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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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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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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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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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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리틀메시지_ 열왕기상1Kings
    열왕기상1Kings과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한 권이었다. 열왕기서는 이름 그대로 솔로몬부터 시드기야까지 유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열왕기서의 사건이 시작될 때 나라는 하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난 뒤 두 나라로 나뉘었다. 그 뒤 두 왕국은 강대국에 망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잡혀갔다. 남 유다 백성은 바빌론에 잡혀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경고대로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와 훈육뿐이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요 한 장 속에 _권영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웠다. 한 담요를 덮고 나란히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고 아들은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아들의 발을 덮는다. 아버지는 평생을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남몰래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거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진실을 모르니 늘 아버지가 어렵고 섭섭하다. 이렇듯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려고 마음을 다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치욕과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죄였다. 솔로몬은 외국의 우상들을 섬겼고 백성은 그를 따랐다. 고작 한 세대 만에 그 나라가 쇠퇴하고 분열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경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이 있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그들의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처럼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일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한 모습에 용서의 기회를 주시듯 늘 용서와 축복의 기회를 엿보신다. 2024-03-17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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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 리틀메시지_ 사무엘하2Samuel
    사무엘하2Samuel의 사건들이 기록되기 이전에 사무엘은 이미 죽었다. 사무엘하의 내용은 다윗서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주전 1010년부터 970년경까지의 다윗 왕의 통치를 다룬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다'라고 나단이 다윗에게 전한 사무엘하 7장 16절은 메시아께서 오실 때까지 다윗의 혈통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이른바 다윗의 언약이다. 이런 시가 있다. 하느님에게 _박두순 때맞춰 비를 내리시고 동네 골목길을 청소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가슴아픈 일이 있어요 개미네 집이 무너지는 것이지요 개미네 마을은 그냥 두셔요 구석에 사는 것만 해도 불쌍하잖아요 가끔 굶는다는 소식도 들리는데요 이 시의 화자는 때맞춰 비를 내려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한편 개미네 마을은 그냥 두어달라고 부탁한다. 비 때문에 개미네 집이 무너지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그렇듯 사무엘하의 사건들은 이스라엘의 다윗 왕조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섭리의 기록이 담긴 역사다. 2024-03-10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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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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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이 삶이 되다_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주신 말씀_ 전도서 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지난 5월의 푸르른 세상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아하! 참으로 푸르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영의 눈을 뜨고 바라보는 만물의 변화 속에 모습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성은 참으로 놀라웁기만 하다. 같은 공원 길이요 같은 나무들인데 깊이 짙어가는 가을의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흘러간 5개월의 시간 속에 녹여있는 듯 새롭게만 비춰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는 솔로몬의 혜안은 놀랍고 깊이 공감이 가는 말이다. 천지창조 시 하나님은 넷째 날 ‘하늘 궁창의 광명체들로 낮과 밤을 나누시고 징조와 계절과 달과 해를 이루게 하라’ (창 1:14) 말씀하심으로 ‘시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시간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 속에 사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시간이란 틀 속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모든 삶이 ‘때’라는 섭리 안에 이루어져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에서 시간의 ‘때’에 가두신 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세상에서의 시간의 삶을 마친 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 하심에 큰 ‘목적’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 삶 동안에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본질적 존재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가는 목적을 이루는 복 받은 삶이라 하겠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그 삶이 비록 최상의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질적 목적을 모르는 짐승과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비록 사는 동안이 마냥 평탄치만 않고 형통과 곤고함이 ‘때’를 따라 달리 찾아오더라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젊을 때는 젊을 때 대로 늙으면 늙어가는 때 대로 더 깊어가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기에 기쁨이 더해가는 것이리라! 결국, 그래서 하나님도 그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게 아닐까? 아멘. 2022-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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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3
