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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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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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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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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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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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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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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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총회연금가입자회 염원
    충성 측과 최 권사 측 사이 정산 소송 1심 충성 측에 대한 기각 판결 그 정산 금액 중 60프로는 최 권사 몫 그 소송에서 이기든 지든 그 지분에 따라 30억 납골당 측 몫 각 교단 연금액 기장 측 2000억 통합 측 4000억 기감 측 1조 우리 교단 통합 측 10분의 1 김선규 총회장 “이제 우리 교단도 납골당 16년 적폐를 넘어서서 최소한 기장 측이라도 따라 잡읍시다” 우리는 총신 뒷산에 핀 꽃의 줄기다. 총회 앞길에 고인 빗물에 비치는 낮달이다. 새벽별을 이정표 삼아 골고다 비탈길을 가는 루포의 아비 구레네 시몬이다. 이도저도 아니면 아파트 노인정 앞 평상에 내려앉은 하얀 목련 푸른 잎사귀다. 하나님 나라 말고 오갈 데 없는 우리 목사의 거처는 다 멀고 희미하고 후미진 곳들이다. 꽃의 줄기와 낮달과 나뭇잎은 아득하고 외로운 것들이다. 그러나 있는 듯 없는 듯 숨 쉬는 이것들이 없으면 세상이 외로워지고 잘 나가는 목회자가 아니었던 우리는 외로워질 것이다. 그런 곳에 가서 그들이 되려 하는 우리의 마음은 가난하다. 그래서 갈릴리 산상에서 주님 말씀하신 그 가난한 우리의 마음은 드물고 귀한 마음이다. 총회연금가입자회 제11회 정기총회가 3월 29일 총회회관에서 열렸다. 자신의 피눈물이 강을 이룬다는 총회납골당열혈지사 권의수 목사는 신임 회장에 선임된 날 이렇게 말했다고 기독신문의 박민균 기자가 자상하게 전했다. “작년 2월 6일 은급재단은 납골기에 대한 정산을 마치고, 담보를 확보해서 매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산도 담보도 없이 최춘경 씨에게 매각하려 한다. 더 이상 불법을 강행하면 안 된다” 이어서 사법적인 책임이 따를 말을 함부로 하는 권의수의 불법에 대한 법적 보충 설명으로 총회 몇 안 되는 법학박사이고 총회은급재단이사회 이사인 유장춘 목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제가 매각협상을 하면서 51억 원에 대한 담보를 받고 27억 원에 매각하자고 제안했다. 대형 로펌들에게 문의했을 때, 반드시 소송을 당한다고 했다. 반드시 담보를 설정해야 한다고 했다. 담보설정도 안하고 27억 원에 매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납골당을 제대로 처리해야 은급재단과 총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총회 돈은 눈 먼 돈’이란 인식이 더 이상 퍼져서는 안 된다.” 이 두 사람의 발언에 대한 진상은 이렇다. 2016년 7월 13일 총회회관 2층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제100회 총회 실행위원회(위원장 박무용)에서 몇 안 되는 총회 법학박사 가운데 한 사람 유장춘이 말했다. “법적으로야 잘 아시겠지만 은급재단 이사회에 (납골당 매각에 대한) 법적 권한이 있고 여기는 의결 총수로 충분히 해야 되고 (결의해 주면) 일을 급속도로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것은 여론의 문제고 법적인 문제는 은급재단이사회가 팔면 법적인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여론을 충분히 청취해야 되고 총회결의는 이미 손해를 보더라도 매각하라는 것이 기본 결의 내용입니다. 여론을 청취한 다음에 이것을 진행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일만 악의 뿌리 돈을 좋아한다고 스스로 외치고 실행하는 허활민의 평생 동지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은 법학박사 유장춘의 실행위원회 발언과 결의를 따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사회를 본 총회 결의와 실행위원회 결의에 따라 27억 매각 의사를 확인하는 내용증명까지 은급재단이사장 자신의 이름으로 보내고도 최춘경 권사 측에 대한 납골당 매각을 제100회기에 매듭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2016년 9월 제101회 총회(총회장 김선규 목사)에서 격론 끝에 납골당 문제는 제100회 실행위원회(위원장 박무용) 결의대로 매각하도록 결의가 됐다. 총회 유리창 김선규 제101회 총회장은 1월 23일 총회회관에서 신년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그 해결 의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는 이미 그 내부에 관계하고 있는 분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나름의 해법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컨트롤(조정) 가능한 문제들로 보고 있습니다...” 역대 총회장과 달리 김선규 총회장은 자신의 말대로 16년 총회 적폐를 청산하고 총회은급재단을 발전시키기 위해 은급재단 이사회(이사장 김선규 목사)는 1년간 10회 회의를 열어 이사회 합의 납골당 매각 이행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8월 11일 계약금 2억7천만 원을 받고 정식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하고도 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총회유리창 김선규 총회장은 제102회 총회 개회일인 9월 18일 낮 12시 익산 전복궁 식당에서 전체이사회를 열었다. 