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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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신 6대 총장 김영우에 거는 기대
    7월 11일 토요일 오후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가뭄에 지친 숲을 거칠게 퍼붓는 소나기가 수락산을 휩싸 안았다. 후덥지근하던 더위도 소나기가 걷어 가버려 한결 시원했다. 7월 10일 금요일 오후 1시 기독신문의 편집국장 강석근과 정론기독신보의 발행인 김만규 목사를 포함해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린 교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이사장실, 총장실, 교수실, 기획실 등이 자리한 총신대 본관 2층 회의실에서 열린 총신대운영이사회(운영이사장 대행 송춘현 목사)에서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가 참석한 이사의 유효투표수 3분의 2를 1차 투표에서 유효투표보다 10표나 넘겨 신임총장으로 선임됐다. 이러한 결과는 역대 총장 선거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화합을 외친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의 진심과 노력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나 총회 정치의 중심이 되는 총신대, 총신신학연구원 출신 김영우 목사는 한국 교계 중요 대표 자리를 섭렵한 길자연 전 총장의 잔여임기를 이어 2년 6개월 동안 총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정해진 시간에 회의실 의자를 메운 102명의 긴장한 표정의 이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필리핀에서 급거 귀국한 이사장 직무대행 송춘현 목사의 매끄러운 사회로 운영이사회가 물 흐르듯 진행됐다. 송춘현 목사는 청천교회를 조기 은퇴한 후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 회의 참석을 위해 필리핀 영주를 위한 서류를 수속 중이었는데 여권을 빼내 오느라 금전과 시간상의 적지 않은 손해를 껴안았다고 한다. 연단 왼쪽 앞자리에 백남선 총회장이 조각처럼 앉아 있고, 운영이사석에는 제100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로 나서느라 현 운영이사장직을 사임한 김종준 목사도 보였다. 두 개의 하얀 무명베로 된 직사각형 기표소가 회의실 문 앞에 경비병처럼 서있는 가운데 알밤 같은 운영이사회 서기 고광석 목사가 깐깐한 출석 확인을 했다. 그 뒤 낮지만 분명한 어조로 송춘현 목사가 성수가 됨으로 개회를 선언했다. 서기가 안건 상정을 통해 변경된 이사 명단을 발표하고 자격이 안 되는 구(舊) 이사들이 이석했다. 이어서 고광석 목사가 전날 7월 9일 오후 3시 총장추천위원회에서 서광호 목사의 동의와 김승동 목사의 제청으로 투표에 들어가 참석자 7명이 전원 찬성 투표해 추천된 김영우 목사의 총장 후보 단독 선정과 7월 11일 운영이사회에 추천된 과정을 보고했다. 운영이사장 대행 송춘현 부이사장이 추천에 대해 묻자 운영이사회의 동의와 제청이 있자 가부를 물어 확인하고 투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하귀호 목사가 총회장의 배경 설명을 할 기회를 달라고 제안했다. 허락이 되자 미남형의 용모와 날씬한 몸매의 총회장 백남선 목사가 김대중 대통령처럼 구수한 호남 방언의 말투로 발언에 나섰다. “성수가 될는지 걱정했는데 바쁘신 가운데에도 이렇게 성황을 이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가 총회장으로 있는 동안에 우리 신학교가 망가지는 일이 있어도 사람을 바꾸기 보다는 정관을 전반적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가려고 이제까지 온 겁니다…그러나 아시는 대로 총신대학교가 정원을 감축해야 하는 구조조정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피하려면 상위권에 들어가야 하는데 분규 대학은 무조건 감축이랍니다. 그러면 년 45억씩 주는 교육부 지원금도 못 받고 학생들 학자금도 못 받는답니다. 불이익이 너무나 많은 겁니다. 총신대를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했는데 망가진 다음에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차제에 마침 길자연 총장이 사임하게 되시어 재단이사장이 그 자리로 옮기면 재단이사와 운영이사들을 다 바꾸고 앞으로 총회 뜻을 따라 새로 출발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합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총신대를 정상화시키고 법을 제대로 만들고 총회가 화합할 수 있다는 생각에 화합을 했습니다. 저의 중심을 이해하시고 앞으로 어쩌든지 총회를 위하고 총신대를 위해서 결정해 주십시오.” 박수가 있었다. 운영이사장 대행 송춘현 목사가 총회장이 합의의 배경으로 언급한 학교의 위기 상황을 총신대 기획실장 김산용 목사(전 개혁 측 출신의 대학 행정 실무자)가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사들이 허락했다. 회의실 한쪽에 서있던 김 실장이 나와 설명을 했다. “대학을 평가할 때 정량평가와 정성평가가 있습니다. 교직원 수급이나 취업률 등의 객관적인 정량평가에서는 총신대학교가 200여 대학 가운데 41위로 상위 25%에 속하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주관적인 정성평가(교육부는 2014년 9월 객관적인 정량평가와 주관적인 정성평가가 결합된 새로운 평가지표를 발표하고 11월 첫 대학구조개혁 평가에 나서기로 했다. 예를 들면 취업률의 경우 이전에 단순 취업률을 비교해 평가했다면 이제 해당지역 취업가능 여건과 전공 계열 등을 정성적으로 반영해 평가하는 식이다. 또 대학이 학생들의 취업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도 평가 요소다)에서는 총회와의 분규 때문에 교육부 평가에서 이차 대상 평가의 저조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저희가 이의 제기를 해서 교육부가 저희 입장을 받아주게는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저희 대학 한 학년 정원이 360명인데 10%만 감축이 되도 전 학년 150여 명이 줄어들게 됩니다. 대학은 실제로 5년 전부터 적자입니다. 대학원과 신학부를 통해 그 적자가 보충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까지 가서 총회장님께 이런 실정을 보고를 드렸습니다. 대학평가 공식 발표는 8월쯤에 나올 것입니다. 부실대학이라는 평가를 벗어나기 위해 저희가 밤을 세워가며 일했습니다. 저희 대학은 사실 정량평가에서 상위 25%에 들어가기 때문에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주관적인 정성평가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운영이사장 대행은 투표 방법에 대해 물었다. 모 이사가 투표 전에 2% 모자란 느낌이 드니 총장후보자의 발언을 듣고 투표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송춘현 목사는 동의 제청과 가부를 물어 총장후보 김영우 목사의 발언을 허락했다. 김영우 목사가 발언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사람인데 총회장께서 이렇게 세워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만일 제가 총장으로 선출되면 첫째로 역사적 개혁신학을 공고히 하고 어려움에 빠져 있는 학교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대원생들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듣고 있습니다. 신대원 졸업생들이 전방위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전문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려고 합니다.” 배재군 목사가 저간의 총회와의 갈등에 대해 김영우 목사의 보충 발언을 요구했다. 김영우 목사는 제99회 총회 결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재단이사 재적수의 부족으로 총신 재단이사회 정관개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설명한 뒤 “불가피한 사정으로 국가헌법의 양심의 자유를 따른 것이긴 하지만 학교 문제로 인해 소송을 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유감 표명을 했다. 투표 방법을 논의해 무기명 비밀투표를 결의했다. 투개표위원을 송춘현 목사가 자벽한 뒤 위원 호명에 따라 102명의 운영이사들이 투표지를 받아 기표소에 들어가 기표를 하고 나와서 투표함에 투표지를 넣었다. 유효투표수 102표 가운데 79표의 찬성표가 나와 김 목사의 총장 선임 건이 통과됐다. 총장에 선임되려면 투표 참석 운영이사의 2/3가 나와야 하는데 김 목사는 1차 투표에서 유효표 69표보다 10표나 더 받아 난항을 겪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손쉽게 당선됐다. 반대표는 23표에 불과했다. 앞서 정일웅 총장과 길자연 총장의 두 차례의 총장 투표 결과를 김영우 목사의 총장 선출 투표가 그 기록을 단번에 일신한 것이다. 2009년 9월 17일 3시 28분. 총신대학교 운영이사회 회의장은 일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5개월 동안 난항을 거듭해 온 제4대 총장 선출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이다. 이날 4차 접전 끝에 정일웅 교수가 제4대 총신 총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2008년 9월 6시간 30분 동안 8차례 마라톤 선거를 했지만 정일웅 교수는 3분의 2 유효투표수에서 1표가 모자라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때 8차례의 투표를 위해 이사 호명을 하느라 하귀호 목사의 입이 말라 목이 메기도 했다고 한다. 2013년 12월 17일 총신대학교 운영이사회는 총신대 운영이사회 회의실에서 2013년도 제3차 운영이사회를 열고, 길자연 목사를 제5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길자연 목사는 1, 2차 투표에서 3분의 2를 얻지 못했으나, 3차 투표에서 90표를 얻어 당선됐다. 길 목사는 1차 투표에서 142표 중 83표를 얻은 후, 2차 투표에서 137표 중 87표를 얻어 지지를 넓혔다. 결국 3차 투표에서 총 투표수 133표 중 90표를 얻어 3분의 2(89표)를 넘기고 총장으로 선출됐다. 2015년 7월 10일 오후 3시 총신대 재단이사회실에서 총신대 제6대 총장 김영우 목사를 추인했다. 총신 재단은 아사회를 소집하여 총장 추인을 결의했다. 재단이사회는 개회 성수에 1명이 모자라 고영기 목사를 1시간 여 기다린 뒤 총장 추인에 앞서 김영우 이사장은 이사장 직무대행으로 안명환 목사를 지명했고, 이어 안명환 목사의 사회로 김 이사장을 이석시킨 후, 운영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된 김영우 목사를 제6대 총신 총장으로 추인했다. 2014년 9월 30일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대전 한밭대에서 대학구조개혁 평가지표 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다. 교육부 정책연구진은 공청회에서 대학구조개혁 평가지표 10개 영역 23개 항목 36개 세부지표를 발표했다. 이날 발표한 36개 세부지표 가운데 교사확보율과 전임교원 수만 완전 정량평가로 이뤄지며 나머지 34개 지표는 완전 정성평가 또는 정량평가와 정성평가가 결합한 방식으로 평가된다. 이전까지 대학평가는 정량지표로 줄을 세우는 상대평가 방식이었다.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 평가는 취업률, 재학생 충원률, 장학금 지급률 등 정량적 요소를 반영해 하위 15% 대학을 선정했다. 그러나 교육부가 새롭게 마련한 구조개혁 평가지표는 정성평가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절대평가 방식으로 바뀌었다. 교육부는 “대학의 여건, 개선 노력 등을 함께 평가할 수 있도록 정량지표와 정성지표를 함께 활용하고, 절대평가를 통해 교육의 질을 측정하는 등 기본 원칙에 따라 평가지표 초안을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는 새로운 평가지표에 대해 10월 중 의견수렴을 거쳐 11월에 첫 평가를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육부는 2022년까지 대학입학정원을 16만 명 감축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대학구조개혁 평가에 따라 대학을 최우수·우수·보통·미흡·매우미흡 5단계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정원감축 규모를 달리하도록 강제할 예정이다. 최우수 등급을 받은 대학만 자율에 맡기고 나머지 4개 등급은 무조건 정원을 축소해야 한다. 그러나 정성평가를 도입한다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 나온 게 없어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지 문제로 지적된다. 교육부가 구상하는 700명 규모의 평가단이 일관된 잣대를 가지고 정성평가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정성평가는 평가위원의 주관적 평가가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대학들이 로비를 통해 높은 등급을 받으려 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또 교육부가 절대평가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16만 명이라는 정원감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상대평가로 정원감축 규모를 조절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다. 완전 절대평가가 이뤄질 수 없기에 정성평가의 객관성이 더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강하다. 이런 문제의 해결과 그 이상의 발전은 2015년 7월 10일 운영이사회에서 선출되고 재단이사회에서 전원 찬성으로 추인된 제6대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의 몫이다. 깊은 개혁주의 신학 지식과 뛰어난 정치력을 겸비한 김영우 목사는 온전한 총신 7년 출신이고 총회의 정치 일선의 일등 정치인으로 총신대의 첫 번째 총장이 되는 기록을 세우게 됐다. 그는 겸하여 우리말과 영어의 달변이기도 하다. 총신대 학창시절 충청도 보령의 유복한 가정 출신이라 사당동에서 하숙생으로 보낸 김영우 목사는 이제 총신 재단이사장에서 총신 총장이 되어 총신을 바로 세우고 발전시키기 위해 그의 말년을 사당동에서 헌신적으로 마감하는 진정한 총신인이었고 역사적 개혁주의를 확고하게 다진 세계 제일의 개혁주의 총회 지도자로 존경받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2015-07-12
