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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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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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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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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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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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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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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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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7 - 황금입
    Johnchrysostom 황금입 세상이 변했다. 여당은 죽상이 되고 야당은 밥상이 되고 여든 가까이 먹은 부자가 만든 당은 생각보다 큰 시루떡을 쥔 아이가 됐다. 이제 마음들은 너나없이 봄기운을 따라 두둥실 떠 있다. 첩보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우편 배달부 노릇도 제대로 못한 안기부 직원들은 이제 본격적인 수사를 받을 모양이다. 그들이 아무리 모르쇠로 버텨도 알 건 다 아는 세상 사람들은 수사가 어찌 되든 별 관심을 보이질 않을 것이다. 제롬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경을 번역하고 글을 쓰는 가운데 그는 마음의 평화와 보람을 맛보았다. 남자는 형제로 생각하게 되었고 여자는 이성이 아니라 자매로 보였다. 위대한 수도사가 또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크리소스톰이다. 이 이름의 뜻은 황금입이다. 워낙 그의 설교가 출중했기 때문에 나중에 그렇게 불리우게 된 것이었다. 그는 비쩍 마르고 삭개오처럼 키가 작았다. 얼굴은 창백하고 링컨처럼 볼은 우묵했다. 이마는 온통 찌글짜글한 주름투성이에다 머리는 엘리사처럼 대머리였다. 턱에는 꼬깃꼬깃한 회색 수염이 성기게 붙어 있었고 움푹한 눈은 형형한 빛을 발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거미에 견주었다. 그는 3백 47년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안디옥 산등성이에서 수도를 닦는 형제들에 합류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에 비견되기도 하는 그의 어머니 아나투사는 손사래를 치며 아들을 말렸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들을 타일렀다. “애야 네 아버지께서 네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잖니. 널 키우기가 얼마나 힘겨웠는지 너는 아마 모를 게다. 사업이니 세금이니 하는 걸 내가 알 턱이 있겠니. 게다가 하인들은 얼마나 망나니들인지 내 속이 다 썩었을 게다. 친척들은 눈이 벌개가지고 내 돈만을 울궈내려고 아우성들이었지.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널 위해 참고 헤쳐 왔다. 나는 이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난 널 불행하게 만들고 싶은 생각일랑 눈꼽만치도 없다. 그러니 이 못난 에미 소원이 나 죽을 때까지만 나와 함께 있어다오. 그 뒤에 네가 무엇을 하든 네 마음대로 하려므나”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부탁을 따라 집에 눌러 앉았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자 크리소스톰은 지체없이 수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그는 보다 훌륭한 삶이 세상에서 복닥거리며 사는 사람들을 돕는 감독의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감독의 생활은 수도사의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감독은 양떼를 가르쳐야 한다. 그는 나그네도 보살펴야 했다. 그는 여성들도 돌보아 주어야 하고 게으름 피울 때 꾸짖기도 해야 하고 어려울 때 다독거려 주어야 한다. 그는 남자들 가운데 사는 한 남자이기도 해야 한다. 교인들의 싸움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아리우스 주의자들과 논박을 벌여야 한다. 감독은 마차경주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다. 또한 감독은 가치 있는 사람에게 성만찬을 베풀고 가치 없는 사람에게는 성찬을 못 받게 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은 쓰잘데 없는 일에 눈을 돌릴 수 없는 목자의 업무였다. 20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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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1-30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구 계명 거짓말
    The Feast of Absalom, Niccolo Tomioli, 17th century Lesson XXI 제구 계명 거짓말 Ninth Commandment Lie 사상 최대의 거짓 인생을 산 사람의 하나가 미국의 페르디난드 왈도 테마라(1921~1982)였습니다. 그는 타인 이름을 훔쳐 신학자, 심리학자, 철학박사, 교도관, 교사, 그리고 의사로서 행세하며 일생을 사기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로 행세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의관으로 세운 공로로 캐나다의 국민 영웅으로까지 칭송을 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악당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1941년 12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터라 그는 이름을 바꿔 프레드 W. 테마라라는 이름으로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테마라는 승선 근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무 학교의 훈련생으로 지원했습니다. 훈련 뒤 그는 버지니아의 노퍽 인근의 해군대대에 위생병으로 배속됐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공식 서류들을 잔뜩 훔쳤습니다. 그는 아이오아 주립대학교의 졸업 앨범에서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꾸미고 사진을 붙여서 해군 의무장교 복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복무 결정서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테마라는 위조 신분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뒤 그는 스탠퍼드 출신 심리학 박사 로버트 린턴 프렌치를 입증하는 서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고향 로렌스로 돌아가서 교구의 신부 사무실에서 빈 서류더미를 훔쳤습니다. 