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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3_ 샤를마뉴
    Imperial Coronation of Charlemagne, by Friedrich Kaulbach, 1861 샤를마뉴 웬 겨울이 이리 봄날 같은지 모르겠다. 눈이 내리고 산등성이에 눈이 쌓이고 처마에 고드름이 달리는 풍경을 볼 수 없다. 먹고 사는 건 나아졌는데 환경은 나빠졌다. 이게 우리 인간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는다. 그 옛날 어렸을 적 한강이 꽝꽝 얼어 한남동에서 보광동까지 썰매를 지치며 왔다 갔다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이제 동화 속의 사건쯤으로 돼버리고 말았다. 새해가 되니 달라진 거라곤 달력의 연도를 알리는 숫자뿐이고 모든 게 그대로다. 사기 치는 사람은 계속 속이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연신 두리번거리며 도울 일을 찾는다. 햇빛이 따사해지면 그 열기에 자극받은 종달새는 긴 잠에서 깨어나 창공을 나르며 맑은소리를 바람에 날리겠지. 사는 날까지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고 견뎌야 살맛 나는 세상을 누릴 수 있겠지. 일흔다섯이 된 늙은 선교사 보니파키우스의 얼굴이 새삼 내 망막에 어른거린다. 보니파키우스는 프리질랜드인에 대한 자신의 첫 번째 선교 실패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습하고 막무가내로 억척스러운 프리질랜드인들한테 돌아갔다. 이번에 그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그것을 눈꼴이 시어 못 보는 야만인들이 노기충천하여 칼을 꼬나 쥐고 보니파키우스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밀어닥쳤다. 보니파키우스의 제자들이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나 늙은 선교사는 그들을 만류하며 말했다. 『싸우지 마시오.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아야 됩니다. 용기를 내시요.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을 겁내지 마시오.』 이방인들은 선교사와 제자들을 죄다 죽였다. 그리고 눈이 벌게 피 묻은 칼을 들고 재물을 찾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비치는 건 성경 사본들과 성물 나부랭이들뿐이었다. 중세란 게르만이 이동하는 5세기에서 동로마가 멸망하는 15세기 중엽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 걸출한 인물을 꼽는다면 신앙에 근거한 확신에 차 역사에 획 점을 크게 찍은 샤를마뉴를 빼놓을 수 없다. 샤를마뉴란 프랑스어로 발음된 이름이고 영어로 말하면 찰스 더 그레이트(Charles the Great) 찰스대제를 말한다. 그는 로마제국 이후 가장 큰 제국을 설립한 인물이다. 색슨족이라고 하는 북부 독일인들은 프랑크족의 왕 샤를마뉴를 통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신앙을 가졌다. 무력으로 전도하는 샤를마뉴 샤를마뉴는 26년간 색슨족과 싸움을 벌인 끝에 그의 신앙과 통치를 색슨족에게 먹히게 할 수가 있었다. 색슨족은 칼끝이 무서워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참된 본질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다행히 그런 전도 방법에 수긍한 그리스도인들도 더러 있었다. 색슨족이면서 샤를마뉴의 자문이 된 알쿠인(Alcuin)이라는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색슨족한테서 돈을 쥐어 짜내려고 드센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를 억지로 씌운다면 그들이 세례는 받아도 신앙이 그닥 튼튼하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선교사들은 전도자가 되어야지 약탈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Emperor Charlemagne, by Albrecht Dürer, 1511–1513 아주 다행스럽게도 칼을 앞세운 강압적인 전도 방법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보다 부드럽고 기독교적인 방법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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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9-13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2_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Saint Boniface by Cornelis Bloemaert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엄벙덤벙하는 새 한해의 끄트머리에 서게 됐다. 다가오는 새해를 마주하고 뒤돌아보면 속 쓰림이 가슴을 맴돈다. 지나온 길이 성에 안 차기 때문이다. 새해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안다미로 하는 삶의 길을 걸어야겠다. 우리 역사에서 정점에 서 있다가 역사의 장으로 평가가 옮겨지는 두 인물이 있다. 한 사람은 은퇴를 준비 중에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은퇴를 선언했다. 한 사람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앞장서 투쟁한 공로가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장군 출신 대통령으로 민주화의 기틀을 눈에 띠게 다진 공로가 있다. 