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G.OPINION
Home >  G.OPINION  >  G.OPINION

실시간뉴스
  • [더굳뉴스] 윤희원 목사 총회선거법 전환 의견
    산업시대 이전에 창궐한 질병은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위생적인 시설도 없었거니와 의학 기술도 덜 발전하여 치료제도 없었고 영양 결핍으로 면역력 또한 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질병은 과잉에서 비롯된다. 재판 몸살에도 이재명이 설치는 신자유시대의 질병은 우울증이다. 상품과 화폐도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화의 시대에 사람들은 모두 성공을 꿈꾼다. 이를 위해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이다(“Yes, we can!”). 그러나 누구든지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과잉 긍정 문화는 외부의 위협이나 억압과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짓누른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입증해야 하는 자아는 피곤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울증을 낳는다. 개인의 욕망을 부추겨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가 자신을 채찍질하게 만드는 시대에 개인은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구실'이 되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구청 직원 같은 이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이재명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한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5-07
    • G.OPINION
    • G.OPINION
    2024-05-07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 G.OPINION
    • G.OPINION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 G.OPINION
    • G.OPINION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 G.OPINION
    • G.OPINION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 G.OPINION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 G.OPINION
    • G.OPINION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크투'와 황규학이 제기한 광성교회와 이인강 문제의 진실(5) - 최삼경 목사
    <크투>와 황규학이 제기한 <광성교회> 문제도 <명성교회> 건처럼 공적 헌금이었으며 이인강 문제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충분히 회개한 문제다. 본 글에서 크투가 제기한 두 가지(광성교회, 이인강) 건에 대하여 동시에 답하겠다. 크리스천투데이(크투)가 제기한 돈 문제 4가지 중에 두 가지(명성교회 건, 이재록 건)는 충분히 진실을 알렸다고 본다. 본 5번째 글에서 나머지 두 문제를 동시에 답하려는 것은 그래야 장재형 씨가 통일교 내에서 어떻게 문선명 씨를 섬기면서 무슨 일들을 해 왔는가와 그가 했던 재림주 노릇을 빨리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크투의 기자들과 황규학 씨처럼 되든 안 되든, 알든 모르든 무조건 필자를 문제 삼아 진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필자를 공격해온 사람들은 없었다. 저들의 그 허위 기사들 때문에도 언론 자체가 가진 우상성과 또 필자를 미워하는 사이비 이단들과 사이비 이단 옹호자들의 바람과 그리고 삼류급 잡지에서 정보를 취하고 사는 삼류급 인생들의 무지한 인격 탓에 그것을 믿고 신뢰하고 거짓인줄 알고도 인터넷을 통하여 그것을 퍼트려 필자를 힘들게 해왔다. 그것이 저들이 얻은 성공이라면 성공일 것이다. 그러나 아는 자는 진실을 알고 있고 알아가고 있음이 다행이다. 크투의 실수는 어쩌다 한 실수가 아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진실한 사람도 물론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거짓된 사람의 실수와는 다르다. 거짓된 사람은 본질 자체가 거짓되기 때문에 여기서도 거짓되고 저기에서도 거짓되며 어쩌다 진실을 보여도 자신의 거짓을 선으로 포장하여 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적 선으로 진실 속에 거짓이 숨어 있다. 크투가 그동안 필자에게 쏟아놓은 저질스럽고 사악한 글들을 보면 진실을 추구하려다 한 실수가 아니라 본질적 거짓으로부터 나온 악들이다. 필자를 좌파 빨갱이로 몰려는 사악한 의도만 보아도 그 점이 명약관화해진다. 그리고 명성교회 건도 이재록 건도 광성교회 건도 이인강 건도 마찬가지다. 먼저 앞의 두 건(명성교회 건, 이재록 건)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하자면 이렇다. 명성교회 건이다. 크투는 17년 전 일을 마치 현재의 일처럼 느끼도록 글을 꾸며 썼고 거기에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김삼환 목사로부터 5천만 원의 뇌물을 받고 세습을 비판하는 것처럼 모함의 글들로 도배질하였다. 필자의 글에 ‘헌금’이라는 말이 분명히 나와도 ‘헌금’이란 말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점은 저들의 거짓된 인격과 잘 어울리는 짓이다. 그리고 필자의 글과 김기홍 교수와의 전화를 통하여 5천만 원은 명성교회가 <교회와 신앙>에 해준 공적 헌금이었다는 점을 선명하게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일말의 언급초자 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앞의 글을 수정하든지 사과하든지 아니면 달리 믿지 못할 근거와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저들은 목사도 아니지만 정직한 사람도 정직한 기자도 정직한 크리스천도 아니다. 그것이 크투 기자들의 본질이다. 이재록 건도 마찬가지다. 명성교회 건은 17년 전 일이지만 이재록 건은 그보다 앞선 20-22년 전의 일이다. 이 때는 대부분의 이단 연구를 하는 주요 교단들(통합, 합동, 고신, 합신) 어디에서도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규정한 일이 없을 때이다. 그 때 본지 발행인이었던 남광현 장로가 이재록 측으로부터 돈을 받았으나 이내 잘못을 깨닫고 받은 돈을 모두 돌려주었으며 기독공보와 본지 <교회와 신앙>에 잘못을 사과하고 충분한 회개까지 하였다. 그 후 1999년에 필자가 앞장서서 한기총에서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그 후에 필자와 본 지가 나서서 각 교단과 MBC PD 수첩에 자료를 제공하였고 더욱이 최근 이재록 씨의 성폭행 문제와 이재록 씨의 구속과 만민중앙교회 문제를 가장 앞장서 보도한 언론 역시 본지다. 그래서 필자는 크투가 독자적으로 이재록 씨의 이단성을 밝힌 글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재록에 대한 기사들은 충분하지만 그러나 크투 자체가 이 씨의 이단성을 밝혔다고 여길 만한 글을 찾지 못하였다. 크투 기자들의 신학과 사상이 들어간 연구와 평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하기야 저들이 장재형 씨의 이단성을 옹호하는 자들임을 볼 때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크투가 이재록 씨나 다른 사람의 이단성을 밝히고 비판한 글이나 기사가 있다면 제시해주기 바란다. 크투가 능동적으로 정작 이단을 비판한 글, 특히 통일교를 비판한 글을 찾을 수 없다. 적어도 통일교의 핵심 멤버로 일하였던 장재형 씨가 만든 언론이요, 그의 주장대로 그가 비록 통일교 요직을 두루 맡았지만 통일교 교리를 가르친 일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그곳에서 꺼냈다는 주장이 진실이라면 크투만은 대한민국의 어떤 언론보다 통일교의 이단성을 밝히는 데 가장 앞장섰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대신 크투에는 필자를 비롯하여 이단연구가들을 비판한 글은 넘친다. 그 중에도 필자를 비판한 글들은 산더미와 같다. 인터넷에 필자를 비난하는 글들이 많게 1만여 건 이상 떠 있을 때 절반 이상은 크투와 자매 언론들이 재생산한 글들이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황규학 씨가 만든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면서도 크투는 황규학 씨를 황규학 씨도 크투를 비판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필자가 황규학 씨처럼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하고 절도미수죄를 짓고 그것이 대법원까지 유죄로 인정을 받았다고 가정한다면 크투가 어떻게 하였을지 짐작하는 것은 가히 어렵지 않다. 필자는 거짓에 근거하여 빨갱이로 몰려고 하면서도 황규학 씨의 성추행 죄나 절도미수 같은 죄는 대수롭게 않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크투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이 아님을 이보다 더 확실하게 증거 할 것이 무엇일지 모르겠다. 크투가 한국교회에 존재해야 하는 최대 최고의 목적은 ‘장재형 보호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자연히 그 장재형의 이단성을 밝히려는 필자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것이다. 크투가 알아야 할 사건이 하나 있다. 당시 침례교의 권 모 목사가 이재록 1,600만원 건을 가지고 필자를 ‘가롯 유다’에 비유하는 글을 써서 필자가 그 돈을 받은 것처럼 몰아가려다가 법정에서 필자와 관련 없음이 밝혀져 민형사 간에 벌금을 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본론: 광성교회 헌금 건과 이인강 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1. 광성교회(김창인 목사) 건도 명성교회 건처럼 당시 광성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창인 목사가 본지(교회와 신앙)의 이사장직을 수락하고 해준 고마운 헌금이었다. 