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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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윤희원 목사 총회선거법 전환 의견
    산업시대 이전에 창궐한 질병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위생적인 시설도 없었거니와 의학 기술도 덜 발전하여 치료제도 없었고 영양 결핍으로 면역력 또한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질병은 과잉에서 비롯된다. 재판 몸살에도 이재명이 설치는 신자유시대의 질병은 우울증이다. 상품과 화폐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성공을 꿈꾼다. 이를 위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누구든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과잉 긍정 문화는 외부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해야 하는 자아는 피곤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울증을 낳는다.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시대에 개인은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구실'이 되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구청 직원 같은 이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이재명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한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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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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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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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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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 G.OPINION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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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국가 난국을 위한 보수 교단의 사명
    문재인은 고슴도치 쪽일까 아니면 여우에 가까울까. 조금 실례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인간 유형론(類型論)을 학문 세계에 처음 도입한 인물은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이다. 고슴도치는 한 가지 이론으로 복잡한 세상만사를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늘, 효과와 역(逆)효과라는 양면성(兩面性)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책과 예측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면 부인한다. 예측이 빗나가면 타이밍이 이상하게 꼬였다거나 예상 밖 요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라며 틀린 생각을 고집한다. 실업률이 올라가고 취업률이 떨어진 이유를 장마 탓으로 돌리는 식(式)이다. 의견이 다른 두 마리 고슴도치가 부딪치는 TV 시사토크쇼는 재밌고 시청률도 높다. 여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사태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을 탐구한다. 최저임금만 인상하면 가계소득이 절로 높아진다는 단순 이론을 거부한다. 무한히 긴 지렛대와 그만한 받침점만 가져오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간(肝) 큰 고슴도치와 붙으면 백전백패(百戰百敗)다. 문재인은 프랑스 방문에서 "프랑스혁명과 광화문 촛불이 시공간(時空間)을 뛰어넘어 깊이 연결돼 있음을 느꼈다"면서 "프랑스혁명 정신은 한국 국민이 들었던 촛불 하나하나에서 혁명의 빛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외교적 수사법(修辭法)이라 해도 프랑스혁명은 이렇게 단순한 미화(美化)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역사다. 미국역사학회(AHA) 회장의 2003년 취임 연설을 들어보자.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인정받고 있지만 평판(評判)은 추락했다. 이제 프랑스혁명은 폭력·공포 정치·전제주의 그리고 집단 학살의 전조(前兆)로 다가선다." 왕과 백성에서 혁명 주동자까지 1만 명 이상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갔으니 평가가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1957년 6월 마오쩌둥(毛澤東)은 고위 당직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중국이 지향하는 정치체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민주적이고, 기율(紀律)이 엄격하면서도 자유스럽고, 뜻을 하나로 모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분방(奔放)하게 발휘될 수 있는 정치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발언을 계기로 봄이 찾아왔다. 반동(反動)이란 딱지가 붙어 무수한 사람이 희생된 엄동설한(嚴冬雪寒) 뒤의 봄이라서 지식인들은 특히 환호했다. 주석(主席)의 뜻이 '민주적' '자유스러운' '개성이 분방하게 발휘되는'이란 단어에 있다고 믿은 일부는 공산당의 비(非)민주성을 개혁하라는 데까지 나갔다. 봄은 갑자기 끝났다. 수천 명이 처형되고 수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것이 '뭇꽃이 핀다'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결말이다. 이런 결말이 마오(毛)가 의도적으로 덫을 놓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공산당 독재에 대한 불만이 그렇게 큰지 몰랐다가 비판의 홍수에 당황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랬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중국 칭화대(淸華大) 방문 때 "가장 존경하는 중국 정치인으로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을 꼽고 "두 분이 시대를 나눠 중국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천윈(陳雲)은 혁명 원로로서 마오쩌둥 사후(死後) 덩샤오핑과 함께 권력의 양축(兩軸)을 이뤘다. 천윈의 마오쩌둥 평가는 이렇다. "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업적은 불멸(不滅)로 남았을 것이다. 1966년에만 죽었어도 과오도 많지만 공(功)이 더 크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1976년까지 살아있었으니…." 대약진운동·인민공사·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최소 4,500만 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은 마오의 시대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고슴도치의 과욕(過欲)이다. 고슴도치 시대에 여우들 목소리는 여론 대접도 받지 못한다. 그 결과 앞뒤가 어긋나는 말과 행동이 탱크처럼 굴러간다. 현 정권은 역사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을 삭제키로 했다. 북한을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래놓고 대통령 대변인은 "북한은 우리 법률 체계에선 국가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북한과 합의는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 없다"고 한다. 북한을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非核化)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한국은 '동맹 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줘도 된다' 식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재판의 독립'과 '법관 인사의 독립'이 사법부 독립의 기둥이다. 정권은 이 두 기둥을 뽑으면서 사법부를 개혁한다고 한다. 현 정권을 비판·공격·조롱하면서 국고 지원을 받는 예술가는 없다. 예술계의 굵직굵직한 의자에는 한자리 예외 없이 자기편을 앉혔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리스트를 인쇄했던 미련한 전(前) 정권 인사들은 엄중 처벌을 받았다. '인쇄된 리스트' 와 '인쇄되지 않은 리스트'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익 독재와 좌익 독재는 힘의 방향이 다를 뿐 작동(作動) 원리는 같다. 나치 독재 시대를 몸으로 뚫고 나온 독일 어느 법학자는 그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명령은 명령이다" "법률은 법률이다"라는 구호로 군(軍)과 사법부를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정의는 정의다"라는 구호로 '불의(不義)의 시대'를 완성했다.' 권력이 휘두르는 동어반복(同語反復)의 최면술은 일종의 사기(詐欺)다. 이런 시대를 뚫고 나가려면 여우들은 '근거'를 물어야 한다. '명령의 합리성'과 '법률의 정당성'의 근거를 묻고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실체'를 의심해봐야 한다. 전략의 출발은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언제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앞의 것이 '지리(地理) 감각'이고, 뒤의 것이 '역사 감각'이다. '상대를 바로 알고 나를 바로 아는 것'도 이 두 가지 위에서 가능하다. 역사는 지리 감각과 역사 감각을 잃은 국가들의 무덤이다. 1871년 독일을 처음 통일했던 비스마르크는 후대(後代)에 두 가지 생존의 지혜를 물려주었다. 하나는 서쪽 프랑스, 동쪽 러시아와 이룬 국경이 산맥이나 바다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당부다. 양쪽을 적으로 삼거나 양쪽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의 자살'과 같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내부가 분열됐을 땐 어김없이 외세(外勢)가 개입했다는 교훈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남긴 '지리 감각'과 '역사 감각'은 곧 잊혔고, 독일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양면(兩面) 전쟁을 벌이다 패배했다. 2018년 6월 13일 수요일에 대한민국 전역에서 치러진 6·13 지방선거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싹쓸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를 딱 한 달 앞둔 대통령 지지도가 최고 86%를 기록했다. 취임 당시(84%)보다 더 높다. '대통령 우산' 속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55%가 나왔다.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등 4당 지지율을 모두 합친 것의 2배였다. 반면 2020년 1월 31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인 34%로 떨어졌다는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힌 무당층(無黨層)은 현 정권 출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현 정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여권과 검찰의 충돌, 부동산 정책 논란,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등이 여권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거 전날 6월 12일에는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3월부터 이어져 온 북핵 드라마의 정점(頂點)을 찍는 날이었다. 지 고모부를 박격포로 죽인 천인공노할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억류 미국인 석방이라는 선물을 보냈고 뒤든 앞이든 이익만 밝히는 거래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은 '생큐(Thank you)' '나이스(nice)'라는 단어로 감사를 표시했다. 오가는 말에서는 미·북 간 중대 거래(去來)가 익어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대안(代案)'을 제시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김정은) '우리가 한반도 전체(entire peninsula)를 비핵화 할 때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 이뤄질 것'(트럼프). 