묵은해를 보내며 두 사람의 공로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후계자 문제로 진통을 겪는 교회현실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귀감이다. Portrait Roi de france Clovis 게르만의 일족인 프랑크족은 본디 이교도였다. 프랑크족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나라를 세우게 된다. 프랑크족이 사람답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들의 왕 클로비스(Clovis) 치하에서였다. 클로비스는 기독교 신앙을 지닌 클로틸라 공주와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을 자기가 믿는 주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다. 클로비스는 들은 척도 않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투에서 패배의 위험에 빠졌다. 그때 그는 부르짖었다. 『내 마누라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시여 절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누구한테 이런 소리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도와주시어 제가 이기면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받을 것을 맹세합니다. 이제 당신께 기도드립니다. 부디 내 대적에게서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클로비스는 승리했다. 그는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세례를 받았다. 독일의 회심은 영국에서 온 한 선교사한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는 이름이 영어로는 위니프래드(Winifred)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보니파키우스라고 흔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현재 네덜란드에 해당하는 프리즐랜드인이라는 부족 속에 들어가 사역을 했다. 그러나 프리즐랜드인은 선교사를 쫓아냈다. 그는 라인강 훨씬 위쪽으로 올라가 선교사역을 해야만 했다. 독일인은 거대한 떡갈나무를 보탄(Wotan)이라고 부르며 신으로 받들었다. 보니파키우스는 그 나무를 베어 보탄이 전혀 신이 아님을 증명하겠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흰소리 뇌까리는 허튼수작에 신의 진노를 사 보니파키우스가 거꾸러지는 꼴을 보게 됐다고 수다들을 떨었다. 정작 선교사가 도끼를 들어 우람한 떡갈나무를 후려쳤을 때 갑작스럽게 엄청난 돌풍이 일어나 나무줄기를 네 토막으로 쪼갰다고 전설은 전한다. 보니파키우스는 네 동강 난 나무를 널빤지로 켜 판자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가르칠 요량으로 보니파키우스는 실제로 풀다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죽기 전에 그 수도원에서 4백 명에 달하는 수도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었다. Schloss Fulda‎ 보니파키우스는 이제 일흔다섯이 됐다. 대주교까지 된 그는 프리즐랜드인에 대한 첫 번째 선교 실패를 스스로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마인츠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그는 프리즐랜드로 돌아가 선교사역을 하다 살해당해 순교했다. 그는 평생 하나님 나라만을 전하다 갔다. 20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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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9-0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1_ 성 마르탱
    Louis-Anselme Longa, La charité de saint Martin 성 마르탱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신앙을 생각하면 장로였고 지역을 생각하면 선생이었고 아파트를 생각하면 회장이었다. 소문은 무성했다. 예상은 확실한 통계를 근거로 하고 있었는데 사람마다 말이 달랐고 공식적인 여론기관은 두리뭉실한 침묵으로 눙쳤다. 생게망게하는 중에 변화를 택해 귀중한 한 표를 찍었다. 포장 쳐진 뒤깐 같은 데서 기도까지 곁들였다. 마음 졸이며 브라운관 앞에 바싹 다가앉아 눈과 귀를 모았지만 상황은 기대를 빗나간 예상대로였다. 실로 오랜만에 국민의 뜻이 나름대로 반영된 선거였다. 꾀하는 것은 인간이 이러고저러고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다. 권세란 자고로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장로로 대통령이 된 분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그가 링컨처럼 억눌리고 소외받는 사람한테 혜택이 돌아가는 공의와 공평이 푸른 기와집에서 푸르른 강물처럼 흘러나오게 하고 남과 북이 합쳐지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도록 뜨겁게 기도해야겠다. 그를 이용해 어떤 기득권이나 편의를 늘이려고 할 때 콘스탄틴 치하에서 겪었던 기독교의 전철을 밟게 되고 말 것이다. 그에게 종교의 짐을 지우지 말고 공의의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지도자가 되길 간절히 빌어야겠다. 프랑스는 야만인들이 끼어들기 전에 개종 됐었다. 거개의 나라가 콘스탄틴 시대 무렵에 그리스도교국이 됐다. 