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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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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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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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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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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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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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상1Kings
    열왕기상1Kings과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한 권이었다. 열왕기서는 이름 그대로 솔로몬부터 시드기야까지 유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열왕기서의 사건이 시작될 때 나라는 하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난 뒤 두 나라로 나뉘었다. 그 뒤 두 왕국은 강대국에 망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잡혀갔다. 남 유다 백성은 바빌론에 잡혀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경고대로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와 훈육뿐이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요 한 장 속에 _권영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웠다. 한 담요를 덮고 나란히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고 아들은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아들의 발을 덮는다. 아버지는 평생을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남몰래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거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진실을 모르니 늘 아버지가 어렵고 섭섭하다. 이렇듯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려고 마음을 다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치욕과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죄였다. 솔로몬은 외국의 우상들을 섬겼고 백성은 그를 따랐다. 고작 한 세대 만에 그 나라가 쇠퇴하고 분열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경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이 있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그들의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처럼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일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한 모습에 용서의 기회를 주시듯 늘 용서와 축복의 기회를 엿보신다. 2024-03-17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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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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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이 삶이 되다_ 찍힌 바 된 참 감람나무 유대인
    주신 말씀_ 로마서 11:17~24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찍힌 바 된 참 감람나무 유대인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천육백 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그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셨던 소회를 말씀하셨으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 후 피폐하고 지리멸렬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대답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사뭇 냉소적이며 원망 가득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들의 대답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듯 그 후 4백 년 동안 침묵하신다. 갑갑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항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하시며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세상에 보내시는 ‘이처럼의 사랑’을 답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께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들은 그 많은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을 보면서도 메시아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었다. 그들의 ‘실족’에 큰 덕을 본 사람은 돌감람나무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 11:11) 곧 아브라함 때로부터 참감람나무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백성은 찍혀 떨어져 나가고 그 덕택(?)으로 우리 이방인이 그 풍성하신 구원의 은혜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큰 쓰임을 받은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늘 가슴에 있어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에게 ‘교만’치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원가지도 아끼고 아니하셨은즉...’(21절) 그러나 어찌하랴! 그 참감람나무 유대인들은 주님 오신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모세에게만 붙들려 있다 하니 혹시 하나님은 아직도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에게 기대하고 계시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멘. 20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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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4
