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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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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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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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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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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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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리틀메시지_ 열왕기상1Kings
    열왕기상1Kings과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한 권이었다. 열왕기서는 이름 그대로 솔로몬부터 시드기야까지 유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열왕기서의 사건이 시작될 때 나라는 하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난 뒤 두 나라로 나뉘었다. 그 뒤 두 왕국은 강대국에 망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잡혀갔다. 남 유다 백성은 바빌론에 잡혀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경고대로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와 훈육뿐이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요 한 장 속에 _권영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웠다. 한 담요를 덮고 나란히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고 아들은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아들의 발을 덮는다. 아버지는 평생을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남몰래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거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진실을 모르니 늘 아버지가 어렵고 섭섭하다. 이렇듯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려고 마음을 다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치욕과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죄였다. 솔로몬은 외국의 우상들을 섬겼고 백성은 그를 따랐다. 고작 한 세대 만에 그 나라가 쇠퇴하고 분열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경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이 있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그들의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처럼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일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한 모습에 용서의 기회를 주시듯 늘 용서와 축복의 기회를 엿보신다. 2024-03-17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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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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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큐티 5 하늘
    하늘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1:6-8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년 12월 30일-1945년 2월 16일)는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詩)'(1948)에 수록된 머리말 격인 ‘서시’(序詩)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노래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에세이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에서 시인 소강석 목사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애처롭다고 했다. 시인 윤동주가 ‘하늘을 우러러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다짐한 그 하늘은 무엇일까. 하늘은 종종 사람이 땅에서 위로 올려다볼 때 보이는 곳으로 정의된다. 비록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봐 왔지만 하늘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늘'의 개념은 지구의 땅 위에서 적용되기 때문에 지평선 위의 대기, 또는 행성과 행성 위에 붙어있는 물체들의 보이는 표면 위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 천문학의 영역에서 하늘은 천구(天球)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태양, 별, 행성, 달이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상의 돔(dome)이다. 그리고 그것은 별자리라고 불리는 구역으로 나뉜다. 태초에 무(無)에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운 우주에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다. 태초에 우주에 빛이 비추자 물 가운데 궁창(穹蒼 firmament)이 드러났다. 유대교의 세계 구분의 하나인 하늘, 원래 금속판을 두드려 얇게 늘려 편 것을 의미하는 말로 별들과 행성들이 매달려 있는 둥근 천장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나 강 등의 아래의 물과 수증기로 올라가 비나 눈 등으로 내릴 위의 물을 구분하는 하늘이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 사람들의 하늘은 다르다. 영국의 설교자들의 왕자(Prince of Preachers) 스펄젼(Charles Haddon Spurgeon 1834. 6. 19 - 1892. 1. 31) 목사는 어느 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목사 앤드류 보나르(Andrew Alexander Bonar 1810. 5. 29 - 1892. 12. 30)의 저서 레위기 주석(Commentary on Leviticus 1846) 한 권을 받았다. 출생은 24년 차이지만 사망은 같은 해인 스펄젼은 너무 고마워서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그 책을 보나르에게 돌려보냈다. “보나르 박사님 이 책에 당신의 서명과 사진을 동봉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보나르 박사는 다음과 같은 글과 함께 그 책을 스펼젼 목사에게 돌려보냈다. “친애하는 스펄젼 목사님 나의 서명과 사진과 함께 이 책을 돌려보냅니다. 목사님이 좀 더 기다려주신다면 훨씬 더 나은 모습(likeness)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왜냐면 내가 주님과 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we shall be like him; for we shall see him as he is 요1 3:2).” 1507년에 성직자가 된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는 죽기 전날 밤 정신이 말짱했고 식탁에 친구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죽어 하늘에서 서로 만나면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확고하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그 이유는 이랬다. “아담은 이브를 보는 순간 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녀가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도 다음 생에서 그렇게 될 거야.”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좀 더 깊이 있게 알고 삶의 지혜가 생겨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이다. 다음 세대에게 좋은 것을 남겨주고 나보다 앞선 이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삶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런 연결 고리 안에 살아간다. 사람들이 흔히 말한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믿음으로 좋은 것을 감사하게 먹으면 좋은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행동을 하게 된다. 좋은 행동이 이어지면 좋은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좋은 습관으로 오랜 시간을 사는 사람은 얼굴에 그것들이 쌓인다. 생각과 얼굴에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일상을 정성으로 가꾸고 싶다. 우리가 먹는 것, 우리가 읽는 책,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우리가 남기는 자취들, 우리가 만드는 생각, 우리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의 경험... 모든 것은 어디론가 소멸되지 않고 바로 우리 얼굴에 쌓일 것이다. 그것들이 욕심과 심술의 모습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늘이라 칭하신 물 위의 궁창이나 물 아래의 궁창이고 싶다. 주석 창 1:6-8. 둘째 날 the second day 6절 궁창 firmament 불가타 성서(the Vulgate 4세기에 번역된 라틴어역 성서)는 궁창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키아’(rakia)를 피르마멘툼(firmamentum)으로 번역했다. 그것을 킹제임스역에서 영어 퍼머먼트(firmament)로 번역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빛이 비추자 대기가 둘러싼 천체의 모양이 관찰자에게 아치형 창공(the vault of heaven)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단어는 개역성경에서 태초의 축축한 구름들의 무게를 지탱하는 넓고 푸른 하늘 궁창(穹蒼 firmament)으로 번역되었다. 궁창은 하늘(sky)이고 천공(天空 heaven)의 궁형(弓形 arch)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구 위에 증기 형태로 물들 사이에 뜨게 한 팽창(expanse) 즉 광활한 공간이다. 대기(atmosphere)의 창조로 지구 표면에 덮인 물의 더 가벼운 거의 반은 보이는 초자연적으로 하늘에 끌어올려 뜨게 하고 반면에 더 크고 무거운 나머지 반의 덩어리는 아래에 남아있게 했다. 따라서 공기가 ‘물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waters) 있게 되었다. 즉 물들이 갈라지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증기 덮개(vapor canopy)였을 것이다. 이것이 ‘온실 효과’(greenhouse effect)로 지구의 열을 막아주고 동일한 열대 기후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 위의 이 덮개가 노아의 대홍수 때 내린 비로 뚫렸을 것이다. +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창 7:11-12 이것이 창세기 5장에서의 장수(長壽)에 더해 창세기 6장-9장에서의 홍수의 물 근원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하늘(Heaven)이라 부르셨다. '그대로 되니라 and it was so'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이행(履行)이 곧바로 따랐다는 것을 표현하는 관용어이다. +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시 33:9 8절 하늘 Heaven 성경에서 하늘(Heaven 히브리어 ‘shamaim’)은 하나님의 거처(the habitation of God)로 표현된다. 