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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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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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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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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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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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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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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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은급재단과 돼지
    왕을 위한 정치술을 설파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년 5월 3일 ~ 1527년 6월 21일)가 500년 뒤 2020년 3월 3일 공산주의 독재자에 목마른 문재인의 우왕좌왕을 예견한 듯 말했다. "질병은 초기에는 진단하기 어렵지만 치료하기는 쉽고,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진단은 쉬우나 치료가 어려워진다.“ 우울한 비관론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근거 없는 낙관론은 세상을 큰 혼란에 빠뜨린다. 중요한 건 현실을 직시하는 판단력이다.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자. 그리고 기도하자. 나부터 보호해야 한다. 그게 문재인 정권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키는 일이다. 2016년 7월 13일 총회회관 2층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제100회 총회 실행위원회(위원장 박무용)에서 몇 안 되는 총회 법학박사 가운데 한 사람 유장춘이 말했다. “법적으로야 잘 아시겠지만 은급재단 이사회에 (납골당 매각에 대한) 법적 권한이 있고 여기는 의결 총수로 충분히 해야 되고 (결의해 주면) 일을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여론의 문제고 법적인 문제는 은급재단이사회가 팔면 법적인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론을 충분히 청취해야 되고 총회결의는 이미 손해를 보더라도 매각하라는 것이 기본 결의 내용입니다. 여론을 청취한 다음에 이것을 진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은 최춘경 권사 측에 대한 납골당 매각을 제100회기에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리고 제101회 총회(총회장 김선규 목사)에서 격론 끝에 납골당 문제는 제100회 실행위원회 결의대로 매각 진행하도록 결의가 됐다. 김선규 제101회 총회장은 1월 23일 총회회관에서 신년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 해결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그 내부에 관계하고 있는 분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나름의 해법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컨트롤(조정) 가능한 문제들로 보고 있습니다...” 은급재단 이사회(이사장 김선규 목사)는 제102회 총회 개회일인 9월 18일 낮 12시 익산 전복궁 식당에서 전체이사회를 열고, 벽제 납골당을 27억원을 최춘경 씨에게 매각하는 건을 표결에 붙였다. 이날 이사회에는 감사 2명을 제외하고 13명 이사 전원이 참석했다. 표결 결과 3분의 2에 해당하는 9명이 매각 찬성 의사를 표시해 최종 매각이 결정됐다. 앞서 은급재단은 8월 11일 최춘경 권사와 27억원 매매계약서를 작성할 때 은급재단 이사 3분의 2(9명) 동의를 계약 단서조항으로 명기한 바 있다. 2017년 9월 21일 제102회 총회 넷째 날 오전 은급재단 보고 때 제101회 은급재단이사회의 납골당 매매 계약 수용 여부 논란이 일자 전계헌은 말했다. “(제92회) 총회는 어떠한 손해가 있더라도 팔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명한 김선규 은급재단 이사장이나 전 납골당 조사처리위원장을 역임한 박춘근 목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그 부당성을 우려하는 기사까지 보냈지만 그는 무시하며 ‘ㅋㅋ’ 문자로 다음 날 드러낼 흑심을 암시했다. 그는 충성 측을 편들고 총회 결의를 어기는 김기철 목사와 유장춘 박사의 말에 귀를 더 기울이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했다. 보고는 기각되고 총회 18년 적폐를 제100회 제101회 결의에 따라 처리한 이사장과 이사들에 대한 유장춘과 이남국 주도의 조사처리위원회가 결성됐다.2018년 1년의 조사결과 아무런 혐의도 발견하지 못했을 뿐안 아니라 그들이 소송에서 제출한 김성태와 강진상의 도달주의 사임 사유가 2017년 9월 18일 은급재단 이사회 결의에서 효력이 없다는 사실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유는 그 당시 그런 서류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총무 김창수 법인국 직원 박상범과 김은미 등이 2018년 4월 민사법원에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은급재단과 공모해 꾸몄고 그 조사처리위원회도 공모했거나 묵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할 탐욕의 돼지들이다. 2017년 8월 11일 벽제중앙추모공원 매매계약서의 제10조(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기하고 있다. 1. 갑 또는 을이 본 계약상의 내용에 대하여 불이행이 있을 경우 그 상대방은 불이행한 자에 대하여 서명으로 이행을 최고(재촉)할 수 있다. 단 그 이행 최고가 있음에도 상당한 기한 내에 이행을 하지 않는 경우라도 제9조(계약의 해제 등)에서 계약해제사유로 정한 것 외에는 본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 2. 갑 또는 을이 제9조 각 호 사유 외의 사유로 본 계약상 의무를 불이행하는 경우 상대방에게 그 이행의 최고를 받은 날부터 이행할 때까지 매매대금 전액의 1000분의 1(270만 원)을 매일 이행 강제금으로 지급하여야 한다. 벽제중앙추모공원 매매계약의 을인 최춘경 권사 측은 상기의 계약 조건에 따라 27억의 1000분 1인 270만 원을 매일 이행강제금으로 지급하라는 요구와 함께 계약이행 소송을 제기했다.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총회 결의를 지키기 위한 각고(刻苦)의 산물 은급재단의 납골당 매각보고를 무임승차 제102회 총회장 전계헌은 기각하고 납골당 16년 적폐 해결하라는 총회 결의 역행하는 흑심(黑心)을 드러냈다. 총회 기관지 기독신문의 기사 역시 총회 회관 관리책임자인 박상범 국장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지 전게헌의 은급재단이사회처럼 계약해지 된 성결교 충성교회 측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기독신문은 2019년 3월 11일 자에 박민균 기자의 다음의 기사를 게재했다. 김성태 장로 “사실만 썼을 뿐 해가 되는 행동 안했다” 현직 은급재단 이사가 벽제중앙추모공원 매각소송에서 상대편에 유리한 사실확인서를 작성해 준 것으로 드러났다. 은급재단 이사회(이사장:이승희 목사)는 3월 7일 총회회관에서 제3차 이사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벽제중앙추모공원(이하 납골당) 관련 소송사건을 점검하고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내용이었다. ... 은급재단이 진행 중인 중요한 소송이 또 있다. 바로 납골당 소유권이전등기(2018나2064451) 소송이다. 은급재단은 전임 이사장이 상대에게 유리한 사실확인서를 써주는 등 불리한 상황에도 작년 11월 1일 1심에서 승소했다. 최춘경과 온세교회가 항소해서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오는 3월 28일 2차 변론을 앞두고 소유권이전등기(매매계약 이행) 소송에 또 빨간불이 켜졌다. 이사장 이승희 목사는 “상대방에 유리한 서류를 써준 이사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서를 써준 사실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승희 이사장은 해당 이사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이사들은 크게 분개했다. “이전에도 이런 행위를 한 이사가 있다. 정관에 의거해 공식적으로 정직을 시켰다. 징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사들은 전임 은급재단 이사장도 상대방에게 유리한 사실확인서를 써줘 소송이 힘들었던 점을 상기하며, 2심 재판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날 이사회에서 해당 이사의 징계는 논의하지 않았다. 취재결과 사실확인서를 써준 이사는 김성태 장로로 확인됐다. 김성태 장로는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김장수 목사가 검찰조사를 요청해서 거부했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서를 써달라고 해서 써준 것일 뿐”이라며, “진술서를 쓰기 전에 은급재단 담당 국장에게 연락해서 허락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양심에 따라 사실을 썼을 뿐, 은급재단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 현 은급재단이사회 이사장 이승희 목사와 이사들은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재단이사장이 제92회 총회와 제100회 총회 결의에 따라 벽제추모공원 매매계약서의 계약 내용의 효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워낙 신용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다시 한 번 그 계약서의 1항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한다. 2017년 8월 11일 벽제중앙추모공원 매매계약서의 제10조(채무불이행과 손해배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기하고 있다. 1. 갑 또는 을이 본 계약상의 내용에 대하여 불이행이 있을 경우 그 상대방은 불이행한 자에 대하여 서명으로 이행을 최고(재촉)할 수 있다. 단 그 이행 최고가 있음에도 상당한 기한 내에 이행을 하지 않는 경우라도 제9조(계약의 해제 등)에서 계약해제사유로 정한 것 외에는 본 계약을 해제할 수 없다. 최춘경 권사 측의 계약해제사유는 잔금을 치루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없는 게 계약의 상식이다. 게다가 그 계약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계약금 2억 7천만 원을 지급해 은급재단이 영수했고 최춘경 권사 측은 27억의 계약 잔금을 언제라도 치를 준비까지 해놓고 있다. 더 나아가 2심에서 최춘경 권사 측에 패소해 계약 강제이행금 징수에 들어가면 빈약한 은급재단의 재정에 막대한 손해을 끼치게 될 것이다. 이 민사 소송은 거짓 전결처리 서류와 비양심적인 거짓 사실확인서와 뒤늦게 소정한 정관을 참고한 민사재판부에 기각됐다. 양심을 속이는 총회 은급재단 관리직원 박상범 김은미와 김성태와 유장춘 이사는 믿음의 진주를 밟는 돼지들이다. 