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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희와 김태현의 성막과 건축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물건은 사용되는(be used) 것이고, 사람은 사랑받는(be loved) 존재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선 사람이 사용되고, 물건이 사랑을 받는다. 그 반대가 성막과 건축의 디자이너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와 총괄대표 김태현 건축가의 관계다. 건축가(Architect)의 영어 어원은 '계획과 과제를 도안하고 지도하는 사람'(a person who designs and guides a plan, project, etc.)이다. 실제로 고대 건축가들은 '건축'일만 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지며 지폐에 자국의 건축가를 새긴 나라도 많다. 사실상 고대에는 거의 모든 왕이 통치자이자 동시에 건축가였다. 자신의 업적과 신에 대한 찬양, 자신의 예술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건축을 이용하였다. 물론 이런 왕들 중에 대중을 위한 건축을 한 왕들도 있다. 성막은 길이가 약 45.6m(100규빗), 폭이 약 22.8m(50규빗)인 뜰 가운데 세워졌고 뜰 사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청동으로 만든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 27:9-19). 뜰(마당)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이 있었고(출 27:1-8), 제사장들이 제사를 위하여 자기 몸과 제물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뜰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막의 성소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다(출 26:15-30).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여 있었고(출 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 털 휘장이(출 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 들인 숫양 가죽이(출 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 26:14)이 덮인 4중 지붕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 병상, 휘장 왼편에 금 등대, 그리고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 단이 놓여 있었다(출 25장). 또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직 언약궤만 있었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그리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릴 때 들어갔지만(출 27:21; 30:7; 24:3,8)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갔다 (레 16:1-34, 히 9:7).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예물과 기구가 놓여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언약궤(법궤, 증거궤)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장소는 단지 휘장 하나로만 가려져 있을 뿐인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은 둘로 찢겨 졌다.(마 27:51, 막 15:38) 따라서 이제는 제사장과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누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히 10:19-22). 이 사건은 성도들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2023년 11월 21일 11:00 아차산로 345 tBD 사무실.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 총괄대표, 김태현(콜롬비아 건축대학원 졸업) 기독언론인협회(회장 황규학) 회원 고정양, 김영배, 김효정, 소재열 간의 신앙과 교회 건축에 대한 대담이 이루어졌다. 김영배: 서정희 씨는 전공을 안 하셨는데 건축에 대해 많이 아시는 것 같은데요. 황규학: (총괄대표 김태현) 옆에 따라 다니다 보니까. (일동 웃음) 서정희: (손사래를 치며) No, No. 정보를 잘 아시고 말하세요. 김효정: 허위 보도. 허위 보도. (일동 웃음) 서정희: 저는 젊었을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아서 집안에서 많은 일들을 했잖아요. 김태현: 공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서정희: 그렇죠. 공간 디자인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저는 그 기초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믿고 있습니다. 김영배: 그 기초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죠? 서정희: (1962년생) 1981년 19살 때 주님을 믿고 지금까지 저는 예화를 들 때 누구한테 얘기를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2-6)을 꼭 예로 들어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 건축을 맡기잖아요. 성소(聖所, Sanctuary)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處所)'다.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사함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외소(外所)와 내소(內所)로 분리된 구조였고 최초의 성소는 이동이 가능한 천막 형태였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불렸다. 성소를 지을 때 실을 꼬아서 만든 천막으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장막(帳幕)이나 성막(聖幕)이라고 했다. 서정희 씨가 말을 이었다. 서정희: 그 성막을 그에게 맡긴 이유가 딱 하나예요. 많은 사람에게 성막 짓는 이야기를 해봐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령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감동 때문에 여러 가지 일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고 출애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실 짜는 일 가구 짓는 일 모든 것들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께서 임했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들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제게 임해서 남들보다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다음에 성막을 보지 않아도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것처럼 우리 건축가 선생님들이 하지 못 하는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셨고 계시의 영을 부어주셨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영도 주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랜 세월 살림하면서 훈련을 했더니 그 열매로 국제대학원에서 초빙교수로 공간디자인을 3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받았습니다. 저도 외부로 다니면서 강사를 했었는데 결국 정교수가 될 정도로 주님이 인도해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배워서 한 것보다 더 많은 일곱 권의 책을 냈는데 다 집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도 처음 만들었고 무크 형태의 책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고, 그리고 글을 써도 자서전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다 집 안에서 썼고 묵상도 집 안에서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은 우리의 가정 교회가 점점 확대되어 작은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작은 것을 귀히 여기고 그 작은 것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 담겨진다면 크든 작든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저는 같다고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도했던 것들이 꾸준한 훈련과 그 공교함과 정교함이 결국은 건축팀을 만나서 더 성숙 되고 확대된 것 같아요. 그래서 감히 제가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영광을 누린 거죠. 김태현 대표님이 저를 써주신 거죠. (웃으며) 감사하게 된 거죠. 소재열: 궁금한 게 있는데 저는 항상 실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서정희: 저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우리가 정말 묵직하게... 주님은 간사함을 싫어하시잖아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 48) 말씀하시잖아요. 간사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말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그런 자세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실익이 생기지 않을까요. 황규학: 신앙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네요. 서정희: 내가 이 건으로 당장 이익이 없어도 그러나 결국에는... 소재열: 믿음이 좋은 분들하고 대화하면 제가 힘들어하거든요. 그러나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지되기 위해서는 뭔가 이익이 창출되어야 하거든요. 서정희: 그렇지 않으면 엄청 고달프죠. 김태현: 건축 디자인 회사가 베이직(기본)을 잘 고수하면 큰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벌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저희는 이 건축 디자인 공동체를 만들었을 때 돈을 버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기본에 충실하고 인내하면서 디자인을 해나가면서 우리(회사) 식구들이 먹고 살면 돼요. 황규학: 철학이 분명하네. 서정희: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많고 하나님이 보고를 열으시면... 김태현: 이걸 사업으로 일으키고 하는 문제보다 저희는 신앙으로 멀리 보고... 소재열: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죠. 서정희: 주님이 보고를 열으셔야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황규학: 소 박사가 보고 배워야 돼요. 소재열: 그러니까 나머지는 하나님 주신다니까. 그러나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김태현: 부끄러운 과거지만 소위 명예와 돈 이런 걸 건축 디자인의 하나님 주시는 달란트로 여기고 그것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던 세월이 많이 있었어요. 선배님들 앞에서 죄송한 말씀인데 제가 부끄러운 과거를 지나고요. 느낀 것이 많이 있어요. 서정희: (웃으며) 깨졌다는 얘기에요. 김태현: 그걸 쫓아 올라가다가 상당히 어느 정도까지 접근을 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한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유로 그렇게 됐어요. 해외 일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주로 일했던 나라들이 러시아 연방 우즈베키스탄, 카지스탄 전쟁 나기 전 우크라이나, 몽골, 이런 러시아 언어를 쓰는 나라들, 러사아를 큰형님으로 여기는 나라들, 중앙아시아를 포함해서 최근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통령 관련 프로젝트를 했었어요. 새로운 정부 출범과 동시에 건설부에 자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해나가면서 그때 당시 명예와 돈을 하나님 주신 달란트를 이용해서 추구를 했어요. 그렇게 여러 일을 추진하다 자금력이 모자라 중단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중국과 터키 정부가 들어오게 됐어요. 그 두 정부가 들어오면 프로젝트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기들 자원과 인력이 전부 들어와요. 그렇게 되니까 제가 했던 일이 중국과 터키 기업들이 들어와서 다 넘어가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저랑 멀어지게 되죠. 그렇게 되면서 2, 3년 어렵게 되죠. 싱가폴에 본사가 있고 거의 100명 정도 직원이 있었는데 다 손을 놓게 됩니다. 그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일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tBD를 기점으로 작지만 성실하게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황규학: 건축과 다른 문제인데 두 사람이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서정희: 이 문제는 30년 전으로 돌아가야 돼요. 우리 친정하고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았어요. 그런 거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소재열: 교회를 상대로 일을 하시면 아까 말한 것처럼 돈이 개입되잖아요. 시험 많이 듭니다. 감당하셔야 될 겁니다. 서정희: 그런데 우리는 지금 꼭 교회만 하는 건 아니예요. 교회는 저도 개인적으로 겪어봤는데 경력이 40년이니 안 겪어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저희에게 주신 것들이 다른 거예요. 저는 어제도 묵상하면서 '주님 저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들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제가 흘려보내야 될 것들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으로 저를 다시 영화롭게 해주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모든 기준을 세상으로 삼으면 저는 시험 들어서 하루도 못 살아요. 그러나 주님과 저와의 교제 가운데서만 머물면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사단이 밀 까부르듯 우리를 까부를 것입니다(눅 22:31-32).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전신갑주를 입고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들어서지도 말았어야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무장하고 나가듯 영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tBD를 세우셨을 때는 주님께서 믿고 맡기실 일들이 있을 거고, 보내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맡겨주시는 기업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저를 유방암에서 다시 살리셨다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믿습니다. 또 주님 앞에 갈 때는 어떤 말들을 해야 될까, 생각한다면 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런 마음과 각오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시고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누가 물 주고 자라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시는 거잖아요. 내가 감히 어떻게 합니까. 주님 그렇지 않습니까.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Tadao Ando, 1941년 9월 13일~ )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안도는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는데, 건축가가 되기 전에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로 일했고, 건축에 대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969년에 그는 회사를 설립했고(firm Tadao Ando Architects & Associates), 1995년에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상금 십만 달러를 고베 지진 고아들에게 기부하였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그의 건축물 속의 '물'은 얕고 조용하며 잔잔하다. 또한, 건축물과 매우 인접하여 하나로써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함과 경건함을 준다. 자연과의 조화와 함께 큰 특징으로 보여지는 것은 건축작품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건축교육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오사카 '촌놈' 안도는 건축 여행을 하면서 롱샹과 라투레트를 오랜동안 혼자 공부했다. 스위스 예술고등학교에서 배운 그림이 건축교육의 전부였던 시골뜨기 코르뷔지에는 안도의 롤모델이자 영웅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光の教会, 히카리노쿄카이)가 있는데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정식 명칭은 '이바라키 가스가오카(茨木春日丘)'로 1989년 준공되었다. 예배당, 홀, 목사관은 모두 안도 다다오 씨의 설계다. 보통의 경우라면 십자가가 걸려있는 예배당 대신에 정면 벽면에 십자 모양의 틈을 만들어 놓아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아름다운 십자가가 나타나도록 설계됐다.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 가로와 세로로 만들어진 틈,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와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십자가가 나타난다. 예배당의 바닥과 의자 등은 빛의 십자가가 자아내는 빛을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심플한 구조인 만큼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설계, 간소하면서 작은 예배당이면서도 명암의 조절로 차분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공간이다. 끌려서 안으로 들어가 음미하기 시작하면 계속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떠나기가 어려워진다.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모든 걸작들이 그렇듯이... 서정희 씨는 tBD 건축사무소 대표이며 국제대학교 산업디자인 초빙교수, 영동대학교 협력 교수이다. 김태현 씨는 우즈베키스탄 건설부 수석자문이면서 콜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이다. 서정희 씨는 첫 프로젝트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에 소속된 캠퍼스 복음화와 온 가족을 위한 전략적인 교회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대전의 오메가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tBD 대표 서정희 씨는 "시골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그 공간에 맞게 인테리어나 교회 건축을 할 수 있다"라고 했다. tBD 총괄대표 김태현 씨는 "하나님 말씀, 십자가로 이루어진 예배당, 자연, 미래에 대한 공간을 만드는 경건성과 실용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은 ‘바람이 불어’에서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라고 자신의 괴로움을 성찰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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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 함신익의 전도 심포니
    함신익(咸信益, 1957년 10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관현악단 지휘자이다. 현재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이며 그 외 국내에서는 대전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에서 지휘봉을 잡았었다. 그는 1995년 한국인 최초로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학과 교수가 됐다. 2010년 10월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상임 지휘자 함신익과 KBS 교향악단의 연주는 New York Times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연주”라는 평론을 받았다. 영국의 The Financial Times는 함신익과 대전시향의 카네기홀 연주를 "확실한 자부심과 확실한 헌신, 열정과 뛰어난 정교함이 어울린 음악"으로 평가하였다.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으로도 불리는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은 합동 교단의 중진 함성익 목사의 친동생이다. 심포니 송(Symphony S.O.N.G; Symphony Orchestra for the Next Generation) 오케스트라는 2014년 8월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창단연주회를 개최하였다. 그 오케스트라가 2023년 10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인근 창성교회(담임 함성익 목사)에서 연주를 했다. 함성익 목사가 성경 누가복음 15:11-24 제목 '돌아온 둘째 아들' 설교하고 축도했다. 이어진 창성교회 행사는 삼양교회 설립자 성자의 풍모를 지닌 함영진 목사의 둘째 아들로 세계적 지휘자가 된 함신익의 '심포니 송' 연주가 이어졌다. 그와 함께 피날레로 '새 생명 축제 VIP 초청 주일'을 위해 창성찬양대도 피터슨의 '아름답다 저 동산'을 함신익 지휘로 찬양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의 모델로도 알려진 바가 있는 마에스트로 함신익은 그의 친형 함성익 목사가 젊은 찬양대 지휘자 시절 제일 좋아하는 '아름답다 저 동산'으로 각종 경연대회에 참여해 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함신익은 예일대 지휘과 교수로 20년 넘게 교육현장에서 우수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배출시켰고 그의 지휘 문하생들은 세계 주요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오케스트라를 구축하기 위해 함신익은 현대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오케스트라에 기품 있는 새로운 음악을 전달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매년 상하이 심포니와의 현대음악제 개막연주를 지휘하고 있으며 우루과이 국립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보편적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음악은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 함토벤이라는 평을 받는 함신익이 연주 홀이 아닌 교회 '새 생명 축제 VIP 초청 주일' 연주회에서 지휘하는 전도 심포니 음악을 듣고 지휘 몸짓을 보니 감흥이 달랐다. 그는 선율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선율을 발전시켜 나가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능력을 발휘한 지휘자 같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0-24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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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1
  • 이승만은 누구인가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에 탔다. 첫 번째 정차 역은 전 총신재단이사장 김기철 목사가 목회하는 정읍.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정부 세우자’고 연설한 정읍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 훌륭한 역사적 용단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또래의 목사일지라도 우파와 좌파가 만난다면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이 오갈 수 있을 것 같다. “6·25 터지니깐 국민들 보고 안심하라 방송해놓고 다리 끊고 도망쳤는데 뭘 잘해?” “전쟁 나면 당연히 ‘우리 군이 잘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방송하지 ‘큰일 났으니 도망가세요’라고 방송하냐? 갑자기 밀고 내려오니깐 반복해서 틀어주던 라디오도 못 끄고 화급히 후퇴한 거지. 한강 철교도 이승만이 끊으라고 한 게 아니고 군에서 안 되겠다 싶어 끊은 거야.” “이승만은 반민특위(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를 해산시킨 친일파잖아.” “그때는 국민 80%가 글도 못 읽고, 제주 4·3 여순 사건 터져서 혼란스러운데 정치인들끼리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였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같이 했다고 관료들 다 내쳐버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이승만은 일본이 반대해도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주장하면서 대한해협에서 고기 잡던 일본 어선들 막 잡아들였어. 이래도 이승만이 친일파냐? 네 말대로면 이승만보다 친일파 훨씬 많이 기용한 김일성도 친일파겠다.” “미국 꼭두각시 노릇 하느라 민족이 분열되고 전쟁까지 했는데?” “남한에서 선거도 하기 전에 김일성은 이미 소련 지원 받아서 군대 만들고 정부 만든 상태였어. 이런 상황에서 김구랑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봐야 협상이 되겠냐? 난 전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조그만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전혀 순종적이지 않았어. 오히려 빨리 휴전하고 싶은 미국이 이승만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권 세우려 했을 정도지. 굴하지 않고 직선제 개헌해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불리하게 진행되는 휴전 협상을 뒤집으려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 끝 전술을 썼어. 그렇게 미국한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 대한민국 침범은 곧 최강대국 미국 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라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 문제를 해결해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거야. 우크라이나 봐. 미군이 주둔했다면 감히 러시아가 쳐들어오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를 전광훈처럼 옹호하냐?” “뜬금없이 전광훈은 왜 나오냐. 이승만은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당선 확정이었어.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사람들이 장난친 거지. 독재자는 말이야, 국민의 재산을 국유화해놓고 제 맘대로 해. 김일성이 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바로 그거야. 맘대로 매매·상속도 못 하는데 뭔 분배? 독재 강화 수단이지. 이승만은 유상 몰수, 유상 분배해서 국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늘려줬어.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줘서 6·25 때 용감히 싸울 원동력이 된 거야. 그리고, 세상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 소강석이 칭송하는 등소평이 천안문에서 한 것처럼 탱크로 밀어버리지. 이승만은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에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어. 게다가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부족한 재정에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 이승만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을까.” “그래도 초대 대통령은 목숨 바쳐 무장 투쟁한 김구였어야 해!” “당신은 왜 잘사는 대한민국에서 문재인처럼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건국에 몸 바친 이승만은 싫어하고 김구만 좋아하냐? 국제정세를 잘 알고 활용한 이승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김씨 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었을 거야. 이승만이 원자력을 육성했으니깐 이렇게 싼값에 고속열차도 탈 수 있는 거지. 물론 이승만이 잘못한 점도 있었지만 넌 구구단도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미적분 할 수 있냐? 미국도 1965년에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한테 처음 투표권 줬어. 식민지를 막 벗어나서 모든 게 취약했던 나라의 첫 지도자가 생존 문제를 해결했으면 잘한 거 아니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게 ‘정읍 선언’이야. 이승만이 옳았다고!” “와, 너 고등학생 때는 안 그랬을 것 아니야. 이해찬과 달리 같은 용고 나온 놈이 어쩌다 극우로 변해버렸냐.” “이승만 존경하면 다 극우냐? 3대 대통령 선거 때 보면 오히려 대구가 좌익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전라남도가 이승만을 72% 지지했어. 전라도가 우파의 본산이었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달리 무능하고 비굴한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돼 1899년 1월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1875년 전주이씨 몰락, 양반의 ‘6대 독자’로 출생하여 아버지 종교인 유교와 어머니 종교인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을 위해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를 배워 출세할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미감리회 선교부가 설립한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영어공부에 몰두하였고 선교사와 토착 전도자들이 전하는 기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구 국가의 정치적 기본 개념인 ‘자유와 평등’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관여, 급진적 정치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일로 1899년 수구파에 의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혔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가 기억나면서 기도를 하였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절대자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종교적 개종을 하였다. 그런 이승만이 1904년 2월 7일 수감 된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12일 뒤인 2월 19일부터 넉 달 동안 비장한 심정으로 '독립정신'(獨立精神, The Spirit of Independence)을 저술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및 대한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저술하였으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서구 열강이 기독교에 기초하여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것을 서술하면서 한반도에 기독교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등 이상 사람이나 한문깨나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대한의 장래가 맨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승만은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순 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집필 중 이승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읽혔으며 탈고한 1904년에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경 때문에 대한제국 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이후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서문에서 그는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함은 외국이 침범함을 두려워 함도 아니요, 정부에서 보호하지 못함을 염려함도 아니요,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구성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0장에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11~25장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를, 26장부터는 국제정세를 기록했다. 