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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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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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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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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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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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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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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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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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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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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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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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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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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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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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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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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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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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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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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0_ 법정
- 켄터베리의 순교자 토마스 법정 세상 관행은 권력의 끈이 이어지면 바빠지고 끄나풀이 떨어지면 적막감에 싸이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요즈막엔 장로 대통령을 싸고도는 사람들은 얼싸절싸 몰켜 다닌다. 늘 푸르고 키가 큰 월계수처럼 변함없이 힘을 떨치자며 월계수회를 만든 사람은 생일을 당했는데도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단다. 세상인심 괴이쩍기 그지없다. 지미 카터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땅콩농장에 돌아왔을 때 하룻밤을 지내고 아침이 되자 주위에 아무도 없는 적막감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회상하고 있다. 일천만 이상이 득실거리는 서울에서 텃밭을 가꾸며 사는 게 소원이라 수단껏 그 기반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그 좋은 시장을 일주일 하다 그만둔 교회 집사가 있다. 공기 좋은 우면산 기슭에서 텃밭도 한가로이 못 가꾸게 됐고 다락도 폐쇄됐고 입만 불쑥 튀어나오게 됐다. 그리고 어깨춤을 추며 감사헌금까지 냈는데 한 주일 지난 뒤에는 위로 예배를 굴삭기로 잔디를 갈아엎은 집에서 드리게 되었다니 쯧쯧, 주여 굽어살피소서. 교회와 국가가 티격태격할 일은 법정 문제에도 있었다. 교회는 자체 법정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법정을 들락거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했다. 그 이유땜새 그런 관행이 점점 자라나 주교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게 만들었고 교회법이라는 법체계가 주교들의 판단을 이끌게 되었다. 국가 역시 계속해서 법정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와 국가가 힘을 합쳐 사이좋게 일할 때 어느 쪽 법정이 어떤 문제를 처리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그닥 까탈이 일어날 수 없었다. 일상적인 협약에 따라 교회는 과부들, 미성년의 고아들, 결혼 등에 관한 사건들을 다루었다. 그런데 교회가 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성직자는 어떤 사건이든지 불문곡직하고 교회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아야 된다고 공포했기 때문에 국가와 분쟁이 생겼다. 왕은 주장하기를 아무리 성직자라도 죄를 범했다면 그 누구를 무론하고 지엄한 나라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14th-century depiction of Becket with King Henry II 이 알력은 영국에서 곪아 터졌다. 영국 왕 헨리 2세는 교회에 압력을 넣어 캔터베리 대주교로 자신의 오랜 동지 토마스 베케트를 뽑도록 채근했다. 왕도 생각하기를 토마스가 자기 말을 고분고분 잘 따라 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완전히 잘못 봤다. 노래 잘하고 놀기 좋아하고 붙임성 있는 이 왕실 시중꾼은 주교가 되자마자 안면을 싹 바꿨다. 그는 교회를 옹호하는 완강한 투사로 변했다. 왕은 화가 날대로나 분을 삭이지 못해 치를 떨었다. 그는 신하들 앞에서 침을 튀겨 가며 백담사 시절의 머리 벗겨진 사람처럼 툴툴댔다. 『나한테 밥을 얻어먹은 녀석이 나한테 발길질을 해. 내 궁정에 들어올 때는 절름발이 망아지 마냥 설설 기더니 지금은 왕처럼 으스대는 꼴이라니. 그래 이런 고이얀 사제를 혼구멍 내는 신하가 한 놈도 없단 말이냐?』 이 말을 전해 들은 네 명의 우락부락한 기사들이 달려가 캔터베리 예배당에서 토마스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영국 전역을 흉흉하게 했다. 