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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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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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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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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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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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 G.OPINION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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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헌법과 목사
    헌법 전문(前文)은 어떤 상식을 공유하고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지 드러내는 글 우리 믿는 자와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우리 목사는 또 다른 헌법 총회 헌법을 가져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 성례 거행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 강이 풀리면 봄이 오겠지. 그게 오면 총회도 봄이겠지. 그건 안 와도 소식이야 오겠지. 오늘도 시골 교회서 사진 찍고 간다. 총회의 봄이 오면 이 아득함도 풀리겠지. 송구영신에 얼었던 교회 지붕도 제멋에 녹는데 분쟁 교회마다 왜 아니 풀릴까. 오늘도 어느 교회에서 사진 찍다 간다. 헌법 전문(前文)은 우리가 어떤 상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지를 지극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국가 공동체가 최대다수의 합의 위에서 빚은 한 편의 문장 한 편의 시다. 나라의 상식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표준이다.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우리 믿는 자와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우리 목사는 또 다른 헌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총회 헌법이다. 본 총회의 헌법은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시대(1901∼1906)에 다음과 같이 헌장에 관한 준비를 하였다. 1901년 만국장로회 헌법 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1902년에는 헌법 준비위원과 노회 규칙위원을 선정하였다. 190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헌법 중 일부를 역간 하여 소요리문답 5천부를 출판하였다. 1905년에는 교회 신경을 공의회가 의정 채용하게 되었다. 그후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노회)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것이 최초의 헌장이었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한 제90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와 합동하였고 합동원칙합의문의 준수와 함께 본 헌법을 사용키로 하였다. 제 1 조 목사의 의의(意義)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任職)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롬 11:13). 성경에 이 직분 맡은 자에 대한 칭호가 많아 그 칭호로 모든 책임을 나타낸다. 1. 양의 무리를 감사하는 자이므로 목자라 하며(렘 3:15, 벧전 5:2∼4, 딤전 3:1) 4.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하며(계 2:1) 가끔 생각한다. 칼빈(Jean Calvin, 1509. 7. 10 – 1564. 5. 27) 이후 믿음에 믿음으로 살다 떠난 목사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눈처럼 흰 학이 된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전부터 겨울이면 믿음의 목사들이 높이 울며 날아갔던 듯싶어 나도 그 울음소리를 들은 듯 눈물 글썽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던 듯싶다. 날아가는 저 하늘 학의 무리들 멀어져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 즐거운 여행 마치는 날 나도 그 속의 한 마리 학이 되어 아픔도 근심도 다 벗고 하늘 높이 주님처럼 오르겠지. 나는 가끔 생각한다. 믿음에 믿음으로 살다 떠난 목사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눈처럼 흰 학이 된 것이라고. 2017-04-28
    • G.OPINION
    2017-04-30
  • 실행위원장 향배(向背)
    총회장의 제일 의무는 총회 결의를 지키고 실행하는 일 신분이 회복된 울산남교회의 남송현 목사총회 대표자 서류 발급을 하지 않아 납골당 측 계약이행 소송도 감당해야 할 것 바람이 불어도 눕지 않는 풀이 될 때 소신 없는 총회장이란 오명을 벗을 것 총회장 김선규의 제101회기 첫 총회실행위원회가 3월 30일 오전 11시 총회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실행위원회에 상정한 안건은 폐간 기독신문 관련 보고 반총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회 관련 보고 김선규가 목맨 한교총과 한기총 등 연합단체 가입 추진 총회 결의 이행 보고 총무 선거 세칙 마련 칼빈의 정신은 없고 당치도 않은 설교대회나 여는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사업 추진 보고 등이었다. 명색이 실행위원회인데 총회에서 결의된 안건 실행을 위한 안건이나 진지한 논의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현안을 내놓은 폐간 기독신문이나 총신대 문제 등의 안건에 대해서조차 위원장 김선규 총회장은 아무런 주도적인 의견이나 의지를 비치지 않았다. 회의 도중 격한 충돌 등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사진행을 주도하지 않고 거의 방관자 자세였다. 강일구는 연신 떠들어댔다. 실행위원회인데 실행을 위한 적극적이고 가능한 의견 논의나 동의 제출은 없었다. 예컨대 총회에서 결의한 납골당 매각 문제나 남울산노회 재판국 판결과 총회 결의에 따른 후속 이행 조치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이 신분이 회복된 울산남교회의 남송현 목사에 대한 총회 대표자 서류 발급을 하지 않고 있다. 총회장의 제일 의무는 누구보다 총회 결의를 지키고 실행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 다음 총회는 그 총회장에 대해 박근혜같은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납골당 측의 계약이행 같은 소송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김선규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여기저기 설교하느라 분주히 다니는 그에겐 하루하루가 심판의 날이며 역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가 바람 앞에서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람이 불어도 눕지 않는 풀이 될 때 소신 없는 총회장이란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다. 수그리느냐 고개를 드느냐의 갈림길에 선 김선규의 선택을 주목하는 이유다. 2017-04-28
    • G.OPINION
    2017-04-30
  • 목사의 헌법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우리가 어떤 상식을 공유하고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지 명시한 글 우리 헌법은 장로회 정치는 지교회 교인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가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 명시 강이 풀리면 봄이 오겠지. 그게 오면 총회도 봄이겠지. 그건 안 와도 소식이야 오겠지. 오늘도 나주금천교회에서 사진 찍고 간다. 총회의 봄이 오면 이 아득함도 풀리겠지. 송구영신에 얼었던 교회 지붕도 제멋에 녹는데 분쟁 교회마다 왜 아니 풀릴까. 그래도 오늘은 풀릴 기미가 보이는 광주중앙교회 교육관에서 취재하고 간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우리가 어떤 상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하는지를 지극하게 드러내는 글이다. 국가 공동체가 최대다수의 합의 위에서 빚은 한 편의 문장 한 편의 시다. 나라의 상식을 바르게 세우기 위한 표준이다.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이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우리 믿는 자와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우리 목사는 또 다른 헌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총회 헌법이다. 본 총회의 헌법은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시대(1901∼1906)에 다음과 같이 헌장에 관한 준비를 하였다. 1901년 만국장로회 헌법 번역위원을 선정하였고 1902년에는 헌법 준비위원과 노회 규칙위원을 선정하였다. 1904년에는 웨스트민스터 헌법 중 일부를 역간 하여 소요리문답 5천부를 출판하였다. 1905년에는 교회 신경을 공의회가 의정 채용하게 되었다. 그후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노회)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것이 최초의 헌장이었다. 1968년 9월 19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회집된 제53회 총회에서 재수정하게 되고 1990년 9월 18일 김제중앙교회에서 회집된 제75회 총회에서 헌법을 개정하기로 가결하고 위원 15인을 선정하여 일임하였다. 동위원회에서 정치와 예배모범 일부를 수정한 안을 1991년 9월 24일 대구동신교회에서 회집된 제76회 총회에 보고하니 채택하고 교회의 모든 직임의 연한을 만70세까지로 함을 본회가 결의하여 보고된 개정안에 포함시켜 이를 각 노회에 수의하여 1992년 9월 22일 인천제2교회에서 회집된 제77회 총회에서 이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2005년 9월 2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한 제90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와 합동하였고 합동원칙합의문의 준수와 함께 본 헌법을 사용키로 하였다. 이 헌법의 핵심 장로회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장로회 정치 이 정치는 지교회 교인들이 장로를 선택하여 당회를 조직하고 그 당회로 치리권을 행사하게 하는 주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민주적 정치이다. 당회는 치리 장로와 목사인 강도 장로의 두 반으로 조직되어 지교회를 주관하고 그 상회로서 노회 대회 및 총회 이같이 3심제의 치리회가있다. 이런 정책은 모세(출 30:16 18:25 민 11:16)와 사도(행 14:23 18:4 딛 1:5 벧전 5:1 약 5:14) 때에 일찍 있던 성격적 제도요 교회 역사로 보더라도 가장 오랜 역사와 항상 우위를 자랑하는 교회는 이 장로회 정치를 채용한 교회들이며 또한 이 장로회 정치는 다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본으로 한 것인 바 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은 영국 정부의 주관으로 120명의 목사와 30명의 장로들이 1643년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예배당에 모여서 이 장로회 헌법을 초안하고 영국 각 노회와 대회에 수의 가결한 연후에 총회가 완전히 교회 헌법으로 채용 공포한 것이다. 본 대한예수교장로회 교회의 헌법도 1912년 총회가 조직되고 1917년 제6회 총회 때 본 총회의 헌법을 제정할 때에 이 웨스트민스터 헌법을 기초로 해서 수정 편성한 것이다. 제 1 장 정치 예수교 장로회 정치의 일정한 원리 8개조가 있으니 이것을 이해하여야 교회의 성질을 알 것이다 제 1 조 양심 자유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過分)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人類)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侵害)하지 못한다. 제 2 조 교회 자유 1. 전조(前條)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일례(一例)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각기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一切)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設定)할 자유권이 있다. 2.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同一視)함을 바라는 것뿐이다. 제 3 조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체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설치(設置)하사 다만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신도로진리와 본분을 준수하도록 관리(管理)하게 하신 것이라. 이러므로 교우 중에 거짓 도리를 신앙하는 자와 행위가 악한 자가 있으면 교회를 대표한 직원과 치리회가 당연히 책망하거나 출교할 것이라. 그러나 항상 성경에 교훈한 법례(法例)대로 행한다. 