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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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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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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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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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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29 - 한 머리와 세 얼굴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v, between 1408 and 1425 한 머리와 세 얼굴 ‘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뭐길래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보상자에 눈길을 모으고 배꼽을 잡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한다. 어제 대발인가 사발인가 하는 청년이 결혼한 데까지 이른 모양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인기작가의 엿가락 같은 이야기 늘림을 어디까지 늘릴런지 사뭇 기대가 된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열 받은 교회들이 모세 앞의 홍해처럼 둘로 좍 갈라졌다. 바로를 피하기 위한 선민의 물 건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국의 통일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교회의 갈라짐이었다.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틴 황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전을 왔다갔다 했다. 제국의 통일을 공고히 해주어야 할 교회가 갈라서서 성부니 성자니 성령이니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싸우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양상은 황제의 정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제국인데 도움을 엄청 주리라 생각된 교회가 오히려 여론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을 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실 콘스탄틴 황제는 삼위일체 논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해되는 게 별로 없었다. 측근들을 통해 설명을 몇 번 들었지만 도무지 장님 코끼리 더듬기였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놓고 설왕설래 하느라 눈에 핏발이 서고 목에 힘줄이 돋는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데간데없었다. 논쟁이 뭐길래 교회의 사랑까지 식혀 버리는지. 토론장에 난데없는 폭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드잡이를 하더니 급기야는 치고받았다. 형제요 자매들인 그리스도인끼리 싸우는 꼴을 나비넥타이에 콧수염 기른 김동길 교수가 봤다면 “이게 뭡니까?”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느물거렸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데 그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렵사리 마련된 제국의 안정이 교회 싸움에 깨질런지도 몰랐다. 내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쟁취한 제국이며 황제 자리인가!황제는 뒷짐을 풀었다. 그는 먼저 메신저를 보내 양 파 지도자한테 항의 조의 나무람을 전달했다. 황제는 말했다. “이게 뭡니까? 이 모든 논쟁은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빚은 결과입니다. 말에 담긴 어리석은 차이 때문에 형제끼리 원수처럼 치고받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이 무슨 망발들입니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소?” 하나님은 셋이니 둘이니 하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싸울 때 교인들 사이에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림이 유행했다. 이 그림에서 삼위일체가 한 머리와 세 얼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의 모퉁이에 있는 날개 달린 네 피조물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현대 의학으로도 감기의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의 실체를 어떻게 인간의 말과 그림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Holy Trinity Template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좋아했다. 신학적인 설명이야 어찌 됐든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라고 잘 설명해주니까 말이다. 202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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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28 - 삼위일체와 분열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 (1756–1758) 삼위일체와 분열 통일과 화해를 기대하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삐걱거리고 있다. 복면을 쓰고 쇠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벌건 대낮에 스스럼없이 농부의 아들이 세운 공장을 우우 몰려다닌다. 어린 백성을 정신없는 정신대로 내모는 데 일조를 했던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섬이 없다. 대신에 섬나라 자그마한 정치 지도자가 우리 의원끼리 박터지게 싸우던 국회에 나타나 머리만 조아리다 사라졌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정말 이 겨울에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도 독일처럼 통일이 되어 애국가와 찬송을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끼리 다른 문제도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관계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너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옥신각신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의 육신을 지니시고 이 땅에 사셨다. 그는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한테 새 생명을 주셨다. 그럴진대 그는 확실히 노대통령 같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나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신이 두 분이 계시지 않게 되겠는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이럴 경우 신이 세 분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영어참고서 제목으로 채택된 바 있는 이 삼위일체 논쟁이 어느 곳보다도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뜨겁게 달구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라는 이름의 연로한 성직자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인간 이상이었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했다고 알쏭달쏭한 주장을 점잖게 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서 시무하던 아다나시우스라는 부교역자가 감히 아리우스 감독의 주장이 얼토당토않다고 반론을 폈다. 근간에 위장을 덤덤하게 떼낸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그는 아다나시우스 같이 바른 말하는 교역자를 좋아하신다. 아마 도망다니던 아다나시우스를 당시 이 목사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교회에 특채해서 거둬 주셨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의견을 그가 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Ikone Athanasius von Alexandria어쨌든 아다나시우스의 그 당시 반론은 박수는커녕 그를 밤낮으로 도망 다니게 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이상이셨고 하나님 이하이셨다면 기실 그는 인간도 아니시고 하나님도 아니시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이도 저도 아닌 얼추 묘한 존재가 되시고 마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셨다. 하나님의 실재를 완전히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풍성히 공유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게 된다. 성령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한 분 안에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한 세 분이 계시다. 즉 만유의 주 성부 하나님,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우리 영혼을 감동 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202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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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 Jan Hus at the Council of Constance. 