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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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우스 1세는 수도원장으로 있을 당시 로마 시내 광장을 거닐다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시장에서 매매된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한 노예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하얀 피부와 반듯한 용모, 아름다운 머리카락의 노예는 대답했다.
“안젤래(angelais, 영국).”
그레고리우스 1세는 노예의 대답에 충격을 받았다.
“안제레(angele, 천사), 천사라구. 그렇게 불릴 만도 하군. 얼굴도 천사와 같으니. 하늘나라에 사는 천사들의 후계자들이 분명하군.”
노예는 영국에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레고리우스 1세는 저 멀리 낙후된 브리튼 섬의 angele, 즉 천사가 보내서 노예가 온 걸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64대 교황(재위: 590년 9월 3일 - 604년 3월 12일)이 된 이후에도 그레고리우스 1세는 잉글랜드를 잊지 않았다. 597년에 그는 자기 수도원의 수사들을 선교사로 임명하여 섬나라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597년 6세기말 섬나라 영국 angelais에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 1세에게 선교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미개지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시절 조선의 개신교는 국내에서의 신앙 전파는 ‘전도’, 해외는 ‘선교’로 구분했다. 그 당시의 우리는 사실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를 세상에서 찾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국가의 주권도 없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선교사는 어디서 활동한 누구일까? 한국 개신교 역사가 최초의 선교사로 기록하는 인물은 뜻밖에도 1908년 제주도로 파견된 이기풍(1868~1942) 목사이다. 이는 당시 제주도가 육지와는 언어나 풍습이 완전히 달라서 해외나 다름없는데다 실제로 바다 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190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은 7명 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는 당시 개신교 신앙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의 선교 활동을 자원했다. 이기풍 목사는 1908년 2월 20일 목포에서 제주도를 향하여 조사 한 분과 승선하였으나 소식이 없다가 44일 만에 무사도착이라는 전보를 목포의 가족들에게 보내 왔다고 한다. 그가 제주도에서 활동한 기간은 1908~1915년, 1927~1932년 등 두 차례에 걸쳐 만 12년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제주도에 1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고 신앙의 씨앗을 뿌렸다.
 
제주 시내에 있는 성내교회는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처음 세운 교회이자 그의 제주 사역 중심지였던 곳이다. 1908년 1월 중순 평양을 출발한 이 목사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후 4월 초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는 바닷가에서 한 해녀를 만나 처음 복음을 전했고 얼마 후 몇몇 사람들과 함께 교회를 열었다.
 
현재 삼도동의 성내교회(기장)는 원래 제주 훈련청이 있던 자리로 1910년 매입해 교회로 사용했다. 교회 입구에는 수령(樹齡)이 300년이 넘는다는 팽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이기풍 목사가 이 나무 밑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했다”는 안내문이 눈에 띈다. 성내교회에는 또 이기풍 목사 기념비 등 그의 활동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제주도에서 이기풍 목사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또 한 곳은 북제주군 조천읍 와흘리 야산에 자리잡은 이기풍 선교기념관이다. 예장 통합 총회가 1998년 5월 이기풍 목사의 선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이 목사의 사진과 유품 등이 전시돼 있다. 이 기념관은 대지 1만600평, 연건평 2000여평에 4백5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예배실을 비롯해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으며, 2인실과 단체가 사용할 수 있는 숙박 시설은 4백여 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獨老會·朝鮮耶蘇敎長老會獨立老會의 약칭)를 열면서 시작한 국내 장로교는 광복 후인 1952년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신파(高神派·'出獄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이었던 한상동 목사와 고려신학교에서 비롯)가 별도의 교단으로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갈래의 교단이 나뉘게 됐다. 1953년 자유주의신학 문제로 기독교장로회(기장)와 예수교장로회(예장)로 나뉘었고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를 놓고 이를 찬성하는 예장통합과 반대하는 예장합동이 각각의 교단으로 갈라졌다.
 
