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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이고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 12월 21일 ~ 1886년 5월 23일)의 "모든 시대는 신(GOD)에게 이어진다"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의 기원전 404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아테네의 융성과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경과를 기록한 이 책은 전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후의 대전으로 기원전 405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해권을 잃어 곡물 수입과 해외 영토 연락이 끊겨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와 법원에 갑질하다 자멸할 자처럼 아테네는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한영우(1938~2023)는 저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현대사 서술에서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당신의 국제적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결단을 안 내렸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두 사람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문정송 장로의 기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간구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 많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저희를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이곳 광신대학교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우리들의 입술로 죄짓지 않도록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주중앙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 섬기며 한기승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빌라델피아 교회의 본을 받아 우리의 가지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의 예비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개혁 정통 보수 신앙으로 부활 승리 신앙으로 광주중앙교회를 아름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임을 고백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바른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케 하시고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님께 영력, 지력, 체력을 더하셔서 영육이 강건함으로 목양,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사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살아나셨다. 주 예수 부활하셨다. (회중 아멘)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이 중대한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 승리 신앙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성령 임재를 체험하는 삶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중 아멘) 솔로몬 왕에게 주셨던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셔서 개혁 정통 보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중 아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성가대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마귀 세력이 떠나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나는 승리의 찬양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요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큰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성가대가 문정송 장로의 기도대로 "예수 다시 사셨네"를 찬양했다. 사회자 김기택 목사가 요한복음 5:24-29 봉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기승 목사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회중 아멘)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저와 여러분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아닌가요. (회중 아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아멘인가요. (회중 아멘) 이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문 28절,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회중 아멘)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교주가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자리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지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회중 아멘)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중 아멘)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확신을 믿습니까. (회중 아멘)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의 총회가 되기를 불철주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2023년 4월 부활의 봄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했던 한기승 목사의 부활과 건재가 2025년 4월에도 볼 수 있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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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병철 사업 보국과 한기승 목사 신앙 보국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4년간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직과 사단법인 신아세아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상우(李相禹, 1938년 4월 16일~)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말인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부활 신앙이 없이 1987년 타계하신 이병철 회장과 달리 한기승 목사는 2023년 4월 9일 믿음의 부활을 전하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교단과 국가에 기여한다. 광주 무등산 불의 혀 한기승 목사는 외쳤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우리 대한민국을 반도체 대국으로 일군 이병철 회장도 모두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총회와 대한민국이 되기를 불철주야 기도하겠습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았던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푸르른 호국의 계절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계절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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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그것이 신학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소강석 목사처럼 채워야 할 욕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삶과 믿음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는 2025년을 코앞에 두고 2024년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명창의 ‘새타령’을 듣고 전율하듯 흔치 않은 설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꺼질 듯이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곧장 날카로워져 심령을 벨 듯한 그의 소리에 그만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목소리의 힘은 강력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쟁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감사할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조선의 천재 집단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과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 1446년(세종 28년) 가을. 젊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체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속에서 발견된다. 단서는 사자가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과 몸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금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주상의 침전에 출몰하는 귀신, 저주받은 책들의 공동묘지.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다. 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 강채윤은 참혹한 죽음과 위험한 음모에 점점 빠져든다. 집현전 학사는 왜 우물 속에 처박혔는가. 사라진 금서는 어디에 있는가. 살인자의 정체를 쫓아 궐 안의 미로를 헤매던 채윤은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오리무중 속에 감춰져 있던 이들은 바로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그들의 수장인 주상 세종 대왕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 사대부들의 거대한 음모.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들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추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세종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연쇄살인의 이면에는 뛰어난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주인공 채윤이 마주한 세종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하고 오랜 허물을 벗으려 하는 문명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종 시대는 육백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백성들이 쓰기 편한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 사대부들의 대립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안사고를 접하고도 갈 길을 잃어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만 99세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가 2023년 백수연 축하 미사에서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99세 신부가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는 모습에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62세 소강석 목사가 인도하는 새에덴교회 2025년 신년축복성회가 2024년 12월 29일 주일 저녁 7시부터 2025년 1월 3일 금요일 오후 9시까지 매일 저녁 진행됐다. 이 집회는 35년 넘도록 이어온 집회다. 그런데 새해를 사흘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7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제주항공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생존자 2명을 제외한 모든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승무원 이모(33) 씨는 목포지역 병원으로 후송된 뒤 ‘어디가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여객기 후미 쪽에서 승객 서비스를 맡았던 이 씨는 왼쪽 어깨 골절과 머리 등을 다쳤으나 의식이 뚜렷한 상황이고 맥박도 정상이며 보행도 가능하다고 병원 측은 진단했다. 그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가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며 한쪽 엔진에서 연기가 난 후 폭발했다는 목격담을 구조대에 남겼다. 함께 구조된 20대 여성도 목포 중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50분 새에덴교회 신년축복성회2에서 62세 소강석 목사는 제목 ‘온리 원을 위한 신앙개혁’ 온리 원(only one)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을 위한 것 같이 본문 역대하 34:29-32 성경을 읽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소강석 목사는 철문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안 비행기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회중 아멘). 1분 동안 묵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이러한 재난과 재앙이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한숨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게 해주시고 아버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회중 큰 아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부족한 종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발뒤꿈치 상처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시고 여러분 누구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 소 목사를 보고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회중 아멘) (소 목사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나니... 이정명(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상상해서 추가해 작품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팩트(fact 事實)에 근거한 픽션(fiction 虛構)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종(世宗, 1397∼1450) 대왕은 강인하고 뭐 굉장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야, 세종대왕도 그렇게 참 나약한 부분이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세 달 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이 살인사건 이면에는 조선의 최고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가 뭔 줄 아세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다. 한글이란 이름은 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1914년 7월 27일)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사건) 이후에도 강습소 활동과 문법 연구, 사전 제작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쓰던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갑작스런 복통을 겪고 병사하였다. 사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주시경의 생전 숙원을 이뤘다. "여러분 세종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유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책력‘册曆’에 관한 연구를 하는 역학‘曆學’의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고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조선의 향악(鄕樂; 당악‘唐樂’에 대하여 조선 고유의 음악을 일컫는 말)을 바로 잡았는데요. 아악(雅樂;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궁정용 고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라고 할지라도 중국을 사대(事大;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화하족(華夏族) 또는 제하(諸夏)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이다.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 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화'(华)와 중화민국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상 한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길게 논하기 위해서 한나라 때 형성된 전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의 한족들은 선비족·몽골족·만주족·동남아인 등 근방 민족들과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화'(华)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현재는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 섬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한 문자를 만든다 이건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최만리(崔萬理, 1398년 ~ 1445년 10월 23일; 1444년 2월 20일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던 여러 대신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를 필두로 유학자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예우하면서 세계문자 역사상 가장 높이 인정되는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친히 참여하였고, 그 이외에 공이 큰 사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의 말미에 기록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8명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얼마나 병약한 존재였는가. 세종은 30대에 요즘 말로 당뇨병인 소갈증을 앓아 물을 한 동이씩 먹었다고 합니다. 물을 많이 먹고 또 소변을 자주 보고 특별히 합병증으로 시력이 약해집니다." 세종의 건강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눈병 12번, 허리통증 6번, 무릎통증 3번, 목마름 증상 2번, 살 빠지는 증상 1번이 언급돼 있다. 나이대 별로 분석하면 허리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해 30대 때 심해졌다가 낫기를 반복했다.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했다가 역시 좋아지다가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이 병들 때문에 세종대왕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여러분 42세(세종 21년) 때 신하들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각장애인에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세종 23년 1440년이죠.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신사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큰 소리로) 전하, 불가함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왕위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은 지혜롭고 늠름하고 지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백성의 안위를 돌보고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종은 좋은 책은 백번 읽었대요. 머릿속에 거의 암기할 정도죠.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문자. 여러분 영어보다 더 복잡한 뭐... 똑같은 발음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 한글이 있잖아요. 세계 최고의 문자. 뭐 누구는 그랬다고 하잖아요. 캐나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세종대왕에게 이름을 물어봤대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가나다'라 해라, 하셨다잖아요. (회중 박장대소) 조크입니다. 4군 6진(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이 '가나다'라 '캐나다' 이름을 지었다는 말처럼 피식 웃게 해주는 조크가 분명해도 저런 말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한다.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 30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歐蘇手簡;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글)이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병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아 부왕 태종이 모든 서책을 감추게 했는데,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아 있던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30번 넘게 읽었으며, 즉위 후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총명과 호학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널리 전했다. 구양수는 정치가로 호를 취옹(醉翁), 또는 육일 거사(六一居士)라 했고,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는데,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둘 다 66세를 살아 ‘구소’로 흔히 병칭된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廟號, temple name;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당대 조선의 모든 분야, 즉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 백성의 복지 수준도 향상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넓힌 임금.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재 군주로, 광개토대왕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민중에게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단 둘뿐인 군주이다. 우리 시대의 기이한 시인 성직자 소강석 목사의 only one 오직 하나뿐인 설교가 이어진다. 길선주, 한경직 등의 설교자를 뛰어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한글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암초를 만나도 파선을 당하지 않고 풍랑을 만나도 인생의 배가 뒤집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요 똑같은 사건을 만나도 팍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풍풍 뛰어 올라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시련을 만나도 폐인이 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신사임당에게는 좀 유감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5만 원짜리가 나오기 전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최고였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세종대왕에게는 끝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긍정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민족을 위하여 선한 정치를 할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민족이라는 이런 긍정 언어가 세종대왕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운 것은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세종대왕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모르셨음에도 그에게는 도전과 긍정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씨건 김 씨건 박 씨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처럼 도전정신과 긍정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세종대왕이 온리 원(only one)의 역사를 이루고 온리 원의 꽃을 피워낸 사람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오늘 병원에 갔는데요. 손님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분 입장에서는 손님이지만 그건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회중 웃음) 여러분 모든 사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스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적 설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창조적인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없는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 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은 현재도 할 일이 있고 미래도 할 일이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결별을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그분이 분명히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거룩함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 오셔서 살다가 그냥 다시 올라가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역대하 34:31-32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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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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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함성익 목사 노인 전도론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스토아학파의 체계적 창시자인 제논(제논 호키티에우스, 기원전 335년경 ~ 기원전 263년경)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2024년 12월 2일 총회회관에서 열린 제109회 전도부(부장 최효식 목사) 총회전도정책포럼에서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의 형 함성익 목사(전도부 서기)가 우리 교단 칼빈주의 정체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성경적 노인 전도론에 대해 입을 열었다. "... 