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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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교회 서초 새 성전 입당
    세계를 향해 두 팔 벌린 서초 새 성전 입당 서초새예배당의 건립목표 사랑의교회 5대 사역비전의 구현 GLOVE로 요약되는 G(Growing in Truth, 제자공동체) L(Loving Family, 생명공동체) O(Obeying God, 예배공동체) V(Volunteering in Christian Life, 섬김공동체) E(Evangelizing the World, 증인공동체) 1971년 지금의 숭실대 앞으로 돌아가 보자. 숭실대 정문을 지나 사당동 쪽 언덕을 넘어서면 철거민들이 자리 잡은 초라한 골짜기에 총회신학교가 있었다. 내부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신학교 건물 지하에는 전깃불도 없는 기숙사가 있고 지하의 식당은 울퉁불퉁 정리되지 않은 운동장을 면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학연구원 전도사들보다 머리가 길고 황색 가방을 든 옥한흠 전도사가 운동장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총신 신학연구원 재학시절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100명이었던 주일학교를 500명까지 성장시켰다. 그 후 1970년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사역자로 부임한 그는 인생의 분수령이 된 대학부를 맡았다. 그는 부임한 지 3년 만에 서울에서 최초로 대학부 학생 2백 명을 모아놓았다. 그는 1972년 34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수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2년 성도교회를 담임했던 김희보 목사가 총신대학의 학장으로 떠난 후 김성환 목사가 그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시 총신대 1년생으로 성도교회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면서 틈틈이 대학부를 기웃거렸다. 서울의 명문대 남녀 학생들로 그득한 교육관 2층의 대학부 집회실은 늘 그득하고 옥한흠 전도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대학생들은 진정 옥한흠 전도사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뜨거웠고 밝았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모태 옥 목사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는 선교단체에는 있지만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대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유학, 제자훈련의 신학적 검증의 길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격적 체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옥 목사는 1975년 미국의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1977년 5월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강남은평교회 개척과 사랑의교회로의 변경 옥한흠 목사는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짜리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말씀 안에 내포된 십자가 의미를 좋아했던 그는 ‘사랑’이란 단어에 ‘의’라는 소유격을 붙여 그만의 목회철학을 드러냈다. 그가 인도하는 예배의 찬양과 말씀을 교회가 세든 건물 밑에서 구두를 닦고 고치는 사람이 듣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사랑의교회에서 시작한 첫 제자반은 김영순 사모 혼자만 남고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여자 제자반은 영적으로 큰 변화를 맛보았다. 옥 목사는 교회 밖의 모든 모임이나 집회 요청을 거절하고 제자훈련에 철저히 집중했다. 여자 제자반이 성공하자, 1979년 남자 제자반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옥한흠 목사는 구역장을 순장, 구역예배를 다락방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소그룹 리더인 순장은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2년을 마친 후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설교에 생명을 걸었고, 주기도문송, 세례자 간증을 활용하여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복음을 체험하도록했다. 옥한흠 목사의 복음적 설교와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순장들의 전도로 교인이 500여 명으로 증가하자 교회건축을 결의하고, 1985년 1월,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해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소음을 없애기 위해 카타콤처럼 지하로 예배실을 만든 점과 건축비가 모자라 가장 흠이 많은 불량품 적벽돌로 지은 것이 오히려 경건한 운치를 자아냈다. 십자가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강대상 앞에 붙였다. 옥한흠 목사 조기 은퇴 발표 2001년 7월 출석교인 20000명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옥한흠 목사는 ‘65세 은퇴’를 발표한 후 후임자 선정 작업을 벌여왔다. 그는 그 배경을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교회에 젊음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어떻게 하면 사랑의교회가 늙지 않고 다음 세대에도 활기와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한때 융성했던 교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는 적절한 때 리더십을 교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후임을 맡게 되는 오정현 목사와의 인연에 대해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밝혔다. “20여년 전 오정현 목사가 이끌던 내수동 교회 대학부를 제가 지도한 이래 긴밀한 선후배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저와 목회 철학을 공유하고 있고,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개척해서 15년 만에 미주 최대의 한인 교회로 만든 오 목사의 리더십이 사랑의교회를 계속 활기 넘치는 교회로 만들 것으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는 약 4000개의 한국인들이 세운 이민 교회가 있고, 그중 3000여 개가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국내의 개신교계보다 더한 열기를 보이고 있는 미국 한인교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부근에 위치한 남가주사랑의교회이다. 지난 1988년 피아노가게 연습실을 빌려 12명의 신도와 함께 교회를 시작, 15년 만에 출석 교인 7000명의 대형 교회로 키운 사람은 오정현(47) 목사이다. 오정현 목사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82년, 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으로였다. 도미(渡美)한 그는 미시간의 칼빈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87년 말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세웠다. 당초부터 미국에서 목회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민 교회에도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남가주사랑의교회가 짧은 기간에 미국의 100대 교회에 들어갈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신도와 이민 2세 교육에 기울인 남다른 열성이 밑받침이 됐다. 특히 오정현 목사는 예배의 열정을 살리기 위해 찬양을 잘 활용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찬양 테이프를 500회 이상 듣고 또 들어 테이프가 풀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 목사는 신자들을 집중적인 장기 교육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본질과 크리스찬의 바람직한 삶에 눈뜨게 하는 ‘제자 훈련’과 연말연초에 40일 동안 실시하는 ‘새벽부흥회’를 통해 지성과 영성을 함께 갖추도록 인도했다. 또 남가주사랑의교회의 신자는 새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70%나 되고 국내 교회들에 비해 남자의 참여 비율이 훨씬 높은 것이 특징이다. 옥한흠 목사의 뒤를 잇기 위해 2003년 8월 중순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사임하고 귀국하는 오정현 목사는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 교회와 서양 교회의 강점을 결합하고,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꿈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정현 목사를 통한 부흥 옥한흠 목사의 기대와 믿음이 이루어져 1978년 9명의 성도로 개척한 사랑의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느덧 등록교인 99,000여 명에 매 주일 45,000여 명이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공동체가 되었다. 기존 강남예배당에서는 ‘소망관’ 이라는 별도의 건물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 지상 4층으로 뿔뿔이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출입구에 위치한 2개의 좁은 계단과 2대의 엘리베이터로 겨우 겨우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주변의 좁은 도로 역시 혼잡했다. 장년은 강남예배당 본당의 6부 예배에 16군데나 흩어져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사랑의교회는 1978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목회철학을 실천하는데 전심전력해 왔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의교회가 드린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총을 허락해 주셨다. 