2008년 9월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 4개 교단이 제주도에서 한 자리에 모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장 김영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장 김용실),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장 임명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총회장 문상득) 등 장로교 4개 교단은 오는 9월 22~26일 제주도에서 각각 총회를 갖고 수요일인 24일 오후 7시 제주컨벤션센터에서 합동예배를 드렸다. 이 합동예배는 평양대부흥의 시발점이 된 평양장대현교회에서 1907년 9월 17~19일 제1회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열렸는데, 이때 안수를 받은 목사 7명 중 한 사람인 이기풍(1865~1942) 목사가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해 선교활동에 나선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작년 이맘때도 김성욱 목사를 만나려고 4월 15일 인천발 제주행 세월호 예약까지 했다가 사정상 그 다음 달 배편으로 변경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세월호는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48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소속의 인천발 제주행 연안 여객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탑승인원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었다. 해가 바뀌어 2015년 4월 8일 수요일 동광교회 김희태 목사 배려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게 되었다. 그는 총신 졸업여행 때 제주도에 올 것을 결심했다. 서울 달동네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그는 구미 상모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1989년 7월 11일 제주이도교회를 설립해 자체 건물의 자립교회로 성장시켰다. 제주시 구남로에 있는 제주이도교회에서 수요 예배 후 담임목사 김성욱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구미공고를 졸업하고 염색공장 해양산업에 취직했는데 그 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 처음 간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예배소리 들렸어요. 그런데 입사서류에 예배 참석 서약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하는 반발심이 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마지못해 사인을 했습니다. 아침 7시에 30분 날마다 예배를 드리는데 한 주일에 예배를 일곱 번이나 드려야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은 그냥 시간 때우기로 일관했죠. 기도를 할 줄 압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성탄절이나 여름성경학교 때 과자 얻어먹고 연극 보느라고 일 년에 두세 번 교회에 갔었죠. 그러다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믿어지게 됐어요. 내가 예수님을 언제 영접했느냐 하면 빌리 그래함 집회(1973년 5월 30일 저녁부터 6월 3일 저녁까지 12만 평의 여의도광장에 51만6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김장환 목사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때였습니다.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70명 되는 교회의 청년 몇 명이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어 통역을 통한 초정에 일어나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인솔 전도사님이 현재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님이셨습니다. 명일동에 교회 개척하기 전에 김삼환 목사께서 하일동 망월리의 해양산업 내에 있는 해양교회에서 10여년 사역을 하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해양교회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좀 까다로우셨거든요. 그분이 7개월간 나한테 전도를 하고 믿음의 기초를 세워 주셨어요. 1980년에 명일동에 명일동의 소리라는 뜻으로 명성교회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주도에 와서 목회를 하는데 명성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유명해져서 여기 계신 목사님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 근처에 방을 잡고 하룻밤을 자면서 수요저녁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수요저녁예배 때 설교 말씀하시는 게 해양교회 전도사 시절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겁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흐름과 스타일이 같고 그 시간에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말하시는 겁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방지일 목사님이시거든요. 예전에는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이실 때도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제 큰 교회 목사님이 되셨는데도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하는 폼이나 여러 가지가 너무나 흡사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워하면서 아는 체 할 엄두도 못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주도로 관광오신 명성교회 집사님에게 물어봤더니 김삼환 목사님이 옛날에 해양교회 계셨다는 겁니다.”
 