65세 이상 노인 연간 자살자 수가 평균 35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기가 막힐 일입니다. 이건 인구 십만 명당 39.9명으로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17,2명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평생 수고와 고생이 끝난 인생 말년에 자살로 마감을 한다는 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삶의 마지막에 자살을 생각한다는 건 참 슬픈 일입니다. 보건복지부 자살실태조사에서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느냐는 설문조사에 응답한 노인 가운데 그 이유가 자신의 연약함, 부족함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 뭐 하냐는 생각이라 합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해결하려는 그런 의식이 강하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노인복지법 제2조에 보면 이렇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여 온 자로서 존경받으며 건전하고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다. 법으로는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존경과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노인은 그의 경험과 연륜만으로도 어르신으로 공경과 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과학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은 노인의 가치가 추락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초고령화 시대에 교회 모습은 어떻습니까. 첫째 세대의 불균형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같은 세대 간에는 자연스럽게 한 편이 되는 동질감을 갖는 반면, 다른 세대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작년 목회데이터 연구소 조사에서 나타난 세대 차이를 가장 크게 느낀 항목은 '의사소통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저 같은 경우 전통적인 목회자 가정에서 자랐고 또 저 자신 전통적인 목회를 해온 사람입니다. 최근에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이 넥타이 안 매고 티셔츠 입고 남방 하나 걸치고 설교단에 서기도 합니다.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라고 목회해서 그런지 그런 모습이 썩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좀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늘 정장을 하고 예배를 드리는 게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는 이런 게 못마땅한 겁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주일 대표 기도를 하는데 청바지에 자켓을 걸치고 나타나 단상에 올라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내려가세요, 장로님' (청중 웃음)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 시험 들더라고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고인이 되신 박기품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우이중앙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주일날 콤비 양복(상의와 하의가 다른 복장)을 입고 갔습니다. 목사님이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목사가 콤비를 입고 다니다니!' 그래서 그 목사님이 생각나서 저는 지금도 설교단에서 콤비를 입지 못합니다. (청중 웃음) 저 같은 노인들 불통 때문에 3040 세대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겁니다. 교회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젊은 세대의 이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직자 은퇴에 따른 직분자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개신교는 사실 국민 22.5%가 교인이었습니다. 1146만 명이 개신교인이었습니다. 예전에 1200만 명이라고 했죠. 그러나 코로나 이후 2022년도에는 774만 명 크리스챤이 인구 대비 19%가 채, 안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20대 30대 감소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세 축소와 함께 원래 중직자들의 고령화로 인해서 은퇴, 소천으로 일꾼은 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교회 직분자들의 고령화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번 제109회 총회에서 정년 연장에 관한 안건 토론이 여럿 있었습니다. 저도 그 토론에 참여해 정년 연장 주장했다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두 달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청중 웃음) 이 목회자의 정년 연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목회자 정년 연장 문제만이 아니라 앞으로 중직자들의 은퇴 문제도 함께 고민했던 겁니다. 앞으로 목사님들이 70에 은퇴하지만 앞으로 장로님들을 포함한 많은 교회 중직자들이 70에 은퇴해버리게 되면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또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다수가 고령 수준에 진입했고 그 모든 분들이 은퇴 나이가 돼버린 탓에 교회 성도들은 있으나 교회 일꾼은 찾을 수 없는 현상이 앞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도 웬만한 교회는 그런 상황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회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발 빠르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초고령화 시대에 또 한가지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고령화되니까 재정이 말라요. 돈이 없어요. 교회 일할 사람도 줄어들고 성도 나이가 많아지니까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수도 그만큼 줄어들죠. 그러니 경제활동의 미비와 수입이 거의 없는 노년 세대로 인해 교회 재정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노인 세대 부양비를 적잖게 느끼는데 교회도 그 문제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헌금을 재정으로 사용하는데 초고령화 시대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함성익 목사는 초고령화 시대의 문제의 실천 가능한 성경적 해결책을 이렇게 제시했다. 첫째, 노인의 권익을 보호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인에 대한 성경적 이해로 세대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3:15-17)이다. 부모는 보이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부모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보이는 하나님이신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노인의 주체적인 역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노인의 학교를 운영해야 한다. 노인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장수를 누리는 존재로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109년을 맞은 총회의 지혜자 함성익 목사는 모세처럼 말한다. "세상의 사람들도 100세 시대를 준비하고 있는데 교회가 100세 시대를 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를 품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유한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행복한 축복입니다. 그리고 그 노년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보낼 수만 있다면 내세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고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말했다.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다." 그처럼 중요한 건 70이니 80이니 노인이 된 것이 아니라 노인으로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가 아닐까. 성경은 말씀한다.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일을 애곡하니라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신 34:7-9 2024-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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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의 한 장 성경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인간에게는 다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겁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정호승 시인은 우회적으로 비판합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은근히 의로운 척하고 자기는 전혀 잘못이 없어요. 법에 하자가 없어요. 그런 사람을 정죄합니다. 시인은 에둘러서 이런 사람을 싫어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늘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죠. 그런가 하면 도정환 시인 우리와 정치적으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분이 정치하기 전에 이런 시를 썼어요.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한 장으로 된 성경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배상하라 빌레몬서 1:14-18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인생의 꽃이 어디 있고 그늘이 없는 인생이 과연 어디가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에 소개되는 오네시모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 집안에 노예라는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런데 이 빌레몬 집사는 오네시모를 아주 총명하게 생각해 신실하게 관리를 잘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오네시모의 삶에도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내가 부인을 얻고 자식을 낳아도 역시 내 가정 내 후손은 노예가 될 텐데. 그 바람에 흔들려 오네시모는 도망을 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주인 돈까지 훔쳐. 어디로 도망을 갔습니까. 한 1600킬로 이상 되는 로마로 갔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세상이 왜 그렇게 좁습니까. 거기서 누구를 만났느냐. 친구의 꼬드김으로 여러분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그때 1차 투옥 시기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사람들을 영접하고 만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도 바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기를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이야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 이야기를 들었을 게 아닙니까. 오네시모는 눈동자에 빛이 났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나 달콤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는 당신의 옥바라지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한 것은 복음을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빌레몬의 노예였는데 도망을 쳐 나왔다’고 바울에게 고백합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며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바울도 잠시나마 입을 열지 못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저렇게 훌륭한 나의 동역자, 저렇게 훌륭한 지혜자, 총명한 사람을 내가 놓치다니. 내가 모른 척하고 저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그가 양심에 못 이겨 돌아간다니.’ 당시 노예가 주인 몰래 물건까지 훔쳐 도망갔다면 화인(火印)은 물론이고 4대까지 벌을 받을 겁니다. 그러니 내가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다고 해도 아무리 빌레몬이 내게 복음을 받고 제자훈련을 받았어도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바울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썼을 겁니다. 바울은 먼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어떤 사람인가를 소개합니다. 이것은 빌레몬서 1:8-10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빌레몬서 1:10-12 말씀은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말씀합니다. 내가 낳았고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심복(心腹), 매우 요긴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네시모야 말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니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 싶다.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로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당시 통념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빌레몬서 1:10-14 내용입니다. 이뿐입니까. 다음은 빌레몬서 1:17-21까지 똑같은 말을 계속해 오네시모를 용서할 수 없겠느냐고 재삼 빌레몬을 설득합니다. 오네시모는 이 편지를 가슴에 품고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는 약 1600킬로 한 달 이상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걸어가면서 가슴속에 읽고 또 읽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감히 빌레몬 집사님의 신의를 배반하다니. 그는 내게 얼마나 잘해주셨는가. 그런 빌레몬 집사님을 내가 배신했으니 나는 도대체 어찌 될 것인가. 바울 사도의 편지를 받고 용서해 줄 것인가, 아니면 내 이마에 화인을 칠 것인가. 아니면 손목을 자를 것인가.’ 아마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탕자도 고백하지 않습니까.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9). 이 말을 얼마나 많이 연습했겠습니까. 아마 오네시모도 별의별 말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연습했을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골로새에 도착했습니다. 빌레몬이 골로새에 살았거든요. 전설에 의하면 라오디게아에서 낙농업을 하면서 엄청난 부자가 되고 상업 도시인 에베소에 가서 새로운 사업을 하러 가는 길에 두란노 서원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칼칼한 목소리로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이며 여러분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외치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디서였든지 빌레몬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습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에 나타나니 사람들이 ‘저런 쳐죽일 놈이 있는가’ 요즘 말로 하면 인터넷 언론 할 것 없이 (회중 웃음) 그냥 뭐 오네시모를 조져대는 겁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는데 물건을 훔친 저 두 손목을 자르든지 도망을 친 저 두 발목을 잘라 버릴거야, 모두가 수군거렸을 겁니다. (묶인) 오네시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엎드려 빌레몬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때 동행한 두기고에 대해 골로새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니 그는 사랑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니라 내가 그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내는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그들이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골 4:7-9 두기고가 발언권을 신청합니다. ‘빌레몬 집사님, 오네시모가 도망친 로마에서 친구의 도움으로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크게 회개하고 거듭나서 사도 바울의 옥바라지도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는 이제 바울의 심복 중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인자한 주인을 떠난 것을 가슴 아파하고 양심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죽더라도 복음을 들은 양심대로 살아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오네시모는 아무 말도 않고 부들부들 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두기고가 발언권을 요청합니다. ‘존경하는 빌레몬 집사님. 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사도 바울이 친필로 쓴 편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두기고가 오네시모의 가슴 속에 든 바울 서신을 빌레몬에게 전달했습니다. 빌레몬이 보니 바울의 친필 서신입니다. 빌레몬은 ‘우리 은사 사도 바울이 눈이 어두우셔서 대필로 편지를 쓰시는 데 나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으면 친필로 서신을 감옥에서 보내셨을까’하고 감격을 합니다. 그 순간 빌레몬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그토록 믿음과 정을 주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인간적 노여움을 누르고 용서한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비난을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친필 서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변했다는 오네시모를 용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오네시모의 몸도 흔들리고 있지만 빌레몬도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 바울을 영적 은사(恩師)로 삼았던 빌레몬이라 할지라도 오네시모를 바라보면 속이 끓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아무리 흔들리는 꽃도 제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직접 사도 바울을 섬기지 못하면 내가 섬길 자를 뽑을 사람도 누구를 뽑았겠느냐. 바로 저 오네시모를 뽑아 보냈을 것이다. 성령께서 내 소원을 이렇게 응답하시고 연로하신 사도께서 육필로 권고하심이 이처럼 망극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연로하신 사도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나 역시 만 가지 죄악을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하고 스스로 찾아온 오네시모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노라. 그리고 이 자리에서 오네시모의 노예 증서를 불태우고 자유 시민이 될 것을 선포하노라. (회중 아멘) 여러분 빌레몬이 뚜벅뚜벅 걸어가서 묶인 오네시모의 사슬을 풀어줍니다. 그 모습을 본 많은 사람이 감탄합니다. 빌레몬은 무릎 꿇은 오네시모를 안아주면서 말합니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사업을 하느라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나를 대신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위대한 사도 바울의 제자가 되기를 부탁한다.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떠나시오. 한시가 급하오. 바울 사도의 건강이 걱정되오.’ 여러분, 이 교회가 성장해 골로새 교회가 되었고 이 골로새 지역은 빌레몬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이 훔쳤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선교비를 가지고 바울을 더 잘 섬기기 위해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의 제자가 됩니다. 말씀과 영성 훈련을 받아 교회 전설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당시 가장 큰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자 이게 발단이 돼 그 유명한 폴리캅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됐고 이그나티우스도 노예에서 해방을 받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오네시모로 인해 이 빌레몬서가 한 장밖에 없지만, 신약성경 정경이 되어가는 과정에 포함이 된 것이 복음의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변화되고 관대와 관용이 있고 용서와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삶을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회중 아멘) 어디까지나 교회 전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림자와 그늘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그림만 보고 누가 잘했다더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꼭 꽃이 피려면 바람이 불어요. 바람이 불면 꽃이 아름답게 보이고 그 바람을 통해 꽃향기가 멀리멀리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합동 포럼이 부디 이런 모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도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늘이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합동포럼에서는 그림자가 있고 그늘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 빌레몬서와 같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작은 모임이지만 큰 역사를 행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모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오늘 대표회장에 취임하시는 우리 고광석 목사님, 저보다 IQ가 50 이상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저분의 언변을 감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스피치가 좋으신지. 저도 논쟁을 좀 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합동포럼이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빌레몬과 같은 아름다운 섬김의 역사를 이루면서 더 부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이처럼 거침없는 기인(奇人) 소강석 목사가 읽는 시나, 전하는 말씀을 감동 있게 듣는 것은 사도들이 본보기로 보여준 그들의 신앙과 진지함 때문이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그들의 명백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삶뿐만 아니라 믿음도 사랑하는 한, 우리는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 같은 그런 사역과 삶에 감동을 받으며 희열을 느낀다. 그런 믿음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는 점에서 우리 교단에 소강석 같은 기인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축사하면서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인용했던 말 중 가장 유명해진 말이 있다. (굶주린 것처럼) 계속 추구하고, (미련한 것처럼) 계속 시도하라. 이는 잡스가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Whole Earth Catalog의 1974년 판에 쓰여있던 말이다. 즉 '무식하면 용감하듯이' 계속 시도해서 얻으라는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경영 철학은 다음과 같다. 경영은 기존 질서와 철저히 다르게.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선정해 직접 몸으로 뛰어라. 항상 새로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포기하지 마라. 기술력을 과신하기보다 소비자 눈높이에 맞춰라. 간단하고 단순하게 하라. 성경은 말씀한다.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빌레몬서 1:20-21 202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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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이고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에드워드 핼릿 테드 카(Edward Hallett Ted Carr,1892년 6월 28일~1982년 11월 3일)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 1795년 12월 21일 ~ 1886년 5월 23일)의 "모든 시대는 신(GOD)에게 이어진다"라는 개념까지 포용해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말은 과거와 현재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의 말처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바람직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했던 패권국 아테네의 실패 과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 ~ 기원전 400년경)의 기원전 404년까지의 사건만을 기록한 채 미완성 작품으로 전해진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한 축을 이룬다. 