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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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9년에 카르카손에서 추방되고 있는 카타리 신자들

 

믿음을 지킨 사람들

 

이맘때면 벚꽃 같은 어린이 세상이 되곤 했다. 공휴일의 어린이날에 서울 시내 고궁을 어린이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5월은 그것 하나만으로도 푸른 어린이 세상일 수 있었다.

 

홍제동에서 창경원까지 걸어서 원숭이며 호랑이를 구경하러 왔다. 집에서 밥을 먹고 출발한 뒤로 무엇으로 허기와 갈증을 누르고 다녔는지 기억이 아슴하지만 어쨌든 즐거운 하루의 어린이날이었다. 요즈막 어린이들에게는 도무지 눈만 껌벅거려질 일이겠지만… 허기사 30년이 지난 과거 지사이기두 하구.

 

사람들의 기억에서 마르세이유를 떠났던 소년 십자군 5천 명은 까마득히 잊혀졌었다. 그런데 18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사람의 생존자가 나타났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18년 어간에 일어났던 일을 말한 실상은 이랬다.

 

일곱 척의 배에 5천 명이 나눠 타고 마르세이유 항구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줄 바다로 나아갔다.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폭풍우가 밀어닥쳤다. 두 척이 암초에 부딪혀 침몰했다. 승선했던 소년들은 전부 죽었다.

 

배를 내준 친절한 상인들은 야비한 노예장사꾼들로 돌변했다. 그들은 나머지 다섯 척에 승선한 소년들을 죄다 모하메드 교도들에게 팔아넘겼다.

 

성인이 되어 돌아온 생존자는 눈을 빛내며 사람들한테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 길고 모진 세월 속에서 노예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좀 낫게 할 요량으로 신앙을 버렸다는 소년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모하메드 교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알라 신앙을 받아들이라고 우리들을 끊임없이 회유했죠."

 

소년 십자군은 거룩한 땅을 결코 보지도 못했지만 신앙을 지켰다. 눈곱만한 이익만 눈에 보여도 신앙의 도리를 헌신짝 팽개치듯 하는 요즘 세태에 비한다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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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 신자들에 대한 화형

 

교회는 신앙을 지키고자 무진 애를 썼다. 십자군의 실패는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룩한 땅을 이교도에게서 탈환하는데 실패하고 패잔병으로 집에 돌아온 많은 십자군들은 지치고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의기소침해진 그들은 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정말 선하신지 어떠신지를 의아히 여겼다.

 

그러한 의심이 마음에 박힌 그들이 귀향길에 불가리아를 지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세상이 악하고 육체도 악하다는 것을 믿는 옛날 영지주의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상심한 십자군들은 이런 사상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카다리파라고 불렀다. 카다리는 순수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카다리파는 악하다고 규정된 세상과 육체와 되도록 관계를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프랑스 북부로 돌아갔고 곧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십자군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에 어떠한 전쟁에도 나가려 들지 않았고 심지어 닭 모가지를 비트는 일조차도 질겁했다.

 

그들은 결혼조차도 꺼렸다. 비록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주 소수이기는 했을지라도 말이다. 육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어떠한 육체의 형상도 만들지 않았다. 각기 이유가 다르긴 하지만 카다리파는 성상 파괴주의자들과 닮은 데가 있었다.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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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6_ 믿음을 지킨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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