 주셨어요. 그분과 헤어진 지 20년이나 됐는데 저를 기억하고 이 교회에 추천해 주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당시 이 교회 임시당회장이셨습니다. ―저도 출판관계로 인연이 있는데 김윤규 목사님 정말 좋으신 분이죠. 김 목사님이 임시당회장이시니까 저를 모든 면에 이 교회에 맞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 장로님들이 그럼 한번 보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서류도 낼 겨를이 없이 바로 청빙 목사 세 명의 후보군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까지 네 명이 되었죠. 네 사람이 다 설교하고 교회가 투표를 했어요.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투표를 한 겁니다. 먼저 두 사람이 결정됐어요. 두 사람을 놓고 당회가 또 투표를 했어요. 그래서 결정된 한 사람을 놓고 전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를 한 겁니다. 저는 투표를 세 번 받았어요. 하나님이 하시니까 순적하게 진행됐어요. ―하남교회가 전통을 따라서 은혜롭게 청빙 절차를 밟았네요. 기도하고 투표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거죠. 다른 분들도 아주 강력한 후보들이었는데 제가 됐어요. 하나님 은혜죠. 저는 모르고 왔는데 와 보니까 청빙위원들이 정한 열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조건에 딱 맞았다는 거예요.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일이니까 다 순적하게 이루어지더라고요. ―담임목사로서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데 교회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지식보다도 교회는 성도에게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고향인 겁니다.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 자라고 힘을 얻듯이 교회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가 지치고 힘들면 어머니한테 와서 용기를 받고 또 세상으로 나가고. 그래서 교회가 어머니 같다고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엄마를 찾듯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 교회 해 보니까 두드러지는 게 한국에서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외롭고 괴로우니까 교회로 오잖아요. 어떤 면에서 교회가 엄마지요. 그 사람들 인도해 주고 품어 주고 격려해 주고 돌보아 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민 교회를 목회하면서 참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곳이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이 위로도 얻고 힘도 얻는 거죠. 우리가 몸이 병들면 병원가고 약 사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면 갈 데가 없잖아요.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가나요.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우면 혼자 끙끙 앓고 있거든요. 그러다 누구 만나면 고작 푸념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지 않습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정신과에 가죠. 그전에는 안 가거든요. 결국 마음이 상한 자는 갈 곳이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이민자들은 더욱 그렇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살다가 마음이 상하고 아프면 어머니한테 와야죠.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이전하고 이렇게 성장시키셨는데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참고로 제가 2007년 4월 8일 부활주일에 부임 설교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월요일 서울동노회가 열렸어요. 노회 참석해서 이명 허락을 받은 바로 그날 저녁 장로님이 내 이름의 도장을 새겨가지고 와서 이 땅 계약을 했어요. 이 땅은 제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구입하기로 결정을 해 놓은 거죠. 그러니까 계약만 제가 한 거죠. 그때부터 설계와 건축은 제가 다 관여하게 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이런 형편을 모르고 교회가 힘들테니 이삼 년 안에는 교회를 건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교인도 잘 모르고 하니 말입니다, 그게 일반 목사들 생각이죠. 그런데 와 보니 상황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지나고 나니까 그때 잘했지 싶어요. 그런데 이 예배당 장소를 놓고 갑론을박이 참 많았어요. 원래 교회가 있던 장소를 주장하는 측이 있고, 이전 결정을 한 지금의 장소를 원하는 측이 있고, 제삼의 다른 장소를 생각하는 측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이민 교회에서 한번 겪었어요. 미국에서 작은 예배당을 하나 지었는데 상황이 똑같았어요. 땅 계약 진행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살려 진행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잘됐어요. 하나님께서 한국 목회를 위해 미국에서 저를 미리 훈련을 시키신 거죠. ―그 당시 지금의 교회를 크게 지으신 거 아닙니까. 제가 아니라 온 교인이 힘을 다해 지었습니다. 사실 부채도 꽤 되긴 하지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교회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저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정이 많아요. 저는 미국에서도 장로님들하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저는 스스럼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저를 처음 봤을 때 놀랐을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선을 보러 왔는데 편하니까 백팩을 메고 왔어요. 목사는 그렇게 안 다니잖아요. 그런데 와서 설교를 하고 당회실에서 면담을 하는데 저는 그냥 편하게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어요. 오랜 사귄 사람들처럼 막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장로님들이 놀랬을 거예요. 저는 잘 보일 일도 없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니 참 편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얘기 했어요. 사실 저는 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교회 건축 문제를 얘기할 때도 그냥 자유롭고 편하게 하는 겁니다. 