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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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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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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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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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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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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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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 욥의 정원 욥기Job는 대부분 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은 그의 책 14장 14절에서 20절까지에서 욥은 실제 장소에서 실제 시련들을 겪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시련을 겪을 때 신앙을 지키는 인내자의 본보기로 욥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난 기도했다 _작자 미상 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내가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작자 미상의 시인은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기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처럼 욥도 그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욥기에는 세 만남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이 있다. 둘째 욥과 친구들의 만남이 있다. 셋째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납득시키려 애를 쓴다. 욥은 자신의 성실과 믿음을 타협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나 말도 거부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욥은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욥기에는 많은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 비유들은 자연 세계의 삶과 죽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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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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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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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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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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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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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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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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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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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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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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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양중앙교회 성탄절 칸타타
- 작년 성탄 주일 1호선 녹양역에서 내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녹양중앙교회로 걸어가는 길은 눈이 얼어 미끄러웠다. 의정부 변두리 녹양동 버들개초등학교 옆의 크지 않은 교회를 찾아갔다. 매섭게 추운 날이었지만 주님의 오심을 기리는 소박한 성탄절 예배를 기대하며 걸었다. 두 사람의 머릿수를 더하는 것만 해도 의미가 있다며 조심조심 걸었다. 그런데 성탄절 대예배에 세계 어디 교회에서도 없을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탄 축하 예배에 성탄절 칸타타가 설교 전에 진행됐다. 칸타타는 '노래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cantare'에서 유래하였는데, 독창과 중창, 합창으로 구분되는 성악곡 형식으로, 대개 처음과 끝 곡은 합창으로 하는 극음악이다. 칸타타는 오라토리오보다 가사의 길이가 짧고 서정적이어서 극의 줄거리를 해설하는 '낭송자'가 없는데 녹양중앙교회의 칸타타는 두 사람의 낭송자까지 있었다. 관현악만 함께했다면 오라토리오였다. 한덕균 목사가 성경본문 마태복음 2:1-12의 말씀 봉독을 한 뒤 12명의 성가대원이 아름다운 붉은 옷을 입고 설교단에 섰다. 지휘자의 인도에 따라 노래가 흐르고 해설이 이어지고 피아노와 올갠의 반주가 끼어들었다. 찬양대는 입을 크게 벌려 주님 오심을 찬양하고 기뻐했다. 그들의 노래는 크리스마스의 힘을 느끼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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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양중앙교회 성탄절 칸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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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서초 새 성전 입당
- 세계를 향해 두 팔 벌린 서초 새 성전 입당 서초새예배당의 건립목표 사랑의교회 5대 사역비전의 구현 GLOVE로 요약되는 G(Growing in Truth, 제자공동체) L(Loving Family, 생명공동체) O(Obeying God, 예배공동체) V(Volunteering in Christian Life, 섬김공동체) E(Evangelizing the World, 증인공동체) 1971년 지금의 숭실대 앞으로 돌아가 보자. 숭실대 정문을 지나 사당동 쪽 언덕을 넘어서면 철거민들이 자리 잡은 초라한 골짜기에 총회신학교가 있었다. 내부 공사가 마무리 되지 않은 지하 1층 지상 4층의 신학교 건물 지하에는 전깃불도 없는 기숙사가 있고 지하의 식당은 울퉁불퉁 정리되지 않은 운동장을 면하고 있었다. 당시의 신학연구원 전도사들보다 머리가 길고 황색 가방을 든 옥한흠 전도사가 운동장을 걷는 모습이 보인다. 총신 신학연구원 재학시절 서울 은평교회에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100명이었던 주일학교를 500명까지 성장시켰다. 그 후 1970년 김희보 목사의 요청으로 성도교회 사역자로 부임한 그는 인생의 분수령이 된 대학부를 맡았다. 그는 부임한 지 3년 만에 서울에서 최초로 대학부 학생 2백 명을 모아놓았다. 그는 1972년 34세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수도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2년 성도교회를 담임했던 김희보 목사가 총신대학의 학장으로 떠난 후 김성환 목사가 그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이 글을 쓰는 나는 당시 총신대 1년생으로 성도교회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면서 틈틈이 대학부를 기웃거렸다. 서울의 명문대 남녀 학생들로 그득한 교육관 2층의 대학부 집회실은 늘 그득하고 옥한흠 전도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들의 심령을 파고들었다. 대학생들은 진정 옥한흠 전도사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진지했고 뜨거웠고 밝았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모태 옥 목사는 대학생들이 기성 교회에서 빠져나가 선교단체로 모이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다. 그는 선교단체에는 있지만 기성 교회에는 없는 세 가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복음, 훈련, 비전이었다. 대학생 12명과 함께 성도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시작한 그는 3M(Campus Ministry, Business Ministry, World Ministry)의 비전을 갖고,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대학생들에게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유학, 제자훈련의 신학적 검증의 길 제자훈련에 대한 신학적 논리와 성격적 체계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옥 목사는 1975년 미국의 칼빈신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1977년 5월 칼빈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자리를 옮겨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강남은평교회 개척과 사랑의교회로의 변경 옥한흠 목사는 기성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끊기 위해 1978년 6월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그해 7월 23일 주일 오후 3시, 강남 서초동 유스호스텔 앞 3층짜리 건물 2층에서 강남은평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81년 9월 강남은평교회는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라는 말씀 안에 내포된 십자가 의미를 좋아했던 그는 ‘사랑’이란 단어에 ‘의’라는 소유격을 붙여 그만의 목회철학을 드러냈다. 