트럼프의 표현도 지금까지의 '북한 비핵화'에서 김정은식 용어(用語)인 '한반도 비핵화'로 옷을 갈아입었다.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듯 했지만 실상은 있으나마나 한 것의 비유인 개뿔 변화였다. 모든 거래의 기본 원칙은 등가(等價) 교환이다. 김정은이 확실히 핵과 미사일을 내려놓는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북(對北) 제재 완화, 경제 지원과 국제 경제 기구 참여 허용, 미·북 수교(修交)를 비롯한 북한 체제 보장 방안, 전략무기 한반도 전개 축소, 한·미 연합훈련 축소, 주한 미군 감축 등 모든 메뉴가 정상회담과 후속 회담 탁자에 오른다고 봐야 한다. 이들 메뉴는 트럼프식 '신속한 일괄 타결'과 김정은이 희망하는 '단계적 동시 타결' 방식을 혼합한 조리법(調理法)으로 굽거나 익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이 코스 요리가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는 2020년 11월 이전에 제공된다는 시한(時限)만 명시되면 조리법의 배합(配合) 비율에는 융통성을 보일 공산이 컸다. 개뿔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 보수(保守)는 2020년 총선, 2022년 대선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위선의 중독자 문재인의 고공(高空) 지지율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은 남북 관계 변화다. 그러나 실상은 선제공격, 예방전쟁이란 살벌한 단어들이 오가는 전쟁 분위기에서 벗어난 듯한 빈말의 성찬으로 일시적 안도감(安堵感)이 불러온 착각 비슷한 것이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전쟁 승리 두 달 후 선거에서 졌다. 1차 이라크 전쟁 승리로 지지율이 89%로 치솟았던 아버지 부시도 재선에 실패했다. 선거정치에선 평화도 승리만큼 덧없는 물거품이다. 브란트 총리의 동방(東方)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그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적 독일 통일의 길을 닦았던 헬무트 콜 총리의 비전과 전략이 담긴 말을 참고할 일이다. “사회주의자는 (정권 장악에) 성공할지 몰라도 사회주의는 (국민을 고루 배부르게 한다는) 목표 달성에 성공한 적이 없다.” 100원에 사들여 80원에 파는 기업은 없다.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에선 80원의 세금을 걷어 100원어치 복지를 베풀겠다는 정치인이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과는 정치인 대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경제와 담쌓은 사람도 일거리가 늘어야 일자리가 는다는 원리는 알고 있다. 이 정부는 거꾸로 간다. 세계 모든 개발경제학 교과서에는 '한국 성공'과 '북한 실패' 스토리가 체제(體制) 간 우열을 비교하는 대표 사례로 실려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이와 정반대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있다. 우리 보수 교단은 나날이 깊어가는 국민의 이런 시름과 걱정에 희망의 출구(出口)를 위한 기도의 사명이 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2019년 10월 광화문 집회 뒤 한기총 회장 전광훈이 약속보다 늦게 나타나 인터뷰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출발하려는데 취재진이 빙 둘러쌌다. 내가 스타가 됐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다 나를 보겠다며 온다." "문재인 정권에 대해 화가 나서 광화문에 몰려나왔지 목사님을 보러 나온 것은 아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된다." "적어도 80%는 나를 보러 나왔다." "분노하는 국민을 위해 자리를 깔아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해라.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파국이 시작된다." 문재인을 탄핵한다는 그는 "나라를 위해 내 한 몸 바치려는 것뿐이다. 세속 정치에 대한 욕심은 털끝만치도 없다"고 문재인 어법으로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전광훈 목사와 손잡고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신당을 창당한다고 한다. 요즘 보수층이 가장 열광하는 진보층의 폭격기 '문재인 정권 공격수' 진중권씨가 이런 말을 했다. “탄핵 이후 보수의 환골탈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결국 그들에게 발목을 잡혀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죠.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 부대야말로 문재인 정권을 지탱해주는 최대의 버팀목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그들이 보수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친문 헤게모니도 영원할 겁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진보주의 교단과 신학대학은 용감하게 시위에 앞장섰다. 이제 공법의 철옹성 윤석열 검찰총장과 촌철살인의 성웅 진중권 교수 외에 공산주의 행태를 빼닮은 친문 헤게모니를 침묵으로 지원하는 진보 진영 교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믿는 보수 교단이 나서야 할 갈 것이다. 보수교단의 선봉장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는 신앙의 회복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를 따르고 추구하는 세력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교단은 구태의연한 태도를 벗어나 태극기 부대를 넘어서는 자유 민주주의 토대의 신앙을 위한 회복 기도회를 광화문 광장에서 열고 찬송과 기도로 국가와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성령의 투혼 김종준 총회장과 목회생태계 퍼스트무버 소강석 부총장이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20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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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1
  • 총회 안에서 우린 누구
    성령의 불로 정재된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의 제104회 총회 안에서 목사와 장로로 마주치곤 하는 우린 서로 다른 주장을을 하고 서로 다른 가을을 보내고 서로 다른 선교지를 생각했다. 우리는 여러 노회에서 드디어 외로운 노후를 맞고 드디어 이유 없이 가난해지고 드디어 맞이한 은퇴를 수긍했다. 우리는 여러 노회에서 모여들었다. 그분께서 결연히 뒤돌아서시자 그는 우연히 같은 멜로디로 찬송을 하고 그리고 우리 중 누구는 재판국 농단자 김영범처럼 생각나지 않는 믿음을 찾아 다른 교단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내년 사순절에는 뜨거운 겨울이 끝날 거다. 우리는 여러 노회에서 모여들어 여전히 만남을 하곤 할 것이다. 외롭고 달콤하고 또 긴 후회와 소망을 나눴다. 기도하다가 불현듯 뇌리에 막연히 떠오르는 사람, 그가 그리우면 나는 울며 회개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질끈 감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속쓰림으로 피아노 흑백 건반을 치듯 너를 향한 기다림이 소망이 되는 날 우리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소망 다 사그러질 때까지 어두운 유대 들과 이스라엘 산굽이 떠돌며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서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그 벽에 기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변화산에 올라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우리에게 총회란 무엇인가. 총회는 부총회장 소강석 시인의 시 같은 이름붙이기에 따른 ‘꽃밭이거나 사막의 별’이기도 하다. 가끔 우리에겐 신앙이 먼저인지 명목이 먼저인지 모를 정도로 이름 붙이기는 중요하다. 총회 안에서도 그렇고 총회를 넘어서도 그렇다. 총회 이름은 신앙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우리 존재 의미의 첫 출발점 즉 빌미가 되어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보다 길고, 황규철이나 김영우에게서 보듯 우리는 믿음을 생각보다 쉽게 잃고 조국이나 유재수에게서 목격하듯 성령의 마지막 아홉 번째 열매 절제(갈 5:22-23)를 상실한다. 우리는 오늘도 일어나 세수를 하고 하루의 일과를 보내면서 믿음을 잃은 사람을 잊고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잊었던 그 얼굴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애잔하다. 아마 하나님 앞에서 서로 보고 싶어도 하나님을 떠나 놋 땅에 거하는 가인처럼 볼 수 없는 사람일텐데. 그러나 동탁 같은 문희상의 뱃살에 눌려 공수처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2019년 12월 30일 어제처럼 아무리 우리 사는 세상이 어둡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이고 문재인이 마치 파리오처럼 너희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며 이죽거린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한 섭리와 사랑을 멈출 수는 없다. 이 생각을 하고 믿음으로 돌아서게 되면 나는 감사에 목이 메어 꼭 울게 된다. 결국 총회 안에선 우린 믿음의 존재이어야한다. 하나님과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그리고 어렵고 병들고 전광훈 목사처럼 갇히게 될지라도. 제104회 정금 총회장 김종준 목사의 개혁 신앙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2020년 새날 목전. 믿음의 영혼을 흠뻑 적신 눈물을 훔치며.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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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31
  • 부활 소망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1913~1974)의 대작(大作) "우주"(Universe)가 홍콩 경매에서 132억 원을 기록했다. 한국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다. 값을 떠나 이 작품은 광활하고 오묘하다. 하지만 이론물리학이 그리는 우주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넘어선다. 과학으로 관측할 수 있는 물질(별과 은하+성간물질)은 우주 전체의 4%에 불과하다. 우주의 대부분은 불가해한 암흑물질(23%)과 암흑에너지(73%)이거니와 정말로 놀라운 건 나의 탄생이다. 이 우주에서 내가 태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우주가 생겨날 확률, 생명체가 진화할 확률, 지구에서 내가 수태될 확률을 곱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은 "이 우주가 왜 있는가"를 묻는다. 인간의 마음이 우주와 일대일(一對一)로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이다. 수학에서 "구골(Googol)"이라는 단어가 있다. 구골은 10의 100 제곱을 가리키는 숫자이다. 즉 1 뒤에 0 이 100개나 달린 거의 무한대 숫자이다. 그래서 이 구골은 우주의 모든 원자의 수보다 많은 엄청나게 큰 숫자이다. 바로 이 "구골"이라는 단어를 따서 현재의 글로벌 선두 기업인 "구글(Google)"이라는 회사명이 탄생했다. 이세돌과의 바둑 대결을 통해 알파고(Alphago)를 목격한 우리 사회에선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류를 지배할 것이라고 믿는 이가 많다. 그러나 난 요즘 영화에서처럼 자기성찰과 공감능력을 지닌 기계의 출현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연산 능력과 추론은 지능의 주요 기능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계산 능력으로 환원할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 형상을 닮은 피조물 인간은 삶과 우주의 의미에 대해 궁극적 질문을 던지고 이웃의 고통을 공감하며 연민하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019년 보수 교단이 기도하는 대한민국에선 공감과 연민은커녕 생각이 다른 이들을 난폭한 말로 서로 난자(亂刺)했다. 존재의 의미를 탐색해야 할 언어가 흉기가 되어 서로를 베었다. 하늘을 찌른 진영 간 적대와 증오 앞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음자리가 초토화되었다. 진영 논리가 비판적 사유(思惟)와 상상력을 질식시켰다. 