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소망과 사랑 둘이 살고 있었네. 소망이 집을 비울 때는 사랑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바람 불던 날 슬적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소망을 줍고 있었고 위에 있던 십자가, 날개를 펴고 있었네.
날개를 퍼덕이며 십자가는 말했네.
"어서 오게, 그대 집으로..."
하늘이 보내준 은혜의 열매들. 아무렇게나 매달린 잎새들의 자유. 작은 마당은 산그늘에 덮였고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밤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창수 목사는 자신의 설교 십계명을 통해 세상 떠나는 날까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메신저로 살려는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있다. 그는 2024년 11월 3일 주일, 한복을 입고 강단에 섰다. 대명교회(1915년 11월 7일) 설립 109주년 기념과 1908년 한국교회가 정한 추수감사절 예배를 기리기 위해 시편 103:1-8 본문에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했다.
"20세기 최고의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그날 이후>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습니다. 물론 작가가 꾸며 낸 이야기지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사는지를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입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자들이 시간이 지나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시기 위하여 지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셨는데 막상 큰 은혜를 받은 그를 찾아가 보니 완전히 술주정뱅이가 되어 있었고 손발을 덜덜 떨며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지경이 되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앉은뱅이 때는 구걸하면서 살 수가 있었고 얻어먹을 수가 있었는데 오히려 정상이 돼서 걷게 되니까 구걸하여 얻어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는 직장도 없고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인생을 원망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향해 가시는데 이번에는 한 불량자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다른 불량자와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불량자는 이전에 예수님께서 진흙을 발라 눈을 뜨게 한 바로 그 소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 불량자로 살아가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을 뜨고 보니까 세상의 돌아가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이 세상이 어떻게 이 모양이냐? 이런 생각을 하다가 화가 나서 화풀이를 하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가슴 아픈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시편 103편 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은택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데 이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benefit 恩澤 은혜와 덕택)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은택이라는 이 단어는 좀 특이한 단어입니다. 은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게물’이라는 말인데, 보상, 공적, 행위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주석가 반즈(Albert Barnes 1798 12. 1 - 1870 12. 24)라는 분은 이 ‘은택’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합니다.
‘은택은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로운 사역을 총칭할 때 쓰는 <게물>이라는 단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살지만, 숨 쉬고 살아가며 이 땅에서 지금까지 온 것과 오늘 이곳에 찾아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것들이 은택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 베푸신 모든 사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바로 ‘은택’인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그 은택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잊지 말라’는 단어는 히브리 동사 ‘샤카흐’입니다. 잊지 말라는 동사 ‘샤카흐’라는 말은 단순히 우리 속에서 기억이 떠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베푸신 놀라운 은혜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지칭할 때 하는 말이 바로 ‘샤카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는 산과 바다와 온 우주와 같이 넓고 크지만 우리는 그 자체를 기억조차 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감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상황에도 우리를 보호하시지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택을 거부하면서 살아갈 때가 참 많습니다. 더 심각한 경우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뿌리라면 감사는 열매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사의 크기와 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어. 저 사람은 참 거룩하게 보여 저 사람은 중직을 맡았어. 심지어 저 사람은 목사야.’ 이것은 그분의 믿음의 수준이 아닙니다. 삶의 실생활 속에서 그분이 얼마나 많은 감사의 열매를 맺느냐가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입니다.
에베소서 5장 2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어 단어 중에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넘친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나칠 정도로 넘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에 물이 있는데, 가득 찼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부어서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완전히 제방을 넘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저는 ‘overflowing’이라는 단어가 신앙생활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잔에 물이 넘치거나 홍수가 나서 물이 둑을 넘는 것처럼 우리 삶에도 감사가 지나칠 정도로 가득 넘쳐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며 그 은혜가 마음속에 가득 차 흘러넘치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노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이렇습니다. 저 할아버지는 감사하는 것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아니 저 할머니는 좀 과하게 감사를 해!’
이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멋진 노인은 감사의 사람’이라고 정의를 합니다.
오늘 저희는 교회 설립 109주년 기념 주일과 또한 이 한 해의 추수 감사 주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보통 전 세계에서 추수 감사 주일은 11월 셋째 주일입니다. 그렇지만 저희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109년 전 대명교회가 바로 첫 설립 예배를 드렸던 날이 11월 첫째 주일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첫째 주일을 감사 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날은 또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보호하심에 감사하는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를 드리고 온 교회가 함께 그분의 은혜를 고백하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온 교회가 모여 감사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행하신 일들을 서로 나누고 감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본문의 말씀처럼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입니다.