그가 인도하는 예배의 찬양과 말씀을 교회가 세든 건물 밑에서 구두를 닦고 고치는 사람이 듣고 신자가 되기도 했다. 사랑의교회에서 시작한 첫 제자반은 김영순 사모 혼자만 남고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여자 제자반은 영적으로 큰 변화를 맛보았다. 옥 목사는 교회 밖의 모든 모임이나 집회 요청을 거절하고 제자훈련에 철저히 집중했다. 여자 제자반이 성공하자, 1979년 남자 제자반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옥한흠 목사는 구역장을 순장, 구역예배를 다락방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소그룹 리더인 순장은 제자훈련과 사역훈련 2년을 마친 후에 세워졌다. 또한 그는 주일예배를 통해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설교에 생명을 걸었고, 주기도문송, 세례자 간증을 활용하여 성도들이 예배 시간에 복음을 체험하도록했다. 옥한흠 목사의 복음적 설교와 제자훈련을 통해 배출된 순장들의 전도로 교인이 500여 명으로 증가하자 교회건축을 결의하고, 1985년 1월, 성전 입당예배를 드렸다. 그해 서울시 건축상 은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소음을 없애기 위해 카타콤처럼 지하로 예배실을 만든 점과 건축비가 모자라 가장 흠이 많은 불량품 적벽돌로 지은 것이 오히려 경건한 운치를 자아냈다. 십자가 대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자를 강대상 앞에 붙였다. 옥한흠 목사 조기 은퇴 발표 2001년 7월 출석교인 20000명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옥한흠 목사는 ‘65세 은퇴’를 발표한 후 후임자 선정 작업을 벌여왔다. 그는 그 배경을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교회에 젊음을 불어넣기 위해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어떻게 하면 사랑의교회가 늙지 않고 다음 세대에도 활기와 영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한때 융성했던 교회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는 적절한 때 리더십을 교체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후임을 맡게 되는 오정현 목사와의 인연에 대해 옥한흠 목사는 이렇게 밝혔다. “20여년 전 오정현 목사가 이끌던 내수동 교회 대학부를 제가 지도한 이래 긴밀한 선후배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저와 목회 철학을 공유하고 있고,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개척해서 15년 만에 미주 최대의 한인 교회로 만든 오 목사의 리더십이 사랑의교회를 계속 활기 넘치는 교회로 만들 것으로 믿습니다.” 전 세계에는 약 4000개의 한국인들이 세운 이민 교회가 있고, 그중 3000여 개가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국내의 개신교계보다 더한 열기를 보이고 있는 미국 한인교회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부근에 위치한 남가주사랑의교회이다. 지난 1988년 피아노가게 연습실을 빌려 12명의 신도와 함께 교회를 시작, 15년 만에 출석 교인 7000명의 대형 교회로 키운 사람은 오정현(47) 목사이다. 오정현 목사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82년, 신학을 공부하는 유학생 신분으로였다. 도미(渡美)한 그는 미시간의 칼빈 신학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87년 말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세웠다. 당초부터 미국에서 목회를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제 이민 교회에도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남가주사랑의교회가 짧은 기간에 미국의 100대 교회에 들어갈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신도와 이민 2세 교육에 기울인 남다른 열성이 밑받침이 됐다. 특히 오정현 목사는 예배의 열정을 살리기 위해 찬양을 잘 활용했다. 그는 그것을 위해 찬양 테이프를 500회 이상 듣고 또 들어 테이프가 풀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오 목사는 신자들을 집중적인 장기 교육을 통해 기독교 복음의 본질과 크리스찬의 바람직한 삶에 눈뜨게 하는 ‘제자 훈련’과 연말연초에 40일 동안 실시하는 ‘새벽부흥회’를 통해 지성과 영성을 함께 갖추도록 인도했다. 또 남가주사랑의교회의 신자는 새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70%나 되고 국내 교회들에 비해 남자의 참여 비율이 훨씬 높은 것이 특징이다. 옥한흠 목사의 뒤를 잇기 위해 2003년 8월 중순 남가주사랑의교회를 사임하고 귀국하는 오정현 목사는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 교회와 서양 교회의 강점을 결합하고,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꿈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오정현 목사를 통한 부흥 옥한흠 목사의 기대와 믿음이 이루어져 1978년 9명의 성도로 개척한 사랑의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어느덧 등록교인 99,000여 명에 매 주일 45,000여 명이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공동체가 되었다. 