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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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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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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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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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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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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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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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김종희 칼럼 - 개정된 헌법을 잘 알아야 실수가 없다
    Ⅰ. 노회재판국 구성에 있어 실수하기 쉬운 점 ① 권징조례 제118조가 과거 헌법에는 “재판국은 본 국원 중에서 국장과 서기를 택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개정된 헌법에는 “재판국은 본 국원 중에서 국장과 서기를 택하여 본회의 허락을 받을 것이요...”라고 되어 있다. ② 즉 과거 헌법에서는 본회에서 재판국원을 선출한 후에 노회가 폐회하고 선출된 재판국원들끼리 모여 국장과 서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정된 헌법하에서는 선출된 재판국원 중에서 국장과 서기를 선택하여 본회에 보고하여 허락을 받아야 한다. ③ 본회에서 허락을 받는 절차를 이행하지 못하였다면 재판국 일정을 진행할 수 없다. 국장과 서기가 없으므로 원 피고에 대한 소환장을 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선택하여 진행하고 나중에 본회의 허락을 받는다는 편법을 하면 된다고 할지 모르나 안된다. 이런 식으로 편법을 하는 것을 인정한다면 헌법을 그렇게 개정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노회 재판국의 판결은 공포와 함께 노회 판결로 효력을 발생하는데 합법적이 아닌 국장과 서기 이름으로 공포할 수 없지 않은가. 공포하고 허락을 받는다는 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다. Ⅱ. 교회의 대표자에 대하여 실수하기 쉬운 점 ① 과거 정치 제9장 제3조는 “당회장은 그 지 교회 담임 목사가 될 것이나...”였으나 개정 헌법은 “당회장은 교회의 대표자로 그 지교회 담임 목사가 될 것이나...”로 ‘교회의 대표자’라는 문구가 첨부되었다. 그동안 목사는 교회의 대표요 장로는 교인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목사가 교회의 대표라는 명문 규정이 없어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② 그러므로 교회의 대표가 되는 목사를 제쳐 놓고 소위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교인들 개개인의 서명을 받아 대표권을 행사하려는 것은 불법이 된다. 목사가 노회로부터 어떤 책벌을 받은 사실이 없는데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목사의 시무를 못하게 하거나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으려는 행위가 있다면 불법이다. 왜냐하면 위임예식을 할 때 정치 제15장 11조 4항에 의거 “여러분은 저가 본 교회 목사로 재직(在職)중에 한결같이 그 허락한 생활비를 의수(依數)히 지급(支給)하며 주의 도에 영광이 되며 목사에게 안위가 되도록 모든 요긴한 일에 도와주기로 맹세하느뇨?”에 “예”하고 서약을 했기 때문이다. ③ 교회 안에서 어떤 위원회를 조직하기 위하여는 의결기관을 거쳐야 합법이다. 당회를 통하여 의결하든지 공동의회를 통하여 의결을 해야 합법이다. 당회나 공동의회를 통하여 의결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들이 서명한 문서는 사적인 문서에 불과하다. 당회나 공동의회를 통하여 의결을 하려면 교회의 대표자로 당회장이 되며 공동의회 회장이 되는 목사가 참여하지 않는 결의는 있을 수 없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목사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에 할 수 있다고 할지 모르나 행여 지탄의 대상이 될지라도 법적으로 목사의 지위가 인정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당한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은 방법으로 해서는 안된다. 2019-09-04김종희 목사(전 총회정치부장. 성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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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04
  • 조국과 윤익세 조사처리
    신학의 짐이 버거워 총신 뒷산에 올랐다. 신학을 멀리 하려고 풀밭에 누웠더니 허름한 총신이 내 눈에 밟혔다. 총신을 가까이 잡으려고 나무에 올랐더니 호롱불 밝히고 등록금이 버거운 총신이 저만치 물러난다. 이것이 신학이었다. 이제까지 신앙이 길을 이끌었다. 이 우울한 날들에 그래도 잠시 웃게 해주는 인터넷 유머는 '최순실 딸한테 승마 배울래, 조국 딸한테 수술 받을래'이다. 조국의 딸은 28년이라는 세월을 철저하고 용의주도한 아빠 덕에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달리다가 의사가 될 문턱에서 이제 고졸(중졸) 학력으로 몰락할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의사 노릇을 안 하게 된 것이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애꿎은 환자들을 위해서는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가짜 뉴스란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 보도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를 뜻한다. 윤익세를 지지하는 가짜 뉴스 전파자같은 자들처럼. 