목사가 그러니 교인들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단호함과 엄격함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교회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반세기가 넘은 51년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죠. ―목사님 겉보기에는 점잖고 매끄럽게 보이는 데 다른 면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런 내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희 교회가 오래 되다 보니 전통을 고수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회를 할 때도 기도를 많이 해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이 교회 회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회는 통성 기도를 많이 하고 회의를 합니다. 이렇게 했더니 회의도 순조롭고 시간도 많이 안 걸려요.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방식의 회의네요. 저희는 회의를 할 때 순서에 따라 발언을 하고 조용하게 진행합니다. 회의는 의견 조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가 되어야 하고 발언의 기회가 공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견 조율이 어렵지 않아요. ―어려운 걸 쉽게 처리하십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죠. 하나님께서 사람들 일을 잘 아시니까 캘리포니아 끝자락에 있는 저를 하남교회에 데려다 놓으신 거예요. 교회가 평안해지고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 당시에는 교회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오고 3개월 만에 좋아졌어요.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씨름하죠. 그러니까 현대교회의 예배 핵심이 설교인데 설교에 맞춰 예배를 디자인해야 합니다. 저는 빅 아이디어 큰 생각 즉 큰 주제 하나를 정해요. 이 달 같으면 지난주에 했는데 지저스 스토리Jesus Story 즉 예수님과 나와의 이야기인데 이걸 의역해서 인생의 봄이라고 해요. 3월이니까 봄이 오잖아요. 이 봄에 맞는 메시지 다섯 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성도들의 상황입니다.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에 맞춥니다. 이 다섯 개를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주제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자료들을 찾고 강단에 디스플레이를 합니다. 주보도 거기에 맞춥니다. 주보에 예고편 식으로 다섯 개의 주제도 보여 줍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다음 주에 어떤 말씀을 듣게 될지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이 예컨대 히든카드라는 제목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맞는 영상을 제작합니다. 다음 주 영상을 찍으러 내일 담양에 간답니다. 한 팀이 갑니다. ―매주 그걸 만들면 상당한 시간과 예산이 투입되겠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전문 방송 팀이 있어요. 풀타임 사역자들입니다. 영상 음향 조명 팀도 있습니다.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도 있어요. 등장 배우는 교인들이 봉사해요. 남의 것을 사용하면 저작권 침해라 방송에 내보낼 수가 없어요. 설교 한 편에 맞춰 이 모든 것들이 종합해 사용됩니다. 설교는 건축의 기둥처럼 큰 주제로 세우고 거기에 맞는 소주제를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채웁니다. 그렇게 디자인된 예배 시간에 제가 설교를 합니다. 말하자면 아픈 사람이 약국에 오면 열이 나는지 기침이 나는지 들어보고 진단해 약을 조제해 주잖아요. 그런데 약국에서 진단 없이 미리 약을 지어놓고 오는 사람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약사는 환자의 상황에 맞는 약을 주는 게 약사의 본분이죠. 목사는 성도의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 년치 주제를 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상황을 위해 매달 주제를 정합니다. 그 달이 끝날 때쯤 다음 달 주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인 중심의 설교를 준비해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서는 한 달에 얼마나 하십니까. 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만 서점에 가면 30권은 삽니다. 직원을 시켜 사는데 30권 더 사면 샀지 덜 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금방 봅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컨대 이 책을 보면 목차를 보고 필요한 곳을 찾아 읽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본전 다 뽑은 겁니다. 소설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음 책을 읽는 겁니다. 30권 사오면 금방 다 읽게 됩니다. 그리고 저렇게 쌓아놓죠. 저는 독서 때문에 머리 아프거나 부족을 느끼진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은 독서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다양한 책을 섭렵합니다. 성도들의 상황에 맞추려면 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성경 본문 연구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두란노가 발간하는 《생명의 삶》을 온 교인이 보기 때문입니다. 1997년 부임한 해 여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걸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걸 매월 정기구독으로 700권을 받습니다. 그 본문을 가지고 새벽기도회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본문 묵상이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 본문을 돌은 게 아마 몇 차례 될 겁니다. 본문이 정해지면 주석도 보죠. 필요한 단어는 원어도 찾아봅니다. 그러나 본문에 그렇게 매이지는 않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성경 연구보다 묵상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죠. 그래서 지난달의 주제가 하나님을 체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Testimony 증언이라 했지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간증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논리나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아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종교적인 사람 즉 종교인입니다. 지난 한 달 그걸 설교하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리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사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성도들과 은혜의 시간을 많이 나누었죠. 제 개인적으로는 참 풍성한 한 달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데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만 했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한번 들었는데 자기계발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았는데 실제 내용은 그렇지가 않군요. 