  • 성경이 삶이 되다_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주신 말씀_ 마태복음 5:22~24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한국인들에게는 서양의학에도 없는 ‘홧병’이라는 게 있다 한다. ‘분노’를 참아내서 생기는 병이다. 분노의 조절 기능이 원활치 못한 사람은 각종 충동적 사고를 일으키고 급기야 ‘살인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 주님이 가르치시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삶 속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구약 율법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거와 같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매우 강화된 심판의 기준을 제시하셨다. 어찌 사람이 인생을 사는 동안 정서적 문제인 ‘노’를 발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심지어 주님은 형제에게 ‘욕을’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셨다. 미련한 놈? 내 일상의 기준으로는 그 정도는 큰 욕도 아닌 듯한데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형제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형제는 피를 나눈 육신적 형제와 믿음 안에 맺어진 영적 형제가 있으리라. 육신적 형제든 영적 형제든 화목한 관계가 언제나 지속 되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내 경우만 보더라도 육신적 형제인 동생과는 한때 원수 못지않은 갈등이 있었고 지금 교적을 둔 교회 내에도 성도들 간 적잖은 다툼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당연히 분노와 심한 말까지 서슴없이 오간다. 주님은 이런 불화와 원망의 문제가 있으면 예배에 앞서 먼저 ‘화해’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분노’를 지니고 드리는 예배는 경건할 수 없고 청결하지 못하여 상달이 안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오직 형제는 ‘사랑’의 대상이다! 아멘. 20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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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0
  • 성경이 삶이 되다_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주신 말씀_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왜 믿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라고 누구나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 생활을 함으로 정신적 육신적 평안을 얻고 삶 속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털어놓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 인생들의 삶 속에는 항상 수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염려와 고뇌가 반복되고 있다. 질병의 문제, 자녀, 가정의 문제, 재물과 직장의 문제 등 오죽하면 불교에서는 그 문제들로 인한 번뇌가 108가지가 있다 하였다. 그 108가지 번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그리스도인과 불교 신자들에게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그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수행’이란 것을 권면한다. ‘수행’이라 함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부처 화’ 되기까지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멈춰서 원하는 경지에 이르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극락’이 보장될 것인가? 불교계의 대표적 큰스님이라는 성철스님이란 분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겼다. 그러나 정작 죽음 앞에서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 볼 때 그토록 오랜 세월의 ‘수행’ 결과에도 사망 앞의 문제와 ‘극락’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며 백팔번뇌에 대한 온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불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닌 철학적인 종교요, 영광과 기쁨이 아닌 끝없는 번뇌의 종교인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어떤 신이 내가 창조주다, 하나님이다, 부활이요 영생이다!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증한 바 있는가? 이는 귀신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러므로 백팔번뇌든 사망이든 그 어떤 문제라도 ‘하나님을 만날 때’ 완벽히 해결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아멘. 20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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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3
  • 성경이 삶이 되다_ 범사에 감사하라
    주신 말씀_ 데살로니가전서 5:18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느 학자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단어가 무엇인가를 조사하였더니 ‘사랑’이란 말보다 ‘감사’란 단어였다 한다. 또 미국이 역사도 짧은데 어찌 저렇게 빠른 시일 내에 부강하게 되었고 세계 일등 국가가 되었나를 분석하니 모든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땡큐’(감사)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감사라는 말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감사’는 조건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함은 무 조건적인 감사를 하란 말이기도 하다. 범사...? 우리 일상의 범사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겠으나 아프고 괴롭고 짜증 나고 두려운 일들도 많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모든 상황을 막론하고 ‘감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도를 하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해 주셔서’의 감사였다. 곧 좋은 은사를 베풀어 주심에 대한 조건적 감사였던 것이다. 만약 몇 년 전 같은 기막힌 웅덩이에 빠져들어가는 환난을 당하거나 갑자기 죽을병에 걸리거나 자식들에게 큰 문제가 닥쳤을 때라도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감사’를 하며 춤추고 노래가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론은 이제는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상황을 반전시키시는 기적이 일상이기에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체험이기도 한 일이라 또한 ‘감사의 끝’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말세에는 사람이 돈, 자기, 쾌락을 사랑하므로 감사가 없어진다(디후 3:2)라고 한다. 못된 사랑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더욱더욱 사랑하면 만사는 ‘감사’로 바뀌는 것이다. 아멘. 2021-11-06
    •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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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06