사세가 불리해진 왕은 순교로 성자가 된 토마스의 무덤에 달려가 참배를 해야만 했다. 202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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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0_ 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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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 주신 말씀_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우리가 예수님을 왜 믿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이라고 누구나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교회 생활을 함으로 정신적 육신적 평안을 얻고 삶 속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로 털어놓고 그의 도우심을 바라기 때문이라 하겠다. 우리 인생들의 삶 속에는 항상 수많은 문제들로 인하여 염려와 고뇌가 반복되고 있다. 질병의 문제, 자녀, 가정의 문제, 재물과 직장의 문제 등 오죽하면 불교에서는 그 문제들로 인한 번뇌가 108가지가 있다 하였다. 그 108가지 번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리 그리스도인과 불교 신자들에게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그 번뇌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기 수행’이란 것을 권면한다. ‘수행’이라 함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부처 화’ 되기까지 고행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멈춰서 원하는 경지에 이르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극락’이 보장될 것인가? 불교계의 대표적 큰스님이라는 성철스님이란 분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겼다. 그러나 정작 죽음 앞에서는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 볼 때 그토록 오랜 세월의 ‘수행’ 결과에도 사망 앞의 문제와 ‘극락’을 확신하지 못한 것이며 백팔번뇌에 대한 온전한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이리라! 그러므로 불교는 생명의 종교가 아닌 철학적인 종교요, 영광과 기쁨이 아닌 끝없는 번뇌의 종교인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시고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어떤 신이 내가 창조주다, 하나님이다, 부활이요 영생이다! 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증한 바 있는가? 이는 귀신도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러므로 백팔번뇌든 사망이든 그 어떤 문제라도 ‘하나님을 만날 때’ 완벽히 해결되는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아멘. 2021-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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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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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물레방아 세상
-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1115년) 물레방아 세상 야당 시절 닭장차 신세도 심심치 않게 졌던 신임대통령은 취임식 단상에서 성역 없는 부정부패 척결을 외친다. 박수가 터져 나온다. 부정부패 척결 대상자들도 멋모르고 힘껏 손을 마주친다. 야당인이었던 사람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 시절 야당은 여전히 야당이고 그 시절 여당은 묘하게도 여당인 채 정권이 교체됐다. 그래도 정권교체는 교체인지 온고지신을 좋아하는 강토에 신한국을 외치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물레방아가 왜 도는지를 몰라 내력을 물어보겠노라고 노래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물레방아가 왜 도는지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세태가 왔다. 이리저리 칡넝쿨처럼 엉켜 빌붙어 살던 사람들에게 얼굴 뜨거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일제 시대에도 자유당 시절에도 군사정권 밑에서도 살아남은 그 끈기로 이번 시련에도 살아남으려고 버둥질을 치겠지. 엽전들이 짤랑거리며 사는 세상만큼 재미있는 곳이 있을까 싶다.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 법무부 장관이 된 사람의 딸이 한국인임에도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이유가 참으로 갸륵하다. 미국대학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여자대학을 가기 위해서였다. 참으로 이 하늘 아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미국 시민권자로서 미국대학을 가지 않고 한국제품을 이용해 준데 대해 상은 주지 못할망정 학교를 자퇴시키고 이 비좁은 땅의 국적을 다시 얻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신한국을 외치는 신명 나는 판국에 말이다. 추운 12월에 독일 황궁을 떠났던 헨리 4세는 추레한 모습으로 카놋사 성문에 나타났다. 벌써 시절은 해가 바뀐 1077년 정월이었다. 눈이 땅에 아직도 희끗희끗 남아 있었다. 참회자로서 흰옷을 입고 맨발로 헨리 4세는 성문 앞에 하루종일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카놋사 요새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둘째 날 헨리 4세는 눈 위에 맨발로 서 있었다. 성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삭풍이 부는 가운데 지리한 침묵만 감돌았다. 셋째 날 헨리 4세는 다시 성문 앞에 나타났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멍청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느물스러운 베드로의 후계자라도 문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을 거절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드디어 성문이 신음을 토하듯 끼이익 열렸다. 강력한 황제가 체수 적고 다리가 밖으로 휜 교황 앞에 굽신거리며 탄원자 자세로 서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황제는 입에서 나오는대로 약속을 해댔다. 