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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엄상익의 미셀러니_ 화가 날 때
    화가 날 때 한 절도범이 내게 물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양심이 아프다고 하는데 저는 왜 그 양심이라는 게 아프지를 않죠? 아무렇지도 않아요. 판사 앞에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는 차라리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 말속에서 이미 그의 잠자는 양심이 기지개를 펴고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하다가 걸린 강간범과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왜 강간을 하면 나쁘죠?” 그가 내게 물었다. 그는 아무런 죄의식조차 없이 범행해 왔던 것 같다. 그의 표정을 살폈다. 상식을 벗어난 질문이지만 그는 진지했다. 신중하게 대답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와 딸이 있죠?” 내가 되물었다. “있어요” “어떤 놈이 집에 몰래 들어와 아내와 딸에게 당신이 한 짓 그대로 했다고 상상해 봐요. 당신 같으면 그놈에게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는 잠시 그런 장면을 상상하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면서 흥분하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바로 즉석에서 때려죽이겠어요.” 그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가 하는 강간은 재미있는 놀이였던 것 같다. 그런 피해가 자신의 일이 되니까 비로소 강간이 범죄인지를 느끼는 것 같았다. 범죄인들이 대부분 극한적인 이기주의자였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을 벌레같이 죽이기도 했다. 내가 강간범에게 말했다. “처참하게 맞아 죽지 않고 이렇게 감옥에 앉아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법의 혜택 아닐까요?” “------”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나의 말을 일부는 납득하는 눈치였다. 여러 명을 죽인 잔인한 살인범을 만난 적이 있었다. 껍데기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서 나는 파충류를 보았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다섯 명만 죽였다고 불었는데 사실 죽인 사람들이 더 있어요. 그중 두 명은 내가 쓰레기 하치장 밑에 묻어뒀는데 그것까지 알려줘야 할까? 그냥 가만히 있을까?”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에게 분통이 터져서 내뱉었다. “야 이 살인범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내 말을 들은 그의 눈에서 순간 불이 번쩍했다. 둘만 있는 교도소의 작은 방이었다. 교도관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졸라 죽일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지면서 내게 말했다. “내가 아무리 살인을 했더라도 살인범이라고 직접 말하다니? 변호사가 그래도 되니?” “살인을 했으면 살인범 소리를 듣는 게 당연하지 않니? 너는 강도범이기도 하잖아? 아니야?” 내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35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본 세상 밑바닥이었다. 그들에게 도덕이나 윤리는 없었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양심의 명령이라는 게 있을 턱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타락의 밑바닥이었다. 성경 속의 예언자는 말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그들에게 화가 있으리라고. 변호사 생활 35년 동안 나는 항상 분노했다. 감옥에 가서 그 안에 있는 흉악범들과 싸우면서 화를 냈다. 법정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했다. 사무실을 찾아와서 잔꾀를 부려 탈법이나 불법을 행해 달라는 사람들에게 성을 냈다. 화를 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었다. 화를 낼 때 나는 지옥의 변두리를 서성거렸다. 악마를 닮는 것이다. 하늘의 고요를 떠나서 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이 세상에서 성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의가 공공연히 짓밟힐 때, 무고한 이가 학대를 당할 때 성을 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참고 성을 내야 했다. 내가 강도라고 직접 욕한 살인범에게서 뒤늦게 받은 편지의 이런 문장을 아직도 기억한다. ‘변호사까지 나를 두려워하면서 비위를 맞추곤 했습니다. 나에게 강도라고 살인범이라고 직접 말해줘서 고맙습니다.’ 내 말이 그에게 어떤 자극이었던 것 같다. 강간범과 그 가족은 시편 23장을 천 번 썼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내준 숙제였다. 나는 성경 속에서 화를 내는 방법을 배웠다. 성내야 할 경우 예수처럼 성을 내야 했다. 성내자마자 용서하고 저주했던 입으로 곧 입 맞추고 때린 손으로 곧 치료해 주고 말이다. 그렇게 해야 악마가 분노의 틈을 타지 못하는 것 같다.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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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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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준 시네마힐링 - 토끼 울타리
