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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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런>
감독 : 닉 파크, 피터 로드
제작 : 아드만 스튜디오

제목 : 닭아! 닭아! 밝은 닭아!
 
뒤늦게 예술 대열에 합류한 영화는 도저한 기세로 발전을 거듭하여 21세기 문화예술의 첨병으로 떠올랐다. ‘작품인가, 상품인가’ 하는 논란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불과 백 년 남짓한 시간에 영화가 쌓아올린 독특한 미학과 영상 문법은 ‘제7 예술’로서 독보적인 경지를 열었다. 바로 이 점, 예술로서의 필름, 영상 언어로서의 영화에 앵글을 맞추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영화읽기의 또 다른 재미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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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 애니메이션 <치킨 런>은 지난 백 년, 영화가 온축蘊蓄한 여러 기법과 미학을 한데 아우른 멋진 사례다. 더구나 <치킨 런>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영화의 여러 표현 기법을 염두에 두고 스토리보드를 만들었다. 영화 장면을 미리 다 그려놓고 그에 맞추어 세트, 인형, 카메라를 배치해 목적한 그림을 실제 필름으로 꼼꼼하게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장면에 따라 감독의 의도와 고민을 ‘커닝’할 수 있는, <치킨 런>의 색다른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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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런>은 ‘닭토피아’를 꿈꾸는 양계 농장의 당돌한 암탉 이야기다. 주인공 ‘진저’는 농장이 주는 풍부한 먹이의 ‘함정’을 간파하고, 철망 너머 피안의 세계로 닭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이를테면 ‘암탉 모세’다. 농장 세트와 탈출 과정은 <쉰들러 리스트>와 <대탈주>를 절묘하게 패러디했다. 암탉 진저의 눈에 비친 농장은 <쉰들러 리스트>의 아우슈비츠에 다름 아니다. 감독은 진저의 눈높이로 관객의 시선을 이끈다. 광각 렌즈에 로앵글Low-angle로 과장해 잡은 철조망 너머로 닭들의 막사가 도열해 있고, 한 줄기 번개와 함께 하늘은 음산한 기운에 휩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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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신부터 <치킨 런>은 서스펜스의 문법을 교과서처럼 깔끔하게 보여준다. 군살 하나 남기지 않는 과감한 생략과 몽타주, 관객의 신경을 잡아채는 음산한 화면과 사운드, 그 청회색 화면 위로 닭 한 마리가 특공대 침투조의 몸짓으로 전진해온다. 뒤를 따르는 오합지졸 탈출조. 긴장미 넘치는 암울한 화면과 코믹한 닭들의 아이러니컬한 대비. 포인트다. 칠전팔기, 반복되는 실패에도 진저의 집념은 ‘빠삐용’처럼 날카로워지고, 농장주의 폭압도 날이 갈수록 무겁게 영화를 짓누른다. 여기에 갑자기 날아든 수탉 ‘록키’. 다분히 <대탈주>의 실베스터 스탤론(그의 출세작이 바로 <록키>다)을 의식한 설정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대탈주>의 탈출 장면들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하며 한바탕 코미디의 웃음바다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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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펀한 코믹 시퀀스를 연출하면서도 <치킨 런>은 범작의 수준을 뛰어넘는 고도의 심리적 안배를 잊지 않는다. 탈출의 위험과 농장의 풍요로운 식사, 피안에 대한 기대와 불확실성. 그 강파른 불안감 사이를 오가는 닭들의 대립과 갈등, 민중의 미래를 걸머진 ‘모세’의 부담과 고뇌, 이 미묘한 심리의 굴곡을 굵은 선으로 이끌며 <치킨 런>은 인간 사회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갈파한다. 혁명 시대 인간 군상이 겪었던 온갖 감정과 상념의 파노라마 – 혁명가의 신념과 절망, 무지렁이 우중들의 우유부단한 패배주의, 불확실성에 뒤흔들리는 회색론자들의 기회주의 – 가 <치킨 런>의 닭 무리의 행태와 고스란히 오버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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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진저의 탈출 시나리오도 아슬아슬하게 성공의 문턱을 넘는다. 이 숨가쁜 엑스터시를 표현해낸 영상의 긴박감이 <치킨 런>의 백미다. 격정을 딛고 다시 뭉친 닭들은 ‘조직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온몸으로 체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저 일행은 닭의 과학으로 만든 비행기를 타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어 꿈에 그리던 피안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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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에 가까운 <치킨 런>이 끝내 놓친 옥에 티 하나. 바로 수컷 록키의 존재다. 서커스단의 대포쇼 총알 역할을 하다가 오발 사고로 농장으로 날아든 록키는, 시종 허풍을 떨며 암탉들과 노닥거리는 짓으로 일관하다 D-데이 전날 밤 비겁하게 혼자 도망간다. 막 싹트기 시작한 진저와의 러브 스토리가 의식되었는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농장으로 돌아오는데, 그때는 닭들의 비행기가 힘차게 하늘을 향해 이륙한 순간이다. 얼떨결에 탈출의 영웅으로 부상한 록키는, 닭토피아에서 ‘청일점’으로 온갖 행복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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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즐기면 그만인 애니메이션에 생트집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여권론자들의 눈에는 곱지 않을 설정이다. ‘본디 수컷의 존재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이중 풍자라면, 이번에는 남성 관객의 입맛이 씁쓸해질 것이다. 요는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좀 더 단단한 설정이 아쉬웠다는 것. 그래도 뭐, <치킨 런>의 미덕이 크게 흐려지지는 않은 듯.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금자탑, 아드만 스튜디오
 