오직 "우리 편" 여부만 따지는 세태 속에서 정치는 전쟁으로 타락하고 정의는 허공에 흩어졌다. 총회는 납골당 매매 등기이전 소송을 하면서 드러낸 믿음에 근거한 진실한 자기성찰과 공감 능력이 사라진 곳에 신자의 죄의식은 물론이고 인간다운 염치와 부끄러움이 남아날 리 없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한국 사회는 벌거벗은 동물의 세계로 추락했다. 말 그대로 헬조선이 되었다. 총회가 이 시대 빛이 되어야 할텐데 하나님 말씀 그대로 거짓의 아비 마귀 자식들이 되어 거짓을 일삼으며 권력과 황금에 갇힌 자들처럼 어둠 속을 활보한다. 우리는 일제 식민지에서 나라를 세웠고 국가 멸절(滅絶) 직전의 6·25전쟁에서도 살아남아 믿음으로 세계 제일의 기독교계를 세우고 열정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을 일구고 바른 지성과 행동으로 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한국의 기적"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았던 한국 기독인의 믿음과 기도와 땀이 오늘의 성취를 추동했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는 자기 불신을 허락하지 않는 믿음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선택을 받은 우리에겐 절망하거나 타락할 권리가 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나누어 세밑과 새해로 분별한다. 우리네 삶에다 의미와 소망의 무늬를 입히기 위해서다. 한 해의 끝, 밤하늘의 별빛에서 "우주 속의 나"를 보는 건 절망을 딛고 희망을 확인하는 일이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미미한 인간이 만나는 체험이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다. 현대 과학이 뒷받침하는 실존 경험이다. 인간은 잠깐이나마 나사로가 내려다 본 지옥 같은 현실을 넘어선 성찰의 순간을 가져야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김환기는 작품 "우주"와 함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걸작을 남겼다. 시인 김광섭(1906~1977)의 시에서 빌려온 제목 자체가 존재 물음에 대한 심원한 응답이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자 이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 우리 모두 국가와 총회의 내년 전망은 어떨지 역사와 현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자. 나이 든 사람일수록, 더구나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는 어렵다. 그걸 바꾸는 순간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세계관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통령과 조국이 그리고 전계헌과 박상범이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니라는 점이다. 권력자와 실세가 가상현실의 나라를 향해 치달을수록 진짜현실의 민초들은 고단해지기 십상이다. 특히 나라의 지도자가 외교와 안보의 냉엄한 현실을 제대로 못 보면 국민은 위험해질 수밖에 없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7대 술탄 메흐메드 2세. 이후에도 서방 기독교세계 정복사업을 펼친 그는 잔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약속하곤 정복지의 지배층을 모조리 살해하기도 했다. 이를 전해들은 다른 곳에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전을 펼치자 ‘항복하면 알라께 맹세코 목을 베지 않겠다’고 약속해 문을 열게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는 신에 대한 맹세를 지켰다. 목이 아닌 몸통을 베어 수비군 전원을 살해했다. 역사는 잔인했던 메흐메드 2세를 정복자로, 공포심에 눌려 그의 약속을 믿고 무장해제를 결정한 사람은 무능한 지도자로 기억한다. 북한 김정은이 바로 메흐메드 2세 같은 잔학무도한 그런 놈이고 그런 놈을 믿거나 언행이 닮은 작자는 무능한 지도자이거나 거짓 목사일 것이다. 인간은 상상력 말고도 날개가 있다. 미국 시인 랭스턴 휴스는 "꿈(Dreams)"에서 그걸 노래한다. 꿈을 단단히 붙잡아요 꿈을 잃으면 삶은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와 같으니까요 그래서 믿음의 독수리 날개( 사 40 : 31)를 가지고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바라는 부활 소망을 믿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계 22:21).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그 말씀을 들은 자가 대답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2019-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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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8
  • 성탄에 내가 가장 원하는 건 당신
    이건 기도다. 풍진 세상 딛고 참은 울먹임이다. 돌 많은 너덜겅 걷다 헐거운 다리품이 믿음 아래 감춰졌다가 바어져 나온 소망. 믿음의 가족 잠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새벽기도 펼치는 목사의 걸음새에 겨울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사랑이다. 24일 대구 강북경찰서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 9분쯤 대구 북구 한 주택에서 40대 초반 부부와 중학생 아들 A군(14), 초등학생 딸 B양(11) 등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의 죽음은 A군의 담임교사의 신고로 밝혀졌다. 지난 21일까지만 해도 등교했던 A군이 학교에 나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자 담임교사가 A군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인기척도 없었다. 담임교사는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이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유가족들의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10년 전쯤 개인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난 뒤 계속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24일 숨진 유가족이 발견된 주택 현관문은 경찰 통제선이 여러 겹으로 둘러진 채 잠겨 있었다. 주택 건물 입구에는 이 가족 앞으로 온 독촉장이 수십 장 쌓여 있었다. 시중 은행과 대부업체 등에서 온 독촉장과 세금 미납 고지서 등에는 적게는 수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의 금액이 적혀 있었다. 가정이 큰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듯 생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날을 찬양하는 캐럴은 4세기 로마에서 시작했다. 클래식 음악의 시대를 지나며 각종 캐럴이 쏟아졌다. 교회와 성당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일에 걸맞은 노래는 한 해도 빠짐없이 필요했던 것이다. 근대 이후에는 19세기 미국 작곡가 제임스 피어폰트가 만든 ‘징글벨’이 캐럴 세계 ‘왕좌의 게임’을 100년 이상 좌지우지했다. 캐럴은 가정에서, 일터에서, 눈 내리는 전장에서 울리고 퍼졌다. 그러다 마침내 그것이 태어났다. 1994년 11월 1일. 미국 가수 머라이어 캐리가 캐럴 앨범 ‘Merry Christmas’를 발표한 날. 캐럴의 세계, 캐럴의 역사는 뒤집어진다. 음반은 지금껏 전 세계에서 1,500만 장 이상 팔렸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캐럴 음반. 특히나 수록곡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내가 성탄에 가장 원하는 건 당신이다)가 ‘물건’이었다. 가수인 캐리와 작곡가 월터 아파나시에프가 함께 만든 이 곡은 수백 년간 불린 캐럴들을 하나둘 물리치고 감히 인간 캐럴 역사의 대명사가 됐다. 캐럴의 주인공 아기 예수는 왜 곧 새해와 새벽을 맞을 엄동설한 캄캄한 밤에 태어나셨을까. 메시아가 사람의 모습으로 혼돈과 고난의 세상에 오신 건 아마도 모든 걸 새로이 시작하자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대가 사는 그곳에서, 모두가 편견 없이 새로운 눈으로 그대와 사람들을 바라보길 바라는 아기 예수의 순수한 마음’처럼 말이다. 가장 고귀한 성탄 선물은 바로 세상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고 천하보다 귀한 사람, 자기 자신의 생명이다. 그래서 성탄이 거짓의 아비 마귀를 추종하는 총회은급재단의 사문서위조 비리와 청와대의 각종 불법을 털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려는 김창수, 유장춘, 박상범, 당신의 남은 생애 중 첫 번째 날’이 되길 기도해 본다. 내가 성탄에 가장 원하는 당신을 위해 영국 왕실 전통을 따라 해피 크리스마스!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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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은급재단 비리 기사 진정성
    어이, 소 목사 한 이십 일 전 만 70이 된 한 해를 보내며 당신 시 가장 귀한 걸로 한 편만 기억하겠소. 그러고는 죄다 간직하겠소. 꽃밭에 여행길 그 믿음 한 움큼만 새김질하며 시방은 그 꽃 다시 필 그 사막에 숨어 기다리겠소. 문권모라는 방송인이 프로그램 진정성 여부에 대해 동아일보에 이런 말을 했다. 기획 회의 등 방송국의 콘텐츠 회의에 들어가다 보면 일반인 입장에선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의외의 단어’가 곧잘 등장한다. 이 단어는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회의에서도 자주 이슈가 된다. 바로 진정성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성 얘기를 하면 “방송은 어차피 다 연출 아닌가” “화면을 통해 보는데 어떻게 진정성을 알아챌 수 있는가”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 나도 TV 프로그램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무언가 어설프거나 꾸민 듯한 장면이 나오면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채서다.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처럼 요즘 시청자들은 ‘방송국 놈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이때 뭐가 진짜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독버섯 같은 가짜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시청자들은 진짜 콘텐츠가 가짜보다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인간을 비롯해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공정성이란 개념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공정성은 집단생활의 경쟁구도 속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2003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Monkeys reject unequal pay’)에 명확한 사례가 나온다. 똑같은 과제를 수행한 두 원숭이 중 한 마리에게는 맛이 밍밍한 오이를, 다른 한 마리에게는 달콤한 포도를 줬다. 오이를 받은 원숭이는 어느 순간 실험을 진행하던 사람에게 오이를 던져버렸다. 매체의 발달에 따라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진정성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보지 못한 것을 다루는 사극이나 공상 과학물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그 나름의 진정성, 즉 정확한 고증이나 그럴듯한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한다. 이를 설명하는 문학 비평 용어가 핍진성(逼眞性)이다. 핍(逼)에는 핍박하다, 강제로 받아내다 등의 뜻이 있다. 핍진성은 쉽게 말해 ‘진실성을 짜내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성질’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동전 크기만큼만 모발을 남기고 머리를 미는 청나라 초기의 변발이나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도포의 소맷자락 등 고증의 정확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도 작품의 사실성이 높다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일반 방송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기관지 기독신문에도 감히 명함을 내밀 수 없는 빈약한 인터넷 사설언론 더굳뉴스의 기사의 진정성 여부야 더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요즘 세간의 청와대 비리 혐의 사태에 대한 주요 일간지 같이 연일 총회은급재단 비리 혐의 사태를 다루고 있다. 