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제108회 총회 임원 및 상비부장 후보 등록이 2023년 7월 3일(월) 오전 10시부터 총회회관에서 제108회 총회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배광식 목사, 서기 허은 목사) 주관하에 고영기 때문인지 소강석이 좋아하는 심의분과위원장 이종철 목사 안내로 진행됐다. 달아오르는 선거 열기와 장마를 앞둔 폭염도 달랠 겸 중국 굴기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기원전 145년∼기원전 90년)이 전하는 서늘한 역사 한 토막을 살펴보자. 사마천이 죽음과 바꾸면서까지 완성하고자 했던 역사서가 바로 ‘사기(史記)’이다. 그 '사기' 가운데 실린 일화가 골계열전(滑稽列傳)인데 중앙집권 과정에 국가권력과 지방 토호 기득권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라 볼 수도 있다. 혹은 전국시대 초기니 국가건설 중 계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 내용은 이렇다.


고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Warring States period, 기원전 476년 또는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초기 최강국이었던 위(魏)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 위나라 성세를 만든 위문후(魏文侯, ? ~ 재위 : 기원전 445년 ~ 기원전 396년)라는 군주가 있었는데 그는 인재를 사랑한 왕이었다. 그는 위나라를 전국시대 최초로 패국으로 만들었다. 그의 휘하에 서문표(西門豹, 산서성 윈청 시 샤현 출생)가 있었다. 위문후는 군사적 요충지 업(鄴) 땅에 서문표를 파견했다. 서문표가 부임해보니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성안이 한산하고 왕래하는 사람이 적었으며, 민심도 좋지 않았고 백성들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서문표가 장로(長老)들을 불러 백성들의 괴로움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한 장로가 말했다.


"강의 신 하백(河伯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압록강의 신인데 태양신 해밝이라고도 하며 중국 신화의 하백과 동일시된다)에게 신붓감을 바치는 일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업의 삼로(三老·관리)와 아전(하급 관리)들은 해마다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갑니다. 거둔 수백만 전 중에서 하백에게 신붓감을 바치는데 20만~30만 전을 쓰고 그 나머지 돈은 무당들이 나누어 가집니다. 무당이 돌아다니면서 어려운 집안 딸 중에 아름다운 처녀가 있으면 ‘하백의 아내가 될 것’이라며 데려갑니다. 10여 일 뒤 여자의 이부자리와 방석을 만들어 여자를 그 위에 앉힌 뒤 물에 띄워 보냅니다. 처음에는 떠 있지만 수십 리를 가면 물에 가라앉고 맙니다."


무당들이 하백을 모신다며 해마다 마을의 딸들을 희생시키고 있었다. 딸 가진 집들은 큰 무당 눈에 띌까 두려워 딸을 데리고 멀리 도망을 갔다. 갈수록 사람이 줄고 가난해지고 있었지만 무당들은 계속 "하백에게 신붓감을 바치지 않으면 물이 넘쳐 백성들이 죽을 것"이라고 했다. 서문표는 장로들에게 말했다.


“하백을 위해 신붓감을 바칠 때 나도 참석하여 처녀를 전송하겠소이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삼로와 아전, 유지들과 마을의 부로(나이든 어른)가 모두 모였고 구경하러 온 백성이 2천~3천여 명이었다. 두령 무당은 이미 일흔이 된 늙은 여자였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신붓감을 불러오너라. 아름다운지 직접 확인하도록 하겠다.”


무당 제자들이 처녀를 장막에서 데리고 나왔는데, 서문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무당과 삼로와 부로들에게 일렀다.


“이렇게 못생겨서야 하백이 기뻐하겠소? 수고스럽겠지만 큰 무당 할멈이 직접 하백에게 가서 다시 예쁜 처녀를 구해 보내드린다고 전하시오.”


곧바로 군사를 시켜 큰 무당 할멈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지켜보는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지만 서문표는 개의치 않았다.


“무당 할멈이 어째 오지 않고 이렇게 지체한단 말인가? 제자들이 대신 가서 소식을 전해야겠구나!”


군사를 시켜 제자인 새끼무당 하나를 강물에 던졌다. 조금 있다가 또 말했다.


“제자란 무당도 어찌 이리 시간을 허비하느냐? 다시 제자 하나를 보내 하백에게 사정을 전하도록 하라!” 


