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7-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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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김한욱 목사 소나무의 푸르름
    외교 전략 가운데 ‘대나무 외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뿌리는 단단히, 줄기는 곧게, 가지는 유연하게.’ 핵심은 가지의 유연함을 지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휘어도 부러지지 않는 뿌리를 위한 즉 원칙의 외교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계절 푸른 소나무는 유연하게 휘지 않지만 대신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느 계절이 와도,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소나무는 꺾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혹한에도 곧게 서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하나님의 영광 그 빛을 위한 개혁주의 열망처럼.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 연구실 책상 주위를 배회했지만 두 줄을 넘길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초기 사학계에 영향을 미쳤고 민족사학을 개척하고 그리고 그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학자 고 이기백(李基白, 1924년 10월 21일 ~ 2004년 6월 2일) 교수의 수필에 나온 한 문장이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렇듯 "총회에 대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신앙을 드러낸 목사가 총회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2022년 9월 6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정적인 정견발표를 외친 신예 제107회 총회 부서기 후보 김한욱 목사다. 그는 예전에 제101회 총회 부서기 후보로 등장해 돌풍을 일으킨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2016년 9월 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혁, 바로 세우기, 품격 회복 등 이른바 3R을 통해 성숙한 총회가 되는 일에 헌신하겠다'라고 정견발표를 했다. 그리고 9월 26일 부서기 선거에서 신예 권순웅 목사가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관록의 김상현 목사를 제치고 당선됐다. 그 뒤를 이어 2022년 9월 7일 푸르른 소나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김한욱 목사의 정견발표다. "저는 정견발표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습니다. 그 준비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 기울였습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좋은 청사진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네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공약을 일단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총회는 정말 일꾼, 정말 총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일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골 조그만 교회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출석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너무 가난해 열여덟 살에 외항선 선원으로 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외항선을 타고 어둠의 그늘을 지나기 위해서 놓치 않은 것이 있다면 성경책입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 때 30명이 탄 배에서 저 혼자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원들을 전도하게 해주십시오.' 결국에는 30명 가운데 27명이 모여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1년 뒤 한 달을 쉬게 됐는데 그 시간 동안 육지에서 전도 훈련과 영적 사역을 배웠습니다. 22살, 25살 청년의 시대에 거리로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26살에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저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어두운 광야에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한 두 가지 뜻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24년 전(1998년)에 새안양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제2 새안양교회’를 세우고 안양에서 멀리 떨어진 하남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다 당회가 구성되고 독립했습니다. 저는 총회를 위해서도 바르고 정직하게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을 개발해 불신자를 전도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제 공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107회 '샬롬 부흥'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때를 위하여 김한욱을 준비시켜주셨고 총회장 이하 임원들을 잘 섬겨서 제107회 총회를 아름답게 끝맺는 일을 뒷바라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중 힘찬 박수) 신앙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엔 한계가 있지만 신앙은 세상을 감싸고 하나님과의 샬롬이 이루어지고 푸르른기 때문이다. 김한욱 목사에게 어울리는 말씀일 듯싶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내리소서 느 13:31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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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8
  • [더굳뉴스] 허은 목사 부산의 아우구스티누스
    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민주당의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씨는 말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다음에는 안희정·이재명·박원순 같은 사람이 이어서 쭉 장기 집권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싸가지 없는 소리’였겠지만 이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어쩌면 이해찬씨의 말은 그냥 흘려버릴 말이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한 세 사람 가운데 사법 위기에 허덕이는 이재명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먹은 것도 없이 겨우내 버틴 몸으로 꽃까지 피워내야 하는 것이 봄이다. 새싹이 온몸으로 흙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도 봄이다. 그건 정말이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는 은총이다.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가 말했다.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없는 것을 본다. 소망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감독(bishop)이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독이었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감독은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 그들에게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말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해집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주님 은사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2023년 3월 16일 오후 2시 부산 연제구 연산 8동에 있는 동현교회의 주민을 위한 무료 카페에서 지용길 목사와 함께 허은 목사와 대담을 나누었다. 지형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해 도로여건이 열악하고 인근 주민과의 관계성이 낮아 지속적인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는 곳이다. 2022년 5월 21일 입당 감사예배 및 헌당식을 드린 산등성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지상 4층, 지하 1층의 예배당은 아늑했다. 연산동을 아우르는 연건평 511평의 예배당은 주변 개발지역과는 달리 지형적인 한계로 인해 소외받았던 연산8동과 어울려 아담했다. -여기는 언제 자리 잡으셨습니까. "지난해 5월에 입당했습니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총회 부서기 마치고 그해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서기 임기 중(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많이 바쁘셨을텐데. "네. 교회 일과 총회 일이 겹쳤습니다. 교회 장로님들, 집사님들 많이 수고하시고 정말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이 지역은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삽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고 도로변에 있지 않아서 불리한 면이 있는데 오히려 동네 가운데 있어 조용하고 지역 주민들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좋습니다. 이 카페는 무료 카페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차 빼서 마시고 우리 교회 교역자 집사님들이 순번을 맡아 봉사를 합니다." -이런 교회 카페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여기는 어려운 분들, 독거노인들이 많아 지난해 5월에 입당하면서 전체 100개 가정에 쌀, 라면을 동사무소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지난 연말 성탄절에 2백 가정에 한 상자에 105만 원 상당의 생필품을 전달했습니다. 그야말로 지역에 있는 교회로서 지역민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가니까 교회 안에도 어르신이 많고 교회 주변 이웃에도 어르신이 많습니다. 다음 세대도 잘 키워야 하지만 이 어르신들에게 천국 기실 때까지 여러 가지 책임을 져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집이 나고 교회가 살 여력이 되면 이런 어른들을 1인 1실, 혹은 2인 1실로 30분 정도 천국 가실 때까지 모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회복지학도 전공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고 요양시설을 운영하면 외부 시설장을 모셔야 되는데 제가 자격증을 따니까 경비도 줄이게 되죠. 그런데 교회가 작지만 아담하게 세워지니까 주변 지역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 여기로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최근에도 우리 장로님들께서 '목사님 꿈꾸고 계시는 그 일을 현실화시켜봅시다. 교회 짓고 1년도 안 됐으니까 준비가 되면 옆에 있는 건물 하나 사 가지고 우리 형편에 맞게 부속건물 지어 청소년, 아이들, 청년들 교회 와서 마음껏 공부하고 놀 수 있게 자리 만들어줍시다. 그 위에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우리가 평생 책임져주고 하는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담하게 지역민과 함께하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현교회는 개척하셨나요, 부임하셨나요. "제가 2대 목사입니다. 1대 목사님이 다른 교회를 섬기다가 나오셔서 성도 30여 명하고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소금공장도 하시고 빌려서 예배드리셨습니다. 제가 보니 전월세를 일곱 군데나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주택을 하나 매입해 예배당을 짓고 IMF가 올 당시 빚이 상당했습니다. 저를 후임으로 오라 했습니다. 당시 목사님이 협심증으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숨이 차서 설교를 잘못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고 1년 뒤 다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목사님이 인천 길병원에서 수술하고 좋아지셨습니다. 건강이 좋아지시니 3년 동안 안 물려주시는 겁니다. 3년 뒤 위임투표를 해 물려받긴 했습니다. 물려받은 뒤 있던 교회를 매각하고 다른 교회를 사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우리에게 부담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가 너무 도시 중앙이고 환경이 유흥가라 장기적으로 볼 때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코로나 시국인데 장로님들과 뜻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 여기 집 네 채가 한 날, 한 시 동시에 계약이 됐습니다. 그 네 집을 한 필지로 묶어 헐어내고 건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총회 서기 임기 중인 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은혜롭고 순적하게 성전 건축이 됐군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없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 교회가 제대로 되겠나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왜 이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는지 환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벽처럼 싹 둘러싸고 있고 딱 우리 교회가 서 있는 주변에 서민들이 사는 고만고만한 건물만 좍 있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겁니다. (나중에 올라가 보니 정말 그랬다.) 어려운 분들 사는 가운데 교회가 있고 그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좍 서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는가. 그래 이분들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을 때 성도들의 생각이 이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곳에 세워주셨다. 그렇게 해서 작지만 차근차근 우리 힘에 맞게 지역도 섬기고 또 우리 노회 장로회에서 해외 개척 선교를 하겠다 해서 단독으로 하기에는 좀 버거운 게 있고 해서 우리 교회하고 노회장 노회하고 절반씩 힘을 보태 캄보디아에 교회를 하나 세웁니다." 그 관련 기사가 '기독신문'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동부산장로회 임원들은 부산 동현교회(담임 허은 목사) 성도들과 함께 2023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천준상, 이숙영 선교사가 사역하는 바탐방지역을 탐방했다. 이 지역에서는 약 20평 규모의 비전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고대학생 52명이 생활할 수 있는 EDM선교센터를 증축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동부산장로회와 동현교회는 이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 4천만 원을 함께 감당하기로 했다. 허은 목사는 지난 2021년 9월 제106회 총회 서기 직무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다고 한다. “총회 서기는 총회 소속 노회와 교회의 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하는 직분이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며 어떤 외압에도 바르게 섬기겠다.” 부산 아우구스티누스 허은 목사는 제107회 총회선거관리워원회 서기로서 제107회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의 클린개혁을 떠받칠 제108회 총회 임원과 상비부 선거를 깨끗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를 관리해야 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낳아주신 어머님, 길러주신 어머님을 다 같이 진심으로 섬겼던 효심을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동현교회와 총회를 섬길 것이라 믿는다. 그리면 제104회 총회장 이승희 목사가 총회 석상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총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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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6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5
    “미국은 다시 이기고 있습니다. 그 점을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가 오늘 밤 이 자리에 있습니다.” 2026년 2월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 행정부 들어 두 번째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이 시작됐다. 이날 백악관과 민주당은 국정연설에 초청한 ‘특별 손님’을 통해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강조하는 전략을 펼쳤다. 트럼프는 6·25 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E. 로이스 윌리엄스를 초청해 그에게 미국 최고 군사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그는 1952년 기밀 작전에서 소련 전투기 네 대를 격추했다. 트럼프는 이달 초 윌리엄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훈장 수여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이날 윌리엄스는 멜라니아 여사와 나란히 앉았고, 멜라니아가 목에 훈장을 걸어줬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순간은 2차 세계대전의 재현이었다. 제1 세계로 간주되는 대륙에서 오랜 역사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를 영토 문제로 침공하는 일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적이 없다. 적어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로는 없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러시아 사주를 받고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군병사 칼 파워스 기념비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1934-) 목사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이 겹쳐있다.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 목사가 1950년 한국에 온 미군 칼 파워스(Karl Powers, 1928~2013. 9. 21) 상사의 무조건적 헌신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내 인생을 바꾼 건 한 미군 병사의 힘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한 사람이셨습니다. 모든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1934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5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랐다. 어려운 형편이라 늘 끼니가 걱정이었다. 그가 4학년 때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수원의 못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전학 온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4대1의 경쟁을 뚫고 6년제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하고싶었던 그는 서울의 철도고등학교는 전액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1950년 6월 26일 혼자 서울로 향했다. 그 하루 전의 한국전쟁 발발을 알지 못했던 그는 피난 인파에 휩쓸려 고생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수원으로 돌아왔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이 물러갔으나 여전히 학교 문은 열리지 않아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경부터 이듬해인 1951년 1월 초 사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유엔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1·4후퇴 때 퇴각한 미군들이 수원교도소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가 친구들과 담장 밖에서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한 미군이 여러 친구 중에서 김장환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여 그를 막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난로를 가리키며 불을 지펴달라는 시늉을 했다. 눈치 빠른 그는 재빨리 논두렁에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와서 난로불을 피워주고 시키지도 않은 청소까지 거기다 신발까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자 영특하고 부지런한 그를 매일 오게 했고, 부대가 경산으로 내려갈 때 그를 데려 갔다. 막내아들을 전쟁통에 타지로 보낼 수 없었던 어머니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영어도 배우고 일을 해서 돈도 벌고 싶었다. 일을 하고 받은 초콜릿이나 담배는 암시장에 내다 팔면 바로 돈이 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이 되자 수원교도소 자리에 미군 부대가 들어왔다. 갓난아기에게 무언가 먹이려고 애쓰던 어머니들, 전쟁고아의 비참한 삶, 공포에 떨던 민간인들,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들. 경기도 수원에서 살던 소년 김장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김장환 목사는 수복 후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 집은 소작농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60%를 땅 주인에게 주고, 나머지 40%로 살았습니다. 식구는 13명이었습니다. 양식이 모자라 한 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했습니다. 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보리쌀만 먹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꿈이 정치인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종종 미군 부대로 놀러 갔지요. 운 좋으면 초콜릿이나 껌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소와 마차를 빼앗겨 집안은 빈털터리였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얻어가는 담배와 비누, 통조림 등을 팔아서 집안 생계를 도왔지요.” 하루는 미군이 김장환에게 장작을 구해 난로에 불을 피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막사 청소까지 해놓았다. 남달리 똘똘하고 영리한 그는 미군 숙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소년 하우스 보이가 됐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된 어린 소년들은 미군에게 달러로 임금을 받고, 자신이 일하는 숙소의 미군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조리 과정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1인용 통조림 형태의 전투식량이다. 해방 이후엔 C-레이션이 상자당 쌀 1되 값에 시장에서 팔렸다. 그리고 미군이 입지 않은 속옷, 양말, 전투화, 군복 등도 모두 얻어올 수 있었다. 하우스 보이로 일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도 배고픔을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었다. 경산에 있을 때 어느 미군이 그에게 '빌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영미권의 남자이름인 윌리엄(William)에서 파생된 이름 혹은 애칭(William→Billy→Bill)이다. 생뚱맞게 윌리엄에서 왜 발음이 전혀 다른 빌리와 빌이란 애칭이 나온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윌리엄'이란 영어식 이름은 원래 게르만식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게르만식 언어에서는 자음 W가 영어의 V와 비슷한 음가를 지니기 때문에 나오게 된 형태이다. 실제 동일한 계통에서 파생된 독일식 이름으로 빌헬름(Wilhelm) 또는 빌로헬름(Wilohelm)이 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애칭이 빌리(영어: Billy, 독일어 Willy)가 된다. "단호한 보호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미군은 꼬마 소년 김장환이 아주 똑똑하고 야무지게 보였던 모양이다. 빌리는 그곳에서 일생의 은인인 인사 업무를 담당하던 칼 파워스 상사를 만난다. 당시 22세였던 칼 파워스 상사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중 옆 막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빌리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빌리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했고 늘 배움에 목말라 있던 빌리도 선뜻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51년 5월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 고등학교 입학 허가서를 들고 나타났다. 