    감독 : 필립 노이스출연 : 에블린 샘피, 데이빗 걸필리, 케네스 브래너 제목 : 피의 레퀴엠, 엄마 찾아 삼만리 흔히 ‘지리상의 발견’으로 지칭되는 역사는, 기실 살육의 카니발이었고, 인간 존엄의 공동묘지였다. 정의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기만의 비망록이었다. 메이플라워호를 필두로 시작된 이민 행렬은 3,000만 명에 달하던 북미 대륙 인디언을 몰살시켰다. 지금은 불과 200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을 뿐이다. 스페인의 코르테즈 군대는 아즈텍 문명을 멸절시켰다. 괌에서는 백인 점령군이 원주민 남자를 모조리 참살함으로써 모계로 이어지는 제3의 혼혈 민족을 낳았다.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노예로 쓰기 위한 인간 사냥이 창궐했으며, 노예의 후손들은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하고 카리브해의 열도에 새로 둥지를 틀어야 했다. 저 무참한 역사의 그늘 한 귀퉁이에서 미처 조명되지 못한 피의 레퀴엠은 또 무릇 기하이던가. 여기 또 한 조각의 피 묻은 퍼즐이 있다. 20세기 초 호주 대륙의 서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100여 년 동안 백인의 침입에 대항해온 원주민은 중과부적, 백인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원주민특별법에 따라 생활이 일일이 통제되었다. 필립 노이스 감독은 그 압제의 역사 중에서 특히 원주민보호기구의 잔혹상을 미시의 앵글로 주목한다. 원주민보호기구는 혼혈아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혹은 사랑의 열매로, 혹은 강간의 결과로 태어난 혼혈 아이들을, 원주민보호기구는 언제든 어디서든 강제로 데려다가 수용시설에 유치할 권력을 갖고 있었다. 생이별도 그런 생이별이 없었다. 명분은 거창했다. 백인의 피가 절반은 흐르는 아이들을 어떻게 원주민의 야만적인 생활 속에 버려둘 수 있겠는가, 데려다가 교육을 받게 하고 문명을 누리게 하고 신의 품에 안기게 하자. 아이들은 원주민 어머니에게서 강제 격리되어 백인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기도를 배웠고, 일을 배웠다. 그리고 백인 가정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학습된 하인으로서, 하녀로서, 혹은 3D 직종의 막노동꾼으로 공급되는 거였다. 원주민 언어가 금지되었고, 원주민 풍습이 금지되었고, 고향 생각이 금지되었다. 좀더 백인에 가까운 2세, 3세를 낳도록 하기 위해 결혼을 강제하기도 했다. 밤이면 성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같은 강제 이주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강제 이주의 후유증으로, 정체성의 혼란, 문화의 단절, 가정 파괴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도둑맞은 세대(The Stolen Generations)'로 불린다. 필립 노이스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틴 올슨에게서 각본을 받고 전율했다. 도리스 필킹턴이 쓴 실화소설 <토끼 방지 울타리를 따라서>(Follow the Rabbit-Proof Fence)>를 각색한 시나리오였는데, 주인공이 바로 도리스 필킹턴의 친모인 ‘몰리 크레이그’였다. 영화는 14살 몰리(에블린 샘피 扮)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어, 실제 인물 몰리 크레이그(84세)의 진솔한 표정을 화면에 가득 채우면서 막을 내린다. 필립 감독은 가능한 한 기교를 자제하고, 원작에 담긴 고통과 감동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1931년 호주 서부의 지갈롱.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이 어린 몰리와 8살바기 동생 데이지, 10살짜리 사촌 그레이스, 세 계집아이를 순찰차에 태우고 어미들의 울부짖음을 남겨둔 채 떠난다.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무려 1,500마일(약 2,400km) 떨어진 낯선 곳. 강압과 규율에서 소름끼치는 미래를 예감한 몰리는, 어느날 두 동생을 데리고 수용소를 탈출한다. 잡히면 감당하기 어려운 혹독한 체벌이 기다리고 있다. ‘개코’라는 별명을 가진, 같은 원주민 출신의 무두(데이빗 걸필리)가 이들을 추적한다.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베테랑이다. 영화는 크게 두 갈래의 축으로 미묘한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아무런 준비 없이, 허름한 차림에 신발조차 변변치 못한 아이들의 머나먼 여정. 배를 주리고 숨을 죽이며 가야 하는 가시밭 길이다. 현상금이 붙고, 곳곳에서 현상금을 노린 이들의 거짓 친절이 거미줄처럼 기다리고 있다. 유일한 희망은 한없이 뻗어 있는 ‘토끼 방지 울타리’(이 울타리는 토끼로부터 농경지를 지키려는 경계이자, 백인과 백인 아닌 ‘것’들을 나누는 상징이다). 그 울타리를 따라가다 보면 고향이 나온다. 뒤에서는 개코 무두가 말을 타고, 반대쪽에서는 경찰이 지프를 몰고 울타리를 훑어온다. 울타리가 희망이자 덫이다. 