개혁의 촛불 일본 자동차 공세에 밀려 맥을 못 쓰던 미국 자동차업계를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이아코카였다. 그는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되었고 그의 경영 철학과 경험은 세계에 물결을 일으켰다. 미국 내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도 대단해서 그는 워싱턴을 넘보는 마음이 생겼던 모양이다. 그래서 뉴욕타임즈는 칼럼까지 동원해 미국에 필요한 것은 일류 자동차 제조업자지 이류 정치가가 아니라고 호소했다. 『아니 여보게들 아이아코카가 정치를 할 모양이네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이 영판 정치인 같은 어투로 말하고 있어』 요즘 정치 은퇴를 선언한 사람이 정치를 안 하겠다고 하는 말이 각 일간신문에 계속 실리고 있다. 무슨 꿍꿍이속인지 모르겠다. 위클리프는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의 운동은 영국에서 별 호응을 받지 못했지만 보헤미아에서 지지를 획득했다. 그 당시 영국 왕이 보헤미아 공주와 결혼을 했었다. 현재 체코슬로바키아인 그 나라에서 존 후스는 이탈리아의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처럼 부패한 성직자들을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성직자들은 화려한 옷에 달린 술을 휘날리며 말을 탔고 은으로 만든 화려한 색상의 곤봉으로 가는 길에 거추장스런 사람들을 쫓았다. 후스는 거침없는 비난들 때문에 이단으로 고소를 당해 콘스탄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회부 되었다. 후스는 자신이 잘못 가르쳤다는 정죄에 대해 결코 그런 가르침을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경위야 어찌 됐든 후스는 그걸 취소해야만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눈을 껌벅거리며 도대체 결코 가르친 적이 없는 걸 무슨 수로 취소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후스는 거절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화형당했다. 화형당하는 후스(예나 약전, 15세기 후반) 그 결과 보헤미아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확산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하늘은 푸르렀고 성직자들의 뺨은 디룩디룩했다. 개혁의 불빛은 아직 희미했지만 여러 구석에서 촛불들이 타고 있었다. 독일 라인강 계곡을 따라 일단의 조용한 무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를 시작하지도 않았고 수도원을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접촉을 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이와 유사한 또 다른 그룹이 홀랜드에 있었는데 스스로를 『공동생활 형제』라고 불렀다. 그들은 늘 함께 살면서 물건을 함께 나누고 대부분의 시간을 가르치는데 보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을 교육을 통해 이곳저곳에서 퍼뜨렸다. 특별히 학교와 대학교들을 통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이 그룹을 통해 책이 한 권 나왔는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성경처럼 읽히고 있다. 이름하여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다. 어떤 형제가 썼는지는 확실하게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토마스 아켐피스로 알려져 있다. 개혁의 촛불들이 희구하는 것은 하나님 교회의 사랑과 선의 회복이었다. 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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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3_ 개혁의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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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 면죄부 판매 죄의 그늘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단지 교회의 탐욕만을 증가시켰다. 이유인즉슨 돈을 그러모으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 있는 교황청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교황의 오랜 부재로 토지들을 이웃 통치자들이 마구 짓밟아 못 쓰게 만들었다. 아비뇽에 자리 잡은 교황 요한 22세는 돈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옛것이든 새것이든 온갖 짓을 다 했다. 물론 세례, 결혼, 장례 등과 같은 정식 예식에 돈이 부과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둘로 나눠 두 무덤에 매장하는 것조차도 돈만 내면 교회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유럽 어느 곳에 있든 명색이 주교이면 임지를 받을 때 1년 치 봉급을 고스란히 교황한테 바쳐야 했다. 요즈음 학교 선생이 될작시면 이런 꼴같잖은 일이 있다는데 그 옛날 교황한테서 학교 이사장들이 배운 모양이다. 그래서 어떤 주교직이 공석이 된다면 교황은 얼씨구나 하고 그 자리를 메우려고 다른 주교를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연쇄적으로 주교직이 한 자리씩 비게 되어 주교들이 전부 자리를 옮기게 될 것이다. 그런 뒤 교황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옮긴 주교들한테서 부임 첫해의 월급을 모조리 상납받게 된다. 돈을 버는 또 다른 방법으로는 면죄부를 파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죽은 사람이 연옥에서 괴롭게 지내야 되는 기간을 단축시켜 주는 교황의 허가증이었다. 그 사상은 연옥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성자들의 공로를 보관한 보물창고를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됐다. 이 증서는 타인에게 양도도 가능했다. 가난과 결혼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이 요한 22세와 같은 탐욕 덩어리 교황한테 지청구를 늘어놓고 교황을 이단이라고 몰아댔을 때 분노의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교황은 화가 지글지글 끓어올라 본보기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몇을 이단 심문관에게 넘겨 화형에 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군주들이 이탈리아의 교회 소유 토지를 탈취해가자 교황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들과 전쟁을 일으켜 정말 힘써 그러모은 돈을 태반이나 전쟁터에서 허비했다. 교황은 교회가 교회답게 행해야 될 일에는 쓸 돈이 거의 없었다. 또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런데 쓸 마음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70여 년 만에 로마로 돌아온 뒤 사치와 교만의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성직자들은 아주 품위 있게 되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교회당과 그림과 책에 솔찬한 돈을 썼다. 그들은 카드놀이와 잔치에 아주 많은 돈을 활수 하게 지출했다. 그들은 값비싼 의상을 걸쳤고 예배 행렬을 화려하게 꾸몄다. 교황은 강력함을 내보이려고 멋진 의자를 군인들이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게 했다. 평신도들은 고등종교의 신앙에서 낮은 마법의 주술적 신앙으로 떨어졌다. 그들은 성만찬을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의 부적처럼 사용했다. 기독교에 만연된 치명적인 죄와 마법이 교회의 생명을 비칠거리게 했다. 사치의 죄에 빠진 교회 개혁의 외침과 시도들이 유럽 전역에서 불끈거리며 나왔다. 밤이 깊을 대로 깊어 어두운 만큼 밝은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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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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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 서방교회의 분열을 상징화한 14세기의 세밀화 죄의 교회 침범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교황권을 튼튼하게 세운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도 죽고 교회와 세상에 신선하고 감동적인 영향을 미친 프란체스코도 죽었다. 이 세상은 악인만 죽는 게 아니라 의인도 덩달아 죽기 마련이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 그런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쓰러진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거듭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텐데. 어쨌든 이노켄티우스 3세와 프란체스코가 죽은 뒤 중세는 내리막길을 마구 달렸다. 일단 지어진 대 예배당은 변함없는 매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돌로 된 건물은 비바람으로 인한 마모를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을 지닌 인간은 자기 특성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교회는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가 교회를 침범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을 침범했던 야만인들보다 훨씬 심한 피해를 교회에 끼쳤다. 그러나 야만인들이 로마인을 죄다 죽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 죄들이 교회의 모든 덕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중세의 아주 깜깜한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신앙의 촛불이 최소한 깜박거리고는 있었다. 