제 4 조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진리는 선행의 기초라 진리가 진리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傾向)에 있으니 주 말씀하시되「과실로 그 나무를 안다」하심과 같으니 진리와 허위(虛僞)가 동일(同一)하며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관계 없다 하는 이 말보다 더 패리(悖理)하고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結託)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제 5 조 직원의 자격 제 4 조의 원리에 의지하여 교회가 당연히 직원을 선정하되 교회의 도리를 완전히 신복(信服)하는 자로 선택하도록 규칙을 제정(制定)할 것이다. 그러나 성격(性格)과 주의(主義)가 다 같이 선한 자라도 진리와 교규(敎規)에 대한 의견(意見)이 불합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일반 교우와 교회가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제 6 조 직원 선거권 교회 직원의 성격과 자격과 권한과 선거와 위임하는 규례는 성경에 기록되었으니 어느 회에서든지 그 직원을 선정하는 권한은 그 회에 있다. 제 7 조 치리권 치리권은 치리회로나 그 택해 세운 대표자로 행사함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준봉 전달(遵奉傳達)하는 것뿐이다. 대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인즉 어느 교파의 치리회든지 회원의 양심을 속박할 규칙을 자의(自意)로 제정할 권리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하신 뜻에 기인(基因)한다. 제 8 조 권징 교회가 이상(以上) 각 조의 원리를 힘써 지키면 교회의 영광과 복을 증진(增進)할 것이니 교회의 권징은 도덕상과 신령상의 것이요 국법상의 시벌(施罰)이 아닌즉 그 효력(效力)은 정치의 공정(公正)과 모든 사람의 공인(公認)과 만국 교회의 머리되신 구주의 권고와 은총에 있다. 가끔 생각한다.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이후 믿음에 믿음으로 살다 떠난 목사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눈처럼 흰 학이 된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전부터 겨울이면 믿음의 목사들이 높이 울며 날아갔던 듯싶어 나도 그 울음소리를 들은 듯 눈물 글썽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던 듯싶다. 날아가는 저 하늘 학의 무리들 멀어져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 즐거운 여행 마치는 날 나도 그 속의 한 마리 학이 되어 아픔도 근심도 다 벗고 하늘 높이 주님처럼 주님 계신 곳으로 오르겠지.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 헌법에 따라 믿음에 믿음으로 살다 떠난 목사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실은 눈처럼 흰 학이 된 것이라고. 2017-03-06
    • G.OPINION
    2017-03-06
  • 2월 이생각저생각
    러브 브레이슬릿 1969년 까르띠에는 전 세계의 연인들에게 그들의 영원하고 충실한 사랑을 위한 특별함을 표현할 수 있도록 ‘러브’라는 이름의 브레이슬릿을 발표했다. 러브 브레이슬릿은 중세의 전사가 아내에게 채운 정조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일단 손목에 끼운 다음 특수 제작된 전용 드라이버를 이용하여 나사를 고정시키는 특별한 디자인이다. 기존에 주얼리를 착용하던 방식과 비교하면 혁명이었다. 까르띠에 관계자는 “브레이슬릿과 함께 링·네크리스·이어링이 연인의 영원한 사랑을 표현하는 결정체로 사랑 받고 있다”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 받는다는 점으로 인해 보석은 한층 더 그 빛을 발하게 됐다”고 전했다. 목사들도 한번쯤 상여금으로 온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해 내조하는 사모님들에게 선물해봄직 하지 않을까. 촛불·태극기 극한 대치 속 도심 ‘비무장지대’ 헌재의 탄핵심판 최종변론일을 하루 앞둔 2월 26일 박근혜 대통령에겐 그러나 ‘머나먼 길’이었다. 그는 대통령 최초로 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해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다 결국 불출석하기로 했다.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출석하면 반드시 신문하겠다는 헌재의 방침을 박 대통령이 부담스러워한 것 같다”고 전했다. 결국 이번 주부터 헌재는 결론을 앞둔 마무리 수순에 돌입한다. 2월 27일 오후 2시는 최종변론하고 선고는 3월 13일 이전으로 예상하고 있다. 대통령 대리인단은 “9인 재판관이 아닌 현재의 8인 재판 결론은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변수가 되진 못할 듯하다. 8인 재판이 위헌이 아니란 헌재의 결정까지 있다. 박 대통령에게나 탄핵 추진 세력에게나 모두 ‘운명의 시간’을 앞두고 2월 25일 토요일 서울 도심을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가 갈랐다. 경찰차벽으로 가로막은 둘 사이엔 300m의 빈 공간이 생겼다. 말 그대로 두 세계를 가르는 ‘비무장지대(DMZ)’였다. 2월 마지막 토요일 밤 이 역사 현장을 몇몇 목사들도 가 본 모양이다. 총회 오뚝이 엷은 베이지 버버리 트렌치코트 애용 버버리가 봄 시즌에 어울리는 선물 아이템을 제안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인 트로피컬 개버딘 트렌치코트이다. 트로피컬 개버딘은 주위 환경에 알맞으면서 가장 가벼운 옷을 선택하고자 하는 토마스 버버리의 철칙에 충실한 옷이다. 온화한 날씨에 알맞은 가벼우면서도 보호 기능이 있는 소재를 갖췄다. 그래서인지 총회 오뚝이도 엷은 베이지 색 버버리 트렌치코트를 애용한다. 트로피컬 개버딘 트렌치코트는 아주 가는 실가닥(gossamer thread)을 이용했다. 온화한 기후에 어울리는 이전보다 가벼워진 개버딘으로 제작했다. 개버딘은 100여 년 동안 버버리 스토리의 핵심이자 트렌치코트의 중심이었다. 버버리는 개버딘을 다른 방수 소재와 차별화되게 도안해 버버리 공장에서 제작하고 있다. 트로피컬 개버딘 소재는 기존의 코튼 개버딘보다 가벼우면서 강한 내구성을 자랑한다. 옷감 안으로 침투하는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버버리의 시그니처인 단단한 트윌 구조로 짰다. 유연성과 볼륨감을 더하기 위해 텀블 공정을 거친다. 텀블 공정은 완성 사이즈보다 일부러 크게 제작해 고온에서 최대한 수축시키는 작업이다. 고교 졸업장도 없는 라이트 형제 800m 비행 뒤의 열정과 몰입 형 라이트 윌버(1867~1912)와 동생 라이트 오빌(1871~1948)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형제다. 1903년 12월 17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의 모래언덕에서 ‘동력을 이용해 공기보다 무거운 물체를 조종하고 지속적으로 첫 비행’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들 라이트 형제의 위대함은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과정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4년간 격렬한 폭풍 연이은 실망 대중의 무관심과 조롱 그리고 마귀처럼 지독하고 구름처럼 무수했던 모기떼를 견디며 키티호크의 바닷가에서 비행 실험을 했다. (집이 있는) 오하이오와 이곳을 다섯 차례 오갔다. 모두 합쳐 1만1000㎞를 기차로 이동했다. 그 결과가 모두 합쳐 800m가 조금 넘는 시험 비행 성공이었다. 수천 번의 지리한 실험 끝과 끈질긴 개량 끝에 이룬 결과였다. 그것은 총회 오뚝이 같은 불굴의 의지와 신념 부단한 지적 관심과 호기심야말로 업적을 일군 ‘진짜 동력원’이었다. 그 배경은 형제의 ‘영명함’보다 이들을 이렇게 담금질한 이력에 있다. 고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형제는 1893년 오하이오주 데이튼의 집 근처에 자전거 판매점과 수리점를 열었다. 형제는 밤낮으로 자전거에 푹 빠졌다. 자전거포 시대는 비행기 시대의 거름이 됐다. 기울어지는 자전거를 그 방향으로 계속 달리게 하면 자세가 바로 잡하는 원리는 비행기 조종에도 응용됐기 때문이다. 1895년에는 2층 건물로 가게를 옮겨 1층은 전시실로 쓰고 2층에선 자체 모델 자전거를 주문 제작했다. 사업은 번창했다. 여기에 머물렀으면 항공 시대는 연기됐을 것이다. 결정적인 기회는 호기심 많은 청년에게 먼저 찾아왔다. 1896년 장티푸스로 장기간 침상 신세를 지던 오빌이 독일 활공기(글라이더) 연구가 오토 리리엔탈을 다룬 기사를 봤다. 감동한 형제는 삶 자체를 비행기에 몰입했다. 교사로 일하던 여동생 캐서린까지 나서 형제를 도왔다. 형제의 공동작업과 가족의 따뜻한 관심은 인류사의 큰 걸음에 윤활유가 됐다. 진보란 결국 인간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 잘 쓰면 약인데 … 인류를 구성하는 핵심 정치 단위는 씨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전인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도덕이 탄생했다. 조슈아 그린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에 따르면 도덕은 진화의 산물이다. 도덕이 초기값(default)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경험은 우리의 뇌에 각인됐다. 도덕 덕분에 ‘부족’ 내 협력이 수월하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동향·동문 같은 출신 사람들에겐 ‘우리가 남이가’의 논리가 작용한다. 부족 내에서 도덕을 깨는 사람은 죄의식·수치심을 느낀다. 부도덕한 행위는 부족에 대한 배신이다. 분노의 대상이다. 실험심리학자·신경과학자·철학자인 죠수아 그린 교수에게 도덕이란 “이기적인 개인이 사회적 협력이 주는 이득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심리적인 적응”이다. 이타심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성향이다. 그린 교수는 이러한 사실을 뇌의 기능적자기공명영상(fMRI) 촬영으로 밝혀냈다. 현대인들은 각자의 도덕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 서로 부딪힌다. 촛불과 태극기 집회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한 차원 높은 도덕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족 내에서 도덕적 판단은 직감과 본능의 영역에 속한다. 0.001초 만에 판단이 선다. 디지털 카메라를 자동모드로 설정해 놓고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나 vs 우리’ 문제는 해결됐다. 문제는 ‘우리’(총회) vs ‘그들’(총신)이다. ‘다른 부족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마음 한구석에 있다. 부족 간 협력은 어렵다. 부족 내 협력을 위한 도덕이 ‘자동 모드’라면 부족 간 협력은 생각이 좀 필요한 ’수동 모드‘다. 수동 모드에서는 본능·직관을 넘어 이성이 등장하고 우리에겐 믿음이 앞선다. 하지만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고 믿음보다 사욕이 눈을 가린다. 다른 ‘부족’과도 잘 해보자 협력하자 연정하자고 하면 반응이 시큰둥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심판과 처단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그들을 넘어선 도덕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대에는 부족·민족을 넘어선 새로운 도덕이 필요하다. 부족들의 도덕이 서로 충돌할 때 이를 해결하는 더 좋은 방법과 더 나쁜 방법이 있다. 장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 방법과 우리를 수렁에 빠트리는 방법이 있다. 죠수아 그린 교수에게 좋은 방법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공리주의(utilitarianism)다. 공리주의를 재해석하면 ‘고차도덕(metamorality)’이라 할 수 있다. 고차도덕은 “서로 경쟁하는 부족의 도덕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글로벌 철학”이면서 ‘깊은 실용주의(deep pragmatism)’이기도 하다. ‘우리가 남이가’를 나라 전체 전 인류에 적용하는 게 고차도덕이다. 우리의 뇌는 고차도덕을 썩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고차도덕을 구현하려면 어쩌면 뇌가 아닌 칼빈의 개혁주의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늘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염려해야 한다 “윤리도 그렇고 뭐든지 그 기원이나 과정까지 포함해 완벽하게 좋은 방책이라는 것은 없다. 기사도가 어떻게 생겼나. 약자와 여성을 존중하는 게 기사도이지만 기사도는 깡패·칼잡이들이 만들었다. 칼잡이를 하다 보니까 ‘이런 규칙은 지켜야겠다’는 각오가 생긴 것이다. 얼마전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한 다음에 미국 기자가 쿠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한 쿠바 작가가 이렇게 얘기한다. 우리가 결국 자본주의 쪽으로 가는 건데 ‘야만적 자본주의(savage capitalism)’로 가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그 작가가 이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카스트로 체제도 야만적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였을 것이다. 하나의 야만주의에서 또다른 하나의 야만주의로 가는 것이 두렵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완전히 좋은 선택이라는 것은 없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혼란을 겪었기 때문에 사회 공동의 윤리적 기준을 갖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할 때는 나쁜 수단을 써도 된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3년 전 세월호 참사가 결정적이었다. 우리는 세월호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지 못했다. 재발 방지 시스템을 갖추지 못했다. 학생들을 버린 선장 구조에 소홀했던 당국 등 법적 책임은 물어야 하지만 동시에 무엇이 왜 잘못됐는지를 철저히 밝혀야 했다. ‘누구’보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살펴야 했다. 그러려면 들어야 한다.” 질의 : 정치의 목적은 권력쟁취 아닌가. 응답 : 정치학자들 얘기다. 권력을 사적으로 표현한 거다. 인문학자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다. 