그리고 벽제 납골당을 27억 원을 최춘경 권사에게 매각하는 건을 표결에 붙였다. 이날 이사회에는 감사 2명을 제외하고 13명 이사 전원이 참석했다. 표결 결과 3분의 2에 해당하는 9명이 매각 찬성 의사를 표시해 최종 매각이 결정됐다. 앞서 은급재단은 8월 11일 최 씨와 27억 원 매매계약서를 작성할 때 은급재단 이사장 김선규 총회장은 돌다리도 두들긴다는 심정으로 최 권사 측의 어려운 양보를 얻어 은급재단 이사 3분의 2(9명) 동의를 계약 단서조항으로 명기했기 때문에 그것까지 충족시킨 것이다. 이렇게 총회 결의와 총회실행위원회 결의를 따라 총회은급재단이사회 10회에 걸친 난상 토론과 합의로 체결된 납골당 매각 계약을 총회연금가입자회 회장으로 선임된 권의수는 돈 좋아하는 허활민과 박무용처럼 되고 싶은지 합법적 절차를 따른 납골당 매각 계약을 불법이라고 발언했으니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 다음 유장춘 목사는 제100회 2015년 총회 현장과 2016년 실행위원회에서도 27억에 팔아야 한다고 발언을 했다. 그리고 내가 취재한 것만도 3년째인 2017년 유장춘 목사 자신이 총회은급재단이사회 이사로서 10회에 걸친 이사회 회의에서 가장 집요하고 본분에 어긋난 반대와 의견을 개진했다. 그리고 자신도 시종 참석해 표결에 참여했음에도 합법적 절차에 따라 최종 체결된 납골당 매매 계약에 대해 유장춘 법학박사는 2018년 지금도 반대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충성 측과 최권사 측 사이 정산소송 건은 1심 충성 측에 대한 기각 판결이 났고 충성 측에서 항소해 2심 심리 진행 중이다. 더군다나 2015년 1월 13일 사법부는 납골당 매매계약과 관련해 은급재단이 2013년 11월 7일 매수인(충성교회)에게 계약 해제 의사를 통지함으로 계약이 해제됐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총회연금가입자회 신임회장 권의수와 법학박사 유장춘은 총회를 위한 것인지 자신들을 위한 것인지 실상은 총회에 아무 의미 없는 51억 손해배상 소송 담보를 요구하며 합법적인 납골당 매매계약에 대해 꼬리를 무는 아리송한 시비를 일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51억 손해배상 소송 건도 그 중심은 실제로 최 권사 측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 그들은 사법적 책임을 져야할 곤혹스러운 날이 올지도 모른다. 연금가입자회 회장에서 물러나는 신실한 손범성 목사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란 제목의 설교에서 말했다고 한다. “납골당 문제가 잘 해결되고 은급재단이 투명하게 운영되어 목회자들이 노후걱정을 하지 않고 목회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목회자들의 염원 해결을 위해 제101회 총회장 총회 유리창 김선규 목사는 납골당 매매 계약 체결을 앞두고 은급재단이사회 석상에서 말했다. “각 교단 연금액이 기장 측(교세 30만)은 2000억 통합 측은 4000억 기감 측은 1조입니다. 이제 우리 교단도 납골당 16년 적폐를 넘어서서 발전을 해 최소한 기장 측이라도 따라 잡읍시다.” 그러나 연금가입자회 신임회장 권의수와 총회은급재단이사회 이사 유장춘 법학박사는 적폐 속으로 다시 파묻히려고 하는 걸 보니 그럴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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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4-05
  • 소강석 목사 수난주간 논단
    시대의 예언자 소강석 목사 “내부 분열과 싸움은 결국 비참한 공멸이며 패망으로 가는 길” 역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며 반복의 원리 지금 우리 교단의 현실 총신 문제로 큰 갈등과 상처 급기야 공중파 방송 보도만천하에 총신 문제 드러나 십자가 정신을 붙잡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 대의를 가지고 공익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가 황금의 입 김희태 목사는 틈만 나면 들르는 제주도 농장 감귤나무 사이에 거름을 새로이 하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었을 것이다. 제주도에 들렀을 때 본 김희태 목사의 장화를 신고 밀짚모자를 쓴 행색은 경험이 오랜 농부에 못지않았다. 내가 사는 수락산에도 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풀이 돋고 아파트 자투리땅의 흙냄새도 맡게 된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 올리는 봄 풀잎은 육신의 부활을 실감하게 한다. 그 믿음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는 봄 풀잎을 보고 있으면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되고 또 기적과도 같은 부활의 능력이 살가워지기도 한다. 텃밭 농사를 지은 적이 있는 사람이 말했다. 열무와 당근 그리고 감자와 고구마 또 아욱과 상추와 배추 농사를 지었다. 소출은 썩 좋지 않았지만 행복감은 꽤 있었다. 움트는 것을 돕고 푸른 성장을 돕고 열매를 맺는 것을 돕는 것을 통해서 내가 움트고 내가 자라고 내가 열매가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내게 텃밭 농사는 단순하게 농작물을 기르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마음 밭을 경작하는 일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밝음과 활력과 자애와 보살핌의 씨앗을 심고 가꾸는 일이었다. 나는 작은 땅의 경작을 통해 마음에 많은 것을 얻었다. 이 일은 비록 물질적으로 얻는 것이 사소할지 모르지만 슬픔과 좌절의 늪에 자주 빠지게 되는 우리의 삶에 견주어 보면 상실감에 빠진 마음을 밝게 회복시키는 일인 만큼 그 이익은 상당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자연의 성장을 도우면서 우리 마음속에 긍정하는 마음도 함께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3월 6일 제74회 총회장을 지낸 이성택 목사(서울평안교회 원로)의 장례식을 다녀온 김진웅 목사(칼빈대 재단이사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93세의 원로 이성택 목사 입관예배의 축도에 앞서 장례예배 사상 유례가 없는 고인의 덕을 기리는 회고담 축도를 했다고 한다(3월 7일 발인예배 축도 평양노회장 박광원 목사). 