주요 내용은 외국의 침범이나 정부의 무능보다 더 큰 문제는 백성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 곧 인민의 심성에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다. 인민이 독립심을 갖기 위해선 스스로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강렬한 믿음 위에서만 백성은 권리를 가진 근대적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은 모든 것의 근본을 기독교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근대 구미 문명의 기초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몽된 개인(enlightened individual)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된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고선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세워질 수 없음을 내다보았다. 조선은 한때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0~40%를 넘어섰던 신분제 사회였다.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기층 민중은 신분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노예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이 준 인권을 갖고 태어난 자유인임을 자각해야만 국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익히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면의 절대자 하나님과 직면하고 스스로 독립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전향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사에 머물 수 없다. 이따금 한 사람의 온전한 전향은 역사적 큰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1945년 분단 이래 북한의 지도부는 공산주의 명령경제, 폐쇄적인 고립주의, 반민주적 집단주의, 일인 지배 수령유일주의, 공격적 종족주의를 채택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난한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으로 남아 있다. 정반대로 남한의 지도부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개방적 시장 경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창의적 개인주의, 경쟁적 다원주의, 범인류적 국제 연대를 추구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 10위권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해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을 만든 악마적 이념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건전한 국가 철학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모택동이라는 독재자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좀비 떼처럼 날뛰었다. 마찬가지로 1980-90년대 대한민국에도 김일성의 홍위병을 자처했던 주사파가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과 한국의 주사파는 과연 왜 그토록 어리석은 개인숭배의 노예가 되고 말았나? 독립정신을 버린 채 좀비 정신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립심을 잃은 개인은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전체주의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청년 이승만이 7년 감옥살이에서 깨달은 진리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했던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 새로 책방을 열은 모양이다. 그 책방 맨 앞 진열대에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놓아두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롬 8:31-32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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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7
  • 하나님 외교관 손문수 목사
    19세기 프랑스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는 외교적 수사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외교관의 '그렇다'라는 말은 '고려해 본다'라는 의미이고 '고려해 보겠다'라고 말하는 건 '안 된다'는 의미다. ‘기도해 보겠습니다’도 그런 의미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안 된다'고 말하는 자는 외교관이 아니다. 그렇듯 목회에 있어서도 손문수 목사의 경우처럼 외교적 수사의 효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손문수 목사의 행동 지침은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저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는 외교관을 닮았다.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원장 장혜경 박사) 총동문회 회장연임 감사예배 및 정기총회가 2023년 6월 12일 오전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 대예배실에서 개최되어 손문수 목사(동탄순복음교회)가 취임감사예배를 드리고 정기총회를 가졌다. 이날 감사예배는 이평수 목사(총무, 다산충만한교회)의 사회로 드렸다. 편정자 목사(부회장, 주신은혜교회)의 대표기도 후 주미 목사(서기)가 마 28:18-20 성경을 봉독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손문수 목사(회장, 동탄순복음교회)가 ‘지상명령’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목회자들이 실천해야 할 유일한 목회방법이 지상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가장 중요한 핵심내용을 알아야합니다. 먼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것으로 그 방법은 눅 24:49(능력), 행 1:4-5, 8(성령), 2:1-4 말씀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이 생겨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게하고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을 한 말씀도 빼지 않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환영사는 장혜경 박사(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 원장), 박영숙 목사(순복음삼마교회)와 연충복 목사(증경회장, 금촌순복음교회)가 축사하고 주술람미 목사(증경회장)와 윤석원 목사(1기 회장)가 격려사를 하고 손문수 목사(회장, 동탄순복음교회)가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원장 장헤경 박사)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평수 목사(총무, 다산충만한교회)가 광고 후 헌금축복 및 축도로 감사예배를 마쳤다. 정기총회는 손문수 회장의 진행으로 서기 주미 목사가 회원 점검, 부회장 문명자 목사가 대표기도, 서기 주미 목사가 서기보고, 재무 조순옥 목사가 재무보고, 회계 조미자 목사가 회계보고, 감사 정길영 목사가 감사보고, 회장 손문수 목사가 안건처리, 총무 이평수 목사가 광고 후 하나님 외교관 손문수 목사의 폐회선언으로 정기총회를 마쳤다. 예술계 거장들의 운명에서 아주 큰 공통점은 그 예술의 스펙트럼이 평범한 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넓고 실체가 단단하다는 것이다. 반면 정작 예술가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조바심을 내며 일평생을 예술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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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5
  • 김종철 목사 총회 임원 추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가 2년여 공들여 조각한 "다윗" 상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작업을 의뢰한 피렌체 시장이 방문해 코가 조금 큰 것 같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작품은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데다 좌대 위에 올려질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아래에서 조각을 올려다보게 되면 원근감으로 인해 얼굴이 작게 보일 것을 계산해 일부러 조금 크게 만든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원리를 설명하는 대신 조각대 위에 올라가서 코를 손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는지 한번 봐 달라고 묻자, 시장은 한결 낫다고 말하고 자리를 떠난다. 미켈란젤로는 사실 조각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대리석 가루를 가지고 올라가서 조금씩 뿌리면서 작업하는 척 연기를 했을 뿐이다. 시장과 논쟁을 벌여봐야 그가 한낱 예술가의 말에 자신의 주장을 굽힐 리도 없고 또한 설사 그랬다고 한들 미켈란젤로에게는 아무 득이 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예술가 한 명이 한 도시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년 12월 7일 ~ 1680년 11월 28일)는 오늘날 로마의 모습을 거의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 장대한 교회와 회화, 조각과 분수가 있는 로마는 도시 공간 전체가 극적이어서 여행자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우상숭배의 연극에 동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베르니니의 "다윗"(1624) 상과 120년 전의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1504)을 비교해 보자.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을 하기 직전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투석기와 돌을 어깨너머로 멘 채 형형한 눈으로 적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이처럼 정적(靜的)인 모습을 표현한 데 비해 베르니니는 몸을 틀어 골리앗을 향해 투석기로 돌을 던지는 역동적 장면을 표현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다윗의 표정은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의 투혼(fighting spirit)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으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만들었다고 한다. 조각이 멈추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작가 베르니니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담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베르니니는 바로크 예술의 선두에 서 있었다. 바로크 예술은 이 시대 가톨릭 종교개혁의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한다.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의 기독교는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로 양분되었다. 가톨릭으로서는 신교의 충격으로 한 세기 정도 휘청거렸다. 그러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체의 개혁(예전에는 ‘반동 종교개혁’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가톨릭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주로 쓴다)을 추진하여 교리와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 결과 17세기에 들어서서 자신감을 회복한 가톨릭계의 열망이 바로크 예술로 나타났다. 신교라는 ‘이단’이 패배하고 성상 숭배에 쪄든 가톨릭 신앙이 승리했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이를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확인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새로 정비한 로마의 성당들이 그것이 우상숭배인 줄도 모르고 조각이나 회화, 장식예술을 총동원하여 놀라운 정도로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그런 이유다. 그 가운데 최정상의 활약을 선보인 예술가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예장합동 김종철 목사(큰빛교회)가 2023년 9월 제108회 총회 부회록서기에 출마한다. 용천노회(노회장 채수영 목사)는 2023년 4월 10일 경기 성남시 세광교회(채수영 목사)에서 제131회 정기회를 갖고 31대 노회장을 지낸 김종철 목사를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했다.. 노회원들의 만장일치 기립박수 속에 추천을 받은 김종철 목사는 말했다. “노회원들께서 부족한 종을 너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작년에 낙마했을 때도 너무 안타까워해 주시고 다시 도전하면 당선될 것이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습니다. 용천노회의 위상을 높이고 총회를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날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받은 김종철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 85회 졸업생이다. 총회 주요 활동은 2014년 총회 아이티사법처리전권위원회(위원장 신규식 목사) 서기, 교단교류협력위원, 교회실사처리위원회 서기, 총회선거관리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 목사) 연기금제도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상임총무로도 활동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고양시기독교총연합회와 일산기독교연합회 임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2005년 고양시에 개척한 큰빛교회를 18년째 섬기며 지역사회를 밝히는 큰 빛이 되고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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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3
  • 제비뽑기 사도 박광재 목사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탁월한 예술가 한 명이 한 도시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는 오늘날 로마의 모습을 거의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 장대한 교회와 회화, 조각과 분수가 있는 로마는 도시 공간 전체가 극적이어서 여행자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연극에 동참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말했다. “로마는 당신을 위해 있고 당신은 로마를 위해 있다.” 여러 개체에 무언가를 표기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뽑아 벌칙이나 차례를 정하는 놀이를 이른다. 한자어로는 추첨(抽籤)이라고 한다. 제비뽑기에 쓰이는 물건을 '제비'라고 한다. '제비' 자체로도 '제비뽑기'의 뜻이 된다. 주로 운에 맡기는 놀이이고 승부를 쉽게 내고 싶을 때 쓰는 놀이이다. 어원상 조류 제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제비뽑기에서 '제비'는 중세 한국어에서 '져비'로 나타난다. 종이에 내용을 적어놓은 뒤 접어놓고 섞어서 뽑은 것에서 따와, 접다의 옛말 '졉다'에 접미사 '-이'를 붙인 '져비'가 되어 지금의 '제비'가 됐다고 한다. 로마 제국이 유대 지역을 지배할 때 한 유대인이 누명을 쓰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의 형 집행일이 되자 로마 병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제비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제비 2개 중에 하나를 뽑아라. 이 두 제비 중 하나엔 붉은 표시가 있는데 네가 뽑은 제비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으면 넌 죽을 것이지만 표시가 없으면 넌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제비들은 모두 붉은 표시를 한 것들이었고 유대인 또한 그걸 예상하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농락당하게 된 그는 고민 끝에 제비 하나를 뽑고는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을 곧바로 입안에 넣고 삼켜버렸다. 당황한 병사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제비를 삼켜버리면 네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지 않느냐." 그러자 유대인이 말했다. "병사님의 손안에 있는 남은 제비를 보십시오. 둘 중 하나에만 표시가 되어 있다고 병사님이 말하셨으니 그 남은 제비에 표시가 있으면 제가 뽑은 것은 표시가 되지 않은 것일 테고 표시가 없으면 그 반대겠지요." 당연히 병사의 손안에는 표시된 것이 있었고 유대인은 풀려났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그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실시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수 14-19장). 그리고 아간이 범죄했을 때 범인을 찾아내는 데에도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다(수 7:14-18). 뿐만 아니라 속죄제를 위해 바쳐진 두 염소 중에서도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냈다(레 16:7-10). 그 밖에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세울 때도 제비를 뽑았다(삼상 10:21,22). 그리고 제사장, 찬양하는 자, 성전 문지기 등의 직무를 위임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으며(대상 24:5; 25:8; 26:13) 정해진 기간 동안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데에도 제비를 뽑았다(느 10:34; 11:1). 구약 성경과 달리 신약 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시행한 예가 사도행전 1:26에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한 번 언급되어 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사도를 세울 때였다. 이때 열한 명의 사도들은 기도를 한 후 제비를 뽑았다. 그렇듯 총회 공정 선거 개혁을 위해 성경의 '제비뽑기'를 시행해야 한다고 평생 외친 인물이 있다. 그는 영광교회 박광재 목사이다. 오늘날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는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로 거수나 투표를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결정 방법이라는 것이 박광재 목사의 주장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야 있겠지만,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결정권을 맡기는 제비뽑기 방법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가 40년 목회 사역을 마치고 2023년 4월 1일 오전 11시 영광교회 본당에서 원로목사 추대를 받고 제비뽑기로 결정된 후임 하만규 목사의 위임 감사예배를 드리고 또한 박광재 목사 기념관 개막식도 가졌다. 1부 예배는 박광재 목사의 사회로 남평양노회 전 부노회장 김승석 목사의 기도, 사회자의 성경 봉독, 영광교회 시온 성가대의 감동적인 메들리 찬양으로 은혜를 끼쳤다. 전 총신대 총장 정성구 목사가 히 11: 24-26을 본문으로 ‘거룩한 꿈을 꾸자’란 제목의 힘찬 말씀을 예전보다 더 알차고 은혜롭게 전했다. 2부 원로목사 추대식은 남평양노회 전 노회장 임중근 목사의 사회 가운데 사회자의 추대 기도, 김지영 장로의 추대사, 사회자의 공포, 추대 패 전달, 축하 패 전달로 마쳤다. 3부 담임목사 임직식은 위임국장 한창호 목사의 사회 가운데 후임 제비뽑기 영상 시청, 위임 기도, 목사 서약, 교인 서약, 위임국장 공포, 위임 패 전달로 마쳤다. 제4부 축하 및 인사는 옥토교회 원로목사 김신성 목사의 권면, 총신신대원 전 총동창회장 이춘복 목사의 축사 및 자랑스런 동문 상패 증정, 총신신대원 총동창회장 김진하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총신신대원 제75회 동창회장 오세광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총아협 대표회장 배만석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필리핀복음주의신학교 이갑형 교수, 증경 부총회장 이완수 장로의 축사, 박재천 목사, 소망교회 원로 이실태 목사의 축시, 박광재 원로목사의 회고사, 하만규 위임 목사의 답사, 성문교회 성자 풍의 원로 황정식 목사가 축도로 모든 순서를 은혜롭게 마무리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33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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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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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향기 변우상 목사
    버스 창문 밖으로 교회 건물의 어깨에 여름성경학교를 알리는 긴 천이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산과 들을 찾는 사람이 많다. 나무와 꽃이 내뿜는 여름의 향기에 몸과 마음이 절로 깨끗해진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감각이다. 인체에서 제일 먼저 발달한 감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후각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미국의 리처드 액설(Axel)과 린다 벅(Buck) 연구팀은 1991년 코에 있는 후각 수용체의 기능을 처음으로 규명했다. 이들은 이 공로로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후각 수용체와 특정한 향기 분자는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결합한다. 맛이나 냄새를 말로 설명하기는 뜬구름 잡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맛을 풀이할 때처럼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기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짠맛의 풀이는 아주 쉽다. '짠맛: 소금 맛과 같은 맛.' 그래 바로 이거다. 얼마나 간단하고 알기 쉬운가. 신맛은 식초나 설익은 살구, 매운맛은 고추와 겨자, 단맛은 꿀, 고소한 맛은 볶은 참깨나 참기름과 같은 맛이라고 설명된다. 음식이 입에 당기는 맛을 뜻하는 감칠맛도 소중한 맛이다. 감칠맛은 움직씨 '감치다'에서 비롯된 것인데, '감치다'는 '잊혀지지 않고 늘 마음에 감돌다'라는 뜻을 가진다. 감칠맛과 짝을 이루는 그림씨, 다시 말해 감칠맛을 표현하는 그림씨는 '맛깔스럽다'일 것이다. 맛깔은 맛의 빛깔, 곧 맛의 성질을 말하는데, 음식 맛이 입에 맞거나 마음에 들 때 '맛깔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맛과 마찬가지로 냄새도 말로 설명하기는 뜬구름 잡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맛을 풀이할 때처럼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기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냄새를 나타내는 말들은 동시에 사람의 성품이나 하는 짓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음 쓰는 것이나 하는 짓이 다랍고 잔 것을 '고리다'고 하고, '구리다'는 하는 짓이 더럽고 추잡한 것, '노리다'는 마음 쓰는 것이 치사스러운 것을 나타낸다. 하는 일이 아니꼽거나 무엇이 너무 적어서 마음에 차지 않을 때는 '비리다'고 한다. '타분하다'는 생선이나 고기 따위가 약간 상하여 새뜻하거나 신선한 맛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리다'와 '타분하다'가 결합하면 '고리타분하다'가 되어 냄새가 고리고도 타분하다는 뜻이 된다. 군내는 제 본맛이 아닌 다른 냄새를 가리키는데, 텁텁한 군내는 군둥내라고 한다. 날내는 날것에서 나는 냄새, 풋내는 새로 나온 푸성귀 같은 것에서 나는 풀 냄새를 말한다.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는 새물내, 빨지 않고 오래 둔 더러운 빨랫감에서 나는 쉰내는 자릿내다.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필명을 도향(稻香)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나락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변우상 목사의 이름에서는 은퇴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언제나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느낌의 향기가 난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는 그 새물내를 예수향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이 향기로 말하듯 목사는 예수향기로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변우상 목사를 생각하면 용인제일교회 교인들은 새물내 느낌의 예수향기에 콧구멍이 그리움으로 벌름거릴 것이다. 변우상 목사의 설교나 삶에서는 꾸미고 덧씌운 듯한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그의 설교를 듣거나 삶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예수향기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특별히 목사는 자신의 부인에게 삶과 설교에서 감동을 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란 날마다 서로 가릴 것이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변우상 목사의 설교에 대한 고(故) 김영순 사모의 태도를 그들의 딸 변순주 집사가 이렇게 회상한다. 늘 바쁜 남편을 당신의 남자로 욕심내지 않으시고 목사님으로만 모셨던 사모님. 여자이기 보다 목사 부인으로만 사셨던 나의 엄마. 항상 아빠를 사랑하시고 아빠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행복해 하셨지요. 설교시간이면 예배실 장의자를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자세로 말씀에 집중하시던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해요. 엄마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신자의 모범이셨어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일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날까? 사도 바울은 특이하게 "냄새"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설명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 2:14-16 고린도후서 2: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 말씀한다.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나는 그리스도인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주께서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신다.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는 예수의 냄새, 예수향기가 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사도 바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로마제국 군대가 주피터 신전에서 승전을 기념하며 향을 피우는 장면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씀한다." 승리의 향을 피우는 로마 장군들과 같이 죄와 거짓과 사망을 주무기로 싸움을 걸어오는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구원과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예수향기를 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마음 쓰는 것이나 하는 짓이 다랍고 잔 '고린' 냄새, 더럽고 추잡한 '구린' 냄새, 마음 쓰는 것이 치사스러운 '노린'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 속에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로 신선하고 신령한 예수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새물내’는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이라는 의미의 ‘새물’에 냄새를 뜻하는 접미사 ‘-내’가 합쳐진 말이다. ‘오래도록 빨지 않은 빨랫감의 쉰 듯한 냄새’를 뜻하는 ‘자릿내’가 그 반대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새물내 같은 예수향기를 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느 날 순례자가 길에서 향내가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을 발견해서 방에 갔다 났다. 그랬더니 온 방 안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찼다. 순례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진흙덩이에서 나는 이 놀라운 향기는 무엇일까? 알고 보니 이 진흙 덩이는 백합과 같이 있었다. 진흙에 불과했지만 백합과 함께 있었으므로 놀라운 향기를 방안에 풍기는 흙이 되었다. 진흙 속에 배어 있는 백합의 향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예수향기이다. 그렇다. 아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도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향기로운 인생을 산다. 제3대 안디옥의 총대주교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50년 ~ 117년)는 그의 고결한 성품으로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라고 알려졌다. 현재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 바로 이 사람이 쓴 편지이다.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이고 오현제 중 한 사람인 트라이아누스(Traianus; 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7일)조차 그의 고매한 인품을 존경했다. 어느 날 황제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황제 폐하, 그것은 제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서 예수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난다. 찬송가 샤론의 꽃 예수는 이렇게 노래한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데 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마음에 사랑으로 피소서." 작시자 아이다 가이리 여사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무명시인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찬송 작곡자 찰스 가브리엘 목사가 그녀의 찬송시 '샤론의 꽃 예수'를 읽고 난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이 곡조를 작곡했다. 