정치는 서로 다른 걸 어울리게 공존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좋은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질의 :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 응답 : 1997년 민주당 대선후보였을 때 기자들이 이라크전 찬반 여부를 물었다. 답변이 기막혔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했다. ‘하나님이 미국 편’이냐는 질문도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냐 아니냐보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답했다. 알고 보니 이 말은 링컨이 먼저 썼다. 남북전쟁 때 ‘하나님은 북군 편’이라는 참모들의 말에 링컨은 ‘우리가 늘 하나님 편에 있는지 염려해야 한다’고 했다. 정치가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 모든 새로운 것의 어머니는 모든 오래된 생각 경청의 대가는 카바레 제비다. 환심을 사려는 의도는 불순하지만 ‘그랬구나’ ‘힘들었구나’라며 상대방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역으로 경청과 가장 먼 사람은 정치인·종교인·교수다. 자기들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모든 새로운 것의 어머니는 모든 오래된 생각들”이다. 알고 보면 혁신은 오래된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생각(리씽크)’됨으로써 화려하게 부활한 ‘오래된 생각’들이 있다. 미래의 운송수단으로 꼽히는 전기차도 실은 과거의 유산이다. 최초의 전기차는 1837년 영국의 로버트 데이비슨이 처음 만들었고 19세기 말 미국에 등록된 전기차 수는 3만 대가 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 대규모 유전이 발견돼 휘발유 값이 급락하고 배터리 용량이 한계에 부닥치면서 전기차 생산은 중단되고 말았다. 전기차의 가치를 되살려낸 사람은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다. 이베이 공동 창립자로서 지분을 팔아 거부가 된 그는 2004년 테슬라를 만들어 전기차 사업에 돈을 쏟아 부었고 대성공을 거뒀다. 창의성이란 간과되었던 아이디어가 지닌 가치를 깨닫는 상상력일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혁신의 시대는 재발견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개혁을 위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우리도 칼빈주의 뿌리인 “기독교강요”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리씽크’가 혁신으로 이어진 사례는 비즈니스와 의학·군사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펼쳐진다. 재건성형·접합 수술 등에 활용되고 있는 ‘거머리 요법’은 고대 인도와 그리스 의학서에도 기록돼있는 치료법이다. 한동안 비과학적이고 혐오스러운 의학의 역사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20세기 들어 재조명받아 2004년엔 미국 식약청이 거머리를 ‘의료기구’로 승인했다. 또 2003년 중국 약사 한리가 특허를 내 인기를 끈 전자담배도 반세기 전에 이미 나왔던 아이디어다. 1965년 미국인 하버트 길버트가 비슷한 발명품을 만들었지만 거대 담배회사의 광고 공세에 밀려 생산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반면 한리는 우리 교회가 바라고 권장하는 금연 바람 덕을 톡톡히 봤다. 우리 시대가 특별히 과거보다 새롭고 독보적이지 않으므로 과거의 아이디어들도 얼마든지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그렇다면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세상에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나 혁신”을 이끌어내는 비법은 뭘까. 결론은 기존의 것에 대한 “믿음을 보류하고 다시 생각해보는 일”이다. 누구도 영원히 틀렸다고 말하지 말고 지금도 생각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다시 해야 한다. 일론 머스크가 만든 전기차 회사 테슬라는 미국 공학자 니콜라 테슬라(1856∼1943)에서 이름을 따왔다. 테슬라는 현대식 교류 전기 공급 체계를 개척했다. 1888년 그가 만든 최초의 교류 유도전동기는 1세기 후 테슬라 전기차의 중심 장치가 됐다. 테슬라는 미래에 대한 정확한 전망으로도 후세를 놀라게 한 인물이다. 1926년에 50년 후 세상이 어떨지 묻는 질문을 받고 “무선 기술이 완벽하게 적용되면 온 세상이 거대한 뇌로 변할 것이다. TV와 전화기를 통해 수천㎞가 떨어져 있어도 앞에 있는 것처럼 서로를 보고 들게 될 것이다. 그런 기능을 하는 장치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또 드론의 등장도 예측했다. 그의 전망이 빗나간 곳도 있긴 하다. “국경이 대부분 사라지고 다양한 인종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계를 향해 큰 진전이 이뤄질 것”이란 대목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찌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찌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전도서 8:17 2017-02-28
    • G.OPINION
    2017-02-27
  • 총회 가는 역사(驛舍)
    해는 저물고 총회 가는 삼성역 지하철 역사(驛舍)에서 너를 보냈다. 예레미야 애가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젊은 믿음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아직 갈 길 먼 총회 역사(歷史)가 전동차에 실려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두리번거리고 나는 이곳에서 내 죄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외치는 가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누굴 닮은 거북이여 느릿느릿 소망을 싣고 가거라. 슬픔이 없는 곳으로 통하는 지하철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어릴 적 가난한 홍제동 언덕 성탄절이지만 마지막 은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낡은 교회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이 시려 덜컹거리는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횃대 위의 닭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주님이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기도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껴잡은 손바닥을 불빛 속에 오므리며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추위에 떨 듯 한 상자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끓인 보리차 김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기도는 식어간다. 조그만 예배당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사람들은 더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배당에서 오지 않는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나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1942년 1월 말 일본으로 떠나기 전 젊은 윤동주는 이런 시를 남겼다.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참회록 - 윤동주(1917~45)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만 24년 1개월을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그때 그 젊은 나이에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슬픈 사람의 뒷모양이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는 여전히 믿음과 순결의 피 흐르는 우리의 순교자다. 2월 16일은 그의 76주년 기일(忌日)이다. 믿음을 전하고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할 총회 소속 목사들은 사후(死後) 각기 기일마다 총회와 총신을 위해 어떤 기억을 남길 수 있을까. 2월 15일 총장도 없는 총신대 사당동캠퍼스 졸업식을 다녀오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졌다. 우리의 믿음은 정말 어디로 가고 있나하는 참회의 생각에... 2017-02-17
    • G.OPINION
    2017-02-17
  • 눈 내리고 비 오는 총회
    얼굴 없이 지는 설날 시간은 가는 겨울인데 얼굴 없이 오는 비에 겨울은 차갑게 운다. 서럽다, 이 나의 가슴속에는 흰 눈 같은 은혜 사무치는데 총회 앞 높은 느티나무의 푸릇한 가지 해 지나니 부활을 위해 바뀌는가. 총회 앞 대치동 고개에 애달피 설운 비는 내리지만 내 마음은 지난 총회자리에 주저앉아 머문다. 지난 총회 떠난 길 총신이며 납골당이며 경남동노회며 울산남교회며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들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아쉬움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제101회 총회 자욱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멍울이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빛 속에 총회 유리창으로 통하는 소망이 묶인다. 하나님의 뜻으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 것 같다. 거기 총회 언덕 꼭대기에 서서 소리치지 말라. 물론 그게 황규철을 싸고돌아 칼부림까지 낳은 안명환이든 납골당을 비비 꼬아놓은 서기행이든 뜬금없는 유장춘이든 말은 옳다, 너무 옳아서 말하는 것이 도리어 성가시다. 그 말만 많은 언덕에 차라리 대장간을 지어라. 거기 풀무를 만들고 거기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낫이든 호미든 고퇴든 만들었다고 외치라. 그러면 우리가 모두 너나없이 들을 것이다, 듣고 그대가 무엇을 했는지 알 것이다. 그러나 되지도 않는 너무 옳은 얘기만 큰소리로 외치지 말라. 옳은 말들은 너무 옳아서 도리어 성가시다. 말보다 실행이다. 실행이 따르지 않는 말은 푸념이고 헛소리다. 말로만 외치지 말고, 대장간이라도 지어라.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무엇을 만들었으니 사든지 가져가든지 하라 외치라. 그러면 우리는 당신들이 만든 그것을 보고 당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총회에서 만나자. 부디 그곳에서 웃어주고 악수도 벼랑에서 만난 목숨처럼 해다오. 그러면 나는 실행하지 않은 총회 결의를 짜서 네 입에 부어줄까 한다. 그러면 제102회 총회에서 다윗의 별 전계헌 총회장 사회로 또 이렇게 저렇게 결의가 될 것이다. 도마같이 주님을 만지고 다니는 발길 속으로 지금 부활의 봄을 재촉하는 은혜의 비 내려 믿음의 친구라도 생각하는 추억에 잠겼으면... 2017-02-09
    • G.OPINION
    2017-02-09
  • 아듀 2016 ‘타인의 고통’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 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고 왜곡시키는 일 마다하지 않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끝 모를 잔혹함을 보이는 인간들로 인한 ‘타인의 고통’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문제 지적 새해 김선규 총회장 이끄는제101회 총회 본디 맑은 말이 흘러넘치길 소망 12월 22일 남성역에서 총신 재단이사회 취재 가는 길에 빗방울이 툭 정수리에 떨어진다. 가던 길 멈추고 하늘 쳐다본다. 우산 펴들다 말고 하늘에 잠긴다. 저 까마득한 공중에서 단 한 방울로 나를 명중시킨 이는 누구일까. 하기야 이 많고 많은 목사 중에 능란한 혀 놀림으로 교단의 명예로운 직을 관통해버린 해괴한 작자도 있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존재는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치고 축적된 결과물인가. 그런데 우연의 외곽에 필연의 법칙이 있다. 가령 빗방울이 하늘로 솟을 리 없고 꽃이 피기도 전에 열매가 맺히는 법이 없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리도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리도 없다. 우연에 시간의 더께가 쌓이면 필연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필연의 스펙트럼 안에 수많은 우연이 존재한다. 예컨대 나는 그를 만났지만 여느 목사들처럼 그에 대해 속속들이 모를 수도 있었다. 그러니 “교단의 명예로운 직을 관통해버린 해괴한 작자”는 우연과 필연의 포개짐에 파우스트를 유혹한 메피스토펠리스의 말을 따르는 불신이 더해진 “성공의 모델”이다. 그러나 성공으로 그에게서 예수는 떠나고 최순실 사태에서 보듯 마귀가 그 주위를 맴도는 자들이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될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말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다(딛 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한다(마 5:48).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다"(요일 2:21).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온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신다(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눅 18:27). 주님이 말씀해 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 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마음에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한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미국의 비평가 소설가 연출가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 1. 16 ~ 2004. 12. 28)은 사진작가로 사회비리를 고발한 행동가이자 예술가이기도 하다. 