프랑스의 개종을 마무리화 하는데 도움을 준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은 성 마르탱이었다. Monument to Saint Martin of Tours in Odolanów 군인이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닌 마르탱은 어느 날 거의 벌거벗은 거나 다름없는 한 사람을 만났다. 마르탱도 외투가 한 벌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외투를 칼로 두 토막 내 큰 쪽을 거지에게 건네줬다. 거지는 머리를 방아개비 마냥 연신 조아리며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며 감사를 표했다. 그날 밤 마르탱은 꿈을 꿨다. 그 꿈속에서 그는 외투를 잘라준 거지가 바로 그리스도이셨음을 알게 된다. 그 뒤 마르탱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군대를 떠나 수도사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주교가 되었다. 마르탱을 통해 많은 이교도들이 신앙을 얻었다. 죽은 후 마르탱은 공식적인 성자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민간인들은 마르탱의 뼈다귀도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마르탱의 유물이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옮기게 되면 일부 큰일 났다 싶은 거지들은 한사코 지방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혹시 난 병이 낫고 거지 신세를 면할까 해서 말이다. Tomb of Saint Martin 그러나 마르탱의 유물 덕을 보려는 거지들은 이번 선거에 나선 여느 후보들 마냥 쓴맛을 보았다. 때아닌 대통령선거에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나심을 기리는 성탄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 선거구호 대신 자선 남비를 채워주기를 바라는 댕그렁 소리가 거리 소음을 헤치고 있다. 교회마다 치렁치렁 등을 밝히고 있다. 아이들은 성탄절 맞이를 위한 준비에 교회를 밤마다 들락거린다. 교회에 톱밥 난로가 있던 시절 우리는 교회에 나가 연극을 보고 노래를 듣고 과자 봉다리를 받는 짜릿함을 만끽했었다. 이제는 보여주고 전하고 줄 때가 된 것 같다. 그리스도처럼... 20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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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8-30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0_ 앵글로색슨
    앵글로색슨 바람이 제법 맵다. 얼마 안 있으면 맵찬 바람이 귓바퀴를 할퀼 게다. 추위를 생각하면 따스한 곳에서 활동하시는 돌쇠선교사님의 텁텁한 모습이 둥실둥실 떠올라 웃음 짓게 한다. 거금 3억 원을 선뜻 내놓고 목쉬기 경주에 뛰어든 사람이 글쎄 여덟이나 된다. 좋아진 세상이다. 돈만 있음 아무나 대통령선거에 나설 수 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장군 출신은 하나도 없다. 세상 오래 버티고 볼 일이다. 그러면 볼거리를 심심찮게 먹거리마냥 구경할 수 있다. 오! 나의 하나님. 세상에 도대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식대로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부정이 있는 곳에는 파리 잡아먹은 두꺼비마냥 눈만 껍벅거리던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글쎄 그런 사람들이 부정이 없는 곳에는 쉬파리마냥 꼬여 왕왕댑니다. 이럴 때는 하나님. 국회의원 나리 된 수염 기른 교수 말마따나 이게 뭡니까? 하고 주님께 되물어도 되는 걸까요? 영국은 남부와 북부로 대별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북부는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남부는 기후가 온화한 평야 지대이다. 영국에는 본래 이베리아족이라고 하는 원주민이 둥지를 틀고 있었는데 유럽의 유목민인 켈트족이 밀려왔다. 원주민은 북부로 밀려났다. 켈트족은 다시 주전 55년에 로마 장군 시저(카이사르)의 침략을 받고 격렬한 사람들은 북부로 밀려나고 줏대 없는 사람들은 남부에 눌러앉아 로마의 라틴 민족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로마의 평화시대가 이어진다. 로마의 찬란한 문화가 영국에 넘쳐나게 된다. 달도 차면 기운다던가 태평세월 속에 로마제국의 기둥이 썩어들어갔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워진 로마 본국은 본토방위를 위해 해외 주둔군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이로 말미암아 북부로 밀려났던 사람들이 남부를 압박했다. 영국 주둔 로마군의 철수로 다급해진 남부의 켈트족은 바다 건너 색슨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색슨족이라 함은 독일의 작센지역에 살며 싸움을 일삼던 야만족을 일컫는다. 그 이웃에 앵글로족이 살았다. 어디 싸움질할 데 없나 하며 몸이 근질거리던 색슨족에게 싸움을 도와 달라 하니 마다할 리 없었다. 바다를 건너 싸움 나들이 나선 색슨족은 영국 남부에 도착해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바다 건너 섬 땅이 이렇게 좋다니. 얼마나 온화하고 싱그럽고 초목이 무성한지 그들은 다시 침침하고 습한 색슨 지역으로 돌아갈 마음이 싹 사라졌다. 마음이 돌변한 그들은 북부 지역의 스코틀랜드사람을 쳐부수는 게 아니라 칼 부리를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에게 들이댔다. 