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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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이 삶이 되다_ 결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주신 말씀_ 여호수아 3:15~17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결국,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2백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이 거느린 수없이 많은 소와 양 떼,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성막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마침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첫 관문인 넘치는 요단강 앞에 선 것이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6백 년간 이어져 온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 현실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저 평범하게 그 약속의 땅을 밟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출애굽의 마침표를 찍고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뀌는 터닝포인트가 홍해가 갈라지고 바닥이 마른 바다를 건넌 ‘홍해의 기적’이었다면 6백 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첫 번째 출발점은 ‘요단강의 기적’인 것이다. 요단강 지역의 곡식을 거두는 시기엔 항상 요단강이 넘쳐흐른다고 한다. 요단강의 기적은 홍해 때와 달리 하나님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을 물에 밟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물에 들어서자 위에서부터 흐르던 물이 그쳐서 멀리 있는 아담성 변두리에 일어나 한곳에 쌓이고(수 3:16) 마른 강바닥이 되어 모든 백성이 밟으며 건너는 또한 번의 장엄한 기적의 장면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홍해의 기적과 요단강의 기적! 이 두 장면의 다른 점이 있다면 홍해의 기적 시엔 믿음이 없고 원망 중인 백성을 이끈 모세가 오직 자신만의 믿음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지팡이를 홍해를 향해 내밀으며 하나님의 창조의 기적이 이루어졌었고 요단강의 기적 시엔 믿음으로 온전히 무장된 모든 백성(만나 세대)이 언약궤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앞세워 요단강을 복종케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온전한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 자격을 갖추었음을 말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사건들을 겪어 왔는가! 많은 사람이 죽었고 다시 태어났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서는 요단을 건너기까지 흐른 5~6백 년의 세월! 그 세월 속에 변함이 없었던 것은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꿈’이었고 ‘약속 하심’의 성취인 것이다. 오늘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기대하며 소망 속에 살아가고 있다. 곧 다시 오실 우리 주 예수님을 고대하며 다시는 사망이 없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존재하고 기쁨만 가득한 곳, ‘새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고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천 년이 하룻밤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즉 깨어 기다리고 갈망하노라면 요단강이 멈춰서는 그날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내 눈앞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아멘, 할렐루야! 2023-08-11
    • G.QT
    • G.QT
    2023-08-11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30과 말씀의 효력
    문89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효력이 되어 구원을 얻게 하는가? 답_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특히 강설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신이 효력 있는 방법을 삼아 죄인을 반성시켜 회개하게 하시며 또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함과 위로를 더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문90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고 들어야 효력이 되어 구원을 얻는 방도가 되는가? 답_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방도가 되게 하려면 마땅히 부지런함과 예비함과 기도함으로써 생각하며 믿음과 사랑을 우리 마음에 두고 행실에 나타낼 것이다. 【관련성구】 1)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9:7-8 2)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 8:34 3)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2 세상에 떠도는 이런 시가 있다. 그때 예수께서 제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곁에 둘러앉히시고 이렇게 가르치셨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린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고통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에서의 보상이 크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말했다. "그 말씀을 글로 적어 놓으리까? 그리고 안드레가 말했다. "그 말씀을 잘 새겨 둬야 할까요?" 그러자 야고보가 말했다. "그걸 갖고 우리끼리 시험을 쳐볼까요?" 그리고 빌립이 말했다. "우리가 그 뜻을 잘 모를 경우에는 어떻게 할까요?" 그리고 도마가 말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줘야 할까요?" 그러자 요한이 말했다. "다른 제자들한테는 이런 걸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마태가 말했다. "그 말씀이 실생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요?" 그러자 그 자리에 참석했던 바리새인 하나는 예수님에게 수업 계획서를 보여 줄 것을 요청하면서 그 가르침의 최종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우셨다. _작자 미상 사도 요한은 증거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구원의 역할을 한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떠난 사람들의 어려움을 묘사한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치도 없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주를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듣고 믿어야 한다.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에 대한 권면을 젊은 사역자 디모데에게도 전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7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과 능력은 다양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굳은 마음의 반석을 쳐서 부수는 방망이(렘 23:29), 자신을 비추어 보는 거울(약 1:23-25), 생명으로 자라는 씨앗(눅 8:11), 씨앗을 자라게 하는 비와 눈(사 55:10-11), 영혼의 음식(고전 3:1-2), 꿀(시 19:10), 금과 은(시 119:72), 등불(시 119:105), 불(렘 20:9), 검(히 4:12)의 속성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성경뿐만 아니라 성령의 조명과 감동도 동반되어야 한다. 읽거나 선포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방편이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통로가 된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전해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핵심개념정리】 1. 구원의 방편은 무엇인가? 읽거나 선포를 통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방편이 된다. 2.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 이외에도 어떤 유익이 있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딤후 3:16. 3. 복음은 어떤 능력이 있는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롬 1:16. 2023-08-09
    • G.CULTURE
    • G.BOOK
    2023-08-09
  • 제108회 선거 유향과 몰약
    덥고 짜증이 날 때는 향수를 맡으면 기분 전환이 된다. 6개의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가운데 냄새를 맡는 비근(鼻根)은 3번째이다. 눈과 귀 보다는 등급이 아래지만 혀[舌]보다는 등급이 높다.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다는 게 그만큼 효과가 크다는 이야기이다. 한가하게 입으로는 차를 마시고 침향을 피우면서 그 연기를 맡으면 열 받은 게 내려간다고 한다. 지독히 더우니 겨울 분위기라도 느껴보자.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 선물로 가져갔다는 유향과 몰약은 어떤 물건일까. 유향은 감람나무 과에서 추출된다. 아라비아, 예멘, 오만, 소말리아에서 자라는 감람나무들이다. 나무 크기는 5~6m. 해발 1000~1800m 석회질 산지에서 야생으로 자란다. 유향은 나무껍질을 치고 다듬거나 줄기를 도려내서 얻는다.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수액을 얻는 것이다. 냄새는 신선하고 상쾌하다. 기원전 2천 년 전부터 이 유향을 낙타에 싣고 시나이반도를 출발하여 유럽 쪽에다 공급하는 ‘유향 로드’가 있었다고 한다. 몰약은 무엇일까. 감람나무의 한 종류에서 나오는 수액을 추출한다.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남부, 이란이 원산지이다.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아마포에는 몰약이 발라져 있었다. 몰약은 유대 장례 풍습에서 빼놓을 수 없었다. 몰약 성분의 수액이 공기에 닿으면 적갈색 덩어리로 굳어진다. 덩어리 크기는 콩만 한 것에서부터 달걀만 한 크기까지 있다. 향은 부드럽고 은은한 향으로 생선 요리 맛을 돋우는 레몬이나 사프란의 향을 떠올리게 만든다. 몰약의 ‘팅처(에탄올에 허브를 담가 우려낸 것)’에는 소독 작용과 진정 작용, 거담 작용이 있는 모양이다. 몰약도 역시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제108회 총회 선거에 나선 후보의 표어 가운데 이런 신선하고 상쾌한 유향이나 부드럽고 은은한 레몬이나 사프란의 향을 떠올리게 하는 몰약 같은 선거운동이 있다. 이를테면 부총회장 후보 김종혁 목사의 교회 표어, '오직 예수'를 지향하는 태도나 부서기 후보 임병재 목사의 선거 광고 이미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부회록서기 후보 김종철 목사가 여기저기 얼굴 내밀지 않고 오히려 목회와 기도 전념으로 선거운동을 대신하는 전략 같은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 9:23-25 2023-08-07