  • 성경이 삶이 되다_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주신 말씀_전도서 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지난 5월의 푸르른 세상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아하! 참으로 푸르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영의 눈을 뜨고 바라보는 만물의 변화 속에 모습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성은 참으로 놀라웁기만 하다. 같은 공원 길이요 같은 나무들인데 깊이 짙어가는 가을의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흘러간 5개월의 시간 속에 녹여있는 듯 새롭게만 비춰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는 솔로몬의 혜안은 놀랍고 깊이 공감이 가는 말이다. 천지창조 시 하나님은 넷째 날 ‘하늘 궁창의 광명체들로 낮과 밤을 나누시고 징조와 계절과 달과 해를 이루게 하라’ (창 1:14) 말씀하심으로 ‘시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시간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 속에 사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시간이란 틀 속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모든 삶이 ‘때’라는 섭리 안에 이루어져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에서 시간의 ‘때’에 가두신 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세상에서의 시간의 삶을 마친 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 하심에 큰 ‘목적’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 삶 동안에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본질적 존재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가는 목적을 이루는 복 받은 삶이라 하겠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그 삶이 비록 최상의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질적 목적을 모르는 짐승과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비록 사는 동안이 마냥 평탄치만 않고 형통과 곤고함이 ‘때’를 따라 달리 찾아오더라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젊을 때는 젊을 때 대로 늙으면 늙어가는 때 대로 더 깊어가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기에 기쁨이 더해가는 것이리라! 결국, 그래서 하나님도 그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게 아닐까? 아멘. 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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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9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라
    주신 말씀_골로새서 1:9~10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라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알고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닌 듯하다. 우선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낳게 하시고 나를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 나처럼 비천하고 무지렁이 같은 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은 있으실까? 지난날 내게 닥친 고난에서 나는 기도하며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 하고 여쭈면서 도우심을 간구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그 고난이 기쁨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고 얼마나 감사해 하였는지 몰랐다. 꼭이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니 세상에 나온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히 있으실 것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당사자인 자신이 어떻게 헤아려 아는가에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교인들에게 ‘듣고’, ‘깨닫고’, ‘열매 맺다’라고 말하며(골 1:6)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고 있다’라고 칭찬한다. 즉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듣는 귀가 있었고 그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더불어 말씀을 행하여 열매 맺는 결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지금까지 듣고 배워 말씀을 깨달아 알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범사에 주님께 합당하게 매일을 ‘하나님을 아는 것’에 힘쓰며 살아가는 삶! 그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아멘.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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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3
  • 지선철 성경 에세이_ 포로 70년 만의 귀환과 오늘의 이스라엘
    주신 말씀_ 에스라 1:1~3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포로 70년 만의 귀환과 오늘의 이스라엘 오늘날 중동의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건국된 면적 약 2만㎢ 인구 860여만 명의 작은 나라로서 아직도 이집트를 제외한 인접한 아랍국가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유태계 80%의 신생국가이다. 놀라운 것은 주전 800~1,200년 전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 후 전 세계로 흩어져 살던 유대민족이 국가건설을 열망한 끝에, 2천여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에 와서 세계 각지에서 모여들어 불과 70여 년 전인 1948년에 팔레스타인계를 몰아내고 다시 나라를 세웠다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왠만한 민족들은 나라가 멸망하고 나면 수십 년 혹은 아무리 길어도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인종적 혼합으로 민족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 사례인데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들은 예수님 이후 2천 년 동안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갖은 수난과 박해 속에 서로 민족의 정체성과 언어, 종교를 지켜오다가 끝내 다시 뭉쳐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건국하였다. 끈질긴 민족성도 민족성이지만 생명력과 결집력은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다. 유대인들의 기구한 운명은 고대사에서도 숱한 전쟁과 멸망을 겪어 왔지만 예수님 탄생 이후 로마 시대의 종교적 박해를 받다가 근대사에 이르러 독일 나치스에 의해 5백만 명이 넘는 대학살을 겪으며 최고조에 이르렀다. 오늘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지 하나님이 약속한 70년이 지나자 하나님의 영적 감동을 받은 바사왕 고레스는 유다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있다. 이는 예레미야 입을 통하여 ‘칠십 년이 끝나면 너희를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신 약속의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라. 또한 그동안 예레미야, 다니엘, 에스겔 등 하나님의 사람들이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흘린 눈물과 기도가 결실 맺는 감격적 일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세계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꿈을 약속의 말씀을 통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 탄생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스라엘의 역사로 나타내시고 있는 것이다. 한편 오늘의 작은 중동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나라인가? 