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간음 사진.JPG
Susannah accused of adultery, by Antoine Coypel 

 
Lesson XIX
제칠 계명 간음
Seventh Commandment Adultery

교도 계율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형무소 근처에 교수대가 서있습니다. 그 교수대 위에 한 젊은 여자가 서있습니다. 많은 구경꾼들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여자는 진홍빛 A(간음을 나타내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자를 수로 곱게 새긴 가슴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에 왔는데 암스테르담에서의 남편의 일처리가 늦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식도 없이 헤어져 있는 기간이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오래 헤어져 있는 사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간음을 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엄격한 청교도들은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녀는 한사코 간음의 상대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범한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죄의 열매인 아이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뒤 평생 간음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존경받는 젊고 학식 많은 목사 딤즈데일이었습니다. 딤즈데일은 헤스터 프린과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수해서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오래 소식이 없던 그녀의 남편 칠링월스가 아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만나지 않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의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고뇌로 쇠약해진 목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치료약이라 속이고 목사를 서서히 독약으로 중독시킵니다. 그런데 그의 복수가 무르익어 성공할 무렵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군중 앞에서 헤스터 프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시던 여러분. 나를 거룩하다고 존경해주시던 여러분. 이 자리에 죄인이 섰습니다. 나는 마땅히 7년 전에 이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씨를. 여러분은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를 가나 주위에 이 글씨의 무섭고 끔찍한 광선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수치의 표적을 보고 떨지 않은 죄인이 여러분 속에 숨어 살아왔습니다.

모든 죄를 고백한 딤즈데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헤스터는 나머지 생애를 딸을 키우며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보내다 마감합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 대신에 검은 바탕에 붉은 주홍 글씨가 새겨집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 7월 4일 - 1864년 5월 19일)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습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소설에는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1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41.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as God loves chastity and purity, we ought to guard against all uncleanness. The substance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we must not defile ourselves with any impurity or libidinous excess. To this corresponds the affirmative, that we must regulate every part of our conduct chastely and continently. The thing expressly forbidden is adultery, to which lust naturally tends, that its filthiness(being of a grosser and more palpable form, in as much as it casts a stain even on the body) may dispose us to abominate every form of lust. As the law under which man was created was not to lead a life of solitude, but enjoy a help meet for him, and ever since he fell under the curse the necessity for this mode of life is increased; the Lord made the requisite provision for us in this respect by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entered into under his authority, he has also sanctified with his blessing. Hence, it is evident, that any mode of cohabitation different from marriage is cursed in his sight, and that the conjugal relation was ordained as a necessary means of preventing us from giving way to unbridled lust. Let us beware, therefore, of yielding to indulgence, seeing we are assured that the curse of God lies on every man and woman cohabiting without marriag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 20:14

41.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합니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私通)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데 2017년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시태그 운동(Hashtag activism 해시태그 활동주의)는 단순히 홍보 수단이나 가벼운 주제를 묶어 보여주는 역할에서 확대되어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는 해시태그의 사회운동 역할을 말합니다.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고 사회운동 역할로 확장된 것입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이게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으로써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해 시민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여론입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연극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018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제칠 계명에 대한 가르침의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해줍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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