    • G.OPINION
    • G.OPINION
    2023-08-07
  • 과학시대에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_ 윤희원 목사
    들/어/가/는/말 자연계시 속에 있는 창조 신화와 특별계시 속에 있는 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학자이며 세계적 스테디셀러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년 2월 24일 ~ )는 “인간이 신을 발명할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는 끝날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앞의 말은 틀린 말이고 뒤의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 인류의 역사는 신이 되려고 했다가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야기이고 구속계시이기에 특별계시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특별계시와 자연계시 두 가지로 주어졌다. 특히 자연계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였는지에 대하여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자연계시인 하나님의 창조계시는 성경 속에서도 다양하게 표현되고 이해되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2:3절의 창조이야기와 창세기 2:4-25절의 창조이야기는 전혀 다른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창조 이야기에는 엘로힘(창 2:3절에서 2:4절까지 모두 하나님으로 번역됐음)이, 두 번째 창조 이야기는 야웨(여호와)-엘로힘(창 2:4절에서 창 3:23절까지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했으며 창 3:24절의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So he drove out the man)의 하나님이란 단어는 원본 성경에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가 통하게 하기 위해 집어넣었기에 정확히 여기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어야 한다. 여호와란 이름으로 창세기 4:1에서 창세기 4:24절까지 나오며 창세기 4:25절에서는 하나님(엘로힘)으로, 26절에는 ‘에노스’를 셋이 낳고,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the name of the LORD)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창세기 5:1, 22, 24절은 하나님(엘로힘)으로, 창세기 5:29절에서는 여호와(야웨)로, 창세기 6:2절은 하나님으로, 창세기 6:3절은 여호와로, 나머지 부분에서는 이렇게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은 다른 신의 창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이름이 교차적으로 서로 쓰여지고 있기에 다른 창조의 이야기라고는 볼 수 없다. 문제는 창조 순서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는 먼저 땅이 창조되어 있고, 그 때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하며 혼돈하고 흑암에 다 덮여 있고, 그러한 땅, 그 세계에 하나님의 영이 물의 얼굴(水面 수면 the face of the waters)에 풀어지고 배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즉 여기에서 보면 땅과 물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땅과 물이 있는 상태에서 빛을 창조하시고, 궁창을 창조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을 나누고, 땅의 식물을, 그리고 해, 달, 별을 어류와 조류를 짐승과 사람을 창조하신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의 창조 순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와는 사뭇 다르다. 날짜 구분이 없고 사람이 초목도 없고 채소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되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여 그에게 주고 경작하게 하신다. 즉 사람은 창세기 1장의 순서대로 맨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서는 땅이 만들어진 다음에 즉 창세기 1장의 시점으로 셋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 같은 창조의 이야기를 하면서 전혀 다른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더욱이 창조한 신이 하나는 엘로힘이라는 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야웨)라는 신이다. 이것은 문자주의 신앙으로는 이해하고 풀어낼 수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가를 알면 이해되고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두 이야기의 창조는 고대 근동의 사람들에게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창세기 1장도 이야기하고 사람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생기를 주셔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두 이야기가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연계시의 신화와 특별계시로 주어지는 창조 이야기의 차이이고 차별성이다. 세계와 사람의 창조 모두 다 하나님의 창조임을 밝힌다. 1.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 먼저 우리는 서양과 동양의 우주관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서양은 신들을 의인화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양에는 온갖 ‘신화’들이 신들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왔다. 원래 신화는 고대인들의 신비로운 일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그것이 전승되면서 고대인들의 지혜를 담아 놓은 것이 되었고 또한 종교가 되었다. 고대인들의 소박한 질문을 풀어주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는 삶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교훈이 되었다. 동양의 신화인 중국의 신화는 서양의 신화와는 다르다. 신화이지만 의인화된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은 음(廕)과 양(陽)이라는 두 가지 상극의 힘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하여 창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 서양의 신화는 항상 카오스(천지창조가 이루어지기 전 태초의 소용돌이 치는 어둠)의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신을 의인화시키지 아니하는 동양의 신화에도 카오스의 상태에서 알을 깨고 반고(盤古/시조신)가 태어나 땅(음)과 하늘(양)을 분리한 뒤 1만 8천 년 동안 살다가 죽었다. 그러자 그의 숨결은 바람이 되고 두 눈은 해와 달, 몸은 여러 산이 되었고 반고의 몸에 있던 벼룩조차 물고기와 동물로 변했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의 신화도서양의 신화처럼 카오스의 상태를 전제하고 있다. 더욱이 서양의 신화인 바벨론의 신화는 5천 년 전 티아마트(여신)가 바다의 신 압수와 결합해 하늘의 신 아누를 낳고 다시 아누와 티아마트가 결합해 물의 신인 에야를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의 이야기들을 다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창조의 이야기가 고대 근동의 신화 이야기의 틀 속에서 고대 삶들이 이해가 되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창세기 1:2절은 그런 혼돈, 즉 카오스의 상태를 이야기한다.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이야기로 읽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말이 아니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라는 틀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는 것은 성경도 신화이니 신화적으로 읽자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그 구원의 이야기,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The story)로 읽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게 하면 그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목적이 드러나게 되고 그 목적에 따라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역할이 나누어지게 되고 그 이야기에 대한 어떤 기대를 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과 과학주의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 문자주의에 빠져서 그렇게 되었다. 이 성경 문자주의는 사실상 현대의 과학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쉽게 말해서 과학주의는 오직 자연과학(natural science 자연현상에 대한 이해를 조직화한 지식의 체계)만이 실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지적 권위를 가지고 있고 윤리, 철학, 신학이라는 것은 사적인 정서나 문화적 소산, 또는 맹목적인 신념에 기초해 있다고 규정하여 실재의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과학주의는 사실상 ‘과학’이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변증가 모어랜드(J. P. Moreland 1948. 3. 9)는 말한다. “과학주의가 과학을 왜곡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은 본질상 실재를 아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성경주의 즉 성경의 문자주의가 ‘성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문자주의가 ‘창조과학’을 이야기하고 그 창조과학이 마치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다. 사실상 과학주의는 전혀 과학이 아니다. 오히려 철학의 한 학설이다. 그래서 모어랜드는 “과학주의는 실제론, 인식론(지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얻는가를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의 한 학설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과학주의가 창조를 부인한다고 해서 창조과학은 하나님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그대로 믿자고 한다. 