교황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용서했다. 세상은 물레방아 같다. 판세가 금새 변했다. 다시 한번 나라를 장악하게 된 황제는 약속들을 저버렸다. 교황은 다시 그를 출교시켰다. 그러나 황제는 이번에는 교황이 너무 지나치다고 백성을 설득했다. 여론의 지지를 업은 황제는 군사를 동원해 로마로 진군했다. 그는 탄원자가 아니라 정복자로 당당하게 교황은 폐위시키고 새로운 교황을 옹립했다. 교황을 혼내는 황제 종내 또 다른 교황과 또 다른 황제는 싸움의 불씨가 된 문제를 종식 시키는 데 합의를 했다. 즉 주교들은 어느 한쪽이 아니라 교황과 황제를 다 같이 만족시키고 충성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주교들은 마누라도 포기해야 했다. 그때부터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지 못했다. 202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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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물레방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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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범사에 감사하라
- 주신 말씀_ 데살로니가전서 5:18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느 학자가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는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단어가 무엇인가를 조사하였더니 ‘사랑’이란 말보다 ‘감사’란 단어였다 한다. 또 미국이 역사도 짧은데 어찌 저렇게 빠른 시일 내에 부강하게 되었고 세계 일등 국가가 되었나를 분석하니 모든 국민이 일상생활에서 ‘땡큐’(감사)를 제일 많이 하는 것이 그 비결이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감사라는 말의 힘은 대단한 것 같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감사’는 조건이 있는 감사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 함은 무 조건적인 감사를 하란 말이기도 하다. 범사...? 우리 일상의 범사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겠으나 아프고 괴롭고 짜증 나고 두려운 일들도 많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모든 상황을 막론하고 ‘감사’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도를 하면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해 주셔서’의 감사였다. 곧 좋은 은사를 베풀어 주심에 대한 조건적 감사였던 것이다. 만약 몇 년 전 같은 기막힌 웅덩이에 빠져들어가는 환난을 당하거나 갑자기 죽을병에 걸리거나 자식들에게 큰 문제가 닥쳤을 때라도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감사’를 하며 춤추고 노래가 가능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론은 이제는 ‘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는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상황을 반전시키시는 기적이 일상이기에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는 언제나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체험이기도 한 일이라 또한 ‘감사의 끝’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말세에는 사람이 돈, 자기, 쾌락을 사랑하므로 감사가 없어진다(디후 3:2)라고 한다. 못된 사랑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더욱더욱 사랑하면 만사는 ‘감사’로 바뀌는 것이다. 아멘. 202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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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범사에 감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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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교황과 황제의 싸움
- Heinrich vor Canossa 카노사의 하인리히 (1862) 교황과 황제의 싸움 형님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형님 같은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이 대부분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하는 전도사들한테 왜 그런 칭호로 불리시게 됐는지는 알길 바이없다. 그러나 그 교수님은 정말 정 많고 자상하고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성정을 지니신 은사이셨다. 세상이 요상스러운 것은 그분한테 은덕을 입은 전도사들이 적지 않은데 나중 은사에게 곱지 않은 말을 뇌까리는 걸 보면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바람결에 들리는 소식이 형님 같으신 은사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다. 세월이 살처럼 빠름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 교단 기독교 교육학의 길을 열고 닦으신 은사께서 늘 동안의 모습으로 활기차게 제자들을 키워 오셨는데 활동이 여의치 않으시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소망하고 기도드리기는 작년 인천 총회에서 기쁘게 뵈었듯이 금번 총회 석상에서도 놀라는 표정으로 만나 뵐 수 있도록 해야겠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토스카나의 마틸데, 클뤼니의 후고 아무리 성직자라도 죽으라면 죽을지언정 한 몸 이룬 마누라를 포기하라는 교황의 명령은 따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황금알을 낳는 땅을 물려줄 자식까지 없어질 판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세상의 지배자와 싸움을 벌인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7세였다. 그 대상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 4세였다. 교황은 두 가지 명령을 무기로 휘둘렀다. 삼중관을 쓴 교황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의 모든 주교들은 황제가 아니라 교황한테서 주교 지휘봉을 받아야 된다. 그리고 독일의 모든 주교들은 한사람 빠짐없이 마누라를 포기해야 한다.』 