기존 강남예배당에서는 ‘소망관’ 이라는 별도의 건물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모였다. 학생들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 지상 4층으로 뿔뿔이 흩어져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마치고 나면 출입구에 위치한 2개의 좁은 계단과 2대의 엘리베이터로 겨우 겨우 오르내리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주변의 좁은 도로 역시 혼잡했다. 장년은 강남예배당 본당의 6부 예배에 16군데나 흩어져 영상으로 예배를 드려야 했다. 사랑의교회는 1978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 세우는 목회철학을 실천하는데 전심전력해 왔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랑의교회가 드린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총을 허락해 주셨다. 넘치도록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어떻게 해야 사랑의교회가 이 시대 앞에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지 기도하는 가운데, 공간부족이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새 시대 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새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새 시대 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새예배당 건축은 말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서초동 새 예배당 완성 사랑의교회는 서울 서초동에 3년 5개월만에 새 예배당 건축을 완료하고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오정현 목사는 "새 예배당 입당을 위한 감사의 열쇠"란 제목의 설교에서 "오늘부터 우리는 공간과 시간의 이동뿐만 아니라 의식의 이동까지 포함하는 전 인격적인 전환을 경험하게 되리라 믿는다. 3만여명의 성도들이 눈물의 헌금으로 예배당을 짓게 돼 감격스럽다. 수많은 고비들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 입당하는 것 자체가 새 예배를 드리는 것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더 큰 감사가 있다. 영혼의 감사를 통해 미래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이 되자"고 강조했다. 사랑의교회 예배당과 이화여대 캠퍼스 2010년 6월 건축을 시작해 3년 5개월만에 완공된 사랑의교회 새 예배당은 지하 8층부터 지상 14층까지 연면적 6만 7천여 제곱미터㎡ 약 1만 9천 7백여평이다. 참고로 2010년 통계로 이화여대는 15개 대학원 및 11개 단과대학(17개 학부, 17개 학과)이 설치되어 있으며, 재학생은 21,200여 명, 전임교원은 913명, 직원은 370여 명이다. 이화여대의 많은 건물을 제외하고 이화여대의 부속건물 가운데 하나인 이화여대캠퍼스센터ECC는 6층짜리 건물 연면적 약 7만㎡ 약 2만 3백여평이다. 그런데 사랑의교회 교인 4만5천여명이 예배드리고 교육받고 교제와 나눔의 봉사를 위한 전체 건물 크기가 북측 미션센터 8층(사역공간)과 남측 드림센터 14층(교육공간) 등 지상 2개동 건물과 지하 예배공간(워십센터)을 다 합한 연면적이 6만 7천여 제곱미터㎡ 1만 9천 7백여평이다. 그런데 학생과 교수와 직원을 다 합쳐 2만 3천여명의 이화여대의 부속건물 하나의 연면적이 약 7만㎡ 약 2만 3백여평이다. 2만 3천명의 교육을 위한 대학교의 여러 건물이 충분히 있음에도 또 지은 부속 건물 하나의 크기가 4만5천명을 위한 사랑의교회보다 3천 제곱미터㎡나 크다. 그런데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이화여대의 ‘ECC(Ewha Campus Complex)’에 대한 사회 여론은 칭찬 일색이다. 왜 이화여대는 다른 건물도 많은데 또 부속 건물을 지어 돈을 낭비한다든지 차라리 그 건물의 소요 경비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않았는지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교회 예배당의 주요 기능은 말 그대로 예배와 신앙 교육을 위한 공간의 장이지 구빈소가 아니다. 대학도 큰 대학이 있고 작은 대학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각기 능력과 형편대로 큰 교회가 있을 수 있고 작은 교회가 있을 수 있다. 지상 14층과 8층 규모의 쌍탑이 서로 양팔을 마주잡고 당기면서 중앙에 서 있는 벽돌 시계탑을 포옹하는 듯한 이미지로 설계한 김천행 집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은 디자인적으로는 성도를 안으시고, 이웃을 안으시고, 세상을 안으시는 예수님의 따뜻함을 디자인개념으로 살렸고 중앙광장에서는 세계지도를 보며 젊은이들이 세계를 품고 기도할 수 있도록 했다. 시계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33개의 참을 설치하여 예수님의 공생애를 생각하도록 했다. 새 예배당 겉면은 유리로 둘렀다. 대법원?서초경찰서?서울고등검찰청 등 각진 벽돌 건물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띈다. 유리로 장식한 지상 공간은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사용한다. 교회 건축위원회 관계자는 아이들이 높은 곳에서 사회의 중심부를 바라보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호연지기를 기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유리를 택했다고 말했다. 