  • 성경이 삶이 되다_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신 말씀_ 요한복음 15:9~12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마지막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부탁하신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 하는 말씀이셨다. 특히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 계명’이라 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요 13:44)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 난 후 천오백여 년이 지난 뒤 모든 율법을 폐하는 ‘완성된 계명’으로 ‘사랑’을 명령하신 것이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라’ 하는 새 계명은 어떤 사랑을 어떻게 하라는 말씀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의 사랑이다. 주님께서는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기까지의 우리를 사랑하신 지극한 ‘사랑’이다. 참으로 지켜내기 힘든 새 계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내 목숨을 내어놓으며까지 남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랑이 지구상 인간 사이에 지켜진다면 이 땅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의 세상이 되리라!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땅 위에는 주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서로 사랑은커녕 이웃과 시기와 질투와 악으로 더욱 가득 찬 세상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또한 많기에 이 땅에는 소망이 아직 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다’(요 14:21) 하심과 같이 주님의 명령은 사뭇 엄격하다. 주님은 지극히 사랑하는데 내 이웃과 형제에 대한 사랑은 소홀함에 현재의 나를 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우리 사랑하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고 뜨겁다! 송구스러운 마음에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시던 모습을 생각하며 소외된 내 이웃의 아픔을 찾아 발을 씻겨 주는 심정의 사랑을 먼저 해봐야겠다. 이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한 계명이라 했으니 손해 봄이 아니요 수지맞는 장사(?)가 되리라! 아멘. 2022-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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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5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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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9
  • 성경이 삶이 되다_ 기도하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
    주신 말씀_ 마가복음 11:22~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도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과 기도는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다. 믿음 없이 백날 하는 기도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구하고 달라고 기도해 놓고 설마 진짜 주실까? 하고 의심하는데 하나님이 들어 주실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러니 믿고 기도하고 기도하였으면 반드시 들어 주실 것임을 믿으라는 주님의 가르치심 일진 데 그런데 그게 참 어려운 게 사실이다. 주님의 말씀처럼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 주실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그런 유의 기도를 했다고 해서 산이 그렇게 바다에 던져질 것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보다 더한 홍해를 갈라지게 한 기도를 하였고 여호수아는 태양과 달을 중천에 머물게 했던 기도를 하였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그만큼 믿음의 기도는 역사함이 많다는 것을 주님이 가르치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삶 속 대부분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주기도문’의 중심 테마와 같이 ‘먼저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이루는 기도’가 되어야겠지만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질병과 고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이 절박하게 필요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때의 기도가 사욕을 떠난 순수한 하나님의 도우심 만을 바라고 올리는 기도라면 구하고 나서 절대 의심치 말고 받은 줄로 믿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폐부까지 살피시며 작은 숨소리까지도 놓치지 않고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라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를 외면치 않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다. 자녀 된 자가 떡을 달라는데 독을 주실 하나님이 아니시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고(마 7:9~10;눅 11:11~13) 예수님은 비유까지 들어 우리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밝히셨다. 아들을 구하는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사무엘이란 걸출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시며 병 낫기를 간구한 히스기야 왕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징표로 해시계까지 뒤로 움직여주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한나가 기도 후 얼굴에 수심이 없이 온전히 믿었듯이 믿음! 곧 받을 것을 믿는 믿음의 기도가 전제된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의 기도’(눅 17:6) 그만큼 기도는 믿음이 뒷 받침 되어야 하리라! 어쨌든 인생의 모든 문제 앞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장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만이다. 다가올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5분 뒤에 죽음조차 모르는 게 인생이다. 오직 쉬지않는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굳이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환난 날에 나는 하나님께 매달렸고 도우심을 구하고 믿었으며 내 두서없는 중언부언의 기도조차 다 들어주신 하나님을 나는 수없이 체험하였고 그 결과로 지금 인생의 가장 복되고 평안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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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2