환갑이 넘은 어머니는 고심 끝에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아들이 7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아들에게 종이봉지에 흙을 담아 주면서 고향생각이 날 때 다려 먹으라는 당부를 하며 보냈다.1951년 11월 12일 전쟁중인 최빈국 한국에서 17세의 고등학생이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1일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수원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번쩍이는 신천지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 근무연장기간이 끝나지 않은 칼 파워스 상사 대신 먼저 귀국한 동료가 빌리를 마중 나왔고, 며칠 후 드디어 칼 파워스 씨가 사는 버지니아주 단테시에 도착했다. 빌리는 미국에 가서야 칼 파워스 씨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테시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산골짜기에 사는 칼 파워스 씨는 곧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빌리를 데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밥존스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칼파워스 씨가 빌리를 학비가 싼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대신 기독교 사립학교에 넣은 것이 오늘의 김장환 목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군대에서 한 동료가 "밥존스가 외국학생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한 말 때문에 선택한 학교였다. 빌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밥존스 재단은 기독교 교육을 위해 밥존스 1세가 1927년에 설립한 학교로 매우 보수적인 학풍을 고수하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기독교 학교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명문으로 꼽힌다. 밥존스 재단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한 울타리에 있는데 중학생부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있다. 엄격한 생활과 함께 매일 아침 채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빌리는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중 제리 메이저라는 신학과 학생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지독한 외로움과 답답함에 시달리던 빌리는 한국말로 기도를 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방과후에 영어를 못하는 빌리를 따로 지도해주었고, 기숙사 동료들도 열심히 도와주어 첫 학기를 낙제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칼파워스 씨에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빌리는 파워스 씨가 군인장학금으로 어렵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댄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빌리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어가 익숙해진 데다 칼 파워스 씨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다졌기 때문이다. 반드시 뭔가 이룩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도 한몫 했다 빌리가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웅변대회에 참가하고부터였다. 전국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칼 파워스 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직접 원고를 써서 선생님께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선생님은 동양학생이 지원한 것을 가상히 여겨 웅변연습을 도와주었다. R과 L 발음을 고치기 위해 입에 구슬을 물고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 교내대회에서 1등을 하고 학교 대표로 주대회와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해 아이젠하워상을 받았다. 그 일로 빌리는 밥존스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방학 때 빌리가 1등 트로피와 부상으로 받은 텔레비전을 안고 칼 파워스 씨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온동네에 화제가 되었다. 칼파워스 씨는 빌리의 학비를 대기가 버거울 때는 지역 신문인 '디킨스니언'지에 빌리의 사정을 알리고 모금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동양학생을 위해 성금을 보내주었고 빌리는 모금 문화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학교생활에 자신이 붙은 빌리는 과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사귀는 여학생이 없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학교 음악회에 언제나 혼자 가야했다. 키가 큰 미국 여학생들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빌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담하고 예쁜 여학생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용기를 내서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트루디는 환하게 웃으며 빌리를 맞아들였다.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기숙사에서 벌점을 단 1점도 받지 않은 모범생 빌리는 이미 학교 내에서 인기스타였다. 두 사람은 음악회에 다녀온 뒤 편지를 주고받다가 2년 후 트루디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빌리는 고교 졸업 때 우등상을 받았고 그 소식은 빌리의 학비를 모금해주었던 디킨스니언에 보도되기도 했다. '빌리 김은 모히칸 문학단체의 일원이었고 스포츠 매니저이기도 했다. 또 학급 성가대원이었고 미국 미래교사회 밥 존스 고교 지부의 리더였으며 학생신문 '트라이앵글'지의 스포츠 편집자였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민주주의의 소리'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빌리를 소개했다. 고교를 졸업할 때 빌리는 망설임 없이 신학대학을 선택했다. 미국에 와서 신앙을 갖게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신앙상담자와 신앙관련 모임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믿음을 키워나갔다. 밥존스에서는 정기적으로 채플시간을 통해 바이블 컨퍼런스를 실시한다. 한국의 부흥회와 비슷한 형태인데 빌리는 그 예배를 통해 강한 비전을 받고 주말이면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시골교회에 가서 전도도 하고 간증도 했다. 돈을 모아서 다른 지역에서 열린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에 참석해 강한 도전을 받기도 했다.빌리는 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쳤을 때 파워스 씨 집과 가까운 롱브랜치 교회에 강단에 서게 되었다. 출석교인이 약 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였다. 그 교회에 파워스 씨의 외삼촌이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부흥집회 기간을 맞아 서너 명의 강사를 초청할 때 빌리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빌리는 한시간 동안 한국 상황과 미국에 오게된 경위, 학교 생활, 앞으로의 꿈을 조리있게 강연했다. 그날 집회가 소문이 나면서 빌리는 단테시의 여러 교회에 부흥강사로 초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라이온스 클럽과 로터리 클럽에서도 빌리를 스피치 강사로 초청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아칸소까지 가서 스피치를 하고 돌아왔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한국에서 온 빌리의 흥미로운 스피치는 어디서나 인기였다. 빌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비 이외의 경비는 스스로 마련하였다. 칼 파워스 씨가 공부에 지장이 있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라고 하여 주말에 강연을 하고 방학 때마다 동급생인 왈리의 집에 가서 일했다. 왈리의 아버지 왈도 예거 장로는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닭과 칠면조를 가공하는 회사 코트랜드를 운영했다. 예거 장로는 미국 기독교실업인협회 회장을 3년간 역임한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빌리는 방학 때 왈리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미국 기독교인 가정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미국 시골 마을로 전도하러 가는 주말 전도여행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키 작은 한국 청년의 스피치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4학년 때 빌리는 대학원을 마치면 한국에 가서 복음전도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주말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다녔다. 학교생활이 익숙해져 어려움이 없었지만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은 적이 많았다. 기숙사에서 세끼 밥을 먹지만 용돈이 없어 군것질을 할 수가 없었다. 파워스 씨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지원을 요청했다. 빌리와 트루디는 좋은 만남을 갖고 있다가 트루디 언니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시간주 레이크뷰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빌리를 트루디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했다. 빌리를 인근에 있는 프리 감리교회에서 저녁설교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트루디의 아버지는 설교를 들으며 빌리를 사윗감으로 점찍었지만 트루디의 어머니는 딸을 가난한 나라로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트루디의 어머니는 빌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밥존스 대학교 총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미국 사람이든 동양사람이든 결혼하려면 빌리 김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디를 시골집에 데려 갔을 때 칼 파워스 씨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시골로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어 독신으로 지내고 있던 칼 파워스 씨는 트루디 때문에 빌리가 미국에 주저앉게 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중산층 집안에서 어려움없이 자란 트루디가 산골집에서 스스럼없이 부엌일을 하는 것을 본 칼 파워스 씨는 빌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칼 파워스 씨는 빌리가 공부를 마치면 꼭 한국으로 돌아가서 활동하길 바라고 있었다. 빌리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 '1958년 밥존스를 빛낸 30대 동창생'에 선발되었다. 빌리와 같은 해에 졸업하기 위해 부지런히 방학 때마다 학점을 딴 트루디도 그해 8월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58년 8월 8일 저녁 8일 두 사람은 미시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빌리는 밥존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트루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트루디가 돈을 벌게 되자 빌리는 7년간 학비를 대준 칼 파워스 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빌리는 1년 안에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했다. 트루디도 매일 새벽 2시까지 빌리가 과제물 밀리지 않도록 도왔다. 대학원은 32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대학 때 부지런히 학점을 이수하고 섬머스쿨까지 다닌 빌리는 예정대로 1년 만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2월 단테침례교회에서 빌리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칼 파워스 씨는 빌리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해 11월 빌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트루디의 교사월급과 빌리의 부흥집회 사례비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후원해준 칼 파워스 씨의 고귀한 뜻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일단 고국으로 돌아갈 배표 2장을 일단 마련했지만 가난한 고국에 돌아가서 선교활동을 하려니 모든 게 걱정되었다. 부부는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달에 50달러 씩 도와주는 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국으로 떠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귀국을 앞두고 캔턴 침례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을 때, 그 교회에서 마침 매달 50달러씩 선교비를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곧이어 왈도 예거 장로가 세계기독봉사회를 창설하여 김장환 목사의 한국선교를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친구들은 한국 선교 때 사용하라며 모금을 하여 4륜구동 포드 픽업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매달 선교헌금을 하겠다고 약속한 친구들도 있었다. 캔턴침례교회와 친구들은 40년 넘게 후원비를 보내주고 있다. 1959년 12월 불안한 눈빛으로 뱃전을 서성이던 17세의 하우스보이 빌리가 8년 만에 목사 김장환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파란눈의 트루디가 함께 했다. 그리고 포곡제일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고 김종원 목사를 담임교역자로 섬기게 될 공군 병사 빈병옥이 김장환 목사를 만나려고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설립된 오산공군기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안에서...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1-5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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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4
    심판의 날 모든 인생은 하나의 세계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모른다. 바깥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날씨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삶의 환경이다. 날이 덥거나 춥고 가끔은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그저 평범하게 식사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견뎌내야 하는 삶이기도 하다. 미국의 소설가 마리오 푸조(Mario Puzo, 1920년 10월 15일 ~ 1999년 7월 2일)가 집필한 장편 소설. 1969년 3월 10일 출판되었고 출간 직후 무려 67주간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다. 2년 뒤 1971년까지 미국 내 900만 부 이상, 전 세계적으로 2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목인 대부(代父, godfather)는 본래 가톨릭 등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의 남자 후견인을 의미하는데, 여기선 마피아 조직의 두목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소설 '대부'(The Godfather)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코니 콜레오네가 결혼식을 한 1945년부터 비토 콜레오네의 뒤를 이은 마이클 콜레오네가 뉴욕을 제패하는 1955년까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도입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8월 마지막 토요일(26일) 대부의 딸 콘스탄지아 코를레요네의 결혼식에는 이런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청첩장을 받았다. 신부의 아버지 돈 비토 코를레오네는 롱아일랜드의 화려한 저택에 살고 있었지만 옛 친구나 이웃을 잊는 법이 없었다. 피로연은 자택 안에서 하루 종일 계속될 예정이었다. 틀림없이 대단한 행사가 될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도 막 끝났기 때문에 참전 중인 아들 걱정으로 축제 분위기를 해칠 염려도 없을 것이다. 결혼식은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는 자리가 될 것이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전국민 옥쇄를 외치며 항복하지 않는 일본 히로시마에, 3일 뒤 8월 9일 나가사키에 81년 전 당시 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한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거웠던 데다가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사실상 이륙 중량 초과였으며, 이 때문에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Paul Tibbets, Jr., 1915년 2월 23일 ~ 2007년 11월 1일)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다. 이 상황을 히로시마의 시각에서 다시 구성해보면 우선 1945년 8월 6일 아침 7시, B-29 1대(기상관측 임무를 맡은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미국 공군 폴 티비츠대령이 호위 전투기도 없이 소수의 B-29만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일종의 기습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앞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1945년 8월 10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지도에서 38선을 찾아냈다. 38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될수록 조선 북쪽 멀리까지 올라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싶었지만, 바다 건너 오키나와 및 필리핀에 있던 미군들이 군함으로 조선에 이르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려야 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으로 진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38선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땅덩어리는 조금 작아도 수도 서울 및 인천과 부산 등 큰 항구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훨씬 더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리라 짐작했는데, 소련은 뜻밖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은 터였지만 38선에서 남하를 중지했다. 김장환 목사가 16세가 되는 1950년 6월 25일 전까지... ‘하우스보이’ 김장환 목사 인생역전 이끈 칼 파워스 상사 202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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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4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3
    칼빈주의 국가 건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했던 신대륙에 1620년 12월 2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늘날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으로 건너온 사람들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칼빈주의 이념에 입각한 공화국 건설을 위해 1630년, 영국 국왕의 칙허를 받아 온 부유한 청교도 1,000명이 있었다. 이들의 지도자는 존 윈슬롭(John Winthrop, 1588년 1월 12일 - 1649년 3월 26일)이었다. 윈슬롭은 예정설을 주장한 칼빈주의자인데 성경에 근거한 이상적 국가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1620년 런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매우 신앙심이 두텁고,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 의례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청교도 신앙을 열심히 신봉했다. 1630년 4월 8일 네 척의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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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5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2
    미국 청교도 칠면조 미국의 건국 이념과 정치 문화에는 청교도적 개신교 전통이 깊이 스며 있고, 주류 사회 역시 개신교 문화권이 중심을 이룬다. 보수란 무엇일까. “개인의 자유.” 미국 보수의 이념적 출발점이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서 작동하는 사회보다 개개인이 알아서 움직이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집단지성이 어느 정치 권력자 한 명 또는 일개 정치 집단보다 낫다는 생각이 보수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자유가 있어야 경쟁이 있고, 경쟁이 있어야 발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추수감사절은 성탄절과 함께 미국의 양대 명절로 꼽히는데,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븐에 구운 칠면조를 나눠 먹는 것이 전통이다.추수감사절의 핵심은 감사함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 축제는 매우 미국적인 것이다. 칠면조가 주인공이 되는 전통은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1621년에 맞은 첫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잡아 나눠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덩치도 큰 칠면조가 추수감사절에 주로 먹었던 거위를 대신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미국 땅이 척박해 영국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추수감사절만큼은 없는 살림에도 칠면조를 요리해 다 같이 나눠 먹으며 1년을 무사히 넘긴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 됐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이 추수감사절만큼은 대가족이 모여 앉아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굶주리고 힘들었던 조상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66일간의 항해 끝에 1621년 11월 11일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케이프코드(Cape Cod)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였다. 선박을 수리한 후, 1621년 12월 21일 오늘날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첫 겨울을 맞이한 이민자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그러나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사법과 생존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이 감사의 마음을 나눈 것이 오늘날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유래가 되었다. 칠면조를 뜻하는 영어 ‘터키(turkey)’는 튀르키예(터키) 상인들이 유럽에 들여온 닭(아프리카 뿔닭)과 야생 칠면조가 닮았다는 이유로 이민자들이 부르던 이름이 굳어진 것이다. 미국인들의 칠면조 사랑은 각별하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1790년 4월 17일)은 말했다. “다른 새들의 먹이를 빼앗는 흰머리수리가 아니라 농장 도둑에게 용감하게 덤비는 칠면조가 우리의 국조(國鳥)가 돼야 한다.” 미국은 2026년 탄생 250주년을 맞이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년 10월 31일 ~1506년 5월 20일)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당시 15 세기 유럽 국가들은 인도, 중국등 동방과의 해상 무역으로 큰 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 항로는 주로 지중해를 통한 인도 항해였다. 그러나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동유럽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도들의 동방 출입을 가로막았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서쪽으로 가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산타 마리아, 핀타, 니나라는 세 척의 배와 함께 오랜 기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당시 그가 발견했던 이 섬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와틀링섬으로 추정) 바하마(Bahamas) 제도에 위치한 섬이었으며, 신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던 콜럼버스는 이 대륙의 원주민을 인도인 즉 '인디언'(India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이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 거륵한 구세주(Holy Savior)의 섬이라고 칭하였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1492년 10월 12일 오전 2시경은 아메리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날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植民地: 본국의 밖에 있으면서 본국의 특수한 지배를 받는 지역)화는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시작됐다.