이건도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와 관련이 있다. 교계 언론들이 너무 혼란스러운 점을 보고 교계정화 차원에서 김삼환 목사가 힘 있는 기독언론을 만들고 싶어 했다. 2001년에 김 목사는 황공하게도 필자를 그 적임자로 여겼는지 주간지를 함께 만들 것을 제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본지 이사들과 협의하고 특히 이 문제를 이 모 교수와 상의하자 다음과 같은 긍정적 충고했다. “김삼환 목사가 언론을 만들면 큰 언론이 될 것인데 최 목사가 가까이에서 일하면 바른 언론이 될 가능성이 크고 최 목사는 강한 언론이 필요한 입장으로 만일 잘못된 언론이 만들어지면 그것도 최 목사를 힘들게 할 것이니 긍정적으로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김 목사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었다. 이 일을 위하여 김삼환 목사는 2002년 봄에 성지 순례를 가자고 제안하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일정과 방법을 협의하자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필자가 알고 있는 참석자들은 이미 고인이 되신 김의환 목사(총신대총장) 외에 본지에서는 김0홍, 유0모, 정0택 그리고 필자와 명성교회측 사람들이(누군지 모르지만)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김삼환 목사는 어떤 이유도 변명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여행도 취소하고 이 일을 없던 것으로 하고 말았다. 당시 필자는 인간적으로 섭섭하였지만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그 후 2013년 세습방지법을 제정하기 전까지 김삼환 목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성교회에 초청되어 금요 모임과 주일저녁 예배에 설교도 하였고 종종 식사 초대도 받았으며 2013년 6월에도 김기홍 교수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고 하여 함께 한 일도 있다. 김삼환 목사가 주간신문 창간을 제안하고도 비록 취소했지만 신문의 필요를 느껴 결국 본지(교회와 신앙) 이사들과 협의하여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님을 찾아가 이사장을 맡아달라고 요구하게 되었고 김 목사님은 기꺼이 이사장을 맡아주시고 월 1천만 원의 헌금을 약속하고 신실하게 헌금해주셨다. 필자는 그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한다. 그리고 주간지가 시작되자 김삼환 목사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점 때문인지 나와 김기홍 교수를 불러 매월 5백만 원의 헌금을 해 주겠다고 하고 열 달 동안(합 5천만 원) 헌금을 해 주다가 중단하였다. 물론 주간지를 하면서 말로 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고 빚까지 졌다. 결국 주간지를 중단하고 지금의 인터넷 신문으로 전환하였지만 필자는 그가 누구든지 고마움은 고마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크투 기자들은 명성교회 헌금도 뇌물이나 금품수수로 보게 하려고 혈안이 되었으니 광성교회 헌금도 뇌물 내지 금품수수로 보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크투의 주장처럼 금품수수가 아니라 광성교회가 결의하고 정식으로 해준 헌금이었다. 필자도 묻고 싶다. 크투는 크투 외에 20여개나 되는 자매 언론들을 가지고 있는데(이름을 수시로 바꾸어서 혼란스럽다) 헌금이 아닌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것들을 운영하고 있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크투는 모든 헌금을 다 금품으로 여겨 누가 하겠다는 헌금이 있어도 무조건 거절하는가? 아니면 이름은 헌금이라도 그것을 금품으로 알고 받아서 사용하는가? 그보다 헌금해 주려는 사람이나 교회가 미래에 무슨 실수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충분한 계시라도 받고 헌금을 받고 안 받고는 결정하는가? 아니면 도적질이라도(?) 하여 그렇게 많은 언론들을 운영하는 것인가? 하기야 장재형 씨를 재림주로 믿었던 이동준 씨의 경우 ‘카드깡’을 해서 헌금을 하고 신용불량자가 되었다고 하니 예청 회원들이 같은 방법으로 헌금을 하여 언론들도 운영되는지 묻고 싶다. 필자의 경우 같은 교단 교회와 헌금을 해 주는 시점에 문제가 없는 교회가 해주는 헌금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일단 헌금을 받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하여도 눈감아 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받을 때는 이단이 아니거나 이단인지 몰랐는데 헌금을 받은 후 그가 이단이란 점일 밝혀지면 헌금도 돌려줬다. 그런 언론도 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비록 명성교회로부터 헌금을 받았지만 세습 문제를 취급한 것은 헌금과 잘못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투는 필자가 수억의 금품을 <광성교회>로부터 받았다고 글을 썼다. 앞의 명성교회 같은 시각에서 나온 실수요 미련이요 그리고 의도적인 범죄다. 사두개인이나 제사장의 눈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죽여야 할 죄인으로 보는 것과 유사하다. 한국교회는 이것이 크투의 본질이라는 점을 알고 대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깨끗한 것이라도 더러운 눈으로 보면 더럽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색맹이 본 색깔은 주관적 확신이 아무리 넘친다고 하여도 바르지 않다. 마찬가지로 육적 성도는 육적인 것도 육적으로 보지만 영적인 것조차 육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마저도 육체로 보았던 점과 같다. 크투 기자들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진실을 진실로 볼 눈이 없고 그것을 시인할 정직함도 없고 지혜도 없어 보인다. 2. 이인강 씨 건의 진실을 밝힌다. 먼저 밝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한국교회는 본지 <교회와 신앙>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부터 알았으면 한다. 본 <교회와 신앙>은 1993년도에 남광현 장로가 부모로부터 받은 유산(수억)을 투자하여 시작된 언론이다. 사람들은 필자가 <교회와 신앙>을 창간한 줄 알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필자는 무슨 단체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세이연>도 필자가 만든 줄 아는 자가 많은데 오해다. 필자가 주도하여 만든 단체나 언론은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교회와 신앙>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제안을 받고 필자는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필자도 소극적으로 본지 창간에 참가하였지만 1993년에 남광현 장로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으로 <교회와 신앙>이 만들어졌다. 현 시세로 환산하면 20억 정도 되는 큰 돈이었다. 만일 지금 본 <교회와 신앙>이 한국교회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면 필자는 그 공로의 일부가 남광현 장로에게 있음을 한국교회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필자는 죽을 때까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2012년에 이인강 건이 터지기 전까지 <교회와 신앙>의 기사도 잘 보지 않을 정도로 본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필자는 2012년까지 소극적으로 본지에 관여하였다. 필요에 의하여 글을 쓰면서도 그때까지 본지 기사조차 잘 읽지 않았을 정도였다. 본지 기자들이 필자가 쓴 글조차 읽지 않는다고 불평과 원망(?)을 종종 하였다. 필자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본지에 발을 디뎠지만 이단 연구에 절대적으로 언론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그러다보니 많은 고소 건이 발생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필자는 그것을 반격해야 하고 또 필자가 세계 도처에 다니며 적지 않은 집회를 하였기 때문에 구독자도 필자가 확보하게 되고 모금도 필자가 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사까지 관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아니었다. 2012년에 이인강 건이 터졌다. 지금부터 7년 전인 2012년에 누군가가 필자에게 ‘남광현 장로가 이인강 씨로부터 2천 여 만원의 금품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제일 먼저 당시 본지에서 일하던 전 기자에게 사실관계를 물어보고 그리고 당사자인 남광현 장로에게 물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 장로가 이인강 씨로부터 받은 돈은 550만원이었음도 알았다. 후에 듣고 보니 이인강 씨 측에서는 2,350만원을 뇌물로 주었는데 이 일을 주선한 지미숙 씨가(크리스챤연합신문 발행인, 카이캄 홍보부장) 1,800만원을 중간에서 가로챘고 남광현 장로에게 550만원을 준 것이었다. 필자는 <교회와 신앙>의 문을 닫으려고 결심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목회와 이단연구를 동시에 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오래전 일이지만 이재록 건으로 인하여 황규학 씨와 같은 인간들이 필자를 괴롭히고 있는데 또 다시 이런 일이 있게 되자 받은 심적 고통은 너무나 커서 본지를 폐간하려고 결심하였다. 당시 필자는 울며 살았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흘렀다. 필자의 눈물을 본 이단연구가들과 필자를 사랑하는 동역자들과 기자들은 필자에게 이렇게 용기를 주었다. 첫째는 “교신이 문을 닫으면 이단들과 이단 옹호언론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힘써 도울 것이니 문 닫지 말고 해보자”는 것이었다. 