지금까지 전국 교회는 이런 총회 헌법과 성경에서 크게 벗어난 비양심적이고 비신앙적인 총회 은급재단의 ‘무능과 무책임의 표본’을 본 적이 없다. 총회 은급재단의 부도덕과 무능 논란을 불식시키고 싶다면 제103회 총회 감사부는 부장 최병철 장로가 아무리 충성교회 측과 끈끈한 박상범 장로와 친하더라도 총회 은급재단에 대한 중간 감사를 전국남전도회 수준으로는 해야 전국 교회와 총대의 신뢰를 회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총회 감사부는 늘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구태를 벗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나 그러지 못했다. 미국 뉴욕의 월 스트리트도 돼지와 관련이 있다. 1653년 뉴욕 맨해튼 주민들은 돼지 떼의 난입을 막기 위해 벽(wall)을 세웠고, 이후 벽을 따라 거리가 형성되면서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총회도 돼지 떼처럼 무리를 지어 총회를 호시탐탐 노리는 부패한 자들을 막기 위해 감사의 벽(wall)을 세워 ‘월 스트리트’라는 이름을 얻어야 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지도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지도자가 기회를 인식하고 포착할 수 있으며 상대보다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運)은 모든 전략전 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쳤을 때는 운 때문에 최대한 세밀하게 세운 계획이 완전히 뒤집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량 있는 지도자는 가능성이 기회로 변하는 때를 인식하고, 경쟁자나 상대방보다 더 빨리 반응하여 행운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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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3
  • 코로나 배재군 목사 대책
    오늘의 코로나바이러스 전파 확산의 근본 발단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도, 둘째도, 세째도 문제인 대통령과 현 정부에 발단의 근본원인이 있다. ■ 그 이유 1. 대한민국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지 아니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 및 남북대화에 대한 정략에만 초점을 맞추어 중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또한 시진핑 4월 한국방문 초청을 이루기 위한 계획을 성사하려는데서 우한 및 중국을 거쳐 입국하는 내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신천지에 속한 사람으로 200여 명이 우한에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이 어떤 제재도 없이 입국이 허용되므로 코로나바이러스가 일파만파 퍼지게 된 것이 근본 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 대책 모기가 옮겨주는 말라리아 병원체는 숙주의 이동성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버젓이 피를 빠는 모기를 때려잡을 기력조차 없도록 만들어야 더욱 안전하고 쉽게 다음 숙주로 옮아갈 수 있다. 전파가 쉬워지면 독한 병원체가 고개를 든다. 다행히 지금 우리나라에 돌아다니는 코로나바이러스는 독성이 그리 강하지 않아 보인다. 개인위생 준칙을 철저히 따르고 의심 증상이 나타나면 1339로 전화하여 필요하면 검진받고 혹여 확진자로 판명되더라도 곧바로 치료를 시작하면 거의 다 완쾌된다. 그렇다면 상황은 매우 간단하다. 바이러스의 전파 경로만 효율적으로 차단하면 큰 인명 피해 없이 마무리될 일이다. 중국 우한과 청도대남병원처럼 병을 키우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해야 한다. 배재군 목사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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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2
  • 김종희 칼럼 - 화해중재위원회의 역할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속담이 있다. 양쪽의 말을 들어보면 다 일리가 있어서 어느 편이 옳다고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분쟁하는 양편을 만나보면 다들 자기들 말이 옳다고 항변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 분쟁이 많은 것 같다. 총회로부터 화해 중재의 임무를 부여받고 활동을 하다보니 분쟁하는 양편으로부터 보내오는 서신을 받는다. 내용은 상대편은 그르고 자기편이 옳다는 내용이다. 얼마 안 있으면 분쟁하는 곳을 방문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화해 중재를 맡은 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분쟁하는 이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마음을 이 글로 옮겨본다. Ⅰ. 서로 망하는 싸움을 중단해야 한다. 과거 10시간 마라톤 회의를 하면서 분쟁하는 양측에 말씀으로 권고를 했던 적이 있다. 갈라디아서 5장 15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하지 않았는가. 두려움을 느끼며 서로 용납하고 화합하는 것을 권면하였다. 극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때 필자가 깨달은 것이 있다. 다투다 보니 감정이 악화되어 갈 때까지 간 경우라도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마음이 동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서로 망하는 싸움을 중단하자. 그런데 일반 교인끼리 분쟁한다는 말은 별로 듣지 못했다. 분쟁에는 목사와 장로, 아니면 장로와 장로가 대립하고 있었다. 양편으로 나뉘어 싸우는 큰 싸움도 파고 들어가 보면 서로 대립 된 두 사람 때문이다. 두 사람만 화해하면 될텐데 사람들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덤불싸움이 되게 한다. 두 사람 중 하나님은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까? 저 화장실에 있는 구더기가 서로 몸통이 더 굵다고 꼬리가 더 길다고 싸운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비웃을 것이다. “쳇, 구더기 주제에...” 도토리 키재기의 싸움은 그만하자. 조금 더 낫다면 얼마나 더 낫고 못하다면 얼마나 더 못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보면 모두가 구더기같은 죄인인데(욥25;6) 서로의 평안을 위해 나 자신을 죽이고 쳐서 복종시키자. 서로 상생하는 길을 택하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Ⅱ. 사법으로 해결하려는 자체가 허물이 된다.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법에 고소한 모든 것을 취하해야 한다. 상대방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하여 사법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미 그 자체가 허물이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6장 7절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 하였다. 차라리 당하고 속고 마는 것이 낫다. 소송으로 간 것을 부끄러워하며 소송을 취하해야 한다. Ⅲ. 분쟁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상처를 주는 일이다. 과거 자기 마음에 안 맞는다고 교회를 나누려는 0 집사님을 찾아가 권면한 적이 있다. 교회가 나누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집을 심방했다. 잠시 심방예배를 인도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집사님, 주의 종에게 서운한 것이 있으시면 용서하세요. 교회를 나누는 것만큼은 안됩니다.” 그러자 그는 같이 무릎을 꿇고는 법정에 선 증인이 선서를 하듯이 오른손을 치켜들고 말을 했다. “나는 이미 응답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나누는 것에 대해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응답을 받았다고 당당하게 나오는 태도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속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나누라고 응답을 하셨다니 참으로 이상하구나’ 교회는 결국 갈라졌다. 그 후 이런 소식이 들려왔다. “0 집사님 막내딸이 개천에 달팽이를 잡으러 갔다가 물에 빠져...” 그 사건의 의미를 아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순간 교회를 나눈 옛일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 매 맞을 일은 하지 말자.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Ⅳ. 성령님께 순종하면 해결이 된다. 독일의 나찌 치하에서 말할 수 없는 잔인한 핍박과 학대를 받았던 화란의 코리텐 붐 여사의 간증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자신을 고문하고 학대하던 독일 사람들이 미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도록 명령하셨다. 복음을 전한 어느 날 코리 여사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인사하기 위해 자기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사람 중에 뜻밖에도 독일의 그 감옥에서 자기를 고문하고 자기 언니의 목숨을 앗아간 간수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코리는 자기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했다. “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한마디로 ‘하나님 저 인간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 코리의 마음속에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었다. 코리야 용서해라, 하나님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해라, 못해요, 이렇게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에 그 사람은 벌써 코리의 눈앞에까지 왔다. 그런데 그 순간 코리의 마음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나는 네가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겠느냐, 안 하겠느냐를 묻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것은 나의 명령인데 내 명령 앞에 순종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코리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나는 그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용서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이 내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순간 ‘하나님 명령이라면 할 수 없지요. 