독일 성직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마누라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이게 교황의 첫 번째 명령에 대한 성직자들의 답변이었다. 두 번째 명령에 대한 황제의 답변은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다웠다. 황제는 암브로시우스의 옛 도시 밀란에서 주교를 직접 임명했다. 성 베드로의 후계자 교황 이에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성 베드로의 이름으로 황제를 교회에서 출교 조치해버렸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칙령을 공포했다. 교황의 영적인 명령은 무서웠다. 헨리 4세는 자신이 더이상 황제일 수 없다는 사실에 뜨악해졌다. 백성들은 황제의 명령에 고개를 외로 꼬았다. 이 엄청난 사실의 변화에 황제는 숨을 제대로 몰아쉴 수 없을 정도로 기가 찼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교회와 화해하는 일뿐이었다. 칼이 없는 교회의 힘이 이토록 셀 줄을 황제는 예전에 미처 몰랐다. 내심 놀라기는 교황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헨리 4세는 허겁지겁 로마를 향해 출발했다. 그 해는 이미 많이 지나간 끝 무렵이라 라인강은 꽝꽝 얼어 있었다. 12월에 헨리는 적은 무리의 수행원과 알프스를 넘었다. 말의 발이 묶여 있어서 그들은 눈이 덮인 산등성을 다리를 질질 끌며 오르락내리락했다. 살아서 로마 평원에 도달한 사람은 몇 안됐다. 그 사이에 교황은 회합이 있어 교황청을 떠나 북쪽 이탈리아에 있는 카놋사 요새에 도착했다. 교황청에서 헛걸음친 황제는 추레한 꼴로 카놋사 요새까지 황망히 달려왔다. 20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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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8_ 교황과 황제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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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 주신 말씀_전도서 3:11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지난 5월의 푸르른 세상이 어찌 그리 아름답게 보이던지... 아하! 참으로 푸르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영의 눈을 뜨고 바라보는 만물의 변화 속에 모습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성은 참으로 놀라웁기만 하다. 같은 공원 길이요 같은 나무들인데 깊이 짙어가는 가을의 풍경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흘러간 5개월의 시간 속에 녹여있는 듯 새롭게만 비춰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하는 솔로몬의 혜안은 놀랍고 깊이 공감이 가는 말이다. 천지창조 시 하나님은 넷째 날 ‘하늘 궁창의 광명체들로 낮과 밤을 나누시고 징조와 계절과 달과 해를 이루게 하라’ (창 1:14) 말씀하심으로 ‘시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이처럼 시간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 속에 사는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시간이란 틀 속에서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모든 삶이 ‘때’라는 섭리 안에 이루어져 가게 되어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세상에서 시간의 ‘때’에 가두신 것은 하나님이 허용하신 세상에서의 시간의 삶을 마친 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 하심에 큰 ‘목적’이 있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세상 삶 동안에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는 본질적 존재이다.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안에 들어가는 목적을 이루는 복 받은 삶이라 하겠다. 반면,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인생은 그 삶이 비록 최상의 영화를 누린다 할지라도 사람의 본질적 목적을 모르는 짐승과 벌레의 삶과 다를 바 없다 하겠다. 비록 사는 동안이 마냥 평탄치만 않고 형통과 곤고함이 ‘때’를 따라 달리 찾아오더라도...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젊을 때는 젊을 때 대로 늙으면 늙어가는 때 대로 더 깊어가는 아름다움이 있음을 보기에 기쁨이 더해가는 것이리라! 결국, 그래서 하나님도 그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게 아닐까? 아멘. 2021-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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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때를 따라 아름답게 지으신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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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교황의 무기
- 카를로 엠마누엘레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용서를 구하는 하인리히 4세 교황의 무기 아파트를 헐하게 공급해 주겠다던 회장이 이마에 상처를 받고 느닷없이 정계를 떠났다. 제 돈 가지고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어떠냐며 코를 벌름거리더니 이런저런 약속을 제 돈 아까워 헌신짝처럼 내패댕이 쳤다. 미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단다. 그러니까 부자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정신이 오락가락할 적에 하는 말인 성부르다. 『야, 이 노랭이야. 네 돈인데 왜 안 가져가니』 세상 정치는 그나마 새로움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우리 교회 쪽은 어떤지 모르겠다. 세상에선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며 머리를 맞대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금을 그것도 신성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돈을 제멋대로 쓰고도 어엿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행세를 하고 활갯짓을 치니 도대체 어찌 된 노릇인지 모르겠다. 떠나거라. 회칠한 무덤이여 이 봄에 열매 없는 늦은 가을 나무마냥 뿌리째 뽑혀 두 번 세 번 가뭇없이 사라져다오. 