고인은 남북전쟁 통에 헤어진 아내와 1남 1녀의 자녀를 그리며 68년 독신으로 지냈다. 70년 대 평안교회 분쟁을 믿음과 기도와 비폭력으로 해결한 성자 반열의 목사 한 분이 죽었다는 소식은 총신의 소나무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년 넘은 나무 하나가 믿음에서 떠난 불법과 폭력에 흔들리는 총신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이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기도 하다. 오늘도 믿음에서 떠난 일부 학생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 총신 건물 사이를 바쁘게 오갈 것이다. 그들도 안다. 믿음에서 벗어난 일부 신학생들의 총신의 신학 수업과 예배를 드리는 건물에 대한 불법을 굳이 피하지 않고 폭력을 묵과하는 총회 현실을. 그러나 총회는 불법과 친하고 부패가 편하다. 불법과 부패의 배경, 그것으로 족한 총회에 오늘도 수난주간의 봄바람이 분다. 한국교회의 목회생태계 보존과 개선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물질도 아끼지 않고 홀로 분투하는 시대의 예언자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3월 26일 자 기독신문에 올린 논단에 이런 대목이 있다. “... 역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며 반복의 원리이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십자가 깃발이 땅에 떨어진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역사적 교훈을 준다. 내부 분열과 싸움은 결국 비참한 공멸이며, 패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역사는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며 반복의 원리이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십자가 깃발이 땅에 떨어진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소중한 역사적 교훈을 준다. 내부 분열과 싸움은 결국 비참한 공멸이며 패망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지금 우리 교단의 현실은 어떤가. 총신 문제로 인해서 얼마나 큰 갈등을 겪으며 상처를 받고 있는가. 급기야는 공중파 방송에 보도되면서 만천하에 총신 문제가 낱낱이 드러나고 말았다.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정말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붙잡고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대의를 가지고 공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가...”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잡히시는 예수께서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릴 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0-52 우리 믿음의 주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 총신생과 총회 구성원들에게도 절대 필요할 것이다. 향후 개혁주의 보수신학의 보루 총신의 폭력의 악순환을 피하기 위해서는... 2018-03-28
    • G.OPINION
    2018-03-28
  • 총신 사태의 실망과 소망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비폭력 인권 운동가 킹 목사와 달리 총신 출신 목사로서 총신대 사태에 실망과 소망이 있다 실망은 개혁 신앙을 가진 우리의 문제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 믿음이 없는 세상에 알리고 세상이 인정한 것을 당연시 여기고 좋아한다는 것 소망은 믿음 없는 세상도 우리와 달리폭력이 아닌 법대로 처리하는 엄정한 법집행 관행이 있다는 것 믿음의 기도드리고 나면 뒤에 남는 것이 없어 좋다. 죄를 짓고 회개하고 그 약속 허물고 또 그래도 결국은 푸른 하늘뿐이어서 좋다. 한 행의 말씀 읽고 나면 부담이 없어서 좋다. 설교를 쓰고 지우고 결국은 흰 여백뿐이어서 좋다. 평범한 목사 남기는 유산이 없어서 좋다. 벌고 쓰고 헌금하고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흙이니 흙이 돼도 돌아갈 곳이 있어서 좋다. 성경을 벗어나면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직 알려진 바가 없다. 안다고 하는 말들도 사실은 입증되진 않았다. 우리는 삶을 알지 못하면서도 다 안다는 듯 살아간다. 분명한 건 아무것도 쥐지 않고 왔다가 때가 되면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생명은 다 내려놓고 간다는 사실뿐. 이걸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어느 때는 이렇게 없음이 좋아지는 건지도 모른다. 구름 없는 하늘, 텅 빈 백지, 그리고 홀가분한 몸과 마음. 3월 22일 구속 영장 심사를 앞두고 다스 실소유주로서 책임져야 한다는 게 검찰 주장이니 장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마음은 어떨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했던가. 더디고 답답한 법이 사람들의 정의감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불만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의 부정’(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이라는 법언(法諺 법에 관한 격언이나 속담)도 이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영국의 19세기 명재상 글래드스턴이 이 격언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모두 합하면 72권의 방대한 책 탈무드를 6부로 나누었을 때 4부 중 9번째 책 ‘피르케이 아보트’(선조의 교훈)에 ‘정의의 지체와 부정이 세상에 칼을 불렀다’는 구절로 봐서는 그 연원이 2000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피르케이 아보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의 금언도 기록되어 있다. ‘내가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해 살겠는가. 