―해양교회가 어디 있었어요.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 있었습니다. 하일동 바로 옆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가나안농군학교 조금 더 들어간 곳입니다. 강 건너 맞은편은 신앙촌 덕소죠. 김삼환 목사님이 제주도에 연합집회 강사로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감동을 받으시고 저희 교회도 한번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문하실 때 11년 된 그레이스로 모시니까 시동도 잘 안 걸리고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 기도도 해 주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기억을 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주 잘하세요. 김삼환 목사님이 떠나실 때 저한테 서울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면 한번 들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뒤 서울에서 연락이 와서 명성교회에 들렸더니 차를 한 대 준비했다 주시는 겁니다. 신앙과 목회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시력은 언제부터 안 좋았습니까.
“어려서부터 그랬어요. 영양실조였는지 열병 때문이었는지 한번 크게 아팠는데 망막이 찢어지게 됐어요. 망막박리(안구의 안쪽을 덮고 있는 망막층이 찢어지면서 눈 속의 수분이 새어들어 가서 망막이 안구벽으로부터 들뜨는 병적 상태)라고 하죠. 중 2때 병원에 가서 알았어요. 열병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도 구미공고 실업계를 갔죠. 대학도 못 간다 생각하니 제 처지가 참 슬픈 겁니다. 직장 생활도 힘들 것이다. 군대는 가고 싶어도 안 받아줄 것이다. 이런 나에게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가난한 부모가 6남매의 다섯째인 내게 재산을 물려줄 처지도 아니고. 그러니까 앞날이 막막하고 절망이 되더라고요. 그때는 죽을 생각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막상 죽을 생각을 하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을 때니 답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생각한다는 게 내가 죽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실까. 슬퍼할 가족 생각을 하니까 못 죽겠더군요. 그런 가운데 구미공고를 졸업하고 경기도 광주 망월리 염색공장까지 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무슨 기술이든 처음에는 청소 같은 쉬운 일을 하다가 염료로 색을 맞추는 전문적인 기술을 익히게 되면 시각장애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구미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염색공장에서 7개월 있는데 하나님께서 교회가 있는 직장 골짜기로 보내시어 예수 믿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대학도 못 갑니다. 무엇이든 할 수 없습니다. 직장생활도 시력 때문에 힘듭니다. 결혼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저한테 시집을 오겠습니까. 그래서 죽자 했던 것인데 이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죄 용서 받은 기쁨이 일어납니다.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으니 내가 살아야 되지 않겠나. 내가 한 사람이라도 살리거나 복음을 전한다면 인생이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소박한 꿈을 꾸게 되고 뭔가 할 수 있겠다는 소망이 생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밑바닥부터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가다 막일도 했습니다. 저는 그걸 경험삼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정말 그것밖에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 것이었습니다. 시멘트를 나르는 등짐을 지기도 하고, 곡갱이로 땅을 파기도 하고, 구멍가게도 하고 과일장사도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습니다. 밑바닥 일을 하다가 집안의 친척을 통해 교육청 임시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행정공무원 시험도 처음에는 떨어졌지만 결국 합격하고 면접도 잘 봤는데 신체검사에서 시력장애로 떨어지는 겁니다. 지금은 장애인 의무 채용 규정도 있습니다만 그때는 그런 게 없었습니다. 시력 때문에 군대 안 간 것이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그 벽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임시직으로 8년 정도 있으면서 통신대학을 해 행정학을 7년 만에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격을 갖춰도 신체검사에서 안 되는 겁니다.”
 
―신학은 어떻게 하게 되었습니까.
“구미제일교회를 다니는데 청년부 담당 목사님도 그러시고 주변에서 자꾸 신학을 해 보라고 그러더군요. 그래도 아무나 신학을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먼저는 제가 성직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은 당시에도 제 생각에 목회자가 많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2년을 미루다가 결혼 문제를 앞두고 신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그리고 풀리지 않던 결혼 문제가 풀리게 됐죠. 그래서 신학을 마치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주도까지 오게 하나님께서 구미상모교회를 통해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28살 되던 해 1월에 결혼하고 3월에 대구신학을 하는데 저는 통신대학을 마쳐서 3학년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어떻게 하시게 됐습니까.
“제가 시각장애인인데 누구한테 청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구미제일교회 자매(박찬혜 사모)가 저한테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 직장은 임시직 신분이고 앞길이 막막한데 어떤 자매한테 결혼해 달라는 염치가 생기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내의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사실 김성욱 목사는 지금 봐도 잘생겼다고 말을 했다.) 아니 잘생기면 뭐 합니까. 경제력이 있어야 되고 직장이 번듯해야죠. 그래서 저는 앞길이 막막하고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해도 좋다는 겁니다. 신학을 해도 남들이 안 가는 곳으로 가려고 하기 때문에 앞날이 정말 불투명하다고 말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고 이런저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처음부터 각오한 터라 잘 견디더라고요.”
 
―시각장애의 약시(弱視)인데 정상인 같이 보입니다.
“눈이 푹 들어갔거나 검은 안경을 쓰면 시각장애인으로 보일 것입니다만 그렇지 않고 정상인 같이 보여 참 감사하죠. 한 눈을 가리면 그냥 희미하게만 보이죠. 양쪽으로 보면 시력검안표의 위에서 두 번째 것까지 큰 글자만 보입니다. 시력이 0.2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은 가까이 오면 보입니다. 좀 떨어져 있으면 안 보입니다. 보는 범위도 정상인의 1/5정도 밖에  안 보입니다. 한때는 점자를 배울 생각도 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는 독일제 확대경으로 봅니다. 모니터를 볼 때는 화면을 키우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확대경을 들이대고 봅니다. 나이가 들어가니까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설교는 요약을 해서 확대경으로 보면서 합니다.”
 
―설교할 때 보니 아주 자연스럽던데요.
“오래 숙달돼서 그럴 겁니다.”
 