모두가 "집단적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는 한 명의 개인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해악은 안보나 경제 실패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활기를 죽이는 행위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문재인의 조국 법무장관 지명을 계기로 "죽은 시민의 사회"가 소생하고 "죽은 개인의 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청문회를 앞두고 "운동권 전체주의"가 마침내 투우사처럼 소 정수리에 칼을 꽂아야 하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윤익세 조사처리위원회 위원장 신규식 목사의 윤익세 고별 조사 같이. 본질은 조국 지명자 개인이 아니라 그가 상징해 왔던 좌파 기득권 세력의 총체적 민낯이다. 이번 일로 많은 국민은 여태까지의 막연한 "진보 콤플렉스"를 벗게 되었다. 양비론(兩非論)의 강박 혹은 중도론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조국 후보자의 정치적 죽음과 삶은 이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한국 정치사의 결정적 변곡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검찰이 8월 27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관련해 압수 수색을 한 곳은 20여 곳이다. 검찰 관계자는 "의혹을 받는 곳은 사실상 거의 다 포함됐다"고 했다. 법무장관 후보자 비리 의혹과 관련한 검찰 압수 수색에 대해 여권(與圈)에서 잇따라 비난 발언이 나오자, 검찰 내부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 "자기들 수사하면 검찰 개혁 방해하는 것이냐" "수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이번 검찰의 압수 수색이 조 후보자에게 오히려 시간을 벌어주거나, 보호해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검찰 내부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한 관계자는 "검찰이 보여주기 식으로 100명씩 동원해서 압수 수색을 나갈 만큼 할일 없는 조직 같으냐"며 "20곳 넘게 압수 수색을 하려면 며칠 전부터 사전답사도 가고, 각 지방검찰청에 지원 요청도 해야 하고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양 철학에서 사람 팔자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선곤후태(先困後泰)와 선태후곤(先泰後困)이다. 인생 전반부에 곤란했던 팔자가 후반부에 좋아진다는 것이 선곤후태이다. 반대로 전반부에는 잘나가다가 후반부에 곤란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팔자가 선태후곤이다. 초년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잘나가는 사람은 없다. 계속 잘나가려면 8분 능선에서 멈추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은 "선태후곤" 유형에 속하지 않나 싶다. 조국, 그는 그럼에도 "저의 가족이 고통스럽다 해도 제가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는 없다"란다. 처자 목을 베었다는 계백 장군도 아니고 어느 출사표가 이토록 비장할까. 그가 그동안 SNS와 기고문을 통해 쏟아낸 무수한 위선적 발언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의 불운이나 몰락을 비웃는 잔혹한 말들은 그가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인간임을 입증해준다. "법과 제도를 따라"서 국고를 축내고 서민을 울리는 자가 법무장관이 되면 나라가 무사할 수 있을까. 목사 안수증명 서류조차 적법하게 뗄 수 없는 자가 총회재판국장이 되어 불의한 의도에 따라 주님의 몸 된 여러 교회를 산산조각 내지를 않나,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 직무정지 고소를 하지를 않나. 그런 자가 있는 곳이 온전할까. 조국이 자기의 국기 문란 행위를 국민 앞에서 뉘우치거나 윤익세가 교회와 총회를 어지럽힌 죄과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날이 있을까.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는 거대한 대양(大洋)도 자기 손에서 반역의 피를 씻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바다가 붉게 물들 것이라고 통탄했다. 위원장 신규식 박사의 건투를 빈다. 그 조사처리의 적법성 여부조차 제104회 총회 보고 현장에서 총대들 함성으로 결판날 것이다.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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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8
  • 교회를 세운 후보들
    세월 가고 믿음 다지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총회 현장에 별이 보인다. 믿음의 눈에 별이 보이니 교회와 총회 사이에 별이 보이고 교회와 총회 사이에 별이 보이니 총회 섬긴다고 나선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총회 현장에 별이 빛난다. 믿음 옅어 보이지 않던 별이. 세상이 조국 의혹으로 그리고 교단은 윤익세 조사 처리 심의로 온통 무더위 찜통 속이다. 그래도 입추가 지나고 나서는 교앙(驕?)하던 매미 울음소리의 기세가 꺾였다. 피곤한 세상일 잠시 잊고 바람 드는 대치동 총회 언덕에서 총회 임원 선거 속으로 들어가 제104회 총회를 섬길 별들을 보는 것은 어떨까. 금번 총회 임원 선거 후보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목사와 장로가 있다. 탁한 총회를 밝힐 별 셋이다. 총회장 후보 : 김종준 목사 - 꽃동산교회 부총회장 후보 : 소강석 목사 - 새에덴교회 부총회장 후보 : 임영식 장로 - 아천제일교회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가 말한 '몰입'이 일어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역시 능숙함이라는 것이다. 달리기든 글쓰기든 춤이든 능숙해질 만큼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숙련되는 과정에서 비로소 '해야 할 일'이 '할 수 있는 일'이 된다. 이것은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행복감으로 이어진다. 몰입이 잘되는 성격적 유형에 성실성이 포함되는 건 그래서다. 세상을 위해서든 총회를 위해서든 어떤 일을 하든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킨 위의 세 별 김종준 목사, 소강석 목사, 임영식 장로 같이 중요한 건 탁월성이다. 요리, 연주, 강연, 목회 그 일이 무엇이든 능숙해질 때까지 단련해야 한다. 그것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못하는 걸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하는 일을 점점 더 잘하게 되는 것이 끝내 전문가를 만든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데 필요한 게 꼭 "열정"은 아니다. 