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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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희 칼럼_ 정년문제 처리에 대한 아쉬움
    해마다 총회 때면 정년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법대로 만 70세 정년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정년만을 고집할 수 없는 피치못할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대우(?)를 받으며 조기 은퇴하는 경우는 여유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평생 목회한 목사에게 대우는커녕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는 은퇴가 걱정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정년 문제에 대하여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잘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헌법도 살리면서 지 교회 사정도 고려해 주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사료 된다. 제107회 총회 석상에서 한 필자의 동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Ⅰ. 정년연장은 헌법 정신에 배치되는 주장인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한 지 교회나 1구역(4지 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70세까지 시무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시무 연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 70세 정년 이전에 사망을 하거나 병고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년 이전에도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물러날 사정이 없을 때는 만 70세까지만 시무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다. ② 물론 전항과 같은 해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란 꼭 만 70세 이전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은퇴할 시점에 가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은퇴 시점이 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정하여 원래 법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60세까지 한다였는데 만 70세로 연장한 법이라면 만 70세가 되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더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종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만 70세로 줄여 놓은 것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억지는 아니다. 목사와 교회 간 합의만 되면 다소 정년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③ “근로자가 정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자의 동의 아래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용자와의 근로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면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단순히 당해 근로자가 정년이 지났다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관계를 해지할 수는 없다.”라는 판례가 있다(대법원 2002두12809). 물론 목사와 교회의 관계가 근로관계는 아니더라도 목사와 교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참고할 판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장대신 51회 총회는 ‘목사 정년 70세는 유지하되 교회에서 원하면 계속 시무할 수 있다’라고 결의하였다. Ⅱ. 정년연장을 위한 신축성 있는 방법은 없는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회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채로 지 교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일정 기간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결의해 주면 된다. ② 정치 제12장 제5조 1항: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 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 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항존직 만 70세를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해석하여 총회 결의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지 교회 시무는 몇 년을 연장할 수 있으되 단, 대외(노회, 총회, 산하기관) 정년은 만 70세를 유지하기로 한다.”로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결의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수 있다. Ⅲ.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종 결론은 총회나 노회에서의 정년은 현재대로 유지하되 각 지 교회가 합의할 경우 지 교회 목회만 몇 년을 더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면 된다. 노회에서 선거 피선거권은 제한하고 시무하는 지 교회 당회장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총회가 결의하여도 교회가 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원하지 않는 교회에 피해가 되지도 않는다. 통계상 정년 문제로 인하여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하는데 서로서로 입장을 이해하며 정년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종희 목사(총회 정치부장, 헌법자문위원장 역임. 성민교회)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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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2
  • 우리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자!_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결국은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야 한다. 에피소드로 끝나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에는 미래가 없다. 본래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트콤(sitcom)이라고 볼 수 있다. 시트콤은 situation comedy의 줄임말이다. 이 시트콤인 에피소드의 재미는 서브젝트(subject)인 주인공이 프로젝트(project)에 휘말려 결국은 오브젝트(object)가 되어버리는 데 있다. 사실상 어떤 선거든지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그 선거를 통해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즉 서브젝트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선거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획되기에 선거를 관리, 기획하는 선관위는 이 프로젝트 운영에 공정을 기해야 하며 프로젝트 되는 선관위 규정에 스스로가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 프로젝트화 되지 못한 출마자는 자연히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 선관위는 선관위 스스로가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일에서 처음에는 법과 원칙에 의해서 투명하게 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안에 따라서 법과 원칙은 적용하고 크게는 정치적 고려를 스스로 하고 법과 원칙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선거는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말이다. 결코 희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희극이 되어버리면 계속하여 이런 일이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단 한 번 있었던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는 미래가 없다. 선거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행하여 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선거는 ‘지지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없음’에서 선택하는 자유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아주 나쁜 선거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지할 수 없음도 지지할 수 있음도 사라져 버린 단독후보로 결정되는가 했는데 이제는 ‘양해서’와 ‘사과문’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총대들에게 두 후보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 막장 선거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렇게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는가? 두 후보인가? 아니면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선관위인가? 나는 선관위라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선관위는 없어져야 한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토록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고, 변질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내밀하게 부총회장 선거를 들여다보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사과한 후보를 아니면 선거법을 위반했음을 사과했기에 ‘양해합니다’라고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상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적인 고려를 처음부터 했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되고 화합과 이해의 정치가 된다. 그런데 한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고 다른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지 않고 미루다가 선거 막판에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자에게 ‘선거법을 위반했으니 사과하고’ 이미 자격을 획득한 후보자에게는 무슨 언질(?)을 주어서 양해한다고 ‘양해서’를 쓰게 해서 두 사람 모두를 다 자격 없는 후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난, ‘양해서’를 쓴 후보도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불공정하고, 깨끗하지 못한 선거에 ‘양해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총회의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양해서’를 쓰지 않고 후보사퇴를 선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문을 쓰고 후보의 자격을 얻어 부총회장에 출마한 후보에게도 묻고 싶다. ‘선거관리 규정을 어긴 후보입니다’라는 사과문을 쓰고 후보자가 되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과문을 쓰고 후보가 되려고 하는가이다. 후보가 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교회의 선거는 이기고 지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선출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과문까지 쓰고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보가 되려고 했는데 당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난 선거규정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후보의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일꾼이 되십시오”라는 사퇴의 변을 내고 사퇴했다면 우리 총회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헌법적인 정치가 살아났을 것이다. 선거규정 하나도 지키지 못한 후보가 어떻게 헌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들이 사퇴하지 않고 짜고 치는 무슨 판처럼 선관위에 의해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서로 잘해 봅시다’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100회 총회 때부터 교회의 정치가 성경과 헌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묘한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신자유적인 심리정치란 참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사실 유권자들에 유리하게 되는 것 같지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정치이다. 그래서 그 심리정치에 의해 수년 전(2016년) 우리는 두 사람의 목사 부총회장 후보를 자격 없음으로 규정하여 탈락시키고 현장에서 두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는 장로교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는 다시 자격 없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자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는지 더 좋아졌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법 규정 앞에서 평등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고민한다. 선거에 임하는 나 자신도 투명하지 않고 더욱더 선거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자인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출마했고 이제 나 역시 내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선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총회의 바른 정치는 언제나 구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예 구호도 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장로교 정치에 맞게 되려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이 작성된 ‘성명서’지만 8월 29일 전국호남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총회 참석도 단호히 거부한다”라고 성명했기에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그날 참석한 450명 정도 되는 총대들은 부총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호남협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성명서’가 있다면 나 역시 찬조금 들고 그날 참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격이 있든 없든 두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 총회의 부 대표자와 대표자의 자격을 2년 동안 주게 될 것이다.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바보이다. 사실상 나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고는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삶에서 목사로서 터득된 비결이 있다. 