그에 대한 총회 관계자 가운데 더굳뉴스 기사의 진정성을 문제 삼으며 이런 말을 내게 대놓고 했다. "납골당 측으로부터 대가를 받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들 말한다." 기자가 그렇게 기자를 썼을 때 다음과 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첫째, 김영란법 상의 금품수수 혐의로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위험이 따른다. 둘째, 허위 사실의 가짜 뉴스로 인한 명예훼손 고소를 면할 길이 없다. 셋째, 진실을 먹고 살아야 하는 기자의 진정성 여부를 독자들이 알게 되어 기자 생명인 신용을 잃게 된다. 넷째, 더욱 경계해야 될 사실은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처럼 역 가짜 뉴스에 휘둘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은급재단 비리를 불독처럼 물고 늘어지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내가 평생에 걸쳐 자랑스럽게 사랑하는 총회의 거룩성을 지키고 개선하기 위해 목숨까지라도 내놓을 각오로 지위고하 막론 총회 관련 비리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은급재단 사문서위조 근거는 이렇다. 1. 2017년 9월 8일 김성태 이사 9월 15일 한 건도 아닌 두 건의 은급재단 이사 사임 전결처리를 전후해 은급재단 이사장 김선규 제101회 총회장의 사전 허락이나 사후 보고가 김창수 박상범 김은미 누구에게서나 없었다. 2. 2017년 9월 18일 납골당 매매계약 의결 은급재단 이사회에서도 상임이사 김창수나 법인 직원 김은미에게서 일체 보고가 없었다. 3. 2017년 9월 18일 오후 2시부터 개회되어 22일 금요일까지 이어진 제102회 총회에서조차 보고되지 않았다. 유장춘 이남국 김기철 주도의 납골당 매각 불법 조사처리위원회의 구성 의결되는 순간에도 그 중요한 결격사유 이사 사임 전결처리 건을 보고하지 않았다. 집요한 반대자 유장춘의 입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4. 2018년 납골당 불법 매각 조사처리위원회 활동 중에 이사 사임 전결처리 건에 대해 조사나 보고가 일체 없었다. 5. 그러다 2019년 5월 계약금을 주고받은 매매계약에 따른 납골당 등기이전 소송을 다루는 중앙지법 민사법정에 전 총무 김창수와 법인직원 박상범에 의해 이사장을 배제한 전결처리 문서와 그 당위성에 대한 김창수의 사실확인서와 박상범의 진술서를 소송 대리 변호사를 통해 제출했다. 이상의 정황으로 미루어 은급재단 이사회 공모 이사 사임 사문서위조와 법원의 업무 방해 범죄를 파악하게 되고 전광훈 목사에 비할 바 안 되는 용기를 가지고 기관지 기독신문의 조족지혈에 불과한 '더굳뉴스'에 끈질기게 고발하게 되었다. 어쨋든 하나님 은혜로 100년 총회 역사상 초유의 도저히 밝히기 어려운 비리가 사문서위조 전결처리 문서에 대한 사실확인서와 진술서 증거를 전 총회총무 김창수 총회직원 박상범, 김은미 등의 살신성인( 殺身成仁 )의 변호사 조력 법원 제출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 비리를 공모해 저지른 혐의의 은급재단 이사회 범법자들이 자신들의 비리 행각을 뉘우치지 않고 그 비리 고발 상대방을 매도하는 행습을 일삼고 있다. 그런 비열하고 불신앙적인 행태는 마치 이 혼탁한 시대를 빛내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청와대 비리를 향한 수사가 한나라당의 돈이나 사주를 받고 한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더불어민주당 대표 용고 후배 이해찬의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말투는 그런 식이긴 하지만...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과 교회의 하나님 살아 계시어 어제나 오늘이나 오늘도 굽어보고 계시고 또 하나님 없는 문재인 동류 좌파들이 외치지만 지키지 않는 정의도 사실 살아 움직이며 윤석열 검찰총장의 서슬 퍼런 수사를 통해 역사하고 있다. 더하여 나는 시덥지않게 보는 길자연을 가장 존경한다는 전광훈 목사의 종잡을 수 없지만 목숨을 건 것 같은 청와대 앞에서의 질타를 통해서도 촛불을 가장한 불의의 빛이 흔들리고 있다. 눈주름 골진 데 꽃잎을 날리니 문득 스멀스멀 기어드는 사막의 침묵들. 뜨겁디뜨거운 해나래를 접고 향내 나는 침묵 번져 꿈처럼 금강석 별 흐르는 시내산 사막 한 귀퉁이에서 이제 딱 하나 믿음만 남기고 다 잊을 때가 됐다. 솔로몬의 말처럼 기쁨도 슬픔도 지나갔다. 어떤 의미로는 아니 언제나 하나님 은혜 고마웠고 감사했던 한 해였다. 딱 하나 남길 그 고마움의 씨앗을 고르기로 하자. 씨앗이라도 품어야 긴 겨울을 지낼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노을 물드는 총회 꽃밭에 꽃잎으로 눕고 싶다. 2019-12-22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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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2
  • 문재인 운명 그리고 김창수 박상범 김은미 헌신
    울산 대암교회 하나님의 장로 김기현을 이긴 문재인 친구 송철호 시장의 당선 직후 언론 인터뷰도 새삼 화제다. 배광식 목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김기현 장로가 믿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문재인의 운명적 친구 권유로 송철호가 선거에 출마했다는 내용이다. “저는 집도 이사하고 더 이상 (선거)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재인 변호사가 찾아왔다. 만났더니 ‘형, 이사했다며? 다시 이사 가소’ 그래서 ‘내는 내 맘대로 못 사나?’ 하니까 ‘그게 운명인데 어쩝니까?’ 그래서 다시 이사를 갔다.”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은 민주당 경선뿐만 아니라 울산시장 본선과도 연결되는데 이른바 ‘하명수사’ 의혹이다. 송 부시장이 2017년 10월 김기현 전 울산시장 측근 관련 비위 정보를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에 보냈고 이 내용은 청와대 반부패비서관-경찰청 등을 거쳐 울산지방경찰청으로 하달됐다는 내용이다. 황운하 당시 울산경찰청장은 원래 수사팀을 좌천시키고 새로 A 경위 등을 발탁해 수사를 맡겼다. 이후 김기현 울산시장이 한국당 공천을 확정 지은 2018년 3월 16일, 울산경찰청은 김 시장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한국당 ‘울산시장 불법 선거개입 의혹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인 주광덕 의원은 “문 대통령의 30년 절친을 당선시키기 위해 당과 정부, 청와대 그리고 경찰이 동원된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명구가 있다. "비관주의자가 바람을 불평하고 낙관주의자가 바람이 바뀌길 기대할 때 리더는 돛을 조성한다." "위기가 왔을 때 가장 훌륭한 배는 리더십이라는 이름의 배다." 운명을 뇌까리는 문재인과 달리 나폴레옹은 말했다. "리더는 희망을 나른다(A leader is a dealer in hope)." 위기가 왔을 때 시험해봐야 리더의 진짜 점수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이제 운명을 믿는 문재인의 권유를 따랐다 울산 시장 당선의 굴레를 목에 건 송철호와 그 오랜 벗은 어떤 하나님의 섭리를 맛보게 될까.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른 효심어린 자식들로서. 언제 이런 총회를 볼 수 없을까. "총회는 눈이 오면 그냥 받아들여요. 눈이 쌓인 총회가 되는 거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총회가 되지요. 새가 앉으면 새가 앉은 총회가 되는 거죠." 비가 오면 젖을까 싶어 당장 우산을 펴고 바람이 불면 시리게 스며들까 바로 옷깃을 저민다. 우리는 고통이나 시련 같은 자극에 방어적으로 반응한다. 하지만 나무처럼 내게 오는 것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어떤 세계가 열릴까. 비 오면 비 내리는 나무, 그늘이 오면 그늘진 나무로, 같은 자리에서 오래도록 한결같은 삶이지만 나무는 하루도 같은 모습이 아니고 때로 꽃으로 때로 낙엽으로 물들고 변해간다. 하나님의 은혜로. 섬진강 시인 김용택 은 이런 얘기를 하곤 했다. 70년 넘게 같은 동네 사람, 같은 학교, 같은 길이 너무 심심해서, 심심하니까 뭐든 자세히 보게 됐다고. 자세히 보니 달리 보이고 달리 보이니 새롭게 보이고 그걸 끄적이다 보니 시가 되었다. 1972년부터 40년 넘게 10년 근무까지 해가며 총회를 들락거렸는데 아직 70년이 안 돼 고런지 시가 솟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 안타깝다. 올해 가장 기억나는 것이 어디를 가던 중 만난 시골 교회 근처에서 폭우 속을 우산 없이 천천히 걸었던 일이었다. 뛰지 않고 걷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보니 그때 젖은 비를 가득 품고 올라온 흙냄새, 꽃 냄새 그리고 비가 흘러내리는 십자가 때문이었다. 그때 나무처럼 느릿했던 그 걸음이 2019년 내가 겪은 가장 시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총회 비리 척결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 은급재단 사문서위조 및 법원 업무방해 증거 서류를 법원에 사실확인서와 진술서를 제출한 김창수와 박상범의 헌신 그리고 김은미의 총회 개혁을 위한 눈물겨운 서류 작성 조력은 문재인처럼 민형사 소송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이기에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수사와 재판은 든든한 총회 관할이 아닌 각자 주소지 관할 경찰서와 검찰에서 받아야 할 것이다. 눈자락 날리는 오후 1호선 지하철 차창을 바라보며...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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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1
  • 하나님의 총회 성탄 선물
    하나님의 총회 크리스마스 선물총회 개혁 위해 썩고 곪은 은급재단 이사 공모 사문서위조와 전 총무 거짓 사실확인서변호사 통해 중앙지법 제출 사실로 드러나. 우리도 이제 성탄절에 영국 왕실 관습처럼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어떨까. 진보 좌파처럼 거짓을 일삼는 총회 부패한 계층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을 서로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크리스마스에 주고받는 선물은 김상윤과 전계헌처럼 은밀히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마음이 담긴 뜻을 전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물자가 부족했던 근대 이전 사회에서 선물은 빈한한 일상을 보완하는 경제 방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음식과 문구류, 의복과 가축 등 생활에서 필요한 물건들이 선물로 사용되었다.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잔과 도검, 벗에게 보내는 종이와 벼루 등에는 충성과 우정을 담보하는 사회적 상징이 담겨 있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되었을까.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은 역시 퓨리탄 puritan이라는 그 이름답게 성경적 믿음에 근거해 크리스마스 축제를 금지했었다. 예수 탄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였다. 평일로 지정하고 적발되는 자에게는 벌금까지 부과했다. 제네바의 칼빈처럼. 당시 많은 주민은 오랜 전통에 따라 겨울 동지 축제를 구실 삼아 술에 취해 흥청거렸는데 크리스마스도 핑계가 됐다. 교회는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런 전통을 뿌리 뽑지 못했고 결국 12월 25일을 기독교 명절로 전용하게 됐다. 그 과정에 "메리 크리스마스"는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무례한 민중이 술에 취해 고함치던 인사말이었다는 것이다. 실상은 신앙적 역행과 흥청거림의 세속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19세기 들어 분위기를 들뜨게 해 소비를 부추기려는 상업주의에 따라 확산되면서 가장 선호하는 구호가 됐다. 이어 1843년에 등장한 크리스마스 카드 문구와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라는 캐럴송을 통해 세계 공통 인사말로 대세가 기울었다. 그러자 교회는 1940년대 들어 논쟁을 포기하고 "메리 크리스마스"를 용어에 포함하기로 했다. 대신 그 대책으로 백화점 등 상가 진열장과 광고에 예수의 탄생 장면 등 기독교 이미지를 최대한 사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노골적으로 기독교 표현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다른 종교 신자나 무신론자 고객들에게 거부감을 줘 매출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였다. 1990년대 이후엔 "Happy Holidays"로 바꿔 다는 곳도 많아졌다. "holiday"라는 단어도 "holy day(거룩한 날)"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종교 색채가 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일 축하 때 "Happy Birthday" 등은 "happy"를 쓰는데 왜 유독 성탄절만 "Merry Christmas"라고 하는 걸까. "happy"는 감정적 상태를 나타내는 데 비해 "merry"는 동사 느낌의 활동적인 어감을 풍긴다.