테마라가 노퍽에 있는 해군부대로 돌아왔을 때 보안 조회가 끝나는 대로 장교로 임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보안 조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겁을 먹고 그 날 밤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메인의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물학자 C. B. 해먼으로 변신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의사 조셉 시르 박사의 모든 신상 정보를 훔쳐냈습니다. 테마라는 조셉 시르 박사라는 신분으로 캐나다 뉴브런즈윅의 세인트존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립 캐나다 해군의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이 되었습니다. 어떤 여자와 사랑에도 빠졌습니다. 그는 군인 복무를 마친 뒤 결혼해서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에서 개업하고 정착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달콤한 생활에 젖어있던 그에게 구축함 카유가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테마라를 태운 구축함은 한국을 향해 유유히 출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부두에서 눈물에 젖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군의관 테마라는 감기나 배탈 같은 가벼운 질병만 치료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상당한 한국군 세 명을 태운 배가 카유가 호에 다가왔습니다. 중상을 입은 이 세 명을 테마라가 치료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심장 부근에 총알까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외과 수술 경험은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군의관 테마라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한국군 병사는 며칠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다른 한국군 두 명도 적절한 치료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테마라 자신도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기적이 그에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캐나다 해군의 홍보 담당자는 이 소식을 캐나다 신문에 자세하게 게재하였습니다. 함장은 그에게 표창을 주기 위해 해군본부에 그의 이름을 상신했습니다. 이 와중에 진짜 조셉 시르 박사가 신문을 보고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테마라의 의사 행세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정착을 하려던 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랑하던 여자도 눈물 자국 없는 메마른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떠났습니다. 데마라는 캐나다로 송환되어 파면되고 국외 추방명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담을 잡지사 라이프에 팔아 많은 돈을 번 다음 유랑하던 그는 마침 텍사스주의 휴스톤에서 교도소 직원 모집 광고를 보자 응모했다. 벤 W.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기가 전에 썼던 수많은 이름으로 신원보증을 섰습니다. 교도관으로서의 그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수감자를 위해 쓰기공부반을 만들고 체육의 날을 만들자는 그의 구상이 텍사스주 교도행정국장 엘리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흉악범을 수용한 헌츠빌 교도소의 개혁안을 맡기까지 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이 잡지에 실리자 어느 수감자가 그가 가짜임을 알아냈습니다. 결국 그는 교도소를 떠났습니다. 그를 고용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엘리스 교도소 행정국장도 그가 진짜 증빙서류만 갖추고 돌아온다면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교도관으로 일한 사람 가운데 최고였다는 거였습니다. 테마라처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어째서 정식 자격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런 질문을 받자 “순전히 악당 근성 때문이지”라고 쾌활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기 이름으로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 있는 한 병원에서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테마라의 이 마지막 직업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습니다. 그는 61세 때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저서 『거짓말의 전략』에서 거짓말 방법의 원칙은 ‘모호함을 피하라’는 것이고 거짓말로 생긴 관계의 원칙은 ‘적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침대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남으로써 시작하고, 30분 뒤에 사람들은 우리를 침대에 다시 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침대로 돌아갑니다. 피곤하거나 매우 슬플 때 우리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다 어느 멋진 날 우리는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숨과 산책, 달콤한 말들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친척들이 개입하고, 급기야 옷들, 속옷들, 가구들, 주방용품들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수의를을 입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 위에 누운 채 우리는 그 총체적인 혼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감정들을 전혀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미소를 띨 것입니다. 거짓말로 형제 왕자들을 잔치에 초청해 죽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바로 그 미소를 갖고 태마라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람들을 속였고 또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심장발작으로 죽을 때 그는 진짜 목사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구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THY NEIGHBOUR 47.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since God, who is truth, abhors falsehood, we must cultivate unfeigned truth towards each other.