남 장로는 모든 책임을 지고, 자신이 가진 권리도 주식도 다 내어놓고 본지를 떠나갔다. 결국 남광현 장로는 전처럼 그 돈을 돌려주고 그로 인하여 자기가 본지에 가진 모든 권리들을 다 포기하고 주식까지 다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필자는 그 후부터 어쩔 수 없이 본지를 적극적으로 맡아서 이끌게 되었다. 당시 남광현 장로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떠날 것이니 문만 닫지 말아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구하였다. 결국 남 장로는 550만원의 돈 때문에 본 교회에서 치리를 당하였고 몇 년 동안 몸무게가 20여 Kg이 빠지도록 하루 밤에 2천여 개의 물품을 운반을 해야 하는 택배회사에 나가 속죄하는 맘으로 막 노동을 하였다. 크투는 필자가 “남광현 장로를 희생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필자가 지금도 남장로로 본지에서 대표이사로 일하도록 한다면 크투의 기자들은 필자를 의리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과연 칭찬할까? 털끝만큼도 그러리라 믿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공격할 것이다. 크투에게 중요한 것은 돈 문제도 아니고 남광현 장로의 문제도 그렇다고 이인강 문제도 아니다. 오직 최삼경을 잡기 위한 거리가 된다는 점이다.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는가? 크투나 황규학 씨는 돈을 준 이인강 씨나 중간에 돈을 떼먹은 지미숙 씨에 대한 공격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누가 누구에게 뇌물을 주었다면 그 죄는 결코 받은 자만의 죄가 아니다. 준 자의 죄도 같다. 아니 그 일을 주선하고 심부름을 한 자의 죄도 죄다. 거기에다 중간에서 많은 돈을 떼먹은 사람(지미숙)의 죄는 더 크게 물어야 옳다. 의를 추구하고 추구하는 그 의가 목적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크투도 황규학 씨도 돈으로 이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이인강 씨를 공격한 일을 보지 못하였고 그 일을 주선하고 남 장로에게 준 돈보다 3배나 더 많은 돈을 떼먹은 지미숙 씨를 공격하는 것도 본 일이 없다. 자신의 전재산을 다 투자하였고 본지를 끌어오느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고생을 다 하고도 550만원 때문에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가진 주식까지 다른 사람에게 다 양도하고 떠나간 남광현 장로만 공격하는 것이다. 사실 남장로를 공격하는 것도 그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 일로 필자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더러운 기름옷에는 김치 국물을 한 병 부어도 그 옷은 입을 수 있지만 깨끗한 와이셔츠는 김치 국물 한 방울만 묻어도 입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결론: 성숙한 기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는 교계에 언론과 기자를 두 종류로 나누고 싶다. 하나는 정직한 언론과 깨끗한 기자요 하나는 거짓된 언론과 거짓된 기자다. 그리고 더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성숙한 언론이냐 성숙하지 못한 언론이냐’, ‘성숙한 기자냐 성숙하지 못한 기자냐’의 문제다. 언론의 기초는 정직이다. 모든 것은 정직과 진실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비록 정직하다고 해도 성숙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에 이롭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언론 중에 정직한 언론도 많지 않지만 성숙한 언론을 찾기는 그보다 더 어렵다. 이는 ‘성숙한 목회자나 성숙한 신학자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언론과 기자에게 성숙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만일 어떤 언론이 성숙한 언론이라고 한다면 그 언론에 성숙한 리더가 있을 것이다. 필자도 ‘내가 과연 성숙한 목회자요 성숙한 언론인인가’를 늘 반성해야 하고 특히 언론의 영향이 커져갈수록 진실 위에서 성숙하기를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남광현 장로 사건에서 때로 필자가 앓아야 할 병을 남장로가 대신 앓은 것은 아닌가 반성하고 회개한다. 참으로 30여 년간 본지를 끌어오느라 힘들었다. 항상 적자였고 거기에다 120-130여건의 고소 건으로 법정에 끌려 다녀야 했고 변호사 비용에 시달려야 했고 황규학 씨나 크투 같은 형편없는 이단옹호언론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필자는 이 이인강 건에서도 크투나 황규학 씨에게 비난을 받아야 할 잘못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이인강 건과 필자가 관련이 있다면 누구보다 지미숙 씨가 이를 가장 잘 알 것이고, 필자를 폭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는 지미숙 씨가 홍보부장으로 있는 카이캄도 여지없이 공격하였고 또 지미숙 씨의 죄를 덮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샅샅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크투 기자는 일련의 일들에 대하여 필자에게 도의적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필자도 크투 기자들과 장재형 씨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끔찍한 점이 있다. 장재형 씨는 자신은 재림주 노릇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재림주로 섬기는 사람이 있음을 딱 한 번 인정한 일이 있다.(후에 하나씩 자세히 취급할 것이다.) 필자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으려면 장재형 씨에게는 더 큰 도덕적 책임을 물어야 햘 것이다. 장재형 씨는 재림주도 아니고 재림주 노릇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을 재림주로 섬기는 그런 미친 인간들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도의적 책임을 묻기로 하면 필자보다 장재형 씨에게 백배나 더 물어야 옳은 일이 아니겠는가? 성구 하나로 결론을 삼고 글을 맺고 싶다. "너는 허망한 풍설(風說)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誣陷)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최삼경 목사(<교회와 신앙> 편집인, <빛과소금교회> 담임 목사) 2019-11-26
    • G.OPINION
    • G.OPINION
    2019-11-26
  • 청와대 유재수와 수서경찰서 박상범 뒷배
    총회의 불빛은 아버지 팔뚝처럼 든든하다. 겨울녘에 들어선 저녁은 야곱의 팥죽 한 그릇처럼 조용히 끓고 접시에 놓인 불빛을 김종준은 에서처럼 게걸스레 핥는다. 그리고 위선의 입을 틀면 쏴아 거짓말이 쏟아진다. 그 위선을 삼킨 개가 하늘을 향해 짖어대면 그래도 하늘에선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첫 별이 다가올 진리의 구주를 기리는 성탄절을 밝히려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검찰이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에 대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유씨는 금융위 국장으로 있을 때 세금 감면 등 기업 편의를 봐준 대가로 골프채, 항공권, 자녀 유학 비용 등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혐의는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작년 말 청와대 민정수석실 특별감찰반원이 "조국 민정수석 지시로 유씨 감찰이 중단됐다"고 폭로하면서 밝힌 내용 그대로다. 특감반 보고 문건을 보면 기업·기업인 이름과 함께 유씨가 받은 금품 종류까지 나와 있다. 특감반원들이 유씨를 몇 차례 대면 조사까지 하면서 파악한 내용인데 검찰 수사로 실제 근거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도 당시 조국 수석은 "경미한 품위 유지 위반 수준이었다"며 특감반 조사 내용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사실을 호도한 것이다.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비리를 알면서도 덮었다면 직권 남용이다. 청와대 특감반 관계자들에 따르면 유씨는 특감반에서 3번째 조사를 받은 직후 75일간 병가를 냈다. 그 사이 '조사 중단' 지시가 있었다. 유씨가 누군가에게 구명 로비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갑작스러운 조사 중단 지시에 특감반장조차 "굉장히 분개했다"고 한다. 금융위는 구체적 비위 내용은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유씨의 사표를 받았다. 청와대가 공무원 비위를 적발하면 검찰에 수사 의뢰하거나 소속 부처에 문서로 내용을 알려 징계토록 하는 것이 상식인데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금융위는 유씨가 사표를 내자 금융위를 감독하는 국회 정무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비위가 있다는 이유로 물러난 공직자에게 알짜배기 자리를 주선한 것이다. 몇 달 뒤 유씨는 부산시 경제부시장까지 됐다. 단순히 민정수석실 차원이 아니라 이 정권의 권력자가 유씨 뒤를 봐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게 누구인지 밝혀야 한다. 유씨는 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실에 파견됐고 대통령 일정을 담당하는 제1부속실에서도 근무했다고 한다. 이 정권 실세들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감반이 유씨 휴대전화를 분석했더니 유씨가 현 정권 실세 정치인,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과 보안 메신저를 주고받으며 금융위 인사 문제 등을 상의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당시 특감반원의 증언이다. '조국 사태'보다 더 크고 심각한 사안이다. 