넘치도록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어떻게 해야 사랑의교회가 이 시대 앞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 기도하는 가운데, 공간부족이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새 시대 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새 시대 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새예배당 건축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서초동 새 예배당 완성 사랑의교회는 서울 서초동에 3년 5개월만에 새 예배당 건축을 완료하고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오정현 목사는 "새 예배당 입당을 위한 감사의 열쇠"란 제목의 설교에서 "오늘부터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의식의 이동까지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전환을 경험하게 되리라 믿는다. 3만여명의 성도들이 눈물의 헌금으로 예배당을 짓게 돼 감격스럽다. 수많은 고비들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 입당하는 것 자체가 새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더 큰 감사가 있다. 영혼의 감사를 통해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자"고 강조했다. 사랑의교회 예배당과 이화여대 캠퍼스 2010년 6월 건축을 시작해 3년 5개월만에 완공된 사랑의교회 새 예배당은 지하 8층부터 지상 14층까지 연면적 6만 7천여 제곱미터㎡ 약 1만 9천 7백여평이다. 참고로 2010년 통계로 이화여대는 15개 대학원 및 11개 단과대학(17개 학부, 17개 학과)이 설치되어 있으며, 재학생은 21,200여 명, 전임교원은 913명, 직원은 370여 명이다. 이화여대의 많은 건물을 제외하고 이화여대의 부속건물 가운데 하나인 이화여대캠퍼스센터ECC는 6층짜리 건물 연면적 약 7만㎡ 약 2만 3백여평이다. 그런데 사랑의교회 교인 4만5천여명이 예배드리고 교육받고 교제와 나눔의 봉사를 위한 전체 건물 크기가 북측 미션센터 8층(사역공간)과 남측 드림센터 14층(교육공간) 등 지상 2개동 건물과 지하 예배공간(워십센터)을 다 합한 연면적이 6만 7천여 제곱미터㎡ 1만 9천 7백여평이다. 그런데 학생과 교수와 직원을 다 합쳐 2만 3천여명의 이화여대의 부속건물 하나의 연면적이 약 7만㎡ 약 2만 3백여평이다. 2만 3천명의 교육을 위한 대학교의 여러 건물이 충분히 있음에도 또 지은 부속 건물 하나의 크기가 4만5천명을 위한 사랑의교회보다 3천 제곱미터㎡나 크다. 그런데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이화여대의 ‘ECC(Ewha Campus Complex)’에 대한 사회 여론은 칭찬 일색이다. 왜 이화여대는 다른 건물도 많은데 또 부속 건물을 지어 돈을 낭비한다든지 차라리 그 건물의 소요 경비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았는지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교회 예배당의 주요 기능은 말 그대로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한 공간의 장이지 구빈소가 아니다. 대학도 큰 대학이 있고 작은 대학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각기 능력과 형편대로 큰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작은 교회가 있을 수 있다. 지상 14층과 8층 규모의 쌍탑이 서로 양팔을 마주잡고 당기면서 중앙에 서 있는 벽돌 시계탑을 포옹하는 듯한 이미지로 설계한 김천행 집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은 디자인적으로는 성도를 안으시고, 이웃을 안으시고, 세상을 안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을 디자인개념으로 살렸고 중앙광장에서는 세계지도를 보며 젊은이들이 세계를 품고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33개의 참을 설치하여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하도록 했다. 새 예배당 겉면은 유리로 둘렀다. 대법원?서초경찰서?서울고등검찰청 등 각진 벽돌 건물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띈다. 유리로 장식한 지상 공간은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사용한다. 교회 건축위원회 관계자는 아이들이 높은 곳에서 사회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호연지기를 기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리를 택했다고 말했다. 밖에서도 안이 잘 보이는 소재로 교회가 사회와 소통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서초새예배당의 건립목표 사랑의교회 5대 사역비전의 구현 5대 사역비전은 GLOVE로 요약되는 G(Growing in Truth, 제자공동체), L(Loving Family, 생명공동체), O(Obeying God, 예배공동체), V(Volunteering in Christian Life, 섬김공동체), (Evangelizing the World, 증인공동체)를 뜻한다. 이를 위해 설계의 방향을 소통과 개방(개방성), 효율적인 공간창출(효율성), 시대요구에 부응하는 건물(첨단성), 교회다운 건물(경건성), 아름다운 건물(디자인)로 정하였다. 사랑의교회 새예배당 현장에서 보이는 광경은 마치 청각으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유리건물의 쌍탑은 오케스트라이며 벽돌시계탑은 마치 아름답고 역동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처럼 느껴진다. 시민들이 모이는 중앙광장으로부터 6,500석의 지하교회 대공간까지 빛이 비취게 하는 광장 유리바닥과 광장바닥에 새겨진 세계지도, 이들과 어우러진 광장 조경, 높은 유리벽의 쌍탑 건물이 광장을 감싸는 것을 통해 사랑의교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교회 출석교인은 4만 5,000명이다. 1만 5,000명 이상 되는 교회가 새 예배당으로 이전 한 예를 찾을 수 없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어느 공간 하나도 그냥 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해 이룬 결과물이다. 6,500명을 수용하는 본당은 가로 90m, 세로 45m로 장충체육관 크기다. 하지만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어 어느 좌석에서도 시선이 차단되지 않는다. 또 모든 좌석에서 강대상까지 40m 이내여서 가시거리가 확보되고, 고도의 집약된 차음과 음향장치가 가능하며, 최첨단 고효율 설비로 장소에 따라 온도차를 느끼지 못 하도록 해 쾌적함을 극대화시켰다. 광덕트(sky light)에 의한 자연채광도 도입했다. 강남예배당보다 크기는 3배 이상 크지만 더 아늑하고 일체감을 갖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양(면적)보다 질(성능과 쾌적성)적 성능을 확보 양(면적)보다 질(성능과 쾌적성)적 성능을 확보해 같은 면적이지만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의 경우 실안에 기둥이 없는 무주공간으로 처리해 실사용의 자유로움을 주었다. 또 각 실의 사용용도에 적합한 고도의 설비시설(난방, 냉방, 환기, 통신 등)을 집중화해 제공, 쾌적한 공간이 되게 함으로써 현재보다 더 많은 인원이 수용되도록 했다. 냉난방 기구를 천정에 부착해 바닥사용 면적을 최대한 높이는 방법도 동원됐다. 본당이 지하에 있고 많은 인원이 수용되므로 비상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재해시 단시간에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본당을 피난복도로 둘러싸도록 해 어떤 방향으로도 피난이 용이하도록 했다. 화재시 10분 이내에 본당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계단과 출입문을 마련했다. 또한 스프링클러 등 법적 소방기준 이상으로 안전하게 시설을 구비했고 거의 대부분의 자재를 불연재로 하였다. 새예배당은 소통과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유리건물(All Glass)이다. 유리건물은 빛과 조명에 의한 연출이 자유롭고 추후 첨단 신소재가 개발될 경우 변화에 가장 우수한 건물이 될 수 있다. 건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외관 장식만을 위해 설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초새예배당은 장식만을 위한 설치를 일절 배제했다. 예수님의 손을 형상화하기 위해 필요 없는 수평루버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서향과 동향 햇빛을 일부 조절해 여름철 난방부하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기능상 필요한 루버를 이용, 예수님의 안으심을 표현했다. 서초예배당은 타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하연면적보다 지상연면적이 훨씬 크지만 서초 새예배당은 지상면적이 40%, 지하면적은 60%를 차지하는 특수한 건축물이다. 또한, 지하에 위치한 선큰가든은 지상에서부터 지하5층까지 약 30m의 수직벽이 거친 자연석으로 마감돼 자연친화적 미와 안정감을 주고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임을 고백하게 한다. 이제 서초 새예배당은 국제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이곳을 통해 수많은 생명들이 예수님 품으로 올 것을 확신하며 외부의 대소규모 행사에도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은 11월 30일 서초구 반포대로 121에 마련한 새 예배당에서 입당감사예배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섬김사역과 세계선교, 복음적 통일운동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서초역 사거리 대법원 맞은편에 위치한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은 6782㎡(2051평)의 대지에 지하 7층, 남쪽 드림센터 14층 북쪽 미션센터 8층 규모로 건축됐다. 한국 교회를 위한 공간 사랑의교회는 서초예배당을 교회만의 자산으로 묶어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사역과 연구와 모임의 공간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교단의 중요한 행사 개최는 물론, 교계 엔지오(NGO) 단체들의 세미나와 모임 공간으로도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서울 중심에 위치해 있고 교통도 편리해 여러 단체들이 공간사용을 요청하고 있다. 오 목사는 “앞으로 사랑의교회 사역은 예수님만 기쁘게 하고, 주님만 두려워하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도록 노력하겠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전진하자. 주님을 찬양한다”고 말했다. 강단에 오른 오정현 목사는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HEART’비전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서의 의식의 전환을 해야한다”며,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령공동체를 이루자"고 선포했다. 2008년 12월 23일 옥한흠 목사는 다음과 같은 성탄 메시지를 전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 이번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 속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을 알면 세상의 어떠한 형편도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가진 못한다.” 이제 탄탄한 섬김의 전진 기지를 마련한 오정현 목사는 옥한흠 목사의 뒤를 이어 제자 훈련의 국제화와 복음적 평화통일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 뛸 것이다. 2013-12-23