탁월한 능숙함이 그 일을 좋아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총회를 위한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를 통해 그 가닥이 잡힌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이란 가치를 붙들고 제104회 총회에서는 능숙한 전문가들을 선출해 총회와 총신에 또아리를 튼 불평등 구조를 바로잡고 신학과 신앙의 개혁을 날카롭게 벼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원칙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어떤 경우에도 ‘칼빈주의 말씀의 원칙’ ‘십계명에 근거한 신앙의 원칙’을 놓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2019-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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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8
  • 총회 선거규정 이대로 좋은가
    총회 선거규정을 살펴보면서 수정의 필요성을 느끼는 부분이 있어 제안을 해 본다. Ⅰ. 제1장 제5조 5항. 현재 조문은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원)의 “위원이 시무하는 동일노회에서 총회임원 및 기관장 입후보자 등록과 동시에 자동으로 해임된다.”이다. 이 조항은 동일노회에 선관위원이 있을 때 임원 출마를 하게 되면 선관위원이 자동 해임되도록 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법이 되고 있다. 한 사람은 출마를 하게 되고 선관위원은 한 사람의 출마로 선관위원직을 잃게 된다. 이 부분이 서로 합의하여 이루어진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동일 노회 안에서 갈등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이 조항을 개정하여 “위원이 시무하는 동일노회에서 총회임원 및 기관장 입후보자 등록을 할 경우 위원은 동일노회 입후보자에 한하여 심의를 할 수 없다.”로 하여 선관위원도 살리고 입후보도 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그 대신 선관위원이 있는 노회에서는 위원을 포함 임원 또는 상비부장 1인(목사 장로 구분 없이)만 출마 가능하도록 하면 위원이 있는 노회가 혜택을 누린다는 비난도 피할 것으로 보인다. Ⅱ. 제3장 제12조 1항. 현재 조문은 “각 상비부장은 1년 조에서 선출하고 해당부서에서 2년 동안 봉사한 자로 하며, 등록일 까지 무흠(권징조례 제5장 제35조에 의거 처벌되지 아니한 자)만 7년 이상 된 자로 한다”는 조항에 ‘무흠이란 모든 입후보자 공히 권징조례 제5장 제35조에 의하여 처벌되지 아니한 자’로 명시하면 좋을 것 같다. 왜나 하면 무흠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여 사소한 흠이라도 찾아내어 선거를 혼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 제4장 제13조 1항. 총회임원 현재 조문에는 없지만 "정 임원으로 추대되는 자가 있을 때 동일직의 정 임원으로 입후보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하여 추대되는 부임원이 있는데 정 임원으로 출마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정 임원으로 추대되는 부임원이 있을 때 부 임원에게 결격사유가 발생하여도 선관위가 조치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에 정 임원 출마를 제한해야 한다. Ⅵ. 제4장 제13조 5항. 이 조항은 제103회 총회에서 신설된 조항이다. “선출직에 당선된 자는 그 임기가 마치기전에는 또 다른 선출직에 출마할 수 없다.”이다. 이에 대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부임원이 아직 임기를 마치기 전에 정 임원에 출마할 수 없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규정에 부 임원은 정 임원으로 간다는 조항이 있기에 부 임원까지 염두에 둔 조항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선출직에 당선된 자는 그 임기가 마치기전에는 또 다른 선출직에 출마할 수 없다. 단 부 임원이 정 임원으로 출마할 경우는 예외로 한다”로 하면 좋을 것 같다. Ⅴ. 제5장 제25조 2항. 현재 조문에는 “2. 후보자의 등록취소 사유가 발생한 경우 출석 위원 2/3이상의 결의로 해당자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이를 “2. 후보자의 등록취소 사유가 발생한 경우 전체 위원 2/3이상의 출석과 출석 위원 2/3이상의 결의로 해당자의 등록을 취소할 수 있다. 단 이의가 있을시 재심을 청원할 수 있다.”로 하여 등록취소 정족수를 강화하고 재심 제도를 두어 억울함을 방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Ⅵ. 제6장 제26조 1항. 현재 조문에는 “총회임원,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및 기관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선출직),총회 총무 입후보자(이하 ‘입후보자라 함) 및 그 지지자는 선거기간 중 일체의 금품요구 및 금품수수(金品授手)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덧 붙여 금품수수가 미수(未遂)에 그쳐도 처벌을 할 수 있다는 문구를 첨부하면 좋을 것 같다. Ⅶ. 제6장 제31조 현재 조문은 “본 규정 제14조(입후보자의 등록제한)제 5항에 의거 교단 법 절차에 따라 하지 않고 직접 국가법에 고소, 고발 등을 제출하거나 총회를 상대로 민사(가압류, 가처분 등 포함)로 제소한 자는 본 규정 제28조(후보등록취소규정) 제6항의 제재를 받는다.”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6항의 제재를 받으며 제소 접수일로부터 입후보자는 자격이 상실된다.’를 첨가하여 사법 제소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Ⅷ. 결론 제103회기 선거관리위원회가 무난히 입후보자 심사를 마쳤다. 남은 임무 중 하나는 선거규정을 손보는 일이다. 필자가 제언하는 규정들 이외에 지금까지 해석이 분분했던 조항들을 다듬어 제104회 총회에 상정하여 좀 더 보완된 규정을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김종희목사(전 정치부장. 성민교회) 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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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27
  • 김종희 컬럼 - 정년 연장 어떻게 생각하나?