우리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 과학주의에서 말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고 그렇다고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과학주의에 매몰되어 버린 우리의 사상과 문화가 기승을 부리면서 이미 서구사회는 점차 세속화 되었고 현대문화의 중추세력인 대학과 기업 그리고 우리의 삶의 문제를 윤리와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법관들이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을 이제는 사적인 미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모어랜드는 그의 책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간)에서 과학주의의 폐단 4가지를 이렇게 말한다. 1) 과학주의는 기독교의 주장을 타당성의 구조 밖으로 몰아냈다. 2) 과학주의는 지금 우리의 문화를 규정하는 몇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 3) 과학주의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키웠다. 4) 과학주의는 교회의 제자훈련을 훼손하고 기독교적 양육을 비효과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아주 편협한 종교가 되고 신앙이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인격적인 신앙이 아닌 미신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이 과학적 증거도 없이 그리고 믿어야 되는 이유도 없이 믿고 있음을 드러내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학주의의 편만성이 그리고 그 과학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에 편승한 성경의 문자적 권위가 기독교를 믿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속주의자가 되게 했고 과학주의가 만든 세상에 물들게 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철학자 다니엘 스톨자(Daniel Stoljar 1967년생)에 의하면 과학주의는 다음과 같다. 1) 기초적으로 ‘물리주의는 참이다’라는 것에서 전제된다. 2) 해석적으로 ‘물리주의는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3) 인식론적으로 ‘자연과학에 암시된 세계의 그림은 그것이 어떠하든지 간에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이다. 4) 갈등적으로 ‘물리주의는 언뜻 보기에 일상생활에서 많은 전제와 충돌한다. 5) 이것을 해결하는 것으로서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일상생활의 전제들을 해석하는 관점을 수정하거나 제시해서 물리주의와 양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주의에 입각한 세계관은 사실상 철학 제일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과학 제일주의를 주장하는 데 있다. 과학주의는 추론의 기초가 되는 출발점이 과학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고 하여 철학의 데카르트식 토대주의((foundationalism 또는 기초주의, 정초주의는 정당화된 믿음이나 건전한 전제로부터 추론된 결론과 같이 확실한 기초에 의존하는 인식론)를 부정하고 관찰자가 탐구 주제를 총체적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유리한 가설적 지점을 가리키는 ‘아르키메데스 점’(Archimedean Point 이 표현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어떤 고정된 점이 주어지면 그 점을 받침점으로 삼아 지렛대를 이용하면 지구까지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한 데서 유래)이 과학에만 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과학주의 주장은 역시 신학에도 적용되어 신학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직 과학에서 추론하는 아르키메데스 점으로 하나님이 추론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부정한다. 이런 과학주의에 맞서 창조과학자들은 창조과학을 주장했다. 그런데 창조과학의 주장은 사실상 과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인식의 사슬’이 되는 모든 것이 추론되는 기본 인식의 토대에서 실험과 과학에 의해 입증되지 않고 추론되었기 때문이다. 학문의 이러한 토대주의, 또는 정초주의에 대해서 여기에서 더 설명할 수 없다. 다만 과학주의는 그 정초 됨이 과학 밖에 있지 않고 과학 안에 있다고 하여 과학 밖에 있는 기초인식을 부정하고 있다. 이 말은 과학에 의해 입증되거나 아니면 원인으로서 가설을 세울 수 없다면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성경과 과학의 대화 영국의 이론물리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성공회 사제인 존 폴킹혼(John Polkinghorne 1930년 10월 16일 ~ 2021년 3월 9일)은 ‘과학시대의 하나님의 신앙’(Belief in God in an Age of Science)에 대해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로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모색한다. 왜냐하면 “나는 확실히 믿습니다”하는 자기주관 적인 신앙고백으로는 충분한 신앙의 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21세기의 과학은 데카르트적, 뉴턴적 확실성이 진리의 궁극적인 기초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고 ①우주관에 대해 ②생명의 기원에 대해 ③인간의 내적 삶에 대해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을 통해 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인 성경을 우리는 과학책으로 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과학책도 아니고 문학책도 아니고 어떤 신화를 소개하는 신화의 책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시를 이야기하는 이야기책이다. 그래서 과학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역사책으로 읽어도 안 되고 이야기책이지만 문학책으로 읽어도 안 된다. 물론 성경에는 역사도 나오고 시도 나오고 희곡도 나오고 선지자들의 설교도 나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 수사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본래 성경이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로 쓰여졌기에 ‘그’ 이야기(The narrative)로 읽어야 한다. 이야기 또는 '내러티브'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을 말한다. 문학에서 이야기는 배경, 인물, 구성(플롯), 이야기를 이루는 분위기인 톤으로 이루어진다. 20세기 문학평론가 허먼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는 이야기가 희극, 로맨스, 비극, 풍자의 네 가지 원형에서 나온다고 보았고 로렌스 엘스브리는 이야기가 어떤 가정이나 집안의 이야기, 다툼과 경쟁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어떤 여행에 관한 이야기, 고난을 참고 이겨내는 이야기, 어떤 개인적인 꿈과 희망을 성취하는 이야기와 같이 5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야기(narrative)가 아닌 '말하다'(say) 쪽의 구두를 통한 이야기(story)는 대인관계의 의사소통과 인간의 사회화에 있어 가장 주된 수단이며 동시에 언어의 표현 양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이야기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 표현의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성경을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잠언 18:15절의 말씀처럼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로운 자의 귀는 지식을 구하느니라”는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러티브 속에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전통 이야기, 지도 이야기, 비전 이야기, 3종류의 이야기가 있다. 전통 이야기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고 지도 이야기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길과 그 아이디어를 일러주며 비전 이야기는 그래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 3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없고 계시의 이해 없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은 무지와 맹신을 조장하는 것과 같다. 성경을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로 말하는 이야기(narrative)로 읽게 되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듣게 되고 그 듣게 됨으로 소망이 생겨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잠 9:10)”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로 읽지 아니하면 오늘날과 같은 과학시대에는 완전히 허무맹랑한, 어쩌면 고대 근동의 신화보다도 못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한 운율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낮의 광명과 밤의 암흑, 해 뜰 무렵의 희미한 연자줏빛과 해거름 녘의 붉은 노을, 겉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현상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이해하려고 상상하여 신화라는 이야기(story)를 만들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러기에 이야기(narrative)로 읽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고 문자주의로 읽어서 천동설(태양이 지구를 돈다)을 주장했지만 결국은 18세기 초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에 의해 지동설(지구가 태양을 돈다)이 주장됨으로 천동설은 폐기되었다. 20세기 초에 대구경 망원경이 출현해 하늘의 체계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태양도 은하수에 포함된 수천억 개의 별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우리 은하 역시 우주에 퍼져 있는 수천억 개의 은하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태어나 사이공에서 프랑스 학교를 다닌 후,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1976년 버지니아 대학에서 천문학 교수가 된 우주과학자 트린 후안 투안(Trinh Xuan Thuan)은 말한다. “우주 속에는 타원은하, 나선은하, 불규칙 은하가 있고 이 은하들이 집단을 이루어 은하군, 은하단, 초은하단의 구조를 가진다. 국부은하군의 일원으로 이 은하 군에는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뿐만 아니라 우리 은하의 위성 은하인 대마젤란은하와 소마젤란은하를 비롯한 크고 작은 15개의 난쟁이 은하들도 들어있다.” 