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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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에 나온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는 장로교,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감리교 신자였다. 신앙도 없고 정신도 없는 문재인도 대권을 쥘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아직 대놓고 무신론을 표방하는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기 힘들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가 종교개혁을 촉발하지 않았다면 장로교도 감리교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은 종교개혁 503주년이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오후 2시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의 대문에 면죄부(indulgence)의 문제점을 지적한 ‘95개 논제’를 붙였다. 하나도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 면죄부를 ‘망치로 붙였다’느니 ‘접착제로 붙였다’느니 하는 설과 함께 아예 그런 일은 없었다는 설도 있다. 확실한 것은 루터에게 불굴의 용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寶庫)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1518년 4월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스콜라주의 영광의 신학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십자가의 신학’에서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진노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과 복은 십자가 아래, 말하자면 ‘불행과 재난’ 아래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눈에는 거짓(Luge)으로 보이고 세상의 거짓은 진리로서 드러난다. 십자가 신학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천 명, 수만 명이 모여서 열광하고 설교자가 스타처럼 청중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단에 계시기보다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소수의 무리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말씀을 듣는 세상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설교단에 임재해 계신다. 설교자가 마치 황제처럼 청중들을 종교적 열광으로 몰아가고 번영과 성공을 나누어주는 설교단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의 영광과 존엄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길이다. 영광의 신학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요 14:8) 라고 간청하는 빌립의 요구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말씀하신다.”
 
용기는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제국과 교회를 상대로 싸운 루터는 어떻게 그의 선배들과 달리 화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그리스도교인은 하나님 섭리(攝理)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본다. 세속인들의 눈은 다르다. 그들 입장에서 보면 종교의 생존과 부흥을 결정하는 것은 국내·국제 차원의 정치 상황이다.
 
루터교는 유럽 종교전쟁(1524~1648)에서 살아남았다. 전쟁의 이면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로 무장하기 시작한 국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년)와 베스트팔렌조약(1648년)을 통해 종교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라는 원칙과 가치의 보호 속에 유럽의 팽창과 함께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에도 도달했다.
 
2016년 말 발표된 ‘2015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는 종교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신자 수에서 개신교(967만6000명, 19.7%)가 불교(761만9000명, 15.5%)를 앞서 1위로 발표됐다. 종교가 없는 국민(56.1%)이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얼핏 보면 우리나라는 종교 인구가 차츰 줄고 있는 유럽형 종교 지형을 닮아가고 있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유럽에서처럼 젊은이들이 종교에 관심이 없다. 무신론이 유입돼 종교 지형에서 한자리를 확보했다. 역사를 따져보면 다른 측면이 떠오른다. 1945년 광복 당시 2,500만 인구 중 종교가 있는 비율은 4~6%에 불과했다. 조선왕조와 함께 붕괴한 유교가 남긴 종교 공백을 일제강점기부터 개신교·불교·가톨릭이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종교의 자유가 중시되는 미국의 영향권에 우리나라가 포함된 덕분에 모든 종교는 친종교 환경을 누렸다. 보수정권이 진행한 산업화 또한 종교의 급성장에 유리했다.
 
‘2015 인구주택총조사’ 발표 이후에 1위 자리를 내준 불교와 자체 집계(565만 명)와 비교했을 때 통계청 수치(389만 명)가 너무 낮은 가톨릭은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토론회·세미나를 개최하는 등 여진이 좀 있다. 하지만 종교는 부침을 거듭한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한때 융성하다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게 종교이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15일 총선을 앞둔 종교개혁 503주년은 개신교에 새로운 개혁을 요구한다. 종교개혁 505주년과 한국 개신교 선교 135주년을 맞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도 개혁이다. 물론 선교·전도를 열심히 하고 바르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신앙인들이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개혁은 정치 상황과도 맞아야 한다. 개혁은 통일 친화적이어야 한다. 통일이라는 거대한 정치 흐름을 타면 흥하고 못 타면 쇠퇴할 것이다. 언젠가는 북한이라는 ‘거대 종교 권역’이 열린다. 통일 전후로 종교 순위는 바뀔 가능성이 크다. 각 개신교단이 할 일이 많다. 뭔가 역할을 찾아내면 살고, 못하면 밀릴 것이다. 국가와 정부만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종교계 1위 개신교단이 일정 부분이라도 김일성 일가 독재 폭정에 시달린 옛 북한 주민들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에 ‘통일준비위원회’(위원장 김재호 목사)는 항상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활동해야 할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루터교를 믿는 미국 병사들이 많이 참전했다. 한국의 추운 겨울 날씨를 이겨낼 수 있는 병력 자원을 5대호 지역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마침 그 지역은 루터교 신자들이 밀집한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종교계에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좌파 정권의 무리한 우파 적폐 청산과 무모한 장기 집권 꼼수 밀어붙이기가 야기한 ‘분노의 정치’에 기독교가 해답을 내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루터는 ‘분노의 사도’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는 분노했을 때 기도도 더 잘하고 설교도 더 잘한다.”
 
이 말은 2020년 한국에도 묘한 울림이 있다. 어느 쪽 입장에 속하건 촛불 정국이 계속되고 있는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감정을 대표하는 것은 분노다. 통일 이후에도 남한 출신이건 북한 출신이건 극심한 분노를 느끼게 될 정국이 들이닥칠 수 있다. 하루빨리 분노를 넘어 한국을 개혁하는 프로세스가 시작돼야 한다. 우리 개혁주의 교단의 활약이 필요한 시대다.
 
지도자에겐 책임감 못지않게 반응성도 중요하다. 최근 유행하는 농담이란다. 청와대 뒷산이 ‘적폐청산’, 조국이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 ‘조로남불’이라고 한다. 권력은 애정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언정 경멸당하거나 미움받는 일을 경계해야 하고 때론 과감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제104회 총회엔 그리 시간이 많이 남은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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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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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과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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