아테네의 융성과 쇠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 - 기원전 404년)의 경과를 기록한 이 책은 전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 또 투키디데스는 정의보다는 패권에 기반하여 국가 간의 관계를 보는 정치적 현실주의 학파의 시조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스 연합군이 대제국 페르시아를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이끌었다. 페르시아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결성된 동맹은 시간이 갈수록 아테네의 갑질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됐다. 동맹 도시들을 착취하며 아테네는 패권국 행세를 했다. 아테네가 무리하게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한 뒤 갑질에 대한 역풍이 거세게 불었다. 아테네의 힘이 약해지자 동맹 도시의 반란이 들불처럼 퍼졌다. 아테네는 가까스로 연명하다가 기원전 405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최후의 대전으로 기원전 405년에 일어난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에서 스파르타 해군에 대패했다. 이로써 아테네는 제해권을 잃어 곡물 수입과 해외 영토 연락이 끊겨 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었다. 대한민국 국회와 법원에 갑질하다 자멸할 자처럼 아테네는 동맹에 갑질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이다. 서울대 명예교수 한영우(1938~2023)는 저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의 현대사 서술에서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의 선택은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당신의 국제적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결단을 안 내렸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두 사람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문정송 장로의 기도가 부활의 기쁨과 축복을 간구했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증인 된 삶을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허물과 죄 많은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저희를 보혈의 공로 의지하여 예배의 자리에 부르시고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이곳 광신대학교에서 하나님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진행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우리들의 입술로 죄짓지 않도록 입술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함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주중앙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로 섬기며 한기승 담임목사님을 세우시고 빌라델피아 교회의 본을 받아 우리의 가지 믿음을 굳게 잡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의 예비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주님이시여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개혁 정통 보수 신앙으로 부활 승리 신앙으로 광주중앙교회를 아름답게 신실하게 하나님만 섬기는 하나님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저희들임을 고백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들의 삶을 간섭하시고 바른길 믿음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라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실 때 우리의 심령이 소생케 하시고 은혜의 시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목사님께 영력, 지력, 체력을 더하셔서 영육이 강건함으로 목양, 목회 사역을 감당하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악이 생각나게 하시고 회개의 영을 허락하사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영육 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 받으며 치유되고 회복되는 성령의 역사가 이 시간 이곳에서 일어나는 현장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살아나셨다. 주 예수 부활하셨다. (회중 아멘) 사망 권세 이기시고 승리자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회중 아멘) 이 중대한 부활의 진리를 믿게 하시고 죽음을 정복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으니 우리 또한 부활 승리 신앙으로 다시 살아남을 믿으며 지금도 살아 계셔서 믿는 자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의 성령 임재를 체험하는 삶의 증인으로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회중 아멘) 솔로몬 왕에게 주셨던 지혜와 지식과 명철함을 우리 자녀들에게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고 건강을 지켜 주셔서 개혁 정통 보수 신앙이 다음 세대로 전수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회중 아멘)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성가대가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마귀 세력이 떠나고 어둠의 권세가 물러나는 승리의 찬양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놀라운 은혜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간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부활이요 생명이요 참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큰 아멘) 아멘.” 할렐루야 성가대가 문정송 장로의 기도대로 "예수 다시 사셨네"를 찬양했다. 사회자 김기택 목사가 요한복음 5:24-29 봉독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한기승 목사가 "부활 신앙으로 승리합시다"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했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다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회중 아멘)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저와 여러분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회중 아멘)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두 가지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아닌가요. (회중 아멘)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아멘인가요. (회중 아멘) 이 부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문 28절,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아멘.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 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회중 아멘)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종교의 교주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교주가 인류의 죄를 해결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에게 사망의 자리에서 영원의 자리 생명의 부활로 인도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지금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부활 신앙을 믿음으로 승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기를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회중 아멘)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중 아멘)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중 아멘)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회중 아멘)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회중 아멘) 부활의 확신을 믿습니까. (회중 아멘)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회중 아멘)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과 우리의 총회가 되기를 불철주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는 저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한 2023년 4월 부활의 봄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했던 한기승 목사의 부활과 건재가 2025년 4월에도 볼 수 있기를 날마다 기도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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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한기승 목사의 부활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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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와 큐티
-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시에서 최초 보고된 2019년 11월 17일 장봉생 목사는 이런 말씀을 전했다.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습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습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습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습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 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저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저는 제6대 담임목사로 2019년 현재 19년째를 맞이했습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큐티 책을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202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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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와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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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병철 사업 보국과 한기승 목사 신앙 보국
-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2003년부터 4년간 한림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했다. 현재 서강대학교 명예교수직과 사단법인 신아세아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는 이상우(李相禹, 1938년 4월 16일~)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말인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쌀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이병철 회장은 40년대 광복 전후부터 목돈을 벌어 50년대 한국전쟁 시기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고, 덕분에 1950년대엔 이미 국내 제1의 재벌로 성장한 기업인이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내세운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기치가 생필품의 국산화를 고민하던 당시 정권의 이해관계와도 맞물려 기세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선친 이찬우가 1900년대 전후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이승만과 약간 친분이 있었던 탓인지, 제일모직 완공식 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부활 신앙이 없이 1987년 타계하신 이병철 회장과 달리 한기승 목사는 2023년 4월 9일 믿음의 부활을 전하는 신앙보국(信仰報國)으로 교단과 국가에 기여한다. 광주 무등산 불의 혀 한기승 목사는 외쳤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 100세를 산들 200세를 산들 만족하겠습니까.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다 있지 않겠습니까. 옛날 조선 시대에 수명이 30대 40대 길어야 50대였습니다. 가끔 60대였습니다. 그래서 60대 환갑잔치를 가진 것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우리 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하고 신약 개발이 되고 최첨단 의료기가 발달 돼 많은 질병을 치료합니다. 그러나 옛날에 없던 병과 암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 삶에 죽음이 엄습해올 때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죽음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나의 모든 수고를 다 해서라도 생명을 연장하고 싶은 게 모든 사람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더 살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죽음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자냐 가난하냐 살아 있을 때 조금 편리하거나 불편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명예롭게 살았느냐 불명예스럽게 살았느냐의 여부도 죽음 앞에서는 별문제가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문제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과 여러분의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다 죽기를 싫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공평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 사회가 공평해졌습니까.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돈이 없고 권력이 없는 사람과 법정에서 사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과 비교해 공평해졌지만 우리 사회가 우리 삶이 다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평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는 돈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배운 사람도 배우지 않은 사람도 도시에 사는 사람도 시골에 사는 사람도 젊은이도 어린이도 노인도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공평한 것입니다. 이 땅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진시황제도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도 우리의 삶을 이렇게 편안하게 만든 발명왕 에디슨도 그리고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우리 대한민국을 반도체 대국으로 일군 이병철 회장도 모두 죽음을 막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무수한 사람이 죽었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이 죽고 있고 앞으로도 다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래 살고 싶은데 왜 죽는 것입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성경은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우리 삶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망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를 다 믿습니다. 창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와 비 필연적 창조가 있습니다. 필연적 창조는 하나님이 반드시 세상을 창조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가 생깁니까. 하나님이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혁 신앙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반드시 창조하셔야 한다는 필연적 창조를 말하면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해서 존재하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말할 때 비 필연적 창조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수도 있고 안 하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것을 창조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창조하셨느냐, 하나님이 피조 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의 백성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고 그 백성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가 인간 세계에서 창조의 경륜이 무너지고 인간의 삶에 죄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맺으셨던 은혜 언약을 아담이 파괴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음으로 아담이 범죄했다.’ 그렇게 해서 죄가 우리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선악과를 따 먹었다’ 기록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은혜를 주셔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지만 한 가지 금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 권한에 두셨는데 아담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반역하는 행위였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찬탈함으로 죄가 인류사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대표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 언약을 파괴해 그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 때문에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죽음, 모든 사람이 비통해하고 괴로워하는 죽음, 이 죽음이 죄 때문에 우리에게 도입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목적을 훼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죄가 있으면 평안이 없어지고 생명을 빼앗기게 됩니다. 죄가 사람을 지배해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파괴되고 창조의 목적을 상실하고 창조의 질서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시면서 하나님이 그냥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어떻게 억제하고 제거할 것인가 하는 방법을 하나님이 내셨습니다. 그 첫 번째 방법이 인간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에 보면 노아 홍수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변화가 있는데 인간 수명의 단축입니다. 그 이전에 인간이 900살 930살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살을 살았습니다. 이건 설화나 전설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오래 살았습니다. 여러분, 오래 사는 것 우리가 다 원하는 데 참 좋겠죠. 그러나 오래 살면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오래 산 만큼 더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때 사람들이 오래 살므로 죄가 넘쳤습니다. 죄가 너무 많아 하나님이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시고 노아 홍수 이후에 수명을 120세로 단축을 시키셨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므로 죄가 조금씩 억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를 억제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두 번째 방법을 내셨습니다. 바로 그것은 국가를 세우신 것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이 죄를 지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감옥에 보내고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가 많아지겠습니까 적어지겠습니까. 죄가 줄어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죽여도 감옥에 안 가고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아마 사람 죽일 사람 많을 겁니다. 국가는 이런저런 법을 어겨도 내가 세금 안 내고 내가 불이익을 안 당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욕구대로 욕망대로 욕심대로 살아서 죄를 짓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벌금내지 않는다면 교통법규 없다면 과속하고 차선 지키지 않고 얼마든지 차를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런데 교통법규 어긴 게 사진이 찍히고 벌금이 부과되니까 속력을 줄여서 교통사고 줄어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국가를 세우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악한 독재 정부라도 국가가 세워지면 국가의 공권력을 위해서 죄가 억제되는 것입니다. 국가가 세워지고 국가의 공권력으로 죄를 억제했지만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를 인류사회에서 완전히 억제하고 제거하기 위해 방법을 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죄의 문제를 법적으로 완전히 제거할 뿐 아니라 해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삼위일체 교리, 성육신 교리,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 교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은 곧 사망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면권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통치자에게 있습니다. 한 국가의 대통령은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사면을 하기도 하고 권리를 복권 시키기도 합니다. 사면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복권은 상실된 권리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치권자인 대통령만이 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통치자는 그 나라 백성의 사면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듯 세상의 사면권은 누구에게 있느냐. 그것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대신 지우셔서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뿐만 아니라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기게 하려고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은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어떤 분이 기도하실 때 그럽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죽음은 육신의 의미도 있지만 원리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었던 자, 하나님과 분리된 사람들,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회개하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가 아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부활은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죽었던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부활했습니다. 죄에서 생명으로, 이게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때에 죽었던 모든 자들이 다 부활합니다. 이게 마지막 때의 부활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만이 죄의 정복자이시고 예수님만이 사망의 정복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연결된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다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이 사실을 믿게 하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임재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본인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이것을 증거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죄 사함 받았다고 영원한 부활을 소유하게 됐다고 누가 증거하게 하는가. 우리 안에 보증으로 와 계신 성령이 증거하고 믿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고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합니다. 