그러면 용서해야지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과 느낌도 없이 다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어 그를 안는 순간 주께서 내 마음속에 그를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느낌을 부어 주셨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 일기장의 마지막에 이런 인상 깊은 글을 썼다.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분쟁 중에도 순간순간 성령님께서 마음을 노크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용서해라, 화해해라, 그때 성령을 거스르지 말고 순종해 보자. 사도행전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Ⅴ. 내가 죽으면 해결된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큰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 교회 기둥 같은 장로님” “우리 교회 기둥 같은 집사님”이라고 한다. 기둥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기둥은 밑에 서야 한다. 기둥은 밑에서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지 위에서 군림하지 않는다. 기둥이 지붕 위에 서 있는 집을 본 적이 없다. 기둥 같은 일군은 교회의 어려움을 밑에서 묵묵히 지고 가는 일군이다. 또한 기둥은 밑에 서있으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숨어있다. 만약 기둥이 눈에 잘 보이는 위치에서 거치적거리면 불편할 것이다. 교회의 기둥 같은 일군은 힘든 일을 맡아 감당하면서도 생색내지 않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일군이다. 또한, 기둥은 같이 서야 한다. 여러 기둥이 같이 있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자신만이 제일이라는 식의 교만과 독선은 금물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함께 일할 줄 아는 겸손한 일군이 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기둥은 죽은 나무라야 한다. 살아있어서 맘대로 가지를 뻗으면 집에 균열이 생기고 위험할 것이다. 교회의 기둥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라는 일군이어야 한다. 나 한 사람이 죽어 교회가 평안하다면 내가 죽자. Ⅵ. 결론 분쟁을 계속하면 피차 망한다. 너도 잘못이 있지만 나도 잘못이 있다. 조금 더 옳고 그를 수 있지만 도토리 키재기의 싸움이다. 사법으로 가는 것 자체가 허물이다. 기도하다 보면 성령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가 있다. ‘그만하고 화해할 수 없겠니?’ 그 음성에 순종하자. 자존심만 버리면 된다. 그리고 한쪽을 죽이고 자신만 살려고 하지 말고 상생의 길을 택하자. 내가 문제가 아닌가? 나만 죽으면 된다. 교회 기둥은 죽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를 죽이는 자의 편이시다. 하나님은 자기를 죽이는 자의 편이시다. 지는 것 같아도 그것이 이기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선이 악에게 지는 것 같았으나 최후의 승리는 선의 승리였다. 예수님의 원수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자기들이 이긴 줄 알고 만세를 불렀으나 결국 예수님이 이기셨다. 이긴 것 같아도 지는 싸움이 있고 지는 것 같아도 이기는 싸움이 있다. 싸움으로 결말을 보려고 하지 말고 화해하고 양보하며 결말을 내자. 화해중재위원회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 주려는 위원회가 아니다. 말씀으로 돌아가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화해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끝까지 감정으로 대립하고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분쟁하려는 측에는 따끔한 매를 제시하며 중재를 시도할 필요성도 가지고 있는 위원회이다. ‘신종코로나19’로 예배도 마음놓고 드릴 수 없는 때가 왔다. 지난날 우리의 허물과 죄를 돌아보아 회개할 때다. 지금은 서로 물고 먹으며 싸울 때가 아니다. 서로 화해하고 힘을 모아 함께 기도할 때다. 김종희목사(총회정치부장역임. 화해중재위원회 서기. 성민교회) 2020-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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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9
  • 시진핑과 이만희의 악마
    위기에 몰려 악마 불러낸 시진핑 이만희적그리스도이고 반 기독교 세력의 머리들책임 회피한 악마는 거짓말쟁이 그들 아비 독일 철학자 칸트가 말했다. “시는 천재만이 쓸 수 있는 최고의 예술 장르다.” 다행히 우리는 출근길 거리에서도 시 글줄을 접할 수 있을 만큼 시가 대우받는, 어쩌면 흔한 나라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외벽에 큼지막하게 걸린 광화문 글판 말이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에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지금 걸린 문안은 윤동주의 동시다. 슬그머니 번지는 미소는 희망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광화문 글판은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척박한 땅을 적셔온 시원한 찬물 한 그릇이다. 기적 같은 그 한 사발 받아들고, 힘내자, 총회.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 윤동주를 사랑하는 시인 소강석 부총회장도 있지 않은가. 기술의 발달은 눈부시다. 하지만 철학까지 담보하진 않는다. 마이클 센델이 예로 들었던 것처럼 다수의 성인을 구하는 게 정의인지, 한 명의 어린이를 구하는 게 정의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결국 인간의 합의가 필요한 이유다. 신도들 중에서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확진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신천지 이만희 교주가 2020년 2월 21일 신도들에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특별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방송(CBS) 등에 따르면 그는 편지에서 "금번 병마(病魔)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짓"이라며 "이 모든 시험에서, 미혹에서 이깁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라며 "전도와 교육은 통신으로 합시다"라고 말했다. 개신교계에서는 신도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쓴 내부 단속용 편지가 유출된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신천지 이만희처럼 아니면 이만희가 시진핑처럼 둘러댔든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미생물로 밝혀지고 이름도 가진 “바이러스는 악마”라며 “반드시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라고 다짐했다. 우한에서 발생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재앙에 대처하는 전근대적 상황 인식이 명징하게 드러났다. ‘악마’는 근대의 아침이 밝아오기 전 힘없는 백성을 공포에 떨게 한 광신(狂信)의 상징이다. 15세기 말 교황 이노켄티오 8세가 인증한 마녀사냥 지침서는 “악마와 계약을 맺은 사람”을 마녀로 규정했다. 재앙이 발생하면 운수 사나운 사람들이 화형에 처해졌다. 시진핑은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한 반(半)생명체인 바이러스를 ‘악마’라고 명명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고 인민과 유리된 중세의 권좌로 숨어버렸다.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우한 현장에도 나타나지 않아 민심과 멀어진 황제임을 실증했다. 2003년 사스 사태 때 방호복을 입고 현장에서 지휘하던 후진타오와 대비된다. 세계 여론은 “시진핑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언비어는 바이러스보다 나쁘다”라며 쉬쉬하다가 골든타임을 놓쳤다. 가장 큰 책임은 완벽한 1인 권력체제를 거머쥔 시진핑에게 있다. 그런데도 ‘악마’를 소환해 유체이탈 화법으로 책임 소재를 실종시키고 무오류의 존재로 남으려 한다. 대안의 집권세력이 없는 일당제는 이렇게 위험하다. 우환의 재앙을 감지하고 최초로 문제제기를 한 젊은 의사는 경찰에 체포돼 반성문을 썼고, 진료 중 감염돼 사망했다. 억압적 체제가 초래한 비극이다. 감염자가 발생한 지 50일이 넘어서야 시진핑은 처음으로 총력대응을 촉구하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우한에선 4만 가구가 함께 식사하는 만인연(萬家宴)이 열리고, 봉쇄 전에 500만 명이 연휴를 맞아 타 지역으로 빠져나간 이후였다. 우한 역병은 초기 대응이 잘못돼 지구적 재앙이 됐다. 2002년 사스 사태 때도 중국은 5개월이 지나서야 발생 사실을 인정했다. 중국 네티즌들은 “우리를 죽이는 건 박쥐가 아니라 정부가 강요한 침묵”이라며 분노한다. 독재국가 중국의 심리와 행동은 미숙하고 그 비용을 전 세계가 치르고 있다. 중국은 세계보건기구(WHO)까지도 자국 대변인으로 만들었다. 전 세계에 비상이 걸렸는데 사무총장은 “중국 정부의 대처로 신종 코로나가 해외로 확산하는 것을 막았다”라고 우긴다. 미국이 예산지원을 줄인 틈을 파고들어 돈의 힘으로 WHO를 장악해서 벌어진 소극(笑劇)이다. 국제기구의 정치적 중립성까지 흔든 중국의 탐욕은 전 인류에게 독이 될 것이다. 중국은 자국 내 70개가 넘는 도시를 봉쇄하거나 주민의 이동을 제한했다. 이런데도 한국에는 “중국인 입국 금지를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우습게 알면서 “한국은 운명공동체”라고 한다. 대사의 오만방자한 언행은 19세기 조선을 속국으로 취급하던 위안스카이와 닮았다. 문 정권은 총선 전에 시진핑 방한을 성사시키기 위해 저자세를 취했다. “운명공동체” 발언도 문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 미국은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고, 중국의 맹방인 북한과 러시아도 일찌감치 국경을 폐쇄했다. 한국은 관광 목적의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마저도 발표 2시간 만에 번복했다. 중국이 그렇게 무서운가. 나를 무시하는 상대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은 노예가 되는 길이다. 중국은 힘이 커지면 은혜를 잊어버린다. 한국은 중국이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천안문 사태로 고립됐을 때 손길을 내밀어 국교를 맺은 나라다.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자 4년 만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했다. 미국·일본·EU는 아직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도 북핵 위협에 맞서 사드를 들여왔다고 경제보복을 했다. 그런 나라와 운명을 함께할 수는 없다. 악마를 소환해도 역병은 소멸되지 않는다. 중국은 전근대적 주술이 아닌 민주주의와 과학으로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 감염증 정보는 즉시 투명하게 공개해 전 세계가 대처하게 해야 한다. 성경과 그것에 근거한 총회 헌법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 악마 소행 운운한 이만희와 시진핑이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자들임을 그들의 거짓말과 위선을 통해 그들이 적그리스도이고 반 기독교 세력의 머리들임을 확실히 깨우쳐야 한다.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뽑아 세운 문재인이 거짓을 일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만희나 시진핑이나 김정은 등과 같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문재인은 시진핑과 김정은을 한국에 불러들이지 못해 애걸복걸 안달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 2020-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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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4