내가 나를 위해 산다면 나는 무엇이겠는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란 말인가’(피르케이 아보트 1:14). 아울러 “시골뜨기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피르케이 아보트 2:6)도 기억에 남는 글귀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범죄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어쨌든 ‘정의의 지체와 부정이 세상에 칼을 불렀다’는 말이 법과 현실의 괴리를 지적할 때 쓰는 단골 인용구가 된 것은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공이 크다. 1963년 앨라배마주 흑인의 합법적인 평화 시위를 돕다 투옥된 킹은 “흑인들에게 ‘기다려라’는 말은 ‘안 돼’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지나치게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버밍햄 감옥에서의 편지’)라고 외쳤다. 컨테이너로 총신대 건물 두 동 출입구마다 막아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일부 학생들의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용역이 동원되어 통로를 열고 4층 전산실을 회복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학사 행정을 마비시키는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사건을 국회에서 한 국회의원이 불법으로 거론하고 교단 자체의 힘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성토하고 문교부 당국의 개입을 촉구했다. 그에 띠라 기독교계 문제 보도라면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유력 일간지와 방송들이 그것을 뉴스거리로 보도했다. 국회의원의 지적과 여론의 보도에 교육부는 3월 19일 총신대에 공문을 보내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학생들이 제기한 민원과 학사·인사·입시 운영 현황, 회계 관리 현황, 이사회 운영 전반 등을 조사하겠다고 통보했다. 교육부가 2014년도부터 2018년 3월 1일까지의 회계연도 예·결산서를 요구하고 학사와 이사회 운영 전반을 광범위하게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이런 믿음이 없는 세상의 실태에 박수를 치고 좋아하는 교계 언론과 목회자와 신학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가 하는 의구심과 걱정이 앞선다.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은 때로 정의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1930년대 미국 경찰의 강압적 수사 방식에 제동을 건 말이었다고 한다. 이에 버금가는 가장 유명한 말은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의 링컨기념관 앞에서 행한 ‘I have a dream’은 미국사회의 흑인에 대한 차별과 그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 그리고 평화공존에 대한 그의 소망과 신념을 담은 유명한 연설이 되었다. 1964년 그는 비폭력주의 저항운동에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n the state of Mississippi, a stat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injustice, sweltering with the heat of oppression, will be transformed into an oasis of freedom and justice...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불의의 열기로 무더운, 억압의 열기로 무더운, 저 미시시피마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 킹 목사와 달리 총신 출신 목사로서 총신대 사태를 바라보며 느끼는 실망과 소망이 있다. 실망은 개혁신학 신앙을 가진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음이 없는 세상에 알리고 세상이 인정한 것을 우리가 당연시 여기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망은 믿음이 없는 세상임에도 우리가 보기에 이러든 저러든 폭력이 아닌 법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성경의 믿음이 없지만 엄정한 법집행의 관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상징으로 세상 사람들은 안대를 두르고 저울과 칼이나 법전을 든 유스티티아를 정의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서구에서는 법과 정의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인격화시킨 정의의 여신상을 법의 상징물로 여겨 각 도시의 시청, 법원, 광장 등에 세웠다. 유스티티아(Justitia)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이름은 라틴어로 정의를 의미하며 영어의 ‘정의’(Justice)란 단어가 여기서 생겨났다. 정의의 여신상은 각 나라의 시대와 사회의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형되어 묘사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가리지 않고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그리스의 여신 디케는 칼만 쥐고 있었으나 로마의 유스티티아에 이르러 공평의 의미가 가미되어 저울을 들고 있는 모습의 여신상이 만들어졌다. 여신이 들고 있는 상징의 의미는 이렇다. 정의의 여신상의 저울은 ‘법 집행에 있어 편견이 배제된 평등’을 상징한다. 법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해야 한다. 평등한 법 집행을 하겠다는 뜻으로 평형저울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형평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칼은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겠다는 뜻으로 국가의 위하력(겁을 주어 범법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상징한다.