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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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끝 말씀
    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1-13 ……… 2)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9 ……… 3)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0-21 작자 미상의 이런 시가 있다.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내가 그린 최초의 그림에 빛을 비춰주시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주인 없는 개를 보살펴 주시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동물들을 잘 대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란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난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언제나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내게 입 맞추시는 걸 보았어요. 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때로는 인생이라는 것이 힘들며 우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님을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날 염려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꼭 이루고 싶어졌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당신이 생각하셨을 때 사실 난 언제나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내가 본 모든 것들에 대해 당신에게 아멘으로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답을 제시해준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4-5 스바냐 선지자는 더욱 감동적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벧전 1:8) 된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3-14 이 말씀은 우리가 어리석고 죄스러운 어떤 일들을 요구할 수 있다거나 또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실례가 있다. 1540년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수였던 미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1. 12. 26. - 1546. 4. 7.)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해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루터에게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 모아 편지를 보냈다. 루터는 편지를 받자마자 간절한 내용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당신이 필요하다. 나는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이 계속 더 살아있기를 명하고 싶다... 나는 주께서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나를 위해서 당신을 살려두시겠다는 말씀을 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이것을 위해 나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내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안다. 그 이유는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일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 루터의 이러한 확신에 찬 말은 그 당시 신중한 말이 요구되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뒤 일어난 일을 보면 루터의 이 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루터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미코니우스는 이미 말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는 읽어주는 루터의 편지를 듣고 곧 소생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완전히 회복했다. 그 후 미코니우스는 6년을 더 살았다. 게다가 그는 루터보다 두 달을 더 살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뒤 모든 내용의 마지막에 ‘아멘’을 덧붙일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멘은 원래 긍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강하게 하다’(strengthen), ‘확증하다’(confirm)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의 아멘은 우리의 믿음이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거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아멘은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들으시리라 하는 확신의 증거로 말하는 것이다. 고대 유대교에서는 랍비가 성경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성도들이 그 구절을 따라 말하게 함으로써 성경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점차 구절을 되풀이해 따라 말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성경 구절을 따라서 반복하는 대신에 그것을 압축한 한 마디 아멘을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멘이 기도나 찬송의 맺음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마칠 때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교훈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6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간구한 내용에 대한 이해와 믿음으로 아멘을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핵·심·개·념·정·리】 1)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답을 제시해준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3) 어떻게 기도할 때 확신을 얻게 되는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뒤 모든 내용의 마지막에 ‘아멘’을 덧붙일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멘은 원래 긍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강하게 하다’(strengthen), ‘확증하다’(confirm)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의 아멘은 우리의 믿음이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거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아멘은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들으시리라 하는 확신의 증거로 말하는 것이다.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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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선거의 시대