비유적인 표현으로 성전(Temple)이 하늘과 대비되어 서술된다. +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왕상 8:27 '저녁이 되며 And the evening' 둘째 날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saw that it was good)는 말이 생략되었다. 이에 대해 중세의 히브리어 성경 주석가 유대교 랍비 라쉬(Rashi 1040. 2. 22 - 1105. 7. 13)는 이렇게 해석했다. 둘째 날에 시작한 일(9절과 10절에 이어진)이 셋째 날의 중간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에 ‘좋았다’(good)고 완전하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The Old Testament cosmos. QT 되새김 A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하는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는가(admit). B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라는 이 말씀을 진리라고 믿는가(believe). C 성경에서 ‘하늘’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라(consider). D 둘째 날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빠진 사실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궁창을 만드신 하나님, 당신이 계시는 하늘을 사모하는 소망을 주소서. 20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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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교회사 1_ 교회의 시작
    An Eastern Roman mosaic showing a basilica with towers, mounted with Christian crosses, 5th century, Louvre. 교회의 시작 교회는 우리 영혼의 집이다. 어렸을 적 다니던 교회들은 대개 언덕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문 안에 있는 교회들을 빼놓고 서울 변두리에 있는 교회들은 시골 교회들과 다를 바 없이 동네를 굽어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그곳에 가면 톱밥 난로에서 비집고 나오는 따사로움이 있었고, 교회 전도사님이나 선생님의 벙긋거리는 입에서 술술 나오는 이야기의 신비로움과 즐거움이 넘실거렸다. 아무런 조건 없이 그냥 주는 군침 도는 과자봉지가 있었고, 가슴설레는 연극연습과 공연이 널려있는 잔치가 있었다. 더운 여름이면 교회만큼 서늘하고 재미진 곳이 있었을까 싶다. 왜냐면 교회만치 여러 개의 큰 창문과 높은 천정을 가진 건물을 1905년대 말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꼬마들이 어디 감히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어디서 그렇게 눈치 없이 킥킥거리고, 소리 지르고, 터럭만큼의 겁도 없이 자유스럽게 선생님을 대하고 같이 놀 수 있었을까? 이제는 도시, 마을, 어느 곳을 가도 교회의 뾰족한 탑이나 네모진 탑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곳에도, 복면을 한 젊은이들이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곳에도, 로마 병정의 모습으로 방패와 방망이를 쥐고 돌격을 외치는 곳에도, 조금만 눈을 들어보면 십자가 달린 교회들을 너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집이며 어머니인 교회는 무엇인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으로부터 이천 년 전,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로 팔레스틴에서 태어나셨다. 신이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 인간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설흔 살이 되셨을 때 옛날 유대 선지자들 같은 종교 지도자가 한 사람 광야에 나타났다. 그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가 곧 올테니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라고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 사람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다고 해서 세례 요한이라고 불리었다.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 뒤 예수님은 팔레스틴 북쪽 지역인 갈릴리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셨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아주 즐겁게 들었다. 왜냐면 예수님은 괜스레 엄하고 복잡하게 발전된 유대교 율법의 사소한 규칙을 버리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짊어진 종교의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교를 보다 단순하고 느끼기 쉽게 만드셨다. 그렇다고 해서 식은 죽 먹듯 아주 쉽게 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는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다. 많은 군중들이 그를 따랐고 그의 말씀에 기쁘게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예수님을 사울처럼 왕으로 삼았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주위에 적은 무리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사람을 낚는 어부들’을 삼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다. 그 제자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교회’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클레시아(ecclesia)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헬라어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이태리어의 키에자(chiesa)와 프랑스어의 에글리즈(eglise)가 나왔다. 영어의 처치(church)는 스코틀랜드어의 커크(kirk)와 독일어의 키르크흐(kirche)처럼 ‘주님의 집(the lord’s)’을 나타내는 또 다른 헬라어 퀴리아콘(kyriakon)에서 나왔다. 2020-05-09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5-09
  • 더굳큐티 4 빛의 시작
    Accretion disk 빛의 시작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3-5 1918년 전 세계 인구는 4억5000만에서 3억5000만 명으로 1억 명이 줄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을 고려하더라도 인구가 한 해에 1억 명이나 줄어든 것은 이 해에 전 세계적으로 스페인 독감이 대유행했기 때문이다.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전 세계 사망자의 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2000만∼5000만 명, 많게는 1억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에게 가장 두려웠던 전염병인 흑사병이 기승을 부렸던 1347~1351년의 5년 동안 2500만 명이 사망한 것과 비교해도 스페인 독감을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달수 없다. 어떤 전염병이나 전쟁, 기아도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실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소설의 모태랄 수 있는 보카치오(G. Boccaccio)의 ‘데카메론’은 14세기 유럽 전역을 강타한 페스트 역병에 맞닥뜨린 삶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의 소산이다. 당시 페스트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규범을 와해시키고 이후 사회 문화적 대 변화를 몰고 온 인류가 경험한 전대미문의 대재앙이였다. 까뮈(Camut)도 이를 소재로 ‘페스트’라는 소설을 쓰고 이로 인해 모두가 이른바 ‘사회적 격리’에 처한 황폐한 도시민의 절규와 연대감을 절절히 토로하고 있다. 이처럼 인류는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드는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취약한 생명 적 한계성을 수시로 드러내 왔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자연의 생태계는 참으로 오묘한 질서 체계 위에 있다. 결핵과 같은 질병들은 인구가 밀집한 도시지역에서 떠나지 않았고 런던과 같은 도시에서는 전염성 질병에 의한 사망률이 하도 높아서 1900년 이전까지는 꾸준한 인구의 유입이 없이는 도시의 인구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20세기 초반에 전염병의 원인이 밝혀지면서 5천 년 전, 도시가 생겨난 이후 처음으로 도시를 유지할 인구를 스스로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14세기에는 흑사병이 발생하자 도시의 귀족들이 오염된 환경을 피해 도시를 비우면서 도시가 기능을 잃었지만, 21세기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자 공황에 빠진 도시민들의 사재기와 국제적인 물류시스템의 순환에 문제가 생기면서 도시가 기능을 상실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어느 작은 지역의 문제로도 전 세계 도시의 기능이 정상 작동을 멈출 수 있다는 세계화를 전 세계 시민들이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도시가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고 우리나라는 무려 80% 이상의 인구가 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세계적 공황 상태에서 어둡고 긴 시련의 터널을 고통스럽게 통과 중이다. 아무래도 기적이라도 일어나야 될 판국으로 잔인한 혼돈의 양상들이 온통 지구촌을 흔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끝이 있는 법이여서 이 같은 생존을 위한 고투에 종언을 고할 날도 머지않으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태초의 우주는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웠다. 그때 하나님의 신은 물에 덮인 우주의 수면을 알을 품은 닭처럼 덮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어둠에 쌓여 있던 지구가 환해졌다. 빛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양이나 불빛은 그 자체가 빛의 원천(광원)이다. 광원이 아닌 다른 사물에서 산란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광원에서 나온 빛이 우리 눈에 닿기 때문이다. 광원은 자연광과 인조광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광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광원에서 나온다. 이러한 광원에는 태양과 별이 있다. 인조광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광원에서 나온다. 보통 빛은 호수 위를 전파해가는 수면파와 같은 파동이라고 설명한다. 또 빛은 광자라고 하는 입자로 설명하기도 한다. 빛을 파동으로 설명하든 입자로 설명하든 두 경우 모든 빛이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빛의 속력을 측정하려 한 사람 중에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다. 갈릴레이는 약 1k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등불을 가지고 상대방의 등불이 보이면 바로 등불을 열게 하는 방법으로 그 시간차를 통해 광속을 측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는 빛이 왕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10만분의 1초 정도로 매우 짧아 속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여러 실험을 통해 정의된 빛의 속력(speed of light) 또는 광속은 진공에서 1초에 대략 30만 킬로미터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 B.C. 274년 ~ B.C. 196년)가 인류 최초로 측정한 지름 4만 킬로미터의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30만 킬로미터 거리를 1초에 도달하는 매우 빠른 속력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북반구에서 해가 가장 높게 올라오는 날인 ‘하지’에 시에네(아스완) 지역 한 우물에 주목했다. 