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굳뉴스] 장창수 목사 어메이징 그레이스
2024년 7월 7일 대구대명교회 맥추감사주일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긴 비를 뜻하는 '장맣'에서 '장마'로 축약된 말이다. 숲길을 걷다 보면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실이다.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많은 의견’은 들을 수는 있어도 ‘다양한 의견’을 보기엔 적합하진 않다. 이럴 때 책이 좋은 보완재가 되어준다. 내가 모르는 삶과 세계, 인식을 적당한 깊이로 빠르게 습득하는 데 독서만 한 방법이 없다. 책이 괜히 간접 체험 콘텐츠의 최고봉이 됐겠는가. 책으로 쌓은 지식은 성경의 믿음이나 삶의 지혜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서로 보완하며 한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한 층 드높인다.
2024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오전 11시 30분.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설립 109년 대구대명교회 설교단에 섰다. 시편 136:21-26을 봉독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실로암 찬양대가 찬양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를 찬양하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이끄시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주의 크신 주 은혜로 붙드시네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권세로 기도하고 주의 은혜를 간구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이 고백이 지난 6개월 동안의 우리의 고백인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장로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에 임할 줄로 믿습니다. 성가대 찬양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시고 우리도 같은 고백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많은 분들의 십일조와 감사와 여러 예물과 맥추 감사 헌금들을 받아주시고 바친 손길마다 이 땅의 만 가지 복으로 갚아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 베푸신 축복과 은혜가 매일의 감사가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개인만이 아니라 가정에도 삶의 현장에도 자녀들에게도 특별한 모든 일에도 주께서 주시는 복으로 갚아 주옵소서. 아버지 하나님, 장례식을 마치고 슬픔 속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우리 믿음의 가정도 복되게 하셔서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으로 위로받게 해주소서. (회중 아멘)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주의 종이 부탁드립니다. 나는 너를 치료하는 여호와라 하셨으니 생명의 말씀대로 저희에게 이 시간 임재하여 주시고 능력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옵소서. 너 악한 고통과 질병들아 성도를 괴롭히는 모든 악한 것들아 나사렛 예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성도들의 몸에서 즉시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떠나갈지어다. (회중 아멘) 깨끗하게 나을지어다. (회중 아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을 주시고 감사로 충만하여 우리 삶이 감사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부족한 종에게도 말씀의 은사를 덧입혀 주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회중 아멘)"
총회와 총신을 밝힐 대명(大明)교회 큰 빛 장창수 목사가 주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의 입을 열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오늘 본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별관 3층에서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대명성전, 강북성전, 경산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대명의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맥추감사주일 '감사하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이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평상시 우리의 감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나의 기대를 넘어서는 일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감동을 하느냐. 내가 예기하지 못했던 일과 사건들에 접하거나 선물들을 받을 때 그때 감동받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선물과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 뜻밖에 나를 알아주는 누군가의 마음이라 그렇게 쓰면서 자기 어릴 때와 지금까지의 감동의 이야기들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20대 초 자기가 기차 시간표를 보며 여행 일정표를 짜면서 겪은 감동의 순간들, 비 내리던 날 할 일 없이 따뜻한 방에 들어앉아 마셨던 커피의 감동, 그 당시에는 이런 감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이런 감동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일들의 반복은 오히려 감동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가고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은 것들을 가지게 되면서 감동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도 여기에 공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무도 많은 감동의 조건과 대상들을 주셨지만 이것이 반복되고 늘 똑같이 임하니까 그게 감사할 일인 줄도 모르고 감동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또 나이가 들어가면서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그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많이 있으니까 감사가 줄어들고 감동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예전에 그를 감동하게 했던 그 많은 일들이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듯이 스쳐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삶 속에서 감사와 감격,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들이 성도로서의 가장 본질적인 것 중의 하나가 감사와 기쁨이라고 칼빈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표징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 특징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들은 야! 와! 감탄과 감사를 참 잘합니다. 지난 주간에도 우리 교회 유치부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물론 제가 세뇌를 시키기도 했지만 그냥 지나가지 않고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저를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하면 불러서 간식을 줍니다. 교육을 한 명에게 시켰는데 요즘은 이게 퍼져서 아이들마다 저를 보면 '잘 생긴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회중 웃음) 그래서 아이들이 오면 주려고 제 방에 온갖 간식을 갖다 놨습니다. 캔디나 초콜릿이 해로울까 봐 날마다 갯수를 정합니다. 오늘은 두 개만 가지고 가, 또는 세 개만 가지고 가. 그런데 지난주는 저한테 뭐라 뭐라 말하면서 저를 안아주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해줬어요.