    성탄절부터 정월 초하루까지의 일주일은 시간 밖의 괄호와도 같다.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성탄절이 띄운 기분은 어디로 착지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그 마음의 공백 속에서 한 해의 기억은 눈발처럼 뿔뿔이 흩어진다. 2024년 세계는 전쟁 2개와 50여 국의 선거로 갈등의 몸살을 앓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새해로 이월돼 살상과 파괴로 치닫고 있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20억 명이 50여 국에서 선거로 정치적 선택을 한다. 20억이라는 숫자는 세계 경제 총생산의 60%에 해당한다(뉴욕타임스 집계). 선거가 있는 나라는 인도·인도네시아·멕시코·남아프리카 미국 그리고 유럽 27국(의회) 등이다. 선거는 본질적으로 현상 타파적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선거판은 항상 대립적이며 분열적이고 이 틈을 노린 기회주의나 인기영합주의가 득세할 소지가 높다. 그런 의미에서 2024년의 세계와 교계는 극도의 불안을 안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계는 자국 이기주의로, 교계는 후보와 총대 공히 개인 이기주의로 흐르고 있다. 피란민·자원·인종·종교 등으로 갈등 구조가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새해가 되면 다르다. 사람들은 열두 달 365일로 조직된 시간 속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행진해 간다. 당신의 새해 계획은 무엇입니까. 1월부터는 어엿한 목표를 갖고 살아봅시다. 그래야 다음 연말쯤에는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새해 다짐을 하려는 이에게는 세상을 조직적으로 바라보는 법, 즉 원근법이 필요하다. 시점이 분산되어 있으면 자칫 생활이 무질서해질 수 있다. 한 해를 요령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일정한 시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자, 하나의 사실이 분명해졌다. ‘역사의 휴일’이 끝나고 신냉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탈냉전 30여 년간 인류는 잠깐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를 망각했다. 그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바치는 '군주론'을 저술했다. 1513년 발표한 '군주론'에서 그는 위대한 군주와 강한 군대, 풍부한 재정이 국가를 번영하게 하는 것이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군주는 어떠한 수단을 취하더라도 허용되어야 하며 국가의 행동에는 종교 및 도덕의 요소를 첨가할 것이 아니라는 마키아벨리즘을 발표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책임을 지는 것이고 책임은 결과로 판가름 난다. 정치는 나라의 존망이 걸린 것이기에 냉엄한 것이고 목적이 중시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백범 김구 선생은 외쳤다. “우리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어느 나라의 선거나 그 어떤 교파의 선거도 오는 4월 10일에 치러질 한국 국회의원 선거보다 중요하지 않다. 정치판은 당면한 치명적 상황에 대한 인식도 없어 보이고 이 엄중한 국제 파고에서 살아갈 연명책에 대한 정책적 공방도 없다. 인구 감소 문제, 자국 이기적 경제 흐름, 자원 외교의 한계, 북한과의 무력적 대립 문제 등에 대한 지적도 토론도 보이지 않는다. 북한 김정은은 엊그제 남북은 더 이상 동족 관계가 아니라며 한국에 핵 무력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식으로 협박하고 나섰다. 우리는 남북 관계에서도 더 이상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초점은 대통령 부인 명품백 수수 불법 영상에 대한 특검이고 비명, 친명, 친윤, 반윤공천 여부고 비대위 구성이고 정객들의 이합집산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4·10 총선거의 의미는 집약해서 말하면 한 시대의 청산에 있다. 한국은 정치적 굴곡의 고비마다 그 시대의 주류를 교체해 왔다. 장기 집권(이승만)의 적폐가 쌓였을 때 군부(5·16)가 들어왔고, 군부가 오래가자 학생들이 앞장선 민주화가 그것을 넘어뜨렸다. 이때부터 대학생 운동권 세력이 20여 년간 좌파 정치를 주도해 왔다. 현 더불어민주당의 170여 석 가운데 100석 넘게 운동권 차지다. 낡고 권위주의적인 보수·우파 세력만으로는 조직과 권모술수가 능한 운동권 좌파를 당할 수 없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나 총회 총대가 투표장에서 의식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이것을 살아가는 시대정신이다. 선거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마찬가지로 지도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마술사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배우 이선균과 그의 연기를 좋아한다. 많은 남자들이 간증하듯,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는 삶과 일에 지친 중년 사내들을 위로하고 각성시키는 힘이 있었다. 다시 꺼내 읽은 5년 전의 메모장에 드라마의 대사가 적혀 있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 드라마에서 이선균은 건축구조기술사. 자신의 다짐과 달리, 그의 내력은 버티지 못했다. 좋은 믿음이 결국 좋은 삶을 만든다. 성경은 말씀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4-15 2024-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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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박성규 총장의 소명
    우리는 최첨단 망원경과 내비게이션을 가지고도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 김영우 같은 이재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가장 미워하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경우 말이다. 총신대 신임 박성규 총장은 총신대 운영을 밝히는 총회 앞에서 총신대가 세미나리(seminary) 즉 씨를 뿌려 모를 키우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묘판(苗板)이라고 했다. 그것을 우리말로 모판 또는 못자리라고 하는데 그 말의 탄생 과정은 이렇다. 먼저 벼를 뜻하는 방언인 나락을 털어서 가장 알찬 것들만 골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듬해 봄까지 건드리지 않도록 깊숙이 감추어 두는 것이 ‘씻나락’이다. 곡식의 알이 낟인데, 낟알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의 알갱이를 말한다. 봄이 오고 사월이 되면 무논에 모판을 마련하는 한편으로 씻나락을 꺼내서 물 채운 항아리에 담근다. 물에 담가 싹이 잘 나도록 돕는 것인데, 물에 들어가는 그때부터 씻나락은 ‘볍씨’로 이름이 바뀐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볍씨는 씨눈 쪽에 껍질을 뚫고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모판에 내다 뿌려야 한다. 모판에 떨어진 볍씨는 곧장 위로 싹을 밀어 올리고 아래로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는데 이때부터 볍씨는 다시 이름을 ‘모’로 바꾸어 부른다. 모가 모판에서 한 뼘 남짓 자라면 철에 맞추어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는 아침 일찍 모판에서 모를 쪄서 잘 다듬어 둔 무논에다 옮겨 서너 낱씩 포기를 잡아 못줄에 맞추어 심는다. 이렇게 모심기를 끝내면 그때부터 모는 다시 이름을 ‘벼’로 바꾸어 부른다. 