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교회의 특성과 힘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여러 종류의 시도가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 즉 칠죄종(七罪宗: 죄의 일곱 가지 근원)은 오만 탐욕 사음 노여움 탐식 질투 나태 등을 이른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섯 가지 죄가 교회를 냅다 쳐들어왔다. 이것들을 이런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탐욕은 약탈 포대기를 싣고 달리는 말로 묘사된다. 탐식은 맛있는 음식을 통째로 삼키는 짐승으로 표현된다. 사치는 온갖 모양을 내느라 여념이 없는 여인으로 그려진다. 남자도 이 짓을 했다. 노여움은 연약한 처녀의 머리를 칼로 내리치려는 걸로 묘사된다. 교만은 자기 말에서 굴러떨어져 채이는 그림으로 나타난다. 약탈 포대기를 나를는 탐욕 교회의 탐욕은 국가와 아주 심하게 마찰을 빚었다. 국가도 역시 탐욕 덩어리였다. 싸움을 하면서 교회는 더욱 탐욕스러워져 갔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은 부자가 되었고 왕들은 질투로 배가 아파 몸살을 앓았다. 특별히 영국과 프랑스 왕은 강력한 국가를 구축하고 있는 참이라 많은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면 누구에서도 그걸 얻거나 뺏을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그들은 5.6공 시절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고나 할까. 영국 왕은 교회 재산 축적에 도움을 줬고 프랑스 왕은 자기 나라의 어떤 돈도 로마로 보내는 걸 아주 싫어했다. 이에 발끈한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는 교회의 재산을 뺏어 가는 어떤 왕도 왕한테 교회 재산을 바치는 어떤 성직자도 출교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아주 시덥잖다는 표정으로 교황을 생포해 프랑스의 한 궁벽 진 촌락으로 교황청을 이전시킴으로써 교황의 으름장에 답했다. 그 촌락 이름이 아비뇽이었다. 교황들이 7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로마에 부재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305-1377) 이 시기를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 기간을 본 따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라고 한다. 2022-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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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1_ 죄의 교회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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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ermon to the Birds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 새로운 수도원 운동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시대에 새로운 종류의 수도원운동이 일어났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바람을 탄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세상과 떨어져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수도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탁발수도사(friar)니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er에서 온 말이다. 탁발수도사들은 함께 모임을 갖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백성들과 함께 보냈다. 새로운 수도원 운동의 지도자는 프란체스코였다. 그는 이탈리아의 조그만 마을 아시시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자 상인이었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는 통설과 달리 프란체스코는 부자가 되기를 꺼렸다. 세상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사람들이 부를 얻고자 몸부림치며 싸우는 데서 비롯된다고 프란체스코는 믿었다. 그리고 교회의 어려움은 수도원들이 너무 부유해지고 너무 편안해져서 가난한 사람들을 잊어버리는 데 있었다. 프란체스코는 『가난 양』(Lady Poverty)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결코 가지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는 화폐 가치가 있는 선물은 어떤 것도 고개를 외로 꼬았다. 그는 입을 옷과 먹을 음식만 받았다. 그는 노동을 했지만 입고 먹는 것 이상의 임금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최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악의 것을 위해서 구걸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입으려고 하지 않고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빌었다. 또한 그는 내일의 것이 아니라 그날에 필요한 오늘의 것만을 위해 구걸했다. 그는 몸의 건강조차도 자신의 소유에 속한 무엇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나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기꺼이 찾아갔다. 그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들이건 도시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우리 찬송가 가사따나 아골 골짝 빈들에도 그는 복음을 들고 찾아갔다. 그가 활동하던 때는 도시들이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였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모본을 따라 사는 실체를 몸소 보여주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들이 되었다. 프란체스코는 물건 소유를 포기했을지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아름다운 세상을 소유한 부유함을 느꼈다. 프란체스코의 손과 발에 나타난 흔적들을 스티그마타 즉 성흔이라고 한다. 스티그마타(stigmata)의 복수형이다. 그 흔적들은 붉은 반점들인데 프란체스코가 그리스도의 상처들을 너무도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했다. Giotto Legend of St Francis Stigmatization 성흔을 받는 성 프란치스코 프란체스코는 날아다니는 새들을 앉혀 놓고 행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은 자매들이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방주 속에서 구원해 주셨고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하늘을 너희한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너희는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둥지를 만들어 살라고 너희에게 큰 나무들을 주셨다. 너희는 누에를 치지도 않고 목화를 심지도 않았는데 너희에게 털옷을 입혀 주셨다. 그러므로 작은 자매들이여,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하도록 해라』 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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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9_ 새로운 수도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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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 논쟁하는 학자들 교회교육 언제는 쇠뜨기 풀이더니 이제는 소금이 유행이다. 건강에 소금물 복용이 그만이란다. 그것에 관한 강습회도 있고 가르침대로 따랐더니 효과를 봤다고 여기저기 퍼치는 소금 전도사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그에 반해 정신건강을 위한 방법 개발에는 늘 잠잠하다. 정신이 저마다 건강해서인지 아니면 생명 연장에 정신건강이 별 소용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우리네 정신건강은 실로 나쁘기 그지없다. 검사가 검사한테 잡혀가 구속당하고 목사가 목사의 고발로 구치소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고 전직 대통령들은 외출도 못하고 자기들 보호를 위해 발사된 최루탄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학들은 부정입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려고 사람들은 돈돈 하겠지… 아이를 체벌하는 수도사 배우고자 소년들이 선생인 수도사한테 몰려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록이 있다. 소년들: 선생님 저희 어린이들은 정확하게 말할 수 있도록 저희를 가르쳐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립니다. 선생: 배울 때 매도 맞아야 할텐데? 소년들: 무식하기보다는 매 맞는 게 차라리 낫겠어요. 그러나 선생님은 친절하시고 괜히 매를 때리지 않으신다는 걸 저희는 알고 있어요. 선생: 너희는 무슨 일을 하니? 첫 번째 소년: 전 수도사가 될래요. 하루에 일곱 번씩 형제들하고 노래를 불러요. 그 사이에 라틴어를 배우고 싶어요. 선생: 이 친구들은 무얼 하는지 알고 있니. 첫 번째 소년: 농부도 있고 양치기도 있고 소치기도 있고 사냥꾼도 있어요. 그리고 어부, 행상, 상인, 구두 만드는 사람, 빵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선생: 농부 너는 무슨 일을 하니? 농부: 아주 고된 일을 열심히 합니다. 새벽에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쟁기질을 합니다. 날마다 2천 평 이상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소년마다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는다. 소년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최고라고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선생: 자 조용히들 하려무나. 각자 서로를 도와주어라. 