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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 총회선관위 장미의 이름
- 젊은이들은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 배움은 사양길에 들었다. 그뿐인가. 세상이 거꾸로 걷는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시궁창에 처넣고 새들은 날지 못하는 주제에 둥지를 떠난다. 다행히도 나는 그 시절에 윌리엄 수도사 같은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배움에의 욕구를 채우고 사물을 바로 보는 감각을 익혔으니 내가 험로를 헤맬 때도 스승의 교훈이 나를 인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중에서 '장미의 이름'은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미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소설가, 역사학자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년 1월 5일 ~ 2016년 2월 19일)의 메타픽션 소설(등장인물들이 가상 세계 'fictional universe' 안에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나 모순을 제기하여 아이러니와 자아 성찰을 유도하는 방식의 소설)이다. 1327년 11월의 이탈리아 어느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장미는 아주 아름답게 피지만 쉽게 범접할 수 없도록 가시가 있고 연약한 잎을 움켜쥐면 쉽게 지기도 한다. 장미의 이러한 특성이 이 소설의 배경이 된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한 베네딕트 수도원의 금서와 같다. 당시의 시대상은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와 다른 교단 즉 “이도교”들로 구성된다. 교황의 힘이 막강했기에 이성의 말과 행동은 교황의 한마디에 묵살당했다. 때문에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던 윌리엄도 이단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 쉽게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이 소설은 당시 교황과 황제 사이의 세속권을 둘러싼 다툼,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청빈 논쟁, 제국과 교황에 양다리를 걸치려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입장, 수도원과 도시 사이에 흐르는 갈등 등을 다루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도사, 바스커빌 출신의 윌리엄과 그를 모시는 수련사,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는 황제 측과 교황 측 사이의 회담 준비를 위해 회담이 열릴 수도원에 도착한다. 원장은 윌리엄에게 그 수도원에서 있었던 의문의 죽음의 비밀을 풀어달라고 간청한다. 1327년 겨울 윌리엄은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했다. 미궁으로 빠져드는 살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조사에 착수한 이튿날 또 한 사람의 수도사가 보란 듯이 죽었다. 이어서 세 명의 수도사들이 연속으로 죽었다. 끔찍한 독살이었다. 그런데 이 살인 사건들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윌리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장서관에 있는 어떤 책이 연쇄 살인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죽음의 책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로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의 '시학' 제2권이었다. 우리에게 '시학'은 한 권으로 전해진다. “서사시와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해보도록 하고 지금은 비극에 관해서 논의해 보자.” '시학'은 도입부를 마치고 제6장을 이렇게 시작하여 곧이어 비극을 다룬 다음 서사시를 다루고 제26장에서 끝을 맺는다. 그러면 희극은? 말은 꺼내놨으니 쓰긴 썼을 터.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이런 말도 한다.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관해선 따로 '시학'에서 정의해 놓았다.” 하지만 '시학'에는 정작 우스꽝스러운 것들에 관한 논의가 없다. 그렇다면 희극과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다룬 다른 책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제2권도 썼고 그곳에서 희극을 다루었으리라 추정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애를 기록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두 권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하지만 두 권 가운데 제1권만 전해질뿐 제2권은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로 이 질문에 답한다. 젊은 수사 아드소가 스승 윌리엄과 머물게 된 수도원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사람들은 악마의 짓이라며 공포에 빠져들고 권력을 저울질하는 종교재판관은 고문과 협박으로 얻어낸 거짓 자백으로 수사를 종결하려 한다. 하지만 스승 윌리엄은 이 사건의 중심에 미궁의 장서관이 있다고 보고 그곳을 조사하는 한편 수도사들을 탐문 한다. 윌리엄은 타협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모든 게 인간의 욕망 때문이었다. 육욕과 권력욕 그리고 자기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려는 독점욕이 살인의 가장 큰 동기였다. 그렇듯 엄격한 근엄주의 수도사였던 호르헤는 생각했다. ‘웃는다구. 경건한 수도사들에게는 어림없는 소리지. 웃음은 사람을 경박하게 만들지. 게다가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 따위에 관심을 갖다니 당치 않다. 고로 '시학' 제2권은 금서여야만 하지.’ 그는 다른 수도사들이 이 책을 탐독하는 것을 막고, 탐닉하는 자를 응징하기 위해 책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 독약을 묻혔다. 누군가 오른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면서 유쾌하게 키득거릴 때 그는 불경스러운 웃음의 값을 목숨으로 치러야 했다. 결국 윌리엄은 여러 자료를 통한 추론으로 장서관의 밀실에 들어갈 방법을 찾아낸다. 장서관의 밀실에는 윌리엄의 예상대로 호르헤 노 수도사가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마지막 논쟁을 펼친다. 마침내 사건의 전모를 폭로하는 윌리엄 앞에서 호르헤는 장서관에 불을 질렀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시학' 제2권의 필사본은 호르헤의 이빨에 뜯기며 불에 타 재로 사라져버렸다. 끔찍한 메타픽션 소설적 상상력이다. 그러나 신학이나 성경 문제가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불경스러운 웃음을 찬양하는 '시학'을 보존한 장서관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호르헤는 장서관에 불을 지른다. ‘의심 없는 믿음은 악마와 같다는’ 단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여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행동한 끝에 결국에는 한 수도원을 사흘 밤낮 타게 해 전소시킨 호르헤의 행동은 부정부패가 배광식의 불경스러운 웃음처럼 낭자한 작금의 교단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전율스럽다. 2022년 8월 26일 10시 30분 열린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10주년 기념대회에서 총회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소강석 목사는 축시를 낭독했다. “... 흑암의 땅 조선에 사랑과 희망의 십자가를 세우며 가슴마다 교회를 세워갔던 한국 장로교 110주년의 역사여 한마음, 한뜻이 되어 코로나 팬데믹의 안개를 뚫고 새로운 부흥의 아침을 향해 비상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는 지갑을 다 털어 미화 101달러까지 다 헌금했다. 그 후 12시 30분 제17-2차 선관위 전체회의를 서울 잠실 롯데호텔 3층 에메랄드룸에서 점심 식사와 다과를 곁들여 주재했다. 그 덕에 밖에서 서성이던 기자 일행은 회의는 취재하지 못하는 대신 언감생심(焉敢生心) 비싼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날 선관위는 비공개이지만 기관지 기독신문 기자만 배석한 채 목사부총회장 후보 오정호의 졸업자 명부가 없는 총신대 현관 벽에 'DONOR WALL'이라는 해괴한 기증자 명단 벽이 생겼다. 그런데 부총회장 후보 오정호가 그 얼어죽을 제막식 참석에 대한 선거법 위반을 심의 안건으로 다뤘다. 선관위원들은 오정호 후보 확정 여부를 놓고 찬반으로 나눠 장시간 논의한 끝에 표결에 부쳤다. 개표도 한 그 결과는 비밀에 봉하고 기관지 기독신문 단독 속보를 참조하라는 친절한 안내와 그 결정은 9월 1일 발표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선관위 위원장 소강석 목사의 마음은 회의장 밖에까지 그의 큰 소리가 들리고 아리송한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두 후보가 경선을 통해 승부를 가르기를 바라는 묘책을 강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보랏빛 소(Purple Cow) 소강석 목사가 오가며 주재하던 선관위가 9월 1일 선관위 차기 전체회의에서 어떤 소를 몰고 올지 '장미의 이름'의 수도사 윌리엄처럼 사뭇 궁금하다. 언제부턴가 양심의 부재가 성공 조건이 되었다. 범법 사실이 드러나도, 권력과 명망이 있다면 기억나지 않는다고 내빼거나 말로만 사과하면 끝난다. 수사나 감사도 받지 않고 증거는 인멸된다. ‘너만 그런 것도 아닌데 재수 없었네’ 하듯 총회 지도층에 포진한 스승과 제자 그리고 선배와 후배는 서로 위로하고 밀어주고 가려주고 끌어준다. 좋은 인맥이란 어떤 죄라도 덮어줄 든든한 뒷배가 생긴다는 뜻인가. 아드소는 스승의 가르침을 등불 삼아 평생을 살았고 노년엔 그가 선물한 안경을 쓰고 회고록을 적었다. 제자가 스승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평생을 걸어온 발자취는 그 사람의 인생 전부다. 문제는 자신이 모르는 것과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신앙의 진실과 본질을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총회 정치꾼들의 당당한 태도가 문제다. 이런 태도가 비신앙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오랜 세월이 지나 수도사 윌리엄의 제자 아드소는 멜크의 수도원장의 심부름으로 이탈리아에 다시 가게 된다. 그런데 그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건이 일어났던 베네딕트 수도원을 다시 방문한다. 수도원 아래, 마을과 경작지는 황폐해져 있었고 웅장했던 수도원은 덩굴과 잡초가 우거진 폐허가 되어있었다. 아드소는 자갈을 헤집어 수십 년간 묻혔을 양피지 조각을 모으고, 남아 있는 탑 하나를 타고 거의 무너진 장서관에 올라간다. 그는 거기서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궤짝 하나를 건지고 하루종일 흙을 뒤져 유물 몇 점을 더 건진다. 그렇게 배낭 2개를 꽉 채워 멜크로 돌아간다. 아드소는 그 양피지 조각들을 어찌어찌 복원시키고 해석해 나갔다. 양피지엔 몇몇 인용문과 자투리 문장들밖에 남지 않았고 모아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으리라고 아드소는 확신한다. 그럼에도 어쩐지 계속해서 그 문장들을 읽고 다닌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도저히 진리를 알아낼 수 없는 세상에 회의와 혼란을 느낀 아드소는 트레믈레의 베르나르(Bernard de Tremelay ~ 1153년)의 아주 긴 풍자시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에 나오는 구절을 총회선거관리위원장 소강석 목사의 축시처럼 읊으며 수기를 마무리한다. 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 있을 뿐. 2022-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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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 총회선관위 장미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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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제56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발화
- 장봉생 목사의 열정적인 인도로 합심기도가 근래 보기 드물게 뜨겁게 달아올라 1995년 ‘월간문예사조’로 등단한 시인 소강석은 ‘샘터’ 발간 9번째 시집 ‘사막으로 간 꽃밭 여행자’에서주님을 향한 사랑의 절절한 기도를 고백한다. “차마 고백하지 못한 사랑이 시라면 밤새 뒤척이는 달빛 그리움도 시라면... 눈물이 녹아서 시가 될 때 우리 시가 되면 만나요. 사랑의 시가 되어 만나요. 꽃잎은 바람에 흔들려도 바람을 사랑합니다... 밤이 깊어도 아침이 밝아도 꽃잎이 모두 저버려도 꽃잎은 바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집니다.” 그리고목사 소강석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각오를 다짐한다. “꽃밭을 여행했으면 사막으로 가라. 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 꽃밭의 향기를 사막에 날리고 사막의 침묵을 꽃밭에 퍼뜨리라. 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 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전국 목사와 장로들이 본당을 가득 채우고 열린 첫날 개회예배는 총회와 총신과 한기총 금권선거와 애물단지 부동산 총회 떠넘기기 대가, 그리고 한기총 전광훈의 변승우 이단 해제 앞잡이 길자연 아바타의 허공을 치는 허울 좋은 개살구 설교를 마쳤다. 그 뒤 서대문교회를 새문안교회에 버금가는 교회로 성장시키고 장래 총회장으로 빛날 장봉생 목사의 하나님의 도우심과 회개를 촉구하는 열정적인 인도로 합심기도가 근래 보기 드물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밤마다 울산 큰 바위 기도로 다져진배광식 목사(대암교회)가 총회의 새로운 치유와 목사 장로의 새로운 신앙의 각오를 부르짖었다. 총회 감사 대가 최병철 장로(중심교회)가 문제의 해결은 기도뿐이고 회개는 말씀이 뿌리라는 특별간구를 했다. 제56회 전국목사장로기도의 개회예배는 제99회 광주겨자씨교회 총회 명사회와 날카로운 판단으로 총회와 총신의 변화를 이끌어낸 대쪽 총회장백남선 목사 축도로 마쳤다. 교회와 사회에서 헌신적인 삶을 보여준 개인에게 수여하는 밀알상 수상자로 이춘복 목사(남현교회), 권순웅 목사(주다산교회) 등이 상장과 훈장을받았다.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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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장봉생 목사 제56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 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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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총신대 학사학위 과정 내력