그 우물을 들여다보면 해가 보였다. 태양이 머리 위에 90도 수직으로 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같은 날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세워놓은 막대기에는 그림자가 생겼다. 두 도시는 약 800km 가량 떨어져 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현상에 주목했다. 이렇다 할 첨단 장비나 도구는 없었지만 그는 두 가지 가정을 통해 지구 둘레의 길이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태양의 빛줄기들은 지구로 평행하게 도달한다’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지구는 완벽한 구 형태’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막대의 그림자와 막대가 이루는 각의 크기를 측정했다. 막대와 그림자 끝이 이루는 각의 크기는 7.2도였다. 이는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가 지구 중심으로부터 이루는 각의 크기도 7.2도라는 말이다. 360도의 1/50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의 거리가 약 800km일 때 지구의 둘레는 50배인 약 40,000km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는 현재 미항공우주국이 명시한 지구 둘레 40,030km와 비교해도 오차가 크지 않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비밀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두뇌로 발견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데려오시는 짐승들의 이름을 맞춘 것처럼.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 2:19-20 주석 창 1:3-5. 첫째 날 THE FIRST DAY.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하셨다’라는 뜻의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표현하는 최초의 간결한 관용 표현이다. 원래 '말씀하시되'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고 '가로되'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개역성경은 예스러운 ‘가라사대’와 ‘가로되’를 사용한다. 개정성경은 이 말을 모두 ‘이르시되’나 ‘말씀하시되’로 고쳤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33:6 By the word of the LORD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host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성경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뜻하셨다(willed), 포고하셨다(decreed), 지명하셨다(appointed)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뜻(determining will)은 모든 경우 즉각적인 결과가 따랐다.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장엄한 사실을 표현하는 최고의 단순한 구절. 태양에서 나온 것과 다른 이 빛이 깊음(the deep)을 덮고 있는 흑암(darkness)을 깨뜨린다. 그런데 창조의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생긴 이 빛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케케묵은 물음에 대해 성운설(the nebular theory) 등 여러 가설이나 과학적 추론이 있지만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는 성경 해석의 제일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벗어나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시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해 성경은 말씀한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하시자 바로 나타난 최초의 이 빛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구 밖의 어떤 신비한 빛의 원천에서 왔을 것이다. 4절 좋았더라 that it was good 창조주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 등에서 반복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good)는 말은 미학적인 판단(aesthetic judgment)보다는 창조의 순결한 선함(the moral goodness of Creation)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뜻의 일치와 목적을 표현한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divided the light from darkness' 지구가 그 축의 둘레를 날마다 도는 것으로 생기는 낮과 밤의 교체나 연속을 의미하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렇듯 하나님은 나누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 땅과 물,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등을 나누셨다. 이 나눔의 원리가 성경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우르를 나누셨고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을 나누셨고 그의 교회와 세상을 나누셨다.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4-16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의 백성이 모든 더러운 것들과 나누어지고 구별되기를 바라신다.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 6:14;7:1 5절 칭하시니라 God called ‘빛을 낮이라 칭하신’ 하나님은 인간 생활에서 빛의 의의(意義)를 정의(定義)하신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 중심이고 그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신 행위는 창조에 대한 그의 주권을 나타내신다. 인간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 어떤 인물이나 어떤 사물에 대해 이름을 정하는 것은 주권의 표시이다. 르우벤 자손은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뒤 그 도시들의 이름을 바꿨다. +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고쳤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 민 32:38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도 유다 왕을 격파한 뒤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왕하 23:34 '저녁과 아침 the evening and the morning' 이 구절은 두 요소 즉 낮과 밤이 분명하게 결정하는 말 그대로 자연적인 하루(a natural day)를 의미한다. 그리고 창세기 저자 모세(Moses)는 하루의 구분을 오늘날 우리가 하듯이 하루를 낮과 밤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 즉 해넘이에서 해돋이까지(from sunset to sunrise)로 생각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창조의 시작을 아침으로 표시하고 창조의 마감을 저녁으로 표시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날 the first day' ‘첫째 날’에서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 욤(yom)은 창조의 날을 서술하는 5절 8절 13절 19절 23절 31절 등에서의 그 단어의 사용은 별문제로 하고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최소한 네 가지 방식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1) 창세기 1장 14절 16절 18절 등에서의 야간(night) 밤에 대비되는 12시간의 주간(晝間 daytime)을 나타낸다. (2) 창세기 1장 14절에서 24시간의 태양일(solar day)을 나타낸다. (3) 창세기 1장 5절에서 첫째 날 ‘빛’의 창조로 시작된 빛의 기간(period of light)을 나타낸다. (4) 창세기 2장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의 24시간 태양일로 이루어진 창조의 전체 기간 6일을 나타낸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문자적인 6일 엿새에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First Day of Creation (from the 1493 Nuremberg Chronicle) QT 되새김 A 성경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뜻하셨다(willed), 포고하셨다(decreed), 지명하셨다(appointed) 등을 의미한다는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는가(admit). B 혼돈과 흑암이 가득한 지구에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다는 사실을 진리라고 믿는가(believe). C 이 빛이 깊음(the deep)을 덮고 있는 흑암(darkness)을 깨뜨리는데 창조의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생긴 이 빛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보라(consider). D 혼돈과 흑암을 깨뜨린 이 말씀의 빛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빛으로 세상을 밝히신 하나님이시여 나의 혼돈하고 어두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춰주소서. 2020-05-08
    • G.QT
    • G.QT
    2020-05-08
  • 더굳큐티 3 혼돈의 시작