    • G.QT
    2013-12-23
  • 걷기와 달리기 _ 당뇨병의 특효약 근육강화
    수련의 시절 당뇨병 치료의 명의로 소문나신 교수님의 진료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 때만해도 대형병원이 많지 않기는 했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선생님을 뵙기 위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진료실 앞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교수님 옆에서 환자들 혈압을 재면서 틈틈이 교수님의 비방(秘方)이 무엇일까 엿보았는데, 쓰시는 약은 일반적인 당뇨약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기야 비방이라는 것이 실제 있겠는가. 약이야 거기서 거기지.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교수님께서 환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환자들의 종아리를 일일이 주물러 보시는 것이었다. 여자 환자들의 다리를 조물조물 주무르실 때는 약간 민망한 감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중요한 진료의 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환자의 다리 근육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근육은 혈당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경제 활동에 있어 은행 예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밥을 먹고 혈액으로 흡수된 포도당은 바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분의 포도당은 근육에 흡수되어 있다가 나중에 활동 시 필요하면 혈액으로 방출되어 사용된다. 근육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가 돈을 벌어 예금하지 않고 바로바로 쓰는 것과 같다. 있을 때 흥청망청 쓰거나 버리다가 정작 필요할 때 돈이 없어 쩔쩔 매는 상황인 것이다. 근육량이 적은 당뇨 환자는 많이 먹지 않아도 식사 후 혈당이 바로 확 올라가고 높은 혈당이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반대로 식사를 거르거나 활동을 좀 과하게하면 당뇨약의 효과로 인해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는 저혈당 증세도 자주 올 수 있다. 헬스클럽 같은 곳에 가 보면 체성분 분석이란 것을 해준다. 내 몸에 있는 근육과 지방량을 분석해서 좀 더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일일이 환자가 방문할 때마다 체성분 분석을 하기는 어려운데, 쉽게 몸의 근육량을 측정해 보는 방법이 종아리를 만져 보는 것이다. 우리 몸 근육의 많은 부분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같은 하체에 많이 몰려있다. 피부가 얇고 지방이 적은 종아리 부분을 만져 보면 대략적인 체 근육량을 알아볼 수 있다. 그냥 운동 많이 하라고 말로만 하지 않고, 일일이 종아리를 만져 보시면서 “왜 이렇게 약해. 운동을 많이 안했나보네. 많이 걸어요.”하시던 선생님의 진료 방식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환자에게 운동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 걷는 것만으로도 혈당을 낮출 수 있다.필자의 환자분 중 60대 후반 여성분이 있었다. 당뇨병에 걸린 지 20년이 되었고, 여러 약제를 사용해 보았지만 몇 달 이상 혈당이 적절 수준으로 조절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췌장에서 인슐린을 만드는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고 보고 인슐린 주사 요법을 권유한다. 하지만 환자 분은 완고하게 인슐린 치료를 거부하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통해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갑자기 생활 습관을 현저하게 개선시켜서 혈당을 떨어뜨리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부 못하던 학생이 갑자기 뜻한 바가 있어 공부에 열중해 성적이 비약적으로 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난 후 그 여자 환자분의 혈당은 식전, 식후 평균 100mg/dl 정도씩 떨어졌고 적절 수준의 혈당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비결을 물어보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한 두 시간씩 근처 학교 운동장을 돌았어요. 직장 다녀와서 피곤해 쓰러질 것 같아도 걸었지요. 지난번 태풍 왔을 때는 우산 쓰고 죽기 살기로 걸었구요. 무릎 관절이 아파서 운동하고 나면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도 계속 걷다보니 적응이 되었어요.” 그 분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먹는 약으로 혈당 잘 조절되고 있고 복용하는 약의 개수도 줄였다. 종아리 근육은 나날이 탐스럽게 불어나고 단단해졌다. TV를 보다보면 인기 있는 걸그룹들의 늘씬한 다리를 보고 감탄한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그런 다리를 보면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필자는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투석 치료를 받는 환자분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혈당 조절이 안 되는 당뇨 환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래서인지 어르신들 종아리를 주물러 보고 조선무 같은 탕탕한 알통이 잡히면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당뇨병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어서 걸어보자. 혈당이 신통방통하게 떨어지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지속적으로 산소 마시는 달리기 신진대사 활성화, 혈압 떨어뜨려그러나 걷기를 더 오래, 자주 하면 달리기와 같은 효과 내지 않을까?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걷기' 꾸준히 걷고, 시간 나면 뛰어라 우리는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운동하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달리기가 건강에 최고로 좋은 운동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지속적으로 산소를 들이마시며 하는 운동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나서부터다. 역기를 드는 것처럼 단박에 용을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강도는 낮지만 산소를 계속 소모하는 운동이 신진대사를 활성화해 과잉 축적된 칼로리를 태우고 혈압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달리라는 권고가 나왔다. 의학은 항상 과학적 규범을 만들고 이에 따르게 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 번에 최소 30분 이상 진땀나게 뛰라는 충고가 사람들 귀에 인이 박였다. 하지만 미국 하버드 의대 공중보건 분야의 일부 연구진은 달리기가 현대인에게 최적(最適)의 건강 권고안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고는 지난 30여 년간 걷기와 달리기를 놓고 어느 게 더 좋은지 논쟁을 벌여 왔다. 달리기가 심장 건강에 좋은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지만 걷기만으로도 달리기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느냐라는 궁금증에서 논쟁은 출발한다. 운동 효과 산출은 운동 강도와 지속 시간, 빈도에 의해 결정된다. 걷기가 달리기의 세기를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달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걷고, 더 자주 걷는다면 달리기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규모 분석이 이뤄졌다. 하버드대에는 하버드 졸업생 10만여명과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 10만여명의 건강 실험 풀(pool)이 있다. 일정 그룹을 반으로 나눠 한쪽에만 특정 조건을 주어 몇 년간 살아가게 한 후 그렇지 않은 그룹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건강에 좋은지를 알아내는 연구 시스템이다. 하버드 졸업생 1만200여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이뤄진 연구에서 일주일에 9마일, 즉 약 1만4500m를 걸은 사람은 주로 앉아서 생활한 사람보다 사망률이 22%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달리기의 효과와 유사했다. 논쟁에는 영국 런던대학이 지난 27년간 나온 걷기 효과 논문 4295개를 분석한 연구도 인용됐다. 46만명을 11년 동안 관찰하니 많이 걸은 사람에게서 심혈관 질병 위험도가 31% 줄고, 사망률은 32% 감소했다. 그들은 시속 3~4㎞ 속도로 일주일에 약 9000m를 걸었다. 중년에 평상시 생활을 반복하면 1년에 약 1㎏씩 체중이 늘어난다. 그런데 하루 걸은 시간이 총 30분이 넘으면 1년에 0.5㎏이 줄어든다는 연구도 나왔다. 이런 결과들이 체질마다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하버드대는 쌍둥이에 대한 연구를 분석했다. 1만6000명의 쌍둥이를 대상으로 20년간 한 달에 여섯 번, 한 번에 30분 이상 걷게 했더니 거의 걷지 않고 산 쌍둥이 형제보다 사망률이 56%나 줄었다. 걷기 효과는 유전적 체질이 아니라 습관에 있다는 얘기였다. 달리기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최대 심박 수의 약 75%에 이르러야 최적 운동 효과를 낸다. 1분당 최대 심박 수는 통상 220회에서 자기 나이를 뺀 값이다. 나이가 50세면 170회가 최대 심박 수다. 그 정도까지 달리려면 워밍 업(warming-up) 시간이 필요하다. 속도를 시속 7㎞ 이상 내어야 하니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운동화도 신어야 한다. 장소에 제한도 생긴다. 뛰고 나면 땀이 나니 쿨 다운(cool-down)이 필요하고 샤워도 해야 한다. 한 번에 30분을 달리려면 최소 1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권고안을 지키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달리기를 하라는 권고안은 많은 현대인에게 죄의식을 심어줬다. 또 달릴 때 한쪽 무릎에 실리는 하중은 체중의 3배다. 이 때문에 운동 부상이 발생할 확률이 걷기보다 10~20배 높게 나온다. 반면 걷기는 참으로 편한 운동이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걸을 시간만큼만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별도의 복장도 필요 없다. 달리는 시간보다 1.5배에서 2배 더 오래 걸으면 운동 효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활을 감안한 가장 적합한 건강 교시(敎示)안은 걷기라는 것이 하버드대의 의견이다. 요즘 현대인의 삶은 포인트 생활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포인트, 피자 한 판을 시켜도 쿠폰이 붙는다. 신용카드와 항공여행은 말할 것도 없다. 걷기에도 포인트가 있다. 하루 10분씩 세 번 걸으면 30분 효과에 버금간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 모여 누적 효과를 내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미러 뉴론(mirror neuron·거울신경계)'이라는 것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는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따라서 한다. 술자리에서 옆 사람이 맥주잔을 들면 나도 모르게 잔을 들게 되는 배경이다. 당신이 걸으면 자녀도 걷고, 배우자도 걷는다. 심지어 애완견도 걷는다. 걷고, 시간이 나면 뛰어라. 당신의 신발이 유전자보다 당신의 수명을 결정하는 더 강력한 지표다. 내과전문의 강영석