어처구니없는 처참한 살육전이 감행됐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색슨족의 이웃 앵글로 족도 이게 무슨 뭐 같은 경우냐며 서둘러 바다를 건너와 영국 남부를 공략하는 데 뛰어들었다. 힘이 없는 켈트족은 스코틀랜드, 에이레, 아일랜드 등으로 쫓겨났다. 이런 역사를 지니고 있는 영국인인지라 같은 국기 아래 있지만 서로 늘 으르렁거릴 수밖에 없다. 살기 좋은 영국 남부는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차지했다. 땅이란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모양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런 모양으로 흘러가고 교회의 역사는 그 흐름 속에다 십자가를 세운다. 2021-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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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8-23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9_ 영국과 천사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있는 19세기 모자이크 영국과 천사 쪽 곧은 오래된 길이 있다. 그 길을 걷노라면 고목을 만난다. 고목이 전하는 말 없는 소리는 그 어떤 말로도 흉내 낼 수가 없다. 장로는 뛰고 선생은 달리고 회장은 날아다닌다. 이번 성탄절에는 퀘퀘묵은 정치꾼들의 풀어진 모습을 볼 수 있을 모양이다. 한 사람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패자가 될 게다. 그날과 그 꼬락서니들이 눈에 선하다. 해 아래 무슨 새것이 있겠는가. 왜 사는 걸까? 그걸 물으며 사는 사람이 잘못된 것일까? 아님 그냥저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온전한 것일까? 도시 종잡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어쨌든 길이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란 더욱 그래야 될 게다. 교황 그레고리우스1세는 영국 남부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사람이다. 그가 영국에 관심을 갖게 된 전설이 있다. 어느 날 로마에 있는 왁자한 저자 거리에서 그레고리우스1세는 노예로 팔려고 내놓은 소년들을 보게 되었다. 교황이 짙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 소년들은 어떤 애들이지?』 『안글레스(Angles) 섬나라 애들입죠.』 이 대답에 영국 소년들을 한 번도 본적이 없던 그레고리우스는 엉뚱한 반응을 보였다. 안그레스(Angles:섬나라 사람)가 아니라 안젤스(angels:천사)겠지. 어쨌든 교황은 어거스틴을 영국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 선교사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히포의 어거스틴과 구별하기 위해 캔터베리의 어거스틴이라고 한다. 로마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영국 남부에서 활동을 한 반면에 스코틀랜드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은 북부에서 영국으로 내려가 사역을 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관습과 로마 관습 사이에 차이들이 생겨났다. 아드리엔 이센브란트가 그린 성 그레고리오의 미사 한 가지 차이는 수도사들의 머리 깎는 습관에서 드러났다. 제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당시의 수도사들은 율부린너 마냥 머리털을 면도해 싹 밀어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물이 귀한 사막이나 수행지에서 훨씬 편했고 머리를 감지 않아 생기는 불결함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면도하는 걸 체발이라고 한다. 이 습관에도 약간씩의 차이는 있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귀에서부터 깎아 성화에 나타나는 후광처럼 작은 머리 뭉치를 남겨 놓았다. 로마 수도사들은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머리털을 깎아 가시면류관처럼 귀 둘레에 작은 머리털 테를 남겨 놓았다. 부활절 날짜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있었다. 모든 교회가 부활절을 춘분 지난 첫 보름달이 뜬 후 첫 토요일에 지내야 한다는 니케아공의회에서 결정된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근거를 계산해내는 데는 차이가 있었다. 아일랜드인은 오래되고 오류가 많은 월력을 따랐다. 로마인은 날짜 계산에 있어서 보다 정확했다. 아일랜드인과 로마인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부활절을 같은 날 지내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생활습관과 생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분열과 싸움을 거듭해왔다. 이 문제는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는 그 진리가 평범한 상식이 되기 위해 우리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될 게다.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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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8-1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8_ 땅에 심은 십자가