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we must not by calumnies and false accusations injure our neighbour's name, or by falsehood impair his fortunes; in fine, that we must not injure any one from petulance, or a love of evil-speaking. To this prohibition corresponds the command, that we must faithfully assist every one, as far as in us lies, in asserting the truth, for the maintenance of his good name and his estate. The Lord seems to have intended to explain the commandment in these words: “Thou shalt not raise a false report: put not thine hand with the wicked to be an unrighteous witness." "Keep thee far from a false matter”(Exod. 23:1, 7). In another passage, he not only prohibits that species of falsehood which consists in acting the part of tale-bearers among the people, but says, “Neither shalt thou stand against the blood of thy neighbour,"(Lev. 19:16). Both transgressions are distinctly prohibited. Indeed, there can be no doubt, that as in the previous commandment he prohibited cruelty unchastity, and avarice, so here he prohibits falsehood, which consists of the two parts to which we have adverted. By malignant or vicious detraction, we sin against our neighbour's good name: by lying, sometimes even by casting a slur upon him, we injure him in his estate.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you suppose that formal and judicial testimony is here intended, or the ordinary testimony which is given in private conversation. For we must always recur to the consideration, that for each kind of transgression one species is set forth by way of example, that to it the others may be referred, and that the species chiefly selected, is that in which the turpitude of the transgression is most apparent. It seems proper, however, to extend it more generally to calumny and sinister insinuations by which our neighbours are unjustly aggrieved. For falsehood in a court of justice is always accompanied with perjury. But against perjury, in so far as it profanes and violates the name of God, there is a sufficient provision in the third commandment. Hence the legitimate observance of this precept consists in employing the tongue in the maintenance of truth, so as to promote both the good name and the prosperity of our neighbour. The equity of this is perfectly clear. For if a good name is more precious than riches, a man, in being robbed of his good name, is no less injured than if he were robbed of his goods; while, in the latter case, false testimony is sometimes not less injurious than rapine committed by the han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47.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십니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십니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합니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거짓 맹세가 내포됩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 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항상 성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합니다(마 5:48).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 2:21).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십니다(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눅 18:27). 주님이 말씀해 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19 202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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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1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6 - 제롬
    St. Jerome in His Study (1480), by Domenico Ghirlandaio. 제 롬 훌쩍 길을 떠나 나그네가 되고 싶은 계절이다. 바람이 산들거려서도 그렇고 세상이 온통 선거 바람으로 흔들거려서도 그렇다. 허나 천로역정의 크리스천이 아닌 바에야 길 떠난들 세상을 벗어 날 수 있으랴 싶다. 진정 세상을 떠나지 않고서야 세상을 떠나는 게 녹녹하겠는가... 가정을 돌아보고 맡겨진 일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기꺼운 하나님의 일인지 모르겠다. 고골리의 소설 외투에 나오는 주인공 아까끼아까끼예비치가 자기일과 외투를 끔찍이 생각하는 만큼이나 가슴 버겁게 뿌듯하다. 한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은 훌쩍 떠나서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헌신을 깁는 신기료장수건 이 땅 저 땅 기웃거리는 부동산업자건 나름의 계기와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할진대 수도사가 된다든지 성직자가 된다든지 하는 일이 범상하게 결정되는 일은 아닐성싶다. 유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Eusebius Hieronymus)로 알려진 제롬(St. Jerome)은 지금은 유고슬라비아에 속한 스트리돈에서 347년에 난생처음 큰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모는 유복한 중산층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의 가정교육은 가히 모범적이었다. 