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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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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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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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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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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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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성경에 잡힌 우주
    “우리 망원경에 잡힌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이 1998년 ‘내 연구실에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간의 기원’의 저자 토마스 헤르토흐를 만나 던진 것이다.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호킹과 함께 연구했다. 호킹은 사망 직전 다중우주 관련 논문도 저자와 함께 썼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이론물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호킹과의 공동 연구를 소개하는 '시간의 기원’은 교양과학서이다. 문제는 이렇다.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는 주변 영역과 온도 차가 10만분의 1도밖에 안 된다. 온도 차가 1만분의 1도였다면 우주는 블랙홀 세상이 됐을 것이고, 100만분의 1도였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만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생명 친화적인 우주’다. 우주의 인플레이션(팽창) 속도, 공간이 3차원이라는 것, 중성자와 양성자의 질량 비율, 강한 핵력과 전자기력의 강도 비율, 암흑 에너지의 밀도… 이처럼 우주의 각종 변수가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진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을 ‘미세 조정(fine-tuning) 문제’라고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이런 것이다.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우주마다 물리법칙이 다르다. 우리의 우주가 생명 친화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우주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명 친화적이지 않은 다른 수많은 우주에는 우주를 고민할 생명체가 없다.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우주를 설명한다는 이른바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1973년 처음 제기됐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주장은 검증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과학의 영역인지 애매하다는 말이다. 신학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렌즈를 깨끗이 닦아 가방에 넣고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노부부의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가 아주 큰 남편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키가 아주 작은 아내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학생 같다. 그렇다, 부부란 키를 맞추는 것이다. 키를 맞추듯 생각도 맞추고 꿈도 맞추고 목적지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내릴 역에 다다르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 말없이 함께 내리는 것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 브랜드로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 것인지 고민한다. 우리 목사들도 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목회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나. 월급 외에 사역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이 명하신 소중한 목회를 충분히 다 체험하고 있나. 곧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믿음으로 건국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분수령이 될 22대 국회의원 선거다. 선거가 끝나면 300명의 의원이 새로 뽑힐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리더, 지도자라 부르지만 지난 세월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과연 리더인지 개탄스럽다. 생산적인 가치는커녕 걱정과 분노를 더 많이 유발하지 않았나. 그들은 왜 국회의원이 되려는지, 국회의원이 되어 어떻게 쓰이고 싶고 어떤 가치를 생산하고 싶은지 한 번이라도 자문해 본 적이 있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여전히 삼류, 사류인 이유 하나는 그들이 이런 본질과 마주하는 대신 오로지 허영의 시장에 정신이 팔려서가 아닐까. 각 당의 후보들은 지금이라도 ‘어떻게 세비 값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휴대폰 렌즈에 잡힌 총회의 목사와 장로도 유권자이기에 2024년 4월 10일 믿음의 눈 밝게 뜨고 조금이나마 그 일에 진심인 사람을 골라 투표해야겠다. 과학자가 주장하는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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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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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 ‘안수증명 사실 확인서’선관위 제출용 발급 밥값이라면 그 근거 서류 필요 밝히는 건총회 고위 공직 국장 이름값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서 말했다. “내 말이 진실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내가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난이 곧 신뢰를 증명하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돈과 철학이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반면 소피스트들은 여러 도시에서 강의하면서 수업료로 높은 금액을 불렀다. 일부 부흥사의 은혜와 감동처럼 지식 활동을 금전 척도로 따진 것이다. 어렸을 때 집에 일꾼이 오면 무거운 짐을 다 옮긴 뒤에도 그는 “더 할 일 없소.” 하고 팔을 걷었다. “이제 그만 됐다”는 어머니에게 일꾼은 말했다. “아이고 밥값은 해야지요.” 서로 웃는 낯이었지만 ‘밥값’의 뜻은 엄정했다. 무릇 살아가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받은 만큼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사람의 도리로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네받은 품삯을 구태여 밥값이라 부르는 속뜻도 깊었다. 나이가 들어 총회에 나와 보니 밥값 말고도 ‘이름값’이 중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조직에서 다들 크고 작은 이름을 내걸고 살았다. 자신이 잘나서 세운 이름은 일부분이고 대부분 주변에서 거들고 대접해줘서 생긴 이름이다. 그래서 ‘이름값’을 치러야 하는 사람은 ‘그들’이 아닌 ‘나’였던 셈이다. 요즘 총회 지도층 총회 본부 고위 공직자 교단 유명 인사들을 보면서 그들의 ‘밥값’과 그들의 ‘이름값’을 떠올린다. 밥값을 하려면 그 자리에 앉혀준 임명권자가 지시한 일을 제대로 해내야 할 것이다. 그게 밥값이다. 그러나 총회 공직자로서 이름값을 하려면 임명권자가 내린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서 총회와 신앙의 기대치에도 부응해야 한다. 밥값은 기본 필수요 이름값은 그 너머 알파요 신자의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밥값’의 의무감과 ‘이름값’의 신앙 양심이 충돌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총회 국장 노재경이 말하듯이 총회 선관위에 제출할 ‘안수증명서 사실 확인서’라는 해괴한 증명서를 총회장 이름으로 발급하는 것이 밥값이라면 그 서류의 정당성을 입증할 근거서류가 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히는 것이 총회 고위 공직 국장으로서 당연한 책무요 이름값일 수도 있다. 