―어떻게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까.
“총신 졸업반 때 김의원 교수 인솔로 이곳에 평생 처음으로 졸업여행을 오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여행하고는 인연이 없었거든요. 그때 제주도는 우상숭배, 관광지, 열악한 교회 환경 등 인기가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제 사역지가 이곳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제주도에 가서 목회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구미상모교회 전도사 친구가 제게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정이 되어 제주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1989년 구미상모교회의 파송을 받았으니 이제 26년이나 됐네요. 7월 11일이면 정식으로 26주년이 되는군요.”
 
―지난날을 생각하면 특별히 어떤 게 기억이 되시나요.
“제주도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오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건강이나 실력이나 저보다 다 나은 분들이죠. 그러나 의욕만 가지고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움이 많죠. 지나고 보니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말씀이 더욱 은혜로 실감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구미상모교회의 파송과 지원을 받아 개척의 특혜와 혜택을 많이 받은 목사이기도 합니다. 구미상모교회의 배경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생활비와 교회 건물 월세를 몇 년간 지원해 주고 교회 지을 때 1억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기도도 해 주시고 또 상모교회 기관들에서도 후원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전도국장 시절 90년대에 이도교회가 지하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저 건너 길가의 작은 건물 지하 23평을 쓰고 있었죠. 거기서 6년 반 있었습니다. 그 후 땅을 사서 이쪽으로 오게 됐죠.”
 
―교세가 어떻게 되나요.
“지금 교세는 어린이 포함 한 200명쯤 되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죠. 주일 장년 출석은 80에서 90명 사이죠.”
 
―1년 예산은 얼마나 되나요.
“건축비까지 다 합쳐 2억 정도 됩니다.”
 
―부채는 얼마나 됩니까.
“부채는 교회 증축할 때 5억이었는데 2억 2천 갚고 지금은 2억 8천 남았습니다. 구미상모교회에서 1억을 후원해 주고 우리 교회가 헌금을 하고 해서 빚이 줄었습니다. 아이엠에프 같으면 어려울 텐데 지금은 이자가 많이 내려가서 이자 부담은 그렇게 힘들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건축헌금으로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목회를 하실 때 목사님의 핸디캡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제가 제일 힘들 때가 처음 개척했을 때 두 번 철거해야 할 때였습니다. 교회가 들어오는 것을 주민들이 좋아하지를 않았습니다. 준공검사가 안 된 건물에 교회가 들어왔다는 것을 빌미로 구청에 고발해서 준공검사를 안 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달 동안 철거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건물 주인하고 뒷집하고 건물 경계 때문에 분쟁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지하를 쓰고 있는 데도 용도변경을 안 하고 쓴다며 고발을 해서 철거를 하고 보름 동안 교회 예배당 사용을 못 했습니다. 그리고 한 3년쯤 지나 시력 장애가 심해져서 길을 건널 때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보이지 않아 소리로 알아야만 하고 길이 두세 개로 겹쳐 보이는 겁니다. 시력이 현격하게 나빠져서 사람이나 사물을 거의 못 알아보는 지경까지 간 겁니다. 그때는 교회가 기초가 선 것도 아니고 식구도 하나 더 늘어 둘째 딸이 생기고 지하실에서 어머니도 모시고 있는데 시력까지 나빠지니 절망이 오더라고요. 저는 운전도 못하죠. 다른 목사님들은 사역하고 전도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망에 빠지니까 꼼짝을 못하겠는 거예요. 그런 상황 가운데 가이드포스트에서 1980년대 미국 드라마에서 맥가이버의 상관 배역을 했던 사람의 간증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45세에 시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시력을 잃고 나서 생각하니 시력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가 45년 동안 보게 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도 시력을 잃거나 빼앗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가져가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을 못 봐도 기도는 할 수 있고 전화를 하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목회를 하자. 내가 못 하는 거나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목사님들이 해 줄 것이니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전에는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면서 심방을 하고 전도를 했었습니다. 그것도 못 하고 할 수 없는 그때부터 교회가 조금씩 일어서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인들이 찾아오는 겁니까.
“예, 그러는 겁니다. 내가 뛴다고 교회가 되는 건 아닌 모양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교회가 일어서고 지하실도 채워지는 겁니다. 그때 선교원도 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23평인데 실평수는 한 18평 되는 거죠. 2층을 임대하여 운영하던 어린이선교원도 어린이들이 그때 80명까지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옮기려고 더 넓은 곳을 찾으니까 건물을 빌려주지를 않는 거예요. 계약까지 해도 깨지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를 바꾸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형편은 땅 한 평을 사기도 어려웠습니다. 제주도는 임대료도 1년치를 선불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임대료를 빌려 집세를 내고 매달 갚아나갔습니다. 그런데 임대조차 힘드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게 몇 년도였습니까.
“95년도였습니다. 사실 기도는 94년부터 하기는 했습니다만 이제 본격적으로 교회를 짓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땅이 나왔습니다. 어머니께서 집을 헌납하신 것과  성도들의 헌금, 대출금 등을 합쳐 222평의 땅을 샀습니다. 땅이 있으니까 조립식 건물이라도 지을까 하다가 지하실 예배당이라도 파자해서 예배당을 마련해 예배를 드리게 됐죠. 그리고 주변이 택지로 바뀌어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해서 교회가 먼저 준비하자는 믿음에서 2011년에 지금의 예배당을 증축하고 리모델링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교회가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교회가 제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요사이는 육지에서 오신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도교회가 이제는 제주도에서 모범적인 교회이겠는 데요.
“자립하는 교회임에 감사하며 좋은 모델이 되고자 꿈꾸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총회적으로 이도교회가 자립교회 안에 들어간 겁니다.
“예산이나 재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감사한 일입니다. 빚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총신 몇 회시죠.
“79회입니다.”
 