  • 성경이 삶이 되다_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주신 말씀_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산상수훈 이렇게 기도하라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신앙생활의 중심 중의 중심이며 핵심적인 행위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자 통로로서 하나님께 ‘플러그인’ 되는 고리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듯이 기도한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것도 기도로 하나님께 상달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체로 창조하셨고 하나님 자신도 지극히 인격체이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크신 뜻에 합하고 옳은 것이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야 그것이 믿음의 실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세상 논리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기적’으로 응답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적은 하나님의 일상적 일이기에 언제나 가능함이라! 그러면 어떻게 하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을까? 그 기도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늘 ‘이렇게 기도하라’고 산상수훈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가르쳐 주셨다. 모범 기도문을 말씀(마 6:9~13) 하시고 난 뒤 다시 한번 핵심 요점으로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강조하고 계신다. 우리의 필요를 능히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는 ‘나’의 문제보다 ‘하나님의 의’가 땅 위에 실현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성경 전체의 ‘핵심 과제’를 완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나’의 문제는 고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처결해 주신다는 약속이 전제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모범 기도문을 깊이 의미해 봄으로써 올바른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는 ‘주기도문’을 암기를 해서 하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일상에서 기도할 때 이런 아젠다와 ‘핵심’이 들어있는 내용으로 하라고 모범 기도문을 알려 주신 것이리라! ‘주기도문’의 주목할 핵심 단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인데 여기서 ‘아버지’의 본래 뜻은 헬라어인 ‘파테르’라는 말로 아랍어, 아바 곧 ‘아빠’라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아빠와 아버지의 호칭의 의미는 같지만 사뭇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왜 ‘아빠’라 부르라 하셨을까? 예수님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께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었다 해도 늘 ‘아이’와 같은 존재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모든 것을 기대고 해결해 주며 보호해 주는 무조건적 존재이다. 하나님이 ‘내 아빠’이시면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게 있겠는가! 부족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는 동안에 죽음 직전까지도 하나님을 항상 ‘아빠’로 부르며 사는 존재가 되어야 하리라. 두 번째 주목할 말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거다. 세상은 모두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하는 곳이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우리가 내 필요와 내 사욕을 위해 ‘하나님의 손’을 구하기만 한다면 크리스천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를 ‘복’ 그 자체로 창조하셨다. ‘죄’가 복을 가려서 그렇지 예수님이 ‘죄’를 도말 하신 이상 우리는 다시 ‘복의 근원’ 곧 복덩어리가 된 것이다. 내가 복 그 자체인데 내 뜻이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인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하실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의 뜻과 꿈이 이 땅에 이루어지길 간구하면 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우리’라는 말이다. 크리스천은 공동체로서 각 지체 간 ‘형제’로서의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공동체로서의 필요와 질서로서 하나를 이루고 세상의 빛과 소금의 공동체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 역시 내 것, 내 문제, 내 자식, 내 필요의 중심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여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크리스천이라는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내 주변, 우리 교회, 우리나라, 세계 인의 공통의 문제 등에 대한 기도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거나 진정이 부족하였다. 매우 졸렬하고 병든 기도였음을 이 시간 회개한다. 다음, 용서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다. 하나님 앞에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자신의 몸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게 하신 것이다. 그런 용서를 받은 자로 우리는 누구든 얼마든지 잘못도 용서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세상 사는 동안 마귀는 끝없이 우리를 시험과 유혹으로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시험은 예수님도 받은 것으로 말씀으로 반드시 이겨내야 하지만 ‘유혹’은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요청하여야 할 것이다.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는데 그러면 기도는 얼마나 하여야 하나?