이걸 조화롭게 해결하는 정답이 ‘자리값’이다. 그러나 총회 서류 발급을 관장하는 국장은 정당한 서류인지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전문성과 책임을 당연히 지니고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근거서류의 확인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민감한 사안이라서 거부하는 직권남용을 넘어 더 나아가 10년간의 관행이라면서 목사의 생명인 ‘안수증명서’에 대해 노회가 해야 할 일을 그 일을 해서는 안 될 총회가 증명해 주는 어처구니없는 서류를 엄정한 총회 선관위에 제출하게 하는 것은 사법에서도 중한 죄로 여기는 ‘사문서위조’의 불법을 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서류의 어이없는 내력은 이렇다. 2018년 7월 3일 총회장 이름으로 증명해 주는 총회 임원 후보의 목사 안수는 1995년 3월 9일 안수를 받았는데 영어로 된 졸업증명서는 영어로 ‘fifteenth June of nineteen ninety six’(1996년 6월 15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신학교 졸업 1년 3개월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는 사실을 어떤 서류에 근거해 총회 선관위에 제출할 서류로 총회가 2018년 7월 3일 총회장 이름으로 발급해주었는지 기사를 써야하는 기자로서 궁금했다. 반드시 확인을 하고 써야 한다는 소재열 박사의 충고에 따라 총회로 갔다. 총회 총무가 휴가 중이라 그 확인을 전화로 물었더니 출타 중인 담당 국장 노재경에게서 “민감한 사안이라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을 총무에게서 전화로 전해 들었다. 나중 다른 사람이 노재경에게 물었더니 처음에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떼다가 그 서류를 디밀자 10년 전부터의 관행이라 그리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잘못을 범하는 총회 공직자가 또 있다. 임해순이 자기 아들 친구라 데려오고 건강도 여의치 않은 박상범은 오랜 세월 부장과 국장으로 은급재단을 오래 관장하면서 은급사업을 같이 출발한 통합 교단은 4100억이고 우리 합동 교단은 372억에 불과한 사실에 대한 책임 의식은커녕 일말의 양심과 부끄러움도 없다.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총회와 실행위원회와 8회에 걸친 은급재단이사회 결의에 따라 매매계약을 제102회 총회 며칠 전에 체결했다. 그러나 17년 해묵은 납골당 적폐 해소를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기가 바뀌자 총회 결의와 총회장 김선규 재단이사장의 1년에 걸친 재단이사회 해결과정을 보고도 총회 고위 공직자임에도 제102회 회기 내내 신성한 총회 결의를 보란 듯이 무시하고 “이제 납골당 적폐를 털고 통합 교단처럼 앞으로 나아가자”고 외치고 개혁을 실천한 김선규 총회장의 합법적 매매 계약과 17년 적폐해소 업적을 모독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진행 중인 납골당 매매계약 강제 이행 소송으로 재판에 질 경우 하루 270만원 씩 지불해야 하는데도 재판을 이리저리 질질 끌고 있다. 그 재판이 일 년이 다 돼가니 300일만 잡아도 강제 이행금 지불액이 8억 천만 원이다. 다행히 다윗의 별 전계헌 총회장이 지난 번 8월 은급재단이사회 때 은급재단 이사장으로서 1심에서 질 경우 재판을 더 이상 끌지 않고 매각하기로 했으니 그나마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공직을 맡아 자릿값을 못하면 ‘꼴값 떤다’는 소리를 듣다가 종당에는 불명예스럽게 물러나게 된다. 아니 그 정도로 그치는 게 아니라 들통 나면 ‘죗값’을 치르게 될 수도 있다. 그동안 세상에서 많이 봤듯이 자릿값 못하면 시간이 흐른 뒤 다음 정권이 반드시 죗값을 묻는다. 택배 기사에겐 밥값을 하는 게 그의 성실이라면 고위 공직자는 자릿값을 하는 게 그의 성실이다. 그렇듯 총회 직원도 총회 공직을 맡아 자릿값 못하고 시간이 흘러 들통 나면 사법에 고발 고소를 당하는 일이 생기고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교단은 정권이 바뀐다는 개념이 없어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 실적이 없는 박상범처럼 문책은커녕 총회구정조정위원회 서슬 속에서 국장 진급도 하고 총회 결의를 무시하고 총회 결의와 재단이사회 결의에 따라 매매계약을 한 전임 김선규 총회장의 명예를 모독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어도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총회 일이란 그러려니 하니 물론 나도 잘 지내고 있다. 지금 총회 선관위 제출용 ‘안수증명 사실 확인서’라는 해괴한 증명서를 떼 준 일로 그 고위 공직자가 이번 8월 28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 고발을 당했다는 말이 들린다.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한다. 말씀과 총회에 충성하지 아니하고 잘못된 관행에 의지해 반역하는 자는 사법의 책벌과 하나님의 심판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다. 스웨덴에선 ‘적당히’를 뜻하는 ‘러곰’(Lagom)이란 말을 숭상한다. 식사는 적게 하고 생각은 많이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조화를 중시한다. 피아노의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이 어우러져 음악을 만들어내듯 사회 구성원들은 증오를 드러내지 않고 공존을 모색한다. 스웨덴의 가장 큰 자산은 국민이 국가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한다. 제103회 총회에서는 이러한 총회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책임을 묻고 제도 개선의 틀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자리보전이나 어두운 대가에 길들어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총회의 앞날을 위해 할 일 하는 게 바로 “자릿값을 한다”는 것이다. 노재경처럼 워낙 잘못된 관행에 쪄들어 총회를 이용하는 자에게는 그 꿀맛을 버린다는 게 쉽지 않고 소태를 씹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총회도 총회 지도자와 총회 공직자가 자릿값과 이름값을 해 전국 교회와 노회가 총회를 신뢰하는 날이 이 사건의 해결을 통해 필히 오기를 바란다. 2018-08-29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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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29
  • 교수 윤익세 목사
    교수 윤익세 목사 자신에 관한 제102회 총회 결정 문제 삼아 총회와 선관위 정면 도전 기사 게재 이런 행위는 자신의 문제를 빌미 자신의 정당성과 정치적 입지를 알리는 고도의 선거운동이기도 해 총회재판국 국장 허은 전주동부교회 분쟁 상소 건 부당 처리 항의 답변권징조례 76조 판결 전 선전 금지 위반 아주 바쁜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 미국에서 불의의 사로로 떠난 아내를 잊고 다시 결혼하려는 마음이 있다. 칼빈대에도 사무실이 있으며 교회에도 사무실이 있다. 기억에는 한계가 있다.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 있으며 성장을 위해 시간이 무한정 들어가는 믿음도 있다. 맞물린 교수와 목사의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의 경력의 대부분은 거기서 쌓았으며 신학대 교수이고 교회 목사이니 둘 다 사실 믿음과 관련된 일이다. 물고기도 아니고 밀가루도 아니니까 붕어빵의 깊은 고민과 비슷한 처지다. 붕어빵은 늘 같은 모양이다. 제가 붕어빵이라는 데 한 점의 의문도 없다. 그도 그렇다. 나는 칼빈대 교수이고 아산사랑의교회 목사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교수와 목사인 그리고 총대로서 재판국원이고 부서기 후보인 그는 그인가. 믿기 어려운 때가 있다. 부인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 안에 다른 시간들과 온갖 장소들에서 변하는 낯선 인격들이 우글거린다. 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2018년 7월 6일 하야방송 - 예장합동 103회 총회 앞두고 ‘이중직’에 대한 총대권 ‘이중잣대’ 논란 제하의 단독 특종 기사를 내보냈다. 그 주장의 개략은 이렇다. 헌법에 이중직은 총대 될 수 없다는 조항 없어 예장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이 9월에 개최되는 103회 총회를 앞두고 ‘이중직’에 대한 “이중 잣대를 헌법에 이중직은 총대 될 수 없다는 조항 없어 예장합동(총회장 전계헌 목사)이 9월에 개최되는 103회 총회를 앞두고 ‘이중직’에 대한 “이중 잣대를 대지 말라”는 주장과 함께 이 문제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102회기 총회에서 김선규 총회장은 교수와 목회를 하는 이중직이 있다며 103회 총회 전에 교수를 할 것인지, 목회를 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노회에서는 이중직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으로 결정한 바 있다... 