믿음이 없는 바보, 신학과 신앙이 없는 멍청이는 항상 세상에서 방황하고 믿음 있는 신학과 신앙에 굳게 선 자는 세상에서 여행하고 산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방황을 해도 우리 총대들은 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왜? 두 후보자에게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자격을 주고 우리에게 할 수 없는 투표를 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자에게는 투표하지 말자. 도덕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민주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아니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수년 동안 나는 권위주의자에게 참 권위가 없고 도덕주의자에게 진정한 도덕이 없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민주투사에게 정작 민주 의식이 없음을 보아왔고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찍자. 누가 한들 나아질 총회가 아니다. 우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잘라낼 각오로 찍어야 한다. 좋은 놈(?) 중에서 좋은 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관위에 의해서 나쁜 놈(?) 중에서 더 나쁘지 않을 분(?)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이렇게 후보자 두 분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쁘면 자격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 한 분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섯 분의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를 기도는 하지 말고 화장실에 앉아서 매일 매일 고민해 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된 선거에서 서브젝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를 골라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개혁신학과 신앙의 반대자인가를 투명성의 원리에서가 아닌 불투명성의 원리 속에서 선택해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잘못하면 지역적이고 신학적이고 광신(狂信)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힐링(healing)의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킬링(killing)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총대들에게 두 분의 후보 중에서 누가 킬링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총신과 광신의 대결도, 영남과 호남의 대결도, 교갱과 영성의 대결도, W.E.A의 찬성과 반대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신앙이나 신념과 다른 합리적인 견해가 신앙이나 신념의 도그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오면 우린 갑각류들이 발작하듯 반발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느덧 내 개혁신앙과 신학이 지적 갑각이 되었고 교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앙의, 신학의 순결함을 지키고 방어한답시고 이념적 순결주의가 되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내 신앙과 신학의 정당성만 스스로 부여하고 신학적, 윤리적 나르시시즘에 젖어 두 후보에 대한 차이도 차별도 모른 채 내 생각과 판단에 틀리면 조롱, 내면의 비웃음과 반대로 일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프로젝트화 한 선관위원들을 향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술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비참한 총대일 뿐이다. 이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문화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우리 총회의 정치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이러한 선거 프로젝트를 만들고 힘쓰는 동안 우리 총회의 영향력은 총회 안에서도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부탁한다. 킬링하지 말고, 힐링의 총회 정치를 세워가기를, 그리고 이 선거는 우리 교단 역사에서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길 기도한다. 누가 부총회장이 될 것인가? 당신이 지지하는 사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이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일일 것이다. 누가 소통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 이 글은 2022년 9월 6일 기독신문의 ‘선관위 입장, 사과문 감사의 글’이 나기 전에 쓴 글입니다 -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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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맨돈 소강석 선거법 위반 소지素地
    6.1 지방선거를 42일 앞두고 부실 선거관리로 말 많던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사퇴했다. 노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체 위원 회의에서 “부실 투표 관리 책임을 통감한다”라면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라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공직선거 관리 총책임자인 노 위원장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현직 대법관이다. 선관위원장직을 사퇴하더라도, 대법관 직위는 계속 수행한다. 노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당시 대법원 주심을 맡아 2020년 무죄 취지 판결을 주도했다. 4월 20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가장 큰 이유로는 사전투표 부실 관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경기남부청 반부패수사계는 지난 5일 제20대 대선 사전투표 관리 및 운영 부실 논란에 휩싸인 노 선관위원장에 대한 고발 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2021년 3월 20일, 4월 7일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앞두고 맨돈 소강석이 내려다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4차 재난지원금은 가급 적 3월 중에 집행되도록 속도 내달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재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선관위 사무총장은 작년 국회에서 “총선 전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라고 했다. 이번 지원금도 선거에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거법은 ‘공무원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대통령의 선거 전 재난지원금 독촉이 선거법 위반이 아니면 무엇인가. 지난 2021년 2월 이재명 승리를 위해 뛰던 문재인은 여당 대표·장관 등을 대동하고 가덕도를 찾아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방문 하루 전날 민주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주요 공약이라고 발표했다. 선관위는 그래도 “대통령 직무 수행”이라고 했다. 선거 심판이 아니라 정권 하수인이다. 총회 소속 목사들의 카톡 여러 모임방에 제3차 합동 포럼 개최에 관한 공고문이 올라왔다. 맨돈 소강석과 맨쇼를 벌여 죽었던 송병원을 제105회 총회 현장에서 부활시켜 장로 부총회장으로 당선시키고 절대 돈 먹은 적 없다는 이승희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혁 목사가 대표회장으로 올린 공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시 : 2022년 8월 16일(화) 10시 30분 ~ 2시 장소 : 대전인터시티 호텔 대상 : 정회원 및 지역별 게스트 장로 3인씩 특별초청 1부 예배 설교 :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축도 : 김상현 목사(목장교회, 기독신문 사장대행) 2부 축사 및 특강 축사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증경총회장) 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직책이 빠져 있다. 배만석 목사(사랑스러운교회, 전 총신대 신대원 총동창회장) 장봉생 목사(서대문교회, 은혜로운동행기도회 본부장) 환영사 :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특강 : 송삼용 목사(하늘양식교회,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_ 윌버포스와 합동 포럼의 비전 제107회 선거기간에 제106회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제107회 선거관리 중책을 맡은 맨돈 소강석이 선거법 개악과 금권 부정 선거 달인임에도 축사를 한다. 이 모임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총회 정치꾼들의 모임이다. 8월 16일 대전인티시티호텔에서 모인다. 도대체 오비이락의 의혹이 있는 모임을 왜 갖는 것이고 엄정한 선거관리의 책임을 진 선거관리위원장임에도 맨돈 소강석은 누구를 위해 무슨 축사를 하는가. 그 행위가 총회 선거법을 위반하는 소지가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 주최 측 핵심인물로 추측되는 언론인은 이번 선거 특정 후보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노예제 폐지 업적을 이룬 영국의 정치인을 내세운 특강은 총회 소속 목사이고 언론인인데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의 연구생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하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은 특정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 또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며 헌법과 법률로 위원의 임기와 신분을 보장하여 외부의 간섭과 영향을 배제함으로써 직무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총회선거규정은 위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6조(조직 및 직무) 1. 위원장: 위원회를 대표하여 선거관리의 제반 사항을 총괄한다. 9. 모든 입후보자는 소정의 양식을 따라 “공명선거 서약서”를 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며, 그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과 총회 규칙 및 선거규정 등을 비롯한 제반 결의에 대하여 성실히 준수할 것과 선거와 관련하여 총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대하여 사회법에 의거 민, 형사상 제소, 고소, 고발 등을 하지 않기로 서약합니다."로 한다. 제26조(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1. 총회임원,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및 기관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선출직), 총회 총무 입후보자(이하 ‘입후보자’라 함) 및 그 지지자는 선거기간 중 일체의 금품 요구 및 금품 수수(金品授受)를 할 수 없다. 4.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 선거운동기간이 종료한 후, 총회 개회 일부터는 교인 동원 및 문자 전송 등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된다. 위반 시에는 후보자격이 상실된다. 단, 부임원으로서 정임원 후보인 경우와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 총회선거법 제26조 4항은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선거관리위원장은 온갖 행사에 참여해 맨쇼를 하며 어겨도 되는 것인가. 그러한 특권은 사회법과 총회선거법에서도 금하는 금품 수수의 맨돈 위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제28조(선거규정 위반자 처벌규정) 2항은 다음과 같이 엄하게 규정한다. 본 규정 제26조 1항과 2항을 위반한 자로서 금품제공자는 영구히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고 금품을 요구 및 받은 자는 금액의 30배를 총회에 배상하며 위반 즉시 10년간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되 그 기간은 배상금을 총회 입금일로부터 계수한다. 목사임에도 성이 차지 않아 배광식도 소지한 법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언론인으로 알고 있다. 총회 선거기간의 정치적인 특강에 앞서 옛 선비들도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어 꼭 지켜야 하는 법칙이나 규정)로 삼은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으로 아무 상관도 없이 한 일이 공교롭게도 때가 같아 억울하게 의심을 받거나 난처한 위치에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의 불미(不美)한 일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맨돈 소강석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총회 선거관리위원장의 본분과 목사의 직분을 되새겨 맨돈과 맨쇼를 삼가 바로 서기를 바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얻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든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지혜에 대한 사랑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관습도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에서나 공무에서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탁에 조회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의 계시에 의지했을까? 그들이 신탁에 의지한 것은 지혜의 부족 탓일까, 지혜로움 때문일까. 신탁에 의지한 그리스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의 지혜를 구한 까닭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다. 신탁의 뜻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인들은 더 지혜로워졌다. 신적인 계시의 뜻을 묻고 따지는 과정은 인간적 지혜를 갈고닦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신탁의 관습은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지혜’,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수많은 권력자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함을 삼가라.” 이 두 경구가 왜 거기 새겨져 있었을지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함을 삼가라”는 신탁에 앞서는 신탁, ‘최고의 신탁’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지나침 없는 행동의 지혜를 찾는 일이었으니까. 성경은 말씀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2-25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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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8-12
  • 윤석열 대통령 대처 수상처럼