    • 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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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12
  • 전국호남협의회와 김영우
    전국호남협의회(대표회장 최병남 목사) 제16차 정기총회가 7월 6일 오전 10시 30분 유성 관광호텔 8층 스타볼룸에서 전국의 회원들이 좌석이 모자라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할 정도로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접수대에는 제100회 총회부서기 후보로 나선 이형만 목사(전호협 회록서기), 총회장로부총회장 후보로 나선 신신우 장로(전호협 회계), 총회부회계 후보로 나선 양성수 장로(전호협 부회계) 등이 전호협 총회에 참석하는 회원들의 접수와 안내를 맡아 봉사하고 있었다. 제94회 총회 회록서기를 역임한 대표회장 최병남 목사의 절제된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에서 증경총회장 서기행 목사는 마태복음 4:1-11에 근거한 『공생애의 출발』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했다. 서기행 목사는 청치 9단 호남의 대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문학이나 영화에서 옛 기억을 떠올리는 느낌, 회상 장면 등을 위해 흔히 사용하는 플래시백(Flashback) 기법으로 옛날로 돌아가 보자. 1998년 2월 25일 인동초(忍冬草) 김대중(金大中) 씨가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해 7월 16일 종로5가에 있는 한국교회1백주년기념관에서 전국호남협의회는 제3회 정기총회를 열고 서기행 목사(대성교회)를 신임회장으로 선출했다. 257명의 회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이날 총회에서는 대표회장을 도와 실행위원회의 업무를 관장하는 실무회장을 신설하는 등 일부 규칙을 수정했다. 군산의 얄개 서정태 목사의 사회로 시작된 1부 예배는 문갑천 목사의 기도·이상술 목사의 성경봉독·최기채 목사의 설교·특별기도·축사·김도빈 목사의 축도 순으로 진행됐으며, 최낙현 장로와 지상섭 목사가 「국가경제와 통일을 위해」 「화합과 일치를 위해」 특별기도를 했다. 이날 모임에는 전국영남협의회와 전국서북협의회 임원진이 참석해 행사를 축하했으며, 김상중 목사·최성관 목사·최재우 목사가 각각 격려사와 축사를 했다. 회장으로 선임된 서기행 목사는 『귀한 인물들을 많이 발굴해 총회를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호남협의회가 감당하도록 하자』고 인사했다. 당시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실무회장:서정태 상임총무:김삼봉 기획총무:양근실 정책총무:송휘상 조직총무:이충선 홍보총무:송태희 섭외총무:이을익 재정총무: 안기영 사무국장:김백경 서기:전대웅 부서기:김병성 회계:나도재 부회계:이상집 감사:이지철 이성수 이점호 협동총무:노회별 대표 29명. 2013년 병상에서 일어나 2015년 7월 6일 다시 현재로 돌아온 서기행 목사는 설교에서 이렇게 외쳤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구원은 오직 예수라고 말할 때 기독교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총회가 성경과 헌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이어서 특별기도 순서에서 본회실무회장 정용환 목사가 얼마 안 남은 제100회 총회를 위하여 기도했다. 총회총무 김창수 목사, 기독신문사장 이재천 장로, 중부지역협의회장 정진모 목사 등이 축사를 했다. 2부 총회에서 상임회장 전계현 목사가 기도한 뒤 임원개선을 통해 제16기 대표회장에 백남선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는 취임 인사에서 전국호남협의회의 앞날이 아니라 총신 총장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제까지 누구한테 로비를 받아 일해 본 적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총회 결의에 맞는 일이냐 그것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일했습니다…총신 정관을 총회 직할이라 고치고 앞으로는 총회 허락 없이는 재단이사들이 마음대로 재단의 법을 고칠 수 없게 하려고 합니다…정부에서 앞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구조 조정한다고 합니다. 우리 총신이 지금 316명 허락받아 모집합니다. 10프로 감축이 4개 학년에 적용되면 120여명 줄어들게 됩니다. 지금 우리 총신은 총신 자체로는 운영이 어렵습니다. 타산이 안 맞다고 대학부를 없앨 수도 없습니다. 분규 대학이 되면 형편이 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생겨 김영우 목사가 한 2년 총장을 하고 물러나면 재단이사를 다 바꿀 수 있어요. 사실 김영우 목사가 능력은 있어요. 총회 화합도 이루고 총신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어서 전국호남협의회 대표회장의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백남선 목사가 참석한 금번 100회 총회 임원 후보들을 총회선거법에 저촉되지 않게 일어나게 해 박수라도 쳐주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서기행 정치 9단 목사가 앞자리의 증경총회장 석에서 일어나 달변의 토를 달았다. “누가 호남 출신 후보인지 아는데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 박수 칩시다.” 그 자리에는 호남 출신 부총회장 후보 김종준 목사, 신신우 장로, 부서기 후보 이형만 목사, 윤익세 목사, 부회계 후보 양성수 장로 외에도 강원도 출신 부총회장 후보 김선규 목사도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 테이블에 같이 앉아 있었다. 호남출신 임원 후보이지만 이날 참석하지 못한 부서기 후보 고강석 목사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 심의분과에 출석했기 때문이었다. 본회 회계를 맡은 신신우 장로는 순서 담당비 결재판과 봉투를 들고 부지런히 전국호남협의회 총회의 순서자들을 만나 사인을 받고 봉투 전달을 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여러 문제에 두루 잘 통할 것 같은 신임상임총무 유태영 목사가 증경총회장 이기창 목사의 수술 소식을 전하며 기도부탁을 하고 후원을 해 주신데 감사드린다고 인사했다. 실무회장 김영섭 장로의 식사기도 후 호텔 식사라고 믿기 어려운 점심이 시작됐다. 식사 자리에서도 백남선 목사는 각을 세우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김영우 목사를 훌륭하신 분이라고 추켜세웠다. 나는 칼빈대 명예박사이고 총회 정치에 밝기도 한 정중헌 목사에게 김영우 목사가 총신 총장이 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정중헌 목사는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서기행 목사는 외쳤다. “총회가 성경과 헌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백남선 목사 자신도 말했다. “저는 이제까지 누구한테 로비를 받아 일해 본 적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총회 결의에 맞는 일이냐 그것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일했습니다…사실 김영우 목사가 능력은 있어요. 총회 화합도 이루고 총신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어떤 지위나 어떤 형편에 있는 사람이건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60 중반을 넘기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은 세상이든 교회든 두 종류의 사람 즉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5-20 이제 우리는 백남선 목사와 김영우 목사, 그리고 제100회 총회 호남출신 임원 후보들이 어떤 열매를 맺을지 확인한 뒤 그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알 수 있으리라. 2015-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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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9
  • 백남선과 김영우의 딜
    칠월은 이미 여름의 절정이고 총회 정치의 클라이맥스다. 하나님의 영광 같은 찬란한 햇빛이 도처에 타오르고 총신의 김영우 재단이사장은 총회의 백남선 총회장의 벼랑 끝 합의의 바람 뒤에서 얼굴이 빨갛게 익는다. 그 바람이 서늘한 전국 교회의 애타는 바람들을 가를 때 총회의 칠월은 ‘한탄’과 ‘체념’ 사이로 흘러간다. 어떤 총대들은 실망과 분노를 토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러와 사고로 점철된 어수선한 세계를 넘어 분단의 국가와 갈등(葛藤)의 총회를 겪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은혜로 대체로 평화로운 시간이 무심하게 이어진다. 2014년 12월 4일 총회임원회(총회장:백남선 목사)는 몸살을 앓지만 성장을 멈추지 않는 세계 제일의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에서 회의를 열고 11월 25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최한 실행위원회 결의에 따라 총회결의이행을위한위원회에 서광호 목사 김희태 목사 김진웅 목사 신신우 장로 심요섭 장로 등 5인을 위원으로 선정했다. 2015년 1월 15일 총신재단정관변경관련결의이행위원회(위원장:김진웅 목사, 서기:서광호 목사)가 총회장실에서 첫 번째 회의를 열고 총신대 재단이사직을 사임하지 않은 이사들에 대해 총회의 모든 공직을 정지(해임)시키기로 결의했다. 또 1월 22일 회의에 총신운영이사장 김종준 목사와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를 출석시켜 총회 결의에 대한 조정을 하기로 했다. 또 길자연 총신대 총장에 대해서는 교단 헌법 제3장 제2조 3항에 의거해 정년이 초과되었으므로 즉각 사퇴할 것을 권유키로 했다. 2015년 2월 26일 11시 총회실행위원회(총회장:백남선 목사)는 총회회의실에서 134개 노회 83명의 실행위원과 36명의 노회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실행위원회 및 노회장 연석회의는 제99회 총회결의 시행의 건을 단일안건으로 다뤘으며 결의에 앞서 제99회 총회결의사항과 총회결의 시행내역을 보고했다. 또 향후 총회 결의 집행과 관련하여 제기된 모든 소송에 대하여 총회가 책임지고 대응키로 했다. 이와 관련해 총신재단정관변경관련결의이행위원회(위원장:김진웅 목사, 서기:서광호 목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결의이행을위한법률대응위원회 5인 김인중 서광호 이형만 목사, 신신우 심요섭 장로 등을 총회장 자벽으로 또 선임했다. 6월 19일 총신재단정관변경관련결의이행위원회(위원장:김진웅 목사, 서기:서광호 목사)는 총신대 재단이사들이 제99회 총회 결의 취지에 동의하고 사임을 하도록 촉구키로 하는 동시에 사임을 끝까지 거부하는 재단이사 및 소속 노회원들의 총회 총대를 정지하도록 천서위원회에 통지하기로 했다. 6월 25일 목요일 총신대 총장 길자연 목사가 사임했다. 전주에서 모인 재단이사회(이사장:김영우 목사)는 1년 4개월 재직하고 2년 6개월의 임기를 남겼고 그리고 정치력과 지도력이 깊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는 길자연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심상법 대학원 부총장을 총장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6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총신 이사장실에서 김영우 재단이사장은 기자 간담회를 갖고 제99회총회 총신대 관련 결의 가운데 소급 적용 조항만 빼고 제99회총회 결의대로 총신대 정관을 개정하겠다는 당연한 입장을 장황하게 밝혔다. 이 소식이 즉각 전국 교회와 총대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총회장의 비선 실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6월 29일 월요일 총회결의이행을위한법률대응위원회(위원장 서광호 목사)는 모임을 갖고 총신 재단 측의 이와 같은 입장에 대한 대책을 세운다는 입장을 밝혔다. 6월 30일 화요일 광주에서 비선 실세들을 통해 물밑에서 백남선 총회장과 총신대 재단이사장이 의견을 나눈 뒤 만나 그들 나름의 측근들이 배석한 가운데 총회와 총신 양측의 이른바 합의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합의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김영우 재단이사장을 길자연 전 총장 잔여 임기동안 총장으로 운영이사회에서 선출하여 재단이사회에서 최종결정하는 사항을 추진한다. 2. 