    • G.QT
    2013-12-23
  • 위로의 아들 박형만 성경필사조각가
    내년 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 필사전시회를여는 위로의 아들 박형만 15년 선禪과 탁마琢磨를 수행한 불도이면서 아내의 권유로 어쩌다 들르던 교회에서 다메섹에서의 사울처럼 예수를 만난 건축가 박형만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삶의 기적이라고 강조한다. 못을 박은 십자가 조각과 나무판 성경 필사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을 전하는 박형만은 말한다. 내 조각은 스스로의 죄를 향한 못질이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과 위로이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성경공부를 하다 말씀에 취했다.그는 묵상한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다 천생 예술가이고 디자이너이니까 나무에 새길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2시간 고요한 새벽 맑은 정신일 때 오직 말씀을 나무판에 필사했다.완성품은 더 이상 글씨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 하나의 작품이었다. 더 나아가그에게 필사는 단순한 성경쓰기가 아니라 성경의 뜻을 시각적으로 정리하여 다듬어 보는 행위였다. 성경을 원문으로 보고 싶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다 모음이 없어 받침이 없는 전통 히브리어 글자체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나름의 히브리어 글자체를 개발했다. 박형만 필사 조각가는 기도 가운데 이스라엘 본토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토라 모세 오경을 전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2년반 동안 히브리어 토라를 가로 1.3m 세로 3.3m 나무에 새긴 필사 조각이 완성되어 내년 봄 예루살렘 나들이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필사조각가 박형만 010-9046-0946 후원계좌 / 농협 369-02-129114 2013-12-22
    • G.QT
    2013-12-22
  • 더굳뉴스 창간호 98회 총회
    제98회 총회가 수원과학대 라비돌리조트 신텍스컨벤션에서 9월 23일 오후 2시 개회 -장자총회의 원로와 총대 -특별위원회 위원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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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25
  • 교단의 조향장치와 제동장치는 정상인가
    주기철 목사와 조만식 장로를 배출한 산정현 교회의 김관선 목사는 이런 글을 썼다. 매우 오래된 일이지만 자동차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빨리 달리게 하는 장치도, 멋진 외관도 아닌 조향장치와 제동장치라는 것입니다. 조향장치란 자동차의 방향을 잡아주는 것이며 제동장치는 자동차를 정지시키는 기능을 합니다. 아무리 빨리 달리는 자동차라 할지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자동차가 가지 않는다면 큰일 납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자동차라 할지라도 자동차를 정지시켜야 할 때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흉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운전자가 아무리 핸들을 돌려도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거나 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는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러기에 조향장치와 제동장치를 자동차의 가장 중요한 장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장자 교단도 그렇지 않을까. 얼마나 힘이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는지 이런 것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거대한 교단의 방향을 잘 잡아야 될 것이다. 힘도 있고 교세도 뛰어난데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교단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어떤 교단보다 앞서가며 2만 교회를 향해 빠르게 잘 달린다 할지라도 멈춰야 할 순간 멈출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빨리 가는 교단은 그 속도만큼이나 더 잘못될 것이며 더욱이 멈출 능력조차 없다면 그 혼란과 뒷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제97회 총회 후 교단은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중에 혼란은 피했지만 논란은 여전한 총회선거법 개정은 바로 칼빈주의의 본산이고 장자인 교단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말들은 무성했지만 몸을 던져 거대한 교단의 제동장치 역할을 홀로 담당한 목사가 있었다. 그는 동평양노회 배광영 목사였다. 배광영 목사와 함께 선거규정효력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던 정중헌 목사는 7월 15일 소를 취하했다.그는 서울중앙법원에 총회선거규정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선거법 개정의 가장 큰 쟁점은 후보자 자격 중 총회장과 목사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세례교인 500명, 기타 임원 세례교인 300명 이상 교회를 시무해야 한다는 조항 삭제 여부다. 또한 총회임원 상비부장 총회산하 기관장을 역임한 자로 경력을 강화하여 논쟁이 첨예하게 진행됐다. 선거법개정위원회(위원장:유병근 목사)는 총회 내 더 많은 인사가 임원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검증된 인사를 후보로 나서게 해야 한다며 이와 같은 조항을 신설하여 선거법을 개정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특정 후보를 염두에 둔 선거법 개정이라는 의혹이 짙었다. 게다가 지난 제97회 총회에서 세례교인수 항목을 결의하여 통과하였는데 시행도 하기 전에 회기 중에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배광영 목사(동평양노회)가 제기한 총회선거규정효력정지 가처분신청에 대한 심리가 7월 17일 오후 2시 20분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50부에서 열렸다. 이날 총회 측 변호사는 총회임원 입후보자 자격을 “세례교인 500명, 300명 이상 교회 시무자”로 한정하는 것은 총대들의 선거권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것이라고 변론했다. 동평양노회 배광영 목사가 제기한 총회선거규정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이 9월 총회에 앞서 각하됐다. 이로써 제98회 총회 임원선거는 총회선거법개정위원회(위원장:유병근 목사)의 개정안대로 실시하게 되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51부는 신청인 배광영 목사가 총대가 아님으로 가처분신청 적격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또한 설령 당사자가 적격자라 하더라도 총회 선거법 규정을 놓고 총회 내 다툼이 있지만 개정한 선거규정이 권한범위를 넘어섰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총회실행위원회에서 인준을 받아 공고가 되었기 때문에 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제98회 총회에서 개정된 선거법 인준을 받은 뒤, 선거를 실시하면 모든 것이 치유될 것으로 보인다며 각하취지를 설명했다. 교단의 행보에 제동을 건 배광영 목사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행보에 잠시나마 한 목사가 제동을 걸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교단에 제동장치를 시도해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광영 목사 개인의 용기와 인내는 희생적이고 귀감이 될 만한 일이었다. 나중에 10월 14일 개회되는 제173회 동평양노회 정기회에서 배광영 목사의 일이 논의되었다. 그 때 동평양노회 난곡제일교회 박보근 목사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된 일이지만 한 목사가 교단의 힘에 맞서 소송을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었다. 소송에는 고비용의 변호사와 저비용의 변호사의 문제도 곁들여 있었기 때문이다. 배광영 목사가 진다면 소송비 부담은 개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배광영 목사는 굴하지 않고 버티었다. 결과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어려운 가처분신청 각하였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리고 총회 현장에서의 선거 결과도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다. 선거법개정의 저의를 가진 측이 선거에서 참패했기 때문이다. 총회 총대들과 사람들이 소수를 제외하고 저마다 입을 모아 말했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 이적이 일어났다. 교단의 조향장치와 제어장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정상이었다. 2013-11-25