    정년 연장 어떻게 생각하나? 헌법 제3장 제2조 3항에 보면 “항존직의 시무 연한은 만 70세로 한다.” 그리고 항존직에는 목사와 장로, 집사가 속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만70세란 만71세 생일전날까지라고 총회 결의로 유권 해석을 내린바 있다. 이와 같은 정년에 대하여 정년연장을 헌의하는 안들이 해마다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년연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목사나 장로가 정년을 연장하려는 것을 욕심으로 치부하지 말고 진지하게 토론해 보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 Ⅰ. 대법원이 가동연한(稼動年限)을 5년 연장하였다. ① 가동연한이란 특정 직업군의 사람이 몇 살까지 일할 수 있는지 그 한도를 말하는 것이다. 1989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판결을 통해 가동연한을 55세에서 60세로 상향조정하였는데 30년이 지난 2019년에는 가동연한을 60세에서 65세로 5년을 연장하였다. ② 그동안 대법원 판례상 가동연한이 가장 긴 직업군은 법무사, 변호사, 목사, 승려로 70세였으며, 의사와 한의사, 소설가, 화가 등은 65세였다. 물론 가동연한의 연장이 정년연장은 아니지만 그만큼 일할 수 있는 나이를 5년이나 연장하여 대법원이 판결을 하였다면 목사 장로의 정년을 지금의 70세에서 연장을 논하는 것이 사회 통념에 반하지 않는다. Ⅱ. 항존직(恒存職)의 법 정신을 살려야 한다. ① 항존직이란 용어를 해석함에 있어 혹자는 ‘한 사람이 그 직분을 죽을 때까지 시무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직책이 교회 안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즉 교회 안에 사람은 바뀌더라도 그 직책만 항존하면 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 이 해석대로 한다면 교회 안에 있는 서리집사나 권사의 직책 등은 항존을 안 시켜도 된다는 오류에 빠진다. ② 위의 해석은 본래의 법정신과는 맞지 않다. 정치 제4장 제4조 1항에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終身)토록 시무한다.”고 되어 있다. 이를 보면 항존직이란 교회 안에 그 직분이 사람은 바뀌더라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직을 맡은 사람이 종신토록 시무하는 것을 말한다. ③ 그러므로 헌법에 항존직이라고 해 놓고 임기를 정하여 그만하라는 것은 법정신에 비추어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다. 임기를 정하여 하려면 항존직이란 용어 자체를 없애야 한다. Ⅲ. 종신직(終身職)을 사양하고 은퇴하는 것이 특권이 되어야 한다. ① 보수적인 미국 개혁교단의 헌법 규례에 의하면 “목사는 65세에 은퇴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다.”라고 되어 있고 미장로교도 대부분의 목회자가 65세에 은퇴하지만 헌법에는 65세에 은퇴하라는 강제 규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총회나 노회가 은퇴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목사와 교회가 서로 동의한다면 목회를 계속하는 것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② 그러므로 총회나 노회에서 목사나 장로의 정년제를 만들어 놓고 강제로 시행하는 경우는 헌법위반이라고 본다. 법을 만들어 강제로 은퇴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당사자가 목회를 더할 수 있지만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한 시점에 은퇴하는 것이 특권이 되어야 한다. ③ 불교는 아예 정년이 없다. 가톨릭은 추기경이 80세가 넘어야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톨릭의 각종 직분은 75세 안팎에서 물러나는 것이 전통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76세이던 때에 서울대교구장 자리에서 은퇴했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내에서 정년을 연장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에 대하여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Ⅳ. 정년제가 상책(上策)은 아니다. ① 흔히 넘쳐 나는 신학생들의 수급을 위해 정년제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생각이다. 은퇴하는 목회자가 쏟아져 나오는 신학생에 비해 훨씬 적다. 아들은 열인데 아버지 돌아가시면 물려받으라는 식이 아닌가? 정년제를 자리 비워 주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다리는 사람은 홍수처럼 밀려오는데 몇 자리 빈다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② 노후 준비가 안 된 목회자들의 대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연령만 따져 무조건 물러나라고만 할 것인가? 먼저 총회나 노회나 교회가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형교회는 은퇴하면 사택 제공하고 다달이 사례 지급하고 은퇴금도 지불하지만 시골교회는 대책이 없다. 그것을 본인의 문제로만 국한시키며 마구 법을 만들어 몰아내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③ 사실 알만하니 은퇴한다는 말이 있다. 목사의 나이가 70세가 되면 이제는 시행착오 겪을 것도 다 겪고 영성이 무르익은 완숙한 나이라고 본다. 젊은 목회자가 겪을 수 있는 교회 분쟁을 오히려 최소화 할 수 있다. 심방을 하고 설교를 하는데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나이다. 4-5년이 성도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목회할 수 있는 황금기라고 본다. ④ 더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농촌교회는 고령화되고 있다. 만 70세를 정년으로 할 때 당회원 없는 미조직교회가 늘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한 총회 안에서 도시교회와 농어촌교회를 구분하여 정년연령을 다르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Ⅴ.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법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법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얼마든지 토론하고 수정해 볼 필요성이 있다. 무조건 정년제를 지금처럼 고수해야 한다면 정상이고 정년연장을 검토해야 한다면 비정상인 것처럼 이분법적인 잣대로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정년제가 실시되어 시행하는 만큼 종신직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정년연장에 대하여는 머리를 맞대고 진지한 토론을 해 볼만 하다. 2019-08-13김종희 목사(전 정치부장. 성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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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3
  • 총회장 이승희 정치적 결단의 때