제 설교를 그렇게 하는 의도는 교인 가운데 청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교회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교회가 연령층이 높았습니다. 제가 부임할 때 마음에 부담이 될 만큼 교인들 머리가 하얀 거예요. 그래서 포커스를 바꿨더니 지금은 삼사십 대가 교인들 주류를 이룹니다. 아주 많아요. 그런 젊은 사람들 때문에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안목을 가지고 젊음의 한때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제 설교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도전 의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 때문에 다시 시작하고 도전한 사람이 젊은 사람 가운데 많습니다. 주부들 중에서도 자격증도 따고 학위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무실 직원도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놀랍네요. 목회자들의 사고가 일찍 늙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이 있고 젊은데도 나이 든 사람이 있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사고(思考)가 나이 든 목사가 있어요. 관건은 저도 나이가 들어도 젊음의 사고를 가지고 목회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는 자리에 계속 있지만 제 사고가 늙어버리면 이 사람들은 사라져요.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교회는 지금 삼사십 대 교인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배도 1부 2부는 정장 차림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3부 4부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헤드셋을 하고 강대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설교를 합니다. 3부와 4부는 조명도 회중석은 좀 어둡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미국 교회에서도 그런 걸 많이 봤습니다. 극장처럼 아주 어두운 교회도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 약간 어두우면 안정이 돼요. 어두우면 숨을 수가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들의 심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그렇게라도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편안히 예배드리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 배려가 젊은이가 교회를 올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집중을 위해서도 좋은 것 같은데요. 청년들은 퍼포먼스에도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어쨌든 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면 은혜가 안돼요. 환하면 불안해지는 경향도 있어요. 나이든 세대는 예배는 환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나름대로 선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멕시코에 교회를 하나 세워 봐서 아는데 선교 전략이 정말 필요해요. 선교지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후원받은 재산을 처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의를 여러 사람 이름으로 해야 됩니다. 서로서로 모르게 하고 후원한 교회의 담임목사만 아는 거죠.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게 맞죠. 그러나 선교에 대해 성도들도 보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교의 방향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냥 선교사 보내고 후원금만 보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교를 하게 되면 전략적인 선교를 할 것이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지에 학교도 세우고 센터도 세우려고 합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 수도 같은 데서 좋은 대학의 젊은이들을 선교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없는 시골보다 도시의 젊은이들을 선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가 바뀌는 것은 젊은이 선교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우리 세대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대였습니다. 밤새 부르짖고 울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가슴 세대고 요즘 세대는 머리 세대 같아요. 우리는 열정을 앞세우는데 요즘 세대는 데이터와 정보를 중시하는 것 같아요.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두 학기 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 제 후배들 아닙니까. 늘 이런 얘기를 자주해요. 우리 시대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목회자들이 시대에 맞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지만 그 대신에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그 심령을 채워줄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 설교는 많은 경우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겉은 멀쩡한데 속이 병들잖아요. 계절의 봄은 때가 되면 와요.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리는 봄은 그냥 누구에게나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봄은 초청하지 않으면 오지 않아요.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영접하고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내 인생의 진정한 봄이 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벌고 출세해도 인생의 봄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봄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한 젊은 목사들의 사랑과 헌신이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2015-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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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더굳뉴스] 시인 소강석 목사