밖에서도 안이 잘 보이는 소재로 교회가 사회와 소통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서초새예배당의 건립목표 사랑의교회 5대 사역비전의 구현 5대 사역비전은 GLOVE로 요약되는 G(Growing in Truth, 제자공동체), L(Loving Family, 생명공동체), O(Obeying God, 예배공동체), V(Volunteering in Christian Life, 섬김공동체), (Evangelizing the World, 증인공동체)를 뜻한다. 이를 위해 설계의 방향을 소통과 개방(개방성), 효율적인 공간창출(효율성), 시대요구에 부응하는 건물(첨단성), 교회다운 건물(경건성), 아름다운 건물(디자인)로 정하였다. 사랑의교회 새예배당 현장에서 보이는 광경은 마치 청각으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같았다. 유리건물의 쌍탑은 오케스트라이며 벽돌시계탑은 마치 아름답고 역동적인 바이올린 협주곡의 선율처럼 느껴진다. 시민들이 모이는 중앙광장으로부터 6,500석의 지하교회 대공간까지 빛이 비취게 하는 광장 유리바닥과 광장바닥에 새겨진 세계지도, 이들과 어우러진 광장 조경, 높은 유리벽의 쌍탑 건물이 광장을 감싸는 것을 통해 사랑의교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교회 출석교인은 4만 5,000명이다. 1만 5,000명 이상 되는 교회가 새 예배당으로 이전 한 예를 찾을 수 없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어느 공간 하나도 그냥 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통해 이룬 결과물이다. 6,500명을 수용하는 본당은 가로 90m, 세로 45m로 장충체육관 크기다. 하지만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어 어느 좌석에서도 시선이 차단되지 않는다. 또 모든 좌석에서 강대상까지 40m 이내여서 가시거리가 확보되고, 고도의 집약된 차음과 음향장치가 가능하며, 최첨단 고효율 설비로 장소에 따라 온도차를 느끼지 못 하도록 해 쾌적함을 극대화시켰다. 광덕트(sky light)에 의한 자연채광도 도입했다. 강남예배당보다 크기는 3배 이상 크지만 더 아늑하고 일체감을 갖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양(면적)보다 질(성능과 쾌적성)적 성능을 확보 양(면적)보다 질(성능과 쾌적성)적 성능을 확보해 같은 면적이지만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면 주일학교의 경우 실안에 기둥이 없는 무주공간으로 처리해 실사용의 자유로움을 주었다. 또 각 실의 사용용도에 적합한 고도의 설비시설(난방, 냉방, 환기, 통신 등)을 집중화해 제공, 쾌적한 공간이 되게 함으로써 현재보다 더 많은 인원이 수용되도록 했다. 냉난방 기구를 천정에 부착해 바닥사용 면적을 최대한 높이는 방법도 동원됐다. 본당이 지하에 있고 많은 인원이 수용되므로 비상시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재해시 단시간에 안전하게 피난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본당을 피난복도로 둘러싸도록 해 어떤 방향으로도 피난이 용이하도록 했다. 화재시 10분 이내에 본당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계단과 출입문을 마련했다. 또한 스프링클러 등 법적 소방기준 이상으로 안전하게 시설을 구비했고 거의 대부분의 자재를 불연재로 하였다. 새예배당은 소통과 개방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유리건물(All Glass)이다. 유리건물은 빛과 조명에 의한 연출이 자유롭고 추후 첨단 신소재가 개발될 경우 변화에 가장 우수한 건물이 될 수 있다. 건물을 돋보이게 하려고 외관 장식만을 위해 설치하는 경우가 있는데 서초새예배당은 장식만을 위한 설치를 일절 배제했다. 예수님의 손을 형상화하기 위해 필요 없는 수평루버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서향과 동향 햇빛을 일부 조절해 여름철 난방부하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기능상 필요한 루버를 이용, 예수님의 안으심을 표현했다. 서초예배당은 타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반 건축물들은 대부분 지하연면적보다 지상연면적이 훨씬 크지만 서초 새예배당은 지상면적이 40%, 지하면적은 60%를 차지하는 특수한 건축물이다. 또한, 지하에 위치한 선큰가든은 지상에서부터 지하5층까지 약 30m의 수직벽이 거친 자연석으로 마감돼 자연친화적 미와 안정감을 주고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임을 고백하게 한다. 이제 서초 새예배당은 국제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이곳을 통해 수많은 생명들이 예수님 품으로 올 것을 확신하며 외부의 대소규모 행사에도 아름답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은 11월 30일 서초구 반포대로 121에 마련한 새 예배당에서 입당감사예배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섬김사역과 세계선교, 복음적 통일운동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했다. 서초역 사거리 대법원 맞은편에 위치한 사랑의교회 서초예배당은 6782㎡(2051평)의 대지에 지하 7층, 남쪽 드림센터 14층 북쪽 미션센터 8층 규모로 건축됐다. 