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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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윤희원 목사 총회선거법 전환 의견
    산업시대 이전에 창궐한 질병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위생적인 시설도 없었거니와 의학 기술도 덜 발전하여 치료제도 없었고 영양 결핍으로 면역력 또한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질병은 과잉에서 비롯된다. 재판 몸살에도 이재명이 설치는 신자유시대의 질병은 우울증이다. 상품과 화폐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성공을 꿈꾼다. 이를 위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누구든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과잉 긍정 문화는 외부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해야 하는 자아는 피곤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울증을 낳는다.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시대에 개인은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구실'이 되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구청 직원 같은 이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이재명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한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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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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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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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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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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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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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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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_ 부활의 아침에 시를 읽다
    부활의 아침에 넘어서야 할 것?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오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 부활의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다. 부활 사건은 하늘길을 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죄로 인한 사망의 자리에서 살 희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 소통케 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사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나 돌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인간을 사망의 길로 몰아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우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날카로운 현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체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섬기곤 했다. 성경에 주로 나오는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이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미이다.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우상이다. 아스다롯은 농사의 우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우상이 황금 송아지 우상이다. 한편 초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옛 관습이나 문화가 우상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는 우상숭배 개념이 더욱 넓어졌다. 재물, 탐욕, 음행 등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두를 우상과 동일하게 간주했다. 그런 우상은 세계 도처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교회를 움직이는 힘에는 공통 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교회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맘몬’의 힘이다. 이른바 ‘물질(돈)’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성도들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첫 행하신 일은 성전에서 돈 매매하거나 돈 바꾸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둘러 엎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전을 청소하시고 몸과 영혼이 병들고 상한 자들을 고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로 교회의 장래를 밝게 볼 수만은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취하는 일들이 난무하다. 교회나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날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행여나 혹시나 어쩌다 금송아지를 주님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든 비우는 성빈(聖貧)생활이 없는 종교는 타락하게 되어 있다. 출력이 없이 입력만 하면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다.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야 산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이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 코로나에도 매년 재산이 몇억씩 불어나는 공무원들은 투자의 귀재들인가. 최근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LH 부동산투기는 인간의 탐욕은 과연 끝이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의도에 봄 향기를 가득 머금은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가짜농부’는 왜 그리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다 썩은 것인가. 공직자와 법관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부패하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돈, 권력, 명예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를 치열하게 만드는 원초적 욕망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서 이룬 성과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나 둘을 가지려는 순간이 탐욕이다. 그만큼 삶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지금도 주변엔 돈 많은 재벌이 권력이나 명예를 더 갖고 싶고,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도 갖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하다가 소중히 일궈온 삶이 탐욕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게 된다. ‘무소유’를 강연하던 어느 종교인이 페라리자동차와 건물주로 ‘풀 소유’로 추락하였으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병폐는 끝없는 욕심이 아닐까. 코로나가 소멸되어야 한다. 길가의 개나리와 벚꽃은 만발하였지만, 코로나로 일상의 회복을 맛보지 못한다. 모두들 참으로 어렵다.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혹자는 우스개로 말하기를 종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겟돈(?) 전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니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세속적인 것들, 우상들을 제거하는 변화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집 ‘귀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소중한 삶과 물질들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치고 다스리고 버려야 할 그 모든 것을 거듭나고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사월의 봄, 부활의 봄에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 백성들에게 교회는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음으로 교회 됨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선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 다시 복음으로 가야 산다. 고난 가운데 탄식하고 신음하는 사회과 교회와 이 백성들에게 ‘평안하라’ 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음성이 다시 들려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세상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달려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에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유안진 시인이 쓴 ‘내 믿음의 부활절’이란 시를 다시 읽는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풀 포기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마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 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해마다 기적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부활에 참여하므로 개인이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를 꿈꾼다. 나사로처럼 사망의 자리를 털고 나온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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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3
  • 김종희 칼럼_ 부목사 투표권 논쟁에 대한 정리