- 황규학 박사(법학)는 통합 측 목사이자 인터넷 언론 '기독공보'의 탁월한 지적 논단을 주도하는 기독교계의 대표적 논객이다. 그가 5월 18일 다음과 같은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000의 학력검증과 학위 사칭 의혹 000은 총신대학교(B.A)가 아니라 총회신학교 졸업이라고 표기했어야 예장통합 교단에서 73-82회, 93-96회에서 이대위 활동을 13년간 해왔던 000의 학력을 검증할 필요가 있다. 000은 자신에 대해서 총신대학교에서 B.A 학사학위를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빛과소금교회 홈페이지에 의하면 000은 자신이 총신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최근 은퇴하면서 펴낸 책에서도 총신대학교(B.A):1969년 3월-1975년 2월 20일 졸업한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000이 쓴 이력이 맞다면 그는 총신대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고 학사학위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총신대학교는 1969년 12월 27일 대학으로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1970년 3월부터 정식대학생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000은 1969년 3월에 총회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1969년 3월에는 총신대학교가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총회신학교였다. 총신대학교 연혁을 보면 1967년 6월 12일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총회신학교는 1969년 12월 27일이 되서야 총신대학교로 설립인가를 받는다. 1969년 12월 27일 문교부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인 총회신학대학 설립인가를 받다. (신학과 50명) 총신대학교 100년사에 의하면 총회신학교는 각종학교(各種學校; 정규학교가 담당하기 어려운 분야를 실시하는 학교와 유사한 시설을 갖춘 일종의 학교)로 인정을 받았지만 1959년 합동과 통합 교단이 갈라지면서 총회신학교는 무인가 신학교가 된다. 장로회신학교는 각종학교로 있다가 1961년 장로회신학대학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총신대는 문교부로부터 인가를 받기까지 10년 동안 무인가 신학교로 있게 된다. 1967년 5월 4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인가를 받게 된다. 학교법인 인가를 받은 후 한 달이 지나 1967년 6월 3일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각종학교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총회신학교가 1969년 12년 27일 정식 대학교로서 승인될 때까지 학력만 인정하는 각종학교로서 존재하였다. 각종학교는 다른 대학 졸업생들과 같이 학력만 인정할 뿐 학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정규대학으로 승격될 때까지는 학사 학위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총회신학원 제13회 이사회의록에 의하면 1971년 4월 29일 회의에서 1968년, 1969년 입학한 학생들에 대해서 학력을 인정해 달라고 학력 승인 청원 건을 다루게 된다. 총신신학대학 정식인가 받기 전에 각종학교로 인정되었을 때 입학 되었던(1971년도에는 3, 4학년에 해당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력 인정승인을 받도록 문교부에 청원할 것을 고성훈 이사의 동의와 양재열 재청으로 제출할 것을 가결하다. 68, 69년에 입학한 학생들이 각종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71년 이사회에서 학력 인정 청원을 하게 된다. 71년까지 68, 69회에 입학한 사람들까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 내용으로 보았을 때, 68, 69년에 입학하였던 학생들은 정식 총신대학교가 아닌 총회신학교 입학생으로서 71년까지 학력도 인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68, 69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각종학교에 입학하였지만 학력도 승인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력이 인정되었다면 총신 이사회는 71년에 학력 승인 청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 최삼경은 1969년에 입학을 하였기 때문에 총신대학교가 아니라 총회신학교를 졸업한 것이 맞고 총회신학교 출신자들에게는 학사학위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B.A(bachelor )라고 표기한 것은 학위 사칭일 수 있다. B.A(bachelor)의 의미는 학사학위 소지자를 말한다. 제13회 이사록의 내용에 의하면 1971년까지 68, 69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여전히 문교부로부터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000이 총신대학교에서 B.A를 받았다면 000이 학번을 공개하는 등 000이 학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제13회 이사록의 내용에 의하면 1971년까지 68, 69년에 입학한 학생들은 여전히 문교부로부터 학력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000이 총신대학교에서 B.A를 받았다면 000이 학번을 공개하는 등 000이 학력을 입증할 필요가 있다. 만일 000이 정식대학을 나온 것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지난 30년 동안 한국 교계는 학사학위도 없는 무인가 신학교 출신 목사에게 교리 적으로 농락당하였던 것이다. 이단감별사들은 대부분 신학사 학위가 있는 사람조차 하나도 없다. 이 기사를 보고 총신대를 졸업한 나는 오정호 중심으로 매년 열리는 총신대 총동창회가 20여 명 모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동문이 더 많이 모이게 연락을 하라고 말했더니 개인정보비밀보호법을 내세우며 주간 기독신문 광고 공고면 된다고 뻗댄다. 동문 출신으로 여겨지는 대학부 교수들도 그 의견에 수긍하며 오정호랑 해외여행 다녀오기 바쁘다. 오정호는 총신 교수 동문 외에는 관심이 없는지 동문 활성화에 대해선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오정호도 교수들도 대학 학적에 대해 말 못 할 속내가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올해 설립 127년째인 뉴욕공립도서관(NYPL)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공도서관이다. 맨해튼 42번가 본관을 비롯해 뉴욕시 전역에 92개 분관이 있고 장서(藏書)와 디지털 자료는 5600만 점이 넘는다. NYPL 맨해튼 본관 앞에는 ‘라이브러리 웨이’라는 좁다란 길이 있다. 길바닥 동판에 책과 언론에 관한 위인들의 경구(警句)가 새겨져 있다. 그중 20세기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의 격언이 인상적이다. ‘진실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거짓은 꾸며내야 한다.’ 가짜와 선동이 판치는 이 세상에 진실을 수호할 최후의 보루는 칼빈주의를 따르는 총신대와 총신 신학부를 거쳐 목사가 된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경구라고 할 수 있겠다. 2022-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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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총신대 학사학위 과정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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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직관의 지도자 고광석 목사
-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이익과 행복을 앞에 둘 것이냐, 상대의 이익과 행복을 앞에 둘 것이냐’를 생각하면서 갈등을 많이 하게 된다. 그때가 중요하다. 바로 그때 나의 이익을 버리고 바른 마음으로 살면 인생이 바뀐다. 바른 한 생각이 인생을 바뀌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한 생각을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 바르지 않으면 히나님의 복이 깃들지도 않고 그 복을 누릴 수도 없다. 그래서 교회 풍속을 해치는 음기는 음습한 곳을 좋아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하나님 은혜의 햇볕을 쬐어야 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을 널리 알리는 게 상책이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한 소인배를 포용하되 그들이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교화시켜야 한다. 소인배 난동을 제약할 법규를 제정하고 알려야 한다. 그게 총회 리더가 할 일이다. 2013년 12월 18일 속전속결의 제98회 총회장 안명환 목사는 총회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총회 임원회를 주재하며 제98회 총회에서 행정 보류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2014년 9월 25일 제99회 총회 넷째 날인 9월 25일 오전 회무에서 총대들은 한기총 탈퇴 결의를 논의했다. 이렇게 강하게 말한 총대도 있었다. “한기총은 이단의 온상이다. 한기총을 탈퇴해야 한다.” 반면 일부 회원들은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자고 말했다. 직관의 지도자 고광석 목사는 말했다. “한기총 탈퇴는 임원회에 일임하든 안 하든 신중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세상일은 모두 극한에 이르면 반드시 뒤집어지게 마련이다." 총회는 정치인이 그 모범을 실천하여 과거의 병폐를 불식시켜 주기를 요구한다. 총회장과 정치인의 인격과 신앙이 확고하다면 총회 목사와 장로들은 사심 없이 따르는 법이다. 우선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정직은 말이 아니고 실천이다. 정치는 결과로 평가되는 것이지 말재간이니 금전의 열매가 아니다. 우리는 언행이 다른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정치적 실적을 과장하거나 ‘비신앙’의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지도자가 두 개의 잣대로 위선을 감행하는 태도는 총회 구성원의 불신과 배척을 자초할 뿐이다. 총회 정치는 정의의 가치와 질서를 떠나서는 존속하지 못한다. 정의는 권력의 산물이 아니다. 러시아 푸틴이나 공산정권들이 그 길을 택했기 때문에 세계와 인류가 공분을 느끼고 있다. 정의는 더 많은 교인의 자유와 신앙을 위한 필수조건이지 정치상품이나 구호가 아니다. 그동안 총회 지도자들이 개혁주의 정의 구현을 책임지겠다고 했는데 왜 정의는 사라져 버렸는가. 편 가르기로 불신을 만들었고 돈 살포로 타락을 심화시켰고 교권 다툼은 진실을 역행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성경적 개혁주의를 염원했다면 총회와 노회 무대에서 상치되는 신앙관과 가치관으로 총회 적 불신과 고립을 자초하진 않았을 것이다. 신앙과 기도마저 정치의 수단으로 삼는 총회 악을 저지른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성경은 말씀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2-44 20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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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직관의 지도자 고광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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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야고보James
- 야고보James는 이 편지를 쓴 저자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의 형제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이고 독실한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신자들은 시련들과 시험들로 괴로움을 겪었지만 그들 회중들 사이의 문제들로도 어려웠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들의 신앙이 성숙해지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편지를 썼다. 때문에 야고보서를 신약의 잠언이라고도 한다. 이런 시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 _미구엘 드 우나무노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 말하듯 진리를 아무런 열정도 없이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만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진리는 명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해 주어졌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삶을 논의하는 실천적인 성경이다. 이 편지는 복음서의 산상수훈과 잠언의 메아리가 울린다.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법을 실제적이고 신실하게 깨닫게 한다. 야고보서는 진실한 믿음의 인내와 혀의 조절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등과 같은 실천을 실제적으로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믿음을 실습하고 실행한다면 우리의 시련들과 행동들과 말과 기도에서 자신의 믿음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2025-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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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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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야고보J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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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 그것이 신학이든 예술이든, 무언가를 새로 안다는 것은 소강석 목사처럼 채워야 할 욕구가 늘어난다는 뜻이다. 