벼는 농사꾼의 갖은 정성을 다 받으며 자라나 마침내 새끼를 배고 몸 안에 밴 새끼가 자라면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가 바로 ‘나락’이다. 그러나 열매만을 따로 떼어서 나락이라고 하지만, 우선 나락을 밴 그날부터 벼를 모두 싸잡아 나락이라 부른다. 그래서 ‘벼농사’라는 말이 곧장 ‘나락농사’라는 말로 이어지고 그것을 옴니암니 가리지는 않고 넘나들며 쓰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낟알이었다. 총신이라는 모판에서 뿌리를 내리고 말씀을 먹고 세상으로 나와 성령을 받으며 잎을 키웠다. 우리는 그냥 살았을 뿐인데 어느덧 나이든 목사가 되었다. 그냥 믿고 언덕 넘어 전등도 없어 호야불로 밝힌 총신을 다녔을 뿐인데. 박성규 총장의 근황을 보면 총신대를 위한 그 한 번의 성취를 위해 은 자신을 ‘다마스쿠스 검(Damascus blade 劍)’처럼 날카롭게 벼린 모습이다. 다마스쿠스 검은 동시대는 물론 역사상의 어떤 유럽의 강철검보다 뛰어난 검이었다. 비단 손수건을 칼 위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베어질 만큼 예리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이 커서 바위를 내리쳐도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괴테의 1만 2111행의 시(詩)로짜여 진 장편 희곡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이다. 인간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갈 곳, 목표, 지향점이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방황을 멈추고 자족과 정체(停滯), 그리고 안주(安住)가 일상화된 삶이라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독일어로 직업은 ‘Beruf’인데 여기서 파생된 ‘Berufung’은 소명(召命)의식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인은 직업 수행을 자신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소명의 실천’으로 여기는 인식이 견고하다고 한다. 김영우가 총신을 쥐락펴락하던 시절 재단이사장에 자질과 열정을 갖춘 경상도 김승동 목사 대신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한 강원도 목회자를 인선한 적이 있다. 지금의 총신 이사회는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이사들과 이사장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다. 세상이 아프다. 전쟁이 터지고 난민은 떠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 그에게 딱히 무슨 죄가 있었을까. 죄 많은 이들이 오히려 죄를 외면하는 세상에서 이이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내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뜻이고 신앙의 힘이며 신자의 역할이리라. 그 뜻이 겸허하고 겸허하여 우리는 예수님 오신 날의 의미를 이이복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이 세상이 돈과 물질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의미와 눈빛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땅도 자원도 빈약한 한국은 교육과 똑똑한 인재들 덕분에 이만큼 발전했다.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교육이 대학부터 무너지고 있다. 최근 만난 한 대학 관계자는 현실을 털어놨다. “학부는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공계조차 무너졌다. 입학하자마자 반수 시작해서 제주대 약대라도 가려 한다. 메디컬(의약학 계열) 빼고는 초토화됐다. 대학원은 정원도 못 채우고 고도의 학문 연구 기능은 없어진 지 오래다. 국내외 인재를 모셔 오고 싶어도 희망 연봉을 지급할 여력이 없다.” 미국대학경영협회 2021년 자료에 따르면 하버드대 기금은 494억 달러(약 63조9927억 원), 스탠퍼드대가 353억 달러(약 45조7029억 원)다. 한국 최상위권 사립대 작년 수입이 6000억∼9000억 원 수준(이월금 포함)이다. 적립금은 5000억∼7500억 원 수준이다. 영유아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 학비가 연 2000만 원을 넘는데 사립대 연평균 등록금이 그 절반도 안 되는 757만3700원이다. 등록금 싸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다. 미국이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미국 연방교육부가 등록금 상한을 정하진 않는다. 대신 장학금 확대, 학비 대출 지원에 주력하고 소비자(학생)가 좋은 대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덕분에 미국 대학은 자가발전이 가능하다. 최강 기술 강대국의 원천이다. 우리 교육부는 어떤가. ‘표(票) 떨어질 일’이라며 10년 넘게 대학 재정을 묶어놓고, 얼마 안 되는 재정사업으로 대학을 쥐고 있다. 그 결과 모든 한국 대학이 자생력을 잃고 교육부가 꽂아놓은 ‘지원금 링거’로 연명 중이다. 한국 고등교육이 재기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교육부 권한을 유치원 및 초중고교와 국공립대 범위로 축소해야 한다. 사립대에 대해서는 감사, 감독 권한 정도만 남겨야 한다. 등록금이 가계 부담이라면 조(兆) 단위 대학사업을 장학금으로 돌려 직접 학생을 지원하는 편이 낫다. 교육부가 권한을 놔야 ‘돈값’ 못 하는 대학은 자연스레 퇴출되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대학은 나라를 먹여 살릴 것이다. 가장 시급한 교육 개혁은 ‘교육부 개혁’이다. 하수상한 시절 총신대는 독일인의 ‘Berufung’ 소명(召命)의식이 충실한 박성규 총장 체제로 내실을 다지며 전진하고 있다. 게다가 이사장 화종부 이사, 송태근 목사 등의 아낌없는 지지와 후원까지 더해지고 있다. 가자 믿음이여 살 맞대고 가자 하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안을 소망 하나 내리고 있거니 성경은 말씀한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2-24 2023-12-31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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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 성경이 삶이 되다_ 영생
    주신 말씀_ 요한일서 5:11~13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목적지는 바로 영생하는 데 있다. 그 영생은 죄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지옥 불 속에서의 영생이 아닌, 하나님이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가 들어가는 ‘새 하늘 새 땅’의 천국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림을 말한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영생’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어느 날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다 지키고 나아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16~22)고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에서 중요한 영생의 개념은 영생은 무슨 선한 일을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마 19:17), ‘천국에 들어가는 것’(23절)이란 말씀으로 볼 때 영생은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곧 무슨 일을 해서 댓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체와 근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들어간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영생에 대하여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어 사도 요한은 그의 공동서신인 요한일서의 본문 기록과 같이 예수를 믿고 내 안에 예수가 함께하고 계신다면 이미 나에게는 ‘영생’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예수를 죽인 자 가운데에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고 단언하며 하나님의 영이 계시는 자는 결코 사망이 없음을 말씀하였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탄생의 목적은 인간처럼 사시기 위해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을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는 공생애 3년 동안도 죽음의 길을 가시기 위해 걸으셨고 마침내 받으신 사명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었다’라는 사명의 마침표를 찍으셨다. 