손택은 그녀의 저서 ‘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 1977)에서 사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두려움에 빠질 때 총을 발사한다. 그렇지만 향수에 젖을 때는 사진을 찍는다. 인정하든 안하든 간에 인간 모두는 관음증환자다." 수전 손택은 행동하는 지성인이자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느꼈던 점을 고스란히 담은 저서 ‘타인의 고통’이 있다. 그녀는 이 책으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평화상을 수상했다. 기자가 물었다. "당신이 쓴 모든 형태의 저술에 공통적으로 내재해 있는 주제는 무엇입니까.""문학과 사회죠.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수전 손택은 1933년 1월 16일 뉴욕에서 출생했다. 1951년 시카고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에서 1954년 영문학석사를 1955년 철학석사를 받은 다음에 미국의 여러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1963년 그녀의 첫 번째 소설 ‘은인’(The Benefactor) 1966년 에세이 ‘해석에 반대한다’(Against Interpretation)가 출간됐다.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그녀는 당대의 예술 흐름에 깊게 몰두하며 단호하게 반해석학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입장을 천명했다. 프레더릭 제임슨(Frederic Jameson)은 이 책의 위험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Marxism and Form)을 내놓았던 것은 유명하다. 여러 저서 외에도 그녀는 몇 편의 영화와 연극을 연출했다. 유방암이 발병한 이후 1978년 에세이인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이 출판됐다.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발전된 입장을 현실세계에 적용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뉴욕과 파리를 오고가며 살다가 2004년 12월 28일 백혈병으로 뉴욕에서 죽었다. 그때 당시 뉴욕 타임즈가 '여왕이 영면하다'로 제목을 뽑을 만큼 뉴욕의 문화계와 사교계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녀는 또한 일찍이 전위예술(아방 가르드 avant garde)의 내털리 우드로 불렸을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지만 군더더기 없는 문체만큼 빈틈없고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펴낸 ‘타인의 고통’은 ‘사진에 관하여’처럼 사진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9․11사건 이후에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지전쟁과 테러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담고 있다. 그녀는 포르노그래피와 마찬가지로 전쟁과 테러와 같이 잔혹한 상황을 담은 사진 역시 중독성이 있어서 반복될수록 시시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 점을 지적했다. 손택은 일생동안 기계로 대량 복제되는 이미지가 문화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일관되고 추적하고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현실참여로 발전시켰다. ‘타인의 고통’에서 저자는 전쟁과 테러로 점철되고 있는 지구촌에서 끝 모를 잔혹함을 보이는 인간들로 인한 타인의 고통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우리가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말했다. “‘타인의 고통’은 사진 이미지를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전쟁을 다룬 책입니다. 제게 있어서 이 책은 스펙터클(압도될 만큼 엄청나고 굉장한 상황)이 아닌 실제의 세계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논증입니다. 저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서 사람들이 이미지의 용도와 의미뿐만 아니라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14쪽).” 그녀가 ‘타인의 고통’에서 인용하는 자료들은 중세에서 현대까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중동 그리고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은 보스니아내전이었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발칸반도를 무대로 벌어진 보스니아내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대규모 학살이 벌어진 치명적 전쟁으로 규정되고 있다.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연방탈퇴로 촉발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과정에서 정작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장소는 힘없는 보스니아였다. 보스니아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계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그리고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보스니아의 독립선언이 계기가 되어 유고연방의 전 지역에 걸쳐 서로에 대한 인종청소를 벌이게 되었다. 모두 27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UN은 전쟁 초기에 군사개입을 주저하였을 뿐만 아니라 3만 명이나 투입된 평화유지군의 역할 역시 미미해서 휴전과 확전이 반복되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보스니아에서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는 사진에 담겨 외부에 알려졌는데도 커다란 반향을 불러오지 못했던 것은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도 않고 자국의 지도자들이 이 전쟁은 도저히 손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153쪽)’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문제로 싸우는데 이웃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타인의 고통’은 강 건너 불일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군이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두브로브니크에 대한 대규모 포격이 있고서야 유엔과 유럽연합 그리고 서구 언론은 이를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세계의 집단건축유산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고 포격을 멈출 것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발칸반도의 이슬람 유산파괴와 인종청소에 상대적으로 미온했던 것에 비하면 이 도시에 들어서 있는 후기 르네상스양식의 건축물들이 서구 시청자들의 눈에 친숙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이 문제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먼 곳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와 전쟁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에는 사진 더 이전에는 그림 등을 통해서 그 끔찍한 현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손택은 말했다.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 이래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46쪽).”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말 그대로 렌즈 앞에 놓인 그 무엇인가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진은 사라져 간 과거와 떠나 간 사람을 추억케 해주는 데 있어 그 어떤 그림보다도 탁월했다. 카메라 이전에 그림으로 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걸작으로 손택은 자크칼로의 “전쟁의 비참함과 불운”(1633년) 고야의 “전쟁의 참화”(1820년)를 꼽고 있다. 자크칼로는 1630년대 초 로렌지방을 점령한 프랑스군대가 민간에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18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고 고야는 1808년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 봉기한 스페인에 진주한 나폴레옹 군대가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83장의 동판화로 제작하였다. 전쟁사진이 태어난 최초의 전쟁은 크림전쟁(1853~1856)이었다. 로저 팬턴은 영국정부가 파견한 이 전쟁의 ‘공식’ 사진작가였다. 당시 영국의 인쇄매체들이 영국군이 겪고 있던 위험과 결핍을 부각시키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전쟁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전해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사진기술상의 문제에 더하여 정부의 이런 요구가 있어 사진작가의 연출에 따라 포즈를 취한 장병들의 모습만 담을 수 있었다. 전쟁터의 참상을 사진에 처음 담은 것은 영국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세포이 반란(1857~1858)에 참전한 펠리체 베아토였다. 인도 군인들의 도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영국군의 승리를 찬양한 것이지만 영국군의 포격으로 산산조각이 난 럭나우의 시칸다바그 궁전의 안마당이 반란자들의 뼈로 뒤덮여 있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었다. 정작 전쟁의 참상을 본격적으로 사진에 담기 시작한 것은 남북전쟁(1861~1865)에 참전한 매튜 브래디가 이끌던 북부의 사진작가들이었다. 분명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사진들을 찍은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들은 우리는 기록해야 할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매튜 브래디는 추측이긴 하지만 사진사에 남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카메라는 역사의 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터의 사진들 심지어 걸작이라고 칭송을 받는 것들까지도 대부분 연출되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점령한 이오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장면을 찍은 유명한 사진 역시 시간이 지난 뒤에 더 큰 성조기로 재현하도록 해서 찍은 것이었다고 한다. 이오섬은 우리말로는 유황도라고 읽어 유명한 섬이다. 전쟁사진들이 연출되지 않은 채 찍히게 된 것은 베트남 전쟁부터다. 그래서 손탁은 말했다. “이 점이야말로 한 세대의 의식에 아로새겨지게 된 이미지들이 지닌 도덕적 진정성의 핵심이다(90쪽).” 이는 사진작가들이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텔레비전이 전쟁의 현실을 보여 주는 결정적 매체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진작가들은 텔레비전과 경쟁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의 의도에 의하여 연출된 장면이 사진에 담길 수도 있다. 대표적 사례로 손택은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가 저지른 학살현장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용하고 있다. 캄보디아의 왓트마이 사원에는 희생자들의 유골과 함께 전시하고 있는 그들의 사진들에 대해 손택은 말했다. “영원히 죽음을 응시하고 있고 영원히 살해당하기 일보직전에 처해 있고 영원히 학대받고 있다(96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야드바셈’ 워싱턴 D.C.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그리고 베를린의 ‘유태인 기념관’과 같은 전쟁 기념관들이 집단학살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런 자료들이 그 범죄의 참상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 지속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서다. 모든 기억은 개인적이고 재현될 수는 있지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집단의 기억으로 전해질 수는 있겠지만 사진이야 말로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정신으로 챙겨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손택은 말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떠올린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진을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 되어버렸다(135쪽)...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쟁에 매혹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있을까(178쪽)... 어떤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 줘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도록 움직일 수 있을까.” 손택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진 이외의 형태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은 퇴색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을 것이다. 손택은 의외로 전장에서 찍은 사진이 아니라 캐나다의 사진작가 제프 윌이 아프카니스탄의 전쟁을 주제로 스튜디오에서 찍은 ‘죽은 군대는 말한다’(1992년)를 반전(反戰)의 이미지로 인용하였다. 