모처럼 삼박자를 두루 갖춘 클레이 애니메이션 <치킨 런>. 이 작품의 제작 기간은 허투루 보낸 시간 없이 꼬박 4년.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숙명인 ‘지옥의 공정’을 감안하고 감상한다면, <치킨 런>의 재미는 곱절이 된다.
 
세상에 미련하고 생색 안 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한 일이 바로 클레이 애니메이션 작업이다. 영화의 1초는 대개 24프레임으로 이뤄져 있다. 24장의 필름이 돌아가면서 관객에게 1초의 영상을 선사하는 것이다. 실사 영화야 무비 카메라로 ‘차르르’ 찍으면 그만이지만, 클레이 애니메이션은 얘기가 다르다. 인형의 동작 1초를 만드는 데 하루해가 훌쩍 넘어간다. 점토로 인형을 만들어 필름 한 컷을 찍고, 미세하게 움직인 점토 인형을 다시 만들어 또 한 컷을 찍는다. 이렇게 24컷의 연속 필름을 만들어야 1초의 영상을 얻을 수 있는데, 이 기법을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Stop motion animation’이라 부른다.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진가는 몹신(군중신)에서 두드러진다. 인형 하나가 웃고, 울고, 찡그리고, 떠드는 표정 1초를 얻는 데만도 인형 얼굴 10여 개가 소요되는데, 하물며 수십 마리의 닭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는 <치킨 런>의 파티 장면에 이르러서랴. 아드만 스튜디오는 이 ‘지옥의 공정’을 거쳐 무한한 표현의 영역을 개척해냈다. 아카데미상에 빛나는 ‘윌레스와 그로밋’ 시리즈는 클레이 작업의 금자탑이다. <자동바지>의 초고속으로 질주하는 장난감 기차 시퀀스, <화려한 외출>의 달 여행 시퀀스와 스키 타는 로봇, <양털 도둑>의 프로펠러 비행기 전투 장면 등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불후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아드만 스튜디오가 기왕의 성과와 자신감을 한 차원 더 밀고나간 야심작이 바로 <치킨 런>이다. 일단 러닝타임 84분. 애니메이션의 숙명인 인공 이미지는 매력 만점의 미남미녀 배우들이 펼쳐 보이는 다양한 연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단조로워서 60분 러닝타임의 TV물이 주류를 이루는 경향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노린 디즈니류 애니메이션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생뚱한 뮤지컬 장면들도 이 ‘단조로움’을 의식한 편법의 일환.
 
이를 의식한 <치킨 런>은 조명과 앵글을 한층 다채롭게 채용하였다. 물량 면에서도 종전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대작이다. 등장하는 닭만도 80여 마리, 원근감과 서스펜스 등을 표현하기 위해 같은 등장인물도 A형과 B형, 두 종류의 인형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모두 300개의 A형 닭과 130개의 B형 닭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머리와 부리, 눈 등은 표정과 동작에 따라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도록 약 60배수의 소품을 따로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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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만 스튜디오 삼총사’ : 왼쪽부터 피터 로드Peter Lord, 데이빗 스프럭스톤David Sproxton, 닉 파크Nick Park.

아드만의 명성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현대사와 고스란히 중첩된다.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 등으로 아카데미상을 무려 7개나 수상했고, 심지어 껌 기계를 개종한 아드만의 독특한 점토 배합 기계는 ‘아드만식 혼합’이라는 고유명사를 탄생시켰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클레이 애니메이션에 심취했던 닉 파크, 피터 로드와 데이비드 스프럭스톤은 10대 때 이미 영국 BBC TV로부터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의뢰받아 재능을 떨쳤고, 1972년 마음을 모아 아드만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10년도 채 못 되어 아드만을 세계 제1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성장시킨 ‘아드만 스튜디오 삼총사’는 마침내 할리우드 자본의 초청으로 전세계 배급망의 안내를 받으며 <치킨 런>을 이륙시킨다.
 
멋지다. 아드만의 발자국이 곧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역사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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