한국 교회를 위한 공간 사랑의교회는 서초예배당을 교회만의 자산으로 묶어두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사역과 연구와 모임의 공간으로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교단의 중요한 행사 개최는 물론, 교계 엔지오(NGO) 단체들의 세미나와 모임 공간으로도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미 서울 중심에 위치해 있고 교통도 편리해 여러 단체들이 공간사용을 요청하고 있다. 오 목사는 “앞으로 사랑의교회 사역은 예수님만 기쁘게 하고, 주님만 두려워하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도록 노력하겠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기를 원한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전진하자. 주님을 찬양한다”고 말했다. 강단에 오른 오정현 목사는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HEART’비전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공간에서의 의식의 전환을 해야한다”며,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령공동체를 이루자"고 선포했다. 2008년 12월 23일 옥한흠 목사는 다음과 같은 성탄 메시지를 전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이 이번 성탄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다. 그 메시지 속에 희망이 있다. 그 희망을 알면 세상의 어떠한 형편도 우리를 절망으로 끌고 가진 못한다.” 이제 탄탄한 섬김의 전진 기지를 마련한 오정현 목사는 옥한흠 목사의 뒤를 이어 제자 훈련의 국제화와 복음적 평화통일의 마중물이 되기 위해 뛸 것이다.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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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 서초 새 성전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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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달리기 _ 당뇨병의 특효약 근육강화
- 수련의 시절 당뇨병 치료의 명의로 소문나신 교수님의 진료실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 때만해도 대형병원이 많지 않기는 했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한두 달에 한 번씩 선생님을 뵙기 위해 몰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진료실 앞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교수님 옆에서 환자들 혈압을 재면서 틈틈이 교수님의 비방(秘方)이 무엇일까 엿보았는데, 쓰시는 약은 일반적인 당뇨약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기야 비방이라는 것이 실제 있겠는가. 약이야 거기서 거기지.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교수님께서 환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환자들의 종아리를 일일이 주물러 보시는 것이었다. 여자 환자들의 다리를 조물조물 주무르실 때는 약간 민망한 감도 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중요한 진료의 한 과정이었다. 그것은 환자의 다리 근육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근육은 혈당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 경제 활동에 있어 은행 예금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밥을 먹고 혈액으로 흡수된 포도당은 바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여분의 포도당은 근육에 흡수되어 있다가 나중에 활동 시 필요하면 혈액으로 방출되어 사용된다. 근육이 부족하다는 것은 우리가 돈을 벌어 예금하지 않고 바로바로 쓰는 것과 같다. 있을 때 흥청망청 쓰거나 버리다가 정작 필요할 때 돈이 없어 쩔쩔 매는 상황인 것이다. 근육량이 적은 당뇨 환자는 많이 먹지 않아도 식사 후 혈당이 바로 확 올라가고 높은 혈당이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반대로 식사를 거르거나 활동을 좀 과하게하면 당뇨약의 효과로 인해 혈당이 급격히 떨어지는 저혈당 증세도 자주 올 수 있다. 헬스클럽 같은 곳에 가 보면 체성분 분석이란 것을 해준다. 내 몸에 있는 근육과 지방량을 분석해서 좀 더 좋은 몸을 만들기 위한 조언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일일이 환자가 방문할 때마다 체성분 분석을 하기는 어려운데, 쉽게 몸의 근육량을 측정해 보는 방법이 종아리를 만져 보는 것이다. 우리 몸 근육의 많은 부분은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같은 하체에 많이 몰려있다. 피부가 얇고 지방이 적은 종아리 부분을 만져 보면 대략적인 체 근육량을 알아볼 수 있다. 그냥 운동 많이 하라고 말로만 하지 않고, 일일이 종아리를 만져 보시면서 “왜 이렇게 약해. 운동을 많이 안했나보네. 많이 걸어요.”하시던 선생님의 진료 방식은 굉장히 합리적이고 환자에게 운동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 걷는 것만으로도 혈당을 낮출 수 있다.필자의 환자분 중 60대 후반 여성분이 있었다. 