예수님만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신 성탄의 의미도 귀하지만 우리 죄를 용서하고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부활절의 의미가 우리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우리의 모든 것은 마지막 순간에 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기고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교회생활하고 수고하고 봉사하는 이 모든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갖는 사람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우리 환경 속에서 승리할 수 있고 삶의 현장에서 승리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 가운데 많은 환란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고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앞에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이 부활 신앙이 죽음을 이기게 하고 이 부활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 신앙이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까.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염병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환경과 사건과 사람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확실치 못하니까 부활의 생명이 없으니까 환란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흔들리고 우리의 믿음의 자리가 흔들리는 것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지는 부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부활 신앙으로 승리하는 총회와 대한민국이 되기를 불철주야 기도하겠습니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낼 때마다 그 흔적을 안에 간직한다. 일 년에 하나씩 나이테가 생기는 이유다. 그래서 나무들에게 겨울은 그저 버티기만 하는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1억4천만 년 전 생존 전략으로 개발한, 성장의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다. 진짜 의미 있는 일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이듯 말이다. 우리가 보았던 겨울나무들이 이런 삶의 원리를 푸르른 호국의 계절에 보여주듯 부활 신앙을 믿고 전하는 한기승 목사의 총회를 위한 부활과 건재를 알려줄 계절도 문득 다가올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1-52 2025-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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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이병철 사업 보국과 한기승 목사 신앙 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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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 그것이 신학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소강석 목사처럼 채워야 할 욕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삶과 믿음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는 2025년을 코앞에 두고 2024년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명창의 ‘새타령’을 듣고 전율하듯 흔치 않은 설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꺼질 듯이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곧장 날카로워져 심령을 벨 듯한 그의 소리에 그만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목소리의 힘은 강력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쟁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감사할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조선의 천재 집단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과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 1446년(세종 28년) 가을. 젊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체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속에서 발견된다. 단서는 사자가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과 몸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금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주상의 침전에 출몰하는 귀신, 저주받은 책들의 공동묘지.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다. 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 강채윤은 참혹한 죽음과 위험한 음모에 점점 빠져든다. 집현전 학사는 왜 우물 속에 처박혔는가. 사라진 금서는 어디에 있는가. 살인자의 정체를 쫓아 궐 안의 미로를 헤매던 채윤은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오리무중 속에 감춰져 있던 이들은 바로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그들의 수장인 주상 세종 대왕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 사대부들의 거대한 음모.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들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추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세종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연쇄살인의 이면에는 뛰어난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주인공 채윤이 마주한 세종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하고 오랜 허물을 벗으려 하는 문명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종 시대는 육백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백성들이 쓰기 편한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 사대부들의 대립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안사고를 접하고도 갈 길을 잃어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만 99세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가 2023년 백수연 축하 미사에서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99세 신부가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는 모습에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62세 소강석 목사가 인도하는 새에덴교회 2025년 신년축복성회가 2024년 12월 29일 주일 저녁 7시부터 2025년 1월 3일 금요일 오후 9시까지 매일 저녁 진행됐다. 이 집회는 35년 넘도록 이어온 집회다. 그런데 새해를 사흘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7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제주항공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생존자 2명을 제외한 모든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승무원 이모(33) 씨는 목포지역 병원으로 후송된 뒤 ‘어디가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여객기 후미 쪽에서 승객 서비스를 맡았던 이 씨는 왼쪽 어깨 골절과 머리 등을 다쳤으나 의식이 뚜렷한 상황이고 맥박도 정상이며 보행도 가능하다고 병원 측은 진단했다. 그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가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며 한쪽 엔진에서 연기가 난 후 폭발했다는 목격담을 구조대에 남겼다. 함께 구조된 20대 여성도 목포 중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50분 새에덴교회 신년축복성회2에서 62세 소강석 목사는 제목 ‘온리 원을 위한 신앙개혁’ 온리 원(only one)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을 위한 것 같이 본문 역대하 34:29-32 성경을 읽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소강석 목사는 철문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안 비행기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회중 아멘). 1분 동안 묵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이러한 재난과 재앙이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한숨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게 해주시고 아버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회중 큰 아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부족한 종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발뒤꿈치 상처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시고 여러분 누구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 소 목사를 보고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회중 아멘) (소 목사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나니... 이정명(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상상해서 추가해 작품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팩트(fact 事實)에 근거한 픽션(fiction 虛構)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종(世宗, 1397∼1450) 대왕은 강인하고 뭐 굉장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야, 세종대왕도 그렇게 참 나약한 부분이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세 달 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이 살인사건 이면에는 조선의 최고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가 뭔 줄 아세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다. 한글이란 이름은 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1914년 7월 27일)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사건) 이후에도 강습소 활동과 문법 연구, 사전 제작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쓰던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갑작스런 복통을 겪고 병사하였다. 사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주시경의 생전 숙원을 이뤘다. "여러분 세종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유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책력‘册曆’에 관한 연구를 하는 역학‘曆學’의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고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조선의 향악(鄕樂; 당악‘唐樂’에 대하여 조선 고유의 음악을 일컫는 말)을 바로 잡았는데요. 아악(雅樂;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궁정용 고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라고 할지라도 중국을 사대(事大;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화하족(華夏族) 또는 제하(諸夏)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이다.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 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화'(华)와 중화민국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상 한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길게 논하기 위해서 한나라 때 형성된 전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의 한족들은 선비족·몽골족·만주족·동남아인 등 근방 민족들과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화'(华)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현재는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 섬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한 문자를 만든다 이건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최만리(崔萬理, 1398년 ~ 1445년 10월 23일; 1444년 2월 20일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던 여러 대신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를 필두로 유학자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예우하면서 세계문자 역사상 가장 높이 인정되는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친히 참여하였고, 그 이외에 공이 큰 사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의 말미에 기록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8명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얼마나 병약한 존재였는가. 세종은 30대에 요즘 말로 당뇨병인 소갈증을 앓아 물을 한 동이씩 먹었다고 합니다. 물을 많이 먹고 또 소변을 자주 보고 특별히 합병증으로 시력이 약해집니다." 세종의 건강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눈병 12번, 허리통증 6번, 무릎통증 3번, 목마름 증상 2번, 살 빠지는 증상 1번이 언급돼 있다. 나이대 별로 분석하면 허리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해 30대 때 심해졌다가 낫기를 반복했다.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했다가 역시 좋아지다가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이 병들 때문에 세종대왕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여러분 42세(세종 21년) 때 신하들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각장애인에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세종 23년 1440년이죠.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신사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큰 소리로) 전하, 불가함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왕위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은 지혜롭고 늠름하고 지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백성의 안위를 돌보고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종은 좋은 책은 백번 읽었대요. 머릿속에 거의 암기할 정도죠.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문자. 여러분 영어보다 더 복잡한 뭐... 똑같은 발음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 한글이 있잖아요. 세계 최고의 문자. 뭐 누구는 그랬다고 하잖아요. 캐나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세종대왕에게 이름을 물어봤대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가나다'라 해라, 하셨다잖아요. (회중 박장대소) 조크입니다. 4군 6진(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이 '가나다'라 '캐나다' 이름을 지었다는 말처럼 피식 웃게 해주는 조크가 분명해도 저런 말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한다.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 30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歐蘇手簡;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글)이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병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아 부왕 태종이 모든 서책을 감추게 했는데,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아 있던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30번 넘게 읽었으며, 즉위 후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총명과 호학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널리 전했다. 구양수는 정치가로 호를 취옹(醉翁), 또는 육일 거사(六一居士)라 했고,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는데,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둘 다 66세를 살아 ‘구소’로 흔히 병칭된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廟號, temple name;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당대 조선의 모든 분야, 즉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 백성의 복지 수준도 향상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넓힌 임금.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재 군주로, 광개토대왕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민중에게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단 둘뿐인 군주이다. 우리 시대의 기이한 시인 성직자 소강석 목사의 only one 오직 하나뿐인 설교가 이어진다. 길선주, 한경직 등의 설교자를 뛰어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한글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암초를 만나도 파선을 당하지 않고 풍랑을 만나도 인생의 배가 뒤집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요 똑같은 사건을 만나도 팍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풍풍 뛰어 올라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시련을 만나도 폐인이 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신사임당에게는 좀 유감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5만 원짜리가 나오기 전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최고였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세종대왕에게는 끝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긍정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민족을 위하여 선한 정치를 할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민족이라는 이런 긍정 언어가 세종대왕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운 것은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세종대왕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모르셨음에도 그에게는 도전과 긍정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씨건 김 씨건 박 씨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처럼 도전정신과 긍정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세종대왕이 온리 원(only one)의 역사를 이루고 온리 원의 꽃을 피워낸 사람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오늘 병원에 갔는데요. 손님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분 입장에서는 손님이지만 그건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회중 웃음) 여러분 모든 사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스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적 설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창조적인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없는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 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은 현재도 할 일이 있고 미래도 할 일이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결별을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그분이 분명히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거룩함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 오셔서 살다가 그냥 다시 올라가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역대하 34:31-32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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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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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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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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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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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 한번 툭 대면 그대로 터져버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 지구촌과 한국 정치판이다. 영남협의회가 제7회 정기총회를 열고 박영만 목사(경동노회, 경주서부교회)를 신임 대표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와 함께 영남지역 109회기 총회 임원 당선자 축하 순서를 진행했다. 정기총회는 2024년 12월 4일 대신대학교(총장 최대해 목사)에서 개최했다. 1부 예배는 직전 대표회장 김장교 목사 사회로 손원재 장로(상임회장) 기도, 총회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예배자' 제목을 말씀을 잔잔한 위엄으로 전했다. 로마서 11장 36절 말씀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예배자'란 제목으로 장봉생 목사가 입을 열었다. "개혁주의 신학 포럼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모여 늦게까지 토론을 하는데 제 기억으로 예배 시간이 20분이었습니다. 당황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15분 만에 끝났으니까요. 그날 포럼 주제는 ‘개혁주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비스듬하게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데 돌아다니고 발표할 강의안을 보는 교수들을 보며 그 모습이 제대로 예배드리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년 불교를 믿는 어느 여성이 그냥 지나가다가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어떤 힘에 이끌려 들어왔다고 하는데 뒷자리에서 계속 1시간 내내 눈 뜨고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는 겁니다. 찬양하는 사람들 옆에 대표 기도하는 사람, 저 뒤에 설교하는 사람 뒤에 누군가 같이 있는 게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 같지 않은 사람. 아! 이 교회 뭐가 있다. 갑자기 신령기가 발동해 좀 더 지켜봐야겠다 생각했다는 겁니다. 한번 참석하고 두 번 참석하더니 그게 계기가 되서 참석하면서 이게 복음입니까, 이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까, 두려움으로 감사함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식당을 경영하는데 얼마 전 가보니 '이제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 사랑을 받으며 몇 년을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니 이제 아버지 집에 갈 때가 된 것 같아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뒷골이 당기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대표하는 오늘 본문에 헬라어 전치사 3개 ‘에크’ 주에게서 나오고, ‘디아’ 주로 말미암고, ‘에이스’ 주에게로 돌아가리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예배합니다. 복음적 삶을 마무리하는 로마서의 마지막 구절도 송영으로 끝납니다. 이 복음으로 너희를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간절한 음성으로) 아멘. 우리 선배님들 목사 장로님들 나이 들어가면서 영원히 예비 된 그 자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체질을 만드시고 연습 많이 하셔서 영원한 예배의 자리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목사로 섬기고 장로로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동행하시는 성령으로 인하여 감격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 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퇴한 지 오랜 선배를 찾아 ㅤㅂㅚㅆ더니 말하십니다. 은퇴하니까 영력이 필요 없더라. 뭐가 필요합니까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지. 영성은 필요하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살면서 예배는 해야 되고 죽어 천당 가서도 예배는 해야 되니 영성은 필요하지. 최소한의 최소한의 영력은 차치(且置)하고 최소한의 예배는 할 수 있는 영성 관리는 우리가 해야 되겠습니다. 예배조차도 감격스럽게 드리지 못하는 그 정도 영성 가지고 목사 한다고 장로 한다고 왔다 갔다 하고 명함 내고 출판물에 이름 올리고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남협의회 우리 목사님 장로님들 뭐가 필요하십니까. 돈이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자리가 필요하십니까. 아니면 영성이 필요하십니까. 최소한의 예배를 드리기 위한 영성은 교회를 더 예배하기 위한 자리로 만들기 위한 영력은 얼마나 더 필요로 하십니까. 지난 토요일에 우리 총회장님이 너무 바쁘셔서 하셔야 할 자리를 부총회장인 제가 대신 섬기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가서 설교를 제가 했습니다. 자존심을 지킵시다. 적어도 내가 이 자리, 이 협의회에 함께한다는 그리고 내가 사람들 앞에 명함 내밀 수 있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스스로 자부한다면 최소한 자존심은 지킵시다. 우리가 대단한 성인군자는 못 돼도 하나님 앞에 예배자는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는 고백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는 제대로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화려한 재능 있는 교인들 별로 없어도 그래도 복음을 아는 복음의 감격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답게 나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를 만들어 놓고 설 수 있는 그런 우리 협의회의 일꾼들 될 수 있기를 (간절한 음성으로)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회중 아멘) 수고하시는 회장님과 수고하실 회장님, 임원님들 귀한 협의회를 통해서 영남지역협의회에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불같이 일어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교단을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반도 땅을 만드는 일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2부에서 총회 당선인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영남지역은 이번 109회기에 총회장 김종혁 목사를 비롯해 서기 임병재 목사, 회계 이민호 장로,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 GMS 이사장 양대식 목사, 고시부 부장 김성환 목사 등 선관위원, 재판국원, 기관장으로 28명이 선출됐다. 3부 정기총회 회무에서 한 회기를 이끌어 갈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다. 대표회장에 선출된 박영만 목사는 말했다. “지난 6회기까지 잘 이어와 주신 임원들에게 감사 인사드립니다. 협의회가 창립할 때 정신 다시 한번 기억하며, 협의회 목사 장로들의 단합과 연대를 통해 영남지역 사역이 확장되는 계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전과 따뜻함, 그리고 우리의 옛 모습을 다시금 일깨웠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총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메시지의 진정한 힘은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가 전한 성경 말씀에 있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whom be glory for ever. Amen. 성경은 말씀한다.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요 4:23-24 202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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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영남협의회 부총회장 장봉생 목사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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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수업 - 칼빈은 누구 Who is Calvin