서문표가 입을 열 때마다 제자가 한 명씩 강으로 던져졌는데, 돌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문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무당과 제자들이 여자라 사정을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니 삼로들께서 들어가 하백에게 알리라”며 이번엔 삼로를 강물 속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아전과 고을 유지들을 지목해 한 사람씩 강물에 던져버렸다. 겁에 질린 이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땅에 부딪치니 이마의 피가 땅 위에 흐르고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그 이후로 업 땅의 아전과 백성들은 다시는 하백을 위해 신붓감을 바쳐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도망쳤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커다란 사회모순과 백성의 고통 뒤에는 주동자와 가담자, 방관자가 있다는 과학에 가까운 공식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지금 한국사회는 어떨까. 지금 한국사회에는 귀신과 망자, 초자연적 존재의 권위를 빌어 권력을 얻고 횡포를 부리고 국민을 속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무당이 단순히 점치고 치성 올리고 살풀이하는 개인 기복 서비스에 그치지 않고 김어준처럼 정치에 개입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있을까, 없을까. 만약 귀신과 망자를 팔아 사람들을 속여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있고 정치에 개입하는 사이비 언론인들이 있고 그로 인해 사회가 병들고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상징에 목을 매면 늘 실제나 사실은 소외되고 귀신이나 괴담이 주인이 되면 산 사람들이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태사공자서를 집필하던 도중, 사마천은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사마천은 이릉은 선전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패전의 책임은 대장군인 이광리가 져야 했으나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다. 따라서 이릉에 대한 변호는 무제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 여겨진 것이다. 사마천은 이릉과는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단순히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사마천의 변호는 무제의 미움을 샀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 무제는 옥에 갇힌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첫째 돈 50만 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둘째 사형, 셋째 궁형 셋 중 하나였다.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거세당하는 궁형을 받고 성불구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53만여 자의 한자로 저술된 사기의 총 130편 중 마지막 편으로 서문에 해당하며 사마천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것)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졌구나!"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기원전 97년 마흔아홉의 사형수 신분이 된 사마천이 사형보다 더 치욕스럽다는 궁형을 자청한 까닭은 미처 못다 한 말, 즉 평생을 준비해 온 역사서를 다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을 확률 20%에 도전한 무모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하늘조차 그를 데려가지 못했다. 이듬해 지천명 오십의 사내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그에게 씌워졌던 반역죄가 무고였음이 밝혀졌다. 세상에 이런 억울함도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억울함과 울분을 마지막 남은 일, 역사서를 쓰는 일에 쏟았다. 기원전 90년, 그의 나이 55세 무렵 역사서 '사기(史記)’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는 지나온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오래전에 보내온 친구 임안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썼다. 역사서에다가는 밝힐 수 없었던 궁형을 전후로 한 자신의 심경, 역사서를 끝내야만 했던 까닭,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 등을 격정적으로 밝혔다. 이 글이 중국 10대 문장의 하나로 꼽는 ‘보임안서’이다. 그 글에서 그는 토로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궁형을 선택하는 것이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었다. 거세의 치욕을 견디며 사마천이 살아남은 이유는 오직 하나, “지나간 일을 서술하여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것”(‘사기’, ‘태사공자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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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7년에 이르는 총회선거 ‘기본’은 언제나 총회와 노회의 향상이었다. 총회 선거 입후보 등록 첫날인 2023년 7월 3일 오전 10시 55분경 부총회장 오정호 목사(새로남교회·서대전노회)가 제108회 총회 총회장 후보로 등록했다. 이어서 부서기 김한욱 목사(새안양교회·소래노회)가 서기 후보, 전승덕 목사(설화교회·서대구노회)가 회록서기 후보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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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부총회장 경선 후보로는 김종혁 목사(명성교회·울산노회)와 남태섭 목사(대구서부교회·대구노회)가 등록했다. 장로부총회장 경선 후보로는 김영구 장로(장위제일교회·경기노회)와 이이복 장로(성남제일교회·성남노회)가 등록을 마쳤다. 총회 총무 경선 후보로 박용규 목사(가창교회·대구중노회)와 고영기 목사(상암월드교회·평양노회)가 등록했다. 부서기 경선 후보로 최인수 목사(수산중앙교회·경상노회)와 임병재 목사(영광교회·경청노회)가 등록했다. 부회록서기 경선 후보로 육수복 목사(전곡충현교회·강북노회)와 김종철 목사(큰빛교회·용천노회)가 등록했다. 부회계 경선 후보로 임성원 장로(다산교회·남대구노회)와 이민호 장로(왜관교회·경북노회)가 등록했다.


이날 임원 입후보 후보 등록에는 소속 노회와 총신신대원 동기생, 지지자들이 대거 몰려 선거 유세장을 방불케 했다. 그와 달리 부회록서기 경선 후보 김종철 목사만은 총회 공명선거 표본이라도 되려는 듯 조용하고 조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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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총회 역사 108년째를 맞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안과 혼돈을 벗어나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의 충분함을 알아차리는 연륜 깊은 믿음이다.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밀려오는 만족감은 닫힌 세계가 약속하는 ‘사색’의 만족감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더 큰 충분함은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무엇이든 쏟아지는 시대의 처방은 믿는 것이며, 그 답은 넓이가 아닌 깊이에 있다. 괴담과 사투 벌였던 전문가들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상식과 과학의 힘으로 바로잡았다. 진리와 진실은 외롭지만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성경은 절대적인 답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1-3


202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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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회 임원 선거의 힘과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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