    Galactic Cntr full cropped 혼돈의 시작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영국의 소설가이고 시인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1885년 9월 11일-1930년 3월 2일)의 ‘시에서의 혼돈’이라는 글이 있다. 해리 크로스비의 시집 ‘태양 마차’에 붙인 서문이었다. ... 시의 본질적 성질은 그것이 새로운 주목의 노력을 한다는 것, 그리고 알려진 세계 내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과 꽃은 모두 늘 물결치는 기묘한 혼돈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익숙해진 혼돈을 우리는 우주(cosmos)라고 부른다. 우리를 구성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적 혼돈을 우리는 의식, 정신 그리고 심지어는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혼돈이다. 비전(vision)에 의하여 밝아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는. 마치 무지개가 폭풍을 밝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듯이. 그런데 무지개처럼 비전도 사라진다. 인간은 혼돈 속에서 살 수 없다. 동물은 그럴 수 있다. 동물에게는 모든 것이 혼돈이다. 다만 혼돈의 물결 내에서 반복되는 몇몇의 움직임과 양상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만족해한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을 비전으로 감싸야하며, 외면적인 형태와 안정성과 고정성의 집을 지어야 한다. 혼돈에 대한 공포로 인간은 처음에는 자신과 영원한 소용돌이 사이에 우산을 펴 세운다. 그런 다음에 인간은 우산의 안쪽을 창공처럼 색칠한다. 그리고 우산 아래서 돌아다니고 살다가 죽는다. 우산은 후손에게 전해져서 둥근 천장이 되고, 인간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침내 지붕은 더 이상 우리를 속이지 못한다. 그것은 색칠한 회반죽이다. 인간이 그동안 보여준 모든 솜씨도 우리를 속이지는 못할 것이다. 단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든 베토벤이든 휘트먼이든. 보라! 천장의 회반죽에 칠해져있다. 아시시(Assissi)의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시스처럼. 놀랍게도 허공처럼, 새들이 나르는 공간처럼, 많은 사물의 혼돈처럼. 부분적으로는 프레스코가 퇴색하였기에.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 교회를 나와서 자연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서 기쁘다... 그러면 이 중대한 때에 시인은 어떠한가. 시인은 인류의 내적 욕구를 드러낸다. 무엇을 드러내는가. 혼돈에 대한 욕구와 혼돈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혼돈에 대한 욕구가 시의 호흡(breath)이다. 혼돈에 대한 공포는 다채롭게 펼쳐지는 형식과 기법들에 들어있다. 시는 단어들로 만들어진다고들 말한다. 시인은 소리와 이미지의 방울들을 불어서 만드는데 이 방울들은 곧 그것들을 채우고 있는 혼돈에 대한 갈망의 호흡으로 터진다... 광부의 아들 시인 로렌스가 ‘시는 혼돈에 대한 갈망의 호흡’이라는 혼돈(chaos)은 은하계(universe) 또는 질서와 조화의 구현으로서의 우주(cosmos) 창조 이전의 진공 상태(void state)를 말한다. 그리스어 카오스(chaos)는 ‘광대한 진공’(vast void), ‘공백’(chasm), ‘끝없이 깊은 구렁’(abyss 深淵) 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기의 팽창 즉 공간(space)을 의미할 수도 있다. 혼돈은 창세기 1:2의 ‘깊음’(abyss 深淵)이라는 용어와 연관이 있다. 그 용어는 창조 이전의 비존재(a state of non-being)의 상태나 형체가 없는 상태(a formless state)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C. Westermann, Genesis, Kapitel 1-11, Neukirchen-Vluyn, 1974, 3rd ed. 1983.).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수면(the face of the waters)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수면’은 ‘물속의 혼돈’(watery chaos)과 같은 우주의 초기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Guthrie, W.K.C.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ume 1, The Earlier Presocratics and the Pythagore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59, 60, 83). 그리스어 구약성경 70인역 성경(The Septuagint)은 창조의 본문에서 ‘혼돈’(chaos)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미가서 1:6(‘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과 스가랴 14:4(‘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에서 ‘갈라진 틈’(cleft), ‘골짜기’(gorge), ‘깊은 구렁’(chasm)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4세기에 번역된 라틴어역 불가타 성서(The Vulgate)는 누가복음 16:26(‘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에서 혼돈을 하늘과 지옥 사이의 ‘큰 구렁’(great gulf)으로 번역한다. 태초의 혼돈한 우주의 지극히 작은 행성 지구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주석 2절 땅 the earth 땅으로 번역한 지구(地球, Earth)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행성이며, 엷은 대기층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형 행성 가운데 가장 크다. 지구는 달을 위성으로 둔다. 지구의 중력은 우주의 다른 물체, 특히 태양과 지구의 유일한 자연위성인 달과 상호작용한다.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 작용으로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힘에 의해 해면(海面)이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는 조석(潮汐) 현상이 발생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거리는 약 1억 5000만 킬로미터이다. 지구는 완전한 구(球)가 아닌 회전타원체에 가깝다. 태양은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가스가 뭉쳐 이뤄진 거대한 공이라 할 수 있다. 지구만 한 행성이 100만 개도 넘게 들어갈 수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이 지구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8분. 그런데 태양이 보내는 빛에는 열도 함께 있다. 촛불에 손을 가까이 대면 촛불의 열을 받아 손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햇빛이 아침에 우리 이불 위를 비출 땐 태양의 열도 이불 위에 같이 와서 따뜻해지는 것이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without form, and void 그러나 태초의 그 지구는 형태(form)가 없이 혼돈(confusion)했고 텅 비어(void) 공허(emptiness)했다. 이사야 34:11에 “당아(cormorant 물새 종류)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이라고 표현한 것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설명되지 않는 시기에 진동하고 쪼개지고 있던 이 지구는 혼돈의 상태에서부터 현재 구조의 세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어둡고 물속에 잠긴 황무지(watery waste)였을 것이다. 흑암 darkness 흑암이 언제나 악의 상징인 것만은 아니다. +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시 104:19-20 본문에서의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다. 깊음 the deep 깊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홈(tehom)은 깊은 연못 심연(深淵 abyss)을 의미한다. 그 깊음은 태초의 우주 발생(primitive cosmogony)이 아니라 지구를 덮은 물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 the Spirit of God 유대인 주석은 본문의 ‘하나님의 신’을 ‘신성한 존재의 신비롭고 보이지 않는 저항할 수 없는 임재’(mysterious, unseen, and irresistible presence of the Divine Being)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신’은 성령(the Holy Spirit)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분명한 언급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은 성자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위하여 만물을 실제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성삼위 모두 창조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에 대한 위엄의 복수 대명사(us, our)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나타내기 위해 창세기 1: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단수 동사를 사용한다. 운행하시니라 moved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알을 품을 때 닭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the Spirit 성령)이 수면(the face of the waters)을 계속 덮고(brooding over) 계셨다는 것이다. 신(the Spirit)의 직접적인 행위는 생명이 없고, 조화되지 않는 요소들이 작용하게 함으로써 새 창조의 환경에 적합한 상태에 맞도록 결합시키고 정돈하고 성숙하게 했다. 이 새 창조의 기사(account 記事)는 창세기 1:2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맞게 시작하면서 창조 과정의 상세한 사항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변화들을 어떤 구경꾼(onlooker)이 보고 말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서술한다. QT 되새김 A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는가(admit). B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늘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는 이 말씀처럼 천지가 질서가 없고 텅 비었다는 사실을 진리라고 믿는가(believe). C 하나님의 신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라(consider). D 창조 사역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사실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연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여 나의 기도와 삶에 함께해주소서. 2020-05-07
    •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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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7
  • 더굳큐티 2 우주의 시작
    Apollo 11 lunar module 우주의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 이것은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의 말이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를 다룬 영화 ‘콘택트(Contact, 1997)’에도 소개된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주 어디엔가 우리와 같은 혹은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갖춘 외계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칼 세이건의 말대로 우주는 너무나 넓고 우주에는 너무나 많은 별이 존재한다. 태양계가 속해있는 우리 은하에는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최소 천억 개가 있다. 만약 별을 1초에 하나씩 센다면 약 3,200년이 걸리는 엄청난 숫자다. 또한 이같이 엄청난 별을 가진 우리 은하와 같은 은하가 또 천억 개가 있다. 그래서 칼 세이건은 우리 인류가 이제 우주의 해변에 발을 담그게 됐다고 말했다. 이 별들에 딸려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의 숫자까지 고려해보면 우주의 지적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그 천억 개의 행성 가운데 하나인 달에 대한 우주 탐험을 제안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그는 1961년 연설에서 예언처럼 주장했다. “나는 이 나라가 1960년대가 지나가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 뒤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목표를 달성해야 함을 믿습니다.” Aldrin Looks Back at Tranquility Base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Apollo 11)는 처음으로 달에 착륙한 유인 우주선이다. 아폴로 계획의 다섯 번째 유인 우주 비행인 동시에 세 번째 유인 달 탐사였다. 1969년 7월 16일에 발사되었으며 선장 닐 암스트롱,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달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이 탔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달에 발을 딛은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 당시 콜린스는 달 궤도를 돌고 있었다. 1969년 7월 16일 13시 32분에 플로리다주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새턴 5호 로켓으로 발사되었다. NASA의 5번째 아폴로 프로그램 유인우주선 임무였다. 7월 20일 20시 17분에 달착륙선이 달의 표면에 착륙했다. 