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 이식(移植)으로 비롯되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시대에 시작됐다. 엘리자베스 1세는 44년을 통치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되었고, 이 시기는 흔히 엘리자베스 시대로 불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수많은 청혼에도 독신을 고집하여 "처녀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어 영연방 버지니아주(Commonwealth of Virginia)라고 명명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이어 즉위한 국왕 제임스 1세는 1606년, 식민지화 목적을 위하여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를 특허하였다. 1607년, 회사가 보낸 식민지 주민들은 제임스타운에 첫 영구적 영국인들의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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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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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호남의 어거스틴 채규현 목사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 취득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신앙심 깊은 청년의 집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웃이 차를 태워주겠다고 했고, 선장이 보트를 몰고 왔으며, 헬기까지 날아와 구조를 제안했다. 하지만 청년은 하나님이 구해줄 거라며 세 번 다 기회를 거절했다. 그러고 끝내,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하늘나라에 간 청년은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신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너를 위해 차도, 배도, 헬기도 보냈다. 네가 죽은 건 네 탓이니라.”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거나 나무가 바람에게 말할 때 서로의 몸을 포갠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여주는 것이다. 소통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닿아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몸은 대상이 ‘의식’되고 지각되는 통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삶과 역사 그리고 연극이고 그 사이에는 구획이 없다. 왜 세상에는 악(惡)이 존재할까.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 11. 13 ~ 430. 8월. 28)은 악이 선(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의 부재(不在)’ 상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라틴어 이름 아우구스티누스는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 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했다.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두고 세계 영성계를 강타한 책이 있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es)이다. 이 책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읽히는 기독교의 중요 고전 중의 하나다. 참회록이라고도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은 적절한 제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찬양”의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 제10권 이하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인간론 시간론 성경해석 방법론 등을 개진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 사상과 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책이다. "고백록"의 전반부는 젊은 시절의 방황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고백록"의 후반부는 세계의 기원과 시간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주를 이룬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름은 어거스틴이고 이 책은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이 책을 씁니다. 나는 당신을 잃어 비참했고 당신을 찾아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찬미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다른 죄인들을 위해서도 이 책을 씁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평화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며 사는 안토니오의 이야기는 비수처럼 나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사악하고 추잡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우리 집 뒤에 있는 정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나는 땅 위에 쓰러져 이마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왜 지금 하지 못합니까. 왜 지금 나의 온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못합니까. 하나님 지금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갑자기 나는 근처 정원에서 한 어린 아이가 ‘그것을 손에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이런 말로 하는 놀이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성서를 펴서 읽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성서를 펴자 내 눈에 로마서 13:13-14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나의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심덩어리들과 두려움들은 끝났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지배하는 사상은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을 가지기 전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온갖 사악함으로 가득 찼던 당대의 명문 카르타고 대학을 다녔다. 그처럼 채규현 목사도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그곳 버팔로에는 어거스틴의 카르타고와는 달리 한국 학생 12명이 있었는데 10명이 예수쟁이였다. 그들은 그에게 끈질기게 전도했다. 그는 그들의 전도와 아내의 임신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체험했다. 그 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2년차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그의 삶은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을 살았다. 그는 귀국해 개신대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다 안식년을 맞았다. 그러다 2004년 5월 광주중앙교회의 청빙을 아무 연고 없이 받고 변한규 목사 뒤를 이어 후보자 가운데 제일 높은 점수(청빙위원 34명 중 31명 찬성)를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청빙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은 김상술 장로였다. 그리고 그의 퇴장에 앞장 선 사람도 시계수리공 김상술이었다. 어거스틴이 반달족의 침입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생각하고 “신국론”을 썼듯 채 목사는 시계수리공 김상술의 톱니에 걸리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김상술은 총신대 재단이사 관계로 당회에서 치리를 당해 원로가 될 수 없게 됐다. 거기서 문제가 꼬였다. 부임하고 5년은 요셉이 예언한 풍년처럼 좋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6년 되는 해 2010년 1월 14일부터는 요셉이 예언한 흉년처럼 악한 세월이었다. 그 대략을 살펴보자. 좋은 세월 2006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간 광주중앙교회(채규현 목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은혜의 분위기 속에 폐회됐다.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는 이번 목사장로기도회는 광주중앙교회가 호남지역은 물론 구 개혁교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밝히고 모든 공을 장로님을 비롯한 전 성도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우리 교회 나름대로 손님을 맞는다고 최선을 다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필요하다면 교단행사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2006년 5월 8일 총신 운영이사회(이사장 김동권 목사)는 광주중앙교회에서 임원회와 이사회 전체회의를 잇달아 열었다. 그리고 현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오는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했다. 2007년 7월 16일 ~ 7월 24일 세례교인헌금(총누계: 20억 5454만 9122원)의 전국 최고 납부 4교회 중 광주중앙교회가 2위를 차지했다. 2009년 11월 28일 오전 10시 광주중앙교회는 장로 10명의 장립식을 비롯해 직원 131명의 임직식을 거행했다. 악한 세월 사실 교회 분쟁을 낳은 악한 세월의 씨앗은 2006년 5월 8일 열린 총신 운영이사회에서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그 해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시계수리공 김상술 장로가 총신과 총회를 상대로 시계 조립하듯 교회 돈을 가지고 비리를 조립했기 때문이다. 2010년 4월 22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1차 임시회를 빛고을중앙교회에서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를 면직처리했다는 재판국 보고를 받았다. 노회는 또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으로 광신대 총장인 정규남 목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2010년 5월 10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2차 임시회를 담양 봉산교회에서 열고 성명서를 냈다. 광주중앙교회 사태와 관련해 전남제일노회의 재판을 불법으로 규정한 총회재판국에 헌법을 준수하고 법을 바르게 적용하고 채규현 목사와 관련된 예심판결에 대해서도 즉시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의 용어 사용이 잘못됐다고 신문에 글까지 올린 김상술 측 변호인 신현만은 자신의 책 “교회 재판 이렇게 하라”에서 예심판결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었다. 2010년 5월 27일 헌의부(부장 노승욱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으면 확정판결이 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상소장을 기각했다. 2010년 6월 29일 헌의부는 총회회관 소예배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가 제출한 ‘목사 면직에 대한 상소장’을 재심의했다. 그 결과 “상소장 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재판국에 이첩하는 것이 헌의부의 임무다”, “재판국 구성 요건 및 절차 문제로 인해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상소 건은 취급할 이유가 없다”등의 의견이 맞서 투표를 진행, 찬성 11명, 반대 4명, 기권 4명으로 재판국에 이첩했다. 2010년 7월 16일 재판국(국장 김영길 목사)은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다뤘다. 이 자리에서 상소인 채규현 목사는 전남제일노회의 재판국 구성은 불법이며 적법절차에 따라 노회 재판국에 소원장을 제출했는데 노회서기가 재판에 계류 중이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채 목사는 이단사상과 이신칭의를 부정했다는 질의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라고 전제하고 어렸을 적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설교한 부분을 이단으로 정죄했다고 말했다. 이 표현이 오해를 주었다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2011년 2월 14일 광주중앙교회중재위원회(위원장 김준규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채규현 목사 측과 정규남 목사 측을 각각 불러 현 상황을 청취했다. 채규현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고인식·류성선 장로는 “성도들은 현재 채 목사를 중심으로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정규남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김상술·고용태 장로는 “채 목사의 신학적 문제 해결 없이 조정은 무의미 하고 채 목사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나누는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광신대 총장이면서 광주중앙교회 불법 임시당회장이 된 정규남 목사는 채 목사와 웨스트민스터 동문임에도 “채 목사가 신학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쉽게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며 나름 학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011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제4민사부는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정규남 목사와 고용태 장로 등이 채규현 목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광주중앙교회의 대표자로서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한 채 목사에 대해 정규남 목사가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광주중앙교회 구내에 당회장이나 담임목사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출입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김상술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10일 광주고등법원 제1민사부는 선고심에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조경묵 목사 등이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금지 등을 청구한 항소를 각하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전남제일노회 재판국의 채규현 목사에 대한 면직 결정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를 채 목사에 대한 면직을 무효화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이 2010년 9월 30일 열린 총회 석상에서 ‘유효한 절차가 행하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종결’되면서 효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 민사2부는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 금지 등을 취지로 한 2013다62018 사건에 대해 상고기각 결정을 내리고, 채규현 목사의 당회장 지위 회복을 인정한 광주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다. 2016년 4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제11민사부는 원고 황윤수가 피고 채규현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주문을 하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했다. 이 사건 교회의 적법한 대표자는 피고(채규현)라 할 것이므로 황윤수를 대표자로 한 원고 교회 명의의 이 사건 소는 대표권 없는 자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 소는 부적법하므로 각하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2016년 10월 27일 채규현 목사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장로가 이렇게 말했다. “총회가 채 목사를 떠나서 진정 교회와 교인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론은 총회가 해줄 수 있는 걸 못하고 구실을 못했다는 거예요. 상회비를 납부했고 세례교인 헌금을 전국 2등으로 총회에 냈어요. 채 목사에 대한 총회 결의도 있고 재판도 이겼어요. 채규현 목사가 광주중앙교회를 얼마나 매일 눈물로 기도했고 그 사모가 눈물로 기도하고 여기까지 지켜왔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못했을 겁니다. 채규현 목사님이나 사모님을 보면 정말로 진실한 교역자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채규현 목사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성추문이나 어떤 문제도 없고 그만큼 깨끗하고 신학적 학식도 높은 분이라는 겁니다. 내가 정말 사람 잘 봤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채 목사님 곁을 7년 동안 왜 떠나지 못하고 맴도느냐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제가 채 목사님한테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내가 하나님 곁으로 가면 내가 삼 일 동안 외롭지 않고 내 가족이 삼 일 동안 쓸쓸하지 않도록 내 빈소를 지켜주실 것을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걸 말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나와 함께한 목사님하고 교인들 장로님들이 있지만 채규현 목사님이 끝까지 저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이걸로 다예요. 나한테는 이게 전부였는데 총회에서는 그 고난과 역경과 이 아픔을 누가 보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이 분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요. 제일 무서운 게 이거거든요. 총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냐. 첫째는 광주중앙교회고 둘째는 채 목사 사모예요. 왜냐하면 목사는 당사자이지만 사모님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고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모든 그 사업 그 선교원 교육관을 불법으로 차지하고 내주지 않고 버티며 소송하고 대항하니 이 무서운 죄를 누가 다 져야 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살아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건강하고 참 바르시죠. 진즉 끝날 것인데 대법 판결 난 지 3년 됐고 제99회 총회 때 각하됐으니 그때 끝났어야 해요. 끝난 것인데 또 손대면 안 돼요. 손대면 이건 불법이에요. 일사부재리에 의해 또 하면 안 돼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안 되고 총회가 판결했으면 시행하면 돼요.” 채규현 목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내 편이 아닙니다. 저쪽 이쪽 갈라진 편이 아니고 그냥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장로님들도 확인 위원을 했잖아요. 거기서 뭐가 하나라도 나왔으면 (신앙적으로) 내 편에 설 사람은 없어요. 자기네들이 다 확인했어요. 재정이고 뭐고 다 무혐의가 되니까 마지막에는 이단까지 들고 나온 겁니다. 사실은 이단이 제일 쉬운 건입니다. 나는 그렇게 표현 안했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인데 그것밖에 없는데 이번 제101회 총회 때도 뒤집으려고 별 짓을 다했죠.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까 지금까지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2년 동안 당회장 채 목사에게서 결재권을 빼앗기 위하여 시계수리공 김상술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14일 다른 장로와 함께 그를 찾아 왔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10가지를 내밀며 당회장의 재정결재권과 인사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목회를 못하도록 교회에서 내 보내겠다며 겁박했다. 그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 뒤 채규현 목사가 지금까지 고소당한 것이 형사와 민사 합쳐서 47건이다. 심지어 어떤 한 건은 10가지 문제로 고발했기에 10건의 고발 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약 60건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 중에 3분의 1 정도가 형사 고발 건인데 채 목사가 고발당해 기소된 적이 한 건도 없이 다 무혐의 처분을 받고 모든 민사소송은 다 이겼다. 2010년 1월 14일에 광주중앙교회는 분쟁이 시작됐으니 약 7년여 가까운 세월동안 고통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교회 노회 총회와 연관되어 일어난 일은 참으로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종결되면 ‘히포의 어거스틴’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와 위대한 학자가 되었듯 채규현 목사도 ‘호남의 어거스틴’이 되어 우리 교단과 교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가 되고 위대한 기록을 남기리라 믿는다. 눈은 차갑고 부드럽고, 결국 사라지는 존재다. 우리 역시 모두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그 위에 글을 쓴다는 것이 더 의미 있다. 가장 절망적인 이야기를 겪은 신앙이라도 사는 동안에는 내가 고통의 자리를 지나갔고 나도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감각을 준다. 신앙은 결국 우리를 삶 쪽으로 한 발 나아가게 한다. 믿음으로 세상과 연결되어왔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2026-07-14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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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4