    윤석열 정부의 동시다발적 사정(司正)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을 비롯해 경찰과 감사원 등 기존 사정 기관은 물론이고 법무부, 국토교통부, 통일부와 같은 정부 각 부처까지 전 정권 관련 각종 의혹 파헤치기에 나서고 있다. 이전의 경우 정권교체 후 벌어진 사정 작업이 주로 과거 정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윤석열 정부의 사정 작업은 문재인 정부는 물론이고 현 야당 유력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함께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과거와 현재 권력 모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다. 적이 될 능력을 갖추는 것, 적이 되는 적은 강한 천성을 전제로 하며 그 까닭에 저항을 찾아다닌다... 공격하는 자의 힘에 대한 일종의 척도는 그에게 필요한 적대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맞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나 또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뤄진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승부를 건 문제들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쩌다 우연히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과 융통성과 무기를 동원해야만 맞설 수 있는 저항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적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년 10월 13일 ~ 2013년 4월 8일)가 당수가 된 것을 한 번의 요행으로 여겼고 오래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당을 이끌고 처음 2~3년 동안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대처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를 매도했다. 그녀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모두 질식시켜서 영국 경제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화해 무드를 깨고 소비에트연방을 힐난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겨울, 몇 개의 공공부문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대처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면서 노동당과 제임스 캘러핸 총리를 이 파업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대담하고 분파적인 발언으로서 저녁 뉴스를 장식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문재인처럼 유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안심시켜야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 좌파가 득세한 당시의 영국은 그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다. 대처는 지금까지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해왔지만 총리가 된 이상 논조를 절제하고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윤석열 시대처럼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바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대처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선거 때 공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삭감이었다. 대처 총리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캘러핸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는 충격에 빠졌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같은 당의 남성 의원 다수가 수년간 자신들을 대해온 대처의 처신에 더 이상 분개를 참지 못하고 이준석과 이재명처럼 공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온건한 의원들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처가 국가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 봐 두려워했다. 대처 총리는 그들을 내각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모든 반대자를 밀어낼 기세였다. 적들의 영역은 점점 커졌고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하락 일로에 놓여 있었다. 벌써 탄핵을 들먹이는 윤석열 반대 여론처럼 다음 선거에 그녀가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1982년 대서양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러사아의 푸틴처럼 국내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포클랜드섬을 침공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군사정권 관리들은 영국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불모지인 포클랜드를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클랜드에 해군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만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무의미하고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비난했다. 당내에서도 다수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섬의 재탈환에 실패한다면 보수당은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그녀의 자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놓던 바로 그 자질을 말이다. 완고한 고집이 이제는 용기와 고결한 기품으로 보였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데다 제 경력만 챙기는 주위의 남성들에 비하면 대처 총리는 단호하고 강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삽시간에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잊혀졌다. 대처는 정치무대를 장악했고, 다음 두 번의 선거에서 노동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윤석열처럼 마거릿 대처도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중산계급의 여성이고 우익 과격파였기에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는 권력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선 인사이더가 되려 하지만(아웃사이더로 살기는 고달픈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여느 검찰총장과 달라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차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처가 주위의 남성들처럼 행동했다면 다른 남성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본능은 아웃사이더로 머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아웃사이더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남성들의 군대에 대항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처럼 당당한 대처 역시 덧없고 치상적인 대중적 인기 따위에 영합하지 않았다. 김종인 같은 정치꾼들은 지지도의 수치에 일희일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즉 정치가들이 전쟁을 하면 얻으려고 하는 목표물)은 호감을 주는 인사보다 우위를 차지한 인사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일부 대중이 미워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 맨돈 소강석처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맨돈만 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들, 거짓의 제왕 이재명이나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자들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든든하게 의지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존재다. 그래야 피아가 구분되고 적과 아군이 드러날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일이나 작금의 이런저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윤석열 대통령을 눈 가리고 아웅 식 여론 조사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는 정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허위의 한가운데는 정치꾼과 언론꾼이 설치는 이권 타협의 영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고 우호적인 경로만을 찾다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고 조국과 추미애처럼 우왕좌왕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수렁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적들에게 둘러싸인 아웃사이더로, 투사로 여겨야 한다. 끊임없는 전투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의의 용사로 강인하고 기민하게 만들 것이다. 좌파 무리들과의 반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처 수상처럼 반목 없이는 전투도 없고 전투가 없으면 승리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을 즐기는 자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문재인 패거리의 유혹이 아니라 대처 수상의 정면돌파 대처를 본받아 민노총의 파업 병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양보해지기보다는 불법을 타파하고 이겨 존경받고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은 현재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미래 세대(世代)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불법하고 불의한 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 얻는 인기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요즘 진행되고 있는 과거 정권의 수사 정국에 대해 “통상 이런 사정 작업의 최종 종착역은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이 과거의 전례였는데 과연 어느 시점에 전 대통령의 이름이 흘러나오느냐가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 BC 545년경~BC 470년경)는 '손자병법'에서 대처 수상이 실행한 것처럼 말했다.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적이 오기를 대비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처 수상처럼만 하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수상처럼 한국병을 고친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서 선동하는 좌파 무리가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함성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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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총회 무게 있는 부서의 장을 용하게 맡는 재주의 정치가 김상현이 총회 화합의 사도 박병석 목사 방장 카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만 될 수 있으면 정치 이야기하지 말고 은혜받는 혹은 미담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에 근거하고 그간의 유력 신문 기사를 살펴 카톡방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재인이나 배광식의 서사는 극적이지만 진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 비겁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 집착했으면서 초연한 척하고 사익를 탐했으면서 개결한 척한다. 무사안일을 갈구하면서 당당한 척하고 잘못했으면서 정당한 척한다. 그들의 재임은 의심과 허위의 기간이다. 맥베스에서의 셰익스피어 표현을 빌리면 “아라비아의 향수도 그의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내려다보며 손을 씻는 빌라도처럼 능청스레 변명해도 후일 역사는 바르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바르게 하도록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하는 합성어이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스러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水)이 넘쳐 생긴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정하고 부조화한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게 정치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세상과 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의인을 의미한다. 배광식이 총신 졸업생들에게 전한 성경 말씀 내용이 정치의 본뜻이고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도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 졸업식장의 배광식을 통해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상현의 말이나 행동과 달리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 노회) 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최초의 헌장에 근거해 제정되고 공표된 총회 헌법 정치편에서 정치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1장 원리 예수교 장로회 정치의 일정한 원리 8개 조가 있으니 이것을 이해하여야 교회의 성질을 알 것이다 제1조 양심 자유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過分)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人類)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侵害)하지 못한다. 제2조 교회 자유 1. 전조(前條)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일례(一例)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각기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一切)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設定)할 자유권이 있다. 2.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同一視)함을 바라는 것뿐이다. 제3조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체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설치(設置)하사 다만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신도로 진리와 본분을 준수하도록 관리(管理)하게 하신 것이라. 이러므로 교우 중에 거짓 도리를 신앙하는 자와 행위가 악한 자가 있으면 교회를 대표한 직원과 치리회가 당연히 책망하거나 출교할 것이라. 그러나 항상 성경에 교훈한 법례(法例)대로 행한다. 제4조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진리는 선행의 기초라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傾向)에 있으니 주 말씀하시되 ‘과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심과 같으니 진리와 허위(虛僞)가 동일(同一)하며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관계없다 하는 이 말보다 더 패리(悖理)하고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結託)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또한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세례 요한은 당시 집권자인 헤롯의 비리를 정치적으로 지적한 죄로 목이 잘렸다. 성경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마 14:3-12 성경은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그가 지적하는 정치 기사로 넘친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서 그 부분들은 제하고 읽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총회 산하 수도노회 소속 목사인 김상현은 무엇을 믿고 살고 총회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위해 왜 정치하는지를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릴 염려는 전혀 없겠지만 대한민국의 법정에 피소당할 수도 있는 각오는 가지고... 2022-02-16