총신대학교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총장으로 선출될 경우 재단이사장직과 이사직을 사퇴 하고 재단이사회에 관한 것을 관여하지 않는다. 3.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운영이사회를 소집하여 관련 사항을 처리한다. 2015년 6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 7월 2일 목요일 오전 11시 제99회총신재단정관변경관련결의이행위원회(위원장:김진웅 목사, 서기:서광호 목사)는 해외에 있는 김희태 목사를 제외하고 총회장실에서 회의를 갖고 백남선 총회장과 김영우 재단이사장의 합의에 대한 논의를 2시간여 다루었다. 그러나 점심시간도 훨씬 지나쳐 논의를 거듭한 동 위원회는 결의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서기 서광호 목사가 발표하고 위원장 김진웅 목사는 깊은 속내를 길게 내뿜었다. 부총회장 후보로 나선 신신우 장로는 말을 아끼고 잘생긴 소년 같은 웃음을 짓는 심요섭 장로는 간간이 고개를 저으며 날카로운 비평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뒷담화의 결론은 백남선 목사와 김영우 목사가 딜한 내용은 뒤로 하고라도 그들만의 소위(所謂) 합의 사항의 이행이 난망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4월 9일 목숨을 끊기 전 “검찰이 저거랑 제 것을 딜하라고 그러는데 내가 딜할 게 있어야지요”라고 언급한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성 전 회장은 2004년 자유민주연합에 불법 정치자금 16억 원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가, 2005년 5월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행담도 개발사업과 관련한 비리 혐의로 다시 기소돼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고, 한 달 뒤인 200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은 바 있다. 요즈음 부패와 부정에 대해 세간에 회자(膾炙)되는 딜이란 영어의 deal로써 거래하다, 다루다, 처리하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딜한다는 것은 거래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렇듯 백남선 총회장과 김영우 재단이사장이 합의서를 발표한 이면에는 어떤 딜이 분명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총회에 회자되고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협상에 강하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은 문제를 논리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란다. "왜?"에 대한 답과 함께 문제를 접근하는 사람을 상대로는 그 답이 말이 되건 안 되건 "왜?"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이 접근하는 사람이 이기기 힘들다. 그런데 백남선 목사와 김영우 목사 사이의 합의는 "왜?"에 대한 답의 논리성은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의 신앙적인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양측의 합의서에 대해 입을 여는 총대들의 중론이다. 백남선은 국정을 재단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회 결의를 지키고 수행하는 총회장의 본분을 지켰어야 했다. 그리고 김영우는 총장이 아니라 총회의 흐름과 결정들에 그의 입버릇처럼 개혁주의 영향을 미치는 총회의 존경 받는 정치인으로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무슨 꿈을 꾸었는지 궤도를 벗어났다. 그것은 그들 양자의 알량한 속내를 드러내고 외적이든 내적이든 그나마 얼마 안남은 그들의 정치적 지도력마저도 무너지는 비극의 시작을 알렸다. 이를테면 그들의 합의라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B급 조폭 영화의 효시가 된 ‘넘버 3’(1997)의 불사파 두목이 어리바리 청년 조직원 세 명을 앞에 앉혀 놓고 열변을 토한다. 원래 말을 부정확하게 하지만 화가 잔뜩 나 더욱 그렇다. ‘헝그리 정신’에 대해 설명하며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현정화”를 언급할 때 “임춘애입니다”라고 토를 단 부하를 마구 두들겨 팬다. 보스가 현정화라면 현정화인 것이다. 임기가 두 달 남은 총신과 정치 후배 총회장 백남선이 임기가 올해 말까지인 총신과 정치 선배 재단이사장 김영우에게 임기가 2년 4개월 남은 총신대 총장하라면 총회 결의고 뭐고 총장할 수 있는 것이다. 뒤에서 총회의 비선실세 허활민이 미국과 한국의 총신을 쥐락펴락하게 됐다는 웃음을 짓는 가운데. #1. 조필(송강호): “니, 니들 내말 자, 잘 들어. 내, 내가 하늘 색깔이 빨간색 하면 그때부턴 무조건 빨간색이야. 이, 이, 이건 노리끼리한 색이지만 내가 빨간색! 하면 이것두 빨간색이야. 응? 이 XXX야, 응? 내가 현정화라 그러면 무조건 현정화야. 내 말에 토, 토, 토다는 XX는 전부 배반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앞으론 직사시켜 버리겠어 아주 직사!” ‘친구’(2001)에서 반대 세력을 키워 오야붕에 도전한 건달은 주인공 동수에게 자신이 한 일은 ‘배신’이 아니라 ‘혁신’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총회에서는 혁신대신 개혁이라고 말한다. #2. 상곤(이재용): “냄들은 내보고 행님 등에 칼을 꽂느니 배신이니 해싸도 그거 다 내 모함한다꼬 하는 소리다. 내 솔직히 말해서 행님한테 배신 때릴 생각 눈곱만큼도 없다. 단지 내가 원하는 기는 항상 일등만 있으면 썩으니까 내가 이등이 되가꼬 일등 정신도 좀 차리게 하고. 또,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우리 세계를 이끌어 나가야 된다, 이긴기라.” 영화 ‘대부’(1972)에서 콜레오네 집안의 둘째 아들 마이클이 약혼자에게 정치와 마피아의 ‘비즈니스’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얘기한다. 작금(昨今)의 총회에서 이 말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총회와 산하 기관의 돈이라면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인 것이 통념이다시피 됐다. #3.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 “내 아버지는 대통령이나 상원의원처럼 다른 사람을 책임지는 사람과 다를 게 없어.” 케이 애덤스(다이앤 키튼): “순진한 소리를 하는군요. 대통령이나 정치인은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마이클: “케이, 누가 순진한 건지 모르겠네.” 이런 시가 있다. 칠월 -허연(1966~ ) 쏟아지는 비를 피해 찾아갔던 짧은 처마 밑에서 아슬아슬하게 등을 붙이고 서 있던 여름밤을 나는 얼마나 아파했는지 체념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낮게만 흘러다니는 빗물을 보며 당신을 생각했는지, 빗물이 파 놓은 깊은 골이 어쩌면 당신이었는지 칠월의 밤은 또 얼마나 많이 흘러가 버렸는지. 땅바닥을 구르던 내 눈물은 지옥 같았던 내 눈물은 왜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 칠월의 길엔 언제나 내 체념이 있고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가 있고 빗물에 쓸려 어디론가 가버린 잊은 그대가 있었다. 여름 날 나는 늘 천국이 아니고, 칠월의 나는 체념뿐이어도 좋을 것 모두 다 절망하듯 쏟아지는 세상의 모든 빗물, 내가 여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여름날이 늘 좋기만 한 천국은 아니다. 우리 총회에 당도한 칠월엔 ‘체념’이나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이름조차 잃어버린 흑백영화 같은 ‘총회회관과 총신과 양지캠퍼스를 마련한 이영수 목사 시대’도 있었다. 과거라는 빗물에 쓸려가 버린 총회의 안타깝고 아쉬운 나날들. 그랬으니 골을 파고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빗물 속에서 문득 ‘당신’ 백남선 목사와 김영우 목사의 멋쩍은 웃음과 허활민의 헛웃음이 비치기도 한다. 백남선 목사는 총신 2년을 다녀 나와 총신 신학부 72회 동기이고 김영우 목사는 총신대 1학년 때부터 44년을 선배로 알아온 처지다. 그래서 나는 총회의 정치가 사리사욕의 딜로 절정에 달하는 칠월을 얼마나 기대하고 손꼽아 기다리는지 모른다. 하나님 은혜로 살아만 있으면 해마다 겪게 될 이 부끄러운 딜의 여름을. 2015-07-06
    • 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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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6
  • 바나바와 같은 리더가 요구되는 한국교회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의 질타를 받는다. 한국교회의 각 교단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왜 한국교회가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자문해 본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물론 일반 성도들의 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리더십에서 그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바나바를 마음에 떠 올리면서 한국교회 리더들이 바나바를 닮을 수는 없을까 하고 소망해 본다. 첫째, 바나바는 인재를 소중히 여기는 지도자였다. 바나바는 12사도 그룹에 속한 사람이었다. 바나바가 사울을 12사도에게 소개한 사실이나(행 9:26-30), 스데반의 일로 성도들이 흩어져 안디옥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한 사실(행 11:19-26)은 이를 증거 한다. 이렇게 바나바는 12사도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12사도들이 두려워하고 교제하기를 꺼려하는 사울을 12사도와 교제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고(행 9:27), 그 후 다소에 은둔해 있던 사울을 복음 전선으로 이끌어 들여 동역한 사실은 인재를 아끼는 바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1차전도 여행(행 13장, 행 14장)기간 중에 밤빌리아 버가에서 전도 팀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마가 문제를 다룰 때도 인재를 아끼는 바나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제 2차전도 여행 준비를 할 때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수행할 사람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다(행 15:36-41). 이 때 바나바는 사람 중심으로 생각했고, 바울은 사역 중심으로 생각한 듯하다(행 15:37-38). 두 사람의 주장이 모두 옳을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마가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큰 유익을 주었다. 마가는 4복음서의 하나인 마가복음을 기록했고 후에 바울도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고 썼다. 바나바가 마가를 회복시키지 않았더라면 마가가 복음을 위해 이런 귀한 기여를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바나바는 마가가 한 때 잘못을 했지만 그것을 게의 하지 않고 마가를 교회의 큰 재목으로 키우는데 일조를 했다. 한국 사람의 피 속에는 다른 사람을 높이고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는데 인색한 요소가 함유되어 있는 듯하여 마음이 씁쓸하다. 정치권을 보아도 비평과 비난이 난무하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교회 내에서 까지도 사랑과 화합이 기대되는 곳에서 화합과 자기희생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바나바는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본 받아 자기 희생으로 교회의 화합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을 발하게 했다. 바나바는 인재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 둘째, 바나바는 두 번째 위치도 만족하는 지도자였다. 우리는 항상 첫째를 좋아한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자신이 신학대학교에서 1등으로 졸업했다고 이력서에 기록하기까지 한다. 한국교회의 리더들은 항상 앞장서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바나바는 둘째 위치도 만족하는 온유와 겸손의 지도자였다. 사도행전 11장의 기록은 비록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선임자였지만 선임자의 위치를 고집하지 않은 듯하다. 다소에 있는 사울을 데려온 바나바는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행 11:26, 개역개정)되도록 함께 사역했다. 바나바와 사울의 관계는 선임자와 조력자의 관계보다는 오히려 동등한 위치에서 사역한 관계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나바의 아름다운 성품 때문이었다. 바나바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지도자였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다. 교회의 상황으로 보아 바나바가 팀장이요, 사울과 마가는 협력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13장과 14장의 기록은 사울의 활동을 두드러지게 묘사한다. 박수 엘루마를 대면했을 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행 13:9, 개역개정)라고 기록한 내용이나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행 13:13, 개역개정)의 표현이나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행 13:16, 개역개정)등의 표현은 바울이 활동 면에서 바나바를 앞선 사실을 보여준다. 누가는 선교 팀장인 바나바의 이름을 언급하기보다 협력자인 바울의 이름을 자주 사용한다. 마치 바울이 팀장이 되고 바나바가 조력자가 된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나바는 경쟁의식을 갖지 않고 바울과 함께 사역을 계속했다. 바나바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과 교회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늘 날 우리 한국교회에 바나바의 성품을 닮은 리더들이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지금 밖으로는 사회의 질타를 받고, 안으로는 성장이 정체되었거나 혹은 퇴보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바나바와 같은 리더들의 인도를 통해 새롭게 전진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본다. 하나님의 교회는 멸절되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여 그의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이 기쁘게 사용할 바나바와 같은 리더들이 한국교회에 많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박형용 박사(전 합신대 총장, 현 더굳뉴스 고문) 2015년 6월 27일