삶과 믿음이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어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시인이고 기인인 소강석 목사는 2025년을 코앞에 두고 2024년 12월 30일 저녁 7시 30분 명창의 ‘새타령’을 듣고 전율하듯 흔치 않은 설교를 전했기 때문이다. 꺼질 듯이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곧장 날카로워져 심령을 벨 듯한 그의 소리에 그만 마음을 베이고 말았다. 목소리의 힘은 강력해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조선의 정쟁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새해에는 감사할 일이 많기를 기원하는 간절한 목소리였다. 조선의 천재 집단 집현전 학사들의 연쇄살인과 목숨을 건 비밀 프로젝트. 1446년(세종 28년) 가을. 젊은 집현전 학사 장성수의 시체가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속에서 발견된다. 단서는 사자가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과 몸에 새겨진 문신, 그리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저주받은 금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기도 전에 두 번째, 세 번째 살인이 이어진다. 매일 밤 이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 주상의 침전에 출몰하는 귀신, 저주받은 책들의 공동묘지. 사건은 점점 복잡해지고 살인자의 정체는 종잡을 수 없다. 사건을 맡은 겸사복(궁궐 수비군) 강채윤은 참혹한 죽음과 위험한 음모에 점점 빠져든다. 집현전 학사는 왜 우물 속에 처박혔는가. 사라진 금서는 어디에 있는가. 살인자의 정체를 쫓아 궐 안의 미로를 헤매던 채윤은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오리무중 속에 감춰져 있던 이들은 바로 새로운 격물의 시대를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찬 젊은 집현전 학사들과 그들의 수장인 주상 세종 대왕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해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엄청난 프로젝트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 사대부들의 거대한 음모. 수수께끼의 문신과 그림, 그리고 경복궁 구석구석의 전각들에 숨겨진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내며 채윤은 사건의 중심부로 다가간다. 추리 소설 ‘뿌리 깊은 나무’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세종 시대, 훈민정음 반포 전 7일간 경복궁에서 벌어지는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연쇄살인의 이면에는 뛰어난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는 비밀 프로젝트가 있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다. 주인공 채윤이 마주한 세종의 시대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 기존의 모든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시대정신이 도래하고 오랜 허물을 벗으려 하는 문명 대전환기였다. 이러한 격동의 세종 시대는 육백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놀랍도록 닮아있다. 소설 속에서 백성들이 쓰기 편한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기득권 사대부들의 대립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워 무안사고를 접하고도 갈 길을 잃어 헤매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생명의 성스럽고 거룩한 결정체다. 만 99세 광주 대교구 윤공희 대주교(1924년생)가 2023년 백수연 축하 미사에서 1시간 동안 미사를 집전하고 마지막에 이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삽시다." 99세 신부가 하나님의 자비와 섭리와 사랑을 설교하는 모습에 사람한테도 ‘늙는다는 것은 이런 깨달음을 전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62세 소강석 목사가 인도하는 새에덴교회 2025년 신년축복성회가 2024년 12월 29일 주일 저녁 7시부터 2025년 1월 3일 금요일 오후 9시까지 매일 저녁 진행됐다. 이 집회는 35년 넘도록 이어온 집회다. 그런데 새해를 사흘 앞두고 2024년 12월 29일 오전 9시 7분쯤 전남 무안국제공항에서 착륙 중이던 제주항공 항공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울타리 외벽과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81명 중 생존자 2명을 제외한 모든 탑승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승무원 이모(33) 씨는 목포지역 병원으로 후송된 뒤 ‘어디가 아프냐’는 의사의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가요?”라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여객기 후미 쪽에서 승객 서비스를 맡았던 이 씨는 왼쪽 어깨 골절과 머리 등을 다쳤으나 의식이 뚜렷한 상황이고 맥박도 정상이며 보행도 가능하다고 병원 측은 진단했다. 그는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가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추정된다며 한쪽 엔진에서 연기가 난 후 폭발했다는 목격담을 구조대에 남겼다. 함께 구조된 20대 여성도 목포 중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2024년 12월 30일 월요일 오후 7시 50분 새에덴교회 신년축복성회2에서 62세 소강석 목사는 제목 ‘온리 원을 위한 신앙개혁’ 온리 원(only one) 오직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을 위한 것 같이 본문 역대하 34:29-32 성경을 읽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소강석 목사는 철문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안 비행기 사고로 슬픔을 당한 분들을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 나라에 다시는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나님 이 나라를 지켜주시옵소서(회중 아멘). 1분 동안 묵도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 백성을 보호해 주시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슬픔을 당한 유족들을 위로해 주시옵소서. 이 나라에 이러한 재난과 재앙이 없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한숨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기도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와 은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오늘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아버지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도전을 받게 해주시고 아버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축복해 주시옵소서. (회중 큰 아멘) 연약한 가운데 있는 부족한 종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발뒤꿈치 상처도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여러분 우리 민족 우리 국가가 슬픔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은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오고 계시고 여러분 누구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여기 소 목사를 보고 오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회중 아멘) (소 목사 노래한다.) 여호와는 너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며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시나니... 이정명(실제 역사를 바꾸지 않고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상상해서 추가해 작품을 쓰는 추리 소설가) 작가가 쓴 ‘뿌리 깊은 나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이지만 팩트(fact 事實)에 근거한 픽션(fiction 虛構)이라는 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종(世宗, 1397∼1450) 대왕은 강인하고 뭐 굉장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을 보면 야, 세종대왕도 그렇게 참 나약한 부분이 있구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기 세 달 전 집현전 학사들을 상대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이 살인사건 이면에는 조선의 최고 천재 집단이 목숨을 걸고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가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프로젝트가 뭔 줄 아세요. 훈민정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글의 옛 이름(첫 이름)으로 세종대왕이 창제한 문자의 명칭이자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사용법 등을 해설해 놓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세종 25년(1443년)에 창제된 후 1446년(세종 28년)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뜻은 '백성(民)을 가르치는(訓) 바른(正) 소리(音)'이며, 28개의 낱자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글자에 속하며,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에 편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시초이며, 훈민정음은 1446년에 정식으로 반포됐다. 한글이란 이름은 은 조선말 개화기에 한국어와 한글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국문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주시경(周時經, 1876년 12월 22일 ~1914년 7월 27일)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에 의거해 일본 제국과 친일파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사건) 이후에도 강습소 활동과 문법 연구, 사전 제작 등 한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에 힘쓰던 주시경은 1914년 7월 27일 39세의 한창인 나이에 갑작스런 복통을 겪고 병사하였다. 사후 주시경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주도하여 조선어학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여 주시경의 생전 숙원을 이뤘다. "여러분 세종 시대에 새로운 정신을 필요로 하는 대전환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로운 시대에 맞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바로 훈민정음을 창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시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비밀유지가 필요했습니다. 조선 고유의 역법(천체의 운동을 관측하여 책력‘册曆’에 관한 연구를 하는 역학‘曆學’의 여러 가지 법)을 만들어놓고도 조선력(朝鮮曆)이라고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조선의 향악(鄕樂; 당악‘唐樂’에 대하여 조선 고유의 음악을 일컫는 말)을 바로 잡았는데요. 아악(雅樂; 옛날 우리나라에서 의식 따위에 정식으로 쓰던 궁정용 고전 음악)이라고 할 수 없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종 시대라고 할지라도 중국을 사대(事大; 본래 큰 것을 섬긴다는 뜻으로 조선의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을 상징하는 개념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화하족(華夏族) 또는 제하(諸夏)는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원류가 되는 민족이다.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 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중화'(中華) 또는 '화하'(華夏)라는 말은 화하족에서 유래한 말로서, 중국을 일컫는 말이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의 '화'(华)와 중화민국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사실상 한족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길게 논하기 위해서 한나라 때 형성된 전설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현재의 한족들은 선비족·몽골족·만주족·동남아인 등 근방 민족들과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중국의 정식 국명인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의 '화'(华)와 신해혁명 직후인 1912년 건국된, 현존하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지만 현재는 중국 대륙이 아닌 대만 섬의 중화민국(中華民國)의 '화'(華)는 모두 화하족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 마당에 중화 문자인 한자(漢字)를 놔두고 조선의 고유한 문자를 만든다 이건 정말 혁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시겠지만 최만리(崔萬理, 1398년 ~ 1445년 10월 23일; 1444년 2월 20일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렸던 여러 대신들 중에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했다)를 필두로 유학자들의 반대가 얼마나 심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이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예우하면서 세계문자 역사상 가장 높이 인정되는 자랑스러운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합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에 친히 참여하였고, 그 이외에 공이 큰 사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 내용의 말미에 기록된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 8명이 있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얼마나 병약한 존재였는가. 