  • 이효상 칼럼 - 마테오리치 선교사에서 다산(茶山) 정약용까지
    한문 성경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처음 전해진 것은 조선 후기이다. 중국에 기독교를 전한 이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소속 선교사 '마테오리치'다. 그는 중국어를 배워 유교의 경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라는 지도까지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를 중국에 전하기 위해 유교를 공부하여 유교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유학자들의 한계를 찾아내 기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는 ‘서교(西敎)’,'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큰 관심거리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를 반대하였던 조선의 유학자들조차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조선 후기 대표적 유학자로『성호사설』을 저술한 이익(李瀷)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읽고 “그 학문은 오로지 천주(天主)만을 위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이다”라고 '상제'와 '천주'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독교(천주교), 즉 서학이 유교와 불교사상이 굳건한 조선에 뿌리를 내린 것은 인조 때이다. 숙종 때에는 교세를 자못 떨쳤으며 영·정조 때에는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등 각처에 성행했다. 특히 영조 시대에는 전성기를 맞아 이익(李瀷)을 중심 한 서학연구는 그의 제자와 문하생들에게 확산되어 ‘조선 서학’이란 학문체계가 수립됐고, 조선 후기 실학 형성의 중요한 줄기가 되었다. 당시 사회불안 속에서 서학 사상은 지식층에게 새로운 개혁의식의 확대와 봉건사회에 대한 개혁의식의 자극제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렇게 서학이 크게 번창하게 되자 '서학서(西學書)'의 반입을 금지시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하지만 서구의 문물을 배운 실학파 학자들이 기독교를 공부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 사상(西學)은 조선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조선 봉건사회의 개혁을 이끌려는 실학파가 생겨났고 그 대표적 실학자 이익의 사상적 후계자가 ‘정약용’이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경기도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1784년 실학파 선구자인 이승훈은 사절로 북경에 갔다가 귀국 직전 예수회 신부 그라몽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많은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명동에 있는 김범우 집에 조선 성당을 건립하고 그의 동지 이벽,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3형제, 이가환 등과 공동으로 기독교를 포교했다. 당대의 유학자들이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된 것은 성리학으로 표현되는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해답이 성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16세 때 이가환 및 매형이 되는 이승훈을 통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 보고 서학에 심취했다. 정약용의 개혁사상과 과학적 지식은 이때 습득한 서학, 즉 기독교 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고 1885년 기독교에 입교하며, ‘요한’이란 세례명을 갖게 된다. 기독교 포교 활동이 표면화되면서 조정으로부터 금지령이 내려졌고, 기독교 탄압 시책들이 나오게 된 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1801년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기독교(서교(西敎)를 사교(邪敎)라며 엄금·근절하라는 금령을 내렸다. 기독교인으로 밝혀진 주문모,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이가환, 홍교만,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등 천주교도와 진보적 개혁가 등 100여 명이 처형되고 4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때 수배되어 토굴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교회를 구하기 위해 흰 명주에다 교회의 박해상황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 황사영이 편지를 쓴다. 당시 베이징[北京] 주교 구베아에게 서한을 작성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11월 능지처참을 당한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 영세받고 알렉산드르라는 교명으로 신자가 된 이로, 다산 선생의 조카사위였다. 다산 선생의 형제들은 신앙의 순교자가 되었다. 처형당한 정약종,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유배에서 풀릴 때까지 18년간 그는 학문에만 몰두했다. 이때 정치기구의 전면적인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 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했다. 유배 생활 가운데서도 그의 개혁 의지는 식을 줄 몰랐고, 그의 개혁 사상 속에는 기독교 사상이 분출됐다. 1936년 정약용의 사망 후 1839년 기해박해 때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주도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과 샤스탕 신부 그리고 정약종의 둘째 아들인 정하상 등 70여 명의 교인들이 순교하였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철저히 기독교 신앙이 사상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선생은 『시경(詩經)』을 통해 분명히 창조주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그것이 '천「天」' 즉, '상제「上帝」'이며, 상제는 인간만사를 강림하는 능력을 가진 세상만사를 주재하는 자라고 보았다. 만물의 근원인 「천」 즉, 상제는 결코 주자의 리(理)와 같은 자연 만물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라, '위격(位格)'을 갖춘 윤리적이며 신적인 존재였다. 우리를 굽어보고 재앙과 행복을 가려주는 이러한 천, 상제를 성심으로 경외하여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의 이러한 사상은 국가개혁에 중심적 역할을 감당했고,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에 잘 드러나 있다. 목민심서에서 ‘애민’은 기독교의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때, 『마과회통(麻科會通)』으로 백성과 고통을 나눈 다산 정약용의 참모습을 우리 공무원들이 되새겼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정약용의 가장 큰 업적은 백성을 위해 살아가는 ‘애민’ 정신으로 다산 선생이 후대에 존경받는 이유이다. 수도권 동북부 거점도시 남양주시가 다산 정신을 계승하려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다산 선생에게서 성경의 총리 다니엘이나, 숨겨진 신앙인 니고데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다산은 올곧은 신앙적 가치관과 정신세계로 부패한 관료들의 핍박과 괴롭힘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다니엘처럼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신의 신앙대로 백성을 섬기는 일을 다 했다. “악당들의 유언비어가 더욱 심해졌다”라고 ‘자찬 묘비명’에서 표현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18년의 세월을 원망이나 좌절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방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척박한 유배지를 학문의 성지로 승화시킨 그 정신과 혜안은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남긴 저서의 내용과 양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였는데, 그의 시(詩)와 글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자신의 절망적 상황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고통받는 민초들의 삶을 슬퍼하고 그런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인으로 대안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끈기와 열정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정신을 다산선생의 자손인 정영진 관장이나 크로스로드를 이끄는 정성진 이사장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며 오늘의 한국을 생각해 보자. 지금 한국 사회는 다산선생이 살던 조선 봉건사회와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들의 당파 싸움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상실, 관리들의 부정부패 만연,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사회현상, 부동산과 토지문제, 중소업체의 몰락 등 사회개혁의 필요성은 그때와 같다. 형제를 죽이고, 매형을 죽이고, 조카를 죽인 그 시대를 정약용 형제는 저주하지 않았다. 시대를 저주하는 대신 아파했다. 그러나 애통하는 자(Those who mourn)는 불의한 시대에 위로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시대는 이들과 대면해야 한다.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한국교회건강연구원) 2020-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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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8
  • 김종희 칼럼 - 제105회 총회에서 경쟁 후보간의 쟁점