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깨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유대인이나 이슬람교도들만큼 우리는 (나는) 기도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나는 부끄러울 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심은 늘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일상에 적용하며 호흡함과 같이 살아가란 것이다. 기도는 먼저 나를 바꾸는 일이며 열방을 가슴에 두고 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이고 기도하는 자는 늘 ‘기쁨’에 충만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넘쳐나면 기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멘. 2022-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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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5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생기
    주신 말씀_ 에스겔 37:5~6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나님의 생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기가 있다. 그 생기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택하심을 받은 자의 징표는 하나님의 생기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주셨을 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함과 같이 생기가 없는 사람은 그저 땅의 흙일뿐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야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도 인류 최초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기를 빼앗기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생기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다 멸망하여 골짜기를 가득 메운 마른 뼈로 변해버린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기를 넣어주겠다 하심은 새로운 구원의 약속이요, 무조건적 은혜이다. 오늘날 이 지구상의 3분의 1인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진정 하나님의 생기를 얻은 은택을 받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하나님의 생기를 입은 사람은 그 생기가 드러나는 삶을 살아야 진짜이다. 삶 가운데 ‘하나님의 생기’가 없다면 가짜 그리스도인이요, 살아있다고 하나 실상은 마른 뼈일 뿐이요, 땅으로 돌아갈 흙덩이인 것이다. 생기를 드러내는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준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곧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사기, 악들에서 떠나야 하며 선을 행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사람이 말하게 하는 것이다. 아멘. 20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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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8
  • 성경이 삶이 되다_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주신 말씀_ 로마서:26~28 26.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 세상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 특권이란 바로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보혜사(helper) 성령님’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 보혜사를 뜻하는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란 말은 대언자, 중보자, 조력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예수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모든 것을 말씀하여 주시며(요 15:26)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연약함을 도우시며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할 때 나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여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제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연약함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선 제한된 삶의 연수와 질병, 예고 없이 닥치는 사건, 사고, 시련, 풍파 등등 그것들을 넉넉히 이겨내고 사는 사람은 세상엔 없다. 연약함으로 말하면 나도 누구 못지않다. 젊은 시절이나 군 생활 때엔 친구나 동기생들에게 당당하고 강하게 비춰 보이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매우 약하고 여린 마음을 소지하였고 담력, 용기, 남자로서 갖춰야 할 힘, 패기 등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그 많은 풍파를 견디고 이겨내온 삶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강해서 여기까지 잘 살아온 것일까? 어림없는 소리다. 이제 말씀을 깨닫고 믿음 안에서 지난날을 뒤돌아보니 내게는 항상 ‘나를 도우시는 성령님’이 계셨던 것이다. 그분이 바로 내 삶의 승리의 원동력이셨다! 내 삶의 가장 든든하신 ‘빽(?)’ 보혜사 성령님이 나를 지키시고 도우시는 한 이 세상에서 나의 삶에 두려움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암! 아멘.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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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4
  • 성경이 삶이 되다_ 절망 속에 이사야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
    주신 말씀_ 이사야 11:6~9 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절망 속에 이사야가 꿈꾸는 하나님 나라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전쟁선포에 아하스왕과 남유다 온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사 7:2)함 같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지금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곡히 바라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칠백 년 후에 오실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게 하시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정체성까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다. ‘한 아이를 주시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기묘자와 모사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사 9:6~7)이시라는 거다. 