이 쫓고 쫓기는 얼개를 두고, 감독은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콧날 시큰한 숨바꼭질 놀이를 펼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실 하나로, 몰리는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엄마의 품에 안긴다. 그러나 저 눈물의 포옹도 잠깐, 피도 눈물도 없는 백인의 공권력은 이미 고향 지갈롱을 지배하고 있다. 저토록 짓밟힌 삶에게 승리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저 무너지지 않고 견디는 것. 저 ‘백 년 동안의 고통’은 보상되지 않는다. 인간을 착취하는 인간의 무한 욕정 앞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저 지리멸렬한 삶에도 웃음은 있다. 어린 몰리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순간, 화면이 밝아지면서 8순의 두 노인이 파안의 웃음을 흩날린다. 몰리와 데이지, 햇살에 트고 세파에 무르익은 주름 투성이의 웃음이다. 살아남은 자의 웃음이다. 이렇게 느꺼운 생존도 있었다. 이렇게 갸냘픈 승리도 있었다. 몰리와 데이지는 웃지만, 그 웃음 앞에서 관객의 가슴은 무너진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필립 노이스 감독의 필모그라피다. 17세에 영화계에 입문한 호주 출신의 필립 감독의 대표작은 <패트리어트 게임>(1992년)과 <긴급명령>(1994) <본 콜렉터>(1999). 전형적인 할리우드 풍으로 팩스 아메리카나를 외치던 감독이 어느날 수구초심, 호주 영화로 돌아가는데, 하필 반정부 색상이 농후한 전복적인 작품이다. 영화는 관객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필립 감독의 뇌리에 불현듯이 영화 <쿼바디스>의 감독 머빈 르로이가 첫 시사회를 마친 뒤 외쳤다는 유행어가 떠올랐을지 모를 일이다. “신이여! 정녕 이 작품을 제 손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201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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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6
  • 송준 시네마힐링 - 그녀에게
    <그녀에게>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 하비에르 카마라, 다리오 그란디네티 음악 :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 제목 : 속삭이라, 믿음으로 사랑으로 대저 ‘깊은 뜻’은 언어의 저 너머에 존재한다고 전해진다. 교언영색의 달콤한 꾸밈은 말 뒤에 숨은 칼날을 경계할 바이며, 구구절절한 장광의 변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를 무는 오해를 빚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부작용 없는 언어의 본질을 천착하기로 이심전심의 경지가 이야기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영산에 불러놓고 ‘한 송이 연꽃을 말없이 들어 보이자(拈華)’ 오직 가섭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微笑).’ 이에 석가가 가섭에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 : 언어나 경전에 의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뜻)’의 심법을 전해주었다. 저 유명한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에서 마음으로 무지개를 세운다 해도, 어쩌란 말인가. 알 듯 모를 듯한 상승의 경지가 비록 거룩하긴 하나, 가섭과 무릎을 맞댔던 석가의 수제자들도 넘지 못한 불립문자의 경지를 강파른 속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살아가는 현대인이 어떻게 넘볼 수 있을 것인가. 설사 이심전심으로 텔레파시가 전해졌다 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권력의 문제다. 가섭의 텔레파시는 절대자인 석가에게 전해짐으로써 소외를 극복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대중 속의 소외’가 극심한 현대사회에서는 어렵사리 텔레파시를 통한 상대가 권력과 먼 거리에 있는 사람일 경우 ‘다수의 횡포’로부터 ‘왕따’를 면키 어렵다. 영화 <그녀에게>는 이 미묘한 역설의 경계에 서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불립문자의 레토릭으로 언어, 특히 음성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말’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화의 원제목도 다. 알모도바르는 언어의 세계와 무언의 영역을 대립항으로 교차시키며 영화의 얼개를 짜나간다.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장식한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의 춤사위는 무언의 세계를 상징한다. 영사기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피나 바우쉬의 애절하고도 긴박한 <카페 뮐러> 안무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공연을 보던 한 남자가 감동을 못 이겨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데, 옆 자리의 베니그노(하비에르 카마라)가 그 모습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는다. 베니그노는 코마(혼수상태) 환자를 돌보는 간병인이다.