저들의 민족적 끈기와 강인한 결집력은 출애굽 후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선민의식에서부터 비롯되어 유대인이라는 자랑할만한 민족혼을 지켜 온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탄생 이후 하나님이 진정 이루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작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선민임을 자처하는 저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부정하고 있으며 오직 모세 율법에 얽매여 유대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현실의 비극적 문제인 것이다! 저들의 지독한 완고함과 고집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고 계실까?! 그토록 ‘돌아오라’고 호소하셨던 마지막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도 사도 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도 외면하고 예수님 마저 끝내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막장 죄악은 새롭게 택함을 받은 열방의 하나님 백성들이 역 선교 활동을 통하여 과연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있을까? 이 시간도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는 역사로 쓰여지고 있으리라...!! 아멘. 20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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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8
  • 지선철 성경 에세이_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리라
    주신 말씀_ 예레미야 33:1~3 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크고 은밀한 일을 보이리라 한 치의 앞이 보이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은 ‘내게 부르짖으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응답하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여 놓으신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오늘의 예루살렘은...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부르짖으면 저들의 구원과 회복의 계획을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신 것이다. 결국, 예루살렘 땅에는 구원의 기적이 일어났다.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조차 없는 유다 성읍과 예루살렘 거리에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 여호와께... 감사를 외치는 소리(렘 33:10~11)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70년이 지나 제국이 멸망하고 3차에 걸쳐 포로민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기적과 함께 성전과 성벽이 재건축된 느헤미야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느 12:43) 할렐루야! 하나님의 크고 은밀하며 놀라우신 계획은 내 삶 속에서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이제 한국으로 귀국하여 산 지 만 3년이 흘렀다. 그동안 하나님은 내게 말 못할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나를 끌어올리시고 나를 대적한 모든 자들로부터 공의를 드러내 주셨으며... 경제적 회복은 물론 모든 법적 문제를 승리케 하셨으며... 오늘, 모든 갈등과 아픔에 종지부를 찍는 통지서를 받도록 일을 이루어 주셨다. 아멘.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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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1
  • 지선철 성경 에세이_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주신 말씀_ 이사야 41:8~10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그만큼 외면당하시고 무시당하셨으며... 아무리 호소해도 말 안 듣는 백성이라면 하나님도 이제는 돌아서시고 버릴 법도 하신데 하나님은 끝내 도와주시고 붙들어주신다고 하신다.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은 무던히도 깊은 죄악에 물들어 있다. 남과 북을 통틀어 몇몇 ‘다윗의 길’을 간 왕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여로보암의 길’을 갔고 우상을 온천지에 깔아 놓았으며... 죄악에 버무려진 장아찌같이 변하여 버렸다. 지금 저들은 앗수르 바벨론 등 외세의 침공으로 삶의 소망을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잘된 일 아닌가! 벌을 받아 마땅한 백성임에 틀림이 없는데 하나님은 또다시 저 백성들에게 위로의 손을 내미시며... 구원의 약속을 하고 계신 것이다.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다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하고 정겹게 부르시며... ‘너를 괴롭히던 자들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며... 너와 다투었던 자들을 멸망할 것’(사 41:11~12) 이라고 약속하시며... 끝내 구원해 주실 것이란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두려워 말라...’ 위 격려의 말씀은 말씀의 앞뒤 정황을 고려함 없이 내게 비추어 나의 지난 힘든 날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었다. 그 말씀은 의지였고 용기였으며... 불안을 떨쳐낸 담대함이 되었으며... 결국,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내 평생에 이러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안 계셨으면 단연코 말하건대 지금의 나는 없었으리라! 아멘. 202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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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4
  • 지선철 성경 에세이_ 광야에서 오직 주만 의지하며
    주신 말씀_ 시편 63:1~4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광야에서 오직 주만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입성시키시기 전에 훈련하고 가르치시려 택하신 곳은 다름 아닌 광야였다. 오늘 본문의 시는 다윗이 유다 광야에서 지은 시라 한다.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오직 영혼은 주를 갈망하며 육체는 주를 앙모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광야는 먹을 것이 없고 물을 찾기 힘든 곳이다. 그곳에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쓸 데가 없고 금은보화가 많은들 소용이 없다. 오직 광야에서는 생명을 유지할 물과 양식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런데 다윗은 주만 갈망하며 주의 권능과 영광만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 시키시는 목적도 다윗과 같이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게 하려 하신 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면 된다는 표징이요, 가르침이신 것이다. 이는 오늘 우리의 광야 같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신 것이다. 어떤 환경,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다윗과 같이, 먹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영혼으로 갈망하고 사노라 보면 나도 모르는 ‘만나’로 메추라기로 먹여주시며 내가 사모하는 곳 가나안 땅 곧 새 하늘 새 땅은 어느새 눈앞에 와 있을 것이다. 아멘.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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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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