    D 노회에서 정기노회를 앞두고 부목사 투표권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D 노회뿐만 아니라 정기노회를 앞두고 노회마다 투표권 문제로 대립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임원이나 총대를 선출할 때 소수의 표에 의하여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특히 부목사인 경우 이미 이사는 다른 노회로 하였는데 이명은 하지 않았다면 투표권이 있는가. 또 한 시무를 하지 않거나 기관 목사나 교육목사로 파송한 경우 투표권이 있는가를 정리해 본다. Ⅰ. 이명 하지 않은 부목사는 투표권이 없다. ① 권징조례 제109조에 보면 “목사도 전조와 같이 다른 회에 옮길 이명서를 수취한 후에 그 노회에 가입하기까지 여전히 본 노회 관할에 속하고(이명서 수취일로부터 본 노회 안에서 언권과 투표권이 없다) 1년 내로 이명서를 본 노회에 환부하면 노회는 이 사건을 회록에 기입하고 그 회원권은 여전히 지속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기 내용을 근거로 부목사가 다른 노회로 임지를 옮겨 이사를 갔지만 아직 이명 처리를 안 한 경우라면 투표권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명서를 수취한 날부터 본 노회 안에서 언권과 투표권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표권이 없는 이유를 아래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② 정치 제4장 제4조 3항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미 다른 노회로 이사를 간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목사라고 할 수 없다. 즉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이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③ 원칙적으로 부목사가 이사를 갈 때 이명 허락을 받고 가야 한다. 그러나 노회의 사정상 회집이 어려우므로 이명을 허락받고 가는 것으로 묵인하고 보낸다. 그리고 노회 때 사무처리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이므로 이사를 할 때 이명서를 수취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④ 너그럽게 양보하여 이명서를 수취하기 전에 투표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명서를 수취하는 날부터 투표권이 없다고 했으므로 수취하는 그날에는 투표권이 없다. 즉 이명서 수취를 오후에 하여도 오전부터 그날은 투표권이 없다. 대게 임원 선거나 총대 선거는 이명서를 취급하는 날에 다 한다. 그러므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⑤ 제88회 총회에서 평남 노회장 송행식 씨의 질의의 건에 대하여 “이명하지 않은 부목사에게 전 소속 노회 선거권 있는가: 할 수 없다.”로 결의하였기에 투표권이 없다. Ⅲ.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는 투표권이 없다. ① 정치 제4장 제4조 3항 “부목사는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어느 당회가 당사자의 사정에 의해 부목사로 청빙을 해 주었지만 청빙한 교회에서 시무하지 않으면 투표권이 없다. 시무하는 증거는 담당하는 부서가 있어야 하며 매월 급여가 지급되고 있다는 내역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 제3장 제3조 “남·녀 전도사를 당회의 추천으로 노회가 고시하여 자격을 인가하면 유급 교역자로 당회나 목사의 관리하는 지교회 시무를 방조하게 한다.”고 하였다. 시무를 방조하는 자도 유급이어야 한다면 위임목사를 보좌하며 시무하는 부목사는 당연히 시무하는 교회로부터 급여를 받아야 한다. ② 해 교회에서 부목사로 청빙을 하여 기관 목사로 파송하거나 교육 목사로 파송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해 교회가 임의로 파송한 경우는 기관 목사나 교육 목사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정치 제4장 제4조 7항(교단 기관 목사) “노회의 허락을 받아 총회나 노회 및 교회 관계 기관에서 행정과 신문과 서적 및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목사이다.” 10항(교육 목사)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라고 하였다.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회의 허락 없이 해 교회가 파송한 경우는 부목사로 인정하여 투표권을 줄 수 없다. 사실상 이런 경우는 부목사로 청빙하는 척하며 노회를 기망한 경우이므로 해 교회 당회장을 문책해야 한다. Ⅳ. 결론 해 교회에서 노회에 계속 부목사 청빙 청원을 한 경우는 투표권이 있다. 제96회 총회에서 “계속 부목사 청빙 청원을 한 부목사이면 시무 목사이므로 정회원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가결하다.”로 정리하였기에 투표권이 있다. 그러나 이명을 하지 않는 부목사, 청빙해 준 교회에서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 노회의 허락 없이 기관 목사나 교육 목사로 해 교회가 임의로 파송한 경우는 투표권이 없다. 투표권 논쟁을 정리하여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종희 목사(헌법자문위원장.정치부장역임.성민교회)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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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3
  • 이효상 칼럼_ 빌 게이츠에게 듣는 기후 위기(재앙) 대처법
    코로나19의 팬데믹(pandemic)은 273만 명이라는 사망자를 내고 전 세계 인구의 1억 2342만 명(2021년 3월 25일 기준)을 감염시켰다. 미래학자들은 전염병은 코로나가 끝이 아니며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변종이 계속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중심에 지구환경의 변화 즉 기후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여러 재난 가운데서 지구의 창조환경을 복원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쏟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1955~)도 1995년 ‘미래로 가는 길’을, 1999년 ‘생각의 속도’에 이어 금 년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원저: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 김영사)’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앞선 두 권이 모두 IT,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 등의 미래를 예견한 책이라면, 이번에는 ‘기후’ 문제다. 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빌 게이츠라는 것, 그 책 제목이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라니, 빌 게이츠는 도대체 왜 기후변화를 말하기로 했을까? 빌 게이츠가 왜 이렇게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가질까.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관심 집중! 전 세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 게이츠는 책에서 20년 전 소프트웨어(software)를 본업으로 했던 그가 부인과 함께 2000년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고 저개발국을 여행하며 에너지 빈부 격차를 해결하고 싶었다는 얘기로부터 풀어간다. “기후변화에 대해 알아야 할 두 가지 숫자가 있는데, 첫 번째는 ‘510’이고, 다른 하나는 ‘0(제로)’”라고 설명한다. 510억 톤(t)은 전 세계가 매년 대기권에 추가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이다. 0(제로)는 지구 온난화를 막고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인류가 목표로 해야 하는 숫자다. '넷-제로(Ner-zero)'라 부른다. 그는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기술이 청정에너지 기술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만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 있다. '510억'이 '0'이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빌 게이츠는 어렵지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없애는 탄소 제로(carbon zero)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년 배출하는 510억 톤의 온실가스, 사실 그 양이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양인지 가늠조차 안 된다. 온실가스를 제때 줄이지 못한다면 지구 전체에 대규모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기후 재앙으로 코로나 사망자의 5배의 인구가 숨질 것으로 예측하며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용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게이츠는 ‘탄소 제로’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린 프리미엄'이라는 용어로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친환경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드는 추가적인 비용을 의미한다. 빌 게이츠는 '더러운' 에너지를 '깨끗한'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드는 비용, 즉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깨끗한 에너지 기술이 정부의 정책이 되고 시장에서 활성화된다면 그린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것이고 결국엔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져서 탄소 감축이 아닌 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럼 그린 프리미엄을 어떻게 낮추나? 510억 톤의 이산화탄소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31%를 차지한 제조 분야이다. 다음은 전기 생산(27%), 동물 사육과 농업 재배(19%), 교통과 운송(19%), 냉난방(7%) 순이다. 이 중에서 어느 부분을 먼저 바꿔야 그린 프리미엄을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전기차만으로 안된다. 철강, 시멘트, 육류 등의 탄소 제거가 시급하다. 책에서 ‘여러 수단들이 여전히 탄소 제로의 목표 중 일부만 달성하게 되므로 나머지 목표 달성에 필요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출시해야 한다"고 제시하며 가장 적극적인 해법으로 기술혁신을 들고 있다. 기술혁신은 삶의 편리함을 유지하면서 대기 오염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란다. 또 하나는 태양광과 풍력 등 이미 보유한 수단들을 더 빨리, 그리고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비용이 싸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의 견해다.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왜 이렇게 어둡지? 조명은 어디에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빈곤의 본질 중 하나는 전기의 부족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사무실, 공장, 콜 쎈터 등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조명과 백신을 24시간 냉장고에 냉각시킬 수 있는, 믿을 만하고 저렴한 전기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술과 발을 맞추지 못하는 (에너지)정책의 대표적인 예는 원자력 산업이다.