검찰이 끝까지 추적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총회 박상범 국장이 김성태 은급재단 이사 사임서 관련 김창수 전결 위조사문서 및 동행사로 수서경찰서에 고발당했다. 그런데 김창수와 박상범은 피고발인 조사도 안 받고 21일 중앙지검에 각하 의견 송치됐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박상범과 김창수는 그러면 그렇지 총회가 어떤 곳인데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사법제도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유재수의 청와대 특별감찰반 감찰을 덮은 청와대 뒷배가 누구인지를 검찰이 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총회 박상범 국장과 총회 자체의 비리를 봐주는 총회 관내 수사경찰서의 뒷배를 누가 봐주는지를 사문서위조 사건 각하송치를 받은 중앙지검 검찰에서 수사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결국 총회 비리 당사자와 수서경찰서 뒷배가 누구인지를 이번에는 반드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김창수와 박상범 사문서위조 사건 고발이 검찰로 넘어갔고 수서경찰서 부실 수사 의혹 수사관도 직무유기 혐의로 고소당해 검찰 수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흑막이다. 장막 안은 어둡다. 총회장 취임예배 순서자 사례 봉투를 직접 챙겨 들고 다니는 김종준의 임원회 내막도 침침하다. 그 색채는 그의 불통 독주로 짙어진다. 자신이 1년짜리가 아닌 만년 총회장이라며 떠들고 다니는 총회 국장 박상범과 언론과 법률 자문 측근 소재열은 치졸한 위선을 생산한다. 그의 거짓말은 조건반사적이다. 교활함은 악성 진화한다. 김종준은 미스터리다. 그는 왜 그런 박상범과 소재열에 집착할까. 김상윤의 명품가방 수수 전계헌이 어불성설 본받는다는 JP는 명언을 남겼다. "정치는 허업(虛業)"이라고. JP의 허업을 세상사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다. 정치라는 게 매일매일은 역동적이고 뭔가 세상을 바꾸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결과적으로는 허망한 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따지면 인생사 허망하지 않은 일이 없지만 특히 정치가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총회 비리를 덮으려는 김종준도 겉으로는 신앙의 회복을 외치면서도 속은 신앙을 버린 총회 정치의 허망함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제는 제102회 총회 사문서위조 몸통 전계헌을 고스란히 이어 그 비리를 덮고 방조하는 제104회 총회 김종준은 그 책임으로 인한 불법의 처절한 대가를 혹독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제104회 총회장이랍시고 불법을 하지 않겠다며 총회 행사 관련 설교마다 신앙의 회복을 외치면서 정작 에서같은 목사인 자신이 뉘우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2019-11-23
    • G.OPINION
    • G.OPINION
    2019-11-23
  • 김종준 혹은 소강석
    총회에선 법원에 명품 총회장 전계헌 허락을 얻어 위조 사문서를 낼 정도로 미친 법인국 붙박이 박상범 행정도 믿음이다. 믿음을 거스르는 불의를 방조하지 않았다면 총신 동문 그늘 아래서 김종준 당신과 오래 교류를 나누고 싶었다. 불의한 자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총신 동문이 아닌 소강석 당신과는 총회 날개 아래 평생 충심과 존경 어린 기사를 쓰고 싶었다.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쪽을 보는 당신들의 먼 눈. 허나 믿음이란 에녹처럼 참이신 하나님과 함께 걷는것. 나는 나이든 귀. 당신들 거짓을 비호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총회에서 존경과 존중은 비루해진다. 총회라 소리 내어 부른 목사. 하나님의 거룩한 모임이라 믿음을 끌어와 젖은 소망 건져 올리고 심령이 젖었을 것이다. 주께서 빛나는 이마를 총회에 대시던 길자연 이전 시절은 참으로 높고 밝았을 것이다. 햇빛과 달빛이 엇갈리는 혀와 어금니에 아려오는 박상범의 검은 믿음. 김종준 혹은 소강석. 나는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문서위조의 전계헌과 김창수와 박상범의 총회의 믿음을 빠져나가고 있다. 음악전문 케이블 채널 엠넷(Mnet)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101(프듀)’ 시리즈의 투표 순위 조작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이 CJ ENM 고위 관계자 등 10여 명을 입건해 혐의를 확인 중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11월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경찰청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현재까지 CJ (고위)관계자, 기획사 관계자 등 10여명이 입건됐다"고 밝혔다. 입건자 명단에는 엠넷을 보유한 CJ ENM의 고위 관계자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프듀’ 순위 조작 논란은 지난 7월 ‘프듀X’ 마지막 생방송 경연에서 유력한 데뷔 후보로 점쳐지던 연습생들이 탈락하고 의외의 인물이 데뷔 조에 포함되면서 불거졌다. 엠넷 측은 7월 초 경찰에 정식 수사의뢰를 했다. 시청자들도 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엠넷 소속 제작진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고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그렇듯 납골당 소유권이전 소송 1심 2018년 11월 1일, 그리고 2심 2019년 8월 29일에 대비해 은급재단 김성태 이사 사임 건에 관해 법적 인사권자인 은급재단 이사장 김선규 총회장의 사전 허락이나 사후 보고 없이 2017년 9월 15일자 전결처리 위조 문서를 2018년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김창수와 박상범도 고발당했다. 조만간 피고발인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밝혀야 할 거룩한 총회가 방송사 PD나 조국처럼 거짓을 뻔뻔하게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그 사실을 몇 차례 말해도 눈만 멀뚱거리는 김종준은 어느 교단 총회장이고 그런 비리를 조장한 전계헌을 위해 총회장 면전에서 설교하는 부총회장 소강석의 목회생태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인가 혹은 거짓의 아비 마귀를 본받는 자들인가. 납골당 소유권이전소송 1심 판결이 어이없게도 매수인 측 패소로 끝난 2018년 11월 1일. 그날 서울지방법원 복도에 다른 교단 출신 기자 유현우와 송상원 그리고 김종준과 소강석 이름으로 총회 석상에서 6천만 원 상당의 것을 총대들에게 나눠준 책의 저자 소재열이 있었다. 다른 교단 기자 둘은 하나님은 정의 편이라며 이죽거렸다. 무슨 연유인지 총회장과 부총회장의 상당한 후원 혜택을 누린 법학박사 소재열은 팔장을 낀 채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내 법 상식이나 믿음의 수준에서는 총회 결의에 따른 매매라 기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소재열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김성태 이사 사임 건 위조 전결 처리 문서 까닭이었다. 김종준과 소강석이 거금을 들여 총대들에게 나눠준 소재열의 법서의 법 상식과 법 지식은 위조사문서 동행사와 허위에 의한 사법의 공무방해가 얼마나 가증스러운 것인지를 조국이나 문재인처럼 무시하는 수준의 것이란 말인가. 조국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거짓투성이 가족 비리에 대해 ‘재판을 통해 책임이 가려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교묘하고 교활하다. 프랑스의 비리 정치인이 법망을 빠져나갈 때 쓰는 말이 있다. ‘레스퐁사블, 메 농 꾸파블.’ 책임은 있다, 그러나 유죄는 아니다, 이런 뜻이다. 조국이 이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아내의 혐의에 대해 ‘책임이 가려진다’고 했다. 김종준이 박상범이 사문서위조를 했어도 1심과 2심에 이겼으니 괜찮다는 식이다. 기소와 재판은 책임을 묻는 절차가 아니라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가리고 유죄일 때 형량을 정해 감옥살이를 시키는 절차다. 더욱 하나님께서는 그 절차를 넘어서 신앙으로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양심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이다. 이제 그 납골당 소유권이전소송 재판의 패소 원인이 거룩한 총회 측의 사문서위조에 의한 것이었음이 그 과정과 제반 법 규정 문서나 회의록을 통해 드러나 사법 당국에 우선 김창수와 박상범이 고발을 당한 상태이다. 조만간 전계헌은 사문서위조 공모 내지 지시 혐의로 김종준은 사문서위조 방조 혐의로 고발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알아야 한다. 그들의 그런 믿음에 반하는 어두운 행위들이 기관지 기독신문이 아닌 사설 언론을 통해서도 총회와 세상에 길이 남아 전해진다는 사실을... 더하여 기회와 과정은 조국스럽고 결과는 문재인스럽다는 국민 목소리가 조국과 문재인에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를 비리를 방조하고 후원하는 김종준 혹은 소강석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2019-11-12
    • G.OPINION
    • G.OPINION
    2019-11-12