    • G.OPINION
    2015-06-27
  • 말라위 나이팅게일 백영심 선교사
    현대 간호학의 기초를 세운 나이팅게일은 백의의 천사라고 불린다. 1853년 터키를 침공한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면서 크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의 참담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던 나이팅게일은 다른 간호사들과 함께 이스탄불의 영국군 야전병원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나이팅게일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 업적을 세운다. 수많은 의사와 다른 간호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팅게일만이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크림전쟁이 진행되던 1800년대 중반에는 위생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해야 할 야전병원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2차 감염으로 인해 죽어나갔다. 아직 질병의 세균설이 제대로 정립되지도 않았을 때였지만, 나이팅게일은 병원 내의 더러운 위생시설, 살균되지 않은 수술 도구들, 각종 악취 등이 부상자를 사망으로 이르게 한다고 생각하여 병원을 최대한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개혁의 기본으로 삼았다. 또한 병원에 들어온 부상병들에 대한 관리도 엉망이어서 부상으로 입원했는지 질병으로 입원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었고, 입원, 퇴원, 사망에 대한 자료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나이팅게일은 환자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확한 자료의 기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체계적으로 의무 기록을 정리?관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나이팅게일은 후대의 간호사들이 어떤 길을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등대의 역할을 했다. 나이팅게일 선서식에서 입는 가운은 이웃을 따뜻하게 감싸는 간호정신을 뜻하고, 손에 든 촛불은 주변을 밝히는 봉사와 희생정신을 의미한다. 호암재단은 지난 4월 1일 제25회 호암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과학상은 천진우 연세대 언더우드 특훈교수, 공학상은 김창진 미국 UCLA대 교수, 의학상은 김성훈 서울대 교수, 예술상은 김수자씨, 사회봉사상은 백영심 간호사가 선정됐다. 범삼성가가 만든 호암재단은 매년 학술, 예술 및 사회발전과 인류복지 증진에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을 선정해 호암상을 시상한다. 호암상은 삼성그룹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의 호를 따서 1990년 제정된 상이다. 6월 1일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호암아트홀의 시상식의 금년 수상자들 가운데 사회봉사상을 수상한 백영심 간호사는 ‘말라위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동광교회(담임목사 김희태)가 25년 전에 파송한 제1호 선교사다. 동광교회가 처음 백영심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아프리카선교회를 운영하는 김희태 목사의 선배 목사의 부탁으로 이뤄졌다. 동광교회 성도들과 오랜 시간 교제를 하지 못하고 파송됐음에도 불구하고 동광교회는 IMF와 교회 건축이라는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김희태 목사의 약속을 지키는 언행일치의 목회관에 따라 선교 후원의 고삐를 전혀 늦추지 않았다. 나름의 정립된 선교관을 가지 김희태 목사는 말한다. “우리는 한번 파송한 선교사님들을 믿고 기다립니다. 4년 한 텀 기간 동안에는 선교의 토대를 세울 시간으로 생각하고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2년을 더 기다리며 영혼구원의 열매를 맺기를 기다립니다”. 백영심 간호 선교사는 고려대 부속병원에서 근무하던 1990년 28세 나이에 안정된 일터를 버리고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하였다. 케냐에서 4년을 보낸 뒤 의료 환경이 더 열악한 말라위로 옮긴 백 간호사는 주민들과 함께 직접 벽돌을 만들어 보건소를 짓고, 하루 100여 명의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전문 의료 인력도 제대로 된 약품도 부족한 상태에서는 나을 수 있는 환자들 조차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에 백 간호 선교사는 제대로 된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러한 간절한 바람은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2008년 릴롱궤 외곽에 180병상 규모의 대양누가병원의 설립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온 의료봉사진이 대양누가병원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 병원은 연간 20만 명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현대식 병원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통해 환자 치료뿐만 아니라 말라위의 의료 수준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 선교사는 현지의 의료보건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2010년 간호대학을 설립하고 현재는 더 큰 30만평의 대지에 의과대학과 병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가난에서 벗어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은 교육이라는 믿음으로 현지에 유치원, ICT 대학 등 교육시설을 설립하여 원주민의 계몽과 이를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끌고 있다. 그런 그가 즐겨하는 말은 "저는 '태평양의 물 한 방울'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이다. 그는 2010년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초기에 발견해 큰 위험은 피했지만, 목소리를 제대로 못 낸다. 백씨가 말라위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무기력'과 싸우는 일이었다. 백 선교사는 "내가 여기에서 100년을 살아도 뭐가 달라질까란 생각에 괴로웠다"며 "힘들 때마다 '우리가 하는 일이 태평양의 물 한 방울 정도지만, 그 물 한 방울이 없다면 태평양의 물은 결국 한 방울이라도 줄어드는 것 아닌가'라고 한 테레사 수녀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말했다. 백 선교사와 말라위의 만남은 우연적이었다. 젊은 시절, 간호학교 재학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백 씨는 언젠가 케냐의 맛사이 부족에게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인상 깊게 들었다. 고려대 부속병원에 취직한 이후에도 케냐인들의 아픈 모습이 상상되어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기 어려웠던 백 씨는 결국, 병원을 그만두고 케냐로 향했다. 2년 동안 케냐에서 의료봉사를 하는 동안, 아프리카 곳곳에서 기근과 영양결핍, 에이즈와 결핵 등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목도하며 그들을 혈육처럼 여기게 됐다. 의료봉사를 끝내고 귀국했던 백 씨는 아예 한국생활을 정리하고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탔다. 도착해서는 버스를 타고 아프리카 인근 국가들을 여행하다가 말라위 치무왈라에서 행보를 멈췄다. 백 씨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자신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절실함을 느꼈다고 했다. 주민 500명이 살고 있던 치무왈라에서 백 씨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벽돌을 직접 만들어 약 99㎡(30평) 규모 진료소를 지었다. 진료소가 생기자 하루 평균 100명 이상이 몰렸다. “아침 문을 열기 전부터 와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아픈 것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죠.” 생계는 주민들과 함께 꾸렸다. 옥수수 가루로 죽을 만들어 먹을 때도 있었고 한국이 생각날 때는 쌀밥을 지어 주민들과 나눴다. 밤이 되면 진료소 주변은 노천극장이 됐다. 백 선교사는 나무에 흰 천을 걸어 스크린을 대신하고, 치체와어(말라위인의 80%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로 더빙한 예수 영화를 상영했다. 주민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고,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에 환호하며, 149㎝의 작은 키에 하얀색 가운을 입은 백 간호 선교사를 하나님이 보내신 ‘작은 천사’,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기 시작했다. 소문을 접한 다른 마을에서도 진료를 와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진료소는 직원과 약품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백 선교사는 병원 건축을 도와줄 사람을 기도하며 수소문했다. 2004년 여름 말라위에서 처음 백씨를 본 뒤 한국과 말라위를 오가며 봉사하는 홍민희 을지대 간호학과 외래교수는 이런 증언을 했다. 2005년 하반기 어느 날 외래진료를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있던 백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홍 교수는 "백 간호사가 전화를 끊고 차를 멈추더니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대양상선 정유근 회장이 백씨 소문을 듣고 사재를 털어 현지에 큰 병원을 짓고자 전화한 것이었다. 정 회장은 '나중 돈을 벌면 아프리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고 다짐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말라위 한인 교민을 만나 백씨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다. 정 회장은 사재 33억 원을 들여 2008년 2월 말라위 릴롱궤에 대양누가병원을 설립했다. 또 이후로도 대양상선을 통해 매월 1억 원 이상씩 지원하고 있다. 완공식엔 무타리카 말라위 대통령이 참석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80병상으로 시작한 이 병원은 이후 200병상으로 증축됐다. 그 다음에는 병원 옆에 간호대학도 세웠다. 말라위 사람들이 의료기술을 배워야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월 1일 백영심 선교사의 호암상 시상식에 깊은 샘 같은 김숙자 사모와 함께 특별 초청으로 참석한 김희태 목사는 백 선교사의 헌신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2015-6-22
    • G.MISSION
    • G.MISSION
    2015-06-22
  • 오정호 목사의 목회관