자기 일을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사제이든 수도사이든 평신도이든 군인이든 누구라도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해야 한다. 일에 힘쓰고 분수를 지키도록 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점잖게 행동해라. 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걸어라.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제단에 공손히 절을 해라. 그리고 조용히 서서 같은 음으로 찬송을 하고 죄 용서를 구하도록 해라. 교회는 어린 소년들뿐만 아니라 나이든 학생들도 가르쳤다. 교회의 주도로 신학을 가르치기 위한 대학교들이 설립됐다. 대학교는 하나님에 관해 가르쳤고 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법학과 의학도 가르쳤다. 대학교 선생들은 석사나 박사로 불리웠다. 그들은 서로 논쟁을 벌임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폈다. 학자의 논쟁이 줄어들고 눈치 보기만 한껏 늘어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더욱 이단이 기승을 부리고 목회자들은 괜한 일에 이리 몰려다니고 저리 몰려다닌다. 202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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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8_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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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 주신 말씀_ 민수기 6: 24~27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화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몇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민 14: 22) 위 말씀은 가데스바데아 바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중 선발된 정탐꾼 열두 명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한 후 돌아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제사장 나라’ 계약을 파기하고 애굽의 노예로 살기를 선택하자 하나님이 보이신 분노의 말씀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은 열 하루면 가고도 남을 가나안 땅을 40년을 돌아서 가게 되고 하나님을 거역한 출애굽 세대는 모두 광야에서 죽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은 40년간 변함없이 만나를 내려주셨고 저들의 의복을 헤어지지 않게 하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항상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는 사람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게도 수없이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은혜와 영광을 보면서도 쉽게 믿음에서 약해지고 약속을 잊어버리는 인생! 그는 바로 ‘나’일 수도 있다. 내 인생 모든 날은 차치하고 근래 3년간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이적과 은혜만은 단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되리라! 아멘.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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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삶이 되다_ 복과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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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3_ 사람을 먹는 인종
- Leonardo da Vinci(1452-1519)-The Last Supper(1495-1498) 사람을 먹는 인종 한껏 달군 빛으로 태양이 더위와 칙칙함을 보내는 8월이다. 열매가 딴딴히 영그는 이 계절이면 우리네는 늘 상 해묵은 부채를 정리하지 못한 찜찜함으로 몸과 마음을 더욱 뒤척인다. 그 개운치 못함이란 기실 해방이란 것이 된 지도 어언 수십 개 성상이 지났음에도 친일파 문제를 매듭짓지 못함이다. 이제 계절이 계절이니 만치 ‘국화 옆에서’가 아니라 해를 바라보는 꽃 옆에 서서 소태를 씹듯 한 편의 시를 읊조릴까 한다. 일본 칼이 행세하던 그 시절엔 그들을 위해 가미가제 공격 대원을 부추기는 그런 시를 썼던 서정주 씨가 이런 시를 써 내렸다. 해와 달이 문둥이에게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붉은 꽃 같은 울음을 밤새 우웁니다. 한하운의 ‘나는 문둥이가 아니 올소이다’라는 나환자에 대한 자조적인 시도 있다. 그럼에도 나환자의 시에 관한 한 여인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한 서정주의 이 시만큼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게 또 있을 성 싶지가 않다.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이 레프라균이라는 나균을 발견함으로써 치료 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이병은 가히 절망의 병이었다. 그래서 그 옛날 나환자들에게 오늘날 쇠뜨기 풀이 어쨌든 나병에 특효라는 해괴한 치료법이 차츰 나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연스러운 달이 보리밭을 휘영청 밝히는 밤에 보리 김을 쐬며 얼라를 잡아먹으면 나병이 씻은 듯 가신다는 소문이었다. 나환자들 가운데에는 물색없는 이런 해괴한 소문을 몸소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혹간 있었던 모양이다. 오죽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냐 싶지만 자기 몸 하나 낫겠다고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심성 앞에는 입만 벌어질 따름이다. 초대교회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로마인들 사이에 쫘하니 퍼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육제를 열어 어린애들을 잡아먹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비밀 모임들에서 성만찬을 행한데서 비롯됐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 식사 때 “이 빵은 내 몸이고 이 포도주는 내 피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임 때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만찬을 행했다. 이런 내용을 알 길이 없는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가당찮은 소문을 자기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두 귀로 똑똑히 들었노라고 여기저기 입을 놀릴 만도 했다. 당시의 무지렁이 민중들은 이런 무서운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살려둔다면 그 땅에 온갖 재앙을 가져오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악함은 신들을 노엽게 하여 괘씸한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애꿎은 일반 민중들까지 벌을 받는 피해를 입힐 것이었다. 가축이 일없이 죽었다거나 로마의 젖줄인 티베르 강물이 강둑을 넘었을 때 이방인들은 고개를 외로 꼬며 입을 열었다. “이것 보라구! 사람 잡아먹는 그리스도인 녀석들을 사자들에게 던져 버리자구. 이 녀석들을 그대로 뒀다간 우리가 제 명에 살기 어렵다니까 그래”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고개를 너나없이 끄덕거렸다. 20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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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3_ 사람을 먹는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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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12. - 로마성벽의 낙서
- The Fire of Rome by Hubert Robert (1785) 로마성벽의 낙서 그리스도인들은 한동안 전쟁에 나가지를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노예를 소유했지만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고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의 권리를 그들에게 주었다. 옛날에 노예였던 사람이 로마의 감독이 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본의 아니게 생긴 아이나 허약한 아이를 남몰래 숲에다 버린 뒤에 죽게 하거나 강도들이 밤 줍듯이 집어가게 하지를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인 여성이 이방인과 결혼을 해서 딸을 낳는다면 애 아빠는 아주 유들유들하게 『거 뭐 갖다 버리지 그래』라고 말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어머니에겐 그런 말이 전혀 씨가 먹혀들지를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인 부인이 죽는다면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묻힌 곳과는 동떨어진 카타콤에 동료 신자들에 의해 안장됐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습성과 관행이 이러다 보니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꽤 까다로운 별난 종자들 내지는 심지어 『인류의 적』이라고까지 생각했던 이유를 어림잡을 수도 있을게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당치 않은 거짓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로마 전역에 소문이 퍼져 떠들썩하게 되었다. 하루면 너끈히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발 없는 이런 소문이 이방인들의 증오를 하루가 다르게 커지게 만들었다. 