첫째, 대명교회를 지난 109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성도는 깊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대명교회가 설립된 1915년 그 당시 1910년대는 조선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제 치하였습니다. 구한말 1905년에 을사조약이 있었고, 1910년 8월 22일 강압적으로 한일합방이 되어 진짜 미래를 알 수 없는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히려 그 절망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한국의 선교 역사를 보면 우리가 1800년대 말부터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장 많이 들어왔습니다. 가장 많이 선교사들이 들어왔던 때가 바로 일제 치하 속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때입니다. 많은 선교사가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수많은 벽안(碧眼)의 선교사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절망의 땅, 흑암의 땅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 교회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우리 교회는 1915년 11월 6일에 역사적인 첫 설립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의 경상도 장로교회사』라는 책에 보면 그 당시에 우리 교회의 기록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당시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한 의료 선교사이자 목회자였던 아치볼드 플레처(Archibold D. Flecher-한국명:별리추)라고 하는 선교사님이 제중원(지금의 동산병원)의 2대 병원장으로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분은 목사이자 의사이자 선교사였습니다. 평일은 열심히 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업무가 토요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는데 키가 2미터 가까이 되는 분이 그 피곤한 육신에도 불구하고, 매주 토요일 오후가 되면 자신의 왕진 가방에 각종 연고와 많은 의료 약품을 가지고 무료 진료와 전도를 나갔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염증 하나가 생기고 고름이 생기는 곳에 연고만 잘 발라도 나을 수 있는데, 이 간단한 조치나 약이 없어서 팔을 자르고 심각한 육신의 생명까지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플래처 목사님이 동산병원에서 가까웠던 대명동 지금의 계명대 근처에서 서부 정류장에 이르기까지(지금의 대명동과 성당동 일대) 열심히 전도하며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이 이러한 사역을 계속해서 하자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교사가 나누어주는 약을 바르면 낫는다. 병을 치료해 주더라.’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님을 찾았고 선교사님은 치료와 함께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 전도 활동을 통해 한 사람을 만나는데 이 분이 바로 박덕일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대명교회에서 전도사로 계셨고 나중에는 동산병원에 근무하시다가 목사님이 되는데 플래처 목사님은 박덕일 조사와 함께 매주 토요일 전도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드디어 전도의 결실로 7명의 성도를 얻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이 예배드릴 장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놓고 기도했고 아마 전도 받고 처음 예배 장소가 없어서 4년에서 5년 동안은 대명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최복암 집사님 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플래처 목사님은 동산병원으로 돌아가 거기에 근무하는 몇 의사분들과 간호사들에게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들은 대명리 근처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분들이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해서 예배 장소를 마련합니다. 그들이 헌금한 액수가 당시 돈으로 80원인데 이 돈으로 초가집 한 동을 매입합니다. 8칸의 초가집을 매입하고 교회를 정식으로 설립을 합니다. 1915년 11월 첫 주에 플래처와 박덕일 조사와 성도들이 모여서 역사적인 첫 설립과 감사 예배를 드립니다. 이어서 교회의 설립자는 플래처 선교사로 하고, 최초의 당회장으로는 브루엔(Henrry Munro Buruen) 선교사님이 맡으셨습니다. 그렇게 대명교회가 첫 설립이 되어서 오늘 109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자신의 집을 첫 예배의 장소로 제공한 최복암 씨가 최초의 집사가 되었고 1918년 1월에 배석주 전도사님이 대명교회 최초의 목회자로 부임을 했습니다. 1920년에 김도현 씨가 영수로 선출이 되었고 1921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다음 세대 교육을 위하여서 일반 학교를 설립합니다. 1922년에 첫 부흥회를 하고 1932년에 우리 대명교회가 정상적으로 조직이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전도사가 있고 교역자와 장로님의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고 집사를 임명합니다.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이때 네 분의 집사님을 세우는데 그 집사님 중의 한 분이 서대암 집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나중에 저희 교회 장로님이 되셨는데 서대암 집사님이 바로 현재 저희 교회 장은환 장로님, 전무중 장로님 두 분 원로 장로님의 외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 교회가 1938년까지 지속적으로 교회가 안정적인 부흥을 하고 1938년 11월에 정상용 장로님이 최초로 장로로 취임을 하며 당회가 조직이 됩니다. 이때 우리 대명교회는 남자와 여자가 커튼을 쳐서 서로 분리해서 예배를 드렸고 이 당시에 장년 35명, 그리고 주일학교가 4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1938년은 안타까운 해입니다. 바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말도 안 되는 일제의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가 하나의 예의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가결하고 대표하는 목사와 장로들이 평양에 있는 신사에 가서 절을 하는, 하나님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일제는 구체적으로 이때 탄압으로 황국신민 서사 제창, 그리고 그들의 황국 시민으로서 황제와 그들의 조상들에게 절을 시키는 이런 종교 행위, 우상 숭배행위를 시켰습니다. 교회마다 엄청나게 협박하며 공출이라는 미명 아래 너희들이 이 위대한 일에 동참하라고 돈이나 쇳덩어리나 쌀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때에 우리 대명교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한 분밖에 없었던 정상용 장로님이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고문을 당했는지, 교인들에 대한 압박이 있자 우리 교회 종을 자진해서 수레에 싣고 경찰서에 갖다 주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교회에 아픔이 있었음에도 대명교회 성도들은 끝까지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반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고난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겠다고 각오를 하면서 교회 안에 걸려있는 동방요배를 위한 휘장을 찢어버립니다. 이것 때문에 1939년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대명교회 성도들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동방요배를 하지 않고 휘장도 걸지 않자 1943년부터 45년까지 일본 경찰은 대명교회 당회를 강제로 폐쇄를 시켰습니다.