은하가 우주 속의 집이라면 은하군은 우주 속의 마을인 셈이고 은하단은 우주 속의 도시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망원경의 발전으로 이제는 초은하단을 발견했다. 초은하단은 우주 속의 대도시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주는 광활하고 이 광활한 우주는 약 150억 년 전에 대폭발이 일어나서 생겨났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4년 안드로메다 성운이 우리 우주에 속하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해 우주의 크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다는 걸 확인한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년 11월 20일 ~ 1953년 9월 28일)은 1929년에 먼 곳에 있는 은하들이 우리 은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냈고 우주의 팽창이 어디서나 똑같이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런 우주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우주와는 달리 변하고 있으며 우주 속의 별들도 탄생과 성장,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고 있음을 알았다. 이렇게 과학은 우주의 신비를 속속히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문자주의에 매몰된 성경학자는 과학에 의해 밝혀지는 우주의 신비, 그 창조의 신비는 도외시하고 이 세상(우주)이 BC 4004년 전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점만 이야기하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가르치면 광대한 우주의 밝혀진 기원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없고 생명의 진화에 대해서도 답을 줄 수가 없다. 우주의 기원과 생명에 대한 답을 해줄 수 없는 기독교가 지금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되어버렸다. 결국, 기독교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으라고 하는 종교가 되었다는 현실을 간과할 수가 없다. 4. 큐티의 성경 읽기는?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문제에 부딪혀 있다. MZ 세대(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를 합쳐 부르는 말로,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출생률이 증가한 베이비붐 세대의 자손이고 Z세대라는 이름은 Y세대부터 알파벳 순서를 이어받아 X세대에 이은 2세대라는 점에서 유래했고 SNS와 인터넷, 스마트폰에 익숙한 세대)는 성경을 아예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다. 성경이 분명 이야기인데도 ‘그’ 이야기되는 내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아닌데 진리라고 믿으라고 하니 부모 따라서 교회는 다니지만,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다니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narrative)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지금 40대 이상 된 교인들은 대부분 교회에서 큐티(Quiet Time/경건의 시간)라고 하는 성경 묵상을 했고 또 들었다. 이 큐티 묵상이 성도들이 성경을 가까이할 수 있도록 했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개인의 경건 훈련을 하게 하는 이점도 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반성해 보면 교회 안에서 개인적 경건 훈련이 싹트게 했고 가나안 성도(신앙을 갖고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인을 말로 가나안이라는 표현은 '안 나가'를 거꾸로 뒤집은 말)가 생겨나게 했고 (아)카페교회의 교인이 늘어나게 하는 요인도 되었다. 결국, 큐티의 성경 읽기 묵상은 개인적이고 문자 중심의 해석에 근거한 이해와 적용으로 신앙 엘리트주의를 양산했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그’ 이야기로서 객관적 이해 없이 주관적으로 이해하여 그릇된 본문 이해를 가지고 말씀으로 산다고 또는 말씀 묵상을 하고 산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간음, 혼외정사, 동성애, 사기, 가정파탄, 중독, 재정(공금) 비리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되었다. 교회는 기업보다, 정당보다 더 무서운 이익집단이 되어버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모두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큐티를 하면서 성경을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읽었다 이 자기계발의 목적은 분명히 성경적으로 우상이다. 그렇다면 기복신앙 또는 번영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상숭배의 부리는 탐욕이다. 이 탐욕은 역설적으로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헐벗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사는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또 하나의 뿌리는 성공, 위대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래서 자기계발에 힘쓰고 자기계발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도 선용(이용이지만)한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5.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려면? 이 과학시대에 어떻게 하면 성경을 과학으로도 읽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아니면 제3세계 교회 목회자와 리더를 위한 교육과 문서 운동을 펴나가는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의 말처럼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을까? 사실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으면 아래의 15가지 것들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이야기로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수학의 공식도 아니고 화학의 방정식(반응식)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오직 이야기로 하였다. 2) 왜 하나님은 이야기로 이야기의 틀로 구원 계시를 하였을까?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기에 이야기로 계시하셨다. 3)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관계됨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해되지 않고 오해되고 사실상 들어도 무슨 말인지 왜 그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속된 말로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하고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당시 창조의 이야기를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사람이나 이집트에 사는 사람, 또는 중국에 살고 있는 사람에게 했다면 그들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한다’라고 듣지도 아니했을 것이다. 4) 이야기에는 이렇게 관계의 신비가 전제되어 있다. 나와 잠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내 아내밖에 없다. 아무 여자나 붙잡고 ‘잠을 자자’고 하면 그건 필경 미친놈이고 정상적인 사람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계시되는 신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진리이다. 5) 이 관계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 속에 있는 관념은 오감의 대상이 되고 추리는 신비가 된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사실이 되고 그 이야기 속에 있는 원리는 인격과 삶이 된다. 6)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있는 내가 경험할 수 없는 가상의 세계와 내가 있는 현실의 세계, 그 경계선을 좁혀주며 하나로 묶어 주기도 한다. 7) 이야기 속에 있는 믿음의 사람은 그 누구든지 믿음이 신념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소명 이야기 속에서 왜 그렇게 거듭거듭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묻지 않고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가를 알게 된다. 8) 이야기로 하나님이 구원 계시를 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믿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믿음으로는 즉 신념의 신앙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신앙은 사랑의 신앙, 경외의 신앙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지 못하고 믿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하시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시면서 슬퍼하셨다. 9) 이야기는 원리를 깨우치고 이치를 알게 하는 지성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는 다 이야기 설교, 비유 설교였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삼위일체 적으로 하나 됨을 경험하게 된다. 10)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에 의하면 7가지 관계(①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②우리와 하나님과의 이야기 ③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의 관계 ④우리와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⑤우리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의 관계 ⑥우리와 상징물, 예술품, 인공물(사물)과의 관계 ⑦우리와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2010년 4월 15일 중앙일보를 통해 그는 “교회가 비즈니스 전문가를 초청한다. 성경과 예수, 성령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세계관은 없다. 세계관은 모두 머리에서 나온 거다. 거기선 아무것도 얻을 게 없다. 성경에선 하나님을 맛보고, 그걸 느끼라고 했다. 우리에겐 라이프(Life·삶 혹은 생명)가 필요한 것이지 뷰(View·관점)가 필요한 게 아니다”라고 질타했다. 11)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순종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비추어 사는 것이다. 