  • [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유쾌함에 대하여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가슴이 잃어버린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가수 최백호가 삶의 허무와 지나간 시간에 대한 미련을 담은 《낭만에 대하여》라는 곡을 1994년에 발표했는데, 1996년작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곡을 찌르는 웃음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보카치오(1313-1375)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와 건축가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이다. 그는 재치 있는 응수로 사회적 지위의 경계선을 허물고 나폴리 군주와 우정을 맺었다. 어느 찌는 여름날 군주가 조토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그림을 그만 그리겠네.” 이에 조토가 이렇게 응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폐하라면 말이지요.” 똑같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유난히 밝은 사람들이 있다. 마치 해맑은 아이처럼, “괜찮아” “다 좋아질 거야” 하며 긍정적 태도를 잃지 않는 사람들. 이들의 뇌는 대체 어떠한 점이 남들과 다른 걸까? 이 흥미로운 주제를 미국의 한 행동과학자이자 뇌과학자가 연구했다. ‘강연하는 의사’로 잘 알려진 앤서니 T. 디베네뎃 박사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이들처럼 순수한 열정을 간직하고 즐겁게 세상을 살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유쾌 지능(Playful Intelligence)’ 이 타인에 비해 높다고 말한다. 세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1955)는 미주리 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며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위치한 중앙 미조리 대학교(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12년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와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책 또한 그러하다. 그는 그의 저서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에서 말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전부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 경구에 딱 맞는 유쾌한 인물이 바로 새에덴교회 소강석(蘇康錫, 1962. 2. 22 ~ ) 목사이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소강석 목사는 전 세계 교인을 사로잡는 설교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웃게 하는 유쾌한 유머로 시작해 누구나 감동하는 명쾌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2016년 3월 3일 오전 7시 서울 코엑스 D홀에서 열린 제48회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3.000여 명의 국내외 각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함께 참석해 ‘통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민족’이란 주제와 ‘성경적 섬김, 나부터 개혁, 새 마음 국민통합, 경제 재도약, 한반도와 세계 평화’라는 부제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설교자는 소강석 목사였는데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과 미래의 통일비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강석 목사의 특기인 즉흥 멘트가 박근혜 대통령을 환하게 웃게 만들었다. “세계의 몇몇 유명 여성 정치인들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완전 차별화가 되셨습니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들이지만 대부분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1963년 8월 중순 무려 25만 명의 사람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 앞에 모였다. 초대장도 없고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던 시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 1. 15. ~ 1968. 4. 4.)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인권 탄압으로 고통을 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킹 목사가 다른 인권운동가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며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걸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전파했다. 워싱턴의 여름 뙤약볕 아래 그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흑백 갈등 차원을 넘어 미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25%의 관중이 백인이었다고 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킹 목사처럼 자신의 신념을 전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본래 영성에 도취된 퓨리티(purity) 지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무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를 만나 반기독교 세력들의 전략과 공격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알게 되었다. 그 뒤부터 소강석 목사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맞서 이슬람 세력 억제와 동성애 입법 방지 등을 위한 사상전(思想戰)의 선봉장으로 교계 유니티(unity) 지향의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의 두 축 퓨리티와 유니티를 위해 한국교회를 섬기고 교계 연합을 위한 한 줌의 중보와 불씨가 되고자 헌신하고 있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삶과 설교 앞에 독자는 즐거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앉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어떤 흠이나 결이 없는 가장 유쾌한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도 아주 좋아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중 소통 매체인 시성(詩性)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2015년 천상병귀천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어느 모자의 초상〉에 이런 시가 있다. 빈 의자 지하상가 개척교회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하려면 마음이 곤고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팠던 나날들 토요일 저녁이면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드렸던 기도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 하늘에 닿아 목자의 피리소리를 따라 몰려오는 양떼들처럼 구름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당신의 목동이 되었으니 아, 지하실 교회 차가운 빈 의자여 어둠 속에서 빛나던 영혼의 별빛이여 고독한 소명자의 눈물이 적신 사랑의 목마름이여 이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순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빈 의자」는 소강석 시인이 가락동의 개척교회 시절 겪은 이야기다. 소강석 목사는 1988년 가락동의 한 상가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정말 피눈물 나는 이야기다. 시인의 말처럼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들린다. 소강석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은 꼭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게 된다. 다음은 소강석 목사의 간증 중 일부이다. “저는 88년도 가락동에서 월세로 처음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함께할 개척 멤버나 경제적인 지원 없이 분당으로 옮겨와 그야말로 맨손으로 지금의 새에덴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개척 3년 만에 300명 장년 성도를 돌파하게 되었고 4년 만에 교회 건축 대지 400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1030평에 달하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1500명 성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지역적인 조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7년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눈물의 기도와 전적인 하나님 은혜일뿐입니다.” 이제는 4만여 명의 성도가 새에덴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새에덴교회가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이 시에서 보이듯 성도들을 내 부모님이나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내가 발전하고 싶은 것처럼 성도들의 발전을 돕고 그들의 미래와 행복을 같이 고민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따랐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2016년 8월 14일 새에덴교회에서 광복을 기리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물었다. -피곤하신데 사모님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키도 더 크시던데. “그건 내가 책 한 권 드릴 게요. 책에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그는 차를 가지고 들어온 사무 간사에게 〈맨발의 소명자〉라는 책을 가져오게 해 건넸다. -결혼 이야기가 이 책에 다 있나요. 그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 책에는 그의 장모 정금성 권사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있었다. 광주 신학교 시절 그는 어느 날 무등산 기도원에서 금식 겸 굶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기도하는 곳 위쪽에서 여자 성도 열대여섯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소리나 모습이 영적 고단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가 고픈 신학생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조용히 보더니 말했다. “주의 종이 되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목숨 내놓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 신학생들을 보면 한숨 나올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기도를 했다. 순간 자손심이 상한 그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쌀쌀 맞을 수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저 사람은 영통을 한게 아니라 먹통을 했구먼.’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우렁차게 기도를 했다. “주여! 나를 저런 사람보다 7배 70배 더 큰 기도의 영력을 주옵소서.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지금 이 기도에는 억울함이 배어 있다. 그런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년 11월 24일 ~ 1675년 2월 21일)는 진(眞)보다도 선(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된다. 그의 저서 라틴어 제목 〈에티카〉(윤리학')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試圖)이다. 그래서 ‘감정의 윤리학자’로 불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한 인간의 48가지나 되는 감정엔 ‘억울함’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억울함을 느끼나. 교통사고가 나도 갑자기 상사에게 혼이 나도 심지어 말싸움을 하다 이겨도 어딘가 손해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은 억울함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양인은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았다는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강석 전도사도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억울해서 씩씩거리며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 보니 아까 그분이었다. 아까는 쌀쌀 맞았는데 지금은 부드럽게 그를 대하니 그는 어리둥절했다. “기도하시는 데 실례합니다만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있는 데 말을 걸어 그만 무심코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시는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광주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기회만 있으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기도하며 이상을 키웠다. “저 넓은 서울 땅!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까. 어느 쪽에서 개척을 하게 하실까.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하나님! 저도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저의 갈 길을 보여주소서. 제가 가야 할 곳을 가르쳐주소서. 그리고 개척에 필요한 물질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이런 기도의 영감 속에 취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당시 유쾌한 전도사 소강석에게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영등포로 갈까요, 청량리로 갈까요...” 신학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개척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그는 데이트 한번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신앙생활에 너무 바쁘고 또 전남 화순군 백암리에서 개척한 백암교회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는 연애할 기회가 없었다. 그때까지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고 게다가 그것이 죄인 줄 알았다. 그는 이제는 데이트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회 개척을 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많은 목사님들의 조언도 뒤따랐다. 총각 신분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왕에 결혼을 할 거라면 개척 전에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할 대상자는 있는데 그 자매가 그하고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안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기도원에서 만나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의 딸인데,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사 사모는 절대로 안 하겠으며, 특히 소강석 전도사 같은 사람과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대로 마음까지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자매가 저에게 그토록 거부반응을 보인 이유는 어렸을 때 자기 어머니가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믿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닭을 잡아도 자녀들에게는 국물도 맛보이지 않고 목사님께 갖다드리고,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해도 교회에 먼저 갖다 바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앞장서서 교회 건축헌금을 드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목사님과 어려운 교회는 보이는 대로 도와주면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거의 신경을 못 썼단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목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절대로 엄마처럼 믿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엄마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열성파 예수쟁이 전도사와 결혼을 하라니 펄펄 뛰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키도 작고 못생기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니...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키 작은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제가 키가 작고 못났으며 가난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편지를 써도 뜯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습니다. 편지를 아무리 잘 써도 한 자도 안 읽어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녀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종합병원 옆 다방에서 7시에 기다리겠다고 편지하고 나가면 8시, 9시가 되도록 어항 옆에 앉아 물고기만 바라보다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욕세례를 퍼부으며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맞받아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욕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저와 죽어도 결혼을 안 하기 위한 쇼였습니다.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면 포기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애 경험이 없는 저는 데이트도 믿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밀어붙이니까 그녀가 이제는 해외근무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귀찮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아예 해외로 도망을 가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장모님이 되실 정금성 권사님께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딸이 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결혼 하지 않겠다고 날고뛰니 나라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차라리 어떻게 해 불소.” “예? 어떻게라고요?” “내가 방 열쇠를 줄 테니까 어떻게 해 불란 말이시...” “아, 네... 어떻게요...” 저는 그제야 어떻게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고 열쇠를 받아 장모님의 뜻을 받들어 어떻게(?)를 하기 위해 밤에 그녀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따고 들어가자마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날아 왔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며 발버둥을 치던지 어떻게는 고사하고 본전도 못 챙기고 어떻게든 도망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주일을 작정 기도하면서 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충분한 자금을 신청했습니다. 그것을 일주일 내에 주시면 제 전략이 먹혀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도 미국에 계시던 박종삼 목사님으로부터 돈이 송금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돈을 송금하면 며칠 이상이 걸리는데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를 해 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주일 후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무하는 적십자병원 앞에 저는 뭉칫돈(?)을 주고 택시 한 대를 대기시켜 놓고 잠복근무를 하였습니다. 물론 이 전락은 그녀의 어머니 정 권사님과 짜낸 지혜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잠복근무를 시작한 지 정확히 33분 후 병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에 권사님의 딸인 배정숙 자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기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지... 저는 그들을 계속 미행하였습니다. 물론 제 뒤로 멀찌감치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적십자병원에서 충정로 쪽으로 가던 중 한 여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약속이나 모임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머리 모양도 특별히 신경을 쓴 데다 양복에 구두까지 맞춰 잘 차려입은 저는 배정숙 자매 앞으로 가서 대뜸 입을 열었습니다. “정숙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나하고 1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지금 2시가 되었는데, 어디 가는 거예요? 미스 배가 먼저 나에게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간호과장과 수간호사가 있는 곳에서 평소처럼 제게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으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때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습니다. 그 순간 대기시켜 놓은 택시가 제 앞에 와서 섰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엄중한 자세로 그녀를 택시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제 일사불란한 태도에 어떻게 반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침이 마르고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당당한 모습을 지키며 어떻든 여유 있는 체하며 어떻게 밀고나갔습니다. 택시는 내장산으로 달렸습니다. 택시 안에서 침묵은 계속되었고 저는 다소곳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벌어진 것입니다. 드디어 내장산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눈에 띄는 벤치로 가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습니다. 한 1분쯤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리 꾸며진 거룩한 각본대로 일어나 정숙 씨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버렸습니다. “주여! 주의 종이 사랑하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딸에게 도장 찍어주소서. 결재하여주소서. 목사 사모로 이미 인을 쳐주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소명이 확실한 저 같은 목사 후보생 사모로 도장 찍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내 평생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안수기도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배정숙 자매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어떻게 자연스러운 데이트를 하기도 머쓱해져서 더 이상 내장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바로 차를 타고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광주로 오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여! 연애하는 데도 뜨거운 소명감이 필요하고 우직한 믿음이 필요하군요. 이제 저의 개척도 절반은 이루어졌네요.” 저는 그 당시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이나 지혜로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앞장세우고 영적 생명력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목회를 합니다. 돌아오자마자 저는 결혼 날짜부터 잡았습니다. 12월 26일! 딱 50일을 앞두고 결혼 날짜를 정한 셈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쪽 집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방 얻을 돈도 준비해놓지 않은 데다 언제 준비해서 결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하며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때마다 항상 정 권사님은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평소에 존경하던 김창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신부는 빌려서라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저는 헌 양복을 입었고, 길거리 리어카에서 산 1500원짜리 모조 반지가 결혼 예물의 전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특별한 사연이 담긴 우리의 결혼 예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선생(?)께서 특별 심방을 와 가져가버렸기 때문입니다. 1500원짜리 모조 반지라는 것도 모르고 그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요.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6년 소강석 목사는 신학교 전 과정을 수박과 오이를 팔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소명의 길을 밟은 뒤 목사안수를 받으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란 기대는 몽상이었다, 소 목사는 부교역자로 받아주는 교회 하나 없는 척박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는 하나님의 비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야 했다. 서울에서 개척한다는 믿음을 갖고 물색한 지역은 그마나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척을 할 수 있는 ‘가락동’일대였다.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8만원. 지하 23평 공간에서 소강석 목사는 첫 예배를 시작했다. 주일 낮 예배는 몇몇 주민들의 참석이 있었지만 저녁예배는 장모님과 부인 그리고 어린 자녀들만 참석해 힘겨웠다. 그나마 부인은 어린 자녀 뒤치다꺼리 하느라 뒤편에 있어서 장모님과 마주 대하는 설교시간은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하곤 한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오가는 쥐새끼들 때문에 경건해야 할 예배는 어수선 그 자체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며 낮에는 전도하면서 밤에는 교회당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작정기도 100일 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가 비로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새롭게 각성했던 시기였다.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 1988년 11월 가락동 지하에서 처음 예배를 시작한 이후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비좁은 공간 속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소강석 목사는 2001년 3월 평양을 방문할 기회를 통해 통일한국 시대의 비전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평양에 있는 창광 유치원을 방문하면서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한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북한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창광 유치원에서부터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교회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켜 통일 한국 시대를 짊어지고 갈 지도자로 배출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그 결과 3M(맨손, 맨몸, 맨땅)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창립 17년 만인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2016년 7월 27일 약속보다 반시간 늦은 오후 2시 30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도착한 새에덴교회 집무실에서 소강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늦는 바람에 점심을 여유 있게 먹었다고 웃으며 예의 그 달변의 입을 먼저 열었다. -목장 기도회 때 제 설교 들으셨나요. “광명교회에서 못 들었습니다.” -뭐냐면 지금 한국 교회가 빨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회 생태계 교회 생태계 환경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관심이 있느냐. 