그의 ‘다 이루심’은 사망을 멸하신 것이고 그와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시는 사망이 없는 ‘영생의 삶’을 은혜로 주셨던 것이다. 요한 사도나 바울 사도의 말처럼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면 나는 이미 영생에 ‘들어가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는 오직 사망을 멸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로구나!! 예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부자 청년과 같이 십계명은 물론 온 율법을 다 지키고도 모자라 가진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예수님을 모르니 천국에 들어간다는 보장을 얻지 못하였으나 이 시대의 우리들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만 믿고 성전 된 내 몸 안에 그의 영만 모시고 있으면 이미 ‘영생에 들어가 있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수치, 고통을 치루시고 물과 피 모든 진액 남김없이 쏟고 마침내 ‘다 이루시고’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 그 은혜 무엇으로 다할 수 있을지 오직 눈물만 앞을 가리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2023-12-30
    • G.QT
    • G.QT
    2023-12-30
  • 총회 지도자들의 새해를 위해
    베이징 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1927년 추수 봉기를 이끌고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교적 교의(교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당신들의 교의는 분(糞)만도 못하다고 말해야 한다.” 표현의 비속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마오는 분명 맞는 말을 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이 통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던 그 자신조차도 이 금언의 중량감에 끝내 짓눌리고 말았던 것일까. 1966년 참혹한 문혁기(文革期), 손에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천안문 앞에서 마오 찬가 ‘동방홍’을 부르던 무수한 홍위병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천천히 흔들며 답례하던 마오가 이미 새로운 교조 그 자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여기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년 3월 23일 ~ 1980년 3월 18일)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분석했던 마르틴 루터의 심리적 특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위를 혐오하고 그것을 뒤집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원래 권위적이었을 수가 있으며, 권위를 뒤집고 나서는 자신이 다시 권위주의의 화신으로서 군림하게 되기 쉽다." 교조에 대한 저항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교조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한국적 민주주의든, 주체적 사회주의든, 민족적 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개혁주의든 한번 머리에 박힌 ‘당연한 생각’은 그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0~20년 전의 ‘상식’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며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이런 말을 했다. “습관에 구속돼선 안 된다. 가끔 습관은 진리를 짓밟기도 한다. 습관보다는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해야만 한다.” ‘세상 참 좋아졌다’고 빈정대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정말 좋아졌다. 당신만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대답이 적절해졌고, ‘법은 멀고 주먹과 돈은 가깝다’는 총회 해결사들에게는 “이젠 주먹보다 CCTV가 더 가깝다”는 대답이 들어맞게 됐으며, 이재명처럼 “여태껏 큰일 날 일을 저지르고 살았는데도 무사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가 됐다. 도시를 가장 도시답게 하는 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다. 길을 걷다 언제든 발길을 멈추고 낯선 눈을 들어 하염없이 바라보는 도시여행자처럼, 나도 오늘은 내 방식대로 총회가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를 즐겨야겠다. 세상엔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배웠지만, 꼭 그렇진 않다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 받아들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고 했지만, 부지런하면 피곤을 피하기 어렵단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것이 틀린 게 아니란 걸 받아들이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스무 살 소원은 마흔 살 되는 거였다. 그냥 가만 있어도 시간은 가고 나이를 먹을 텐데, 그런 허무한 소원이 대체 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나의 소원은 아흔 살 되는 거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기대는 현재에 붙들린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반성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완성된 나에 대한 바람이다. 죽을 만큼 힘들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좌절을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런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때로 우리 앞에 새로운 깨달음이 나타나거나 오래전의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내 의식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개인이 그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들이 모여 온전한 전신상(全身像)을 만들기 전까지 모든 총체적 평가는 유보돼야 하며, 의심받아야 한다. 보편적 진리란 없다. 