'오늘은 간식 다섯 개야.'
그러자 제 방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이 '와!' '와!' '와!' '와!' 감탄을 연발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그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저 아이들처럼 살아야 되는데. 그 작은 캔디 하나에도 지금보다 한 개 더 많은 것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지금 사는 삶 속에서도 저렇게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성경에 '어린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서양의 문명 속에서 그들이 발전한 것은 그 속에 믿음이 있었고 기독교 문명이 큰 기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기독교 문명 속에서도 감사와 감탄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그 문화와 그들의 부강함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원더풀(wonderful)과 땡큐(thank you)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수년 전에 제 은사이셨던 톨슨(Dr. Donald Torsen: Azusa Pacific University 조직신학 교수) 박사께서 우리 교회 오셔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패스터 장, 경주를 보여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경주에 모시고 갔습니다. 박물관도 보여드리고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톨슨 박사님이 관찰에 집중하시면서도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우리가 그냥 스쳐 지나갈 물건 하나를 보시고도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제가 설명을 해드리면 그 설명 속의 의미를 가지고서도 그저 ‘원더풀’ 하시는 겁니다. 이런 모습 속에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느냐 생각해봅니다.
시편 139편 14절에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말씀하는데 '기묘하심'이라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묘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으심이 심히 신기하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 대상이 나를 지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지으셨다는 게 신기한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됐을까. 그리고 이 뉘앙스(nuance 어감) 속에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표현입니다. 작든지 크든지 좁든지 넓든지 잘생기든 못생기든 그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자신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와우! 감탄을 하고 야! 이게 어떤 은혜인가 감사하는 이런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조그만 생각하면 우리의 모든 삶이 감사와 감동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감사와 감동이 없습니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내용을 잊어버리면 그 감사를 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감사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 주인이시면서 저희들의 삶을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그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그래도 한국의 교회 절기에 한 해의 절반을 보내면서 이렇게 뭘 모르는 소리를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 맥추(이 말은 보리 ‘맥麥’자와 가을 ‘추秋’가 합쳐진 단어 즉 “보리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라는 뜻) 감사절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 추수를 기념하는데 오늘날 농사도 짓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교회가 왜 이런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감사의 절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특별히 지나간 한 해의 반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 자신들과 삶을 지켜주신 은혜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충만한 감사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감사는 우리의 삶을 유익하게 만드는 신비를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였고 신학자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캇 펙(Morgan Scott Peck, 1936년 5월 22일~2005년 9월 25일)의 저서 '그리고 저 너머에' 보면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그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수많은 걸음과 여정을 바라보면 참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 속에서도 결국 감사도 그 선택에 포함된다고 스캇 팩은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삶의 시간 속에 우리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 교회 오면서 야 또 주일이다. 왜 이렇게 빠르지, 말은 안 하지만 시간이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측면은 설레임을 가지고 이 맞닥뜨린 지난 육 개월을 돌아보며 우리는 하나님을 잊지 않고 감사를 선택합니다. 감사를 선택하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모든 삶의 감사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를 주제로 하는 시편 136편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구절이 그 독특한 형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런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러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편은 히브리인들이 유월절이나 신년절이나 감사절에 자주 암송을 하고 함께 교독을 하는 아주 대표적인 성경입니다.
성전 뜰은 누구나 들어가지만 성소와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편 100편 4절에 보면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히브리어로 문이나 궁정은 성소 안의 뜰을 말하는데 이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해야 될 제일 중요한 일은 감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제사와 예배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이 예배 속에서 지금 앉아 예배드리는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예배 요소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 말씀합니다."