이 찬송시의 배경은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란 구절이다.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 시적인 어휘로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새로움의 꽃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고후 2:15),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 엡 5:9). 이 시대 우리 총회의 그런 표본이 변우상 목사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예수향기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면 그는 누구인가.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아픔인 6.25전쟁을 겪으면서 학업이 늦어져 다른 연배보다 2년 늦게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어 고향에서 꼴을 베고 있던 어느 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친구들을 보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 비가 유난히 많이 오던 그 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처음 서울 큰아버지 댁에 찾아가서 중학교 공부를 시켜달라고 간청했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 과외, 라디오수리공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과정을 마쳤다. 신앙은 모태신앙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다. 김승룡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숭인교회를 출석했고, 학생회 회장은 물론이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했기에,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목회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목회자로 헌신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학교 담임선생 결혼식에 참여하고자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의 결혼식에 갔다. 본인을 제외한 친구들 모두가 술을 마시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막차를 잡기 위해 뛰어가게 되었다. 마침 다리 위를 뛰어가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버스 헤드라이트 불빛이 너무 밝아서 길을 잘못보고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절해버렸고 이것을 본 버스 운전기사와 친구들이 즉시로 달려가 버스에 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서울로 올라가던 중 버스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고 결혼식에 갔던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목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변우상 목사(총신 65회)는 총회신학교 신학생 시절, 2학년 때부터 용인 목회를 시작했다. 숭인교회 고등부 학생시절 고등부를 담당하던 차용식 목사가 후에 신일교회 당회장 목사로 갔는데, 고등부 때 제자였던 변우상 전도사를 기억하고 신일교회 부흥회 강사로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주일학교 성경학교를, 새벽과 저녁에는 장년부흥회를 인도하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차 목사가 다른 교회로 가면서 그에게 신일교회를 이끌기를 부탁했고, 신일교회 당회 및 교인들도 간곡히 요청해서 받아들이게 됐다. 그 때로부터 용인에서의 반세기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1963년의 일인데, 2년 후인 1965년에는 포곡교회에서도 교회를 이끌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변우상 전도사는 신일교회와 포곡교회(現, 포곡제일교회)를 모두 목회했다. 주간에는 사당동 총신에서 공부하고, 토요일에는 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서 내려 2시간을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용인에 오면 용인기독병원에 가서 매주 환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위해서 기도했다. 그즈음에 김영순 사모를 만나 결혼했고, 그 시절 신혼여행은 고사하고, 돈이 없어서 신혼방도 어렵사리 마련했다. 1970년대 용인 시내에는 기장과 감리회 교단의 교회 2개만 있었다. 예장합동 교단 소속 교회는 없었다. 변우상 목사는 용인 인근에서 군목으로 사역하던 이기만 목사에게 교회를 개척하고 청소년 선교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1973년 4월 용인제일교회는 이렇게 설립됐다. 그러나 이기만 군목은 근무지변경으로 1년도 안 되어 전근을 떠나게 됐고, 결국 변 목사가 1974년 2월 천막 예배당 용인제일교회에 부임했다. 변우상 목사가 부임한 후 용인제일교회는 놀랍게 성장했다. 변우상 목사가 용인제일교회에 부임한 1970년대는 산업 성장이 한창인 터라 당시 용인 지역은 가죽 의류 염직 등 공장이 많았고, 20살 내외의 청년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변 목사는 그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전도와 구제 사역을 진행했다. 지역에 있는 동광통산, 화일상사, 원진레이온, 대동화학, 중앙염직, 경방, 신원산업 등 용인 관내에 있는 회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신우회를 조직하여 매주 예배를 드렸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주일날 교회로 몰려온 것이다. 이를 통해 산업선교를 확장시켰고, 또한 용인시장에 나가 발로 뛰며 전도하여 시장 복음화를 시작함으로 약 300점포의 많은 상점 주인들이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4월 1일 제일어린이 선교원을 시작으로 지역에 있는 어린이 교육에 앞장섰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료혜택이 어려운 인근 면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 사업은 녹십자병원 원장이었던 박종희 집사가 주축이 되어 용인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의료관계자들로 의료선교회를 구성, 김정란 산부인과, 에덴 이비인후과, 부부한의원 등 의료에 종사하고 있는 성도들이 동참했다.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변우상 목사가 전국 수백 교회와 기도원들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하셨다. 부흥회를 통해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가지고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나눔으로 교회는 점점 더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강력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신일교회, 포곡제일교회를 담임했던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고자 서울에 있는 큰 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초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용인의 시골 작은 교회여서 모시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변 목사는 부흥회를 요청받으면 교회가 크든 작든, 멀든 가깝든, 어디든지 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의 그 결심대로 땅 끝 마을 해남, 제주도, 미국, 뉴질랜드, 중국, 태국, 미얀마, 나병환자촌 교회 등 어디서든지 말씀을 증거해 달라는 곳이면 평생 거부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나갔다. 용인제일교회는 청년을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변우상 목사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1980년 당시로서는 용인과 수원 지역에서 최대 규모인 연건평 692평 예배당 건축 때문이었다. 건축비의 어려움으로 용인제일교회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용인 전역에 난무할 정도였다. 교인들의 헌금도 한계에 달해 빚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용인제일교회 초대 장로 故 박한신 장로가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자신의 눈을 팔아 교회를 건축할 벽돌을 사서 쌓아달라는 유언을 했다. 또 최애현 권찰이 와서 자신의 건강한 눈을 팔아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변우상 목사는 강단에 올라가 눈물로써 그분들의 중심을 전했고, 온 교회 성도들은 통곡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 청년회 회장이었던 권희용 장로를 중심으로 청년회에서 금품 봉헌 운동이 일어났고,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통장을 가져오는 청년들, 집을 팔고 전세로, 전세를 월세로 돌려 건축헌금을 하는 성도들이 계속 이어졌다. 예배당 건축은 5년 동안 공사를 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 열매가 현재 마평동 655번지에 우뚝 서있는 용인제일교회 예배당이다. 교회 건축이 끝나고 1987년부터 시작한 총력 전도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전을 채우고 1000명, 1500명으로 매주일 출석하는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 성도들의 성장에는 그림자처럼 목사님을 내조하는 故 김영순 사모가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매일 저녁 금식을 하며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사모님의 헌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물은 물론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렸다. 병든 환자들의 입원비, 쌀이 없는 가정에 쌀을 가져다주고, 겨울이면 연탄을 배달해 주었다. 본 교회 교육전도사들이 결혼할 때면 일일이 혼수품을 챙기고, 어려운 이웃 교회 목사님 댁에 음식은 물론이고 쌀과 헌금도 베푸는 사랑의 메신저였다. 변우상 목사가 사모와 심방을 하던 초창기는 성도 가정이 모두 어려워 물 한 컵 대접할 여유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심방이나 전도를 다니실 때는 언제나 주머니에 비스킷을 넣고 다니면서 먹었다. 성도들이 점심을 드셨느냐고 물어볼 때, 가난한 성도들도 배려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신병자들도 집에 데리고 와서 날마다 찬양하며 기도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도 좁은 사택에서 함께 머물게 하고, 교회 청년들이 집에 와서 언제든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게 하는 등 초대교회의 모습을 몸소 실천했다.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교회와 남편을 위해 헌신하던 2000년 세상을 떠난 고(故) 김영순 사모의 마지막을 그들의 딸 변순주 집사가 2012년에 이렇게 회상했다. 13년 전 2000년 GMS선교대회가 수원에서 열렸습니다. 그 대회 저녁예배 찬양봉사를 위해 용인제일교회 성가대와 변우상 목사님이 교회버스로 교회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집에서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말소리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고 어머니를 진찰하신 한의사는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말했습니다. 119구급차를 타고 아주대병원으로 갔습니다. 구급차 안에서 어머니는 눈이 몹시 아프시다 하면서도 아버지 변우상 목사에게는 선교대회 예배가 끝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온 가족이 함께 조용히 기도드릴 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용인제일교회 목회 38년과 예수향기를 날린 평생 사역 50년을 마감하고 기리기 위해 변우상 목사 원로추대 및 임병선 목사 위임 감사예배가 용인시 마평동 용인제일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장년 40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한 예배당은 용인제일교회 성도는 물론 중부 지역 목회자 및 장로들과 지역 정재계 인사 등으로 가득 찼다. 변 목사가 지역사회와 총회와 교계에서 고결한 성품으로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로 불린 사도 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 같은 “한국 교회의 예수향기 목사”로 일컬어지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감사예배는 축하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설교를 한 증경총회장 김준규 목사는 “한 교회에서 사역하시며 목회자로서 정말 잘 달려오셨다. 본분을 다하셨다.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축하했다. 이어 변 목사의 39년 목회 회고영상이 상영되고, 담임목회자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이 되자 성도들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박한준 장로는 눈물을 삼키며 “목사님은 오직 목양일념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예수향기 변우상 목사는 눈물 머금은 동안(童顔)의 얼굴로 답사를 했다. “지난 50년, 행복하게 목회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주님의 일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일입니까. 그래서 미치도록 목회를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고맙습니다.” 변우상 목사가 원로로 추대된 2013년 7월에 새롭게 담임목사가 된 임병선(총신 92회, 전 신반포교회 청년담당 부목사) 목사는 설립 40주년을 맞아 용인제일교회를 젊은 분위기, 역동적인 분위기로 바꿔 나가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슬하에 6남매가 있고 그중 신학을 공부한 자녀도 있지만 그는 담임목사 초빙공고를 통해 임병선 목사를 후임으로 결정했다. 변우상 목사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인품이 드러난 후임자 선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70세 정년을 앞두고 10년 전부터 기도해 왔다. 실제 준비는 5년 전에 시작했다. 공개모집을 통해 후임으로 4명이 지원했다. 장로들이 중심이 된 교회 당회(20명)에서 먼저 이들을 심사했다. 물론 4명 모두 우리 교회나 나하고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투표를 통해 한 명을 선정했다. 장로님들이 자꾸 내 의중을 알고 싶어 했지만 일체 함구했다. 내 말 한마디가 결정적으로 작용될 것은 빤하지 않겠는가. 당회에서 후보자 1명을 선정했고 이를 온 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에 부쳤다.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만 최종 통과가 되는 것이고 그 이하일 경우에는 다시 모집공고를 내도록 했다. 다행히 교인들이 후임자를 흡족하게 여겼고 임병선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게 됐다.” 이제 2015년 12월에 용인시청 근처 용인시 처인구 역복동 산 97-1 대지면적 6,176평에 건축 면적 5,000평의 건축 설계를 완료하고 2016년 착공해 2017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새로운 예배당 글로리센터 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용인제일교회의 이런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원로 변우상 목사는 후임 임병선 목사를 적극 후원하고 후임 임병선 목사는 원로 변우상 목사의 기대와 뜻을 살리고 높이는 목회를 한다. 은퇴 이후에도 변우상 목사의 예수향기는 6남매 자녀 모두와 함께 사는 용인의 빌라에서, 용인제일교회에서 한 달 한 번 하는 저녁설교에서, 수원의 은퇴 목회자들이 모이는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덕영대로 1201번길 16 세일프라자 3층의 희망은목교회 등에서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처럼 여전히 날리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라일락꽃 도종환 진정 도종환 시인의 라일락꽃 같은 평생의 반려자 2000년 김영순 사모가 떠나는 그 날, 그 주일(主日)에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을 수 없어서 강단을 비우지 않고 슬픔을 참고 설교하고, 평생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장로님들로부터 모든 성도와 자녀, 그리고 총회 산하 모든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도하고, 맨 마지막에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현실에서 보이며 살아온 변우상 목사는 진정 예수를 그 가슴에 품었기에 예수향기가 새물내처럼 풍기는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였다. 2015-07-29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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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 오정호 목사의 목회관
    '유월' 하고 소리 내면 걸리는 것 하나 없다. 유월 하면 청개구리·소나기 소리, 능소화·감자꽃·밤꽃이 생각난다. '유월' 햇빛이 밝다. 부드러운 발음과 달리 모진 유월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래도 국가 재난 사태에도 박 대통령은 무슨 습관인지 활짝 웃고 다니기만 하지만 의료진들의 목숨 건 사투 덕에 메르스가 '유월' 하늘을 떠돌다 이제는 좀 수굿해진 모양이다. 이러다 언제 편안히 여름 날지 마음 쓰이지만 태풍의 재난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2013년 11월 8일 중국어로 바다제비라는 뜻의 초강력 태풍 하이옌[海燕 - Haiyan]이 필리핀 중부를 강타했다. 이 태풍으로 필리핀에서만 1만200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민도 430만 명이나 발생했다. 최대 피해 지역인 레이테섬에선 지역 내 건물의 70~80%가 무너졌다. 이 섬의 최대 도시 타클로반은 인구 20만 명이지만, 이중 1만 명이 숨졌다. 오정호 목사를 처음 만난 건 총회회관에서 총회군선교회가 아라우부대 필리핀 재난지역 파병예배 때였다. 총회군선교회(회장:김기원 목사)가 2013년 12월 23일 총회회관에서 필리핀 태풍 피해 지역 복구에 나서는 국군 아라우 부대 파송 및 환송예배를 드렸다. 파송 장병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오정호 목사(군선교회 명예회장)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축복’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여러분은 대한민국 군인들 중에 뽑힌 사람들로 환란 당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 떠난다”며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손과 발을 통해 눈물 흘리는 필리핀 여러 형제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아라우 부대는 필리핀 타클로반을 비롯해 태풍 피해 지역에서 도로 복구, 관공서와 학교 보수 등에 나서게 된다. 아라우부대는 파병된 이후 '피의 희생을 땀으로 보답한다'는 슬로건으로 헌신적 재해 복구 활동을 펼쳤다. 태풍 피해를 본 학교·관공서·병원·보육원 등 67개소의 공공시설을 복구했으며, 쓰러진 전신주 250여개를 다시 세웠다. '찾아가는 종합의료지원'으로 의료 사각지대 현지 주민들을 진료했다. 파병 기간 92개 소외 지역 마을 주민 등 4만2000여명이 진료 혜택을 받았다. '아라우 중장비 직업학교'를 설립해, 포클레인·지게차 등 중장비를 다룰 수 있는 현지 인력 500여명을 양성했고, 한국어교실도 운영했다. 6만1000여명의 현지 주민에게는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라우부대가 1년의 파병임무를 마치고 2014년 12월 23일 돌아와 해단식을 가졌다. 오정호 목사를 아라우부대 해단 3주 전 전국이 꽁꽁… 강추위가 밀려온 12월 2일 오후 3시 대전 새로남교회 10층의 새로남카페에서 만났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한없이 하늘에 가까운 투명한 삼면 유리벽이 대전 신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는 분주했다. 그는 대전지역 목회자들 식사 대접을 마치고 오는 길에 제과점에서 샀다며 따뜻한 빵을 탁자에 내놨다. 그와 적지 않은 시간 나눈 이야기 가운데 후배 목사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그간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이제 전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그의 목회관을 담고 있었다. 그의 듣기 좋은 굵직한 음성이 울렸다. “1993년 4월 3일 남정웅 목사가 서울 구로동의 서울남교회(1993년 12월 28일 정년 은퇴한 박원섭 목사를 이어 제4대 담임목사로 서울남교회 부임)로 떠나자 새로남교회에 혼란이 왔어요. 후임 목사를 결정하는데 핑퐁 게임하듯 서로 추천하고 비토하는 겁니다. 당회에 갈등이 생긴 거죠. 그렇게 갈등을 거듭 겪다보니 안수집사 그룹이나 다른 그룹들이 당회가 담임목사를 결정하지 못 하고 뭐하는 거냐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하게 됐어요. 전교회의 존경을 받으시는 옥한흠 목사에게 가서 좋은 목사 추천을 한번 받아보자 한 겁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옥한흠 목사가 듣고 나를 추천하시게 된 겁니다. 옷을 벗죠.” 밖은 겨울바람으로 찬데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 겨울나무들처럼 이야기 나누는 새로남카페 안의 훈훈함에 우리는 웃옷들을 잠시 안녕 했다. “그때 비로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새로남교회와 연결이 된 겁니다. 대전은 잘 모르는데다 사돈의 팔촌까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정말 물이 설고 낯선 곳이죠. 그런데 옥 목사가 저를 추천하신 겁니다. 저는 말을 안 했습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날 옥 목사께서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시기 전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총신대 휴게실에서 저를 만나셨어요. 하시는 말씀이 ‘오 형제 내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내가 장년부할 테니까 오 전도사는 주일학교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그분이 원래 제안을 하시고 그러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그건 어렵겠다 했습니다. 왜 어렵냐고 물으셨습니다. 내수동교회에서 대학부를 지도해야 될 입장인데 빠질 수가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휴게소에서 차 한 잔 마시고 돌아서시며 하는 말씀이 ‘나한테 배워도 많이 배울텐데’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쉽다하는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맴돌아요. 그리고 헤어졌죠. 물론 후에 다시 만났지만 말입니다. 저는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지도하고 결혼한 뒤 군대를 갔습니다. 그 다음에 군대 제대한 뒤 사랑의교회로 갔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원래 상가에 있다가 지금 서초동에 교회를 세울 때 지하로 내려간 이유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땅값 떨어진다고 난리가 났어요. 원래 설계를 멋있게 하고 이게 아니라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교회 건물을 못 올리게 데모를 해대고 하니까 본당을 지하로 내려 보낸 겁니다. 그런데 그게 나름대로 특색 있게 짓다 보니 건축 상도 받고 그런 겁니다. 위에 공사할 때 방수 처리가 미흡해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바늘구멍 하나만 있어도 물이 새는 겁니다. 그러면 갈고 뜯고 얼마나 많이 공사를 다시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만 7년 사랑의교회 옥 목사님을 보필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보내주셔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 마음속에는 부산 호산나교회(합신측)의 최흥준 목사가 기성교회에 들어가서 잘 하고 계시니까 중부권 대전에도 사랑의교회 출신 교역자가 한 사람 있었으면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바로 새로남교회 부임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제가 허락한다고 그 교회가 저를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 일주일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족과 의논을 하니까 모두 안 가고 싶다고 펄쩍 뛰는 겁니다. 다 미국에 있고 싶다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기도해 보겠다며 LA 근처의 하이데저트라고 하는 사막에 있는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곳입니다.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제 마음에 잠언 29장 25절, 26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제 마음에 부딪쳐 왔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가보라고 해서 교회 개척하실 때 순종하지 못했는데 하여튼 나가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행기 표도 보내주니 좋아서 한국에 나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후 공동의회를 했는데 제가 덜컥 됐습니다.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말입니다. 그 다음 노회에서의 정치문제로 위임목사가 임시목사 청빙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교회 청빙위원회 집사님한테 그 전화를 받고 양떼가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는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아내한테서 부임하지 않으면 교회가 쪼개지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가 자신의 면류관이 아니라 양떼의 은혜와 행복과 목회의 안정을 위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내도 찬성했습니다. 저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능력 있는 목사도 아니고 무슨 교회를 질 것도 아니고 화평한 교회 화목한 교회만을 이루면 된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1994년 11월 6일 부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갖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5년 동안 두문불출 목회만 전념했습니다. 신학교 강의나 외부 강사도 일체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싸우는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니까 매주 마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겁니다. 3년 만에 1부에서 3부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차시설이 열악했는데 8중 주차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충청도 끈기가 있잖아요. 경상도 같으면 뿌샤버린다 할텐데 그런 불편에 대해 내색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 얘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축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교인 거의 전체가 건축 반대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자가 2년 만에 하나님의 뜻이라며 올라간 서울에서 다시 하나님의 뜻이라며 대전에 내려와 분립 개척예배를 드리니까 8분 장로 가운데 몇, 안수 집사들 몇 사람을 비롯해 사람들이 저쪽으로 갔어요. 교회 안에 혼란과 평지풍파가 날 수 있는데 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그쪽 교회 개척헌금을 해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노회와 총회에 제소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를 봐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제가 다 가라앉혔습니다. 영적 매듭을 짓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서로 다 잘 알고 그러는 사이 아닙니까. 저는 화평한 교회만을 바랐는데 하나님께서 덤으로 교회까지 주셨습니다. 부임한 지 2년이 좀 지난 1997년 5월 600여 명 모일 때 교회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장로들도 요단강 가시고 이민도 가시고 했습니다. 다시 내려온 목사에게 가고 교회가 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은혜를 주시니까 매주 교인들이 오는 겁니다. 저쪽 교회 빚도 다 갚고 헌당식도 부임 6개월 만에 제가 했습니다.” 카페 봉사자가 과일을 갖다주었다. “나는 교회를 짓는다면 전통 방식으로 하나 짓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원래 있던 교회는 공간 여유가 없어 성도들이 가 있을 데가 없었어요. 교회 앞에 정해진 방향이 없는 이면도로가 있어 차가 막 다녀 아이들도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행복했습니다. 이 교회 건축은 정림건축(1967년 설립된 정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서울월드컵경기장, 무역센타, 연세의료원세브란스병원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이 했고, 시공은 전국 도급 순위 4위의 엘지건설이 했습니다. 이 교회를 엘지건설이 맡게 된 것은 마침 이 교회 건너편에서 을지대학병원을 짓고 있던 터라 그냥 한 건설 현장이나 같았습니다. 엘지건설도 좋고 우리 교회도 좋은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이 교회 건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과정의 은혜도 주실 것이고 결실의 열매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1600여 명 모일 때였습니다. 성도들의 헌신이 얼마나 놀라웠는가 하면 수협에서 융자금을 천천히 갚으라고 조기 상환 페널티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빚도 빨리 갚고 헌당도 빨리 했습니다(2002년 6월 14일 새성전 건축 봉헌예배, 2008년 11월 16일 헌당식). 그 사이에 4년 반 동안 이단들과 소송도 있었습니다. 국제초등학교도 하나 세웠습니다. 고등학교는 많은 데 초등학교는 우리가 제일 큽니다. 이제까지 잡음 없이 땅을 사고 건물 짓고, 화평하게 일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 태도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목회관은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목양일념(牧羊一念), 정도목회(正道牧會), 은총무한(恩寵無限), 동역감사(同役感謝), 성령충만(聖靈充滿)입니다. 이 목표로 달려왔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목양일념이라는 말과 사도(邪道)가 아니라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일념으로 왔습니다. 제가 저에 대해 드릴 말씀은 이게 다입니다. 하하.” 사임하고 떠난 전임 목사 면직하라고 돈까지 들여가며 아우성치는 삼일교회(송태근 목사) 같은 분쟁 아닌 분쟁을 겪는 교회들과 정도 목회를 걸으려는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될 오정호 목사의 이야기를 마치고 둘러 본 새로남카페의 창에 대전청사가 들어선 신도시의 너른 겨울 숲이 내려다 보였다. 이런 시가 있다.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 영 철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 헤어질 때 교회를 벗어나 건널목까지 배웅한 그는 악수를 나눈 내가 푸른 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고 돌아보니 아직 그 자리에 겨울 숲을 뒤로 하고 겨울바람에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2015-6-22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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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제1 총신인 김승동 목사