그는 열두 살 나이에 가정교육에 힘입어 로마로 유학 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세계 최고의 도시인 로마에서 학문의 기초와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라틴문학과 학문으로 무장된 어엿한 학자가 된 제롬은 지하묘지인 카타콤에서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 종종 참석했다. 그러다가 로마에서의 학업이 갈무리 지어갈 무렵인 366년경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무 살 청년 때였다. 로마 생활을 청산한 제롬은 20년을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불혹의 나이 마흔이 돼서 인생은 뭔가하고 뭐 씹는 표정을 할 때 그는 수도원 운동에 깊이 매료됐다. 돌아다니고 돌아다닌 끝에 그는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영혼의 평화를 찾아 수도사보다 한 급수 윗길인 은수사가 되었다. 그의 경륜과 학식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이 있었지만, 그는 모래바람 이는 사막에다 거처를 정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정작 사막은 그의 생각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는 짐승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지만, 마음속은 로마를 활보하고 다녔다. 아리따운 여자들의 춤추는 선정적인 모습이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고자 하는 그의 뇌리를 휘젖고 다녔다. 미칠 지경이었다. 고개를 외로 틀어보기도 하고 절레절레 흔들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로마의 신나는 정경들이 모지락스럽게 들러붙었다. 심지어 돌로 가슴을 쳐 보았지만, 그의 생각에 또아리를 튼 망상들이 한시도 그를 놓치지 않고 괴롭혔다. 몇 년 동안 사막에서 부질없는 싸움을 엎치락덮치락 한 뒤에 사막 생활을 포기하고 속세로 돌아갔다. 이때 사자 한 마리가 그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고 한다. 그가 어디로 가든 사자는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Bernardino Pinturicchio - Saint Jerome in the Wilderness - Walters 371089 제롬은 뛰어난 학자였다. 그는 히브리어를 배워 구약성서를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고 신약성서 역시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옮겼다. 제롬이 번역한 성서를 벌게이트 성서나 불가타 라고도 한다. 불가타는 민중이라는 뜻이 있다.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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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1-1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5 - 녹옥과 주옥
    Luther vor Cajetan 녹옥과 주옥 어느 야당의 공동대표라는 사람이 연설하는 걸 들었다. 그런데 그는 정치 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고 어떻게 할 것이라는 시덥잖은 소리만 하품 나게 늘어놓았다. 요컨대 세상 정치인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는 코끝도 내비치지 않았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세상이 바로 될 것인지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그 정치인은 세상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나이 90줄을 접어든 목사님이 템플턴 상이라는 걸 받는 모양인데 그 상금이란 게 만만치가 않다. 신문 조각에 선뜻 내키지 않게 써갈겨 논 글로 보건대 종교 분야의 노벨상이니 어쩌니 한다. 아마 템플턴이라는 사람 돈푼이나 가지고 있어서 자기 이름 박힌 뭔가를 남기고 싶어서 만든 상인 모양이다. 옛날 좀 모자란 왕이라는 사람이 도루묵을 어떻게나 맛있게 먹었는지 그 기쁨에 왜장 가또오 가요마사에게 무릎 꿇고 절했던 곳이 있다. 이제는 공기 좋고 물 맑은 그곳에 기거하고 계신 그분은 개신교의 온갖 일에 관심을 표명하신다. 그분은 저서라고는 설교집 정도인데 글쎄 그게 게으른 목회자들의 복사기 기능을 가진 눈과 손의 대단한 애용품이 된 지 오래이다. 독재자의 마나님이 총 맞아 죽었을 때 까까중이 되뇌는 염불 비슷한 기도를 광장에서 읊조리는 것도 서슴치 않은 이런저런 공로들을 기려 종교의 노벨상이라 하는 걸 하늘나라 상급 대신 받게 된 모양이다.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통장 한 개 없다는 말이 구호인 그는 외출 시 기사 딸린 고급 승용차에 실려 전국 어디든 가고 남한산성에서도 사위 가족과 살 공간이 있고 은퇴한 그의 교회 안에도 하산 시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거처가 늘 정갈스럽게 간수되어 있다. 자기 이름의 집과 통장을 가진 사람도 얼마나 힘겹게 살아가야 되는지 모르는 세상인데 참으로 묘한 일이다. 세상이 어렵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수도사들은 너나없이 세상으로 돌아왔다. 기근으로 세상이 굶주릴 때 그들은 홀연히 세상으로 돌아와서 부자들을 설득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게 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행한 어느 수도사의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수도사는 아주 탐욕스러운 부유한 젊은 여인을 알았다. 그는 그녀에게 가서 진심이 담뿍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아주 헐값에 보석을 사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은 오백 냥만 주시면 아주 대깔 좋은 보석을 세트로 사드리겠습니다. 이런 기회는 흔치 않습니다.” 여인은 귀가 솔깃해서 어느 정신 나간 여인네들이 헌금한 보석을 처분하려나 하는 요량에 선뜻 돈을 내줬다. 그러나 그는 보석을 가져오지를 않았다. 여인이 따져 물었다. 수도사가 대답했다. “따라 오시죠. 보석을 보여드리리다. 보시고 맘에 안 드시면 돈을 환불해 드리리다.” 수도사는 여인을 어느 집으로 안내했다. “녹옥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옥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아무려면 어때요” 그는 먼저 나환자 병동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화들짝 놀란 그녀에게 말했다. “이 나환자들이 나의 녹옥들입니다.” 다음에 그는 불구자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 불구자들이 나의 주옥들입니다. 돈을 돌려드릴까요?” 여인은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대답했다. “아니에요. 값어치가 있네요.” 2021-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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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1-0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팔 계명 도적질