장창수 목사는 오페라에서 언어의 악센트로 이야기하듯이 부르는 레치타티보를 부르듯 독창한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언제까지)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할찌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그 찬양이 무엇입니까. 바로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의 1절에서 3절은 여호와의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4절에서 9절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10절로 20절까지는 여호와께서 내 적을 물리쳐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설교 본문 시편 136편의 23절에서 26절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 우리를 건지시고 비천한 데서 살려주시고 올려주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에 대해서 마음껏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들이 감사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도 지난 한 주간 지켜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고 특별히 맥추감사절 절기를 지키며 지난 육 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이 충만한 감사로써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6편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말씀합니다. 이 감사가 충만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앞서 인용한 송정림 작가의 ‘감동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만 '설렘의 습관'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재미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이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설레임을 가지고 감사를 가지고 그분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무죄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동 없이 오늘 감사가 없이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유죄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1부 예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여러 성도들이 둘러서 같이 탔습니다. 그런데 새 가정의 집사님 한 분이 타셨는데 너무 조용하고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 같았습니다. 그냥 저한테 쉽게 얘기하시면 되는데 못하시더라고요. 고개를 이렇게 숙이고 말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저는 매주 목사님이 이번 주는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에게 설레이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어찌 보면 그분이 특별난 게 아니라 이게 정상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설레임! 오늘도 나를 통한 정말 하나님의 그 은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 이런 것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고 예배드리는 설레임! 설레임이 식이지는 것은 신앙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성전에서 손을 들고 예배를 드리는 행위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경배이고 찬양입니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행위입니다.
'홀로 큰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먼저 찬양대가 이렇게 찬양하면 온 백성이 두 손을 들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렇게 찬양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과 감사를 올려드릴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저희들이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찬앙대를 대신하고 그리고 성도 여러분이 히브리인을 대신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는 겁니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장창수 목사가 선창했다.)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온 회중이 일제히 우렁차게 찬양했다.)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한 번 더 해볼까요.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회중: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 히브리인들은 성전 앞에서 이렇게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감사를 잊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행스텐버그(E. W. Henstenberg)의 책에 보면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종교적 의무가 아니라 형식적인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며 벅찬 감격 속에 자발적으로 행하며 감사 감사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럴 때 기쁨으로 반짝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은혜와 감사의 기름이 부어졌다는 것이며 기쁨과 감사는 신앙의 표징입니다.'
우리가 이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충만한 은혜를 입을 때 그분이 감사를 받으시고 충만한 은혜가 우리에게 기름 부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삶의 회복도 되고 다시 한번 용기도 얻고 우리가 치료함도 받고 은혜도 받고 밝은 모습으로 이 예배당을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강력한 도우심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기억하고 감사의 원천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감사! 우리는 매 주일 왜 예배를 드릴까요.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고 우리 주인 되신 하나님께 그분을 만나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118편 23절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라' 말씀합니다.
과연 이 세상의 최고의 성자가 누구입니까. 공의로운 사람입니까. 탁월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에 한결같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은혜를 생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22절입니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물론 이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는 바벨론이 '비천함'에서 그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 히브리인을 탈출시키시고 해방시키셔서 약속의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는 무엇일까요. 역사적인 배경도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 삶들을 돌아보면 비참했습니다. 수치스럽고 보잘것없고 영적으로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셨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자격 없는 저희들이 죄 씻음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됐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과 영생의 소망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시편 116편 8절에도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에 비참함의 세 단어가 나옵니다. 사망입니다. 눈물입니다. 넘어짐입니다. 영적으로는 사망에서 우리를 건져주셨고 수많은 고통과 눈물에서 그리고 넘어진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 어떤 경우에서 심지어 수치스러운 것과 비참함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어떻게요. 천국으로 화하도다.'
천국의 특징을 시 에스 루이스(C. S. Lewis)는 설레임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지겨운 곳이 아닙니다. 영혼이 떠돌아다니는 우리 상상 속의 영혼의 장소가 아닙니다.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실제적인 장소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는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소는 실제 거주하고 실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 슬픔 많은 이 세상 그 상황이 안 바뀌어도 천국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찬양한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속삭이듯) 그 어디나 하늘나라' 설레임과 기쁨으로 삽니다. 영혼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도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 우리의 이 땅 오천 년 동안 우리가 초근목피(草根木皮 제대로 풍년이 진다고 해도 반 철 식량밖에 거두지 못했다. 나머지 몇 개월은 역시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을 해야 했다고 한다)를 우리가 피할 수가 없어서 1957년까지 우리가 그렇게 무시하는 아프리카 가나(Republic of Ghana) 수준과 비슷했다고 합니다."