생태계가 무너지면 우리 생존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사막화 되고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생태계가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걸 모르니까 교단 안에서 분쟁이 잦은 겁니다. 이거 아는 사람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요. 이건 내가 국정원장을 지내신 김승규 장로에게서 배웠습니다. “명성교회 장로죠.” -네 아닙니다. 할렐루야 교회 장로죠. 그분한테 배워가지고 또 따로 전문가들한테도 배웠습니다. 제가 얘기 좀 쭉 하겠습니다. (인쇄물을 보이며) 여기 있지만 글과 말은 또 다릅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영국교회는 사상전과 영전을 하지 못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을 주도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국교회는 입법화로 가기 전에 사상전과 영전을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알고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영국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 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반대로 이슬람은 8%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도 사상전을 하고 영전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세 가지 당면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 생태계와 교회 환경을 복원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의 터보 엔진을 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회 생태계가 복원되어도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부흥하지 않으면 안 돼요. 셋째,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신앙을 계승해주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교회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생태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후변화협약까지 하며 자연 생태계 복원을 위해 목매고 있습니까? 환경, 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생명 사회가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 최고의 천재 관상가 김내경이 어느 바닷가에서 한명회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이거늘,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관상만 보았지, 보이지 않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 한국교회도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걸 보고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고 연합하여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어야 해요.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러한 사상전, 영전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각개전투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지게 된 거예요.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는 교회가 많았고 교계가 교권 싸움으로 연속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할 수 있습니까? 1)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저도 가락동 23평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지하실에서 개척해서 죽어라고 전도하여 양육해 놓으면 주변에 깨끗하고 시설 좋은 교회로 가 버리는 거예요. 저도 과거에 이런 아픔을 겪어 보았어요. 목회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는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사람이 옮겨도 또 다시 새로운 성도들이 왔지만, 지금은 더 이상 작은 교회에 교인들이 오지 않아요. 왜냐면 이런 수평이동의 선순환 생태계가 다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로칼 처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교회로 존재해야 해요. 우리 지역에도 공교회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단 안에서도, 한국교회 안에서도 공교회를 이루어야 해요. 선교신학자 랄프 네이버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은 교회가 성장할수록 자신만의 성을 쌓으려고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지역 안에 하나님의 도성을 쌓아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캐슬 빌더(castle builder)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킹덤 빌더(kingdom builder)가 되라고 하는 거예요. 2) 신앙과 신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purity)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퓨리티의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략 중의 하나가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을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정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정결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거룩(holiness)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순결(purity)이나 정결(cleaness)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이지만 거룩에 참여하고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정결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정결한 영성, 순결한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렵혀진 신부가 어떻게 신랑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정결,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없어요. 일제시대 때도 얼마나 신사참배 문제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더럽혔습니까? 영적 간음을 하게 된 것이에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들까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적 행위라고 변명하며 신사참배에 동참했어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아녀자에게 정절의 의무가 있듯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정절이 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폭압으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마저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아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예와 권력 앞에 믿음의 정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며 통회합니다. 그리고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외치며 순교의 길을 가다가 결국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옥중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교회가 지원을 해서 일사각오라는 영화로 제작이 되어 상영이 되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주 목사님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산정현교회를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오늘날 우리의 잘못으로 목회 생태계가 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서로 연합하여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교회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뿐만 아니라 안티크리스천의 공격이 얼마나 주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공격해 오는지 몰라요. 물론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핍박과 박해로 무너뜨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보이지 않게 사상전 영전으로 공격해 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상의 기본은 신마르크스주의입니다. 신마르크스주의(Neo Marxism)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만든 것인데 한마디로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상입니다. 내용은 무신론이지만 겉으로는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의 권익보호, 공동체 등을 추구합니다. 바로 이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진보 사상과 신좌파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 권익보호 공동체 등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무신론적 사상이 끼어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성도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동성애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동성애를 통한 성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신마르크스주의를 창안한 빌헬름 라이히가 근로자들의 정신치료를 해주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었는데, 좁은 국민주택에서 사는 노동자들이 신경증이나 노이로제에 많이 걸려있더라는 거예요. 그 이유를 분석해보더니 성적인 억압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작은 집에서 부모님도 모시고 애들도 우글우글하지요,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원만한 성생활을 못해 성적 억압이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 때 그는 깨달았어요. “아, 이것이다. 사람은 성적 욕구를 잘 풀어줘야 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성적 욕구를 발산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정치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인간에겐 성적인 억압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제한받고 있는 성적문제부터 해방시켜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주장한 성정치 이론이었습니다. 성정치 이론에 의하면 억압된 성적 욕구는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적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의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자유롭게 분출할 때 개인도 행복하고 이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세상을 맞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합니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남자끼리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여자끼리도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지요. 따라서 신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공격 목표는 기존 제도권의 가정과 학교에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가정과 학교를 무너뜨리려고 해요. 그리고 교회를 공격해요. 특별히 대형교회를 공격해요. 그래서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 교육부터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의 규범과 구조에서 해방을 하도록 충동하고 선동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에서는 어떻게든지 학생들의 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안절부절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거든요. 이것이 바로 성정치와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래도 그 사람들 불쌍하니까 그냥 자기들 맘대로 살도록 놔두면 안 됩니까.” 물론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그들이 소수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들 좋은 대로 살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고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다수의 인권이 역차별을 받게 되거든요. 특별히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못해요. 이런 설교 했다간 당장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게 돼요. 그러면 목회 생태계가 저절로 파괴될 수밖에요. 또 어떤 분은 우리나라에 동성애자들이 몇 명이나 되고 영향력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느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동성애를 연구를 하다 보니까 동성애가 이슬람이나 이단, 안티 세력과도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이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말하려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슬람은 절대로 기독교를 용납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러한 세력이 안티크리스천들과 연합을 해서 한국교회를 전략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는 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런 교회라면 함께 연대해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동성애를 막아내고 이단을 막아내야 해요. 그렇게 해서 목회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해요. 물론 이 일이 어려운 일이기도는 합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퓨리티(purity)와 유니티(unity)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까 내부의 소모전을 하다가 공멸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거예요... 물론 우리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암묵적으로 교회 간의 경쟁, 교단 간의 경쟁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미국도 보십시오.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도 빌리 그래함 이후에 연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없으니까 다 개교회주의로 빠져 버렸어요. 개교회, 개교단주의에 빠지고 큰 교회 목사들 간에 스타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세상에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여러분은 〈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세상에 수업시간에 교사가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고 고소를 당해 법정까지 서게 돼요. 미국도 이런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 연합집회를 갔을 때 동성결혼법이 통과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회를 했던 교회에 7천 만이나 되는 큰 교단을 이끄는 총회장이 참석을 한 거예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이끄는 총회장이에요. 그래서 그날도 총회장 전용기를 타고 올 정도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인사말을 하는데 자기는 변호사 출신이라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성명서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듣고 하도 열이 받아서 강단에 올라가 예정에 없었던 동성애 설교를 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태어나서 이런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했던 기자들이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미국 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몇몇 교회들을 탐방하고 왔는데, 한 군데도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주보 광고나 반대 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그 총회장님께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총회장님, 성도가 7천만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함께 연합해서 동성결혼법을 막아야지요. 만약에 워싱턴 광장에서 미국 교회 성도들이 백만 명만 모여서 반대 집회를 했다면 절대로 동성결혼법은 통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총회장도 내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영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966년 런던목회자협의회에서 존 스타트목사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세웠어요.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가 너무 독선적 강의를 한 거예요. 그러자 그 후로 존 스타트 목사가 로이드 존스와 결별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가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사회적 정치적 이슈나 현안에 대해서 전혀 노터치를 한 거예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개교회 목회만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교회도 망한 것이 아닙니까? 장자교단이라면 이런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과 교리가 다르면 큰 형님이 야단도 치고 가르치면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면서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너네들은 우리와 다르니까 니들끼리만 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옛날에도 종갓집이 종갓집 역할을 잘해야 집안이 잘 되었어요. 장손이 장손 역할을 잘 해야지 무능하고 역할을 못하면 못난 동생 놈들이 육갑을 떠는 경우가 있어요. 동생들이 육갑을 떨면 집안이 자칫 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를 지키면서 함께 연대해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야 해요. 그러려면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해요. 그리고 때로는 정책적 연합을 해야 해요. 우리 교단이 좀 영향력도 발휘하고 기수가 되어야 해요. 저는 이러한 일을 10여 년 전부터 해 왔어요. 10여 년 전부터 동성애를 막기 시작했고 8-9년 전부터 이슬람을 막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을 하면서 테러 위협도 받았어요. 심지어는 어느 국가 기관에서 테러를 대비해서 신변보호를 해 준 적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회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언론 대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만나려고 국회를 들락날락했어요. 모든 제도와 문화는 사상과 철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철학은 반드시 입법화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국회를 들락날락하며 동성애법을 막고 작년에는 교회 과세 문제를 은밀하게 막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저 보고 정치목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교회 생태계를 보호하고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데, 누가 정치 목사라고 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이 목회 생태계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생태계를 지키는 일을 해야죠. 우리 교단이 자기 왕국을 세우는 캐슬 빌더가 아니라 킹덤 빌더가 되어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생태계를 복원하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1시간 40분에 걸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나만을 위한 열정적인 일인(一人) 특강이 끝났다. 오후 5시 그는 수요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는 3층 당회장실에서 교회 밖 건널목까지 배웅해 주었다. 2016년 8월 14일 광복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 뒤 교회를 방문한 문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 뒤 간신히 짬을 내 만났다. 피곤해 한숨을 쉬는 소강석 목사는 내가 물을 두 가지가 뭐냐고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는 생략하고 앞으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정말 건강관리가 제 숙제입니다. 건강에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게 제일 중요하더군요. 내가 해 보니까. 그래서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말입니다. 나는 골프도 못 치고 다른 특별한 운동도 못 합니다. 뒷산이 있어요. 뒷산 가서 장로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합니다. 때로는 혼자라도 밤에 산에 가서 명상하는 그것이 아직까지 버티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과제는 휴식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가 무리이신 것 같은데요. “아! 휴식. 지금 사실은 월요일은 뮤지컬도 가야하고 그리고 모임들 8·15 행사...” -주보에 나온 목사님 일정만 봐도 숨이 막히던데요. “또 동성애 모임 뭐라더라 아 그 지난번에 집회한 것에 대한 뒷관리...” -저는 예배드리고 뵈면서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얼마나 가시겠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지도자이신데 지쳐 계시고. 메시지에서도 강단 위에서도 너무 안타깝고... “아휴.” -목사님 설교를 세계 사람들이 보는데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이면... 설교 횟수를 좀 줄이셔야겠어요. 주일 설교를 두 번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목사들도 많던데(32명). “부교역자들이 많이 있지만 설교는 은사가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은사가 있어야 되죠. 그래도 소 목사님이 줄이시면 참석 교인이 두 배로 늘어날 겁니다. 세 번 나눠 참석하던 교인들이 두 번에 다 모여들 겁니다. 한 번이라도 쉬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1부는 중직자들이 참여해요. 세 번 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김삼환 목사도 세 번 해요. 일단은 제가 4부하고 5부는 영상예배로 드리고 축도해요. 저녁예배 때는 여섯 번 하게 되니까 정말 죽어요. 저번 수요일 오셨던가요. 그때는 여덟 번 설교했어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좀 드려야겠다 싶어 그냥 가려다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지도자는 가급적 시간과 건강을 아끼셔야 합니다.“ 2016년 8월 31일 오후 8시 70을 바라보는 김문기 장로가 르디님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수요예배 설교 중 소강석 목사는 말했다. “참 옛날에 점쟁이가 예언을 하는데 큰 아들은 관운이 많고 그렇게 만사형통을 한다는데 나는 빌어먹게 생겼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한테 빌어먹고 살고 있어요.” (양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한다. 회중 박장대소.) 세상에 소강석처럼 유쾌한 목사는 없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숨을 참고, 손을 가지런히 하고,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따위의 존재론적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다. 그러나 유쾌한 목사 소강석이 3M 목회 과정에서 자신의 벽 앞에서 취한 믿음의 자세는 내가 보기에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소설〈이름 붙일 수 없는 자〉중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는 주인공이 몸통과 머리만 남은 채 단지에 들어가 어느 식당의 메뉴판 노릇을 하면서 말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위대한 정신은 늘 임계점(臨界點) 가까이에서 그 너머를 꿈꾼다. 사상이 한 경계를 넘을 때 세계가 발전한다. 그래서 세상엔 아직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남아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와 대다수의 실망스러운 리더가 존재한다. 늘 그래왔고, 또 늘 그럴 것이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그를 즐겨 만나고 싶어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 그가 교단과 교계와 대한민국의 유쾌한 영적 지도자가 되어 우리를 유쾌하게 해 주고 우리 믿음을 명쾌하게 해 주고 대한민국을 모세처럼 이끄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10-12 201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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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08