    ‘동양의 신비한 사상을 서양의 세련된 기법을 통해 마스터한 화가’라는 평을 듣는 서양화가 남관(南寬, 1913년 ~ 1990년 3월 30일)은 파리에서 자신의 처참한 생활을 반영하듯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어두운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태양을 받은 환한 빛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작품 '허물어진 고적'(古跡)이 탄생했다. 이 작품은 오랜 세월 어둠에 파묻혀 있던 어떤 거대하고 고귀한 존재를 의미한다. 가치 있지만 가려져 있던 것, 그것이 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결정적 순간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남관은 감춰진 의미, 다시 말해 비의(秘義)를 내비치는 게 예술의 힘이자 역할이라 생각했다. 예술은 정신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신비한’ 영역이다. 남관은 잔혹한 고비를 겪으면서도 악착같이 생을 이어가는 인간상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비참한 인간상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싶다고도 했다. 실은 남관 자신이 그런 인간이었다. 어둠과 고독에 파묻혀 있던 인간. 그러나 영원히 빛나는 것을 향해 나아갔던 예술가. '서울의 예수' '시인 예수' 저자 국민시인 정호승(1950- )은 그의 시 '고래를 위하여'를 애송하는 시인 소강석 목사에 대해 말했다. “소강석 목사님의 시에는 예수님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을 걸어가다가 절망과 고통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일어나 걸어라!’ 하신 예수님의 그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사람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과 고뇌가 깃든 시인 소강석 목사님 시집을 읽으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안아주시고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의 위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말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꽃이 필 때도 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릴 때도 있습니다. 아니, 언젠가는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폭설에 갇혀 길을 잃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한다면 그 모든 날이 상처의 계절이 아닌 사랑의 계절이 되어 감싸주리라 믿습니다." 생전의 청빈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한경직(韓景職, 1902년 12월 29일 ~ 2000년 4월 19일) 목사 이후 대한민국의 가장 뛰어난 영적 지도자는 소강석 목사일 것이다. 시인 소강석 목사가 예술가 남관처럼 견딘 그의 믿음의 삶을 시로 노래한다. 눈앞의 꽃 지고 나면 세상 모든 꽃 다 진줄 알았더니 일어나 눈을 들어보니 사방 천지가 다 꽃이었다 꽃 한 송이 졌다고 울지 마라 눈 한 번만 돌리면 세상이 다 꽃이다. 나는 몰랐다 저 하늘의 별이 차마 마주치지 못한 눈빛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저 지상의 꽃들이 차마 고백하지 못한 사랑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저 창문 밖으로 스치는 바람이 차마 지우지 못한 그리움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 23:1-6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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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더굳뉴스] 대신대학교 발전 세 기둥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가 개교 70주년을 맞았다. 1954년 4월 1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대구야간신학교로 개교한 이후, 여러 차례의 변천 과정을 거쳐 대신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정규대학 인가를 받고 오늘날 총신대(총장 박성규)와 더불어 총회를 떠받치는 대표하는 목회자 양성의 모판(seminary)이 됐다. 2000년 신학대학원과 2001년 일반대학원을 잇따라 설치하면서 도약하게 됐다. 이 무렵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한 김신길 장로가 부친 김추호 장로를 이은 엄청난 헌신을 보이면서 대신대학교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한국에선 의사라고 하면 수술하고 약 처방하는 치료(임상) 의사밖에 모른다. 미국 등 선진국엔 의사 과학자가 많이 있다. 의사 과학자는 의사 면허를 갖고 새로운 치료법과 의약품, 의료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 사람이다. 의학, 과학, 공학 융합 연구 역량을 갖춰야 한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절반이 의사 과학자다. 나머지는 생물학자, 생화학자 등이다. 치료만 해온 의사 중 수상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 한국 의대에 수재가 다 모여도 노벨 의학상이 나올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세계 교회 역사상 의사로서 신학을 발전시킨 영국의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년 12월 20일-1981년 3월 1일)처럼 의사이면서 신학을 발전시킨 대신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암 전재규 장로가 있다. 백암 전재규 박사의 평전 '향기 짙은 인생 여정' 출판기념회가 2023년 3월 15일 대신대학교 인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향기 짙은 인생 여정'은 전재규 명예총장의 삶과 신앙을 오랜 친구인 만호 류재양 장로(대신대 명예이사)가 한 권의 책에 담아 편찬한 것이다. 전재규 박사는 “평전에 담긴 것처럼 저의 삶에 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라면서 출간이 이루어지기까지 애쓴 여러 동역자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총회 정치가 류재양 장로도 저자 인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높은 이상을 품고 계속해서 전진해온 백암의 삶을 평전으로 알리게 되어 몹시 기쁘다”라면서 “백암의 꿈인 청라 정신의 구현과 기독교 선교 역사기념관 건립을 반드시 함께 이루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최대해 총장 사회로 진행된 감사예배는 재단부 이사장 김재국 목사 기도,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다니엘 12:2-4의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말씀에 근거해 ‘별과 같이 빛나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전재규 장로에 대해 “아름다운 인생이 보여주는 귀한 본을 우리도 따르자”라고 전했다.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 같은 혁신적인 리더는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의사소통을 한다. 프레젠테이션, 설교, 강연, 회의, 자료 공개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총회나 노회나 교회의 목적을 강조하는 방법을 강구한다. 