    '유월' 하고 소리 내면 걸리는 것 하나 없다. 유월 하면 청개구리·소나기 소리, 능소화·감자꽃·밤꽃이 생각난다. '유월' 햇빛이 밝다. 부드러운 발음과 달리 모진 유월이 전국을 강타했다. 그래도 국가 재난 사태에도 박 대통령은 무슨 습관인지 활짝 웃고 다니기만 하지만 의료진들의 목숨 건 사투 덕에 메르스가 '유월' 하늘을 떠돌다 이제는 좀 수굿해진 모양이다. 이러다 언제 편안히 여름 날지 마음 쓰이지만 태풍의 재난에 비하면 견딜 만하다. 2013년 11월 8일 중국어로 바다제비라는 뜻의 초강력 태풍 하이옌[海燕 - Haiyan]이 필리핀 중부를 강타했다. 이 태풍으로 필리핀에서만 1만2000여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민도 430만 명이나 발생했다. 최대 피해 지역인 레이테섬에선 지역 내 건물의 70~80%가 무너졌다. 이 섬의 최대 도시 타클로반은 인구 20만 명이지만, 이중 1만 명이 숨졌다. 오정호 목사를 처음 만난 건 총회회관에서 총회군선교회가 아라우부대 필리핀 재난지역 파병예배 때였다. 총회군선교회(회장:김기원 목사)가 2013년 12월 23일 총회회관에서 필리핀 태풍 피해 지역 복구에 나서는 국군 아라우 부대 파송 및 환송예배를 드렸다. 파송 장병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오정호 목사(군선교회 명예회장)는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는 축복’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여러분은 대한민국 군인들 중에 뽑힌 사람들로 환란 당한 이웃들을 돕기 위해 떠난다”며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손과 발을 통해 눈물 흘리는 필리핀 여러 형제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란다”고 권면했다. 아라우 부대는 필리핀 타클로반을 비롯해 태풍 피해 지역에서 도로 복구, 관공서와 학교 보수 등에 나서게 된다. 아라우부대는 파병된 이후 '피의 희생을 땀으로 보답한다'는 슬로건으로 헌신적 재해 복구 활동을 펼쳤다. 태풍 피해를 본 학교·관공서·병원·보육원 등 67개소의 공공시설을 복구했으며, 쓰러진 전신주 250여개를 다시 세웠다. '찾아가는 종합의료지원'으로 의료 사각지대 현지 주민들을 진료했다. 파병 기간 92개 소외 지역 마을 주민 등 4만2000여명이 진료 혜택을 받았다. '아라우 중장비 직업학교'를 설립해, 포클레인·지게차 등 중장비를 다룰 수 있는 현지 인력 500여명을 양성했고, 한국어교실도 운영했다. 6만1000여명의 현지 주민에게는 무료 급식을 제공하기도 했다. 아라우부대가 1년의 파병임무를 마치고 2014년 12월 23일 돌아와 해단식을 가졌다. 오정호 목사를 아라우부대 해단 3주 전 전국이 꽁꽁… 강추위가 밀려온 12월 2일 오후 3시 대전 새로남교회 10층의 새로남카페에서 만났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한없이 하늘에 가까운 투명한 삼면 유리벽이 대전 신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카페는 분주했다. 그는 대전지역 목회자들 식사 대접을 마치고 오는 길에 제과점에서 샀다며 따뜻한 빵을 탁자에 내놨다. 그와 적지 않은 시간 나눈 이야기 가운데 후배 목사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그간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이제 전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그의 목회관을 담고 있었다. 그의 듣기 좋은 굵직한 음성이 울렸다. “1993년 4월 3일 남정웅 목사가 서울 구로동의 서울남교회(1993년 12월 28일 정년 은퇴한 박원섭 목사를 이어 제4대 담임목사로 서울남교회 부임)로 떠나자 새로남교회에 혼란이 왔어요. 후임 목사를 결정하는데 핑퐁 게임하듯 서로 추천하고 비토하는 겁니다. 당회에 갈등이 생긴 거죠. 그렇게 갈등을 거듭 겪다보니 안수집사 그룹이나 다른 그룹들이 당회가 담임목사를 결정하지 못 하고 뭐하는 거냐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합의를 하게 됐어요. 전교회의 존경을 받으시는 옥한흠 목사에게 가서 좋은 목사 추천을 한번 받아보자 한 겁니다. 그래서 옥한흠 목사를 만나게 됐습니다. 옥한흠 목사가 듣고 나를 추천하시게 된 겁니다. 옷을 벗죠.” 밖은 겨울바람으로 찬데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잎들을 떨군 겨울나무들처럼 이야기 나누는 새로남카페 안의 훈훈함에 우리는 웃옷들을 잠시 안녕 했다. “그때 비로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새로남교회와 연결이 된 겁니다. 대전은 잘 모르는데다 사돈의 팔촌까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정말 물이 설고 낯선 곳이죠. 그런데 옥 목사가 저를 추천하신 겁니다. 저는 말을 안 했습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어느 날 옥 목사께서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시기 전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총신대 휴게실에서 저를 만나셨어요. 하시는 말씀이 ‘오 형제 내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내가 장년부할 테니까 오 전도사는 주일학교를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그분이 원래 제안을 하시고 그러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그건 어렵겠다 했습니다. 왜 어렵냐고 물으셨습니다. 내수동교회에서 대학부를 지도해야 될 입장인데 빠질 수가 없으니 양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휴게소에서 차 한 잔 마시고 돌아서시며 하는 말씀이 ‘나한테 배워도 많이 배울텐데’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쉽다하는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맴돌아요. 그리고 헤어졌죠. 물론 후에 다시 만났지만 말입니다. 저는 내수동교회 대학부를 지도하고 결혼한 뒤 군대를 갔습니다. 그 다음에 군대 제대한 뒤 사랑의교회로 갔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원래 상가에 있다가 지금 서초동에 교회를 세울 때 지하로 내려간 이유가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땅값 떨어진다고 난리가 났어요. 원래 설계를 멋있게 하고 이게 아니라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교회 건물을 못 올리게 데모를 해대고 하니까 본당을 지하로 내려 보낸 겁니다. 그런데 그게 나름대로 특색 있게 짓다 보니 건축 상도 받고 그런 겁니다. 위에 공사할 때 방수 처리가 미흡해 고생 많이 했습니다. 바늘구멍 하나만 있어도 물이 새는 겁니다. 그러면 갈고 뜯고 얼마나 많이 공사를 다시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만 7년 사랑의교회 옥 목사님을 보필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보내주셔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 마음속에는 부산 호산나교회(합신측)의 최흥준 목사가 기성교회에 들어가서 잘 하고 계시니까 중부권 대전에도 사랑의교회 출신 교역자가 한 사람 있었으면 하신 모양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바로 새로남교회 부임 문제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제가 허락한다고 그 교회가 저를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없고 해서 일주일 말미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족과 의논을 하니까 모두 안 가고 싶다고 펄쩍 뛰는 겁니다. 다 미국에 있고 싶다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기도해 보겠다며 LA 근처의 하이데저트라고 하는 사막에 있는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곳입니다. 금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제 마음에 잠언 29장 25절, 26절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이 제 마음에 부딪쳐 왔습니다. 그래서 옥 목사님에게 연락을 드렸더니 가보라고 해서 교회 개척하실 때 순종하지 못했는데 하여튼 나가보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행기 표도 보내주니 좋아서 한국에 나가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 후 공동의회를 했는데 제가 덜컥 됐습니다. 기라성 같은 분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말입니다. 그 다음 노회에서의 정치문제로 위임목사가 임시목사 청빙으로 뒤바뀌었습니다, 교회 청빙위원회 집사님한테 그 전화를 받고 양떼가 저렇게 어려움을 당하는데 나는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아내한테서 부임하지 않으면 교회가 쪼개지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가 자신의 면류관이 아니라 양떼의 은혜와 행복과 목회의 안정을 위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내도 찬성했습니다. 저는 한 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능력 있는 목사도 아니고 무슨 교회를 질 것도 아니고 화평한 교회 화목한 교회만을 이루면 된다는 생각으로 왔습니다(1994년 11월 6일 부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갖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5년 동안 두문불출 목회만 전념했습니다. 신학교 강의나 외부 강사도 일체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싸우는 교회로 소문난 교회가 안정되기 시작하니까 매주 마다 사람들이 늘어나는 겁니다. 3년 만에 1부에서 3부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차시설이 열악했는데 8중 주차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충청도 끈기가 있잖아요. 경상도 같으면 뿌샤버린다 할텐데 그런 불편에 대해 내색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 얘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축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교인 거의 전체가 건축 반대를 안 했습니다. 그런데 전임자가 2년 만에 하나님의 뜻이라며 올라간 서울에서 다시 하나님의 뜻이라며 대전에 내려와 분립 개척예배를 드리니까 8분 장로 가운데 몇, 안수 집사들 몇 사람을 비롯해 사람들이 저쪽으로 갔어요. 교회 안에 혼란과 평지풍파가 날 수 있는데 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정면 돌파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그쪽 교회 개척헌금을 해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이건 말도 안 된다며 노회와 총회에 제소하자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를 봐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제가 다 가라앉혔습니다. 영적 매듭을 짓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서로 다 잘 알고 그러는 사이 아닙니까. 저는 화평한 교회만을 바랐는데 하나님께서 덤으로 교회까지 주셨습니다. 부임한 지 2년이 좀 지난 1997년 5월 600여 명 모일 때 교회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다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장로들도 요단강 가시고 이민도 가시고 했습니다. 다시 내려온 목사에게 가고 교회가 참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은혜를 주시니까 매주 교인들이 오는 겁니다. 저쪽 교회 빚도 다 갚고 헌당식도 부임 6개월 만에 제가 했습니다.” 카페 봉사자가 과일을 갖다주었다. “나는 교회를 짓는다면 전통 방식으로 하나 짓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행복한 교회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원래 있던 교회는 공간 여유가 없어 성도들이 가 있을 데가 없었어요. 교회 앞에 정해진 방향이 없는 이면도로가 있어 차가 막 다녀 아이들도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목회는 행복했습니다. 이 교회 건축은 정림건축(1967년 설립된 정림은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서울월드컵경기장, 무역센타, 연세의료원세브란스병원 등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이 했고, 시공은 전국 도급 순위 4위의 엘지건설이 했습니다. 이 교회를 엘지건설이 맡게 된 것은 마침 이 교회 건너편에서 을지대학병원을 짓고 있던 터라 그냥 한 건설 현장이나 같았습니다. 엘지건설도 좋고 우리 교회도 좋은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제 마음에 이 교회 건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과정의 은혜도 주실 것이고 결실의 열매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1600여 명 모일 때였습니다. 성도들의 헌신이 얼마나 놀라웠는가 하면 수협에서 융자금을 천천히 갚으라고 조기 상환 페널티를 없앴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우리가 빚도 빨리 갚고 헌당도 빨리 했습니다(2002년 6월 14일 새성전 건축 봉헌예배, 2008년 11월 16일 헌당식). 그 사이에 4년 반 동안 이단들과 소송도 있었습니다. 국제초등학교도 하나 세웠습니다. 고등학교는 많은 데 초등학교는 우리가 제일 큽니다. 이제까지 잡음 없이 땅을 사고 건물 짓고, 화평하게 일을 해 왔습니다. 