선장은 닐 암스트롱 중위, 조종사는 버즈 올드린이었다. 달에 착륙하고 6시간이 지나서 7월 21일 02시 56분 15초에 암스트롱이 달에 내렸다. 버즈 올드린은 20분 후에 내려왔다. 2시간 30분을 달에서 걸어 다니면서 21.5kg의 달 모래 등을 채집했다. 달 궤도를 돌고 있는 사령선에는 마이클 콜린스 (우주비행사)가 혼자 남아있었다. 달에 착륙하고 21.5 시간이 지나서 달착륙선이 이륙해 사령선과 도킹했다. 여러 가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달 표면으로부터의 사상 최초의 선외 활동을 파악한 영상은 전 세계에 전달되었다. 지구상에서는 그 순간 적어도 세계 6,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암스트롱은 착륙선의 다리 위에 내려서 달 표면 상태를 “밝고, 거의 가루와 같이 보인다. (fine and almost like a powder)”라고 보고한 후 착륙으로부터 대략 6시간 반 후의 1969년 7월 21일 우주 시간(UTC: universal time coordinated) 02:56(미 동부 시간 오전 10시 56분) 달 표면에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었다. Three astronauts in spacesuits 1969년 7월 23일 귀환 전의 마지막 밤 세 명의 비행사는 텔레비전 인터뷰에 대답했다. “우리를 쏘아 올린 새턴 V 로켓은 극히 복잡한 기계이지만 모든 부품은 완벽하게 작동해 주었다. 우리는 이 기계가 아무 문제도 없게 일해 준다는 신뢰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 비행은 다 셀 수 없는 사람들의 피와 땀과 눈물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우리 세 명은 몇천, 몇만의 인간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고마워요!” - 콜린스 “인간 세 명을 달에 보낸다는 위업은 정부나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나 혹은 그 이상의 것에 의해서 완수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간의 미지에 대한 호기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며칠 전의 그 달 표면에서의 사건을 생각해 낼 때 찬송가의 1절이 생각난다. 하늘을 생각할 때 순리대로인 달이나 별의 운행은 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이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 올드린 “이 비행이 실현된 것은 가장 먼저 역사에 있어 무수한 실적을 남긴 과학사의 위대한 선인들, 다음에 이것을 완수하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낸 미국 국민, 그리고 그것을 이행한 정부와 의회, 한층 더 우주선이나 새턴 로켓, 사령선 컬럼비아, 착륙선 이글, 선외 활동 장치, 달 표면에 있어서의 작은 우주선이라고도 말해야 할 우주복 등을 만들어낸 정부 기관이나 기업 등 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우리는 이 우주선을 설계하고 시험하고 완성 시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인 모든 미국인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바치고 싶다. 그리고 또 이 방송문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의 축복을. 이상, 아폴로 11호로부터.” - 암스트롱 우리는 주변의 보이는 세계를 날마다 보며 산다. 그러나 이 세계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즉 그의 존재, 그의 지혜 그리고 그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다.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0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다. 그 모든 것 우주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오늘 본문은 위대한 천지창조의 선언문이다. 주석 1절. 태초에 In the beginning 1절은 창조 기사의 장엄한 요약이다. 하나님은 시작( the beginning)이시다. 아니 만물의 원인이시다(the Cause of all things). 본 장의 나머지는 창조의 세부 사항들을 기술한다. 태초는 영원의 심연 속에(in the depths of eternal ages) 숨겨진 아주 멀고 알려지지 않은 태고의 한 시기(a period)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대들은 물질의 창조와 혼돈이 줄어들고 질서가 자리 잡는 사이에 지나갔을 수 있다.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The Lord possessed me at the beginning of his work, the first of his acts of old. Ages ago I was set up, at the first, before the beginning of the earth. 잠 8:22, 23 하나님 God 하나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다. 초월자(the Supreme Being)의 "힘 Strong"과 "능력 Mighty"을 지닌 전능(omnipotent power)을 나타낸다.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은 히브리어 복수 형태다. 그 복수 형태에 근거하면 세분 하나님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성경 서두에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성의 존재 여부는 논쟁이나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엘로힘은 성경에서 만물의 원천과 근원이신 신적 존재(the Divine Being)의 일반적인 칭호이다. 엘로힘은 복수 형태인데 히브리어에서 막강한 힘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형식이다. 여기에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영원(eternity)과 무한(infinity)의 모든 힘을 쥐고 계시고 하나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성경은 창조 사역에 함께 참여하신 신성(the Godhead)의 복수(성부 성자 성령 Father, Son, Spirit) 교리를 명확하게 계시하고 있다. +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잠 8:27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2-3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2 Bentley Erdman Keynes 천지 the heaven and the earth 우주(the universe)를 의미한다. 창세기의 이 첫 절은 영감 된 성경의 전체 서론 즉 총론(general introduction)이다. 만물이 시작이 있고 어떤 것도 영원부터 존재하거나 우연히 생긴 것은 없고, 어떤 열등한 대리자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없고, 온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생겼다는 위대하고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는 선언문이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이 창조의 선언 뒤에 지구에 한정된 창조의 서술이 이어진다. 창조하시니라 created 이 히브리어 단어는 단수 형태이다. 이것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 주어 엘로힘이 복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하는 어떤 사상을 가로막게 된다. 히브리어 동사 '창조하다'의 빠라(bara)는 하나님의 활동에만 오로지 사용된다. 만들다(make) 또는 이루다(form) 같이 사람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무(nothing)에서 유(something)를 창조하는(create)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즉 어떤 선재하는(pre-existing) 물질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nothing)에서 생산하는(produce)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QT 되새김 A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위대한 천지창조의 선언문임을 인정하는가(admit). B 하나님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을 믿는가(believe). C 하나님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엘로힘이 복수 형태인 사실을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가(consider). D 온 우주가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생겼다는 사실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주여.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신 말씀처럼 창조하신 하늘의 소망과 땅의 기업을 나의 믿음 속에 창조해주소서. 20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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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6
  • 더굳큐티 1 성경의 시작
    The Creation of Adam depicted on the Sistine Chapel ceiling by Michelangelo, 1508-1512 성경의 시작 책들(books)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한 영어의 바이블(Bible)은 신성한 책들의 전체 문집에 붙인 5세기에 시작된 명칭이다. 바이블이라는 명칭을 채택한 것은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였고 점차 영어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바이블은 많은 다른 저자들이 다른 세 언어로 1,600여 년에 걸쳐 기록했다. 세상에 수 많은 책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바이블은 오직 한 주제 즉 인간 구원의 주제를 다루는 단 한 권의 책이다. 모세가 기록한 오경을 그리스어로 ‘다섯 권의 책’이라는 의미의 펜타투크(Pentateuch)라고 하고 유대인은 토라(Torah) 즉 ‘율법’(the law)이라고 한다. 토라를 다섯 권으로 구분한 것은 구약의 그리스 번역자들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은 오경의 첫 번째 성경의 이름을 베레쉬트(Bereshith)라고 했다. 그것은 ‘태초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인데 첫 번째 성경 창세기의 첫 문장 첫 단어였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구약성경 원본 번역본 가운데 70인이 번역했다 해서 70인 역 성경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이 있다. 창세기의 영어 제목 ‘제네시스’(Genesis)는 70인 역의 제목을 따른 것이다. 그 말은 시작이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성서의 제목 ‘베레쉬트’(Bereshit) 역시 히브리어 구약성서의 첫 줄의 첫 말에서 따온 것이다. 그 말은 ‘처음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 창세기는 시간과 생명과 죄와 구원과 인류와 히브리 민족의 시작을 기록한다.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들이 성경 이야기에 한결같이 흐르다가 요한계시록에서 끝이 난다. 창세기는 시작된 모든 것을 불러주는 이름의 책이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시작해서 모든 존재의 이름을 지어주신다. 이런 시가 있다 꽃 - 김춘수(金春洙 1922.11.25-2004.11.2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존재하는 것들에 꼭 맞는 이름을 붙여주는 행위가 시 쓰기다. 