헌법에 이중직은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없는 상황이기에 ‘이중직’ 총대 자격에 대한 기준은 정치적인 논리보다는 형평성 부분으로 처리해야 할 부분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현재 이와 관련해 충남노회(노회장 윤익세 목사)는 ‘이중직에 대한 질의 건’이라는 제하로 총회에 질의서를 접수했다. 질의서에 명시된 질의 내용은 ▲이중직은 총회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조항이 헌법 어디에 등재되어 있는지 답변해줄 것과 ▲헌법에 없는 내용을 총회가 결의하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사례비를 받지 않아도 직이 두 개이면 이중직에 해당하는 것인지, ▲이중직이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물었다. 이같은 질의에 대한 답을 6월 15일까지 총회에 요구했지만 총회에서는 아직 답이 없으며 현재 이와 관련해 규칙부로 넘겨져 진행가운데 있다. 교수 윤익세 목사는 총회 임원 후보로서 어떤 언론 플레이도 하면 안 된다. 더욱이 선거 후보 등록기간에 재판국장 경력의 엄격한 법통 경력의 그가 기독신문도 안 되는데 사설 언론에 위법인 줄 알면서 왜 자신의 문제를 항변했을까. 칼빈대는 교수 윤익세 관련 총회의 질의에 윤익세 목사는 칼빈대 교수라고 확인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관위는 왜 말이 없는가. 102회기 총회에서 김선규 총회장은 교수와 목회를 하는 이중직이 있다며 103회 총회 전에 교수를 할 것인지 목회를 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노회에서는 이중직을 정리해서 올리는 것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선관위는 차세대 총회 지도자로 떠오르는 김용대 목사의 부서기 후보직은 구개혁 측 총대 문제를 인정할 수 없어 총대 자격이 미달된다며 전체 투표까지 해 반려 결정을 재빨리 공지했다. 그런데 그와 달리 교수 윤익세 목사 문제는 총회 결의 문제이니 제103회 총회 현장까지 가져가기 위해서인가. 총회선거관리규정 제26조 (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5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노회 추천을 받은 입후보자는 추천을 받은 날로부터 개회 전까지, 그 외의 입후보자는 등록마감일로부터 개회 전까지 모든 언론에 광고 및 인터뷰 등을 통해 본인과 소속 교회를 알리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단, 언론을 통한 선거운동은 등록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까지 총회 기관지를 통해서만 할 수 있고, 5단 광고(경력사항 포함) 4회까지 게재할 수 있다. 교수 윤익세 목사는 자신에 관한 제102회 총회 결정(자신의 문제 현장 처리를 모면하게 해 준)을 문제 삼아 총회와 선관위에 정면 도전하고 항변하는 기사를 단독 게재했다. 게다가 이런 행위는 자신의 문제를 빌미로 자신의 정당성과 정치적 입지를 알리는 고도의 선거운동이기도 하다. 그가 소속한 총회재판국 국장 허은에게 전주동부교회 분쟁 상소 건을 부당하게 처리한 항의를 했다. 그의 대답인즉 이렇다. 허은: ... 14인 장로 측에서 제기한 모 언론 기사 보도와 함께 제출된 76조 위반 건에 대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76조는 무슨 내용입니까. 허은: 권징조례 76조에 대하여 판결 전 선전 금지 위반에 대한 건입니다. 그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9장 상소하는 규례 제 76 조상회는 어느 때를 물론하고 그 소속 하회가 헌법에 위반되게 처리한 사건이 있는 줄을 확인하면 하회로 하여금 정한 처소에 그 문부를 가지고 와서 처리한 형편을 보고하게 할 것이요, 그 착오된 사실이 명백히 발견되면 상회가 직접 변경하든지 하회에 환송하여 처단할 것을 지도할 수 있다. 혹시 어떠한 소원이나 상소를 불문하고 본 치리회나 혹 그 재판국에서 재판하는 중 판결 언도 전에 피고 혹 원고가 상회원에게나 일반 민중에게 대하여 변론서나 요령서를 출간 혹 등사하여 직접 혹 간접으로 선전하면 치리회를 모욕하는 일이니 그 행동을 치리하고 그 상소를 기각할 수 있다. 법에 정통한 허은은 언론 자유에 근거한 언론 비판이나 정황 보도를 지례 판단한 것까지는 좋은 데 장로 측 옹호 최성관 기사는 문제 삼지 않았다. 게다가 그 법을 따라 그 상소를 기각하지 않고 법을 초월하는 불법적 합의문으로 절대 다수의 상대를 교회에서 축출했다. 한 교회가 세 교회로 분리되는 이만 교회 운동에 기여를 했다. 그러나 그 합의서 내용은 뭘 모르는 순박한 목사와 장로는 겁박해 얻어낸 합의서임을 그 합의 7개 조항마다 총회재판국장 허은과 중전주노회장 김형래와 상소인 김중경 등의 붉은 인주 자국처럼 교인들의 통한의 피와 하나님의 진노가 서려있다. 그 사실을 당사자들이 모른다면 그 처리는 제103회 총회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으리라. 어쨌든 그들은 권징조례 적용으로 한 개인이 아닌 한 교회를 삼분(三分)시키는 처리를 감행했다. 그 사건에 직간접으로 간여했을 총회와 총회재판국원 실세이고 칼빈대 교수 충남노회장 윤익세 목사는 총회 임원 후보로서 총회선거관리규정이 금한 자신의 문제를 항변하고 자신의 위세를 기관지 기독신문이 아닌 사설 언론에 선전했다. 더욱 궁금한 것은 어떻게 그 사설 언론은 이러한 은밀한 특종을 단독으로 입수했을까. 그리고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구개혁 측까지 들먹이며 막가는 지엄한 선관위 이은철 위원장은 총회선거관리규정 제26조 (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5항을 위반한 교수 윤익세 목사의 사설 언론 항변 사실을 몰랐을까. 그래서 지금까지 교수 윤익세 목사의 그 사실을 뭉개고 있는 것일까. 유신 반대 유인물을 돌린 경기고 학생 노회찬이 드루킹 관련 4000만 원 강연료 문제로 2018년 7월 23일 국회의원 직에도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 노회찬은 여성·장애인·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눈물 흘리고 힘겨운 삶을 개선하기 위해 입법에 전력을 다해 많은 성과를 거뒀다. 2004년 호주제 폐지 법안 대표 발의자가 바로 노회찬이었다. 보수정치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비판을 하되 적대적이 아니었고 물러서지 않았지만 상대를 모욕하지 않았다. ‘깨인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노회찬은 밑창까지 닳아버린 구두와 지구에서 달나라까지 가고도 남는 거리를 11년간 달린 낡은 승용차로 힘없는 사람들만 골라서 찾아다녔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했던 노회찬은 우리 총회 차원에서 바라보면 얼마 안 되는 하찮은 과오를 자책하고 스스로를 정죄(定罪)했다. 교수 윤익세 목사 그가 교수와 목사로서 무얼 가르치는지는 몰라도 그가 무얼 하고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한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 목사 이제 돈 안 먹어.”“(칼빈대) 총장에 선출되면 정치를 그만 두겠다.”“월급은 사실 ...다.”“분쟁 교회 해결은 재판이 아니라 상담이 최고다.” 이중직 어디에서도 돈을 안 받는다는 의사를 사설 언론에서 피력한 그는 고급 새 차를 타고 다닌다. 그의 자녀는 미국에서 학교 다니며 살고 있다고 한다. 교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노회찬은 강연료 고작 4000만 원 때문에 부끄럽고 후회스럽다며 자신의 생을 마감했다. 교수 윤익세 목사에게는 후회스러운 일이 없었을까. 그는 각종 병아리 분양을 즐긴다. 그래서 여느 목사 사무실과 달리 그의 교회 사무실에는 병아리들이 부화해 자라고 있는 유리 상자가 있다. 아마 그런 그는 또 다른 분야의 학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교수로서의 저서나 논문에 대해 본인이나 타인이 말해 준 적이 없다. 그의 큰 후원자는 얼마 전 제주도 농장으로 은퇴한 김희태 목사이다. 앞으로 그에게서의 후원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칼빈대 당국자가 그가 교수가 맞느냐는 총회 질의에 교수가 맞는다고 답변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총회가 묵묵부답이라고 그는 항변한다. 허은은 전주동부교회 목사 측에 상소를 기각시키고 불리한 합의를 한 근거가 언론 플레이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7월 6일 후보 등록기간 중에 기독신문도 아닌 다른 언론에 언론플레이를 한 교수 윤익세 목사는 괜찮은가 아니면 선관위 자체가 모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심의 중인가. 세상이라는 공간에 역사라는 시간이 거쳐 가다 보면 원한이 쌓이기 마련이다. 원한 중에서 가장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을 누군가가 해치는 일이다. 해서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부지수 불여공대천(父之讐 不與共戴天)’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갈갈이 찢어놓고 사랑하는 신자들의 믿음을 죽이는 사람들과 어찌 하늘을 같이 할 수 있겠는가. 그 교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한데 주님의 몸을 해하는 불법을 저지르고도 이죽거리며 활개치고 다니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도 이 총회다. 