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따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엄격히 집행하도록 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법의 엄격한 집행’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법전은 말 그대로 ‘법전에 의한 법적용’을 뜻한다. 법은 법전에 의해 기억되기 때문이다. 가린 눈이나 눈가리개는 사적 편견이나 차별 없이 공정하게 집행하겠다는 뜻이다. 즉 ‘공정성’을 뜻한다. 그냥 눈을 뜨고 본다면 사람을 차별하지만 눈을 감고 사람을 판단한다면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짐이 없는 공평함’을 뜻한다. 정의(正義)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고 올바른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로 대부분의 법이 포함하는 이념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짐꾼 아모스를 통해 말씀한다.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But let judgment run down as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아모스 5:24 2018-03-21
    • G.OPINION
    2018-03-21
  • 총신과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
    이제 기도의 응답인지 폭력에 대한 대처인지 정부 기관 교육부 총신 조사 시작돼 그 결과를 기도하고 그 결과에 순응해야 할 것 기도 히브리어 원래 뜻 ‘호의적인 판결을 내려달라고 판사에게 호소하는 것’ 3월 19일 오후 1시 총회 임원 회의실에서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위원장 전계헌 총회장)가 위원장이 불참한 가운데 서기 권순웅 목사의 주도로 열렸다. 사진을 찍는 것 이외에는 내용 취재는 비공개였다.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의 중심 불꽃 권순웅 목사가 각 지역협의회에서 열리는 집회에서 주장하는 일관된 기조는 이런 것 같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총신 사태를 통해 우리 총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운동처럼 강력한 운동성을 가지고 총회와 총신의 질서가 공의롭게 회복되도록 힘을 모읍시다.” 그의 주장처럼 되기 위해서는 개혁사상의 본질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여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그 95개 논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와 같은 잘못을 비판하고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루터는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추진 동력을 제공한 것은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이다. 그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사상을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한다. 그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가 1536년 저술한 초판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한 개신교 사상 중 루터교회와 구별되는 칼빈주의를 뜻한다. 즉 칼빈주의(Calvinism) 또는 개혁주의(Reformed Tradition, Reformed Chrisitianity, Reformed Protestantism, Reformed Faith)는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 사상 및 성경을 따르는 신학사상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유명한 표어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것이다. 작금의 총신 사태에 대한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의 대처와 각 지역 협의회의 실태는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 사상 및 성경을 따르는 개혁사상을 부흥시키는 운동에서 좀 벗어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위원회가 지향하는 바대로 개혁사상부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성경과 ‘기독교 강요’에 근거한 실천 강요를 제시하고 실행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총신 사태에 대한 불법과 폭력을 지지하거나 덮어주는 것 같은 태도로 인해 성경과 개혁사상에 어긋난 행보는 수정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성경 어디에서도 칼빈의 저서 어디에서도 폭력과 불법은 어떤 경우에도 반대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고 광나루 신학교를 잃어도 WCC에 반대해 맨몸으로 일어선 교단이다. 더군다나 총신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 교단 신학교이고 명목상이라도 그 정관은 성경과 개혁사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떠한 행동이나 생각은 한 치라도 성경과 개혁사상에서 벗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이교도들처럼 목적을 위해 불법과 폭력 수단을 인정하거나 실행한다면 그들은 교단을 떠나야 할 것이다. 총회 감사부가 첫째 날 감사를 끝낸 3월 18일 오후 늦게 교육부는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총신대학교(총신대학교)에 대해 2018. 3. 20(화)~2018. 3. 23(금)까지 실태조사를 한다고 통보해 왔다. 그리고 일부 신학생들이 총회회관 4층에 몰려와 총회장 면담을 주장하고 총회장을 만날 수 없자 교단지 기독신문 사무실에 들어가 시위성 요구를 강석근 편집국장에게 했다. 다윗의 별 전계헌 총회장이 폭력을 자제하고 총신 사태를 풀어야 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기독신문 인터넷 판에서 내려달라는 요구였다. 