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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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0월 21일, 삼선개헌을 통해 국회는 헌법 제69조 3항의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개정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1971년 3월 17일 민주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하였다. 김대중은 2차 투표에서 이철승 지지세력을 규합하여 결국 김영삼을 누르고 최종적으로 승리하였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박정희와 맞서게 되었다. 1971년 4월 27일에 열린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헌법상의 마지막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는 임기의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단행하지만, 얼마 후 "그동안 진행해오던 국책사업의 안정적 이행과 평화통일을 위한 안정적 국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성명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계엄령과 국회 해산을 통해 10월 유신을 선포하게 된다.

1971년 봄 대학가는 개학하자 일제히 교련 반대 시위로 들끓었다. 밤이면 적막하고 여름밤이면 개구리 울음이 드높은 사당동 골짜기에 자리 잡은 총신은 박정희가 농단하는 대한민국 시국과는 동떨어져 기도와 말씀 연구에 열심이었다. 그런 성향에 어울리게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후미진 사당동 골짜기의 총신대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희천 목사를 강사로 심령부흥회를 가졌다. 칼빈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총신생들은 공사 마무리가 안 된 천장 곳곳에 박쥐처럼 매달린 호롱불을 밝힌 예배실에서 집회를 했다. 두루마기를 입은 박희천 목사는 금식을 하며 설교를 했다. 통성기도 시간은 뜨거운 은혜의 도가니였다. 대학부 1학년 신출내기 신학생은 놀라움과 호기심에 통성으로 부르짖는 신학생들의 모습을 두리번거렸다. 소련의 철의 장막, 중공의 죽의 장막이 걷히고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외침도 들렸다. 그 당시 세상의 온갖 문제가 총신생들의 통성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니 그날 밤 신학생들의 기도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역사했다.

1학기가 다할 무렵 학교가 팔려 경기도 광주로 옮긴다는 말이 돌았다. 사당동 학교에 오려면 흑석동을 돌아 사당동 종점에서 걸어오거나 상도동 숭실대 앞에서 언덕을 넘어 오거나 봉천동에서 봉천 시장을 지나 고개를 넘어 오거나 해야 했다. 비만 오면 땅은 질펀해져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었다. 화장실은 학교 밖에 널판의 간이식으로 되어 있었다. 온갖 불편에도 학생들은 믿음 하나로 찬송하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당동도 그 당시 시외 수준이었는데 경기도 광주라면 교단과 총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패한 교단 정치 세력의 음모였다. 그 극비 정보는 당시 스포츠 머리 스타일과 해박한 신학 지식의 달변으로 유명했던 대학부 4학년 김영우 전도사가 시무 교회 담임목사를 통해 입수한 것이었다.

신학부 3개 학년 대학부 4개 학년 일동이 수업거부에 들어갔다. 총신을 지키기 위한 조직적인 반대활동을 위해 각 학년마다 대표 3명씩을 뽑아 21전권위원회를 선정했다. 위원장은 신학부 3학년 박도순 전도사가 맡았다. 21위원에는 전권위원회 서기였던 대학부 4학년 김영우 전도사, 대학부 2학년 이경원, 신학부 1학년 이종영 전도사, 대학부 1학년 김영배 등이 들어있었다. 당시 21전권위원회 중심에는 21전권위원회 서기 김영우 전도사가 있었다. 21전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아예 집으로 돌아갔다. 독재 정권 반대나 교련 반대 데모 한 번 없던 총신 신학생들이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고 학교의 발전이나 교단의 성장에는 관심 없는 부패한 교단 세력을 막기 위해 데모를 하고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교권 세력에 맞선 21전권위원회의 전국교회 순회 활동을 위한 전략과 자금은 김영우 전도사의 머리와 손에서 나왔다. 교단 소식에 어둡던 전국교회 목사들이 21전권위원회 신학생들을 통해 부패한 교권 세력의 음모를 알고 분노했다. 1971년 9월 23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56회 총회(총회장 정규선 목사)에서 총회신학대학 재단이사회와 일반이사회의 개편을 결의했다. 당시 부서기가 된 이영수 목사(대전중앙교회)의 시대가 시작되고 박찬목 목사(혜성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북 세력의 시대는 마감되었다.

총회신학대학에 전기가 들어오고 콘크리트 바닥도 정리되지 않은 채 사용하던 건물의 리모델링이 시작됐다. 당시 박아론 교수의 부친 박형용 학장의 방은 콘크리트 마감이 깔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지금의 총신 발전의 기초가 그때 마련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44년이 흐른 2015년 총회는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측과 총신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 측과 총신정관 개정문제를 놓고 총신의 주도권을 위해 대립하고 있다. 그 대립의 각이 이번 100회 총회에서 격돌할 것이다. 어떻게 될까. 그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이청준은 1965년 ≪퇴원≫으로 등단한 이래 작가의 실천성으로서 그 몫이란 무엇인가를 작품의 화두로 삼고 ‘언어’와 ‘소설’의 진정성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이다. 권력과 저항의 이중 구조를 우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는 이청준의 ≪예언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홀 안의 다른 가면들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한 침묵 속에서 싸움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201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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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측과 총신 측의 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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