다만 인생 행로(行路)에 작고 큰 도움의 손길을 말없이 내밀 수 있는 벗으로서의 지혜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나의 길을 물을 수 없는 시간을 고스란히 떠안고, 우리는 매일 미지의 세계를 향해 구원의 길을 떠난다. ‘떠남’은 그 자체로 길을 묻는 과정이며 고뇌와 선택으로 지나온 시간과 설렘과 걱정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추억은 찰나만을 보여주지만, 무수히 많은 시간의 교차점을 감지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처럼 말이다. 이렇게 춥고 바람이 시린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하고 의심을 품어 보지만 믿음은 마치 봄의 전령처럼 생명을 이야기한다. 다가오는 봄이, 그 생명의 기운이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은혜롭길 기도해 보자. 힘겹고 지칠 땐 목표를 향해 억지로 힘겹게 내딛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자연스럽게 때가 이르기를 기다려도 될 것 같다. 빛이 인도하는 곳으로 향하기만 해도 그 너머에 모세 같은 믿음의 꿈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소망이 총회 지도자 한기승 목사, 장봉생 목사 등의 마음을 다독이길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2023-12-29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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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9
  • 총선과 장봉생 목사 진중세례식
    나쁜’의 우리말 어원은 ‘나뿐’이고 ‘좋은’의 우리말 어원은 ‘주는’이고 그래서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나누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의 우리말 어원을 실행하는 총회군선교회(회장: 장봉생 목사)가 2023년 12월 21일 총회회관에서 제6차 실무임원회를 개최했다. 군선교회는 제27회 정기총회를 2024년 2월 29일 판암장로교회에서 개최하고 공문을 발송하기로 결의했다. 준비위원장으로 홍석현 목사(군선교회 수석부회장)와 실무위원 4명(황성준, 안재훈, 최상호, 이인순 목사)을 선임했다. 그리고 2024년 2월 4일 제주지회 헌신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연이어 6일까지 2박 3일간 제주도에서 실무 정 임원 부부수련회를 가진 뒤 4월 20일 논산훈련소에서 진중세례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이틀씩 재판을 받고 명색이 운동권 주류 당 대표라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신없는 사람도 태연자약(泰然自若) 능글거리고 있다. 그런데 나도 좋아하는 유명 배우가 수사 기관의 수사 압박에 정말 안타깝게 스스로 삶을 마감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어린다. 자신의 측근들 죽음에도 무심했던 그 꿋꿋한 대표가 그 배우 사망 당일인 12월 27일 오후 자신의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뜬금없이 '이승에서의 한'까지 들먹인 이런 글을 올렸다 내렸다고 한다. “고(故) ㅇㅇㅇ님을 애도합니다. 죄로부터 국민을 지키라는 국가 수사 권력에 의해 무고한 국민이 또 희생됐습니다. 저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참 아픕니다. 나의 아저씨, 다음 세상에서는 그 편하고 선한 얼굴 활짝 펴시기 바랍니다. 이승에서의 한은 모두 잊으시고 이제 그만 편히 쉬소서.” 참으로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정말 희대의 마귀를 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내년 4월 10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과 자세로 투표장에 나가야겠다. '나의 아저씨' 같은 그의 장례식이 이랬을지도 모르겠다. 눈 내린 추운 겨울날, 검은 옷을 입은 한 무리의 가족이 묘지로 향하고 있다. 어린 두 남매가 손을 꼭 잡고 앞장서고 엄마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노인의 부축을 받으며 뒤따르고 있다. 여자의 얼굴은 창백하리만큼 희고 몸은 임신한 상태다. 장례식의 주인공은 이 아이들의 아빠이자 여자의 남편이다. 친구나 친지도 없는지 장례식 참석자는 이들뿐이다. 여자는 남편을 잃은 슬픔도 크지만 배 속 막내까지 어린 삼 남매를 홀로 부양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막막할 테다. 의지할 데라곤 늙은 친정아버지밖에 없어 보이지만 노인의 표정도 심란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우울한 겨울 날씨, 휑한 벽, 가족밖에 없는 장례식, 창백한 여자 얼굴. 오른쪽 두 남자가 거리를 두고 이 가족을 지켜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며 위로받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불행은 비교에서 온다. 잘난 사람과의 비교는 더 큰 불행을 낳는 법이다. 능글스런 마귀가 설치는 이때 장봉생 목사가 회장으로 이끄는 총회군선교회가 내년 총선 4원 10일 열흘 뒤 4월 20일 논산훈련소에서 거행하는 진중세례식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1-4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4-21 2023-12-28
    • 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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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8
  • 크리스마스와 한동훈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결합을 뜻하는 영어이다. 프랑스어로는 ‘Noel’, 스페인어로는 ‘Navidad’이라고 한다. 1970년 시각 장애인 뮤지션 호세 펠리치아노가 만들고 발표한 이 노래는 스페인어로 ‘Feliz Navidad’가 되겠다. 기독교 공인 이전의 전통 교회 시대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과 논쟁이 있어 왔다. 삼위일체론으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 날짜인 3월 25일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서 예수의 탄생을 알렸다는 수태고지일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상징적인 9개월간의 잉태 이후인 12월 25일을 탄생일로 본다는 것이다. 서기 350년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의 크리스마스 선포는 기독교 공인 이후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절기로 확립하는 마침표였다. 다른 입장으로는 성경에서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을 적시하지 않았고 이날이 로마제국의 태양신 숭배 축일과 같다는 사실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 일부의 교파도 존재한다. 이날이 정녕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이 맞느냐 아니냐의 논쟁은 지금 의미가 없다. 동양의 동지와 며칠 차이 나지 않는 크리스마스가 어둠의 시간이 끝나고 빛의 시간이 시작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동서 대륙을 넘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맞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버리고 올해부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삼는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러시아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우크라이나의 의지일 것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지만, 신약성서 어디에도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가 기록은 없다. 