세종은 30대에 요즘 말로 당뇨병인 소갈증을 앓아 물을 한 동이씩 먹었다고 합니다. 물을 많이 먹고 또 소변을 자주 보고 특별히 합병증으로 시력이 약해집니다." 세종의 건강과 관련한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눈병 12번, 허리통증 6번, 무릎통증 3번, 목마름 증상 2번, 살 빠지는 증상 1번이 언급돼 있다. 나이대 별로 분석하면 허리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해 30대 때 심해졌다가 낫기를 반복했다.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했다가 역시 좋아지다가 악화하기를 반복했다. "이 병들 때문에 세종대왕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또 한 가지 병이 생겨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고 해요. 여러분 42세(세종 21년) 때 신하들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시각장애인에 아주 가까웠다고 합니다. 세종 23년 1440년이죠. 세종이 눈이 보이지 않아서 '나는 더 이상 정사를 돌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왕위를 세자에게 넘겨주겠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나옵니다. 신사들이 울면서 만류를 합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큰 소리로) 전하, 불가함을 윤허하여 주옵소서. 왕위에서 물러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눈이 침침해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은 지혜롭고 늠름하고 지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렇게 병약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스럽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 백성의 안위를 돌보고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세종은 좋은 책은 백번 읽었대요. 머릿속에 거의 암기할 정도죠. 그리고 세계 최고의 문자. 여러분 영어보다 더 복잡한 뭐... 똑같은 발음이지만 의미가 전혀 다른 우리 한글이 있잖아요. 세계 최고의 문자. 뭐 누구는 그랬다고 하잖아요. 캐나다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는데 세종대왕에게 이름을 물어봤대요. 그래서 세종대왕께서 '가나다'라 해라, 하셨다잖아요. (회중 박장대소) 조크입니다. 4군 6진(143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토 수복 이념과 북방 개척의 결과물로, 이때 현대 한반도 및 현행 대한민국 헌법의 대한민국 북방 영토 범위를 규정지었다)을 개척하고 과학과 음악을 발전시켰습니다." 세종대왕이 '가나다'라 '캐나다' 이름을 지었다는 말처럼 피식 웃게 해주는 조크가 분명해도 저런 말이 우리에게는 더 많아야 한다. 세종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에 있을 때 30번 읽었다는 책이 '구소수간'(歐蘇手簡;중국의 대문호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글)이다. 세종이 왕자 시절에 읽었던 책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병중에도 독서를 그치지 않아 부왕 태종이 모든 서책을 감추게 했는데, 세종은 병풍 사이에 남아 있던 구소수간을 찾아내어 30번 넘게 읽었으며, 즉위 후에도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는 세종의 총명과 호학의 성품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널리 전했다. 구양수는 정치가로 호를 취옹(醉翁), 또는 육일 거사(六一居士)라 했고, 소식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는데, 모두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 둘 다 66세를 살아 ‘구소’로 흔히 병칭된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묘호(廟號, temple name;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라고 한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당대 조선의 모든 분야, 즉 법제, 의례, 음악, 지리학, 역사학, 언어학, 천문학, 군사학, 기계공학, 농학, 의학을 발전시킨 것은 물론 백성의 복지 수준도 향상시키고 군사력도 강화했으며 심지어 땅까지 넓힌 임금. 1433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최윤덕 장군이 조선군 약 15,000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이어서 1436년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된 이천 장군이 1437년 2차로 여진족을 토벌하며 최윤덕, 이천 장군이 설치한 4군(四郡)과 1433년 김종서 장군이 이징옥, 황보인 등과 함께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지방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두만강 유역에 설치한 6진(六鎭)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린 천재 군주로, 광개토대왕과 함께 오늘날의 일반 민중에게 '대왕'이라는 수식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단 둘뿐인 군주이다. 우리 시대의 기이한 시인 성직자 소강석 목사의 only one 오직 하나뿐인 설교가 이어진다. 길선주, 한경직 등의 설교자를 뛰어넘는... "그리고 무엇보다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해 조선의 르네상스 문예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쓰고 있는 이 한글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난의 파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암초를 만나도 파선을 당하지 않고 풍랑을 만나도 인생의 배가 뒤집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요 똑같은 사건을 만나도 팍 깨져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움을 만날수록 풍풍 뛰어 올라가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똑같은 시련을 만나도 폐인이 되기도 하고 꽃을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엄청난 환난을 당했지만, 신사임당에게는 좀 유감이기는 하지만... 여러분, 5만 원짜리가 나오기 전에는 1만 원짜리 지폐가 최고였어요.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을까요. 세종대왕에게는 끝없는 도전정신, 그리고 긍정의 언어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이 민족을 위하여 선한 정치를 할 것이다. 나의 사랑, 나의 민족이라는 이런 긍정 언어가 세종대왕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 아쉬운 것은 당시는 복음이 전해지지 않아서 세종대왕이 우리가 믿는 예수를 모르셨음에도 그에게는 도전과 긍정의 언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씨건 김 씨건 박 씨건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은 세종대왕처럼 도전정신과 긍정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세종대왕이 온리 원(only one)의 역사를 이루고 온리 원의 꽃을 피워낸 사람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갑자기 안수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어요. 건강에 대해 조언을 해주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오늘 병원에 갔는데요. 손님이 많으시더라고요. 그분 입장에서는 손님이지만 그건 손님이 아니라 환자입니다. (회중 웃음) 여러분 모든 사물은 에너지와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에너지가 스스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적 설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창조적인 설계자가 있다는 것이죠.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시죠. 하나님이 없는 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 보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은 현재도 할 일이 있고 미래도 할 일이 있음을 믿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결별을 해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시게 하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그분이 분명히 육신을 입긴 입으셨지만, 하나님의 모든 신성과 거룩함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 오셔서 살다가 그냥 다시 올라가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안 가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평소 백성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대왕은 백성들이 글을 몰라 겪는 어려움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들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이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 곧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역대하 34:31-32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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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MISSION
- G.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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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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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하루 일
-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칭찬의 역설이 있다. 칭찬만 계속하면 칭찬의 가치가 하락한다. 칭찬만 일삼는 이의 칭찬이 비판을 주로 하는 이의 칭찬과 같은 무게일 리 없다. 계속 칭찬만 하는 사람은 결국 어느 것도 제대로 칭찬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말것이다.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하루 일을 어떻게 시작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각자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은 달라도, 처음 5분을 어떻게 보내는 가를 살펴보면, 일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를알 수 있다는 뜻이다.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신문을 읽는사람, 아니면 지난 밤에 본TV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면서 하루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어떤 행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느냐"라는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가? 하루 일을 시작하는 태도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삶에서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다. 골로새서 3:23에는"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 앞에 놓여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 된 우리들이, 맡은 일을 앞에 두고 하품만 하거나 쓸모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런가 하면, 빌리보서 2:13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하는 일은 내가 하기 때문에 나의 일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땅에서의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에 속한 자이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늘의 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 나라에 관계된 일이기에 소중하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불평은 마음의 자세를 흔드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월요일 아침, 직원회의에 들어갔다고 하자. 그런데 회의장의 제일 높은 자리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주님께서 웃음을 지으시며 "이번 주에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당신에게 물어보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현대인들은 습관처럼 "바쁘다"고 말한다. 또 실제로 자기 일에 열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때에는, 아무 의미도 없이 쳇바퀴만 열심히 돌리는 다람쥐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바쁘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맡기셨을 때, 어리석게도 창조의 보람과 기쁨을 포기하고 생존하기 위해 땀 흘려 수고해서 일해야만 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땀 흘려 수고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다. 