한번 거짓을 눈감아주면 다른 거짓이 우후죽순 생겨날 수밖에 없다. 거짓말로 얻는 이익이 그것으로 잃게 되는 대가보다 크다고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총회가 그렇다. 법정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도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작년에만 1516명이다.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 수사기관에서의 허위 진술이 얼마나 될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총회도 믿음과 양심을 떠난 거짓말을 죄악시하지 않는 행습이 그런 세상 문화 속에서 싹텄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홉 번째 계명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 20:16)이다. 열매로 그 나무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는 주님 말씀의 시금석은 이 계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짓을 태연히 말하는 사람은 며칠 뒤에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그러면 그 신앙 나무의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총회 지도자의 입후보 자격은 무엇보다도 세상처럼 거짓이 드러나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준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자괴감(自愧感)이 든다. 이제 지하철에서의 다툼으로 가해자가 되어 벌금 30만 원 형을 받았다. 그래서 기다리던 끝에 오늘 나는 ‘벌금을 가납하지 아니하면 1일 10만 원 상당의 노역에 처한다’는 그 선고문에 기록된 대로 의정부 교도소로 입소하여 죄수의 체험과 회개 기도하는 특혜를 누리게 됐다. 혹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부족한 총신 72회 동료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란다. 2018-07-30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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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30
  • 제1회 총회장상
    수상자 대표 소강석 목사 아주 소박한 상임에도 매우 단단한 소회를 밝혔다. “모든 것을 총회를 위해 꽃피우는 마지막 삶으로 알고 살아가도록...” 미흡한 것 총회장 단체 등대상에영동중앙교회 분쟁 판결 아닌 협상 해결 제101회 재판국장 윤익세가 빠진 것 호암상은 커녕분쟁과 부정에 오간다는 돈에 비해 상금이 턱없이 너무 적다는 것 ‘당분간’ 총회는 여전히 깊이깊이 부패할 것이다. 당분간 노회는 여전히 돈바람에 나부끼고 있을 것이다. 당분간 교회는 각자 나름대로 잘 살아 있을 것이다. 당분간 해도 달도 날마다 뜨고 질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은 어떠세요’ 라고 묻는 내 믿음도 당분간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이 총회 탁류는 흐르고 흘러 몇몇 총대를 살찌우고 그 곁에서 사람들은 잘 살아 있을 것이다. 해와 달도 부패한 그들도 누릴 수 있게 변함없이 뜨고 질 것이다. 뭇 생명과 별들의 움직임은 저 하늘의 뜻인데 믿음이 아니고는 그걸 온전히 알 도리는 없다. ‘당분간’은 잠시 동안을 말한다. 그것은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수십 만 년 인류사도 수억 년의 자연도 수십 억 년 별들의 시간도 잠깐이다. 하나님 앞에서 ‘당분간’은 너무 큰 말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 저희끼리 속살거리는 부패한 자들에게 사실 심판으로 알게 모르게 곧 다가올 그 말은 무서운 말이다. 새벽 기도에 신학생으로서 전도사로서 울었다. 목사가 되어서도 자라지 않는 믿음 소망 사랑을 안고 자곤 했다. 그리고 흘러간 겨울 저녁 굴뚝 연기 같은 것이 또는 먹다 내려놓은 숟가락 같은 것이 돌아오지 않는 믿음의 소명을 되돌아와 건드리면 개미처럼 땅강아지처럼 작고 서러워졌다. 이제 사람이 되는 걸까. 밥 먹어야지 부르던 저녁 굴뚝 연기가 있었고 다 못 먹고 숟가락 내려놔야 했던 그 옛날로 불려가서 작고 서럽고 외로운 무엇이 되는 것 같은 느낌 탓에... 호암상은 199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이 호암 이병철 선생의 인재제일과 사회공익 정신을 기려 사회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어 학술·예술 및 인류 복지증진에 크게 공헌한 인사들을 현창하기 위해 설립 제정한 상이다. 학술 예술 및 인류복지증진에 공헌한 인사를 시상하기 위해 1990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제정하였다. 시상분야에 따라 과학상 공학상 의학상 예술상 사회봉사상으로 나뉘며 이외 분야에 특출한 업적을 이룩한 인사에게 시상하는 특별상이 있다. 연간 후보자를 접수하나 매년 11월 30일까지 접수된 후보자들이 차년도 수상자 선정을 위한 심사대상이 된다. 심사는 매년 12월에서 차년도 4월 초까지 진행되며 수상자는 4월에 언론과 호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된다. 현재 호암상 수상자의 국적은 불문하지만 한국계 인사여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매년 6월 1일 서울의 호암아트홀에서 시상식이 있고 이어서 신라호텔에서 축하연이 거행된다. 또한 시상식을 전후하여 전국의 주요 연구소 대학 고교 등에서 수상자의 기념강연이 펼쳐진다. 대한민국의 노벨상으로 일컬어진다.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순금 메달(187.5g) 그리고 상금 3억 원이 수여 된다. 2018년 7월 9일 11시 총회회관 5층 회의실에서 제1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총회장상 수여식이 있었다. 총회의 위상을 높이고 하나님 영광 드러내는 사역을 감당한 개인 교회 단체들을 발굴해 기리기 위한 행사이다. 제102회 총회 결의에 따라 열린 총회장상은 개인의 밀알상 교회의 참빛상 그리고 단체의 등대상 등으로 조촐하게 수여됐다. 총회장상을 헌의안으로 올린 공이 있는 조승호 목사는 말했다. “총회에 그동안 조사하고 치리하는 위원회는 많았지만 상주는 위원회가 없었던 것이 안타까워 헌의를 했는데 총대들이 기꺼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날 개인의 밀알상은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성남농인교회 이영빈 목사 암사제일교회 정상권 장로 새로남교회 오덕성 장로가 각각 받았다. 교회의 참빛상은 신령교회 현종규 목사 예광교회 최형묵 목사가 수상했다. 단체의 등대상에는 함평노회 군선교회 대구지회 서울강남노회 주일학교연합회 등이 수상했다. 수상자 대표로 단에 선 소강석 목사는 그간 받은 수많은 상에 비해 아주 소박한 상임에도 매우 단단한 소회를 밝혔다. “모든 것을 총회를 위해 꽃피우는 마지막 삶으로 알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옥에 티랄까 미흡한 것은 단체의 등대상에 2017년 영동중앙교회 분쟁을 총회재판국의 판결이 아닌 협상의 공증으로 해결한 제101회 재판국장 윤익세가 빠진 것과 소문에 의하면 분쟁과 부정에 오간다는 돈에 비해 상금이 턱없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3억 원의 호암상에는 못 미칠지라도 고작 100만 원 200만 원이라면 총회장의 어느 행사 참석 순서 값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제101회 총회재판국장 윤익세는 불난 교회 재건에 힘쓴 노회(‘더굳뉴스’도 현장 취재 보도로 재정과 여론에 일정 부분 기여했어도 그 노회 누구에게도 감사 한 마디 듣지 못했다)보다 훨씬 힘든 영동중앙교회 분쟁을 재판이 아닌 상담에 의한 합의로 분쟁의 불길을 끝냈기 때문이다. 그는 칼빈대 교수 그리고 분쟁으로 대법 판결을 앞둔 충남노회 임원 아산사랑의교회 담임 총회 실세 총대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다 감당하고 있다. 그런 그의 공을 기리지 못한 것은 제1회 총회장상의 적지 않은 흠이랄 수 있겠다. 내년 제2회 총회장상에는 이번 일을 거울삼아 제102회 재판국장 허은에게 반드시 그 상을 수여해야 할 것이다. 그는 영동중앙교회 목사 측에 십억 원을 지불한 윤익세보다 더 훌륭하게 전주동부교회 분쟁 건을 돈 한 푼 안 들이고 합의서(당한 목사 쪽은 항복서라고 함) 한 장만으로 수년 간 지속될 지옥 같은 분쟁을 단 기간에 해결했기 때문이다. 총회재판국 총회선거관리위원회 총회 기관지를 비롯한 사설 언론들 돌아가는 행태를 보면 유서를 쓰기 딱 좋은 믿음의 나날이다. 밤새워 기도하며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 꼬깃꼬깃 구겨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픽 픽 던져버리고 또 하루를 음험하게 그을리는 굴뚝새처럼 자기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촉새처럼 길고도 지루한 유서를 담장 위로 높이 걸어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 줄 위에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거미처럼 총회에서 총대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 ‘참 잘 썼어요’ 한다. 그리고 총회장이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 하며 총회장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처럼 우리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 중 하나이다. 탄생과 더불어 죽어간다. 새 짐승 벌레 총대의 한 동작 한 동작은 다 유언을 적는 일이 된다. 이것은 비관이 아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의 상을 위해 죽음으로 끌려가는 두려운 여행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 가는 신비한 천국여행이다.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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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13