꽃은 삶이 아름답되 짧고 외롭기에 함께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준다. 태초의 창조 때 하나님께서 각자의 올바른 이름들로 사물들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그 이름들로 이루어진 세상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날마다 읽고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당신이 바라시는 대로 달라지게 하시기 위하여 끈기 있게 일하시며 기다리셨다. 그들은 종종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달라짐의 바람과 기다림을 결코 그만두지 않으셨다. 그는 여전히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세우신 계획을 당신이 지닌 믿음의 삶 속에서 모두 이루어 주실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고 약속의 땅을 위해 고향을 떠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들을 주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신 뒤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처럼.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맨 나중에 지음 받은 최초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유일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조심해야 한다. +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창 9:6 +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 3:9-10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켰다. 그러나 어느 날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29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것이다.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8 해와 별을 창조하는 야훼 신 QT 되새김 A 세상에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성경은 오직 한 주제 즉 인간 구원의 주제를 다루는 단 한 권의 책이라고 인정하는가(admit). B 하나님은 약속을 하신 뒤 그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을 믿는가(believe). C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보라(consider). D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닮을수록 하나님의 축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될 수 있도록 축복해소서. 2020-05-04
    • G.QT
    • G.QT
    2020-05-04
  • 이야기 세계교회사를 시작하며 - 바람의 눈
    Morella Santa Maria Window 바람의 눈 살을 에이는 고추바람이 봄빛에 스러져 흔적이 없게 되었다. 대신에 꽃바람이 꽁무니를 잇더니 이제는 찬 소소리바람과 싱그러운 벌바람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빛이 다사로운가 하면 어느덧 겨드랑이를 적시게도 한다. 이 바람과 빛이 동굴을 벗어나 집을 가지게 된 사람들에게 문제가 됐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그들의 사는 집으로 따스하고 환한 빛은 들여보내고 차가운 바람은 막아줄 마땅한 투명체를 도저히 꿈조차 꿀 수 없었다. 사람이라는 게 본디 꿈을 꿀 수 없다고 해서 넋 놓고 앉아 있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질 못하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머리를 짜내도 해결책이 안 나왔다. 그것은 집 안으로 빛은 들어오되 바람은 되도록 적게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집 꼭대기에 초생달 모양으로 틈을 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논 틈새의 모양새를 본 사람들이 눈처럼 생겼다는 말을 하나, 둘 하기 시작하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그 틈새를 ‘바람의 눈’이라고 멋을 부려 부르게 되었다. 바람은 기어들어 오고 빛도 넉넉하게 스며들게 하기 위해 집 위를 가늘게 튼 일명 ‘바람의 눈(wind’s eye)’이 줄어 창(window)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하여 과거를 알 필요가 있다. 이 과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거 역사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들은 과거라는 거울 속에 비친 그들 자신의 모습에 흐믓한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식성과 취향에 맞는 어느 일정 기간과 인물을 선정하여 연구하려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거나 기리기 위하여 히죽거리며 그들의 생각대로 과거를 현재에 재현시켜 놓는다. 그런가 하면 금이 갔거나 결이 고르지 못한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우리의 찌그러지고 볼품없는 모습을 발견하고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게 될 것이다. 역사를 보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역사를 창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창문은 바깥을 바라보기 위해, 즉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라는 창문을 통해 우리의 현재 모습과 다른 어떤 것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거 역사로부터 현재 우리에게 유익한 어떤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나는 지나온 교회의 이런저런 역사 내지는 이야기들을 바람의 눈으로 생각하고, 그것들을 통해 오늘의 교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얻어내고자 한다. 교회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되었으며, 그 안에서 또는 그것을 둘러싸고 무슨 일들이 있었으며.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하는 등등의 것들을 베인턴(Roland H. Bainton)의 저서 ‘우리 선조들의 교회(The Church of Our Fathers)에 근거하여 일정한 주견이 없지만 얼마 간의 능력을 가지고 한껏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바람의 눈을 통해 선뜩한 바람은 적게 들어오고, 따스하고 밝은 빛은 많이 들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램을 글을 시작하면서 해본다. 2020-05-0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5-02
  • 더굳큐티 - 큐티와 성경 읽기 ABCD
    새해 새달 새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이다. 새싹의 움틈과 새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 없이 되풀이 되는 일이다. 우리는 어제 지난해와 다름없이 우리의 몸과 우리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간다. 또 새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 우리의 몸과 우리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한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한다. 또 우리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 순간 죽고 또 태어난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이어짐과 더불어 생명이 있게 하는 두 계기 가운데 하나라는 말이 된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이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듣는다. 바흐를, 베르디를,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이나 극장을 찾는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는다. 성경을 전하는 목사 또는 설교로 전해 받은 복음을 통해 은혜받은 신자도 그 성경 말씀을 반복해서 듣고 삶을 통해 그 말씀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있다. 베토벤의 음악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다. 그러나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히 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이다. 이 설계도로 소리의 집을 지어 듣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이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한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는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곳을 보게 하고 들리지 않던 곳을 듣게 한다. 영적 성장과 유지를 위해 주석과 QT를 필요로 하는 우리 신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 그래서 주석과 QT를 합친 더굳큐티 The Good QT를 기획하게 됐다. 본 기획물의 참고 문헌은 다음과 같다. 첫째 참조 텍스트 ‘제미슨-포셋-브라운 성경 주석’(The Jamieson-Fausset-Brown Bible Commentary)은 성경 전권에 대한 ‘비평적 실험적 실제적 주석’(the Commentary, Critical, Experimental, and Practical)이라는 부제가 달린 주석이다. 1871년에 발간된 이 주석의 저자는 재미슨(Robert Jamieson), 포셋(Andrew Robert Fausset) 브라운(David Brown) 등이다. 제미슨(Robert Jamieson D.D. 1802-1880)은 글래스고 프로반밀(Provanmill in Glasgow)에 있는 세인트 폴스 교회(St. Paul’s Church) 목사(minister)였다. 포셋(Andrew Fausset, A.M. 1821-1910)은 요크(York)에 있는 세인트 커트버츠 교회(St. Cuthbert’s Church)의 교구 목사(rector)였다. 브라운(David Brown. 1803-1897)은 글래스고에 있는 스코틀랜드 프리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 소속 세인트제임스(St. James)교회의 목사와 아버딘대학교 프리 교회 대학(Free Church College of the University of Aberdeen)의 신학 교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에 대해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게 하는 겸손한 노력’(humble effort to make Scripture expound itself)의 일환이라며 이렇게 기도했다. “우리의 깨우침을 위해 모든 거룩한 성서들을 기록하게 하신 찬양받으실 주께서 이 노력을 축복하시고 죄인들의 회심과 성도들의 교화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하시고 주의 위대하신 이름의 영광과 주의 나라의 빠른 임재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May the Blessed Lord who has caused all holy Scriptures to be written for our learning, bless this ... effort ... and make it an instrument towards the conversion of sinners and the edification of saints, to the glory of His great name and the hastening of His kingdom! Amen.” 둘째 참조 텍스트 유대교 주석 ‘모세오경과 하프 토라’(The Pentateuch and Haftorahs)이다. 선지서에서 발췌된 하프 토라는 각 안식일과 유대인 축제와 금식 일에 관한 율법 강해 뒤 읽는 예배용 성서이다. 