    Constant Wauters, The Caught Thief Servant Lesson XX제팔 계명 도적질Eighth Commandment Robbery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비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은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발성기관 생리학을 연구하고 농아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876년 2월 14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서 3주 뒤 특허를 받았습니다. 독일의 물리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가 1861년에 고안한 전화기가 아직 특허를 받을 만큼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벨의 특허권 획득은 정당했습니다. 라이스의 전화기는 코맹맹이 소리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 1808 ~ 1889)가 발명한 전화기는 문제가 다릅니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메우치는 벨보다 5년 앞서 그 전화기로 벌써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우치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1876년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벨이 고용한 유능한 변호사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남자 사이의 소송은 한없이 이어졌습니다. 1896년 메우치가 한이 맺혀 숨을 거둘 때까지도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벨이 속이고 기술을 훔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였습니다. 그레이는 우선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시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걸 갖고 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처음 열린 전화기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이크로폰과 금속진동판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에 명시된 기술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벨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과학역사가들 사이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벨이 특허를 취득한 전화기의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레이가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무려 100건이 넘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레이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벨에게는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종 판결에서는 승리를 얻었지만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찬반 동수로 엇갈렸다. 어쨌든 벨은 두 번의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22년 벨이 숨을 거두자 미국의 전화국들은 1400만 전화회선을 1분간 정지시키고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반면에 그레이는 백과사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라 있고 메우치는 그 이름마저 잊혔습니다. 벨은 자신의 행적에 어울리는 말을 남겼습니다. “What this power is I cannot say; all I know is that it exists and it becomes available only when a man is in that state of mind in which he knows exactly what he wants and is fully determined not to quit until he finds it.”나도 이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전부는 이 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는 완전한 결의를 마음속에 가진 사람에게만 쓸모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팔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5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STEAL 45. The purport is, that injustice being an abomination to God, we must render to every man his due. In substance, then, the commandment forbids us to long after other men's goods, and, accordingly, requires every man to exert himself honestly in preserving his own. For we must consider, that what each individual possesses has not fallen to him by chance, but by the distribution of the sovereign Lord of all, that no one can pervert his means to bad purposes without committing a fraud on a divine dispensation. There are very many kinds of theft. One consists in violence, as when a man's goods are forcibly plundered and carried off; another in malicious imposture, as when they are fraudulently intercepted; a third in the more hidden craft which takes possession of them with a semblance of justice; and a fourth in sycophancy, which wiles them away under the pretence of donation. But not to dwell too long in enumerating the different classes, we know that all the arts by which we obtain possession of the goods and money of our neighbours, for sincere affection substituting an eagerness to deceive or injure them in any way, are to be regarded as thefts. Though they may be obtained by an action at law, a different decision is given by God. He sees the long train of deception by which the man of craft begins to lay nets for his more simple neighbour, until he entangles him in its meshes--sees the harsh and cruel laws by which the more powerful oppresses and crushes the feeble--sees the enticements by which the more wily baits the hook for the less wary, though