- Lesson I칼빈은 누구Who is Calvin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제 동창 친구 하나는 대학에 갈 때 영어가 싫어서 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다보니 교과서가 전부 영어 원서였습니다. 영어는 라틴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법이 꽤 복잡합니다. 간단한 예로 be 동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겁니다. 대략 이렇습니다. ⑴ 변칙(變則)동사(anomalous verb)의 하나로 어형(語形)변화에 특징이 있음.⑵ 의문문을 만드는 데 주어와 도치되며 조동사 do를 쓰지 않음: He is busy.→Is he busy?⑶ 부정문으로 할 때에도 do를 안 씀: That is nice.→That is not 〔isn’t〕 nice. 다만, 명령형에서는 흔히 do를 쓰며, do를 쓰지 않는 것은 옛 형태: Don’t be a fool.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마라. Be not afraid. 《고어》 두려워하지 말지어다.⑷ 강조할 때 do를 사용치 않고 be 동사를 세게 발음함: She is [-z-] kind, indeed. 그녀는 정말 친절합니다. 다만, 긍정(肯定) 명령형을 강조할 때에는 do를 씀: Do be gentle to them. 제발 그들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게나. be 동사의 문법 일부가 이러니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영어 공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비들을 잘 넘기고 복잡한 문법 체계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됩니다.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래 해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5-10억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 국민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각 나라의 엘리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 내는 정보입니다. 신문, 잡지, 도서, 학계, 인터넷 등을 통해 영어 사용 인구가 생산해내는 정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현대를 살면서 영어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봉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영어 번역본을 통해 그 진수(眞髓)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교계에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엘리트(elite) 개혁주의자이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선구자(forerunner)는 누구입니까. 칼빈(John Calvin)입니다. 칼빈은 누구입니까.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빈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목회자(pastor)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의 대표(chief) 해설자(expositor)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polemic)과 변증(apologetic) 저술가(write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seminal)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commentary)들과 신앙고백(confessional) 문서(document)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treatise)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인문주의(humanist hjːmnist) 법률가(lawyer)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 시의회의 이단(heresy)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을 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55세 소천)을 보냈습니다.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RECOLLECTION 되·새·김 1. 영어 공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2.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3. 칼빈주의는 무엇입니까.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이 포함된 견해(aspect)입니다. 2019-02-04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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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수업 - 칼빈은 누구 Who is Calv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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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수업 - 제이 계명 우상숭배
- 제이 계명 우상숭배 Second Commandment Idolatry 색이 바랜 5센티 가량의 송곳니를 4억 불교도들이 지상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숭배합니다. 이 치아는 주전 543년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태운 장작더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뒤 실론(Ceylon)으로 그 치아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는 그 치아가 실론의 칸디(Kandy)에 휘황찬란하게 건립된 치아 사원 안의 황금 연꽃 위에 얹혀있습니다. 황금 연꽃 둘레는 수많은 루비와 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여러 나라에서 10만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이 신성한 치아를 바라보려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사원에 금과 은과 보석들의 예물들을 가지고 와 바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톨릭에서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들이 "성물"이라고 숭배하고 보관하는 것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나폴리와 로마의 교회들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털.- 페루기아 대성당(Cathedral Perugia)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반지.- 프라토(Prato)의 교회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거룩한 허리띠. - 나폴리의 산 가우디오소 에파트리찌오 교회와 로마의 백성들의 마리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젖 방울들. - 주님의 마지막 만찬 때 사용된 대야가 제노아의 성 로렌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면사포 그리고 안드레 사도의 두개골이 모두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돌기둥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 세마포가 투린의 세례 요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Second Commandment THOU SHALT NOT MAKE UNTO THEE ANY GRAVEN IMAGE, OR ANY LIKENESS OFANYTHING THAT IS IN HEAVEN ABOVE, OR THAT IS IN THE EARTH BENEATH, OR THAT IS IN THE WATER UNDER THE EARTH: THOU SHALT NOT BOW DOWN THYSELF TO THEM, NOR SERVE THEM. 제이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17. As in the first commandment the Lord declares that he is one, and that besides him no gods must be either worshipped or imagined, so he here more plainly declares what his nature is, and what the kind of worship with which he is to be honoured, in order that we may not presume to form any carnal idea of him. 제일 계명에서 여호와께서 그는 하나이시고 그 이외에 신들을 하나도 예배하거나 상상해서 안 된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그는 여기에서 무엇이 그의 본성이시고, 그리고 그가 영광받으셔야 될 예배의 종류가 무엇이고, 순서를 따라(in order) 우리가 그에 대한 어떤 육체적인(carnal) 사상을 만들려고 추정해서는(presume) 안 된다는 것을 더 자세히 선포하십니다.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he will not have his legitimate worship profaned by superstitious rites. Wherefore, in general, he calls us entirely away from the carnal frivolous observances which our stupid minds are wont to devise after forming some gross idea of the divine nature, while, at the same time, he instructs us in the worship which is legitimate, namely, spiritual worship of his own appointment. 그러므로 이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한(legitimate) 예배를 미신적인 의식(rite rait)들로 불경스럽게(profane) 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그는 우리가 육체적인 하찮은(frivolous) 계율(observance)들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멍청한 마음은 신성에 대한 어떤 막돼먹은(gross grous) 사상을 따라 그런 계율들을 고안하는 데 익숙합니다(wont). 한편 그와 동시에 그는 정당한 예배 즉 그 자신이 지정하신 영적 예배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The grossest vice here prohibited is external idolatry. This commandment consists of two parts. The former curbs the licentious daring which would subject the incomprehensible God to our senses, or represent him under any visible shape. The latter forbids the worship of images on any religious ground. 여기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형식적인(external) 우상숭배(idolatry)입니다. 이 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의 감각에 예속시키거나 하나님을 어떤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방자한(licentious) 대담무쌍(daring)을 억제합니다. 둘째 부분은 어떤 종교적인 구실(religious ground)을 붙인 성상(image)들의 예배를 금지합니다(forbid). There is, moreover, a brief enumeration of all the forms by which the Deity was usually represented by heathen and superstitious nations. By “any thing which is in heaven above” is meant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perhaps also birds, as in Deuteronomy, where the meaning is explained, there is mention of birds as well as stars(Deut. 4:15). 더욱이 여기에는 이교도와 미신적인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형태의 조물주(Deity)에 대한 간결한(brief briːf) 목록(enumeration)도 있습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로 의미하는 것은 해, 달, 별들, 새들입니다. 아마도 별들뿐만 아니라 새들도 언급하고(신 4:15) 그 의미를 설명도 하는 신명기(Deuteronomy)에서처럼 말입니다. I would not have made this observation, had I not seen that some absurdly apply it to the angels. The other particulars I pass, as requiring no explanation. We have already shown clearly enough(Book 1. chap. 11, 12) that every visible shape of Deity which man devis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divine nature; and, therefore, that the moment idols appear, true religion is corrupted and adulterated. 내가 이 목록을 천사들에다 터무니없이(absurdly) 갖다 붙인 어떤 것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소견(observation)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고안한 신에 대한 모든 형태의 보이는 모양은 하나님 신성에 전혀(diametrically) 반대되는 것(Book 1. chap. 11, 12)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상들이 나타나는 순간 참 종교는 부패하고 변질된다는(adulterate) 사실을 말입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제이 계명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형식적인 우상숭배입니다. 2. 제이 계명에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엄중한 경고가 붙을 정도로 심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형상이든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왜 칼빈은 ‘우상이 나타나는 순간 참된 종교가 부패하며 변질한다’고 가르칩니까. 제이 계명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섬길지라도 알맞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9-01-17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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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수업 - 제이 계명 우상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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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 수업 - 제일 계명 유일신
- 제일 계명 유일신First Commandment 지난 2018년 7월 5일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독일 트리어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한국 일부에서 크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공산주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에게 증오와 굶주림을 안겨줍니다. 그를 따르는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는 산유국(產油國)임에도 경제 붕괴로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1980년대 운동권 학생 책꽂이엔 주로 한 종류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에 토대를 둔 ‘사회구성체론’과 ‘정치경제학’ 같은 책입니다. 서클 세미나에서 토론하려면 그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시대 청년 대학생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 지도자들처럼.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9:20-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경 3억 3천만에 달하는 신들과 여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세대 당 여덟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동물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동물들과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부양을 합니다. 동물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들의 집에서 하인을 둔 부자 주인 노릇을 하며 빈둥빈둥 살아갑니다. 인도의 4억 5천만 힌두교도들은 거의 7천 5백만에 달하는 소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의 농작물들을 먹어치우고 해를 주는 원숭이들과 쥐들과 여러 해충들까지도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영역에서 시작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힘을 다해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 이 말씀은 다른 신이나 현대의 무수한 우상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섬기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 소유 명예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요.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irst Commandment. I AM THE LORD THY GOD, WHICH BROUGHT THEE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BONDAGE.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제일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16. The authority of the Law being founded and established, God delivers his First Commandment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Lord will have himself alone to be exalted in his people, and claims the entire possession of them as his own. That it may be so, he orders us to abstain from ungodliness and superstition of every kind, by which the glory of his divinity is diminished or obscured; and, for the same reason, he requires us to worship and adore him with truly pious zeal. The simple terms used obviously amount to this. 16. 창시되고 설립된 율법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그의 제일 계명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는 말씀으로 전하십니다. 이 계명의 의미(purport)는 여호와(the Lord)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에서 스스로 높임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들의 전체 소유를 그 자신의 것으로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That it may be so), 그는 모든 종류의 불신앙(ungodliness)과 미신을 끊을 것을(abstain æbstein)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그것으로(by which) 그의 신성의 영광이 감하거나(diminish) 흐려지게(obscure) 됩니다. 그래서 같은 이유로, 그는 참 경건한 열정으로 그를 경배하고(worship) 숭배하라(adore)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require). 명료하게 사용된 단순한 말씨(terms)가 결국 그 의미입니다(amount to this). For seeing we cannot have God without embracing everything which belongs to him, the prohibition against having strange gods means, that nothing which belongs to him is to be transferred to any other. The duties which we owe to God are innumerable, but they seem to admit of being not improperly reduced to four heads: Adoration, with its accessory spiritual submission of conscience, Trust, Invocation, Thanksgiving.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embrace embreis)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상한 신들을 갖지 말라는 금지(prohibition)는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어떤 다른 것에 결코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의무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innumerable) 이것들을 네 가지로 줄인다고 해서 부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숭배(Adoration), 양심(conscience)의 보조적인(accessory) 영적 복종(submission)과 함께, 신뢰(Trust), 기원(Invocation), 감사(Thanksgiving) By Adoration, I mean the veneration and worship which we render to him when we do homage to his majesty; and hence I make part of it to consist in bringing our consciences into subjection to his Law. Trust, is secure resting in him under a recognition of his perfections, when, ascribing to him all power, wisdom, justice, goodness, and truth, we consider ourselves happy in having been brought into intercourse with him. Invocation, may be defined the retaking of ourselves to his promised aid as the only resource in every case of need. Thanksgiving, is the gratitude which ascribes to him the praise of all our blessings. 숭배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위엄(majesty)에 경의를 표할(homage) 때 우리가 그에게 바치는 존경(veneration)과 예배(worship)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숭배를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게 하는 요소로 생각하겠습니다. 