이 주석의 편집인이고 영국 유대교 랍비 회장 헤르츠 박사(DR. J, H. HERTZ)는 1936년 5월 10일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히브리어와 영어 본문의 모세9오경(Pentateuch)과 하프토라(Haftorah: 유대교 회당 매주 예배 시 모세오경 토라를 강독한 뒤 선지서에서 선별해 읽기 위해 편집한 성경)에 대한 주석을 곁들인 이 저서는 영어 사용 유대인들이 회당과 학교와 가정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David Levi와 Issac Delago가 해석한 모세오경 주석은 140년 전(1896년)에 발행되었고 더군다나 오늘날(1936년)은 구할 수도 없다. ...본서의 전거가 되는 자료들은 고대 중세 현대의 유대인과 비유대인 주석가들에서 구했다. 건전한 랍비주의 교리는 ‘어떤 출처에서든 진실은 받아들이라’(Accept the true from whatever source it come’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이 경건한 기독교 주석가의 것이든 성상파괴주의 성서학자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의 것이든 어떤 글이라도 막론하고 말이다... 셋째 참조 텍스트 ‘이스턴 성경 사전’(Easton's Bible Dictionary)을 저술한 이스턴 박사(Matthew George Easton 1823-1894)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와 저술가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그의 사후 1897년에 출판된 본서이다. 이 책은 성경의 단어, 인물, 장소 등의 표제어로 편집된 백과사전식 편견이 없는 성경 사전이다. 이 사전은 현대에도 유용한 성경 주제들의 다양한 정보와 배경을 탁월하게 전달해준다. 위의 세 텍스트 Jamieson-Fausset-Brown Bible Commentary(1872), 유대교 ‘모세오경 주석 The Pentateuch and Haftorahs(1972), Easton's Dictionary(1897) 이외에 The King James Study Bible(1988), With the Word(1991) 등을 참조해 설교자들의 설교 준비와 영성을 돕기 위한 주석을 1980년에 안수를 받고 어언 나이 70의 선배 목사가 되어 2020년에 시작하게 되었다. 성경을 전하는 설교자와 성경을 실천하는 신자로서 겪은 갈등과 아쉬움 끝에 후배 목사와 진리에 갈급한 경건한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일념으로 감히 성경 주석 저술에 나서게 되었다. 본서 더굳큐티 The Good QT의 내용 80프로는 위의 참고 저서들을 번역 편집한 것이고 나머지는 나의 거친 삶의 체험과 짧은 식견을 자유롭게 보탰다. 신자의 생명은 성경 지식에 터 잡은 특별 은총의 영성에 더해 일반 은총의 삶의 식격과 지식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큐티라는 명칭이 생겨난 이래 세계를 변화시킨 영적인 운동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중 하나가 1882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후퍼(Hooper)와 쏠턴(Thorton) 등 몇몇 학생들이 시작했던 경건 훈련 운동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생활이 ‘세속적인 경향’으로 꽉 차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기도하면서 해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이 찾아낸 방법은 ‘하루 생활 중 얼마를 성경 읽기와 기도로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조용한 시간’(Quiet Time)이라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명칭이 줄어 편의상 큐티(QT)라 불리게 되었다. 큐티는 말 그대로 조용한 시간과 장소를 정하여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는 시간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대로 실천하고, 실천한 것을 서로 나누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신앙훈련이다. 따라서 더굳큐티가 추구하는 표어(標語)는 ‘성경을 알고 성경을 따르고 성경을 전하는 것’이다. 더굳큐티는 성경을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성경매니아(Bible-mania)를 위한 안내서(guide book)라고도 할 수 있다. 성경 본문(개역성경)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 절씩 본문과 해석을 읽게 하고 묵상하게 한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법은 영국의 경건한 신학자이고 2005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Time)이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됐던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1921년 4월 27일-2011년 7월 27일)의 성경읽기 ABCD 방법을 따른다. 1959년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왕실 채플린(Chaplain)에 임명된 그는 시온주의를 반대하면서 확고하게 말했다. ‘정치적 시온주의와 기독교 시온주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저주이다... 오늘날 참된 이스라엘인은 유대인도 아니고 이스라엘인도 아니고 이방인일지라도 구세주를 믿는 신자들이다...’(Political Zionism and Christian Zionism are anathema to Christian faith ... The true Israel today is neither Jews nor Israelis, but believers in the Messiah, even if they are Gentiles ...) 존 스토트 박사의 그런 신념에 따라 구세주를 믿는 신자들을 위한 QT 되새김의 네 가지 질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의 저서 ‘복음을 지키라’(The Message of 2 Timothy: Guard the Gospel)에서 제시한 성경 읽기 방법을 ABCD의 순서를 따라 읽는 방법을 추천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평생 독신에 유일한 취미가 들새 관찰(birdwatching)이었던 90세에 타계하신 그가 말하는 그 ABCD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A는 인정하다(Admit;to concede as true or valid)의 머리글자인데 당일 읽은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서 진실로 인정하느냐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B는 믿는다(Believe;to accept the truth of what is said by someone)의 머리글자인데 당일 읽은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서 진실로 믿느냐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C는 생각하다(Consider;to think about-something or someone-carefully especially in order to make a choice or decision)의 머리글자인데 당일 읽은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서 생각해보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D는 행하다(Do;to make a choice about something : to choose something after thinking about it)의 머리글자인데 인정하고 믿고 생각한 성경 말씀을 마음속에서 결단을 내리고 진실로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일 읽은 성경 말씀을 압축한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를 읽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을 마치는 형식을 취한다. ‘더굳큐티’를 읽은 신자가 날로 믿음과 지혜가 자라 세상을 견디고 그 주위에 반딧불이 같이 빛나고 그 믿음을 자연히 전하거나 그 모습이 자연히 전해지기를 바란다.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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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1
  • 큐티주석50 소돔 왕의 제안
    소돔 왕의 제안 14:21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창 14:21-24 요단강 하구에서 홍해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잊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서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신비하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라. 귀향을 매개로 조용히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는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흐르고 흘러가는 강은 인생을 닮았다. 강은 뭐하러 흐르나. 1등 되기 위해 흐르는 강은 없다. 높은 고개마루 넘기 위해 흐르는 강도 없다. 강은 바다에 닿기 위해 흐른다. 흐르는 일에 멈추는 일을 더해 결국 완성되려고 흐른다. 흐름으로서의 우리는 흐르는 것도 두려워하고 흐르지 않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이르는 곳은 같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생을 멈추면 다 바다가 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도 강의 흐름은 너무 짧다. 두려워만하기에 삶이 너무 아깝다. 가장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선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보는 방법이다. 가장 큰 희망은 가장 큰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한 아름다운 말들이 대개 어둠 속에서 탄생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두려움과 우울 속에서 보내고 있는 지구 저편 믿음의 형제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별에 대해 말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들린다고. 그때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한 세계가 닫혔으니 우리가 믿을 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듣게 된 사람에게는 더 잘 볼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릴 테니.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아브람은 세 가지 승리를 얻었다. 첫째 그는 롯을 이겼다. 둘째 그는 세상의 왕들을 이겼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는 사실을 그는 성경에서 최초로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1 5:4)는 믿음으로 싸우고 그것이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셋째 그는 자신을 이겼다. ‘싸우기 전처럼 이긴 후에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개인적인 이익을 사용할 수 있는 유혹을 받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는 모든 승리 뒤에 그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고 마귀의 거래를 물리쳐야 한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싸움에 이기고 승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아브람을 살펴보자. 창 14:20-24 소돔 왕의 제안 A proposal of king of Sodom 21절. 소돔 왕이...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the king of Sodom said ... Give me the persons 승리자로서 아브람은 그가 구원한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그의 노예들로 삼거나 묶어서 팔거나 속량 몸값(ransom)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그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이라는 관례를 걷어차 버렸다. 22절.