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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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 오정호 목사
    체르니의 아버지는 오르간 연주자이자 오보에 연주자였으며 피아노 교사, 피아노 수리 등 음악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했고 체르니의 음악교육은 그런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음악을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체르니는 문학과 언어에 있어서도 또래의 아이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무료로 음악을 배우던 가난한 제자들로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으니 이후에 그가 가난하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여 무료로 레슨을 한 것은 아버지로부터의 대물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23년 체르니는 그의 스승 베토벤을 어렵게 설득해 12살이었던 리스트를 데려갔다. 리스트가 자신이 작곡한 소품 한 곡을 연주하자 베토벤은 바흐의 푸가를 주문했고 리스트는 바흐 평균율 피아노곡집에서 C단조 푸가를 연주했다. 베토벤은 즉석에서 다른 음계로 바꾸어 연주할 것을 요구했고 리스트는 훌륭하게 연주를 마쳤다. 베토벤은 리스트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리스트는 훗날 “이 사건은 나의 삶에서 가장 위대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나의 예술가로서의 경력에 수호신 역할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리스트는 평생에 베토벤이 자신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는 고백이다. 1971년 지금의 숭실대 앞으로 돌아가 보자. 숭실대 정문을 지나 사당동 쪽 언덕을 넘어서면 철거민들이 자리 잡은 초라한 골짜기에 총회신학교가 있었다. 내부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신학교 건물 지하에는 전깃불도 없는 기숙사가 있고 지하의 식당은 울퉁불퉁 정리되지 않은 운동장을 면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학연구원 전도사들보다 머리가 길고 황색 가방을 든 옥한흠 전도사가 운동장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총신 신학연구원 재학시절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100명이었던 주일학교를 500명까지 성장시켰다. 그 후 1970년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사역자로 부임한 그는 인생의 분수령이 된 대학부를 맡았다. 그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는 선교단체에는 있지만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대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그는 성도교회에 부임한 지 3년 만에 서울에서 최초로 대학부 학생 2백 명을 모아놓았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시 총신대 1년생으로 성도교회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면서 틈틈이 대학부를 기웃거렸다. 서울의 남녀 대학생들로 그득한 교육관 2층의 대학부 집회실은 늘 그득하고 옥한흠 전도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대학생들은 진정 옥한흠 전도사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뜨거웠고 밝았다.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격적 체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옥 목사는 1975년 미국의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1977년 5월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유학을 마친 옥한흠 목사는 미국과 한국의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짜리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84년 6월 옥 목사는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다. 제자훈련 목회를 시작한 지 5년이 되자 제자훈련에 대한 중간결산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3개월간 제자훈련 자료들을 모은 후, 1984년 제자훈련 겨울방학을 이용해 용인 벧엘수양관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원고를 집필했으며, 7주 만에 원고를 탈고했다. 2010년 9월 현재까지 103쇄가 인쇄됐다. 『평신도를 깨운다』의 책 발간은 CAL세미나 개최로 이어졌다. 책을 읽은 목회자들로부터 제자훈련 세미나 요청이 쇄도하자 1986년 3월 세미나실(현재 국제제자훈련원)을 설립하고, 1986년 3월 제1기 ‘평신도를깨운다 제자훈련지도사세미나’(CAL세미나)를 사랑의교회에서 개최했다. 고 옥한흠 목사가 시작한 ‘제자훈련 지도자 세미나’가 100기를 맞았다. ‘CAL세미나’로 유명한 제자훈련 지도자세미나는 1986년 3월 시작해 꼭 30년 만에 100기를 배출하게 됐다. 국제제자훈련원과 사랑의교회 그리고 제자훈련목회자네트워크(CAL-NET 전국대표 오정호 목사)는 100기 배출을 기념해 오는 2015년 2월 3일 오전10시 사랑의교회에서 ‘2015 CAL-NET 전국 평신도 지도자 컨벤션’을 개최했다. 컨벤션 주강사는 이어령 박사와 권성수 목사였다. 이어령 박사는 오전에 ‘지성과 영성이 균형잡힌 제자’를 주제로 강의하고, 권성수 목사는 오후 ‘목자의 심정으로 사역하는 제자’를 강의했다. 이외에도 선택강좌로 오정호 목사의 ‘성경적 훈련 목회자상’ 강의가 있었다. 옥한흠 목사의 제자들이 적지 않은데 그중 옥한흠 목사가 사랑하는 참 제자를 꼽는다면 단연 오정호 목사가 가장 앞설 것이다. 오정호 목사는 옥한흠 목사가 아끼는 제자 조성희 사모와 결혼을 했다. 사랑의교회에서 부부가 사역한 사례는 아마 오정호 목사와 조성희 전도사 부부가 유일할 것이다. 오정호 목사는 옥한흠 목사의 사랑에 힘입어 미국 유학(FULLER THEOLOGICAL SEMINARY)도 다녀왔다. 오정호 목사는 그의 스승 옥한흠 목사의 사랑과 기대에 부응하여 목회 사역에 있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2015년 4월 19일 주일 11시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 오정호 목사가 설교하는 새로남교회 3부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본문은 누가복음 7:36-42 설교제목은 『더 사랑의 비밀』이었다. 설교자와 교인이 성경 본문을 한 절씩 교독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누가복음 7:36-42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성악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하는 말은 평생에 아침 일찍이 모이면서 딱 두 번 노래했다고 합니다. 테너 성악가로서 목의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 노래하는 것은 치명적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가 대통령 조찬기도회, 두 번째가 자신의 아버님 생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는 말이 오늘 이렇게 아침에 모여서 행사를 하니 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왔습니다. 이런 고백을 그는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가지는 남다른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내게 은사를 주신 이도 주님이시오 쓰시겠다는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에 나는 기쁨으로 이 자리에 나옵니다. 주님이 나를 쓰시겠다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남모르는 『더 사랑의 비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오늘 어떤 비밀을 가지고 나오셨습니까.…아멘은 천상의 용어입니다. 예배는 주님만을 높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의 의지가 주님 앞에 송두리째 드려지고 있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예배는 원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옛날 교회는 이런 푹신한 의자가 없었습니다. 그냥 나무 바닥이었습니다. 무릎 꿇고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영적인 사사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영혼의 부식 상태가 심각합니다. 서울에 행인들이 길을 가다가 땅이 함몰되었습니다. 지반이 내려앉았어요. 전문가들이 연구를 해보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상수관과 하수관이 부식되어 거기서 물이 새는 겁니다. 그래서 땅들이 점점 무너져 어느 순간 빠져버리는 겁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참 예배자로 드리지 않을 때는 겉보기에는 멀쩡해요. 그러나 영혼이 점점 부식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왕창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누가 져야겠습니까. 하루아침에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닙니다. 바리새인처럼 형식은 갖췄어도 마음이 주께서 멀어지거나 주님 앞에 엎드리되 적당히 엎드리고 납작 엎드리지 않으면 그런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배자로 나와 있습니다. 스무 시간을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고 두 시간을 예배 드리는 사람이 세상을 따라가겠습니까 주님을 따라가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친구의 십분의 일밖에 안 되는데 나중에 자라서 부모 따라가겠습니까. 친구 따라가겠습니까. 우리가 주일 오전 한 번 오후 한 번 드리는 걸로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입니다. 주님 우리 마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예배를 드림으로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많이 사랑한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예배자의 축복 아니겠습니까. 일상의 분주함을 이제는 정리하고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 주님이 나를 발견하는 예배자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정호 목사의 사무실에 들어가면 한쪽 벽에 그가 새로남교회에 부임해 함께한 “아름다운 동행 20년”을 정제된 한 단어, 한 줄 문장에 따뜻한 마음을 담아 축하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다. 1994년 11월 6일 오정호 목사는 유학을 마치고 옥한흠 목사의 추천으로 새로남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부임 3년이 안 된 교인 성장으로 1997년 3월 2일 주일부터 낮 예배를 1, 2 ,3부 확대해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의 은혜와 추진력과 실천력을 겸비한 오정호 목사는 부임 이후 1997년 5월 대전 만년동의 500평의 부지 매입을 시작으로 총 1650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새로남교회 부임 10년만인 2004년 5월 30일 온 성도가 참석한 가운데 입당예배를 드리고, 2008년 11월 16일 헌당예배를 드렸다. 새로남교회 주변에는 대덕연구단지, 정부대전청사, KIST(카이스트) 등 국가 주요 건물들이 있어 전도와 대안 교육의 좋은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오정호 목사는 선명하지만 강한 영성과 정치력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 총회의 차세대 지도자로서 총회를 이끌고 총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사랑의교회도 세우고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교갱협)도 설립한 옥한흠 목사의 참 제자답게 목회도 성공한 목회자이지만 총회와 교계에서도 성공한 정치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15-05-06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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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6
  • 전병욱vs송태근
    1954년 2월 28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갈월동에서 첫 예배를 집행했고, 3월 1일 창립예배를 드렸다. 같은 해 5월 용산구 청파동으로 교회건물을 이전했다. 1955년 12월 한병혁이 초대 위임 목사로 부임했다. 1976년 7월 16일 김영규가 2대 위임 목사로 부임했다. 1993년 12월 25일 갓 30세에 전병욱 목사(총신 84회)가 3대 위임 목사로 부임하여 80명의 신도를 15년 새 출석교인 1만6000여 명으로 200배 성장시켰다. 2008년 10월 기준이다. 본당만으로 참석자들을 수용하기가 곤란해지자 1999년 3월부터 인근의 숙명여자대학교 대강당을 빌려 주일예배를 드리며, 이후 교회건물을 신축 및 매입하여(B, C관) 수용능력을 늘렸다. 숙명여자대학교 측과의 임대계약 만료로 대강당 예배를 2009년 3월 말 종료했다. 신도 중 1만 명 이상이 미혼 청년들로 교인 평균 연령이 26.9세인 교회. 교역자 12명, 장로는 7명에 불과한 교회의 담임 전병욱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이렇게 갈파했다. “오늘날 한국 젊은이들이 가장 영적으로 갈급해 하는 것은 바로 정체성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정체성과 소통도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이 부재한 것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 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단추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가장 강하게 안정시킨 시점에 다윗이 실족했던 것처럼 신자의 수가 2만2천여 명으로 치솟고, 현금만으로 마련한 예배당을 포함해 3개의 건물(A, B, C관)과 경기도 남양주시 수동면의 기도원이 있고, 미자립교회를 100만 원씩 1000개 교회(전병욱 목사 재직 당시 100개 교회를 도움)를 돕기 위한 저수지 교회로서의 자금 370억 원(헌금만으로 모인 돈)을 달성한 시점에 전병욱 목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은밀한 사실이 다윗의 밧새바 사건처럼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그 일로 청파동 언덕의 아담한 교회를 엄청나게 키워 언덕에서 평지에 우람하게 자리 잡고 군림하던 삼일교회 당회장 직을 내려놓고 이런저런 명목아 붙은 13억의 전별금을 받고 사임했다. 그리고 2010년 11월 1일 그는 교회 내에 아무런 분규나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굴욕적인 이행각서에 서명까지 한 뒤 교회를 떠났다. 전병욱 목사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세였고 그들은 전병욱 목사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여느 목사들과 달리 교회의 안정을 위해 그들을 잠재우고 2만이 넘는 신자와 370억 원의 현금도 고스란히 물려주고 교회를 사임했다. 삼일교회 당회(임시당회장:길자연 목사)는 2012년 5월 27일 당회를 열어 청빙위원회가 추천한 송태근 목사(총신 79회)를 청빙키로 만장일치 결의했다. 당회는 송 목사에 대해 “복음적 설교에 탁월한 은사가 있으며 청년사역과 선교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신 분”이라며 후보 선임 이유를 밝혔다. 송태근 목사가 10월 10일 삼일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송 목사는 이날 위임목사 취임예배에서 “무언가 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다”며 “오직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들을 삼일교회 성도들과 묵묵히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겠다”고 인사했다. 송 목사는 무엇보다 전병욱 목사 사건과 관련해 피해자들에게 깊은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송 목사는 “상처 입고 만신창이가 된, 씻을 수 없는 오욕을 겪은 피해 자매들에게 삼일교회 공동체 책임자로서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한다”고 밝히고, 설교단 옆에서 머리 숙여 사과 인사를 했다. 이어 송 목사는 “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송 목사는 또 전병욱 목사 사건과 이 한 목회자의 문제이기 이전에 삼일교회 공동체와 한국교회 공동체의 문제라고 밝히고, “다시 한 번 철저히 회개하고, 재발방지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교단과 한국교회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2014년 10월 13일 10시 은석교회당(김진웅 목사)에서 제175회 평양노회가 개회했다. 노회장 강재식 목사의 사회와 설교로 진행된 개회예배는 김선규 목사의 축도로 마쳤다. 이날 또 다른 관심사로 떠 오른 삼일교회 전 담임 전병욱 목사에 대해서는 재판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중지를 모았다. 회의 시간 연장을 해가며 3시간 넘게 증경총회장 이성택 목사와 교계의 거목 길자연 목사의 권면과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후임 송태근 목사의 끈질긴 현장에서의 면직 요구와 회원들의 공방을 거친 뒤 평양노회는 재판국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발언대에 선 원로 이성택 목사는 이미 시벌을 당해 교회사임을 한 목사를 면직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간절하게 말했다. 이어서 길자연 목사는 이미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합의도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면직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권면했다. 삼일교회 당회는 전병욱 목사의 전별금 13억 4500만원 중 퇴직금을 제외한 12억 3500만원에 대해 반환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나는 문제가 있는 총신 84회 전병욱 목사를 면직하자는 총신 79회 송태근 목사는 삼일교회를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아니면 최소한 얼마나 안정이라도 시켰는지를 묻고 싶다. 노회 현장에서 발언에 나선 한 목사는 삼일교회 이광영 장로에게 언제는 전 목사가 별 죄가 없다며 옹호하더니 이제는 면직시켜야 한다는 이유를 물었다. 이광영 장로는 당시는 세상에 전병욱 목사만 목사였는데 현재는 전병욱 목사만 파렴치해 목사라고 할 수 없어 면직시켜야 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요즈음 교회의 풍토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목사가 사임하고 나면 장로가 그 교회의 실세가 되는 게 다반사이다. 아마 삼일교회의 송태근 목사는 그 교회에서 설교나 행정력에 있어서 별 영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총신 선배이면서 삼일교회 후임자이기도 한 송 목사가 전 목사의 면직을 고수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다. 줄어드는 교인 때문이라면 설교와 기도에 더욱 힘을 기울이고 부임 때의 “오직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들을 삼일교회 성도들과 묵묵히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하겠다”하는 말을 따라 청년사역과 선교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졌다니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일들에 죽기를 각오하고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성장시킨 큰 교회와 많은 교인과 370억의 현금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포기하고 찾기도 힘든 홍대 근처 건물 2층에서 청년 선교에 힘쓰고 있는 전병욱 목사를 비난하고 면직을 획책하는 행위는 어디에서 배우고 익혔는지를 묻고 싶다. 전병욱 목사가 개척한 것 때문에 삼일교회 교인이 반 이하로 줄었다고 생각한다면 홍대새교회를 제 발로 가서 라반처럼 확인을 해보기 바란다. 삼일교회의 교인이 줄어든 만큼 홍대새교회가 늘어났다면 1500여 명에서 1200여 명으로 줄겠는가. 송 목사는 무엇보다 전병욱 목사 사건과 관련해 삼일교회 부임 시 피해자들에게 깊은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에 노력할 것을 다짐했듯이 행여 마음속에 드는 여자 생각과 눈초리조차 조심하며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족처럼 덧붙여 한때 국민은행 지점장으로서 전병욱 목사의 배려의 혜택과 신앙의 가르침을 입은 나원주 장로가 훌륭한 담임으로 모시고 있는 송태근 목사가 열심히 전병욱 목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고 있음에도 얼굴을 들기 힘든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전임 목사님이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비난하고 폄훼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지 않는 행위이고 송태근 목사의 훌륭한 가르침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행태임을 알기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누가복음 6:40-44 2015-05-06
    • G.OPINION
    2015-05-06
  • 선거와 중서울노회