누가복음 2:8-20에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양을 치는 목자들이 그날 밤에 양을 돌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목자들이 밤에도 양을 돌봐야 하는 건 3월에서 11월까지다. 2세기 중반만 해도 예수의 탄생은 워낙 신비로운 사건이라 인간의 시간 밖에서 일어난 일이 틀림없다는 관념까지 존재했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죽은 날만 기념할 뿐 생일을 축하하는 건 이교도 풍습이라 여기기도 했다.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의 저자 마크 포사이스는 ‘크리스마스는 왜 하필 12월 25일일까’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저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2~3세기 기독교인들은 여러 근거에 의해 예수가 춘분 무렵인 3월 25일 ‘세상에 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의 아들이 ‘세상에 왔다’라는 것을 수태(受胎)로 해석해야 할지 탄생으로 해석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일었는데 동정녀 마리아에게 열광했던 사회 분위기가 예수가 수태 당시부터 신의 아들이었다는 이론에 힘을 실어줬다. 그래서 교회력은 3월 25일을 ‘성수태고지절’로 기록했고 예수는 아홉 달 후인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는 것이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라고 최초로 언급한 기록은 354년에 발간된 ‘연대기(Chronology)’다. 2022년 윤석열의 대선 승리를 전망했던 영국 언론 이코노미스트는 2024년 전망에서 국민의힘이 2024년 4월 10일 치를 총선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고 썼다. 그에 부합하듯 윤석열 대통령의 복심 한동훈 법무장관이 2023년 12월 21일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고 싶었고 이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라고 이임사에서 밝혔다. 이임식을 마친 한동훈은 누가복음처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다. “국민의힘을 이기는 정당으로 만들겠습니다. 제가 한 일 중 잘못되거나 부족한 부분은 저의 의지와 책임감이 부족하거나 타협해서가 아니라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 일 것입니다. 검사 일을 마치면서도 같은 말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을 마칠 때 제가 똑같이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그래야 정상이다. 고르게 안정적으로 뛰는 심장은 죽은 심장이니 말이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이 울퉁불퉁 들쭉날쭉 뛰는 게 정상이듯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거의 모든 젊은 시절을 일반 감옥도 아니고 바다에 떠 있는 요새 같은 감옥에서 보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 있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영예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내가 한 성공으로 나를 심판하지 말아 달라. 얼마나 많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는가로 심판해 달라.” 민주당은 정말 정신 바싹 차리고 굳게 단합해 혁신해야 할 것이다. 수평선 너머에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파도만 보지 말고 그 너머 바람을 볼 줄 알아야 할 텐데 작가 이재명은 완성도 낮은 소설을 짓느라 못 볼 것이다. 제107회 총회선관위 이모 주모 너희는 복 있는 장로에게 남은 유일한 것을 이용했다. 너희 탐욕을 위해 그의 소망을. 성경은 말씀한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2:25-35 2023-12-27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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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 19:13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영국의 침례교 목사 메이어(F. B. Meyer, 1847. 4. 8. - 1929. 3. 28.)는 몇몇 가까운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이 미국에 있을 때 그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아주 쉬웠지. 기도가 술술 나오더군. 그런데 몰간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내 교회 근처에 있는 교회를 맡게 되니까 그건 이야기가 영 달라지는 거야. 내 속에 있는 옛 아담이 새록새록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거야. 정말 괴롭더군. 그러나 나는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질투로 나를 시험하는 옛 아담을 발길로 걷어차 버릴 수 있었지. 그리고는 내 친구에 대한 내 생각이 옳든지 어떻든지 간에 나의 생각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을 했어. 그건 내 교회가 캠벨 모간 환영회를 열어주기로 한 거야. 그래서 성대하게 환영회를 열어주었지. 그러니까 그 친구 정말 좋아하더군. 우리 교인들도 놀라는 눈치였어. 내 기분도 훨씬 가벼워지고 좋더군. 그리고 주일 저녁 설교를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때면 나는 몰간의 교회로 달려가서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을 낙으로 삼게 됐지. 몰간의 설교야 말로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설교라면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 그러나 목사의 신분과 입장에서만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던 내가 마음을 비우고 신자의 자세로 몰간의 설교를 들으니까 아주 겸손해지게 되더군. 그러니까 은혜도 받고 몰간에 대한 내 마음도 편해지고 이건 일거양득이더라 말이야. 그런데 교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존경까지 하더군. 그런데 주님의 사랑의 은혜는 정말 놀랍더군. 내가 우리 교회를 비우는 날은 천부적인 설교자 스펄젼(Charles Spurgeon) 목사가 내 대신 설교를 하지 뭔가. 스펄젼과 몰간 그 두 사람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들인가. 글쎄 몰간 교회만 사람들이 넘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우리 교회도 사람들로 가득 차는 거야! 참 놀라울 일이지 않은가! 우리 세 사람 다 득을 보게 되었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무엇보다도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말씀뿐이더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라고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는 현실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간구이다. 