  • 명품 가방 주변
    총회는 9월을 기다리며 나지막하게 대치동 언덕에 주저앉아 졸고 있다. 간간이 허활민 제네시스 멈췄다가 사리지던 영동대교 앞 호텔 옆. 무리지어 빈손 흔들던 김상윤과 그의 아우들. 사진 찍혀 빛바랜 명품 가방에 허활민 그림자 길게 걸터 앉는다. 날마다 귀만 밝아지는 김화경 목사 그 자리에 여전히 손 가락질하며 서 있다.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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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6
  • 총회 선거에 대한 규제
    언론을 통한 선거운동은 등록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까지 총회 기관지를 통해서만 할 수 있다 부 칙 1. 본 규정을 개정하고자 할 때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재적회원 3분의 2이상의 결의로 하되 총회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차제에 기독신문 광고 독점 폐지하고 타 언론사도 광고 허용해야 석류의 붉은 빛은 과일들 중에서도 유난히 도드라진다. 유리 외피와 수정의 씨앗을 가진 석류는 보석의 이미지로 응결된다. 보석은 아름답고 차갑다. 얼음 알갱이를 삼킨 듯 속은 시리겠지만 오래지 않아 외려 화끈거릴 것이다. 이 열기에 닿은 마음이 고뇌를 잊고 깊은 데서 깨어나는가. 어디서 맑은 기도 소리가 난다. 그렇듯 세상의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믿음을 지닌 전도사는 새끼를 밴 줄도 모르고 전도지를 짊어진 어미 당나귀를 재촉하였다. 달빛은 파랗게 빛나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어두운 길을 온몸으로 채찍 받으며 어미는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었다. 세상으로 가는 길 새끼는 눈도 뜨지 못한 채 거꾸로 누워 구름처럼 둥둥 떠가고 전도사는 복음을 모르는 벽촌을 향해 마음이 조이고... 벚나무 아래 펀펀한 돌 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녹을 수 없는 눈과 녹지 않는 눈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도사는 전도지를 꺼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두 줄의 문장에서 희고 간결한 믿음을 꺼내 가려는 벽촌에 날려 보냈다. 미국과 북한 회담의 출발은 시각적 충격 효과다. 카펠라 호텔 회담장 입구에 성조기와 인공기가 놓였다. 6개씩 겹쳐져 색감은 대담해졌다. 그 상징성은 격렬하다. 양국은 70년 적대관계다. 북한에 미국은 ‘철천지 원쑤’다. 그것은 반목을 푸는 장치다. 김정은-트럼프의 첫 악수 배경이다. 김정은 언어의 속이기 장난은 기묘해진다. 그것으로 폭압적인 독재국가의 지도자는 멋있는 지도자로 변신한다. G7 지도자들도 백안시하고 ‘협상의 기술’이라는 저서도 내고 세계를 누비며 스캔들을 낳고 저 혼자 잘난 체하던 트럼프는 정작 어린 김정은과의 말싸움 협상에서 여지없이 밀렸다. 담판 결과는 심하게 기울었다. 핵무장 해제의 시간표는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장로 부총회장 나이는 그대로 두고 목사 부총회장 후보 연령이 57세로 낮아져 영남 서열 순위에서 한참 밀리는 이승희가 부총회장이 된 것처럼 그냥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한다”로 돼 있다. 추상적인 ‘노력’은 통제하기 힘들다. 합의문은 과거 9·19 공동 선언문(2005년)의 수준보다 떨어진다. 북한을 위한 체제 보장은 뚜렷해졌다. 그것은 3대 세습 통치자의 결정적인 성취다. 그러나 그 여파는 우리에게도 미쳤다. 어제 여당의 압승으로 끝난 제7회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표심은 기인(奇人) 소강석의 의도와 달리 동성애를 지지하는 진보 문재인 정부와 박원순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보수 정당들에 보다 철저한 반성과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내년 총선은 예전의 투표 역사에서처럼 현명한 국민에 의해 반대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제 우리 교단도 9월 총회 선거 축제에 접어들었다. 이 선거는 지방선거와 마찬가지로 법과 선거법 규정 안에서 치러야 한다. 1995년 9월 22일 제정하고 2017년 9월 22일 14차 개정을 한 총회 선거관리규정의 핵심을 공명선거 숙지를 위해 한번 살펴보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거관리규정 1995년 9월 22일 제정2017년 9월 22일 14차 개정 제6장 선거에 대한 규제 제11조 (총회임원 입후보 자격) 1. 총회장① 등록일까지 만 57세 이상 된 자② 목사장립 후 만 20년 이상 된 자③ 등록일까지 동일교회 또는 동일노회에서 무흠 만 15년 이상 된 위임목사④ 등록일까지 총대경력 10회 이상 된 자 2. 목사 부총회장: 총회장 입후보자의 자격과 동일하다. 단 2회 입후보만 가능하다. 3. 장로 부총회장① 등록일까지 만 60세 이상 된 자② 장로장립 후 만 15년 이상 된 자③ 등록일까지 동일교회 또는 동일노회에서 무흠 만 15년 이상 된 시무장로④ 등록일까지 총대경력 6회 이상 된 자 제26조 (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1. 총회임원,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및 기관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선출직), 총회 총무 입후보자(이하 ‘입후보자’라 함) 및 그 지지자는 선거기간 중 일체의 금품요구 및 금품수수(金品授受)를 할 수 없다.2.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상대 입후보자에 대한 사퇴 목적 또는 공정한 선거 진행방해를 목적으로 설득, 회유, 압력, 담합할 수 없다.3. 노회에서 총회임원 후보자로 추천을 받고 등록하지 않았거나 등록 후 사퇴할 수 없다.4. 선거운동기간은 등록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교회, 소속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 선거운동기간 이후인 총회 개회일부터는 교인 동원 및 문자 전송 등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된다. 위반 시에는 후보자격이 상실된다. 단, 부임원으로서 정임원 후보인 경우와 단 독후보로 출마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5. 노회 추천을 받은 입후보자는 추천을 받은 날로부터 개회 전까지, 그 외의 입후보자는 등록마감일로부터 개회 전까지 모든 언론에 광고 및 인터뷰 등을 통해 본인과 소속 교회를 알리는 행위를 할 수 없다. 단, 언론을 통한 선거운동은 등록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까지 총회 기관지를 통해서만 할 수 있고, 5단 광고(경력사항 포함) 4회까지 게재할 수 있다. 제28조 (선거규정 위반자 처벌규정)1. 허위사실로 입후보하였다가 등록이 취소된 자는 향후 10년간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한다.2. 본 규정 제26조 1항과 2항을 위반한 자로서, 금품제공자는 영구히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고, 금품을 요구 및 받은 자는 금액의 30배를 총회에 배상하며, 위반 즉시 10년간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되 그 기간은 배상금을 총회 입금일로부터 계수한다.3. 그 외에 본 선거규정을 위반한 자는 향후 4년간 총회 공직을 제한한다 이 규정을 교단 기관지 ‘기독신문’의 권유에 따라 유력 후보자와 엄정한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이은철 목사)가 제26조(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5항을 어겨 제28조(선거규정 위반자 처벌규정) 3항을 적용받아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결과를 낳지 않기 위해서는 선거관리위원회가 다음의 규정 즉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선거관리규정’에 따른 절차를 밟아야 했다. 부 칙 1. 본 규정을 개정하고자 할 때는 선거관리위원회의 재적회원 3분의 2이상의 결의로 하되 총회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이제라도 정해진 규정을 따르는 것이 법에 저촉되지 않고 총회 선거를 원만히 치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소송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라도 총회가 정신을 차리고 총회 최고 지도자를 선정하는 총선 축제 기간에 언론 간의 공정거래와 형평성 원칙에 따라 기독신문의 독점 광고를 폐지해야 할 것이다. 공명선거와 공정선거를 위해 다른 언론에도 광고를 허용해야 할 것이다. 제102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영명한 이은철 위원장의 용단에 따라 제103회 총회에서 심도 있게 다룰 수 있기를 바란다.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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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4