이어 전 총회 역사위원장인 박창식 목사는 서평을 통해 “백암과 만호가 지닌 신실한 신앙과 따뜻한 인간애를 만날 수 있는 정금과 같은 교훈이 담긴 서적” 대신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암 전재규 장로(대구서현교회)의 평전 '향기 짙은 인생 여정'은 87년 세월을 믿음의 사람, 충성 된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온 한 인생의 성장 과정 그리고 교회와 지역사회와 조국을 위한 헌신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평전의 필자는 전재규 장로의 막역지우이자 긴 세월을 함께 동역해 온 총회 유력 정치인 류재양 장로이다. 두 사람은 같은 대구 땅에서 성장하며 1980년 대신대학교 야간부를 나란히 졸업한 후 평신도지도자로서 총회와 지역 교계를 함께 섬겨왔다. 특히 모교인 대신대학교에서 지금도 전 장로는 명예총장으로, 류 장로는 명예이사로 자리를 지키며 학교 발전을 열심히 돕고 있다. 대구기독교의 정체성을 축약한 ‘청라 정신’의 구현을 위해서도 두 사람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끌고 밀어주는 사이다. 의사 출신 장로의 신분으로 어떻게 해서 선지 동산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는지, 또한 대구지역은 물론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상대로 선교 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에도 나서게 되었는지를 이 책은 세세하고 치밀하게 증언한다. 이미 본인의 회고록을 집필한 적이 있는 전 장로가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세상에 소개하게 된 것도 류 장로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라며 말했다. “40년간 저의 모든 것을 지켜본 만호가 세상을 위해 다음세대들을 위해 제 평전이 꼭 나와야 한다고 강권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대학교 개교 68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2022년 4월 12일 학교 인문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학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전재규 명예총장에게 공로패를 전달했다. 전재규 명예총장은 제5~6대 총장을 연임하며 학교의 기틀을 세우는 데 물심양면으로 앞장섰다. 대구서현교회에서 31년간 시무장로로 헌신한 전 장로는 경북 칠곡 동명에서 태어나 미션스쿨인 계성학교와 경북대 의대를 거쳐 미국에서 마취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동산기독병원의 간절한 요청으로 귀국한 전 장로는 계명대 의과대 학장, 대한마취과 학회장, 대한통증학회 학회장, 대한호스피스협회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복음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로 쓰임 받았다. 전재규 장로는 신앙인과 의료인 외에도 역사가로서도 빛나는 업적을 남긴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했다. “나는 직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붙들어 주신 분이 계십니다. 깊은 구렁으로 빠질 뻔한 곳에서도 나를 잡아주셨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오랜 세월 속에서도 내 가족들과 내 생활을 지켜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생명 나의 주님이십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점철된 삶을 산 전재규 장로는 대신대 5대, 6대 총장재임 시기, 30억 원을 학교 발전을 위해 기증한 바 있다. 전재규 장로의 헌신으로 대신대는 학교부지 확장, 종합관 건립, 도서관 이전, 기숙사 리노베이션 등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전 장로가 장학금으로 기탁한 3억 원을 ‘백암장학금’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전재규 장로는 2021년 1월 20일 또 다시 대신대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전 장로는 이날 대구시 북구 산격동 소재 본인과 미국에 거주하는 딸 명의의 부동산을 대신대에 증여했다. 이 부동산은 현재 시가로 27억 원 정도로 알려지고 있다. 전 장로가 증여한 부동산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매각절차를 밟는다. 매각대금 가운데 일부 조교수 급여보전 용도 외에 전액 장학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이는 증여자인 전재규 장로의 뜻에 따른 것이다. 전재규 장로는 “총장 재임 때부터 학교가 살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학문에 매진하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다”라며 증여 배경을 설명했다. 대의명분이 있는 하나님의 사업이라는 기쁜 마음으로 헌신해 온 전 장로는 대신대에 대한 남다른 신념과 가치가 있다. 전 장로는 “영남지역 복음화와 특히 대구가 제2 예루살렘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신학을 파수하는 대신대학교가 든든히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늘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라고 했다. 대신대학교는 지난 2009년 7월 의학박사인 전재규 장로(대구서현교회 원로·80세)를 제5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전재규 장로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대신대는 본격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된다. 지지부진하던 시유지 5160평을 매입한 데 이어 진입도로 건설, 종합관 건립 등 거침없는 인프라 구축이 2013년 6월 30일 전재규 장로가 6대 총장으로 퇴임하기 전까지 이뤄졌다. 이를 위해 전 장로는 약사인 아내와 평생을 모은 거액의 사재를 대신대에 조건 없이 헌납했을 뿐만 아니라 총장재임 시절 지급되던 급여와 판공비 일체를 받지 않고 직임을 감당했다. 전재규 장로에게 대신대는 어떤 의미인지 말했다. “의사로 한창 바쁜 시기에 대신대 야간학부에 들어가 신학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8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교수로, 재단이사와 감사, 심지어 총장까지 맡으면서 대신대와 함께 해 왔습니다. 신학 공부는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호스피스 협회를 처음으로 조직했고, 치유선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을 열 수 있었던 것도 대신대 덕분이었습니다. 대신대는 6.25전쟁 도중 1952년에 시작되었으며, 영남지역 복음화를 위해 필요한 역할을 해 온 학교로, 공적 차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대구의 청라정신 회복을 부르짖으며 대구·경북 일대 근대역사문화 보존과 계승에 앞장서는 대신대 명예총장 전재규 장로. “대구를 다시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세우는 운동을 시작합니다.” 대신대학교 명예총장인 전재규 장로에게는 가족 말고도 평생 동안 지극한 애정을 보낸 대상이 둘이나 더 있다. 하나는 ‘교회’이고 하나는 ‘대구’이다. 이 둘을 조합한 ‘대구의 교회’는 따라서 전 장로에게 무엇보다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어릴 적 담쟁이 넝쿨 우거진 청라언덕 대구 선교부 주변을 거닐며 자랐고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병원을 통해 사람들이 문맹에서 벗어나고 목숨을 구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6·25 때는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함께 예배하고 전도하는데 앞장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열심히 전도하며 외친 구호가 바로 ‘대구를 제2의 예루살렘으로’였다. 