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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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눈을 움츠리며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이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영어명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헬라명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라는 그의 통칭(通稱)은 그의 전설적인 웅변 때문에 붙여진 황금의 입(golden-mouthed)이라는 뜻이다. 그 통칭은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의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탓이다. 위대한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설교를 듣느라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안투사는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로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의 최우수 학생으로 후계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Diodorus)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그는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 때인 AD 386년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는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 강론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하나는 초고 형식으로,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를 다듬어서 일관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전례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구약 성경에 어떤 제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한 것도 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란 크리소스톰이기에 설교는 항상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 방법에서 얻은 영적 통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강해는 윤리적 권면으로까지 폭을 넓혔다. 그의 설교는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른 한쪽은 성도의 삶의 한복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주석에서 예화로, 성경 원리에서 실제적인 호소로 설교를 전개시켜 갈 때는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며 제스처가 활발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진다. 그러면 기대감에 부푼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하다가 경우에 따라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청중의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환호를 받은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설교자가 박수갈채를 좋아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칠 것이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단순한 전개 형식을 취해 간다. 그럼에도 그가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 까닭이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이 있었다.
둘째,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셋째, 설교를 불붙게 하는 정열이 넘쳐 흘렸다.
이런 4세기의 크리소스톰을 닮은 21세기의 목사가 서울에 한 사람 있다. 그는 동광교회의 김희태 목사다. 1966년 3월 15일 창립된 동광교회에 1987년 12월 25일 김희태 목사가 부임했다. 김희태 목사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인이 2015년 현재 재적 교인 7000여명 장년 주일출석 2500여명으로 성장했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15일 교회 설립 50주년 예배를 드렸다. 이날을 기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23일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를 설립했다. 아카페는 아가페와 카페를 합성한 이름이다. 실제로 일반인을 위한 카페가 아담하고 예쁜 교회 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교회를 위해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기 전 하나님의 은혜로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 교회 앞에 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 주변은 귤 농장과 농토로 둘러싸여 있다.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동광교회 오전 12시 3부 예배. 크리소스톰 같은 황금의 입과 푸른 초장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김희태 목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동광교회 설교단에 섰다. 그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논리적이고 재미있고 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부활하면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 앞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인데 그 당시 중국의 비단과 값이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마포는 최고의 의상을 의미하며 부(눅 16:19)와 정결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계 19:8, 14). 우리가 최고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로 말미암아 오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좌우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행복하세요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태풍 급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기 시작합니다. 이건 태풍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겠는가 하는 걸로 내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서 강 서안에 있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대단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5리 동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촌락 베다니에서 이제 진짜 강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예루살렘에 강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걸 잠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니까 더 큰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세계를 뒤엎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 2천년 역사 아니 세상 2천년 역사에서 예수님을 뽑아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크게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 초라한 나사렛 예수! 무슨 사건이냐.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감격을 온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회가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법이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존경받고 아이들도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없는 걸로 미루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18살 정도 동생 마리아는 15살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가 아픈 겁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질병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말합니다. 지금은 잠을 자도 잘 낫지를 않습니다. 수면제가 나오고부터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잠자면 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맛이 간 사람도 푹 자면 온전해졌습니다. 잠들었으면 병이 다 나을테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강한 태풍을 만들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가운데 도마가 말합니다. 그는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목수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잘 해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는구나 생각하고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결심도 좋고 참 남자다운데 허경영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 부활, 예수님 기적 못 믿겠다고요. 누구는 믿어지는 줄 압니까.