    • G.OPINION
    • G.COLUMN
    2022-02-16
  • 총회장이 되려는 이유
    얼마 전 미국의 존경받는 정치인 밥 돌(Robert Joseph "Bob" Dole, 1923년 7월 22일~2021년 12월 5일)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정계에 진출해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캔자스주를 대표하여 연방 하원 (1961년~1969년)과 연방 상원(1969년~1996년)을 지냈으며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였다. 2021년 12월 5일 (98세) 그의 별세 소식에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워싱턴 내셔널 몰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참석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했던 그는 과거 돌 전 의원이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건립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추모사에서 돌 전 의원이 들려준 삶의 교훈에 대해 얘기했다. “바르게 말하라, 그것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정치적 견해 차이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20여 분에 걸쳐 매우 긴 추모사를 낭독했다. 함께 의회를 누비며 우정을 쌓아온 오랜 정치 지기의 별세 소식에 침통한 모습이었다. 추모사 중에서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낸 대목이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하자. 밥 돌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사람의 좋은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 뒤에 붙은 ‘to a fault’ ‘결점이 될 때까지’라는 표현은 밥 돌에게 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돌 전 의원의 솔직함에 대해 흉을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매우 고결한 성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분열의 정치를 염려하며 “타협(compromise)은 결코 더러운 단어가 아니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노(老) 정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좌절하거나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모자란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의 평가를 앞세웠던 그의 소개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당시에 나는 책을 읽으며 공상하는 걸 좋아하고 예쁜 것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기죽지 않고 신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쾌한 그 고백은 아이들을 향해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그의 용기가 더 빛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성적표에 써 준 글이다. ‘책을 많이 읽는 듯하나 이해력이 떨어지고 외모에 무지 신경을 씀.’ 공부를 못했고 초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글짓기상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락부장을 도맡아 소풍, 수학여행을 가면 먼저 나가 노래하고 춤췄다. 총회장을 지낸 소강석, 현재 총회장 배광식, 그리고 2년 뒤 총회장이 되고 싶은 장봉생 등에게 총회장을 하려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목사가 되어 총회장이 되려면 공부 잘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믿음의 아이들에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공부 못하고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미래의 내 모습을 마음껏 꿈꿀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들은 이런 추모사를 다른 총회장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우리 솔직히 말하자. 죽음 앞에 선 이번 증경 총회장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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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1-30

실시간 G.COLUMN 기사

  • 이효상 칼럼 - 선지자적 지성 담론이 사라진 시대
    선지적 지성, 담론이 사라진 시대인가? 한 남자가 자살을 결심하고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라고 삶의 이유를 묻자 이를 위해 철학자 윌 듀런트(Will Durant )는 이 문제를 혼자 고민할 게 아니라 당대 지성인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여겼다.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당대 지성인 100인에게 편지를 썼고 거기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렇듯 전통적으로 ‘지성인’이란,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공적인 참여와 활동을 담당할 때 그렇게 칭한다. ‘지성인’은 문인, 성직자, 철학자, 사상가, 대학교수 등 공적 담론을 이끌어 나가는 이들이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이런 지성인을 가리켜 사회의 “파수꾼”(Wachter)이라 불렀다. 자발적이었건, 강요되었건 일제 강점기 말 식민지 조선에서는 지식인만 넘쳐날 뿐 지성인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시국도 있었다. 그것은 다만 그때만이 아니다. 과거 혼란한 6.25 전란과 민주화 시절 대중들은 지식인들을 사회의 길잡이로 삼아 한 시기를 헤쳐 나가기도 했다. 1970년 이후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며 한국사회는 지성인의 현실 참여의 비중이 커졌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지성인의 사회 참여가 감당해 온 역할과 비중은 오히려 작아지고 희미해졌다. 아니, 어쩌면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정도인지도 모른다. 공적 영역에서 무책임하며 도덕적으로 오류를 범하는 이들을 향해 엄중히 비판하고 올바른 대안과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적 지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치열한 논리를 바탕으로 한 지성적 담론이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점이다. 지성인에 속하는 이들이 정치적 입장에 서서 지향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향한 비난과 협박만으로 그 담론을 대체하고 있다. 오늘날 지성인이 아무리 객관성과 보편성을 주장해도, 그 발언은 간단히 어느 한 ‘편’의 것으로 매도당하고 만다. 지성인들의 숙명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책임 윤리와 신념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며 참여할 수도 있다. 지성인의 덕목은 이성적이고 도덕적 균형 감각을 갖춘 독립된 파수꾼 역할에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지성계는 도덕적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양극화된 정치문화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갈등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친다. 강단 지성인들이 이제는 SNS와 유튜브 채널에서 활약하며 선과 악을 이분법으로 규정하고 심판하는 검사의 역할까지 하려 한다. 내 편이면 옳은 선이고, 반대편은 그른 악으로 규정하는 식이다. 최근 386세대 동료를 만나보면 그새 다들 교수가 되어 있고, 수도권 웬만한 대학에선 교수연봉이 1억이 넘는다고 자랑한다. 그들은 교수는 기능이 아니라 신분. 그 신분의 유지를 위해 그들은 자기들끼리도 안 읽는 논문을 써 가며 그 자리를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누리는 특권은 희생양인 시간강사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이들이 침묵하는 데에는 진보나 보수나 차이가 없다. 이른바 ‘진보적’ 지성인들은 지배층이 되었고 이미 기득권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자기 계급을 대변할 뿐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문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비판해야 할 그 현실을 자신이 만들었고 막아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종교계 등 사회 전반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그 막강한 영향력으로 대중을 장악해 얼마 남지 않은 희미한 ‘비판’의 목소리마저 잠재우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시스템의 문제점과 허구성이 폭로되는 것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기들만의 지식이 아니라 서로 함께 손잡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지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전후해서 소위 진보 지식인 그룹의 진영논리는 극심했다. 이들은 기이할 정도로 당파적 편향성을 띄었다. 특정 정당과 지역으로 나눠 한쪽 편만 들며 상대편을 폄하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했다. 지성인 스스로가 나서서 케케묵은 지역갈등의 망령을 되살리거나 한쪽만의 견해를 진실처럼 말해선 안된다. 반대편의 위선에 대해 말하려면 자기편의 위선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이성에 바탕을 둔 지성인이 지녀야 할 도덕적 의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지성인들마저 권력에 줄을 서고 손을 잡기 시작한다. ‘비판’을 사명으로 알던 진보 지식인들이 정부 기관에 진출한다. 그러면서 친정부를 표방하며, SNS를 이용해 쏟아내는 정치적 발언은 살벌하기 짝이 없다. 친정부 편향적 미디어의 주장만 받고 옹호하며 SNS에 공유한다. 이런 지성인이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지지자들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그들의 역할이 선동적으로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 추종자들은 SNS에서 강화된 응집력으로 매스컴들과 상호작용을 발휘하며 여론을 주도한다. 언제부터인가 ‘지성인’이라는 말을 듣기 힘들어졌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실제로 지성인이나 논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혹독한 여론과 언론 앞에 고뇌하고 침묵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는 시류에 영합하는 정치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행동하는 지성인 중에 ‘어용’이 많다. 지성인이 침묵하거나 어용 지식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지성의 무덤이요, 지식인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자나 권력기관에 영합하며 자리를 보장받고 줏대 없이 줄서기 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어용’이라 부른다. 물론 아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직장인’이 아닌 ‘지성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더러 남아 있긴 한 것인가. 가령, 스스로 지성인이라 일컫는 성직자가 자리를 탐하거나 이권에 개입하고 비즈니스맨(businessman)으로 전락한다면, 선지자적 지성을 포기하고 이런 지식인들이 어떤 편에 서는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는 지성인은 더 이상 ‘계층’으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익집단’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진보는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가치집단’으로서 진보는 죽었다”라는 진중권 교수의 지적처럼 전통적 지성인은 멸종한 것일까. 가히 지성인들에게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서 도덕적·지성적으로 냉정한 평론과 진지한 토론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전통적인 관점의 지성인은 사라져 간다. 현대 지식인은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등 SNS에서 많은 팔로워 구독자를 가진 사용자나 포털사이트에서 큰 블로그를 운영하는 파워블로거 등에 영향을 미치는 ‘메가 인플루언서(Mega-Influencer)’로 형태로 대체된다. 교수, 문인, 성직자, 철학자 등이 이 역할에 해당된다. 최근 친정부 성향의 메가 인플루언서들은 SNS상에서 자기만의 전문성을 지닌 ‘마이크로 인플루언서(Micro-Influencer)’들과 조응하며 영향력을 확대한다. 여기에 소위 ‘셀럽(Celeb)’이라 불리는 집단이 지식인 대열에 가세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식인은 많지만 이성적이고 깊은 사유(思惟)를 갖춘 지성인들은 침묵하고 자연히 사라지고 만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로 『지식인의 아편』을 쓴 레몽 아롱(Raymond Aron)의 명언이 떠오른다. “정치란 선악의 투쟁이 아니다. 과거와 미래의 투쟁은 더욱 아니다. 정치란 좀 더 바람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선택일 뿐이다. 정치를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지난해 9월 소설가 황모(某)씨는 1,267명이나 되는 문인들을 모아 서명을 받고 ‘조모(某)지지’ 성명을 주도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랴. 조모(某)를 졸지에 한국의 드레퓌스, 죄 없는 의인으로 추앙받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어용’이 되어간다. 심지어 ‘어용 지식인’임을 자랑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어용’이 투사가 되고, 가슴에 빛나는 훈장을 달고, 그 공으로 자리가 보장된다. 이렇게 한국 사회는 중요한 쟁점마다 선과 악 이분법으로 나뉘어 갈등과 대립, 분열의 중심에 어용 지식인들이 있다. 지성인이나 논객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난세(亂世)에 침묵하고 현실을 외면한다. 한국사회에 지성과 도덕적 윤리에 충실한 지성인이 생존하기는 한 것인가. 이 시대 지성인의 역할과 책임, 그리고 용기와 고뇌가 있는가. 권력자 헤롯이나 바로, 혹은 네로의 눈치를 보다 그 목소리를 잃지 않았는가. 가십(gossip)과 먹방(먹는 방송)으로 일관하는 언론 방송이 제 기능을 다하고 있다고 보는가. 선지자적 지성과 메시지가 사라지는 시대, 현실의 부정과 부패, 구조적 모순에 대해 누구도 바른 말하지 않는 침묵의 사회는 과연 건강한 것인가. 오늘 하늘의 소리를 듣고 시대정신을 가리키는 선지자와 예언자적 메시지는 누가 말 것인가. 광야의 들소리처럼, 세례요한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 혹독한 비난 가운데서도 작은 신음소리라도 내는 그런 지성으로 인해 역사는 치유되고 발전한다. 지성인들은 당대에 평가받지 않고 다음 세대에 평가될 것이다. 다음 세대는 지금의 한국사회와 지성인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글쓴이: 이효상 원장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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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13
  • 이효상 칼럼 -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대한민국, 미래는?