이렇게 비추어 사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하나님을 알려고, 경험하려고 힘쓰며 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이 신앙임을 알게 된다. 12)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관계 맺음으로써 들려지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르라” 하신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박식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년 ~ 322년)는 “사는 법을 배우고 싶으냐?” 물으면서 “내 가르침을 따르라”고 한다. 부처(Buddha)는 “해탈을 하라”고 한다. 마호메트(Muhammad)는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코란을 배우라”고 한다. 얼마나 예수님과 다른가? 13)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이야기되는 본문과 씨름하게 되며 결국은 본문이 말을 하고 본문에게 말을 건네고 본문의 그 이야기가 내면화되어 영혼의 양식이 된다. 영혼의 양식이 된 이야기는 해석할 것이 별로 없는 이야기 즉 삶의 이야기가 된다. 14)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리스도인과의 서로의 관계도 모르기에 지키기보다는 자기만 옳다는 소영웅주의에 빠져 심지어 같은 동료 그리스도인과도 경쟁하여 자신이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승리적, 경쟁주의에 매몰되어 섬김만 받으려고 한다. 15)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의심은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강화되고 반복되면서 관계의 신비가 깊어진다. 6. 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이렇게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지 못한다. 성경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즉 고정관념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로 읽으려면 세 가지 전제 사항을 알아야 한다. 1) 성경 이야기는 어떤(?)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이야기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관계성을 알지 못하고 객관적, 심리적으로만 읽으면 ’그‘ 이야기는 모순되는 이야기가 됨을 알아야 한다. 2) 이러한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이야기에 대한 독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는 그 객관적 불안전함과 주관적 심리성 때문에 본문의 의미가 가려지기도 하지만 또 선이해가 없으면 성경은 이야기로 읽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 성경 이야기에 대한 선이해는 일단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를 구분 짓고 맞는 이야기이면 해석할 수 있는 자의식이 생겨나서 묵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선이해를 이야기의 본문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여 가지는 훈련을 해야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7. 성경을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려면? 성경은 무조건 읽고 묵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성경 이야기를 관계 속에서 읽고 깊은 묵상을 하게 되면 그 묵상은 J. 스코트 듀발, J. 다니엘 헤이즈가 쓴 ˹성경 해석(성서유니온 간)˼에 보면 “과거와 오늘이라는 간격을 메우는 과정이 일어난다”라고 한다. “첫째 원래의 역사적 문맥에서 본문을 파악하고 둘째, 최초의 청중과 오늘의 독자(나)의 차이점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셋째, 본문에 담긴 신학적인 원리를 찾아서 넷째, 현재의 상황에 그 신학적 원리를 적용한다”라고 한다. 그래야 바른 묵상이 되며 이 바른 묵상을 통해서 깨달은 원리는 성경 전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성경 전체의 원리와 대치되지 않음을 알게 되어 성경의 본문이 현실에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이어도 그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을 알게 되고 그 역사성 속에 있는 적실성을 이해하여 현실에서 ’그‘ 이야기의 역사성을 살려내고 적실성을 찾아내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구원 이야기가 본래 지니고 있는 역사적, 계시적 토대를 굳건히 한다. 문제는 현실에서 적실성이 없는 이야기는 인지 부조화가 심하게 발생 되고 선이해로서 전혀 읽을 수 없는 본문 즉 이야기도 성경에 참 많이 나온다. 먼저 창조 이야기도 그렇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 특히 어린아이까지 진멸하라(시 137:9, 사 13:16)는 이야기는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이다. 이런 이야기 속에서 역사성만 붙잡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신비성은 사라지고 현실성만 찾으면 그 이야기의 역사적 토대가 흔들리다. 선이해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난제의 이야기가 성경에는 많다. 이러한 문제들 대문에 성경 해석에서 역사성을 버리고 적실성을 찾기 위해 알레고리(allegory 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의 해석이 선호되었는데 쉽게 난제의 이야기에 무조건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알레고리의 해석은 매우 조심해서 선용해야 한다. 무분별하게 성경 이야기에 알레고리 해석을 했기에 중세는 암흑기가 되었다. 지금은 성경 이야기를 역사-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 되어 이야기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참 어렵게 되었다. 이야기로 읽기 전에 역사적으로 문법적으로 읽자고 하니 이야기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대다수의 배경은 그 당시의 현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다. 또 문법적으로 즉 문자적으로 수사적(修辭的)으로 읽자는 것은 일단 이야기의 틀을 무시하고 읽자는 것이다. 이야기의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야기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아주 크게 충돌하거나 또는 충돌하지 않는 이야기였음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관계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이야기였다는 점을 무시하고 또 오랫동안 문자적, 문법적으로 읽자는 것은 해석의 목적에만 부합되고 교리에 적합한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이런 해석방법도 다 용인하자는 것은 중세까지 유행했던 알레고리의 성경 해석방법과 다름이 없다. 결국, 지금 성경의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믿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특히 문헌비평과 수사비평을 통해서 오류가 너무 많아서 믿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된 것은 과학시대에 성경 읽기가 역사-문법적 방법으로 편승한 것이다. 역사-문법적인 방법으로 읽는 것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이 방법으로 읽어도 이야기로 들어야 됨을 말하고 싶다. 그래서 사실상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먼저 서사문학이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읽어야 한다. 수사문학으로 읽어서는 성경의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그 스토리(narrative) 속에 들어있는 담화(談話)가 관계적으로 또는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사는 종이 위에 있는 평면적인 것이지, 서사(이야기)처럼 입체적이고 다중적이지 않다. 그래서 수사적 읽기는 재현되지 않고 비평된다. 그러나 서사적 읽기는 이야기이기에 그 이야기의 현실이 지금 이야기를 듣는 자의 생각 속에 상상으로 재현된다. 재현되는 이미지가 있기에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비평되지 않는다. 묵상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문헌비평을 하자고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성경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탁월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Johannes Vos, 1862년 3월 14 일 - 1949년 8월 13일)는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로 읽으라고 그의 책 ’성경 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간)에서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구원 계시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과거를 보고 다시 그 과거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야기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그때의 성경 이야기를 읽고 그 성경의 이야기를 오늘 여기서 써 내려 간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서 하나님의 그 구원 계시가 성취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되고 지금 여기서 그 구원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을 제자로 부르시어 교회를 이루게 하시고 그 사역을 우리에게 맡겨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생활을 하게 하신다. 지금 우리가 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 계시의 ’그‘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가/는/말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관계의 신비를 경험하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자.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알고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을 만나고, 그리고 살아갈 신비를 알게 되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어나는 삶을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는 여백이 없는 충만함은 없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그 충만함 속에 있는 여백이 보이고 그 여백을 상상과 경험 또는 이해로 채우며 산다. 성경의 이야기는 여백이 있는 그림이다. 이야기로 성경을 읽으면 여백을 추측하거나 추론하지 않고 이미지로 여백을 채우는 그림을 그린다. 