  • 문재인과 김종준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資質)은 우선순위(priority)를 정확히 매기는 것이다. 문제점을 찾아내는 데도 문제점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해결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도 기준이 되는 것이 우선순위다. 엉뚱한 데 조직의 에너지를 탕진(蕩盡)하면 김정은이나 전계헌처럼 쇠퇴(衰退)와 쇠망(衰亡)의 길로 들어선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종종 흉(凶)하다고 했다. 납골당 관련 사문서위조 전결 혐의 김창수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했기 때문이다. 이순신을 닮기란 어렵고 흉한 자가 되기는 쉽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흉한 자가 너무 많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갖고 우리 총회를 돌아보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답이 보일 것 같다. 현재 상황에서 납골당 관련 은급재단 사문서 위조 기안 혐의의 박상범은 조국처럼 무죄(無罪)다. 아직은 혐의자(嫌疑者)·용의자(容疑者)일 뿐이다. 헌법 27조의 "모든 형사 피고인은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규정 덕분이다. 조국씨의 아내·아들·딸·어머니·동생·제수·5촌 조카·처남 및 그들의 범죄를 거든 사람들도 "무죄 추정 원칙"의 그늘 아래 있다.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중대 범죄 혹은 잡스러운 여러 범죄에 연루(連累)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국무위원 또는 정부 중요 직책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우리 총회 헌법이나 규칙처럼 없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유형은 세 가지다. '탁월한 지도자'는 나라가 자유롭게 번영할 뼈대를 멀리 보며 설계하고 치밀하게 시공(施工)한다. 법률도 제도도 세월이 흐르면 헐거워지고 현실과 맞지 않게 된다. 도로나 건물처럼 주기적 보수(補修) 공사가 필요하다. '보통 지도자'는 보수할 때를 놓치지 않고 나라가 굴러가게 한다. 그러나 '참 나쁜 지도자'는 자신의 역량(力量)과 국가가 놓인 환경을 오판(誤判)하고 나라의 골조(骨組)를 바꾸겠다고 덤비다 건물을 무너뜨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겠다며 시도 때도 없이 모든 것을 뒤집어 아수라장을 만든다. 문재인은 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를 두고 "국민의 뜻은 검찰의 정치적 중립 못지않게 검찰 개혁이 시급하고 절실하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유엔 총회에 가서 "북한은 작년 9·19 군사 합의 이후 단 한 건의 위반이 없었다"고 했던 대통령이다. "우리 경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말을 수시로 되풀이한다. 북한 미사일 발사의 굉음(轟音)도 세종로의 함성도 청년 실업자의 비명도 듣지 못하는 은급재단 사문서위조에 대한 김종준의 태도처럼 "선택적 난청(難聽)" 증상이다. 설득은 "귀[耳]로 시작해서 입[口]으로 마무리한다"는데 그래서야 설득의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겠는가. 조국의 위선(僞善)은 지난 두 달 양파처럼 벗겨졌다. 위선이란 영어 단어(hypocrisy)는 원래 '배우의 연기(演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위선은 탈을 쓰고 사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런 조국의 탈위에 '무죄 추정의 원칙'이란 우산을 받쳐 주고 있다. '대통령 사람', '대통령 편' 말고 그 우산을 빌려 써본 사람이 있는가. 역대 우리 총회장들도 은급재단의 박상범에 대해 문재인처럼 굴었다. 그래서 은급재단 기금이 통합 측의 십분의 일이고 허구헌날 끝을 모르는 재판에 매달려 사는데도 자리 보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작금의 은급재단 사문서위조 건에 대해 그 위중성을 여러 번 설명하고 설득해도 김종준은 마이동풍이다. 그의 인식에 따르면 명예훼손 벌금 확정이 된 나는 죄인, 고소해 이긴 송상원은 의인이라는 식이다. 사설 언론 기자 사이에 범용되고 있는 ‘작전’이라는 관습에 대해 그는 작전의 '작' 자도 모르고 작전을 해본 적도 없다는 형사 법정 증언으로 그 실체를 증명하지 못한 나를 증거 중심의 재판에서 이겼다. 나는 송상원처럼 그와 관련해서 이런 일이 있을 줄 모르고 녹음이나 영수증을 챙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속도 없이 부총회장 선거 관련 기사에 대해 크로스뉴스의 송상원에게 "너 작전했지"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자신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온갖 모욕을 해 어리숙한 내 화를 돋군 뒤 송상원은 첩보 작전하듯 비밀리 녹음한 녹취록까지 증거로 제출해 고소했다. 그 덕에 나는 훨씬 영리해졌고 벌금 100만 원에 대한 배상 노역으로 9박 10일 교도소에서 기도하는 체험을 하게 됐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항간에 김종준이 부총회장 선거 때 길자연에 버금가는 적지 않은 돈을 뿌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고 고무줄 총회선거법에 걸리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김영란 법’ 저촉으로 사법 당국에 기소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김종준은 자신이 흠없는 의인이라 불법을 않겠다며 임원회 때도 실행위원회 때도 전국 노회장 상비부장 회의 때도 공언하는가. 총회 정치꾼들 사이에 회자되는 '들키지 마라'는 열한 번째 계명에 안 걸린 총회장임을 버젓이 자랑하느라 '회복'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는가. 미국 대통령 링컨의 말이다. "나는 공화국의 헌법을 생명처럼 수호하겠다고 선서했다. 그러나 나라가 무너진 다음 헌법을 수호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문재인과 김종준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국가의 국민과 총회의 총대가 마음으로 새길 말이다. 무슨 말인가. 총회가 사문서위조의 불법으로 납골당 관련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배신하고 헌법을 어기는 행위를 통해 총회가 망하는 사건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나 총회가 망하지 않으려면 국민과 총대가 진실해야 할 것이다. 조국 일가의 각종 문서 위조를 일삼은 거짓 행위를 두둔한 대통령 문재인이 어떤 형식으로든 책임을 져야하듯 전 총무 김창수외 박상범의 ‘김성태 사임서 전결 사문서위조’에 대한 방조와 두둔에 대해 회복의 총회장 김종준 역시 어떤 형식으로든 회복할 수 없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는 대통령이 거짓의 아비 마귀에 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라가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져 싸우는 걸 보면서도 그토록 거짓말에 이골이 난 조국에 집착하는 까닭이 도대체 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았다. 조국처럼 문재인과 김종준이 유유상종 (類類相從)이라는 걸.. 2019-10-30
    • G.OPINION
    • G.OPINION
    2019-10-30
  • 납골당 총회 추파(秋波)
    해마다 바뀌는 일 년짜리 총회장 김종준 무능 비웃으며 자칭 만년 총회장 박상범 떠벌림 상관없이 거기 잔잔히 일어나는 개혁 물결 총회 추파(秋波) 총회 유리창 김선규 총회장 적폐 해소 납골당 대법원 판결 기다리며 참으로 오래 잃어버렸던 웃음 한 움큼 되찾고 싶은 가을날 여름내 거룩한 총회 물든 김종준 마음 창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있다. 꽃동산 양심나무 빈 둥지에 고이는 늦은 밤 회개 빛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있다. 소재열 입발림 마른 아부 꽃 아슬한 갈길 먼 104회 총회. 해남 해안 미역 냄새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속 끓이는 김종준 쪼들린 마음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불법을 맴돈다. 사설 언론 총회 회의실 금지 구역 우두커니 혼자 매여 있는 총회장 양심 없는 표정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있다. 주인 없는 대치동 총회나무 잎사귀 뒤에 숨은 자벌레 같은 박상범 등허리에도 초록은 조금 남아 총회의 초록 계절은 이제 다 지나갔다. 산골짜기의 가을 물은 풍성하고 맑다. 겨울을 대비하느라 산도 머금었던 물기를 뱉어내느라 그러하다. 해마다 바뀌는 일 년짜리 총회장 김종준의 무능을 비웃으며 자칭 만년 총회장이라는 박상범의 떠벌림과 상관없이 거기 잔잔히 일어나는 개혁 물결을 일러 총회 추파(秋波)라고 한다. 그런데 그 추파의 이편에 앉아 제101회 총회 유리창 김선규 총회장 적폐 해소 납골당 대법원 판결 기다리며 참으로 오래 잃어버렸던 웃음 한 움큼 되찾고 싶은 가을날이다. 2019-10-23
    • G.OPINION
    • G.OPINION
    2019-10-23
  • 조국과 총회은급재단 수치
    옛날엔 여름이 이렇게 덥지 않았어. 가만히 있으면 시원했거든. 대신 겨울엔 추웠지. 그리고 총회 전 추석은 그리움과 사랑의 성묘가 있지. 어릴 적 할아버지 따라 할머니 산소에 간 강석. 할아버지의 푸념 소리를 듣지. 할아버지는 푸념으로 속울음을 풀어내지. 할머니에게 무엇을 잘 못 했길래. 무엇이 그리도 고마웠길래. 푸념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눈물을 대신한다, 산소 앞에 꼼짝 않고 앉아서 듣는 할아버지 푸념은 할머니에게 띄워 보내는 아린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산소를 둘러싸고 있다. 강석의 하모니카처럼. 제104회 총회를 앞두고 총대들도 추석맞이 성묘가 한창일 것이다. 산소를 찾아가 덥수룩이 자란 잔디와 풀을 베어 내리고 깊은 절을 올리리라. 생전에 조금이라도 더 잘해 드릴 걸…. 스미는 후회에 몸을 적실 게다. 이즈음의 성묘 모습은 바뀌고 있지만 조상에게 올리는 그리움이야 믿음의 우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2006년 10월 31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동생 부부는 52억 원대의 밀린 공사비를 달라며 자신의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학재단 웅동학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날 웅동학원이 이사들에게 조 후보자 동생을 법인 사무국장으로 뽑는 안건을 상정한 이사회 개최를 통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웅동학원은 이사회를 열어 이사장을 대신해 법원 및 부동산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법인 사무국장에 조 후보자 동생을 앉혔다. 