―이제 고참인데 후배들에게 한 마디 해 주십시오.
“제가 겪은 바로는 목회자는 한 곳에 오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주도에 올 때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라는 걸 반드시 기억하라고 권면해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걸 고백하고 잊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이동수 집사님이라고 구미제일교회에서 만난 분인데 술 마시고 교회 앞에서 행패부리는 남편을 장로로 변화시킨 집사님입니다. 전국여전회연합회 회장도 지내신 분입니다. 지금은 권사님이 되셨겠죠. 그분의 권면은 제가 힘들 때마다 많은 힘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니 책임져 주시고 도와주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세월 어떤 비전을 가지고 계십니까.
“지금은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제2의 인생이 허락된다면 이도교회를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은퇴해 후임에게 물려주고 또 다른 사역으로 파송을 받고 싶습니다. 젊은 세대를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훌륭한 목회자라도 끝낼 때 교회와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회의 끝마무리도 아름답길 원합니다, 일평생 헌신하시다가, 은퇴 후에 대책이 없으신 목회자들을 위해  은퇴 목회자들의 자립 및 선교공동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주가 가장 적합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하여 제주총회수양관 예정부지가 제주노회로 이관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저와 제주노회 목회자들이 갖고 있습니다,”
 
―제주수양관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저희 제주노회만 해도 70대가 몇 분 되고, 60대가 12명, 50대가 15명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갈 데가 없는 은퇴목사들의 자립 공동체가 정말 필요합니다. 총회가 2010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 수양관 건립 부지 매입으로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에 대지 2414평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총회에서 계획하고 결의한 대로 수양관 규모를 축소해서 지어주시든지(총회임원회와 총회유지재단은 2010년 3월 19일 전국 노회 임원을 초청한 가운데 제주도에서 기공예배를 드렸다), 아니면 저희 제주노회에 부지를 이관해 주시든지(통합측 총회는 100억대 이기풍선교관을 제주노회에 이관하였음),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2010년 구입가로 제주노회가 분할 상환할 수 있게 해 주시든지, 건축을 할 수 있도록 장기임대라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서정배 목사)는 2010년 8월 20일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을 건축위원회에 전권을 맡겨 제95회 총회 보고 전까지 설계 계약하여 시행하기로 결의했다. 건축위원은 변우상 이태선 최병현 이치우 목사, 최병철 김원래 천충길 장로 등 7인이다. 이와 함께 제주선교100주년기념수양관 건축위원회 사업계획을 용역업체 예다움건축사로부터 보고받고 진행키로 했다.
 
총회유지재단이사회(이사장:김삼봉 목사)는 2010년 11월 30일 총회장실에서 회의를 열고 제주수양관 착공시기를 공사 예상금액의 70%가 확보된 후 시행키로 가결했다. 이로써 180억원이 예상되는 제주수양관은 건축기금의 126억원이 마련돼야 공사를 진행할 수 있다고 그럴듯한 단서를 달아놓고 그들은 너나없이 몰려든 아이티 구호헌금 요리에 정신이 팔렸다. 그래서 올곧다는 제99회 총회장 백남선과 총무 김창수조차 한국과 미국의 총신과 납골당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2015년 4월 현재까지도 제주도총회수양관에 대한 2009년 제94회 총회(증경총회장이면서 현 법인찬송가공회 이사장 서정배) 결의 시행여부가 오리무중이다.
 
201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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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선교사 김성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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