이 상상력이 없으면 이야기는 이야기로 읽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묵상할 수 없게 된다. 참된 묵상, 바른 묵상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지금 우리와 다른 반(反) 기독교 문화와 어떻게 관계하고 소통하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지 아니했다. 더욱이 구약 성경 속에 있는 어떤 교리적 진술이나 신조를 선포하지 아니했다. 그냥 십자가를 이야기로 선포했고 예수 부활을 이야기로 전했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야기하며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 사람으로 즉 제자로 살았다. 사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의 예수 믿음은 신조나 강령, 어떤 신앙고백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기록되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성경을 ’그‘ 이야기로 읽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신조를 믿음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교조적 읽기가 되어버렸다. 결국, 현대에 와서는 자기계발, 성공을 위해 읽는 이야기가 되었다. 잊지 말자. 성경의 관계의 대상은 역사가 아니다. 문자도 아니다. 아니 어떤 신비도 아니다. 오직 우리이다. 또 우리가 관계할 수 있는 관계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어야 하고 인격체이어야 한다. 더욱이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죽으시고 다시 인격체로 살아나신 것은 그에게 있던 부활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 부활의 실체(인격)이고 그 부활의 실체와 우리가 관계 맺음으로 가지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관계 맺음은 헛된 것이고 성경은 ’그‘ 이야기로 읽을 수 없게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맺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자로 성경을 읽으니 성경은 다 의문투성이고 성경의 이야기가 신비가 되지 못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해 버린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는 사람은 삼위일체 되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관계는 신뢰이다. 신뢰가 깨어지면 관계는 깨어진다. 그래서 성경을 이야기로 읽으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믿음의 ‘신념이나 시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신뢰와 경외함의 자세는 관계이기에 알고 따르는 것이고 신념이나 시각은 이론이기에 알고 부정하거나 긍정하고 배우기는 하지만 실천이 없는 신앙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이야기로 성경을 읽지 아니하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되어버려 행위 없이 믿고 실천하지 않는 외식자가 된다. 성경을 이야기로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확신 속에서 믿고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면서 산다. 2023-08-05
    • G.MISSION
    • G.SERMON
    2023-08-05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이란
    주신 말씀_ 레위기 19:2, 20:26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이란 ‘거룩’이란 지식백과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성품’이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레 19:2, 벧전 1:15~16)이다. 보통의 사전적 의미로는 ‘성스럽고 위대함’이며 비슷한 의미로는 높고 귀하다, 휼륭하다, 고귀하다, 성스럽다, 존엄하다, 등등이 있다. 성경적 의미로는 ‘구별됨’, 즉 하나님께 쓰이도록 구별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거룩하라’라고 명령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심으로 백성 된 너희는 당연히 거룩해야 된다는 말씀이고 만민 중에서 하나님이 ‘구별’하신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별해서 세우신 백성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하는 ‘거룩’은 어떤 것일까? 레위기 19~20장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거룩함이란 첫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믿음 생활이며 둘째,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 이 두 가지를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진정 요구하시는 ‘거룩’임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거룩’이라 함은 경건하고 엄숙함, 올바르고 근엄한 자세가 생각나서 존엄하신 성직자분들이 떠오르고 나는 그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는 삶의 실천이 거룩한 것일 거라 생각하였으나 레위기 묵상을 통하여 깨달은 거룩은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이웃 사랑의 실천함으로 압축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0)고 사랑의 실천적 정의를 가르치셨고, 몸소 그 사랑을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데까지 보여주셨으며 베드로 또한 ‘거룩함이란 사랑을 실천하는 행실에 있다’(벧전 1:15~16) 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내려주시면서 ‘밭 모퉁이를 남겨놓고... 포도원 열매를 다 따지 말 것이며...’ (레 19:9~10) 세부적인 실천 방법까지 말씀해 주셨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에 뿌리를 둔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거룩을 이룰 수 있음을 깊이 깨닫는다. 아멘. 2023-08-05
    • G.QT
    • G.QT
    2023-08-05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29과 구원과 결혼
    문85 우리가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받을 진노의 저주를 피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답_ 우리가 죄를 인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받을 진노의 저주를 피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속의 유익을 전하는 여러 가지 나타나는 방법을 힘써 사용하라는 것이다. 문86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답 _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복음 중에 우리에게 주신 대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그에게만 의지하는 것이 다. 문87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인가? 답 _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곧 구원 얻는 은혜인데 이로 말미암아 죄인이 자기 죄를 참으로 알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아 자기 죄를 원통히 여기고 미워함으로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든든하게 결심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새로이 순종하는 것이다. 문88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시려고 나타내시는 보통 방법이 무엇인가? 답 _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유익을 전하시려고 나타내시는 보통 방법은 그의 규례인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이다. 이것이 모두 그 택하신 자에게 효력이 되어 구원을 얻게 한다. 【관련성구】 1)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2)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행 20:21 3)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고전 3:6-8 지중해에 있는 그리스의 한 외딴섬. 마음만은 청춘인 도나와 스무 살 난 딸 소피 모녀는 바닷가에서 작은 모텔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 결혼식을 앞둔 소피는 엄마가 처녀 시절에 쓴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고 자기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있는 남자 세 명에게 엄마의 이름으로 청첩장을 보낸다. 어릴 적 친구들 타냐와 로지가 도착하자 옛 추억에 잠기는 도나. 하지만 곧이어 옛 애인 세 명이 한꺼번에 등장하자 혼란에 빠지는데... 제목이 “어머나, 세상에!”라는 뜻의 뮤지컬 『맘마미아!』의 배경은 그리스의 하얀 섬이다. ‘맘마미아’(Mamma Mia)는 원래 이탈리아어로 ‘내mi 엄마mamma’, 즉 “엄마야!” 하고 놀라는 감탄사이다. 파란 지중해에 떠 있는 하얀 섬. 그 섬에 아빠 없이 살고 있는 두 모녀. 어릴 적 꿈을 접고 미혼모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야만 했던 엄마는 옛 친구들의 방문으로 잠시나마 처녀 시절로 되돌아간다. 결혼을 앞둔 딸은 엄마의 옛 애인들을 불러 자신의 친아버지를 가려내기로 한다. 세 명의 중년 여성과 세 명의 중년 남성이 깜짝 재회를 하면서 해프닝이 벌어진다. 세 중년 여성은 도나의 침실에서 소녀 시절 결성했던 보컬 그룹 ‘도나와 다이나모스’ 포스터를 꺼내보며 꿈 많고 끼 넘쳤던 옛 시절을 회상한다. 세 아줌마가 10대 소녀로 돌아가 침대 위에서 뛰고 구르며 헤어드라이어와 스노클링 장비를 마이크 삼아 『댄싱 퀸』을 부른다. 그러는 한편에서는 느닷없이 한자리에 모인 세 명의 남자가 각기 자기들만의 추억에 잠긴다. 그중에서 샘은 아직도 도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다가온 결혼식. 딸의 결혼식 전날 도나가 딸 소피의 머리를 빗어주며 만감이 교차하는 노래 『내 곁을 떠나가네』(Slipping Through My Fingers)를 부르며 눈물에 젖는다. 하지만 소피는 중요한 건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을 미룬 채 약혼자 스카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생뚱맞은 결혼 무한 연기 발표에 갑자기 주인공을 잃은 하객들은 소란 끝에 샘과 도나를 대신 결혼시키기로 결정한다. 