지혜, 정의, 선, 및 진리 등의 모든 능력을 그의 것으로 돌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intercourse) 되는 것으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신뢰는 그의 완전하심(perfections)에 대한 인식(recognition) 하에 하나님 안에 머무는 보증(secure)입니다. 기원은 모든 종류의 필요의 유일한 자원(resource)으로 그의 약속의 도움에 우리 자신을 다시 맡기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모든 우리의 축복의 찬양(praise)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보은의 마음(gratitude)입니다. As the Lord does not allow these to be derived from any other quarter, so he demands that they shall be referred entirely to himself. It is not enough to refrain from other gods. We must, at the same time, devote ourselves wholly to him, not acting like certain impious despisers, who regard it as the shortest method, to hold all religious observance in derision. 여호와께서 이것들이 어떤 다른 진영(quarter)에서 나오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것들이 온전히(entirely) 그 자신에게만 돌려질 것을 요구하십니다(demand). 다른 신들을 삼가는(refrain rifrein)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헌신해야만 합니다. 모든 종교적 관례를 아주 헤식은 수단으로 우습게 아는 불경건한(impious) 조롱꾼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But here precedence must be given to true religion, which will direct our minds to the living God. When duly imbued with the knowledge of him, the whole aim of our lives will be to revere, fear, and worship his majesty, to enjoy a share in his blessings, to have recourse to him in every difficulty, to acknowledge, laud, and celebrate the magnificence of his works, to make him, as it were, the sole aim of all our actions.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인도할 참 종교에 선행(precedence)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에 알맞게 젖게 될 때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이 그의 위엄을 존경하고(revere) 두려워하고 예배하게 될 것이고, 그의 축복의 한 몫(share)을 향유하고(enjoy)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의지하게(recourse) 되고, 그의 솜씨(work)들의 장엄함(magnificence)을 인정하고 기리고(laud) 경축하게(celebrate) 되고, 여호와를, 말하자면(as it were), 모든 우리 행위의 유일한(sole soul) 목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Next, we must beware of superstition, by which our minds are turned aside from the true God, and carried to and fro after a multiplicity of gods. therefore, if we are contented with one God, let us call to mind what was formerly observed, that all fictitious gods are to be driven far away, and that the worship which he claims for himself is not to be mutilated. Not a particle of his glory is to be withheld: everything belonging to him must be reserved to him entire. 그 다음 우리는 미신을 조심해야(beware)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참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되고 많은 신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therefore) 우리가 한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앞에서 말했던 것을 회상하도록 합시다. 모든 가공의 신들은 멀리 쫓아버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서 요구하신 예배가 훼손되어서는(mutilate)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영광의 한 미립자(particle)도 공제돼서는(withhold) 안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은 온전히 그의 것으로 확보되어야(reserve) 합니다. The words, “before me,” go to increase the indignity, God being provoked to jealousy whenever we substitute our fictions in his stead; just as an unfaithful wife stings her husband's heart more deeply when her adultery is committed openly before his eyes. “내 앞에(before me)”라는 말은 무례(indignity)가 늘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가공물들을 그를 대신해 바꿀 때마다 질투를 일으키십니다. 마치 부정한 아내가 남편이 보는 데서 간음을 범할 때 그녀 남편의 심장을 아주 깊이 찌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Therefore, God having by his present power and grace declared that he had respect to the people whom he had chosen, now, in order to deter them from the wickedness of revolt, warns them that they cannot adopt strange gods without his being witness and spectator of the sacrilege. To the audacity of so doing is added the very great impiety of supposing that they can mock the eye of God with their evasions. 그러므로 그가 선택하신 백성을 그의 현존하는 권능과 은혜로 존중하신다고 선포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반역(revolt rivoult)의 불의(wickedness wikidnis)를 제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신성 모독(sacrilege)의 증인과 목격자가 되지 않고는 그들이 이상한 신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그들이 이상한 신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 자신이 그 신성모독의 증인과 목격자가 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그런 짓을 하는 뻔뻔함(audacity)에 더해 그들의 핑계(evasion)들로 하나님의 눈을 속일(mock) 수 있다고 상상하고 아주 큰 불신앙(impiety)을 더합니다. Far from this the Lord proclaims that everything which we design, plan, or execute, lies open to his sight. Our conscience must, therefore, keep aloof from the most distant thought of revolt, if we would have our worship approved by the Lord. The glory of his Godhead must be maintained entire and incorrupt, not merely by external profession, but as under his eye, which penetrates the inmost recesses of his heart. 이러기는커녕(Far from this)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구상하고(design dizain) 설계하고 또는 실행하는(execute eksikjuːt) 모든 것을 그가 환히 보고 계시다고 선포하십니다(proclaim proukleim).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찬성을 받는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그런 반역의 아주 먼 생각조차 계속 초연해야(aloof)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성(Godhead)의 영광은 외적인 신앙고백(profession)뿐만 아니라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으시는 여호와의 눈앞에서도 온전하고 청렴하게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이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사귀고 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러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웨 엘로헤카(Yaweh Eloheka)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계명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말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존재하시게 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으시고 스스로 충족하십니다. 이렇지 못한 존재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무슨 신이라고 하는 열등한 존재들과 완전히 다르시기에 우리에게 최고의 예배를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잡다한 신들을 섬기기보다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복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1-3 2019-01-09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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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앙 수업 - 제일 계명 유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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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결혼 - 박헌성 목사
- 제네바는 사계절이 분명한 곳입니다. 중세를 갓 지난 16세기 신앙 때문에 촘촘하게 중층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 칼빈 시대에 물 같이 담백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일까요. 휘어진 달리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댑니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달리아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릅니다. 부부 사이의 주고받음이 달리아 이파리와 허공 같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있는 것,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등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계는 말로써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빈은 정숙하고 자상하고 까다롭지 않고 검약하고 근면하고 그리고 자신의 건강 에 세심한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칼빈은 그런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 이델레트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Idelette bore Calvin one son and possibly a few daughters, all of whom died in infancy. In response to the slander of Catholics who took this for a judgment upon them for being heretics, Calvin said he was content with his many sons in the faith. 이델레트는 칼빈에게 한 아들과 아마 몇 명의 딸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들 모두 유년기에 죽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단이 된 것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판이 내린 것이라는 가톨릭교도들의 비방에 답하여 칼빈은 믿음 안의 많은 아들들로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Idelette busied herself attending to Calvin in his many illnesses, faithfully visiting the sick and afflicted, and making her home a refuge for those who fled for their lives and their faith. 이델레트는 칼빈 자신의 많은 질병들에도 아프고 어려운 사람을 성실하게 심방하는 칼빈의 시중을 들고 그리고 삶과 신앙을 위해 도망친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집을 피난소로 제공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습니다. Though she survived the plague when it ravaged Geneva, Idelette died after a lengthy illness in 1549. Upon her deathbed she was patient, and her words, 전염병이 제네바에 창궐했을 때 살아남긴 했지만 이델레트는 오랜 질병으로 1549년 사망했습니다. 임종에 임해서도 인내심이 강한 그녀는 말했습니다. “O God of Abraham, and of all our fathers, in thee have the faithful trusted during so many past ages, and none of them have trusted in vain. I also will hope.” “아브라함과 우리 모든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수많은 과거 시대에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들의 신뢰가 한 사람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소망합니다.” What Calvin wrote to Pierre Viret some days after her death will illustrate her character further. 그녀가 죽고 며칠 뒤 칼빈이 비레(Pierre Viret 1511~1571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에게 이델레트의 성품에 대해 아주 깊이 설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I have been bereaved of the best companion of my life, of one who, had it been so ordered, would not only have been the willing sharer of my indigence, but even of my death. During her life she was the faithful helper of my ministry. 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도리였다면 그녀는 내 가난뿐만 아니라 내 죽음의 자발적인 공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내 목회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였습니다. From her I never experienced the slightest hindrance. She was never troublesome to me throughout the entire course of her illness; she was more anxious about her children than about herself. As I feared these private cares might annoy her to no purpose, I took occasion, on the third day before her death to mention that I would not fail in discharging my duty to her children. 그녀에게서 나는 한 번도 아주 사소한 방해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전체 기간 내내 한 번도 나를 귀찮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그녀의 아이들을 더 염려했습니다. 이런 사사로운 걱정들이 그녀를 괴롭힐까봐 걱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그녀의 임종 사흘 전 내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언급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Taking up the matter immediately, she said, ‘I have already committed them to God.’ When I said that that was not to prevent me from caring for them, she replied, ‘I know you will not neglect what you know has been committed to God.’ Lately, also, when a certain woman insisted that she should talk with me regarding these matters, I, for the first time, heard her give the following brief answer: 그 문제를 즉시 잡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애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또한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한다고 (칼빈이 재혼할 경우를 생각하고) 어떤 여인이 주장할 때 그녀에게 다음의 짤막한 대답을 들려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Assuredly the principal thing is that they live a pious and holy life. My husband is not to be urged to instruct them in religious knowledge and in the fear of God. If they be pious, I am sure he will gladly be a father to them; but if not, they do not deserve that I should ask for aught in their behalf.’ This nobleness of mind will weigh more with me than a hundred recommendations. ‘확실히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제 남편(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다면 그가(칼빈) 그 아이들에게 기꺼이 아버지가 되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제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요청해야 할 가치가 그들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매한 마음은 내게는 100개의 권고보다 더 무게가 나갈 것입니다. -John Calvin, Letter to Pierre Viret, 1549 -존 칼빈, 비레(Pierre Viret)에게 보내는 편지, 1549 아내의 유언을 전하는 칼빈의 편지는 그녀가 얼마나 고결한 마음의 신앙을 가졌는지를 동료 개혁자에게 편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아내의 마음은 자녀들의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 거룩한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양아버지 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말할 정도로 자녀의 신앙과 삶을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는 무엇보다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진정한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 만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그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비유해보면 이렇습니다. 구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가 좋은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구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합니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처럼 신앙과 삶으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중에서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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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결혼 -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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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 취임사 - 이승희목사(반야월교회)
- 칼빈 탄생 509주년 개혁과 변화 새 물결 흐르게 할 것 제103회 총회장 이승희목사 존경하는 총대 여러분, 그리고 만 이천 교회, 삼백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의, 103회 총회장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단 앞에서, 역사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급변하는 역사는, 교회의 환경을 점점 더 비관적으로 만들고, 사회적 이슈는, 반(反)기독교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준비에 무관심하며, 우리 스스로, 자정(自淨)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뢰를 잃어가고, 미래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총신사태와 끝 모르는 은급재단 문제, 수많은 분쟁과 송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총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배와 성찬으로 개회하는 총회 역시, 성(聖) 총회라고 부르기에, 우리 스스로가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총회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인 우리를 향해, 세상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비난의 소리를 이제는 멈추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빼앗긴 다음세대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총대 여러분, 지난 102회 총회에서, 여러분은 저에게 전례 없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총회의 변화에 대한, 여러분의 갈망이며 응원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3회 총회는 이제 그 변화에 도전을 선포합니다. 불가능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함께 걸어가면 그곳이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가 가짜가 아니라면 총회는 반드시 새롭게 변화될 줄 믿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아침이 오듯 그냥 찾아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변화의 문빗장을 열어야 합니다. 제가 그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시행착오도 있고, 조직적인 저항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총회는 변화해야 합니다. 만 이천 교회와, 삼백만 성도들이 총회를 새롭게 하라고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보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여러분은 103회 총회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는 그 목소리를 듣기위해, 전국을 권역별로 소통투어를 가졌습니다. 총대들의 요구는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회무진행의 변화였습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회무를 진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수의 발언 독점을 제한하고, 여론의 왜곡을 막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하겠습니다. 총대 여러분께서도 협력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총회를 공의로 이끌겠습니다. 소위 말하는 작전총회를 차단하겠습니다. 우리 총회가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끌려가거나 정치적 의도로 사전에 기획되는 총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총대 여러분 또한, 세력에 편승하지 말고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의와 총회의 공의를 세우는 거룩한 총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정치는 생각들끼리의 다툼이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절제된 감정으로, 타협하고 양보하며, 공통점을 찾을 때, 건강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정치는 무력해지거나 타락하게 됩니다. 103회 총회를 건강한 정치의 장(場)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살고, 교회와 총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총회장의 권한을 충분히 활용하겠습니다. 그러나 권한(權限)을 권력(權力)으로 남용하지는 않겠습니다. 불법과 반칙을 막아내고, 질서와 원칙을 세우는데 사용하겠습니다. 동시에, 관용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그 권한을 사랑으로 사용하겠습니다. 103회에서는 여러분이 세운 총회장과 임원들을 흔들지 마십시오. 흔든다고 흔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청산되어야 할 아주 나쁜 구습입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는 오히려 총대 여러분들이 꾸짖어 주셔서 총회의 질서를 세우며, 임원들이 총회의 권위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언론에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한 나팔이 되어 주십시오. 개혁이란 이름을 생산적 방향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자칫 오용되면 우리 모두를 무너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역사에 남을 교훈을 외치며,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신문제는, 현재 임시이사가 선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교단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총신사태는,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장과 이사들의 반 총회적인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선한 결단을 한다면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지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총신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계산도, 야욕도 버려야 합니다. 총신의 혼란에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의 불신조장과 편 가르기도 한몫을 했습니다. 총회장인 저에 대해서도 도를 넘는 음해를 일삼았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불순함 들을 중단하십시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속히 학교를 정상화 하는데 전력합시다. 총회 임원회가 앞장서겠습니다. 총신 정상화를 위해전폭적인 지원을 실행하겠습니다. 은급재단 문제도 이제는 분명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더 이상 현란한 주장들이나, 현실성 없는 계산들은 멈추어 주십시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더 이상의 것들을 잃지 않습니다. 이 진통을 앓은 지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더 복잡한 상황들만 만들고 있습니다. 아픔도 있고, 분노도 있겠지만 이제는 여기서 미래적 결단을 내립시다. 과감한 기구 정비와 제도 혁신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위원회가 있습니다. 총회는 상비부(常備部)가 중심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상비부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해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식위원회를 양산하는 것은, 너무도 잘못된 총회의 기형적(畸形的)현상입니다. 이로 인한 불필요한 재정의 출혈도 심각합니다. 또한 소수의 사람들과 특정세력이, 총회의 여러 직책들을 독식(獨食)하는 것도 잘못된 폐단이며, 하루빨리 고쳐야 할 제도개선입니다. 총대가 1700여명입니다. 다른 사람도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양보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총회가 되었기에 우리들이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금 번 총회에서 과감하게 결심하여 기구와 제도의 혁신을 이룹시다. 그래야 총회가 발전하고, 건강해 집니다.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저는 이 한 주간의 회무를 마치면, 곧 희망행보(希望行步)를 시작할 것입니다. 총회본부는3S운동(SMILE, SPEED, SPIRIT)을 전개하겠습니다. 이 운동은, 모든 행정을, 친절하게, 빠르게, 신앙으로 섬겨가자는 운동입니다. 또한 임원들과 직원들 전체가 신앙수련회로 부터 영적무장(靈的武裝)을 하고 103회기 업무를 시작할 것입니다. 일 년 뒤, 이 자리를 떠날 때에는,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총회장이 되겠습니다. 돌아가는 교회와 가정에서 환영받는 목사와 가장이 되겠습니다. 함께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의 동역자인 저희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저와 함께 희망의 총회를 만들어 주실 총대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꼭 기억합시다. Be the Change! (*) 20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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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장 취임사 - 이승희목사(반야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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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누구인가 - 박헌성 목사