시험과 유혹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원인은 소극적인 것인데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으로 생기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욕심에 끌려 시험받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말씀하는 불행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둘째 원인은 적극적인 것인데 우리를 파멸하려는 사탄으로 생기는 것이다. 사탄은 죄의 원조이다. 사탄이 이브를 유혹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인간이 죄를 짓게 한 자였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하고 말씀한다. 사탄은 마귀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사탄이라는 명칭은 ‘대적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아 물러가라”(마 4:10)대놓고 말씀하신다. 욥의 이야기는 사탄이 하나님의 제한과 통제의 범위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욥 1:12;2:6). 마귀들은 영원한 사슬에 매여 있다(유 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마귀들에게 너끈히 대항할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때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대적하라고 권면한다(엡 6:16). 이제 믿음은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서 마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사도 바울은 이어서 가르쳐준다. 그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물리치셨다(마 4:1-11). 사탄과 벌이는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믿음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이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칼이다. 이 두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훈련방법은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으로 확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과 악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 【핵·심·개·념·정·리】 1) 시험과 유혹의 원인은 무엇이 있는가? 첫째 원인은 소극적인 것인데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으로 생기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적극적인 것인데 우리를 파멸하려는 사탄으로 생기는 것이다. 2) 사탄에 대항해 신자는 무엇으로 싸워야 하는가? 사탄과 벌이는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믿음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이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칼이다. 3) 사탄을 대항하는 두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훈련방법은 무엇인가?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으로 확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과 악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2023-12-27
    • G.CULTURE
    • G.BOOK
    2023-12-27
  • 성경이 삶이 되다_ 구주 오심, 낮아짐의 극치
    주신 말씀_ 누가복음 2:8~11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태초에 ‘빛이 있으라’(창 1:2) 말씀하심으로 빛을 만드신 하나님은 이어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만드셨다. 그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없다고 솔로몬은 고백하였다(왕상 8:27). 그 높으신 하나님이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을 사람들은 ‘성탄절’이라고 부른다. 이 성육신 사건이야말로 ‘낮아짐의 극치’이다. 겸손의 끝인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하여 피조물은 감히 그분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의문조차 가질 수 없다. 그만큼 하나님은 높고도 높으신 시작과 끝이 없으신 그 지혜가 무궁 그 자체이신 오직 ‘말씀’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극한의 낮아지심에 대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요 1:14)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고요한 밤중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돌보는 외로운 목동들에게 먼저 ‘주의 영광을 두루 비춰 주셨다’(9절). 오늘 밤에도 춥고 외롭고 가난하고 병들고 낮고 착한 이들에게 영광이 먼저 비춰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인 사람들은 이 밤에 ‘지체 없이’ 베들레헴으로 간다. 그리고 먼저 경배하리라! 이제부터 그 사람들은 결코 ‘낮은 자’가 아니다! 아멘. 2023-12-24
    • G.QT
    • G.QT
    2023-12-24
  • 오정호 총회장의 열린 총회
    인문고전을 읽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보통 보이는 것(sight)에 주목한다. 그러나 뛰어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insight)에 주목한다. 통찰력을 의미하는 “insight”는 “sight”에 “i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통찰력이란 보이는 것보다 더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일반 총회원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총회와 총신으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것(insight)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13년 제98회 총회에서 한기총과 행정보류를 선언하였고 2014년 제99회 총회 넷째 날인 9월 25일 오전 회무에서 총대들은 한기총을 탈퇴하자고 결의했다. 당시 정치부장 오정호 목사는 힘있게 주장했다. “한기총은 이단의 온상이니 탈퇴해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1998년 새해 첫 공식 행사로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1930년 8월 12일 ~ )를 만났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 총수도 아닌 1992년 영란은행을 무너트린 외환 투기꾼을 만나야 했던 까닭은 국제 금융시장에 대한 그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1997년 말에 발발한 외환 위기 사태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급히 구제금융을 빌려야 하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 금융계 큰손들을 초청해 한국에 대한 투자와 외환 위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는데 바로 그 첫 번째 인물이 조지 소로스였다. 1930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소로스는 어린 시절 독일군과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시가전을 목격하며 컸다. 공습이 잦고 전기가 끊기고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전쟁 통에 그는 변호사였던 아버지를 도와 암시장에서 물건을 팔고 삼촌의 담배 장사도 거들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유대인임이 발각되면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는 야반 탈주를 감행해 런던으로 탈출했다. 