딸의 결혼식에서 엄마가 결혼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되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행 4:12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희귀하고 특이한 데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영적인 특별한 것을 체험하게 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것을 찾아 여기저기 다닌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듣는데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하나님의 축복으로 얻게 되는 믿음은 기묘하거나 특별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은혜의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신실한 신자인지 여부를 알려면 말씀이 선포되는 주일 예배에 성실하게 참석하는지를 물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진정한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 만족을 포함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그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뿌리가 되어야 한다. 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비유해보면 이렇다. 결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남녀가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가 좋은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배우게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결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계이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결혼의 세 번째 단계는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어 믿음의 세 번째 요소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헌신해야 할 것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핵심개념정리】 1.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되는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업음이라"(행 4:12) 하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2.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듣는데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하고 말씀한다. 3. 결혼에 비유해보면 믿음에는 어떤 단계가 있는가? 결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결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결혼의 세 번째 단계는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세 번째 요소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를 약속하고 주님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202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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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01
  • 이기도 목사 이기는 이스라엘
    하나는 신앙의 기둥, 또 하나는 과학의 기둥 위에 젊은이들이 바른 신앙에 입각한 바른 지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유기농 농산물을 기반으로 강남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원경선의 아들 원혜영과 그의 친구 남승우에 의해 1981년 처음 창립된 (주)풀무원식품의 ‘풀무원’이란 이름은 성경 말씀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유기농 식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풀(草)’을 연상하기 쉽지만,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도구인 ‘풀무’에서 따온 이름이란다. '풀무원’이란 이름의 유래는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는 말씀처럼 금이 풀무에 연단 될수록 더 단단해지듯 금보다 귀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단 과정이 있음을 새기고 자신의 순수한 땀으로 살 수 있도록 인간을 풀무질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를 낳을 때 당시 상황이나 상태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붉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붉다'는 뜻을 가진 '에서'로 이름 지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뒤꿈치'라는 뜻의 아케브에서 유래되었다. 어머니 리브가가 쌍둥이 형, 에서를 낳았을 때,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고 야곱이라고 지었다. 후에 야곱은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따라서 이스라엘로 개명했다(창 32:24~32).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라는 뜻이다. '주예수이름교회'를 세우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어명으로 받드는 '어명세계선교회'를 이끄는 이기도 목사도 1990년 안수를 받을 때 꿈속에서 하나님이 '네 이름을 기도라고 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목사의 생명은 기도인데 주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는구나' 생각하고 순종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의 삶과 사역은 계시의 연속이었다. 선교를 하나님의 어명으로 받드는 이기도 목사는 처음에 중국 선교를 하다가 몽골 선교로 바뀌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1990년대에 중국 쪽에 선교를 했습니다. 선교를 하다가 중국에서 체포돼서 블랙리스트에 올라갔습니다. 그 후로 중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기도를 하는데 '중국 선교에 제가 미쳐있는데 왜 문을 닫으십니까' 하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위를 보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항상 위를 보면서 기도를 하는데 무슨 말씀이신가 하면서 지도를 살펴봤더니 중국 위에 몽골이 있더군요. 하나님이 몽골에 가라는 말씀으로 받고 준비했습니다. 그랬더니 몽골 선교의 문을 열어주셔서 2000년부터 들어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2005년 말에 몽골에서 나와서 2006년에 '주예수이름교회'를 개척했습니다. 몽골은 라마 불교의 나라고 정부에서 비자를 잘 안 줍니다. 몽골사람들은 대부분 대중집회를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부족한 저를 통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 사람이 많이 믿게 됐습니다. 거기는 주일 개념도 없고 이방인들인데도 은혜받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핍박들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이겨내고 교회가 잘 세워졌습니다. 제가 2005년도 말에 한국에 나왔지만, 그 이후로 계속 들어가서 5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1년에 보통 서너 차례 들어가서 교육하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방언과 치유의 은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너무도 부족한 사람이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빌립보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을 붙들고 삽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약하고 부족한 자이지만 능력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를 선택해주셨고 기름 부어주셨고 내 입술에 말씀을 넣어주셨고 선교의 열정을 주셔서 신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 믿음이 한 번도 식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변함없이..." 이기도 목사는 2023년 7월 23일 오후 5시 '어명세계선교회' 주관 선교축제를 부천시 라비에벨 웨딩홀에서 열었다. 피종진 목사와 신규식 목사가 축사와 격려사를 했다. 그리고 7월 31일부터 8월 5일까지 몽골 십자군 집회(The Crusade in Mongolia)를 이끌고 있다. 그는 말했다. “선교는 어명입니다. 온 인류와 우주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시며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제자들에게 지상 최고, 최대의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일에 순종하는 것이 제 일생의 사명입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창 32:27-28 2023-08-01
    • G.MISSION
    • G.MISSION
    2023-08-01
  • BOOK_ 히브리서/ 박경호 헬라어 성경
    번역 박경호 신학자 20년 넘게 헬라어 번역 분야만 파고든 원어 성경 연구가이자 강해 설교자. 저자는 서울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 후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어릴 적부터 고신측 교단 소속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고, 교회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도 했으나 영어 성경을 통독·번역하며 한글 성경과 영어 성경의 많은 오번역들을 발견하고서 성경 원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원래의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히고자 번역을 하게 되었고, 그 뜻을 파고들면서 원어에 입각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구약 히브리어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생에게서 2년간 과외로 아랍어를 배웠으며, 4복음서와 요한계시록 헬라어 번역을 위해 20년을 기도하면서 번역과의 지루한 싸움을 해왔다. 저자는 성경해석은 원어에 기반하여야 하고, 이를 토대로 성경을 연구하여 적용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국내에서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헬라어 한 단어를 한글의 여러 단어가 아닌 오직 한 개의 단어로 직역하여 완벽하게 번역한 저자는 이 번역 성경이 독자들에게 전해진다면 원어를 모르는 누구도 원어로 된 성경을 읽는 것과 같은 뜻으로 쉽게 알게 될 것이라 확언한다. 통합측 복음신학교 총장과 교수진은 저자의 헬라어 번역의 탁월성과 신앙을 인정하였으며, 수많은 목회자도 저자의 번역서들과 원어 강해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고 그 메시지를 인용하여 목회 현장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마태복음, 누가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NEW마태복음,헬라어 번역 성경을 출간했고, 현재 히브리어&헬라어 베다니 번역원 원장으로서, 창세기 번역 성경도 출간할 예정이다.