   자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베다니 동네 입구에 마르다가 뛰어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마 그때 마르다의 모습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말 그대로 때맞춰 오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이제 오십니까 하는 원망의 말투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발 후퇴합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어린 두 자매가 남겨져 있으니까 이 슬픔을 가시게 해 줄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엇박자 코미디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대답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갑니까.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은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정답으로 가슴에 사무쳐서 나와야 합니다. 로봇처럼 컴퓨터처럼 스위치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소리를 하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의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마르다도 별 고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것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마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허경영이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는데 개표 결과 0.2% 득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9만7천여표)을 기록하여 7위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득표율입니다. 자기가 축지법을 쓰고 아이큐가 430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을 했대요. 여기까지 했으면 허풍으로 끝났을 건데 도를 지나쳤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한 겁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17대 대선 때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콩밥을 먹고 정신이 들었는지 요즘은 좀 엄한 소리를 덜 하고 노래를 합디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허경영은 사기꾼이 아니라 미쳤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기꾼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허경영보다 좀 더 하신 겁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못 믿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믿게 하시려고 나사로의 무덤까지 오신 겁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입관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사람이지 죽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고 해도 간덩이 큰 사람은 3일 동안 밥을 못 먹고 약한 사람은 30년 식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 더 흉악한 꼴 보기 전에 관 두껑 덮고 못질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냥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따를 것 같죠.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한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을 믿는 게 아니라 죽이고자 합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모의에 못이기는 체 하고 끌려들어가 죽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이 수용이 안 되니까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예수님 금요일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주일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낼 때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우는 곡(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게 전통 장례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가족묘에 안장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에 여인들이 그를 위해 울어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안식일은 참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울어 드리기 위해서 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와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 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를 동산 무덤 관리인으로 알았어요. 예수님 시신이 없으니까 그에게 시신에 기름도 바르고 곡도 해야 하니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때 그가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골치 아프셨을 것 같아요.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셔야 된다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 만날 때마다 “내가 네 할애비다”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들이 사랑하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모두 최대한의 속도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 말고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터키 해안 남부 지역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데 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 유학을 왔습니다. 그가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소식을 전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이상한 무리를 본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을 박살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그 도시를 경계로 이쪽 아시아에 항상 상주하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들 봐라 하며 그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거의 다마스커스에 갔는데 홀연히 하얀 빛이 그를 비추는 겁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번화가 직가(straight street)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거기서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온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때 사울의 머릿속에 있던 성경 지식이 재조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믿기만 하면 머리가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증거를 찾습니다. 스스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이 배반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망을 시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그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사람이 큰 자라는 뜻인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서진(西進)할 때 엄청난 태풍이 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해놓았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창세기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할 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자이십니다. 이것은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쯤 되면 그 예언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두셋만 있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것도 다 제자들이 지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판의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이 되면 재판에서 거짓말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증언해서 손해가 난다면 절대 거짓증언 안 한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직장을 잃고, 추방을 당하고, 거지가 되고, 목이 잘려 죽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데도 아시아보다 로마에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도망을 다니고, 거지가 되고,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부활의 소망,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삐삐를 사용하다가 좀 있으니 몽둥이 같은 이동 전화기를 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별 쓸 일도 없으면서 으스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최신식 스마트폰이 나와 누구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핸드폰 없을 때 전화기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볼 일이 있으면 이웃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숨을 몰아쉬며 우리 집 오시라고 합니다 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모두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행복합니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미래의 어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부활의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환란과 핍박을 이긴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광야에 산에 어디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메시아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게 오십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사기꾼들이 설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 죽었든 다 육체로 부활하여 동시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생명, 젊음, 경륜, 기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9일 오후 2시 제주도 아카페 교회 카페. 
 
제주 제주시 선덕로 바다 앞 도두해수파크 찜질방에서 나와 해안로 정류장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17번 버스를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다른 한분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본 나고야 교회 목사님의 한국 사모님이었다. 그분도 제주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일본의 아들들 때문에 제주도 땅을 정리하려고 오셨단다. 정류장 건너에는 아침 선잠에 눈비비고 나온 것 같은 청색의 푸른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듯 밀려와 마음 깊숙이 할 말이 많은 듯 해안에 부딪혔다.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늘었다. 마침내 온 17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와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달빛빌리지 앞 푸른 초장 팻말이 있는 곳에 내렸다. 제주도 화석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김희태 목사가 아들 목사와 귤 밭을 맨발로 한 고랑씩을 맡아 매고 있었다. 차를 대접받은 뒤 두 달 전 설립된 근처의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로 갔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순대국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교회 뒤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는 평안교회 부목을 거쳐 1988년 인천의 희망교회와 풍성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했다. 그러다 그는 2015년 3월 23일 동광교회 50주년을 기려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설립한 아카페(A Cafe)교회에 부임했다.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두 사람은 총신 77회 동창이면서 절친이고 나이는 52년생인 권 목사보다 김 목사가 두 살 위다)가 1987년 동광교회 부임하실 때 제가 그랬죠. 교회 출석 교인이 2000명이 넘을 거다. 제가 말하는 건 장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입니다. 요새 통계로 말하면 7000이지만 주일 출석 장년 교인만 2000이 넘는다고 한 거죠. 그런데 김희태 목사가 안 믿어요. 그래서 제가 뭐랬냐하면.
김희태 목사: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제가 확신했죠.
권혁선 목사: 사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해 줬으니까 그 교회 저력을 알잖아요. 그런데 동광교회는 목사님만 좋은 분이 오면 가능한 교회죠. 문제가 많은 교회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에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의논하다 보니까 모르는 분이 오시면 그게 그거니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서 담임목사를 모시자 그런 겁니다. 그 결과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제가 가면 감당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 목사님이 가면 이건 틀림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큰 교회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가시면 2000명 됩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이 저보다 믿음이 없어가지고 그럴리 없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동광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됩니다 하면서 그때 김 목사님과 약속을 했어요. 2000명이 되면 저한테 선교비 천불씩 후원해 주기로.