    제4대 민의원선거가 1958년 5월 2일 치러졌다. 역시 관권 금권선거였다. 공명선거를 당국이 한사코 부르짖어온『5·2민의원총선거』의 투표일인 2일 선거 운동원이 구타당한 사건현장을 취재하러간 기자들을 백주 괴한들이 집단폭행하는 한편 카메라까지 강취한 사건이 수도서울시내 한 복판에서 발생하여 완전히 폭력에 짓밟힌 피의 투표일이 되고 말았다. 정당별 당선자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통일당 1명으로 여당인 자유당이 의석의 54%를 차지했다. 특히 자유당은 서울에서 15석 중 겨우 1석을 차지하는 등 대도시에서 참패하고, 그 후 6월 7일 개원하여 국회의장에 이기붕을 선출했다. 그러나 제4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한 채 1960년 4ㆍ19혁명의 격류에 밀려 만 2년 1개월 남짓하여 해산되고 마는 비극의 운명을 간직한 국회가 됐다. 2015년 4월 29일 재·보궐선거가 끝난 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2층 선거 상황실은 이날 오후 6시 개표 시작부터 분위기가 밝았다. 강석호 사무1부총장은 "광주 서을을 제외한 국회의원 선거구 3곳을 다 이기는 거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자알~하면"이라며 웃었다. 결과는 새누리당이 4곳 가운데 광주를 제외한 수도권 3석을 석권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날 선거 상황실을 따로 차리지 않았다. 취재진 편의를 위해 국회 본청의 당 대표실과 사무총장실을 개방하고, 개표방송을 틀어놓는 등 약식 상황실만 마련했다. 결과는 1석도 얻지 못한 참패였다. 호남의 광주마저 무소속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날 선거 결과에 따라 국회 의석수는 여당인 새누리당이 157개(지역구 130, 비례대표 27)에서 160개로 늘었고, 야당인 새정치연합은 130개(지역구 109, 비례대표 21)를 유지했으며, 무소속이 3명으로 늘었다. 나머지 5명은 정의당 소속이다. 3월 15일과 4월 15일 사이 총회 산하 전국 143개 노회들의 정기회가 시작해 다 끝났다. 봄 정기 노회는 새로운 임원 구성뿐 아니라 총대를 선출하고 또 총회의 중요한 쟁점이나 문제들을 연구하여 헌의했다. 이제 100회 총회를 앞둔 우리 교단은 이번 99회 총회에서 노회 헌의안들과 총대들의 논의를 통해 교단이 나아갈 지표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5월 11일부터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서 시작하는 목사장로기도회를 마치면 6월부터는 본격적인 선거철이 시작된다. 6월 1일부터 10일까지 후보자 이력도 발표하지 않고 밀실 감별을 일삼는 총회선거관리위원회는 제100회 총회임원회 후보자들의 접수를 받고, 이어 7월 1일부터 10일까지 상비부장 후보자들의 접수를 받는다. 몇 노회를 다녀 보니 노회 임원 선거를 구태의연한 전형위원회 선정이 아니라 직접 선거를 원했다. 직접 선거를 원하지 않는 노회의 고질은 일부 원로 그룹과 이른바 수구 세력의 기득권 지키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한 세력은 직접 선거로 이루어지는 총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데 힘을 쓰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과거 부정으로 얼룩졌던 우리나라가 이제는 일반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정착되어 이번 4·29 재·보궐선거에서 보듯 부정이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칼빈주의 사상을 따르는 교회가 중심이 된 우리 총회 산하 노회들에서 흑백투표나 거수투표를 고수하는 공산주의 선거보다 못한 행태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참으로 미래 총회의 희망이 보이는 노회가 있었다. 그것은 1981년 수도노회에서 분립한 중서울노회(노회장 김구년 목사)였다. 2015년 4월 14일 오전 10시 금남교회당에서 제71회 정기 노회가 열렸다. 개회예배와 성찬예식이 끝나고 사무처리회로 이어졌다. 곧 회원호명 등의 순서가 끝나자 임원선거와 총대선거가 시작됐다. 그리고 기표소에서의 투표가 진행되고, 선거관리위원의 개표가 이루어지고, 선거결과가 발표됐다. ★노회장:김구년 목사(금남교회) 부노회장:유귀상 목사 유재명 장로 서기:강조훈 목사 부서기:박래흠 목사 회록서기:이상협 목사 부회록서기:호용한 목사 회계:김성수 장로 부회계:우의창 장로 ★총회총대:김구년 김관선 유귀상 이상협 박성일 배치영 김성윤(이상 목사) 유재명 강문정 장덕용 조윤성 김진만 박정수 정찬홍(이상 장로) ★기독신문이사:신현수 목사 ★GMS이사:한문우 목사 유광철 목사 ★서울신이사:이선영 목사 김동문 목사 노회원들은 자유롭고 정연하게 한 표의 주권을 교회 안에 마련된 기표소에서 행사했다. 중서울노회에서의 정기회 진행은 밝고, 단순하고, 조용하고, 매끄러웠다. 시간을 내어 중서울노회의 중진(重鎭) 박기환 목사(동대문중앙)와 대담을 했다. ―중서울노회 오신 지는 얼마나 됐습니까. “30년 됐습니다.” ―목사님 오셔서 지금의 선거 제도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됐습니까. “투표제와 전형위원회를 오가면서 지금과 같은 선거제도 정착을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은혜로 노회 질서가 확립될 시점에 투표제로 왔죠.” ―그런 전환점을 어떻게 가지게 된 겁니까.“노회 전입순이나 선후배 관계를 확립하고 나니 임원의 순서를 정하는 분위기가 노회 안에 마련됐습니다. 총대는 총회에 가서 노회를 대표해 일한 분으로 중지를 모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노회가 민주적이고 성경적인 절차와 전통을 확립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노회와 달리 이런 성경적이고 대의적인 제도 확립을 위해 노회 차원의 어떤 노력이 있었습니까. “물론 노회 어른들과 중진들의 상당한 노력이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대로 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심과 신앙 양심을 가지고 노회가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는 합의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들로 노회 임원을 세우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투명하게 노회를 운영해 노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반 조성을 위해 힘을 모았습니다. 중서울노회와 총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후배 지도자들을 키울 수 있다면 저 자신부터 마음을 비우고 자리를 내놨습니다. 3년 전부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총대와 공직을 안 맡고 있습니다. 제가 총신 74회인데 마침 이번 제100회 총회는 동창 박무용 목사가 총회장이 되니까 저희 동창회에 정말 감사한 일이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선거(選擧, election)는 다수인(多數人)이 일정한 직(職)에 취임할 사람을 선출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반드시 국가기관의 선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교회·회사·학교 기타 여러 사회조직이나 집단에서도 널리 행하여진다. 현대 민주국가에서 선거의 기본원칙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의 네 가지이다. 투표와 선거는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지칭하는 범주가 다르다. 투표는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데 다수결로 하는 방법 중 하나를 말하는 것이고, 선거는 말 그대로 어떤 대표자를 뽑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총회의 근간을 이루는 노회의 임원과 총대 선거는 반드시 투표에 의한 다수결로 뽑혀야 한다. 자고로 정치의 근본은 공공성(公共性)을 실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총회의 찬송가공회, 납골당, 아이티 등의 사태에 처리에 있어서는 정치의 근본인 공공성은 이름에 불과할 뿐 막후에서는 직접 선거가 아닌 전형위원회를 통해 총대가 된 총회의 권력 카르텔 집단이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돈과 이권을 뜯어먹는 데 바빴음을 증명한다. 이 권력 카르텔 안에서는 서로 형님 동생 하면서 끈끈한 의리를 말하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친다. 이때 이른바 도둑정치(kleptocracy)가 조직체 내에 똬리를 틀게 된다. 사회 인프라 건설담당을 맡은 아프리카의 장관이 같은 일을 하는 아시아의 한 장관 집에 초대받았다. 집이 너무 호사스러워 물었다."당신 봉급으로 어떻게 이런 집에 살 수 있습니까. " 그러자 아시아 장관은 아프리카 장관을 창가로 불러냈다."저기 다리가 보이죠?" "보이는군요." 그러자 아시아 장관은 말했다. "10%." 그 다리 건설비의 10%를 먹었다는 것이다. 1년 후 그 아시아 장관은 아프리카 장관 나라에 초청받아 그의 집에 초대됐다. 그의 집은 더욱 화려했다."아니 당신 월급으로 이런 집에 살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아프리카 장관은 아시아 장관을 창가로 불렀다."저기 다리가 보입니까." '아시아 장관이 '아무리 봐도 다리는 없었다. "다리라곤 안 보이는데요." 그러자 자신을 가리키며 아프리카 장관이 말했다. "1백%." 그는 다리 건설비를 통째 먹어버린 것이다. 이런 부패한 정치를 '도둑정치'라고 한다. 건강한 정치 안에서만 자유와 인간 존엄이 가능하다는 건 만고불변(萬古不變)의 진리에 가깝다. 총회의 대의정치와 총회 헌법의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전형위원회를 통한 총회의 권력 카르텔 집단의 도둑정치는 단연코 장자 교단의 최대의 암(癌) 덩어리다. 도둑정치가 횡행하는 곳에 좋은 총회라는 이름은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덕적 해이의 수준이 아니라 신앙과 총회 구조 자체가 아예 부패해 있는 현상의 발로(發露)다. 따라서 바른 총회의 대의정치를 위해서는 노회의 임원과 총대는 직접투표로 선출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총회의 도둑정치를 막기 위해 총회부총회장 선거도 이제는 제비뽑기가 없는 직접투표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20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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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4
  • 더굳뉴스 제 17호 크리소스톰 김희태 목사
    “교회 안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눈을 움츠리며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이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영어명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헬라명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라는 그의 통칭(通稱)은 그의 전설적인 웅변 때문에 붙여진 황금의 입(golden-mouthed)이라는 뜻이다. 그 통칭은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의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탓이다. 위대한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설교를 듣느라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안투사는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로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의 최우수 학생으로 후계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Diodorus)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그는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 때인 AD 386년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는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 강론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하나는 초고 형식으로,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를 다듬어서 일관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전례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구약 성경에 어떤 제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한 것도 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란 크리소스톰이기에 설교는 항상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 방법에서 얻은 영적 통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강해는 윤리적 권면으로까지 폭을 넓혔다. 그의 설교는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른 한쪽은 성도의 삶의 한복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주석에서 예화로, 성경 원리에서 실제적인 호소로 설교를 전개시켜 갈 때는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며 제스처가 활발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진다. 그러면 기대감에 부푼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하다가 경우에 따라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청중의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환호를 받은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설교자가 박수갈채를 좋아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칠 것이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단순한 전개 형식을 취해 간다. 그럼에도 그가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 까닭이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이 있었다. 둘째,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셋째, 설교를 불붙게 하는 정열이 넘쳐 흘렸다. 이런 4세기의 크리소스톰을 닮은 21세기의 목사가 서울에 한 사람 있다. 그는 동광교회의 김희태 목사다. 1966년 3월 15일 창립된 동광교회에 1987년 12월 25일 김희태 목사가 부임했다. 김희태 목사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인이 2015년 현재 재적 교인 7000여명 장년 주일출석 2500여명으로 성장했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15일 교회 설립 50주년 예배를 드렸다. 이날을 기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23일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를 설립했다. 아카페는 아가페와 카페를 합성한 이름이다. 실제로 일반인을 위한 카페가 아담하고 예쁜 교회 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교회를 위해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기 전 하나님의 은혜로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 교회 앞에 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 주변은 귤 농장과 농토로 둘러싸여 있다.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동광교회 오전 12시 3부 예배. 크리소스톰 같은 황금의 입과 푸른 초장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김희태 목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동광교회 설교단에 섰다. 그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논리적이고 재미있고 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부활하면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 앞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인데 그 당시 중국의 비단과 값이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마포는 최고의 의상을 의미하며 부(눅 16:19)와 정결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계 19:8, 14). 우리가 최고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로 말미암아 오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좌우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행복하세요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태풍 급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기 시작합니다. 이건 태풍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겠는가 하는 걸로 내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서 강 서안에 있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대단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5리 동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촌락 베다니에서 이제 진짜 강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예루살렘에 강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걸 잠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니까 더 큰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세계를 뒤엎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 2천년 역사 아니 세상 2천년 역사에서 예수님을 뽑아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크게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 초라한 나사렛 예수! 무슨 사건이냐.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감격을 온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회가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법이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존경받고 아이들도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없는 걸로 미루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18살 정도 동생 마리아는 15살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가 아픈 겁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질병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말합니다. 지금은 잠을 자도 잘 낫지를 않습니다. 수면제가 나오고부터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잠자면 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맛이 간 사람도 푹 자면 온전해졌습니다. 잠들었으면 병이 다 나을테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강한 태풍을 만들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가운데 도마가 말합니다. 그는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목수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잘 해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는구나 생각하고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결심도 좋고 참 남자다운데 허경영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 부활, 예수님 기적 못 믿겠다고요. 누구는 믿어지는 줄 압니까. 자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베다니 동네 입구에 마르다가 뛰어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마 그때 마르다의 모습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말 그대로 때맞춰 오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이제 오십니까 하는 원망의 말투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발 후퇴합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어린 두 자매가 남겨져 있으니까 이 슬픔을 가시게 해 줄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엇박자 코미디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대답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갑니까.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은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정답으로 가슴에 사무쳐서 나와야 합니다. 로봇처럼 컴퓨터처럼 스위치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소리를 하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의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마르다도 별 고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것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마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허경영이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는데 개표 결과 0.2% 득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9만7천여표)을 기록하여 7위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득표율입니다. 