    저 출산율, 암 사망율, 음주 소비량, 양주 수입률, 교통사고율, 청소년 흡연율, 이혼율, 국가부채… 이런 각종 타이틀은 손가락 순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 중에 하나가 국내 총생산(GDP)에 비해 국가부채, 가계부채 증가 폭도 코로나19 위기 이후에 경고음이 더 크게 울렸다. 2019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를 보면 국가부채가 2019년도 1743조6천억 원으로, 그 전년보다 60조2천억 원이 늘면서 국민 1인당 1,409만 원 상당의 빚을 떠안고 전 국민이 3년 동안 한 푼도 안 써야 다 갚을 수 있는 상태이다. 국가채무 급증은 재정수지 악화로 국채 발행이 늘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재정안정 마지노선’인 40%를 넘어 41.4%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는 향후 예상되는 6월 추경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로 추경이 반영되면 국가채무비율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늘고 있는 나랏빚, 경기 불황으로 세수마저 줄면 나랏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게 된다. 국가 채무에 국세마저 1조3000억 원 덜 걷히는 세수 결손까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경제의 먹구름은 언제 걷힐지 아무도 모른다. 고용부가 발표한 ‘3월 사업체 노동력’발표에 3월 한 달 새 강제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59만 명이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전 산업으로 번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앞으로 재정 지출은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코로나충격으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을 돕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지만, 부유층에도 재난지원금을 뿌려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해 본 영화 ‘국가부도’가 생각나면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불과 20년 전 1998년 IMF 현실을 소재로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상황을 그린 영화였는데 어찌나 실감나든지,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아니다”.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인지 참 모를 일이다. 모두들 힘들다 어렵다고만 하는데 당국자나 정치권만 여전히 괜찮다고 하니 도무지 무엇을 보고 괜찮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더 혹독한 댓가를 치르고 나서 깨닫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6월, 3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서두르고 있다.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동 제한 장기화에 따른 내수 위축과 전 세계적 경제 추락으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각국이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 게 ‘뉴노멀(New Normal)’이 되고 있다. 추경도 적정 규모를, 적기에 처리하는 게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재정 건전성 악화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재정 쓰임새가 커질수록 재정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유지하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데 그 누가 감당할 것인가. 국민 혈세는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빚낸 돈을 자기 주머니 쌈짓돈 쓰듯 선심성으로 뿌린다면 국가 미래는 어두워질 수 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재정 질주 및 1당 독주는 미래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선명 야당의 역할이 더 기대된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면 나라 살림을 관리하는 정부와 정치인이 무슨 대책이라도 내놔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6월 21대 개원국회는 나라 살림을 알뜰하게 운영하도록 여야 없이 지혜를 모으고 협치하는 새 풍속도를 기대하면서도 이미 두 차례 추경 과정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쥐어짠 상황이겠지만 공기업 등 강도 높은 추가 세출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계속 적자 국채 발행만 늘릴 경우 통화 팽창과 국제 신인도 추락 등의 부작용이 예상된다. 정부투자 대부분 비생산적 혈세 낭비로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릴수록 세금이 늘어나고 그만큼 민간은 새로운 투자 기회를 잃게 된다. 결국 정부의 확장정책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국가의 부담만 늘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정부는 512조 원 규모 슈퍼 예산에서 불요불급한 지출을 삭감하는 등 과감한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나라 곳간을 맡은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다. ‘빚 살림살이’는 정부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340개 공공기관의 부채는 지난해 21조 원 이상 불어 사상 최대인 525조1000억 원에 달했다. 당기 순이익은 2016년 15조4천억 원에서 6천억 원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지난 4년간 임직원을 10만 명이나 늘렸다. 경영이 얼마나 방만한지를 말해주는 수치다. 근거도 없고 기준도 애매한 나라빚 불리기는 정부나 공공기관이나 똑같다. ‘전시상황(戰時狀況)’이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발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改憲) 군불 때는 여(與)당은 개헌안 처리를 들고 나왔다. 어차피 재적 3분의 2를 얻어 국회를 통과하기는 힘들다. 국민들은 4.15 총선에서 개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여당에게 주었다. 그만큼 경제 위기극복과 책임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당부였다. 장차 개헌 논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는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일 것이다. 지금 개헌 논의에 국력을 쏟을 여력이 없다. 경제 위기극복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판에 여당이 개헌 논의로 국력을 분산 시키는 행동이나 궁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장기집권을 대비한 권력의 오만함으로 비춰질 것이다. 대통령이 현 경제상태를 ‘전시상황’이라고 하는데, 여당은 왜 그렇게 반대로 가야 하나. ‘국민개헌발의’와 통합당 일부 의원들을 흔들어 보려는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 두 동강 내는 진보의 폭주, 극단의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아마 이런 돈 걱정일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지만 결론은 돈 걱정이다. 돈에 신경을 쓰고 걱정하고 힘들어하며 스트레스도 받지만 우리로 하여금 각성(覺醒;깨달아 앎)케 한다. 코로나 보다 빚이 더 겁난다고들 한다. 코로나 충격속에 서민들은 빚으로 버틴다. 실물경제 침체로 사회취약 계층은 생활고와 빚으로 살아간다. 민생경제가 응급상황에서 1700조 넘는 국가부채, 선심성 긴급재난지원금으로 과연 발등의 불은 꺼질까?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양극화는 더 심각해진다. 어차피 70% 국민은 대출 깔고 사는 서민이다. 빚 가운데서 빚으로 산다. ‘재난 지원금’으로 인해 경기부양이라는 큰 도움이 되기보다는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로는 될 듯하다. 국가가 공짜 돈을 준다는데 싫어할 국민은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배급과 할당 등을 공유하는 국가 주도형 사회경제가 형성되고, 정부의 선심성 퍼주기 정책이 오히려 정부의 의존도만 높여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 속에 국민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 위기극복을 핑계로 ‘묻지마 지원’은 안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개인적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의 엄중함과 노동 창의력 등이 상실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지 염려된다. 서민들은 일자리와 빚 상환 걱정뿐이다. 올해 1분기 파산신청이 5년 새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도 돈이 없고 국가도 돈이 없다. 국민은 은행 이자내기 바쁘고 국가는 매년 늘어나는 국가부채를 부담스러워 한다. 이렇게 늘어난 빚은 누가 갚을 것인가? 향후 계속되는 적자 국채발행은 향후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될 잠재적인 빚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선심성 퍼주기가 마냥 환영할 일만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은 4인가구 기준 최대 100만 원의 지원금을 주는 대신 돈 많은 사람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며 주었다. 재난지원금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액공제를 해주는 특별법까지 만들면서, 빚 낸 돈을 무차별 살포한다는 비판을 면하려는 황당무계한 ‘기부 운동’을 벌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재정정책은 끝없는 ‘땜빵식’, ‘돌려막기식’으로 이어져 혼란을 부른다. 돈이 ‘빚’이 되면 어떻게 될까. ‘빚 진게 죄인’이라는 말이 있다. ‘죄인’ 되고, 자유함을 잃고 매이는 ‘노예’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빚의 대물림은 불행이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안겨주고 있다. 이 기회에 ‘포퓰리즘 정치’에 맛을 들인 그리스 ‘국가부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아르헨티나도 부도국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대한민국, 후손들에게 ‘빚’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글쓴이: 이효상 원장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한국교회건강연구원)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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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6
  • 엄상익 칼럼 - 기독교당