  • [더굳뉴스] 김한욱 목사 소나무의 푸르름
    외교 전략 가운데 ‘대나무 외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뿌리는 단단히, 줄기는 곧게, 가지는 유연하게.’ 핵심은 가지의 유연함을 지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휘어도 부러지지 않는 뿌리를 위한 즉 원칙의 외교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계절 푸른 소나무는 유연하게 휘지 않지만 대신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느 계절이 와도, 제 빛깔을 잃지 않는다. 소나무는 꺾이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혹한에도 곧게 서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유지한다. 하나님의 영광 그 빛을 위한 개혁주의 열망처럼.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 연구실 책상 주위를 배회했지만 두 줄을 넘길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초기 사학계에 영향을 미쳤고 민족사학을 개척하고 그리고 그 한국사의 대중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 역사학자 고 이기백(李基白, 1924년 10월 21일 ~ 2004년 6월 2일) 교수의 수필에 나온 한 문장이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고 한다. “민족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그렇듯 "총회에 대한 사랑과 구원에 대한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신앙을 드러낸 목사가 총회 현장에 나타났다. 그는 2022년 9월 6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정적인 정견발표를 외친 신예 제107회 총회 부서기 후보 김한욱 목사다. 그는 예전에 제101회 총회 부서기 후보로 등장해 돌풍을 일으킨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2016년 9월 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혁, 바로 세우기, 품격 회복 등 이른바 3R을 통해 성숙한 총회가 되는 일에 헌신하겠다'라고 정견발표를 했다. 그리고 9월 26일 부서기 선거에서 신예 권순웅 목사가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관록의 김상현 목사를 제치고 당선됐다. 그 뒤를 이어 2022년 9월 7일 푸르른 소나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김한욱 목사의 정견발표다. "저는 정견발표를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왔습니다. 그 준비과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 기울였습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네가 아무리 좋은 청사진을 내놓는다 하더라도 네 자신이 올바른 사람이 아니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공약을 일단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우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총회는 정말 일꾼, 정말 총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일꾼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골 조그만 교회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출석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가정이 너무 가난해 열여덟 살에 외항선 선원으로 배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저는 외항선을 타고 어둠의 그늘을 지나기 위해서 놓치 않은 것이 있다면 성경책입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제가 열아홉 살 때 30명이 탄 배에서 저 혼자 예배를 드리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원들을 전도하게 해주십시오.' 결국에는 30명 가운데 27명이 모여 예배하게 되었습니다. 1년 뒤 한 달을 쉬게 됐는데 그 시간 동안 육지에서 전도 훈련과 영적 사역을 배웠습니다. 22살, 25살 청년의 시대에 거리로 나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26살에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저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귀하기 때문에 어두운 광야에서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위한 두 가지 뜻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24년 전(1998년)에 새안양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제2 새안양교회’를 세우고 안양에서 멀리 떨어진 하남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다 당회가 구성되고 독립했습니다. 저는 총회를 위해서도 바르고 정직하게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을 개발해 불신자를 전도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제 공약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107회 '샬롬 부흥'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때를 위하여 김한욱을 준비시켜주셨고 총회장 이하 임원들을 잘 섬겨서 제107회 총회를 아름답게 끝맺는 일을 뒷바라지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중 힘찬 박수) 신앙은 지식보다 중요하다. 지식엔 한계가 있지만 신앙은 세상을 감싸고 하나님과의 샬롬이 이루어지고 푸르른기 때문이다. 김한욱 목사에게 어울리는 말씀일 듯싶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여 저를 기억하시고 은총을 내리소서 느 13:31 2022-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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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8
  • [더굳뉴스] 허은 목사 부산의 아우구스티누스
    지난 2017년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민주당의 공동선대위원장인 이해찬씨는 말했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다음에는 안희정·이재명·박원순 같은 사람이 이어서 쭉 장기 집권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켜야 한다.” 보수 진영으로서는 ‘싸가지 없는 소리’였겠지만 이제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2년 반이 지난 이 시점에서 어쩌면 이해찬씨의 말은 그냥 흘려버릴 말이었던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말한 세 사람 가운데 사법 위기에 허덕이는 이재명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먹은 것도 없이 겨우내 버틴 몸으로 꽃까지 피워내야 하는 것이 봄이다. 새싹이 온몸으로 흙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도 봄이다. 그건 정말이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이 아무도 모르게 잠들 수 있도록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는 은총이다.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 아우구스티누스(354년 11월 13일 ~ 430년 8월 28일)가 말했다. "사랑이 있고 소망이 있어야 없는 것을 본다. 소망이 없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이름은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으로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427년 반달족(게르만족의 한 민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감독(bishop)이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독이었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감독은 430년 8월 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반달족의 히포 점령은 431년의 일)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전쟁으로 두려움에 빠진 난민들을 돌보며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이는 "우리의 이웃이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 그들에게 자비롭게 대하는 행동은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고백록'에서 말했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불은 위로 향하고 돌은 아래로 향합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 그런 질서가 덜한 곳에는 불안하고 질서가 잡히면 평온해집니다. 제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 주님 은사로는 저희가 불타오르고 위로 이끌려갑니다. 타오르면서 갑니다." 2023년 3월 16일 오후 2시 부산 연제구 연산 8동에 있는 동현교회의 주민을 위한 무료 카페에서 지용길 목사와 함께 허은 목사와 대담을 나누었다. 지형적으로 저지대에 위치해 도로여건이 열악하고 인근 주민과의 관계성이 낮아 지속적인 인구 유출과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는 곳이다. 2022년 5월 21일 입당 감사예배 및 헌당식을 드린 산등성이 동네 한가운데 있는 지상 4층, 지하 1층의 예배당은 아늑했다. 연산동을 아우르는 연건평 511평의 예배당은 주변 개발지역과는 달리 지형적인 한계로 인해 소외받았던 연산8동과 어울려 아담했다. -여기는 언제 자리 잡으셨습니까. "지난해 5월에 입당했습니다.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총회 부서기 마치고 그해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서기 임기 중(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많이 바쁘셨을텐데. "네. 교회 일과 총회 일이 겹쳤습니다. 교회 장로님들, 집사님들 많이 수고하시고 정말 은혜중에 잘 마쳤습니다. 이 지역은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삽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있고 도로변에 있지 않아서 불리한 면이 있는데 오히려 동네 가운데 있어 조용하고 지역 주민들하고 가깝게 지내니까 좋습니다. 이 카페는 무료 카페입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대로 차 빼서 마시고 우리 교회 교역자 집사님들이 순번을 맡아 봉사를 합니다." -이런 교회 카페는 못 본 것 같은데요. "여기는 어려운 분들, 독거노인들이 많아 지난해 5월에 입당하면서 전체 100개 가정에 쌀, 라면을 동사무소를 통해 전달했습니다. 지난 연말 성탄절에 2백 가정에 한 상자에 105만 원 상당의 생필품을 전달했습니다. 그야말로 지역에 있는 교회로서 지역민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가니까 교회 안에도 어르신이 많고 교회 주변 이웃에도 어르신이 많습니다. 다음 세대도 잘 키워야 하지만 이 어르신들에게 천국 기실 때까지 여러 가지 책임을 져주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집이 나고 교회가 살 여력이 되면 이런 어른들을 1인 1실, 혹은 2인 1실로 30분 정도 천국 가실 때까지 모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회복지학도 전공해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따고 요양시설을 운영하면 외부 시설장을 모셔야 되는데 제가 자격증을 따니까 경비도 줄이게 되죠. 그런데 교회가 작지만 아담하게 세워지니까 주변 지역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 여기로 보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전에도 그랬습니다만 최근에도 우리 장로님들께서 '목사님 꿈꾸고 계시는 그 일을 현실화시켜봅시다. 교회 짓고 1년도 안 됐으니까 준비가 되면 옆에 있는 건물 하나 사 가지고 우리 형편에 맞게 부속건물 지어 청소년, 아이들, 청년들 교회 와서 마음껏 공부하고 놀 수 있게 자리 만들어줍시다. 그 위에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우리가 평생 책임져주고 하는 일을 생각하고 준비해가고 있습니다. 작지만 아담하게 지역민과 함께하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현교회는 개척하셨나요, 부임하셨나요. "제가 2대 목사입니다. 1대 목사님이 다른 교회를 섬기다가 나오셔서 성도 30여 명하고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 그 어려운 시절에 소금공장도 하시고 빌려서 예배드리셨습니다. 제가 보니 전월세를 일곱 군데나 다니셨습니다. 그러다가 작은 주택을 하나 매입해 예배당을 짓고 IMF가 올 당시 빚이 상당했습니다. 저를 후임으로 오라 했습니다. 당시 목사님이 협심증으로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셨습니다. 숨이 차서 설교를 잘못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고 1년 뒤 다 물려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 목사님이 인천 길병원에서 수술하고 좋아지셨습니다. 건강이 좋아지시니 3년 동안 안 물려주시는 겁니다. 3년 뒤 위임투표를 해 물려받긴 했습니다. 물려받은 뒤 있던 교회를 매각하고 다른 교회를 사서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우리에게 부담이 됐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가 너무 도시 중앙이고 환경이 유흥가라 장기적으로 볼 때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코로나 시국인데 장로님들과 뜻을 모으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침 여기 집 네 채가 한 날, 한 시 동시에 계약이 됐습니다. 그 네 집을 한 필지로 묶어 헐어내고 건축을 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12월에 공사 시작해 총회 서기 임기 중인 2022년 5월에 완공이 됐습니다." -은혜롭고 순적하게 성전 건축이 됐군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없는 사람이 많은 동네라 교회가 제대로 되겠나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 좋아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고 옥상에 올라가 보니 왜 이곳으로 하나님이 보내셨는지 환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벽처럼 싹 둘러싸고 있고 딱 우리 교회가 서 있는 주변에 서민들이 사는 고만고만한 건물만 좍 있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겁니다. (나중에 올라가 보니 정말 그랬다.) 어려운 분들 사는 가운데 교회가 있고 그 주변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병풍처럼 좍 서 있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는가. 그래 이분들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이곳에 교회를 세우셨구나 하는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을 때 성도들의 생각이 이제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곳에 세워주셨다. 그렇게 해서 작지만 차근차근 우리 힘에 맞게 지역도 섬기고 또 우리 노회 장로회에서 해외 개척 선교를 하겠다 해서 단독으로 하기에는 좀 버거운 게 있고 해서 우리 교회하고 노회장 노회하고 절반씩 힘을 보태 캄보디아에 교회를 하나 세웁니다." 그 관련 기사가 '기독신문'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동부산장로회 임원들은 부산 동현교회(담임 허은 목사) 성도들과 함께 2023년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천준상, 이숙영 선교사가 사역하는 바탐방지역을 탐방했다. 이 지역에서는 약 20평 규모의 비전교회 예배당을 신축하고 이 일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중고대학생 52명이 생활할 수 있는 EDM선교센터를 증축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동부산장로회와 동현교회는 이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 4천만 원을 함께 감당하기로 했다. 허은 목사는 지난 2021년 9월 제106회 총회 서기 직무를 시작하면서 다짐했다고 한다. “총회 서기는 총회 소속 노회와 교회의 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하는 직분이지만 법과 원칙을 지키며 어떤 외압에도 바르게 섬기겠다.” 부산 아우구스티누스 허은 목사는 제107회 총회선거관리워원회 서기로서 제107회 총회 불꽃 권순웅 총회장의 클린개혁을 떠받칠 제108회 총회 임원과 상비부 선거를 깨끗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선거를 관리해야 되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 낳아주신 어머님, 길러주신 어머님을 다 같이 진심으로 섬겼던 효심을 그리고 이 땅의 삶을 끝내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신념을 따른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동현교회와 총회를 섬길 것이라 믿는다. 그리면 제104회 총회장 이승희 목사가 총회 석상에서 "당신 같은 사람이 총회장이 되어야 한다"고 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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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6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5
    “미국은 다시 이기고 있습니다. 그 점을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가 오늘 밤 이 자리에 있습니다.” 2026년 2월 24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2기 행정부 들어 두 번째로 열린 상·하원 합동 연설이 시작됐다. 이날 백악관과 민주당은 국정연설에 초청한 ‘특별 손님’을 통해 각자의 정치적 입장을 강조하는 전략을 펼쳤다. 트럼프는 6·25 전쟁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한 E. 로이스 윌리엄스를 초청해 그에게 미국 최고 군사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했다. 그는 1952년 기밀 작전에서 소련 전투기 네 대를 격추했다. 트럼프는 이달 초 윌리엄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훈장 수여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이날 윌리엄스는 멜라니아 여사와 나란히 앉았고, 멜라니아가 목에 훈장을 걸어줬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순간은 2차 세계대전의 재현이었다. 제1 세계로 간주되는 대륙에서 오랜 역사를 공유하는 이웃 국가를 영토 문제로 침공하는 일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일어난 적이 없다. 적어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로는 없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위 38°선 전역에 걸쳐 러시아 사주를 받고 북한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한반도 전쟁이다. 광복 후 한반도에는 냉전체제 속에서 남북에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갖춘 북한이 통일을 명분으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개입으로 역전되던 전황은 다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교착상태에 머물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전쟁이 중지되었다. 한민족 전체에 큰 손실을 끼쳤고 이후 남북분단이 더욱 고착화하여 아직도 휴전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미군병사 칼 파워스 기념비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1934-) 목사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이 겹쳐있다.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 목사가 1950년 한국에 온 미군 칼 파워스(Karl Powers, 1928~2013. 9. 21) 상사의 무조건적 헌신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말했다. "내 인생을 바꾼 건 한 미군 병사의 힘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한 사람이셨습니다. 모든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1934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나 가난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5남매 가운데 막내로 자랐다. 어려운 형편이라 늘 끼니가 걱정이었다. 그가 4학년 때인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수원의 못골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전학 온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4대1의 경쟁을 뚫고 6년제 수원농림학교에 들어갔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하고싶었던 그는 서울의 철도고등학교는 전액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1950년 6월 26일 혼자 서울로 향했다. 그 하루 전의 한국전쟁 발발을 알지 못했던 그는 피난 인파에 휩쓸려 고생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수원으로 돌아왔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인민군이 물러갔으나 여전히 학교 문은 열리지 않아 그는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곤 했다. 그가 열일곱 살 되던 해,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경부터 이듬해인 1951년 1월 초 사이,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유엔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1·4후퇴 때 퇴각한 미군들이 수원교도소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가 친구들과 담장 밖에서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한 미군이 여러 친구 중에서 김장환을 손가락으로 지목하여 그를 막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난로를 가리키며 불을 지펴달라는 시늉을 했다. 눈치 빠른 그는 재빨리 논두렁에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와서 난로불을 피워주고 시키지도 않은 청소까지 거기다 신발까지 반짝반짝하게 닦아 놓자 영특하고 부지런한 그를 매일 오게 했고, 부대가 경산으로 내려갈 때 그를 데려 갔다. 막내아들을 전쟁통에 타지로 보낼 수 없었던 어머니 반대가 심했지만 그는 영어도 배우고 일을 해서 돈도 벌고 싶었다. 일을 하고 받은 초콜릿이나 담배는 암시장에 내다 팔면 바로 돈이 되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이 되자 수원교도소 자리에 미군 부대가 들어왔다. 갓난아기에게 무언가 먹이려고 애쓰던 어머니들, 전쟁고아의 비참한 삶, 공포에 떨던 민간인들,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들. 경기도 수원에서 살던 소년 김장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김장환 목사는 수복 후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 집은 소작농이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 60%를 땅 주인에게 주고, 나머지 40%로 살았습니다. 식구는 13명이었습니다. 양식이 모자라 한 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한 가마 반을 갚아야 했습니다. 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보리쌀만 먹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꿈이 정치인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종종 미군 부대로 놀러 갔지요. 운 좋으면 초콜릿이나 껌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소와 마차를 빼앗겨 집안은 빈털터리였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얻어가는 담배와 비누, 통조림 등을 팔아서 집안 생계를 도왔지요.” 하루는 미군이 김장환에게 장작을 구해 난로에 불을 피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막사 청소까지 해놓았다. 남달리 똘똘하고 영리한 그는 미군 숙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소년 하우스 보이가 됐다.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일하게 된 어린 소년들은 미군에게 달러로 임금을 받고, 자신이 일하는 숙소의 미군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미군의 전투식량인 C-레이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기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조리 과정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1인용 통조림 형태의 전투식량이다. 해방 이후엔 C-레이션이 상자당 쌀 1되 값에 시장에서 팔렸다. 그리고 미군이 입지 않은 속옷, 양말, 전투화, 군복 등도 모두 얻어올 수 있었다. 하우스 보이로 일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도 배고픔을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었다. 경산에 있을 때 어느 미군이 그에게 '빌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영미권의 남자이름인 윌리엄(William)에서 파생된 이름 혹은 애칭(William→Billy→Bill)이다. 