    선거철이 되면 모두 단일후보가 되기를 꿈꾼다. 단일후보가 되면 힘든 싸움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 후보의 흠을 찾아 선관위에 이의를 제기하게 마련이다. 그 흠 중에 상대 후보의 총회 총대권에 문제가 없는지를 따지는 것이 가장 많다. 제105회 총회에서 총대권 문제로 흠을 잡힐만한 쟁점이 되는 사안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살펴본다. Ⅰ. 총회(총회장, 임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경우 ① 과거에 총회장이나 임원 등을 상대로 사회법에 소송을 제기한 자에게 총대권을 정지한다는 결의가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결의가 나오면 과거의 결의는 없어진다. 최근의 결의가 중요한데 제104회 총회의 결의는 이렇다. “사법 고소자, 사법 소송 대응 및 사회 법정 소송비용 관련 건과 총회 임원회에서 이첩한 건을 병합하여 제99회, 제101회 총회 결의와 총회 임원회 청원서(보고서 147쪽)대로 지금부터 시행하되 시행세칙은 5인 위원회에서 연구하여 다음 회에 보고하기로 하고 위원 구성은 정치부에 맡겨 하기로 가결하다.”이다. ② 그러므로 제99회, 제101회 총회 결의와 임원회 청원의 건대로 시행하는 것이 최근 결의이다. 제99회 총회 결의는 “성경과 헌법과 규칙 등 교회 내의 법 절차에 의한 충분한 소송 절차 없이 교회, 당회, 노회, 총회에서 적법하게 ‘결정된 사항’이나 총회의 각급 산하 치리회(당회, 노회) 및 각급 기관과 속회와 그 ‘소속 인사’를 국가법에 소송하는 자가 무혐의 판정이나 패소할 시 당사자에게 소송비용 일체를 변상토록 하고 소속 치리회는 권징조례를 적용하여 법원 고소 접수일로부터 목사에게는 소속 노회의 공직과 총회 총대권을 2년간 정지하고 장로에게는 소속 당회에서의 직무와 노회 총대권을 2년간 정지한다. 상회는 하회에 통보하여 하회가 이를 불이행할 시 상회가 직접 처결한다. 단, 국법에서의 심판 결과를 인정하여 승소한 자는 총회 결의의 면책을 받으나 패소한 자의 처리는 소속 치리회의 판단 및 승소한 자의 의사에 따라 처리하며 승소한 자가 총회 법에 소송을 제기할 경우 소속 치리회는 헌법 절차에 따라 처리한다.”이다. 또한 101회 총회 결의는 “교회법을 경유하지 않거나 교회 재판 중 사법으로 갈 경우에는 접수일로부터 2년간 총대권을 정지하기로 가결하다.”이다. 또한 제104회 임원회 청원은 “총회를 상대로 소송을 할 경우는 목사의 경우 소송 접수일로부터 소속 노회의 공직과 총회 총대권 2년간 정지, 장로의 경우 소송 접수일로부터 소속 당회에서의 직무와 노회 총대권 2년간 정지”를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③ 상기 제99회 제101회 총회 결의와 임원회 결의를 종합하여 보면 공히 총대권 2년 정지를 하기로 하였다. 과거 총대권을 3년, 5년 정지의 결의가 있었으나 2년간 정지하기로 한 새로운 결의가 있으므로 새로운 결의에 적용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 총회를 상대로 한 소송으로 인하여 총대권 정지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2년이 경과 되었다면 출마에는 지장이 없다. 과거 당시의 결의에 의해 3년이나 5년의 총대권 정지의 징계로 출발 되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결의가 2년이면 신법 우선원칙에 따라 2년의 적용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범죄 행위 당시의 법보다 형을 가볍게 정한 새 법이 만들어졌다면 새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도 있다. 또한 우리 형법 1조 2항은 "범죄 후 법률의 변경에 의하여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거나 형이 구법보다 경한 때에는 신법에 의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총회(총회장,임원)를 상대로 소송을 한 경우는 총대권 2년이 정지된다. Ⅱ. 총회 현장이나 지 교회에 와서 소란을 피운 경우 ① 제104회 총회 결의는 이렇다. “이리노회장 최병덕 씨가 헌의한 제98회 총회 결의(총회 총대가 아닌 노회원이나 관계자 또는 소속된 사람이 총회 석상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지 교회에 가서 소란을 피우면 해당 노회에 책임을 물어 총회 총대권을 5년 정지키로 가결하다.)대로 시행 촉구 청원의 건은 해당 노회에 책임을 물어 총회 총대권 5년 정지하며 그 당사자는 해노회로 하여금 중징계하기로 가결하다.”이다. ② 그러므로 노회에 속한 목사나 장로 또는 교인이 자신의 감정에 따라 다른 교회를 찾아가 시위를 하면 시위하는 그 사람이 소속한 노회는 책임을 지고 5년간 총대를 파송할 수 없다. Ⅲ. 지역 경계를 어긴 교회를 보내지 않을 경우 ① 제79회 총회는 “지역 노회 경내의 타 지역 노회 소속교회는 해당 지역 노회로 보내기로 가결하고 이를 95년 4월 정기노회 시까지 시행토록 하며 이 결의를 위반할 때에는 위반한 노회의 총대권을 전원 중지하기로 하다. 단, 무 지역 노회는 제외, 분립 당시 총회가 인정한 것은 제외”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의하여 경내에 있는 타 지역 노회 소속교회는 해당 지역 노회로 보내야 한다. 단 무지역 노회와 노회를 분립할 당시 허락한 경우는 지역 경계가 어긋남에도 그대로 소속된 노회에 있을 수 있다. ② 이에 대하여 103회 천서위원회는 79회 총회 결의대로 시행하도록 지시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전원 총대권을 정지하겠다고 통지한 바 있다.(본부 제103-533호) 그러므로 후보 간의 경쟁이 치열하게 될 경우 상대 후보 노회에 지역 경계를 어긴 교회가 있으면 보내 달라고 할 수 있으며 상대 노회가 이에 불응하면 선거관리위원회나 천서검사위원회에 총대권 정지를 요구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쟁점이 되기 전에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Ⅳ. 노회에서 총대 선출에 하자가 있는 경우 ① 총대 선출은 반드시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출하지 않아도 된다. 제99회 총회 결의는 “남부산남노회장 김진묵 씨가 헌의한 헌법 정치 제12장 2조 총회의 조직 중 '노회가 투표 선거하여'는 무기명 비밀투표임을 확인 및 무기명 비밀투표로 선거하지 않을 시 총대권 상실의 건은 헌법대로(투표 방법은 각 노회가 정한 방법에 의하여) 하기로 가결하다.”이다. ② 그러므로 노회가 정한 방법에 의하여 투표하면 된다. 무기명 비밀투표를 할 수도 있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기립투표, 손을 드는 거수투표, 손뼉을 치는 박수투표 등 노회가 정한 방법이면 된다. 노회에서 총대 후보자를 추천하고 투표할 수도 있다. 과거 헌법에서는 후보 추천 없이 선거하였지만 개정된 헌법 정신은 후보를 추천할 수 있다.(정치 13장 1조 참조) ③ 중요한 것은 총대를 선출함에 있어 투표권에 부정이 있으면 안된다. 시무기간(최고 2년)이 초과된 조직교회 시무목사, 3년마다 노회 승낙을 받지 않은 미조직교회 시무목사, 전도목사, 무임목사들의 회의 결정 및 투표권 행사로 조직한 노회 임원과 총회 총대는 무효라는 점을 인식하고 분명한 총대권을 가진 자에 의하여 선출되어야 한다. 특히 부목사는 당회의 결의를 거쳐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아야 함으로 청빙을 받은 지 1년이 경과한 부목사는 무임목사가 되어 투표권이 없음도 유념해야 한다. 김종희목사(정치부장 역임. 성민교회)20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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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4
  • 개혁과 통일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에 나온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장로교,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감리교 신자였다. 신앙도 없고 정신도 없는 문재인도 대권을 쥘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아직 대놓고 무신론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가 종교개혁을 촉발하지 않았다면 장로교도 감리교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은 종교개혁 503주년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오후 2시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대문에 면죄부(indulgence)의 문제점을 지적한 ‘95개 논제’를 붙였다. 하나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 면죄부를 ‘망치로 붙였다’느니 ‘접착제로 붙였다’느니 하는 설과 함께 아예 그런 일은 없었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루터에게 불굴의 용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스콜라주의 영광의 신학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신학’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진노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과 복은 십자가 아래, 말하자면 ‘불행과 재난’ 아래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눈에는 거짓(Luge)으로 보이고 세상의 거짓은 진리로서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서 열광하고 설교자가 스타처럼 청중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단에 계시기보다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소수의 무리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말씀을 듣는 세상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설교단에 임재해 계신다. 설교자가 마치 황제처럼 청중들을 종교적 열광으로 몰아가고 번영과 성공을 나누어주는 설교단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의 영광과 존엄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길이다. 영광의 신학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라고 간청하는 빌립의 요구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말씀하신다.” 용기는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제국과 교회를 상대로 싸운 루터는 어떻게 그의 선배들과 달리 화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그리스도교인은 하나님 섭리(攝理)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속인들의 눈은 다르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종교의 생존과 부흥을 결정하는 것은 국내·국제 차원의 정치 상황이다. 루터교는 유럽 종교전쟁(1524~1648)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의 이면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로 무장하기 시작한 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와 베스트팔렌조약(1648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과 가치의 보호 속에 유럽의 팽창과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도달했다. 2016년 말 발표된 ‘2015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는 종교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신자 수에서 개신교(967만6000명, 19.7%)가 불교(761만9000명, 15.5%)를 앞서 1위로 발표됐다. 