땀과 수고와 노력을 들이면, 거기에는 분명히 열매가 있기 때문이다. 시편 126:5~6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심으로 얻은 열매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갔다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열심히 행한 일의 보상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서 우리가 보다 좋은 직장을 찾는 것 보다 더 나은 보수를 받는 것, 그리고 자녀를 기업으로 얻는 것까지, 모두 주님이 주시는 열매이자 주님이 주시는 보상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해야 할,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 나라를 펼칠 수 있는 기회이다. 때로 눈물과 수고로 일해야 할 때가 오더라도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 하늘에서의 상이 큰 것은 물론, 땅에서 주님이 히릭하시는 상 또한 클 것이다. 주님께 하듯 마음을 다해 일하기로 결심하는가? 그렇다면 "수고함으로 얻은 열매 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작은 일에도 충성하기 바란다. 중국의 대표적인 편년체 역사서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쓴 송나라 정치가이자 대학자 사마광(司馬光, 1019년~1086년)은 중국 북송의 유학자, 역사가, 정치가이다. 그는 자치통감 서두에서 사람을 네 가지로 나눠 풀이하고 있다. 이는 고스란히 그가 역사 속 인물들을 평가하는 일관된 잣대였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 총회에도 상당한 유효성을 갖는다. 그는 덕[德]과 재주[才]의 유무(有無)를 들어 네 가지 유형을 추출 해냈다. 먼저 그는 덕과 재주를 이렇게 풀이한다. “무릇 귀 밝고 일을 잘 살피며 강한 것을 일러 재주라 하고 바르고 곧으며 도리에 적중해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을 일러 덕이라고 한다. 재주란 덕의 밑천이요, 덕은 재주의 통솔자다.” 그래서 재주는 덕을 통해 다듬어질 때라야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못하면 재가 승하고 덕이 박하다(才勝薄德) 하여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제시한다.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 이를 일러 빼어난 사람이라 하고 재주와 덕이 모두 없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며 덕이 재주를 뛰어넘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재주가 덕을 뛰어넘는 사람을 소인이라 한다[才德兼全謂之聖人 才德兼亡謂之愚人 德勝才謂之君子 才勝德謂之小人].” 그의 인물론의 독특함은 재도 없고 덕도 없는 어리석은 사람보다 재가 덕보다 높은 소인(小人)을 더 경계한 점이다. 사마광은 소인에게 입마개를 해야 한다는 진중권 교수처럼 말한다. “군자란 재주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고, 소인은 재주를 가지고 나쁜 일을 한다. 재주를 가지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좋은 일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고, 재주를 가지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나쁜 일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사 나쁜 일을 하려 해도 그 지혜가 두루 살필 수가 없고 힘도 감당할 수가 없다.” 독일의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유명한 막스 베버(Max Weber, 1864년 4월 21일~1920년 6월 14일)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구분한 것은 성직자 평가와 정치인 평가에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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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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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기승전결의 하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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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 소강석 목사 주님의 위로와 성령의 치유가 있는 메시지 통해 한국을 넘어 시대의 문제를 내다보고 해결하는 긍정적인 예언 미세 먼지와 황사 속에서도 꿋꿋이 피는 기특한 꽃들을 보며 언제나 유쾌한 기인 소강석 목사처럼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잘 될 것을 믿고 예언하자 쓸쓸하고 지치고 거칠어진 우리들 마음에 꽃을 처방한다 미국 시인 조이스 킬머(Joyce Kilmer)는 ‘나무’라는 시로 노래했다. “나는 생각한다/나무처럼 사랑스런 시를 결코 보지 못하리라는 걸(I think that I shall never see/A poem lovely as a tree)... 온 종일 하나님을 우러러보며/잎이 우거진 팔을 들어 기도하는 나무(A tree that looks at God all day/And lifts her leafy arms to pray)... 시는 나같은 바보들이 짓지만/나무를 만드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Poems are made by fools like me/But only God can make a tree) 이 계절의 나무를 보면 그 시인의 안목에 그저 놀랄 뿐이다. 나무가 가장 나무다울 때를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4월이라 말하고 싶다. 이런 봄날에는 낮은 담장 너머 나무 한 그루에도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만다. 건물 사이 좁은 공간에 요량 없이 심어진 나무를 보면서 눈빛이 순해질 수밖에 없다. 산은 물론 종일 빛도 안 드는 건물 그림자 속에서도 나무는 잎을 내고 꽃을 건다. 한 그루 성자(聖者)가 어두운 골목길에 내건 등불 같다. 그래서 소강석 목사가 그의 시 ‘싯딤나무의 기도’에서 ‘... 그러나 당신은/그 쓸모없는 싯딤나무를 꺽어/법궤를 만들라 하셨네...’라고 나무의 고귀함을 노래한 모양이다. 2012년 11월 말 ‘강남스타일’을 들고 세계에 돌풍을 일으킨 가수 싸이의 지구 종말설이 퍼졌다. 그 내력은 16세기 프랑스 의사 겸 예언가로 활동한 노스트라무스(1503년 12월 14일 ~ 1566년 7월 2일 본명 미셸 드 노트르담 Michel de Nostredame)의 다음과 같은 예언 때문이었다. “춤추는 말(dancing horse)의 순환 숫자가 9개가 될 때 고요한 아침(the calm morning)으로부터 종말(the end)이 올 것이다”(From the calm morning, the end will come when of the dancing horse the number of circles will be 9).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 예언에 언급된 ‘고요한 아침’은 19세기 말엽부터 한국을 지칭하는 별칭이었다. 그 이름은 미국의 천문학자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년 3월 13일 ~ 1916년 11월 12일)이 1885년 저술한 책 제목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서 유래한 별명이다. 로웰은 조선말 우리나라에 왔다가 안개 속의 초가집들을 보고 우리나라를 영어로 ‘The Land of Morning Calm’(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표현했다. 즉 ‘조선’(朝鮮)의 한자 뜻 ‘고운 아침’을 ‘고요한 아침’으로 의역한 것이다. 이 제목으로 로웰이 책을 내면서 19세기부터 우리나라의 별명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되었다. 지금 한심한 일가족의 성질로 말 많은 비행사의 잡지 이름이 ‘Morning Calm’이 된 것도 로웰 덕분인 것이다. 이 이름의 유래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인도 시인 타고르(Tagore)로 잘못 알고 있는데 그는 우리를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다. 로웰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83년 5월 일본에 유람 차 방문하여 지내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조선의 미국 수호통상사절단을 만나게 된다. 주일미국공사의 요청으로 로웰은 이들을 미국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로웰은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와 함께 1883년 8월 18일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발한 뒤 같은 해 11월 14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기까지 9명의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의 곁을 보좌하면서 국서 번역, 보좌 업무 및 통역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귀국한 일행 중 홍영식이 로웰의 노고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고종은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실의 초대로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로웰은 조선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한양에 머무르면서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했다. 2년 뒤 1885년 그는 이 기록을 정리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로웰은 조선의 풍물을 기록하는 것 외에도 고종의 어진(御眞)을 포함한 당시의 조선 풍경을 찍은 사진 25매를 남겼다. 다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의 ‘춤추는 말’은 가수 싸이가 유행시킨 ‘말춤’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둥근 숫자가 9개가 된다는 것은 조금 난해하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의 조회수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2012년 11월 30일 오후 7시를 기점으로 유튜브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8억 5221만 4000회. 다시 말해 0이 9개가 되는 10억 조회를 돌파하면 지구 종말(the end)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은 없었다.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조회수는 2018년 기준 31억 회를 돌파했다는 기록 외에는 지구상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세계에서 단 기간 조회수 30억을 가장 빠르게 넘긴 세 개의 영상 가운데 ‘강남스타일’이 3위를 차지했다. 쿼티렌이라 불리는 1,000여편의 4행시 모음은 노스트라다무스를 전설로 남게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예언을 집필했다. 이로써 942편의 4행시가 탄생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 저서 ‘예언록’(Les Propheties: The Prophecies)이 1955년 출간된 이후로 이 책은 성경과 셰익스피어 작품과 더불어 사람들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자극하며 재출판되었다. 정확한 날짜나 사건을 언급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노스트라다무스는 자신의 점성술을 이용하여 종말의 시기를 예언했다. 그가 예언한 종말은 1999년과 3997년 혹은 7000년으로 해석에 따라 시기가 각각 다르다. 그의 예언은 모호한 포현이 많다. 그럼에도 그는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기인(奇人)이다. 사람들은 나무 싹이 움트는 걸 보고 거기 뿌리가 죽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꽃잎과 색을 보며 나무의 이름을 떠올리고 연두의 잎을 통해 계절의 도착을 알아챈다. 총신 사태로 겨우내 숨 돌릴 겨를도 없었을 총회 정치인들도 나무에 물오르는 걸 보면서 ‘아!’ 탄성을 지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움이 머무는 곳은 ‘아!’ 하는 짧은 감동의 순간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하며 감탄하는 예배의 순간이 바로 詩임을 소강석 목사의 설교가 깨우쳐준다. 그는 음유시인처럼 시로 노래하고 설교하는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노스트라다무스처럼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기인이기도 하다. 2018년 3월 8일 일산 킨텍스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5,000여명의 목사들과 장로들 앞에서 소강석 목사는 모든 일에 통달한 지혜를 지닌 솔로몬처럼 전지적(全智的) 관점으로 국가조찬기도회 설교를 전했다. 3월 8일 새벽은 어둠과 빛의 중간, 따뜻함과 차가움의 중간, 이 세상과 저세상의 중간으로 스며들었다. 가느다란 빛들이 피아노 현처럼 세상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새벽의 찬양을 들으며 말씀을 듣는 사이 예언이 선포되었다. 시인(詩人)이자 가인(歌人) 소강석 목사는 2018년 3월 8일 50년 희년을 맞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역사상 그 어떤 설교자도 발산하지 못한 믿음과 끼를 소탈한 문재인 대통령의 감동을 넘어 똘기 넘치는 세계 제일의 대통령 트럼프 어깨도 으쓱하게 할 정도로 한껏 발휘했다. 소강석 목사는 세상의 이목을 끄는 시대의 기인답게 주님의 위로와 성령의 치유가 있는 역동적인 그의 메시지를 통해 한국을 넘어 시대의 문제를 내다보고 해결하는 긍정적인 예언을 전했다. 종말과 죽음을 예언하는 부정적인 노스트라다무스와 달리 희망을 전하는 소강석 목사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보자.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50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존경하는 문재인 대통령님을 모시고 조찬기도회를 갖게 된 것을 아주 뜻깊게 생각합니다. 