    이천십구 년 말 어둠이 내린 저녁 집회가 열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갔었다.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거리에 꽉 차 있었다. 연단 위에서 목사가 설교를 하고 찬송이 거리에 흘러넘쳤다. 그 사람들이 기독교당을 만들었다. 그들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오십 년 전 중학을 다닐 때였다. 대통령을 죽이겠다고 온 무장공비가 서울 거리를 휘젓고 북한군이 얼어붙은 임진강 위로 탱크를 몰고 내려올 것이라는 공포가 우리들을 얼어붙게 했다. 그런 속에서도 선생님은 꿈을 심어주었다. 앞으로 마이카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살아 보세’라는 깃발을 들고 모세같이 국민들을 이끌었다. 광부와 간호사가 독일로 가서 노동을 팔고 군인들이 월남에 가서 피를 팔았다. 간호사로 간 친척 이모는 병자들의 똥을 닦아주다가 얻어맞고 병자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우리 또래의 시골 소녀들이 청계천 봉제 공장에서 노예같이 일했다. 우리들은 모두 거대한 기계 안의 작은 톱니바퀴가 되어 메마른 소리를 내며 앞으로 진군했다. 그런 우리들이 세월의 강을 흘러 어느새 노년의 언덕에 도달했다.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세상이 됐다. 사람들은 명품을 걸치고 세계 곳곳으로 관광을 가기 시작했다. 턱없이 교만한 한국인들이 생겼다. 돈을 벌면 인간 품질이 상승 된 것으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소련이 무너진 후 얼마 안 되어 시베리아를 철도로 횡단할 때였다. 빛바랜 머플러에 낡은 코트를 입고 상점 앞에 줄지어 있는 러시아 여성들은 가난하고 불쌍해 보였다. 시골의 자그마한 박물관 입구를 지키던 한 러시아 여자로부터 우연히 이런 말을 들었었다. “우리는 한 달에 백 불 정도 가지고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암시장에 나가면 문학 서적들이 산 같이 쌓여 있어요. 문화 공연도 거의 돈을 안 내고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달러를 얼마나 가졌느냐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러시아는 가난해도 뿌리 깊은 문화가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나의 가슴에 강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태리를 여행하다가 카프리 섬의 선착장에서 한 이태리인으로부터 비아냥 비슷한 이런 소리를 들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을 보면 주머니는 꽉 차 있는데 머릿속은 뭐가 들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시큰둥하게 내뱉은 말이지만 의미를 던져주는 말이었다. 일본의 작가 야마자키 도요코는 경제번영과 함께 양심을 잃어가는 일본의 정신적 불모를 주제로 ‘불모지대’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잘살아 보자고 했는데 정신적 빈곤은 아직도 그대로인 것 같다. 광장에서 생긴 기독당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예수는 빵 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국가도 경제만으로 존재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종종 정치인들을 만나면 “당신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까?”라고 물어본다. 그들의 정치철학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연다고 했다. 신선한 구호였다. 그러나 그는 보통사람이 아닌 귀족 같았다. 그가 주장하는 구호는 숙성되지 않은 공허한 관념 같은 느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다. 가난과 차별을 경험한 속에서 숙성된 정치철학이라고 공감했다. 그러나 그는 기득권층의 두꺼운 벽을 깨지 못하고 자신이 부서져 버렸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나오는 연설문에서는 피부에 와 닿는 간절한 염원을 느끼지 못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문재인 변호사와 둘이서만 봤을 때 당신은 어떤 나라를 만들어 보고 싶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기독교당의 이념적 지향은 무엇일까. 예수는 정치세력을 조직해 당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가난한 자들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았다. 강대국 로마에 대해 유대의 주체성과 독립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개인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했다.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임은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정신적 불모지대에 불과하다. 사회가 개량되고 국가가 성숙하려면 먼저 개개인의 영혼이 변화되는 게 맞다. 기독교당이 정치판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소금 같은 그 본질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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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3
  • 배재군 칼럼 - 미래 통합당(보수 정당)의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모 일간지 칼럼니스트는 총선의 결과에 대해 "민주당이 나라를 망쳤는데도 180석이면 이 나라의 미래는 절망이다. 이제 국민은 경제와 안보, 자유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진 상태에서 살게 됐다"라고 했습니다. 보수 정당의 패인이 무엇일까요? 여론은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고 보수 골통 꼰대 짓만 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세상 바뀐 줄 모르고 과거에 안주하거나 각자의 환상 속에 빠져 꼰대 짓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목회자(목회자 집단)의 의식은 어떠한가요? 신앙의 본질, 신앙의 형태는 보수 골통을 사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틀, 신앙의 양식마저 변질되지는 않았습니까? 복음의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적용에 있어선 ‘네모난 그릇에 담을 수도, 둥근 그릇에 담을 수도 있듯이’란 예를 들어가면서 ..., (경계해야 할 상황윤리에 맞추어 가면서) 목회자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그러진 군상들을 보세요. 그 모든 것을 담기에는 지면이 부족하고 부끄럽기가 그지없습니다. 만일 교회 존재 가치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존재의 찬성, 아니면 반대일까요?, 한번 생각해 볼까요? 개인적으로 그 결과를 생각하면 신경계통에 오싹하는 전율의 흐름(무서움)을 느낍니다. 맘모스, 초대형, 대형이란 틀 안에서 자신을 우상화하는 유혹, 큰 인물인 듯하는 유혹, 반대로 그렇지 못한데 대한 자괴감, 자존감의 상실 또한 경계해야 할 일들이 아닐까요? 개혁자들이 부르짖었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외침은 지금에도 외쳐야 할 소리, 귀 기울어야 할 소리인 듯합니다. 2020-04-18대한예수교장로회 동원교회 배재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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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8
  • 엄상익 칼럼 - 고약한 심성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한 종편방송에 출연했었다. 방송은 무자비하게 한 인물을 몰아붙이면서 여론의 격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모든 원인이 유병언과 그가 이끄는 종교단체에 있는 것처럼 매도하는 마녀사냥이었다. 그 자리에 있다는 게 후회됐다. 나는 방송 프로그램의 소품에 불과했다. 그 격랑의 종착지는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사건에 걸려 침몰했다. 우리에게는 닥쳐온 불행을 지도자 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는 디엔에이가 있는지도 모른다. 광우병 파동 때였다. 허위선동에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미쳐 날뛰었다. 먼저 소고기 협상대표의 인형이 화형을 당했다. 거기서도 증오의 종착지는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으로 도망가 붉은 촛불의 물결을 보고 겁을 먹었다. 이명박 대통령도 결국 허위 앞에 꺾여 버렸다. 코로나19의 사태가 사회를 재난영화의 한 장면같이 만들고 한국인은 세계가 꺼리는 별종의 인간이 되어 버렸다. 군중의 분노가 그 대상을 찾기 시작하고 겁먹은 정치권은 환자가 발생한 특정 종교단체로 손가락을 향했다. 법무장관이 수사명령을 내리고 서울시장은 그 종교단체와 간부들을 살인죄로 고발했다. 겁에 질려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늙은 교주의 얼굴에서 세월호 사건 때 마녀재판의 대상이 됐던 구원파 유병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아마도 그다음 분노의 파도가 부딪칠 곳은 문재인 대통령일 것이다. 완벽한 것은 없다. 정부의 대처가 미흡하고 총선을 앞두고 정치가 앞설 수도 있다. 대통령이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을 말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코로나19 사태보다 더 독한 국민들에게 퍼져있는 정신적 역병을 보고 있다. 모든 문제가 생기면 즉각 정치로 변하고 사람들은 흥분해서 속죄양을 찾아 거리로 나선다. 누군가 잡아 감옥에 처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다. 대통령의 추락에서 사람들은 묘한 쾌감을 느낀다. 국민들의 심성 자체가 고약한 나라가 됐다.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던 대한민국은 실종됐다. 거리정치가 민주주의를 망치는 독이 되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해타산을 따져서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사람들은 편을 갈라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종주먹을 내뻗으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이념이나 관념적인 구호만 넘치고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려는 귀는 막혀있다. 거리정치로 법은 뒷전이다. 그게 삼십여 년 변호사를 해 온 내가 요즈음 느끼는 사법부다. 전 정권의 핵심들을 잡아넣기 위해 대법관은 국정원장들을 회계 담당 직원으로 보았다. 평생 법의 밥을 먹고 살았지만 나는 그런 법 해석을 이해하지 못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뇌물죄도 의심한다. 그런 성품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범죄는 내면의 고의가 반은 차지하는데 무리하게 몰아치는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도자의 피를 보고 싶어하는 군중 앞에 놓일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와 울산시장의 부정선거가 날을 세우고 있다. 미국의 총기 난동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오바마 대통령은 현장에 가서 연설하지 않고 ‘어메이징 그레이스’란 찬송가를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감동이 물결치고 용서하고 화합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됐다. 리더십이란 국민들의 아픔에 진실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진정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엄마의 마음이었을까. 이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엄마를 부르며 물속에 잠기는 순간 이미 그것은 온 국민을 흐느끼게 하는 정치였다. 고지식한 대통령은 사람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순간을 놓쳤던 게 아닐까.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적 계산보다 진실 앞에서 당당해야 했다. 세계가 서로 물건을 사고팔면서 사는 세상이다. 우리가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팔면 소고기를 사주어야 하는 게 국제무역의 원칙이다. 정치 논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건 그의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은 인기에 영합하기보다 정공법을 택해야 한다. 국민에게 끌려가지 말고 국민을 끌고 가야 한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증오보다 사랑의 마음이 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했으면 좋겠다. 개개인의 영혼이 먼저 변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가 그리고 국가가 달라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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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9
  • 김종희 칼럼 - 0천노회. 0동교회 화목을 위한 제언