    B.C.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포악한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카이사르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遠征)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역전(歷戰)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財界)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陳容)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B.C.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수여한 칭호로, '위엄 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帝政)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집단 지도체제인 과두제(寡頭制)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임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제1 시민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정연철 목사가 설교집이라도 냈는지 광고비가 만만치 않을 기독신문 돌출 광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걸 보니 그는 믿음과 총회 정치력이 아니라 로비스트만 잘 활용하면 될 수 있다는 경험에 의지해 총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 서정배나 김용실처럼 다음에 또 부총회장 선거에 나올 모양이다. 2014년 9월 제99회 총회 당시 가장 유력한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자 김승동 목사의 지지표가 방향을 잃고 정연철을 찍는 바람에 박무용 목사가 정연철을 108표차로 신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계와 총회 정치의 원로목사이자 목회자 시인 백영규 목사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사랑하시지 않는 모양이네.” 제비뽑기 덕에 결선 투표에 올라갔던 정연철 목사는 기도의 종이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받은 표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나오면 그러한 지지를 얻어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모양이다. 교계 지도자로서 모든 면에 탁월해 교단 전체 어느 누구와도 이길 수 있는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에서 떨어지고 그 덕에 몸도 약한 박무용 목사가 총회 상비부 부장도 되어본 적이 없는 상대를 손쉽게 이기고 부총회장이 되었다. 차제에 총회 선거는 무능력과 무자격자들이 즐기는 제비뽑기는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이 들리는 박무용 목사가 100회 총회를 치르고 난 뒤 감당할 스케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런 선례가 바로 앞의 탱크 같은 건강과 힘을 자랑하던 총회 총무 황규철 목사일 것이다. 그는 무리한 총회 정치의 여파인지 지금 건강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총회 총무 말기 총회 상대 재판 패소 건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문제와 사고로 실타래 같이 얽힌 평동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 결의에 따르면 총회 산하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황규철 목사의 평동노회 노회장 사회로 추천을 받은 장대영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유지하고 당선까지 노리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80여㎞가량 떨어진 고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한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뉴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허드슨강을 지키려고 세운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02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로 213년 됐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는 170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는 61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의 사관학교는 단순한 장교 양성 기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 교장을 역임한 테이어 대령이다. '테이어 제도'의 요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감, 명예, 헌신, 정직 등 리더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에 인문학적 교양과 전문 지식까지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을 이끌 진정한 리더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총신도 세계와 한국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자부심이 드높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시작하여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를 거쳐, 1995년 교명을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Chongshin University)로 변경한 총신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고,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주의보다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전통을 따르며 바르트주의를 배격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1959년 제44회 총회 때 WCC문제로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손으로 갈라져 나와 세운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칼빈주의를 계승한 개혁주의 요람(搖籃) 114년의 총신의 힘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총신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이다. 이 학교를 통해 한국과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될 박형룡·박윤선·김창인·옥한흠·박영선·김승동 등의 목사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제1 시민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 시대의 제1 총신인은 교계와 목회에서 올곧고 두드러진 활약과 업적을 세운 김승동 목사다. 그러므로 김승동 목사가 조선 선비들의 전통에 따라 그의 집 대들보에 글을 적는다면 ‘爲神, 爲如白, 爲詩’가 어울릴 것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위신(爲神)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성경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외우며, ‘살아있는 동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겠다’를 입과 몸에 달고 사는 김승동 목사의 신앙관에 맞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여백(爲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의 ‘맑음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김승동 목사가 평생 실천한 청렴을 나타내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시(爲詩)는 ‘시를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통해 성도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전하겠다며 시와 글을 써 책을 낸 목사이기 때문이다. 김승동 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진감 있는 목회,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강단, 은혜로운 당회, 총회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이다. 그렇듯 지도력 부재의 이 각박한 시대에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에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구미상모교회의 김승동 목사이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교회 마당을 지나면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안긴다. 2015-06-22
    • G.PEOPLE
    • G.PEOPLE
    2015-06-22
  •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 오정호 목사
    체르니의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오보에 연주자였으며 피아노 교사, 피아노 수리 등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했고 체르니의 음악교육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음악을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체르니는 문학과 언어에 있어서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무료로 음악을 배우던 가난한 제자들로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으니 이후에 그가 가난하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여 무료로 레슨을 한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대물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23년 체르니는 그의 스승 베토벤을 어렵게 설득해 12살이었던 리스트를 데려갔다. 리스트가 자신이 작곡한 소품 한 곡을 연주하자 베토벤은 바흐의 푸가를 주문했고 리스트는 바흐 평균율 피아노곡집에서 C단조 푸가를 연주했다. 베토벤은 즉석에서 다른 음계로 바꾸어 연주할 것을 요구했고 리스트는 훌륭하게 연주를 마쳤다. 베토벤은 리스트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리스트는 훗날 “이 사건은 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나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에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리스트는 평생에 베토벤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고백이다. 1971년 지금의 숭실대 앞으로 돌아가 보자. 숭실대 정문을 지나 사당동 쪽 언덕을 넘어서면 철거민들이 자리 잡은 초라한 골짜기에 총회신학교가 있었다. 내부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신학교 건물 지하에는 전깃불도 없는 기숙사가 있고 지하의 식당은 울퉁불퉁 정리되지 않은 운동장을 면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학연구원 전도사들보다 머리가 길고 황색 가방을 든 옥한흠 전도사가 운동장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총신 신학연구원 재학시절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100명이었던 주일학교를 500명까지 성장시켰다. 그 후 1970년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사역자로 부임한 그는 인생의 분수령이 된 대학부를 맡았다. 그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는 선교단체에는 있지만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대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그는 성도교회에 부임한 지 3년 만에 서울에서 최초로 대학부 학생 2백 명을 모아놓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시 총신대 1년생으로 성도교회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면서 틈틈이 대학부를 기웃거렸다. 서울의 남녀 대학생들로 그득한 교육관 2층의 대학부 집회실은 늘 그득하고 옥한흠 전도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대학생들은 진정 옥한흠 전도사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뜨거웠고 밝았다.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격적 체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옥 목사는 1975년 미국의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1977년 5월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유학을 마친 옥한흠 목사는 미국과 한국의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짜리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4년 6월 옥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자 제자훈련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3개월간 제자훈련 자료들을 모은 후, 1984년 제자훈련 겨울방학을 이용해 용인 벧엘수양관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원고를 집필했으며, 7주 만에 원고를 탈고했다. 2010년 9월 현재까지 103쇄가 인쇄됐다. 『평신도를 깨운다』의 책 발간은 CAL세미나 개최로 이어졌다. 책을 읽은 목회자들로부터 제자훈련 세미나 요청이 쇄도하자 1986년 3월 세미나실(현재 국제제자훈련원)을 설립하고, 1986년 3월 제1기 ‘평신도를깨운다 제자훈련지도사세미나’(CAL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다. 고 옥한흠 목사가 시작한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가 100기를 맞았다. ‘CAL세미나’로 유명한 제자훈련 지도자세미나는 1986년 3월 시작해 꼭 30년 만에 100기를 배출하게 됐다. 국제제자훈련원과 사랑의교회 그리고 제자훈련목회자네트워크(CAL-NET 전국대표 오정호 목사)는 100기 배출을 기념해 오는 2015년 2월 3일 오전10시 사랑의교회에서 ‘2015 CAL-NET 전국 평신도 지도자 컨벤션’을 개최했다. 컨벤션 주강사는 이어령 박사와 권성수 목사였다. 이어령 박사는 오전에 ‘지성과 영성이 균형잡힌 제자’를 주제로 강의하고, 권성수 목사는 오후 ‘목자의 심정으로 사역하는 제자’를 강의했다. 이외에도 선택강좌로 오정호 목사의 ‘성경적 훈련 목회자상’ 강의가 있었다. 옥한흠 목사의 제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 옥한흠 목사가 사랑하는 참 제자를 꼽는다면 단연 오정호 목사가 가장 앞설 것이다. 오정호 목사는 옥한흠 목사가 아끼는 제자 조성희 사모와 결혼을 했다. 사랑의교회에서 부부가 사역한 사례는 아마 오정호 목사와 조성희 전도사 부부가 유일할 것이다. 오정호 목사는 옥한흠 목사의 사랑에 힘입어 미국 유학(FULLER THEOLOGICAL SEMINARY)도 다녀왔다. 오정호 목사는 그의 스승 옥한흠 목사의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여 목회 사역에 있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2015년 4월 19일 주일 11시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 오정호 목사가 설교하는 새로남교회 3부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본문은 누가복음 7:36-42 설교제목은 『더 사랑의 비밀』이었다. 설교자와 교인이 성경 본문을 한 절씩 교독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복음 7:36-42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성악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하는 말은 평생에 아침 일찍이 모이면서 딱 두 번 노래했다고 합니다. 테너 성악가로서 목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노래하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대통령 조찬기도회, 두 번째가 자신의 아버님 생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오늘 이렇게 아침에 모여서 행사를 하니 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런 고백을 그는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가지는 남다른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내게 은사를 주신 이도 주님이시오 쓰시겠다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에 나는 기쁨으로 이 자리에 나옵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겠다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남모르는 『더 사랑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오늘 어떤 비밀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아멘은 천상의 용어입니다. 예배는 주님만을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의 의지가 주님 앞에 송두리째 드려지고 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원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옛날 교회는 이런 푹신한 의자가 없었습니다. 그냥 나무 바닥이었습니다. 무릎 꿇고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영적인 사사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식 상태가 심각합니다. 서울에 행인들이 길을 가다가 땅이 함몰되었습니다. 지반이 내려앉았어요. 전문가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상수관과 하수관이 부식되어 거기서 물이 새는 겁니다. 그래서 땅들이 점점 무너져 어느 순간 빠져버리는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참 예배자로 드리지 않을 때는 겉보기에는 멀쩡해요. 그러나 영혼이 점점 부식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왕창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습니까. 하루아침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다. 바리새인처럼 형식은 갖췄어도 마음이 주께서 멀어지거나 주님 앞에 엎드리되 적당히 엎드리고 납작 엎드리지 않으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자로 나와 있습니다. 스무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두 시간을 예배 드리는 사람이 세상을 따라가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친구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데 나중에 자라서 부모 따라가겠습니까. 친구 따라가겠습니까. 우리가 주일 오전 한 번 오후 한 번 드리는 걸로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입니다. 주님 우리 마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를 드림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예배자의 축복 아니겠습니까. 일상의 분주함을 이제는 정리하고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 주님이 나를 발견하는 예배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정호 목사의 사무실에 들어가면 한쪽 벽에 그가 새로남교회에 부임해 함께한 “아름다운 동행 20년”을 정제된 한 단어, 한 줄 문장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축하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1994년 11월 6일 오정호 목사는 유학을 마치고 옥한흠 목사의 추천으로 새로남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3년이 안 된 교인 성장으로 1997년 3월 2일 주일부터 낮 예배를 1, 2 ,3부 확대해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의 은혜와 추진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오정호 목사는 부임 이후 1997년 5월 대전 만년동의 500평의 부지 매입을 시작으로 총 1650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새로남교회 부임 10년만인 2004년 5월 30일 온 성도가 참석한 가운데 입당예배를 드리고, 2008년 11월 16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새로남교회 주변에는 대덕연구단지, 정부대전청사, KIST(카이스트) 등 국가 주요 건물들이 있어 전도와 대안 교육의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오정호 목사는 선명하지만 강한 영성과 정치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총회의 차세대 지도자로서 총회를 이끌고 총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랑의교회도 세우고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도 설립한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답게 목회도 성공한 목회자이지만 총회와 교계에서도 성공한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15-05-06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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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6
  • 크리소스톰 김희태 목사
    “교회 안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눈을 움츠리며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이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영어명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헬라명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라는 그의 통칭(通稱)은 그의 전설적인 웅변 때문에 붙여진 황금의 입(golden-mouthed)이라는 뜻이다. 그 통칭은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의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탓이다. 위대한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설교를 듣느라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안투사는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로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의 최우수 학생으로 후계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Diodorus)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그는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 때인 AD 386년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는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 강론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하나는 초고 형식으로,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를 다듬어서 일관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전례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구약 성경에 어떤 제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한 것도 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란 크리소스톰이기에 설교는 항상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 방법에서 얻은 영적 통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강해는 윤리적 권면으로까지 폭을 넓혔다. 그의 설교는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른 한쪽은 성도의 삶의 한복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주석에서 예화로, 성경 원리에서 실제적인 호소로 설교를 전개시켜 갈 때는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며 제스처가 활발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진다. 그러면 기대감에 부푼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하다가 경우에 따라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청중의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환호를 받은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설교자가 박수갈채를 좋아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칠 것이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단순한 전개 형식을 취해 간다. 그럼에도 그가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 까닭이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이 있었다. 둘째,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셋째, 설교를 불붙게 하는 정열이 넘쳐 흘렸다. 이런 4세기의 크리소스톰을 닮은 21세기의 목사가 서울에 한 사람 있다. 그는 동광교회의 김희태 목사다. 1966년 3월 15일 창립된 동광교회에 1987년 12월 25일 김희태 목사가 부임했다. 김희태 목사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인이 2015년 현재 재적 교인 7000여명 장년 주일출석 2500여명으로 성장했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15일 교회 설립 50주년 예배를 드렸다. 이날을 기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23일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를 설립했다. 아카페는 아가페와 카페를 합성한 이름이다. 실제로 일반인을 위한 카페가 아담하고 예쁜 교회 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교회를 위해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기 전 하나님의 은혜로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 교회 앞에 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 주변은 귤 농장과 농토로 둘러싸여 있다.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동광교회 오전 12시 3부 예배. 크리소스톰 같은 황금의 입과 푸른 초장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김희태 목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동광교회 설교단에 섰다. 그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논리적이고 재미있고 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부활하면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 앞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인데 그 당시 중국의 비단과 값이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마포는 최고의 의상을 의미하며 부(눅 16:19)와 정결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계 19:8, 14). 우리가 최고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로 말미암아 오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좌우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행복하세요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태풍 급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기 시작합니다. 이건 태풍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겠는가 하는 걸로 내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서 강 서안에 있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대단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5리 동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촌락 베다니에서 이제 진짜 강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예루살렘에 강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걸 잠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니까 더 큰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세계를 뒤엎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 2천년 역사 아니 세상 2천년 역사에서 예수님을 뽑아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크게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 초라한 나사렛 예수! 무슨 사건이냐.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감격을 온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회가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법이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존경받고 아이들도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없는 걸로 미루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18살 정도 동생 마리아는 15살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가 아픈 겁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질병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말합니다. 지금은 잠을 자도 잘 낫지를 않습니다. 수면제가 나오고부터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잠자면 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맛이 간 사람도 푹 자면 온전해졌습니다. 잠들었으면 병이 다 나을테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강한 태풍을 만들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가운데 도마가 말합니다. 그는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목수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잘 해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는구나 생각하고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결심도 좋고 참 남자다운데 허경영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 부활, 예수님 기적 못 믿겠다고요. 누구는 믿어지는 줄 압니까. 