런던에서 접시 닦기, 페인트공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철도 짐꾼으로 일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9년간의 영국 생활은 배고픔과 고난의 나날이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런 어려운 시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 에라스뮈스, 홉스 같은 철학자의 책들을 온 마음으로 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49년 수영장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읽은 책이 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Sir Karl Raimund Popper, CH, FRS, 1902년 7월 28일 ~ 1994년 9월 17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 출판된 두 권짜리 정치철학 책이다. 원래 포퍼는 이 책을 미국에서 발표하려 했으나 마땅한 출판사를 찾지 못해 결국 1945년 영국 런던에서 라우틀리지(Routledge) 출판사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 책이 발표되면서 무명 학자에 불과했던 포퍼가 학계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 책은 역사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열린 사회'를 옹호한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철학자 칼 포퍼 (Karl Raimund Popper)는 1902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0대 시절 마르크시즘에 잠깐 빠졌다. 마르크시즘의 덫에서 빠져나와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철학, 음악 등을 전공하였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계 1차,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 속에서, 칼 포퍼는 생계를 위해 교육대학에 들어가고 졸업 후 초등학교 교사직과 중등학교 교사직을 받는다. 2차 대전이 터지고 그는 나치의 억압을 피해 유럽에서 뉴질랜드로 이주해 철학을 가르친다. 전쟁이 끝난 후 런던정경대학교 교수로 초대되어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태생의 영국 철학자라고 불린다 포퍼는 그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두 권 가운데 첫 번째 책, '플라톤의 마술'에서 소크라테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며 대학의 원형인 고등 교육 기관 ‘아카데메이아’의 창시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7년 ~ 기원전 347년)의 정치철학을 비판한다. 플라톤은 다양한 서양 학문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사상가, 객관적 관념론(objective idealism)의 창시자였다. 당시 철학자들은 플라톤의 위대함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플라톤의 정치철학이 순진하고 무해한 것이라고 믿었다. 포퍼는 이러한 믿음에 반대하며 플라톤의 정치철학에는 사기와 폭력, 인종차별, 우생학 등 끔찍한 전체주의자의 악몽이 내재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포퍼는 플라톤이 사회 변화와 사회 불만에 대해 행한 분석에 대해서는 극찬했지만, 플라톤의 해결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는 포퍼가 아테네 민주정을 '열린 사회'를 향한 진통이라고 생각한 것과 연관된다. 포퍼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처럼 자유로운 세계관과 함께 탄생할 변화를 두려워하여 자신의 역사주의적 시각을 고수한 것이다. 포퍼는 또한 플라톤이 스스로 위대한 철인 통치자가 되고자 했다고 주장하면서 플라톤을 자기 자만심의 희생자로 간주하였다. 두 번째 책, '예언의 높은 물결: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그 여파'에서는 포퍼의 비판이 헤겔과 마르크스를 향한다. 포퍼는 헤겔과 마르크스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후손으로 생각하였고 이들이 20세기 전체주의의 뿌리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책은 소로스를 충격에 빠트릴 만큼 날카로운 통찰로 가득했다. 그가 입학한 런던정경대학에 세계적 석학 칼 포퍼(Karl Popper) 교수가 있었다. 이 유명한 유대인 철학 교수가 소로스의 논문 지도교수였다. 포퍼 교수는 반전체주의, 반마르크스 성향의 우익 사상가이자 양자역학 등 물리학을 철학적 분석 틀로 즐겨 사용했던 ‘과학 철학자’였다. 칼 포퍼의 사상은 소로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칼 포퍼는 “영원히 올바른 것은 없다”라며 모든 기존 관념을 거부했다. 그에게 진리란 이성에 의해 비판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의 사상은 ‘모든 사상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 사회(Open Society)야말로 이상적인 사회다’로 요약된다. 포퍼에 따르면 열린 사회와 반대편에 있는 것이 전제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다. 교회여 일어나라 위원회(위원장 고석찬 목사)가 ‘한국교회 목회자여 일어나라’를 주제로 원데이(One Day) 송년 말씀 축제를 12월 18일 새로남교회 글로리홀에서 개최했다. 전국에서 모인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한 해를 돌아보고 그 말씀으로 새해를 열어가기를 소망했다. 총회장 오정호 목사는 ‘바벨론 강가에서 울다’라는 제목의 개회 예배 설교에서 외쳤다. “조국을 잃고 바벨론 강가에서 울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교회와 노회, 총회를 가슴에 품고 울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고 학연과 지연에 매이고 금권에 휘둘린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땅에 매여 살다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정호 총회장의 이 외침은 “영원히 올바른 것은 없다”라며 모든 기존 관념을 거부했던 칼 포퍼의 열린 사회(Open Society)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포퍼에게 진리란 이성에 의해 비판될 수 있기에 모든 사상은 불확실하고 인간은 반드시 잘못을 저지른다. 그러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 사회(Open Society)가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렇듯 오정호 총회장도 우리가 지향하는 사상도 성경에 의해 비판받을 수 있기에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수정해 가는 열린 총회(Open General Assembly)를 지향하기를 바란다. “목회자의 자산은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있다. 우리가 말씀으로 살면 주님께서 길을 내신다”는 그의 외침의 실천을 통해 혼탁한 교계에 휩쓸리지 말고 총회와 총신이 성경의 칼빈주의 토대 위에서 바르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7-39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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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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