하나님이 이 태도를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 목회관은 사자성어(四字成語)로 목양일념(牧羊一念), 정도목회(正道牧會), 은총무한(恩寵無限), 동역감사(同役感謝), 성령충만(聖靈充滿)입니다. 이 목표로 달려왔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목양일념이라는 말과 사도(邪道)가 아니라 정도(正道)를 걷겠다는 일념으로 왔습니다. 제가 저에 대해 드릴 말씀은 이게 다입니다. 하하.” 사임하고 떠난 전임 목사 면직하라고 돈까지 들여가며 아우성치는 삼일교회(송태근 목사) 같은 분쟁 아닌 분쟁을 겪는 교회들과 정도 목회를 걸으려는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될 오정호 목사의 이야기를 마치고 둘러 본 새로남카페의 창에 대전청사가 들어선 신도시의 너른 겨울 숲이 내려다 보였다. 이런 시가 있다. 겨울 숲은 따뜻하다 -홍 영 철 겨울 숲은 뜻밖에도 따뜻하다. 검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대고 말없이 늘어서 있고 쉬지 않고 떠들며 부서지던 물들은 얼어붙어 있다. 깨어지다가 멈춘 돌멩이 썩어지다가 멈춘 낙엽이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시간을 붙들어놓고 있다. 지금 세상은 불빛 아래에서도 낡아가리라. 발이 시리거든 겨울 숲으로 가라.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그때. 헤어질 때 교회를 벗어나 건널목까지 배웅한 그는 악수를 나눈 내가 푸른 신호를 받아 길을 건너고 돌아보니 아직 그 자리에 겨울 숲을 뒤로 하고 겨울바람에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2015-6-22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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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김승동 목사 설교-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라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 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여호수아 3 : 14-17절 대부분의 동화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만나서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결혼하게 되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이야기 끝이 난다. 자신도 동화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결혼을 해본다. 동화는 동화이지 현실의 삶은 실제 그렇지 아니함을 금방 알게 된다. 실제적 사랑은 결혼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 이후에 가꾸어져 가며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결혼식 할 때까지의 감동과 기쁨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살아갈 수 록 억지로 주먹을 쥐고 의리의 구호를 외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좋아서 결혼 했으면 살아 갈수록 서서히 좋아져 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그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면 예수님과의 결혼 생활은 이 땅에서 살아 갈수록 점점 좋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과의 결혼 생활은 한번 구원 받은 감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구원 받은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더 큰 신앙의 감동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펴보는 여호수아 3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가르시는 기적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 때의 홍해를 가르사 기적적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광야 생활의 끝을 알리며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또 한 번 요단강을 가르시는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게 된다. 간혹 교회 다니는 분들에게 구원의 처음 감동이 사라진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는데 그 구원 이후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본장에서는 홍해를 가르사 베푸신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은 다음 요단강을 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더 큰 하나님의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려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가 아무런 일도 안하고 그저 교회만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감동을 경험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 앞에 은혜에 합당한 삶의 반응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다시 말해서 홍해의 구원 감동을 요단강의 더 큰 감동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르면 구원 받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더 큰 감동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하겠는가?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첫째 : 말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성결함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2절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5절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도달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일 동안 더 머물며 기다리도록 하신다. 이 기다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삼일 동안이나 머물게 하시는가? 15절“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이 삼일동안 머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 최고로 깊어지며 물이 많아지는 시기를 눈으로 확인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광야보다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으며, 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도록 단단히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더 큰 감동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며 그분을 더욱 신뢰할 때 경험할 수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로 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내 앞에 가로 막혀 있는 요단강을 가르시기 전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잊지 않고 있는지, 하나님만 더욱 의지하고 있는지 하나님만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기를 원하신다. 이것만 확인되면 하나님은 내 앞에 가로 막혀 있는 높고 깊고 넓은 어떤 요단강의 문제도 가르시어 해결해 주실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전 기다리는 동안 명령하신 것이 있다. 바로 성결이다.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스스로 성결하기를 원하신다. 성결이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의지해서 과거의 잘못과 더러움을 끊어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불교처럼 자신을 비워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영으로 자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믿고 자신을 얽매고 있는 죄의 사슬과 흔적들을 끊어내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줄 안다. 성령님에게 맡겨야 한다. 이건 단순히 기도만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 우리의 평소의 습관 모두가 거룩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는 것으로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성령으로 나의 삶을 채워가는 기다림과 성결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 큰 감동과 은혜로 내 앞에 막힌 요단강의 문제를 가르사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둘째 : 하나님 말씀의 언약궤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3절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요단강 앞에서 기다리며 성결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의 수위가 낮은 곳이나 폭이 좁을 곳을 찾으라고 하지 않고,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라고 하셨다. 여러분! 그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의 계명, 말씀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언약궤를 따를 때 그 언약궤를 2000규빗, 약 900미터 쯤 떨어져서 따라가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앞서거나 말씀보다 앞질러서 가지 말고 철저하게 뒤를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머물게 하거든 무조건 머물러야 한다. 성령이 가게하거든 좌우로 보지 말고 무조건 가라. 그래야 하나님은 문제의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자 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서도 계속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처음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치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평안과 형통의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 그대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을 맛보기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항상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시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앞서가시는 성령님을 따라서, 변함없는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복잡하지 않다. 하나님이 변함없고 그분의 말씀이 변함없음을 믿는다면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면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변함없는 방법이다. 여러분 모두가 올 한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셔서 더 큰 감동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셋째 :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내어 딛어야 합니다. 15절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앞으로 나간다. 눈앞에는 요단강이 가장 범람해서 물이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발을 요단강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긴다. 그 때에 요단강은 갈라지면서 완전한 마른 땅이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 홍해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손을 내밀자 물이 갈라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건넌 것이다. 하지만 요단강은 아직 흐르는 물에 발을 딛는 순종함으로 건넌 것이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구원을 베푸신 분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능력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의 발걸음을 내어 딛어야 한다. 순종의 걸음이 앞으로 나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성도의 능력의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순종의 신앙인은 “문제가 있어도 저는 주님의 능력과 말씀만 붙들고 갑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러분! 어느 쪽이 더 믿음의 사람인가? 어느 쪽이 더 큰 감동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까? 예수님은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미래의 일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 주저하지 마라.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어 딛으라. 그럴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더 큰 감동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한번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여러분에게는 구원 받은 감동의 삶이 더 큰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첫째, 말씀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겠으며 성결함도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따르겠습니다. 셋째, 막힌 문제 앞에는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내어딛겠습니다. 2015-06-22