낳아주고 키워주고 황제 자리까지 애써서 안겨준 서태후 같은 어머니를 네로는 살해했다. 그는 이제 거칠게 없는 로마의 황제가 됐다. 네로가 신나는 황제 생활 십 주년 되던 해인 AD64년에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로마가 활활 탈 때 분잡을 떨기는커녕 황제 네로는 가뭇없는 불길을 바라보며 하프의 반주에 곁들여 시를 지어 읊조렸다고도 한다. 황제의 시심에 영감을 준 이 대화재는 로마시의 거의 반을 태웠다. 이 엄청난 재난의 방화주범은 황제라는 소문이 로마 장안에 차츰 퍼지기 시작했다. 시절이 하 수상해지다 보니 황제는 어떤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인 희생양이 아니라 예술적인 희생 모델을 찾아 나섰다. 왜냐하면 황제인 네로는 정치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로마 방화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은 로마 사회에 융화되지 않고 자신들의 관습을 극구 고집하며 살던 터라 그들에 대한 반감이 로마인들에겐 어떤 대상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들의 뒷배를 봐주는 정치인이나 어떤 세력이 세모의 구원파와는 달리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네로에게는 로마 방화의 맞춤한 희생양이 되고 호시탐탐 벼르던 로마인들에게는 맞춤한 분풀이 대상이 되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걸쭉한 비난과 죄명을 들씌우고 그들을 십자가에 꽝꽝 못을 박았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에 역청을 붓고 밤에 네로의 정원 뜰에서 저 어둠을 밝히는 관솟불 마냥 불을 붙여 태웠다. 그 밤에 네로의 정원에 초대받아 술들로 불콰해진 내노라 하는 로마인들은 불타는 그리스도인들을 적이 바라보며 잘코사니 했다. Nero's Torches 로마 시민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당나귀 대가리를 숭배한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 맹랑한 소문을 로마의 성벽 한 귀퉁이에다 보란 듯이 낙서처럼 그림을 그려 휘갈겨 놓은 이방인도 있었다. 이 낙서에 있는 말의 뜻은 “알렉사메노소는 그의 신을 경배한다.”이다. 이 낙서의 언어는 헬라어이다. 그것은 헬라인들이 당시 아주 많이 로마로 이주했기 때문이었다. 202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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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12. - 로마성벽의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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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1_ 그리스도인의 삶
- The cathedra of the Pope in the apse of St. John Lateran, the cathedral of Rome 그리스도인의 삶 전도자는 말하고 있다. “자고로 해 아래 새것이 없노라.” 이 해 아래 새로운 인종이 생겨났다. 이 인종에게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 바나바가 다메섹 가는 길녁에서 회심한 사울을 굳이 데리고 안디옥에 왔다. 그들이 그곳에서 한 일 년간 하는 일 없이 묵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이 새로운 인종에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인종 명이 부여됐다. 새로운 인종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새로움에 걸맞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그리스도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쯤이야 별 해로울 게 있겠느냐고 생각할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도 여의치를 못했다. 그 당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병원들이란 게 거의가 치료의 신이라는 아이스쿨라피우스(Aesculapius)의 후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자들이 입원해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을 때 사제가 병원 복도를 시계추 마냥 오르락내리락하며 환자들의 치료를 돕는답시고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소가 되새김질하듯 읊조리고 다녔다. Statue of Asclepius, exhibited in the Museum of Epidaurus Theatre. 혹자는 그리스도인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야 뭐 어려울 게 있었겠느냐고 생각하며 눈을 말똥거릴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그리스도인에게는 형편이 썩 좋지를 못했다. 이유인즉 당시의 교과서들이란 게 이방 신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이야기들이 아니라 참된 사실로 넙죽넙죽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과 관련된 일들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인 조각가는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직업에 종사함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고객들이 원하는 조각품에는 너나없이 우상 새기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주문을 받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인 조각가는 못마땅하여 외면해야만 했다. 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한사코 행하지 않은 일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검투사들이 아귀다툼하는 격투장에 가지를 않았다. 로마인들은 단순히 군중의 즐거움만을 위해 전쟁 포로들과 노예들을 격투장에서 어느 한 편이 죽기까지 서로 싸우게 했다. 어느 한 편의 검투사가 힘에 부쳐 땅에 코를 박고 쓰러지면 관중들은 열광하며 엄지를 곤두세웠다가 아래로 틀었다. 그러면 숨을 몰아쉬며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흡뜬 검투사는 쓰러진 검투사의 목을 칼로 찔렀다. 피가 울컥 솟아 땅을 흠씬 붉게 물들이면 관중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좋아들 했다. 오늘날의 우리들이 자그만 바보상자를 통해 타이슨의 쇠뭉치 같은 주먹을 얻어맞고 쓰러지는 복서를 보고 좋아하듯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연극들이 잔인하고 조잡했기 때문에 극장에 가지를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힘에 겨운 일을 혼자 이루려고 온 힘을 다하면서도 법정에 가지 않았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다툼이 생기면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발전해 교회의 감독으로 하여금 분쟁의 잘잘못을 가리게 했다. 교회의 감독은 카세드라(Cathedra)라고 불리는 의자에 앉아서 교인들의 다툼을 심리했다. 나중에 이 의자가 교회 안으로 옮겨지게 되자 그 교회를 카세드럴(Cathedral)이라고 불렀다. 카세드라 위에 비둘기가 한 마리 앉아 있었는데 이것은 감독이 올바르게 결정하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했다. São Paulo Cathedral, a representative modern cathedral built in Neo-Gothic style. 2020-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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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1_ 그리스도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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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0_ 어느 총독의 편지
- Painting of Jan Hus in Council of Constance by Václav Brožík. 어느 총독의 편지 늘 똑같은 일과가 시작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 황제는 대충 머리를 빗고 세수를 했다. 그래도 붙어있는 눈꼽을 검지로 때어낸 뒤 아침을 거른 채 집무실에 들렀다. 자기 의자에 몸을 앉힌 황제는 오늘을 어떻게 보낼까 하며 눈을 껌벅거렸다. 그런 그에게 각종 결재서류가 듬직하게 전달됐다. 상을 찌푸린 그의 눈에 편지가 한 통 눈에 얼핏 띄었다. 이 편지는 어느 속주의 총독이 오현제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 트라야누스에게 괴이쩍은 사안에 대해 보고하는 편지였다. 총독은 어찌했으면 좋을지를 현명한 황제에게 여쭙고 있었다. AD 1백 년 경에 씌여 진 이 편지는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폐하, 소신은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소신은 그런 송사를 이제까지 접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년들과 소녀들을 어른들처럼 혹독하게 벌을 줄까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만으로 벌을 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인이라도 실제로 어떤 나쁜 일을 저질렀을 때 벌을 주어야 될까요? 피의자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하면 풀어줘도 될까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한 사람들의 경우에 소신이 처리해온 바는 그들을 로마시민이면 로마에 송치하도록 했고, 로마시민이 아니면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소신이 믿기로는 그들이 아주 고집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소신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존엄하신 황제 폐하의 제단에 분향을 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이나 주었습니다. 