실제로 북쪽의 평양과 남쪽의 대구는 초창기 한국교회의 부흥을 선도한 대표적 도시들이었다. 베어드 선교사가 부산을 거쳐 대구에 찾아온 1896년 이후, 대구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일대에 많은 교회들이 설립됐다. 평균 한 달에 한 교회씩 세워졌다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복음이 퍼져나갔다. “청라정신의 계승은 이 땅에 들어온 복음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우리 시대에 다시 회복하는 일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물려줄 수 있도록 적극적인 동참과 기도가 절실합니다.” 한편, 백암 전재규 박사는 계성중·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클리브랜드 병원에서 전문의를 수료했다. 대한마취과 학회장, 대한통증학회 학회장, 한국의료윤리 교육학회장, 세계마취과학회 상임위원, 대한호스피스협회 초대 이사장, 계명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대신대학교 총장, 동산의료원 박물관장, 대구3·1독립운동 재연 추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마취과학』(1994) 등의 의학 전문서 및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2022, 우리 시대) 등 40여 권의 저서를 저술했다. 대신대학교를 발전시킨 세 기둥을 꼽는다면 재단이사장 김신길 장로 제5대 총장 전재규 박사 그리고 총회와 대신대 막후에서 활약하는 총회 정치가 류재양 장로를 말할 수 있겠다. 현 대신대 총장 최대해 박사는 개혁신학과 신앙적 경영 경륜을 갖춘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향후 총신대에 버금가는 대신대학교 발전을 이룰 큰 기동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성경은 말씀한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2-3 202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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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5
  • 서정희와 김태현의 성막과 건축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물건은 사용되는(be used) 것이고, 사람은 사랑받는(be loved) 존재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선 사람이 사용되고, 물건이 사랑을 받는다. 그 반대가 성막과 건축의 디자이너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와 총괄대표 김태현 건축가의 관계다. 건축가(Architect)의 영어 어원은 '계획과 과제를 도안하고 지도하는 사람'(a person who designs and guides a plan, project, etc.)이다. 실제로 고대 건축가들은 '건축'일만 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지며 지폐에 자국의 건축가를 새긴 나라도 많다. 사실상 고대에는 거의 모든 왕이 통치자이자 동시에 건축가였다. 자신의 업적과 신에 대한 찬양, 자신의 예술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건축을 이용하였다. 물론 이런 왕들 중에 대중을 위한 건축을 한 왕들도 있다. 성막은 길이가 약 45.6m(100규빗), 폭이 약 22.8m(50규빗)인 뜰 가운데 세워졌고 뜰 사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청동으로 만든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 27:9-19). 뜰(마당)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이 있었고(출 27:1-8), 제사장들이 제사를 위하여 자기 몸과 제물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뜰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막의 성소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다(출 26:15-30).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여 있었고(출 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 털 휘장이(출 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 들인 숫양 가죽이(출 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 26:14)이 덮인 4중 지붕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 병상, 휘장 왼편에 금 등대, 그리고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 단이 놓여 있었다(출 25장). 또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직 언약궤만 있었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그리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릴 때 들어갔지만(출 27:21; 30:7; 24:3,8)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갔다 (레 16:1-34, 히 9:7).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예물과 기구가 놓여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언약궤(법궤, 증거궤)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장소는 단지 휘장 하나로만 가려져 있을 뿐인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은 둘로 찢겨 졌다.(마 27:51, 막 15:38) 따라서 이제는 제사장과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누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히 10:19-22). 이 사건은 성도들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2023년 11월 21일 11:00 아차산로 345 tBD 사무실.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 총괄대표, 김태현(콜롬비아 건축대학원 졸업) 기독언론인협회(회장 황규학) 회원 고정양, 김영배, 김효정, 소재열 간의 신앙과 교회 건축에 대한 대담이 이루어졌다. 김영배: 서정희 씨는 전공을 안 하셨는데 건축에 대해 많이 아시는 것 같은데요. 황규학: (총괄대표 김태현) 옆에 따라 다니다 보니까. (일동 웃음) 서정희: (손사래를 치며) No, No. 정보를 잘 아시고 말하세요. 김효정: 허위 보도. 허위 보도. (일동 웃음) 서정희: 저는 젊었을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아서 집안에서 많은 일들을 했잖아요. 김태현: 공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서정희: 그렇죠. 공간 디자인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저는 그 기초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믿고 있습니다. 김영배: 그 기초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죠? 서정희: (1962년생) 1981년 19살 때 주님을 믿고 지금까지 저는 예화를 들 때 누구한테 얘기를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2-6)을 꼭 예로 들어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 건축을 맡기잖아요. 