    총회 화해중재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0천노회와 0동교회가 화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양측의 합의서는 곧 공개되겠지만 우선 0천노회와 0동교회의 화목을 위하여 양측이 협조해 주셨으면 하는 긴급한 몇 가지 제언을 드립니다. Ⅰ. 0천노회는 0동교회에 원만한 당회장을 파송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① 원만한 당회장이란 해 교회 당회원과 협의하여 행정을 처리할 수 있는 당회장을 말합니다. 해 교회 당회원과 마찰을 빚을 경우 교회는 또다시 분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해 교회 당회가 비토하는 당회장을 노회가 밀어 부쳐서는 안됩니다. ② 당회장은 노회가 파송하는가, 당회가 청하는가에 있어서 정치 제9조 제4항에 “당회장은 목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교회에서든지 목사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가 당회장 될 사람을 파송할 것이요. 노회의 파송이 없는 경우에는 그 당회가 회집할 때마다 임시 당회장 될 목사를 청할 수 있으나 부득이한 경우에는 당회장 될 목사가 없을지라도 재판 사건과 중대 사건 외에는 당회가 사무를 처리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③ 얼핏 보면 상기 조항은 노회가 당회장을 파송하지 않는 경우에 한하여 당회가 청원할 수 있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노회가 당회장을 파송할 수 있는 권한과 당회가 당회장을 청할 수 있는 권한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의 원리가 한쪽으로 쏠려 균형을 잃으면 안됩니다. 노회가 파송할 권한과 당회가 청할 권한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당회가 임시당회장을 청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은 노회가 당회장 배정의 권한을 이용하여 지교회를 어렵게 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④ 정치문답조례 제205문에 보면 “교회에 담임목사가 없으면 누가 당회장이 되느냐?” 답은 “노회가 임명하거나 독특한 경우에는 당회가 회장 될 목사를 청할 것이요. 혹은 목사를 청하기가 아주 어려운 경우에는 그 당회 장로 중 1인을 당일 임시회장으로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독특한 경우란 ‘교회가 분쟁 중에 있어 노회가 당회장 배정 권한을 무리하게 행사하므로 지교회의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가 포함된다고 봅니다. 바람직한 것은 노회는 지교회를 돕기 위하여 당회와 잘 협의하여 당회장을 배정하면 좋을 것입니다. Ⅱ. 0동교회는 예배가 잘 드려지도록 협력에 주시기 바랍니다. ① 예배모범 제2장 2항에 “예배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엄숙한 태도와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목사가 낭독하거나 인증하는 성경 밖에 다른 것을 읽지 말 것이다. 합당치 못한 모든 행동을 일체 하지 말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방해하는 일체의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소란을 피우거나 설교를 방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② 합의서에 따르면 “0동교회 공적인 예배의 정상화를 위하여 설교자와 성도들에게 폭언이나 폭행을 가하거나 소란을 피우며 예배를 방해하는 자(동영상 자료 증거)를 적발 시 교인의 권리가 3년간 자동 정지됨을 지도한다.(당회,공동의회.제직회원권이 정지됨)”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합의안에 저촉을 받는 행위를 하여 교인의 권리를 상실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목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서리집사를 포함 모든 교인이 해당됩니다. Ⅲ. 0동교회 목사 청빙은 화해중재위원회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① 합의서에 따르면 “0동교회 문제 해결의 가장 핵심이 되는 위임목사 청빙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청빙위원회를 구성한다. 총회 측 3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며, 화해중재위원회가 지도하여 임시당회장으로 하여금 공동의회를 다시 개최하도록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②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동안 위임목사 청빙과정에서 양측의 견해 차이로 분쟁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화해중재위원회에서 지도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자체적으로 분쟁이 해결될 실마리가 없을 경우 관선이사가 파송되어 일을 처리하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목사를 청빙하는 권한은 해교회의 권한이므로 이 부분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측이 합의하는 목사를 모시도록 돕는 목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0천노회와 0동교회는 목사 칭빙문제를 가지고 대립하는 일이 없도록 양측이 자숙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③ 위임목사 청빙을 제외한 모든 행정은 0천노회가 파송하는 당회장과 0동교회 당회원이 협의하여 진행할 수 있으되 제103회 총회 결의에 따라 위임목사가 청빙되어 시무할 때까지 치리권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합의서 제5항) Ⅳ. 결론 0천노회와 0동교회는 화목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원만한 당회장을 파송해 주시고 거룩한 예배를 훼손시키는 행위를 삼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 청빙에 관하여는 자신들의 뜻을 내려놓고 기도하며 화해중재위원회의 지도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0천노회와 0동교회 위에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종희목사(총회 정치부장 역임.성민교회)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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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주연종 칼럼 - 교회는 사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기구이다
    교회는 사회주의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기구이다 “교회는 본질로 볼 때 사회주의 속에서 사회주의 사회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기구이다. 교회는 더 이상 성장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와 그 발전을 위해서 불필요한 존재이다.” 1983년 동독의 한 간부가 발표한 논문의 핵심 주제였습니다. 1949년 독일 인구의 9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단 이듬해인 1950년부터 동독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이 중단되고, 교회 관련 시설의 신축이나 증축이 불허되고, 교회의 기독교 교리반에 소속되어 신앙교육을 받으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계속되었지요. 반 기독교 정책이 펼쳐지면서 통일 이후 동독의 기독교 인구는 1/3로 줄어 인구의 30%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서독은 85% 정도로 큰 변화가 없었던 것에 반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연령대가 청소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사회주의 국가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 교회교육을 금지하는 대신 성인식을 통해 국가의 소유로 확정해 나갔습니다. 믿음의 세대 계승이 불가능했습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독의 교회들은 기도와 행진으로 엄청난 기여를 하였지요. 결국 그 당 간부의 논문대로 ‘교회는 사회주의와 일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 전 여당의 대표인 이인영 의원이 “이번 총선이 끝나면 우리 사회의 패권을 교체하겠다.”라고 했습니다. “편향된 종교인과 지식인도 교체하겠다.”라고 했습니다. 경자유전(耕者有田) 및 토지공개념 도입 등도 주장했지요. 편향된 지식인과 종교인을 어떻게 감별할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알 사람은 다 압니다. 더 나아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다 압니다. 결국엔 체제를 바꾸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요. 이에 대해 “사회주의 개헌을 하겠다는 거냐”, “국민의 사유 재산을 탈취하겠다는 거냐”라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체제를 바꾸고야 말겠다는 마각(馬脚)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한 발 앞에 다가온 느낌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가치는 자유, 생명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자유란 무엇보다 의견을 달리할 자유”(로사 룩셈부르그)라고 했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전체의 결정을 우선하는 사회주의와 교회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동독이 무너진 후 동독교회가 “사회주의는 오류 그 자체이다”라고 선언했던 것을 참고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코로나19가 창궐하자 그 책임을 교회에 돌리려 예배를 통제하고 교회를 가치 절하시키려는 여러 정치 행위를 보면서 이들이 지향하는 방향이 사회주의가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아침입니다.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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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배제군 칼럼 - 정부와 모든 이들에게 고함
    2007년 12월 7일 서해안 앞바다 유조선 침몰로 서해안 해안가 오염 사건; 추운 겨울 사고현장에서 기름떼를 벗겨내며 봉사한 곳이 어디인가? 한국교회가 이 일에 동참하여 오늘의 서해안 바다를 다시 살리는 일에 크게 일조한 일을 기억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정부는 어느 나라처럼 “교회는 국가적 위기 상황을 위해 모여 기도하는 일에 힘써 주시기 요망합니다.”라는 청원을 할 수 없는가? “기독교인은 중국발 우한 폐렴이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당신들이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열심으로 기도하시오.”라고 부탁하는 멋진 대한민국 정부 및 관료들이 될 수는 없겠는가? 세계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중국발 우한 폐렴, 어찌 사람의 힘으로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신의 힘, 살아계신 하나님의 치유와 회복의 긍휼을 구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동원교회 담임목사 배재군 202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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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4
  • 이효상 칼럼 - 4월 총선, 유권자가 세상 바꿀 수 있나
    시인이 말했듯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우한코로나 사태로 국가적 재난 가운데 빠져 있다. 국가적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경제는 기력을 잃고 바닥을 친지 오래고 맨땅에 헤딩하고 있으며, 안보는 불안, 외교는 왕따이다. 거기에 방역실패, 마스크 대란을 보면 고민된다. 국민 대다수가 마스크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약국 순례'를 하며 거리를 헤매고 있다. 대구의 눈물과 부부가 코로나에 걸려 남편이 사망했지만 장례를 치루지 못한 아내의 참담함,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살 수 없는 나라, 이런 정치 리더십으로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국민들은 일상이 뒤틀리고 경제적 피해가 불어나는 고통의 터널에 갇혔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큰 고통이다. 집권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투쟁의 3류 정치, ‘정의’니 ‘공정’이니 ‘자유’니 하는 말은 이미 오래전 언어의 유희가 되었다. 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고민이 많아진다. 배신과 협잡의 정치판을 보며 꼭 찍어야 하는 정당도, 꼭 찍고 싶은 후보자도 찾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4월 총선은 21대 입법부를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선거다. 한 표로 4년 뒤 국가의 미래가 새롭게 바뀔 수도 있고 반대로 뒤쳐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번 총선의 선택기준은 분명 ‘코로나 리더십’으로, 재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과 반드시 물갈이나 불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무서운 줄 모르는 정치에 찌든 직업적 정치인들을 가능하다면 퇴출시켜야 한다. 코메디 같은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 선거 때면 나타나 명함 돌리는 선거꾼이나 말 잘하는 아나운서, 목소리 큰 사람 뽑는 선거가 아니다. 총선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의 대변자를 뽑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치꾼’이 아닌 주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으로 바꿔야 한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온 몸을 던지며 대구로 달려가 의료봉사를 한 어느 정치인을 보며 감동한 바 있다. 그와 같이 생명을 살리려 한 몸을 던져 헌신한 의료진의 봉사와 보건당국의 역할을 기억한다. 그들은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들의 헌신으로 겨우 버티는 국가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기득권을 누리며 권력의 맛에 찌든 정치인들의 탁상공론도 지켜보았다. 