공회 앞에서 회술레를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래도 제 버릇 누구 못 주겠지만. 중세 때 교회와 나라의 말다툼은 왕들이 왕이랍시고 제 기분 내키는대로 결혼하는 걸 못하게 잡도리하듯 간섭할 때 일어났다. 결혼이나 이혼문제에 있어 교회의 중재와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교회는 왕한테 두 가지 무기를 휘둘렀다. 첫 번째 무기는 출교였다. 이 조치는 왕이 성만찬에 참여할 수도 없고 교회의 어떤 위로와 편의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또 다른 무기는 금령이었다. 이 조치는 당사자인 왕의 영토에 적용되는 출교 조치였다. 벌 받을 당사자가 프랑스 왕이라면 교회의 모든 봉사가 프랑스 전역에서 금지됐다. 그러면 왕의 신하들은 자기들 상전이 교황한테 고분고분 말을 잘 듣게 하느라 땀을 찔찔 흘리며 골머리를 썩였다. 교회와 나라의 또 다른 형태의 싸움은 나라가 교회 일에 콩이야 팥이야 하며 나설 때 일어났다. 그 까닭은 교회가 독일과 프랑스 영토의 거의 반이나 되는 땅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땅을 소유하는 게 처음에는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수도사들이 복음을 선교하려고 쑥대머리 야만인들이 북부 유럽으로 갔을 때 수도사들이 생계를 꾸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사용하지 않는 임자 없는 땅을 일구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광대한 개간된 땅이 교회, 즉 교황청 소유가 되었다. 나라와 곤란한 문제들이 생기게 된 것은 땅에서 모든 세금이 나왔고 땅의 소유자들이 군대의 병사들을 대줬기 때문이었다. 주교와 협의하는 교황 자연히 왕은 땅이 돈을 잘 바치고 사람을 공급해 주는 사람들의 소유가 되길 바랬다. 궁리 끝에 왕은 주교와 수도원장들을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고이얀 처사에 교황은 울대를 돋우며 발끈했다. 왕이 주교와 수도원장한테 든든한 배경이 되주었다. 그래서 급기야는 주교나 수도원장이 교황의 아랫것들인지 왕의 졸개들인지 하는 문제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권력이란 모래 같다던가. 아마 모래를 움켜쥐면 쥘수록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속성을 두고 이른 말인 것 같다. 이제 장로 신분의 대통령이 나왔으니 그가 권력을 잘 선용하도록 아부할 게 아니라 기도해야 될 것 같다. 202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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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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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교황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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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라
- 주신 말씀_골로새서 1:9~10 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라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알고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닌 듯하다. 우선 하나님이 나를 세상에 낳게 하시고 나를 향하신 뜻은 무엇일까? 나처럼 비천하고 무지렁이 같은 자에게도 하나님의 뜻은 있으실까? 지난날 내게 닥친 고난에서 나는 기도하며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일까? 하고 여쭈면서 도우심을 간구하였는데 세월이 지나고 그 고난이 기쁨으로 바뀌었을 때 비로소 ‘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고 얼마나 감사해 하였는지 몰랐다. 꼭이 그런 과정이 있어야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주님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시니 세상에 나온 사람은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히 있으실 것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뜻을 당사자인 자신이 어떻게 헤아려 아는가에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교인들에게 ‘듣고’, ‘깨닫고’, ‘열매 맺다’라고 말하며(골 1:6)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고 있다’라고 칭찬한다. 즉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듣는 귀가 있었고 그 말씀을 깨닫는 지혜와 더불어 말씀을 행하여 열매 맺는 결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지금까지 듣고 배워 말씀을 깨달아 알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범사에 주님께 합당하게 매일을 ‘하나님을 아는 것’에 힘쓰며 살아가는 삶! 그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 아멘. 202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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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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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대관식
- Pope Leo III, crowning Charlemagne from Chroniques de France ou de Saint Denis 대관식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던 것처럼 교황들은 왕들에게 기름을 붓고 왕관을 씌워주었다. 프랑크족의 왕 피핀은 교회로부터 왕관을 받았다.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교회의 허락을 받아 그의 왕국을 신성로마제국이라 칭했다. view of the vatican basilica from a roof near saint Peter square. 팔백 년 성탄절 샤를마뉴는 로마로 가서 성 베드로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다. 샤를마뉴가 추위를 참으며 베드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교황이 언 땅을 사뿐사뿐 밟고 샤를마뉴 뒤로 다가가 머리에 왕관을 털퍽 씌웠다. 기름 부음 받은 대관식 답례로 왕들은 교황한테 봉투 하나 디밀고 끝난 게 아니라 왕이나 황제 신분에 걸맞게 처신을 했다. 