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어가자는 활동성을 가미한 것이다.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틀리는 걸까. 영국과 아일랜드 등에선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특히 왕실에선 꼭 "Merry" 대신 "Happy"를 쓴다. "Merry"는 하층 계급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은 덧셈보다 뺄셈이 좋다. 외식 같은 군더더기를 빼 단순할수록 실용적이고 아름답다. 목사는 마음에 담긴 영혼을 믿음으로 구현하려는 일을 해야 한다. 여백 가득한 들판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느껴지듯. 가난한 심령이 말로 가득 찬 신앙보다 더 풍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제 그림을 그렸으면 지나간 화가, 오늘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누구나 화가, 어제 시를 썼으면 지나간 시인, 오늘 시를 쓰고 있으면 누구나 시인. 어제 설교를 듣기만 했으면 지나간 신자, 오늘 설교를 실천하고 있으면 누구나 목사. 이해관계가 인간의 양심을 빼앗아가는 시대, 목사로서의 경쟁력은 정서적 문해력과 공감 능력에 달려있다. 신세대로 일컫는 밀레니얼 세대와 소통하고 일하기 위해서도 공감 능력은 필수다. 하지만 단순한 동정심의 "동조(sympathy)"는 금물. 이는 오히려 진심 어린 동병상련 감정이입의 "공감(empathy)"을 가로막는다. "그래 정말 힘들겠어!"라며 건성으로 안쓰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래(Me, too)"라며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 "공감"이다. 교인에 공감하며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감정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다. "명확한 경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총회 회복에 딱 맞는 선물을 주셨다. 그것은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이 외치는 회복이 총회의 칼빈주의 회복에 아주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썩고 곪은 총회 은급재단(이사장 김종준) 이사회 공모 사문서위조와 전 총무 거짓 사실확인서를 빼도박도 못 하게 변호사를 통해 중앙지법에 제출한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교단 개혁의 불쏘시개가 되리라 믿는다. 우리도 이제 성탄절에 영국 왕실 관습처럼 "Happy Christmas"라고 하면 어떨까. 진보 좌파처럼 거짓을 일삼는 총회 부패한 계층의 소란스러움을 연상시키는 천박함을 서로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다. 나아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주인공 지독한 스쿠르지 영감의 개과천선을 하고 구원 받는 체험을 하기 위해.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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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8
  • 문재인과 전계헌
    세계 제일 보수 교단의 총회 총대는 조국 식의 전계헌과 유장춘과 박상범에 의한 총회장과 은급재단 이사와 총회 행정 직원의 드러난 사문서위조 의혹의 명백한 불법과 불의를 제네바의 칼빈처럼 묵과해서는 안 돼 조국 사태는 서막에 불과했다. 따지고 보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가족을 둘러싼 비리 의혹은 비리를 고발한 불의 사자 김화경 목사와 재판 중인 김상윤과 전계헌 간의 돈다발이 든 ‘명품가방 수수’ 같이 대부분 개인 문제였다. 감히 의병 죽창을 외친 조국, 그가 보여준 불의와 불공정을 통해 좌파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공정한 공권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국민이 분노한 것은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거짓의 아비 마귀를 추종하는 위선이었다. 좌파에겐 내 편은 정의로워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그들 나름의 믿음이 있다. 그는 ‘내 편’이다. 그래서 그와 가족을 수사하는 검찰이 나쁘다고 한다.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며 내세우는 이유다. 또 다른 아주 심각한 비리의 전형 2017년 울산시장선거에 청와대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이 정권 최대의 비리 사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당시 배광식 목사 시무 대암교회의 신실한 장로 김기현 울산시장의 비리 첩보를 청와대에 제보한 사람은 송철호 울산시장 후보의 측근이었다. 청와대가 첩보 문건을 경찰에 이첩해 경찰이 압수수색을 했으며 경찰이 압수수색 전부터 9번이나 청와대에 정보 보고를 했다면 청와대와 경찰, 송 후보 측이 공모한 선거 공작의 냄새가 짙게 난다. 따라서 청와대가 개입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반드시 밝혀야 한다. 후안무치로 뇌물을 뜯은 유 전 부시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형’이라 불렀고 송 시장은 사석에서 문 대통령과 호형호제하는 유유상종 ‘30년 지기 절친’이라고 한다. 두 사건 모두 정권이 내 편을 위해 개입한 공정한 선거법 위반과 불법 사례다. 총회 기획행정국 직원과 성만 다른 새로 지명된 추미애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첫 마디는 ‘검찰 개혁’이었다. 처음부터 검찰 개혁을 꺼내는 걸 보면 그가 장관이 되는 경우 인사권 행사를 통해 이번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윤석열 사단을 교체해 수사력을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저급한 정치는 큰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더구나 법무부 장관의 인사권 행사는 그 재량이 크지 않다. 법무부 장관은 독단으로 검찰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다. 반드시 검찰총장의 의견을 듣고 대통령에게 검사의 보직을 제청해야 한다.(검찰청법 제34조) 우리 교단 산하 대암교회(배광식 목사) 장로를 모해한 울산 시장 선거 공작에 흔들리는 촛불 대통령이 관여했는지 쉽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수사 과정에서 검찰 조사가 대통령을 향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윤석열 검찰총장 휘하 검찰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검찰은 항상 법과 원칙에 따라 성역 없이 수사하겠다고 말해 왔다. 그 성역이 어디까지인지 국민은 지켜볼 것이다. 선거 공작은 과거 어느 정권에서도 보지 못한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하만 같은 불의한 정치권력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권력이 개입한 선거는 민심을 왜곡시켜 민주주의와 국민의 의식을 뿌리째 흔든다. 그러므로 모든 신실한 국민은 진실을 밝혀내고 책임자를 가려야 할 시대적 의무가 있다. 김정은 식의 내 편에 대한 그릇된 믿음이 사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에 미치면 국가 통치에 결함이 생기게 된다. 불의한 정권은 비리에 무감각해지고 거짓말을 예사로 하며 불법을 저지르게 된다. 순교의 각오로 주사파 문재인을 앞장서 대적하는 전광훈 목사가 존경하는 대통령이 계시다. 그는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이다. 그가 시작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지금 여태 경험하지 못한 위선과 패역의 위험에 처해 있다. 권력의 핵심이 포진해 있는 청와대가 내 편의 비리를 은폐하고 내 편의 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정치 공작이 영구히 은폐된 경우는 없다. 정권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그렇듯 세계 제일 보수 교단의 총회 총대는 전가족이 일심으로 거짓을 일삼는 조국 식의 전계헌과 유장춘과 박상범에 의한 총회장과 은급재단 이사와 총회 행정 직원의 드러난 사문서위조 의혹의 명백한 불법과 불의를 제네바의 칼빈처럼 묵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연합한 노회의 민의와 성경의 참되신 하나님 뜻을 대변하기 위해 총대가 끝까지 지켜야 할 성경 중심의 칼빈주의다.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주권에 따르는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2019-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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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5
  • 전계헌 은급재단 사문서위조 범죄와 검증
    김창수, 박상범 2017년 9월 8일 사문서위조 전결처리 건 이사장 김선규 목사외 2017년 9월 18일 은급재단 이사회는 물론 무임승차 102회 전계헌 총회 9월 21일 납골당 논쟁 당시도 보고하지 않아 그뒤 해가 바뀐 2018년 2월 전계헌 주재 은급재단 이사회에서 김창수, 박상범 사문서위조 공모 혐의 그리고 그 서류 법원 제출 사법 당국 진실 규명 업무방해 김성태 이사 사임 도달주의 위조 문건 지시 총회 은급재단 비리 누가 지시하고 그 더럽고 악한 안을 냈는지 규명 필요 12월 4일 오전 11시 10분경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55·수감 중)의 감찰 무마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동부지검 관계자 9명은 청와대 서편 시화문에 도착했다. 이들은 청와대 측에 “압수수색하러 왔다”고 밝히고 곧바로 청와대 내부로 들어갔다. 검찰 측은 민정수석실이 위치한 여민2관과 대통령집무실이 있는 여민1관에서 멀지 않은 서별관에 머물렀다고 한다. 여기서 검찰은 압수수색 영장에 기재된 자료를 청와대 측에 제시하면서 관련 문건을 가져와 달라고 요구했다. 압수수색이 집행되는 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업무시간이어서 여민1관 집무실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을 겨냥한 청와대 하명(下命) 수사 논란과 관련해 문건 작성자가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이라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추가 강제수사가 예상된다고 한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현대 과학 수사의 개척자로 불리는 프랑스 범죄학자 에드몽 로카르가 "접촉한 두 물체 사이엔 반드시 물질 교환이 일어난다."며 남긴 말이다. '조국 사태에 대한 동아일보 취재의 시작은 단순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평소 언론과 저서 등을 통해 자녀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었다.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조 장관이 “나의 진보적 가치와 아이의 행복이 충돌할 때 결국 아이의 행복을 위해 양보하게 되더라”라고 언급한 것이 대표적이다. 다른 이슈에선 강한 어조였던 조 장관이 자녀 교육에선 자연인의 모습이었다. 조 장관의 딸이 인터넷에 올린 자기소개서 입수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의 조국 인사 검증은 시작됐다. “단국대 의료원 의과학연구소 소속 인턴십의 성과로 논문에 이름을 올렸으며”라고 쓴 문장이 실마리였다. 취재팀은 탐색 끝에 조씨가 제1저자로 등재된 논문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그다음은 ‘검증의 시간’이었다. 논문 저자가 동명이인일 가능성, 고등학생이 해당 논문을 실제로 쓸 수 있는지 병리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었다. 영어 논문을 아예 번역했고 1저자의 의미까지도 새로 검증했다. 논문 저자로 추정되는 인사들의 현 근무지까지 파악했다. 결국 8월19일 충남 천안시 단국대병원에서 장영표 교수와 만나 기사를 쓸 수 있었다. 대학가에서 조 장관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병리학회는 논문을 취소했다. 취재팀은 이후 ‘조국 부인, 딸 허위 인턴증명서 조작 개입’ ‘조국 PC에 장 교수 아들 인턴활동증명서’ 등 기사를 보도했다. 선거 공작과 권력의 비리 은폐는 대통령 측근들이 권력을 자의적으로 남용한 것이다. 대통령이 취임 때 국정 과제 1호로 내걸었던 적폐 청산은 바로 전 정권의 이런 행태를 겨냥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민정수석과 대통령 측근 실세 비서관을 넘어서는 윗선이 얽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러 정황이 그 윗선으로 대통령을 지목하고 있다. 