전장에서 죽어 쓰러져 있는 병사는 말하지 않지만 이 사진 속의 인물들은 말한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고발하는 듯한 이미지에 빠져든다면 우리는 사진 속의 병사들이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려 말을 거는 듯한 상상에 빠져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우리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이 어떤지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다. 결국 사진은 우리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26세에 결핵으로 사망한 존 키츠는 21세에 이런 시를 썼다. 대지(大地)의 시는 결코 죽지 않는다.모든 새들이 뜨거운 태양에 기진맥진하여,더위를 식혀주는 나무그늘 속에 숨을 때, 어떤 목소리가새로 풀을 벤 목장의 울타리에서 울타리로 뛰어다니지.그것은 메뚜기의 목소리-그가 여름의 사치를주도한다, - 그는 결코 기쁨을 참지 않아 왔다,왜냐하면 재미도 시들해질 무렵 그는 어떤유쾌한 잡초 아래에서 편히 쉬고 있을 테니까.대지의 시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외로운 겨울 저녁 서리가침묵을 가져올 때 난롯가에서 날카롭게울리는 귀뚜라미의 노래는 온기 가운데 점점 커져서,졸음에 겨워 반쯤 잠든 사람에게는풀이 무성한 어떤 언덕에서 들려오는 메뚜기 소리 같기 때문이지. 계절이 바뀌어도 자연의 전사(戰士)들인 메뚜기와 귀뚜라미는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이 시를 쓴 후 키츠는 말했다. “상상력이 미(美)로 포착한 대상이야말로 진리임에 틀림없다.” 낭만주의의 대가답게 그는 자연 속에서 진리를 발견했다. 메뚜기-귀뚜라미-메뚜기로 이어지는 오케스트라가 끝나지 않는 한 “대지의 시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고 전하는 목사와 장로인 우리에게는 키츠의 말과 달리 말씀 속에서 발견한 진리가 교회-노회-총회로 이어지는 합창이 끝나지 않는 한 “믿음의 씨 한 톨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 밤 수락산 창공 저렇게 많은 별 가운데 별 하나가 세 박사를 베들레헴으로 인도한 것처럼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을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세월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사라질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선이 관계를 만든다. 너의 시선이 내게 머물 때 나의 시선이 살아난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만세 전에 예정되어 만났기 때문에 이 관계는 예사롭지 않다. 이 모든 관계의 외곽에 더 큰 섭리의 질서가 있어서 너와 나는 언젠가 각기 세월의 밝음과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헤어짐의 불가피성 때문에 너와 내가 하나가 되어 만나 함께 머무르는 짧은 시간은 더욱 소중하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아주 오래 전부터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요셉은 왜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곤 했다. 수많은 이민족이 섞여 사는 로마에서 본적지에 가서 주민등록을 해야 한다면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통망이 완비된 작은 우리나라에서도 모두 본적지로 가서 주민등록을 하라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사는 나자렛에서 본적지 베들레헴까지 가장 짧은 길로 간다 해도 160km 400리 길 남자 혼자 걸음으로도 4일간 걷는 먼 길이다. 그 먼 길을 요셉은 왜 가는 도중 출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떠났을까. 그는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다가 꿈에 나타난 천사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풀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예언 성취를 위해 베들레헴으로 마리아와 함께 떠났던 것이다. 베들레헴은 그의 고향이었고 그곳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이 있었다. 요셉은 인구조사를 빌미 삼아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간 게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메시아 약속이 이루어지도록 마리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잉태한 아기를 모시고 간 것이다. 만델라는 청년시절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해 총파업과 시위 등 비폭력저항 운동을 하다가 무장투쟁을 선언한 후 체포되어 감옥에 갔다. 46세에 들어가 73살의 노인으로 나온 후 그는 27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을 '1만 일의 고독'이라 불렀다. 그 '1만 일의 고독'의 시간이 그를 쓰러뜨리지 않고 일으켜 세우고 적도 용서하는 관용의 성인으로 만들었다. 실패도 하고 쓰러져 보기도 했기에 자신을 핍박했던 모두를 끌어안고 함께 걷자고 손을 내밀게 했다. 쓰러짐의 고독에서 그는 삶의 영광을 깨쳤다.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영광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데 있다. 1만 일의 고독에서 신과 자연과 자신과 나눈 대화가 그를 바꿨고 바뀐 그는 세상을 바꾸고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비추어 주었다. 자신만 사랑하는 이는 고독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돈과 지위와 이성 같은 사랑할 대상이 늘 곁에 있기 때문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김영우처럼 박근혜 대통령도 홀로 살아온 혹독한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도 고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축복을 모르고 ‘타인의 고통’은 외면한 채 자신만의 삶의 여정이 힘든 세월이었다며 최순실 딸처럼 투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임에도 자신을 거짓과 허울과 기만의 거울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이 만든 밀실에 자신을 가두고 오직 자신과 자신을 이용하는 이에게만 문을 열며 이기적인 욕심만 채우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들었을 것이다. 요셉과 만델라는 홀로 걸어야 하는 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자신을 보았기에 고독한 여정에서도 ‘타인의 고통’에 팔을 펼쳐 품을 줄 알았다. 다른 이에게 비치는 나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내가 누구인지 찾는 삶의 여정이었기에 그들이 겪은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한 '깨달음에 이르는 축복'이 되었다. 강일구의 탁한 외침 같은 말의 숲에서 길을 잃는다. 조약돌처럼 만지작거리다 손때 묻은 말들 기도일지라도 주님께 선뜻 건네지 못하고 해야 할 말이 이 말인지 저 말일지 주저하는 내 마음 그냥 이 날에 머물고 싶은 밤 전쟁터 한 장의 사진 속 새겨진 제목처럼 내 말은 벽에 매달려 있다. 해야 할 나의 말이 아니므로 교회와 총신과 총회에 떠도는 말의 숲에서 해야 할 말을 잊고 발락이 탄 나귀의 것같은 귀만 타인을 비방하는 강일구의 탁한 소리와 자신은 한 점도 잘못이 없다며 검찰과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드는 거짓말쟁이의 우물거리는 소리에 먹먹할 따름이다. 한 해가 저문다. 말 많고 탈 많은 격랑의 시간이 영원의 저편으로 밀려난다. 2016년의 현실이 참혹해서 본질이나 본령과 같은 말을 함부로 꺼내기 어렵게 한다. 말의 숲에서 길을 잃는다. 본래 말이 길과 지혜를 지시하거나 비춰주어야 함에도 너무 많거나 손때 묻은 말들은 오히려 허공을 치는 것처럼 허방을 가리킬 때가 많다. 이제 새해다. 총회 유리창 김선규 총회장이 이끄는 제101회 총회에 본디 맑은 말이 흘러넘치길 소망해 본다. 내일 2016년과의 이별이 그래도 못내 섭섭하고 세상의 ‘타인의 고통’과 총회의 여러 ‘교회의 고통’이 못난 내게도 못내 남의 일같지 않아... 2017-12-31
    • G.OPINION
    2017-01-01
  • 영동중앙교회 분쟁 열쇠
    좋은 게 좋다는 전동운 목사와 달리 장광우 목사 성경 헌법 전통에 따른 원칙을 중시하는 목회자 장로들 목사의 설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비판 습관예배와 재정과 인사에 주도적 영동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실질적 당회장 아닌 의례적 대표이런 경향 장 목사 목회 원칙 충돌 새벽 문 열고 교회에 나가 장로들로부터 심장에 혀의 말 총알 한 방 맞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 둘 데 없어 바라보는 하늘엔 떨어질 듯 깜빡이는 눈물같은 별이 몇 개. 그러나 집에 와 보니 아파트 베란다 동백나무 화분에 울컥 동백꽃 한 송이 피었다. 반갑다. 나의 비적대적인 믿음의 장로와 나누는 은밀하고 황홀한 상호 눈빛 속에 핀 믿음의 꽃이여 네가 있어 내가 운다. 꽃들은 자연의 영역 속에서 무심하게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지각(知覺)하는 사람에게는 황홀한 믿음이 된다. 꽃은 불현듯 우리 가슴에 날아와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고 온전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우리 몸을 적신다. 꽃과 상호 눈빛의 교류할 때 우리 믿음도 꽃이 된다. 하나님은 저 소금쟁이 한 마리를 물 위에 띄우려고 다리에 촘촘히 털을 붙이고 기름칠을 하고 수면에 표면장력을 만들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연못이 마르면 다른 데 가서 살라고 날개까지 주셨다. 총신생 되어 서울로 떠날 때 우리 시골 교회 장로님 서울의 다른 교회 가서 힘들면 편지 하고 그냥 내려오라고 기차표 한 장 살 돈을 내 손에 꼭 쥐어주셨다. 그 한마디에 어려울 때마다 넘어지고 쓰러져도 그는 벌떡 일어서곤 했다. 우리가 두려움에 떨지 않는 것은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들이 우리를 붙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 중에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그 손이 우리를 도울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언젠가 우리들도 누군가의 “기차표 한 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전도사나 목사가 쓰러질 때마다 벌떡 일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늘 새로운 해안을 향해 떠밀려가는 파도처럼 영원한 밤 속에서 되돌아옴이 없이 빨려 들어가는 우리는 단 하루라도 세월이라는 바다에 닻을 던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니 우리 서로 사랑하고 사랑을 나누자. 덧없는 시간을 서둘러 하나님을 즐겁게 하기 위해 믿음으로 살자. 인간은 닻을 내릴 항구가 없고 시간은 가 닿을 강기슭이 없다. 시간은 흐르고 우리들은 그렇게 사라져 하나님 앞으로 다가간다. 한탄하는 바람 한숨짓는 석양 그윽한 호수의 맑은 공기, 들려오는 이 모든 것 보이는 것 숨 쉬는 이 모든 것 그대들 모두는 말하여다오. 우리는 서로 사랑했었노라고. 셰익스피어는 노래했다. “장밋빛 뺨과 입술이 시간의 칼날 아래 있을지라도 사랑은 시간의 노리개가 아니다”. 시간은 소멸을 향해 흐르고 그것을 멈추게 할 닻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위로가 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 목사와 장로는 서로 사랑하자. 왜냐하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1 4:7-8 서로 사랑을 나누자. 우리 모두 소멸의 종점에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사랑했노라”고 말하자. 성경을 펴고 믿음을 건진다. 말씀에서 난 믿음을 말씀으로 세운 교회에 담아 다시 교회를 세운다. 말씀은 믿음을 발효시키고 믿음은 사랑을 발효시키고 사랑은 존경을 발효시킬 것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목사와 장로는 점점 제 속을 비워 교회를 끌어안을 것이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목사와 장로는 교회 안으로 사랑 속에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다. 장로의 목사에 대한 존경과 목사의 장로에 대한 사랑은 서로 포개지고 겹쳐지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는 둥글게 안은 채 서로에게 파고든다. 말씀 발효의 시간이 이들 사이의 경계를 지운다. 이것을 바라보는 목사와 장로도 발효되어 이들의 사랑과 존경 속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갈 것이다. 긴 겨울을 함께 가는 교회 안의 존경과 사랑. 차디찬 바람과 얼음과 눈발도 막지 못하는 목사 장로 사랑 뿌리는 믿음이다. 징후는 침묵의 언어다. 징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징후는 침묵의 설교다. 전국장로회의 언어는 징후의 언어이다. 징후에서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해석’이다. 이 해석의 회로에서 총회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전국장로회는 비를 낳고 비는 반총회 물결을 낳는다. 요즘 장로의 행태에 대해 교단 실력자에게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장로가 그러는 것은 총회가 흔들리기 때문이야.” 언제는 영동중앙교회 장로 측 시위대를 이끌던 김화경이 11월 21일 총회 임원회가 있는 날 성석교회 시위대와 교계 작전 언론 세력의 필두(筆頭) 유현우를 비롯한 일단의 기자들을 총회에 몰고 나타났다. 그들은 총회회관 내 4층 총회장실 앞까지 진출해 총회 임원회의를 하고 있는 임원들을 향해 김화경의 선창에 따라 총회 권위를 무시하는 구호를 함부로 외쳐댔다. 