남유다의 이러한 절망과 완고한 불순종 가운데 이사야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확인하여 주신 그 구원자를 바라보며 그분이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지금 그리고 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사자가 어린아이 손에 끌리며 해됨도 상함도 없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나라’(본문) 이런 평화롭고 꿈같은 나라가 이 땅에서는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런 나라는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얻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만드실 ‘새 하늘 새 땅’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이사야가 이천칠백 년 전에 꿈꾸던 예수님 탄생과 ‘새 하늘 새 땅’을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약속을 받고 그 나라를 지금 사모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아멘.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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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8
  • 성경이 삶이 되다_ 모든 환난을 기회로 삼아 이겨낸 왕 다윗
    주신 말씀_ 열왕기상 2:2~3 3.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모든 환난을 기회로 삼아 이겨낸 왕 다윗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며 다윗이 왕위를 계승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만 행하라’는 것이다. 아들 솔로몬에게 내린 이 유언은 바로 자신이 살아온 길이며 죽음 앞에서 내린 일생의 결론이다. 성경 속의 인물 가운데서도 다윗만큼 많은 환난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도 드물고 다윗만큼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온 정성과 열심이었던 사람도 없다.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양치기 목동을 하며 초원에서 해와 별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앙모하였으며 청소년기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난 후 사울의 시샘으로 그의 대적이 되어 십여 년 동안 그의 칼날을 피하여 죽음의 골짜기를 다녔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고난의 고비 때마다 좌절치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며 오히려 깊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시편의 그의 주옥같은 하나님 찬양의 시들은 그가 그 모든 환난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이었나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겪은 환난 고통은 다윗에게 있어 장애물이 아닌 오히려 그를 더욱 굳건히 세우며 하나님께 신뢰를 얻고 이스라엘 사상 최고의 왕이 되는 디딤돌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 인생들의 삶 자체도 수고와 아픔뿐인 연수이며 누구에게나 유라굴로와 같은 광풍은 여지없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다윗과 같은 고난에 대한 대치법을 배워야 하리라. 곧 생과 사의 모든 결론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 놓고 하나님의 궁전과 영광만을 사모하며 시련 뒤에 따라올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믿고 기도와 찬양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아멘. 2022-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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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1
  • 성경이 삶이 되다_ 믿음을 따른 전쟁 여리고성 함락
    주신 말씀_ 여호수아 6:20~21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믿음을 따른 전쟁 여리고성 함락 여리고성은 그 둘레가 약 3~4km에 이르며 이중으로 된 성벽으로 내벽과 외벽으로 구성되었고 진흙으로 만든 토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옹벽은 무려 4~5m(12~15피트)의 높이에 달하였고 이 옹벽 위로 폭 2m, 높이 6~8m의 진흙 벽돌로 된 성벽(외벽)으로 건축되었다 한다. 당시 여리고 성내 사람들은 ‘달의 여신’이라는 우상을 섬겼으며 비교적 풍족한 삶 속에 소돔과 고모라 못지않은 타락한 성문화로 약 5천 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인 여리고성 함락을 위해 매우 독특한 방법을 지시하였다. 곧 여리고성 둘레를 엿새 동안은 조용히 하루 한 바퀴씩 돌다가 일곱 번째 날에는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돌고 제사장 나팔 소리에 맞춰 온 백성이 크게 외치라는 말씀이었다. 그러면 그 성이 무너질 것이란 것이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의 만나 세대 백성들은 이 말씀에 순종하여 6일 동안은 소리 없이 한 바퀴씩 그 성을 돌고 난 후 일곱째날에 가서 일곱 번을 돈 후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소리를 외치자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고 성안의 남녀노소와 짐승까지 진멸시킬 수가 있었다. 완승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전쟁인 여리고성을 정복하는데 왜 이런 방법을 지시하신 것일까, 사뭇 궁금한 일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전쟁은 숫자와 무기와 전술에 승패가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실 것이다.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완전 정복을 위해 무수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만 믿고 따르라는 본보기의 전쟁이었다. 둘째,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셋째,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한 도시는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요즘 방송 뉴스만 켜면 북한의 미사일 위협으로 여차하면 곧 전쟁이 일어날 분위기이다. 연일 미국의 위정자들과 북한의 김정은은 전쟁 위기를 고조 시켜 가고 있다. 세계 언론들도 한반도에서 전운이 감돌고 있음을 연일 쏟아내고 있는 데 반하여 놀라운 사실은 정작 당사자인 한국인은 나 자신부터 놀랍도록 천하태평이다. 왜일까? 나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그렇다면 오죽 좋으련만 수십 년 반복되어 온 ‘전쟁 위기’ 뉴스 등에 아마도 감각이 무디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여리고성 함락의 ‘믿음의 전쟁’에서 보듯 전쟁의 있고 없음도, 승패도, 모두 하나님께 달린 것! 이 시대의 모든 믿는 자들은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아멘.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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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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