소신이 듣기로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한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정해진 날 새벽 전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전혀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그들은 또한 주의 만찬이라고 하는 공동식사를 먹기 위해서도 모입니다. 그들이 비밀 집회를 금하는 소신의 명령이 내려진 뒤로는 이걸 자제해오고 있기는 할지라도 말입니다. 소신은 여집사라고 하는 여자 노예들을 몇 명 고문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정신 나간 사상에 빠져 있다는 이상의 어떤 나쁜 것을 전혀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어리석은 사상에 감동을 받아 신전들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만 지금은 엄격한 법의 금지로 사람들이 황제의 신전으로 서서히 돌아들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치는 매우 잔인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위정자들의 조치에 대해 한 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도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한다. 로마제국의 법과 평화 속에서 여느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행했던 많은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은 못마땅하여 외면했다. 그러한 일들이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이방 종교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릇된 것들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는 위대한 로마 사회의 시민들에게는 그릇되고 괴이하고 화를 돋우는 것이 되었다.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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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0_ 어느 총독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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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9_ 새로운 인종
- Stele Licinia Amias Terme 새로운 인종 싱그러운 여름이다. 이 여름에 장대비가 억세고 모질게 내릴지라도 초목들의 짙푸르름과 쑥쑥 자라남은 은빛 잉어가 없어지는 것처럼 곤두박질치는 폭포를 거슬러 솟구치는 그 모습을 닮는다. BC 753년에 티베르강이 낮게 흐르는 여울 위 언덕에 옹기종기 세워진 촌락으로 출발했던 로마가 이제는 제국이 되었다. BC 27년에 옥타비안이 오랜 세월에 걸친 내란을 평정하고 로마의 진정한 최초의 황제가 됐을 때 로마는 이제 모든 것이 무르익는 여름에 비교될 수 있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된 옥타비안이 다스리게 된 로마제국은 거대하고 강력했다. 근 3백 년에 걸친 로마의 평화를 만끽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7백 년이 넘는 엄청난 세월을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리고 자신들의 영토 확장 전쟁에 참전하고 권력투쟁에 얽힌 내란에 부대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 로마는 주전 1세기 말과 주후 1세기 말에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님되시는 예수님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제국을 호령하던 BC 4년에 태어나셨다. 옥타비안의 치하에서 어림하여 1억에 이르는 로마인들은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을 전쟁만큼이나 신물나게 누릴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확립된 로마의 평화는 간혹 짧은 단절을 제외하곤 거의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싸움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로마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일반 민중들은 그러한 전쟁을 모르거나 아예 무시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주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건설되긴 했을지라도 로마제국 전역에 거미줄처럼 잘 짜여진 도로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안겨 주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의 전파를 널리 전하는데 이 도로망이야말로 엄청난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Vienne RomanTemple 프랑스 비엔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신전 로마인들은 그들의 황제를 숭배했고 황제를 위한 제단에서 분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로마인들은 군인들로 봉직하면서 야만인들에 대항해 제국을 수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군대 복무를 찬성하지 않았다. 로마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많은 다른 일들도 그리스도인들은 행하지를 않았다.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쯤이거나 그 당시의 이런저런 종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신자들의 수가 날이 다르게 늘어가고 그리스도인들의 남다른 신앙생활의 습관에 그것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종교임을 로마인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로마 사회의 틀과 알맹이를 깨뜨리는 아주 위험스러운 종교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모든 인종들로 구성되었다. 또 한 그들은 신분의 귀천이 없이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에게 나타내고 어려운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풀었다. 콰드라투스(Quadraatus)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이라고 소개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나 기존의 종교인들과 비교하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인종과 전혀 다른 이 땅에 새로 생겨난 인종으로 생각할 때만이 이해가 될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이제 이 새로운 인종들 앞에는 무서운 시련이 눈을 번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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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9_ 새로운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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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_ 가이사 아구스도
- Augustuksen mauseleomi 가이사 아구스도 제사장 사가랴가 벙어리 고생까지 하며 늘그막에 어렵사리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으면 좋겠냐고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낳은 지 팔 일이 되어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한 뒤로 이제까지 말 못하는 진짜 벙어리가 되어버린 주름이 깊게 패인 늙숙한 아버지가 손짓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쓰게 서판을 달라고 했다. 그는 서판을 받아들자 자기의 성을 따라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고 요한이라고 썼다. 모였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제껏 벙어리였던 아이의 늙은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아니 자네들 왜들 그렇게 어정쩡하게들 서 있나. 그 아이의 이름은 천사가 그렇게 지어준 것일세.” 사람들은 두 번째 놀랬을 때 눈이 커질대로 커졌었기 때문에 세 번째의 놀람에는 눈들이 오므라들고 입이 해벌쭉해졌다. 요한이라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다. 요셉이라는 젊은 목수도 나사렛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그의 고향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요셉의 이 고향 방문길에 동행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마리아였다. 그녀는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 천하에 칙령을 내린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BC 63 - AD 14)였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로마 정치 판도에 뛰어들게 된 것은 원로원에서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유서에 의해 양자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로 옥타비안이라고 불렸다. 옥타비안은 카이사르 조카의 아들이었다. 이 솜털이 보송거리는 청년은 자세하고 빈틈이 없어서 로마 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공화정의 대의 정치를 숭상하는 키케로의 주목을 받게 된다. 키케로는 이 청년을 이용해 카이사르에 의해 전제정치로 가고 있던 로마를 다시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옹골찬 계획을 세웠다. Cicero Denounces Catiline, fresco by Cesare Maccari, 1882–88 키케로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음을 그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의뭉하고 능청스러운 키케로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키려다가 솜털 보송거리는 청년에게 오히려 이용당하고 만다. 