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곳에서, 매일 24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 탄소 에너지원이다. 새로 개발하는 원자로는 더 안전하고 더 저렴하다. 하지만 올바른 정책이 부재하고 적절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과학은 무용지물이다” 원자력은 매일 24시간 사용 가능한 유일한 무 탄소 에너지원이라고 한다. 그가 제시하는 깨끗한 에너지 기술인 풍력, 지열, 태양열, 배터리, 바이오 연료, 탄소 포집 등에 대한 기술혁신과 정부 지원, 민간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 이후 선진국들은 탄소 제로 실천을 위해 화석연료를 친환경 대체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탄소 배출 7위 국가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한국은 탈원전 기조하에 재생에너지에 집중해왔지만 사실 기후 악당 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탄소 배출 측면에서 효율성이 가장 높은 것은 원자력 발전이다. 무분별하게 태양광 발전을 보조하는 것이 혁신의 전부가 아니다. 태양광 설비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과 그로 인한 간접적인 건강 위험까지 없애는 노력이 진정한 혁신이다. 또한 작은 위험 때문에 원전을 포기하기보다는 원전 위험 제로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 혁신이다. 빌 게이츠는 책의 마무리에서 기술 변화와 혁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가 찾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한목소리로 기후변화 정책을 요구할 때 정치인들은 움직인다”라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부는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기업 활동을 자극하고 시장을 유인해야 할 것이다. 종말이 오고 있는 건가.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미래가 불타고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SOS(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복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미국 지구 물리학보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로 여름은 길어지고 더 더워지며 겨울은 짧아지고 더 추워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소개했다. 2100년이면 1년 365일 중 절반인 174일이 여름이고, 가을은 57일, 겨울은 27일로 한 달도 채 안 되는 것으로 예측했다. 프랑스는 최근 헌법 1조 "기후변화에 맞서 싸운다"를 통과시키고 "공화국은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전을 보장하고, 기후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를 추가하기로 했다. 이렇게 지구 온난화 등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 100여 국, 400여 개의 도시에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 조 바이든(Joe Biden, 1942~) 대통령은 취임 직후, 트럼프가 탈퇴했던 파리 협정에 재가입했고, 각 나라와 연구소마다 풍력발전소, 저탄소 제트 연료 등 복잡한 계산을 통해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 세계가 노력하는 가운데 탄소 포집 기술 개발하는 팀에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가 1억 달러를 상금을 주겠다는 기사도 보았다. 이산화탄소를 땅속에 주입하고 봉인하거나 이산화탄소를 잘 흡수하는 물질로 탄소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시도 그린 뉴딜(Green New Deal)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도시로 만들려는 플랜 (plan)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 재앙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가장 큰 문제이나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실현 가능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대중도 물질적 욕구가 우선되다 보니 환경은 아직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는 측면이 크다. 적절하게 제어할 수단도 부족하니 기업에겐 그저 환경과 관련된 비용지출은 세금 걷는 명목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사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라기보다 당장 살아가는 이번 세대의 이야기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나마 돈이 개입되니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비용을 가장 적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요즘 기업들도 ESG(환경 Environment·사회 Social· 지배구조 Governance) 경영을 확대하고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을 만들 때 에너지소비효율 1~5등급으로 나눠서 생산할 것이 아니라 1등급만 만드는 식으로 바꾸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다. 물론 현재도 1등급을 구매하는 이들에게는 보조금이 지급되지만 모든 전자제품을 1등급으로 만든다면 빌 게이츠가 말했듯이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지지 않을까? 우리 삶이 더욱 변화해야 한다. 숨 막히는 미세먼지부터 가뭄과 폭염, 슈퍼태풍, 식량 폭동과 테러, 대규모 환경 난민 발생까지. 코앞에 닥친 기후 위기의 현실 앞에서 그리고 대안은 찾고 그런 노력을 할 순 없을까. 창틀에 정원을 만들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탄소 금식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탄소 제로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회다. 탄소 문명을 청정에너지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 세계인의 공동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먼 훗날의 기후 재앙에 미리 대처하려면...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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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8
  • 이효상 칼럼_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에서
    아침이면 쓴맛을 보며 하루를 연다. 마치 인생의 쓴맛처럼, 다름 아닌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템프테이션 Temptation)으로 시작된다. 눈 뜨자마자 또는 출근과 동시에 마시는 커피 한잔은 직장인들의 즐거움이자 적(敵)이다. 언제부터인가부터 커피는 일상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중독이 따로 있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면 중독이다. 베토벤(Beethoven)은 매일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는 더할 수 없는 내 벗과 만난다. 아침에 커피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잔의 커피에 담긴 60알의 원두는 내게 60개의 아이디어를 가르쳐 준다.”라고 말했다는데. 커피 한 잔이 예술가들의 혼을 일깨우고,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1년에 몇 잔의 커피를 마실까.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기준 1년에 커피 353잔을 마신다고 한다. 하루에 1잔은 마신다는 의미인데, 세계 평균 소비량 132잔의 2배 이상이다. 하지만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다수 있으니 엄청난 양이다. 커피는 예전 ‘숭늉’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커피의 고향이 어디일까? 커피의 원조국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Ethiopia)다. 커피의 3대 품종 중 가장 향미가 뛰어난 아라비카종([라틴어]Arabica種)의 주산지로 이슬람 문화권인 아랍과 함께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사실 커피를 마시게 된 기원에 관해서는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인 아비시니아(Abyssinia)에 ‘칼디’라는 목동이 있었다. 어느 날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흥분하며 잠을 못 자는 것을 본 그는 직접 빨간 열매를 따서 먹어봤다. 목동은 열매를 먹고 나자 온몸에 힘이 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씨앗을 이슬람 사제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부정한 음식을 먹기 전, 의식으로 빨간 열매를 불에 태웠더니 그윽한 커피 향이 퍼지면서 사제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커피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이후 척박한 땅에서 양이나 염소를 치며 유목 생활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은 힘이 나는 열매를 가지고 다니며 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제들은 밤에 기도를 드릴 때 잠을 쫓기 위해 즐겨 먹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홍해 바로 건너편 나라인 예멘(Yemen)에서 비롯됐다. 이슬람 대사제인 오마르는 모함을 받아 쫓겨 모카(Mocha)라는 항구 도시로 건너오게 되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그는 새가 먹고 있던 빨간 열매를 보고 알라의 계시라 생각해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다. 그랬더니 배고픔도 사라지고 기운이 나서 그 뒤 그 열매로 병약한 이들을 치료했다. 예멘의 모카 항은 그 뒤로 커피를 수출하는 주요 항구로 이름을 알려지며 모카커피(Mocha coffee))의 원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을까. 그 시간은 천년이 넘게 걸렸다. 