그러한 행태의 실상은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압박하고 말살하는 신학생들의 협박과 폭력인 셈이었다. 교육부의 조사내용은 교육부에 제기된 각종 민원 사실여부 확인, 학사, 인사, 입시, 운영 현황, 회계(재산) 관리 현황, 이사회 운영 전반에 관한 사항 등이다. 교육부는 실태조사에 대한 법적 근거로 사립학교법 제48조 및 제70조로 제시했다. 제48조(보고 징수 등) 관할청은 감독상 필요한 때에는 학교법인 또는 사학 지원 단체에 대하여 보고서의 제출을 명하거나, 장부·서류 등을 검사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필요한 조치를 명할 수 있다. 제70조(보고 조사 등) 관할청은 사립학교의 교육에 관하여 조사를 하거나 통계 기타 필요한 사항에 관한 보고를 하게 하거나, 소속공무원으로 하여금 장부 기타 서류 등을 검사하게 하거나 교육의 실시상황을 조사하게 할 수 있다. 이제 기도의 응답인지 폭력에 대한 대처인지 정부 기관 교육부의 조사가 시작됐다. 그 결과를 기다리고 그 결과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믿음에서 벗어난 일부 세력의 바람대로 이제 정부가 개입했으니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민주 정부의 처리는 폭력과 강압이 아닌 법의 절차를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총신대 총장 김영우 목사가 이 험악한 사태를 견디고 대처하는 초인적인 믿음과 인내는 가히 순교자 급이다. 이제 100년 총회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개혁사상부흥운동위원회의 운동이 좋은 열매를 맺어 교단에서 숨을 죽인 개혁사상이 부흥할지 김영우 목사의 역사적 개혁주의가 살아남아 역시 총신에서 기를 못 펴는 개혁사상이 기지개를 펼지 기도해야겠다. 기도(prayer)의 히브리어 원래 뜻은 ‘호의적인 판결을 내려달라고 판사에게 호소하는 것’(to apply to a judge for a favorable decision)이다. 이제 폭력과 불법은 접고 문교부의 ‘호의적인 조사’와 하나님의 ‘호의적인 뜻’을 기다리도록 하자. 2018-03-20
    • G.OPINION
    2018-03-20
  • 총신 폭력 라쇼몽 효과
    테러리스트가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 총신의 역사와 전통을 지우기 위한 시간이 왔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폭력을 금하신 주님의 세상이었고 주님의 세상이고 주님의 세상이리라 폭력은 신체적인 손상을 가져오고 정신적·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인 강제력 법은 상해를 입히거나 협박 행위사람 감금이나 주거 침입 행위 기물의 파손 등 폭력이라 규정 총신 폭력 사태에 대한 목사들의 대답이재륜 ‘아직 기사를 보지 못했다’김정호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김상윤 ‘명백한 불법이다’이승희 ‘아직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기인 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총신대 유리창 문살에 돋는 달무리. 그리고 적막한 밤하늘에 빛나던 달이 가리운다. 믿음의 존립은 은혜의 결과이다. 나는 성화의 미완 상태로 오늘 여기에 살고 있다. 나 또한 성화의 미완인 채로 살다 죽기 전 성화가 완성되어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교리를 믿는다. 2월 28일 나의 믿음에 객관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총신 폭력 사태를 바라보며 문이 자전거 자물쇠로 안으로 잠긴 총신 종합관 앞에 섰다. 총신이 비상사태라고 선포한 제102회 총회 실행위원회의 결의에 무색하게 금식 기도를 한 뒤 일어난 총신의 폭력사태에 할 말을 잃는다. 허허로운 웃음이 총신 겨울나무 가지에 걸렸다. 울리지 않는 종탑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가 웃음에 반짝 빛났다. 신라와 당나라가 대립하고 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라쇼몽'의 처마 밑. 나무꾼과 중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중얼거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한 남자가 그 소리를 듣고 궁금해 한다. 이들은 이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그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사무라이(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를 뜻하는데 본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시侍에서 나온 말) 타케히로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와 함께 오전의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사무라이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산적 타조마루는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타조마루는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마사코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문제는 겉보기에는 명백한 것 같은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그의 것과 다르다.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려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사울 왕 앞의 선지자 사무엘처럼 또 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엇갈리는 진술 속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담겨있다. 좀처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이때 실은 그 현장을 목격한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나무꾼이다. 그는 마사코가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 결투를 시켰고 두 남자는 비겁하고 추잡한 개싸움을 벌인 끝에 산적이 이겼다고 했다. 알고 보니 나무꾼도 마사코의 진주가 박힌 단도를 훔쳤다. 