옥타비안은 젊었음에도 약삭빠르고 처신이 능숙했다. 암살당한 자신의 양부 카이사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서 그는 양부의 부하들이었던 퇴역 군인들과 현직 군인들의 동정을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수완을 주위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게 발휘했다. Marcus Tullius Cicero 키케로는 옛날의 명성뿐이었지만 이 애송이 옥타비안은 로마제국의 상당한 병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이 강화되고 확고해지자 타협과 양보의 손을 거두어들였다. 키케로가 원로원에서 탄핵을 받은 몇 달 뒤 옥타비안은 여세를 몰아 안토니오와 손을 잡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Castro Battle of Actium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강력한 안토니오의 군단과 이집트 집권자 클레오파트라의 군대가 합친 거대한 연합군을 옥타비안은 행운에 힘입어 쉽사리 패배시켰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선지 먼저는 클레오파트라가 싸움이 시작되자 도망을 가고 다음에는 그녀를 안토니오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로마에 평화가 찾아왔고 최초의 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Statue-Augustus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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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_ 가이사 아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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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_ 가이사의 권력
- Murder of caesar 가이사의 권력 바람이 살랑이는 서늘한 그늘에 앉아 책을 읽던 중년의 카이사르가 목놓아 울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란 측근들이 왜 이러시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물을 글썽인 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물쩍지근하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보고 있는데 아, 글쎄 이 사람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세계가 좁다고 누비고 다니지 않았지 뭔가. 그런데 나는 벌써 서른다섯이나 됐는데 이렇다 할 뭐 내놓을 만한 게 없으니 내 꼴이 뭐란 말인가!” 그랬던 카이사르가 지금의 유럽인 갈리아 지역을 정복했고 루비콘강을 건너 자신의 나라를 점령했다. 그는 이제 어정쩡한 세력가가 아니라 로마의 진정한 실권자가 되었다. 어떤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권력이란 손에 쥔 모래와 같다.” 다시 말해 권력은 쥐면 쥘수록 손아귀에 움킨 모래가 움킬수록 손에서 빠져나가듯 된다는 역설이다. 이 말을 그 현실주의자 카이사르도 예전에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2년 임기의 독재관을 두 차례나 연거푸 해먹은 뒤에 BC 49년 10월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예 종신 독재관에 눌러앉고 말았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를 위해 신께 제사 드리는 사제단까지 구성됐다. 이 사제단의 단장은 카이사르의 충직한 심복이며 나중에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집정관 안토니우스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 인생에는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도 있다는 것이다. 종신 독재관으로 절대 권력을 적절하게 휘두른지도 다섯 해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화려한 옷을 걸친 절대 권력자 카이사르의 아내가 어느 날 무섭고 흉칙한 꿈에 가위눌려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 날이 주님 태어나시기 전 44년 3월 15일이었다. 또한, 그날은 원로원에서 로마를 제외한 다른 속주 지역에서는 카이사르를 왕으로 부르자는 결의를 통과시키기로 한 날이었다.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관을 갖추고 있는 남편에게 지난밤의 불길한 꿈 이야기를 들먹이며 그 날의 원로원 출두를 만류했다. 게다가 이날 결의할 안건이 복잡미묘하고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라 그의 측근들도 조심스럽게 그의 원로원 출두를 만류했다. 바로 이날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가 옛날 청년 시절 사랑했던 애인의 아들이라고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브루투스를 위시하여 군주제의 독재가 아닌 대의 정치의 공화정을 희구하는 원로원 의원 40명이 저마다 단검을 품은 가슴을 다독이고 있었다. Retrato de Julio César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현실주의자였고, 기회주의자였고,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을 장악한 뒤에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기대했던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실망했던 사람들이 적지 아니했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장엄한 역사와 신의 섭리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었는가. 부인과 측근들이 원로원 출두를 애써 만류하던 날 절대 권력자의 위엄으로 그 만류들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원로원에 나갔다. 그리고 자기가 무찌른 폼페이우스의 흉상 아래서 난자당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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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_ 가이사의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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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_ 가이사의 쿠테타
- Augustus Lugdunum principes iuventutis 671253 가이사의 쿠테타 아마 어슴프레하게 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가이사(Gaius Julius Caesar)는 골 지역(라틴어의 갈리아) 사령관에 걸맞는 말에 올라 병사들에게 외쳤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림자처럼 도열 해 있던 병사들이 고래고래 함성을 질렀다. 텁텁한 입을 다문 가이사는 지쳐서 눈이 쏙 들어간 눈을 껌벅거리며 말의 배에 냅다 박차를 가했다. 말은 앞발을 곰처럼 쳐들고 허우적대며 힝힝거리다가 쏜살같이 물을 요란하게 튀기며 루비콘강을 건넜다. 본디 루비콘강은 미사리 근처의 한강만큼이나 작은 강인데 지금은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가 들어있는 고대의 골(라틴어로는 갈리아) 지역과 이탈리아를 가름하는 경계선이었다. 관례상 로마의 장군은 이 강을 건너 이탈리아의 로마로 들어 올 때에는 군사 지휘권을 포기해야 했다. 가이사가 이 강을 건너던 주전 49년 1월 10일에 즈음하여 로마의 시국은 뒤엉켜 타고 내리는 전철 모습 같았을 것이다. 귀족 중심의 원로원과 일반 시민 중심의 민회는 무슨 일이든 티격태격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몇 안 되는 과두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에 눈이 벌겋다 못해 검붉어졌다. 대의 정치에 오랜 기반을 둔 로마 공화정의 합리적인 민주주의가 혼란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신나는 골 지역 사령관직의 10년 임기가 다 되어가는 가이사는 임기를 더 연장받고 싶어했지만 원로원에서는 영향력이 날이 다르게 커가는 그에게 더 이상의 권력 증대기반을 주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이제 자신의 운신 폭이 좁다 못해 머리 둘 곳까지 없어질 것을 눈치챈 가이사는 자신의 선배 술라를 본 따 로마의 두 번째 쿠데타 주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주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크라수스처럼 돈이나, 폼페이우스처럼 명성을 구하지 않고 실제적인 권력을 바랬다.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무혈혁명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대를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격파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암살자는 이집트 톨레미 왕의 고문인 로마인이었다. 암살자는 가이사의 칭찬과 환심을 살 줄 알았는데 이집트에 진군한 가이사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때 가이사는 이집트의 톨레미 왕과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하게 된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고 가이사는 지원의 대가로 그녀를 통해 아들을 하나 얻게 되었다. Kunsthistorisches Museum - Gaius Julius Caesar 우리말의 가이사는 본래 라틴어로는 카이사르(Caesar)라고 발음하고 영어로는 시저라고 발음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 성경에 나오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에서 가이사는 우리가 신소리 하듯 개 사러 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골(Gaul) 지역 사령관직의 임기 말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일컫는 황제의 뜻으로 발전된 대명사이다. 권력을 쥔 카이사르는 그의 쿠데타 선배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는 달리 절대 권력을 향해 줄달음쳤다. 202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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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_ 가이사의 쿠테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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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_ 로마, 로마