아랍인은 지중해를 넘나들며 유럽과 활발히 교역을 이어나갔고 그 와중에 커피가 점차 유럽인에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한때 커피를 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유럽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 가진 힘이 막강했는데 이교도들이 들여온 음료 때문에 밤에 잠을 안 자고 범죄와 음탕한 생활을 한다고 믿었기에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 부르고 금지하기도 했다. 17세기경부터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람들을 통해 아시아와 중남미로 보급되며 브라질과 콜롬비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같은 커피 최대 생산지들이 생겨나게 된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인스턴트(instant) 커피가 나왔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에게 휴대용 커피를 마시게 하므로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 후에는 인스턴트 식품의 물결을 타고 널리 일반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머물 당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로 봐서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드링커(Drinker)는 고종황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 최초의 커피를 마신 기록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월(Percival Lowell, 1855.3.13-1916.11.12)은 그의 저서『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보면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조선 고위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별장으로 유람을 가게 되었는데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우리는 다시 누대 위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전문점은 20세기 초, 독일인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라는 독일계 러시아 여인에 의해 들어섰다.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 안에 첫 커피숍을 개업한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명동과 소공동 등지에 일본식 다방들이 생겨났다. 대중 보급은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의 식량에 속해 있던 인스턴트커피가 익숙해지고 인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시판되면서부터다. 다방식 커피든 인스턴트커피든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커피든 간에 커피는 그 향미를 즐기며 소통하는 접촉점임에는 틀림없다. 우울한 날에는 달달한 커피가 좋다. 사람도 커피를 잘 사는 사람이 더 좋다. 그런 사람은 대개 소통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따뜻한 나눔이 행복이다. 우아하게 함께 나누는 커피 한잔의 여유로움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사람은 그렇게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진다. 커피 한 잔이 주는 선물은 분명 매혹적이다. “커피 한잔하시죠?”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럴 때마다 커피를 권하고 마시는 일들이 생긴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때, 으레 마실 커피를 권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진다. 좋은 이미지를 지닌 매너 있는 사람으로, 통찰력을 겸비한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맑은 정신을 갖게 하는 도구 역할도 톡톡히 해내서 바쁜 현대인들과 쉽게 친숙해진다. 모든 만남과 거래에서 첫인상은 매우 중요한데 커피 한 잔은 상대방이 보여주는 태도와 매너가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거나 첫인상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이나 미팅 자리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소통을 열어주고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며 멋진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에덴동산부터 사람은 누구나 유혹에 약하다. 커피 한잔의 유혹은 쉬지 않고 다가온다. 주일에 출석하는 교회는 로비에 커피숍(coffee shop)을 차리신 담임 최 목사님은 바리스타(barista) 교육까지 받고 커피 머신(coffee machine)을 신나게 당기신다. 커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신다. 일회용 컵은 이 장로님이 제공하셨다. 그런가 하면 남양주 다산동 자치위원회 사무실에도 새해부터 커피 머신을 설치하고 별다방(?) 커피가 항상 제공된다. 당연히 안 마실 수 없는 구조다. 대학로 사무실에 나오면 주로 점심을 사먹는데 식후에 단맛 좀 보려고 달달한 자몽차로 마셔야지 하다가도 식당에서 주는 공짜 커피인 믹스 커피(mix coffee)나 지인들이 사는 아메리카노(Americano)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유혹에는 후유증이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중독성 때문이다.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업그레이드(upgrade) 되는 것 같고 집중이 잘 된다. 가끔 안 마시면 뭔가 허전하고 집중이 안 되는 이 느낌은 뭐지 싶다. 어찌 보면 ‘카페인 부작용’이나 ‘카페인 중독’ 같기도 하다. 정말 커피 한잔은 약일까? 독일까?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기는데 반해 너무 많이 마시면 밤에 깊은 숙면을 하지 못한다. 필자의 경우, 커피의 민감성은 오후 2~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 밤 12시경 잠깐 잠들었다가 새벽 2,3시경에 깨면 화장실에 갔다오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잠들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아침이면 몽롱하고 그 잠에서 깨기 위해 다시 커피를 마시는 일이 반복된다. 커피가 가진 카페인 성분은 두 얼굴로 나타난다. 뇌를 각성시키지만 반면 두통과 신경과민, 불안, 현기증을 가져다준다. 심장박동수를 증가시켜 가슴 두근거림, 혈압상승을 유발하기도 한다.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다 오히려 위궤양, 역류성 식도염 등 위 질환을 주기도 하고, 철분과 칼슘을 흡수를 방해해 빈혈이나 뼈의 성장을 저해한다. 한국인들은 칼슘섭취가 부족한데 하루에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면 칼슘의 배출로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이런 커피가 알츠하이머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흥미롭다. 건물마다 커피 전문점이 많이 생겨나고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이 테이크아웃 컵을 손에 든 채 길을 걷는 광경을 보게 된다. 매일 마시는 일회용 잔에 들어있는 커피, 간편하게 먹는 컵라면, 배달음식의 랩 포장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코팅용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휴대용 개인 텀블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환경호르몬을 완벽하게 배제하면서 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멀리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사용하는 일회용 컵, 캡슐과 캔 음료 등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생각하면 커피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의 양은 엄청나다. 음악을 들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의 여유와 사색이 인생을, 열정을 쏟은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되기를 기대하지만 1g의 원두에서 커피는 0.002g, 나머지는 커피 찌꺼기로 버려진다. 기후위기의 환경 변화에서 비상행동이 필요한 때에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것을 재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일회용 컵 등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 환경호르몬도 줄이고 지구도 보호할 수 있다. 한잔 커피의 유혹 앞에서 지혜롭게 일회용 컵 대신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해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는 습관은 어떨까 싶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사진작가, 서지학자, 근대문화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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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2
  • 이효상 칼럼_ 이슈에서 정치인의 침묵과 소신
    4·7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토론이 뜨겁다. 부동산 정책에 이어 초저출산율도 화제가 되었고, 지난달 가진 ‘3지대 후보 토론’에서 안철수 후보와 금태섭 후보 간의 퀴어(Queer)축제를 두고 차별금지와 혐오 논쟁도 이슈가 확산되었다. 선거에 출마한 여야 예비후보들의 가세함으로 '퀴어축제' 찬반 입장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된 바 있다. 퀴어축제는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행사로써, 현재 2000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대구, 부산, 전주, 인천 등 각 지역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일정 기간 퍼레이드와 영화제, 파티를 중심으로 강연이나 전시회, 마켓, 토론회 등의 행사를 통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특히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가행진을 진행한다. 예비후보자 토론에서 금 후보가 “‘퀴어축제’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묻자 안 후보는 TV토론에서 “인권은 자기의 인권 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중요하다.”라며 매년 서울광장에서 개최해온 ‘퀴어축제’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안 후보는 차별에 대해서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라고 전제한 뒤 미국의 예를 들어가며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퀴어축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종의 퀴어축제를 카스트로 스트리라는 곳에서 한다. 거기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남부 쪽에 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서 축제를 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거기 가서 보신다. 샌프란시스코 중심에서 하지 않는다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고 답했다. 