생뚱맞게 윌리엄에서 왜 발음이 전혀 다른 빌리와 빌이란 애칭이 나온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윌리엄'이란 영어식 이름은 원래 게르만식 이름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게르만식 언어에서는 자음 W가 영어의 V와 비슷한 음가를 지니기 때문에 나오게 된 형태이다. 실제 동일한 계통에서 파생된 독일식 이름으로 빌헬름(Wilhelm) 또는 빌로헬름(Wilohelm)이 있다. 따라서 양쪽 모두 애칭이 빌리(영어: Billy, 독일어 Willy)가 된다. "단호한 보호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을 지어준 미군은 꼬마 소년 김장환이 아주 똑똑하고 야무지게 보였던 모양이다. 빌리는 그곳에서 일생의 은인인 인사 업무를 담당하던 칼 파워스 상사를 만난다. 당시 22세였던 칼 파워스 상사는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부모와 생이별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자신이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이 전쟁에서 구해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중 옆 막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빌리를 눈여겨 보게 된 것이다. 그는 빌리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제안했고 늘 배움에 목말라 있던 빌리도 선뜻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다. 51년 5월 칼 파워스 상사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그린빌에 있는 밥존스 고등학교 입학 허가서를 들고 나타났다. 환갑이 넘은 어머니는 고심 끝에 아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아들이 7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어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렀다. 아들에게 종이봉지에 흙을 담아 주면서 고향생각이 날 때 다려 먹으라는 당부를 하며 보냈다.1951년 11월 12일 전쟁중인 최빈국 한국에서 17세의 고등학생이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1일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빌리는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호롱불로 밤을 밝히던 수원에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번쩍이는 신천지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 근무연장기간이 끝나지 않은 칼 파워스 상사 대신 먼저 귀국한 동료가 빌리를 마중 나왔고, 며칠 후 드디어 칼 파워스 씨가 사는 버지니아주 단테시에 도착했다. 빌리는 미국에 가서야 칼 파워스 씨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테시에서도 한참을 들어가는 산골짜기에 사는 칼 파워스 씨는 곧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자신의 결심을 실천하기 위해 빌리를 데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기독교 사립학교인 밥존스 중학교 3학년에 편입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아닌 칼파워스 씨가 빌리를 학비가 싼 버지니아주 공립학교 대신 기독교 사립학교에 넣은 것이 오늘의 김장환 목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군대에서 한 동료가 "밥존스가 외국학생들에게 관심이 있다"고 한 말 때문에 선택한 학교였다. 빌리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밥존스 재단은 기독교 교육을 위해 밥존스 1세가 1927년에 설립한 학교로 매우 보수적인 학풍을 고수하고 있다. 근본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기독교 학교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명문으로 꼽힌다. 밥존스 재단은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한 울타리에 있는데 중학생부터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어있다. 엄격한 생활과 함께 매일 아침 채플에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빌리는 말도 통하지 않는 가운데 학교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던 중 제리 메이저라는 신학과 학생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지독한 외로움과 답답함에 시달리던 빌리는 한국말로 기도를 하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방과후에 영어를 못하는 빌리를 따로 지도해주었고, 기숙사 동료들도 열심히 도와주어 첫 학기를 낙제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칼파워스 씨에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빌리는 파워스 씨가 군인장학금으로 어렵게 공부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댄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빌리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어가 익숙해진 데다 칼 파워스 씨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각오를 단단히 다졌기 때문이다. 반드시 뭔가 이룩한 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도 한몫 했다 빌리가 더욱 자신감을 얻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 고등학교 웅변대회에 참가하고부터였다. 전국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칼 파워스 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직접 원고를 써서 선생님께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선생님은 동양학생이 지원한 것을 가상히 여겨 웅변연습을 도와주었다. R과 L 발음을 고치기 위해 입에 구슬을 물고 피나는 연습을 한 결과 교내대회에서 1등을 하고 학교 대표로 주대회와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해 아이젠하워상을 받았다. 그 일로 빌리는 밥존스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방학 때 빌리가 1등 트로피와 부상으로 받은 텔레비전을 안고 칼 파워스 씨 집으로 돌아갔을 때 온동네에 화제가 되었다. 칼파워스 씨는 빌리의 학비를 대기가 버거울 때는 지역 신문인 '디킨스니언'지에 빌리의 사정을 알리고 모금을 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동양학생을 위해 성금을 보내주었고 빌리는 모금 문화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학교생활에 자신이 붙은 빌리는 과외활동에도 열심이었다. 하지만 사귀는 여학생이 없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학교 음악회에 언제나 혼자 가야했다. 키가 큰 미국 여학생들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던 빌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아담하고 예쁜 여학생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용기를 내서 데이트 신청을 했을 때 트루디는 환하게 웃으며 빌리를 맞아들였다.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기숙사에서 벌점을 단 1점도 받지 않은 모범생 빌리는 이미 학교 내에서 인기스타였다. 두 사람은 음악회에 다녀온 뒤 편지를 주고받다가 2년 후 트루디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식으로 데이트를 시작했다. 빌리는 고교 졸업 때 우등상을 받았고 그 소식은 빌리의 학비를 모금해주었던 디킨스니언에 보도되기도 했다. '빌리 김은 모히칸 문학단체의 일원이었고 스포츠 매니저이기도 했다. 또 학급 성가대원이었고 미국 미래교사회 밥 존스 고교 지부의 리더였으며 학생신문 '트라이앵글'지의 스포츠 편집자였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민주주의의 소리' 웅변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빌리를 소개했다. 고교를 졸업할 때 빌리는 망설임 없이 신학대학을 선택했다. 미국에 와서 신앙을 갖게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의 신앙상담자와 신앙관련 모임의 리더로 활약하면서 믿음을 키워나갔다. 밥존스에서는 정기적으로 채플시간을 통해 바이블 컨퍼런스를 실시한다. 한국의 부흥회와 비슷한 형태인데 빌리는 그 예배를 통해 강한 비전을 받고 주말이면 대학생 선배들을 따라 시골교회에 가서 전도도 하고 간증도 했다. 돈을 모아서 다른 지역에서 열린 빌리그레이엄 전도집회에 참석해 강한 도전을 받기도 했다.빌리는 대학교에서 한 학기를 마쳤을 때 파워스 씨 집과 가까운 롱브랜치 교회에 강단에 서게 되었다. 출석교인이 약 50명 정도 되는 작은 교회였다. 그 교회에 파워스 씨의 외삼촌이 다니고 있었는데 마침 부흥집회 기간을 맞아 서너 명의 강사를 초청할 때 빌리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빌리는 한시간 동안 한국 상황과 미국에 오게된 경위, 학교 생활, 앞으로의 꿈을 조리있게 강연했다. 그날 집회가 소문이 나면서 빌리는 단테시의 여러 교회에 부흥강사로 초청되었다. 뿐만 아니라 라이온스 클럽과 로터리 클럽에서도 빌리를 스피치 강사로 초청했다.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아칸소까지 가서 스피치를 하고 돌아왔다. 동양인이 거의 없는 지역이어서 한국에서 온 빌리의 흥미로운 스피치는 어디서나 인기였다. 빌리는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학비 이외의 경비는 스스로 마련하였다. 칼 파워스 씨가 공부에 지장이 있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말라고 하여 주말에 강연을 하고 방학 때마다 동급생인 왈리의 집에 가서 일했다. 왈리의 아버지 왈도 예거 장로는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닭과 칠면조를 가공하는 회사 코트랜드를 운영했다. 예거 장로는 미국 기독교실업인협회 회장을 3년간 역임한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빌리는 방학 때 왈리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미국 기독교인 가정의 삶을 체험할 수 있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미국 시골 마을로 전도하러 가는 주말 전도여행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어디를 가든 키 작은 한국 청년의 스피치는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4학년 때 빌리는 대학원을 마치면 한국에 가서 복음전도자로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주말 전도여행을 더 열심히 다녔다. 학교생활이 익숙해져 어려움이 없었지만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은 적이 많았다. 기숙사에서 세끼 밥을 먹지만 용돈이 없어 군것질을 할 수가 없었다. 파워스 씨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지원을 요청했다. 빌리와 트루디는 좋은 만남을 갖고 있다가 트루디 언니 결혼식에 참석한 이후 자연스럽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미시간주 레이크뷰에서 열린 결혼식에 참석한 빌리를 트루디의 아버지는 마음에 들어했다. 빌리를 인근에 있는 프리 감리교회에서 저녁설교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까지 했다. 트루디의 아버지는 설교를 들으며 빌리를 사윗감으로 점찍었지만 트루디의 어머니는 딸을 가난한 나라로 보낼 수 없다며 반대했다. 트루디의 어머니는 빌리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밥존스 대학교 총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총장은 "미국 사람이든 동양사람이든 결혼하려면 빌리 김보다 더 좋은 사람을 고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루디를 시골집에 데려 갔을 때 칼 파워스 씨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았다. 시골로 시집오려는 여자가 없어 독신으로 지내고 있던 칼 파워스 씨는 트루디 때문에 빌리가 미국에 주저앉게 될까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중산층 집안에서 어려움없이 자란 트루디가 산골집에서 스스럼없이 부엌일을 하는 것을 본 칼 파워스 씨는 빌리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칼 파워스 씨는 빌리가 공부를 마치면 꼭 한국으로 돌아가서 활동하길 바라고 있었다. 빌리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 '1958년 밥존스를 빛낸 30대 동창생'에 선발되었다. 빌리와 같은 해에 졸업하기 위해 부지런히 방학 때마다 학점을 딴 트루디도 그해 8월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58년 8월 8일 저녁 8일 두 사람은 미시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빌리는 밥존스 신학대학원에 진학하고 트루디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트루디가 돈을 벌게 되자 빌리는 7년간 학비를 대준 칼 파워스 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빌리는 1년 안에 대학원을 졸업하기 위해 공부에 전념했다. 트루디도 매일 새벽 2시까지 빌리가 과제물 밀리지 않도록 도왔다. 대학원은 32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대학 때 부지런히 학점을 이수하고 섬머스쿨까지 다닌 빌리는 예정대로 1년 만에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1959년 2월 단테침례교회에서 빌리가 목사 안수를 받던 날 칼 파워스 씨는 빌리와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그해 11월 빌리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트루디의 교사월급과 빌리의 부흥집회 사례비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후원해준 칼 파워스 씨의 고귀한 뜻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일단 고국으로 돌아갈 배표 2장을 일단 마련했지만 가난한 고국에 돌아가서 선교활동을 하려니 모든 게 걱정되었다. 부부는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한달에 50달러 씩 도와주는 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국으로 떠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귀국을 앞두고 캔턴 침례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을 때, 그 교회에서 마침 매달 50달러씩 선교비를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곧이어 왈도 예거 장로가 세계기독봉사회를 창설하여 김장환 목사의 한국선교를 후원하겠다고 나섰다. 친구들은 한국 선교 때 사용하라며 모금을 하여 4륜구동 포드 픽업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매달 선교헌금을 하겠다고 약속한 친구들도 있었다. 캔턴침례교회와 친구들은 40년 넘게 후원비를 보내주고 있다. 1959년 12월 불안한 눈빛으로 뱃전을 서성이던 17세의 하우스보이 빌리가 8년 만에 목사 김장환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파란눈의 트루디가 함께 했다. 그리고 포곡제일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고 김종원 목사를 담임교역자로 섬기게 될 공군 병사 빈병옥이 김장환 목사를 만나려고 한국 전쟁 중인 1951년 설립된 오산공군기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예정된 섭리 안에서...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1-5 202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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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4
    심판의 날 모든 인생은 하나의 세계다. 그 대부분을 우리는 모른다. 바깥에는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이것은 날씨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혹한 삶의 환경이다. 날이 덥거나 춥고 가끔은 비가 내리는 세상에서 그저 평범하게 식사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견뎌내야 하는 삶이기도 하다. 미국의 소설가 마리오 푸조(Mario Puzo, 1920년 10월 15일 ~ 1999년 7월 2일)가 집필한 장편 소설. 1969년 3월 10일 출판되었고 출간 직후 무려 67주간 뉴욕 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 목록에 머물렀다. 2년 뒤 1971년까지 미국 내 900만 부 이상, 전 세계적으로 2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목인 대부(代父, godfather)는 본래 가톨릭 등에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의 남자 후견인을 의미하는데, 여기선 마피아 조직의 두목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소설 '대부'(The Godfather)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코니 콜레오네가 결혼식을 한 1945년부터 비토 콜레오네의 뒤를 이은 마이클 콜레오네가 뉴욕을 제패하는 1955년까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도입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8월 마지막 토요일(26일) 대부의 딸 콘스탄지아 코를레요네의 결혼식에는 이런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청첩장을 받았다. 신부의 아버지 돈 비토 코를레오네는 롱아일랜드의 화려한 저택에 살고 있었지만 옛 친구나 이웃을 잊는 법이 없었다. 피로연은 자택 안에서 하루 종일 계속될 예정이었다. 틀림없이 대단한 행사가 될 것이다. 일본과의 전쟁도 막 끝났기 때문에 참전 중인 아들 걱정으로 축제 분위기를 해칠 염려도 없을 것이다. 결혼식은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는 자리가 될 것이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 전국민 옥쇄를 외치며 항복하지 않는 일본 히로시마에, 3일 뒤 8월 9일 나가사키에 81년 전 당시 0억 달러나 되는 거금이 들어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2시 45분,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는 원자폭탄 리틀 보이를 싣고 마침내 역사적인 출격을 감행한다. 실제 폭탄이 너무나 무거웠던 데다가 가득 채운 연료 때문에 사실상 이륙 중량 초과였으며, 이 때문에 더 충분한 활주 속도를 얻기 위해 티비츠 대령은 활주로 거의 끝에까지 가서야 겨우 이륙을 시켰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은 에놀라 게이가 이륙을 안하고 계속 달려나가자 활주로 끝에서 충돌하는 것 아니냐며 숨도 못 쉬었다고. 심지어 에놀라 게이 부조종사 로버트 루이스 대위조차도 티비츠(Paul Tibbets, Jr., 1915년 2월 23일 ~ 2007년 11월 1일) 대령이 이륙을 안하자 자신이 조종간을 당길 뻔했다고 술회했다. 이 상황을 히로시마의 시각에서 다시 구성해보면 우선 1945년 8월 6일 아침 7시, B-29 1대(기상관측 임무를 맡은 스트레이트 플러쉬)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많은 히로시마 시민들이 고고도에 유유히 떠있는 이 B-29를 목격했다. 공습 경보도 울렸지만 방공호로 대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일본 시민들은 B-29의 폭격은 보통 수백 대가 들이닥치는 것이고, 한두 대 출현하는 건 정찰 임무 같은 것이라서 별다른 피해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일본 군부와 국민들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미국 공군 폴 티비츠대령이 호위 전투기도 없이 소수의 B-29만 보내서 원자폭탄을 투하하도록 하는 일종의 기습 작전을 짜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실전 투입 원자폭탄이 폭발했다. 폭탄이 터지는 순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엄청나게 밝은 빛을 목격했다. 이 빛이 얼마나 강한지 생존자들은 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손으로 앞을 가리니 자신의 뼈가 보였다고 한다. 미국 국무부와 군부는 1945년 8월 10일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계획을 세우면서 조선지도에서 38선을 찾아냈다. 38선 북쪽에서는 소련군이 항복을 받고 남쪽에서는 미군이 항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될수록 조선 북쪽 멀리까지 올라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싶었지만, 바다 건너 오키나와 및 필리핀에 있던 미군들이 군함으로 조선에 이르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려야 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은 미국이 오래전부터 부탁한대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이미 조선으로 진격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조선의 절반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소련군이 38선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38선 이남이 이북보다 땅덩어리는 조금 작아도 수도 서울 및 인천과 부산 등 큰 항구를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훨씬 더 남쪽까지 내려올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주장하리라 짐작했는데, 소련은 뜻밖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미군이 조선에 들어오지도 않은 터였지만 38선에서 남하를 중지했다. 김장환 목사가 16세가 되는 1950년 6월 25일 전까지... ‘하우스보이’ 김장환 목사 인생역전 이끈 칼 파워스 상사 2026-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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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4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3
    칼빈주의 국가 건설 1492년 10월 12일 콜럼버스가 인도로 착각했던 신대륙에 1620년 12월 21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늘날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으로 건너온 사람들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칼빈주의 이념에 입각한 공화국 건설을 위해 1630년, 영국 국왕의 칙허를 받아 온 부유한 청교도 1,000명이 있었다. 이들의 지도자는 존 윈슬롭(John Winthrop, 1588년 1월 12일 - 1649년 3월 26일)이었다. 윈슬롭은 예정설을 주장한 칼빈주의자인데 성경에 근거한 이상적 국가를 만들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1620년 런던 지방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매우 신앙심이 두텁고, 영국 성공회는 가톨릭 의례에서 탈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청교도 신앙을 열심히 신봉했다. 1630년 4월 8일 네 척의 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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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5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2