- Capitoline Wolf, sculpture of the mythical she-wolf suckling the infant twins Romulus and Remus 로마, 로마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마게도냐 관리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얼굴색이 하얗게 되어 감옥에서 제발 나가주십사고 바울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세계는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인 그리스인들이 득세하던 때가 아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 고대의 로마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관리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사건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의 모든 사건들이 사실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란 대체로 언제나 유익하다. 특히 로마의 역사는 학자들, 정치인들 및 일반인들에게 항상 유익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동양인들에게 중국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생각해 볼 때 기마 경찰이 신은 장화처럼 생긴 로마는 세계제국의 중심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는 20세기 현대의 시점에서는 미국 방송인들이 흔히 뇌까리는 초강대국이 될만한 자원이 없다. 고대적 기준에서 본다면 특별히 그리스와 비교해 볼 때 이탈리아반도는 기본적으로 부를 타고 났으며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Rome is located in Italy 이탈리아는 반도이면서도 우리 한국과 달리 광활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경 9백 60km나 되는 아페닌산맥이 이탈리아반도의 남북으로 척추처럼 뻗어 내려오고 있지만 우리의 소백산맥이나 그리스의 산들처럼 나라를 서로 갈라놓지는 않았다. 더구나 기름진 이탈리아의 농경 지역은 그리스의 경작이 가능한 계곡보다 훨씬 넓었다. 철과 동 등의 광물과 귀금속도 이탈리아는 생산했다. 로마의 진정한 값진 부는 농경지, 목초지 및 산림 등에 있었다. 더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력을 로마는 풍성하게 공급받았다. 그로써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에서 생기는 군대의 결원 보충을 용병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내에서 계속해서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불타는 트로이를 용케 탈출한 아이네아스(Aeneas) 왕자의 후손인 레아(Rhea)가 레무스와 로물루스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그 가운데 로물루스가 구약 성서의 호세아 선지자가 눈물겨운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던 BC 753년에 티베르 강변에다 로마를 창건했다. 로마(Roma)라는 이름은 그것의 창건자 로물루스(Romulus)에게서 따온 듯싶다. 로마라는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수 세기 뒤에 로물루스란 이름이 창안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BC 8세기 중엽 로마는 티베르강이 흐르다가 얕아지는 여울이 있는 언덕 위에 사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살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고학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리고 시장이 서고 재판이 열리는 등 기타 공적인 집회에 쓰인 대광장이었다고 로마인들이 침이 마르게 칭송하던 포럼(forum)이라는 것도 실상 요즘 알고 보니 시체를 묻는 매장지에 불과했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로마 최초의 정착지는 전설이 전하는 대로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김을 모락거리던 시골 동네였다. 그 시골 마을이 수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세계 지배자의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툭하며 싸웠고 거의가 이겼다. BC 2세기 이후에는 영국지역과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지역까지 뻗친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20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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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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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_ 로마,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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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_ 바울의 개종
- Bab Kisan, believed to be where Paul escaped from persecution in Damascus 바울의 개종 다시 사신 주님의 용서를 받고 용기를 얻은 베드로는 제자들을 모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주님을 따르라고 사람들에게 뜨겁게 호소했다. 그 결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그리스도교가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어떤 조처를 취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인 대책회의는 강공책을 쓰기 전에 먼저 불온한 무리의 지도자를 불러다가 위협을 해서 그런 허튼소리를 전파하지 못하게 입을 막자는 결정을 내렸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베드로를 소환해서 앞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무서운 기세로 으름장을 놓았다. 덤덤히 서 있던 베드로는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게 옳은지 당신들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라고 대답했다. Greco, El - Sts Peter and Paul 그리스도인들을 앞장서서 박해했던 이들 유대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람도 섞여 있었다. 이 사람은 다메섹(현재의 다마스커스)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양으로 대제사장에게서 수색, 체포 허가공문을 받았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사람은 홀연히 하늘에서 비추는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얼결에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을 나타내는 초대교회의 그림이 하나 있다. 나중에 그는 칼과 책을 든 모습의 그림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Caravaggio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했었던 이유는 그들이 유대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자 음식, 금식 및 의식 등에 대한 율법들이 구속력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율법들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그 율법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반대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법을 깨뜨리셨을지라도 그가 유대교 성일들을 지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may) 문제이지 반드시 해야만 되는(must) 문제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 문제에 대한 열띤 논쟁에서 바울이 이겼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파자가 되었다. 헬라의 여러 도시들과 로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나셨음을 전파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을 적대했다. 이방인들도 바울을 적대했는데 그들이 애지중지 섬기는 우상이나 신상들을 바울이 신은커녕 없애 버려야 되는 하찮은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에베소에서는 등록금 문제로 데모를 죽기 살기로 해댄 어느 대학생들처럼 소동이 일어났다. 서슬이 시퍼런 로마 총독부 관리들은 이런 소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란의 원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은 바울을 무지하고 우악스럽게 체포했다. 로마에서 오랜 구금 끝에 바울은 사형을 당했다. Rubens apostel paulus grt 202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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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_ 바울의 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