안 후보가 샌프란시스코의 예를 든 것은 서울 퀴어축제가 서울의 중심인 시청 광장과 광화문, 남대문 등 사람들의 방문과 왕래가 많은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축제 참가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과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안 후보가 퀴어축제와 관련해 밝힌 '거부할 권리'의 중요성을 두고 정치권이 시끌벅적하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성소수자 관련 이슈에 안철수 예비후보가 소신 발언으로 성소수자 문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른 바 있다. 진보진영은 일제히 비판을 쏟아냈다. 자신의 발언이 논란으로 확대되자 안 후보는 “저 역시 소수자 차별에 누구보다 반대하고 이들을 배제하거나 거부할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라면서 “서울 퀴어 퍼레이드를 보면 신체 노출이나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경우가 있었다”라며 “성적 수위가 높은 축제가 도심에서 열리면 아동이나 청소년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걸 걱정하는 시민들 의견도 있다. 그래서 미국 사례를 들어 말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후보라면 마땅히 이런 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안 후보에 긍정적 평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안 후보자가 “자기의 인권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소중하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한 대목에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모처럼 안 후보가 분명하고 시원한 메시지를 내놓았다는 느낌이다. 인물이 없다는 야권에 인물로 부각되는 모양새다. 여기에 국민의힘 후보 오세훈 전 시장이 발을 올렸다. 모 라디오 방송에서 "다만 퀴어축제가 서울광장이나 광화문광장 등 인근 도심에서 행해져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울시에는 서울시광장사용심의위원회라는 결정기구도 있고 규정도 있다"라며 "이 기구에서 심의 사용 규칙을 기준으로 결정한다"라며 "시장 개인이 '해도 된다, 하면 안 된다'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광장사용심의위원회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를 가리킨다. 이 위원회는 지난 2019년에도 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개최 여부를 심의하고, 퀴어문화축제의 부대행사인 '서울핑크닷'과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사의 서울광장 사용허가 여부를 승인한 바 있어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측은 “반인권적 대우나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남녀노소가 모이는 시청 광장에서 동성애자 축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오 전 시장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는 퀴어축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박 후보는 기자간담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는 보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2016년으로 5년 전인데 그때와 지금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라며 "사람들 생각도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도 시대 흐름과 같이 바뀌는 것이 맞는다"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동성애, 동성혼, 차별금지법 등 논쟁의 중심에서 정치인의 소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녁에 맞추지 않은 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흘러가는 얘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 들어줘도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논쟁은 다르다. 치열한 논쟁 끝에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것,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소신에 국민의 선택과 평가는 또 어떨까. 성소수자 문제,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인권 차원에서 표현할 자유와 거부할 권리를 동시에 언급한 것을 가지고 일부 진영에서 무조건 차별, 혐오로 몰고 가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일부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문제를 자신의 정치 유불리에 따라 침묵하거나 때론 정치 수단화하는 바람에 인권이 마치 특정 소수의 전유물처럼 변질돼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보편적 인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편향적 인권 편에 슬쩍 발을 담그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정치인들의 어정쩡한 처신 앞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치인의 소신이 새롭게 평가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에 20여 명의 의원들이 가세하며 법적 요건을 갖췄다. ‘동성애 조장’, ‘동성 혼합법 화’, ‘포괄적 차별금지법 독소조항’과 싸우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교계가 아무리 떠들어도 잔 안의 태풍처럼 전달되지 않던 것이 정치인의 분명한 소신 메시지에 여론이 달라지고 국민들이 호응하고 있다. 이참에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서울시민 절대다수의 뜻에 반하는 광장 사용을 지속적으로 허락하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도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슈에 대하여 침묵하는 정치인과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정치인을 보며, 자기 정체성과 표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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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1-03-10
  • 이효상 칼럼_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 출산율 재고(再考)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구 문제 중 하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아이를 적게 낳아 출산율이 감소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저출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장차 경제 활동 인구가 감소하게 되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고령화에 따른 노년층의 부양 부담이 상승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구와 경제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엔 미래 보고서 2040」에서 “인구 감소가 이미 시작된 선진국은 예외 없이 국력 감소가 나타났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일본의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를 사례로 들었다. 이에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 장려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출산장려를 위한 예산은 매년 증가하는데 전혀 출산율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추락하고 있다. 출산을 강조하지만 실제 출산에 대한 직접지원이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문제는 정부의 출산장려예산이다. 2021년도 현재 저출산 명목의 예산은 꾸준히 증가해 2021년도 지난해보다 6조 원 늘어난 46조 원이 편성됐다. 이렇게 정부가 돈은 많이 쓰고 있다는데 아이 키우는 환경도 함께 나아지고 있을까. 2006년 저출산·고령화 사회 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저출산 지원예산은 모두 200조 원 넘게 투입됐다. 예산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21.1%나 증가했다. 예산은 매년 늘어나는데, 정작 주변에서 '아이 키우는데 저출산 예산의 덕을 봤다'라는 가정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출생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이른바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는 지난해 이미 현실화됐다. 2020년 강원도 내 모든 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일어났다. 도내 전역에서 일어난 건 사상 처음으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다. 2021년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비교적 인구가 많은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를 포함 도내 18개 전 시.군에서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섰다. 2019년에는 원주시, 화천군을 제외한 16개 시.군에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발생했다. 2020년 원주시 화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역전하면서 도내 전역으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확대되었다. 강원도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적으로 출생자 수가 27만여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데 비해 사망자 수는 30만 명을 넘으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세대수는 1인 세대 급증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60대 이상 인구가 전체의 4분의 1 수준에 달해 고령화가 심화했으며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도 심해졌다. 2020년 12월 31일 기준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는 모두 5천182만9천23명으로 전년도 말보다 2만838명(0.04%) 감소했다. 연간 기준으로 주민등록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활력을 잃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인구 늘리기에 비상이다. 그럼 출산장려지원을 젊은이들이 체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정부는 저출산 예산이 매년 늘었다고 하는데, 정작 젊은 부부들은 왜 체감하지 못할까. 2018년 이후 처음 1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산율은 2020년 0.9명에도 못 미쳤다. 계속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다. 국민소득 300달러에서 3만 달러로 성장하면서 출산율은 오히려 4.5에서 1 미만으로 추락했다.