    연암은 1780년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와 쓴 견문록 ‘열하일기’에서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했다. 명(明)은 망한 지 130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에서는 건재했다. 조선은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 ‘숭정’을 쓰면서 대의를 따른다는 문재인 행세를 했다. 시대착오적 허위의식이었다. 그는 북벌(北伐)의 대상인 청을 ‘되놈’이 아닌, 조선이 만성적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본받아야 할 나라로 평가했다. ‘열하일기’는 명분과 관념에 포획돼 살아 꿈틀거리는 천하의 현실을 외면한 조선의 각성을 촉구한 문명비평서였다. 하지만 그 책은 청나라 오랑캐 연호를 쓴 불온원고로 몰려 조선이 일본에 망한 뒤인 1911년에야 활자로 간행됐다. 일본의 경제보복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먼저 상대의 실체와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때 확실하게 파악된다. 미국과 전쟁도 했지만 미국의 마음을 사는데 도가 통한 나라가 일본이다. 미국은 한·일 관계를 설계하고 좌지우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국을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일본은 믿는다. 지금 아베의 일본과 트럼프의 미국은 문재인과 달리 속이 시커먼 트럼프와 천둥벌거숭이 김정은처럼 사실상 한통속이다. 한국이 아무리 읍소해도 미국은 중재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일본보다 경제력과 정보력이 부족한 우리는 미국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와 달리 일본은 필요할 때마다 미국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의 장면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04년 미국화한 가네코 남작을 파견해 하버드 법대 동문인 루스벨트를 구워삶았다. 주미 일본대사는 루스벨트를 ‘일본 치어리더’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김상윤에 매달린 전계헌처럼 물정 어두운 고종은 미국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본을 키워서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메시지를 워싱턴을 향해 줄기차게 발신했다. 2차 대전 A급 전범용의자가 세운 사사카와 평화재단 미국지부가 움직였다. 책임자는 미국인이다. 오바마 행정부 국가정보국(DNI) 국장 출신인 데니스 블레어다. 일본이 미국을 다루는 방법은 한 세기 전보다 진화했다. 우리는 100년 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서 일본을 배타적 감정으로 단죄하지 않았다.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건설에 함께 나서자고 했다. 지금 일본은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는데 목말라 있다. 섬나라 ‘왜놈’이 아닌 같은 섬나라지만 영국처럼 2차 대전 이후 크게 성장한 문명국이자 경제 대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임기 말의 무지개 총회장이 신학도 정치도 비전도 미숙한 총장을 맞이한 혼돈의 총신과 이해관계로 얽힌 사고 노회들과 노회한 총대들의 협량(狹量)을 용서하고 변화와 개혁을 위한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화난다고 무시하면 지도자의 인정을 받는데 목말라 있는 라이벌들을 미래의 총회 정치 파트너로 대우해야 총회 난맥 현상이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103년 기다림 끝에 세움 받은 화려하고 다재다능한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총회 10년 대계를 위한 정치적 결단의 때라고 본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같은 우리 교단을 위해서 섭리하신... 2018-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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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2
  • 총회 정치 그 본질
    있잖아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리 노아가 본 무지개를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거든요. 근데요. 이거 봐요. 신비롭죠. 무지개가 손에 내려와 앉았어요. 당신 손에도요.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언약의 무지개. 참 따뜻한 느낌이네요. 인간과 유전자가 98% 이상 일치한다는 침팬지는 다른 영장류에 비해 죽고 죽이는 잔혹한 싸움은 덜 하는 편이라고 한다. 대신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서 정치 공학적 권력 투쟁이 많다고 한다. 인간의 정치처럼 복잡한 동맹과 배반으로 기존 질서를 뒤바꿔버리는 수단을 동원한다는 게 침팬지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다. 물론 강한 우두머리에게 2위가 어느 날 갑자기 치받는 경우는 드물다. 조금씩 작은 전조가 반복되는데 권력 서열 1위의 뒤에서 2위와 3위가 동맹을 맺는 방식이 가장 흔한 일이다. 재미있는 징조는 1위 침팬지가 뻔히 보는 앞에서 3위 침팬지가 2위 침팬지의 털을 골라준다면 쿠데타 전조로 봐도 된다는 것이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침팬지 정치술’이 어느 정도까지는 정치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단 정치를 들여다보면 이런 아쉬움이 든다. 속세 권력처럼 세력 다툼은 있는데 정치가 없다. 총회 정치 현실은 있는데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정치 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 철학이 없거나 아예 정치적 도의마저 짓밟기 일쑤이다. 정치 리더는 있는데 정치 리더십은 없다. 한국 정치 현실처럼 지역 파당은 있는데 교단 지도층은 없다. 당연히 지도자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대개의 지도자는 책임과 헌신 그리고 희생으로 감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패배가 뻔해도 김영삼이나 김대중처럼 불가능한 꿈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우리도 총회와 총신을 위한 그와 같은 노력엔 산하 교회와 노회의 많은 동정과 사랑과 지원이 뒤따르고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소명에 응하는 총회 지도자의 반열에 서려면 어지러운 총회와 어려운 총신을 위한 ‘공적 헌신과 책임’을 생각하고 몸소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칼빈주의 교단 정치의 본질 즉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아직은 기우이지만 현재의 총회 정치 구도가 지역이나 사적 이익만 추구하려 한다면 그게 ‘침팬지 정치술’이다. 그것은 정준모나 김영우 같은 정치적 미아가 되는 지름길이다. 현실 정치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내일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정치적 도의도 없는 정준모나 입만 열면 역사의식이니 아브라함 카이퍼를 외치던 김영우의 교훈은 무엇인가. 신앙과 힘의 모순적 복합체인 총회는 지역 지도자 간 동맹 관계와 세력 균형 위에서 총회와 노회의 평화 공존을 지향한다. 그 실례로 국가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기초한 한·미·일 간 협력과 공조는 지난 반세기 이상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토대였다. 국제 평화는 이성적 국가 철학의 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게 문재인 정부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근본이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방비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고 지도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이유이다. 