자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베다니 동네 입구에 마르다가 뛰어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마 그때 마르다의 모습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말 그대로 때맞춰 오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이제 오십니까 하는 원망의 말투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발 후퇴합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어린 두 자매가 남겨져 있으니까 이 슬픔을 가시게 해 줄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엇박자 코미디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대답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갑니까.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은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정답으로 가슴에 사무쳐서 나와야 합니다. 로봇처럼 컴퓨터처럼 스위치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소리를 하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의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마르다도 별 고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것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마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허경영이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는데 개표 결과 0.2% 득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9만7천여표)을 기록하여 7위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득표율입니다. 자기가 축지법을 쓰고 아이큐가 430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을 했대요. 여기까지 했으면 허풍으로 끝났을 건데 도를 지나쳤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한 겁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17대 대선 때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콩밥을 먹고 정신이 들었는지 요즘은 좀 엄한 소리를 덜 하고 노래를 합디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허경영은 사기꾼이 아니라 미쳤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기꾼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허경영보다 좀 더 하신 겁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못 믿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믿게 하시려고 나사로의 무덤까지 오신 겁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입관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사람이지 죽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고 해도 간덩이 큰 사람은 3일 동안 밥을 못 먹고 약한 사람은 30년 식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 더 흉악한 꼴 보기 전에 관 두껑 덮고 못질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냥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따를 것 같죠.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한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을 믿는 게 아니라 죽이고자 합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모의에 못이기는 체 하고 끌려들어가 죽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이 수용이 안 되니까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예수님 금요일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주일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낼 때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우는 곡(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게 전통 장례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가족묘에 안장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에 여인들이 그를 위해 울어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안식일은 참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울어 드리기 위해서 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와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 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를 동산 무덤 관리인으로 알았어요. 예수님 시신이 없으니까 그에게 시신에 기름도 바르고 곡도 해야 하니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때 그가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골치 아프셨을 것 같아요.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셔야 된다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 만날 때마다 “내가 네 할애비다”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들이 사랑하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모두 최대한의 속도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 말고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터키 해안 남부 지역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데 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 유학을 왔습니다. 그가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소식을 전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이상한 무리를 본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을 박살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그 도시를 경계로 이쪽 아시아에 항상 상주하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들 봐라 하며 그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거의 다마스커스에 갔는데 홀연히 하얀 빛이 그를 비추는 겁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번화가 직가(straight street)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거기서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온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때 사울의 머릿속에 있던 성경 지식이 재조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믿기만 하면 머리가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증거를 찾습니다. 스스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이 배반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망을 시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그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사람이 큰 자라는 뜻인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서진(西進)할 때 엄청난 태풍이 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해놓았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창세기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할 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자이십니다. 이것은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쯤 되면 그 예언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두셋만 있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것도 다 제자들이 지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판의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이 되면 재판에서 거짓말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증언해서 손해가 난다면 절대 거짓증언 안 한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직장을 잃고, 추방을 당하고, 거지가 되고, 목이 잘려 죽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데도 아시아보다 로마에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도망을 다니고, 거지가 되고,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부활의 소망,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삐삐를 사용하다가 좀 있으니 몽둥이 같은 이동 전화기를 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별 쓸 일도 없으면서 으스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최신식 스마트폰이 나와 누구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핸드폰 없을 때 전화기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볼 일이 있으면 이웃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숨을 몰아쉬며 우리 집 오시라고 합니다 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모두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행복합니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미래의 어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부활의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환란과 핍박을 이긴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광야에 산에 어디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메시아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게 오십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사기꾼들이 설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 죽었든 다 육체로 부활하여 동시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생명, 젊음, 경륜, 기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9일 오후 2시 제주도 아카페 교회 카페. 제주 제주시 선덕로 바다 앞 도두해수파크 찜질방에서 나와 해안로 정류장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17번 버스를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다른 한분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본 나고야 교회 목사님의 한국 사모님이었다. 그분도 제주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일본의 아들들 때문에 제주도 땅을 정리하려고 오셨단다. 정류장 건너에는 아침 선잠에 눈비비고 나온 것 같은 청색의 푸른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듯 밀려와 마음 깊숙이 할 말이 많은 듯 해안에 부딪혔다.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늘었다. 마침내 온 17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와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달빛빌리지 앞 푸른 초장 팻말이 있는 곳에 내렸다. 제주도 화석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김희태 목사가 아들 목사와 귤 밭을 맨발로 한 고랑씩을 맡아 매고 있었다. 차를 대접받은 뒤 두 달 전 설립된 근처의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로 갔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순대국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교회 뒤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는 평안교회 부목을 거쳐 1988년 인천의 희망교회와 풍성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했다. 그러다 그는 2015년 3월 23일 동광교회 50주년을 기려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설립한 아카페(A Cafe)교회에 부임했다.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두 사람은 총신 77회 동창이면서 절친이고 나이는 52년생인 권 목사보다 김 목사가 두 살 위다)가 1987년 동광교회 부임하실 때 제가 그랬죠. 교회 출석 교인이 2000명이 넘을 거다. 제가 말하는 건 장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입니다. 요새 통계로 말하면 7000이지만 주일 출석 장년 교인만 2000이 넘는다고 한 거죠. 그런데 김희태 목사가 안 믿어요. 그래서 제가 뭐랬냐하면. -김희태 목사: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제가 확신했죠. -권혁선 목사: 사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해 줬으니까 그 교회 저력을 알잖아요. 그런데 동광교회는 목사님만 좋은 분이 오면 가능한 교회죠. 문제가 많은 교회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에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의논하다 보니까 모르는 분이 오시면 그게 그거니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서 담임목사를 모시자 그런 겁니다. 그 결과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제가 가면 감당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 목사님이 가면 이건 틀림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큰 교회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가시면 2000명 됩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이 저보다 믿음이 없어가지고 그럴리 없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동광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됩니다 하면서 그때 김 목사님과 약속을 했어요. 2000명이 되면 저한테 선교비 천불씩 후원해 주기로. -김희태 목사: 그게 아니라 두당 1불씩 후원해 주기로. 2000명 넘어가면 2000불 하기로. -권혁선 목사: 2000명 훨씬 넘어갈 거라고 했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열티 계산 개념으로 두당 1불씩 하기로 했습니다.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선교지로 갔는데 안 주는 겁니다. -김희태 목사: 저는 두 가지 확신을 가졌어요. 2000명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목회 잘 하는 목사가 선교사 갈 일이 있겠느냐. -권혁선 목사: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요. 목회를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부터 다음 선교지를 어디로 가느냐 여기서 관두면 어디로 갈 것이냐를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일본을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 쪽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랬는데. -김희태 목사: 특별히 일본 낫토(대두를 낫토균을 이용해 발효시킨 한국의 청국장과 유사한 일본 전통의 식품으로 미소와 함께 중세 일본의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었다)를 좋아하죠. 우리 교인들도 낫토, 낫토해. 나는 안 좋아해요. -권혁선 목사: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여기서는 한인 목회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한인 목회를 하려면 문제가 뭐냐면 다른 목사들과 부딪칠 것 같은 겁니다.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분이 캄보디아를 가자고 해요. 캄보디아를 도와달라는 거죠. 그래서 가봤는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참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캄보디아 백성이 불쌍했습니다. 외국 나가서 공항에서 울어본 나라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나라 민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이 친구(김희태 목사를 가리키며)가 문제예요.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많이 도와줬죠. 그 동안 도와준 걸 계산해 보니까 200만불이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걸 다 해놓으니까 내가 왕 노릇 할 것 같은 겁니다. 김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들어와서 이 교회를 하게 된 겁니다. 김희태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비 2000불 약속했는데 교회가 도저히 형편이 안 좋아서 50만원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몇 십만원 보내고. 권혁선 목사: 사실은 2000불 이상 했어. 왜냐면 그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거고. 김희태 목사: 제직회에서 권 목사님 아는 집사가 있어요. 그가 막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집사님, 권 목사님한테 선교비 많이 준다고 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집사님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권 목사님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2000불씩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거 보내는 겁니다. 그 집사님 내려갔어 건강이 안 좋아서. -권혁선 목사: 그랬다고 그러데. -김희태 목사: 그런데 신장하고 간이 안 좋데. 신장 약을 먹으면 간한테 안 좋고 간 약을 먹으면 신장한테 안 좋아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네. 그래서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서한결 사모:(제주 해안가에서 만난 일본 나고야 교회 사모)네, 서양 의학적으로는 그런데 동양 의학적으로 진짜 몸의 원리를 알면 신장(腎臟)은 어머니고 간장(肝臟)은 아들입니다. 옛날에 어린애들이 아프면 엄마가 젖을 토해서 아이한테 줍니다. 신장이 약을 먹으면 간장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알고 한의학적으로 하면 아주 좋죠. -권혁선 목사: 양약으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서한결 사모: 한의학에서 그걸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고 합니다. -김희태 목사: 아이고 사모님 제주도 아카페교회 오시면 우리 노틀(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로 외래어 발음법상 라오터우얼로 소리 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노틀’이 됐다) 클래스가 죽음을 한 단계 올리겠네요. ―그래서 동광교회 장년 주일출석 2000명이 넘어서 선교비 지원이 잘 됐습니까. -권혁선 목사: 아니 2000명은 당연히 넘었죠. 넘었는데 500불밖에 안 보내는 겁니다. 제가 캄보디아 간다고 하니까 1000불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안 믿었습니다. 왜냐. 솔직하게 말해서 김 목사님하고 저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 말고 딴 데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요. 그러나 저하고는 절친이잖아요. 저한테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 파송 교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만원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후원금입니다. -김희태 목사: 그랬었구나. 20만원 내놔. -권혁선 목사: 왜냐면 이건 빤한 계산입니다. -김희태 목사: 친구라 못한 겁니다. -권혁선 목사: 그러나 보통 모르는 목사님들은 친구지간에 안 해 주느냐고 해요. 사실 친구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제삼자는 오히려 딴 데 도와주면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김희태 목사: 우리가 백 불 이백 불은 수십 군데고. 파송이 일곱 가정이에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가운데에서 친구한테 많이 보낸다는 건 명분을 세울 수가 없어요. -서한결 사모: 친구라는 걸 알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권혁선 목사: 온 교회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둘이 아삼륙(마작에서 쓰는 골패의 쌍진아, 쌍장삼, 쌍준륙 이른바 쌍비연이라 하여 좋은 패가 있는데 이 세 쌍의 패 끝 자를 딴 말로 단짝을 비유하거나 서로 호흡이 잘 맞을 때 쓰는 말)이라는 거 다 알아요. -김희태 목사: 게다가 가끔 들어오면 설교시켜야지. -권혁선 목사: 그런데 사실은 2000불이 아니라 더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캄보디아 교회 뭐 할 때도 천만 원 헌금해 줬지 -김희태 목사: 그랬던가. -권혁선 목사: 자동차도 두 대 보내줬죠. 뭐 이래저래 하면 솔찬합니다. 제가 자동차 가지고 사기 많이 쳤습니다. (동석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차를 일부러 안 사요. 오토바이 타거나 걸어다녀요.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오면 헌금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지내시면 되냐고. 일단 그 돈을 받아요. 간 다음에 전화를 해요. 내가 지금 원주민을 위해 그 돈을 써야 되는데 양해해 달라고 말해요. 저한테는 우선순위가 원주민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데 원주민보다는 당장 보이는 대상에 헌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목사님 차 사세요 하고 돈은 줘도 원주민을 위하는 데는 잘 안 주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받은 다음에 원주민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많이 우려먹었죠. 그러다보니 차를 안 타고 일부러 걸어 다닌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담임 목회할 때도 그랬어요. 여름에 제 방에 에어컨 달겠다고 해서 제가 달지 말라고 했어요. 유아실, 영아실, 사무실까지 다 달고 마지막에 내 방 달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서둘러요. 목사 방부터 달면 교육부는 안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사실은 고도의 정치죠. -김희태 목사: 그러다가 평생 못 다는 수가 있어. -권혁선 목사: 난 일 년 만에 다 달었어. -김희태 목사: 그거 하나님의 은혜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평생 에어컨 없이 지냈어요. -권혁선 목사: 야 진짜 못됐구나. -김희태 목사: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도 그 교회가 난리더라고요. 그런 사고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권혁선 목사: 옛날 그 목사님 점잖으시잖아요. -김희태 목사: 부흥회 가면 깜짝 놀래요. 그렇게 큰 교회가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어요. 광주도 여름에 굉장히 덥거든. -권혁선 목사: 저 인간이 좋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안 했다가 저 인간이 넥타이 돌려 매면 난리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좋게 이야기할 때 서로 잘하자. 넥타이 돌려 매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알아서 해라. -김희태 목사: (일본 교회 서한결 사모님을 보며) 사모님 모셔다 드릴게요. 가십시다. 서한결 사모: 제가 한번 걸어 가보죠. (동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모님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 카페를 나갔다.) ―(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저희는 좀 더 있다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 동광교회를 소개해 주었을 뿐인데 김희태 목사는 자기 가족들한테도 제가 가문의 은인이라는 말을 늘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실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권혁선 목사가 김 목사한테 어떻게 했다 이런 말 안 합니다. 처음에는 좀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수치로 느끼거든요. 목사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만 제 경우에도 보면 큰 은혜는 하나님과 부모만이 베풀 수가 있고 사람이 베풀면 서로 떠나게 됩니다. 뭐 그것이 인생이죠. 그런데 그런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절체절명(?體?命)의 일인데 나한테는 손 한번만 내밀면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도와줘요. 도움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대부분 얼마 안 가서 (내 추임새를 받아서)잊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욕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멀리 한 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모양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은 정말 큰 사람입니다. 사실 김 목사님한테는 제가 오히려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파닥파닥하는 못된 성질이 제가 있어요. 김희태 목사님하고 40년 우정이 유지된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김 목사님이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생 도움을 받고 삽니다. 제가 그러죠. 김 목사님 잘된 건 하나님께서 나 도와주라고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오히려 뭐 한 놈이 큰소리친다는 격이죠. ―같은 서울남노회 회원들 가운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님은 의리를 지켜요. 제가 복이 많아서 김 목사님을 사귀게 된 거죠. 저는 먼저 부모를 잘 만났어요. 아내도 잘 만나고 자식들도 좋아요. 저는 정말 성도들도 잘 만났어요.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좋은 형님이죠. 나이도 저보다 두 살 위죠. 저는 만 가지가 없는데도 막 채워져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은 정치도 하는데 막상 총회장은 되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순수한 거죠. 시대가 하도 순수하지 않으니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교도 살아 있어요. 사실 김희태 목사는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와 기도와 삶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이고 크리소스톰의 삶과 정치적 성향도 닮았다.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과 정치적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AD 407년 크리소스톰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갔다. 2015-05-03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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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제주도 선교사 김성욱 목사