    Icon of Saint Patrick, Christ the Saviour Church 땅에 심은 십자가 바람 한 점만 일어도 길 위에 노란 잎이 눈발처럼 내려앉는다. 낙엽이 일렁이는데 그걸 보는 마음이 이리도 감동을 받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런가. 예수그리스도를 이방인에게 전하려면 전하는 사람이 먼저 그걸 자세히 알아야 하는 게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아이들이 소리쳐 부르는 아일랜드로 달려가지 않고 먼저 프랑스로 갔다. 그곳의 수도원에 들어가 수년 동안 선교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배웠다. 공부를 마친 패트릭은 교황의 허가장을 받고 아일랜드로 떠났다. 한때 자신을 노예로 삼아 호되게 부렸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패트릭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는 전설 빼놓고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이런 이야기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어떤 왕이 패트릭에게 사람을 보내 귀한 청동 그릇을 전하게 했다. 시종이 돌아오자 왕이 수염을 툭툭 치며 물었다. 『그래 패트릭이 뭐라고 하드냐?』 『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고맙습니다 라고 라틴어로 말했습니다』 왕의 송충이 같은 눈썹이 찡끗했다. 『그래, 고작 그 말뿐이더냐? 그럼 다시 가서 그걸 돌려달라고 해라』 시종들이 뭐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요령 소리 요란하게 다녀왔다. 『그래 이번에는 패트릭이 뭐라 하더냐?』 왕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고맙습니다 라고 라틴어로 씨부리던데요.』 『뭐라고? 받아도 고맙다 뺏겨도 고맙다라고? 음 그럼 이번에는 그걸 돌려주면서 땅을 덧붙여 주도록 해라.』 이야기는 두 가지 점에서 사실이다. 하나는 패트릭이 라틴어를 말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에게 로마어를 가르쳤다는 점이다. 로마제국이 붕괴되던 바로 그때 교회는 로마에서 그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군대가 아일랜드에 발을 디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교회선교사들은 로마 관습을 전달했다. 후일 아일랜드의 학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파송되어 유럽인을 가르쳤다. 다른 하나는 왕이 패트릭에게 땅을 줬다는 사실이다. 미개인들의 모든 생활은 땅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큰 도시가 하나도 없어서다. 그들은 땅을 의지해 살았다. 그들이 교회에 감사를 나타내는 방식은 땅을 헌납하는 것이었다. 그 땅에다 교회는 십자가를 심고 가꾸었다. 추수하는 수도사를 나타내는 Q 문자 패트릭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옛날 돼지를 치며 노예 생활을 했던 산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산꼭대기에 앉아 하나님의 기묘하신 방법을 곰곰 생각했다. 하나님은 패트릭을 노예로 만드시어 이 아일랜드 백성을 알고 사랑하게 만드시고 예수의 이야기를 가지고 아일랜드인들에게 돌아오게 하셨다. 패트릭이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그는 자기보다 앞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했던 사람들의 영혼이 자기 주위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뜨거운 감동과 체험이었다. 그는 선배들을 뒤따라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바람이 싸하게 부는 산등성에 오도카니 앉아 있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아일랜드인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선교사들이 다른 지역들로 파송됐다. 한 톨의 패트릭이라는 밀알이 아일랜드를 복음의 황금 물결로 일렁이게 했다. 2021-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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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8-0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7_ 노예였던 선교사
    Saint Patrick sent to Ireland by the Pope; wall mosaic in St Mary's Cathedral, Kilkenny. 노예였던 선교사 로마제국에 물밀듯이 들어온 야만인들은 거개가 기독교화 되어 있었다. 그들이 정통 보수 니캐아 신앙을 따르지를 않고 아리우스주의를 따르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양 파를 갈랐던 사상은 대부분 잊혀졌지만 그 차이는 여전히 중요했다. 아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교황의 지도력을 도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타 야만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싸움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교에 군침을 흘리게 된 주요한 까닭도 그리스도교가 강력한 로마제국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쑥대머리에 누런 이빨로 이죽거리는 야만인들은 로마처럼 힘이 세지려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깜냥에 머리를 굴렸다. 