    • G.MISSION
    • G.SERMON
    2015-06-22
  • 더굳뉴스 제 18호 제1 총신인 김승동 목사
    B.C.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포악한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카이사르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遠征)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역전(歷戰)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財界)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陳容)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B.C.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수여한 칭호로, '위엄 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帝政)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집단 지도체제인 과두제(寡頭制)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임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제1 시민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정연철 목사가 설교집이라도 냈는지 광고비가 만만치 않을 기독신문 돌출 광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걸 보니 그는 믿음과 총회 정치력이 아니라 로비스트만 잘 활용하면 될 수 있다는 경험에 의지해 총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 서정배나 김용실처럼 다음에 또 부총회장 선거에 나올 모양이다. 2014년 9월 제99회 총회 당시 가장 유력한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자 김승동 목사의 지지표가 방향을 잃고 정연철을 찍는 바람에 박무용 목사가 정연철을 108표차로 신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계와 총회 정치의 원로목사이자 목회자 시인 백영규 목사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사랑하시지 않는 모양이네.” 제비뽑기 덕에 결선 투표에 올라갔던 정연철 목사는 기도의 종이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받은 표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나오면 그러한 지지를 얻어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모양이다. 교계 지도자로서 모든 면에 탁월해 교단 전체 어느 누구와도 이길 수 있는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에서 떨어지고 그 덕에 몸도 약한 박무용 목사가 총회 상비부 부장도 되어본 적이 없는 상대를 손쉽게 이기고 부총회장이 되었다. 차제에 총회 선거는 무능력과 무자격자들이 즐기는 제비뽑기는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이 들리는 박무용 목사가 100회 총회를 치르고 난 뒤 감당할 스케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런 선례가 바로 앞의 탱크 같은 건강과 힘을 자랑하던 총회 총무 황규철 목사일 것이다. 그는 무리한 총회 정치의 여파인지 지금 건강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총회 총무 말기 총회 상대 재판 패소 건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문제와 사고로 실타래 같이 얽힌 평동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 결의에 따르면 총회 산하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황규철 목사의 평동노회 노회장 사회로 추천을 받은 장대영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유지하고 당선까지 노리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80여㎞가량 떨어진 고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한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뉴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허드슨강을 지키려고 세운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02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로 213년 됐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는 170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는 61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의 사관학교는 단순한 장교 양성 기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 교장을 역임한 테이어 대령이다. '테이어 제도'의 요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감, 명예, 헌신, 정직 등 리더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에 인문학적 교양과 전문 지식까지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을 이끌 진정한 리더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총신도 세계와 한국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자부심이 드높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시작하여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를 거쳐, 1995년 교명을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Chongshin University)로 변경한 총신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고,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주의보다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전통을 따르며 바르트주의를 배격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1959년 제44회 총회 때 WCC문제로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손으로 갈라져 나와 세운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칼빈주의를 계승한 개혁주의 요람(搖籃) 114년의 총신의 힘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총신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이다. 이 학교를 통해 한국과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될 박형룡·박윤선·김창인·옥한흠·박영선·김승동 등의 목사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제1 시민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 시대의 제1 총신인은 교계와 목회에서 올곧고 두드러진 활약과 업적을 세운 김승동 목사다. 그러므로 김승동 목사가 조선 선비들의 전통에 따라 그의 집 대들보에 글을 적는다면 ‘爲神, 爲如白, 爲詩’가 어울릴 것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위신(爲神)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성경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외우며, ‘살아있는 동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겠다’를 입과 몸에 달고 사는 김승동 목사의 신앙관에 맞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여백(爲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의 ‘맑음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김승동 목사가 평생 실천한 청렴을 나타내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시(爲詩)는 ‘시를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통해 성도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전하겠다며 시와 글을 써 책을 낸 목사이기 때문이다. 김승동 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진감 있는 목회,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강단, 은혜로운 당회, 총회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이다. 그렇듯 지도력 부재의 이 각박한 시대에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에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구미상모교회의 김승동 목사이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교회 마당을 지나면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안긴다.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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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제1 총신인 김승동 목사
    B.C.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포악한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카이사르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遠征)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역전(歷戰)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財界)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陳容)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B.C.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수여한 칭호로, '위엄 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帝政)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집단 지도체제인 과두제(寡頭制)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임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제1 시민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정연철 목사가 설교집이라도 냈는지 광고비가 만만치 않을 기독신문 돌출 광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걸 보니 그는 믿음과 총회 정치력이 아니라 로비스트만 잘 활용하면 될 수 있다는 경험에 의지해 총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 서정배나 김용실처럼 다음에 또 부총회장 선거에 나올 모양이다. 2014년 9월 제99회 총회 당시 가장 유력한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자 김승동 목사의 지지표가 방향을 잃고 정연철을 찍는 바람에 박무용 목사가 정연철을 108표차로 신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계와 총회 정치의 원로목사이자 목회자 시인 백영규 목사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사랑하시지 않는 모양이네.” 제비뽑기 덕에 결선 투표에 올라갔던 정연철 목사는 기도의 종이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받은 표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나오면 그러한 지지를 얻어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모양이다. 