제104회 총회 선거를 50여일 앞둔 시기 문재인 치하의 국가도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고 총회와 총신도 어렵다. 총회는 법이 서고 행정이 투명해져야 하고 경영과 신학 노선에 방만한 총신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치러야 혹독한 현실을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 지도력 아래 우리 총회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고 기도에 힘써야 할 때인 것 같다. 이 지혜는 지도층의 신앙적 헌신을 통해 두터워진다. 총대들은 총회와 총신의 미래를 개혁하는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정치가(statesman)를 원하지 다음 선거와 자리만 집착하는 김영우나 김상윤같은 정치꾼(politician)을 고대하지 않는다. 이 난국에 '침팬지 정치술'이 제104회 총회 선거판에 끼어든다면 교단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9-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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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4
  • 총회 총신 그리고 자본주의
    오래된 대구 서문시장 골목 누구는 호객하고 누구는 커피를 나누어 준다. 양미간이 팽팽한 교회 앞을 지나는데 순대국집의 막 쪄낸 돼지 내장이 기도 응답처럼 허기 앞에서 모락모락 한다. 꽃집 여름 장미는 배우처럼 붉은 잎으로 진한 대사를 내뱉는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가끔씩 퇴색한 목사처럼 강단에 내몰려서 색 바랜 노트에나 구걸하는 설교처럼 내 삶도 마음이 지는 쪽으로 해가 지듯 저물 것인가. 퍼붓는 장대비까지 덤으로 얹어놓아도 재고로만 쌓이는 오래된 믿음들에 대한 소망을 쓸쓸히 거두며 마치는 정오 기도.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는 말했다.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정신은 성경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자를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사람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이다." 이 말씀에서의 '근실한 자'는 요셉 같은 근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 앞에 서리라'는 말씀의 뜻은 '근실한 사람'은 왕같이 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불러 내사 가나안(현재의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제사장 민족을 형성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오시기까지의 약 2000년 역사 과정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었다. 그가 요셉이었다. 요셉은 최초의 족장인 아브라함의 증손자(아브라함 → 이삭→ 야곱 → 요셉)이고,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요셉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라헬의 아들이었다. 형들이 이를 시기하여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에 팔았다(창 37:28). 미디안 상인은 이 요셉을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았다. 그러나 또 고난이 닥쳤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바로 왕궁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의 세월 13년 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창 41:46). 성경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의 종일 때에도 바로 왕궁의 감옥살이를 할 때에도 항상 근실했다(diligent)기록하고 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과 가나안 지방에 7년의 풍년이 연속되었다. 이 7년 동안 요셉은 온 애굽 땅 곳곳에 곡식 창고를 세워 곡식을 미리 저장했다. 7년의 풍년이 끝나자 이번에는 7년의 큰 흉년이 계속되었다(창 41장). 이 흉년 때 요셉은 자기 가족 70명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불러내어 온 애굽 백성과 함께 기근의 굶주림에서 생명을 구원했다. 만약 이때 요셉의 지혜로운 치적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과 애굽 제국은 인류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요셉은 자기를 팔았던 형들 앞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전하며 위로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7-8 고난의 13년 세월 속에서도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근실히 수행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마침내 요셉은 자기 동족과 애굽을 구원했다. 하나님을 믿는 요셉의 근실성(diligence)은 잠언에 기록되고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씨앗이 되었다고 막스 베버는 생각했다. 중세의 가톨릭 사회에서는 직업(노동)은 인간 생활을 위한 자연적 질서로 필연적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특별한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가치로 보았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빈주의자(Calvinist)들에게는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중시되어 직업과 노동의 근실성이 신앙의 척도가 되었다. 즉 그들에게는 직업이 교회생활의 일환이었다. 다시 말해 직업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신앙도 깊지 못하다는 뜻이다.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직업과 노동을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득으로 영위되는 경제생활(소비생활)에도 금욕으로 절제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은 하나님께서 맡긴 것으로 신자는 청지기일 뿐이고 또 그 사용은 심판의 근거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 사회의 산업자본은 전근대적인 영리위주의 자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개신교 신자들의 금욕(절제) 윤리에 따라 축적된 화폐자본이었다. 그러므로 이 자본은 특별한 사회 즉 신앙인들의 사회의 산물이었다. 전근대의 영리위주의 천민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연적 이기심에서 일어났다. 그 자본주의는 12세기 경부터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활성화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는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들의 특별한 신앙윤리 금욕과 절제를 통해 일어났다. 이 특징을 막스 베버는 그의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4-1905)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103회 총회 무지개 이승희 총회장 지도력 하에서 총회와 총신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승희 총회장은 어려운 부치의 반야월교회를 대구를 넘어 한국 교회의 어엿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렇듯 그는 목회 성공과 총회장 경력을 살려 교단 지도자로서 총회와 총신의 경영을 성경에 근거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 확립해 주기를 바란다. 길자연이나 김영우같은 총신의 전임자들과 달리... 2019-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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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01