성소(聖所, Sanctuary)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處所)'다.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사함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외소(外所)와 내소(內所)로 분리된 구조였고 최초의 성소는 이동이 가능한 천막 형태였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불렸다. 성소를 지을 때 실을 꼬아서 만든 천막으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장막(帳幕)이나 성막(聖幕)이라고 했다. 서정희 씨가 말을 이었다. 서정희: 그 성막을 그에게 맡긴 이유가 딱 하나예요. 많은 사람에게 성막 짓는 이야기를 해봐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령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감동 때문에 여러 가지 일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고 출애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실 짜는 일 가구 짓는 일 모든 것들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께서 임했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들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제게 임해서 남들보다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다음에 성막을 보지 않아도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것처럼 우리 건축가 선생님들이 하지 못 하는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셨고 계시의 영을 부어주셨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영도 주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랜 세월 살림하면서 훈련을 했더니 그 열매로 국제대학원에서 초빙교수로 공간디자인을 3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받았습니다. 저도 외부로 다니면서 강사를 했었는데 결국 정교수가 될 정도로 주님이 인도해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배워서 한 것보다 더 많은 일곱 권의 책을 냈는데 다 집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도 처음 만들었고 무크 형태의 책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고, 그리고 글을 써도 자서전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다 집 안에서 썼고 묵상도 집 안에서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은 우리의 가정 교회가 점점 확대되어 작은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작은 것을 귀히 여기고 그 작은 것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 담겨진다면 크든 작든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저는 같다고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도했던 것들이 꾸준한 훈련과 그 공교함과 정교함이 결국은 건축팀을 만나서 더 성숙 되고 확대된 것 같아요. 그래서 감히 제가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영광을 누린 거죠. 김태현 대표님이 저를 써주신 거죠. (웃으며) 감사하게 된 거죠. 소재열: 궁금한 게 있는데 저는 항상 실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서정희: 저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우리가 정말 묵직하게... 주님은 간사함을 싫어하시잖아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 48) 말씀하시잖아요. 간사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말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그런 자세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실익이 생기지 않을까요. 황규학: 신앙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네요. 서정희: 내가 이 건으로 당장 이익이 없어도 그러나 결국에는... 소재열: 믿음이 좋은 분들하고 대화하면 제가 힘들어하거든요. 그러나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지되기 위해서는 뭔가 이익이 창출되어야 하거든요. 서정희: 그렇지 않으면 엄청 고달프죠. 김태현: 건축 디자인 회사가 베이직(기본)을 잘 고수하면 큰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벌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저희는 이 건축 디자인 공동체를 만들었을 때 돈을 버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기본에 충실하고 인내하면서 디자인을 해나가면서 우리(회사) 식구들이 먹고 살면 돼요. 황규학: 철학이 분명하네. 서정희: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많고 하나님이 보고를 열으시면... 김태현: 이걸 사업으로 일으키고 하는 문제보다 저희는 신앙으로 멀리 보고... 소재열: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죠. 서정희: 주님이 보고를 열으셔야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황규학: 소 박사가 보고 배워야 돼요. 소재열: 그러니까 나머지는 하나님 주신다니까. 그러나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김태현: 부끄러운 과거지만 소위 명예와 돈 이런 걸 건축 디자인의 하나님 주시는 달란트로 여기고 그것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던 세월이 많이 있었어요. 선배님들 앞에서 죄송한 말씀인데 제가 부끄러운 과거를 지나고요. 느낀 것이 많이 있어요. 서정희: (웃으며) 깨졌다는 얘기에요. 김태현: 그걸 쫓아 올라가다가 상당히 어느 정도까지 접근을 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한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유로 그렇게 됐어요. 해외 일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주로 일했던 나라들이 러시아 연방 우즈베키스탄, 카지스탄 전쟁 나기 전 우크라이나, 몽골, 이런 러시아 언어를 쓰는 나라들, 러사아를 큰형님으로 여기는 나라들, 중앙아시아를 포함해서 최근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통령 관련 프로젝트를 했었어요. 새로운 정부 출범과 동시에 건설부에 자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해나가면서 그때 당시 명예와 돈을 하나님 주신 달란트를 이용해서 추구를 했어요. 그렇게 여러 일을 추진하다 자금력이 모자라 중단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중국과 터키 정부가 들어오게 됐어요. 그 두 정부가 들어오면 프로젝트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기들 자원과 인력이 전부 들어와요. 그렇게 되니까 제가 했던 일이 중국과 터키 기업들이 들어와서 다 넘어가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저랑 멀어지게 되죠. 그렇게 되면서 2, 3년 어렵게 되죠. 