-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냐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뱅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목회자(pastor)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절대(absolute ǽbsəlùːt) 주권(sovereignty sάvərinti)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 ǽspek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s)의 해설자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과 변증 저술가(polemic and apologetic write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독창적인 ‘기독교강요’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들과 신앙고백서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법률가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spǽnjǝ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d by Calvin) 시의회의 이단(heresy hérǝsi)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 ínflʌ̀ks)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 rèfǝrméiʃən)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소천)을 보냈습니다.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박헌성 목사(나성열린문교회)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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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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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은 누구인가 -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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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소강석 ‘완전한 폭풍’
- 개혁주의 신학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통치와 성령의 역사를 이 세상 영역 속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 이 개혁주의 신앙으로 다시 우리 교단을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워야 그의 설교에는 재능보다 하나님 사랑 교회 사랑 동역자 사랑 진심 담겨 적폐 중 적폐 김정은과도 화해하고 대화하는 시대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되어야 주여 하늘의 ’거룩한 완전한 폭풍‘불어오게 하옵소서 내가 사랑하는 목사가 나에게 말했다. “김 목사 당신이 필요해.” 그래서 나는 그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메고 길을 걷거나 가방을 내려놓고 글을 쓴다. 아릿한 봄날 오후 슬쩍 내리는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죽거나 어찌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쨍하게 갠 날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필요로 하면 기꺼이 필요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값진 필요가 되려면 온전해야 한다. 그의 말에서 사랑을 확인한 나는 겁쟁이에 바보가 된다. 사랑의 바보는 난생 처음 나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비 오는 날 내가 빗방울조차 이리도 두려워하니 아무렴 하나님께서 내리는 빗방울일진데 나를 피해 내리겠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가인(歌人) 소강석 목사가 몸을 쥐어짜며 구성지게 이 노래를 부르면 회중이 울까 웃을까. 어쨌든 그의 얄궂은 그 노래가 사방에 울리는데 깨는 듯 조는 듯 봄날은 간다. 꿈인 듯 생시인 듯 봄날은 가고 말았다. 그가 시인 듯 읊조리고 노래인 듯 흘리는 해학과 노래에 사람들은 웃고 운다. 그런데 무엇보다 그의 설교에는 재능이나 학식보다 하나님 사랑 교회 사랑 동역자 사랑의 진심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속에 성령이 주시는 태풍의 예언이 담겨 있다. 태풍(颱風, Typhoon)은 북태평양 서쪽 열대 해상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의 한 종류로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2m/s 이상의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고 있는 기상 현상을 말한다. 7월~10월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발생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북태평양 동부와 북대서양 서부에서 발생하면 허리케인(hurricane) 인도양과 남태평양에서 발생하면 사이클론(cyclone)이라고 한다. 제55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5월 8일 오후 4시 김창인 목사가 충무로 언덕에 세웠다는 충현교회를 강남의 언덕 1만평 위에 세운 충현교회에서 시작됐다. 오후 7시 전국목사장로기도회 첫째 날 저녁집회가 진행됐다. 장재덕 목사(총회회록서기) 인도로 진행된 저녁집회 합심기도에 김진하 목사(예수사랑교회)가 ‘총신대학교와 교단 산하 신학교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회중을 성령의 감동에 젖게 했다. 이어서 300여 명 새에덴교회 찬양대가 감동의 울림으로 충현교회 본당을 가득 메운 뒤 하나님의 말씀 사도행전 2:1-4 본문이 봉독됐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기인(奇人) 예언자 소강석 목사가 ‘하늘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키라’라는 제목으로 교계에 불어 닥칠 ‘완전한 폭풍’을 예레미야 같이 예언을 하고 이사야 같이 대비책을 제안했다. 해마다 목장기도회에 서면 설수록 능수능란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 가득하다면서 그는 귀 있는 목사와 장로들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 ‘완전한 태풍’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이 퍼펙트 스톰은 위력이 크지 않은 둘 이상의 작은 태풍이 서로 충돌하면서 그 영향력이 가히 폭발적으로 커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경제, 사회 분야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악재가 겹쳐 더 큰 피해를 당할 때 쓰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0년에는 ‘퍼펙트 스톰’이라는 재난 영화가 상영되기도 하였는데요. 이 퍼펙트 스톰이 몰아치면 흔적도 없이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립니다. 보통의 태풍은 흔적이라도 남기는데 퍼펙트 스톰은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완전한 폭풍이에요. 그러니 이 퍼펙트 스톰이 불어 닥치면 어마어마한 재난이 일어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세계 기독교는 이 ‘완전한 태풍’ 같은 재난을 맞고 있습니다.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들이 세계 교회 생태계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재난의 폭풍은 지금 한국교회에 더 불어오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첫째, 우리 한국교회가 복음의 본질을 잃고 거룩의 능력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 한국교회는 자성하고 변화를 모색했어야 하는데 안일한 자세로 자기 성(castle)만 쌓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장만능주의와 세속화, 교권의 욕망 때문에 도덕적, 영적, 거룩의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세상의 비난거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 비난과 공격은 너무나 거칠고 험하게 자행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를 향한 재난의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재난의 바람이 우리 총회에도 불어 닥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반기독교적인 사상의 흐름 때문입니다. ... 우리 사회에서도 10년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를 이야기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금기시했지 않습니까. 완전 비정상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언론에서 끊임없이 동성애를 인권으로 포장해서 이야기하고 성소수자로 보도를 하며 미화를 시키니까 10년이 지나자 대중이 그렇게 인식을 해 버린 거예요. ... 제가 얼마 전에 미국 유학을 다녀오셔서 목회를 아주 잘하고 계시는 분과 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옆에도 다가갈 수 없는 인격과 실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저에게 뭐라고 충고를 한 줄 아세요. ‘소목사님, 절대로 교회생태계를 보호하는 사역이나, 교회 연합사역 같은 일을 하지 마십시오. 그거 아무리 해도 안 됩니다. 어차피 유럽과 미국에서 되어진 것처럼 우리나라도 이러한 흐름은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복음을 잘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에 절대로 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아버렸는지 모릅니다... 사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당연히 복음을 잘 전해야지요. 그러나 그러다가 영국교회나 미국교회는 반기독교 악법을 허용해 버리게 되고 목회생태계를 다 파괴시켜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약에 우리나라에서도 차별금지법이나 종교소득과세 등이 법으로 통과되었다면 한국교회는 재난에 완전히 쓰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3년 전에는 하마터면 국회에서 종교인과세가 아니라 종교소득과세로 통과 될 뻔 했어요. 그런데 부족하지만 제가 그것을 뒤늦게 알고 전국 17개 광역시도 기독교연합회장들과 함께 각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한 거예요. 그래서 당시 여당이 의총을 해서 종교소득과세를 종교인과세로 바꾸게 된 거예요. 만약에 그때 종교소득과세로 입법이 되어버렸다면, 한국교회 모든 선교 활동이나 목회자의 목회 활동이 완전히 위축되고 교회가 기업처럼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뻔 했어요. 그런데 다행히 종교인 과세가 되어서 최소한의 마찰을 겪으면서 연착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교회가 성역화되어야 하느냐, 교회도 세무조사를 받아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하는데요. 교회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거지요. 교회는 절대로 영리단체가 아닙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 아니예요. 그러므로 교회는 종교 고유의 목적인 성경의 가치와 예수님의 진리를 실현하는 사역이 보장받아야 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완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인간이 모인 곳인데 빛과 그림자가 있을 수 있는 거지요. 그런데도 어쩌다가 교회에 부정적이고 어두운 요소가 나오면 그렇게 벌떼처럼 달려드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면 이런 현상들이 엄청난 재난의 바람으로 발전할 수도 있거든요. 퍼펙트 스톰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별로 위력적이지 않은 작은 바람이 갑자기 엉키고 충돌하면서 어마어마한 재난의 바람으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우리 총회도 방심할 수 없어요. 총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고 하지만 더 큰 재난의 바람 ‘완전한 태풍’이 불어올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때 우리는 역설적으로 더 큰 하늘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더 크고 더 능력 있는 거룩한 홀리 퍼펙트 스톰(Holy perfect storm)을 일으켜야 해요. 우리가 산불이 일어나면 맞불 작전을 펼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산불은 산불을 놓아 끄는 것처럼 우리도 한국교회에 불어오는 재난의 바람을 거룩한 하늘의 바람으로 잠잠케 해 버려야 합니다. 하늘의 거룩한 퍼펙트 스톰으로 이 땅에 불어오는 반기독교적 재난의 바람을 다 날려버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랬습니다. 당시에 예수님께서는 부활 승천을 하셨지만 유대종교로부터 강력한 핍박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불어오는 재난의 바람이 두려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재난의 바람으로 인해 그들의 신앙에 존폐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 다락방을 향하여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열린 하늘을 통하여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벌벌 떨게 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그 재난의 바람들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은 “급하고 강한 바람”이라고 했어요. 이것이 바로 하늘로부터 불어온 홀리 퍼펙트 스톰이에요. 본문에서 말씀하는 ‘급하고 강한 바람’(a rushing mighty wind)은 헬라어로 “페로메네스 프노에스 비아이아스”인데 ‘파괴적인 힘을 가진 몰아치는 바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퍼펙트 스톰이지요. 그런데 급하고 강한 바람과 함께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같이 임한 거예요. 여러분, 상상해 보세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데 거기에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어대니 얼마나 불이 잘 번지겠습니까. 바로 이 모습이 마가 다락방에 임한 하늘의 거룩한 퍼펙트 스톰이었어요. 그래서 당시에 교회를 태동시키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 재난의 바람을 급하고 강한, 하늘의 거룩한 퍼펙트 스톰이 날려 버렸어요.” 기인 소강석 목사는 재난의 바람 ‘퍼펙트 스톰’을 예레미야처럼 예언한 뒤 그 대비책을 이사야처럼 제안했다. “오늘 존경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 목장기도회로 모이셨는데, 오늘 이 자리가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키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거룩한 하늘의 퍼펙트 스톰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첫째, 먼저 우리가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뿐만 아니라, 2000년 교회 역사를 보면 모든 부흥의 역사는 회개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미스바 부흥운동, 수문 앞 광장의 부흥운동, 갈멜산의 부흥운동이 그랬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냥 기다리기만 했습니까.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경은 사도행전 1:14에서 말씀합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그냥 기도만 했을까요. 그들은 틀림없이 회개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주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모두 다 도망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난날 주님을 배반했던 일들을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순절의 성령 체험을 한 후에 맨 먼저 어떤 메시지를 전하였습니까.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회개하라고 했습니다(행 2:38). 그리고 그 회개의 메시지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행 3:13-15). 그랬을 때, 마가 다락방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위대한 부흥의 퍼펙트 스톰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총신의 문제와 교단의 모든 문제를 우리 모두가 책임지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즘 저도 기도할 때마다 늘 하나님께 회개 기도부터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고 저의 책임이라고 여기며 말입니다... 둘째, 거룩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회개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거룩한 성령의 임함과 부흥의 역사를 사모하며 오로지 기도에 힘썼어요(행1:14). 그들이 하루 이틀 기다리며 기도했겠습니까. 적어도 10일 동안 그들은 숙식을 같이 하면서 성령의 임함을 사모하고 거룩한 부흥의 역사를 간구했던 거예요. 그럴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한 거에요...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렇게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 경건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제는 심령이 점점 컬컬하고 메말라가는 거예요. 교회에서 몇 사람만 모여도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면서 파벌싸움을 하고 쪼그라드는 거예요. 이런 모습이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잘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자 자기들 스스로 영적 각성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부흥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 거예요... 바로 이런 영적 각성과 영적인 갈망이 미국의 1차대각성 운동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2차 대각성운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장로님들이여, 오늘 이 자리가 그런 부흥의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 거룩한 부흥의 바람, 하늘의 폭풍이 불어오는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저녁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회가 끝나도 자리에 앉아서 기도하시고 숙소에 돌아가셔서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거룩함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흥을 사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거룩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 우리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해야 해요. 오늘 우리 교회가 거룩함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머리카락 잘린 삼손에 불과하고 눈알 빠진 삼손에 불과해요... 그런 것처럼 한국교회가 지금 얼마나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언젠가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눈알이 빠져 나간 채 맷돌이나 돌리는 한국교회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함의 능력을 회복해야 해요. 그러면 거룩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리성과 완전성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분리성은 세상, 죄와의 분리를 말하는 것이고 완전성은 우리의 도덕적, 영적인 정결의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참여하고 그 분의 거룩한 품성을 닮아가는 온전한 삶을 말합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생각이 정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주장이 정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주장이 정말 양심적이고 경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의롭고 정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생각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임한 거룩한 영성과 삶이 서로 맞닿으시기 바랍니다. 서로 합쳐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이 서로 합쳐져서 큰 퍼펙트 스톰을 일으킨 것처럼 오늘 여러분의 순결과 거룩의 영성이 서로 합쳐지고 맞닿아서 거룩한 폭풍을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설적인 부흥의 폭풍이 일어나는 자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그 거룩함의 능력을 사회적 영향력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함의 능력을 회복했다면 그 거룩함의 능력을 사회적 영향력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룩한 행실들로 말미암아 하늘의 퍼펙트 스톰이, 이제는 시대와 사회 속으로 불어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교회들을 해체시키려고 하는 재난의 바람들을 무색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개혁신학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통치와 성령의 역사를 이 세상 영역 속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앙으로 다시 우리 교단을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하나 되고 화해를 해야 합니다. 저 적폐중의 적폐였던 김정은 위원장과도 화해하고 화목하는 시대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러한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의 소원이 무너져가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교회의 부흥을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이곳에 하늘의 홀리 퍼펙트 스톰 ’거룩한 완전한 폭풍‘이 불어오게 하옵소서.’ 시인(詩人) 소강석은 ‘...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노래한 윤동주의 ‘십자가’를 읽고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목사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참회하는 ‘시(詩)의 십자가’를 썼다. 나는 동주의 가슴에 차갑게 식은 가슴 위에 /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어요 / 그토록 목 놓아 울며 바라보았던 / 저 햇빛 걸려 있는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 / 끝내 가슴에 안아보지 못하고 / 머나먼 밤하늘 별이 되어버린 / 청년 동주의 시커멓게 타들어간 육신 위에 / 사랑의 나무십자가 하나 목에 걸어주고 싶어요 / 다시는 외로워하지 말라고 / 다시는 목 놓아 울지 말라고 / 그토록 사모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그의 곁에 놓아주고 싶어요 / 야수의 손톱과 발톱에 찢겨나간 / 검은 하늘에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보혈의 붉은 사랑 한 줄기 / 조용히 흘리며 떠난 외로운 사내 / 동주에게 / 내 부끄러운 시(詩)의 십자가 / 눈물로 바치고 싶어요. 20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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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소강석 ‘완전한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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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사도 김관선