  • 김종희 컬럼 - 총회 총대에 대한 법리
    제104회 총회를 앞두고 총대 문제에 대하여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짚어 본다. 1. 총대 선출 ①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노회에서 선출해야 한다. 헌법 제22장 제1조 1항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 노회에서 선택할 것인데 총회 개회 6개월 이상을 격하여 택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구 총대를 정해 놓거나 정기 노회 전 미리 뽑아 놓아서는 안 된다. ② 총회 총대는 정치 12장 제2조에 의하면 ‘...노회가 투표 선거하여...’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제99회 총회에서는 아래와 같이 결의하였다. “남부산남 노회장 김진묵 씨가 헌의한 헌법 정치 제12장 2조 총회의 조직 중 ‘노회가 투표 선거하여’는 무기명 비밀 투표임을 확인 및 무기명 비밀 투표로 선거하지 않을 시 총대권 상실의 건은 헌법대로(투표방법은 각 노회가 정한 방법에 의하여) 하기로 가결하다.”이다. 그러므로 무기명 비밀투표로 꼭 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각 노회가 정한 방법으로 하면 되는 것이 총회 결의이다. ③ 노회 규칙에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한다고 되어 있으면 그대로 해야 한다. 그러나 만장일치로 규칙을 잠정하고 다른 투표 방법으로 하기로 하여 선출했다면 유효하다. 하회가 상회 법을 잠정할 수는 없으나 자신들이 만든 규칙을 잠정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Ⅱ. 총대 자격 ① 목사 총대는 위임목사 중에서 뽑아야 한다. 제87회 총회 결의를 보면 “전북 노회장 유성종씨가 헌의한 미조직교회목사(시무목사)가 노회장과 총회 총대가 될 수 있는 지를 질의하는 건은 법(노회장과 총회총대가 될 수 없다)대로 하기로 가결하다”이기 때문이다. ② 폐 당회가 된 교회의 위임목사는 총대가 될 수 없다. 2년 안에 장로를 세우면 위임은 해제되지 않는다는 총회 결의가 있다. 제60회 총회 결의는 “조직당회로 있을 때 합법적으로 청원되어 노회가 위임을 하였으면 폐 당회가 되었다하여도 그 목사의 위임은 해제되지 않으나 2년 내에 당회가 복구되지 않으면 자동 위임해제 되기로 하다.”이다. 이 결의는 위임목사를 살리기 위한 선처의 결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폐 당회가 되는 순간 2년간 위임은 해제되지 않으나 미조직교회가 됨으로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 ③ 정치 제22장 제1조 2항에 보면 새로 조직한 노회 총대는 개회 후 임원 선거 전에 그 노회 설립보고를 먼저 받고 총대로 허락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각 총대는 서기가 천서를 접수 호명(呼名)한 후부터 회원권이 있다. 헌법 제12장 제6조는 “총회는 매년 1회 정례로 회집하되 예정한 날짜에 회장이 출석하지 못할 때는 부회장 혹은 전회장이 개회하고 신 회장을 선거할 때까지 시무할 것이요, 각 총대는 서기가 천서를 접수 호명(呼名)한 후부터 회원권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총대 자격은 서기가 호명한 후 주어진다. Ⅲ. 총대 수 ① 총대는 정치 제12장 제2조에 따라 매 7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 파송한다. 그리고 7당회가 못되는 경우라도 4당회 이상이 되면 목사 장로 각 1인씩 더 파송할 수 있다. ② 정치 제10장 제2조에 보면 ‘노회 조직은 21당회 이상을 요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21당회 이상이 되어야 노회가 구성되고 총대를 파송할 수 있다. 21당회가 되면 목사 장로 총대 각 3명씩 파송하고 25당회 이상이 되면 목사 장로 각 1명씩 더 파송할 수 있다. ③ 파송하는 총대 수를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직교회 수가 정확해야 한다. 조직교회는 정치 제9장 제1조에 의거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노회의 파송을 받아 지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 ⒝치리(시무)장로 ⒞세례교인 25인 이상이 있어야 한다. 개정된 헌법이 모호하나 담임목사가 공석일 때는 노회가 파송한 당회장을 담임목사 지위로 인정해야 한다. ④ 총회 총대는 1당회에서 목사 장로 각 1인을 초과하여 파송하지 못한다. 즉 한 교회에서 목사 장로 총대를 각 한명씩만 파송해야 한다. Ⅳ. 총대 교체 ① 헌법 제12장 제2조에 보면 ‘각 노회는 총대를 선출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해야 하고 차점 순으로 부 총대 몇 사람을 정해 둔다.’고 하였다. 부 총대를 정해 두는 이유는 원 총대가 유고가 있을 때에 교체하기 위한 것이다. 원 총대가 유고가 생기면 부 총대 서열에 따라 자동 승계된다. 원 총대의 유고를 확인하고 부 총대가 승계하면 명확하다. ② 총대 교체는 노회의 허락을 다시 받지 않고 자동 승계되어 교체된다. 원 총대가 유고가 될 경우 노회를 다시 열어 뽑는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부 총대를 뽑아 대기하게 하는 것이다. 부 총대를 다시 심사하여 보내느냐? 안 보내느냐? 할 수 없다. 만약 노회가 어려울 때 다시 논의한다면 혼란이 오게 된다. 자동승계는 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③ 이는 국회의원 비례대표제와 같은 것이다. 앞에 있는 의원이 자격을 상실하거나 포기하면 자동 승계하는 것이 법이다. 공직선거법 200조(보궐선거) 2항에 따르면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자 명부에 기재된 다음 순번이 자동 승계를 받게 돼 있다. 이에 대하여 조건을 붙여 자격을 제한할 경우 헌법재판소가 위헌 및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바 있다. 그러므로 원 총대가 유고가 생기면 노회 서기는 자동 승계 받을 자로 총대 변경 보고를 하면 된다. ④ 그러나 혹 총회 개회 전에 교체가 되지 않았는데 총회 개회 후 교체를 하게 될 경우는 원 총대가 차례에 따라 부 총대에게 승계할 수 있는데 이 때는 총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정치 제22장 제2조에 보면 “총회 원 총대가 출석하였다가 자기 임의로 부 총대와 교체하지 못할 것이나 부득이한 때에는 총회의 허락으로 부 총대와 교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자기들 임의로 교체하면 호명도 하지 않은 자격이 없는 총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Ⅴ. 총대 여비 ① 정치 제22장 제4조 “총대 여비는 그 노회에서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대로 갈 경우 자기 돈 내고 가라며 총대를 선출하는 노회가 있다면 헌법 위반이다. ② 또한 총대 출마를 할 때 발전기금을 내고 총대에 출마하도록 하여 간접적으로 총대 여비에 대한 부분을 자신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도 위헌적 요소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2019-07-23 (화)김종희목사 (전 총회정치부장.성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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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3