    • G.OPINION
    2013-11-25
  • 매력 있는 설교자 소강석 목사
    3M(맨손·맨몸·맨땅)으로 개척, 신자 3만을 끌어당긴 자석의 설교가 한국사회를 이끌어 갈 비전의 목회자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끄는 조용기 목사를 한신대 한국교회사 교수 연규홍 박사가 인터뷰하고 <조용기 성령의 힘>이라는 책(2011, 바이블리더스)을 펴냈다. 조용기 목사는 그 책 122쪽에서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목사마다 설교를 짓는 각자 방법이 있겠죠. 그러나 제가 제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력 있는 설교가로 새에덴 교회 소강석 목사님이 있어요. 그 양반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유행가도 막 불러댑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는 당황할 정도입니다. 설교 말씀 도중에 유행가를 부르지를 않나 하모니키를 꺼내서 불기도 하고 정신이 없을 정도예요. 그런데도 저는 그 설교를 끝까지 듣거든요. 그 설교에 매력이 있단 말이에요. 매력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학적으로 보면 영 아니다 싶어요. 그런데도 그 교회는 물론이고 그 분의 텔레비젼 설교 프로그램을 보는 아주 많은 성도들이 열심히 설교를 듣습니다. 그 이유는 소강석 목사님의 설교에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강석 목사에게는 ‘맨손, 맨몸, 맨땅’ 밖에 없어 3M 목회자’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맨발의 소명자’로 불렸던 그는 요즘 기독교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2008년 12월호 <시사저널> 지령 1000호 기념호에서 기독교 차세대 리더를 묻는 설문조사와 2009년에 ‘목회와 신학’이 창간 20주년 기념으로 ‘10년 후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목회자’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소강석 목사는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새에덴교회가 크게 성장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소강석 목사의 열정적인 설교와 독특한 예배분위기 때문이다. 소강석 목사는 ‘월간 문예사조’로 등단하여 시집을 5권을 출간한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2007 한국기독교출판문화대상, 2008 목양문화상을 수상했다. 설교 내용을 함축한 시와 수준급 노래실력으로 설교내용과 딱 맞는 찬송가를 직접 부르며 호소하는 감동적인 설교를 한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생각한다. “설교는 철저한 소통입니다. 저는 어릴 때 잠들기 전에 할머니와 어머니 누나한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어요. 할머니가 저한테 ‘나중에 이야기장사 할래?’라고 하셨죠. 동화와 위인전을 많이 읽었는데, 딱딱한 강해설교나 교리설교가 아니라 저는 부드러운 이야기설교를 했습니다. 초창기 때부터 성경을 감동적으로 구성하여 설교하면서 곁들여 그에 맞는 찬양도 불렀죠. 2-3년 전까지 내러티브 스피치가 대세였다면 요즘은 지금은 내러티브와 더불어 문학적 예술적 문화적 감각을 살린 아트 스피치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말을 몰랐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그걸 실천하고 있었더군요. 잘 짜인 드라마를 보거나 조용필의 열창을 들을 때면 목사도 저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연구를 많이 합니다.” 소강석 목사는 새에덴교회의 미래상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미국의 경영학자이자 작가인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앞으로 미국은 목회적 대형교회가 이끌어 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비영리단체의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아주 투명하고 거룩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존경을 받는 교회일 때 영향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시대를 주도해 나갈 것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의 본질은 영혼구원입니다. 목회적 대형교회로 성장하여 한국사회를 이끌어가고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가는 꿈과 비전이 있는 교회가 목표입니다. 본질은 변함이 없으나 상황은 변합니다. 본질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길 원합니다.” 2013-11-25
    • G.PEOPLE
    • G.PEOPLE
    2013-11-25
  • 설교의 기술 - 김영배
    설교를 하는 목사라면 설교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소설이나 시나리오에서 독자나 관객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충분히 만족시키는 짜임새 있는 플롯이 작품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설교 준비 과정을 플롯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일이란 아주 생소한 일이다. 특히 문학의 한 기법인 플롯을 설교에 자유롭게 구사하게 되기까지 도움을 받을 만한 마땅한 책이 없기 때문이다. 설교 역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려는 회중의 호기심과 기대감을 일으킬 수 있는 플롯을 상당히 필요로 하는 데도 말이다. 플롯이란 말은 한 조각의 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더 정확히는 설계도나 평면도 등을 가리키는 낱말의 용법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설계도에는 건물과 부속 건물과 통로와 주차장 등의 배치가 설계되어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소설이나 시나리오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사건의 배열이 곧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플롯은 사건과 사건을 결합시킴으로써 원인과 결과를 생성해낸다. 한 사건의 결과는 또 다른 사건을 발생시킨다. 이야기는 플롯을 지녀야만 결말에 도달한다. 즉 사건이 일어나게 해주는 장치가 바로 플롯이다. 회중은 이 과정을 통해 설교에 흥미를 갖는다. 그러면 좋은 플롯의 설교란 과연 무엇인가? 설교의 도입에 일어난 사건이 회중의 궁금증을 유발해 질문을 던지게 하고 클라이맥스를 거친 후 결말에 이르러 하나님 뜻이 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 좋은 플롯의 설교일 것이다. 햄릿의 막이 오르면 관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드라마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준다.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나면 관객은 복수를 하지만 햄릿도 죽는구나 라는 답을 얻게 된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작, 중간, 마지막의 올바른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을 설교의 준비와 구성에 적용해 보려고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설교는 선지자나 성직자의 연설이다. 설교는 성경과 신학과 도덕의 주제를 전한다. 설교는 주로 성경의 본문 안에서 신앙과 율법과 행동의 의미를 해설한다. 설교의 요소는 해석과 권면과 실제 적용을 포함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한 아주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와 보니 집에서 기르는 진돗개가 목에 뭔가 걸려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개를 동물병원에 맞기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조금 전 다녀온 동물병원의 수의사였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당장 집 밖으로 나가세요!”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깜짝 놀라 물었다. “”제 말대로 하시고 당장 옆집에 가 계세요. 곧 갈게요.“ 수의사는 아주머니의 질문에는 대답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놀랍고 궁금했지만 수의사가 시키는 대로 이웃집으로 갔다. 그런데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찰차 4대가 달려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집 앞에 섰다. 경찰들이 권총을 뽑아들고 차에서 내리더니 집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는 겁에 질린 채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곧 수의사가 도착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가 진돗개의 목구멍을 검사해보니 거기에 사람 손가락 두 개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그 개가 도둑을 놀라게 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은 곧 피 흘리는 손을 움켜쥐고 공포에 질린 채 옷장에 숨어 있던 도둑을 잡아냈다. 숨이 막힌 진돗개 이야기는 플롯의 순수한 표본이다. 장소와 시간을 설명해주는 주어진 환경과 인물묘사는 플롯보다 뒷전으로 밀려 있고 이야기는 세 부분으로 나누인다. 첫째 장면은 극적인 사건과 미스터리로 시작된다. 여자가 집에 돌아와서 진돗개가 숨이 막혀 있는 것을 발견할 때다. 여자는 개를 수의사에게 데리고 간다. 둘째 장면은 여자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면서 시작된다. 몹시 흥분한 수의사가 여자에게 집밖으로 나가라고 수리칠 때부터 위험의 요소가 느껴진다.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직감적으로 숨이 막힌 진돗개의 미스터리가 그 위험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모두들 추측해본다. 아주머니는 집 밖으로 나오면서 동시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온다. 셋째 장면은 경찰의 도착으로 시작된다. 경찰이 급하게 도착함으로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수의사가 도착한다. 수의사는 미스터리의 실체를 가장 먼저 확인한 사람이다. 경찰은 도둑을 잡음으로써 개의 목구멍에서 발견된 손가락의 임자를 찾아낸다. 아무도 이 이야기가 날조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숨이 막힌 진돗개라는 그럴싸한 사건의 단서로 시작되며, 수의사의 전화를 통해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피 흘리는 도둑의 소름끼치는 클라이맥스가 있기 때문이다. 구성은 이야기가 제공하는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발전한다. 시작, 중간, 마지막이라는 플롯의 세 대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아주머니라는 주인공과 도둑이라는 적대자가 등장하여 긴장과 갈등의 요소도 있다. 이와 같이 설교의 구성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한 플롯의 세 대목 시작, 중간, 마지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인공과 적대자가 있어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켜야 한다. 좋은 설교는 플롯과 등장인물을 통해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회중은 그 설교에 빨려들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축복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 설교에 더해지게 될 것이다. 2013-11-25
