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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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포악한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카이사르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遠征)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역전(歷戰)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財界)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陳容)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B.C.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수여한 칭호로, '위엄 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帝政)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집단 지도체제인 과두제(寡頭制)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임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제1 시민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정연철 목사가 설교집이라도 냈는지 광고비가 만만치 않을 기독신문 돌출 광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걸 보니 그는 믿음과 총회 정치력이 아니라 로비스트만 잘 활용하면 될 수 있다는 경험에 의지해 총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 서정배나 김용실처럼 다음에 또 부총회장 선거에 나올 모양이다. 2014년 9월 제99회 총회 당시 가장 유력한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자 김승동 목사의 지지표가 방향을 잃고 정연철을 찍는 바람에 박무용 목사가 정연철을 108표차로 신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계와 총회 정치의 원로목사이자 목회자 시인 백영규 목사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사랑하시지 않는 모양이네.”

제비뽑기 덕에 결선 투표에 올라갔던 정연철 목사는 기도의 종이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받은 표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나오면 그러한 지지를 얻어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모양이다. 교계 지도자로서 모든 면에 탁월해 교단 전체 어느 누구와도 이길 수 있는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에서 떨어지고 그 덕에 몸도 약한 박무용 목사가 총회 상비부 부장도 되어본 적이 없는 상대를 손쉽게 이기고 부총회장이 되었다. 차제에 총회 선거는 무능력과 무자격자들이 즐기는 제비뽑기는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이 들리는 박무용 목사가 100회 총회를 치르고 난 뒤 감당할 스케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런 선례가 바로 앞의 탱크 같은 건강과 힘을 자랑하던 총회 총무 황규철 목사일 것이다. 그는 무리한 총회 정치의 여파인지 지금 건강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총회 총무 말기 총회 상대 재판 패소 건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문제와 사고로 실타래 같이 얽힌 평동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 결의에 따르면 총회 산하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황규철 목사의 평동노회 노회장 사회로 추천을 받은 장대영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유지하고 당선까지 노리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80여㎞가량 떨어진 고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한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뉴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허드슨강을 지키려고 세운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02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로 213년 됐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는 170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는 61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의 사관학교는 단순한 장교 양성 기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 교장을 역임한 테이어 대령이다. '테이어 제도'의 요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감, 명예, 헌신, 정직 등 리더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에 인문학적 교양과 전문 지식까지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을 이끌 진정한 리더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총신도 세계와 한국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자부심이 드높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시작하여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를 거쳐, 1995년 교명을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Chongshin University)로 변경한 총신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고,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주의보다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전통을 따르며 바르트주의를 배격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1959년 제44회 총회 때 WCC문제로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손으로 갈라져 나와 세운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칼빈주의를 계승한 개혁주의 요람(搖籃) 114년의 총신의 힘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총신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이다. 

이 학교를 통해 한국과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될 박형룡·박윤선·김창인·옥한흠·박영선·김승동 등의 목사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제1 시민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 시대의 제1 총신인은 교계와 목회에서 올곧고 두드러진 활약과 업적을 세운 김승동 목사다. 그러므로 김승동 목사가 조선 선비들의 전통에 따라 그의 집 대들보에 글을 적는다면 ‘爲神, 爲如白, 爲詩’가 어울릴 것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위신(爲神)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성경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외우며, ‘살아있는 동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겠다’를 입과 몸에 달고 사는 김승동 목사의 신앙관에 맞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여백(爲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의 ‘맑음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김승동 목사가 평생 실천한 청렴을 나타내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시(爲詩)는 ‘시를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통해 성도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전하겠다며 시와 글을 써 책을 낸 목사이기 때문이다.

김승동 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진감 있는 목회,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강단, 은혜로운 당회, 총회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이다. 그렇듯 지도력 부재의 이 각박한 시대에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에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구미상모교회의 김승동 목사이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교회 마당을 지나면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안긴다.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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