종교가 없는 국민(56.1%)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는 종교 인구가 차츰 줄고 있는 유럽형 종교 지형을 닮아가고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유럽에서처럼 젊은이들이 종교에 관심이 없다. 무신론이 유입돼 종교 지형에서 한자리를 확보했다. 역사를 따져보면 다른 측면이 떠오른다. 1945년 광복 당시 2,500만 인구 중 종교가 있는 비율은 4~6%에 불과했다. 조선왕조와 함께 붕괴한 유교가 남긴 종교 공백을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불교·가톨릭이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종교의 자유가 중시되는 미국의 영향권에 우리나라가 포함된 덕분에 모든 종교는 친종교 환경을 누렸다. 보수정권이 진행한 산업화 또한 종교의 급성장에 유리했다. ‘2015 인구주택총조사’ 발표 이후에 1위 자리를 내준 불교와 자체 집계(565만 명)와 비교했을 때 통계청 수치(389만 명)가 너무 낮은 가톨릭은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토론회·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여진이 좀 있다. 하지만 종교는 부침을 거듭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한때 융성하다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종교이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15일 총선을 앞둔 종교개혁 503주년은 개신교에 새로운 개혁을 요구한다. 종교개혁 505주년과 한국 개신교 선교 135주년을 맞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도 개혁이다. 물론 선교·전도를 열심히 하고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신앙인들이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개혁은 정치 상황과도 맞아야 한다. 개혁은 통일 친화적이어야 한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정치 흐름을 타면 흥하고 못 타면 쇠퇴할 것이다. 언젠가는 북한이라는 ‘거대 종교 권역’이 열린다. 통일 전후로 종교 순위는 바뀔 가능성이 크다. 각 개신교단이 할 일이 많다. 뭔가 역할을 찾아내면 살고, 못하면 밀릴 것이다. 국가와 정부만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종교계 1위 개신교단이 일정 부분이라도 김일성 일가 독재 폭정에 시달린 옛 북한 주민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통일준비위원회’(위원장 김재호 목사)는 항상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활동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루터교를 믿는 미국 병사들이 많이 참전했다. 한국의 추운 겨울 날씨를 이겨낼 수 있는 병력 자원을 5대호 지역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마침 그 지역은 루터교 신자들이 밀집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교계에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좌파 정권의 무리한 우파 적폐 청산과 무모한 장기 집권 꼼수 밀어붙이기가 야기한 ‘분노의 정치’에 기독교가 해답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루터는 ‘분노의 사도’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는 분노했을 때 기도도 더 잘하고 설교도 더 잘한다.” 이 말은 2020년 한국에도 묘한 울림이 있다. 어느 쪽 입장에 속하건 촛불 정국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감정을 대표하는 것은 분노다. 통일 이후에도 남한 출신이건 북한 출신이건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될 정국이 들이닥칠 수 있다. 하루빨리 분노를 넘어 한국을 개혁하는 프로세스가 시작돼야 한다. 우리 개혁주의 교단의 활약이 필요한 시대다. 지도자에겐 책임감 못지않게 반응성도 중요하다. 최근 유행하는 농담이란다. 청와대 뒷산이 ‘적폐청산’, 조국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조로남불’이라고 한다. 권력은 애정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경멸당하거나 미움받는 일을 경계해야 하고 때론 과감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제104회 총회엔 그리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지 않다. 2020-02-03
    • G.OPINION
    • G.OPINION
    2020-02-03
  • 국가 난국을 위한 보수 교단의 사명
    문재인은 고슴도치 쪽일까 아니면 여우에 가까울까. 조금 실례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이 인간 유형론(類型論)을 학문 세계에 처음 도입한 인물은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이다. 고슴도치는 한 가지 이론으로 복잡한 세상만사를 설명한다. 모든 일에는 빛과 그늘, 효과와 역(逆)효과라는 양면성(兩面性)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책과 예측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면 부인한다. 예측이 빗나가면 타이밍이 이상하게 꼬였다거나 예상 밖 요인이 등장했기 때문이라며 틀린 생각을 고집한다. 실업률이 올라가고 취업률이 떨어진 이유를 장마 탓으로 돌리는 식(式)이다. 의견이 다른 두 마리 고슴도치가 부딪치는 TV 시사토크쇼는 재밌고 시청률도 높다. 여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사태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원인을 탐구한다. 최저임금만 인상하면 가계소득이 절로 높아진다는 단순 이론을 거부한다. 무한히 긴 지렛대와 그만한 받침점만 가져오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간(肝) 큰 고슴도치와 붙으면 백전백패(百戰百敗)다. 문재인은 프랑스 방문에서 "프랑스혁명과 광화문 촛불이 시공간(時空間)을 뛰어넘어 깊이 연결돼 있음을 느꼈다"면서 "프랑스혁명 정신은 한국 국민이 들었던 촛불 하나하나에서 혁명의 빛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외교적 수사법(修辭法)이라 해도 프랑스혁명은 이렇게 단순한 미화(美化)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역사다. 미국역사학회(AHA) 회장의 2003년 취임 연설을 들어보자.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인정받고 있지만 평판(評判)은 추락했다. 이제 프랑스혁명은 폭력·공포 정치·전제주의 그리고 집단 학살의 전조(前兆)로 다가선다." 왕과 백성에서 혁명 주동자까지 1만 명 이상의 목이 단두대에서 잘려나갔으니 평가가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1957년 6월 마오쩌둥(毛澤東)은 고위 당직자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중국이 지향하는 정치체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민주적이고, 기율(紀律)이 엄격하면서도 자유스럽고, 뜻을 하나로 모으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분방(奔放)하게 발휘될 수 있는 정치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발언을 계기로 봄이 찾아왔다. 반동(反動)이란 딱지가 붙어 무수한 사람이 희생된 엄동설한(嚴冬雪寒) 뒤의 봄이라서 지식인들은 특히 환호했다. 주석(主席)의 뜻이 '민주적' '자유스러운' '개성이 분방하게 발휘되는'이란 단어에 있다고 믿은 일부는 공산당의 비(非)민주성을 개혁하라는 데까지 나갔다. 봄은 갑자기 끝났다. 수천 명이 처형되고 수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것이 '뭇꽃이 핀다'는 백화제방(百花齊放)의 결말이다. 이런 결말이 마오(毛)가 의도적으로 덫을 놓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공산당 독재에 대한 불만이 그렇게 큰지 몰랐다가 비판의 홍수에 당황했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노무현 대통령도 그랬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중국 칭화대(淸華大) 방문 때 "가장 존경하는 중국 정치인으로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을 꼽고 "두 분이 시대를 나눠 중국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고 했다. 천윈(陳雲)은 혁명 원로로서 마오쩌둥 사후(死後) 덩샤오핑과 함께 권력의 양축(兩軸)을 이뤘다. 천윈의 마오쩌둥 평가는 이렇다. "마오 주석이 1956년에 죽었더라면 업적은 불멸(不滅)로 남았을 것이다. 1966년에만 죽었어도 과오도 많지만 공(功)이 더 크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1976년까지 살아있었으니…." 대약진운동·인민공사·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최소 4,500만 명이 굶어 죽고, 맞아 죽은 마오의 시대를 한마디로 규정한다는 것 자체가 고슴도치의 과욕(過欲)이다. 고슴도치 시대에 여우들 목소리는 여론 대접도 받지 못한다. 그 결과 앞뒤가 어긋나는 말과 행동이 탱크처럼 굴러간다. 현 정권은 역사 교과서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표현을 삭제키로 했다. 북한을 합법 정부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래놓고 대통령 대변인은 "북한은 우리 법률 체계에선 국가로 인정되지 않으므로 북한과 합의는 국회 비준 동의가 필요 없다"고 한다. 북한을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非核化)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한국은 '동맹 관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줘도 된다' 식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재판의 독립'과 '법관 인사의 독립'이 사법부 독립의 기둥이다. 정권은 이 두 기둥을 뽑으면서 사법부를 개혁한다고 한다. 현 정권을 비판·공격·조롱하면서 국고 지원을 받는 예술가는 없다. 예술계의 굵직굵직한 의자에는 한자리 예외 없이 자기편을 앉혔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리스트를 인쇄했던 미련한 전(前) 정권 인사들은 엄중 처벌을 받았다. '인쇄된 리스트' 와 '인쇄되지 않은 리스트'의 차이가 무엇인가. 우익 독재와 좌익 독재는 힘의 방향이 다를 뿐 작동(作動) 원리는 같다. 나치 독재 시대를 몸으로 뚫고 나온 독일 어느 법학자는 그 시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명령은 명령이다" "법률은 법률이다"라는 구호로 군(軍)과 사법부를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정의는 정의다"라는 구호로 '불의(不義)의 시대'를 완성했다.' 권력이 휘두르는 동어반복(同語反復)의 최면술은 일종의 사기(詐欺)다. 이런 시대를 뚫고 나가려면 여우들은 '근거'를 물어야 한다. '명령의 합리성'과 '법률의 정당성'의 근거를 묻고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실체'를 의심해봐야 한다. 