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9-15(일)
 

캡처-web.jpg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현재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는 이상우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말인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이병철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부활 신앙이 없이 1987년 타계하신 이병철 회장과 달리 한기승 목사는 작년 2023년 4월 9일 믿음의 부활을 전하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교단과 국가에 기여한다. 광주 무등산 불의 혀 한기승 목사는 외친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우리 대한민국을 반도체 대국으로 일군 이병철 회장도 모두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총회와 대한민국이 되기를 불철주야 기도하겠습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았던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6월 푸르른 호국의 계절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계절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3-04-09

태그

전체댓글 0

  • 05501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더굳뉴스] 이병철 사업보국과 한기승 신앙보국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