자기가 축지법을 쓰고 아이큐가 430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을 했대요. 여기까지 했으면 허풍으로 끝났을 건데 도를 지나쳤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한 겁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17대 대선 때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콩밥을 먹고 정신이 들었는지 요즘은 좀 엄한 소리를 덜 하고 노래를 합디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허경영은 사기꾼이 아니라 미쳤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기꾼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허경영보다 좀 더 하신 겁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못 믿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믿게 하시려고 나사로의 무덤까지 오신 겁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입관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사람이지 죽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고 해도 간덩이 큰 사람은 3일 동안 밥을 못 먹고 약한 사람은 30년 식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 더 흉악한 꼴 보기 전에 관 두껑 덮고 못질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냥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따를 것 같죠.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한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을 믿는 게 아니라 죽이고자 합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모의에 못이기는 체 하고 끌려들어가 죽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이 수용이 안 되니까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예수님 금요일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주일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낼 때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우는 곡(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게 전통 장례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가족묘에 안장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에 여인들이 그를 위해 울어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안식일은 참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울어 드리기 위해서 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와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 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를 동산 무덤 관리인으로 알았어요. 예수님 시신이 없으니까 그에게 시신에 기름도 바르고 곡도 해야 하니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때 그가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골치 아프셨을 것 같아요.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셔야 된다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 만날 때마다 “내가 네 할애비다”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들이 사랑하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모두 최대한의 속도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 말고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터키 해안 남부 지역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데 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 유학을 왔습니다. 그가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소식을 전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이상한 무리를 본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을 박살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그 도시를 경계로 이쪽 아시아에 항상 상주하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들 봐라 하며 그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거의 다마스커스에 갔는데 홀연히 하얀 빛이 그를 비추는 겁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번화가 직가(straight street)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거기서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온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때 사울의 머릿속에 있던 성경 지식이 재조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믿기만 하면 머리가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증거를 찾습니다. 스스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이 배반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망을 시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그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사람이 큰 자라는 뜻인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서진(西進)할 때 엄청난 태풍이 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해놓았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창세기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할 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자이십니다. 이것은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쯤 되면 그 예언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두셋만 있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것도 다 제자들이 지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판의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이 되면 재판에서 거짓말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증언해서 손해가 난다면 절대 거짓증언 안 한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직장을 잃고, 추방을 당하고, 거지가 되고, 목이 잘려 죽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데도 아시아보다 로마에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도망을 다니고, 거지가 되고,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부활의 소망,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삐삐를 사용하다가 좀 있으니 몽둥이 같은 이동 전화기를 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별 쓸 일도 없으면서 으스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최신식 스마트폰이 나와 누구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핸드폰 없을 때 전화기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볼 일이 있으면 이웃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숨을 몰아쉬며 우리 집 오시라고 합니다 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모두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행복합니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미래의 어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부활의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환란과 핍박을 이긴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광야에 산에 어디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메시아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게 오십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사기꾼들이 설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 죽었든 다 육체로 부활하여 동시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생명, 젊음, 경륜, 기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9일 오후 2시 제주도 아카페 교회 카페. 제주 제주시 선덕로 바다 앞 도두해수파크 찜질방에서 나와 해안로 정류장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17번 버스를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다른 한분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본 나고야 교회 목사님의 한국 사모님이었다. 그분도 제주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일본의 아들들 때문에 제주도 땅을 정리하려고 오셨단다. 정류장 건너에는 아침 선잠에 눈비비고 나온 것 같은 청색의 푸른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듯 밀려와 마음 깊숙이 할 말이 많은 듯 해안에 부딪혔다.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늘었다. 마침내 온 17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와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달빛빌리지 앞 푸른 초장 팻말이 있는 곳에 내렸다. 제주도 화석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김희태 목사가 아들 목사와 귤 밭을 맨발로 한 고랑씩을 맡아 매고 있었다. 차를 대접받은 뒤 두 달 전 설립된 근처의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로 갔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순대국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교회 뒤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는 평안교회 부목을 거쳐 1988년 인천의 희망교회와 풍성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했다. 그러다 그는 2015년 3월 23일 동광교회 50주년을 기려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설립한 아카페(A Cafe)교회에 부임했다.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두 사람은 총신 77회 동창이면서 절친이고 나이는 52년생인 권 목사보다 김 목사가 두 살 위다)가 1987년 동광교회 부임하실 때 제가 그랬죠. 교회 출석 교인이 2000명이 넘을 거다. 제가 말하는 건 장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입니다. 요새 통계로 말하면 7000이지만 주일 출석 장년 교인만 2000이 넘는다고 한 거죠. 그런데 김희태 목사가 안 믿어요. 그래서 제가 뭐랬냐하면.김희태 목사: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제가 확신했죠.권혁선 목사: 사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해 줬으니까 그 교회 저력을 알잖아요. 그런데 동광교회는 목사님만 좋은 분이 오면 가능한 교회죠. 문제가 많은 교회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에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의논하다 보니까 모르는 분이 오시면 그게 그거니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서 담임목사를 모시자 그런 겁니다. 그 결과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제가 가면 감당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 목사님이 가면 이건 틀림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큰 교회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가시면 2000명 됩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이 저보다 믿음이 없어가지고 그럴리 없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동광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됩니다 하면서 그때 김 목사님과 약속을 했어요. 2000명이 되면 저한테 선교비 천불씩 후원해 주기로. 김희태 목사: 그게 아니라 두당 1불씩 후원해 주기로. 2000명 넘어가면 2000불 하기로.권혁선 목사: 2000명 훨씬 넘어갈 거라고 했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열티 계산 개념으로 두당 1불씩 하기로 했습니다.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선교지로 갔는데 안 주는 겁니다. 김희태 목사: 저는 두 가지 확신을 가졌어요. 2000명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목회 잘 하는 목사가 선교사 갈 일이 있겠느냐.권혁선 목사: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요. 목회를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부터 다음 선교지를 어디로 가느냐 여기서 관두면 어디로 갈 것이냐를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일본을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 쪽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랬는데.김희태 목사: 특별히 일본 낫토(대두를 낫토균을 이용해 발효시킨 한국의 청국장과 유사한 일본 전통의 식품으로 미소와 함께 중세 일본의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었다)를 좋아하죠. 우리 교인들도 낫토, 낫토해. 나는 안 좋아해요. 권혁선 목사: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여기서는 한인 목회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한인 목회를 하려면 문제가 뭐냐면 다른 목사들과 부딪칠 것 같은 겁니다.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분이 캄보디아를 가자고 해요. 캄보디아를 도와달라는 거죠. 그래서 가봤는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참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캄보디아 백성이 불쌍했습니다. 외국 나가서 공항에서 울어본 나라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나라 민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이 친구(김희태 목사를 가리키며)가 문제예요.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많이 도와줬죠. 그 동안 도와준 걸 계산해 보니까 200만불이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걸 다 해놓으니까 내가 왕 노릇 할 것 같은 겁니다. 김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들어와서 이 교회를 하게 된 겁니다. 김희태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비 2000불 약속했는데 교회가 도저히 형편이 안 좋아서 50만원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몇 십만원 보내고. 권혁선 목사: 사실은 2000불 이상 했어. 왜냐면 그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거고. 김희태 목사: 제직회에서 권 목사님 아는 집사가 있어요. 그가 막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집사님, 권 목사님한테 선교비 많이 준다고 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집사님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권 목사님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2000불씩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거 보내는 겁니다. 그 집사님 내려갔어 건강이 안 좋아서. 권혁선 목사: 그랬다고 그러데. 김희태 목사: 그런데 신장하고 간이 안 좋데. 신장 약을 먹으면 간한테 안 좋고 간 약을 먹으면 신장한테 안 좋아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네. 그래서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서한결 사모:(제주 해안가에서 만난 일본 나고야 교회 사모)네, 서양 의학적으로는 그런데 동양 의학적으로 진짜 몸의 원리를 알면 신장(腎臟)은 어머니고 간장(肝臟)은 아들입니다. 옛날에 어린애들이 아프면 엄마가 젖을 토해서 아이한테 줍니다. 신장이 약을 먹으면 간장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알고 한의학적으로 하면 아주 좋죠.권혁선 목사: 양약으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서한결 사모: 한의학에서 그걸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고 합니다. 김희태 목사: 아이고 사모님 제주도 아카페교회 오시면 우리 노틀(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로 외래어 발음법상 라오터우얼로 소리 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노틀’이 됐다) 클래스가 죽음을 한 단계 올리겠네요. ―그래서 동광교회 장년 주일출석 2000명이 넘어서 선교비 지원이 잘 됐습니까. 권혁선 목사: 아니 2000명은 당연히 넘었죠. 넘었는데 500불밖에 안 보내는 겁니다. 제가 캄보디아 간다고 하니까 1000불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안 믿었습니다. 왜냐. 솔직하게 말해서 김 목사님하고 저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 말고 딴 데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요. 그러나 저하고는 절친이잖아요. 저한테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 파송 교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만원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후원금입니다. 김희태 목사: 그랬었구나. 20만원 내놔.권혁선 목사: 왜냐면 이건 빤한 계산입니다. 김희태 목사: 친구라 못한 겁니다. 권혁선 목사: 그러나 보통 모르는 목사님들은 친구지간에 안 해 주느냐고 해요. 사실 친구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제삼자는 오히려 딴 데 도와주면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김희태 목사: 우리가 백 불 이백 불은 수십 군데고. 파송이 일곱 가정이에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가운데에서 친구한테 많이 보낸다는 건 명분을 세울 수가 없어요. 서한결 사모: 친구라는 걸 알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권혁선 목사: 온 교회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둘이 아삼륙(마작에서 쓰는 골패의 쌍진아, 쌍장삼, 쌍준륙 이른바 쌍비연이라 하여 좋은 패가 있는데 이 세 쌍의 패 끝 자를 딴 말로 단짝을 비유하거나 서로 호흡이 잘 맞을 때 쓰는 말)이라는 거 다 알아요. 김희태 목사: 게다가 가끔 들어오면 설교시켜야지.권혁선 목사: 그런데 사실은 2000불이 아니라 더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캄보디아 교회 뭐 할 때도 천만 원 헌금해 줬지김희태 목사: 그랬던가.권혁선 목사: 자동차도 두 대 보내줬죠. 뭐 이래저래 하면 솔찬합니다. 제가 자동차 가지고 사기 많이 쳤습니다. (동석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차를 일부러 안 사요. 오토바이 타거나 걸어다녀요.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오면 헌금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지내시면 되냐고. 일단 그 돈을 받아요. 간 다음에 전화를 해요. 내가 지금 원주민을 위해 그 돈을 써야 되는데 양해해 달라고 말해요. 저한테는 우선순위가 원주민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데 원주민보다는 당장 보이는 대상에 헌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목사님 차 사세요 하고 돈은 줘도 원주민을 위하는 데는 잘 안 주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받은 다음에 원주민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많이 우려먹었죠. 