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I have lift up mine hand unto the LORD 세상은 모르는 정직한 자부심과 아량을 지닌 아브람은 여호와께(unto the Lord) ‘내가 나의 손을 들었다’(I have lifted up mine hand) 즉 ‘내가 맹세했다’(I have sworn)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이 말의 의미는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전리품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신 8:17 23절. 신 들메 a shoe-latchet 아브람의 훌륭한 독립 정신은 자신의 친척을 구출한 대가로 신을 메는 끈 같은 아주 사소한 정도의 이익조차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24절.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 only that which the young men have eaten and the portion of the men which went with me 아브람은 자기와 함께 싸움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의 수고를 모른 체 할 권리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할당량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리품의 정당한 몫이 아브람의 동맹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 QT 되새김 A 승리자로서 아브람은 소돔 왕의 제안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었다’는 아브람의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는 아브람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이 자신과 싸움을 같이 한 사람들에 대해 태도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가 되어 주님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해주십시오. 아멘. 2020-04-08
    •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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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8
  • 큐티주석49 멜기세덱의 축복
    Meeting of Abraham and Melchizedek, canvas by Dieric Bouts the Elder, c 멜기세덱의 축복 14: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8-20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신자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믿음의 시간이 새겨진다. 그 믿음은 말씀에 뿌리내린 삶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1847년 작 ‘페스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 시(市)가 페스트로 봉쇄된 후 절망과 고통 그리고 투쟁 등 다양한 시민들의 반응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봄이 되자 사실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병의 종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병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 불행에는 정말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동시에 페스트의 종말이라는 것이 모든 희망의 대상이 되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세계의 중심가 뉴욕 맨해튼이 비현실적으로 텅 비고 항구엔 대형 해군용 의료선박이 들어서 있다. 시체를 채운 냉동 컨테이너 행렬이 도로에 즐비하고 임시 시신 안치소 천막이 바람에 휘날린다. 며칠 전 SNS에 현장 사진을 올린 의료진이 2020년 4월 6일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중국산 마스크를 차지하려고 선진국 국가 간에 얼굴을 붉히고 주가는 폭락했다. 마스크(Mask)의 어원인 라틴어 마스카(Masca)는 본래 공연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말한다. 이탈리아어의 마스케라타(mascherata·가면무도회), 스페인어의 마스카라르(mascarar·얼굴을 칠하다),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는 화장인 마스카라도 여기서 파생했다. 요즘은 마스크라고 하면 먼저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는 의료용 마스크를 떠올리지만 본래는 얼굴을 가리고 화려하게 돋보이기 위해 썼던 셈이다. 천 마스크가 대부분이던 2003년 봄 국내 한 대형마트에서 영국에서 처음으로 직수입한 일회용 황사 전용 마스크 4000개가 하루 만에 품절돼 화제가 됐다. 0.3μm(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입자를 95%까지 걸러낼 수 있다는 제품이다. 그런데 황사와 함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병 우려가 커지자 동이 난 것이다. 마트 측은 1만5000장을 추가 주문했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전 세계에서 동시에 1500만 장이나 주문이 폭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사와 감염병이 고기능 마스크 시대를 연 것이다. 이들 명품업체의 마스크 생산은 위기 극복 차원이지만 마스크로 감염병 예방과 패션을 동시에 노리는 업체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의 한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공기필터가 장착된 마스크는 7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스포츠용품 회사는 운동할 때 쓸 수 있는 마스크도 만들고 있다. 유쾌하지 않은 이유로 마스크의 신세계가 열리고 있는데, 어쩌면 원래 마스크의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리더는 거짓말로 화를 키우고 어떤 리더는 굳은 얼굴로 재난을 직시한다. 바이러스는 동시에 지구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인간의 움직임이 멈추자 지구가 깨끗해졌다. 중국의 탄소 배출이 25% 이상 줄어들면서 대기질이 깨끗해졌고,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던 베네치아 운하에는 60년 만에 물고기가 돌아왔다. 시리아와 예멘의 전투가 중지됐으며 각국의 사회 보장이 강화됐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소강석 목사는 가장 낮은 자리의 언어로 시와 설교로 치열하고 튼튼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배우가 될 수도 가수가 될 수도 정치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인물이 시인 목사로 교단과 교계의 지도자가 된 듯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앞선 왕조들처럼 내전을 통해 성립됐다. 국민 총선거처럼 그 합법성을 뒷받침할 절차는 없었다. 국공내전 중 공산군의 비인도성은 12만∼30만 명이 봉쇄에 따라 굶어 죽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에도 중국 인민의 처지는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최소 30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1953년 반혁명 진압 운동에서는 70만∼200만 명이 처형되었다. 이는 서론에 불과했다. 자립을 통한 경제성장을 충동질한 1958∼1960년의 대약진운동에서는 최대 4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토론의 자유를 일시 허용했던 ‘백화제방’ 운동은 반항자를 색출할 쉬운 도구가 되었다. 이 비극들의 배경에는 인권을 ‘사악한 이기심의 발로’로 치부하는 원천적 비인간성이 깔려 있다. 지금도 중국은 인간을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 (人民)과 국가에 대적하는 ‘적인(敵人)’으로 구분한다. 사회에 암세포처럼 퍼져 있다는 적대세력을 늘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개인숭배가 재연되고 마오쩌둥이 다시 소환되는 오늘날 억압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전쟁 발발부터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까지 4년간 중국은 일본의 80만 병력을 묶어두었다. 연합군의 승리는 중국의 희생 없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성경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홀연히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아 사라진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창 14:18-24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 Melchizedek blessed Abram 18절. 멜기세덱 Melchizedek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My king is righteousness)이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말씀한다. +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1-3 이 말씀은 멜기세덱 한 사람에게 왕과 제사장 직분이 공존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말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격파한 승리는 멜기세덱과 소돔 왕의 나라 편에도 공적인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과 멜기세덱이 특별히 나와 환대하고 관심과 존경을 나타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섬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을 알고 경배하는 몇 안 되는 그 지역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히브리서 7:1에 따르면 멜기세덱은 구세주의 예표(a type of the Saviour)였다. 왕이며 제사장인 그가 아브람에게 나아와 그의 군대가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람을 축복했다. 그것은 어떤 합법적인 일을 통해 거두는 성공의 경우 우리가 본받아야 될 경건한 감사와 승인의 표시다.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And he blessed him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무공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he gave him tithes of all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감사의 예물로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것은 아브람의 용맹뿐만 아니라 그의 경건한 신앙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을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공적인 중재자나 제사장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람의 감사의 표시였고 하나님의 섭리에 영광을 돌리는 행위였다.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 3:9-10 ♣ QT 되새김 A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어떻게 대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의 무공과 경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주님 당신의 말씀에 늘 배고프고 목마른 심령이 가난한(poor in spirit) 우리에게 겸손과 온유와 인자를 더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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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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