    그레고리우스 1세는 수도원장으로 있을 당시 로마 시내 광장을 거닐다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 노예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하얀 피부와 반듯한 용모, 아름다운 머리카락의 노예는 대답했다. “안젤래(angelais, 영국).” 그레고리우스 1세는 노예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안제레(angele, 천사), 천사라구. 그렇게 불릴 만도 하군. 얼굴도 천사와 같으니.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의 후계자들이 분명하군.” 노예는 영국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저 멀리 낙후된 브리튼 섬의 angele, 즉 천사가 보내서 노예가 온 걸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64대 교황(재위: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이 된 이후에도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를 잊지 않았다. 597년에 그는 자기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섬나라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7년 6세기말 섬나라 영국 angelais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에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미개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시절 조선의 개신교는 국내에서의 신앙 전파는 ‘전도’, 해외는 ‘선교’로 구분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사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세상에서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의 주권도 없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선교사는 어디서 활동한 누구일까? 한국 개신교 역사가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하는 인물은 뜻밖에도 1908년 제주도로 파견된 이기풍(1868~1942) 목사이다. 이는 당시 제주도가 육지와는 언어나 풍습이 완전히 달라서 해외나 다름없는데다 실제로 바다 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190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는 당시 개신교 신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의 선교 활동을 자원했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20일 목포에서 제주도를 향하여 조사 한 분과 승선하였으나 소식이 없다가 44일 만에 무사도착이라는 전보를 목포의 가족들에게 보내 왔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활동한 기간은 1908~1915년, 1927~1932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만 12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제주도에 1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고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제주 시내에 있는 성내교회는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처음 세운 교회이자 그의 제주 사역 중심지였던 곳이다. 1908년 1월 중순 평양을 출발한 이 목사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4월 초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한 해녀를 만나 처음 복음을 전했고 얼마 후 몇몇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열었다. 현재 삼도동의 성내교회(기장)는 원래 제주 훈련청이 있던 자리로 1910년 매입해 교회로 사용했다. 교회 입구에는 수령(樹齡)이 300년이 넘는다는 팽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이기풍 목사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성내교회에는 또 이기풍 목사 기념비 등 그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또 한 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 야산에 자리잡은 이기풍 선교기념관이다. 예장 통합 총회가 1998년 5월 이기풍 목사의 선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이 목사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은 대지 1만600평, 연건평 2000여평에 4백5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실을 비롯해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으며, 2인실과 단체가 사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은 4백여 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獨老會·朝鮮耶蘇敎長老會獨立老會의 약칭)를 열면서 시작한 국내 장로교는 광복 후인 1952년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신파(高神派·'出獄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이었던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에서 비롯)가 별도의 교단으로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갈래의 교단이 나뉘게 됐다. 1953년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기독교장로회(기장)와 예수교장로회(예장)로 나뉘었고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를 놓고 이를 찬성하는 예장통합과 반대하는 예장합동이 각각의 교단으로 갈라졌다. 2008년 9월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 4개 교단이 제주도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김영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김용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 임명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장 문상득) 등 장로교 4개 교단은 오는 9월 22~26일 제주도에서 각각 총회를 갖고 수요일인 24일 오후 7시 제주컨벤션센터에서 합동예배를 드렸다. 이 합동예배는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9월 17~19일 제1회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열렸는데, 이때 안수를 받은 목사 7명 중 한 사람인 이기풍(1865~1942) 목사가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선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도 김성욱 목사를 만나려고 4월 15일 인천발 제주행 세월호 예약까지 했다가 사정상 그 다음 달 배편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었다. 해가 바뀌어 2015년 4월 8일 수요일 동광교회 김희태 목사 배려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그는 총신 졸업여행 때 제주도에 올 것을 결심했다. 서울 달동네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그는 구미 상모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1989년 7월 11일 제주이도교회를 설립해 자체 건물의 자립교회로 성장시켰다. 제주시 구남로에 있는 제주이도교회에서 수요 예배 후 담임목사 김성욱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구미공고를 졸업하고 염색공장 해양산업에 취직했는데 그 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 처음 간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예배소리 들렸어요. 그런데 입사서류에 예배 참석 서약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하는 반발심이 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마지못해 사인을 했습니다. 아침 7시에 30분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한 주일에 예배를 일곱 번이나 드려야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은 그냥 시간 때우기로 일관했죠. 기도를 할 줄 압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성탄절이나 여름성경학교 때 과자 얻어먹고 연극 보느라고 일 년에 두세 번 교회에 갔었죠. 그러다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믿어지게 됐어요. 내가 예수님을 언제 영접했느냐 하면 빌리 그래함 집회(1973년 5월 30일 저녁부터 6월 3일 저녁까지 12만 평의 여의도광장에 51만6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김장환 목사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때였습니다.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70명 되는 교회의 청년 몇 명이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어 통역을 통한 초정에 일어나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인솔 전도사님이 현재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님이셨습니다. 명일동에 교회 개척하기 전에 김삼환 목사께서 하일동 망월리의 해양산업 내에 있는 해양교회에서 10여년 사역을 하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해양교회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좀 까다로우셨거든요. 그분이 7개월간 나한테 전도를 하고 믿음의 기초를 세워 주셨어요. 1980년에 명일동에 명일동의 소리라는 뜻으로 명성교회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주도에 와서 목회를 하는데 명성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유명해져서 여기 계신 목사님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 근처에 방을 잡고 하룻밤을 자면서 수요저녁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수요저녁예배 때 설교 말씀하시는 게 해양교회 전도사 시절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겁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흐름과 스타일이 같고 그 시간에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말하시는 겁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방지일 목사님이시거든요. 예전에는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이실 때도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제 큰 교회 목사님이 되셨는데도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하는 폼이나 여러 가지가 너무나 흡사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워하면서 아는 체 할 엄두도 못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주도로 관광오신 명성교회 집사님에게 물어봤더니 김삼환 목사님이 옛날에 해양교회 계셨다는 겁니다.” ―해양교회가 어디 있었어요.“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 있었습니다. 하일동 바로 옆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가나안농군학교 조금 더 들어간 곳입니다. 강 건너 맞은편은 신앙촌 덕소죠. 김삼환 목사님이 제주도에 연합집회 강사로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감동을 받으시고 저희 교회도 한번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문하실 때 11년 된 그레이스로 모시니까 시동도 잘 안 걸리고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 기도도 해 주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기억을 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주 잘하세요. 김삼환 목사님이 떠나실 때 저한테 서울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면 한번 들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뒤 서울에서 연락이 와서 명성교회에 들렸더니 차를 한 대 준비했다 주시는 겁니다. 신앙과 목회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시력은 언제부터 안 좋았습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영양실조였는지 열병 때문이었는지 한번 크게 아팠는데 망막이 찢어지게 됐어요. 망막박리(안구의 안쪽을 덮고 있는 망막층이 찢어지면서 눈 속의 수분이 새어들어 가서 망막이 안구벽으로부터 들뜨는 병적 상태)라고 하죠. 중 2때 병원에 가서 알았어요. 열병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구미공고 실업계를 갔죠. 대학도 못 간다 생각하니 제 처지가 참 슬픈 겁니다. 직장 생활도 힘들 것이다. 군대는 가고 싶어도 안 받아줄 것이다. 이런 나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가난한 부모가 6남매의 다섯째인 내게 재산을 물려줄 처지도 아니고. 그러니까 앞날이 막막하고 절망이 되더라고요. 그때는 죽을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니 답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생각한다는 게 내가 죽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슬퍼할 가족 생각을 하니까 못 죽겠더군요. 그런 가운데 구미공고를 졸업하고 경기도 광주 망월리 염색공장까지 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무슨 기술이든 처음에는 청소 같은 쉬운 일을 하다가 염료로 색을 맞추는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게 되면 시각장애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구미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염색공장에서 7개월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가 있는 직장 골짜기로 보내시어 예수 믿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떻게 달라졌습니까.“대학도 못 갑니다. 무엇이든 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시력 때문에 힘듭니다. 결혼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저한테 시집을 오겠습니까. 그래서 죽자 했던 것인데 이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죄 용서 받은 기쁨이 일어납니다.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내가 살아야 되지 않겠나. 내가 한 사람이라도 살리거나 복음을 전한다면 인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소박한 꿈을 꾸게 되고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소망이 생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가다 막일도 했습니다. 저는 그걸 경험삼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 것이었습니다. 시멘트를 나르는 등짐을 지기도 하고, 곡갱이로 땅을 파기도 하고, 구멍가게도 하고 과일장사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습니다. 밑바닥 일을 하다가 집안의 친척을 통해 교육청 임시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행정공무원 시험도 처음에는 떨어졌지만 결국 합격하고 면접도 잘 봤는데 신체검사에서 시력장애로 떨어지는 겁니다. 지금은 장애인 의무 채용 규정도 있습니다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시력 때문에 군대 안 간 것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그 벽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시직으로 8년 정도 있으면서 통신대학을 해 행정학을 7년 만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격을 갖춰도 신체검사에서 안 되는 겁니다.”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구미제일교회를 다니는데 청년부 담당 목사님도 그러시고 주변에서 자꾸 신학을 해 보라고 그러더군요. 그래도 아무나 신학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먼저는 제가 성직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은 당시에도 제 생각에 목회자가 많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년을 미루다가 결혼 문제를 앞두고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던 결혼 문제가 풀리게 됐죠. 그래서 신학을 마치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까지 오게 하나님께서 구미상모교회를 통해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8살 되던 해 1월에 결혼하고 3월에 대구신학을 하는데 저는 통신대학을 마쳐서 3학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제가 시각장애인인데 누구한테 청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구미제일교회 자매(박찬혜 사모)가 저한테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 직장은 임시직 신분이고 앞길이 막막한데 어떤 자매한테 결혼해 달라는 염치가 생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김성욱 목사는 지금 봐도 잘생겼다고 말을 했다.) 아니 잘생기면 뭐 합니까. 경제력이 있어야 되고 직장이 번듯해야죠. 그래서 저는 앞길이 막막하고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해도 좋다는 겁니다. 신학을 해도 남들이 안 가는 곳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앞날이 정말 불투명하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각오한 터라 잘 견디더라고요.” ―시각장애의 약시(弱視)인데 정상인 같이 보입니다. “눈이 푹 들어갔거나 검은 안경을 쓰면 시각장애인으로 보일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고 정상인 같이 보여 참 감사하죠. 한 눈을 가리면 그냥 희미하게만 보이죠. 양쪽으로 보면 시력검안표의 위에서 두 번째 것까지 큰 글자만 보입니다. 시력이 0.2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은 가까이 오면 보입니다. 좀 떨어져 있으면 안 보입니다. 보는 범위도 정상인의 1/5정도 밖에 안 보입니다. 한때는 점자를 배울 생각도 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독일제 확대경으로 봅니다. 모니터를 볼 때는 화면을 키우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확대경을 들이대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는 요약을 해서 확대경으로 보면서 합니다.” ―설교할 때 보니 아주 자연스럽던데요. “오래 숙달돼서 그럴 겁니다.” ―어떻게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까.“총신 졸업반 때 김의원 교수 인솔로 이곳에 평생 처음으로 졸업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여행하고는 인연이 없었거든요. 그때 제주도는 우상숭배, 관광지, 열악한 교회 환경 등 인기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 사역지가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주도에 가서 목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구미상모교회 전도사 친구가 제게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정이 되어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1989년 구미상모교회의 파송을 받았으니 이제 26년이나 됐네요. 7월 11일이면 정식으로 26주년이 되는군요.” ―지난날을 생각하면 특별히 어떤 게 기억이 되시나요. “제주도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건강이나 실력이나 저보다 다 나은 분들이죠.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움이 많죠.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말씀이 더욱 은혜로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구미상모교회의 파송과 지원을 받아 개척의 특혜와 혜택을 많이 받은 목사이기도 합니다. 구미상모교회의 배경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생활비와 교회 건물 월세를 몇 년간 지원해 주고 교회 지을 때 1억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기도도 해 주시고 또 상모교회 기관들에서도 후원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전도국장 시절 90년대에 이도교회가 지하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 건너 길가의 작은 건물 지하 23평을 쓰고 있었죠. 거기서 6년 반 있었습니다. 그 후 땅을 사서 이쪽으로 오게 됐죠.” ―교세가 어떻게 되나요.“지금 교세는 어린이 포함 한 200명쯤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주일 장년 출석은 80에서 90명 사이죠.” ―1년 예산은 얼마나 되나요.“건축비까지 다 합쳐 2억 정도 됩니다.” ―부채는 얼마나 됩니까.“부채는 교회 증축할 때 5억이었는데 2억 2천 갚고 지금은 2억 8천 남았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1억을 후원해 주고 우리 교회가 헌금을 하고 해서 빚이 줄었습니다. 아이엠에프 같으면 어려울 텐데 지금은 이자가 많이 내려가서 이자 부담은 그렇게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헌금으로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실 때 목사님의 핸디캡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제가 제일 힘들 때가 처음 개척했을 때 두 번 철거해야 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주민들이 좋아하지를 않았습니다. 준공검사가 안 된 건물에 교회가 들어왔다는 것을 빌미로 구청에 고발해서 준공검사를 안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달 동안 철거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건물 주인하고 뒷집하고 건물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지하를 쓰고 있는 데도 용도변경을 안 하고 쓴다며 고발을 해서 철거를 하고 보름 동안 교회 예배당 사용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한 3년쯤 지나 시력 장애가 심해져서 길을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이지 않아 소리로 알아야만 하고 길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는 겁니다. 시력이 현격하게 나빠져서 사람이나 사물을 거의 못 알아보는 지경까지 간 겁니다. 그때는 교회가 기초가 선 것도 아니고 식구도 하나 더 늘어 둘째 딸이 생기고 지하실에서 어머니도 모시고 있는데 시력까지 나빠지니 절망이 오더라고요. 저는 운전도 못하죠. 다른 목사님들은 사역하고 전도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니까 꼼짝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런 상황 가운데 가이드포스트에서 1980년대 미국 드라마에서 맥가이버의 상관 배역을 했던 사람의 간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45세에 시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시력을 잃고 나서 생각하니 시력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45년 동안 보게 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시력을 잃거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가져가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을 못 봐도 기도는 할 수 있고 전화를 하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목회를 하자. 내가 못 하는 거나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목사님들이 해 줄 것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전에는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면서 심방을 하고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것도 못 하고 할 수 없는 그때부터 교회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찾아오는 겁니까.“예, 그러는 겁니다. 내가 뛴다고 교회가 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교회가 일어서고 지하실도 채워지는 겁니다. 그때 선교원도 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23평인데 실평수는 한 18평 되는 거죠. 2층을 임대하여 운영하던 어린이선교원도 어린이들이 그때 80명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려고 더 넓은 곳을 찾으니까 건물을 빌려주지를 않는 거예요. 계약까지 해도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형편은 땅 한 평을 사기도 어려웠습니다. 제주도는 임대료도 1년치를 선불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임대료를 빌려 집세를 내고 매달 갚아나갔습니다. 그런데 임대조차 힘드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게 몇 년도였습니까.“95년도였습니다. 사실 기도는 94년부터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땅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을 헌납하신 것과 성도들의 헌금, 대출금 등을 합쳐 222평의 땅을 샀습니다. 땅이 있으니까 조립식 건물이라도 지을까 하다가 지하실 예배당이라도 파자해서 예배당을 마련해 예배를 드리게 됐죠. 그리고 주변이 택지로 바뀌어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교회가 먼저 준비하자는 믿음에서 2011년에 지금의 예배당을 증축하고 리모델링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교회가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교회가 제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육지에서 오신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도교회가 이제는 제주도에서 모범적인 교회이겠는 데요. “자립하는 교회임에 감사하며 좋은 모델이 되고자 꿈꾸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총회적으로 이도교회가 자립교회 안에 들어간 겁니다. “예산이나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빚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총신 몇 회시죠. “79회입니다.” ―이제 고참인데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제가 겪은 바로는 목회자는 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도에 올 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라는 걸 반드시 기억하라고 권면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걸 고백하고 잊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이동수 집사님이라고 구미제일교회에서 만난 분인데 술 마시고 교회 앞에서 행패부리는 남편을 장로로 변화시킨 집사님입니다. 전국여전회연합회 회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겠죠. 그분의 권면은 제가 힘들 때마다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니 책임져 주시고 도와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세월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제2의 인생이 허락된다면 이도교회를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은퇴해 후임에게 물려주고 또 다른 사역으로 파송을 받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를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훌륭한 목회자라도 끝낼 때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회의 끝마무리도 아름답길 원합니다, 일평생 헌신하시다가, 은퇴 후에 대책이 없으신 목회자들을 위해 은퇴 목회자들의 자립 및 선교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주가 가장 적합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제주총회수양관 예정부지가 제주노회로 이관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저와 제주노회 목회자들이 갖고 있습니다,” ―제주수양관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 제주노회만 해도 70대가 몇 분 되고, 60대가 12명, 50대가 15명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갈 데가 없는 은퇴목사들의 자립 공동체가 정말 필요합니다. 총회가 2010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수양관 건립 부지 매입으로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에 대지 2414평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 계획하고 결의한 대로 수양관 규모를 축소해서 지어주시든지(총회임원회와 총회유지재단은 2010년 3월 19일 전국 노회 임원을 초청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기공예배를 드렸다), 아니면 저희 제주노회에 부지를 이관해 주시든지(통합측 총회는 100억대 이기풍선교관을 제주노회에 이관하였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2010년 구입가로 제주노회가 분할 상환할 수 있게 해 주시든지,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장기임대라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서정배 목사)는 2010년 8월 20일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을 건축위원회에 전권을 맡겨 제95회 총회 보고 전까지 설계 계약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했다. 건축위원은 변우상 이태선 최병현 이치우 목사, 최병철 김원래 천충길 장로 등 7인이다. 이와 함께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위원회 사업계획을 용역업체 예다움건축사로부터 보고받고 진행키로 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김삼봉 목사)는 2010년 11월 30일 총회장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수양관 착공시기를 공사 예상금액의 70%가 확보된 후 시행키로 가결했다. 이로써 180억원이 예상되는 제주수양관은 건축기금의 126억원이 마련돼야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그럴듯한 단서를 달아놓고 그들은 너나없이 몰려든 아이티 구호헌금 요리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서 올곧다는 제99회 총회장 백남선과 총무 김창수조차 한국과 미국의 총신과 납골당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2015년 4월 현재까지도 제주도총회수양관에 대한 2009년 제94회 총회(증경총회장이면서 현 법인찬송가공회 이사장 서정배) 결의 시행여부가 오리무중이다. 2015-04-28
    • G.PEOPLE
    • G.PEOPLE
    2015-04-28
  • Worship Designer 방성일 목사