그 옆에서 색이 바랜 파송 예배 주보를 대사(大使) 신임장처럼 가지고 다니는 북방선교사 강일구도 거라사 광인처럼 괴로운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경찰도 오고 총회 총무 김창수 목사에게서 무슨 확인서 같은 걸 A4 용지에 받고 시위대가 썰물 빠지듯 총회에서 사라졌다. 그 뒤 1층 카페에서 어쩌다 배광식 목사가 사는 차를 김화경과 함께 마시게 됐다. 싱글벙글하는 김화경에게 물었다. “아니 얼마 전에 영동중앙교회 시위대를 이끌더니 오늘 성석교회 시위대는 어찌 된 게요.”영동중앙교회라는 말에 배광식의 찡그린 얼굴에서 뜻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장광우 목사가 장로들한테 사표 낸다고 해 놓고는...”김화경이 서둘러 말을 바꿨다. “성석교회는 내가 결혼한 교회인데...” 1987년 미국 시카고에서의 유학생 시절 그곳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하던 전동운 목사와 선후배 사이로 교제를 나누었다. 그래서 총회 전도국장 시절 나는 영동중앙교회 협동 목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근자에 그 교회에 분쟁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주일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전동운 목사는 안내를 보고 있고 다른 교단 목사가 주일 설교를 하는 그 교회 주보에 뜬금없이 김화경이 금요예배 설교자로 나와 있었다. 2008년 11월 15일 오후 2시 영동중앙교회 담임목사 이.취임식을 거행하고 16년간 영동중앙교회를 이끈 전동운 목사 후임으로 장광우 목사가 취임했다.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는 전동운 목사는 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권한을 자진해서 포기했다. 주민등록상 그의 나이는 63세 다시 말해 앞으로 7년 이상 영동중앙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할 수 있다. 전동운 목사의 퇴임은 7년이라는 세월뿐만 아니라 원로목사라는 자리까지 포기한 것을 의미했다. 1992년 영동중앙교회에 부임한 그는 16년째 사역 중이었으니 4년만 더 사역하면 원로목사가 되기 위한 법적 조건인 20년을 채우게 된다. 게다가 그 해 제93회 총회에서 목사의 정년을 만 71세가 되는 전날까지로 정했기 때문에 욕심만 부릴 수 있다면 8년도 가능했다. 그러나 전 목사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다며 조기 은퇴를 했다. 영동중앙교회 장로들 역시 교회를 위해서였는지 장로들의 말을 잘 듣던 온건한 전 목사의 은퇴를 반갑게 받아들여 퇴직 위로금도 섭섭하지 않게 지불했다. 설교를 잘하고 실력이 있다는 것을 전동운 목사에게 인정받아 그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새로 취임하는 장광우 목사는 총신대 및 총신신대원 그리고 미국 리버티신학교를 졸업했다. 또 LA 동문교회를 비롯해 온서울교회와 가나안 장로교회 등에서 목회를 했다. 특히 경산 중앙교회를 담임하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전동운 목사의 추천과 기대에 부응해 장광우 목사는 정체되어 있던 영동중앙교회를 제자교육을 통해 늘어난 새신자들로 배가시켰다. 이를 계기로 영동중앙교회는 새로워지고 활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임 전동운 목사와 장로들이 장광우 목사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좋은 게 좋다는 전동운 목사와 달리 장광우 목사는 교회 목회에 있어서 성경과 헌법과 전통에 따른 원칙을 중시하는 목회자라는 점이었다. 장광우 목사 이전의 장로들은 목사의 설교에 대해 수첩까지 꺼내들고 이러니저러니 비판하는 습관이 있었고 교회 예배와 재정과 인사에 있어서도 주도적이었다. 영동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는 실질적인 당회장이 아니라 의례적인 대표이어야 했다. 이러한 해묵은 경향이 장광우 목사의 믿음과 성경과 헌법에 따른 목회 원칙과 충돌했다. 평신도를 세우고 뜨거운 감격으로 주를 섬기고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 하는 교회를 비전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던 영동중앙교회는 2015년 하반기부터 담임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2016년 6월에 본격적으로 분쟁상황에 빠졌다. 장로와 일부 성도들은 2016년 6월 8일 수요예배 후 ‘교인총회’를 열어서 장광우 목사의 해임과 노회탈퇴를 결의했다. 현재 장로들은 사법에 ‘담임목사직무정지’와 ‘교회출입금지’를 요청하는 가처분을 신청했는데 모두 기각된 상태다. 장광우 목사는 지지하는 성도 350명의 서명을 받아서 법원에 담임목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보호신청을 제기해 놓고 있다. 그리고 영동중앙교회가 소속된 경평노회는 장로 측을 ‘이탈’로 규정하고 있다. 경평노회는 “장로를 비롯한 일부 성도들이 6월 6일 기소장 접수 후 8일 영동중앙교회비상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교회법 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노회와 총회를 탈퇴”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후 분쟁 상황에서 노회장과 재판국장 등이 시무하는 교회에 주일예배시간에 맞춰 시위를 하고 여러 언론매체에 노회가 불법을 저지른 것처럼 호도했다. 이에 경평노회는 영동중앙교회 분쟁에 관련해 그 책임을 물어 법에 따라 전동운 목사와 장로들을 면직하고 교인지위 제명의 시벌을 했다. 총회 헌법 정치 제 4 장 제 1 조는 목사의 의의(意義)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任職)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롬 11:13). 성경에 이 직분 맡은 자에 대한 칭호가 많아 그 칭호로 모든 책임을 나타낸다.1. 양의 무리를 감독하는 자이므로 목자라 하며(렘 3:15, 벧전 5:2∼4, 딤전 3:1),4.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하며(계 2:1), 총회 헌법 제 5 장 제 4 조는 장로의 직무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교인의 대표자로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림하며, 자교회 혹은 전국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 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주께 부탁 받은 양무리가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되 회개하지 아니 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한다. 이상에서 보면 목사와 장로의 직무의 차이는 분명하다. 총회가 교회 분쟁 해결하는 데 있어서 총회 헌법과 규칙 및 결의에 근거해 진행해야 한다. 2016년 최순실 파동으로 한국이 갇힌 소용돌이는 가히 역대급이다. 그렇듯 우리도 대표적인 사랑의교회를 비롯해 여러 지교회의 분쟁과 총신 파동으로 총회가 갇힌 소용돌이도 역시 역대급이다. 총대들은 정치 지향적이며 총회 권력을 향해 경쟁하지만 결국 갈등을 발전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혼돈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교회와 노회의 개인과 집단 그리고 총회 사이의 매개 집단을 성숙시킬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성경과 총회의 헌법에 근거한 시스템을 공고히 다지지 못했다. 그 대신 길자연 후유증으로 질겁한 나머지 금권선거를 막는다는 명분만 앞세워 옥한흠 목사를 중심으로 몰정치의 제비뽑기를 통해 15년간 부실한 지도자 선출 악순환이 작금의 총신의 혼돈과 교회 분쟁의 소용돌이로 드러난 건 아닐까. 그래서 김용실 같은 자는 제비뽑기가 아니면 언감생심 우리가 어떻게 총회장이 되느냐고 희희덕댔다. 귀한 아들이 제 명에 죽지 못했는데도 돈 자랑만 하고 증경총회장단 회장까지 맡아 거들먹댄다. 그러나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일생일대의 마지막 과업이라 여기고 결연한 개혁의지를 발휘한다면 바로 내년 제102회 총회부터는 중국 요나라 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요 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태평성대를 즐겼다는 데서 유래한 고복격양(鼓腹擊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장자교단이 각 지교회나 총신의 수치스러운 소용돌이의 악순환 속에서 반드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올곧은 장광우 목사는 영동중앙교회 목회를 하면서 난생 처음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을 겪다보니 교회와 장로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이다. 눈물이 마음의 상처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다. 눈물이 마음의 아픔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다. 그렇지만 목사의 눈물이 교회의 새희망을 찾고 있다는 걸 생각하는 장로는 요즈음 많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목사의 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에 맺힌 핏물이라는 걸 눈물방울이 핏방울이라는 걸 생각하는 장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목사의 눈물은 그냥 흘러내리는 게 아니다. 목사의 눈물방울은 그냥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피를 흘려 사신 교회를 위한 눈물이기 때문이다. 영동중앙교회에 분쟁이 일자 장광우 목사를 배척하는 측은 2016년 6월 8일 수요예배 후 교인총회를 열어 장광우 목사의 해임과 노회 탈퇴를 노회법과 교회법을 어기고 결의하는 등 일을 서투르게 저질러 문제가 꼬이게 되었다. 그러자 김화경을 내세워 총회 앞에서 시위를 했지만 별 효용이 없었던 것 같다. 급기야 궁리 끝에 예전의 총회 총대로 드나들던 장로를 내세워 총회 정치권에 줄을 대고 어이없이 폐간되었지만 혹독한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지만 그 장로와 연(緣)이 닿는 기독신문(사장 남상훈)을 활용해 언론 플레이를 시작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교회 분쟁의 해결 열쇠는 성경에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1 4:7-8 영동중앙교회 장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해야 하는 본분을 깨달아야 한다. 그 사랑에서 자신들의 목자인 장광우 목사를 성경과 총회 헌법대로 존경하고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총회 헌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모르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되어 경평노회의 면직과 출교가 더욱 굳어지고 총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도 잃게 될 것이다. 2016-12-24
    • G.OPINION
    2016-12-24
  • 송삼용에 답한다
    언론인은 단순한 생활방편인 하나의 직업일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의 길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마음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직업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은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총회헌법 정치 제12장 제7조에 따라 가는 것이다 송삼용은 어디서 무엇을 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름을 바꾼 크리스천포커스에서 답하라 12월 5일 총회로 가는 길을 걷는데 겨울 햇빛이 바람 속에 이마를 툭 건드린다. 빛이야 그 말을 하나 하려고 수백 광년을 달려온 빛 하나가 ‘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노래한 윤동주의 시처럼 내 이마에 걸려 떨어진 것이다. 모든 생명에 온기를 주고 온 누리를 밝히려고 지상에 내려오는 햇빛들이다. 그런데 나에게 사명을 다하며 떨어진 햇빛을 보다가 문득 나는 이 세상의 모든 햇빛이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강물에게 나뭇잎에게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총회로 가는 내게 말을 걸며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대치동 언덕 길은 매캐한 매연 속에서 반짝이며 날아가는 햇빛들에 온갖 색으로 답하는 생명들이 눈부심으로 가득 차 서로 통하고 있었다. 빛이야 라고 말하며 떨어지는 햇빛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의 소리를 듣고 대치동 총회 문에 송삼용의 출입금지 공문이 발간 볼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사람을 단박에 기분 좋게 만드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 속엔 어디로든 막힘없이 들고나는 자유로운 영혼과 흐르는 눈물 닦아주는 위로의 손길이 담겨 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도 통한다 하고 물과 바람과 공기도 서로 통한다 하지 않던가. 통한다는 말 이 말처럼 마음이 통째로 설레는 사랑의 말도 드물 것이다. 말은 현실 반영을 넘어 현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말이 만들어 낸 현실 가운데 우리를 놀라게 한 올해의 뉴스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총회 헌정 사상 초유의 부총회장 후보 김영우와 정용환의 미련하고 더러운 담합으로 제101회 총회 현장 후보 탈락일 것이다. 2016년이 끝나려면 아직 한 달 남았지만 두 사건은 우리 교단의 올해를 장식하는 가장 큰 뉴스일 것이다. 아마 전통의 기독신보에서 촌스럽다는 이유로 이름이 바뀐 주간 기독신문 폐간 소식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는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 4. 26 ? 1951. 4. 29)은 말했다. "세계는 일어난 모든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사실들의 총합이지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일어난 모든 것 가운데 언급된 것만을 사실로 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아니라 언론의 창을 통해 본 것들을 사실로 안다. 