조 후보자 동생이 소송을 걸고 그 소송을 맡을 담당자로 조국 동생이 정해지면서 결국 웅동학원은 52억원이나 되는 소송에서 변론하지 않고 패소했다. 1일 자유한국당 윤한홍 의원이 경남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웅동학원 이사회 회의록에 따르면 웅동학원은 조 후보자의 동생 부부가 웅동학원을 상대로 52억 원대 소송을 건 2006년 10월 31일 이사들에게 회의를 통보했다. 이후 11월 10일 오후 3시 열린 이사회에서 조 후보자 동생을 ‘이사장을 대신하여 법원 및 부동산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할’ 책임자로 뽑았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조 후보자의 부친 조모 이사장은 “두 번째 안건은 이사장을 대신하여 법원 및 부동산 관련 업무를 주로 담당할 신임 법인사무국장 선임 건을 상정하였습니다. 법인 사무국장에는 본인의 둘째 아들인 조0을 추천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 아들이 웅동학원을 상대로 10일 전에 52억원대의 소송을 제기했다는 설명은 회의록에는 없었다. 이어 한 이사가 “법원 및 부동산 관련 업무는 이사장과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이사장님이 추천하였으니 별 무리가 없다고 본다”고 말하자 다른 이사들이 재청과 삼청을 하면서 조 후보자 동생이 법인 사무국장으로 선임된다. 결국 조 후보자 일가가 운영하는 웅동학원은 2007년 2월 조 후보자 동생 부부로부터 제기된 채권 청구 소송에서 한 번도 변론하지 않고 패소해 52억원을 조 후보자 동생 부부에게 줘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됐다. 이날 이사회에서는 조 후보자 외삼촌인 박 모 전 행정실장이 정년 만기(2006년 12월 31일)가 되면서 신임 행정실장을 뽑는 안건도 상정됐다. 신임 행정실장 후보로는 조 후보자 동생의 처제인 조00씨를 추천했다. 당시 조 이사장은 “신임 행정실장으로 본인의 사돈관계인 조00씨를 추천하고자 합니다. 조00씨는 1970년생으로 경륜은 짧지만 성실한 자세로 이전 회사에서 10년간 재직했습니다”고 소개했다. 그러자 다른 이사들이 찬성, 재청과 삼청이 이어지면서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행정실장은 재단의 돈을 관리하는 자리다. 조 후보자는 1999년부터 2009년까지 웅동학원 이사였다. 윤한홍 의원은 “조 후보자가 당시 웅동학원 이사였는데 과연 동생이 소송을 제기하고 그 소송의 웅동학원 측 담당자로 지정된 이런 일을 몰랐는지 의문이다”며 “사실상 이때부터 학교 재산을 빼돌리기 위해 조 후보자 온 가족이 동원된 것이 아닌지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후보자 동생은 지난달 20일 입장문을 내고 “한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말씀을 드린다”며 “운영하는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웅동학원에 대한 채권 모두를 저와 제 가족 등이 기술신용보증에 부담하고 있는 채무를 변제하는 데 내놓고 남는 채권도 모두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조 후보자 인사청문회 준비단 관계자는 “조 후보자는 ‘동생이 받을 돈이 있어 재단에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안다는 정도만 알 뿐 그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2017년 9월 8일 기독신문 사장 출마 등록을 위한 김성태 이사의 재단이사 사임 건을 도달주의 빌미로 은급재단 상임이사 김창수 총무가 법인국장 박상범이 기안해 올린 서류에 전결 처리했다고 한다. 그런데 2017년 9월 18일 은급재단 이사회 회의 시 그 사임 전결처리 건에 대한 상임이사 김창수의 보고도 없었고 그 전, 그 후, 김선규 이사장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그 회의 자리에는 기독신문 송상원 기자도 참석해 취재를 했다. 그렇다면 이제 2017년 9월 은급재단 이사회 회의록에 대한 확인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총회 은급재단 측의 계획적인 김성태 이사 사임 전결처리에 대한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와 상임이사 김창수와 국장 박상범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의 죄를 사법당국에 물어야 할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8월 29일 원고인 최춘경과 온세교회가 은급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벽제중앙추모공원의 ‘소유권이전등기’ 소송(2018나2064451)에서 김성태 이사 사임 민법 규정 도달주의에 의거 ‘원고들의 항소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제100회 총회(총회장 박무용) 27억 매각 결의에 따라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총회은급재단 이사장으로서 2억 7천 계약금을 받고 매각 계약을 체결한 것이 정지가 됐다. 은급재단의 납골당 매각보고에 대해 매매의 핵심조건인 ‘51억 담보 설정’도 하지 않고 매각한 은급재단 이사회를 성토하며 ‘매각 불가’를 결의했다. 당시 2017년 9월 18일 은급재단 이사회에서도 제102회 총회 석상에서도 김성태 이사 사임 도달주의를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2019년 8월 29일 판결 이후 기독신문은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은급재단 사무국 관계자는 “너무 어려운 재판이었다. 이번 승소로 납골당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앞으로 이 소송 결과가 장부열람가처분을 비롯한 추가적인 법률조치를 진행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우리 총회에 총회 결의는 무엇이며 신앙 양심은 어디 필요한 것인지 되묻고 싶다. 게다가 18년을 끌어온 납골당 문제를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총회 직원 임해순을 통해 직영했을 때 적지 않은 문제와 손해와 부정도 겪었고 성결 교단 충성교회에 매각을 통해 잔금을 받지 못해 계약 해지도 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납골당 운영 동업자이고 우리 교단 목사와 권사가 관련된 납골당 측에 총회 결의와 은급재단 이사회 8차에 걸친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누구 발상인지 김성태 이사 사임 도달주의 빌미로 계약 효력을 정지시키고 무슨 경사라도 났다고 난리다. 총회의 목사 일원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총회 유리창 김선규 총회장의 18년 적폐청산과 은급재단 이익을 위한 총회 결의에 따른 계약을 이겼다고 좋아하는 자들이 알아야 할 일이 있다. 혹여 그들이 소송 과정의 서류에 대한 불법한 일에 연루 의혹이 있다면 조국씨 관련자자들의 경우처럼 사문서위조와 업무방해에 대한 사법의 고발과 고소를 반드시 겪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과 세상 앞에서 거짓말의 씨와 열매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체험해야 할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약속과 양심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인간 서로간의 사랑을 나타내는 인류문회사적인 태도이다. 싸움에서 우리가 이겼지만 쟤네도 우리 집단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가자고 누군가 말해온 덕분에 인류는 지구상의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바꿔 말해 그런 배려와 협력의 마음이 없는 인간은 동물과 다를 게 없다는 얘기일 터다. 17여 년 간선제에서 벗어나 갈피를 못 잡는 총회를 3S(Smile Speed Spirit) 슬로건을 통해 상식(common sense)의 궤도로 올려놓은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는 제104회 총회준비위원회 설교에서 총회 변화의 핵심을 갈파했다. “제도와 사람 일부를 바꾼다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희생하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더 활기찬 총회로 회복할 것입니다.” 2019-09-10
    • G.OPINION
    • G.OPINION
    2019-09-10
  • 조국과 윤익세 조사처리
    신학의 짐이 버거워 총신 뒷산에 올랐다. 신학을 멀리 하려고 풀밭에 누웠더니 허름한 총신이 내 눈에 밟혔다. 총신을 가까이 잡으려고 나무에 올랐더니 호롱불 밝히고 등록금이 버거운 총신이 저만치 물러난다. 이것이 신학이었다. 이제까지 신앙이 길을 이끌었다. 이 우울한 날들에 그래도 잠시 웃게 해주는 인터넷 유머는 '최순실 딸한테 승마 배울래, 조국 딸한테 수술 받을래'이다. 조국의 딸은 28년이라는 세월을 철저하고 용의주도한 아빠 덕에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시달리다가 의사가 될 문턱에서 이제 고졸(중졸) 학력으로 몰락할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의사 노릇을 안 하게 된 것이 그녀 자신과 그녀의 애꿎은 환자들을 위해서는 다행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에 따르면 "가짜 뉴스란 정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언론 보도 형식을 하고 유포된 거짓 정보"를 뜻한다. 윤익세를 지지하는 가짜 뉴스 전파자같은 자들처럼. 모두가 "집단적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는 한 명의 개인으로 사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체주의의 진정한 해악은 안보나 경제 실패 정도가 아니라 사회적 활기를 죽이는 행위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 문재인의 조국 법무장관 지명을 계기로 "죽은 시민의 사회"가 소생하고 "죽은 개인의 사회"가 회생할 수 있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의 청문회를 앞두고 "운동권 전체주의"가 마침내 투우사처럼 소 정수리에 칼을 꽂아야 하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윤익세 조사처리위원회 위원장 신규식 목사의 윤익세 고별 조사 같이. 