그리스도교의 어떤 점들은 야만인들에겐 도시 이상하기만 했다. 그들은 죽기 살기로 싸움을 밤낮 일삼았기에 오른쪽 뺨을 얻어맞고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실천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야만인들의 영웅은 사도 베드로였다. 주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붙잡히셨을 때 베드로가 칼을 쑥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단칼에 베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좋은 결혼도 마다하고 세상을 떠나 사는 수도사들을 아무리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미친 것만 같았다. 이런 막돼먹은 사람들을 교회는 전도해야 했다. 켈트족은 북부 프랑스와 영국 섬들에 살던 사람들이다. 프랑스와 영국에 사는 켈트족은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개종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개종이 되질 않았다. 앵글로 색슨족은 켈트족을 웨일즈로 쫓아낸 새로운 야만족이었다. 그 당시 웨일즈족은 영국 섬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전도 대상이었다. 먼저 아일랜드가 복음화된 경우를 살펴보자.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은 성 패트릭(St Patrick)이다. 그는 아일랜드를 복음화 시키는 일에 누구보다도 많은 기여를 했다. 아일랜드인을 위해 그가 한 일은 악을 선으로 갚은 경우였다. 아일랜드인은 패트릭을 노예로 삼아 심하게 부려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주둔하던 로마군단들이 로마를 방어하기 위해 영국에서 철수해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힘의 공백이 영국에 생긴 그때 패트릭은 웨일즈 국경 근방에서 살고 있었다. 아일랜드인은 로마군이 없는 영국 해안을 싹슬이 하고 다니다가 패트릭을 생포해갔다. 노예가 된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탕자처럼 돼지를 치며 목숨을 연명했다. 패트릭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랐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사였다. 부모 슬하에서 편하게 지낼 때 그는 건성으로 교회에 들락거렸다. 어처구니없는 고난이 닥치자 그는 주님께 기도했다.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는 아일랜드 해변에서 개를 운반하는 화물선을 어렵사리 얻어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고향이 너무 그리워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집으로 되돌아갔다. 고향에서 행복에 겨워하며 지내던 어느 날 밤 그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아일랜드의 아이들이 나타나 지긋지긋한 아일랜드로 돌아와 그리스도를 가르쳐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마음이 움직인 그는 먼저 프랑스로 건너가 수도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노예로 살았던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가 되어 아일랜드로 갔다. 아일랜드인에게 전도한 패트릭 2021-08-0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8-0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6_ 수도사 생활
    Saint Benedict and the cup of poison 수도사 생활 나뭇잎에 감돌던 팽팽하고 짙은 푸르름은 짧아진 해 길이 마냥 맥이 풀렸다. 길가에는 스산함이 감돈다. 길을 걸으면 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선뜩해진다. 밝고 뜨겁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상크름하다. 이제 파리한 바위 사이에 붉은 단풍이 고운 자태를 실컷 뽐내겠지. 그러노라면 우리 인생도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 성숙한 알곡을 머금은 곡식이 되겠지. 수도사들은 완전한 침묵에 갇혀 식사를 했다. 조금 일찍 식사를 마친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고 책을 읽거나 명상에 잠겨야 했다. 식사 중에 수도사가 손이 닿지 않는 걸 집길 원한다면 벙어리 마냥 수화에 버금가는 손짓을 해야 했다. 예컨대 사과가 필요하면 주먹에 엄지를 세워 앞뒤로 흔든다. 우유가 필요하면 왼손 새끼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뜨리고 우유가 흐르는 모양으로 아래위로 흔든다. 매큼한 겨자가 필요하면 오른 주먹으로 코를 틀어쥐고 문지른다. 짭짤한 소금이 필요하면 오른손 엄지로 왼손 집게손가락을 툭툭 친다. 침묵 속에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면 낮잠을 좀 잔 뒤 다시 들판으로 일을 나갔다. 해가 떨어져 땅거미가 기지개를 펴려고 나들이를 시작하면 수도사들은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잠자리에 허리를 뉘였다. 잠잘 때 젊은 수도사들은 나이든 수도사들 사이사이에 끼여 잤다. 젊은이끼리 자다가 젊은 혈기에 드잡이하거나 싸움질하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젊다는 것은 아무래도 성마른 결기를 잘 돋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도사는 자기 소유라고는 도통 없었다. 