싱가폴에 본사가 있고 거의 100명 정도 직원이 있었는데 다 손을 놓게 됩니다. 그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일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tBD를 기점으로 작지만 성실하게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황규학: 건축과 다른 문제인데 두 사람이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서정희: 이 문제는 30년 전으로 돌아가야 돼요. 우리 친정하고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았어요. 그런 거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소재열: 교회를 상대로 일을 하시면 아까 말한 것처럼 돈이 개입되잖아요. 시험 많이 듭니다. 감당하셔야 될 겁니다. 서정희: 그런데 우리는 지금 꼭 교회만 하는 건 아니예요. 교회는 저도 개인적으로 겪어봤는데 경력이 40년이니 안 겪어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저희에게 주신 것들이 다른 거예요. 저는 어제도 묵상하면서 '주님 저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들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제가 흘려보내야 될 것들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으로 저를 다시 영화롭게 해주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모든 기준을 세상으로 삼으면 저는 시험 들어서 하루도 못 살아요. 그러나 주님과 저와의 교제 가운데서만 머물면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사단이 밀 까부르듯 우리를 까부를 것입니다(눅 22:31-32).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전신갑주를 입고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들어서지도 말았어야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무장하고 나가듯 영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tBD를 세우셨을 때는 주님께서 믿고 맡기실 일들이 있을 거고, 보내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맡겨주시는 기업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저를 유방암에서 다시 살리셨다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믿습니다. 또 주님 앞에 갈 때는 어떤 말들을 해야 될까, 생각한다면 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런 마음과 각오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시고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누가 물 주고 자라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시는 거잖아요. 내가 감히 어떻게 합니까. 주님 그렇지 않습니까.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Tadao Ando, 1941년 9월 13일~ )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안도는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는데, 건축가가 되기 전에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로 일했고, 건축에 대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969년에 그는 회사를 설립했고(firm Tadao Ando Architects & Associates), 1995년에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상금 십만 달러를 고베 지진 고아들에게 기부하였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그의 건축물 속의 '물'은 얕고 조용하며 잔잔하다. 또한, 건축물과 매우 인접하여 하나로써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함과 경건함을 준다. 자연과의 조화와 함께 큰 특징으로 보여지는 것은 건축작품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건축교육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오사카 '촌놈' 안도는 건축 여행을 하면서 롱샹과 라투레트를 오랜동안 혼자 공부했다. 스위스 예술고등학교에서 배운 그림이 건축교육의 전부였던 시골뜨기 코르뷔지에는 안도의 롤모델이자 영웅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光の教会, 히카리노쿄카이)가 있는데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정식 명칭은 '이바라키 가스가오카(茨木春日丘)'로 1989년 준공되었다. 예배당, 홀, 목사관은 모두 안도 다다오 씨의 설계다. 보통의 경우라면 십자가가 걸려있는 예배당 대신에 정면 벽면에 십자 모양의 틈을 만들어 놓아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아름다운 십자가가 나타나도록 설계됐다.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 가로와 세로로 만들어진 틈,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와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십자가가 나타난다. 예배당의 바닥과 의자 등은 빛의 십자가가 자아내는 빛을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심플한 구조인 만큼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설계, 간소하면서 작은 예배당이면서도 명암의 조절로 차분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공간이다. 끌려서 안으로 들어가 음미하기 시작하면 계속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떠나기가 어려워진다.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모든 걸작들이 그렇듯이... 서정희 씨는 tBD 건축사무소 대표이며 국제대학교 산업디자인 초빙교수, 영동대학교 협력 교수이다. 김태현 씨는 우즈베키스탄 건설부 수석자문이면서 콜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이다. 서정희 씨는 첫 프로젝트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에 소속된 캠퍼스 복음화와 온 가족을 위한 전략적인 교회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대전의 오메가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tBD 대표 서정희 씨는 "시골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그 공간에 맞게 인테리어나 교회 건축을 할 수 있다"라고 했다. tBD 총괄대표 김태현 씨는 "하나님 말씀, 십자가로 이루어진 예배당, 자연, 미래에 대한 공간을 만드는 경건성과 실용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은 ‘바람이 불어’에서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라고 자신의 괴로움을 성찰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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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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