교계 지도자로서 모든 면에 탁월해 교단 전체 어느 누구와도 이길 수 있는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에서 떨어지고 그 덕에 몸도 약한 박무용 목사가 총회 상비부 부장도 되어본 적이 없는 상대를 손쉽게 이기고 부총회장이 되었다. 차제에 총회 선거는 무능력과 무자격자들이 즐기는 제비뽑기는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이 들리는 박무용 목사가 100회 총회를 치르고 난 뒤 감당할 스케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런 선례가 바로 앞의 탱크 같은 건강과 힘을 자랑하던 총회 총무 황규철 목사일 것이다. 그는 무리한 총회 정치의 여파인지 지금 건강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총회 총무 말기 총회 상대 재판 패소 건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문제와 사고로 실타래 같이 얽힌 평동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 결의에 따르면 총회 산하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황규철 목사의 평동노회 노회장 사회로 추천을 받은 장대영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유지하고 당선까지 노리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80여㎞가량 떨어진 고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한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뉴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허드슨강을 지키려고 세운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02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로 213년 됐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는 170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는 61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의 사관학교는 단순한 장교 양성 기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 교장을 역임한 테이어 대령이다. '테이어 제도'의 요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감, 명예, 헌신, 정직 등 리더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에 인문학적 교양과 전문 지식까지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을 이끌 진정한 리더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총신도 세계와 한국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자부심이 드높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시작하여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를 거쳐, 1995년 교명을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Chongshin University)로 변경한 총신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고,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주의보다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전통을 따르며 바르트주의를 배격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1959년 제44회 총회 때 WCC문제로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손으로 갈라져 나와 세운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칼빈주의를 계승한 개혁주의 요람(搖籃) 114년의 총신의 힘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총신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이다. 이 학교를 통해 한국과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될 박형룡·박윤선·김창인·옥한흠·박영선·김승동 등의 목사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제1 시민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 시대의 제1 총신인은 교계와 목회에서 올곧고 두드러진 활약과 업적을 세운 김승동 목사다. 그러므로 김승동 목사가 조선 선비들의 전통에 따라 그의 집 대들보에 글을 적는다면 ‘爲神, 爲如白, 爲詩’가 어울릴 것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위신(爲神)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성경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외우며, ‘살아있는 동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겠다’를 입과 몸에 달고 사는 김승동 목사의 신앙관에 맞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여백(爲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의 ‘맑음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김승동 목사가 평생 실천한 청렴을 나타내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시(爲詩)는 ‘시를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통해 성도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전하겠다며 시와 글을 써 책을 낸 목사이기 때문이다. 김승동 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진감 있는 목회,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강단, 은혜로운 당회, 총회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이다. 그렇듯 지도력 부재의 이 각박한 시대에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에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구미상모교회의 김승동 목사이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교회 마당을 지나면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안긴다.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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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총회 측과 총신 측의 귀추
    1969년 10월 21일, 삼선개헌을 통해 국회는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3월 17일 민주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김대중은 2차 투표에서 이철승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을 누르고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1971년 4월 27일에 열린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헌법상의 마지막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는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단행하지만, 얼마 후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성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봄 대학가는 개학하자 일제히 교련 반대 시위로 들끓었다. 밤이면 적막하고 여름밤이면 개구리 울음이 드높은 사당동 골짜기에 자리 잡은 총신은 박정희가 농단하는 대한민국 시국과는 동떨어져 기도와 말씀 연구에 열심이었다. 그런 성향에 어울리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사당동 골짜기의 총신대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희천 목사를 강사로 심령부흥회를 가졌다. 칼빈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총신생들은 공사 마무리가 안 된 천장 곳곳에 박쥐처럼 매달린 호롱불을 밝힌 예배실에서 집회를 했다. 두루마기를 입은 박희천 목사는 금식을 하며 설교를 했다. 통성기도 시간은 뜨거운 은혜의 도가니였다. 대학부 1학년 신출내기 신학생은 놀라움과 호기심에 통성으로 부르짖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소련의 철의 장막, 중공의 죽의 장막이 걷히고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외침도 들렸다. 그 당시 세상의 온갖 문제가 총신생들의 통성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그날 밤 신학생들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했다. 1학기가 다할 무렵 학교가 팔려 경기도 광주로 옮긴다는 말이 돌았다. 사당동 학교에 오려면 흑석동을 돌아 사당동 종점에서 걸어오거나 상도동 숭실대 앞에서 언덕을 넘어 오거나 봉천동에서 봉천 시장을 지나 고개를 넘어 오거나 해야 했다. 비만 오면 땅은 질펀해져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었다. 화장실은 학교 밖에 널판의 간이식으로 되어 있었다. 온갖 불편에도 학생들은 믿음 하나로 찬송하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당동도 그 당시 시외 수준이었는데 경기도 광주라면 교단과 총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패한 교단 정치 세력의 음모였다. 그 극비 정보는 당시 스포츠 머리 스타일과 해박한 신학 지식의 달변으로 유명했던 대학부 4학년 김영우 전도사가 시무 교회 담임목사를 통해 입수한 것이었다. 신학부 3개 학년 대학부 4개 학년 일동이 수업거부에 들어갔다. 총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적인 반대활동을 위해 각 학년마다 대표 3명씩을 뽑아 21전권위원회를 선정했다. 위원장은 신학부 3학년 박도순 전도사가 맡았다. 21위원에는 전권위원회 서기였던 대학부 4학년 김영우 전도사, 대학부 2학년 이경원, 신학부 1학년 이종영 전도사, 대학부 1학년 김영배 등이 들어있었다. 당시 21전권위원회 중심에는 21전권위원회 서기 김영우 전도사가 있었다. 21전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아예 집으로 돌아갔다. 독재 정권 반대나 교련 반대 데모 한 번 없던 총신 신학생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고 학교의 발전이나 교단의 성장에는 관심 없는 부패한 교단 세력을 막기 위해 데모를 하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교권 세력에 맞선 21전권위원회의 전국교회 순회 활동을 위한 전략과 자금은 김영우 전도사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 교단 소식에 어둡던 전국교회 목사들이 21전권위원회 신학생들을 통해 부패한 교권 세력의 음모를 알고 분노했다. 1971년 9월 23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56회 총회(총회장 정규선 목사)에서 총회신학대학 재단이사회와 일반이사회의 개편을 결의했다. 당시 부서기가 된 이영수 목사(대전중앙교회)의 시대가 시작되고 박찬목 목사(혜성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북 세력의 시대는 마감되었다. 총회신학대학에 전기가 들어오고 콘크리트 바닥도 정리되지 않은 채 사용하던 건물의 리모델링이 시작됐다. 당시 박아론 교수의 부친 박형용 학장의 방은 콘크리트 마감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지금의 총신 발전의 기초가 그때 마련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44년이 흐른 2015년 총회는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측과 총신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 측과 총신정관 개정문제를 놓고 총신의 주도권을 위해 대립하고 있다. 그 대립의 각이 이번 100회 총회에서 격돌할 것이다. 어떻게 될까. 그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이청준은 1965년 ≪퇴원≫으로 등단한 이래 작가의 실천성으로서 그 몫이란 무엇인가를 작품의 화두로 삼고 ‘언어’와 ‘소설’의 진정성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이다. 권력과 저항의 이중 구조를 우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이청준의 ≪예언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홀 안의 다른 가면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한 침묵 속에서 싸움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2015-06-20
    • G.OPINION
    20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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