    미국 청교도 칠면조 미국의 건국 이념과 정치 문화에는 청교도적 개신교 전통이 깊이 스며 있고, 주류 사회 역시 개신교 문화권이 중심을 이룬다. 보수란 무엇일까. “개인의 자유.” 미국 보수의 이념적 출발점이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서 작동하는 사회보다 개개인이 알아서 움직이는 사회가 더 건강하고 생산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집단지성이 어느 정치 권력자 한 명 또는 일개 정치 집단보다 낫다는 생각이 보수의 시작과 끝인 셈이다. 자유가 있어야 경쟁이 있고, 경쟁이 있어야 발전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추수감사절은 성탄절과 함께 미국의 양대 명절로 꼽히는데,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븐에 구운 칠면조를 나눠 먹는 것이 전통이다.추수감사절의 핵심은 감사함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 축제는 매우 미국적인 것이다. 칠면조가 주인공이 되는 전통은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이 1621년에 맞은 첫 추수감사절에 칠면조를 잡아 나눠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덩치도 큰 칠면조가 추수감사절에 주로 먹었던 거위를 대신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미국 땅이 척박해 영국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추수감사절만큼은 없는 살림에도 칠면조를 요리해 다 같이 나눠 먹으며 1년을 무사히 넘긴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 됐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인이 추수감사절만큼은 대가족이 모여 앉아 칠면조 고기를 먹으며 굶주리고 힘들었던 조상들의 생활을 돌아보고 감사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66일간의 항해 끝에 1621년 11월 11일 청교도를 태운 메이플라워호는 케이프코드(Cape Cod)의 프로빈스타운에 입항하였다. 선박을 수리한 후, 1621년 12월 21일 오늘날 매사추세츠주(州) 연안으로 이동하였다. 첫 겨울을 맞이한 이민자들은 질병과 굶주림으로 절반 가까이 사망했다. 그러나 원주민들과의 교류를 통해 농사법과 생존 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다. 이 감사의 마음을 나눈 것이 오늘날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의 유래가 되었다. 칠면조를 뜻하는 영어 ‘터키(turkey)’는 튀르키예(터키) 상인들이 유럽에 들여온 닭(아프리카 뿔닭)과 야생 칠면조가 닮았다는 이유로 이민자들이 부르던 이름이 굳어진 것이다. 미국인들의 칠면조 사랑은 각별하다. ‘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년 1월 17일~1790년 4월 17일)은 말했다. “다른 새들의 먹이를 빼앗는 흰머리수리가 아니라 농장 도둑에게 용감하게 덤비는 칠면조가 우리의 국조(國鳥)가 돼야 한다.” 미국은 2026년 탄생 250주년을 맞이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1년 10월 31일 ~1506년 5월 20일)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당시 15 세기 유럽 국가들은 인도, 중국등 동방과의 해상 무역으로 큰 이익을 내고 있었다. 그 항로는 주로 지중해를 통한 인도 항해였다. 그러나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동유럽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한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교도들의 동방 출입을 가로막았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지중해가 아닌 대서양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서쪽으로 가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의 이사벨 1세의 지원을 받아, 산타 마리아, 핀타, 니나라는 세 척의 배와 함께 오랜 기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을 발견하였다. 당시 그가 발견했던 이 섬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와틀링섬으로 추정) 바하마(Bahamas) 제도에 위치한 섬이었으며, 신대륙을 인도로 착각했던 콜럼버스는 이 대륙의 원주민을 인도인 즉 '인디언'(Indian)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또한 이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 거륵한 구세주(Holy Savior)의 섬이라고 칭하였다.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1492년 10월 12일 오전 2시경은 아메리카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날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유럽의 아메리카 식민지(植民地: 본국의 밖에 있으면서 본국의 특수한 지배를 받는 지역)화는 15세기 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계기로 시작됐다.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유럽의 여러 민족이 건너가, 원주민 인디언의 문명을 멸망시키고 유럽 문명과 사회 이식(移植)으로 비롯되었다. 영국의 식민 활동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년 9월 7일 ~ 1603년 3월 24일) 시대에 시작됐다. 엘리자베스 1세는 44년을 통치하며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되었고, 이 시기는 흔히 엘리자베스 시대로 불린다. 엘리자베스 1세는 수많은 청혼에도 독신을 고집하여 "처녀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헌정되어 영연방 버지니아주(Commonwealth of Virginia)라고 명명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이어 즉위한 국왕 제임스 1세는 1606년, 식민지화 목적을 위하여 런던의 버지니아 회사를 특허하였다. 1607년, 회사가 보낸 식민지 주민들은 제임스타운에 첫 영구적 영국인들의 정착지를 설립하였다.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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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 [더굳뉴스] 청교도 김장환 목사와 김종원 목사 1
    청교도 창세기 "내 인생을 바꾼 건 한 미군 병사의 힘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한 사람이셨습니다. 모든 것은 한 사람의 힘으로 시작됩니다.” 누가 그랬던가. 본향은 원래 잃어버리는 거라고. 잃어버렸기에 영원히 찾아 헤맬 수 있는 거라고. 알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감 기록은 성경처럼 기억을 지배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You are like light for the whole world. A city built on top of a hill cannot be hidden, and no one would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clay pot. A lamp is placed on a lampstand, where it can give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Make your light shine, so that others will see the good that you do and will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올해 2026년은 대한민국 수립 78주년이다. 이 기간 신생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이룩했다. 그 치열했던 시간을 담은 현대사의 기독교 인물을 소개한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1934-, 92세) 목사의 일생은 한국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이 겹쳐있다. 김장환 목사(빌리 킴)의 영어 이름 ‘빌리(Billy)’는 6.25 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허드렛일)로 일할 때 미군 병사들이 지어준 것이다. 한국전쟁 후 미군 부대에서 일을 도우며 영어를 배웠고, 이때 미국인들이 친근하게 ‘빌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도 화성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김 목사가 1950년 한국에 온 미군 칼 파워스(Karl Powers, 1928~2013. 9. 21) 상사의 도움으로 미국 밥존스 대학(Bob Jones University)으로 유학을 갔다. 1959년 미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당시 ‘빌리 킴’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런 그가 1973년 세계적 부흥사 미국 남침례회 목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년 11월 7일 ~ 2018년 2월 21일)의 전도대회 설교 통역을 맡았다.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목사 전도대회’에는 연인원 320만 명이 모였고 한국 개신교계는 하나로 단합했다. 첫날부터 50만 명이 몰려 아현동부터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까지 인파로 채워졌다. 매일 10만 명씩 참가자가 늘어 마지막 6월 3일 예배에는 117만 명이 여의도 5·16 광장을 가득 메웠다. 개신교 신자를 어림잡아 400만으로 계산하던 시절, 닷새간의 전도대회에 연인원 320만 명이 모였다. 개신교 신자는 이 전도대회 이후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해 1980년대를 거치며 1000만 신자 시대를 열었다. 전도대회에서 빌리 그래함 목사 못지않게 유명해진 사람이 통역을 맡은 김장환 목사이다. 그래함 목사의 한마디가 끝나자마자 열정적 제스처와 함께 한국어로 옮긴 김 목사의 통역은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대회장이었던 한경직 목사는 말했다. "두 빌리(Billy Graham, Billy Kim)는 하나의 영이었습니다." (빌리 킴)김장환 목사는 이 일을 계기로 빌리 그래함 목사와 45년간 우정을 쌓았다. 김장환 목사는 2000년 8월 세계침례교 제19대 총회장에 취임해 2005년까지 전 세계 1억 5천여 명 침례 교인의 리더로 활동했다. 2018년 100세의 그래함 목사 장례식에서 외국인 대표로 추모사를 낭독할 만큼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 위치한 빌리 그레이엄 라이브러리에서 2022년 12월 13일 빌리 킴 홀 개관식이 열렸다. 빌리 그레이엄 라이브러리는 2007년 개관 이래 170만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 미국의 기독교 명소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엄(William Franklin Graham II, 1952년 7월 14일-) 목사는 환영사를 통해 말했다. “김장환 목사는 순수 복음만을 전해온 신실한 목회자입니다. 그를 통해 수많은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고 있습니다. 1973년 여의도 집회 때 제 부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통역을 최고로 잘했습니다. 그때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에 실수가 있었는데, 김장환 목사가 그걸 잡아주시기도 했습니다.” 김장환 목사의 사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빈국에서 미국과 함께 기독 선진국으로 도약한 대한민국 역사에 길이 남을 하나님 축복의 표상이다. 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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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1
  • [더굳뉴스] 권순웅 목사 호렙산 불꽃
    권순웅 목사 목회 철학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꿈을 버리지 않고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 무엇을 얻을까 바라는 거지 인생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명 줄을 잡고 살기 때문 열정적인 호렙산 불꽃 되어 그의 공약 3R 총회 개혁다시 세우고 존중받게 만들고 모든 목사 장로 애곡 속에 떠나기를 남몰래 조금은 늦은 것들이 있다. 늦게 온 것들은 고요하고 스산하다. 늦게 오는 것은 저마다 그늘진 사연이 있다. 늦은 것의 쓸쓸함과 고요함과 심란함. 너무 늦게 찾아와 주목받지 못하거나 쓸모없어진 것들. 그러나 누가 그 순서를 정했더라도 더딘 것은 더딘 데로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도 언젠가 소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권순웅 목사가 그렇다. 호렙산 불꽃을 보고 뒤돌아선 모세처럼. 2016년 12월 4일 11시 주다산교회 예배에서 성경을 읽을 때 다 일어나고 영상 모니터에 성경 구절이 비치지 않았다. 교인 모두는 성경을 펼쳐 들고 읽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명기 32:7-14 권순웅 목사가 성경을 한 손에 받쳐 들고 강단에 섰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오리가 아니라 독수리같이 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광인론(광인이란 말은 그 스스로 지은 말로 미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 수 없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제자훈련에 미쳤다는 광인론 목회철학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내 목회철학을 이렇게 말씀하고 싶습니다. 나의 목회철학은 오리지날입니다. 이것은 오리가 지랄하면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 제가 말씀하는 이 광인론은 절세미인과 같습니다. 절세미인은 절에 세 들어 사는 미친 인간을 말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기도하는 데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셨습니다. 구호를 외쳤는데 미쳐라였습니다... 우리는 오리 같은 뒤뚱거리는 신앙이 아니라 독수리 같이 날아오르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고 바람의 기운을 타면 비상합니다. 우리도 성령의 바람을 탈 때 독수리같이 올라가게 됩니다. 독수리 같은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멀리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독수리가 자기 새끼를 훈련하는 것 같이 자기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본문 신명기 32장 11절과 12절은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암담한 현실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교육에서 일파만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아이가 하나뿐이라 고민이 많았습니다. 애가 중학생 때 학교에서 자꾸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나는 몰랐는데 우리 집사람이 학교에 많이 불려갔습니다. 중3 때 목사의 딸이 노랑머리가 되어 교회에 나타났습니다. 기절할 지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계속 감동을 주시는 것은 이삭처럼 모리아산에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녀지간의 인연을 끊고 독수리가 그 새끼를 키우듯이 그냥 던져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데 던져버릴 때 없나 찾았습니다. 그것도 돈 안 들고 말입니다. 탈북자선교회 미션홈이 떠올랐습니다. 중국 신양(허난 성에 있는 도시인데 허난 성은 인구는 가장 많고 경제적으로는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는 곳)의 촌 한구석에 있는 곳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너 중국으로 유학가라’고 말했습니다. (큰 웃음) 우리 아이는 북경이나 상해를 생각하고 좋아했습니다. 한번 가볼래 했더니 싱글벙글했습니다. 그 당시 겨울이라 밤이 되면 영하 30도 40도가 되는 곳이었습니다. 사실 나도 그곳이 그렇게 어려운 곳인 줄은 몰랐습니다. 갔더니 화장실이 재래식인데 유리창도 없고 비닐로 휘감아 놓은 곳이었습니다. 영하 30도 40도 되니 볼 일을 보면 그대로 쌓여 탑이 되었습니다. 제가 사용해 보니 이게 바로 똥침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웃음) 그리고 숙소는 탈북자나 조선족이니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기숙하는 곳이었습니다. 세면은 식당 안에서 물을 데워 얼굴을 씻고 2주에 한번 신양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 목욕탕에 가보니 물이 설렁탕 국물 같습니다. 때가 허옇게 둥둥 떠다녔습니다. 우리 아이가 거기 일 년 있었는데 살려달라고 사정했습니다. 아빠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 제발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후에 복을 주셨습니다. 미국 유학 문을 열어주시고 밥존스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거쳐 이번에 총신을 졸업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독수리 같은 훈련이 없으면 바로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연단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 백성을 훈련시키십니다. 저는 우리 민족이 지금 연단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이 고난이 우리에게 복이 될 줄 믿습니다...” 권순웅 목사가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친구의 형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명문대에 다니던 그는 청운의 꿈을 가진 고시생이었다.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을 했다. 허름한 장례식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주변은 가을 산이었다. 단풍색깔도 처량하게 보였다. 친구 어머니의 통곡이 그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멍하게 장례를 지켜보았다. 끝나고 식사를 했다. 그때 교회 어른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셨다. “산에 오니 밥맛이 좋다.” 그 한마디가 믿음이 연약한 그에게 비수같이 꽂혔다. 친구 어머니의 애곡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후일 깨달았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셨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아시면서도 우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을 아파하셨기 때문이다. 그는 영남대 경제과 재학시절 이념서클을 이끌었던 운동권 출신이었다. 졸업 후 취직해 대기업 마케팅 업무를 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후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1989년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그는 학교 뒷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SPARK(불꽃) 운동’을 목회비전으로 세웠다. SPARK는 S(Scripture 성경) P(Prayer 기도) A(Action 삶) R(Revival 부흥) K(Kingdom of God 하나님 나라)의 약어다. 그는 보기와 달리 1955년생이라 총신 78회 정도 되어야 하는데 33살 늦깍이 신학생으로 출발해 37살에 졸업한 총신 84회다. 그런 그가 2016년 9월 26일 오후 10시 20분 총회임원 선거로는 유일하게 정상적인 경선이 이루어진 총회 부서기 선거에서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경쟁자를 제치고 총회 부서기에 당선됐다.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올 가을에 권순웅 목사는 제101회 총회의 New Spark 새 불꽃이 되어 전국 교회와 총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불꽃은 연소(燃燒) 반응 시 빛나는 밝은 바깥 부분이거나 타는 불에서 일어나는 붉은빛을 띤 기운이다. 권순웅 목사는 1992년 5월 서울 방이동 상가건물에 개척했다. 소외된 자들을 대상으로 한 철저한 차별화 전략을 내세웠다. 초창기엔 ‘이러다가 교회 문을 닫겠구나’라는 위기감도 들었지만 뿌려진 전도의 씨는 결국 자라고 열매를 맺었다. 2000년 100명 성도를 넘기더니 이듬해엔 장년만 200명 넘게 출석했다. 그 즈음 이사야서 43장 5절을 통해 확신을 얻은 그는 경기도 화성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민족과 세계를 구원하는 한국 교회의 모델’이 되려면 좀 더 넓은 터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때는 동탄 신도시 발표가 나기 전이었다. 교회 이름도 ‘새술’에서 ‘주님이 많이 낳으신다’는 의미의 “주다산”으로 바꿨다. 2001년 8월 화성시 반월동에서 18가정이 초라한 천막교회로 시작했다. 그러다 2014년 4월 19일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60에 종교부지 2000평 건평 2500평 2500석의 예배당을 최대 저렴하게 최고의 기능을 지향해 세웠다. 그는 교회를 지으면서 건축비 절감을 위해 지하를 파지 않고 세웠다. 그리고 재정 여력이 생기자 옆의 땅을 사들여 지하 공간을 파는 것보다 교회 땅을 더 넓힌 지혜를 발휘했다. 교회에서 좀 떨어진 곳에 32400평의 산도 가지고 있다. 지금은 2500명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꿈을 버리지 않고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얻을까 바라는 거지인생이 아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사명 줄을 잡고 살기 때문입니다.”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 주다산교회 교인들이 매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한 장짜리 전도지엔 이 같은 축복의 글이 적혀 있다. 권순웅 목사의 매주일 저녁예배 설교를 요약한 것이다. ‘예수 믿으세요’란 소책자나 말 대신 축복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축복전도법이라고 불린다. 효과가 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울에서 목회하면서 이미 임상실험을 거쳤습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종이 한 장 나눠주고 축복해주는 게 전부지만 10번 이상 계속 만나다 보면 결국 우리 교회 교인이 되더군요. 예수님도 복음을 전하실 때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불신자와의 최고 접촉점은 바로 축복입니다.” 권순웅 목사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기업체에서는 마케팅 부서에서 일했다. 축복전도법을 굳이 마케팅 개념으로 보자면 탁월한 일대일 마케팅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전도받은 자들을 위해 주다산교회는 셀을 통해 양육을 한다. 또 대공동체 사역을 영적 시스템화하여 연간 진행한다. 신년금식집회, 새기비(새벽기도비전), 블레싱데이, 그리고 매주일 저녁에 드리는 신앙의 명가 세우기 예배, 하나님 나라 금요집회 등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는 역동적인 대그룹사역을 진행한다. 그는 이 중심을 영적리더십으로 보고 있다. 이것으로 주님의 리더십이라는 관점으로 선교학 박사를 취득했다. 저서로는 ‘예수 스파크셀 리더십 이야기’ ‘스파크 양육교재’ 15권(공저)이 있다. 권 목사는 총신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강의하며 예수 스파크셀 세미나를 연간 2회 진행하면서 전국교회 목회자를 돕고 세우고 있다. 제101회 총회에 뉴 스파크 새 불꽃으로 등장한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가 앞으로 지켜야 할 공약 3R(Reformation 총회개혁, Rebuild 총회 다시 세우기, Respect 총회 존중)을 내세우며 관심을 가지게 된 총회 형편은 어떤가. “이게 총회냐”라는 목사나 장로의 볼멘소리가 가슴을 친다. 그렇다. 이 몰염치한 거짓과 탐욕 만연한 요령과 눈치 온갖 탈법과 불공정이 판치는 곳을 총회라고 할 수 없다고 개탄도 했다.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면서 희망도 가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우리 모두가 그 공범자들이었다. 실은 이 총회도 힘들게 만들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은 교인들이 주일마다 한 움큼씩 보태는 성미에 의존해 산다는 것을 의미할 때도 있었다. 그 가운데 교회가 성장하고 교인이 늘어나고 서울역 근처 건물에 세 들어 있다가 지금의 어엿한 건물을 지닌 총회와 총신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총회의 이 모든 것은 그 시절 이영수 목사의 공로가 없었다면 장자교단이라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을 것이다. 박윤선 목사를 중심으로 갈려나간 개혁 측의 현실을 보면 감이 잡힐지 모르겠다. 총회가 개교회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고 본이 되지 못하니 노회와 교회도 교인들의 원망을 사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교인의 노회와 총회에 대한 무관심을 낳았다. 폴란드 공산당이 조직한 반유대주의 축출운동에 의해 1971년 망명한 이후에 영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 11. 19.-)은 나치 박해의 희생자였던 마르틴 니묄러의 사례를 들려준다. 처음에 나치는 공산주의자들을 체포하러 왔다. 니묄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기에 가만히 있었다.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잡으러 왔다. 그는 노조와 연관이 없었으므로 침묵했다. 그다음에는 유대인 그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잡으러 왔지만 가만히 있었다. 마침내 나치는 니묄러를 잡으러 왔지만 그때에는 다른 누군가를 옹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눈앞에서 총회와 노회와 교회의 크고 작은 불의가 일어날 때 우리가 침묵하고 자신의 안전과 신앙만을 생각한다면 결국 궁극적으로 위협받는 것은 우리 자신의 안전과 신앙이다.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지 않을 신앙의 권리 더 나은 삶을 선택할 권리 일시적인 안전과 보신보다는 더 많은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양심의 자유와 신앙 인권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본성을 추구하고 지킬 권리가 있다. 한 해를 돌아보는 저마다의 가슴속에 ‘내가 더 많이 노력했어야 하는데’라는 자책보다는 ‘나’와 내 교회를 넘어 ‘우리’가 함께 선택할 수 있는 더 나은 신앙의 바른 삶에 대한 강한 소망이 싹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의 문학관이 있는 남원 노봉마을에 진눈깨비가 흩날린다. 계곡의 물을 끌어올려 타고 도는 물레방아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움직인다. 거대한 몸집을 굴리기에는 물이 턱없이 모자라 보이지만 물레방아는 쉼 없이 물을 타고 돈다. 개울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다. 아침햇살이 비출 때마다 안개분수에서 무지개가 불꽃처럼 빛난다. 아침햇살이 비출 때 마다 물레방아 가의 안개분수에서 무지개가 불꽃처럼 빛난다. 물보라를 흠뻑 뒤집어 남천은 발가벗은 채 얼음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물레방아 주변 대숲에는 물이 흩날려 안개비가 내린다.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17년간 혼신을 바친 대하소설로 20세기 말 한국문학의 새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 “혼불”의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마디 한마디 파나가는 것이다. 세월이 가고 시대가 바뀌어도 풍화 마모되지 않은 모국어 몇 모금을 그 자리에 고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정신의 기둥하나 세울 수 있다면...” 혼불은 일제 강점기 때 사매면 매안마을의 양반가를 지키려는 3대의 며느리들과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숨결과 손길 염원과 애증을 우리말의 아름다운 가락으로 생생하게 복원하여 형상화했다. 혼불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과 애련함 근엄함과 서러움 밝음과 어둠이 댓바람 소리와 함께 대실을 건너 노봉 마을과 사매면을 감싸고돈다. 1998년12월 11일 아직 써야 할 이야기를 남겨둔 채 향년 51세로 작가는 “아름다운 세상 잘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이제 호렙산 불꽃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느보산에 올라 그 조상들에게 떠났다. 그리고 한낱 소설가도 아직 써야 할 이야기를 남겨둔 채 향년 51세로 “아름다운 세상 잘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처럼 권순웅 목사도 혼을 불사르는 열정적인 호렙산 불꽃이 되어 그의 공약 3R로 총회를 개혁하고 총회를 다시 세우고 존중받는 총회로 만들고 모든 목사와 장로들의 애곡 속에 떠날 수 있기를 혼불처럼 소망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가로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는 동시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기 3:1-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마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 신명기 34:4-8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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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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