  • 김중경 설교 정필도 표절 논란
    김중경 목사는 질 낮은 목사들 세속적 성공 추구 설교 아니라 교단과 한국 교계에 귀감이 된 정필도 목사 설교 일부 몇 차례 표절 그런데 그런 그의 설교에 전주동부교회 권사님들 ‘우리가 이제야 진짜 목사님을 만났다’ 중전주노회 김근열 이병록 믿음과 성경과 헌법에서 벗어난 일을 저지른 것 같아 갖은 풍상 끝에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를 이렇게 노래했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 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스폰 소릴 들어 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스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웬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 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고동 소릴 들어 보렴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 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웬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1994년 발표한 이 노래는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 이 노래를 듣게 된다. 김수현은 그날의 감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차를 타고 가다 ‘첫 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가사에 꽂혔어요. 중년 여성이 ‘소녀’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중년 남성들은 ‘실연의 달콤함’에 절대 공감하지 않을까요.” 김수현은 당시 자신의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이 이 노래를 중얼거리게 했는데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노래도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2018년 1월 6일 자 인터넷신문 ’합동교회언론회‘에서 발행인 최성관 목사(장로신문 취재담당)는 다음과 같은 부제로 김중경 목사의 ‘설교 표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김중경 목사는 과연 묶은 땅을 기경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부임 2년 만에 교인들의 마음을 훔치고 교회를 혼란하게 만드는 압살롬의 후예인가? ... 전주동부교회 사태는 김중경 목사를 따르는 측과 반대하는 측과의 단순한 갈등만이 아니다. 먼저 표면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핵심 문제는 김중경 목사의 설교표절과 그 배후세력이다. 부임 2년 차 전주동부교회 김중경 목사는 소속 중전주노회 명령을 따르지 않고 2017년 12월 17일 공동의회를 열고, 계속해서 설교 표절을 문제 삼은 시무장로 14인을 대상으로 계속 시무 여부를 투표에 붙였다. 결국 김중경 목사는 자신을 따르는 3인 시무장로를 제외한 14명 시무장로의 시무를 정지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최성관 목사는 전주동부교회 분쟁의 핵심 문제가 '김중경 목사를 따르는 측과 반대하는 측과의 단순한 갈등만이 아니라 먼저 표면적이지만 가장 강력한 핵심 문제는 김중경 목사의 설교표절과 그 배후세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글쓰기에 남다른 자신을 가진 최성관 목사는 기사 값을 하느라 그랬는지 한참 이런저런 말을 한 뒤 결론은 전주동부교회 분쟁 발단의 핵심인 ‘설교 표절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뜬금없이 ‘교회 분립과 교인 분열을 노리고 있는 외부세력에 대하여’ 말한다. 가인(歌人) 최백호가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 웬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가 ‘낭만에 대하여’라고 노래하듯 말이다. 이어서 교계 가장 올곧은 인터넷언론 ‘뉴스앤조이’의 박요셉 기자가 2018년 1월 15일 자 ‘설교 표절 목사, 면직·출교 전주동부교회 김중경 목사, 노회 판결 불응’ 제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 면직·출교 판결을 받은 김중경 목사는 2015년 말 청빙 후보 시절부터 20여 차례 설교를 표절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17일 공동의회를 열어, 설교 표절을 지적한 시무장로 14명을 시무 정지하고 부교역자 5명을 해임했다. 12월 24일에는 공동의회를 열어 교단 탈퇴를 시도했지만,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그런데 교계에서 가장 올곧은 언론 ‘뉴스앤조이’의 박요셉 기자 역시 전주동부교회 분쟁의 발단이고 핵심인 ‘설교 표절에 대하여’는 무엇을 어떻게 표절하고 그것이 왜 목사 면직 해당 사유와 범죄가 될 만한 근거나 혐의기 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교 표절이 드러난 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문제를 제기한 장로들의 재신임을 묻고 지지 교인과 예배당을 점거한 전주동부교회 김중경 목사가 노회에서 면직·출교됐다’고만 말한다. 이 두 언론의 기사를 놓고 보면 전주동부교회 분쟁의 원인은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 즉 이제까지의 제 칠 계명 문제 다시 말해 요즈음의 표현 미투 문제 또는 재정 문제 또는 이단이나 신학 사상 문제가 아니다. 학계나 예술계에서 문제되는 표절인데 설교에 대한 것이다. 즉 설교 표절이라는 문제가 원인이 되어 목사가 면직을 당하고 교회 분쟁까지 이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김중경 목사의 정필도 목사 표절 시비를 일명 전주동부교회 14장로 측이 제기했다고 한다. 합법적이고 은혜로운 청빙 절차를 거쳐 위임 목사 임직을 한 김중경 목사가 부산 수영로교회 부목사 시절 당회장이고 전국 목회자의 존경의 대상인 정필도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예화를 표절했기에 그 죄가 위임 목사직 사임이나 목사직 면직에 해당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로 17명 가운데 14명이 그것을 주장하고 당시 중전주노회 노회장 김근열 목사와 중전주노회 재판국 국장 이병록 목사가 그 주장을 받아들여 김중경 목사의 면직과 출교로 시벌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앙의 정당성을 가지고 우리의 헌법에 근거해 합법적으로 처리했을 것이기에 그 시벌의 원인과 결과의 과정을 우리의 헌법에 비추어 목사, 장로, 설교에 대해 살펴본 뒤 표절 문제를 짚어보자. 이 문제를 헌법에 비추어 보는 것은 그 이상의 더 좋은 규범이 없다는 믿음과 판단에서다. 첫째 목사란 누구인가. 헌법 정치 제4장은 목사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제 1 조 목사의 의의(意義)목사는 노회의 안수로 임직(任職)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치리하는 자니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다(롬 11:13). 성경에 이 직분 맡은 자에 대한 칭호가 많아 그 칭호로 모든 책임을 나타낸다. 1. 양의 무리를 감사하는 자이므로 목자라 하며(렘 3:15, 벧전 5:2∼4, 딤전 3:1),2.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라, 그리스도의 사역자라하며 또 신약의 집사라 하며(빌 1:1, 고전 4:1, 고후 3:6),3. 엄숙하고 지혜롭게 하여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고, 그리스도의 집과 그 나라를 근실히 치리하는 자이므로 장로라 하며(벧전 5:1∼3),4.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하며(계 2:1),5.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인에게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라 권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 혹은 복음의 사신이라 하며(고후 5:20, 엡 6:20),6. 정직한 교훈으로 권면하며 거역하는 자를 책망하여 각성(覺醒)하게 하는 자이므로 교사라 하며(딛 1:9, 딤전 2:7, 딤후 1:11),7. 