그래서 침대와 담요 상의와 하의를 배급받았다. 수도사는 칼 한 자루, 바늘 한 개, 글쓰기 위한 철필 한 자루를 지녔다. 칼을 베개 밑에 둬서는 안됐다. 그것은 싸움이 일어났을 경우에 대비 한 것이었다. 칼부림도 있었던 모양이다. 음식은 평범했다. 어쩌다 한 번씩 고기를 먹긴 했지만 음식물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굶는 사람은 없었다. 요리와 식사 당번은 평수사들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다. 한 주일 부엌 담당자는 실수를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주말에는 맡았던 부엌을 깨끗이 치워놓았다. 손님에게는 특별한 식탁이 마련됐고 수도원장이 함께 식사했다.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아버지였다. 수도원장을 나타내는 애버트(abbot)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람어 압바(abba)에서 왔다. 수도원 규칙은 수도원장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도원장은 걱정해서도 안 되고 염려해서도 안 된다. 또한, 그는 너무 요구가 많거나 고집이 세거나 질투심이 많거나 의심이 많아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을 것이다.” 수도사들은 모든 일에 수도원장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장은 독단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아주 어린 사람일지라도 수도사들과 의논을 해야 했다. 모든 수도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서로에게 고백해야 했다. 수도원이 은신처 역할을 위해 섬이나 산꼭대기에 세워졌던 것이 점차 야만인들이 사는 곳에 세워졌다. 수도사들이 그들에게 땅을 개간하고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한, 수도사들은 어린애들을 맡아 가르쳤고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이라 책들을 베꼈다. Mount St. Benedict monastery, St. Augustine, Trinidad. 2021-07-13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7-13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5_ 수도사의 일과
    수도사의 일과 이제 어느 길이랄 것도 없이 노상 막힌다. 신호등이 멀쩡하게 눈을 껌벅이는데도 네거리가 곧잘 뒤엉키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우회전한다. 신호등 하나를 받고 나면 좌회전을 받아야 될 사거리가 기다린다. 여기만 넘어서면 다 온 셈이다. 왼쪽 화살표가 나왔다. 골프장 근처의 어수선함만 지나치면 총회회관이다. 차를 주차장에 대놓고 4층까지 계단을 뛰어오른다. 자리에 앉는다. 기도한다. 마주치는 직원과 아침 인사를 건네며 예배실에 들어선다. 묵상에 잠긴다.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부탁드린다. 그리고 그분의 나직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본다. 성경을 몇 장 본다. 아홉 시 예배시간에 맞춰 직원들이 회의실을 메운다. 찬송을 부른다. 짤막한 설교 말씀을 듣는다. 그날 담당자가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친다. 이제 총회의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재편된 새로운 서방세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도원 제도를 바꾼 인물은 성 베네딕투스였다. 그는 이태리에 살았다. 야만인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휘젓고 다닐 때 베네딕투스는 깎아지른 산꼭대기 절벽에다 수도원을 건립해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했다. 그곳을 몬테카시노라고 한다. 베네딕투스 수도규칙에도 진부한 조항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수도사는 결혼해서는 안 되고 가난해야 되고 절대 복종해야 된다는 조항이 그랬다. 새로운 규칙은 수도사는 수도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은수사들이 유랑자마냥 방랑함으로써 심심치 않게 골치를 썩였다. 성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특별한 허락을 받지 않고는 수도원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런 연유로 수도원은 생활에 필요한 일체의 것을 제공해주어야 했다. 수도원에는 들과 강, 우물, 빵집, 부엌 등이 있어야 했다. 수도사들은 농사를 짓고 나무를 베고 요리를 하고 음식 나르는 등의 노동을 직접 담당해야 했다. 하루를 쪼개서 혼자 할 수 있는 손으로 하는 일, 기도, 명상을 하고 여럿이서는 찬양과 독서, 연구, 식사, 수면을 행했다. 기상을 알리는 종은 아침 두 시에 댕그렁거렸다. 그런데 이게 그닥 무리하지 않았던 것은 취침은 저녁 여섯 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의 구분은 계절에 따라 변했다. 일과표가 이렇다. 아침 2시에서 4시까지 기도 아침 4시에서 4시 15분까지 명상 아침 4시 15분에서 6시까지 기도 아침 6시에서 9시까지 연구 아침 9시에서 12시까지 들판 노동 오후 3시 저녁 식사 오후 3시를 noon이라고 했다. 이 단어는 제9시를 의미하는 라틴어 nona에서 유래됐다. 오전 6시부터 헤아려 보면 오후 3시가 된다. 