네 사람은 모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사건의 요지는 이렇다. 한 사무라이가 대낮 숲속에서 죽임을 당한다. 앞서 그의 아내는 산적으로부터 겁탈 당했다. 이것이 ’팩트‘다. 이 사건에 네 사람이 연루된다. 사무라이를 죽인 남자인 산적 타조마루 사무라이 타케히로, 사무라이의 아내 마사코, 그리고 이들을 목격한 나무꾼이다. 그런데 네 사람의 진술이 엇갈린다. 사건은 하나인데 진술은 넷이다. 인물 간의 다른 시각은 ‘라쇼몽 효과’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입장으로 해석하면서 본질을 다르게 인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총회가 총신대학교 문제를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2017년 12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일간 금식기도회를 선포했다. 그리고 다윗의 별 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호소했다. “총신사태와 한국교회가 당면한 과제를 보면 참담함 그 자체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해답을 얻었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전국 교회가 뜨겁게 기도하는 동력을 얻길 바랍니다. 총신대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며 조국교회와 열방선교의 모판입니다. 총신사태 해결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총신대학교 신대원 비대위 소속 학생들이 김영우 총장 퇴진을 요구하며 총신대 사당캠퍼스 본관 4층에 있는 전산실과 도서관 열람실을 지난 1월 29일부터 21일째 종합관 4층 점거를 이어나가고 있을 때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곽한락 전도사는 2월 19일 새벽 5시경 총신대종합관 전산실 시스템을 정지시키는 테러를 지시했다. “학생들은 투쟁을 멈추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2월 6일 기독신문 3면 전면 성명서를 통해 총회장 전계헌 목사가 투쟁보다 기도를 호소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총신 비대위 소속 신학생들은 총회장의 간곡한 부탁을 불효자처럼 거부했다. 그들은 고작 2주 만인 2월 19일 새벽 5시 점령하고 있던 총신 전산실 전원을 뽑고 서버를 마비시키고 총신 행정을 불구로 만들었다. 2월 23일 본관 점거를 결의한 신대원 비상대책위원회는 종합관 1층 학생종합서비스센터를 찾아 직원들에게 퇴거를 요구했다. 직원들이 나갈 수 없다고 맞서면서 소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총신대 박만규 기획평가팀장이 비대위 신학생들의 폭력을 앞세운 불손과 불법에 맞서 화분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총신 관계자들 가운데 신학생들의 불법 폭력에 맞선 유일한 대응을 한 인물이었다. 직원에게 뭔가를 문의하는 신학생을 겁박하고 비대위 신학생이 삿대질을 하며 직원을 하대했다. 그것을 보다 못해 한마디 한 총신대 6회 72학번 신대원 72회 출신인 나에게도 비대위 학생은 위협적인 태도로 앞뒤에서 겁박했다. 그래서 나도 총신 출신이라며 그와 같은 몸짓으로 그에게 했더니 2학년생이라고만 자신의 신분을 밝힌 그도 멋쩍은지 ‘김영우처럼 총신 7년 출신이군’ 하며 물러섰다. 종합관 1층 로비로 나와 오사마 빈 라덴을 닮은 턱수염을 기른 비대위원장은 선배이고 기자인 나의 말 걸음에 학생이 내민 결재 서류 같은 것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 거슬러 받지 못한 셈이라도 있는 듯 닳아 없어진 표정으로 단 한번 우아하게 나를 향해 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의 손사래를 쳤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오사마 빈 라덴은 그의 어머니를 닮아 195cm의 장신이었다. FBI는 오사마 빈라덴이 193~198cm의 장신이며 약 75kg의 마른 체형이라고 기술하였다. 오사마 빈 무함마드 빈 아와드 빈 라덴(1957년 3월 10일 ~ 2011년 5월 2일)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태어난 석유 재벌이었고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의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이다. 아랍어식으로 그의 이름을 풀이하면 ‘오사마, 무함마드의 아들, 아와드의 아들, 라덴의 아들’이 된다. 빈 라덴은 2001년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DC에 행해져 최소 2752명을 숨지게 한 9.11 테러의 배후로 간주되고 있다. 제로니모 작전을 통해서, 2011년 5월 1일(미국 현지시간, 파키스탄 시간으로 5월 2일)에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에서 미국 해군(네이비 실)의 데브그루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른바 지하드라고 선언된 폭력을 바탕으로 하는 빈 라덴의 믿음은 미국이나 다른 이슬람권이 아닌 다른 국가들에 대항하여 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폭력을 동반한 지하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지하드는 이슬람을 위해 헌신하고 분투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드를 행하는 사람은 '무자히드'라고 한다. 빈 라덴의 이데올로기 가운데에는 여성이나 어린이와 같은 무고한 시민들이라 할지라도 지하드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빈 라덴은 반유대주의자였다. 빈 라덴은 자신을 그의 관점을 실현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방법으로 택한 학자라고 여겼다. 빈 라덴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정보기관과 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지목되었다. 폭력(暴力)은 신체적인 손상을 가져오고 정신적·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인 강제력을 말한다. 법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협박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와 함께 다른 사람을 감금하는 행위 주거에 침입하는 행위 기물의 파손 등에 대해서도 폭력이라 표현한다. 