죄로 침륜할 자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자이므로 전도인이라 하며(딤후 4:5),8.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와 그리스도의 설립하신 율례(律例)를 시행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도를 맡은 청지기라 한다(눅 12:42, 고전 4:1∼2). 이는 계급을 가리켜 칭함이 아니요,다만 각양 책임을 가리켜 칭하는 것뿐이다. 이상에서 보듯 목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하고 유익한 직분이고, 양의 무리를 감사하는 목자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이므로 교회의 사자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죄인에게 전파하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라 권하는 자이므로 그리스도의 사신이라 혹은 복음의 사신이라 한다.’ 이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헌법의 목사에 대한 규정은 교회와 노회와 총회 안에서 성경과 헌법에 대한 뚜렷한 범죄가 없이 목사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처벌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보내신 사자(使者)이고 그리스도의 사신(使臣)임을 보증하는 것이다. 둘째 설교(說敎)란 무엇인가. 헌법 예배모범 제6장은 설교를 강도(講道)라는 명칭으로 이렇게 규정한다. 1. 강도(講道)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침이니 크게 주의하여 행하여야 한다. 목사는 전심전력하여 부끄럽지 아니한 일꾼이 될 만하게 힘써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해해야 한다. 2. 강도의 본문은 어떤 성경 한 절이나 혹 몇 절을 택할 것이요, 강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진리 범위 중 한 부분을 해석하고 장편의 본문을 강론하여 그 진리를 가르치며 마땅히 행할 본분의 성질과 한계를 설명하며 혹시 변증도 한다.3. 강도하는 자는 방법을 많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조심하여 예비함이 옳으니 결코 주의(主義)와 예비 없이 하지 말고(삼하 24:24) 복음의 단순한 것을 따라 그 언어(言語)가 성경에 적합하고 듣는 사람 중 무식한 자라도 알아듣기 쉽게 말할 것이요 자기의 학문이나 재예(才藝)를 자랑하지 말고 자기 행실로 자기의 가르치는 도리를 빛나게 하고(딛 2:10) 생각과 말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함으로 신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전주동부교회의 혼란한 김중경 목사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이중 예배 참석 교인들 가운데 초록 조끼를 입은 대다수의 교인들이 김중경 목사를 따르고 그리고 노회 정치와 상관없는 200여 권사님들 가운데 150여 권사님들이 분쟁 가운데 헌신적으로 주의 종을 따르고 강단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정필도 목사의 본을 받은(하나님의 사신을 거부하는 측은 정필도 목사 설교 표절이라는) 그의 설교가 헌법 예배모범 제6장 3항의 ‘복음의 단순한 것을 따라 그 언어(言語)가 성경에 적합하고... 자기의 학문이나 재예(才藝)를 자랑하지 말고 자기 행실로 자기의 가르치는 도리를 빛나게 하고(딛 2:10) 생각과 말과 사랑과 믿음과 정결함으로 신자의 본이’ 되는 설교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즈음 강단에서 시류에 영합해 선배와 동역 목사를 폄훼하고 자기 자랑을 일삼는 목회자의 설교가 적지 않은 때에 말이다. 셋째 장로란 누구인가. 헌법 정치 제5장은 치리 장로에 대해 이렇게 규정한다. 제 4 조 장로의 직무1.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치리 장로는 교인의 택함을 받고 교인의 대표자로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림하며, 자교회 혹은 전국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한다. 2. 도리 오해(道理誤解)나 도덕상 부패를 방지한다. 주께 부탁 받은 양무리가 도리 오해나 도덕상 부패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당회로나 개인으로 선히 권면하되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당회에 보고한다. 3. 교우를 심방하되 위로, 교훈, 간호한다. 교우를 심방하되 특별히 병자와 조상자(遭喪者)를 위로하며 무식한 자와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간호할 것이니 평신도보다 장로는 신분(身分)상 의무와 직무(職務)상 책임이 더욱 중하다. 장로는 무엇보다 ‘교회의 신령적 관계를 총찰함에 있어서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보좌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전주동부교회 분쟁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사신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주도적 역할을 한 장로들은 헌법 정치 제5장 제4조 3항의 ‘신분(身分)상 의무와 직무(職務)상 책임이 더욱 중하다’는 규정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사자 목사와 협동하여 행정과 권징을 보좌하는 것이 아니라 전횡을 한 행태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김중경 목사가 존경하는 그리고 전국 교회 목사들도 흠모하는 정필도 목사의 설교를 일부 몇 차례 표절했다는 빌미를 잡아 위임 목사직 사임 압박을 하고 일부 부패한 중전주노회 임원들을 회유해 자신들의 위임 목사를 면직 출교하는 불법을 범한 혐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뚜렷한 증거가 노회장이 임시당회장이 되어 교회 예금통장 분실 신고를 내고 그 돈을 전부 자신의 통장으로 입금시켰다는 것이다. 헌법 권징조례 제1장 제2조는 권징의 목적을 이렇게 규정한다. 제 2 조 권징의 목적진리를 보호하며 그리스도의 권병(權炳)과 존영을 견고하게 하며 악행을 제거하고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교회를 정결하게 하며 덕을 세우고 범죄한 자의 신령적 유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헌법 권징조례 제1장 제2조의 다음과 같은 단서 조항까지 달고 있다. 1 이상 목적을 성취하려면 지혜롭게 하며 신중히 처리할 것이다.2 각 치리회는 권징할 때에 그 범행의 관계와 정형의 경중(輕重)을 상고하되 사건은 같으나 정형이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달리 처리할 것도 있다. 이럼에도 당시 노회장 김근열과 재판국장 이병록은 성경과 헌법의 규정을 따라 지혜롭게 신중히 처리하기보다 사사로운 이해관계의 악행과 범죄를 따른 의심의 징후가 짙다. 이것은 몇 교회 분쟁에서 드러났듯 차후 하나님과 사법의 엄중한 징계를 받아 혼비백산(魂飛魄散)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헌법 권징조례 제6장 직원에 대한 재판 규례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 3 조 범죄교인, 직원, 치리회를 불문하고 교훈과 심술과 행위가 성경에 위반되는 것이나 혹 사정이 악하지 아니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 범죄 하게 한 것이나 덕을 세움에 방해되게 하는 것이 역시 범죄이다. 제 4 조 재판 안건성경에 위반으로 준거(準據)할 만한 일이든지 성경에 의하여 재정한 교회 규칙과 관례에 위반되는 일이든지 다른 권징 조례로 금지할 일이 아니면 재판 안건이 되지 아니한다. 제 37 조복음의 영예와 발전은 목사의 명성에 관계됨이 많으므로 노회는 마땅히 조심하여 소속 목사의 개인적 행위나 직무상 행위를 자세히 살필지니 그 목사됨을 인하여 편호(偏護)하여 불공정한 판결을 하지 말며 혹 그 죄를 경하게 벌하지 말 것이나 또한 목사에 대하여 사소한 곡절로 소송하는 것을 경솔히 접수하지도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표절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전문) 정현종의 짧은 시를 박덕규는 이렇게 다시 썼다.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사이’ 전문) 정현종의 ‘섬’은 행복이나 문학, 혹은 각자 꿈꾸는 무엇으로 읽히는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시어다. 반면 박덕규의 ‘사이’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이분법적 시대상황을 풍자한다. 마지막 행은 1980년대 시위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정끝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는 자신의 시론서 ‘패러디’(모방)에서 두 시를 패러디 관계로 본다. 박덕규가 정현종의 ‘섬’을 대조적으로 패러디하며 두 텍스트 사이의 대화성을 강화시키고 반전효과를 높였다고 분석한다. 함민복이 패러디한 ‘섬’은 현실을 더 구체적으로 반영한다. 