본질은 조국 지명자 개인이 아니라 그가 상징해 왔던 좌파 기득권 세력의 총체적 민낯이다. 이번 일로 많은 국민은 여태까지의 막연한 "진보 콤플렉스"를 벗게 되었다. 양비론(兩非論)의 강박 혹은 중도론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조국 후보자의 정치적 죽음과 삶은 이제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한국 정치사의 결정적 변곡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검찰이 8월 27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관련해 압수 수색을 한 곳은 20여 곳이다. 검찰 관계자는 "의혹을 받는 곳은 사실상 거의 다 포함됐다"고 했다. 법무장관 후보자 비리 의혹과 관련한 검찰 압수 수색에 대해 여권(與圈)에서 잇따라 비난 발언이 나오자, 검찰 내부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 "자기들 수사하면 검찰 개혁 방해하는 것이냐" "수사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이번 검찰의 압수 수색이 조 후보자에게 오히려 시간을 벌어주거나, 보호해주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도 검찰 내부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한 관계자는 "검찰이 보여주기 식으로 100명씩 동원해서 압수 수색을 나갈 만큼 할일 없는 조직 같으냐"며 "20곳 넘게 압수 수색을 하려면 며칠 전부터 사전답사도 가고, 각 지방검찰청에 지원 요청도 해야 하고 보통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양 철학에서 사람 팔자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선곤후태(先困後泰)와 선태후곤(先泰後困)이다. 인생 전반부에 곤란했던 팔자가 후반부에 좋아진다는 것이 선곤후태이다. 반대로 전반부에는 잘나가다가 후반부에 곤란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팔자가 선태후곤이다. 초년부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계속 잘나가는 사람은 없다. 계속 잘나가려면 8분 능선에서 멈추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국은 "선태후곤" 유형에 속하지 않나 싶다. 조국, 그는 그럼에도 "저의 가족이 고통스럽다 해도 제가 짊어진 짐을 함부로 내려놓을 수는 없다"란다. 처자 목을 베었다는 계백 장군도 아니고 어느 출사표가 이토록 비장할까. 그가 그동안 SNS와 기고문을 통해 쏟아낸 무수한 위선적 발언과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의 불운이나 몰락을 비웃는 잔혹한 말들은 그가 지극히 위험한 반사회적 인간임을 입증해준다. "법과 제도를 따라"서 국고를 축내고 서민을 울리는 자가 법무장관이 되면 나라가 무사할 수 있을까. 목사 안수증명 서류조차 적법하게 뗄 수 없는 자가 총회재판국장이 되어 불의한 의도에 따라 주님의 몸 된 여러 교회를 산산조각 내지를 않나,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 직무정지 고소를 하지를 않나. 그런 자가 있는 곳이 온전할까. 조국이 자기의 국기 문란 행위를 국민 앞에서 뉘우치거나 윤익세가 교회와 총회를 어지럽힌 죄과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날이 있을까.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는 거대한 대양(大洋)도 자기 손에서 반역의 피를 씻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바다가 붉게 물들 것이라고 통탄했다. 위원장 신규식 박사의 건투를 빈다. 그 조사처리의 적법성 여부조차 제104회 총회 보고 현장에서 총대들 함성으로 결판날 것이다. 2018-08-28
    • G.OPINION
    • G.OPINION
    2019-08-28
  • 총회장 이승희 정치적 결단의 때
    연암은 1780년 건륭제의 70세 생일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다녀와 쓴 견문록 ‘열하일기’에서 청(?)의 연호인 ‘건륭’을 사용했다. 명(明)은 망한 지 130여 년이 지났지만 조선에서는 건재했다. 조선은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 ‘숭정’을 쓰면서 대의를 따른다는 문재인 행세를 했다. 시대착오적 허위의식이었다. 그는 북벌(北伐)의 대상인 청을 ‘되놈’이 아닌, 조선이 만성적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본받아야 할 나라로 평가했다. ‘열하일기’는 명분과 관념에 포획돼 살아 꿈틀거리는 천하의 현실을 외면한 조선의 각성을 촉구한 문명비평서였다. 하지만 그 책은 청나라 오랑캐 연호를 쓴 불온원고로 몰려 조선이 일본에 망한 뒤인 1911년에야 활자로 간행됐다. 일본의 경제보복이라는 현실에 직면한 우리는 먼저 상대의 실체와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일본은 미국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때 확실하게 파악된다. 미국과 전쟁도 했지만 미국의 마음을 사는데 도가 통한 나라가 일본이다. 미국은 한·일 관계를 설계하고 좌지우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미국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국을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일본은 믿는다. 지금 아베의 일본과 트럼프의 미국은 문재인과 달리 속이 시커먼 트럼프와 천둥벌거숭이 김정은처럼 사실상 한통속이다. 한국이 아무리 읍소해도 미국은 중재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일본보다 경제력과 정보력이 부족한 우리는 미국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우리와 달리 일본은 필요할 때마다 미국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 직전의 장면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04년 미국화한 가네코 남작을 파견해 하버드 법대 동문인 루스벨트를 구워삶았다. 주미 일본대사는 루스벨트를 ‘일본 치어리더’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김상윤에 매달린 전계헌처럼 물정 어두운 고종은 미국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본을 키워서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한국이 중국에 기울었다”는 메시지를 워싱턴을 향해 줄기차게 발신했다. 2차 대전 A급 전범용의자가 세운 사사카와 평화재단 미국지부가 움직였다. 책임자는 미국인이다. 오바마 행정부 국가정보국(DNI) 국장 출신인 데니스 블레어다. 일본이 미국을 다루는 방법은 한 세기 전보다 진화했다. 우리는 100년 전 3월 1일 독립선언서에서 일본을 배타적 감정으로 단죄하지 않았다. 동양평화와 세계평화 건설에 함께 나서자고 했다. 지금 일본은 다른 나라로부터 인정받는데 목말라 있다. 섬나라 ‘왜놈’이 아닌 같은 섬나라지만 영국처럼 2차 대전 이후 크게 성장한 문명국이자 경제 대국이기 때문이다. 그렇듯 임기 말의 무지개 총회장이 신학도 정치도 비전도 미숙한 총장을 맞이한 혼돈의 총신과 이해관계로 얽힌 사고 노회들과 노회한 총대들의 협량(狹量)을 용서하고 변화와 개혁을 위한 신앙적인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화난다고 무시하면 지도자의 인정을 받는데 목말라 있는 라이벌들을 미래의 총회 정치 파트너로 대우해야 총회 난맥 현상이 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103년 기다림 끝에 세움 받은 화려하고 다재다능한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총회 10년 대계를 위한 정치적 결단의 때라고 본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같은 우리 교단을 위해서 섭리하신... 2018-08-12
    • G.OPINION
    • G.OPINION
    2019-08-12
  • 총회 정치 그 본질
    있잖아요.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리 노아가 본 무지개를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었거든요. 근데요. 이거 봐요. 신비롭죠. 무지개가 손에 내려와 앉았어요. 당신 손에도요.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언약의 무지개. 참 따뜻한 느낌이네요. 인간과 유전자가 98% 이상 일치한다는 침팬지는 다른 영장류에 비해 죽고 죽이는 잔혹한 싸움은 덜 하는 편이라고 한다. 대신 자기가 속한 집단 안에서 정치 공학적 권력 투쟁이 많다고 한다. 인간의 정치처럼 복잡한 동맹과 배반으로 기존 질서를 뒤바꿔버리는 수단을 동원한다는 게 침팬지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다. 물론 강한 우두머리에게 2위가 어느 날 갑자기 치받는 경우는 드물다. 조금씩 작은 전조가 반복되는데 권력 서열 1위의 뒤에서 2위와 3위가 동맹을 맺는 방식이 가장 흔한 일이다. 재미있는 징조는 1위 침팬지가 뻔히 보는 앞에서 3위 침팬지가 2위 침팬지의 털을 골라준다면 쿠데타 전조로 봐도 된다는 것이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는 ‘침팬지 정치술’이 어느 정도까지는 정치의 본질일지 모른다. 그러나 교단 정치를 들여다보면 이런 아쉬움이 든다. 속세 권력처럼 세력 다툼은 있는데 정치가 없다. 총회 정치 현실은 있는데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정치 신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치 철학이 없거나 아예 정치적 도의마저 짓밟기 일쑤이다. 정치 리더는 있는데 정치 리더십은 없다. 한국 정치 현실처럼 지역 파당은 있는데 교단 지도층은 없다. 당연히 지도자의 길은 가시밭길이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대개의 지도자는 책임과 헌신 그리고 희생으로 감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패배가 뻔해도 김영삼이나 김대중처럼 불가능한 꿈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우리도 총회와 총신을 위한 그와 같은 노력엔 산하 교회와 노회의 많은 동정과 사랑과 지원이 뒤따르고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모세처럼 하나님의 소명에 응하는 총회 지도자의 반열에 서려면 어지러운 총회와 어려운 총신을 위한 ‘공적 헌신과 책임’을 생각하고 몸소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칼빈주의 교단 정치의 본질 즉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한다. 