그러다보니 차를 안 타고 일부러 걸어 다닌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담임 목회할 때도 그랬어요. 여름에 제 방에 에어컨 달겠다고 해서 제가 달지 말라고 했어요. 유아실, 영아실, 사무실까지 다 달고 마지막에 내 방 달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서둘러요. 목사 방부터 달면 교육부는 안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사실은 고도의 정치죠. 김희태 목사: 그러다가 평생 못 다는 수가 있어.권혁선 목사: 난 일 년 만에 다 달었어. 김희태 목사: 그거 하나님의 은혜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평생 에어컨 없이 지냈어요. 권혁선 목사: 야 진짜 못됐구나. 김희태 목사: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도 그 교회가 난리더라고요. 그런 사고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권혁선 목사: 옛날 그 목사님 점잖으시잖아요. 김희태 목사: 부흥회 가면 깜짝 놀래요. 그렇게 큰 교회가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어요. 광주도 여름에 굉장히 덥거든.권혁선 목사: 저 인간이 좋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안 했다가 저 인간이 넥타이 돌려 매면 난리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좋게 이야기할 때 서로 잘하자. 넥타이 돌려 매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알아서 해라. 김희태 목사: (일본 교회 서한결 사모님을 보며) 사모님 모셔다 드릴게요. 가십시다. 서한결 사모: 제가 한번 걸어 가보죠. (동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모님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 카페를 나갔다.) ―(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저희는 좀 더 있다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 동광교회를 소개해 주었을 뿐인데 김희태 목사는 자기 가족들한테도 제가 가문의 은인이라는 말을 늘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실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권혁선 목사가 김 목사한테 어떻게 했다 이런 말 안 합니다. 처음에는 좀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수치로 느끼거든요. 목사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만 제 경우에도 보면 큰 은혜는 하나님과 부모만이 베풀 수가 있고 사람이 베풀면 서로 떠나게 됩니다. 뭐 그것이 인생이죠. 그런데 그런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절체절명(?體?命)의 일인데 나한테는 손 한번만 내밀면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도와줘요. 도움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대부분 얼마 안 가서 (내 추임새를 받아서)잊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욕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멀리 한 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모양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은 정말 큰 사람입니다. 사실 김 목사님한테는 제가 오히려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파닥파닥하는 못된 성질이 제가 있어요. 김희태 목사님하고 40년 우정이 유지된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김 목사님이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생 도움을 받고 삽니다. 제가 그러죠. 김 목사님 잘된 건 하나님께서 나 도와주라고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오히려 뭐 한 놈이 큰소리친다는 격이죠. ―같은 서울남노회 회원들 가운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님은 의리를 지켜요. 제가 복이 많아서 김 목사님을 사귀게 된 거죠. 저는 먼저 부모를 잘 만났어요. 아내도 잘 만나고 자식들도 좋아요. 저는 정말 성도들도 잘 만났어요.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좋은 형님이죠. 나이도 저보다 두 살 위죠. 저는 만 가지가 없는데도 막 채워져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은 정치도 하는데 막상 총회장은 되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순수한 거죠. 시대가 하도 순수하지 않으니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교도 살아 있어요. 사실 김희태 목사는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와 기도와 삶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이고 크리소스톰의 삶과 정치적 성향도 닮았다.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과 정치적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AD 407년 크리소스톰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갔다.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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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크리소스톰 김희태 목사
    “교회 안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눈을 움츠리며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이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영어명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헬라명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라는 그의 통칭(通稱)은 그의 전설적인 웅변 때문에 붙여진 황금의 입(golden-mouthed)이라는 뜻이다. 그 통칭은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의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탓이다. 위대한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설교를 듣느라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안투사는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로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의 최우수 학생으로 후계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Diodorus)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그는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 때인 AD 386년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는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 강론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하나는 초고 형식으로,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를 다듬어서 일관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전례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구약 성경에 어떤 제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한 것도 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란 크리소스톰이기에 설교는 항상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 방법에서 얻은 영적 통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강해는 윤리적 권면으로까지 폭을 넓혔다. 그의 설교는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른 한쪽은 성도의 삶의 한복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주석에서 예화로, 성경 원리에서 실제적인 호소로 설교를 전개시켜 갈 때는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며 제스처가 활발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진다. 그러면 기대감에 부푼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하다가 경우에 따라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청중의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환호를 받은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설교자가 박수갈채를 좋아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칠 것이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단순한 전개 형식을 취해 간다. 그럼에도 그가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 까닭이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이 있었다. 둘째,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셋째, 설교를 불붙게 하는 정열이 넘쳐 흘렸다. 이런 4세기의 크리소스톰을 닮은 21세기의 목사가 서울에 한 사람 있다. 그는 동광교회의 김희태 목사다. 1966년 3월 15일 창립된 동광교회에 1987년 12월 25일 김희태 목사가 부임했다. 김희태 목사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인이 2015년 현재 재적 교인 7000여명 장년 주일출석 2500여명으로 성장했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15일 교회 설립 50주년 예배를 드렸다. 이날을 기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23일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를 설립했다. 아카페는 아가페와 카페를 합성한 이름이다. 실제로 일반인을 위한 카페가 아담하고 예쁜 교회 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교회를 위해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기 전 하나님의 은혜로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 교회 앞에 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 주변은 귤 농장과 농토로 둘러싸여 있다.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동광교회 오전 12시 3부 예배. 크리소스톰 같은 황금의 입과 푸른 초장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김희태 목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동광교회 설교단에 섰다. 그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논리적이고 재미있고 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부활하면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 앞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인데 그 당시 중국의 비단과 값이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마포는 최고의 의상을 의미하며 부(눅 16:19)와 정결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계 19:8, 14). 우리가 최고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로 말미암아 오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좌우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행복하세요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태풍 급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기 시작합니다. 이건 태풍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겠는가 하는 걸로 내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서 강 서안에 있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대단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5리 동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촌락 베다니에서 이제 진짜 강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예루살렘에 강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걸 잠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니까 더 큰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세계를 뒤엎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 2천년 역사 아니 세상 2천년 역사에서 예수님을 뽑아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크게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 초라한 나사렛 예수! 무슨 사건이냐.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감격을 온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회가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법이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존경받고 아이들도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없는 걸로 미루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18살 정도 동생 마리아는 15살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가 아픈 겁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질병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말합니다. 지금은 잠을 자도 잘 낫지를 않습니다. 수면제가 나오고부터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잠자면 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맛이 간 사람도 푹 자면 온전해졌습니다. 잠들었으면 병이 다 나을테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강한 태풍을 만들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가운데 도마가 말합니다. 그는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목수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잘 해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는구나 생각하고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결심도 좋고 참 남자다운데 허경영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 부활, 예수님 기적 못 믿겠다고요. 누구는 믿어지는 줄 압니까. 자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베다니 동네 입구에 마르다가 뛰어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마 그때 마르다의 모습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말 그대로 때맞춰 오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이제 오십니까 하는 원망의 말투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발 후퇴합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어린 두 자매가 남겨져 있으니까 이 슬픔을 가시게 해 줄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엇박자 코미디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대답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갑니까.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은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정답으로 가슴에 사무쳐서 나와야 합니다. 로봇처럼 컴퓨터처럼 스위치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소리를 하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의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마르다도 별 고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것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마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허경영이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는데 개표 결과 0.2% 득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9만7천여표)을 기록하여 7위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득표율입니다. 자기가 축지법을 쓰고 아이큐가 430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을 했대요. 여기까지 했으면 허풍으로 끝났을 건데 도를 지나쳤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한 겁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17대 대선 때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콩밥을 먹고 정신이 들었는지 요즘은 좀 엄한 소리를 덜 하고 노래를 합디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허경영은 사기꾼이 아니라 미쳤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기꾼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허경영보다 좀 더 하신 겁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못 믿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믿게 하시려고 나사로의 무덤까지 오신 겁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입관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사람이지 죽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고 해도 간덩이 큰 사람은 3일 동안 밥을 못 먹고 약한 사람은 30년 식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 더 흉악한 꼴 보기 전에 관 두껑 덮고 못질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냥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따를 것 같죠.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한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을 믿는 게 아니라 죽이고자 합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모의에 못이기는 체 하고 끌려들어가 죽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이 수용이 안 되니까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예수님 금요일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주일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낼 때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우는 곡(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게 전통 장례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가족묘에 안장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에 여인들이 그를 위해 울어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안식일은 참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울어 드리기 위해서 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와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 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를 동산 무덤 관리인으로 알았어요. 예수님 시신이 없으니까 그에게 시신에 기름도 바르고 곡도 해야 하니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때 그가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골치 아프셨을 것 같아요.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셔야 된다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 만날 때마다 “내가 네 할애비다”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들이 사랑하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모두 최대한의 속도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 말고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터키 해안 남부 지역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데 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 유학을 왔습니다. 