그래서 언론은 무엇이 사실인지를 알리는 동시에 언급되고 있는 사안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는 기능도 해야 한다. 시포커스에서 크리스천포커스로 이름을 바꾼 신문에 송삼용은 발행인변/이제나는더굳뉴스를생각속에서지우련다 라는 12월 1일자 기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더굳뉴스(발행인 김영배) 11월 28일자 인터넷판에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렸다. 이는 대응할 가치도 없는 글이지만 허위 사실을 유포한 행위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며, 진실 규명을 위해 사실을 밝힌다. “더욱이 송삼용과 강일구는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양 총신의 한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 그 교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본인들이 말했다. 그런데 독신으로 지내며 그 사생활이 의심스러운 김영우의 공문서마다 주소가 명기된 상계동 아파트 앞이나 서천읍교회 사택 앞에서 또는 알 길 없는 총신 총장 관사 앞에서 밤을 새워 그의 비행을 캐려고 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송삼용과 강일구가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양 총신의 한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 그 교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본인들이 말했단다. 이 글을 보니 마치 치매끼 있는 사람이 정신없이 무언가 지껄이는 말처럼 보인다. 김영배는 위 사실을 언제 어디서 송삼용과 강일구가 총신의 한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 그 교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는지 입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황당한 일로 법정까지 가는 일은 없겠으나 사실은 밝혀야겠다. 나는 강일구와 함께 위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한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서 밤을 새울만큼 비굴하고, 추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다. 강일구는 총신 82회 졸업생으로 신대원 때는 인사나 나눌 정도였지만 그와 의사가 소통된 시기는 97회기 당시부터였으니 약 4년 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강일구와 불통의 시기였다. 김영배가 위 허위사실에서 언급한 총신의 모 교수의 비리가 불거졌던 시기는 2007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강일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상태였다. 그런 상태인데 강일구와 내가 그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 그 교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이 있다고 말했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상에서 송삼용이 허위라며 밝히라고 말한 대상은 교수가 아니면서 총장이 된 김영우와 달리 교수로서 총장이 된 분이다. 그리고 송삼용은 이 말을 2014년 여름 어느 날 총회에서 총신으로 갈 때 정말 우연히 강일구와 동승하게 된 그의 차 안에서 들은 말이다. 내 기억에는 그 말이 분명히 새겨있지만 김화경은 무슨 말이든 녹음하지만 나는 다행히 녹음을 하지는 않았다. 동승한 강일구는 송삼용과 같이 그런 행위를 하고 그 말을 나랑 같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 말과 휴대폰 문자에서 보듯 강일구에게서 양심적인 말을 듣거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한 기억력은 제 정신인가 의심이 들 정도이지만 말이다. 오히려 그는 점잖은 송삼용과 달리 아무 때 아무 데서나 기도하듯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며 온갖 상을 찌푸리며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총신 10년이나 선배인 내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법정에 서면 송삼용은 거짓말탐지기를 통과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송삼용의 기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언젠가 김영배는 한 인사가 기자회견에서 밝혔다면서 내가 어디에서 10억 원을 받아 챙겼다는 허위 사실을 보도하더니, 법적 대응하겠다고 경고하자 금방 글을 내린 적이 있다. 이번에 다시 황당한 말을 꺼내면서 허위 사실을 유포한다. 그 의도가 도대체 무엇일까? 누구든지 글을 쓰는 것은 자유다. 글 속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글쓴이의 맘이다. 하지만 허위사실을 공표했다가 내리고, 아니면 말고 라는 식으로 촐랑대고 촐싹거리게 되면 자신이 쓴 다른 모든 글들까지 신뢰에 큰 타격이 간다는 것은 뻔한 이치다. 사실 나는 위 10억 원 등의 허위보도 이후 더굳뉴스 홈페이지를 방문해 본 적이 없다. 그런 탓에 위 기사도 누군가 전해줘서 알았다. 이제는 생각 속에서 더굳뉴스라는 제호까지 완전히 지워야겠다. 더 이상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송삼용이 언급한 한 인사란 윤익세 목사를 말한다. 총회 오뚝이 윤익세 목사가 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아침 7시 팔레스 호텔에서 10명의 기자 앞에서 한 회견 내용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나가자 나한테 전화를 해 그럴 수 있느냐며 따지기에 교회를 몇 군데 사임하면서 10억 원을 챙겼다는데 물으니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그 기사를 빼고 윤익세 목사가 주장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1. 총회장과 총회 지도부를 확실한 증거 없이 공격해 총회의 권위를 해치고 전도의 문을 막는 시포커스 발행인 송삼용 목사를 제재해야 한다. 2. 카지노 설 정보제공자 이능규 목사가 탈북자 단체 운영 명목으로 금품을 요구하고 불응 시 협박하는 의혹이 있다는 행위를 조사해야 한다. 3. 광신, 칼신, 대신 졸업자 총회 편목 과정 수업료 100만원, 3주 교육 과정에 대한 제100회총회 결의를 거부하는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에 대한 처리가 있어야 한다. 나는 안전한 인터뷰 기사가 아닌 내 스스로 판단한 그 누구의 비리 사실도 실명을 거론해 기사를 쓴다. 박정하가 올해 공천부가 모인 대전에서 사주는 점심 식사 자리에서 들었다. 김화경은 자신의 시위는 변호사까지 보장받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런 실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고 내 신앙양심에 따라 고소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쓰는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쓴 글로 고소를 당해 대법까지 가서 벌금형을 확정 받는다면 그 액수만큼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사는 사람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지 12월 2일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이루어진 평생 4건의 재판에서 아직 감옥에 갈 기회는 얻지 못하고 있는 딱한 처지이기는 하다. 위증과 공모와 담합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내가 그 글을 쓴 의도는 올곧은 성품 탓에 별 할 말이 없는 전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그만 들먹이고 말많은 김영우로 관심을 돌려보려는 의도에서였다. 왜냐하면 김영우는 미혼의 고위직 독신이라 총신 내에서만 여러 비리 의혹과 5건(4건이었는데 근자 교수 1건이 새로 추가되어 교수 4 직원 1건으로 5건이 됐다고 함)의 스캔들이 총신 교수와 직원들 사이에 소문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우에 대해서도 어느 교수 집 앞에서 밤을 새웠듯이 눈을 부라리고 조사한 뒤 글을 써보라는 것이었다. 좋은 기삿거리인 김영우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어 안타까운 나머지 총신대와 총신신학원 후배(이 말에는 총신 동문이라는 생각도 지우겠다고 하겠지만)인 송삼용을 위해 좋은 기사 정보를 제공하고 싶은 알량한 배려도 사실 있었음을 감출 수 없는 노릇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문은 진리 추구를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 독자들에게 ‘정보에 기반한 결정(informed decision)’을 내리는 데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되기 때문이다. 총회의 칼빈주의 체제 내에서 정보기반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믿음 있는 총대를 형성하려면 교단 언론 매체의 역할이 총회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기자들은 복합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성을 목사와 장로 총대들에게 신앙적으로 진실되게 제공해야 한다는 깊은 의무감을 느껴야 한다. 박권상(朴權相·1929~2014)은 전주고와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52년 합동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이후 한국일보 논설위원(1960), 동아일보 논설위원(1962)을 거쳐 동아일보 편집국장(1971~1973)을 역임하면서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원칙주의적인 자세로 많은 이로부터 신망을 받았던 대표적인 언론인이다. 그는 강직한 성품 때문에 1980년 군사정부의 언론통폐합 때 강제해직된 후 언론계를 떠났다가 1989년 주간지 시사저널 주필로 언론에 복귀했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시절엔 KBS 사장을 지냈다. 박권상은 일선 기자 시절 때부터 언론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도 많이 했던 언론인이다. 그는 우선 언론에 있어 기능주의적 정확성의 추구보다는 진리 탐구라는 과학적 본질을 강조했던 실천적 언론인이었다. 그에게 있어 뉴스의 정확성이란 일종의 사실의 재현이다. 그러므로 저널리즘의 이상, 특히 취재의 숭고한 사명은 실존의 세계와 복사 재현의 세계를 일치시키는 작업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신문기자의 제일 요건 역시 탐구심(inquisitiveness) 즉 과학도가 진리를 추구하는 정신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끈기 있게 진실성을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이에 따라 사회와 진실에 대한 책임감을 지닌 언론관을 강조했다. “뉴스를 선택함에 있어 현명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옳으냐 여부를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한다”는 그의 주장은 80년대를 전후한 한국 언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언론인의 높은 윤리의식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로도 많이 인용됐다. 박권상은 기자라는 직업적 특성에도 주목했다. 저널리스트의 사회적 역할을 달성하기 위해 전문직업주의(professionalism)의 필요성을 국내에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다. 그는 그의 저서 “자유언론의 명제”(122쪽)에서 말했다. “아직도 저널리즘은 법이나 의술이나 대학교수 등에 비해 후진적인 전문 직업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널리즘이 고도의 전문지식 및 기술과 윤리의식을 갖춘 전문 직업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근대 사회와 근대 인간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곧 저널리즘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일체 움직임을 관찰하고, 설명하고, 분석하고, 비평할 수 있는 종합적 직업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언론인은 단순한 생활방편인 하나의 직업일 뿐만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의 길이기 때문에 사회를 위하여 봉사한다는 마음 없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강조했다. 박권상의 이런 생각이 담겨있는 글이 바로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에게’다. 이 글은 이제 막 언론인이 되려고 마음먹은 젊은 후배들에게 바람직한 언론인의 자세와 언론의 전문직업 정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담하게 들려주는 老 언론인의 지혜와 조언을 느껴볼 수 있는 명문이다. 송삼용뿐 아니라 후배 목사들에게도 좋은 글이라 생각돼 좀 길지만 소개한다. 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에게 사람이란 누구나 타고난 독특한 재주가 있는 법이고 사람마다 지능이나 체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언론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의미에서 누구나 훈련과 노력에 따라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될 수 있다. 민완기자가 될 수 있고 탁월한 논객이 될 수 있고 통찰력을 갖춘 명주필이 될 수 있고 수완 있는 발행인의 길도 열린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그렇듯 간단치 않고 쉽지도 않다. 특히 언론인이 되는 데는 타고난 재주와 더불어 철저한 훈련이 요구된다. ‘언론’이란 아마도 가장 어렵고 가장 고된 직업의 하나이고 현대사회에서 맡은 역할 책임이 워낙 무거운 전문 직업이기 때문이다. 중세 보로니아에 처음 대학이 생긴 것은 세 가지의 전문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시대적 요구에서 유래했다. 