김희태 목사: 그게 아니라 두당 1불씩 후원해 주기로. 2000명 넘어가면 2000불 하기로.
권혁선 목사: 2000명 훨씬 넘어갈 거라고 했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열티 계산 개념으로 두당 1불씩 하기로 했습니다.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선교지로 갔는데 안 주는 겁니다.
김희태 목사: 저는 두 가지 확신을 가졌어요. 2000명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목회 잘 하는 목사가 선교사 갈 일이 있겠느냐.
권혁선 목사: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요. 목회를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부터 다음 선교지를 어디로 가느냐 여기서 관두면 어디로 갈 것이냐를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일본을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 쪽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랬는데.
김희태 목사: 특별히 일본 낫토(대두를 낫토균을 이용해 발효시킨 한국의 청국장과 유사한 일본 전통의 식품으로 미소와 함께 중세 일본의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었다)를 좋아하죠. 우리 교인들도 낫토, 낫토해. 나는 안 좋아해요.
권혁선 목사: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여기서는 한인 목회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한인 목회를 하려면 문제가 뭐냐면 다른 목사들과 부딪칠 것 같은 겁니다.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분이 캄보디아를 가자고 해요. 캄보디아를 도와달라는 거죠. 그래서 가봤는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참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캄보디아 백성이 불쌍했습니다. 외국 나가서 공항에서 울어본 나라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나라 민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이 친구(김희태 목사를 가리키며)가 문제예요.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많이 도와줬죠. 그 동안 도와준 걸 계산해 보니까 200만불이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걸 다 해놓으니까 내가 왕 노릇 할 것 같은 겁니다. 김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들어와서 이 교회를 하게 된 겁니다.
김희태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비 2000불 약속했는데 교회가 도저히 형편이 안 좋아서 50만원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몇 십만원 보내고.
권혁선 목사: 사실은 2000불 이상 했어. 왜냐면 그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거고.
김희태 목사: 제직회에서 권 목사님 아는 집사가 있어요. 그가 막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집사님, 권 목사님한테 선교비 많이 준다고 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집사님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권 목사님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2000불씩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거 보내는 겁니다. 그 집사님 내려갔어 건강이 안 좋아서.
권혁선 목사: 그랬다고 그러데.
김희태 목사: 그런데 신장하고 간이 안 좋데. 신장 약을 먹으면 간한테 안 좋고 간 약을 먹으면 신장한테 안 좋아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네. 그래서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서한결 사모:(제주 해안가에서 만난 일본 나고야 교회 사모)네, 서양 의학적으로는 그런데 동양 의학적으로 진짜 몸의 원리를 알면 신장(腎臟)은 어머니고 간장(肝臟)은 아들입니다. 옛날에 어린애들이 아프면 엄마가 젖을 토해서 아이한테 줍니다. 신장이 약을 먹으면 간장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알고 한의학적으로 하면 아주 좋죠.
권혁선 목사: 양약으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서한결 사모: 한의학에서 그걸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고 합니다.
김희태 목사: 아이고 사모님 제주도 아카페교회 오시면 우리 노틀(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로 외래어 발음법상 라오터우얼로 소리 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노틀’이 됐다) 클래스가 죽음을 한 단계 올리겠네요.
―그래서 동광교회 장년 주일출석 2000명이 넘어서 선교비 지원이 잘 됐습니까.
권혁선 목사: 아니 2000명은 당연히 넘었죠. 넘었는데 500불밖에 안 보내는 겁니다. 제가 캄보디아 간다고 하니까 1000불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안 믿었습니다. 왜냐. 솔직하게 말해서 김 목사님하고 저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 말고 딴 데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요. 그러나 저하고는 절친이잖아요. 저한테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 파송 교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만원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후원금입니다.
김희태 목사: 그랬었구나. 20만원 내놔.
권혁선 목사: 왜냐면 이건 빤한 계산입니다.
김희태 목사: 친구라 못한 겁니다.
권혁선 목사: 그러나 보통 모르는 목사님들은 친구지간에 안 해 주느냐고 해요. 사실 친구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제삼자는 오히려 딴 데 도와주면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김희태 목사: 우리가 백 불 이백 불은 수십 군데고. 파송이 일곱 가정이에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가운데에서 친구한테 많이 보낸다는 건 명분을 세울 수가 없어요.