전략의 출발은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언제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다. 앞의 것이 '지리(地理) 감각'이고, 뒤의 것이 '역사 감각'이다. '상대를 바로 알고 나를 바로 아는 것'도 이 두 가지 위에서 가능하다. 역사는 지리 감각과 역사 감각을 잃은 국가들의 무덤이다. 1871년 독일을 처음 통일했던 비스마르크는 후대(後代)에 두 가지 생존의 지혜를 물려주었다. 하나는 서쪽 프랑스, 동쪽 러시아와 이룬 국경이 산맥이나 바다처럼 든든한 울타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당부다. 양쪽을 적으로 삼거나 양쪽과 동시에 전쟁을 벌이는 것은 '국가의 자살'과 같다고 했다. 다른 하나는 내부가 분열됐을 땐 어김없이 외세(外勢)가 개입했다는 교훈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남긴 '지리 감각'과 '역사 감각'은 곧 잊혔고, 독일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양면(兩面) 전쟁을 벌이다 패배했다. 2018년 6월 13일 수요일에 대한민국 전역에서 치러진 6·13 지방선거 결과는 더불어민주당의 싹쓸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를 딱 한 달 앞둔 대통령 지지도가 최고 86%를 기록했다. 취임 당시(84%)보다 더 높다. '대통령 우산' 속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55%가 나왔다.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 등 4당 지지율을 모두 합친 것의 2배였다. 반면 2020년 1월 31일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인 34%로 떨어졌다는 한국갤럽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지지 정당이 없다고 밝힌 무당층(無黨層)은 현 정권 출범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현 정권 핵심 인사들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여권과 검찰의 충돌, 부동산 정책 논란, 우한 폐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등이 여권에 악재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거 전날 6월 12일에는 트럼프-김정은 회담이 싱가포르에서 열렸다. 3월부터 이어져 온 북핵 드라마의 정점(頂點)을 찍는 날이었다. 지 고모부를 박격포로 죽인 천인공노할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 분위기 조성을 위해 억류 미국인 석방이라는 선물을 보냈고 뒤든 앞이든 이익만 밝히는 거래의 달인 트럼프 대통령은 '생큐(Thank you)' '나이스(nice)'라는 단어로 감사를 표시했다. 오가는 말에서는 미·북 간 중대 거래(去來)가 익어가는 냄새가 물씬 풍겼다.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대안(代案)'을 제시한 데 대해 사의를 표한다'(김정은) '우리가 한반도 전체(entire peninsula)를 비핵화 할 때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 이뤄질 것'(트럼프). 트럼프의 표현도 지금까지의 '북한 비핵화'에서 김정은식 용어(用語)인 '한반도 비핵화'로 옷을 갈아입었다.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듯 했지만 실상은 있으나마나 한 것의 비유인 개뿔 변화였다. 모든 거래의 기본 원칙은 등가(等價) 교환이다. 김정은이 확실히 핵과 미사일을 내려놓는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대북(對北) 제재 완화, 경제 지원과 국제 경제 기구 참여 허용, 미·북 수교(修交)를 비롯한 북한 체제 보장 방안, 전략무기 한반도 전개 축소, 한·미 연합훈련 축소, 주한 미군 감축 등 모든 메뉴가 정상회담과 후속 회담 탁자에 오른다고 봐야 한다. 이들 메뉴는 트럼프식 '신속한 일괄 타결'과 김정은이 희망하는 '단계적 동시 타결' 방식을 혼합한 조리법(調理法)으로 굽거나 익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선 이 코스 요리가 자신이 재선에 도전하는 2020년 11월 이전에 제공된다는 시한(時限)만 명시되면 조리법의 배합(配合) 비율에는 융통성을 보일 공산이 컸다. 개뿔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 보수(保守)는 2020년 총선, 2022년 대선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위선의 중독자 문재인의 고공(高空) 지지율을 떠받치는 핵심 기둥은 남북 관계 변화다. 그러나 실상은 선제공격, 예방전쟁이란 살벌한 단어들이 오가는 전쟁 분위기에서 벗어난 듯한 빈말의 성찬으로 일시적 안도감(安堵感)이 불러온 착각 비슷한 것이다.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전쟁 승리 두 달 후 선거에서 졌다. 1차 이라크 전쟁 승리로 지지율이 89%로 치솟았던 아버지 부시도 재선에 실패했다. 선거정치에선 평화도 승리만큼 덧없는 물거품이다. 브란트 총리의 동방(東方) 정책을 매섭게 비판하면서도 그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적 독일 통일의 길을 닦았던 헬무트 콜 총리의 비전과 전략이 담긴 말을 참고할 일이다. “사회주의자는 (정권 장악에) 성공할지 몰라도 사회주의는 (국민을 고루 배부르게 한다는) 목표 달성에 성공한 적이 없다.” 100원에 사들여 80원에 파는 기업은 없다. 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에선 80원의 세금을 걷어 100원어치 복지를 베풀겠다는 정치인이 성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과는 정치인 대신 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경제와 담쌓은 사람도 일거리가 늘어야 일자리가 는다는 원리는 알고 있다. 이 정부는 거꾸로 간다. 세계 모든 개발경제학 교과서에는 '한국 성공'과 '북한 실패' 스토리가 체제(體制) 간 우열을 비교하는 대표 사례로 실려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은 이와 정반대로 학생을 가르치기 위해 역사 교과서를 뜯어고치고 있다. 우리 보수 교단은 나날이 깊어가는 국민의 이런 시름과 걱정에 희망의 출구(出口)를 위한 기도의 사명이 있다. 엄청난 인파가 몰렸던 2019년 10월 광화문 집회 뒤 한기총 회장 전광훈이 약속보다 늦게 나타나 인터뷰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출발하려는데 취재진이 빙 둘러쌌다. 내가 스타가 됐다. 전국에서 사람들이 다 나를 보겠다며 온다." "문재인 정권에 대해 화가 나서 광화문에 몰려나왔지 목사님을 보러 나온 것은 아니다. 그걸 착각하면 안 된다." "적어도 80%는 나를 보러 나왔다." "분노하는 국민을 위해 자리를 깔아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해라.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파국이 시작된다." 문재인을 탄핵한다는 그는 "나라를 위해 내 한 몸 바치려는 것뿐이다. 세속 정치에 대한 욕심은 털끝만치도 없다"고 문재인 어법으로 말했다고 한다. 이런 전광훈 목사와 손잡고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신당을 창당한다고 한다. 요즘 보수층이 가장 열광하는 진보층의 폭격기 '문재인 정권 공격수' 진중권씨가 이런 말을 했다. “탄핵 이후 보수의 환골탈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결국 그들에게 발목을 잡혀 개혁에 실패하고 말았죠. 그런 의미에서 태극기 부대야말로 문재인 정권을 지탱해주는 최대의 버팀목입니다. 변화를 거부하는 그들이 보수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한 우리 사회의 친문 헤게모니도 영원할 겁니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진보주의 교단과 신학대학은 용감하게 시위에 앞장섰다. 이제 공법의 철옹성 윤석열 검찰총장과 촌철살인의 성웅 진중권 교수 외에 공산주의 행태를 빼닮은 친문 헤게모니를 침묵으로 지원하는 진보 진영 교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를 믿는 보수 교단이 나서야 할 갈 것이다. 보수교단의 선봉장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는 신앙의 회복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 자유민주주의를 따르고 추구하는 세력이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 교단은 구태의연한 태도를 벗어나 태극기 부대를 넘어서는 자유 민주주의 토대의 신앙을 위한 회복 기도회를 광화문 광장에서 열고 찬송과 기도로 국가와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성령의 투혼 김종준 총회장과 목회생태계 퍼스트무버 소강석 부총장이 함께 나서야 할 것이다. 2020-02-01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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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1
  • 김종희 칼럼 - 위임목사 정직과 위임목사 해제의 혼동
    권징조례 제100조에는 “상소를 제기한다 할 때에는 하회에서 결정한 것이 권계나 견책이면 잠시 정지할 것이요 그 밖의 시벌은 상회 판결나기까지 결정대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임목사가 정직 판결을 받으면 총회에 상소를 제기하였어도 정직 판결은 그대로 유지된다. 즉 상소를 제기하여도 정직을 당한 상태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권징조례 제45조를 오해하여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제45조는 “담임목사를 정직할 때는 그 담임까지 해제할 수 있으나 상소한다는 통지가 있으면 그 담임을 해제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상소를 하면 담임을 해제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정직을 당해도 상소를 하면 위임목사직을 해제하지 못하므로 위임목사 권한을 계속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권징조례를 혼동하여 해석하는데서 비롯된다.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Ⅰ. 정직과 해제의 의미를 착각하였다. ① 권징조례 제100조와 제45조는 서로 상충되는 조문이 아니라 정직과 해제를 구별하는 조문이 된다. 위임목사가 정직을 당하여 상소할지라도 정직 상태는 그대로 유효하다는 것이 제100조의 내용이고 그러나 정직은 되었지만 위임목사 신분은 해제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것이 제45조의 내용이다. 즉 위임목사 신분은 유지되고 있지만 위임목사 권한은 정직되어 있다. 정직되었어도 해교회 위임목사는 맞다. 다만 직무가 정직되어 있다. ② 예로 어떤 회사에서 직무정지를 당했다면 직무정지 기간에는 업무도 볼 수 없고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 그러나 파면이 되지 않은 한 그 회사의 신분은 유지된다. 직무정지와 파면은 다르다. 위임목사 정직을 직무정지로 보면 되고 위임해제를 파면으로 보면 된다. 그러므로 위임해제가 되지 않으면 해교회 목사 신분은 갖게 되고 목사 직무만 정직된다.③ 그러므로 위임목사가 정직되었을 때는 직무를 행하면 안된다. 정치문답조례 제360문에 정직목사의 신분에 대하여 답하기를 “정직목사는 목사 직무는 행할 수 없으며”라고 못박고 있으며 정치문답조례 제358문에는 “목사가 정직이나 면직을 받은 후에도 그 직무를 여전히 행하면 이는 교회 법규를 문란케 함이니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시벌한 바를 특별히 주지케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목사의 직무를 강행하면 안된다. 