당뇨병에 걸린 지 20년이 되었고, 여러 약제를 사용해 보았지만 몇 달 이상 혈당이 적절 수준으로 조절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췌장에서 인슐린을 만드는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고 보고 인슐린 주사 요법을 권유한다. 하지만 환자 분은 완고하게 인슐린 치료를 거부하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통해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갑자기 생활 습관을 현저하게 개선시켜서 혈당을 떨어뜨리는 것이 실제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부 못하던 학생이 갑자기 뜻한 바가 있어 공부에 열중해 성적이 비약적으로 오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경우가 매우 드문 것처럼. 그런데 3개월 정도 지난 후 그 여자 환자분의 혈당은 식전, 식후 평균 100mg/dl 정도씩 떨어졌고 적절 수준의 혈당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비결을 물어보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한 두 시간씩 근처 학교 운동장을 돌았어요. 직장 다녀와서 피곤해 쓰러질 것 같아도 걸었지요. 지난번 태풍 왔을 때는 우산 쓰고 죽기 살기로 걸었구요. 무릎 관절이 아파서 운동하고 나면 눈물이 날 정도였는데, 그래도 계속 걷다보니 적응이 되었어요.” 그 분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먹는 약으로 혈당 잘 조절되고 있고 복용하는 약의 개수도 줄였다. 종아리 근육은 나날이 탐스럽게 불어나고 단단해졌다. TV를 보다보면 인기 있는 걸그룹들의 늘씬한 다리를 보고 감탄한다. 하지만 진료실에서 그런 다리를 보면 잔소리가 튀어나온다. 필자는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투석 치료를 받는 환자분들을 많이 접하다보니 혈당 조절이 안 되는 당뇨 환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래서인지 어르신들 종아리를 주물러 보고 조선무 같은 탕탕한 알통이 잡히면 뿌듯한 느낌마저 든다. 당뇨병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간이 없다면 시간을 만들어서 걸어보자. 혈당이 신통방통하게 떨어지고 건강에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지속적으로 산소 마시는 달리기 신진대사 활성화, 혈압 떨어뜨려그러나 걷기를 더 오래, 자주 하면 달리기와 같은 효과 내지 않을까?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는 '걷기' 꾸준히 걷고, 시간 나면 뛰어라 우리는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운동하라는 말을 숱하게 들어왔다. 달리기가 건강에 최고로 좋은 운동으로 등장한 것은 1970년대였다. 지속적으로 산소를 들이마시며 하는 운동 효과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나서부터다. 역기를 드는 것처럼 단박에 용을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강도는 낮지만 산소를 계속 소모하는 운동이 신진대사를 활성화해 과잉 축적된 칼로리를 태우고 혈압을 효과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달리라는 권고가 나왔다. 의학은 항상 과학적 규범을 만들고 이에 따르게 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한 번에 최소 30분 이상 진땀나게 뛰라는 충고가 사람들 귀에 인이 박였다. 하지만 미국 하버드 의대 공중보건 분야의 일부 연구진은 달리기가 현대인에게 최적(最適)의 건강 권고안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러고는 지난 30여 년간 걷기와 달리기를 놓고 어느 게 더 좋은지 논쟁을 벌여 왔다. 달리기가 심장 건강에 좋은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지만 걷기만으로도 달리기의 효과를 낼 수 있지 않느냐라는 궁금증에서 논쟁은 출발한다. 운동 효과 산출은 운동 강도와 지속 시간, 빈도에 의해 결정된다. 걷기가 달리기의 세기를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달리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걷고, 더 자주 걷는다면 달리기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규모 분석이 이뤄졌다. 하버드대에는 하버드 졸업생 10만여명과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 10만여명의 건강 실험 풀(pool)이 있다. 일정 그룹을 반으로 나눠 한쪽에만 특정 조건을 주어 몇 년간 살아가게 한 후 그렇지 않은 그룹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건강에 좋은지를 알아내는 연구 시스템이다. 하버드 졸업생 1만200여명을 대상으로 20년간 이뤄진 연구에서 일주일에 9마일, 즉 약 1만4500m를 걸은 사람은 주로 앉아서 생활한 사람보다 사망률이 22%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달리기의 효과와 유사했다. 논쟁에는 영국 런던대학이 지난 27년간 나온 걷기 효과 논문 4295개를 분석한 연구도 인용됐다. 46만명을 11년 동안 관찰하니 많이 걸은 사람에게서 심혈관 질병 위험도가 31% 줄고, 사망률은 32% 감소했다. 그들은 시속 3~4㎞ 속도로 일주일에 약 9000m를 걸었다. 중년에 평상시 생활을 반복하면 1년에 약 1㎏씩 체중이 늘어난다. 그런데 하루 걸은 시간이 총 30분이 넘으면 1년에 0.5㎏이 줄어든다는 연구도 나왔다. 