그가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소식을 전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이상한 무리를 본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을 박살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그 도시를 경계로 이쪽 아시아에 항상 상주하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들 봐라 하며 그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거의 다마스커스에 갔는데 홀연히 하얀 빛이 그를 비추는 겁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번화가 직가(straight street)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거기서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온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때 사울의 머릿속에 있던 성경 지식이 재조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믿기만 하면 머리가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증거를 찾습니다. 스스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이 배반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망을 시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그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사람이 큰 자라는 뜻인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서진(西進)할 때 엄청난 태풍이 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해놓았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창세기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할 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자이십니다. 이것은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쯤 되면 그 예언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두셋만 있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것도 다 제자들이 지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판의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이 되면 재판에서 거짓말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증언해서 손해가 난다면 절대 거짓증언 안 한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직장을 잃고, 추방을 당하고, 거지가 되고, 목이 잘려 죽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데도 아시아보다 로마에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도망을 다니고, 거지가 되고,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부활의 소망,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삐삐를 사용하다가 좀 있으니 몽둥이 같은 이동 전화기를 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별 쓸 일도 없으면서 으스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최신식 스마트폰이 나와 누구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핸드폰 없을 때 전화기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볼 일이 있으면 이웃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숨을 몰아쉬며 우리 집 오시라고 합니다 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모두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행복합니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미래의 어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부활의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환란과 핍박을 이긴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광야에 산에 어디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메시아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게 오십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사기꾼들이 설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 죽었든 다 육체로 부활하여 동시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생명, 젊음, 경륜, 기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9일 오후 2시 제주도 아카페 교회 카페. 제주 제주시 선덕로 바다 앞 도두해수파크 찜질방에서 나와 해안로 정류장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17번 버스를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다른 한분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본 나고야 교회 목사님의 한국 사모님이었다. 그분도 제주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일본의 아들들 때문에 제주도 땅을 정리하려고 오셨단다. 정류장 건너에는 아침 선잠에 눈비비고 나온 것 같은 청색의 푸른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듯 밀려와 마음 깊숙이 할 말이 많은 듯 해안에 부딪혔다.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늘었다. 마침내 온 17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와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달빛빌리지 앞 푸른 초장 팻말이 있는 곳에 내렸다. 제주도 화석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김희태 목사가 아들 목사와 귤 밭을 맨발로 한 고랑씩을 맡아 매고 있었다. 차를 대접받은 뒤 두 달 전 설립된 근처의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로 갔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순대국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교회 뒤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는 평안교회 부목을 거쳐 1988년 인천의 희망교회와 풍성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했다. 그러다 그는 2015년 3월 23일 동광교회 50주년을 기려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설립한 아카페(A Cafe)교회에 부임했다.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두 사람은 총신 77회 동창이면서 절친이고 나이는 52년생인 권 목사보다 김 목사가 두 살 위다)가 1987년 동광교회 부임하실 때 제가 그랬죠. 교회 출석 교인이 2000명이 넘을 거다. 제가 말하는 건 장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입니다. 요새 통계로 말하면 7000이지만 주일 출석 장년 교인만 2000이 넘는다고 한 거죠. 그런데 김희태 목사가 안 믿어요. 그래서 제가 뭐랬냐하면. -김희태 목사: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제가 확신했죠. -권혁선 목사: 사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해 줬으니까 그 교회 저력을 알잖아요. 그런데 동광교회는 목사님만 좋은 분이 오면 가능한 교회죠. 문제가 많은 교회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에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의논하다 보니까 모르는 분이 오시면 그게 그거니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서 담임목사를 모시자 그런 겁니다. 그 결과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제가 가면 감당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 목사님이 가면 이건 틀림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큰 교회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가시면 2000명 됩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이 저보다 믿음이 없어가지고 그럴리 없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동광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됩니다 하면서 그때 김 목사님과 약속을 했어요. 2000명이 되면 저한테 선교비 천불씩 후원해 주기로. -김희태 목사: 그게 아니라 두당 1불씩 후원해 주기로. 2000명 넘어가면 2000불 하기로. -권혁선 목사: 2000명 훨씬 넘어갈 거라고 했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열티 계산 개념으로 두당 1불씩 하기로 했습니다.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선교지로 갔는데 안 주는 겁니다. -김희태 목사: 저는 두 가지 확신을 가졌어요. 2000명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목회 잘 하는 목사가 선교사 갈 일이 있겠느냐. -권혁선 목사: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요. 목회를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부터 다음 선교지를 어디로 가느냐 여기서 관두면 어디로 갈 것이냐를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일본을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 쪽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랬는데. -김희태 목사: 특별히 일본 낫토(대두를 낫토균을 이용해 발효시킨 한국의 청국장과 유사한 일본 전통의 식품으로 미소와 함께 중세 일본의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었다)를 좋아하죠. 우리 교인들도 낫토, 낫토해. 나는 안 좋아해요. -권혁선 목사: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여기서는 한인 목회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한인 목회를 하려면 문제가 뭐냐면 다른 목사들과 부딪칠 것 같은 겁니다.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분이 캄보디아를 가자고 해요. 캄보디아를 도와달라는 거죠. 그래서 가봤는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참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캄보디아 백성이 불쌍했습니다. 외국 나가서 공항에서 울어본 나라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나라 민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이 친구(김희태 목사를 가리키며)가 문제예요.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많이 도와줬죠. 그 동안 도와준 걸 계산해 보니까 200만불이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걸 다 해놓으니까 내가 왕 노릇 할 것 같은 겁니다. 김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들어와서 이 교회를 하게 된 겁니다. 김희태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비 2000불 약속했는데 교회가 도저히 형편이 안 좋아서 50만원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몇 십만원 보내고. 권혁선 목사: 사실은 2000불 이상 했어. 왜냐면 그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거고. 김희태 목사: 제직회에서 권 목사님 아는 집사가 있어요. 그가 막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집사님, 권 목사님한테 선교비 많이 준다고 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집사님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권 목사님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2000불씩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거 보내는 겁니다. 그 집사님 내려갔어 건강이 안 좋아서. -권혁선 목사: 그랬다고 그러데. -김희태 목사: 그런데 신장하고 간이 안 좋데. 신장 약을 먹으면 간한테 안 좋고 간 약을 먹으면 신장한테 안 좋아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네. 그래서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서한결 사모:(제주 해안가에서 만난 일본 나고야 교회 사모)네, 서양 의학적으로는 그런데 동양 의학적으로 진짜 몸의 원리를 알면 신장(腎臟)은 어머니고 간장(肝臟)은 아들입니다. 옛날에 어린애들이 아프면 엄마가 젖을 토해서 아이한테 줍니다. 신장이 약을 먹으면 간장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알고 한의학적으로 하면 아주 좋죠. -권혁선 목사: 양약으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서한결 사모: 한의학에서 그걸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고 합니다. -김희태 목사: 아이고 사모님 제주도 아카페교회 오시면 우리 노틀(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로 외래어 발음법상 라오터우얼로 소리 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노틀’이 됐다) 클래스가 죽음을 한 단계 올리겠네요. ―그래서 동광교회 장년 주일출석 2000명이 넘어서 선교비 지원이 잘 됐습니까. -권혁선 목사: 아니 2000명은 당연히 넘었죠. 넘었는데 500불밖에 안 보내는 겁니다. 제가 캄보디아 간다고 하니까 1000불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안 믿었습니다. 왜냐. 솔직하게 말해서 김 목사님하고 저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 말고 딴 데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요. 그러나 저하고는 절친이잖아요. 저한테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 파송 교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만원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후원금입니다. -김희태 목사: 그랬었구나. 20만원 내놔. -권혁선 목사: 왜냐면 이건 빤한 계산입니다. -김희태 목사: 친구라 못한 겁니다. -권혁선 목사: 그러나 보통 모르는 목사님들은 친구지간에 안 해 주느냐고 해요. 사실 친구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제삼자는 오히려 딴 데 도와주면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김희태 목사: 우리가 백 불 이백 불은 수십 군데고. 파송이 일곱 가정이에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가운데에서 친구한테 많이 보낸다는 건 명분을 세울 수가 없어요. -서한결 사모: 친구라는 걸 알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권혁선 목사: 온 교회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둘이 아삼륙(마작에서 쓰는 골패의 쌍진아, 쌍장삼, 쌍준륙 이른바 쌍비연이라 하여 좋은 패가 있는데 이 세 쌍의 패 끝 자를 딴 말로 단짝을 비유하거나 서로 호흡이 잘 맞을 때 쓰는 말)이라는 거 다 알아요. -김희태 목사: 게다가 가끔 들어오면 설교시켜야지. -권혁선 목사: 그런데 사실은 2000불이 아니라 더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캄보디아 교회 뭐 할 때도 천만 원 헌금해 줬지 -김희태 목사: 그랬던가. -권혁선 목사: 자동차도 두 대 보내줬죠. 뭐 이래저래 하면 솔찬합니다. 제가 자동차 가지고 사기 많이 쳤습니다. (동석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차를 일부러 안 사요. 오토바이 타거나 걸어다녀요.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오면 헌금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지내시면 되냐고. 일단 그 돈을 받아요. 간 다음에 전화를 해요. 내가 지금 원주민을 위해 그 돈을 써야 되는데 양해해 달라고 말해요. 저한테는 우선순위가 원주민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데 원주민보다는 당장 보이는 대상에 헌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목사님 차 사세요 하고 돈은 줘도 원주민을 위하는 데는 잘 안 주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받은 다음에 원주민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많이 우려먹었죠. 그러다보니 차를 안 타고 일부러 걸어 다닌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담임 목회할 때도 그랬어요. 여름에 제 방에 에어컨 달겠다고 해서 제가 달지 말라고 했어요. 유아실, 영아실, 사무실까지 다 달고 마지막에 내 방 달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서둘러요. 목사 방부터 달면 교육부는 안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사실은 고도의 정치죠. -김희태 목사: 그러다가 평생 못 다는 수가 있어. -권혁선 목사: 난 일 년 만에 다 달었어. -김희태 목사: 그거 하나님의 은혜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평생 에어컨 없이 지냈어요. -권혁선 목사: 야 진짜 못됐구나. -김희태 목사: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도 그 교회가 난리더라고요. 그런 사고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권혁선 목사: 옛날 그 목사님 점잖으시잖아요. -김희태 목사: 부흥회 가면 깜짝 놀래요. 그렇게 큰 교회가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어요. 광주도 여름에 굉장히 덥거든. -권혁선 목사: 저 인간이 좋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안 했다가 저 인간이 넥타이 돌려 매면 난리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좋게 이야기할 때 서로 잘하자. 넥타이 돌려 매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알아서 해라. -김희태 목사: (일본 교회 서한결 사모님을 보며) 사모님 모셔다 드릴게요. 가십시다. 서한결 사모: 제가 한번 걸어 가보죠. (동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모님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 카페를 나갔다.) ―(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저희는 좀 더 있다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 동광교회를 소개해 주었을 뿐인데 김희태 목사는 자기 가족들한테도 제가 가문의 은인이라는 말을 늘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실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권혁선 목사가 김 목사한테 어떻게 했다 이런 말 안 합니다. 처음에는 좀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수치로 느끼거든요. 목사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만 제 경우에도 보면 큰 은혜는 하나님과 부모만이 베풀 수가 있고 사람이 베풀면 서로 떠나게 됩니다. 뭐 그것이 인생이죠. 그런데 그런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절체절명(?體?命)의 일인데 나한테는 손 한번만 내밀면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도와줘요. 도움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대부분 얼마 안 가서 (내 추임새를 받아서)잊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욕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멀리 한 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모양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은 정말 큰 사람입니다. 사실 김 목사님한테는 제가 오히려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파닥파닥하는 못된 성질이 제가 있어요. 김희태 목사님하고 40년 우정이 유지된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김 목사님이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생 도움을 받고 삽니다. 제가 그러죠. 김 목사님 잘된 건 하나님께서 나 도와주라고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오히려 뭐 한 놈이 큰소리친다는 격이죠. ―같은 서울남노회 회원들 가운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님은 의리를 지켜요. 제가 복이 많아서 김 목사님을 사귀게 된 거죠. 저는 먼저 부모를 잘 만났어요. 아내도 잘 만나고 자식들도 좋아요. 저는 정말 성도들도 잘 만났어요.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좋은 형님이죠. 나이도 저보다 두 살 위죠. 저는 만 가지가 없는데도 막 채워져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은 정치도 하는데 막상 총회장은 되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순수한 거죠. 시대가 하도 순수하지 않으니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교도 살아 있어요. 사실 김희태 목사는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와 기도와 삶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이고 크리소스톰의 삶과 정치적 성향도 닮았다.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과 정치적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AD 407년 크리소스톰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갔다. 2015-05-03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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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네팔 지진과 목사의 본분