즉 설교권, 심방권, 성례권, 당회장권, 공동의회장권, 교회 대표권 등 일체의 직무를 행사할 수 없다. ④ 그러나 노회는 임시당회장을 파송해서는 안된다. 위임목사 신분은 살아있고 목사 직무만 정직된 것이므로 담임 목사가 부재하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임시당회장은 헌법 제9장 제4조 “당회장은 목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교회에서든지 목사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가 당회장 될 사람을 파송할 것이요”라고 하였기에 목사(당회장)가 직무정지만 되었을 뿐 목사(당회장)가 없는 상태가 아니기에 당회장을 파송해서는 안된다. ⑤ 교회는 정직을 당한 목사에게 주택과 매삭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 정치15장 제4조에 의거 “귀하께서 담임 시무 중에는 본 교인들이 모든 일에 편의와 위로를 도모하며 주 안에서 순복하고 주택과 매달 생활비 00를 드리기로 서약하는 동시에 이를 확실히 증명하기 위하여 서명 날인하여 청원하오니”라는 청빙 서식으로 청원하였다. 그러므로 정직은 되었지만 해교회 위임목사 신분은 유지되고 있으므로 주택과 매삭 생활비를 지급해야 한다. Ⅱ. 정직당한 목사가 정직 기간이 끝나면 자동 해벌된다. ① 본 교단의 헌법에는 유기 정직을 받은 경우 기간이 만료되면 자동 해벌된다거나 치리회의 결의로 해벌된다는 명문 규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경우는 사회법이나 다른 교단의 경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예로 집행유예를 받았다면 시작하는 시점과 끝나는 시점을 계산하여 자동으로 끝난다. 사법기관이 별도 판결을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직기간이 끝나면 자동 해벌된다. 만약 치리회 결의로 해벌이 된다면 정직 기간이 늘어날 수 있다. 혹 이에 대한 손해를 청구한다면 치리회가 배상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② 대신총회 경안노회는 “유기정직을 받은 장로가 시벌기간이 끝나면 당회가 해벌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유기정직이란 정한 기간 동안은 정직이나 그 기간이 끝나면 자연히 정직이 해제됨을 의미하기 때문에(유기정직 결의는 정한 기한이 끝나면 자동 해벌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 별도의 해벌결의가 필요 없고 그 기간이 지나면 자동 시무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통합 제88회 총회는 “시무 정지 처분이 치리회에 의해서 시행되거나 혹은 본인이 자진하여 집행한 지 6개월이 경과하여 처벌 기간(시무 정지 기간)이 만료되면 자동해벌 된 것으로 본다”로 결의하였다. 물론 본 교단의 경우는 아니지만 참고할 필요가 있다 ③ 정직기간에 회개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기에 자동 해벌되도록 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직 기간 중 회개의 결과가 없으면 기한이 되어 정직이 풀리고 난 후 다시 처벌해야 한다. 권징조례 제41조에 의하면 “피고를 정죄하게 되면 권계나 견책이나 정직이나 면직(정직이나 면직할 때에 수찬 정지를 함께할 때도 있고 함께 하지 아니할 때도 있다)이나 출교할 것이요 정직을 당한 지 1년 안에 회개의 결과가 없으면 다시 재판할 것 없이 면직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정직 기간이 만료되어 자동 해벌된 후, 정직 기간 중에 행한 범죄가 있다면 공회가 재판 절차 없이 다시 치리 할 수 있다. Ⅲ. 결론 권징조례 제100조 “상소를 제기한다 할 때에는 하회에서 결정한 것이 권계나 견책이면 잠시 정지할 것이요 그 밖의 시벌은 상회 판결 나기까지 결정대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소를 하여도 정직은 그대로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더구나 상소를 하였다는 것은 하회의 판결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에 정직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소를 하면 위임 해제를 못한다고 한 권징조례 제45조를 오해하여 여전히 위임목사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면 정직과 해제의 의미를 착각하고 있기에 바른 지도를 해야 한다. 정직 기간을 잘 이행하도록 하고 기한이 되면 자동 해벌되어 목회를 하도록 해 주는 것이 목사를 살리는 길이 된다. 김종희 목사(정치부장 역임. 성민교회)2020-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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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8
  • 김종희 칼럼 - 위임목사 사임과 후임목사 청빙
    제104회 총회는 “이리노회장 최병덕 씨가 헌의한 위임목사가 사임 전에 후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를 소집하고 사회를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의의 건은 헌법대로(헌법은 불가)함이 가하다.”로 결의하였다. 이는 위임목사가 사임하기 전에는 후임목사를 청빙하는 절차를 밟을 수 없다는 결론처럼 보인다. 이럴 경우 교회에는 혼란이 올 수 있다. 교회 측에서는 위임목사를 먼저 사임시키고 자기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후임목사를 청빙하려 할 수 있고 위임목사 측에서는 평생을 시무한 교회를 먼저 사임을 하고 물러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이 결의가 가져 올 혼란을 방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지혜로운 처리가 필요한 현실이다. Ⅰ. 헌법 해석에 대한 오해 ① 위와 같은 결의가 있게 된 이유는 헌법 정치 제15장 제2조 목사선거 “지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당회의 결의로 공동의회를 소집하고 임시 당회장이 강도한 후 공포하기를 교회에서 원하면 목사 청빙할 일에 대하여 투표할 것이라고 그 의견(意見)을 물어 과반수가 찬성하면 즉시 투표한다.”라는 조문 때문이다. 이 조문에 의거 제70회 총회는 “위임목사가 사임도 않고 정치15장 2조를 위배하고 후임목사의 공동의회를 주관함은 불가함”으로 결의하였다. 위임목사가 후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② 그러나 정치 제15장 제2조는 위임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후임목사를 청빙하는 경우가 아니라 목사가 없어서 노회에서 임시당회장을 파송한 교회가 목사를 청빙하는 경우이다. 정치 제9장 제4조 당회 임시회장 “당회장은 목사가 되는 것이므로 어떤 교회에서든지 목사가 없으면 그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할 때까지 노회가 당회장 될 사람을 파송할 것이요”라고 한 법에 따라 파송된 당회장이 있을 때를 말하는 것인데 헌법 해석에 대한 오해로 위임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도 적용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위임목사가 후임목사 공동의회를 하는 것이 법리에 맞다. 정치문답조례 제538문에 보면 공동의회를 주관할 수 있는 차서(次序)가 나온다. 첫째가 본 교회 담임목사 둘째가 노회가 임명한 당회장 순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위임목사가 담임목사이므로 공동의회를 주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헌법을 오해한 총회 결의가 있는 입장에서는 헌법을 바로 해석하고 결의를 번복하지 않는 한 지켜야 한다. Ⅱ. 현재 결의를 지혜롭게 이행하는 방법 ① 제78회 총회는 “중부산노회장 배춘식 목사가 헌의한 해 교회 시무하는 목사가 해 교회 임시 또는 위임 목사를 청빙할 수 없다는 헌의의 건은 해 노회가 선히 지도하기로 하다.”로 하였다. 이런 결의가 있는 이유는 위임목사가 후임목사 청빙을 못하도록 한 70회 총회 결의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한 결의이다. 그럼 선히 지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위임목사가 후임목사 공동의회를 못한다는 결의를 지키면서도 교회에 무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노회가 선히 지도하라는 것이다. ② 그 방법은 헌법 제9장 3조에 의거 대리 회장(임시당회장과 같은 역할)을 청하여 후임목사 청빙 공동의회를 하게 해야 한다. 정치문답조례 538문 누가 공동의회 회장이 되느냐? 답은 “Ⓐ본 교회 담임목사, Ⓑ노회가 임명한 당회장 Ⓐ와 Ⓑ가 불가능할 경우는 본 노회 소속 인근교회 목사를 당회가 청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본 교회 담임목사가 할 수 없다는 것이 총회 결의이고 현재 위임목사가 있어 노회가 임명한 당회장도 없는 경우이니 노회 소속 목사를 청하여 해야 한다. 이는 곧 대리회장(임시당회장)을 청하는 방법이다. ③ 대리 회장을 청하면 대리 회장이 와서 당회 결의로 일주일 전 공동의회 소집을 광고하고 안건으로 후임목사 청빙의 건을 상정하면 된다. 원로목사 추대를 위한 공동의회를 함께 할 수 있다. 안건이 단일 안건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 후 노회에 위임목사 사면서와 원로목사 추대 청원서와 후임목사 청빙서를 동시에 올려 사임을 먼저 받고 원로목사 추대와 청빙을 허락하면 된다. 후임이 미뤄진다면 목사 사면과 원로목사 추대부터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노회에서 파송 받은 당회장이 후임목사 청빙 절차를 하도록 하면 된다. Ⅲ. 복수 안건을 같은 회기에 차서를 따라 처리하면 된다. ① 예로 ‘갑’ 교회의 A목사가 ‘을’ 교회로 부임을 하려면 정치 제16장 제2조 “본 교회의 결의로 청빙서와 청원서를 노회 서기에게 송달하고 노회 서기는 그 청빙 사유를 청빙 받은 목사와 해 교회에 즉시 통지할 것이요 합의하면 노회는 그 교회를 사면케 하고 청빙을 허락한다.”대로 진행해야 한다. 진행할 때 A목사의 ‘갑’교회 사면서와 ‘을’교회의 A목사 청빙서가 함께 같은 회기에 올라오면 사면서 먼저 받고 청빙서를 받으면 된다. 이와 같은 원리로 위임목사 사면서와 후임목사 청빙서를 같은 회기에 차서를 따라 처리하면 된다. ② 위임목사 사면 없이 청빙을 하면 한 교회에 목사가 두 명 있게 된다고 하나 노회에서 접수하여 결의하기 전에는 절차를 진행하는 것일 뿐 효력은 없다. 노회에서 위임목사 사면을 받으므로 직이 없어지고 청빙을 받음으로 직이 주어지게 됨으로 여전히 목사는 한 명이다. Ⅳ. 결론 릴레이 경기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바톤을 터치하는 순간이다. 위임목사가 목회를 하고 후임목사를 결정하는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흔히 “후임목사는 교회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목사님은 관여하지 마십시오” 하면서 위임목사에게 미리 사임부터 하라고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역으로 “후임은 목사인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해서도 안 된다. 서로 피차 상의하고 좋은 결론을 내리게 하여 같은 회기에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서로 알력이 생기기 쉬운 문제를 노회가 선히 지도하는 방법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김종희 목사(정치부장 역임. 성민교회)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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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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