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 여기던 기존 생각들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기 결정권이 생기면서 비혼과 출산은 이제 선택사항이 되었다. 서울시장 선거전이 뜨겁다. 후보들의 정책이슈는 단연 ‘출산 지원’이 화두이다. 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서울에서 독립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총 1억1700만 원의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라고 밝히며 이슈를 선점했다. 그녀의 공약은 결혼하면 4500만 원, 아이를 낳으면 추가로 4500만 원을 지원하고, 여기에 대출이자를 9년간 100% 대납해 총 1억 원 넘는 혜택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정책을 제시했다. 이에 여러 후보들이 공격하고 나섰지만 정작 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 후보의 공약이 오히려 주목받는 이유다. 나 후보자는 “저출산 문제는 이번에 당선될 서울시장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라며 “저출산·고령화가 얼마나 재앙적이고 심각한지 뼈저리게 체감했다.”라고 밝혔다.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20대까지 4선 의원을 지내며 재임 시 저출산·고령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 분야에선 전문가의 공약이어서 수긍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는 “주택문제는 저출산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며 “단순히 현금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 신혼부부가 토지 임대부 주택을 마련할 때까지 이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라며 “현금 살포하고는 다르다”라고 잘라 말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일·가정 양립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이미 선진화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해외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와 스웨덴, 덴마크는 성공적인 가족 정책 사례로 손꼽힌다. 프랑스는 저출산·고령화를 정책의 힘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이자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 가운데 독보적으로 출산율을 끌어올린 사례이다. 다양한 가족 구성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하는 점이 프랑스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신혼부부 모두 들 서울이나 프랑스로 이사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지방자치단체별로 들쑥날쑥한 출산장려금을 정리하고 가족 정책 전반적인 큰 틀에서 시행할 컨트롤타워(control tower)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충청남도의 경우 결혼한 지 2년 안 된 청년 부부가 공공아파트에 입주한 뒤 자녀 두 명을 낳으면 임대료를 전액 감면해주는 '더 행복한 주택'을 공급한다. 방 규모는 기존 임대아파트보다 큰 최대 59㎡(17.8평형)이다. 주거문제를 해결해 준다. 충북 제천시의 사례도 눈여겨 볼만하다. 최대 5,150만 원까지 주택구매 대출금을 내주는 ‘3쾌(快)한 주택자금지원’ 사업을 도입했다. 결혼 후 5,000만 원 이상 주택자금을 대출한 가정이 아이를 낳으면 첫째 150만 원, 둘째 1,000만 원(2년 4회 분할 지급), 셋째 4,000만(4년 8회 분할 지급)을 지원한다. 셋째까지 낳으면 총 5,150만 원의 은행 빚을 지자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한다. 사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중 출산장려 관련 현금지원 비율이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주거 지원, 현금 지원, 육아 서비스 공급, 조세 정책 등 맞물려 돌아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나 사회 시스템이 함께 결혼, 가사노동, 출산, 양육, 교육 등의 몫을 함께 감당해 주지 않으면 경제, 직장, 주거, 세금 등의 장벽을 뚫고 결혼과 출산으로 나가긴 어렵다. 그래서 출산 때부터 대폭 지원하는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세액공제 혜택도 주로 중산층 이상에 쏠리는 만큼 저소득층 젊은 신혼부부의 출산율 재고를 위해 현금 지원 형태는 늘려야 한다. 저출산 문제는 포기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돈다. 저출산 너머를 볼 수 있는 비전, 미래로 나가기 위한 시스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앞장선 정치적 결단,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control tower)가 없다. 백수가 태반인 젊은이들이나 수입이 없는 서민들의 삶이 이토록 팍팍한 것은 경제도, 부동산 정책도,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 출산은 ‘취업-결혼-육아’ 등 라이프 싸이클(Life Cycle)과 관련된 문제로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일·가정 양립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가족 친화적인 사고를 가지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비용’이 아닌 ‘내일을 위한 투자’이다. 우리 정부의 여성부, 복지부 등 여러 부처와 지자체들도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식의 뜬구름 잡는 캠페인이 아니라 산재해 있는 가족 정책을 모은 컨트롤타워로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이고 효과 있는 지원에 나서야 한다. 문경시의 경우 신축년 첫 넷째아 출산 가정이 탄생해 3천만 원의 출산장려금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문경시 점촌2동 김모(35)·강모 씨(34) 부부의 남아로 2남 2녀의 막내가 됐다. 문경시의 출산장려금은 첫째 360만 원, 둘째 1천400만 원, 셋째 1천600만 원, 넷째 이상 3천만 원이다. 이러한 출산장려정책에 힘입어 문경시는 2019년부터 출생아 수가 2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출생아는 328명으로 전년도 대비 14명이 증가했고 이는 경북도 내 유일한 출산증가 기록이다. 출산 절벽시대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다음 세대가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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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총신대 정상화 어디로
    요즘 유행하는 ‘(전 지역에 걸친) 유행병’이란 뜻의 pandemic(팬데믹)이 아닌 혹시 pandemonium(팬데모니움)이란 단어를 아시는지. 이 단어를 한자로 ‘복마전’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데 pan이 ‘모든’이란 뜻이고 demon이 ‘악마’이며 ium으로 끝나는 단어가 ‘건물’이란 뜻이 있기 때문이다. stadium(스타디움)처럼 말이다. ‘복마전’이란 단어는 ‘수호지’에 나오는 말인데 (伏·엎드릴 복, 魔·마귀 마, 殿·전각 전)이란 한자를 쓴다. 말 그대로 ‘모든 마귀들이 숨어 있는 곳’으로 실제 의미는 나쁜 일을 꾸미는 무리가 모인 곳을 비유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어의 의미 때문에 현실에서는 이익갈등으로 인한 이전투구가 횡행하는 곳에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주로 복마전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때 총신이 그런 적이 있었다. 제대로 된 보수 신학은 상식적이고 자유롭다. 더불어 제대로 읽는 신학은 상식과 신앙을 지켜준다. 요즘처럼 문재인의 정치판이 법치주의 좌표를 잃은 시대에는 제정신의 보루 역할도 톡톡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인은 저 거룩한 곳의 정의와 윤리를 추구하는 성직자가 아니다. 정치는 모순과 혼돈의 흙탕물에 뛰어들어 스스로의 온몸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래서 함께 더 나은 세상으로 힘들게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하는 실존적 구원(救援) 행위다. 정치인의 무기인 권력은 타인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폭력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만 용서받는다. 유능한 인재와 손잡고 반대자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다. 총회 정치인들이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상이 있다. 그것은 일명 총신대정상화추진위원회 등 교단 내 4개 주체가 추천한 26명과 교육부가 추천하는 4명을 더한 총 30명의 총신대 정이사 후보 명단이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이하 사분위)에 전달돼 2월 22일 회의에서 이들 30명의 후보 중 15명을 총신대 정이사로 선임한다고 한다. 따라서 사분위는 개방이사추천위원회에서 추천한 김성곤 목사, 김성천 목사, 류명렬 목사, 이광우 목사, 이상복 목사, 이송 장로, 이진영 장로, 최득신 장로 등 8명 중 4명을 반드시 정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그리고 사립학교법 제21조 3항에 ‘이사 중 적어도 3분의 1 이상은 교육경험이 3년 이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총신대 이사 15명 중 최소 5명 이상을 교육경험 3년 이상의 교육이사로 채워야 한다. 일단 교육이사 자격을 갖춘 김종준 목사, 방성일 목사, 송태근 목사, 유선모 목사 등도 정이사로 선임될 가능성이 타 후보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고 교단과 총신의 정상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9년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는 총신대학교의 운영이사회 제도를 완전 폐지했다. 따라서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는 법인에 의해 법대로 운영하는 학교로 제도를 정비했다. 이는 직전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의 변하지 않는 순수한 금 같은 개혁의 열매였다. 게다가 그 뒤를 이은 제105회 세움의 총회장 소강석 목사의 교단과 정계를 아우르는 정치력과 지도력이 총신대 정상화에 밝은 빛과 바른길을 요셉처럼 헌신적으로 보태주고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제 총신대학교 운영은 법인 이사들로 단일체제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이사 선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단 보수 신학의 보루 총신의 정상화를 위해 힘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 29:7 2021-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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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배재군 칼럼_ 정부의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에 대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방역수칙에 대한 지적!