all these escape the judgment of man, and no cognisance is taken of them. Nor is the violation of this commandment confined to money, or merchandise, or lands, but extends to every kind of right; for we defraud our neighbours to their hurt if we decline any of the duties which we are bound to perform towards them. If an agent or an indolent steward wastes the substance of his employer, or does not give due heed to the management of his property; if he unjustly squanders or luxuriously wastes the means entrusted to him; if a servant holds his master in derision, divulges his secrets, or in any way is treacherous to his life or his goods; if, on the other hand, a master cruelly torments his household, he is guilty of theft before God; since every one who, in the exercise of his calling, performs not what he owes to others, keeps back, or makes away with what does not belong to him.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팔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45.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출 13:7).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입니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가로채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습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습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기 수단으로 보십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법을 보십니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꼬임을 보십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입니다. 자기가 소명 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체포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19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 표준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도적질하는 것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적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슴 여미는 고백이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명예와 정절을 훔치고 그녀의 남편의 생명까지 뺏었음에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장발장처럼 빵을 훔치지 않거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부인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제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훔치는 방법과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돈 시간 명예 재능 또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비난하시고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합니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실례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25:35-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들도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020-01-0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0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4 - 수도사와 어머니
    Luther at Erfurt - Justification by Faith 수도사와 어머니 봄이 성큼 온 것인지 시나브로 온 것인지 종잡을 수 없게 겨울이 종적을 감췄다. 나뭇가지의 움찔거림이 느껴진다. 나물 캐러 가는 처녀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른거린다. 공해로 찌든 이 거대한 도시도 봄의 기운을 받아 신선함을 풍긴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새 생명들이 봄빛을 받아 기지개를 펴는 때라서 이런 부질스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최초의 수도사들은 어찌나 엄격한지 힐끔거리기 일쑤인 우리와는 영판 다르게 여자는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느 어머니가 수도를 쌓고 있는 안쓰러운 아들을 만나러 친구들과 나들이를 했다. 그러나 수도하는 아들에게는 어머니도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말을 나누는 동안 내내 눈을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요새 말로 여자가 뭐길래 그랬는지 모르겠다. 친구도 없고 일도 하지 않고 고행하는 까까중 마냥 이런 식으로 혼자 산다는 게 사람에게 좋을 리 없다. 말할 상대도 없고 일도 거의 하지 않는 은수사들은 마귀들이 늘상 자기를 쫓아다닌다고 상상했다. 성 안토니는 마음속에 들끓는 마귀들과 옥신각신하느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Lutherstadt Wittenberg 일설에 의하면 루터가 비텐베르크성에 은둔해 있을 당시 그가 잉크병을 냅다 던져 벽에 얼룩을 남긴 흔적이 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를 끊임없이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마귀 때문이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울컥 화가 솟구친 루터가 “마귀야 물러가라.”라고 버럭 소리 지르며 잉크병을 던졌다는 것이다. 어쨌든 은수사들은 혼자 동떨어져 사는 게 사람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교할 수 있는 상대 가치가 전혀 없으므로 해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도시 알 수 없는데다 혼자이기에 감당할 수 없는 무서움이 그들의 정서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도원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기로 뜻을 모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족과 더불어 산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수도원에서 살았고 여자는 수녀원에서 지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 살기는 했지만 세상이 꼴 보기 싫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존재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 속에서 바글거렸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어느 날 속세에 사는 한 사람이 세상을 멀리하고 산꼭대기에서 사는 은수사를 방문했다. 