  • 김종희 컬럼 - 총회 공명선거 겸손한 제안
    좋은 평가를 받는 총회 회기가 되려면? 어떤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면 그 정부를 대통령 이름을 따서 000정부라고 부른다.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은 물론 임기를 마치고 난 후에 000정부의 평가를 하게 된다. 두고두고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정부가 있는가 하면 좋은 평가를 해 주는 정부도 있다. 교단은 총회장이 선출되어 한 해 동안 교단을 이끌게 된다. 총회장의 이름을 따서 000 몇 회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총회장 회기에 총회의 위상이 세워지고 정직하고 투명하게 잘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하여 필자가 아래와 같은 제안을 해 본다. Ⅰ. 돈 쓰고 당선되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 금권선거를 막아보기 위하여 제비뽑기 선거를 몇 회기 해 보았다. 금권선거를 막는 데는 그런대로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뽑아야 할 인물을 제대로 뽑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절충 형 제비뽑기를 하다가 이제는 완전 직선제로 환원하고 말았다. 이제는 또 다시 금권선거를 막아야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다. 아무리 돈을 안 쓴다 해도 총대들을 찾아보고 그냥 발길을 돌릴 수는 없지 않은가? 총대를 상대로 식사하고 그리고 어떻게 식사 대접만 하여 보내나? 거마비(?)라도 좀 준비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발전기금 기천만원을 부담하면 액수는 크게 늘어난다. 그런데 상대방 보다는 돈을 좀 더 써야 당선된다고 하니 한 지역을 두 번씩도 가게 되고 동일한 후보로부터 한번만이 아닌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를 쓰면 붙고 그 보다 못 쓰면 떨어진다는 말이 나오는 현실이 아닌가? 그러면 이런 판국에 돈을 안쓰는 방법은 무엇인가? 발전기금은 어차피 공식적으로 내야 하는 돈이니까 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돈 이외에는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발전기금만 쓰고 돈을 전혀 쓰지 않은 채 총대들이 후보자의 인물됨을 인정하고 정책과 청사진을 믿고 당선을 시켜 주는 날이 오면 그 때 금권선거는 끝장 난다고 본다. 이러려면 발전기금 날릴 생각을 하고 투명하고 정직한 후보가 되려는 사람이 나와야 한다. 또한 총대들의 의식 변화가 중요하다. 돈을 쓰는 후보는 떨굴 생각을 해야 한다. 각 지역에는 후보자의 부탁을 받고 총대를 소집하는 소위 소집책(?)들이 있을 수 있다. 금번에는 총대 모두가 감시원이 되어 소집 책이나 후보자를 고발하여 페널티를 받게 해야 한다. 돈을 쓰고 당선되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Ⅱ. 탕평책을 쓰지 않으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 탕평책(蕩平策)은 잘 아시는대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당파 간의 정치 세력에 균형을 꾀하던 정책이다. 총회도 정치이기에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자기 세력의 사람만 등용하면 소외되는 세력은 적이 되기 쉽다. 논공행상이나 구색 맞추기식 인사 배정을 지양하고, 해당 부서에서 미래의 꿈을 설계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인사를 배정하면 좋겠다. 어떤 노회는 수명의 위원이 배정되고 어떤 노회는 한명의 위원도 배정되지 않는 편파성이 있으면 안된다. 그리고 매회기 단골손님처럼 배정되는 인물만 계속 배정되어 그 사람이 아니면 일이 안되는 것처럼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신선감이 있는 인물을 등용하는 것이 좋다. 강태공은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서 전문성, 위기관리 능력, 성실성과 충성심, 인격, 청렴함, 정조, 용기, 강한 의지 등 8가지 기준을 중시했다. 율곡 선생은 선조에게 올린 글에 “세종대왕의 정치는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상례에 구애받지 않고 어진 이를 발탁하고 능한 이를 부리어 인재와 직책이 서로 부합되게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인사(人事)는 만사(萬事)다. 인사정책에서 탕평책을 쓰지 못하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 Ⅲ. 불편부당하게 하지 않으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아주 공정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총회를 파하고 나면 많은 말들이 오간다. 그 중에 대표적인 말이 왜 총회장을 비롯하여 임원회가 맡기지도 않은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분명 총회 후 올라오는 청원에 대하여 임원회가 수임하여 할 수 있다는 규칙도 있고 결의도 있는데 말이다. 만약 총회가 끝나고 실타레처럼 일들이 엉키어 가는데 임원회가 손 놓고 가만히 있다면 총회장이나 임원회는 무얼하고 있느냐며 질책을 할 것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쳐 일을 그릇 처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개인 간 분쟁이나 노회 간 분쟁을 보면 어느 한 쪽이 다 옳고 어느 한쪽이 다 그른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일 처리를 팔이 안으로 굽는 식으로 한쪽 편만을 들어 해결하고 나면 구설수에 오른다. 손을 들어 준 쪽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오해를 피하기가 어렵다. 잘못이 분명한데도 손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분쟁이 있는 양측에 개입할 때는 분명한 법의 잣대가 필요하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면서 한쪽을 죽이는 식으로 몰아가면 안된다. 갑 쪽에는 이런 위법한 사실이 있고 을쪽에는 이런 위법한 사실이 있으니 서로 잘못된 점을 시인하고 서로 주고받는 양보를 하도록 하여 상생의 길을 모색해 줘야 한다. 과거 필자가 분쟁을 해결할 때 한편에겐 불법으로 면직한 것은 잘못이지만 본 교단에 남아 있었던 것은 잘 한 일이고 또 다른 편에겐 억울한 면직을 당한 것은 상처이지만 교단을 탈퇴한 것은 잘못이므로 서로 양보할 것은 하고 상생하라는 권면을 하여 해결한 적이 있었다. 총회 후 노회나 개인의 분쟁을 슬기롭게 해결한다면 좋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불편부당하게 하지 않으면 좋은 평가 받기는 틀렸다. Ⅳ. 결론 필자가 지금까지 지켜 본 바로는 좋은 평가를 받는 회기가 되려면 이 세 가지에 유념해야 한다. 돈을 쓰고 당선되면 안된다. 언제나 그것은 올무가 된다. 탕평책을 써야 한다. 인사 정책에 불만이 생기면 총회가 화합할 수 없다. 총회가 끝난 후 일어나는 일들을 오해받지 않도록 투명하게 처리해야 한다. 혹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 주어야 할 때는 그 처리과정을 공개해도 떳떳한 처리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누가 총회장이 되어 총회를 섬기든지 000 제 몇 회기는 정말 잘한 회기였다고 칭찬받는 역사에 길이 남는 회기가 되길 바란다. 2019-07-04 (목)김종희 목사/前 총회정치부장·성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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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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