    정부의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에 대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방역수칙에 대한 지적! 1. 4명 모임은 허용하고, 5명의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2. 부모와 함께 하는 모임은 인원 제한 없이 허용하고, 형제자매의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3. 직계가족 모임은 허용하고, 사적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4. 대형마트, 영화관, PC방 영업시간 해제하고, 식당, 카페의 영업시간은 제한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방역수칙은 과학적, 합리적, 상식적이지 않기에 방역수칙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제 안 1. 획일적 방역수칙을 철회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역 수칙(면적당 인원 제한)을 마련하라. 2.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 확진자 수가 300~500명 그 이상의 증가에 따른 단계별 상향 조치보다 확진자의 급증할 상황에 대비한 의료 수용 시설을 충분히 준비하여 의료 수용 능력에 따른 단계별 방역수칙을 통해 방역조치를 예측, 가능하게 하라. 정부는 국민의 집합 및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직무가 아니겠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동원교회 배재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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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8
  • 이효상 칼럼_ 한국교회여! 트렌드(trend)를 멀리하라
    “카페인(caffeine)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예전에 마시던 박카스나 커피같은 각성 물질의 마시던 그 카페인이 이미 아니다. 이 카페인은 젊은이들이 소통하는 생활방식인 카카오톡(kakao tok), 페이스북(facebook),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줄여 뜻한다. 그동안 웹(web) 2.0을 기반으로 하는 소셜미디어(social media)는 블로그(blogs),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s), 메시지 보드(Message Boards), 팟캐스트(Podcasts)등으로 참여, 공유, 개방이 특징으로 네티즌들이 적극 참여해서 정보를 만들고 공유하는 사회적인 연결성을 중시했다. 웹(web) 3.0은 데이터의 의미를 중심으로 서비스되는 시대를 말한다. 개인화, 지능화, 상황인식 등이 엄청난 양의 정보 중에 내가 지금 필요한 정보와 지식만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맞춤형 웹의 시대가 웹 3.0 시대다.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해서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정보만을 편집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AI) 웹이다. 가령 예를 들어, 웹 3.0에서는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때 그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여러 웹사이트를 일일이 들어가서 정보를 모으고 예약하는 과정 대신 우리의 휴가 일정과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 등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정보를 다 찾아보고 그것에 맞춰 알려준다.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에서 회자 되면서, 많이 쓰이는 용어 중 하나가 ‘메가트렌드’와 ‘빅데이터’라는 단어이다. 인공지능(AI) 기술과 사물인터넷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사회 전반에 융합돼 혁신적 변화가 나타나는 코로나로 인한 변화와 4차 산업혁명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어찌 보면 변종(變種)이 생겨날 정도이다. 교회는 이같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대응해야 할까? 1980년대는 산업화의 뒤를 이어 ‘경영’과 ‘부흥회’가 목회의 필수 키워드(Keyword)가 된 적도 있고. 1980년 후반에는 ‘제자훈련’이, 1990년대는 ‘빈야드’사역이 2000년대에는 ‘복지’가 유행이었다. 2010년경부터는 인간 이해를 전제로 ‘상담’이 목회의 필수 과정처럼 어필(appeal)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한국교회가 트렌드(Trend)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롤러코스터를 해 왔다. 한때는 미국의 어떤 교회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치 그것이 교회 성공의 비결인 것처럼 여겨지고 유행처럼 번져 교회 강단과 세미나를 독점하고 필수코스로 탐방하며 그 과정은 그대로 국내 도입되었다. 교회와 목회, 사역에 뭔 트렌드가 있을까마는 강조점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한때의 흐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트렌드를 잘 선용하면 교회의 여러 활동에 도움 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트렌드에 민감하고 트렌드에 맞추느라 요란스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트렌드는 그때그때 다르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존재의 진중함이 더 종교가 가진 고유의 성질과 맞다. 어찌보면 트렌드는 ‘유행’이고,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이다. 짧게는 3년 길어야 10년을 못 넘긴다. 왔다가 반짝하고 지나가는 허상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혹자는 ‘교회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기술에 매몰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교회는 기술적 가치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움’이라는 영성 적 기준이 있다. 이런 기능에도 불구하고 트렌드가 어떤 방향이나 모습으로 변화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게 어려운 만큼 지금의 교회는 신기술과의 접점을 넓혀가면서도 초대교회의 영성과 공동체성, 공교회성과 공공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물론 전통적인 교회문화 안에도 인공지능의 문화가 도입될 수 있다. 교회가 트렌드에 민감하여 교회 안에 백화점 문화센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양 아카데미, 카페와 서점, 꽃집 등을 만들어 교회를 '거룩한 공간'이라기보다 평일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생활 공간화'함으로써 교회의 대중접근, 특히 교회와 거리를 두는 젊은 세대들을 끌어들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대중의 일상적 삶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비즈니스나 마케팅 지상주의에 빠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하되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미래학자의 책을 100여 권 읽고 여러 강의를 들었지만 그들의 예측도 틀린 경우가 허다했다. 미래학자들의 헛발질을 보며 그들의 말이 꼭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시대의 트렌드를 외면하고 모른다고 잘한 일도 아니다. 줌(Zoom)이나 화상회의가 그렇다. 현 시세를 읽고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트렌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르는 순간, 트렌드에 휩쓸려 결국은 트렌드와 함께 추락할 수 있다. 오늘날 너무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런 함정에 빠지고 있다. 세상 문화가 추구하는 많은 것들에 동조하고 세상 풍속을 따라간다. “자기 스스로 사색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색과 주장과 선동에 따르게 된다. 자신의 사색을 그 누구에게 공물로 바치는 일은 자기 육체를 공물로 바치는 것보다 천하다.”라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는 말했던가. 세상과 소통하고 문화를 접목하며 꼭 트렌드를 앞서가고 주도하고 트렌드에 맞춰가기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넘어선 교회가 가진 영성의 깊이에 달려 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갈급함과 방황하는 그 영혼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세울 것인가 하는 데 더 큰 고민을 가져야 한다. 트렌드는 포장지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 화려한 포장지에 정작 그 알맹이가 허당이면 사람들은 금방 실망하고 떠나가게 된다. 알맹이 즉 내공이 없으면 무슨 사회적 영향력이 있겠는가?