실례로 교황이 이탈리아에서 쑥대머리 야만인들과 곤란한 문제로 골머리를 썩게 되었을 때 피핀은 불원천리하고 말을 달려와 야만인들을 된통 혼을 내주고 다섯 도시를 빼앗아 그 도시의 열쇠를 교황한테 공손히 건네주었다. Harun-Charlemagne 이것이 한 왕국으로서의 교황권의 시작이 되었다. 754년부터 1870년에 이르기까지 교황들은 이태리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처음에 교회와 국가는 참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점차 서로의 힘이 커갈수록 서로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한 다툼들은 교회와 국가가 다 같이 기독교적이고 거룩하다고 말을 앞세워도 이익에 관련된 문제들이라 피하는 게 쉽지 않았다. 문제의 어려움은 교회와 국가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는 데 있었다. 교회와 국가의 차이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말인즉슨 국가는 질서, 재판, 치안 등으로 땅 위 인간의 외적 생활을 다룬다. 국가는 육체와 지상 적인 것들을 처리해야 한다. 또한 그들의 말인즉슨 교회는 인간을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고 양심, 경외, 마음 등으로 인간의 내적 생활을 다룬다. 교회는 영혼을 돌보아 하늘로 이르게 할 책임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구분이 아주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즉 영혼이 육체와 따로 떨어져 있지도 않고 하늘로 가는 길이 다시 말해 교회가 땅에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회 자체가 정부인데다 많은 땅의 소유주라는 사실에서는 갑절로 어려워진다. 하루해가 노루 꼬리만큼이나 짧았다가 이제는 좀 개 꼬리만큼은 된성 부르다. 나무에 물이 오르고 사람들의 여민 옷이 얇아질 때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불끈거린다. 영성에 차진 않지만 교회의 편린을 주절거리고 있는 이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일런가... 2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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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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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7_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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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5_ 교회와 국가
- 13th-century stained glass depiction of Charlemagne, Strasbourg Cathedral 교회와 국가 신학생 시절 주일 아침 서울운동장 앞에 서 있곤 했다. 천호동으로 가려면 당시는 꼭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사철 입는 단벌 회색 춘추복에 댕기를 매고 검은 가방을 들고 서 있노라면 영락없는 이방인 행색이었다. 지금은 이름도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뀐 그곳은 주일 아침이면 등산복 차림의 남녀들로 북적댔다. 그런 북새통에 나만 달랑 그러고 서 있으니 영 어정쩡한 모습이었다. 사당동 골짜기에 밤이면 개구리 합창에 귀가 서늘해지던 그 시절 신학생들은 눈빛만 형형했지 행색은 영양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채플 때 통성기도를 할라치면 그들은 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를 향해 통곡했다. 사면이 꽉 막힌 시절에 중공과 무슬림에게 나아가 말씀 전할 날을 다짐하며 서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믿음의 눈이 아니면 머리만 갸웃거릴 일이었다. 간혹가다 기숙사 식당에 특식으로 돼지 볶음이 올라오면 줄을 두 번 서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렵던 시절 기도는 즐거웠고 선교 열망은 가슴을 터칠 듯했다. 로마제국 붕괴 이후 새로운 서방 세계를 형성하는데 교회의 역할은 상당히 컸다. 교황들은 모든 북부지역들에 선교사들과 수도사들을 파송했다. 선교사와 수도사는 거친 북쪽 지역민들에게 한 신앙 그리스도교와 한 언어 라틴어를 전달했다. 유럽 전역의 모든 교육받은 사람은 라틴어를 알아들었다. 이렇듯 교회는 개화된 남부 유럽과 미개한 북부 유럽을 통합시키는 가교역할을 담당했다. Europe around 814 유럽은 현재보다 훨씬 작은 나라들로 바글거렸다. 그래서 싸움도 잦았다. 하나의 강력한 제국 로마가 사라진 후유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전에 로마제국에서 누렸던 하나의 통일체를 그리워했다. 그들은 서방에서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가 하나의 새로운 로마제국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헬라인들이 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갔다고 생각한 것처럼 프랑크족은 로마제국이 자신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크족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신성 로마 제국을 설립했다. 이 나라는 느슨하기는 했지만 유럽의 올망졸망한 여러 나라들을 여러 세기에 걸쳐 하나로 결속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체가 다 망라되었던 건 아니다. 영국은 유럽에 한 번도 낀 적이 없었고 프랑스는 잠깐 딱 한 번 포함됐었다. 그러므로 중세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할라치면 한 단일한 정부를 생각할 수는 없다. 하나의 큰 덩치 속에 여러 단위가 있는 아파트 같은 형태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교회와 국가는 한동안 서로 도왔다. 국가는 교회가 백성한테 동일한 신앙과 동일한 언어를 가르치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와 교회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왕들은 지배할 힘이 있기에 지배자가 된 5공 시절 머리 벗겨진 사람 같은 강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들은 힘만을 의지해 통치해서는 그 통치가 너무도 힘겹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왕들에게 백성을 다스리도록 맡겨 주시지 않는다면 무지렁이 백성들일지라도 얼마 가지 않아 왕한테 입을 내밀고 머리를 흔들었다. 2021-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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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5_ 교회와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