선거 공작으로 당선된 민주당 소속 울산시장은 대통령과 30년 친분이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은 그의 당선을 "가장 큰 소원"이라고 했다. 조국 전 민정수석은 일면식 없는 유재수씨에 대해 처음에는 강한 감찰을 주문했다가 갑자기 입장을 바꿨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유씨는 문 대통령을 "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두 사건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가 사건의 핵심이다. 직접 관여했으면 실정법 위반이다. 실정법을 위반한 대통령에게 어떤 벌이 부여되는지는 국민 모두가 안다. 검찰의 범죄 수사에 대해 청와대와 여당이 검찰을 공격하고 비난하며 결과적으로 수사를 방해하는 해괴한 상황이 또 빚어지고 있다. 조국 사태에 이어 ‘울산시장 하명 수사’ 사건과 관련해서도 같은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 때도 검찰과 언론 탓을 했지만 진실을 숨기지는 못했다. 조국 사태가 그 일가의 범법 문제라면 울산 선거공작 의혹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본거지’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청와대가 스스로 조사해 국민 앞에 정직하게 밝히고 수사에 적극 협력하는 것이 정도(正道)인데 정반대 행태를 보인다. 결백하다면 결코 그러진 않을 것이다. 청와대가 12월 4일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의 최초 제보를 받아 요약·편집했다고 밝힌 민정수석실 행정관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고교 동문인 문모 행정관(전 검찰 수사관)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 행정관은 6급 검찰 수사관 출신으로 주로 부산 지역 검찰청에서 일했었다. 200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와 주로 대검찰청 범죄정보과 등에서 정보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반년 언저리를 맞던 문재인 정부는 한 손으론 전 정권 때려잡는 적폐 사냥을 하면서 또 한 손으론 적폐보다 더 몹쓸 짓을 하고 있었다. 배짱이 좋은 건지 양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머리가 나쁜 건지 보통 사람들은 헤아릴 길이 없다. 자신들의 정권이 천년만년 갈 거라고 자신했던 모양이다. "백원우 별동대"에서 활동했던 검찰 수사관은 주변 사람들에게 "청와대 파견 근무가 위험하다. 겁이 난다"고 했다고 한다. 문재인 청와대가 법과 규정을 넘나들며 권력을 휘둘렀다는 얘기다. 그가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입으로는 순교의 믿음을 본받겠다는 우리 총회 관계자와 직원들에게는 그런 양심 고뇌의 비극은 전혀 또는 결코 그럴 일이 없지만 말이다. 신앙이 없는 건지 양심이 없는 건지... 비리로 허덕이는 믿음의 단체 우리 총회는 어찌 해야 할까. 우선 총회장의 역할을 대폭 축소하거나 권한 행사의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고 감사부장·재판국장 등 고위 총대와 직원에 대한 총회 인사청문회를 개최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무엇보다 총대가 깨어 있어야 한다. 총회 민주주의의 기본은 총대가 선출된 대표자를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통제’하는 데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는 진리 가운데 하나는 국민이 주권자로서 감시와 통제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주권자로서 대접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총회도 그렇다. 총회 상비부의 비리나 총회 행정 당국자들의 비리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총회 감사부나 각 기관의 감사들의 행위를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국가와 같은 검찰 기구는 없지만 검찰 기능과 권한을 가진 무소불위의 총회 임원회가 있다. 마침 진실을 추구하는 신앙의 회복을 외치는 총회장 김종준이 등장했다. 그를 중심한 총회 각 부의 비리와 총회 행정 당국자, 특히 은급재단 담당자와 전 총무 김창수와 은급재단 이사들의 사문서위조 지시와 공모와 행사에 대한 조사가 절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청와대와 권력자들의 비리를 고발하는 시민 단체들의 고발 같은 사법 당국에 호소하는 고발, 고소를 의식 있는 총대들이 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본연의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고 전하는 사역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시인 소강석 부총회장은 사막같은 거룩한 총회를 노래한다. 꽃밭은 노래했으면 사막으로 가라사막을 다녀왔으면 다시 꽃밭으로 가라...꽃밭에는 사막의 별이 뜨고사막에는 꽃밭의 꽃잎이 날리리니 2019-12-0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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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5
  • '크투'와 황규학이 제기한 이재록 사건의 진실(4) - 최삼경 목사
    먼저 <크리스천 투데이>(크투)가 제기한 금품 문제 중에 이재록 건부터 답하겠다. <크투>의 이대웅 씨와 김진영 씨가 필자와 <교회와 신앙> 관계자들에게 문자와 전화 폭탄을 보내고, 무엇보다 비판의 글들을 소나기처럼 쏟아 부었다. 저들은 10일 동안에(2019년 10월 4일부터 10월 15일까지) 무려 11회나 비판의 글을 썼으니 하루 한 개 이상의 글을 쓴 셈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지금까지 겨우 3회의 글을 썼고(10월 16일, 10월 25일, 11월 6일) 이 글이 필자의 4번째 글이다. 그 후에 크투 기자들은 10월 16일과 10월 25일에 각각 2회의 글을 더 썼는데 하루에 한 꼭지씩 써대던 글을 필자의 글이 나간 후에는 한 달 동안 겨우 두 번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 중 첫 번째는 전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두 번째 글 하나만은 자신들이 제기한 금품 수수 문제 대하여 쓰되 필자가 대답한 핵심 사안은 피하고 동문서답식 글을 썼다. 바로 <최삼경 목사, “‘한 사람’에게 ‘5천만원’”의 주인공 밝혀야>라는 글이다.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26324 위 글에 대하여 대답할 거리가 많지만, 그러다 보면 되레 본질을 흐릴 위험성이 있어 필요하면 후에 다시 답하겠다. 우선 독자들이 비교하여 읽어주기 바란다. 그동안 크투 기자들이 문제 삼은 돈 문제는 네 가지다. 첫째는 명성교회에서 돈을 받았다는 것, 둘째는 광성교회(김창인 목사님)로부터 수억의 금품을 받았다는 것, 셋째는 이재록 건이고, 넷째는 이인강 건이다. ‘명성교회’ 건 문제는 앞에서 충분히 답을 하였다. 이제 남은 세 가지 중에 ‘이재록’ 건부터 대답하겠다. 이재록 건은 17년 전 ‘명성’ 건보다 시간적으로 3-4년 더 앞선 20-22년 전 사건이다. 시간적으로 가장 오래된 사건이기에 이 건부터 취급하기로 한다. 본론: <크투>와 황규학 씨가 문제 삼은 이재록 건의 진실은 이렇다. 문제의 이재록 사건은 지금부터 20-22년 전(1996-1999년)의 일이다. 앞선 명성교회 건은 세습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던 17년 전(2002년) 일임을 필자는 밝혔고 그것도 명성교회가 공적으로 <교회와 신앙>에 해준 헌금이었음도 충분히 밝혔다. <크투>는 표현의 차이를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3류급 기자의 기질을 벗어나서 객관적 사실 중심으로 기사를 쓸 줄 아는 1류급 기자가 되기 바란다. 그러나 이재록 건은 그보다 더 전인 1996-1999년의 일이다. 저들이 명성교회 건은 그 시기를 몰라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처럼 핑계 댈 수 있다고 해도, 이재록 건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첫 번째 이유는 황규학 씨를 비롯한 이단옹호자들과 이단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제기해 필자를 20여년이 넘도록 괴롭혔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목사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온갖 죄들을 다 지은 (지하철 성추행범, 지하철 절도미수범, 상습적 이단옹호자, 상습적 이단옹호 언론을 운영하는 자 등) 황규학 씨가 필자를 공격할 때마다 사용하는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둘째로 <크투> 기자의 글만 보아도 그 시기를 모르지 않음이 충분히 나타난다. 이대웅 씨가 쓴 글 중에 “<교회와 신앙>의 전 대표 이사장이자 전 편집국장인 남광현 씨의 경우 과거 만민중앙교회 측에게서 비판 중지를 명목으로 1,600만원을 받았다가 문제가 되자 돌려줬고 사과문을 발표했으며”라고 한 것이 그렇다. 이대웅 씨는 돈을 돌려준 것도 알고 있고 사과문을 발표한 것까지도 알고 있다. 돈을 돌려준 것도 알고 사과문을 발표한 것도 안다면 그 시기를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연대를 뺐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독자들이 “20년 전에 노루 친 몽둥이를 3년 동안 삶아서 먹으려는 거냐?”라 하거나 “명성교회 건도 그랬는데 과거 얘기를 가지고 웬 난리냐?” 등으로 의문을 제기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 씨는 알지만 모른 체하면서 필자를 금품이나 받는 사람으로 매도하려는 데 혈안이 되어서 생긴 미련이고 악이다. 이재록 사건이 20년도 더 된 일이란 것을 아는 자는 다 안다.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이고, 그보다도 이미 철저히 고백하고 회개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대웅 씨는 ‘재림주’ 장재형 씨의 이단성을 밝히는 필자의 의도에 ‘물 타기’를 하기 위하여 연도를 알고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 삼은 이대웅 씨의 글 전체를 보면, 더 선명하게 알 것이다. <최삼경 목사, “김삼환 목사에게서 5천만원 받아” 주장 파문>(2019년 10월 4일)이란 글이다. 이대웅 씨의 글이다.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25831 최삼경 목사는 그 동안 수 차례 직·간접적으로 금품수수 논란에 휩싸여 왔다. 최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와 신앙>의 전 대표이사이자 전 편집국장인 남광현 씨의 경우 과거 만민중앙교회 측에게서 비판 중지를 명목으로 1,600만원을 받았다가 문제가 되자 돌려줬고 사과문을 발표했으며 아멘충성교회 측에게서는 이단성 논란 해결을 위한 교계 및 <교회와 신앙> 기자 로비 명목으로 억대의 금품을 요구했다. 또 <교회와 신앙>은 광성교회 측에서도 김창인 담임목사 시절 사이비이단대책비 명목으로 수억의 금품을 받았다. 김 목사가 은퇴하고 이성곤 목사가 부임하면서 그 지원이 끊기는데 공교롭게도 그 얼마 뒤부터 최삼경 목사와 친분이 있는 기자가 재직하던 한 매체에서 이성곤 목사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해 광성교회 사태가 발생했고 <교회와 신앙>도 광성교회에 비판적 논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광성교회(김창인 목사) 건은 다음 글에서 자세히 취급하겠다. 그러나 우선 한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이대웅 씨가 쓴 위의 글을 보면 그가 어떻게 광성교회 회계장부를 입수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황규학 씨가 이미 사용한 것임도 안다. 광성교회 헌금 출납 장부인데 이 씨는 그것을 ‘헌금’이라고 하지 않고 ‘금품’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크투>의 부정직함이요 악이다. 이대웅 씨는 읽을 눈이 없는가? 아니면 그것을 해석한 능력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교계 언론들이 헌금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은 기본 상식이다. 물론 이단옹호 언론들은 이단의 돈을 받아서 운영할 것이지만 정상적인 언론들은 교회의 헌금 의존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정상이다. 만일 헌금을 ‘금품’이라고 할 수 있다면 <크투>는 얼마나 많은 금품을 받고 있는지 소상하게 밝혀야 한다. 아니면 <크투>는 별도로 딴 돈벌이를 하고 있는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크투> 기자들은 다른 언론들보다 수입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그럴까? 금품 수수가 안 돼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 알고 싶다. 홍콩의 토마스 왕 목사를 중심한 목회자들은 홍콩에서 활동하던 예청회(장재형이 만든 핵심 단체로 이들이 미국, 호주, 일본, 한국의 <크투>와 자매 언론들에서 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다.) 회원들이 하도 열심히 전도하는 것을 보고,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의 일부 일을 맡겼다고 한다. 