    • G.CULTURE
    • G.BOOK2
    2023-07-29
  • 전국남전도연합회 회장 선출
    잘못을 알면서도 거짓을 조작하는 정치인들 공동체 의식 없이 신앙과 민주주의 근간 흔들어 삶의 공동체인 총회와 교회의 불행 성경적 진실에 입각한 정직한 정치를 되찾아야 체격이 좋은 탓에 체육 선생 아리스톤에게서 어깨가 '넓다'라는 의미의 이름 플라톤( Plato 기원전 428년/기원전 427년 또는 기원전 424년/기원전 424년 ~ 기원전 348년/기원전 347년) 노년에 철인 정치를 꿈꾸던 젊은 시절의 생각을 바꾼 것 같다. 내분에 말려든 시라쿠사이의 지인들이 정치적 조언을 구하자 일흔이 넘은 철학자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사람들을 추방하고 살해함으로써 보복을 하거나 적들에 대한 복수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억제하면서 자기 자신들이나 패한 자들이나 똑같이 만족할 만한 공동의 법들을 세워 경외심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제력을 써서 그들이 그 법들을 지키도록 강제하기 전에는 내분에 처한 사람들에게 패악이 그치는 일은 없습니다.” 남부 이탈리아의 시라쿠사이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였다. 플라톤은 평생 세 번 그곳을 방문해서 철인 왕의 꿈을 실현하려 했지만, 그의 노력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정치적 이상은 현실 정치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편지’에 담긴 조언은 그런 실패자가 전하는 아주 평범한 지혜였다. 플라톤이 거창한 철인 왕정의 계획을 포기하고 상식의 지혜로 돌아간 것은 그런 실패의 경험 탓일까, 나이 탓일까? 아니면 그의 시대가 내분에 휩싸였듯 그의 정치의식도 이상과 현실로 분열되어 있었을까? 어쨌든 ‘편지’에서 플라톤이 남긴 내분에 대한 처방은 ‘국가’의 거창한 철학보다 더 현실적이다. 제42회기 전국남전도회연합회(회장 양호영장로)는 제6차 전국임원회의를 2023년 7월 28일 12시 유성 계룡스파텔에서 열었다. 1부 예배 후 이어진 2부 회의에서 제43회기 회장 선출의 건을 다루는 자리에서 차기 회장으로 남부산동노회 소속 백웅영 장로(해운대제일교회)가 인사했다. 백웅영 장로는 7월 21일 경주 코오롱호텔에서 열린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영남지역 임원회에서 투표를 통해 동대구노회 소속 정시호 장로(북일교회)를 18:14로 제치고 차기 회장 후보가 되었다. 백웅영 장로는 오는 9월 열리는 전국남전도회연합회 제43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확정될 예정이다. 전국남전도연합회의 차기 회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보면서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은 잘못을 알면서도 거짓을 조작하고 저지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회 여러 분야의 지도자들, 정치계 지도자 대부분이 그렇다면 교회와 신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제108회 총회를 맞이하는 총회가 지도자 선출의 폐습으로 중병을 앓고 있는데 오정호는 언제까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만 외쳐댈 것인가. 지금 우리 총회의 질서 파괴와 도덕성 상실을 보면서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 책임은 정치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정치계 책임자들이 우리는 아니라고 항의할 수 있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 지도자들의 신앙심 결함이다. 신앙심이란 천국 갈 때만 필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교단 안에 공존하는 목사와 장로 정치인의 상식이면서 절대적인 권리와 의무를 동반하는 ‘공동체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걸 부정하는 사람은 총회에 살 자격과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이다. 총대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성경의 진실과 정의의 이상과 가치의 회복을 위해 신앙에 입각한 정직한 정치를 되찾아야 한다. 윤리 질서가 회복되고 총회의 이익과 교회의 미래를 위한 정치를 택해야 한다. 신앙의 행복과 신자다운 삶을 위한 자유와 인간애의 정신으로 출발해야 한다. 어려운 과업이 아니다. 주어진 권리와 의무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갈 5:22-26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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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9
  • 성경이 삶이 되다_ 담대하고 인내하라
    주신 말씀_ 히브리서 10:35~38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담대하고 인내하라 성경 속에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는 말씀이 매우 많이 나온다. 어느 목사님은 설교에서 이 말씀이 삼백육십다섯 번이 나온다고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 말이 그처럼 많이 성경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늘 두려움에 도전 당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사탄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마음이며 그 두려움에 굴복당함의 끝은 실패요, 절망이며 사망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나약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시며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임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굳셀 때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이겨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갈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지팡이 하나 붙잡고 거대한 문명과 힘의 상징인 애굽 왕 바로 앞에 서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 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용기와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이고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도 사울의 칼날을 피하고 이겨내어 결국 이스라엘 통일 국가의 왕위에 오른 것도 남다른 담대함과 용기, 인내를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경 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담대함과 인내심을 가진 자들이다. 담대함의 극치는 죽음 앞에서 나타난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 그것은 오직 우리 주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삶 속에서도 담대함과 용기 있는 자가 성공하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이자 이치이며 성공을 이루기까지 인내하며 참는 끈기 역시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능하리라. 어떤 사탄의 간계 속에 두려운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오직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가야 할뿐 뒤로 물러가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했으니 또한 인내할 뿐이로다. 아멘. 2023-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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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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