아직은 기우이지만 현재의 총회 정치 구도가 지역이나 사적 이익만 추구하려 한다면 그게 ‘침팬지 정치술’이다. 그것은 정준모나 김영우 같은 정치적 미아가 되는 지름길이다. 현실 정치인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내일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정치적 도의도 없는 정준모나 입만 열면 역사의식이니 아브라함 카이퍼를 외치던 김영우의 교훈은 무엇인가. 신앙과 힘의 모순적 복합체인 총회는 지역 지도자 간 동맹 관계와 세력 균형 위에서 총회와 노회의 평화 공존을 지향한다. 그 실례로 국가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 기초한 한·미·일 간 협력과 공조는 지난 반세기 이상 동북아 평화와 번영의 토대였다. 국제 평화는 이성적 국가 철학의 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게 문재인 정부가 지켜야 할 대한민국의 근본이다.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방비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걷고 지도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이유이다. 제104회 총회 선거를 50여일 앞둔 시기 문재인 치하의 국가도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고 총회와 총신도 어렵다. 총회는 법이 서고 행정이 투명해져야 하고 경영과 신학 노선에 방만한 총신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치러야 혹독한 현실을 헤쳐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제103회 무지개 총회장 이승희 목사 지도력 아래 우리 총회 모든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고 기도에 힘써야 할 때인 것 같다. 이 지혜는 지도층의 신앙적 헌신을 통해 두터워진다. 총대들은 총회와 총신의 미래를 개혁하는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정치가(statesman)를 원하지 다음 선거와 자리만 집착하는 김영우나 김상윤같은 정치꾼(politician)을 고대하지 않는다. 이 난국에 '침팬지 정치술'이 제104회 총회 선거판에 끼어든다면 교단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9-08-04
    • G.OPINION
    • G.OPINION
    2019-08-04
  • 총회 총신 그리고 자본주의
    오래된 대구 서문시장 골목 누구는 호객하고 누구는 커피를 나누어 준다. 양미간이 팽팽한 교회 앞을 지나는데 순대국집의 막 쪄낸 돼지 내장이 기도 응답처럼 허기 앞에서 모락모락 한다. 꽃집 여름 장미는 배우처럼 붉은 잎으로 진한 대사를 내뱉는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가끔씩 퇴색한 목사처럼 강단에 내몰려서 색 바랜 노트에나 구걸하는 설교처럼 내 삶도 마음이 지는 쪽으로 해가 지듯 저물 것인가. 퍼붓는 장대비까지 덤으로 얹어놓아도 재고로만 쌓이는 오래된 믿음들에 대한 소망을 쓸쓸히 거두며 마치는 정오 기도. 막스 베버(Max Weber,1864-1920)는 말했다.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정신은 성경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자를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사람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잠 22:29)이다." 이 말씀에서의 '근실한 자'는 요셉 같은 근실한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 앞에 서리라'는 말씀의 뜻은 '근실한 사람'은 왕같이 귀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불러 내사 가나안(현재의 팔레스타인)으로 인도하셨다. 이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제사장 민족을 형성하시고 그 민족을 통하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 위해서였다. 그가 오시기까지의 약 2000년 역사 과정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있었다. 그가 요셉이었다. 요셉은 최초의 족장인 아브라함의 증손자(아브라함 → 이삭→ 야곱 → 요셉)이고,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이었다. 요셉은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받던 라헬의 아들이었다. 형들이 이를 시기하여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에 팔았다(창 37:28). 미디안 상인은 이 요셉을 애굽 왕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종으로 팔았다. 그러나 또 고난이 닥쳤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바로 왕궁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고난의 세월 13년 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로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다(창 41:46). 성경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의 종일 때에도 바로 왕궁의 감옥살이를 할 때에도 항상 근실했다(diligent)기록하고 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애굽과 가나안 지방에 7년의 풍년이 연속되었다. 이 7년 동안 요셉은 온 애굽 땅 곳곳에 곡식 창고를 세워 곡식을 미리 저장했다. 7년의 풍년이 끝나자 이번에는 7년의 큰 흉년이 계속되었다(창 41장). 이 흉년 때 요셉은 자기 가족 70명을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불러내어 온 애굽 백성과 함께 기근의 굶주림에서 생명을 구원했다. 만약 이때 요셉의 지혜로운 치적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민족과 애굽 제국은 인류역사에서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 요셉은 자기를 팔았던 형들 앞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전하며 위로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음으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7-8 고난의 13년 세월 속에서도 요셉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근실히 수행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마침내 요셉은 자기 동족과 애굽을 구원했다. 하나님을 믿는 요셉의 근실성(diligence)은 잠언에 기록되고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의 씨앗이 되었다고 막스 베버는 생각했다. 중세의 가톨릭 사회에서는 직업(노동)은 인간 생활을 위한 자연적 질서로 필연적이지만 신앙생활에서는 특별한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가치로 보았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빈주의자(Calvinist)들에게는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중시되어 직업과 노동의 근실성이 신앙의 척도가 되었다. 즉 그들에게는 직업이 교회생활의 일환이었다. 다시 말해 직업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신앙도 깊지 못하다는 뜻이다.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들은 직업과 노동을 하나님의 소명(calling)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소득으로 영위되는 경제생활(소비생활)에도 금욕으로 절제생활을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재산은 하나님께서 맡긴 것으로 신자는 청지기일 뿐이고 또 그 사용은 심판의 근거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 사회의 산업자본은 전근대적인 영리위주의 자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개신교 신자들의 금욕(절제) 윤리에 따라 축적된 화폐자본이었다. 그러므로 이 자본은 특별한 사회 즉 신앙인들의 사회의 산물이었다. 전근대의 영리위주의 천민자본주의는 인간의 자연적 이기심에서 일어났다. 그 자본주의는 12세기 경부터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활성화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의 윤리적 자본주의는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들의 특별한 신앙윤리 금욕과 절제를 통해 일어났다. 이 특징을 막스 베버는 그의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4-1905)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103회 총회 무지개 이승희 총회장 지도력 하에서 총회와 총신이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승희 총회장은 어려운 부치의 반야월교회를 대구를 넘어 한국 교회의 어엿한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렇듯 그는 목회 성공과 총회장 경력을 살려 교단 지도자로서 총회와 총신의 경영을 성경에 근거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원리를 따라 확립해 주기를 바란다. 길자연이나 김영우같은 총신의 전임자들과 달리... 2019-08-01
    • G.OPINION
    • G.OPINION
    2019-08-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