첫째는 성직자로서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는 직업이고, 둘째는 의사로서 사람의 몸을 돌보는 직업이며, 셋째는 변호사로 사람의 행동을 다스리는 직업이다. 이 3대 전문 직업은 당시 사회에 절대적 권위를 갖는 것이었는데, 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공통된 두 가지의 필요불가결한 직업적 요수가 있었다. 첫째는 고도의 직업적인 지식과 기량이다. 그것은 장기간의 학습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두 번째로 공통된 덕목은 철두철미 남에게 봉사하는 정신, 여기에는 드높은 직업윤리와 엄격한 책임의식이 동반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인격적인 품성과 도덕성에 기초하는 것이며 자아의 이익추구에 앞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퍼블릭 서비스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인격적 바탕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물질적 보수만을 염두에 두고 평생을 바치는 직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본질적으로 인도주의적 자기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 나는 현대사회에서 언론이야말로 이상 세 가지 전문 직업을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는 소중한 업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생활, 사회생활을 통틀어 다른 어느 전문직업보다도 더 막중한 책임을 가진다. 이렇듯 언론인은 현대판 성직자, 의사, 변호사, 군인의 임무를 조금씩은 모두 대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 하나는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실존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이 선택적으로 취재, 재구성해서 제공하는 ‘유사의 세계’인데, 대부분 사람한테 대부분의 일은 언론이 제공하는 ‘유사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다. 언론을 통해 우리 머리에 도달한 어느 한 ‘사실’은 실제로 사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우리한테는 ‘사실’이 되고 만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있다고 전하면 있는 것이 되고 없다고 말하면 없는 것이 된다. 실제로 사실 유무와는 관계가 없다. 엄청난 언론의 마술이고, 우리는 좋든 싫든 압도적이고 일방적인 언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 여기서 언론인의 자질과 사명은 자명해진다. 첫째로 어느 직업에서도 볼 수 없는 최고의 정직성, 도덕성이 인격의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력의 억압이나 금력의 유혹에 굴하지 않는 가운데 흰 것을 희다 말하고 검은 것을 검다 말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 진실을 밝히고 진실을 알리는 것을 지상의 보람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복잡하고 다원적이고 혼란스러운 사회현실 속에서 진실을 밝히고 시비를 가리고 정의를 추구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지구력, 탐구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습훈련으로 가능하다기보다는 타고난 기질이기도 하다. 언론에 뜻을 둔 젊은이라면 마땅히 스스로의 적성 여부를 심각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내성적이고 비사교적이고 겁이 많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 흥미가 없는 성격이라면, 또한 권력, 돈, 사회적 지위에 인생의 목적을 둔 젊은이라면 그런 사람은 아예 언론에 진입할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언론의 필수적 조건은 사물을 그대로 관찰하고 균형 있게 표현할 수 있는 표현력의 소유자이어야 한다. 반드시 소설가나 시인의 재주를 요하지 않는다. 언론은 상상력을 토대로 필력을 구사하는 창조의 세계는 아니니까. 그보다 현실을 정확하게, 동시에 신속하게 전달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적극적 활동력이고 뛰어난 집필능력을 뜻한다. 네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광범위한 인문교육적 배경이다. 흔히 언론인은 “어느 한 분야에 통달해야 하고 모든 분야에 상당해야 한다(Every thing about something, something about everything)"고 말한다. 누구나 제한된 연한의 교육을 받고 제한된 수명을 산다. 성취하기 어려운 직업이다. 따라서 언론인은 평생 공부하는 생활을 해야 하고 적어도 한 분야에서는 자신 있는 전문가이자 모든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전문가에게 물어볼 능력이 있어야 하고 전문가의 말을 알아들을 능력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그것을 쉽고 간결하게 옮겨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언론인은 정치인이나 마찬가지로 누구나 이렇다 할 준비 없이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 몇 가지 지적한 대로 엄격한 정신적 자기규제의 인격적 바탕에서 세상을 바로 관찰하고 진실하게 전달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 자유를 사랑하고 정의를 구현하고 결코 비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진실을 추구하고 항상 약자를 돕고 강자를 억누르는 비상한 용기를 갖춘 멋있는 저널리스트. 이 어찌 젊은 사람들이 삶을 불사르면서 몰입할만한 직업이 아닌가. 그러나 거기에 타고난 재주와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현실 언론을 생각할 때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반박할는지도 모르지만, 남을 위해 살겠다는 자아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감히 성직 아닌 성직이라고 말하고 싶다. 박권상의 ‘언론인은 감히 성직 아닌 성직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권면처럼 그리고 더더욱 성직자인 목사가 맡은 언론인의 직임은 어느 정도여야 할까 교계 언론인들은 고민해야 한다. 목사이지만 서천읍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도 관리하고 변변찮은 학위와 영어실력으로 총장이 된 김영우처럼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주일 찾아간 송춘현에게서 사무실 복도에 선 채 차 한 잔 대접받지 못하고 나온 적도 있다.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 늦게 언론인이 된 나는 주님에게서 무량한 만유의 질서 속에 내가 존재하여 있는 이 목숨과 목사직을 받은 데다 폐간 교단지 기자들과 총회 관계자들이 무시하는 사설 언론 “더굳뉴스”의 기자가 되었다. 그래도 나는 윤동주가 노래했듯이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은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총회헌법 정치 제12장 제7조에 따라 가는 것이다. 총회가 기도로 개회하고 폐회하되 폐회하기로 결정한 후에는 회장이 선언하기를 “교회가 나에게 위탁한 권세로 지금 총회는 파(罷)함이 가한 줄로 알며 이 총회같이 조직한 총회가 다시 아무 날 아무 곳에서 회집함을 요하노라” 한 후에 기도함과 감사함과 축도로 산회(散會)한다. 산회한 뒤 다시 개회하고 폐회하고 소문이 피고 후보가 떨어지고 붙고 총회장이 지나고 다시 바람이 인다. 그래도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총회 오늘도.....내일도..... 교회를 건너서 노회로 그리고 노회를 넘어서 총회로. 나는 이렇다. 이제 송삼용은 어디서 무엇을 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름을 바꾼 크리스천포커스에서 답하라. 2016-12-07
    • G.OPINION
    2016-12-07
  • 백남선의 정치와 신앙
    백남선 목사는 사사건건 비난하고 정작 부활주일에 자기가 시무하는 서천읍교회에 나타나지도 않은김영우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는 송삼용 기본 사리판단력 의심스러워 2007년 9월 12일 분당 수내동에 있는 연정교회(김용실 목사)에서 열린 제92회 총회에서 총회 서기로 선출된 백남선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임자들이 이루어놓은 토대 위에 힘을 더해 교단 행정의 신속성과 신뢰성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2013년 9월 23일 수원 라비돌에서 열린 제98회 총회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저력을 보여 주었다. 백남선 목사는 김영우 목사와 경합하여 총 득표수 1446표 중 828표를 얻어 618표를 얻은 김영우 목사를 200여 표차로 당선됐다. 그는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2014년 9월 22일 광주 겨자씨교회에서 열린 제99회 총회에서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길자연 목사 이후 간선제로 인한 15년간의 산적한 문제들을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했다. 백남선 목사는 평소 앞에 나서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일을 진행하고 수습해나가는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논리적이고 냉정한 율사(律師)의 풍모가 풍긴다. 총신대 총장 길자연 목사가 2014년 6월 25일 사임했다. 6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총신 이사장실에서 김영우 재단이사장은 기자 간담회를 갖고 제99회총회 총신대 관련 결의 가운데 소급 적용 조항만 빼고 제99회 총회 결의대로 총신대 정관을 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영우의 거짓 미끼는 즉각 전국 교회와 총대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백남선 총회장은 김영우의 말을 믿고 김영우가 원하는 것을 주었다. 그 열매가 6월 30일 화요일 광주에서 백남선 총회장과 총신대 재단이사장 김영우의 합의서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김영우 재단이사장을 길자연 전 총장 잔여 임기동안 총장으로 운영이사회에서 선출하여 재단이사회에서 최종결정하는 사항을 추진한다.2. 총신대학교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총장으로 선출될 경우 재단이사장직과 이사직을 사퇴 하고 재단이사회에 관한 것을 관여하지 않는다.3.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운영이사회를 소집하여 관련 사항을 처리한다. 김영우는 이 합의서 가운데 1항은 챙기면서 2항과 3항은 2016년 11월 28일까지 지키지 않은 채 총신대생들의 시위를 통해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 백남선의 정직한 정치는 자신의 모교 총신을 착취하고 자신의 교단에 대적하는 김영우의 거짓에 속아 총신 걱정으로 애를 태우고 김영우의 능력을 믿고 합의했다고 2015년 7월 6일 오전 10시 30분 유성의 전국호남협의회에서 말했다. 그렇듯 백남선의 정치는 신앙에 근거한 정직을 실천한다. 그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2015년 4월 5일 오후 3시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개신교 연합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 백남선 목사는 교단의 총회장으로서 설교를 하고 예배 중에 진행된 성만찬 시 루터교 성직자가 성호를 긋고 행하는 배병과 배잔을 받았다. 이 사실을 놓고 송삼용은 백남선 총회장이 우상제물을 먹었다고 틈만 나면 비난한다. 루터교의 시조 루터는 종교개혁자다. 루터의 성만찬 사상은 성직자가 축성한 떡과 포도주에 주님의 살과 피가 임한다는 공재설이다. 츠빙글리는 성직자가 축성한 떡과 포도주는 다만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할 뿐이라고 기념설을 주장한다. 칼빈은 그 둘을 종합해 성직자가 떡과 포도주를 축성하면 주님의 살과 피가 영적으로 임재한다는 영적 임재설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2015년 4월 5일 오후 3시 연세대 노천극장에서의 성만찬은 우리가 정통 교단으로 인정하고 세계가 공인하는 루터교 성직자가 축성한 성만찬을 그 자리에 참예한 모든 성직자와 교인들이 각자의 믿음과 교리를 따라 떡을 받아서 먹고 포도주를 받아 마신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우상제물을 먹고 마신 것이 아니다. 그것을 잘못 알고 우상제물이라고 우기는 송삼용의 신앙과 신학과 상식에 현저한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백남선 목사의 신앙은 그가 목회하는 광주의 미문교회나 그가 총회장으로 봉사한 본 교단 총회에서도 바르기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 백남선 목사는 사사건건 비난하고 정작 부활주일에 자기가 시무하는 서천읍교회에 나타나지도 않은 김영우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없고 그의 교회 시무도 하지 않는 이중직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송삼용은 기본 사리판단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송삼용과 강일구는 흥신소 직원이라도 된 양 총신의 한 교수의 비행을 엿보기 위해 그 교수의 집 앞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다고 본인들이 말했다. 그런데 독신으로 지내며 그 사생활이 의심스러운 김영우의 공문서마다 주소가 명기된 상계동 아파트 앞이나 서천읍교회 사택 앞에서 또는 알 길 없는 총신 총장 관사 앞에서 밤을 새워 그의 비행을 캐려고 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2016-11-28
    • G.OPINION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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