산을 오르느라 숨을 할근거리는 속세인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은수사가 말을 건넸다. “세상은 요즘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이 산더러 ‘일어나 바다로 들어가’라고 대뜸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신앙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가?” 방문객은 숨소리도 죽인 채 눈만 말똥거렸다. 움푹 패인 눈에 형형한 빛을 내며 수도사가 입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오, 산이여 내가 지금 명령을 내리지 못하겠구나. 지금 성경 말씀을 암송하는 중이니 말이다. 그러니 그대로 앉아 있으려무나.”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수도사와 속세인이 깔고 앉은 산이 훈련된 개 마냥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 일화는 수도사가 어쩌니저쩌니해도 최소한 세상을 생각하고는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2021-01-0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01-02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칠 계명 간음
    Susannah accused of adultery, by Antoine Coypel Lesson XIX제칠 계명 간음Seventh Commandment Adultery 교도 계율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형무소 근처에 교수대가 서있습니다. 그 교수대 위에 한 젊은 여자가 서있습니다. 많은 구경꾼들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여자는 진홍빛 A(간음을 나타내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자를 수로 곱게 새긴 가슴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에 왔는데 암스테르담에서의 남편의 일처리가 늦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식도 없이 헤어져 있는 기간이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오래 헤어져 있는 사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간음을 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엄격한 청교도들은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녀는 한사코 간음의 상대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범한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죄의 열매인 아이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뒤 평생 간음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존경받는 젊고 학식 많은 목사 딤즈데일이었습니다. 딤즈데일은 헤스터 프린과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수해서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오래 소식이 없던 그녀의 남편 칠링월스가 아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만나지 않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의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고뇌로 쇠약해진 목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치료약이라 속이고 목사를 서서히 독약으로 중독시킵니다. 그런데 그의 복수가 무르익어 성공할 무렵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군중 앞에서 헤스터 프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시던 여러분. 나를 거룩하다고 존경해주시던 여러분. 이 자리에 죄인이 섰습니다. 나는 마땅히 7년 전에 이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씨를. 여러분은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를 가나 주위에 이 글씨의 무섭고 끔찍한 광선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수치의 표적을 보고 떨지 않은 죄인이 여러분 속에 숨어 살아왔습니다. 모든 죄를 고백한 딤즈데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헤스터는 나머지 생애를 딸을 키우며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보내다 마감합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 대신에 검은 바탕에 붉은 주홍 글씨가 새겨집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 7월 4일 - 1864년 5월 19일)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습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소설에는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1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41.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as God loves chastity and purity, we ought to guard against all uncleanness. The substance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we must not defile ourselves with any impurity or libidinous excess. To this corresponds the affirmative, that we must regulate every part of our conduct chastely and continently. The thing expressly forbidden is adultery, to which lust naturally tends, that its filthiness(being of a grosser and more palpable form, in as much as it casts a stain even on the body) may dispose us to abominate every form of lust. As the law under which man was created was not to lead a life of solitude, but enjoy a help meet for him, and ever since he fell under the curse the necessity for this mode of life is increased; the Lord made the requisite provision for us in this respect by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entered into under his authority, he has also sanctified with his blessing. Hence, it is evident, that any mode of cohabitation different from marriage is cursed in his sight, and that the conjugal relation was ordained as a necessary means of preventing us from giving way to unbridled lust. Let us beware, therefore, of yielding to indulgence, seeing we are assured that the curse of God lies on every man and woman cohabiting without marriag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 20:14 41.