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문화 시류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남의 뒤에 서겠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런 문화 현상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거친 반발과 비판을 두려워해 세속적인 현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트렌드를 멀리하고 시대를 거슬러 ‘수도원 적 영성’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 대안일 수 있다. 트렌드의 옷을 입고 젠틀(gentle)한 교회의 모습은 지녔지만 은혜가 메마른 교회보다는, 트렌드를 멀리하고 영성의 깊이를 더해 영혼을 향한 눈물과 가슴이 뜨거운 교회가 그래도 더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한국교회여! 트렌드를 멀리하자. 트렌드는 본질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여기저기 세미나 돌아다니며 들은풍월로 따라 한들 언제 전문가가 되겠나. 빌게이츠처럼 한다고 첨단목회가 되겠나.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전문가인 평신도들의 몫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차라리 목회의 본질을 부여잡아야 한다. 교회여! 영성과 능력을 지닌 교회로 가자. ‘다시 복음으로’, 트렌드와는 결이 다른 길을 가자. 코로나 위기 속에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으며, 다시 말씀을 깊이 파 실력을 쌓고, 다시 기도의 분량을 채우며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야 산다. 시세를 읽고 실력을 쌓으며 트렌드와 반대로 갈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남다른 생존과 탁월함을 이뤄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을 읽고 성공하는 사람은 그 생각과 가는 길이 이미 다르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감으로써 시대를 열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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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5
  • 김종희 칼럼 - 총회 처리 절차 및 사문화 이해
    필자가 얼마 전 노회 조직은 21당회 이상이 되어야 하고 조직이 되고 난 후 1당회라도 모자라면 흠결(欠缺)이 된다고 글을 쓴 바 있다. 이에 대하여 법을 잘 아신다는 원로께서 반론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미 필자가 언론에 발표한 글로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고 사료 되므로 여기서는 총회 처리 절차 및 사문화(死文化)에 대하여만 언급하고자 한다. Ⅰ. 총회 처리 절차에 대한 이해 ① 정치 제10장 제2조(노회 조직) “노회는 일정한 지방 안에 모든 목사와 각 당회에서 총대로 세례 교인 200명 미만이면 1인, 200명 이상 500명 미만이면 2인, 500명 이상 1,000명 미만은 3인, 1,000명 이상은 4명씩 파송하는 장로로 조직한다. 단 21당회 이상을 요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회는 21당회 이상이 되어야 조직이 된다. ② 21당회로 조직이 된 노회가 몇 당회가 부족하면 흠결이 되는가. ⓐ 몇 해 동안 가동한 조직교회실사처리위원회(이하 실사위원회)의 보고를 총회가 받아 21당회에서 1당회라도 모자라는 노회를 단속하고 총대권을 제한한 것이 사실이다. ⓑ 제105회 총회에서 “서울 강남 노회장 장홍기 씨의 헌의와 전북노회장 이민규 씨가 헌의한 “21당회 미만 노회는 총회 총대 천서 및 상비부 및 특별위원을 제한하고 당회가 충족될 때까지 옵서버로 참석토록” 한다고 결의하였다. 이와 같은 결의들에 따라 21당회로 조직이 되고 난 후 1당회라도 모자라면 흠결(欠缺)이 된다. 1당회라도 부족하면 노회로서 정상적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결의이다. ③ 총회 결의는 지켜져야 한다. 그 결의는 뒤집는 새로운 결의가 나오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그러므로 상기 결의가 위헌적 요소나 문제가 있으면 제106회 총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헌의가 올라와 다시 논의하는 것이 절차에 맞다. 제106회 총회에서 실사위원회의 보고를 뒤집고 21당회가 안돼도 총대 파송을 할 수 있다며 제105회 총회 결의를 뒤집으면 된다. 금번 천서위원회는 총회 결의대로 집행하면 된다. 세상에서도 위헌적인 요소가 있으면 헌법재판소를 거치지 않는가. 총회에는 위헌을 판단하는 기관이 없으므로 총회에서 다시 의논해야 한다. 절차를 무시하고 주장만 하여 총회를 혼란하게 하고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Ⅱ. 사문화(死文化)에 대한 이해 ① 사문화란 ‘조문은 있으나 실질적인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법 조문은 있는데 지키지 못하거나 지킬 수 없는 상태로 많은 세월이 흘러가다 보면 사문화가 되는 것이다. 사문화가 되어도 좋다는 법 조항이 있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문화가 된다는 법 조항을 근거로 대라고 하는 것은 사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② 사문화된 법을 들고나와 당장 실천을 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속·압수·수색 또는 심문을 받지 아니하며,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보안처분 또는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즉 법률에 의한 처벌을 인정하고 있다. 법률에 의한 처벌은 형법 제41조에 보면 형의 종류로 사형.징역.금고.자격상실.자격정지.벌금.구류.과료.몰수가 있다. 여기 사형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465조에 의거 사형집행 명령의 시기에 대하여는 “사형집행의 명령은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6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1997년이후 사형 집행이 한 건도 없었다. 대개 10년간 사형집행이 없는 경우 사실상의 폐지국가 취급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형제도가 사문화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위헌과 법률 위반이라며 당장 사형수를 모두 끌어내 사형을 집행하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③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로 되어 있다. 한반도라 함은 북한을 포함하는 전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주권이 미치는 곳이 영토이다. 그러므로 헌법에 있으니 당장 북한에도 우리 주권이 미치게 하지 않으면 정부가 위헌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환경과 여건 속에서 헌법이 사문화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④ 총회결의가 헌법을 능가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겠지만 지켜오지 않은 사문화된 헌법보다는 현재 지키고 있는 법이 우선한다. 헌법 제67조와 68조에서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을 ‘당선자’로 하고 있지만, 공직선거법 187조와 대통령직인수법 제2조에는 ‘당선인’이라고 부른다. 헌법의 명칭은 사문화되고 아랫 법을 따라 당선인으로 하고 있다. ⑤ 우리 총회가 지난 수십 년간 4당회만 넘으면 총대를 파송하고 3당회 이하일 때 옵서버를 파송한 적이 없다. 세상의 법도 10년 이상 지키지 않으면 사문화를 주장하는 입장인데 수십 년 동안 지켜오지 않은 법을 들춰내 위헌 운운하는 것은 옳지 않다. 법이 있는 이유는 혼란을 방지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다. 법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규범적인 타당성과 법적인 실효성이 합치될 때 가능하다. 타당성이 없는 법은 악법이 될 수 있다. 아무리 헌법적 조항이라고 하더라도 타당성과 실효성이 없는 사문화된 법을 우선할 이유가 없다. Ⅲ. 결론 21당회에서 1당회라도 모자라면 흠결이 생긴다는 것은 실사위원회 보고대로 총회가 결의하였기 때문이며 제105회 총회결의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결의가 나와 뒤집기 전에는 결의된 대로 실행하는 것이 총회의 절차이다. 사문화는 법을 지키지 못하면 자연히 사문화의 길을 걷는 것이므로 사문화하라는 조항이 어디 있느냐고 요구하는 것은 사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참고로 통합 측 헌법은 30개 처 조직교회가 있어야 노회가 조직되고 총대 파송은 각 노회당 목사 장로 각 4인을 기본으로 파송하고 무흠 입교인 비율에 따라 더 파송한다. 우리 교단은 21당회로 노회를 조직하다 보니 노회 수가 너무 많다는 소리를 듣는 입장이다. 21당회라도 유지해야 체면이 설 것 같다. 그런데 3당회 이하 1당회만 남아도 노회라니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나 위헌이 맞다면 제106회 총회에 헌의 안을 올려 다시 다루면 된다. 김종희 목사(헌법자문위원장. 정치부장 역임. 성민교회)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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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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