이때 일제의 핍박으로 축소된 교회도 많고 이상하게 변질된 교회도 많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은혜로 오늘 초가집에서 시작됐던 교회가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고 7명의 성도가 3000여 명의 성도로 하나님은 부흥을 시켜주셨습니다.
저희 교회 주차장 출구 쪽에는 ‘Grace Chapel’이라고 하는 아주 작은 교회가 서 있습니다. 교회 조경이나 장식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출차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대명교회에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나에게 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자는 의미로 작은 교회를 지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인 초가집을 짓지 못하고 적벽돌 작은 교회를 지었지만, 힘들고 어려웠고 첫 시작의 미약함 속에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켰고 눈물과 헌신으로 달려온 신앙 선배들의 그 지조와 희생을 우리가 기억하고 하나님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자는 의미입니다. 일제의 핍박과 시대를 달려 오며 수 많은 교회가 사라지거나 감소하였지만, 우리 대명교회는 109년이 지난 지금 100주년이 되던 해 교회 이전은 물론 대구를 대표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 베풀어주셨던 은혜에 감사할 수밖에 없고 그 신앙의 유산들을 여전히 우리 대명교회가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과 같이 추수 감사 주일인 오늘 우리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기억하길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의 가정과 우리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대명교회를 부임하고 지난 20여 년 얼마나 많은 감사 주일을 보내었습니까? 설교만 해도 40회 가까이 감사 주일을 지키면서 말씀드린 것은 여전히 첫 번째 개인적 감사는 “나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가장 큰 감격은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냐는 것입니다.
지난주 수요일 어린이 예배 때도 제가 아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가슴이 뭉클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창세 전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을 선택하셨다는 교리를 가르치는데 감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문제 있는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 가운데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3절에도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서는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의 파멸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트’인데, 구약에서 23번이 나옵니다. 그 뜻은 ‘죽음, 무덤, 구덩이, 함정, 지옥’ 등의 다양한 말로 번역이 됩니다. 하나님이 죽음에서 우리를 살려주셨고, 우리를 구덩이에서 건져 주셨고, 우리를 지옥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죽음과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하여 영생과 천국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인생을 짓누르는 죄입니다. 죄의 무게로 지옥에 빠질 인생이 예수를 믿고, 예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함을 얻습니다. 죄의 짐을 벗고 영원한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부활의 축복을 누리고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을 가슴에 새길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감사의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제가 미국 탈봇 신학교(Talbot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를 할 때에 도서관 비디오실에서 Amazing Grace 찬양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비디오는 찬양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 있음을 말해주었습니다. 미국 소년 교도소, 흉악범들이 있는 심지어 남미에 있는 포악한 수용소 속에서도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바로 나 같은 죄인도 주님이 살려주셨다는 그 찬양을 부르며 곳곳의 교도소에서 눈물로 찬양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곡을 쓴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은 노예를 팔아먹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온갖 나쁜 짓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찬양의 영어 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과거의 나는 생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찾았습니다!
과거의 나는 눈먼 자였으나 이제는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찬양을 작사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Frances Jane van Alstyne, 1820년 3월 24일 - 1915년 2월 12일)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생후 6주 때의 눈병 치료를 하는데 가짜 의사에게 맡겼다가 각막이 손상되고 평생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분노와 저주, 원망과 불평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신실한 외할머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평생 감사였습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수많은 찬송을 작사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앞을 볼 수도 없고 평생 불편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원망과 불평 없이 감사로 살아가느냐?’