그 때 ‘헌금을 거두지 말라’는 원칙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몰래 헌금을 거두는 것을 보고, 맡겼던 일을 취소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을 공증까지 해 주어서 가지고 있다.) 왜 예청회원들은 헌금을 모았는가? 아니 그야말로 금품 수수를 하였는가? <크투>는 헌금으로 경영하는가? 아니면 금품 수수로 운영하는가? 아니면 통일교처럼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가? 물론, 20년이 아니라 200년 전 일이라고 하여도 회개하지 않은 죄라면 공격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 건은 다르다. 회개를 했다. 회개를 하여도 충분하게 하였다. 필자는 언론이나 기자들 중에 이와 유사한 일이 있을 때 이렇게 철저히 회개한 기자나 언론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런데도 저들은 ‘사과문을 냈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회개’라고 하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헌금을 '금품'이라고 했다. 이런 엉터리 기준은 기독언론의 기자가 아닌 세상 언론에도 없을 것이다. 남광현 장로는 충분히 회개하였다. 남광현 장로(당시 본지 대표이사)는 이재록 교회(만민중앙교회)로부터 책값 조로 1,600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그 후에 돈을 다 돌려준 것은 물론 철저히 회개하였다. 회개하되 넘치도록 하였다. 본 글 하단에 게재될 전문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지금까지 교계에서 이렇게 철저하게 회개한 예가 있으면 <크투>가 한 번 보여주기 바란다. 남광현 장로(당시 대표이사)는 자신이 받은 돈은 되돌려주고 1999년에 필자 소속 교단지인 기독공보에도 회개문까지 냈고 또 본 <교회와 신앙>(1999년 1월호)에는 그 구체적 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회개문을 게재하였다. 남 장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한국교회 앞에 용서를 구하였다. 여기서 그러면 두 사람, 장재형 씨와 황규학 씨는 어떻게 하였는가? 한 번 남광현 장로와 비교해 보자. 과연 <크투>의 창시자 장재형 씨는 통일교 전력을 남 장로처럼 회개하였는가? 장재형 씨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통일교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었느냐?’는 문제와 하나는 ‘그는 재림주인가?’의 문제이다. 장재형 씨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재림주’로 인정하는 것을 딱 한 번 공적으로 인정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하여 그가 재림주가 되었는가(?)는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다음에 본격적으로 취급하겠다. 우선 그의 통일교 전력에 대한 회개를 충분히 하였는가는 확인해야 한다. 이대웅 씨도 남 장로가 이미 회개한 이재록 건을 또다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장재형 씨는 통일교 내에서 핵심적 자리를 두루 섭렵하다시피 했고 선문 대학 교수까지 하였지만 그의 주장처럼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오히려 통일교에서 많은 사람을 꺼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니면 그는 비록 통일교 출신이고 통일교 핵심 멤버 중에 하나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지만 그 죄에 맞는 회개를 하였느냐’는 것이다. 물론 장재형 씨는 처음에는 통일교 교리를 가르친 일이 없다고 하다가 후에는 회개하였다고 하고 그러면서도 어떤 부분은 시인을 하고 어떤 부분은 변명을 한다. 따라서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위 두 가지 견해를 갖고 있음이 자연스런 일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모순된다. 즉 장재형 씨는 자신이 ‘통일교에 있을 때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지도 않았고 오히려 많은 통일교인들을 통일교에서 빼냈다’고 하면서도 장재형 씨가 문선명 주례 하에 1,800쌍 합동결혼식을 하였던 사실에 대하여 그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것은 통일교도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다’. 그리고 <크투>의 이사장인 천환 목사(고신측)에게는 “사랑이 죄죠”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통일교도인 아내와 결혼을 하기 위하여 자신은 통일교인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합동결혼을 하는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장 씨가 선문대학 교수로 재직한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자신이 문선명을 따르고 그를 아버지로 모시는 통일교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전 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자연히 통일교 쪽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한 기자에게 말하였다고 들었다. 또 필자와 이단연구가들에게는 ‘월급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월급을 받기 위하여 교수로 있었다’고 하였다. 두 가지 답은 일맥상통하는 논리다. 그러면 장재형 씨가 비록 통일교에서 활동하였지만 회개하고 나왔다는 말이 맞다면 마땅히 회개도 철저하게 했어야 한다. 물론 이는 두 가지 주장을 억지로 맞출 수 있을 것이니 추후에 <크투> 기자들과 장재형의 변명이 기대되는 바이다. 만약 장재형 씨가 통일교 교리를 가르친 일이 없고 오히려 통일교 교인들을 많이 빼냈다는 주장이 맞다면 장재형 씨는 전혀 회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하고 상급을 받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반대로 장재형 씨가 아무리 통일교에서 핵심 멤버로 활동을 다 하였고 많은 정통교인들, 특별히 청년들을 통일교도로 만들었다고 하여도 거기에 맞는 회개만 하였다면 더 이상 문제 삼을 수 없을 것이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을지 후에 장재형 씨와 그 측근들의 다른 꼼수 논리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은사이신 김명혁 교수(합신대 전 학장, 강변교회 원로 목사)는 장재형 씨가 회개하였다고 확실히 믿는 분이다. 회개하였으니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보는 것도 분명하다. 물론 김 교수는 장재형의 ‘재림주’ 활동은 아예 믿지 않을 것이다. 김명혁 교수는 물론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원로 목사, <크투> 편집고문, 기독교선교횃불재단 이사)도 장재형 씨의 재림주 역할은 믿지 않고 단지 그의 과거 통일교 전력은 이미 회개하였다고 믿는 한 분이다. 그래서 이 두 분 때문에 한국교회가 장재형 문제에 대하여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된 점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럼 장재형 씨의 회개와 남광현 장로의 회개와 비교해 보자. 장재형 씨가 언제부터 얼마나 어떻게 통일교에서 무슨 활동을 하였고 언제 무슨 동기로 통일교를 이단이라고 깨달았고 통일교에서 나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통일교에서 나온 후에 그 큰 죄를 어떻게 회개했는가 하는 점이다. 장재형 씨는 자신의 회개한 점을 기록한 근거가 있는지 회개에 합당한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 보아야 한다. 어거스틴은 마니교에서 나와서 그들과 싸웠고 루터는 천주교에서 나와서 그들과 싸워 이렇게 개신교의 초석을 이루었고 이단 연구가 정동섭 목사는 구원파에서 나와서 구원파와 피터지게 싸웠고 진용식 목사는 안식교에서 나와서 안식교의 이단성을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장재형 씨의 회개는 선명하지 않다. 그는 이 때는 이렇게 말하고 저 때는 저렇게 말하였다. 어쩌다가 그의 통일교의 화려한 전력이 밝혀지면 그제서야 겨우 소극적 변명을 하는 수준이었다. 그 대표적 케이스가 그의 1,800쌍 합동결혼식 사건이고 선문대학 교수 건이기도 하다. 적어도 통일교의 핵심 요직을 두루 다 거쳤던 그가 ‘선문대학을 이루는 데 최고의 공로자 중에 하나’라면 거기에 걸맞은 회개를 했어야 한다. 존경하는 김명혁 목사와 김상복 목사는 장재형이 무슨 회개를 하였는지 어떻게 하였기에 그를 그렇게 믿어주고 그처럼 들러리(?)를 서 주고 계시는지 밝히실 때가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장재형 씨에게는 이렇다 할 회개가 없는 것으로 안다. 회개하였다고 구실을 삼을 정도의 미미한 수준의 회개만 있다. 그것도 초기의 장재형 씨는 아예 통일교 교리도 가르친 일이 없고 통일교인들을 빼냈음을 강조하였기에 회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 후에야 회개를 요구하는 여론이 형성되자 전술적으로 회개를 하였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김명혁 교수나 김상복 목사님은 혹시 장재형을 ‘회개했다고 여겨 주자’고 해온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장재형 씨에 비하면 남광현 장로의 회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확실한 회개요, 철저한 회개라고 할 수 있다. 이대웅 씨가 이재록 건을 가지고 이렇게 필자와 본 <교회와 신앙>을 공격하는 것은 남 장로의 회개를 회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어쩌면 이대웅 씨는 <교회와 신앙>은 회개도 하지 말아야 하고 아무리 철저하게 회개하여도 그것을 회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필자는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 확신한다. ‘<교회와 신앙> 기자는 천을 회개하여도 회개가 아니고 장재형 씨는 하나만 회개하였어도 회개다’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광현 장로는 철저히 회개하였다. 삭개오처럼 4배로 갚지는 않았지만 받은 돈을 다 돌려주었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내용까지 소상하게 밝혀가며 회개하였다. 그 회개가 부족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다시 더 회개하도록 하겠다. 성추행범, 절도미수범, 명예훼손범, 금품수수범 등의 온갖 찬란한 범죄 경력들을 다 가진 황규학 씨는 과연 남 장로처럼 회개하였는가? 황교학 씨는 <크투>와 함께 이 이재록 건을 가지고 필자를 줄기차게 공격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황 씨는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그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황규학 씨는 과연 자신이 지은 그 더러운 죄들을 회개하는 사람인가? 우선 본 글에서는 ‘지하철 성추행죄’와 ‘지하철 절도 미수죄’만 살펴보자. 황 씨에게 회개란 없어 보인다. 그에게 ‘회개’란 단어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는 죄를 지어도 항상 뻔뻔하다. 황규학 씨는 목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절도미수와 성추행을 지하철에서 하고도 그것 자체를 부정한다. 하지도 않은 성추행을 회개하라고 한다면 회개하라는 사람이 오히려 회개를 해야 한다는 말이 되고 만다. ‘절도미수죄’에 대하여는 ‘했다’ ‘안 했다’ ‘오해다’ 등의 변명도 못하고 있다. 회개하려면 먼저 자백을 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황 씨는 아예 그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는 2008년 4월 14일 18시 50분에 지하철에서 한 여성을 성추행하였다. 수치스러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부끄럽다. 법정 판결은 ‘황규학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715-9 소재 지하철 3호선 교대역에서 고속버스 터미널역 방면으로 운행하는 전동차에서 혼잡한 틈을 이용하여 모 여자 뒤에 바짝 붙어 서서 왼쪽다리를 피해자 다리사이에 끼워놓고 성기를 엉덩이에 밀착시켜 비벼대는 방법으로 2분가량 피해자에게 성적 수치심과 불쾌감을 주는 등 추행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가 추행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근거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피해 여성이 황규학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이며 둘째는 성추행이 일어난 시간에 황 씨는 여러 사람들과 수차에 걸쳐 전화 통화했기 때문에 성추행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노회로부터 무죄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엉터리 변명은 오히려 성추행을 사실로 믿어지게 하지만 여기에서 분석하고 비판하지는 않겠다. 