구태 정치인들의 직권남용, 국가 재난 앞에서 편가르기 패싸움 정치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지 일깨워 주었다. ‘코로나 민심’ 앞에서 정당의 정책도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투표 전 후보자의 인물, 공약, 삶의 과정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한 표를 행사 할 작정이지만 가상현실 같은 상황이다. 매번 선거에서 공약이나 정책을 보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것 같고 지역이 천지가 개벽할 것 같아서 귀가 번쩍이고 마음이 설레이지만 선거가 끝나면 금새 아무 일 없었듯이 빈 공(空)약이 될 것이다. 각 정당의 공천은 그들만의 리그인가. 공천관리위원회가 후보자를 최소한 걸러냈다고 하지만, 지역유권자와의 소통이나 공감 없는 공천이다. 여론조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최종선택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과 병역, 사생활, 막말 등도 검증하고 선택해야겠지만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경제위기 극복 대안 제시 능력을 더 높이 주목하고 싶다. 후보자들이 마스크 사기 위하여 줄 서 본 적이 있는가. 한국교회나 ‘한국교회유권자연합’이 공명선거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지도하는 제 기능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특정 정당 지지는 곤란하다. 훌륭한 인물이 선출되길 바라는 기도,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점으로 정치보기,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 설교, 또 하나님보다 정치인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마음 지키기, 가짜뉴스 생산하거나 유포하는 행위 자제,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과 후보자나 당선인의 공약 실천 유무 파악하기 등은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비례후보자들도 주목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언론이나 신앙의 자유까지 제한되는 상황에서, ‘예배 중단’이나 ‘교회 폐쇄’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 같은 오만한 후보나 정치권에 줄서기보다는 해당 후보의 정책과 가치관을 검증하고 선택하도록 지역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쏟아내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 찬성, 반대하는 발언이 선거에선 경계의 대상이다. "우파 지도자가 당선돼야"라고 설교한 목사 12명이 고발당한 바 있다. 매주 칼럼에 독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메일이나 SNS 문자로, 온.오프라인 신문 지면에서 칼럼을 읽는 이가 많을 땐 25만 명을 넘어서다 보니 반응이 즉각 적이다. 더 신중해지고 어느 교수처럼 ‘민주당 빼고’ 식의 정치적 칼럼을 쓰지는 못한다. 사실 4월 투표도 잔인하다. 전염병의 한복판에서 치러진다. 전혀 소통없는 선거, 후보가 누구인지, 투표소를 가야 할지, 줄서기도 부담스럽고 투표소 안에 들어가기도 꺼림직하다. 투표율이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 투표율이 낮으면 표의 왜곡 현상이 생긴다.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대면접촉이 없는 선거를 치루니 선거가 사이버 게임같이 가상현실이 된다. 오랜 정치 생활을 하였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 당연히 당선된다고 착각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투표 독려로 투표율을 높여야겠지만, 코로나 위험으로부터 유권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도 제시해야 한다. 투표소의 방역이나 소독과 더불어 현장 투표자 전원에게 마스크를 지급하거나, 투표소를 최대한 늘려 분산시키는 방법도 고려돼야 한다. 가능하다면 교회가 주민들의 투표소로 제공되었으면 한다. 코로나로 느끼는 지금의 참담한 현실과 공포를 잊지 말자.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교회, 교회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면 유권자로서 바꿔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투표’로 바꾸는 시스템이다. 한 표가 얼마나 엄중한지,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투표’뿐이다. 사실 단 한 표 차이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사례는 많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결정짓는 것은 ‘투표참여’가 답이다. 지금 이대론 더 이상 안 된다. (사회구조적 모순 앞에) 침묵하지 말고 외쳐라. 분노하라. 저항하라.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참여하라. 그 어느 때 보다 한 표가 절실하고 중요하다. 표류하는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구할 것인가. 코로나 위기 가운데서도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임해야 하는 이유다. 한 표가 미래를 결정짓고 세상을 바꾼다. 글쓴이: 이효상 (칼럼리스트/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근대문화진흥 원장/ 한국교회유권자연합 기획위원장)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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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김종희 칼럼 - 정기노회 연기와 총대 파송 문제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정기노회를 연기하는 노회들이 있다. 법리적으로 노회를 연기하는 것과 또한 노회를 연기하여 선출한 총대의 자격에는 하자가 없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정기노회 연기하여 소집할 수 있다. 각 노회마다 정기노회를 소집하는 날짜가 노회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금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노회를 연기하려면 노회 규칙을 잠정하고 연기를 하는데 노회원이 동의(同意)하면 가능하다. 노회가 만든 규칙이기에 노회가 잠정할 수 있다. Ⅱ. 정기노회를 연기하여도 총대 파송에 하자가 없다. ① 헌법정치 제22장 제1조 총회 총대자격 1항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 노회에서 선택할 것인데 총회 개회 6개월 이상을 격하여 택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6개월을 격하여 택하지 못한다는 것는 총회 개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회를 연기할 때 6개월을 벗어나면 문제가 되지만 6개월 이내가 되므로 하자가 없다. ② 오히려 6개월 전에 총대를 선택하여 놓거나 영구총대를 정해 놓는 것은 위법이다. Ⅲ. 정기노회 연기시한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① 헌법 정치 제12장 제2조 총회의 조직에 있어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로서 조직하되 목사와 장로는 그 수를 서로 같게 하고 총대는 각 노회 지방의 매 7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 파송하되 노회가 투표 선거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送達)하고 차점 순(順)으로 부총대 몇 사람을 정해둔다.”라고 되어 있다. ② 그러므로 총회 개회 2개월 전에는 총대 보고를 총회 서기에게 송달해야 한다. 총회규칙 제7장 제22조 “총회는 매년 9월 3차 주일 후 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올해 총회는 9월 21일(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해야 한다. 그러면 총대 보고를 7월 21일 전에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노회를 열어 총대를 선출해야 한다. ③ 그러나 총회 임원이나 선출직 출마자가 있는 경우는 노회를 더 빨리 열어야 한다.(총회 선거규정 제13조 1의 4) “총회 임원 입후보자는 소속교회 당회의 추천을 받아 당해 연도 7월 임시노회에서 본인이 참석하여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마시한이 총회선거규정 제4장 제16조에 의하면 “총회임원은 7월 둘째 주일 후 월요일 오후 9시부터 둘째 주 금요일 17시까지 등록한다.”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 기관장은 7월 셋째 주일 후 월요일 9시부터 셋째 주 금요일 17시까지 등록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7월 임시노회를 열어 출마자를 추천하려면 정기노회는 6월 중으로는 해야 할 것 같다. 올해와 같은 특별한 경우는 정기노회가 늦어지는 만큼 혹 7월 초순에 정기노회가 열린다면 별도의 임시노회를 열지 않고 정기노회에서 출마자들이 추천을 받을 수 있도록 총회 임원회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본다. Ⅳ. 총대 파송에 사문화된 법을 급히 적용할 수 없다. ① 본 교단 총회 안에는 3월에 정기노회를 개최하는 노회들이 있다. 3월 21일 전에 개최되는 노회는 총회 개회 6개월을 격하여 총대를 선출하는 것이 되기에 법에 맞지 않다. 금번에 코로나19 사태로 노회 연기를 검토하며 총대 파송에 문제가 없나 살펴보다가 오히려 3월 노회에서 6개월을 격하여 택하는 것이 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② 그러나 이 법은 이미 사문화 되어 지금까지 3월 정기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를 그대로 인정하여 왔다. 계속 그대로 인정하든지 이번 기회에 이 법을 살리기 원한다면 제105회 총회에서 3월 노회를 모두 4월 노회로 변경하여 모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권리와 의무 등과 관련이 있는 법을 제정, 개정, 폐지할 경우는 입법예고가 필요하며 이미 사문화 된 법을 부활하여 시행하고자 할 때도 계도 기간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③ 예로 경비업법 제7조 “경비업자는 허가받은 경비업무 외의 업무에 경비원을 종사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 제15조 “누구든지 경비원으로 하여금 경비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를 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경비원에게 재활용 쓰레기장 관리, 불법 주차 단속, 택배수령 업무 및 기타 잡무를 고유 업무로 맡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미 정착된 지 오래다. 지금 당장 법대로 어기고 있는 경비업체나 경비원을 처벌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경찰청이 5월까지 계도 기간을 두고 6월 단속을 예고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이미 사문화되어 있는 법을 갑자기 살려 시행하므로 불이익을 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④ 정치문답조례 제635문에 보면 ‘총회가 개회하기 7개월 이전에는 총대를 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7개월까지 기한을 주고 있다. 물론 헌법이 우선이기에 이 조례를 따를 수는 없지만 3월 노회를 하여 총대를 선출한 노회도 7개월을 넘지는 않으므로 참조해 줄 수는 있다 Ⅴ. 결론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노회 연기 개최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노회를 연기하여 총대를 선출하고 파송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 다만 늦어도 7월 초순까지는 정기노회를 열어야 한다. 선출직에 출마자가 있는 노회는 6월 중에는 정기노회가 열리고 7월에 임시노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금번에 총대선출 6개월을 격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3월 노회를 여는 노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해 나온 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사문화된 법을 살리려면 계도 기간을 주고 총회에서 짚은 다음에 법대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봄 정기노회를 연기하여 여는 만큼 가을 노회와의 간격이 6개월이 안 됨으로 6개월 법리에 어긋나는 사안이 발생할 수 있지만 노회에서 유연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도록 다 함께 기도해야 한다. 김종희 목사(정치부장역임. 성민교회)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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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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