냉전과 분단 탓에 어정쩡하고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섬이다. ‘미국과 소련 사이에/ 섬이 있었다/ 나도 그 섬에 태어났다/ 북한과 남조선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보았다’ (‘이북 5도민 회관에서’ 부분) 이어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정끝별은 시인은 일련의 패러디 텍스트들이 서로 의미를 보충하며 ‘혈연관계’를 맺는다고 설명한다. 패러디는 단순히 언어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자체적인 사회·역사적 문맥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표절과 패러디의 차이는 뭘까. 원텍스트를 베끼고 따오고 바꾸면서 그 행위를 숨기느냐, 아니면 재의미화 자체를 즐기느냐다. 시인은 “패러디가 변용과 전복에 의한 창조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그저 ‘텍스트라는 실재에 기생’하며 그 기호화된 실재를 베끼고 따오고 바꾸기만 한다면, 패러디의 미래가 보장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Plagiarism(표절), 혹은 piracy(해적 행위)의 번역으로 알기 쉽지만 표절이란 말 자체는 중국의 시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한 시 외에도 ‘남의 것을 훔치고 약탈하는 일’에 표절이란 말을 폭넓게 적용시켰다. 오늘날에는 plagiarism 등에 대응되는 말로, 창작물에서 다른 사람의 표현이나 방법을 모방하는 것을 뜻한다. ‘훔치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전통적으론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거나 베끼는 일’에 전반적으로 적용하였다. 오늘날 말하는 ‘패러디’(parody)나 ‘오마주’(homage)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선인의 글을 인용하는 일이 잦았던 중국문학계에는 문제적인 담론이기도 하였다. 사실 고대에는 그것이 관행이어서 고대 그리스의 저작들이나 성경만 해도 실제 작가와 관계없이 유명한 인물을 작가로 내세우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게다가 그 것이 나쁜 의도로 한 것도 아니고 주위에서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니고 너무도 당연한 관행이었다. 다만 어떤 창작물을 만들었을 때 그 창작물을 모방해 만든 대상이 해당 창작물을 만든 본인이나 회사일 경우 표절이 아니다. 다만 이 경우 우려먹기라고 욕먹을 수는 있다. ‘허락을 받거나 비영리적이라면’, ‘존경을 담은 오마주, 패러디라면’ 표절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적인 해석이다. 저작권법의 세계에서는 모두를 표절의 범주에 넣는다. 흔히 표절을 양적인 문제로 생각해서 0.01%만인 유사성이면 표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다른 작품에서 단어 몇 개 차용했다고 표절시비에서 패소한 작품들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표절은 원작자의 판단과 해당 작품의 인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패러디’니 ‘오마주’니 하는 형식이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건 김중경 목사의 설교처럼 잘 만들어야 한다. 재해석과 재구축에 성공을 했다면 표절이 아닌 것으로 인정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김중경 목사의 설교가 대다수 교인에게 은혜와 감동을 주고 자신의 삶이 신앙적인게 그 증거다. 이 재구축이 얼마나 잘 되었느냐에 따라 해당 작품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기도 한다. 창작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참신한 걸 만들어 달래서 진짜로 어디서도 듣도 보도 못한 것을 만들어다 줬더니 고객이 적응을 못해서 기각되었고, 그 후에 여기저기서 짜깁기한 것을 그럴듯하게 꾸며서 갖다 줬더니 완전 참신하다고 좋아하더라’하는 얘기를 간간히 들을 수 있는 게 그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표절이란 주로 학술이나 예술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윤리와 관련되는 반면에 저작권 침해는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한 법률적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한 설교에서는 사실상 표절이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김중경 목사가 존경하는 정필도 목사의 설교를 몇 번 패러디하거나 표절하거나 오마주(프랑스어로 '존경'을 의미하는 단어. 일반적으로 타 작품의 핵심 요소나 표현 방식을 흉내 내거나 인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더라도 정필도 목사의 설교가 예술가들의 창작물 저작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굳이 정필도 목사의 저작권이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는 설교마다 예수를 모시기만 하면 일어나게 될 아홉 가지 일들을 일일이 거론했다. 1)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2) 승리의 복을 받습니다. 3) 평안의 복을 받습니다. 4) 모든 저주를 속량 받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됩니다. 5) 치료의 복을 받게 됩니다. 6) 생명이 있습니다. 7) 존귀한 자가 됩니다. 8) 평강이 있습니다. 9) 사랑이 넘치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 결론은 거의 다음과 같았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환영하고 모셔 들이기만 하면 놀라운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참 행복자가 됩니다. 올 한 해 주님을 모시고 사셔서 성공하시고 행복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정필도 목사의 설교를 일부 몇 차례 표절해 교인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신령적 유익을 끼쳐 교회를 성장시켰다면 그 행위는 노회와 총회에서 상을 받을 일이지 벌을 받을 일이 아니다. 성경과 헌법에도 간음과 횡령과 이단에 대한 규정은 있어도 설교 표절에 대한 제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김중경 목사는 세간에 회자되는 질 낮은 목사들의 세속적 성공이나 추구하는 설교가 아니라 수영로교회를 개척해 교단과 한국 교계에 귀감이 되었고 도덕적 흠도 없는 정필도 목사의 (나는 안 좋아하지만) 설교를 일부 몇 차례 표절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설교가 전주동부교회 권사님들이 ‘우리가 이제야 진짜 목사님을 만났다’며 좋아하고 교인과 헌금도 성장하고 믿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중전주노회 김근열이나 이병록이 다른 것에 눈이 가려 믿음과 성경과 헌법에서 벗어난 일을 저지른 것 같다... 그 죄와 벌은 하나님과 사법에 의해 가볍지 않음을 후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양심이 찔린 목사의 마음이 너무 착잡해졌을 테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소설가와 시인이 있었다. 소설가가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문둥이도 꽃이 피면 운다.” 시인이 “오! 자네가 시인이다.” 라고 감탄하며, 어떻게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느냐고 극찬했다. 소설가의 답. “그게 아니고, ‘문둥이도 꼬집히면 운다.’” 덤으로 재미있는 이야기 둘. 활자공이 있던 시절, 인쇄소에서는 활자공이 글을 심어 인쇄했다. 그가 ‘담벼락을 구기다’라는 구절을 썼다. 시인은 오자가 났다며 항의했다. 원래 시인의 시 구절은 ‘담배곽을 구기다’였던 것. 시인과 활자공, 누가 시인일까. 섭섭해서 재미있는 이야기 셋.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 “따뜻한 물을 많이 먹여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아픈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물을 구워줘.” 평범한 문장과 시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문장의 차이. 시나 설교는 이곳에서 출발한다. 차이는 아주 미세하지만 시적 긴장과 설교의 충격은 더 없이 증폭된다. 비문이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발생하는 어떤 ‘낯설게 하기’가 시와 설교를 만든다. 시와 설교는 일상적이지 않은, 문법적이지 않은, 산문적이지 않은 어떤 지점과 성경의 다른 관점에서 우리를 반짝 눈 뜨게 하는, 그곳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총신 72회 별 볼일 없는 만 68세 목사의 생각에 ‘별 볼일 있는 설교도 그렇다.’ 2018-06-02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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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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