    '지식 나눔 콘서트'나 '스타 특강쇼'처럼 요즘 TV를 틀면 흔히 볼 수 있는 강연 프로그램의 원조(元祖)가 테드 콘퍼런스다. 테드는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약자이다. 원래 테드는 1984년 건축가 리처드 워먼(Wurman)씨가 창립해 청중 800여명을 상대로 매년 한 차례씩 열린 소규모 행사였다. 그러나 2000년도에 워먼씨로부터 1400만달러에 테드를 인수한 앤더슨씨는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세계 지식산업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꿨다. 18분 강연의 기적으로 10억 명을 감동시키는 앤더슨은 말한다. “우리의 모토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의 확산(ideas worth spreading)입니다. 저희는 하나의 큰 '아이디어 기계'예요. 기계 위쪽 입구에 아이디어를 떨어트리면, 전 세계로 배급되는 거죠. 테드는 한 가지에만 집중합니다. 호기심. 그것이 이 방대한 콘텐츠를 이어주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테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대입니다. 테드는 선사시대의 캠프파이어 경험을 복원하려고 해요. 모닥불에서 불이 타고, 한 명이 물감을 잔뜩 칠한 얼굴로 앞에서 이야기해요. 또 누군가는 드럼을 치겠죠. 모두가 참여해요.” 효과적인 강연을 위한 테드의 무대 디자인 다섯 가지 규칙 가운데 두 가지 규칙 1. 이중 조명: 단선 조명은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지루하게 만든다. 무대 바닥과 천장 등에 조명을 이중으로 설치해 효과를 극대화한다. 2. 강연자는 청중석에서 무대에 올라서고 청중석으로 퇴장한다: 테드는 뒷무대가 없다. 뒷무대에서 입장하고 퇴장하면 시간이 낭비되며 청중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 꽃샘바람이 시샘하지만 그 바람이 겨울처럼 코끝을 아리게 하지는 않는 3월 4일 오후 2시 한 목회자를 대담하러 갔다가 젊은이 전도를 위해 테드의 앤더슨처럼 교회의 예배를 디자인하는 Worship Designer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하남교회의 방성일 목사다. 그의 서재는 두 면의 대형 책꽂이에 책이 빽빽이 꽂힌 것은 물론이고 바닥도 책들이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의 섬들처럼 쌓여 있었다. 커피가 나왔다. 잔에서 오른 김이 커피 내음을 실어 책 섬들 사이로 번졌다. ―어떻게 목사가 되셨습니까. 타고난 목회자로 보이시는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목사 자질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성품이나 나름대로 소양이 있었다면 목사가 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열등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목사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품행이나 모든 면에서 목사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되기 전에 다른 꿈이 있었습니까. 원래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 어른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직업은 당시의 화이트칼라인 면사무소 면서기였습니다. 농사꾼에게 가장 인기 직업이었죠. 당연히 제 부모님도 늘 제게 그런 소망을 말씀하셨어요. 공무원이 되라고요. 그래서 저 자신도 자연스레 그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세무직공무원이나 검찰직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공부도 쉽지 않은데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당시 세무직공무원 시험은 경쟁률이 120대 1이나 했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죠. ―그러면 목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했습니까. 그 당시 경북 경산의 우리 마을에 아주 잘 믿는 장로님이 담 너머 이웃집에 사셨어요. 그 집은 잘 믿는 집안입니다. 그 장로님 딸이 같이 자란 내 또래였어요. 그 영향으로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우리 부모님은 농사꾼이시니까 도시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잘하시지는 못 했지만 교회는 그냥 다니시는 수준이었어요. 누나 등에 업혀 교회 다닌 기억도 지금 나네요. 내가 목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웃집 장로님이 세상사로 시달리던 저한테 권유를 했어요. 나보고 신학을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그 권면이 제가 목회자의 길로 걷게 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목회 경력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담임목사로 미국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엘센트로 한인교회에서 이민 교회 한번 목회했고 한국에서는 하남교회가 처음입니다. 사실 총신신대원 다닐 때 하남에서 교육전도사 생활했어요. 졸업반 때 제가 대구로 내려가서 청소년교육선교회 지역총무를 하고, 교회 교육전담 교역자, 교회가 파송한 교목으로 활동을 했어요. 그렇게 청소년 사역을 6년 정도 하다가 1996년도에 미국 유학을 갔어요. ―미국 유학을 가시게 된 어떤 동기가 있었습니까. 그게 제가 미국을 처음 간 게 1995년이었을 겁니다. 한번 가서 학교를 돌아보고 돌아와서 1996년에 가방을 싸가지고 유학을 갔어요. 교육목사, 선교단체 총무, 학교 교목으로 청소년 사역을 6년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역에 대한 미래가 안 보이는 거예요. 세상은 급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정치, 교육, 경제 모든 게 미국을 따라가니까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10년 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청소년 사역을 잘하고 싶었어요. 이 아이들 사역을 잘하려면 미래를 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선겁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먼저 조사를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청소년학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알아보니까 샌디에이고에 복음주의 기독교 사립대학이 있는데 크리스찬 헤리티지 칼리지(Christian Heritage College)였어요. 지금은 이름이 샌디에이고 크리스찬 칼리지(San Diego Christian College)로 바뀌었어요. 샌디에이고 엘카혼(El Cajon)에 있는 그 학교 안에는 쉐도우 마운틴 처치(Shadow Moutain Church)라는 백인들 교회가 있는데 3,000여명 모이는 큰 교회였어요. 그 교회 담임목사가 이 대학의 설립자예요. 가보니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교가 있고 이 대학에 청소년학과가 있어요. 학부에 Youth Ministry가 있는 거예요. 게다가 1970년 1월에 설립된 이 대학의 설립 동기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근거한 창조론의 틀 안에서 교육할 수 있는 대학이 필요해서였어요. 그래서 그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3년만 있다 돌아오겠다고 아주 간 크게 보따리 싸들고 혼자 갔어요. 그런데 한 학기 지냈는데 너무 외로워서 혼자 못 살겠더라고요. 그 학교에는 당시 한국인이라곤 나뿐이었어요. 동양계도 일본인과 홍콩인 둘뿐이에요. 서른일곱이었는데 한 학기동안 기숙사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한 학기 마치고 방학 때 나와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죠. ―미국 비자가 참 어려울 때였는데요. 맞아요. 참 비자가 안 나올 때였어요. 돈도 없지 영어 실력도 짧지 비자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그냥 용기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어요. 94년 1월 겨울에 강사로 청소년연합수련회를 기도원에서 인도했어요. 그런데 새벽기도회 마치고 내 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얼마나 말씀으로 위로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시편 32:8을 통해서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산에서 내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무 감동스럽더라고요.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구나. 그래서 바로 비자 신청했어요. 그랬는데 놀랍게도 비자를 바로 주더라고요. 담당자가 바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 인도하심이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너무 쉽게 가족과 함께 미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하나님 인도하심이었어요. 11년 살다가 한국으로 왔어요. ―11년 사셨으면 미국에서 목회 사역도 하셨겠군요. 거기 가서 한인 목회를 했죠. 한인 교회 목회를 잘하다 왔어요. ―저도 시카고에 1년 있었어요. 목사님 같은 분 오시면 교인들이 좋아하죠. 제가 이민 목회를 했는데 한 5년 지나니까 그곳이 좋더군요. 사회 환경도 느긋하고 우리 가족도 다 좋아하는 거예요. 영주권은 아이 때문에 받게 됐어요. 영주권 받은 지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어요.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2007년 4월에 왔는데 2006년 봄에 가족회의를 했어요. 우리 이제 미국 살자고 말입니다. 다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민권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아이 시민권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아내 시민권이 나오고 나는 맨 나중 12월에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달 뒤 해가 바뀐 1월에 하남교회에서 청빙이 온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사실 2006년 가을 대구의 한 교회에서 청빙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교회가 나를 9 10 11월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연말에 들르겠다고 말해 놓으니까 그 교회는 계속 다른 사람을 설교시키면서 나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보내신다는 마음의 감동이 전혀 없어요. 불안하고 그래요. 그래서 계속 못 갔죠. 그러다 미국 시민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교회에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 교회가 1월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연락했어요. 그 교회 청빙 문제를 그렇게 다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인가 이 하남교회에서 청빙 연락이 온 겁니다. 나는 너무 놀랐죠.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남교회는 실제로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참 이야기가 긴데 제가 신대원 시절 하남에서 3년여 모시고 있던 분이 김윤규 목사님(하남예일)이세요. 월간목회 편집장을 오래 하셨죠.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여기 추천해 주셨어요. 그분과 헤어진 지 20년이나 됐는데 저를 기억하고 이 교회에 추천해 주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당시 이 교회 임시당회장이셨습니다. ―저도 출판관계로 인연이 있는데 김윤규 목사님 정말 좋으신 분이죠. 김 목사님이 임시당회장이시니까 저를 모든 면에 이 교회에 맞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 장로님들이 그럼 한번 보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서류도 낼 겨를이 없이 바로 청빙 목사 세 명의 후보군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까지 네 명이 되었죠. 네 사람이 다 설교하고 교회가 투표를 했어요.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투표를 한 겁니다. 먼저 두 사람이 결정됐어요. 두 사람을 놓고 당회가 또 투표를 했어요. 그래서 결정된 한 사람을 놓고 전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를 한 겁니다. 저는 투표를 세 번 받았어요. 하나님이 하시니까 순적하게 진행됐어요. ―하남교회가 전통을 따라서 은혜롭게 청빙 절차를 밟았네요. 기도하고 투표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거죠. 다른 분들도 아주 강력한 후보들이었는데 제가 됐어요. 하나님 은혜죠. 저는 모르고 왔는데 와 보니까 청빙위원들이 정한 열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조건에 딱 맞았다는 거예요.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일이니까 다 순적하게 이루어지더라고요. ―담임목사로서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데 교회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지식보다도 교회는 성도에게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고향인 겁니다.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 자라고 힘을 얻듯이 교회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가 지치고 힘들면 어머니한테 와서 용기를 받고 또 세상으로 나가고. 그래서 교회가 어머니 같다고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엄마를 찾듯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 교회 해 보니까 두드러지는 게 한국에서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외롭고 괴로우니까 교회로 오잖아요. 어떤 면에서 교회가 엄마지요. 그 사람들 인도해 주고 품어 주고 격려해 주고 돌보아 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민 교회를 목회하면서 참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곳이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이 위로도 얻고 힘도 얻는 거죠. 우리가 몸이 병들면 병원가고 약 사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면 갈 데가 없잖아요.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가나요.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우면 혼자 끙끙 앓고 있거든요. 그러다 누구 만나면 고작 푸념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지 않습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정신과에 가죠. 그전에는 안 가거든요. 결국 마음이 상한 자는 갈 곳이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이민자들은 더욱 그렇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살다가 마음이 상하고 아프면 어머니한테 와야죠.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이전하고 이렇게 성장시키셨는데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참고로 제가 2007년 4월 8일 부활주일에 부임 설교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월요일 서울동노회가 열렸어요. 노회 참석해서 이명 허락을 받은 바로 그날 저녁 장로님이 내 이름의 도장을 새겨가지고 와서 이 땅 계약을 했어요. 이 땅은 제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구입하기로 결정을 해 놓은 거죠. 그러니까 계약만 제가 한 거죠. 그때부터 설계와 건축은 제가 다 관여하게 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이런 형편을 모르고 교회가 힘들테니 이삼 년 안에는 교회를 건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교인도 잘 모르고 하니 말입니다, 그게 일반 목사들 생각이죠. 그런데 와 보니 상황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지나고 나니까 그때 잘했지 싶어요. 그런데 이 예배당 장소를 놓고 갑론을박이 참 많았어요. 원래 교회가 있던 장소를 주장하는 측이 있고, 이전 결정을 한 지금의 장소를 원하는 측이 있고, 제삼의 다른 장소를 생각하는 측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이민 교회에서 한번 겪었어요. 미국에서 작은 예배당을 하나 지었는데 상황이 똑같았어요. 땅 계약 진행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살려 진행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잘됐어요. 하나님께서 한국 목회를 위해 미국에서 저를 미리 훈련을 시키신 거죠. ―그 당시 지금의 교회를 크게 지으신 거 아닙니까. 제가 아니라 온 교인이 힘을 다해 지었습니다. 사실 부채도 꽤 되긴 하지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교회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저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정이 많아요. 저는 미국에서도 장로님들하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저는 스스럼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저를 처음 봤을 때 놀랐을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선을 보러 왔는데 편하니까 백팩을 메고 왔어요. 목사는 그렇게 안 다니잖아요. 그런데 와서 설교를 하고 당회실에서 면담을 하는데 저는 그냥 편하게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어요. 오랜 사귄 사람들처럼 막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장로님들이 놀랬을 거예요. 저는 잘 보일 일도 없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니 참 편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얘기 했어요. 사실 저는 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교회 건축 문제를 얘기할 때도 그냥 자유롭고 편하게 하는 겁니다. 목사가 그러니 교인들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단호함과 엄격함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교회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반세기가 넘은 51년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죠. ―목사님 겉보기에는 점잖고 매끄럽게 보이는 데 다른 면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런 내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희 교회가 오래 되다 보니 전통을 고수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회를 할 때도 기도를 많이 해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이 교회 회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회는 통성 기도를 많이 하고 회의를 합니다. 이렇게 했더니 회의도 순조롭고 시간도 많이 안 걸려요.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방식의 회의네요. 저희는 회의를 할 때 순서에 따라 발언을 하고 조용하게 진행합니다. 회의는 의견 조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가 되어야 하고 발언의 기회가 공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견 조율이 어렵지 않아요. ―어려운 걸 쉽게 처리하십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죠. 하나님께서 사람들 일을 잘 아시니까 캘리포니아 끝자락에 있는 저를 하남교회에 데려다 놓으신 거예요. 교회가 평안해지고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 당시에는 교회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오고 3개월 만에 좋아졌어요.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씨름하죠. 그러니까 현대교회의 예배 핵심이 설교인데 설교에 맞춰 예배를 디자인해야 합니다. 저는 빅 아이디어 큰 생각 즉 큰 주제 하나를 정해요. 이 달 같으면 지난주에 했는데 지저스 스토리Jesus Story 즉 예수님과 나와의 이야기인데 이걸 의역해서 인생의 봄이라고 해요. 3월이니까 봄이 오잖아요. 이 봄에 맞는 메시지 다섯 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성도들의 상황입니다.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에 맞춥니다. 이 다섯 개를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주제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자료들을 찾고 강단에 디스플레이를 합니다. 주보도 거기에 맞춥니다. 주보에 예고편 식으로 다섯 개의 주제도 보여 줍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다음 주에 어떤 말씀을 듣게 될지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이 예컨대 히든카드라는 제목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맞는 영상을 제작합니다. 다음 주 영상을 찍으러 내일 담양에 간답니다. 한 팀이 갑니다. ―매주 그걸 만들면 상당한 시간과 예산이 투입되겠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전문 방송 팀이 있어요. 풀타임 사역자들입니다. 영상 음향 조명 팀도 있습니다.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도 있어요. 등장 배우는 교인들이 봉사해요. 남의 것을 사용하면 저작권 침해라 방송에 내보낼 수가 없어요. 설교 한 편에 맞춰 이 모든 것들이 종합해 사용됩니다. 설교는 건축의 기둥처럼 큰 주제로 세우고 거기에 맞는 소주제를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채웁니다. 그렇게 디자인된 예배 시간에 제가 설교를 합니다. 말하자면 아픈 사람이 약국에 오면 열이 나는지 기침이 나는지 들어보고 진단해 약을 조제해 주잖아요. 그런데 약국에서 진단 없이 미리 약을 지어놓고 오는 사람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약사는 환자의 상황에 맞는 약을 주는 게 약사의 본분이죠. 목사는 성도의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 년치 주제를 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상황을 위해 매달 주제를 정합니다. 그 달이 끝날 때쯤 다음 달 주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인 중심의 설교를 준비해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서는 한 달에 얼마나 하십니까. 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만 서점에 가면 30권은 삽니다. 직원을 시켜 사는데 30권 더 사면 샀지 덜 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금방 봅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컨대 이 책을 보면 목차를 보고 필요한 곳을 찾아 읽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본전 다 뽑은 겁니다. 소설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음 책을 읽는 겁니다. 30권 사오면 금방 다 읽게 됩니다. 그리고 저렇게 쌓아놓죠. 저는 독서 때문에 머리 아프거나 부족을 느끼진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은 독서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다양한 책을 섭렵합니다. 성도들의 상황에 맞추려면 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성경 본문 연구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두란노가 발간하는 《생명의 삶》을 온 교인이 보기 때문입니다. 1997년 부임한 해 여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걸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걸 매월 정기구독으로 700권을 받습니다. 그 본문을 가지고 새벽기도회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본문 묵상이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 본문을 돌은 게 아마 몇 차례 될 겁니다. 본문이 정해지면 주석도 보죠. 필요한 단어는 원어도 찾아봅니다. 그러나 본문에 그렇게 매이지는 않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성경 연구보다 묵상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죠. 그래서 지난달의 주제가 하나님을 체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Testimony 증언이라 했지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간증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논리나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아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종교적인 사람 즉 종교인입니다. 지난 한 달 그걸 설교하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리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사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성도들과 은혜의 시간을 많이 나누었죠. 제 개인적으로는 참 풍성한 한 달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데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만 했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한번 들었는데 자기계발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았는데 실제 내용은 그렇지가 않군요. 제 설교를 그렇게 하는 의도는 교인 가운데 청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교회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교회가 연령층이 높았습니다. 제가 부임할 때 마음에 부담이 될 만큼 교인들 머리가 하얀 거예요. 그래서 포커스를 바꿨더니 지금은 삼사십 대가 교인들 주류를 이룹니다. 아주 많아요. 그런 젊은 사람들 때문에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안목을 가지고 젊음의 한때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제 설교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도전 의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 때문에 다시 시작하고 도전한 사람이 젊은 사람 가운데 많습니다. 주부들 중에서도 자격증도 따고 학위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무실 직원도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놀랍네요. 목회자들의 사고가 일찍 늙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이 있고 젊은데도 나이 든 사람이 있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사고(思考)가 나이 든 목사가 있어요. 관건은 저도 나이가 들어도 젊음의 사고를 가지고 목회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는 자리에 계속 있지만 제 사고가 늙어버리면 이 사람들은 사라져요.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교회는 지금 삼사십 대 교인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배도 1부 2부는 정장 차림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3부 4부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헤드셋을 하고 강대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설교를 합니다. 3부와 4부는 조명도 회중석은 좀 어둡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미국 교회에서도 그런 걸 많이 봤습니다. 극장처럼 아주 어두운 교회도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 약간 어두우면 안정이 돼요. 어두우면 숨을 수가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들의 심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그렇게라도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편안히 예배드리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 배려가 젊은이가 교회를 올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집중을 위해서도 좋은 것 같은데요. 청년들은 퍼포먼스에도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어쨌든 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면 은혜가 안돼요. 환하면 불안해지는 경향도 있어요. 나이든 세대는 예배는 환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나름대로 선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멕시코에 교회를 하나 세워 봐서 아는데 선교 전략이 정말 필요해요. 선교지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후원받은 재산을 처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의를 여러 사람 이름으로 해야 됩니다. 서로서로 모르게 하고 후원한 교회의 담임목사만 아는 거죠.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게 맞죠. 그러나 선교에 대해 성도들도 보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교의 방향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냥 선교사 보내고 후원금만 보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교를 하게 되면 전략적인 선교를 할 것이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지에 학교도 세우고 센터도 세우려고 합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 수도 같은 데서 좋은 대학의 젊은이들을 선교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없는 시골보다 도시의 젊은이들을 선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가 바뀌는 것은 젊은이 선교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우리 세대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대였습니다. 밤새 부르짖고 울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가슴 세대고 요즘 세대는 머리 세대 같아요. 우리는 열정을 앞세우는데 요즘 세대는 데이터와 정보를 중시하는 것 같아요.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두 학기 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 제 후배들 아닙니까. 늘 이런 얘기를 자주해요. 우리 시대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목회자들이 시대에 맞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지만 그 대신에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그 심령을 채워줄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 설교는 많은 경우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겉은 멀쩡한데 속이 병들잖아요. 계절의 봄은 때가 되면 와요.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리는 봄은 그냥 누구에게나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봄은 초청하지 않으면 오지 않아요.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영접하고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내 인생의 진정한 봄이 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벌고 출세해도 인생의 봄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봄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한 젊은 목사들의 사랑과 헌신이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2015-03-21
    • G.PEOPLE
    • G.PEOPLE
    2015-03-21
  • 한국의 스펄전 장대영 목사