    2015년 4월 25일 81년만의 大지진, 세계 최빈국 네팔 강타에베레스트에선 눈사태… 800명 머물던 베이스캠프 덮쳐 40여명 死傷사망자가 일만 명에 달할 수도 있다는 예측 이번 지진이 발생한 직후 8시간 동안 모두 65차례의 여진(餘震)이 발생했다. 지진의 여파로 발생한 눈사태가 에베레스트산 베이스캠프를 덮쳐 산악인들이 사망하고 생존자는 구조를 기다리며 베이스캠프에 갇혀 있다. 지진 전문가인 로저 빌럼 미국 콜로라도대 교수는 "지각 균열이 120㎞에 걸쳐 생겼고 이번 지진으로 인해 카트만두시 전체가 남쪽으로 3m쯤 이동했다"고 밝혔다. 네팔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는 내륙국으로 면적은 한반도의 3분의 2(14만7181㎢). 인구는 3050만명이고 이 중 80% 이상이 힌두교를 신봉하는 인도계 아리안족이다. 수도는 카트만두(280만명). 1인당 GDP 700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를 비롯, 해발 8000m 이상의 고봉 8곳이 있어 세계 각지에서 등반가들과 트레킹족들이 찾는다. 2001년 왕세자의 총기 난사 사고로 국왕 등 왕족 11명이 몰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겪은 끝에 2006년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석가모니의 탄생지인 룸비니도 이 나라에 있다. 현지에 파견된 세계 각국 신문 기자들의 보도는 참으로 참혹하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시내 도로는 건물 잔해가 널려 걷기도 어려웠다. 현지인과 관광객 수천 명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마냥 배회하고 있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서양인 남녀는 "여진이 무서워 건물로 들어갈 수 없다. 어젯밤도 길거리에서 뜬눈으로 지새웠다"고 말했다. 시내 병원 안은 친지의 생사를 찾는 시민들로 미어터졌다. 치료 공간이 부족해 피범벅이 된 부상자들은 병원 복도 바닥에 누워 수액을 맞았고, 일부는 병원 앞 길거리에 늘어놓은 침대 위에서 치료를 받았다. 일부 시민들은 집에서 들고 나온 이불을 뒤집어쓰고 길바닥에서 쪽잠을 청했다. 먹을 것도 부족해 시민들은 과자나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지진은 히말라야 일대에서 정상 등정을 꿈꾸며 등반에 나선 산악인들의 목숨도 앗아갔다. 동쪽으로 직선거리로 226㎞ 떨어진 에베레스트산의 지표면을 흔들며 눈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뉴욕타임스 등 외신들에 따르면 25일 지진 발생 직후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제1캠프(해발 5943m) 아래 쿰부 얼음폭포 부근에서 눈사태가 일어나 800여명의 등반가와 셰르파들이 머물고 있던 베이스캠프(해발 5334m)를 덮쳐 17명이 사망하고 34명이 다쳤다. 하지만 눈 속에 매몰된 시신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사망자 숫자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구조자 중에는 한국인도 1명 포함돼 있다고 AP는 전했다. 네팔 대지진으로 발생한 대규모 눈사태가 25일 해발 5334m에 있는 에베레스트산 베이스캠프를 덮치면서 산악인들이 머물던 텐트가 종잇조각처럼 구겨졌다. 베이스캠프에 있다가 가까스로 화를 면한 해양생물학자 조지 포울샴(38)은 "마치 50층 높이의 거대한 흰색 빌딩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고 눈사태 당시 상황을 AFP통신에 전했다. 네팔 대지진은 골든타임으로 불리는 72시간이 28일로 끝났다. 그러나 기적 같은 구조 소식이 전해졌다. 지진 80시간 만에 구조된 28살 리시 카날은 무너진 아파트 건물 2층에서 시신 3구와 함께 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됐다. 그는 지진이 난 지 나흘째가 됐는데,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제 소변을 먹으면서 버텼다고 말했다. 현재 사망자는 5천명을 넘어섰고, 부상자는 1만명을 넘어섰다. 여진과 전염병을 피해 탈출하려는 시민들의 행렬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번 지진의 피해가 큰 이유는 1인당 GDP(국내총생산) 약 700달러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네팔이 지진에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철골이나 콘크리트 건물이 드물고 벽돌을 쌓아올려 만든 건물이 대부분인 탓에 지진이 강타하자 속절없이 건물들이 무너져 내려 희생자가 많았다. 1988년 720여명이 사망한 네팔 동부 지진을 현장 조사했던 일본 야마구치대 무라카미 히토미 교수는 "당시 네팔에서는 규모 4 정도 지진에서도 벽돌 건물의 벽이 무너져 내렸다"며 "그때보다 카트만두의 인구가 4배 증가했지만 여전히 건물을 올릴 때 내진 설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자식들에게 모두 똑같은 넓이로 땅을 나눠주도록 규정한 네팔의 독특한 상속법 역시 화를 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땅을 잘게 나눠 갖다 보니 건물당 대지가 갈수록 좁아지게 마련이고, 그렇다 보니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좁은 땅 위에 무리하게 건물을 높게 올린다는 얘기다. 게다가 이번 지진은 진원(震源·지진이 맨 처음 시작된 지하 지점)이 지표면에서 11㎞ 들어간 곳으로 과거 대형 지진들보다 진원이 얕아 피해가 커진 측면도 있다. 진원이 땅바닥과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지진 규모에 비해 지표면의 흔들림이 더 심했다는 뜻이다.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있는 네팔 일대는 지질학적 구조상으로도 지진이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곳이라고 한다. 지구를 구성하는 거대한 지각판(板) 중에서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는 지점이 히말라야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판이 서로 밀어내는 현상이 끊임없이 발생하면서 히말라야 일대는 지질 구조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네팔과 같은 지진에 매몰된 건물 잔해에서 생존자를 찾기 위해 구조견이 사용되곤 한다.  구조견은 후각과 청각을 활용해 재난 현장에서 매몰되거나 실종된 구조자를 찾아내는 개를 뜻한다. 개의 후각은 인간보다 1만 배나 좋고 청각도 50배 이상 좋다고 한다. 그래서 구조견 1마리가 구조대원 30여 명 이상의 수색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1814년 알프스의 한 수도원이 조난자를 찾기 위해 훈련시켰던 세인트버나드 종 ‘배리’라는 개에서 구조견의 유래를 찾는다. 어느 날 배리는 조난자를 찾아냈지만 늑대로 오인한 조난자의 흉기에 찔렸다. 피를 흘리며 수도원으로 돌아온 배리는 끝내 숨을 거뒀다. 이후 수도승들이 배리의 핏자국을 뒤따라가 조난자를 구조해냈다. 영국 군인 앨런 파톤은 1991년 걸프전에 참전했다 머리를 다치고 다리를 잃었다. 그가 다시 삶의 의지를 찾은 건 안내견 ‘엔달(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을 만나면서였다. 2001년 파톤은 또 한 번 위기를 맞았다. 휠체어를 타고 거리로 나섰다 후진하던 차에 치인 것이다. 차는 달아났고 그는 길 한복판에 나뒹굴었다. 이때 엔달은 쓰러진 주인을 끌어다 안전한 위치로 옮기고 담요로 덮어 주었다. 그런 다음 휴대전화를 물어다 주인 옆에 두고, 인근 호텔로 달려가 사람들이 나올 때까지 짖었다. 파톤이 구조된 얘기는 TV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졌고 엔달은 일약 영웅이 되었다. 구조견으로 활용되는 개는 주로 셰퍼드, 스프링거 스패니얼, 래브라도 리트리버다. 이들 종 가운데 보다 좋은 조건을 타고난 녀석을 골라 생후 2개월부터 2~3년간 각종 훈련을 시킨다. 임무수행을 위해 이들은 성기능 제거 수술도 받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체력이다. 한 예로 국내에서 자주 동원되는 산악 실종자 수색을 위해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산속을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은 때로 사람 2만 명 몫을 해내기도 한다. 음식을 멀리하는 것도 힘든 훈련 중 하나다. 현장의 먹을거리에 현혹될 경우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본 쓰나미 현장에서도 생선과 바다 냄새 때문에 각국 구조견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지구를 구성하는 거대한 지각판(板) 중에서 인도판과 유라시아판이 충돌하는 지점이 히말라야이기 때문에 네팔의 지질 구조가 불안정하듯 우리 총회를 지탱하는 세력 구조도 불안정하다. 현재 총회측과 총신측 두 개의 세력이 서로 밀어내는 현상이 상존하면서 제99회 총회 결의와 납골당, 아이티, 제주수양관 등에 대한 이전의 결의들의 이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디모데전서 1:1-8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을 잇는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디모데전서 1:18-19 좋은 혈통과 엄한 훈련으로 무장된 구조견조차 현장의 먹을거리에 현혹될 경우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과 믿음으로 훈련된 우리 목사들도 주인이 없다고 생각되는 총회의 먹을거리가 눈에 띄면 앞뒤 안 가리고 그것을 향해 뛰어들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다. 이것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바울의 말씀처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기 위해 조난당한 생명을 구하는 구조견처럼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5-04-30
    • 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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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30
  • 제주도 선교사 김성욱 목사
    그레고리우스 1세는 수도원장으로 있을 당시 로마 시내 광장을 거닐다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 노예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하얀 피부와 반듯한 용모, 아름다운 머리카락의 노예는 대답했다. “안젤래(angelais, 영국).” 그레고리우스 1세는 노예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안제레(angele, 천사), 천사라구. 그렇게 불릴 만도 하군. 얼굴도 천사와 같으니.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의 후계자들이 분명하군.” 노예는 영국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저 멀리 낙후된 브리튼 섬의 angele, 즉 천사가 보내서 노예가 온 걸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64대 교황(재위: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이 된 이후에도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를 잊지 않았다. 597년에 그는 자기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섬나라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7년 6세기말 섬나라 영국 angelais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에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미개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시절 조선의 개신교는 국내에서의 신앙 전파는 ‘전도’, 해외는 ‘선교’로 구분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사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세상에서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의 주권도 없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선교사는 어디서 활동한 누구일까? 한국 개신교 역사가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하는 인물은 뜻밖에도 1908년 제주도로 파견된 이기풍(1868~1942) 목사이다. 이는 당시 제주도가 육지와는 언어나 풍습이 완전히 달라서 해외나 다름없는데다 실제로 바다 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190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는 당시 개신교 신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의 선교 활동을 자원했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20일 목포에서 제주도를 향하여 조사 한 분과 승선하였으나 소식이 없다가 44일 만에 무사도착이라는 전보를 목포의 가족들에게 보내 왔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활동한 기간은 1908~1915년, 1927~1932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만 12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제주도에 1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고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제주 시내에 있는 성내교회는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처음 세운 교회이자 그의 제주 사역 중심지였던 곳이다. 1908년 1월 중순 평양을 출발한 이 목사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4월 초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한 해녀를 만나 처음 복음을 전했고 얼마 후 몇몇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열었다. 현재 삼도동의 성내교회(기장)는 원래 제주 훈련청이 있던 자리로 1910년 매입해 교회로 사용했다. 교회 입구에는 수령(樹齡)이 300년이 넘는다는 팽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이기풍 목사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성내교회에는 또 이기풍 목사 기념비 등 그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또 한 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 야산에 자리잡은 이기풍 선교기념관이다. 예장 통합 총회가 1998년 5월 이기풍 목사의 선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이 목사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은 대지 1만600평, 연건평 2000여평에 4백5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실을 비롯해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으며, 2인실과 단체가 사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은 4백여 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獨老會·朝鮮耶蘇敎長老會獨立老會의 약칭)를 열면서 시작한 국내 장로교는 광복 후인 1952년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신파(高神派·'出獄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이었던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에서 비롯)가 별도의 교단으로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갈래의 교단이 나뉘게 됐다. 1953년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기독교장로회(기장)와 예수교장로회(예장)로 나뉘었고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를 놓고 이를 찬성하는 예장통합과 반대하는 예장합동이 각각의 교단으로 갈라졌다. 2008년 9월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 4개 교단이 제주도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김영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김용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 임명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장 문상득) 등 장로교 4개 교단은 오는 9월 22~26일 제주도에서 각각 총회를 갖고 수요일인 24일 오후 7시 제주컨벤션센터에서 합동예배를 드렸다. 이 합동예배는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9월 17~19일 제1회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열렸는데, 이때 안수를 받은 목사 7명 중 한 사람인 이기풍(1865~1942) 목사가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선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도 김성욱 목사를 만나려고 4월 15일 인천발 제주행 세월호 예약까지 했다가 사정상 그 다음 달 배편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었다. 해가 바뀌어 2015년 4월 8일 수요일 동광교회 김희태 목사 배려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그는 총신 졸업여행 때 제주도에 올 것을 결심했다. 서울 달동네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그는 구미 상모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1989년 7월 11일 제주이도교회를 설립해 자체 건물의 자립교회로 성장시켰다. 제주시 구남로에 있는 제주이도교회에서 수요 예배 후 담임목사 김성욱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구미공고를 졸업하고 염색공장 해양산업에 취직했는데 그 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 처음 간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예배소리 들렸어요. 그런데 입사서류에 예배 참석 서약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하는 반발심이 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마지못해 사인을 했습니다. 아침 7시에 30분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한 주일에 예배를 일곱 번이나 드려야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은 그냥 시간 때우기로 일관했죠. 기도를 할 줄 압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성탄절이나 여름성경학교 때 과자 얻어먹고 연극 보느라고 일 년에 두세 번 교회에 갔었죠. 그러다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믿어지게 됐어요. 내가 예수님을 언제 영접했느냐 하면 빌리 그래함 집회(1973년 5월 30일 저녁부터 6월 3일 저녁까지 12만 평의 여의도광장에 51만6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김장환 목사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때였습니다.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70명 되는 교회의 청년 몇 명이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어 통역을 통한 초정에 일어나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인솔 전도사님이 현재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님이셨습니다. 명일동에 교회 개척하기 전에 김삼환 목사께서 하일동 망월리의 해양산업 내에 있는 해양교회에서 10여년 사역을 하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해양교회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좀 까다로우셨거든요. 그분이 7개월간 나한테 전도를 하고 믿음의 기초를 세워 주셨어요. 1980년에 명일동에 명일동의 소리라는 뜻으로 명성교회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주도에 와서 목회를 하는데 명성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유명해져서 여기 계신 목사님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 근처에 방을 잡고 하룻밤을 자면서 수요저녁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수요저녁예배 때 설교 말씀하시는 게 해양교회 전도사 시절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겁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흐름과 스타일이 같고 그 시간에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말하시는 겁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방지일 목사님이시거든요. 