60년대 당시 두 나라의 경제 상황이 아주 비슷했다. 무엇보다 양국의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으며 1차 제품(농산품), 2차 제품(공산품), 서비스의 경제 점유 분포도 비슷했다. 게다가 양국은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고 있었다. 30년 뒤 한국은 세계 14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산업 강국으로 발전했다. 유수한 다국적 기업을 거느리고 자동차, 전자장비, 고도로 기술집약적인 2차 제품 등을 수출하는 나라로 부상했다. 가나의 1인당 GNP는 한국의 15분의 1수준이다. 이런 엄청난 발전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제88회기 총회장 임태득 목사 후임으로 대명교회에 부임한 장창수 목사는 20여 년 교세는 8배 커졌다. 그럼에도 설교는 여전히 가장 큰 부담이지만 설교만큼 가장 영향력 있고 설교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는 장창수 목사는 하나님의 뜻이 성도들의 삶에 깃드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가난과 차별과 고통과 질병과 특별히 배고픔 속에 살았습니다. 이 험난한 역사에 비참함과 990회 이상의 침범을 당하고 어느 한순간 마음 놓고 다리 뻗고 지내지 못하고 한 번도 마음껏 먹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140년 전 복음의 씨앗이 떨어지면서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국가와 민족의 비참함에서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의 비참함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30년 40년 전만 해도 이 먹는 것은 우리에게 갈급한 기도의 제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시대에는 이러한 우리의 먹을 것들이 감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먹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 하나님의 은혜였구나. 그 때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구나.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이게 우리 얘기 아닙니까. 교회 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교회가 109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 1부 2부 예배 참석자를 부교역자를 통해 계수하니까 그때 우리 출석 교인이 340명에서 370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19년 동안 성도들과 행복하게 지내온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 은혜가 감사합니다. 저는 고속도로 휴계소 갈 때마다 하나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나온 옛날을 생각하면 비참했잖아요. 선진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밖에서 돈 안내고 화장실 갈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아요. 정말 감사하고 자랑스러워요.
비참한 우리나라, 비참한 우리 가정, 비참한 나 자신을 세워주신 하나님 은혜를 헤아려보십시오. 그리고 하나씩 그 이름을 말해보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한 걸음만 물러나 보고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도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말씀합니다. (회중 아멘)
미국의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1893~1990)는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사건을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입니다.
야 힘들다. 앞에 이것이 있구나. 저게 있구나. 지금 상황이 이런데 큰일 났다. 저 사람은 있는데 왜 나는 이게 없어. 이게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눈을 통해 바라보면 그 상황이 해석이 됩니다. 남들과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대적에게서 건지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24절입니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회중 아멘)
제가 직역합나다.
'그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대적들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외적과 사탄과 어둠의 권세와 모든 환난에서 우리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분리시켜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네이슬러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바벨론과 적군에서 보호해주시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구원 사역에 대한 암시라고 해석하는 주석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3절 '흑암의 권세' 고린도후서 1장 7절 '죄와 사망' 갈리디아서 1장 4절 '악한 사람들' 사도행전 7장 10절 '모든 환난' 재해나 전염병이나 핍박이나 사고 등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분의 은혜를 망각합니다. 지난 6개월도 당연하게 여기까지 와서 2부 예배 앉아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유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이런 악한 대적에게서 분리시켜주셨습니다.
최근 서울 시청역 교통사고(2024년 7월 1일 21시 27분경 서울특별시 중구 시청역 12번 출구 인근 교차로에서 승용차가 갑작스럽게 인도로 돌진하여 일어난 대형 교통사고)를 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홉 명 가장이 죽었습니다. 일곱 명이 다쳤습니다. 사고를 낸 사람도 40년 베테랑 버스 기사입니다.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우리는 수많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습니다. 이런 사고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당연한 것이요, 그분의 지켜주심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도 반년 동안 고통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대적에게서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회중 아멘) 절대로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103편 3절에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4절에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4절 본문에서의 '파멸'이라는 단어도 독특합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가 성경에서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서 ‘파멸’인데 어느 곳에서는 죽음, 구덩이, 함정, 심지어 지옥으로도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 구덩이, 함정, 지옥 등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온갖 대적과 삶의 고통, 시험,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대가 아무리 오래됐을지라도 수많은 믿지 않는 자들까지도 가장 많이 부르는 찬양이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입니다. 감탄스럽고 놀라운 일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아주 낮게) 어메이징 그레이스...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가! Amazing Grace How Sweet!’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 추도식에서 이례적으로 직접 이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총회와 총신을 밝힐 큰 빛 장창수 목사는 '설교는 성도들의 삶의 적용과 성경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확하고 감동적인 예증과 예화들의 보고가 되어야 한다'는 설교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박사 과정에서 익힌 성경 본문에 대한 많은 관찰의 시간을 가지고 다음의 실제 사건을 예증으로 사용했다.