    • G.OPINION
    2013-11-25
  • 이승구 박사의 신학논단 - “살인 하지 말라”
    “살인 하지 말라” 제 육계명은 십계명 안의 많은 금령들과 같이 “-- 하지 말라”는 금령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결국 진정한 생명 신학과 생명 운동의 적극적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무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들이 강조하고 나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 진술과 운동의 근거가 여기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지 이 계명의 단순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더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 본 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 가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단순한 의미 일단 이 계명이 명령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straightforward).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거나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금령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기만 하면 그의 생명을 해하여도 이 금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찬동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금령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에 그 어떤 해를 가하는 것 모두를 이 금령이 금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모든 살인과 살인 교사, 그리고 자살과 사람들을 자살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금령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좀 깊은 의미 여기서 좀더 나아가 보십시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거나 빼앗지 않으면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요? 이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입법자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명령의 법의 정신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법을 내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밝히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마 5:23), 형제들과 화목하고 사화(私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24, 25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드러내주신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욕하거나 무시하는 그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분노의 대상, 욕의 대상, 비하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해야 할 상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들의 사회는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대립하고 욕하고 비하하는 관계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 사회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인간들은 서로가 화목하고, 용서하고 감싸 주고, 서로를 높이고 존중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는 관계를 가지여 한다는 것입니다. 욕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방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하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이런 입법자의 의도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명령의 더 적극적 의미 더 나아가서 “살인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저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 이에서 더 나아가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의 독자들은 언제나 이 명령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하지 않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명령의 적극적 함의를 생각해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유지되고, 더 나아가 증진되도록 하는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해를 가하지 않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를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창 4:9 참조). 자신과 형제의 생명이 보존되고, 더 좋게 되도록 힘쓰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질(quality of life)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미 이 모든 것의 기독교적 함의는 매우 분명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이 가장 온전한 상태에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우리 생명의 가장 온전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닌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보려는 모든 노력은 다 죄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맹목(盲目)인 채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만 몰두 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생명을 빼앗는 일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물리적 생명과 그 생명의 질에 대한 몰두가 어떻게 하면 죄이고, 사실은 진정한 생명을 앗아 가는 것이 되는 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서 인간 생명의 질을 발전시키는 노력, 인간을 발전 시켜보려는 교육이 사실은 인간을 파괴하며 그들을 진정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보아 왔고, 근자의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피부에 와 닺게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생명의 증진시키려고 노력을 하여 진정한 생명을 죽이는 자들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단이 사람을 찔러 죽이거나 하지 않고서도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된 것처럼(요 8:44), 우리도 여러 방식으로 살인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을 기독교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는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되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여기 에서 진정한 생명 운동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 난 사람이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 생명인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생명,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는 것입니다(요 17:3).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더 깊은 의미 속으로 날마다 들어가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 관계를 계속 자져 나아가기에 날마다 더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더 깊이 있게 하나님과 교제하여 나간다는 말뿐이 아니라, 그 결과 이 세상 속에 진정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고 있는 이 진정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어서 그들도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위해 힘을 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와 선교에 힘을 다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생명을 전달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인간의 물리적 삶(physical life)은 무시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사람도 주어진 한도 내에서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애를 씁니다. 