이런 결과들이 체질마다 다를 수 있겠다 싶어서 하버드대는 쌍둥이에 대한 연구를 분석했다. 1만6000명의 쌍둥이를 대상으로 20년간 한 달에 여섯 번, 한 번에 30분 이상 걷게 했더니 거의 걷지 않고 산 쌍둥이 형제보다 사망률이 56%나 줄었다. 걷기 효과는 유전적 체질이 아니라 습관에 있다는 얘기였다. 달리기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최대 심박 수의 약 75%에 이르러야 최적 운동 효과를 낸다. 1분당 최대 심박 수는 통상 220회에서 자기 나이를 뺀 값이다. 나이가 50세면 170회가 최대 심박 수다. 그 정도까지 달리려면 워밍 업(warming-up) 시간이 필요하다. 속도를 시속 7㎞ 이상 내어야 하니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 하고, 운동화도 신어야 한다. 장소에 제한도 생긴다. 뛰고 나면 땀이 나니 쿨 다운(cool-down)이 필요하고 샤워도 해야 한다. 한 번에 30분을 달리려면 최소 1시간은 투자해야 한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권고안을 지키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달리기를 하라는 권고안은 많은 현대인에게 죄의식을 심어줬다. 또 달릴 때 한쪽 무릎에 실리는 하중은 체중의 3배다. 이 때문에 운동 부상이 발생할 확률이 걷기보다 10~20배 높게 나온다. 반면 걷기는 참으로 편한 운동이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 걸을 시간만큼만 시간을 투자하면 된다. 별도의 복장도 필요 없다. 달리는 시간보다 1.5배에서 2배 더 오래 걸으면 운동 효과도 비슷하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활을 감안한 가장 적합한 건강 교시(敎示)안은 걷기라는 것이 하버드대의 의견이다. 요즘 현대인의 삶은 포인트 생활이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포인트, 피자 한 판을 시켜도 쿠폰이 붙는다. 신용카드와 항공여행은 말할 것도 없다. 걷기에도 포인트가 있다. 하루 10분씩 세 번 걸으면 30분 효과에 버금간다. 일상의 작은 실천이 모여 누적 효과를 내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미러 뉴론(mirror neuron·거울신경계)'이라는 것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는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따라서 한다. 술자리에서 옆 사람이 맥주잔을 들면 나도 모르게 잔을 들게 되는 배경이다. 당신이 걸으면 자녀도 걷고, 배우자도 걷는다. 심지어 애완견도 걷는다. 걷고, 시간이 나면 뛰어라. 당신의 신발이 유전자보다 당신의 수명을 결정하는 더 강력한 지표다. 내과전문의 강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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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와 달리기 _ 당뇨병의 특효약 근육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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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아들 박형만 성경필사조각가
- 내년 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 필사전시회를여는 위로의 아들 박형만 15년 선禪과 탁마琢磨를 수행한 불도이면서 아내의 권유로 어쩌다 들르던 교회에서 다메섹에서의 사울처럼 예수를 만난 건축가 박형만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삶의 기적이라고 강조한다. 못을 박은 십자가 조각과 나무판 성경 필사 작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을 전하는 박형만은 말한다. 내 조각은 스스로의 죄를 향한 못질이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과 위로이다. 그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성경공부를 하다 말씀에 취했다.그는 묵상한 말씀을 노트에 기록하다 천생 예술가이고 디자이너이니까 나무에 새길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2시간 고요한 새벽 맑은 정신일 때 오직 말씀을 나무판에 필사했다.완성품은 더 이상 글씨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 하나의 작품이었다. 더 나아가그에게 필사는 단순한 성경쓰기가 아니라 성경의 뜻을 시각적으로 정리하여 다듬어 보는 행위였다. 성경을 원문으로 보고 싶어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다 모음이 없어 받침이 없는 전통 히브리어 글자체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나름의 히브리어 글자체를 개발했다. 박형만 필사 조각가는 기도 가운데 이스라엘 본토에 가서 유대인들에게 토라 모세 오경을 전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2년반 동안 히브리어 토라를 가로 1.3m 세로 3.3m 나무에 새긴 필사 조각이 완성되어 내년 봄 예루살렘 나들이를 기다리고 있다. 성경필사조각가 박형만 010-9046-0946 후원계좌 / 농협 369-02-129114 201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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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아들 박형만 성경필사조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