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합니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私通)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데 2017년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시태그 운동(Hashtag activism 해시태그 활동주의)는 단순히 홍보 수단이나 가벼운 주제를 묶어 보여주는 역할에서 확대되어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는 해시태그의 사회운동 역할을 말합니다.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고 사회운동 역할로 확장된 것입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이게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으로써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해 시민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여론입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연극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018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제칠 계명에 대한 가르침의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해줍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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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2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3 - 혼자 사는 사람
    Saint Jerome, who lived as a hermit near Bethlehem, depicted in his study being visited by two angels (Cavarozzi, early 17th century) 혼자 사는 사람 세상은 좋아졌다. 카드로 물건을 사고 전화를 건다. 동전을 넣으면 팔팔 끓는 차가 나오는가 하면 라면으로 끼니도 이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가 귀해서 친구들끼리 봉고차를 빌려 여행을 갔었다. 뜨거운 여름 여행길에 탈탈거리는 차라도 빌려 가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했던지. 비포장도로에서 몽땅 내려 밀고 땡기고 하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들 가운데 자기 차 안 가진 사람 없고 듬직한 소나 탄다는 소나타를 가진 친구도 있다. 세상은 이제 혼자 살기에도 그만이다. 옛날 청승스럽게 사내가 빨래판을 문지르거나 대야를 밥상마냥 모시지 않아도 된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가루비누를 흩뿌린 다음 스위치를 누르면 거의 마르다시피 해서 빨래감이 나온다. 웬만한 옷은 탈탈 털어 입어도 좋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문명의 이기들에 둘러싸여 혼자 사는 현대인들이 늘고 있다. 세계가 기독교화 될 때의 교역자들이 원로원의원 마냥 으시대는 귀족이 되고 황제들이 감독들을 부리는 신하처럼 유배시킨다면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 것일까? 양미간을 좁히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을 떠나시오. 사막으로 가시오. 세상을 벗어나시오. 도시에서 도망가시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시편을 노래하는 논과 밭이 있는 들로 돌아가시오. 살기로 눈을 번들거리는 황제들과 부패한 교역자들을 피해 도망가시오. 모든 사람을 벗어나 혼자서만 살도록 하시오" In Orlando Furioso, Angelica meets a hermit 이렇게 했던 사람을 은수사니 수도사니 했다. ‘은수사(hermit)’는 사막에서 격리돼 사는 사람을 뜻한다. ‘수도사(monk)’는 혼자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 최초의 수도사들은 기실 은수사들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은수사는 전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게 되었다. 수도사는 도시와 가족을 떠나 다른 수도사들과 한 무리가 되어 따로 사는 사람으로 통용되게 되었다. 이 운동은 이집트에서 시작됐다. 은수사와 수도사는 세상이 악하고 육체도 악하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영지주의자 즉 노스틱 주의자의 사상에 빠지게 되었다. 육체가 악하다면 고행으로 그걸 다스려야 한다고 그들은 입에 침을 튀기며 말했다. Eremitic cave in Spain 이런 이유때문에 그들은 동굴에서 살았고 바위를 요 삼아 잤다. 그리고 그들은 딱 목숨을 부지할 만큼만 먹었다. 종려 열매와 양상추가 주식이었다. 식사 때 음식이 입에서 떨어질 정도로 잠을 자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악한 육체에 벌을 가하는 셈이었다. 누가 가장 심한 고행을 견딜 수 있는가 견주어 보는 시합도 열렸다. 어떤 수도자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황새처럼 외다리로 서 있었다. 높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가서 장대로 음식을 받아먹고 사는 수도사들도 적지 아니했다. 청년 시절 조계사엘 들른 적이 있었다. 우람한 나무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가보니 여느 까까중과는 달리 황색 가사를 걸친 외국인 중이 석가처럼 고목 아래 가부좌를 틀로 앉아 있었다. 그는 고행 승으로 평생을 앉아 지낸다고 했다. 그 앞에는 공양을 드리는 사람들로 줄을 이루고 있었다. 2020-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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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2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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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19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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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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