- 6월 22일 계룡스파텔 농어촌 교역자 중심의 세미나 여론에 휩쓸린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살리는 농어촌 목회자들의 ‘말’이 넘치기를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이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이다.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배출한 산정현교회의 김관선은 한국 농어촌 교역자를 위한 사도이다. 지난 4월 2~5일 3박 4일 타이완의 타이페이에서 열린 제102회 농어촌부(부장 김관선) 주최 농어촌 교역자 부부수양회를 가졌다. 전원 무료의 농어촌 교역자 부부 참석자들은 3박 4일의 일정동안 여러 명소 등을 찾아 관광을 즐기며 목회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농어촌 사정을 잘 아는 김관선 목사는 이번 수양회에서 참석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일정을 마련하고 저녁집회와 새벽예배를 1시간 이내에 마치고 숙소에서 멀지 않은 관광지를 방문했다. 저녁이면 은혜도 넘쳤다. 북한과의 평화와 통일을 예견한 예언의 능이 있는 기인(奇人)이며 설교에 운율이 있는 시인(詩人)이며 말씀에 곁들인 가락이 흥겹고 눈물짓게 하는 가인(歌人) 소강석 목사의 설교,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유머와 뼈대 있는 설교 등은 참석자들을 은혜의 도가니에서 허우적이게 했다. 농어촌부 임원들의 헌신과 수천만 원의 후원금을 쾌척한 소강석 목사,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 강도사 고시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김상윤 목사, 졸병이 아닌 김장교 목사 등의 숨은 수고가 있었다고 한다.. 이 여세를 몰아 농어촌 교역자를 위한 사도 김관선 목사는 6월 22일 계룡 스파텔에서 농어촌 교역자 중심의 세미나를 열 계획이다. 강사는 공모를 통해 선출된 농어촌 성공 목회자가 세미나를 이끌 것이라고 한다. 믿음의 말이 의미를 잃고 믿음에서 떠난 폭력과 불법의 소리가 판을 치는 제102회 총회 회기를 지내고 있다. 이때를 위해 농어촌 사도 김관선 목사는 2017년 11월 12일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사람의 이성적이고 조리 있는 말은 사상도 담겨 있고 가치도 담겨 있고 감동도 주고 설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우성치는 소리에는 감정만 담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소리는 짐승도 냅니다. 사물들도 각각의 소리가 있습니다. 소리만 듣고도 무슨 소리인가 무엇인가 분간이 가능합니다. 경험상. 그러나 말은 사람만 합니다. 사람이 하는 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말하고 사람을 향해서도 말하면서 소통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성경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까지 하나님이 말씀이심을 보여 주고 있고 말씀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확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가치 이런 것을 아주 멋지게 펼쳐 주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말합니다. 사람의 인격 말로 완성됩니다. 사람의 신뢰 말입니다... 우리 안에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내가 나를 기만하는 요소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실용적입니다. 실용주의가 판을 칩니다. 공리주의도 무너져 버립니다. 어느 게 정말로 공공의 이익에 맞는가. 어느 게 정말로 이 세상을 지탱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이 내게 유리한가 빠른가 편리한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흔히 유행처럼 좋아하는 ‘가격 대비 성능’을 줄여서 말하는 ‘가성비’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만 판단합니다. 어느 쪽이 싸고 좋은가를 따집니다. 비싼 값을 지불해야 되지만 힘을 더 써야 되지만 그래서 힘을 쓴 만큼 돈을 지불한 만큼 효율성은 높지 않지만 뿌듯해지고 감격스러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포기해 버립니다. 실용주의에 휩쓸려가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짓밟아 버립니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소리 속에 같이 휩쓸려 가버리고 내 안에 있는 욕심만 남게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6월 22일 계룡 스파텔에서 농어촌 교역자 중심의 세미나가 여론에 휩쓸린 세상의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살리는 농어촌 목회자들의 말이 세미나에 넘치기를 바란다. 2018-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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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 사도 김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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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목사의 총회장 서신
- 목사자격의 심사 및 임직과 관련한 권한은 총회와 노회에 있습니다 .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은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의 위임목사 자격에 문제가 없다고 한 서울 고등법원의 판결에 대하여 심리미진과 논리 모순 등을 이유로 원심법원으로 파기 환송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 오정현 목사가 미국장로교의 목사였다는 사실과 총신을 졸업하고 총회가 시행한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노회의 인허를 받은 것은 인정하더라도 목사 안수를 받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 이유 였습니다. 재판부는 오정현 목사가 총신에 편입할 당시에 일반편입을 한 것으로 보이고, 일반편입을 했다면 편목편입과 달리 목사안수를 받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본 모양입니다. 우리는 법원이 모든 사안에 대하여 법과 양심에 따라 정의로운 판단을 해 주기를 언제나 기도하고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도 그렇게 판단했을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판결문을 살펴보면 볼수록 이번 판결은 오정현 목사 개인과 사랑의교회라고 하는 한 지역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목회자, 혹은 더 나아가 모든 종교인들의 신분과 자격에 관한 사법부의 개입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습니다. 총회장이 목회서신을 통해 이번 판결을 거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정현 목사가 일반편입 과정이든 편목편입 과정이든 총신을 졸업한 후에는 총회가 시행한 강도사 고시와 노회의 인허를 거쳐 총회산하 지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총회 헌법과 절차에 의해 미국장로교단에서 안수 받은 당사자를 다시 안수하는 것이 오히려 사리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위임목사의 지위에 변동을 구하려면 당사자를 고시하고 인허하고 위임을 결정한 총회와 노회에 청구하여 판단을 받을 사안이지 국가 법원이 개입할 사안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헌법이 보장한 정교분리의 취지에 부합되며 그동안 법원이 스스로 형성하고 일관되게 견지해 온 판례와도 일치되는 것입니다. 문명화 되지 못했던 중세시대에는 교황이 세속군주를 임면(任免)하기도 하고 세속군주가 주교를 임면하기도 하는 등 교황권과 군주간의 충돌과 견제가 끊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주의 국가체제인 대한민국은 엄격히 정교분리가 지켜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법 이전의 미덕과 전통으로 여겨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그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는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은, 만약 이 판결이 확정되어 유지된다면 종교단체 내부의 성직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종교단체가 아니라 법원이 갖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우리사회의 모든 문제들을 법정쟁송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사법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상황에서 종교단체 내부의 자율권으로 보장되어 왔던 목사의 신분의 문제까지도 사법부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를 위해 오늘도 온 맘 다해 헌신하고 있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의 현실은 가이사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서 영적 좌표를 바로 설정하지 못한 우리들의 부족함이 낳은 결과는 아닌지 냉정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내부에서 조차도 교회법을 무시하고 국가법정으로 모든 문제를 가져가려 했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듯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제는 가이사의 법정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법정, 하나님의 법에 집중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회내부에서 해결하는 아름답고도 성경적인 전통을 새로 수립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018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 전계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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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목사의 총회장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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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예언
- 시인(詩人)이자 가인(歌人) 그리고 선지자(先知者) 소강석 목사 3월 8일 아침 예언 하나님께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하사 평화의 꽃길 열고 통일 초석 되고 통일 이루려면 대한민국 하나 돼야 이 모든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자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선택된 기업 되어야 혼란이 지배할 때 환자는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의사는 생각하기 시작한다, 국민은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정치인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목사는 하나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혼란이 지배할 때 나 역시 사랑하는 총회와 총신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건 분명한 것 같다. 혼란을 불러오는 건 결국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 혼란이 또 다른 질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 칼빈의 개혁신학은 얼마나 좋은 향(向)이냐. 그 쪽으로 향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돌아오는 향이다. 남향집과 달리 지는 해가 첫 해라는 서향집. 1960년대 어렵던 시절 전라북도 남원군의 붉게 녹이 슨 양철지붕 밑에서 소강석 목사의 노모는 '석양 아래 새끼들 밥 먹이며 사는 일이 평생이었다'고 여예언자 드보라처럼 말하셨을 것이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는 3월 12일자 중앙일보의 그의 칼럼 ‘전영기의 시시각각’에서 이런 글을 썼다. 8일 새벽 일산 킨텍스에서 기독교계가 마련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소강석 목사의 설교와 문재인 대통령의 축사에 대한 것이었다. 정의용·서훈을 미국 특사단으로 보내던 8일 새벽 일산 킨텍스 단상에 문재인 대통령은 앉아 있었다. 대통령은 ‘기적같이 다가온 소중한 기회를 도널드 트럼프가 차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복잡한 심경이 교차했을 것이다. 설교자인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특사단이 오늘 출발하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니 얼마나 감사한가. 평화의 설국열차가 통일열차가 돼서 쾌속 질주하도록 기도하자”고 호소했다. 그의 발언은 문 대통령의 마음을 대신 표현한 효과를 냈다. 스무 시간쯤 뒤 백악관에서 트럼프를 만난 정의용 특사단장은 목사의 설교를 대통령의 인사말로 살짝 바꿨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어제 아침 국가조찬기도회에서 5000여 명의 한국 목사들 앞에서 트럼프 대통령님께 감사드린다고 말씀하셨다. 여기까지 오게 된 데는 트럼프 대통령이 큰 힘이 됐다.” 칭찬받기 좋아하는 트럼프의 어깨가 으쓱거렸다. 외교관 생활로 잔뼈가 굵은 정의용다운 노련함이었다. 문 대통령은 기도회에서 “남북 대화뿐 아니라 미국의 강력한 지원이 만들어 낸 성과다. 성도 여러분. 미국과 손잡고 북한과 대화하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미국이라는 나라 이름만 꺼냈고 소 목사는 트럼프라는 인격을 입혔다. 소강석이 한국의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미국 대통령을 끄집어낸 것은 대중적 감수성이 풍부한 복음주의 목회자의 면모다. 그러나 감수성 이상의 무엇도 감지된다. 소강석을 설교자로 내세운 한국 기독교의 본류가 북핵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통합과 정체성, 한·미 동맹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통일을 이루려면 대한민국이 하나가 돼야 한다. 평화통일의 열차 안에 탄 승객들이 서로 증오하고 충돌하고 싸워서야 되겠나. 세계 역사에서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갈등과 분열이었다.” 4, 5월 연쇄 정상회담은 핵무기를 둘러싼 한국·북한·미국 3국의 진실들이 환히 드러나는 무대다. 한국의 진실은 이 메시지에 담겼다. 특정 목사나 기독교 세력의 정치관이라기보다 한국인의 절대다수가 공유하는 믿음이라 하겠다. 평화통일의 종착역에 이르기도 전에 열차가 내부 사정으로 탈선한다면 얼마나 허망하겠나. 우리 정부가 금언처럼 새겨 둬야 할 말이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가 앞서 쓴 글의 내용은 실제로 조찬기도회 현장에서 행한 소강석 목사의 예언은 이랬다. “...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얀 빙상에서 출발케 하였던 평화의 설국열차가 마침내 남북정상회담까지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만남과 대화들을 통하여 작은 것이 큰 것이 되고 큰 것이 더 큰 것이 되면 마침내 피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 일에 우리 하나님께서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하셔서 평화의 꽃길을 여시고 통일의 초석을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통일을 이루려면 먼저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평화통일의 열차를 달리게 하였는데 그 열차 안에 탄 승객들이 서로 증오하고 충돌하고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평화통일 열차 안이 마치 에덴의 동쪽과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보면 어떤 나라나 민족도 다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망했지 않습니까.” 시인(詩人)이자 가인(歌人) 소강석 목사는 2018년 3월 8일 50년 희년을 맞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역사상 그 누구도 발산하지 못한 믿음과 끼를 대한민국 대통령의 감동을 넘어 세계 제일의 대통령 트럼프 어깨도 으쓱하게 할 정도로 한껏 발휘했다. 하나님의 예언과 주님의 위로와 성령의 치유가 있는 메시지였다. “... 평창동계올림픽은 저 강원도의 은빛 빙상에서 하얀 평화의 눈꽃을 피우고 화해의 아리아를 울려 퍼지게 한 위대한 제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 설국열차를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남북정상회담과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낭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평화의 설국열차가 통일열차가 되어 하루 속히 쾌속 질주하도록 이 아침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던 중 작년에 저는 미국 LA에서 있었던 마틴 루터 킹 퍼레이드 전야제에서 미국 크렌쇼 합창단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감격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함께 참석을 하신 미국 연방 하원의원인 제니스 한과 함께 무대로 올라가서 손을 잡고 통일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국민은 통일의 노래를 잊어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평양을 예닐곱 번을 다녀왔는데 그곳을 갈 때도 함께 손을 잡고 통일의 노래를 목 놓아 불렀습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통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과는 아주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이 땅에서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6.25전쟁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수많은 세월의 강물이 흘러갔지만 6.25전쟁의 포성소리와 절규, 사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아직도 우리의 귓가에 쟁쟁하게 울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가 백만 명이 넘었고 이산가족이 천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잃은 전쟁과부가 50만,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가 십만 명에 이르렀으니 거리와 거리마다, 마을과 마을마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아낙네의 피 토하는 애곡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는 12년 째 한국전참전용사들을 초청해서 그들을 섬겨왔습니다. 특별히 작년에는 장진호전투에서 싸웠던 참전용사들을 초청하였습니다. 이런 행사를 지상파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분들이 장진호전투 기념비 제막식에 저를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올해 참전용사 행사는 흥남철수작전을 이끌었던 분들이나 그 분들의 후손을 초청해 놨습니다. 사실 흥남철수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찌 오늘날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저희가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지난 참혹한 역사를 기억하며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북한은 계속해서 핵무장을 하고 있음에도 우리만 아무런 대책이나 준비 없이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정체성 위에서 철저한 한미동맹 강화와 안보의 대비를 하면서도 피 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강구하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평창동계올림픽 이후에 이러한 평화와 화해의 무드가 드리워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소식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더욱 평화의 꽃밭을 이루고 화해의 꽃길을 여는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합니다. 독일이 그랬지 않습니까. 누가 뭐라 해도 독일의 화해와 평화통일은 독일교회가 선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남북은 서로 입장이 다를 수 있고 군사와 군사는 여전히 대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 특히 기독교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얀 빙상에서 출발케 하였던 평화의 설국열차가 마침내 남북정상회담까지 갖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만남과 대화들을 통하여 작은 것이 큰 것이 되고 큰 것이 더 큰 것이 되면 마침내 피흘림이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 일에 우리 하나님께서 문재인 대통령님과 함께 하셔서 평화의 꽃길을 여시고 통일의 초석을 이루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통일을 이루려면 먼저 우리 대한민국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평화통일의 열차를 달리게 하였는데 그 열차 안에 탄 승객들이 서로 증오하고 충돌하고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평화통일 열차 안이 마치 에덴의 동쪽과 같아서야 되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보면 어떤 나라나 민족도 다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망했지 않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잘못된 적폐를 고쳐야 합니다. 긴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병폐와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적폐청산이 또 다른 적폐를 낳으면 안 된다는 사실도 경계해야 합니다. 소설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보여준 것처럼 정의도 지나치면 잔인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진정한 정의는 사랑과 정의가 입 맞추고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최근에 헝가리 수상인 빅토르 오만께서 부다페스트의 왕궁에서 “기독교는 유럽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여러분! 일국의 수상이 국정연설에서 공개적으로 “기독교가 유럽의 희망”이라고 말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그랬거니와 앞으로도 한국교회가 이 민족과 대한민국에 희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아침에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킵시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된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인 우리 모두가 이 아침에 나라와 민족 그리고 대통령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지난 3월 7일 워싱턴에선 5년 임기를 마치고 워싱턴을 떠나는 사사에 겐이치로 주미 일본대사를 위한 성대한 송별파티가 열렸다. 워싱턴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들과 각료들이 운집한 주미대사 관저는 미·일 밀월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불과 하루 뒤인 8일. 일본은 ‘북·미 정상회담’ ‘철강 25% 관세 부과 면제 대상 제외’라는 더블펀치를 맞았다. 둘 다 예상도 못하던 것이었다. ‘워싱턴 일본 외교 참사의 날’이었다. 세상이나 총회에서 외교에는 영원한 친구가 없음을 보여준다. 영국의 BBC와 국내 주요 언론은 북·미 정상회담은 위험한 벼랑 끝 전술이라고 말한다. 성공하면 문재인 대통령은 영웅이고 실패하면 장기판의 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절박하다. 게다가 지금은 말뿐이다. 그것도 우리의 말뿐이다. 노동신문도 조선중앙통신도 일언반구 비핵화나 정상회담 관련 언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은 늘 그랬듯 “우리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정색하고 나설지 모른다. 미국도 “행동으로 비핵화 의지의 진정성을 보여라”고 북한에 외치지만 회담 전에 진정성을 증명할 행동 따윈 없다는 걸 안다. 3월 8일 밤의 주인공은 한국이었지만 5월 말의 희생양 또한 한국이 될 수 있다. 모든 게 총회 정치처럼 깜깜이다.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건 분명한 것 같다. 혼란을 불러오는 건 결국 우리들 자신의 믿음과 기도에 달린 것이라는 것이다. 혼란이 대한민국과 세계의 또 다른 질서가 돼서는 안 되기에 시인(詩人)이자 가인(歌人) 그리고 선지자(先知者) 소강석 목사가 3월 8일 아침 예언했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아침에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킵시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선택된 기업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인 우리 모두가 이 아침에 나라와 민족 그리고 대통령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다.”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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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의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