일단 물리적 삶이 있어야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그 어떤 사람의 물리적 생명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삶도 이 세상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증진되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유지와 복지(wellbeing)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병원을 세우고, 구호 기관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중 되어야 하고, 그 삶의 질이 점점 더 나아져야 하겠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물리적인 삶은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는 수정 순간부터라는 것을 아주 자명한 것으로 여기기에 수정난과 배 속의 배어와 태아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낙태 반대 운동에 힘쓰고, 이혼모들이 아이를 낳도록 권면하고, 입양에 앞장서며, 그 모든 것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과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끝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나가는 순간인 심폐사의 순간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안락사에 찬동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존엄사가 진정 존엄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리적 생명이 자연스럽게 그쳐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시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생명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육계명과 성경 전체의 뜻에 근거해서 이 땅 가운데 진정한 생명 운동에 힘쓰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생명운동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여 창조와 구속으로 지금까지 하고 계신 일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생명 운동, 살리시며 살아가게 하시는 살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 운동, 참된 살림의 꿈틀거림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운동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고, 스스로 죽었으나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리시는 살림 운동에 동참하여 가는 일일 뿐입니다. 일반은총적 함의: 사회적 생명 운동의 토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그 생명이 참으로 인간 생명답게 되도록,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 경배 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의존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가르침 받아서 그 뜻이 이 땅 가운데 구현 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지만, 불신자들은 믿고 돌아 올 때까지는 계속해서 서로 죽이고 미워하고 비난하는 그 런 사망운동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깊이 있게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에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지옥과 같은 사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죄악이 성행해도 지옥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아가면 지옥에 던져진다는 사살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 지옥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아직은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첫째로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생명 운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해서 죄악이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는 가지 않도록 억제 하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일반은총적 함의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살인하지 말아야 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주 극악무도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느슨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 은총 가운데서 이 사회가 그래도 유지되도록 하신 죄의 억제의 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주어질 때 저할 할 수 없는 특별은총과는 달리, 일반은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으므로,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좀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회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로서는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지 않고, 더 온전히 해 가는 진정한 생명 운동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일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따라 오도록 하는 폭 넓은 사회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같은 생명 운동인데 그것이 그리스도인 안에서는 구속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여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생명 운동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존중하게 그것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동기가 다르고 궁극적인 방향이 다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위하는 생명운동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협력해 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낙태 반대 운동이나 모든 종류의 “생명을 위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같이 참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비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생명을 위하는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하고 노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기독교에서는 인간 생명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온전한 인간 생명으로 보기에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치를 보급하기도 해야 하지만, 이런 가치를 확산하는 비기독교적 설명도 같이 시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적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인간의 물리적 생명으로 여기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적기는 하지만 있으므로 그런 분들의 설명의 시도를 도와서 인간의 물리적 생명도 여러 방도로 보호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유와 활동의 종국적이고 분명한 근거는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제 육계명은 오늘도 이 세상 속에서 강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2013-11-25
    • G.MISSION
    • G.SERMON
    2013-11-25
  • 김영배의 더굳뉴스 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성경의 황금률이다. 로마 황제는 이 문장을 금으로 써서 걸어놓고 있다가 통치의 길을 잃었을 때 바라봤다고 한다. 연인에게 전구(電球)를 선물로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빛을 심으려는 손길은 예쁘게 포장한 양초를 건네는 법이다. 고대 이집트의 궁궐에서는 밀랍이나 동물의 기름에 갈대를 섞어 만든 양초로 불을 밝혔다고 한다. 신라와 고려의 왕궁에서도 금동수정 촛대, 청동쌍사자 촛대 등이 사용됐다. 촛불은 오랜 궁정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전기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는 양초의 쓰임새가 크게 줄었지만 종교용·축제용·장식용의 촛불은 여전히 밝게 빛난다. 부활절 새벽의 촛불예배는 지금껏 이어져 오는 오랜 전통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맨 처음 촛불 장식을 매달았다. 촛불은 결혼식이나 송년 예배에서도 좀처럼 빠지는 일이 없다. 기껏해야 밀랍이나 파라핀에 실 심지를 꼬아 박은 원시적 조명기구, 그 구닥다리 같은 촛불이 이토록 오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소박한 옛것에 대한 그리움, 실바람에도 가녀리게 흔들리는 순수의 이미지,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히는 희생과 헌신의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나룻배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던 시인 타고르는 촛불과 달빛의 신비한 대조를 경험했다. “촛불을 끄자 신성한 아름다움이 나를 온통 둘러쌌다. 촛불이 꺼지는 순간, 달빛이 춤추며 흘러 들어와 나룻배 안을 가득 채웠다. … 촛불 때문에 달빛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굳뉴스가 지향하는 푯대는 주님이 말씀하신 성경의 황금률이다. 그리고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히는 희생과 헌신의 빛이 되는 촛불의 정신이다. 더굳뉴스의 더는 보태다 더 많게 하다는 뜻이 있다. 더굳뉴스의 굳은 뜻한 바를 굽히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힘을 뜻하다는 굳세다의 굳이다. 영어의 good은 좋다 기쁘다의 뜻이다. 그리고 더굳뉴스의 뉴스는 영어의 news이다. 영어 단어 news는 새로운 것을 뜻하는 new의 특별한 용도의 복수형이다. 이것은 14세기에 발전된 개념이다. 중세에는 그 단어가 newes로 쓰였다. 