2015년 6월 18일 흑백 갈등으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흑인 감리교회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에서 희생된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를 비롯해 흑인 9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인 감리교회 테러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도식이 2015년 6월 26일 찰스턴 대학 강당에서 열렸다. 이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하기 위해 참여한 오바마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찬송가를 부르며 백인의 흑인 증오범죄로 숨진 이들을 기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노래하는 이례적인 모습에 놀랐지만 이내 추도객 모두 기립해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오바마 대통령은 숨진 9명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들 모두 은총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미국에도 은혜를 내려주시길” 기원하는 추도사로 전 미국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감동시켰다. 장창수 목사의 설교는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이게 놀라운 은혜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하우 스윗(Amazing Grace How Sweet). 놀라운 은혜. 얼마나 달콤한지. 오바마 대통령은 계속 끝까지 불렀습니다. 하우 스윗 더 사운드 댓 세이브드 어 레취(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그 중의 중요한 것은 우리가 파멸과 죽음 속에 잃어버렸는데(I once was lost) 벗 나우(But now) 그러나 지금은 아임 파운드(I'm found) 찾았네. 워스 블라인드(was. blind) 눈이 멀었는데 벗 나우 아이 시(but now I see) 그러나 지금은 보네. 이제껏 산 것도 주님의 은혜요. 그러니 어느 것 하나 당연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대적에게서 건져주시고 흑암의 권세와 죄와 사망과 악함과 모든 시험과 환난에서 지켜주시고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은혜이고 지난 육 개월 동안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찬양한다)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주시리.' (회중 아멘) 지금까지도 하나님 은혜로 살고 앞으로도 하나님 은혜로 살다가 장차 나를 본향에 인도해주실 분이십니다.
오늘 한 분의 책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007년에 출판한 '365 땡큐'(365 Thank You)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인 존 크랠릭은 미국의 변호사입니다. LA 주의 대법원 판사를 하다가 2007년에 변호사 개업을 했는데 너무 힘든 겁니다. 소송 건수가 줄고 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벅찹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둘째 아들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집세도 못 내고 예금은 바닥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딸마저도 자기 곁을 떠납니다. 두려움과 생활 때문에 지독한 우울증과 외로움과 절망의 마지막 자락인데 할아버지의 반복적인 말이 생각났습니다.
'존,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감사할 줄 알기까지는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거야.'
이 말이 뭐냐 자기를 돌아보니까 내가 누려왔던 수많은 일들과 생활에 감사하지 않았는데 결국은 그것을 다 놓쳐버렸지 않았느냐. 이제 감사를 해라. 이것을 깨닫고 그는 하루에 한 사람씩 감사를 하려고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365일 매일 있었던 일의 감사 편지를 쓰게 됐답니다.
제일 먼저 큰아들을 찾아가 감사를 했습니다. 두 번째는 상사였던 론을, 세 번째는 친구 린을, 네 번째는 멋진 모습을 만들어 줘서 감사하다고 단골 미용사 에이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넥타이를 선물한 딸에게도 감사를 했습니다. 이런 감사를 정말 365일 실행했습니다. 감사 편지 쓰기를 마쳤을 때 말랐던 체중이 정상이 되고 사업도 정상 궤도를 넘어서고 아래 직원들과의 관계도 회복이 되고 또 다른 사랑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감사는 기적을 낳습니다. 오늘 저는 그의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불평하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문득 믿음의 눈으로 상황과 사건을 해석하게 해주시옵소서. 두 번째 날마다 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내 삶 속에서 내 생각과 마음을 주장하여 주사 언제나 감사가 넘치게 해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지나칠 정도로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서. 2024년 맥추감사절을 드린 성도들에게 정말 남은 인생은 스콧 펙의 말처럼 무엇을 선택하든지 감사 감사 감사하게 해주시옵소시. (회중 아멘) 감사의 신비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날마다 시간마다 감사가 넘치게 하고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또 다른 기적이 여러분의 것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생명의 말씀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문득문득 떠오르게 하시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감사의 삶을 통해 놀라운 기적이 상식이 되는 대명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총회 큰 빛 장창수 목사의 설교 자체가 Amazing Grace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대명교회를 2,500여 명, 8배로 성장시킨 그는 그 놀라운 은혜의 설교를 성도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이렇게 준비한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성경은 말씀한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5-17
2024-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