    침례교 뿌리는 종교개혁 후기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9년 홀랜드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 존 스미드(John Smyth)는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는 세례를 행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침례교 운동은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 런던의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과 맨체스터의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과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침례교회로 수많은 청중을 이끌었다. 2009년 침례교는 설립 400주년을 기렸다. 찰스 해돈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스펄전의 회심은 15세 때인 1850년 1월 6일 일어났다.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눈보라 때문에 콜체스터에 있는 한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스펄전의 마음에 구원의 메시지를 열어주셨다. 그를 감동시킨 성경 본문은 이사야서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였다. 그의 자신의 회심에 대한 회상은 이렇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만, 만약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어느 일요일 아침 대단히 심한 눈보라로 나의 예배당 가는 길을 막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 있지나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날 아침 나는 눈에 길이 막혀서,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조그만 한 교회에 불가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중은 모두 열 두 서넛밖에 없었으며 목회자도 안 나왔습니다. 아마 눈에 길이 막혔던 모양이었습니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 양복장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두장이 같아 보이는 이가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딴 소리는 할 재능이 없어보였습니다.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하는 이사야 45장 22절이었는데 이 사람은 본문을 온전히 읽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경 봉독을 들었을 때 제 생각에 그 말씀에는 제게 대한 어떤 소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를 자주 바라보십시오. 예수는 '나를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큰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았다! 오오,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여기까지에 겨우 한 십 분 동안을 소비하고 나서 이 설교자는 밑천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강단 바로 밑에 앉았던 나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처음 나온 사람인 줄을 알아 차렸던 모양입니다.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어 "청년, 당신은 왜 그리 가련한 모양을 하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청년이 이 성경 본문을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나 가련할 것이고 죽어서도 가련할 것이요. 그러나 이제, 이 시간에 이 성경을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소." 그는 한층 소리를 높였습니다.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라! 지금 바라보라!"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리에서 놀라 일어났으나, 그러나 그 때 나는 예수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구름은 걷히고, 나는 햇빛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 명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아아, 그 누가 이 진리를 좀 더 일찍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더면..."나를 앙망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고한 이 위대한 진리를! 그때부터 스펄전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다. 장대영 목사의 회심도 스펄전처럼 이루어졌고 목사 안수도 17세 때 받고 부흥사로 나섰다. 그의 당시 충청도는 성령의 바람이 뜨겁게 불던 곳이었다. 부흥회를 얼마나 많이 다녔던지 충청도 지역이나 섬 지역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2015년 1월 10일 10시 수도중앙교회 당회장실에서 장대영 목사를 만났다. 그리 크지 않은 당회장실 벽에 수양관 전경이 찍힌 큰 사진틀이 걸려 있었다. ―목회는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목회 시작은 감리교에서 했어요. 그러다 마경일, 윤덕수, 윤창덕 등으로 인해 교단이 갈라지는 바람에 그 바람을 피해 장로교로 왔어요. 그런데 김희보 목사와 박아론 목사가 또 갈라지는 바람에 분열의 아픔과 피해를 또 겪었지요. 어쨌든 이제는 평안해져서 참 은혜롭습니다.” ―사역 기한은 어떻게 되십니까. “목회사역 45년, 부흥사역 45년입니다.” ―두 사역이 다 같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나이에 비해 내가 목회를 오래 했어요. 거기에는 군 면제도 한몫 했지요.” ―독자이셨습니까. “아니요. 대전 병무청에서 누락시키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그 당시는 전도자나 목회자가 많이 없던 시절이었죠. 하나님 복음 사역이 더 급해서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은혜죠. 그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병역 문제를 엄히 다스려서 미국 보낸 장관 아들도 불러들이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선대 때부터 내려온 신앙의 집안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내 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핍박도 많이 받았어요. 그 당시 이강산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분들에게서 은혜를 받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모양입니다.” ―그럼 몇 살 때부터 믿었습니까. “저는 그냥 주일학교부터 다녔어요. 육이오 끝난 뒤였는데 여덟 살부터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니까 어린애가 별스럽다고 유교 집안에서 핍박받고 그런 거지요.” ―교단 안에서 친한 분은 누구셨습니까. “최승강 목사. 참 친했죠. 그런데 좀 일찍 떠나고 말았어요. 최은혜라고 딸이 있었는데 굉장히 사랑했죠. 그런데 그 딸때문에도 마음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에요.” ―부흥사는 어떻게들 되시는 겁니까. “옛날에는 은혜를 받으면 부흥사가 되었어요. 60년대 70년대 성령운동이 일어나니까 그 당시 체험하고 은혜 받으면 사명을 강조하던 시절이었어요. 목회자도 많지 않던 시절이고. 또 성령의 체험 속에서 뜨거워지니까 복음 전하는 일이 인생의 최고 목표로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사명감에 대개 부흥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성령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이 충청도였어요. 성거산 집회, 흑성산 집회, 계룡산 집회 등에서 이성봉 목사, 박제봉 목사 등의 부흥회로 성령운동이 충청도에서 빨리 일어났어요. 옛날 오관석, 김충식, 강달희 등을 보면 다 충청도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삼각산에서 집회를 하다보니까 서울에서도 성령운동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경상도 쪽에서는 용문산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육이오 이후에 성령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 사실 충청도입니다. 처음에는 이북출신 부흥사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충청도에서 제일 많이 부흥사가 나왔죠.” ―그러면 목사님은 몇 살 때 부흥사로 소명을 받으신 겁니까. “열일곱 살 때.” ―그 때부터 바로 부흥회를 시작하신 겁니까. “당시는 열일곱 살만 되도 주일학교 선생을 다 맡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열아홉 살 정도부터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72년에 전도사로 제천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어요.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정식으로 부흥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김제 남산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연줄연줄 계속 나가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신안 앞바다 섬에 있는 교회는 다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나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죠. 근래에는 도시 중심으로 부흥회를 다니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살다보니 벌써 45년이란 세월이 지나가버린 겁니다. 근 반백년 부흥사역입니다.” ―목사님 기록을 보니까 목회사역 기간과 부흥사역 기간이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분이 다 계시나 했습니다. 제가 총회 전도국장 시절 일만교회운동을 하느라 부흥사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부흥사들 설교가 중복되고 한정되어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어떻게 하십니까. “부흥사들이 은사를 가지고 설교를 하니까 제한적인 설교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 설교나 부흥회 설교나 폭을 넓혀서 하고 있습니다. 부흥회 설교다 해서 말씀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부흥사일지라도 설교를 말씀 중심으로 해야지 열매가 있고 생명이 깁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으로 하지 간증 집회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간증하다보면 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하다보면 자기를 확대시키게 되요. 거짓말도 하다보면 습관이 돼서 자꾸 하게 되고 결과가 안 좋게 되죠. 게다가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시지를 않아요. 내가 좀 부족해도 말씀 중심으로 하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은혜가 있게 되죠. 그러다보니 제 부흥회는 한 교회에서 여러 번 초청해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승강 목사 교회 같은 경우에는 일곱 번이나 초청을 받았어요. 그런데 일곱 번째 하려는데 최승강 목사가 소천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후임 목사가 초청을 해서 그 교회 부흥회를 일곱 번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병헌 목사의 인천 낙원제일교회도 그 정도 했죠.” ―최병헌 목사도 부흥사인데요. “그 분이 내 어렸을 때 간증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나를 초청했는데 여덟 번인가 했어요. 나는 최 목사를 몰랐는데 최 목사는 나를 잘 아는 겁니다.” ―목사님은 부흥사로서 화려한 경력을 가지신 분인데 선전은 안 하신 것 같네요. “나는 나 자신을 선전하거나 하지를 않고 열심히 부흥회를 다녔어요. 그런 걸 하면 죄인 줄 알았어요. 보수적이었죠. 우리는 애를 키워도 품에 안고 다니면 큰일 난 줄 알았으니까요. 성경대로 사명자는 부모형제를 버려야 된다고 믿었죠. 그러다보니까 내 자신을 알리는 일은 꿈도 못 꿨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더 오래 하는 것 같아요.”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는 한 주 전에 본문을 정하죠. 그렇게 해야 부흥회를 주일 저녁부터 나가니까 설교를 준비할 수가 있죠. 마음속에 설교 본문과 내용을 담고 지냅니다.” ―설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시는군요. “그렇죠. 생각을 많이 합니다. 목사가 설교 생각밖에 더 있어요. 사람 보는 것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교훈과 뜻을 발견하고, 그렇듯 항상 설교 준비에 마음이 꽉 차 있어요. 주부가 식사 준비를 위해 반찬을 늘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설교 원고를 씁니다.” ―설교를 잘하는 김동호 목사도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하더군요. “아 그래요. 저도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나 깨나 설교 생각이죠. 그게 생명이니까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집사람하고 여섯 살 차이에요. 내가 좀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33살에 했으니까요. 기다렸다가 했어요. 그때는 시절이 가난하고 세대주의가 강할 때라 주님 빨리 오시기를 바라던 때인데다 저는 빨리 주님 오셔야 한다는 믿음도 있어서 결혼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면 목사 사모하면 되겠다 싶어 기다렸습니다. 믿음도 좋고 얼굴도 예뻤어요. 교회 봉사도 잘 했죠.” ―자녀는 어떻게 되십니까. “일남일녀입니다. 아들이 재작년에 목사가 됐습니다. 지금 캐나다 유학 가 있습니다. 딸은 예능 쪽인데 여기서 대학 나와 독일 유학 가서 바이올린 전공했어요. 그래서 스투트가르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있어요. 아직 미혼입니다. 32살인데 유학파들은 결혼이 늦어져요. 독일은 대우가 좋잖아요. 그러니 갈등이 많죠.” ―어떻게 딱 둘만 나셨어요. “우리 형제가 많아요. 내가 십 남매에 다섯째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많은 건 그렇게 원하지 않게 되죠.” ―자녀는 어떻게 키우셨어요. “아들은 아내가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을 했어요. 아들이 커서 신학을 하는데 나는 목회자가 하도 많으니까 그만 두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떠봤어요. 내심 안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본인은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후회가 되는 건 아들한테 너무 엄하게 대했다는 겁니다. 집에서도 볼 때마다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딸은 그렇지 않았는데 아들은 내가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내 앞에서 한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감정 표현을 나한테는 전혀 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주 자그마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좀 마음이 아픔니다.” ―목사님이 화를 내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가 잔소리는 안 해요.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어려워하는 겁니다. 너무 어려워하니까 그 당시는 키우기는 편했는데 나한테 너무 눌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유학으로 멀리 떠나고 나니까 마음의 빈자리가 더 큰 것 같네요. ” ―어디로 갔습니까. “캐나다 밴쿠버로. 공부하고 적응하려니까 힘든 모양입니다. 손녀가 둘입니다.” ―며느리는 뭘 하십니까. “이대 간호학과 나와 이대 부속병원에 있다가 결혼을 했죠. 지금은 내조만 하죠. 애들도 잘 키워요. 우리 손녀가(손톱을 내밀며) 요만큼 한마디도 나한테 반말이 없어요. 백 프로 존댓말을 써요.” ―아드님이나 따님도 목사님한테 존댓말을 쓰게 하셨겠죠. “교역자도 기도할 때 말씀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데 그런데 손녀는 말씀하시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해요. 애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며느리가 참 잘 가르친 거겠죠. 그리고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까 손녀 보는 재미로 사는 게 상당해요. 그 아이만 보면 엔돌핀이 나오는 것 모양입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집에 오면 내 품에서 자고 가곤 했어요. 이제 떠나고 나니 얼마나 허전한지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여섯 살 아이인데 나한테 오면 내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거짓말 하는 줄 알아요. 못하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언어의 마술사라고까지 했어요. 아이한테.” ―목사님은 성격이 어떠십니까. “우리는 외모로만 차분한 것 같지 내면은 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빨리 하고 모든 것이 조금 지체하는 걸 못 보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시간도 칼날 같죠. 내 위치가 목사니까 겉으로 억제하는 것이지 실상 속으로는 성격이 굉장히 빠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시작되면 잠을 못 잘 때가 많아요. 생각을 거듭 하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늘 잠이 부족해요.” ―수양관을 보면 규모가 굉장한데요. 지금 이만한 일을 이뤄놓으려면 굉장히 큰 일인데요. “잔디만 2만 5천평입니다. 은혜의 전당 옥탑까지 내부는 다 대리석을 붙이고 외부는 화강암으로 했어요. 이런 수양관은 전국에 하나뿐입니다. CTS의 내 영혼의 노래 방송도 저기서 몇 번 했어요. 총회 일만교회운동 세미나도 계속 하고 있죠. 수양관에 한 100억 정도 들어갔어요. 저 독수리가 있는 수양관 문만도 2억5천이 들었습니다. 열두 대문처럼 문이 위엄이 있어야 사람들이 무시를 못해요. 문이 하찮으면 사람들이 막 들어와요. 저 설계도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가 했습니다.” ―개선문 같아요. 저 독수리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사야 40:31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는 말씀의 독수리를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양관은 좋습니다. 수영장도 있습니다. 집회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여름 행사 때마다 아이들이 물 사고를 당하곤 해서 말입니다. 전체가 5만 5천 평인데 나무하고의 싸움도 만만치 않아요. 교인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조경하느라 들어간 흙 값만도 엄청 들었어요. 목요일은 저도 새벽 끝나면 가서 열심히 일 합니다. 운동 부족인데 그걸로 메꿔요.” ―목사님은 집회 때 신유도 행하십니까. “저는 기도만 해요. 교인들의 생활에 집중해요.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을 강조합니다.” ―기억에 남는 집회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대전에서 1979년도 열린 충북 체육관 집회일 겁니다. 그 집회가 컸어요. 당시 한 3만 명 모였어요. 그 때도 내 나이가 30대 후반의 어린 나이인데 말입니다. 사실 난 유신 반대도 해서 끌려 다니기도 했어요. 그때 이적이 많이 일어났어요.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불치병 걸린 사람들도 낫고 그랬어요. 이런 이적이 일어나니까 결신자가 수천 명이나 됐어요. 참 대단했어요. 3박 4일의 연합집회인데 내가 주최를 했어요. 충북 체육관 짓고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꽉 차고 밖에까지 사람들이 줄 서 있었어요. 그때는 뜨거운 때라 그런 집회가 가능했어요.” ―지금하고는 어떻습니까. “많이 다르죠. 옛날에는 강단에 서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눈들이 빛났어요. 그러나 지금은 은혜보다는 이벤트성이 강해요. 은혜를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구경을 하는 자세들이죠. 지금은 믿음이 걱정스러운 지경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말세 현상인 것 같아요. 돌리기 힘들 것 같아요.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요. 교역자들 스스로가 교인들 영혼이 아니라 신앙이 아니라 수평 이동을 위해 믿음이 아니라 영웅심으로 목회들을 하는 것 같아요. 숫자 확보나 큰 교회 만들면 된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교인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우리 정신하고는 안 맞아요. 내가 얘기해 봤자 나만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말해도 듣지를 않아요. 저마다 잘 났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말세에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냥 말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같이 안 가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 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나이도 70이 가까워지니까 말은 바르게 합니다.” ―유신도 반대하셨는데 요즘 정치는 어떻게 보십니까. “나쁘죠. 세월호에 무슨 법이 필요해요. 애도해야죠. 정치인들도 보면 애국심이 없어요. 너도나도 무료를 부르짖는데 나라 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국민들 인기몰이 해 표나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참 걱정스럽습니다. 영화를 보지는 못 했습니다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제시장 같은 영화가 많이 나와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 세워진 나라인데 정치인들이 표나 얻으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농촌도 잘 사는데 저마다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야단들이에요.” ―교회 분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단이 문제입니다. 또 목회자도 문제가 있고요. 참 목자라고 밥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삯꾼이라고 해서 밥 안 먹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명감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 정신이 사라지다보니 자기 것을 챙기려는 성향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럼 흠점을 이단이 파고 들어오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총회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평동노회 총대 30년입니다. 연속으로 총대 30년 한 사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총대 30년 하셨으면 정치 안 하시고는 안 될텐데요. “사실 내막이야 다 알죠. 다 보면 총회 돈 눈먼 돈이라고 다 먹지만 다 그 대가를 치르더라고요. 총회를 악용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교회 후계자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교단은 하나님의 예정과 뜻을 믿기 때문에 다른 교단들처럼 유행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습이라는 말 자체를 성경적이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왕조나 독재 정권에서나 쓸 수 있는 용어라고 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고 노예인데 무슨 세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믿음과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많이 보게 돼요.” ―이제까지의 삶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강북에 있었다는 겁니다. 올해가 우리 교회로서는 40주년이라 그간 주변을 사들이긴 했어도 워낙 이 지역이 땅이 없어요. 이 지역은 가난한 곳이에요. 그냥 먹고사는 사람들은 많아도 사업가는 그닥 없어요. 빈촌은 아니면서 모험을 하지 않는 안정적인 사람들로 주종을 이루고 있죠. 그래서 사실 내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늘 빚이 있습니다. 1월 한 달 바치는 헌금이 한 삼천 됩니다. 감당할 수 있다니 감사할 뿐이죠. 1975년도에 강남으로 나갔어야 했어요. 김선도 목사 같은 이는 여기 있다 그리로 갔어요. 내가 어리다보니까 그런 상황 판단이 덜 됐어요. 내가 스케일이 너무 작았어요. 여기 산도 좋아 기도하기 좋다고 눌러 앉았죠.” ―이제 후배 목사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이나 진실인 것 같아요. 재능이 좀 부족해도 진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고 목회하면 목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더라고요. 우리가 무슨 목회를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같은 설교를 해도 진실하게 기도하고 전하면 은혜가 있는데 유행어를 외위 웃기고 인터넷을 이용해 지식을 내보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니까 은혜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문명의 이기나 내 재주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2015-02-08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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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8
  • 백영규 목사의 목향원
    백영규 목사의 이력을 총회 교단지 기독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97년 5월 6일 총회 산하 전국교회 교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로 교단과 나라를 위해 기원하는 34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를 주제로 1997년 5월 6일 오후7시 충현교회(김창인목사)에서 제81회 총회장 김준규 목사의 설교로 개회됐다. 기도회는 교회 성장이 멈추고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진 가운데 3천여명의 교역자가 참석해 열렸다. 둘째 날 저녁집회에서 김창인 목사는 '예수님의 눈물'이란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한국교회를 본다면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리실 것"이라면서, 우리 속에 젖어있는 물질지상주의 명예심 당파싸움 지방색 등을 눈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어서 계속된 '교단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특별기도 시간에는 사회자인 백영규 목사가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우리 모두 울자"고 호소하자 예배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1998년 6월 10일 첫시집 <목사는 목사는 성경이 집입니다 고향입니다>를 낸 백영규 목사(예장총회 서기·상리교회·광주신학교 학장)는 『시는 아닙니다. 설교로 못 다한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얻었던 귀한 경험들을 시의 형태를 빌어 부드럽게 표현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겸손하게 설명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시를 탐닉했습니다. 김소월부터 괴테니 바이런이니 하는 세계적인 시인들의 작품도 미치도록 읽었구요. 그런데 전도사로, 목사로 바쁘게 생활하게 되자 자연 잊고 살게 되더군요.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숨겨 두었던 시심을 다른 분들의 위임예배나 장로장립식에 축사를 하면서 되찾게 됐습니다. 작은 시작입니다.” 2001년 10월 3일 상리교회(백영규 목사)가 4년 6개월에 걸친 예배당 신축공사를 마무리하고 입당식과 직원 임직식을 거행했다. 성도와 하객 1500여명이 참석한 이날 입당식은 백영규 목사 사회로 백원술 장로(장흥중앙) 기도, 최기채 목사(광주동명) 설교, 리영숙 목사(광주서문) 입당기도, 정성규 목사(여수제일) 안기영 목사(광주지산) 축사, 김길현 목사(증경총회장)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1997년 5월 14일 기공한 후 25억을 들여 완공한 상리교회 새 예배당은 지상 3층에 예배실과 친교실 등 800여평 규모를 갖추고 있다. 기존 예배당은 교육관과 목포노회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게 된다. 2002년 12월 17일 목포노회가 3개 노회로 분리되기 전 당시 백영규 목사는 총 164 교회, 85 당회를 거느리며 호남지역 최대 노회로 군림했던 목포노회의 대표로 총회 지도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2006.10월 11일목포서노회(노회장:최우식 목사)는 2006.10월 11일과 12일 목포 사랑의교회에서 제102회 정기회를 열어 백영규 목사(상리교회)의 은퇴식을 거행했다.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은퇴해 농촌 생활을 하고 있는 백영규 목사를 만나러 목포로 갔다. 감사하게도 내가 태어난 산정동에서 목회하는 총회 회록서기 최우식 목사(예손교회)의 신세를 졌다. 최 목사의 차로 청계북초등학교 정류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전남 목포시 무안군 청계면 동암길 75-17에 주소를 둔 백영규 목사의 은퇴 후 지내는 거처를 찾았다. 그는 그의 처소를 천계 목향원이라 부른다. 인사와 차를 나누고 최우식 목사는 떠났다. 백 목사와 마주 앉아 여러 이야기 끝에 나이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을 물었다. Q: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그의 건강 비결은 간단했다. A: 노동. 그리고 기도와 찬송. 천계 목향원 앞과 뒤에 있는 1000여 평의 밭과 과수원을 가꾸느라 일해야 하고 집안일도 만만치 않아 계속 움직이니 몸에 힘이 늘어나. 그 노동이 내 육체에 힘을 주고 건강을 주더군. 그의 얼굴은 맑고 몸은 건강해 보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4년 전 교통사고가 나 갈비뼈가 여덟 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41일 입원해 있었는데 일찍 퇴원해 노동을 했더니 오히려 더 빨리 낫더라구.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그 자유로운 환경에서 그의 경건 생활은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은퇴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새벽기도만 자유롭지 기도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그의 서재 겸 기도실은 응접실과 천정 사이의 중층에 있었다. 중층 서재 책상 뒤의 창이 있는 의자에서 그는 기도를 하고 크게 찬송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밤에 자기 전에 자유롭게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한다. 찬송은 아예 외워서 하다 보니 백영규 목사는 모세처럼 목소리도 정정하고 기억력도 쇠하지 않았다. 그가 가사를 외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이백여 곡이다. 그는 하루걸러 100곡을 큰소리로 부른다. 시인 서정주는 치매 방지를 위한 기억력을 위해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백영규 목사는 경건 생활을 위해 하는 찬송 부르기가 육체의 건강과 기억력 보존에 도움을 주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324장 “주님 찾아 오셨네”이고 늘 그의 마음을 치는 가사는 헛된 교만 버리세 우리 구주 모시고 영원한 복락 누리세였다. 78세의 백 목사에게 앞날의 꿈을 물었다. 내가 사는 동네 너머에는 교회가 있는데 정작 목사인 내가 사는 동네에는 교회가 없어. 원래 동안교회라고 있었는데 없어졌어. 이 동네가 동안이야. 그래서 내가 세상 떠나려고 하니까 이 동네에 교회를 하나 세우고 싶어. 그런데 희망이 있어. 이 너머에 꾸리꾸리 마을이 있는데 바로 꽃동산교회 김종준 목사가 그 마을 출신이야. 내가 김종준 목사 한번 찾아가서 이 마을에 교회 하나 세워달라고 부탁하려고 해.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면 아내와 내가 예배에 참석하거나 저녁설교를 도와줄 수도 있겠지. 백 목사의 외동딸은 기장측 목사의 사모가 되어 군산에 있다고 했다. 그 딸이 낳은 아이들이 그의 집에서 지내는 흔적이 집안과 집밖에 있었다. 그의 여러 시집 가운데 초야에 실린 시 한편을 골랐다. 목사6 이 대목은 소리 내지 말고눈으로 읽고 목사만 보아라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사람은 좋아라내 살중에 살이요내 뼈중에 뼈라고옷을 올리고 내리고모두 던져 버리고허우적 거리다실수로 만든 것이 사람들이다목사는 목사는 고요하고 깊은 밤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너모태에서 지었고 알았고구별하였고 세웠노라 2014-08-25
    • G.PEOPLE
    • G.PEOPLE
    2014-08-25
  • 열방교회 김유식 목사
    진주열방교회의 서부경남지역 복음전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께서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장 14절 진주교회(김동권 목사) 부교역자로 사역하다 건강 때문에 개척을 시작한 김유식 목사. 그는 신학교 시절 1982년 복음전도자 소명을 받았다. 그때 받은 말씀이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께서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장 14절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면 그걸로 사는 거였다. 그때부터 거리나 전철 안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신학을 마치고 진주교회(김동권 목사) 부교역자로 내려와 사역하다 간과 고혈압 등의 건강문제로 매여 있는 부교역자 생활보다는 자유로운 개척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의 실천은 신영미 사모의 기도와 내조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때 김성완 피부과를 운영하는 김성완 서울 명성교회 장로가 봉투 하나를 건넸다. 그 봉투에 삼천 만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1998년 10월 경남 진주시 하대동 722-1번지 말티고개 아래 개척을 시작해 1999년 진주열방교회 설립 진주노회 허가를 받았다. 올해로 15주년이 되는 진주열방교회는 어엿한 자립교회가 되었고 개척 당시부터 서부경남지역 20개 시골 교회와 함께 매주 목요일 지역에 복음전도 사역을 이끌고 후원하고 있다. 서부경남지역 복음화 사업에 필요한 1년 예산 2500만원은 김성완 장로가 기증한 5억 4천의 이자로 감당하고 있다.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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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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