그녀가 대답합니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평생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4정 7절에서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올 한 해도 주의 은혜로 어려움 가운데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지켜주셨고 수십 번 위험한 고비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할 뿐이지 하루에도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40번 이상의 위험한 일들을 맞닥뜨린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우신다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늘 사랑으로 명예롭게 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겨주십니다.
저를 돌아봐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격 없고 죄인이지만 인자와 긍휼로 이끌어 주시고 명예스러운 관을 씌워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난한 집안에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가난과 고통의 시간들... 연약하고 키도 작고 못생겼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보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이 서글퍼지는데 요즘은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들어요. 지난 금요일 서울에 CBS의 올포원 크리스마스 특집 촬영을 하러 갔더니 얼마나 칭찬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공감이 안 될 정도로 분장하는 선생님도 말해요. ‘목사님 잘생겼어요.’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분들도 ‘목사님 피부가 어떻게 이렇게 좋아요.’ 아나운서도 ‘목사님 손주 보셨다면서요. 청년 같으세요.’ 옆에 같이 촬영하는 여자 연예인도 ‘목사님 진짜 잘생겼어요.’ 그런데 그 말들이 저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야...’라고 속으로 되뇌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게 해주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시는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의 영원한 사랑으로 자녀들을 초라한 죄인의 모습이 아닌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표현의 능력』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야 하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감사 렌즈는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들 수많은 삶의 부분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사람의 특징은 감사로 충만한 것입니다. 붉은 렌즈를 끼면 붉게 보이듯이 파란 렌즈는 파랗게 보이듯이 감사 렌즈를 끼고 살면 감사가 넘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표현의 능력』은 감사 렌즈를 끼면 4가지 능력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지나간 시간 속에 도우신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둘째, 어려움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한다.
셋째, 염려 근심에서 벗어나게 한다.
넷째, 우리가 잃은 것이 아닌 우리가 가진 것을 보게 한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과 감사 렌즈를 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베푸신 일상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일상의 은혜는 주셨습니다. 숨 쉬고 살고, 이 지구에서 공기와 물과 일용할 양식과 사랑하는 삶의 터전과 모든 삶의 영역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일상의 영역입니다.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감사의 렌즈를 끼면 그것이 감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당연한 게 아닙니다. 밥을 먹을 때까지 우리는 약 88개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이 시간에도 하루에 8억 명씩이 굶고 있다고 해요. 전 세계에는 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동유럽 집회를 가보니 마실 물이 전부 석회질이에요. 우리나라 물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삶의 영역들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까요? 최소한 이런 감사 절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일상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며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쌀밥 먹는 게 소원이 아니라 덜 먹는 게 목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먹을까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식당에 가도 공깃밥 한 그릇 다 드시려는 분이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가정에 베푸시는 은혜, 우리 자신들에게 베푸신 특별한 일상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택을 잊지 말라면서 부르짖을 때 우리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우리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편 107편 6절에서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 8절에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9절에서도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기도할 수 있는 은총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계의 작가이자 목사인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선물 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아니요. 1분 1초도 살 수 없습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경험적 고백입니다. 그는 정말 건강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정맥이 왔습니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전극도자절제술을 권유합니다. 그러면서 맥스 루케이도가 머리에 망치를 맞은 것처럼 깨달은 게 있습니다. 아...우리가 일상의 은혜를 모르고 지내는데 우리는 심장이 뛰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1분 1초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살아갈 수 없는 게 인생이구나... 그래서 그는 이렇게 씁니다.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는 너끈히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타락한 당신을 은혜로운 삶으로 적극 인도하십니다. 은혜는 주님이 전부입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은혜가 살아 있고 그분이 일하시기에 은혜가 일하고 그분이 중요하시기에 은혜가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은혜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구원받았습니다.’
저는 그의 글 중에 ‘은혜가 우리를 찾는다!’ 이 말이 너무나 공감이 되고 좋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지난 10월 10일 놀라운 소식이 세계로 퍼져 나갔다. 2007년 10월 30일 한국어판이 출간되었으며, 2015년 1월 1일에 데버라 스미스가 번역한 영어판이 출간된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 저자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덕분에 앞으로 다른 한국 작가도 전 세계에서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될 테니 한국 문학으로서도 ‘놀라운 은혜(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바다’ 여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소망하는 믿음의 순례자를 위한 것이 아닐까. 믿음의 순례자인 우리는 때로 그런 은혜를 ‘어쩌다’ 만나 인생의 순례길을 함께하게 될 것이다. 마치 109번째 감사주일을 기념한 대명교회와 제109회 총회가 처음부터 믿음으로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2024-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