예전에는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이실 때도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제 큰 교회 목사님이 되셨는데도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하는 폼이나 여러 가지가 너무나 흡사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워하면서 아는 체 할 엄두도 못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주도로 관광오신 명성교회 집사님에게 물어봤더니 김삼환 목사님이 옛날에 해양교회 계셨다는 겁니다.” ―해양교회가 어디 있었어요.“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 있었습니다. 하일동 바로 옆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가나안농군학교 조금 더 들어간 곳입니다. 강 건너 맞은편은 신앙촌 덕소죠. 김삼환 목사님이 제주도에 연합집회 강사로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감동을 받으시고 저희 교회도 한번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문하실 때 11년 된 그레이스로 모시니까 시동도 잘 안 걸리고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 기도도 해 주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기억을 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주 잘하세요. 김삼환 목사님이 떠나실 때 저한테 서울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면 한번 들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뒤 서울에서 연락이 와서 명성교회에 들렸더니 차를 한 대 준비했다 주시는 겁니다. 신앙과 목회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시력은 언제부터 안 좋았습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영양실조였는지 열병 때문이었는지 한번 크게 아팠는데 망막이 찢어지게 됐어요. 망막박리(안구의 안쪽을 덮고 있는 망막층이 찢어지면서 눈 속의 수분이 새어들어 가서 망막이 안구벽으로부터 들뜨는 병적 상태)라고 하죠. 중 2때 병원에 가서 알았어요. 열병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구미공고 실업계를 갔죠. 대학도 못 간다 생각하니 제 처지가 참 슬픈 겁니다. 직장 생활도 힘들 것이다. 군대는 가고 싶어도 안 받아줄 것이다. 이런 나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가난한 부모가 6남매의 다섯째인 내게 재산을 물려줄 처지도 아니고. 그러니까 앞날이 막막하고 절망이 되더라고요. 그때는 죽을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니 답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생각한다는 게 내가 죽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슬퍼할 가족 생각을 하니까 못 죽겠더군요. 그런 가운데 구미공고를 졸업하고 경기도 광주 망월리 염색공장까지 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무슨 기술이든 처음에는 청소 같은 쉬운 일을 하다가 염료로 색을 맞추는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게 되면 시각장애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구미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염색공장에서 7개월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가 있는 직장 골짜기로 보내시어 예수 믿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떻게 달라졌습니까.“대학도 못 갑니다. 무엇이든 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시력 때문에 힘듭니다. 결혼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저한테 시집을 오겠습니까. 그래서 죽자 했던 것인데 이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죄 용서 받은 기쁨이 일어납니다.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내가 살아야 되지 않겠나. 내가 한 사람이라도 살리거나 복음을 전한다면 인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소박한 꿈을 꾸게 되고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소망이 생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가다 막일도 했습니다. 저는 그걸 경험삼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 것이었습니다. 시멘트를 나르는 등짐을 지기도 하고, 곡갱이로 땅을 파기도 하고, 구멍가게도 하고 과일장사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습니다. 밑바닥 일을 하다가 집안의 친척을 통해 교육청 임시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행정공무원 시험도 처음에는 떨어졌지만 결국 합격하고 면접도 잘 봤는데 신체검사에서 시력장애로 떨어지는 겁니다. 지금은 장애인 의무 채용 규정도 있습니다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시력 때문에 군대 안 간 것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그 벽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시직으로 8년 정도 있으면서 통신대학을 해 행정학을 7년 만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격을 갖춰도 신체검사에서 안 되는 겁니다.”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구미제일교회를 다니는데 청년부 담당 목사님도 그러시고 주변에서 자꾸 신학을 해 보라고 그러더군요. 그래도 아무나 신학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먼저는 제가 성직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은 당시에도 제 생각에 목회자가 많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년을 미루다가 결혼 문제를 앞두고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던 결혼 문제가 풀리게 됐죠. 그래서 신학을 마치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까지 오게 하나님께서 구미상모교회를 통해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8살 되던 해 1월에 결혼하고 3월에 대구신학을 하는데 저는 통신대학을 마쳐서 3학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제가 시각장애인인데 누구한테 청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구미제일교회 자매(박찬혜 사모)가 저한테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 직장은 임시직 신분이고 앞길이 막막한데 어떤 자매한테 결혼해 달라는 염치가 생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김성욱 목사는 지금 봐도 잘생겼다고 말을 했다.) 아니 잘생기면 뭐 합니까. 경제력이 있어야 되고 직장이 번듯해야죠. 그래서 저는 앞길이 막막하고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해도 좋다는 겁니다. 신학을 해도 남들이 안 가는 곳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앞날이 정말 불투명하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각오한 터라 잘 견디더라고요.” ―시각장애의 약시(弱視)인데 정상인 같이 보입니다. “눈이 푹 들어갔거나 검은 안경을 쓰면 시각장애인으로 보일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고 정상인 같이 보여 참 감사하죠. 한 눈을 가리면 그냥 희미하게만 보이죠. 양쪽으로 보면 시력검안표의 위에서 두 번째 것까지 큰 글자만 보입니다. 시력이 0.2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은 가까이 오면 보입니다. 좀 떨어져 있으면 안 보입니다. 보는 범위도 정상인의 1/5정도 밖에 안 보입니다. 한때는 점자를 배울 생각도 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독일제 확대경으로 봅니다. 모니터를 볼 때는 화면을 키우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확대경을 들이대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는 요약을 해서 확대경으로 보면서 합니다.” ―설교할 때 보니 아주 자연스럽던데요. “오래 숙달돼서 그럴 겁니다.” ―어떻게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까.“총신 졸업반 때 김의원 교수 인솔로 이곳에 평생 처음으로 졸업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여행하고는 인연이 없었거든요. 그때 제주도는 우상숭배, 관광지, 열악한 교회 환경 등 인기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 사역지가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주도에 가서 목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구미상모교회 전도사 친구가 제게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정이 되어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1989년 구미상모교회의 파송을 받았으니 이제 26년이나 됐네요. 7월 11일이면 정식으로 26주년이 되는군요.” ―지난날을 생각하면 특별히 어떤 게 기억이 되시나요. “제주도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건강이나 실력이나 저보다 다 나은 분들이죠.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움이 많죠.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말씀이 더욱 은혜로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구미상모교회의 파송과 지원을 받아 개척의 특혜와 혜택을 많이 받은 목사이기도 합니다. 구미상모교회의 배경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생활비와 교회 건물 월세를 몇 년간 지원해 주고 교회 지을 때 1억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기도도 해 주시고 또 상모교회 기관들에서도 후원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전도국장 시절 90년대에 이도교회가 지하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 건너 길가의 작은 건물 지하 23평을 쓰고 있었죠. 거기서 6년 반 있었습니다. 그 후 땅을 사서 이쪽으로 오게 됐죠.” ―교세가 어떻게 되나요.“지금 교세는 어린이 포함 한 200명쯤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주일 장년 출석은 80에서 90명 사이죠.” ―1년 예산은 얼마나 되나요.“건축비까지 다 합쳐 2억 정도 됩니다.” ―부채는 얼마나 됩니까.“부채는 교회 증축할 때 5억이었는데 2억 2천 갚고 지금은 2억 8천 남았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1억을 후원해 주고 우리 교회가 헌금을 하고 해서 빚이 줄었습니다. 아이엠에프 같으면 어려울 텐데 지금은 이자가 많이 내려가서 이자 부담은 그렇게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헌금으로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실 때 목사님의 핸디캡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제가 제일 힘들 때가 처음 개척했을 때 두 번 철거해야 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주민들이 좋아하지를 않았습니다. 준공검사가 안 된 건물에 교회가 들어왔다는 것을 빌미로 구청에 고발해서 준공검사를 안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달 동안 철거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건물 주인하고 뒷집하고 건물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지하를 쓰고 있는 데도 용도변경을 안 하고 쓴다며 고발을 해서 철거를 하고 보름 동안 교회 예배당 사용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한 3년쯤 지나 시력 장애가 심해져서 길을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이지 않아 소리로 알아야만 하고 길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는 겁니다. 시력이 현격하게 나빠져서 사람이나 사물을 거의 못 알아보는 지경까지 간 겁니다. 그때는 교회가 기초가 선 것도 아니고 식구도 하나 더 늘어 둘째 딸이 생기고 지하실에서 어머니도 모시고 있는데 시력까지 나빠지니 절망이 오더라고요. 저는 운전도 못하죠. 다른 목사님들은 사역하고 전도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니까 꼼짝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런 상황 가운데 가이드포스트에서 1980년대 미국 드라마에서 맥가이버의 상관 배역을 했던 사람의 간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45세에 시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시력을 잃고 나서 생각하니 시력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45년 동안 보게 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시력을 잃거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가져가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을 못 봐도 기도는 할 수 있고 전화를 하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목회를 하자. 내가 못 하는 거나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목사님들이 해 줄 것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전에는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면서 심방을 하고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것도 못 하고 할 수 없는 그때부터 교회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찾아오는 겁니까.“예, 그러는 겁니다. 내가 뛴다고 교회가 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교회가 일어서고 지하실도 채워지는 겁니다. 그때 선교원도 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23평인데 실평수는 한 18평 되는 거죠. 2층을 임대하여 운영하던 어린이선교원도 어린이들이 그때 80명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려고 더 넓은 곳을 찾으니까 건물을 빌려주지를 않는 거예요. 계약까지 해도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형편은 땅 한 평을 사기도 어려웠습니다. 제주도는 임대료도 1년치를 선불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임대료를 빌려 집세를 내고 매달 갚아나갔습니다. 그런데 임대조차 힘드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게 몇 년도였습니까.“95년도였습니다. 사실 기도는 94년부터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땅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을 헌납하신 것과 성도들의 헌금, 대출금 등을 합쳐 222평의 땅을 샀습니다. 땅이 있으니까 조립식 건물이라도 지을까 하다가 지하실 예배당이라도 파자해서 예배당을 마련해 예배를 드리게 됐죠. 그리고 주변이 택지로 바뀌어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교회가 먼저 준비하자는 믿음에서 2011년에 지금의 예배당을 증축하고 리모델링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교회가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교회가 제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육지에서 오신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도교회가 이제는 제주도에서 모범적인 교회이겠는 데요. “자립하는 교회임에 감사하며 좋은 모델이 되고자 꿈꾸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총회적으로 이도교회가 자립교회 안에 들어간 겁니다. “예산이나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빚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총신 몇 회시죠. “79회입니다.” ―이제 고참인데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제가 겪은 바로는 목회자는 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도에 올 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라는 걸 반드시 기억하라고 권면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걸 고백하고 잊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이동수 집사님이라고 구미제일교회에서 만난 분인데 술 마시고 교회 앞에서 행패부리는 남편을 장로로 변화시킨 집사님입니다. 전국여전회연합회 회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겠죠. 그분의 권면은 제가 힘들 때마다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니 책임져 주시고 도와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세월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제2의 인생이 허락된다면 이도교회를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은퇴해 후임에게 물려주고 또 다른 사역으로 파송을 받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를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훌륭한 목회자라도 끝낼 때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회의 끝마무리도 아름답길 원합니다, 일평생 헌신하시다가, 은퇴 후에 대책이 없으신 목회자들을 위해 은퇴 목회자들의 자립 및 선교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주가 가장 적합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제주총회수양관 예정부지가 제주노회로 이관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저와 제주노회 목회자들이 갖고 있습니다,” ―제주수양관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 제주노회만 해도 70대가 몇 분 되고, 60대가 12명, 50대가 15명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갈 데가 없는 은퇴목사들의 자립 공동체가 정말 필요합니다. 총회가 2010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수양관 건립 부지 매입으로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에 대지 2414평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 계획하고 결의한 대로 수양관 규모를 축소해서 지어주시든지(총회임원회와 총회유지재단은 2010년 3월 19일 전국 노회 임원을 초청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기공예배를 드렸다), 아니면 저희 제주노회에 부지를 이관해 주시든지(통합측 총회는 100억대 이기풍선교관을 제주노회에 이관하였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2010년 구입가로 제주노회가 분할 상환할 수 있게 해 주시든지,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장기임대라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서정배 목사)는 2010년 8월 20일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을 건축위원회에 전권을 맡겨 제95회 총회 보고 전까지 설계 계약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했다. 건축위원은 변우상 이태선 최병현 이치우 목사, 최병철 김원래 천충길 장로 등 7인이다. 이와 함께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위원회 사업계획을 용역업체 예다움건축사로부터 보고받고 진행키로 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김삼봉 목사)는 2010년 11월 30일 총회장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수양관 착공시기를 공사 예상금액의 70%가 확보된 후 시행키로 가결했다. 이로써 180억원이 예상되는 제주수양관은 건축기금의 126억원이 마련돼야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그럴듯한 단서를 달아놓고 그들은 너나없이 몰려든 아이티 구호헌금 요리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서 올곧다는 제99회 총회장 백남선과 총무 김창수조차 한국과 미국의 총신과 납골당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2015년 4월 현재까지도 제주도총회수양관에 대한 2009년 제94회 총회(증경총회장이면서 현 법인찬송가공회 이사장 서정배) 결의 시행여부가 오리무중이다. 2015-04-28
    • G.PEOPLE
    • G.PEOPLE
    2015-04-28
  • 러브 바이러스