수도사들은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제9시인 noon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수도사들은 아무리 뱃구레 쪼르륵 아우성을 쳐도 수도규칙을 바꾼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규칙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시간을 올려 땡겼다. 다시 말해 오후 3시인 noon을 12시로 올려 잡은 것이다. 바로 그게 오늘날 noon이 12시가 된 까닭이다. 만사가 먹자고 하는 노릇이니 수도사들인들 먹기 위해 머리를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2021-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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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7-05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4_ 교황의 씀씀이
    Jerome and Gregory 성 예로니모(왼쪽)와 성 대 그레고리오(오른쪽) 교황의 씀씀이 인플레에 좋은 점이 있다면 돈 쓰는 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네 세종대왕이나 이율곡 선생이 힘을 엄청 발휘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묘하게도 공산주의 나라들인 옛 소련과 중공이다. 어느 목사 한 분이 옛 소련 선교사로 파송되어 모스크바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고려인 교수에게서 요긴한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를 인사치레로만 때우지 않고 우리네 돈 30만 원에 해당하는 미국 돈을 건네 주었는데 우리에게는 별 크게 생각되지 않는 그 돈의 액수가 소련에서 그 교수로 하여금 입이 함박 만큼 벌어지게 한 모양이다. 까닭인즉슨 그 액수가 소련에서 그 교수의 일 년 치 봉급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돈의 힘은 묘해서 부자가 하는 농담은 모든 사람이 다 배꼽을 쥐게 한다고 한다. 러시아에 가 있는 한국 선교사들의 주위에는 이런저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이 꾀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국인 선교사들이 웃기는 말을 하면 러시아에 사는 사람들도 덩달아 낄낄거릴 게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교회를 위해 돈을 쓸 때도 있었다. 세례받을 때 입는 세례 복을 마련해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보내주었다. 시내 산에서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수도사들에게는 담요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이집트에는 예배당을 지을 때 요긴하게 쓰라고 통나무를 보내주었다. 이집트에 보낸 통나무가 너무 짧다는 보고서가 교황청에 접수됐다. 교황은 양미간을 좁히며 펜을 들어 답장을 보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통나무를 배 길이에다 맞추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요즈막에는 긴 배가 잘 없군요. 긴 배가 항해를 하게 되면 그때 다시 기럭지가 긴 통나무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집트 교인들은 하는 수 없이 교황이 보내준 키 작은 통나무로 서까래도 짧고 기둥도 낮은 교회를 지어야 했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가끔 기분 내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선물을 내렸다. 그는 자상하게 편지까지 곁들였다. 『오리와 오리 새끼를 당신한테 보냅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날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옛날에는 정부가 행했던 종류의 일을 위해서도 돈을 썼다. 옛날에는 로마 정부가 로마 시민들의 식량을 공급해줬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교황이 밀 경작지와 화물 수송 선박들을 소유했다. 로마인이 야만인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도 속량 금을 교황이 지불했다. 로마에서 돈을 넉넉하게 가진 사람은 오직 교황뿐이었다. 교황은 야만인 롬바르드족하고도 조약을 맺곤 했다.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교황은 이태리 반도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교황은 이런 과업들을 스스로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교황이 하고 싶어 안달이 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마땅히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필요성을 느꼈고 그런 일을 해결하기 위해 간여했다. 교황은 그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됐다. 그래서 그는 주변의 여러 지방들,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로마 황제, 그리고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지의 야만 왕국들하고 교제를 나누며 싫든 좋든 정치를 논해야 했다. 2021-06-1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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