서한결 사모: 친구라는 걸 알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권혁선 목사: 온 교회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둘이 아삼륙(마작에서 쓰는 골패의 쌍진아, 쌍장삼, 쌍준륙 이른바 쌍비연이라 하여 좋은 패가 있는데 이 세 쌍의 패 끝 자를 딴 말로 단짝을 비유하거나 서로 호흡이 잘 맞을 때 쓰는 말)이라는 거 다 알아요.
김희태 목사: 게다가 가끔 들어오면 설교시켜야지.
권혁선 목사: 그런데 사실은 2000불이 아니라 더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캄보디아 교회 뭐 할 때도 천만 원 헌금해 줬지
김희태 목사: 그랬던가.
권혁선 목사: 자동차도 두 대 보내줬죠. 뭐 이래저래 하면 솔찬합니다. 제가 자동차 가지고 사기 많이 쳤습니다. (동석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차를 일부러 안 사요. 오토바이 타거나 걸어다녀요.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오면 헌금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지내시면 되냐고. 일단 그 돈을 받아요. 간 다음에 전화를 해요. 내가 지금 원주민을 위해 그 돈을 써야 되는데 양해해 달라고 말해요. 저한테는 우선순위가 원주민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데 원주민보다는 당장 보이는 대상에 헌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목사님 차 사세요 하고 돈은 줘도 원주민을 위하는 데는 잘 안 주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받은 다음에 원주민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많이 우려먹었죠. 그러다보니 차를 안 타고 일부러 걸어 다닌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담임 목회할 때도 그랬어요. 여름에 제 방에 에어컨 달겠다고 해서 제가 달지 말라고 했어요. 유아실, 영아실, 사무실까지 다 달고 마지막에 내 방 달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서둘러요. 목사 방부터 달면 교육부는 안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사실은 고도의 정치죠.
김희태 목사: 그러다가 평생 못 다는 수가 있어.
권혁선 목사: 난 일 년 만에 다 달었어.
김희태 목사: 그거 하나님의 은혜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평생 에어컨 없이 지냈어요.
권혁선 목사: 야 진짜 못됐구나.
김희태 목사: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도 그 교회가 난리더라고요. 그런 사고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권혁선 목사: 옛날 그 목사님 점잖으시잖아요.
김희태 목사: 부흥회 가면 깜짝 놀래요. 그렇게 큰 교회가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어요. 광주도 여름에 굉장히 덥거든.
권혁선 목사: 저 인간이 좋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안 했다가 저 인간이 넥타이 돌려 매면 난리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좋게 이야기할 때 서로 잘하자. 넥타이 돌려 매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알아서 해라.
김희태 목사: (일본 교회 서한결 사모님을 보며) 사모님 모셔다 드릴게요. 가십시다.
서한결 사모: 제가 한번 걸어 가보죠. (동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모님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 카페를 나갔다.)
―(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저희는 좀 더 있다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 동광교회를 소개해 주었을 뿐인데 김희태 목사는 자기 가족들한테도 제가 가문의 은인이라는 말을 늘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실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권혁선 목사가 김 목사한테 어떻게 했다 이런 말 안 합니다. 처음에는 좀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수치로 느끼거든요. 목사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만 제 경우에도 보면 큰 은혜는 하나님과 부모만이 베풀 수가 있고 사람이 베풀면 서로 떠나게 됩니다. 뭐 그것이 인생이죠. 그런데 그런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절체절명(?體?命)의 일인데 나한테는 손 한번만 내밀면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도와줘요. 도움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대부분 얼마 안 가서 (내 추임새를 받아서)잊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욕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멀리 한 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모양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은 정말 큰 사람입니다. 사실 김 목사님한테는 제가 오히려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파닥파닥하는 못된 성질이 제가 있어요. 김희태 목사님하고 40년 우정이 유지된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김 목사님이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생 도움을 받고 삽니다. 제가 그러죠. 김 목사님 잘된 건 하나님께서 나 도와주라고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오히려 뭐 한 놈이 큰소리친다는 격이죠.
―같은 서울남노회 회원들 가운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님은 의리를 지켜요. 제가 복이 많아서 김 목사님을 사귀게 된 거죠. 저는 먼저 부모를 잘 만났어요. 아내도 잘 만나고 자식들도 좋아요. 저는 정말 성도들도 잘 만났어요.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좋은 형님이죠. 나이도 저보다 두 살 위죠. 저는 만 가지가 없는데도 막 채워져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은 정치도 하는데 막상 총회장은 되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순수한 거죠. 시대가 하도 순수하지 않으니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교도 살아 있어요.
 
사실 김희태 목사는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와 기도와 삶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이고 크리소스톰의 삶과 정치적 성향도 닮았다.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과 정치적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AD 407년 크리소스톰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갔다.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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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제 17호 크리소스톰 김희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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