만일 필자가 황 씨처럼 만일 세상 법정으로부터 대법원까지 성추행과 절도미수가 확정되었다면 황 씨와 <크투>와 이단 옹호자들과 이단들이 어떻게 하였겠는가? 아마 필자는 매장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절도미수 건도 그렇다. 성추행 판결 1주일 후인 2010년 7월 22일에 절도미수로 또 3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이 때 그가 목회자란 사실을 숨겼다가 뒤늦게 들통 난 점도 한없이 수치스럽다! 황 씨가 “성추행 재판 이후에 목회자 신분을 감추고 잘못을 저질러 죄송하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사전에는 회개란 없기 때문에 남이 회개한 죄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이런 황 씨는 약방의 감초처럼 한국교회에 끼지 않은 곳이 없다. 이런 자가 세습 옹호를 하고 그의 옹호를 받아주고 그를 후원해주는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에 대한 실망이 크다. 명성교회가 그가 쓴 책을 얼마나 많이 팔아주었는지 모른다. 정직한 사람은 배가 아무리 고파도 도적해서 먹지 않는 법이다. 본 <교회와 신앙>지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언론보다 앞장서서 이재록의 이단성을 줄곧 밝혀왔다. 본 <교회와 신앙>만큼 이재록 씨의 이단성을 밝힌 언론은 없다. 96년부터 99년까지 총 19개의 글을 썼고 95년부터 99년까지는 총 23개의 글을 썼다. 최근에 이재록 씨가 성폭행범으로 구속되면서 본지가 이재록 반대편을 돕고 또 이 사실을 한국교회에 알리는 것도 가장 앞장서서 한 일임을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재록 씨에게 금품을 받고 회개하지 않았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음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1999년에 한기총에서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데 필자가 앞장섰고 한기총에서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자료 또한 본지가 제공하였고 필자의 주도 아래 보고서도 작성하여 이재록을 최초로 이단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래도 본지가 이재록 씨에게 금품을 수수하여 그를 봐주었다고 할 수 있는가? 황규학 씨와 <크투>가 본지처럼 이단을 규정하고 이단을 막는 데 앞장섰다면 그 객관적 증거를 제시하기 바란다. 그 때까지 이재록 씨를 핵심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오직 예성 교단에서 이재록을 이단으로 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교회 이단은 통합, 합동, 고신, 합신에서 95%를 할 때다. 그런데 본지의 이 사건이 터지던 1996년까지 위 4개 교단에서 이재록을 이단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순서는 먼저 한기총에서(1999년 봄) 그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 후에 통합측 9월 총회에서(84회) 이단으로 하고 그 다음 해인 2000년도에 합신에서(85회)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 여러 교단들의 이단 연구에 본 <교회와 신앙>지가 그 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1999년 5월 10일에 MBC PD 수첩에서 이재록의 사이비성을 고발하려고 하자 이재록 측 교인들이 MBC 방송실을 점유하고 기물을 파괴하여 방송을 못하게 한 큰 사건이 있었다. 그 때 이 방송을 위하여 MBC PD 수첩의 윤 PD에게 이재록 씨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아예 기자들이 따라다니며 도왔던 것도 본지였다. 그 후 1999년에 MBC PD 수첩 기념 리셉션을 할 때 MBC에서 필자를 기독교 대표자로 초청하여 참석하였다. 결론: 원수가 가진 장점이라도 그 장점은 장점으로 인정해야 하나님의 사람이다. <크투>나 황규학 씨는 필자가 이것을 "희다"고 하면 "'검다'고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다가 필자가 그것을 “검다”고 하면 이제 “'희다'고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적이나 다름없는 바리새인의 장점도 장점으로 지적하셨다. 필자는 누구를 공격할 때 알면서 거짓을 이용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크투>는 큰 실수를 하였다. 이제 전처럼 필자를 공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친(親) <크투>측 사람들도 17년 전 20년 전 일을 가지고 현재의 일처럼 한 것을 잘못이라고 하였다고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지 한국교회와 함께 두고 보기로 하자. 부록: 남광현 장로의 사과문(1999년 1월)한국교회 앞에 엎드려 사과 드립니다남광현(교회와 신앙 대표이사) <교회와 신앙>이 이재록 목사와 교리적인 문제점을 비판한 것은 96년 7월호가 처음입니다. 최삼경 목사의 연구 분석이었습니다. 이후로 이 목사 측의 반론이 있어 96년 9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목사측에서 9월호 2,500부를 주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생각 끝에 저는 그 주문을 받아드렸고 책값으로 1,000만원(권당 4,000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목사에 대한 최 목사의 추가적인 비판은 진행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나중에 밝혔지만 책 판매는 경영자의 이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10월호를 통해 이 목사 측의 반론에 대한 재판론의 비판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저는 만민중앙교회의 기획실장과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주로 이재록 목사가 지적받고 있는 문제점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목사의 문제점이 속히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고 그는 최삼경 목사가 지적하는 바와 같은 정도의 문제는 없고 몇몇 부분은 주의하고 있다고 거듭 해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명하는 그는 시종 확신에 차있었고 진실해 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 목사에 대한 저의 비판적인 인식은 상당 수준 완화되었고 결국 1년이 넘도록 직원들의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등의 어려운 운영 사정을 견디지 못해 잘못된 판단을 하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목사측으로부터 4차례에 걸쳐 후원금 명목으로 1,600만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최삼경 목사가 다른 연구 일정에 쫓겨 이 목사에 관한 추가 연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틈타 그의 문제점에 대한 편집부 자체적인 비판기사조차 더 이상 나가지 않도록 기자들을 통제해왔습니다. 이목사측에게 약속해준 대로였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앞에 이 사실을 밝힙니다. 이단 문제를 취급하는 공적 언론 활동과 관련하여 저지른 잘못이기에 더욱 재를 뒤집어쓰는 심정에서 공적으로 사실을 밝히며 사과드립니다. 어려운 운영 사정이 결코 핑계가 될 수 없음을 시인합니다. 비록 잘못 판단한 연유였지만 이 목사에 대한 완화된 시각, 즉 긍정적으로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주관적 사연도 결코 정상참작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점 역시 시인합니다. 무슨 비난이라도 아무런 변명 없이 달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메시지를 이목사가 말하고 그 교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를 96년 7월 초순에 처음 받았습니다. 만민중앙교회의 기획실장으로부터 줄곧 들은 해명도 있고 해서 처음에는 차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지 기자에게 확인토록 했습니다. 물론 취재된 내용이 이번 호에서 고발하는 바와 같은 결정적인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도무지 용인될 수 없는 내용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 자료를 접하고 나서야 저의 지난 처세가 참으로 그릇되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이 목사 측으로부터 받은 후원금 1,600만원 전액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민중앙교회 기획실장을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에게 이 목사가 자칭 메시아를 향해 가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이 목사가 만일 소위 자칭 신적 의미를 담은 메시지를 선포한 근거가 나올 시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교회와 신앙>을 통해 한국교회 앞에 고발할 것이라고 저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끝내 그 같은 충격적인 사실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의 잘못된 처세로 인해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먼저 본지의 사역에 찬동하여 후원 차원에서 정기구독 회원이 되어주신 많은 독자님들께 실망감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어려운 사역을 함께 감당해 주시는 목사님들께 충격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본지의 하는 일에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배신감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는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묵묵히 수고를 아끼지 않은 직원 동역자들께 곤혹스러움을 안겨 드렸습니다. 최근에서야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본지 발행인 최삼경 목사님께 깊은 상처를 드렸습니다. 93년 창간 이래 지금껏 사례비 한 푼 받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밤낮 없이 국내외를 돌려 <교회와 신앙>을 살리기 위해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어떠한 고충이 따를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방법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고자 자신과의 수없는 싸움을 다해 오신 최 목사님께 누구보다도 크나큰 배신감과 불명예를 드렸습니다. 이 모든 분들께 엎으려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본지 외에도 이단 연구 활동을 해오고 있는 여러 기관과 사명자들이 있는데, 이분들께도 참으로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행여 저의 잘못이 빌미가 되어 그분들 모두가 함께 비난 받거나 이단 연구 자체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 무조건적으로 부정 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저의 잘못이요, 제가 비난 받을 일이지 저의 잘못이 사이비이단을 정당화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결단코 될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사역을 위해 가능한 대로 가진 것 다 바치고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함께 부끄러움 앞에 서야 할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이러 저러한 일들이 차질을 빚지는 않을까 우려되는 마음도 큽니다. 그렇지만 긴 시간 옆구리를 찌르고 번민의 근원이 되었던 저의 가시를 이렇게 빼내어 버릴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같은 죄가 이것으로 처음이요 마지막이 되도록 기도해 주실 것을 한국교회 앞에 간절히 요청 드립니다. 뼈를 깎는 마음으로 근신하는 가운데 사명 수행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전국의 모든 교회 앞에 다시 한 번 엎드려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9년 11월 14일 (목) 10:25:29 최삼경 목사 sam5566@amennews.com 최삼경 목사 / 본지 편집인, <빛과소금교회> 담임 목사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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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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