이것은 새로운 것들을 전한다는 뜻에서 소식의 뜻으로 발전되었다. 성경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한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들을찌어다 너의 파숫군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봄이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이사야 52:7-9 저널리즘의 본질은 사실 확인의 규율이다. 사실의 규율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투명성의 정신이다. 더굳뉴스는 저널리즘의 본질인 사실 확인과 투명성의 정신을 따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더 좋은 소식과 더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더 좋고 더 굳센 더굳뉴스가 되고자 한다. 들추고 비판하고 죽이는 소식이 아니라 더 좋게 하고 살리는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고자 한다. 더굳뉴스는 격주로 발행하는 소식지라 지나간 소식을 더 좋고 기쁘게 전해야 하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도 먼저 전할 더굳뉴스는 첫눈 소식이다. 한반도로 찬 공기가 내려오면서 당분간 초겨울 추위가 이어질 전망이다. 18일에는 수도권 일부와 서해안 등지에서 첫눈이 내릴 가능성도 있다. 기상청은 “17일 낮에 찬바람이 강하게 불면서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진 데 이어 18일 아침에는 기온이 더 내려가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영하의 기온을 보이는 곳이 많겠다”고 밝혔다. 기상청은 “18일 낮 동안에도 기온이 평년보다 5~8도가량 낮고, 19일까지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더 떨어지겠다”고 덧붙였다. 현재 중국 북동지방 5㎞ 상공으로 영하 35도 이하의 찬 공기가 밀려와 한반도 쪽으로 찬 공기를 내려 보내고 있는 상태다. 기상청은 또 한반도가 찬 대륙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들면서 18일 전국에 구름이 많고, 서해안 등 지역에 따라 비나 눈이 내리는 곳이 있겠다고 내다봤다. 특히 수도권과 충북 등에는 18일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산발적으로 눈이 날리거나 빗방울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낮 동안엔 소강상태를 보이겠지만 이날 늦은 오후부터 밤 사이에 다시 수도권과 서해안·강원 영서·충북·경북 서부 내륙 등지에서 눈이나 비가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그러나 예상 적설량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충남 서해안과 전북 동부 내륙이 1~3㎝, 경기 남부 서해안과 충남 내륙·전북 서해안·전남 내륙·경남 서부 내륙 등지는 1㎝ 미만이다. 눈(雪)의 계절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첫눈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레임의 대상이다. 눈은 무엇일까. 구름 속의 수분이 얼어붙은 상태로 내리는 것을 ‘눈’이라고 한다. 구름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구름 속에 있는 수분은 -20℃ 이하 상태로 얼음결정과 물방울이 뒤섞인 형태다. 온도가 낮을수록 물방울보단 얼음의 양이 많아진다. 눈은 이들 중 얼음알갱이에서 시작된다. 각각의 얼음알갱이와 물방울이 구름 속의 높은 수분 밀도 속에서 서로 충돌하며 점점 덩치가 불어나 눈의 결정이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눈결정들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낙하하게 된다. 눈결정의 크기는 2㎜ 정도. 눈송이는 이런 결정들이 합쳐진 것이다. 결정이 여러 개로 합쳐져 만든 눈송이의 크기는 보통 1㎝ 내외다. 하지만 내리는 도중에 눈결정이 많이 엉겨 붙을 경우엔 1㎝가 훨씬 넘는 큰 눈송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습기가 눈의 결정을 서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물방울의 비율이 높을수록 커다란 눈송이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함박눈 내리는 풍경이 한 폭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함박눈의 큰 눈송이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공기 중 물방울이 눈 결정을 이어붙이면서 탄생한다. “함박눈이 내리면 따뜻하고 가루눈이 내리면 추워질 징조”라는 우리 옛말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실제로 함박눈은 온도가 비교적 높은 온대지방에서 주로 내린다. 반대로 가루눈은 기온이 낮은 한대지방에서 주로 내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추운 곳에선 각각의 얼음알갱이가 그대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주 추운 곳에선 눈의 결정이 서로 부딪쳐도 달라붙기가 어렵다. 대기 중 수분의 많은 양이 얼음알갱이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접착제’ 역할을 해줄 물방울이 부족해서다. 그 결과가 가루눈이다. 반대로 기온이 높은 곳에선 구름 속 물방울의 비율이 높아 눈결정들이 큰 눈송이로 성장할 수 있다. 접착제 역할을 할 물방울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눈은 온도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에 온도가 낮을 때는 가루눈이 내리고 온도가 높을 때는 함박눈이 내린다고 정리할 수 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라면 고운 싸락눈이 내리는 날 외출을 피하는 게 좋다. “완전히 똑같은 눈의 결정은 단 하나도 없다.” 인류 최초로 눈의 결정 사진을 촬영한 미국의 사진가 윌슨 벤틀리(1865~1931)가 남긴 말이다. 흔히 학교에서 눈의 결정은 ‘육각형’이라고 배우지만 그렇지 않다. 눈의 결정은 육각형 모양의 단순한 얼음 결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육각형 모양의 얼음결정은 수분이 포화상태인 대기 속에서 조금씩 성장한다. 얼음 결정에서 시작한 눈결정은 다른 얼음결정과 물방울과 계속 부딪치며 복잡하게 성장한다. 각각의 결정이 각기 다른 대기환경과 수분 포화도 속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결정의 복잡한 가지가 다른 모양을 할 수밖에 없다. 눈결정을 역사상 처음으로 촬영했던 벤틀리는 미국 버몬트주의 한 농장에서 태어난 시골소년이었다. 15세 때 생일 선물로 받은 현미경으로 눈결정을 처음 관찰한 뒤 그 모습에 반해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1800년대 사진기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허락을 얻어 17세 때 사진기를 구했다. 19세 때였던 1885년 그는 눈결정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46년 동안 5000점이 넘는 눈의 결정 사진을 남겼다. ‘완전히 똑같은 눈 결정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이 사진들을 통해 세상에 알렸다. 놀라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조상들은 겨울철 내리는 눈을 보고 풍년과 흉년을 점치기도 했다. ‘눈점’을 언제부터 보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초의 기록은 고려시대 때 것이 남아 있다. 12월(음력)에 눈이 오기를 기원하는 ‘기설제’ 풍속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12월에 눈이 많이 내려야 풍년이 온다’는 믿음이 강했다. 눈이 많이 내려야 보리 농사가 잘 되고, 5~6월 비가 많이 내린다고 여겼다. 이런 풍속은 세심한 관찰을 통해 얻어낸 유용한 지식이었다. 실제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보리밭은 눈으로 인해 단열효과를 갖게 돼 뿌리가 썩지 않는다. 눈이 녹으면서 각종 병충해가 제거되는 효과도 있는 데다 봄까지 토양의 수분도 적당한 수준을 유지해 준다고 한다. 하지만 봄에 내리는 눈은 흉작을 가져온다고 봤다. 추운 겨울에 내리는 눈은 외부의 차가운 대기로부터 아직 제대로 자라지 않은 보리를 보호해 주지만, 봄에 내리는 눈은 외부의 높은 기온을 차단해 보리를 얼어 죽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더굳뉴스는 눈이라면 추운 겨울 같은 세상에 내리는 눈이 되어 아직 자라지 않은 보리를 보호해 주듯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덮어주는 신문이 되고 싶다. 로마의 대정치가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말 잘하는 변호사이고 변론가였지만 자신의 언어 능력에 한계를 느끼고 수사학을 공부하러 그리스로 유학을 갔다. 그는 로도스 섬에 학원을 세워 수사학을 가르치는 아폴로니오스 몰론{Apollonius Molon}의 문하에 들어가 수사학의 이론과 실제를 배웠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와 키케로를 가르친 몰론은 외국인으로는 전례 없이 로마 원로원에 초청되어 연설한 당대 최고의 변호사였다. 몰론은 키케로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바로 핵심을 말하라. 청중을 울리고 웃겨라. 청중이 열광하면 얼른 자리에 앉아라. 눈물처럼 빨리 마르는 것이 없다.” 거기서 키케로가 두 계절 배우고 죽기 3년 전에 펴낸 Orator가 서양 사회에 오늘까지 전해지는 수사의 기본서이다. 라틴어로 웅변을 의미하는 오라티오(Oratio)의 어간(몸통)은 이성과 지성이라는 의미의 라티오(Ratio)다. 키케로는 말하는 기술의 웅변이 없으면 지식이 힘을 못 쓰지만, 지식이 없이 입으로만 하는 웅변은 쓸모없다고 가르쳤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로 알려진 카톨릭 인문주의 신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 1466 ? 1536)는 『어리석음의 찬미 The Praise of Folly』라는 책에서 그리스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말을 소개했다. “인간은 두 개의 혀를 가졌다.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혀, 또 하나는 상황에 따라 말하는 혀다.” 몰론과 에우리피데스의 경구를 기준으로 보면 오늘 우리 일반 정치인들과 교계 정치인들의 말본새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두 개의 혀 중에서 상황에 따라 말하는 혀만 사용할 뿐 진실과 사실 관계는 안중에 없는 것 같다. 이제 지난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린 경기도 병점의 라비돌에서 한국의 장자 교단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98회 총회가 열렸다. 2013-11-23
    • G.OPINION
    2013-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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