특히 평창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리 땅에 평화의 기운이 드리우고 있는 때에 국가조찬기도회를 열게 된 것은 아주 큰 경사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은 저 강원도의 은빛 빙상에서 하얀 평화의 눈꽃을 피우고 화해의 아리아를 울려 퍼지게 한 위대한 제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하여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의 설국열차를 달리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남북정상회담과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낭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평화의 설국열차가 통일열차가 되어 하루 속히 쾌속 질주하도록 이 아침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소강석 목사의 2018년 3월 8일 새벽 예언 40여일 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4월 21일 보도했다. “오늘부터 핵실험·ICBM 발사 중지…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조선중앙통신은 전날 개최된 전원회의에서 ‘경제 건설과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의 위대한 승리를 선포함에 대하여’라는 결정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며 결정서에 “주체107(2018)년 4월 21일부터 핵시험과 대륙간탄도로켓(ICBM) 시험발사를 중지할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됐다고 밝혔다. 북한은 결정서를 통해 “핵시험 중지는 세계적인 핵군축을 위한 중요한 과정이며 우리 공화국은 핵시험의 전면 중지를 위한 국제적인 지향과 노력에 합세할 것”이라며 “우리 국가에 대한 핵위협이나 핵도발이 없는 한 핵무기를 절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경우에도 핵무기와 핵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위한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하며 조선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하여 주변국들과 국제사회와의 긴밀한 연계와 대화를 적극화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조선반도(한반도)와 지역에서 긴장완화와 평화에로 향한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며 “핵개발의 전 공정이 과학적으로, 순차적으로 다 진행되었고 운반 타격 수단들의 개발사업 역시 과학적으로 진행되어 핵무기 병기화 완결이 검증된 조건에서 이제는 우리에게 그 어떤 핵시험과 중장거리, 대륙간탄도로켓 시험발사도 필요 없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부 핵시험장도 자기의 사명을 끝마쳤다”고 했다. 그리고 “핵무기 없는 세계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고... 전국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는 것이 우리 당의 전략적 노선”이라고도 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린도전서 14:1-5 봄날, 나무의 완성은 그림자에 있다. 세상 모든 그림자가 잿빛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나무의 그림자는 해사한 분홍이었다가 상쾌한 초록이었다가 어느 저녁에는 잘 익은 밀감빛 그늘이 된다. 그러니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세상 공부를 제법 하는 셈이다. 이 공부가 끝나면 올 한 해 사는 일이 한결 수월해질까. 나무 한 그루에 시 한 편이라면 삶이 아름답지 못할 리 없을 것 같다. 봄이 되니 드디어 꽃의 계절이 당도하니 산수유에서 개나리와 진달래로, 목련과 벚꽃과 라일락으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릴레이. 당신은 어디에서 이 멋진 봄을 맞이하고 있는가. 세계 제일의 교회를 세운 미남 오정현 목사의 뜻밖의 세상 법정 결정에 쓸쓸하고 지치고 거칠어진 우리들 마음에 꽃을 처방한다. 먹어도 좋고 키워도 좋고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미세 먼지와 황사 속에서도 꿋꿋이 피는 기특한 꽃들을 보며 언제나 유쾌한 기인 소강석 목사처럼 이 봄날 힘을 내보자.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믿고 우리 모두 잘 될 것을 믿고 예언하자. ‘주님의 이름으로 다 잘 되리라고. 아멘.’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5-28 2018-04-22 수정 2025-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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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소강석 목사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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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의 보상과 존경
- 김관선 목사 성도에 대한 권면기인 예언자 소강석 예언대로 톡톡 튀는 수사와 은혜로 온 교인 웃음 감동 도가니 이날 임직식에서 특별히 김관선 목사의 성도에 대한 권면은 이 시대의 기인이고 예언자인 소강석 목사의 예언대로 톡톡 튀는 수사로 온 교인을 웃음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임직자들에게 권면을 하지 않고 권면 받을 사람이 제일 많은 성도들에게 권면하게 돼 기쁩니다. (아멘) (임직자 안수가 있어)가운을 가져와야 된다는 걸 잘 모르고 그냥 왔습니다. 가운을 입어야 된다는 걸 단상에 올라서야 알았습니다. 어떤 분이 절 보고 무릎 꿇으라고 하더라고요. (박장 대소) 그래 그냥 안수 한 번 더 받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조용한 웃음) 그냥 꼿꼿하게 서 있었습니다. 오늘 성도들께서 많은 임직자들을 보고 계신데 이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큰 아멘) 오늘 임직식을 보니 제가 산정현교회 임직 받은 게 생각납니다. 제가 목사 안수받은 지 일 년 밖에 안된 제가 산정현교회 담임목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너무 감사했던 건 뭐냐 하면 저보다 먼저 와있던 부목사가 저보다 먼저 안수 받고 더 오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장로님과 성도님들이 저를 얼마나 많이 존경해 주셨는지 모릅니다.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저를 무조건 칭찬하고 믿어주었습니다. 그 덕에 제가 컸습니다. 키는 안 컸지만. (큰 웃음) 그리고 마음도 크고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도 다졌습니다. 정말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버님이 머리카락이 없으셨습니다. 우리 큰 형님도 머리카락이 없으시고 둘째 형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저도 사실 머리카락이 없을 뻔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저를 격려하고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소강석 목사님은 저보다 훨씬 많은 교인이 있으십니다만 제가 소강석 목사님보다 머리카락 숫자는 많습니다. (짧지만 큰 웃음) 여러분 격려해주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면 잘 못하는 사람도 잘 하게 됩니다. (잔잔한 아멘) 제가 보니까 (형형색색 한복 차림 권사 취임석을 보며) 이쪽은 꽃밭 같습니다. 미모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꽃밭 같은 이분들이 계시니까 향기가 나는 것 같습니다. (장로와 안수집사 석을 보며) 이쪽은 지금 안수 받으실 장로님 안수집사님들 같은데 아무리 봐도 꽃밭은 아닌 것 같고 상록수 같습니다. (잠시 회중석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웃으며) 돈밭입니까. 돈이 나오는 밭이군요. (박장대소) 갑자기 돈으로 보입니다. (큰 웃음) 꽃과 돈. 그런데 꽃밭에 들어가서 꽃을 꺾어버리면 꽃을 또 못 보게 됩니다. 나무 많은 곳에 가서 나무를 베어버리고 뽑아버리면 나무의 혜택을 볼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칭찬하면 여러분은 끊임없이 꽃밭을 볼 것이고 여러분은 언제나 울창한 나무숲을 보게 될 것입니다. (큰 아멘) 격려하시고 칭찬하시고 위로하십시오. (온 회중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 마음에 안 드는 분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이들을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면 이들을 격려하고 믿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큰 아멘) Reward 리워드 보상입니다. Respect 리스펙트 존경입니다. 여러분 일하다 보면 ‘리워드’ 보상받고 싶은 생각보다는 ‘리스펙트’ 존경받고 싶은 생각이 훨씬 많습니다. 보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계신 임직자들을 ‘리스펙트’ 존경해 주십시오. 격려하고 존경하십시오. (큰 아멘) 그러면 어느새 정말 존중받는 일꾼들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큰 아멘) 그러면서 이 교회가 세상에서 존경받을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큰 아멘) 이 교회가 세상에 뿌리기만 하면 보상은 하나님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임직자들을 ‘리스펙트’ 존중하면서 이 교회를 잘 세우면 새에덴교회는 세상에서 존중받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큰 아멘) 여러분 세우신 일꾼들 흔들지 마시고 격려하고 존중해주셔서 이 존중 받는 일꾼들이 담임목사님 잘 섬기고 돈밭에서 돈이 되든가 꽃밭에서는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넘쳐나는 그런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큰 아멘 그리고 우렁찬 박수)” 소강석 목사 박수 치며 뛰어나온다. “네. 톡톡 튀면서 품위가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김관선 목사를 돌아보며) 대머리가 안 되신 것이 기적입니다. (큰 웃음)”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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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김관선 목사의 보상과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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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
- 생전에 폭넓은 학식과 뛰어난 언어 능력, 그리고 빼어난 작문 실력까지 지닌 그는 종교 서적, 역사서, 에세이 등 다양한 글들을 집필함으로써 수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중 대표적으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그리고 아람어로 쓰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해 훗날 가톨릭 라틴 예법의 국제 표준 번역 성경으로 자리 잡게 된 불가타를 탄생시켰다. 또한 그는 성별 상관없이 신앙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무릇 따라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가르쳤고, 특히 배우자를 잃은 여성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수도 생활 방식을 교육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그는 서방교회에서는 교부, 동방교회에서는 존엄한 증거자라는 칭호와 함께 많은 이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다. 영어 이름으로 알려진 제롬(라틴: Eusebius Sophronius Hieronymus; 347~ 420, 9월 30일)은 4세기 수도원 운동이 낳은 위대한 성직자이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초대교회 신학자이자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불가타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라틴어 이름 히에로니무스는 ‘신성한 사람’을 뜻한다.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예수탄생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있다. 그곳은 제롬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교회 지하의 서재이다. 그는 그곳을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성경을 연구한 목회자가 있다. 그는 서울반석교회의 황정길 원로목사이다. 그의 가르침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의 글을 다시 실어 널리 전하고자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교회는 그간 사도 바울의 이신칭의만 가르친 결과 삶이 없는 교인들을 양산했습니다. 믿음은 말씀의 순종을 동반한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어거스틴과 루터로 이어지는 가르침은 법정적 칭의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의 안경을 벗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결과 참회하는 심정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전하려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에는 두 가지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입니다. 