    2000년 ‘I LOVE YOU’라는 제목의 이메일을 통해 확산된 러브 바이러스는 그 확산 속도가 대단히 빨라 전 세계의 컴퓨터를 거의 감염시켜 마비시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사랑을 고백하는 메일 제목에 사람들이 현혹된 까닭이었다. 사랑이 무엇이기에 그 한 마디에 사람들이 그토록 현혹되었을까? 사랑은 - 생명 이전이고죽음 - 이후이며 -천지창조의 시작이고지구의 해석자 시라기 보다는 마치 잠언 같은 이 짧은 시는 영미문학을 통해 가장 위대한 여류 시인으로 평가되는 에밀리 디킨스(Emily Dickinson, 1830~1886)의 작품이다. 사랑이야말로 ‘천지창조의 시작’이며 ‘지구의 해석자’라고 정의한 에밀리 디킨슨의 삶은 역설적으로 매우 평범하면서도 특이한 것이었다. 55년 5개월 5일을 살고 나서 죽을 때까지 표면적으로 아무런 극적 사건도 없이 평범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골수까지 파고드는 강렬하고 열정적인 삶이었다.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한 번도 엠허스트를 떠나지 않은 것은 물론 자기 집 대문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사랑은 마치 종교와도 같은 것이었다. 1862년 그녀는 가깝게 지내던 홀랜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는 천상의 왕이라 불리는 것보다 차라리 사랑 받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이렇듯 지상의 사랑을 참된 신앙으로 보는 이상주의는 애당초 고통을 수반하게 마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슬픔과 기다림의 갈증을 견뎌내야 하는 아픈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필연적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고 시의 세계에서 삶의 의미와 출구를 찾게 했다. 그녀의 그런 사랑은 체호프의 작품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올렌카의 아름다운 마음이 지닌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퇴직한 팔등문관 플래먀니코프의 딸 올렌카는 자신과 관련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 전심전력을 다해 사랑한다. 그녀는 정말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여인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마음이 여성의 참모습일 것이다. 남성은 여성의 그러한 능력을 조금도 흉내 낼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을 가장 가까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숭고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행위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훌륭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수행해왔고 지금도 수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질 것이다. 여성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몸을 바쳐 헌신하는 사랑의 행위는 남성에게 불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스위스의 의학자와 화학자 그리고 위대한 연금술사였던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는 이런 말을 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못한다.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그러나 이해하는 자는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사랑은 더욱더 위대해진다……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다. 파라셀수스는 여러 전기나 자료를 봐도 결혼은 한적 없지만 그의 곁엔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이 같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사랑과 지식은 비례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겠는가! 세상을 오래 살고 지식을 쌓고 그에 걸맞은 지혜를 갖추면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도 언론은 수많은 사건 사고를 전달하느라 분주하기 짝이 없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모여 살다 보니 어찌 문제나 갈등이 없을 수 있으랴.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갈등의 근본 원인은 적대적 잡초관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지 않거나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잡초로 규정하고 없애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말이다. 교단의 노회와 총회 내에서의 여러 분쟁으로 인한 소송과 재판 과정을 보면 믿음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1-3 2015-04-23
    • G.OPINION
    2015-04-23
  • 설교자의 영광을 회복하자
    개신교는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중요한 위치에 두셨고 그의 구속 계획을 말씀으로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창조의 과정을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을 묘사하기위해 “하나님이 이르시되”(창 1:3, 6, 9, 11, 14, 20, 24, 26)를 8회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상을 바로 세우고, 인간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다(요 1:1-2). 요한 사도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심을 증언 한다(요 1:1).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쓴다. 그리고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역사 진행을 위해서도 말씀의 역할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고,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7). 그러나 그 믿음은 우리 안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들을 위한 것으로 믿어 구원을 받는다(롬 10:9-10).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증언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구원의 시작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처럼 ‘성경 말씀’ 혹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세상’을 ‘오는 세상’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세상 나라’를 ‘하나님 나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말씀은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즈음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독교 신문들이나 인터넷 그리고 심지어 일간 신문들까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비판은 주로 교회의 리더들인 목회자에게 쏠린다. 신부나 스님이 약간의 잘못을 하면 신문 매체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목사가 약간의 잘못을 하면 신문 방송이 떠들썩하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교회를 위해 좋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교회를 높은 기준으로 보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목회자들의 마음은 참으로 괴롭다.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초리가 매섭고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이 모두 진실 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모든 비판이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진실한 목회자들은 이런 비판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고칠 것은 고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여 올바른 목회를 회복해야 한다. 올바른 목회의 첫출발이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늘 말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실 되게 선포되어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는 내가 선포하는 설교의 말씀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균형 있게 선포하는 것인지 옷깃을 여미면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목사들이 설교 본문을 읽은 다음 설교의 내용은 성경 본문과 전혀 다른 이야기만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어떤 목사는 매 주일 설교를 이런저런 제목을 정해 놓고 철학 강의를 하기도 한다. 어떤 목사는 삶에 필요한 좋은 이야기를 매주 설교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종류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편에서 생각해 보자. 성도들은 좋은 도덕 강의를 한 편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성도들은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즐거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사역하신다고 성경 말씀이 가르친다(고전 12:3).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설교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성령의 사역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씀이 선포되는 동한 성령은 근심하며 탄식하고 계실 것이다(엡 4:30).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으면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목사들은 말씀 선포를 통해 기독교의 초월성과 특이성을 강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성도들의 도덕적 삶도 강조해야 한다. 성도들의 도덕적 삶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목사는 “하나님의 전체의 뜻”(the whole counsel of God)을 균형 있게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행 20:27). 목사가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든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설교한다면 결국 성도들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똑같은 하나의 종교로 밖에 달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왜 근래에 와서 더욱 비참하게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의식 있는 목회자들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염려한다. 왜 교회가 무기력해졌을까?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가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사실을 왜 믿으려 하지 않을까? 여기에 목회자의 책임이 뒤 따른다. 목회자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의 절대성을 훼손하면서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비슷한 교훈을 계속 설교함으로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초자연적인 특성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목사들은 성도들의 의식 속에서 기독교의 초월성과 유일성을 빼앗은 것이다. 목사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고 전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느 종교에서나 찾을 수 있는 교훈으로 성도들을 최면에 걸어 놓은 셈이다. 성도들은 더 이상 구원이 기독교 진리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를 주저한다. 한국교회에 연약한 부분들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복음이 한국에 들어오고 교회가 설립된 이후 130여 년간 하나님이 한국 땅에 베푸신 기적 같은 역사를 기억하기 바란다. 한국 땅 곳곳마다 교회당이 없는 곳이 없다. 주일이면 손에 성경책을 들고 예배드리러 나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 교회가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목회자들은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이 모든 일을 누가 이루었는가? 하나님이 한국교회 목회자들을 사용하여 이루지 않았는가? 이는 복음의 능력의 결과이다. 지난 2000년간의 기독교 역사를 보면 시대 시대마다 교회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진실한 목회자들을 사용하여 그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유지하시고 흥왕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아직도 한국교회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실하게 섬길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을 위해 전심을 다 바쳐야 하며 또한 균형 잡힌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한국교회 목사들은 성도들이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영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바른 구원관을 알 수 있도록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균형 잡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찰 수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하는 것도 가르치지만, 또한 이웃과의 관계,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도 가르친다. 그동안 목회자들이 균형 잡힌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결과 한국교회가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설교자의 영광은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 있게 선포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박형용 목사,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명예교수 2015-04-21
    • G.OPINION
    2015-04-21
  • 총회 서기(書記)의 임무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는 승정원에 6명의 승지(承旨)를 두었다.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로 모두 정3품 당상관이다. 왕이 내리는 교지는 승지를 통해 해당 관청에 전달되었고, 왕에게 올리는 공문이나 건의사항 모두 승지를 통해 전해졌다. 정승이나 판서 등 중신이 왕을 면담하거나 중요 회의가 열릴 때 참석해 내용을 기록하는 것도 주관했다. 이 기록이 집대성된 것이 조선 시대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승정원일기》다.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호조, 우승지는 예조, 좌부승지는 병조, 우부승지는 형조, 동부승지는 공조의 일을 분담하여 맡아보게 하고 각 업무에 관해 국왕의 자문 역할도 하였다. 승정원은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그 역할이 중대하였다. 승지는 공식적인 권한 이상의 힘을 가졌다.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데서 생기는 힘이다. 종종 정승보다 승지의 권력이 강했다. 세조 때 한명회, 인조 때 김지점, 정조 때 홍국영 등 조선 시대 대표적 세도가들이 승지 자리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래서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013년 8월 5일에 박근혜 정부의 제2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임명되어 ‘왕실장’으로 불린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당·청 핵심인사들과의 만찬에서 자신의 임무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대통령 뜻을 밖에 전하고 바깥 이야기를 대통령에게 전할 뿐이다. 옛날 말로 나는 승지다.” 비서관 또는 성경의 필사자. 후기에는 율법 교육을 받은 사람. “수를 세다”를 의미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히브리어 소페르는 “비서관”, “서기관”, “필사자”로 번역되며, 이 용어는 학식이 있는 사람을 암시한다. 이집트의 서기관은 대개 하층 계급이지만 명석하고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색깔의 잉크를 담을 수 있도록 우묵한 곳이 여러 개 있는 팔레트와 물병과 갈대 붓이 들어 있는 필통으로 이루어진 용구를 가지고 다녔다. 그는 통용되는 법적 서식과 상업 서식에 정통해 있었다. 그러한 양식들을 작성하고 구술을 받아 적는 일 등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았다. 바빌론에서는 서기관이 전문적인 지위에 있었다. 그의 봉사는 거의 필수적이었는데, 상거래 시 문서를 작성하고 계약 쌍방이 정식으로 서명을 하고 증인을 세울 것이 법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비서관은 갈대 가지로 끝을 뾰족하게 만든 철필(스타일러스)로 쐐기문자를 점토판에 썼다. 그는 철필과 점토판을 갖추고 대부분의 상거래가 행해지는 도시의 성문 가까이에 앉아서 준비하고 있다가, 요구받을 때는 언제든 유료로 일을 해 주곤 하였다. 서기관들은 상거래를 기록하고 편지를 쓰고 문서를 작성하고 신전 기록을 돌보고 그 밖의 사무를 보았다. 히브리인 서기관들은 공증인 역할을 하며 이혼 증서를 작성하고 그 밖의 거래들을 기록하였다. 적어도 후기에는 그들의 수수료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사람들은 사전에 그들과 흥정을 할 수 있었다. 대개 거래하는 쌍방 가운데 한쪽이 수수료를 지불했지만, 어떤 때는 양쪽이 분담하였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기록자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이 표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에스겔 9:3-4 1967년 제52회 총회부터 회록서기로 시작된 이영수 목사 시대는 회록서기와 서기를 12년 동안 오가며 총회 권력을 장악하다가 1979년 제64회 총회 부총회장, 1980년 제65회 총회 총회장으로 14년 지속됐다. 1981년 제66회 총회가 열린 자신의 시무 교회 대전중앙교회에서 본 교단과 전 교계를 아우르던 이영수 목사 시대는 마감됐다. 어쨌든 그의 시대에 사당동과 양지의 총신이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총회회관도 대치동 언덕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의 교단 권력의 조절과 유지 통로는 서기와 회록서기를 오가며 총회 임원회를 장악한 데 있었다. 충남노회는 제132회 정기회가 4월 7일 여명교회에서 열려 윤익세 목사(아산사랑의교회)를 제100회 총회 부서기 후보로 추천했다. 또한 동광주노회도 제115회 정기회가 4월 14일 지원교회에서 열려 고광석 목사(광주서광교회)를 총회 부서기 후보로 추대했다. 두 후보의 면면과 자질을 살펴보건대 앞으로 총회 서기가 제 몫을 다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겠다. 근래 총회 임원회의 서기나 회록서기는 그 기능이 거의 소멸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총회 국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총회 임원회 때는 사무국장도 참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된 셈인지 사무국 국장은 물론이고 부장과 직원까지 참여하여 서기나 회록서기가 해야 할 회의 결의 기록을 대신해 주고 있다. 이런 작태는 옛날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와 축구를 하게 됐을 때 양반들이 그것을 천하게 여겨 종들에게 시켰다는 사례와 다를 바가 없다. 회의 결의 기록은 성경 필사자들의 일점일획이 중요했던 것처럼 자구 하나의 차이로 사건 해결을 그르칠 수가 있고 변조의 위험도 상존한다. 서기의 직무가 얼마나 중요하면 총회장의 직권과 더불어 우리의 헌법에 규정까지 했겠는가. 총회 서기의 임무를 헌법 정치 제 19 장 제 4 조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서기는 회중 의사 진행을 자세히 기록하고 일체 문부 서류를 보관하고 상당한 자가 회록의 어떤 부분에 대하여 등본을 청구하면 회의 허락으로 등본하여 줄 수 있다. 서기가 날인한 등본은 각 치리회는 원본과 같이 인정한다. 총회 서기는 옛날 왕이 임명하는 승지나 현재의 대통령이 임명하는 비서실장이 아니다. 총회 서기는 엄연히 총대 유권자들이 직접 투표해서 뽑힌 국회의원과 같은 선출직이다. 작금의 총회장과 총회 직원들에게 매인 직분이 아님을 총회 현 서기나 앞으로 선거에 임하는 부서기 후보들도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헌법의 규정대로 “회중 의사 진행을 자세히 기록하고 일체 문부 서류를 보관”하라는 서기 자신의 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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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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