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발레리나 알리샤(레오노르 발팅)가 그의 환자다. 베니그노는 자기가 본 공연이나 영화, 그 밖의 세상사를 쉴 새 없이 알리샤에게 들려준다. 베니그노의 ‘말 걸기’는 믿음이고 사랑이다. 말이, 말을 통한 사랑이 알리샤를 소생케 하리라는 믿음이다. 어느 날 알리샤의 옆방에 코마 환자가 새로 실려온다. 쇠뿔에 만신창이가 된 인기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와 그녀의 보호자 마르코(다리오 그란디네티). 베니그노는 마르코가 <카페 뮐러> 공연장에서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남자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진다. 그러나 마르코는 베니그노가 권해주는 ‘말의 믿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언어와 무언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그녀에게>를 견인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 또한 염화미소의 개념에 속한다. 다정한 속삭임이 달콤하긴 하나, 내면 깊숙한 외로움이나 오해를 다 풀어주지는 못한다. 가족이나 친지 등 제3자까지 개입하는 갈등이라면 말은 이미 기능을 상실하고 무기력해지기 십상이다. 마르코에게 고백하기를, 베니그노는 짝사랑하던 알리샤를 돌봐주려고 간병인을 자청하여 4년째 남모르는 사랑을 키워가고 있는 중이다. 베니그노의 헌신적인 환자 수발은 그래서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속삭임의 힘’을 확신하지 못하는 마르코의 사랑은, 베니그노의 기이한 짝사랑과 상징적으로 대조된다. 이 씨줄과 날줄을 얼개로 삼아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를 한층 심오한 감성 속으로 밀고 들어간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식으로 해독되지 않는 기이한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인다면, 그 진정성에 도달하지 못하는 뭇사람들의 상투성은 무시돼야 하는가. 영화 중반, 알리샤의 임신과 함께 플롯은 급물결을 탄다. 감옥에 수감된 베니그노는 마르코의 구명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말 걸기의 믿음, 사랑의 힘을 증명하지 못한 채 영원히 무언의 세계로 입적하고 만다. 그러나 영화는 베니그노의 죽음과 함께 묵직한 감동의 아우라를 선사한다. 알모도바르 특유의 ‘모성의 유토피아’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마지막 장에 정겹고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피나 바우쉬의 <마주르카 포고>도 더없이 절묘하게 조응한다. 이 대목에서 세계의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알모도바르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바쳤다. 카를로스 사우라와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감독 알모도바르는 연출 초기부터 기괴한 성적 유머들, 양성애·동성애 혹은 도착적 욕망의 분방한 묘사, 죽음·부조리·혼돈의 자유로운 차용 등으로 비평계 일각에서 ‘악동’ 대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알모도바르의 고집은 대표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 이르러 “경계에 묶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솔직함이 배어나오는 ‘알모도바르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평을 받으며 칸 영화제 감독상·심사위원특별상과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 등 세계 유수 영화제·영화상을 30여 부문이나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알모도바르는 <그녀에게>를 통해 거장의 반열로 훌쩍 뛰어올랐다. 특유의 스타일과 강렬한 원색의 영상미에 진솔한 예술의 향기를 흠뻑 가미한 것이다. 브라질이 낳은 세계적인 뮤지션 카에타노 벨로주의 <쿠쿠루쿠쿠 팔로마> 보컬은 심금을 파고들며 회상 시퀀스와 절묘하게 어우러지고, 극중에 삽입된 7분여 분량의 무성 영화 <애인이 줄었어요> 테마는 알리샤의 임신과 베니그노의 죽음을 매개하는 득의의 상징으로 승화한다. 투우장, 무용학원, 전원 별장을 그린 시퀀스들과 장면마다 배경으로 잡힌 미장센들은 스페인의 문화를 탐미적으로 담아낸 영상미의 절창이다. 특히 네 주인공의 캐릭터를 빚어낸 캐스팅과 연출력은 흔히 감상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강하고 섬세한, 혹은 어눌하면서 신념에 찬 주인공들의 다중성격 연기가 진국이다. 시종 코마 환자로 자리보전을 해야 했던 ‘잠자는 미녀’ 레오노르는 연기의 색다른 맛을 선사한다. 이른바 ‘눈빛 연기’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절묘한 페이소스를 연상시키는 ‘피부 연기’ 차원이랄까. 이들을 카메라로 몰아가며, 때론 느리고 장중하게, 때론 가슴 저미게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감독의 메가폰에서 연륜이 뚝뚝 묻어난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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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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