내적 증거는 하나님이 내 구원이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외적 증거는 내 옆의 사람이 이 사람은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삶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제 내 글이 그런 삶을 실행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삶(행함)이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다수의 성도들이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전도를 강조하는 많은 분들이 입술의 고백 중심의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가 하면, 전도폭발이나 사영리 책자를 통해 전도를 받고 영접기도를 한 후 순간적인 입술의 고백에 의한 신앙을 통해 구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새신자들을 위한 양육 프로그램이 있으나, 구원의 현재적, 미래적 측면이 소홀히 여겨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전도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안내하고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란 말씀으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 1:9ㅡ11절까지를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즉 세상이 그(예수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왕으로 왔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으나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님으로 알아보고 그 예수님을 왕(王)으로, 주(主)로 영접하고 왕의 통치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영접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王)으로 주(主)로 받아드린다는 뜻이며 이를 또한 믿는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요한 3:36절 말씀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을 순종한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까지 내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순종)는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믿음을 드러내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즉 행위로(순종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 1:5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 롬 16:26절에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 라고 믿음 =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는 “믿습니다.” 가 아니라 자아(自我)가 주인 되어 살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시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義)라하며 불순종하는 것을 불의(不義) 곧 죄(罪)라 합니다. 지금까지 아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내 뜻과 내 욕심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의 삶을 살았던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主)로 모셔 드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하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언약관계에 신실한 순종의 삶은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義)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지식으로 아는 입술의 고백적인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종교 개혁자들이 중세 타락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 주의와 공로주의 구원론, 면죄부 판매 등 잘못된 전통을 개혁하는 개혁신학의 주제(主題)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한국 교회 안에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값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주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는 예수님과 연합의 진리와 함께 바울신학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느 서신에서도 순종하는 삶(행함)이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가르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오늘날 한국교회가 믿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主)라 고백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입술의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주(主)냐 로마의 황제, 가이사가 주(主)냐 하는 결단하는 문제이었습니다. 그 결단은 목숨을 건 심각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모슬렘권에서 예수님을 주(主)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동체에서 추방을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순간에 선택하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위협도 없고 부담도 없고 책임도 없는 지적(知的) 동의(同意) 만인 입술의 고백으로 하는 “믿습니다.” 라는 오늘의 우리의 고백과는 전혀 다른 원초(原初)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확인하거니와 믿음은 반드시 행함(순종)이 동반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신학교에서 구원론을 강의 하는 교수들 가운데 일부 교수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교수들이 우리의 구원을 시간상의 순서로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華)로 구원의 순서(order of salvation)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구원을 받은 순서로 칭의(稱義) = 구원의 과거,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 성화(聖化) = 현재 구원,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 영화(榮華) =미래 구원,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장로교 신학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친 조직신학자 (박형룡 교의신학 구원론 5권, p.279, 356)에서 “칭의(稱義)”는 신자가 구원을 받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과거적 구원을 말하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현재적 구원으로 구원의 지속을 뜻하며 (점진적으로 일어나며) “영화(榮華)”는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될 미래적 구원을 (미래에 일어날 일)의미 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구원은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단번에 완성되고 성화는 그 이후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함으로써 시간상의 순서로 가르쳐왔습니다 또한 당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던 이상근 박사의 로마서 주석에서 “이 부분(롬3:21-8:39)은 바울의 구원론,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大)진리를 설명한 곳으로 로마서의 중심부이다 ...이 부분을 대별하면 먼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적으로 의인(義認)의 교리를 밝히고(3:21-5:21)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계속적으로 힘쓸 성결(聖潔)의 생활을 강조한(6:1-8:17)후, 성도가 미래에 받은 영화에 이르고 있다.”(8:18-39)고 가르쳤고, 21세기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에릭슨(M.J.Erickson)도 “칭의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순간적인 사건이지만, 반면에 성화는 완성을 위하여 전 생애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복음주의 조직신학(하), p.15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 성화, 영화를 구원의 시간적 순서로 보고 칭의(稱義)는 순간적이고, 단회적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으로 볼 때 성화 없는, 즉 윤리적 삶이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저도 이와 같이 배웠고 죄송하게도 한 동안 이렇게 가르치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던 가운데 이 순서가 잘못되었으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신학의 산물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남은 생애 이 성경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원한 가치를 위한 자기 부인의 삶이 없는 기복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삶(행함)이 없는 구원, 윤리가 실종된 기독교로 오늘의 교회의 윤리의식의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텐리 존스가 지적한 대로 교회 안에 있는 자의 2/3는 회심(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돌이킴의 삶을 사는 순종의 삶을 사는 삶)이 필요한 자들이며, 안성모씨가 지적한 대로(시사 저널, 2011년 2월23일) 오늘날의 교회는 윤리가 실종된 맛을 잃은 부패한 교회가 되어 사회의 지탄을 받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속지 맙시다. 거룩함을 이루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히12:14 그러면 과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시간적 순서이며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고 순간적(瞬間的)이며 성화(聖化)는 점진적인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되는 것인가?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입니다(롬 3:21-4:25, 갈 3:6-14, 약 2:21-24).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稱義)를 말할 때 아브라함을 등장 시키고 있습니다(롬 3:21-4:25). 바울은 롬 3:21-2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를 말하고 롬 4장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롬 4:3절에서 성경이 무엇이라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느니라하고 아브라함이 믿으매 하나님께 의(義)로 여겨진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의(義)로 여겼다는 말씀은 창세기 15장6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이때 아브라함은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창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창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아브람아 두려워 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나에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밖으로 나오라 하시고 하늘의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고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 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때 아브라함은 몇 살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향해 가려고 화란을 떠날 때의 그의 나이가 75세라고 했고(창12:4)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 했으니(창16:16)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아마 75세와 86세의 중간 인 80세라고 가정해 보고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롬 4:19-22절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義)로 여겨졌느니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칭의(稱義)를 받는 것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창세기 17-18장의 내용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행하라 하시면서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고 내가 네 아내 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브라함이 속으로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을까? 사라가 90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아브라함이 말하자 하나님께서 아니다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하시며 말씀을 마치시고 떠나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대로 자기 집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90세나 된 사라가 이삭을 낳을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80세에 칭의(稱義)를 받고 또 100세에 칭의(稱義)를 받으므로 두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칭의(稱義)를 얻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주시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나 되었고 사라의 나이는 90세로 자손을 가질 수 없는, 즉 생산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내년 이맘때에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죽은 태를 열어 생명을 가질 수 있게 하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롬4:23-24절에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 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우리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주(主)로 믿는 나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만이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그러므로 부활 신앙을 소유한 믿음만이 칭의(稱義)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과 우리가 믿는 믿음이 유전자 상으로 같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갈3:7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또 다시 아브라함이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이에 성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2:21-23)하고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친 내용은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려고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급히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하시며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하시고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으니 천하 만민이 네 씨로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義)로 여기셨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의 나이는 대략 115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100세에 낳았고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갔으니(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때 이삭의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는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115세 때 또 칭의(稱義)를 받습니다. 종합하여 보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창15장에서 자식이 없는 80세인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 17-18장에서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생산 능력이 없는 죽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년 이맘때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는 말씀을 믿을 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고, 창22장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하실 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이삭을 제물로 드림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세 번 칭의(稱義)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0세,100세,115세,) 이와 같이 아브라함의 생애로 보면 칭의(稱義)는 단회적이 아니요 반복적이며 점점 더 믿음이, 즉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單回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구별된 것이 아니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시간적 순서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적 순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롬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였고, 롬6:7절에서는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하고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으로 성화(聖化)없는 칭의(稱義)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죄 된 생활에서 벗어나 구별된 삶(성화(聖化))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믿음)을 살 때 의롭다 하심(칭의(稱義))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화(聖化) 없는 칭의(稱義)는 없는 것이며 성화(聖化) 없이도 칭의(稱義)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론은 성경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또한 칭의(稱義)는 종말론적입니다. 칭의(稱義)를 전문적으로 연구했던 맥그라스(A.E.McGrath)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칭의론'(pp.45-46)에서 “바울 자료에서 칭의는 성도로서의 삶의 시작과 최종적인 완성이 모두 연관된 것이므로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 또한 언급합니다(롬 2:13, 8:33; 갈 5:4-5). 마찬가지로 성화 또한 과거의 사건(고전 6:11)과 미래의 사건(살전 5:23-24)을 언급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칭의(稱義)가 과거의 어떤 한 시점만이 아니고 최종적인 종말론적인 칭의(稱義)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5:5절 말씀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한 말씀과 같이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딤후4:6-8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主)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을 지키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으로부터 최종적인 의의 선언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전 5:23-24절 말씀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거룩하고 흠 없게 보전되기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칭의(稱義)는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것이 아니며 반복적이요 종말론적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시간상의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이며,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로 구원의 양면성을 말하고 있으며, 평생 칭의(稱義), 평생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나 종말론적 칭의(稱義)를 얻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있는 칼빈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기독교 강요]와 [창세기와 로마서 주석]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성령은 죄인된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합시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함(칭의(稱義))과 거룩하게 됨(성화(聖化))을 얻게 하신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전1:30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라 고전 6:11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논리적으로는 칭의(稱義)가 성화(聖化)에 앞서지만 이 두 가지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얻어지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구별은 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성령의 이중 사역(고전 1:30, 6:11)으로 성도들 안에서 평생토록 함께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기독교강 Ⅲ.ⅰ.1). 그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들과의 신비한 연합을 통해서 가능케 되는 것 입니(기독교강요, Ⅲ.ⅰ. 1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칭의의 은혜를 매일 매일 평생토록 죽는 순간까지 이루어가며 가슴 깊이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서 (Coram Deo)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다 같이 상호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고 동시적인 것(「기독교강요」Ⅲ.ⅹⅵ .1)과, 참된 믿음은 순종의 삶으로 증명하게 된다는 것(기독교강요, Ⅲ.ⅹⅶ .12)과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그 안에 항상 살아계신다 갈 2:20는 것(기독교강요, Ⅲ.ⅱ.13)을 고려할 때, 성화(聖化)와 함께 한 칭의(稱義)는 법정적 선언적인 점에서는 단번에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가 회복되는 데는 한 평생이 필요한 (기독교강요, Ⅲ.ⅲ.9)것으로 칭의(稱義)는 성격상 일평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칭의(稱義)의 수단인 믿음과 칭의(稱義)의 근거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칭의(稱義)와 불가분하고 동시적인 성화(聖化)가 평생의 과정인 점에서 칭의(稱義)는 단순히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종말론적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온전히 지켰을 때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는 바울의 말씀(딤후 4:8)에 의하면 칭의(稱義)는 사실상 종말에 되어질 것이 미리 선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칭의의 직접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요(기독교강요, Ⅲ.ⅹⅰ ⅴ.17), 구원론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며(롬 8:29-30),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은혜의 나라에 들어가 그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롬 5:1,2).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稱義)교리는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 교리의 중심점이기에 이 교리가 왜곡되는 경우 기독교의 구원론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칼빈은 기독교강요와 창세기 및 로마서 주석 등에서 특별하고도 섬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는 둘 간(間)에 구별은 있으나 분리가 있을 수 없고 사실상 동시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불신앙과 육체적인 정욕과 평생토록 싸우는 것이요, 온갖 장애물들을 인하여 평생토록 연단 받는 가운데서 죽는 순간까지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달리는 경주였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평생토록 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열심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기독교강요, Ⅲ.ⅲ.9). 이 믿음과 회개로 말미암는 칭의(稱義)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죽기까지 평생토록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원히 사는 것이며 성화(聖化)는 죄에 대하여 죽고 또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 속에서 그리스도를 점진적으로 닮아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 입니다. 요약하자면, 평생 믿음과 평생 회개를 통한 평생 칭의(稱義)와 평생 성화(聖化)를 누린다는 것입니다(나용화 박사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이해 ”). 이와 같은 칼빈의 칭의론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잘못 가르쳐져 칭의(稱義)가 법정적 선언이요 신분의 변화로서 과거적 일회적 사건이기에 시간적으로 칭의(稱義)가 완료된 이후 성화(聖化)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쳐 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왜곡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삶(믿음)이 없어도 믿기만(지적 동의로 입술의 고백)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구원론으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윤리적 삶이 실종된 기복종교로 전락(轉落)했습니다. 또한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상실한 머리털이 깎이우고 두 눈 뽑힌 삼손이 되어 한국 사회로 부터 신뢰를 상실한 부끄러운 우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말씀처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신 말씀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고 우리 자신이 바른 삶을 살고 바르게 가르쳐서 거룩성을 회복하여 빛의 삶을 살아 하나님의 더렵혀진 이름을 회복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복음 진리의 말씀을 우리 자신의 삶이 배반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을 받는 자의 삶의 모델이 되어야 하고 삶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교사의 영성과 성숙의 깊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시간의 길이와 비례합니다. 늘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교사가 되어 한 말씀이라도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화(聖化)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가야 하겠습니다. 2020-04-09 수정 2025-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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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황정길 목사의 칭의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