철학, 정치학 등의 학문에서는 다른 사람 또는 국가나 세력을 제압하는 힘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총회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는 목사들에게 총신 폭력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이재륜 목사 “아직 기사를 보지 못했다.”김정호 목사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김상윤 목사 “명백한 불법이다.”이승희 목사 “아직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더는 기다릴 게 없는 사람처럼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서 벗어난 폭력을 믿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총신의 어제는 경이롭지만 내일은 뼈를 깎아지른 듯 성경과 개혁신학에 근거한 개혁이 몰아치리라. 물이 가장 많이 들고 빠지는 때가 '사리'다. 물이 가장 조금 들고 빠지는 때는 ‘조금’이다. 사리 때를 특히 조심해야 한다. 물이 빠지면 수백 미터 앞까지 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를 끌고 나갔다가는 바다에서 몇 시간을 그냥 떠 있어야 한다. ‘물 때’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살다보면 ‘물 때’와 같은 참으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이 들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다. 잘될 때가 있으면, 안될 때가 당연히 있다. 이 ‘물 때’와 같은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조급함’이다. 항상 잘되어야 하고 안되면 불안해 어쩔 줄 모르는 조급함 때문에 참 많은 이들이 불행해졌다.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총회 결의도 돌아오지 않고 대치동 다리 아래 선지 동산에서 흘러내린 물만 한강으로 흐를 것이다. 성령이시여 오시라. 이제는 말씀으로 깨어난 교회 종들이여 울려라. 믿음은 흐르고 나는 개혁주의 총회와 총신 안에 머문다. 세월은 흐르고 총신 정관 1조의 십계명 돌판 같은 개정으로 나는 그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바라본다. 그 꿈의 실상이 총신 개정 정관 1조에 담겨 있다.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하여 고등교육 및 신학교육을 실시하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이하 "총회"라 한다)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2017.09.15.> 잡히시던 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1-52 총신에 그들이 왔다. 장신의 빈 라덴을 닮은 수염이 덥수룩한 장신의 비대위원장도 섞여 왔다. 햇살이 처연해질 때 꽁지 쳐든 까치가 흰 구름 아래서 슬퍼지려 할 때 울리지 않는 종이 건물 꼭대기에 상징으로 달려 있는 총신으로 왔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왔다. 신자가 되라는 총신 표어가 새겨진 바위의 고독이 무색해지기 전에 믿음을 떠난 무리의 소음이 더 번성하기 전에 왔다. 그들은 법과 믿음은 그만 떠나달라고 왔다. 성경의 믿음에서 떠난 테러리스트가 개혁주의 신학의 요람 총신의 역사와 전통을 지우기 위한 시간이 왔다. 이제 그들의 세상이 왔다. 그러나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폭력을 금하신 주님의 세상이었고 주님의 세상이고 주님의 세상이리라. 2018-03-13
    • G.OPINION
    2018-03-13
  • 아모스와 김영우
    아모스라는 이름 짐꾼이라는 뜻50년 전 머리 짧은 신학생 주의 말씀의 짐을 짊어진 채 어디로 라고 묻지 않고 칼빈의 개혁신학 나르는 주의 종이라는 뜻일 수도 이제 총회와 총신 ‘칼빈의 개혁신학’이 움직이는 집단이 되어야 할 것 그런데 제102회 총회 임원회 총회 목적기금 120억 상당재판 비용으로 총회실행위원회 결의 이제 총회는 총회 목적헌금으로 성경적 신앙과 개혁신학 없는 ‘세속 변호사가 움직이는’ 사유화 정치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폴리티카’(politika)에 따르면 정치는 도시(polis) 또는 국가 운영을 다루는 방법이다. 독일의 막스 베버도 비슷하게 국가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활동을 '정치'라고 정의했다. 결국 정치란 물리력을 독점한 행정 또는 입법부가 공동체 자원을 배분하는 기술적 절차이겠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일까.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플라톤은 목적론적인 정치를 제시했다.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만드는 게 정치의 목적이라는 주장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미국의 사회철학자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년 7월 19일~1979년 7월 29일)가 지적했듯 플라톤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왕은 왕답게 노예는 노예답게 각자 타고난 운명에 충실한 계급 사회였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 했다.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한 우리는 모두 정치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이 말 속에 담긴 진정한 정치의 의미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좀 더 깊게 생각해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정치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를 질서정연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목표를 추구하는 플라톤의 정치는 멋지고 웅장하다. 하지만 정치가 종교가 되는 순간 상대방 경쟁자는 전멸시켜야 하는 종교적 이단이 되어버린다. 플라톤 정치가 이상적인 의도를 숭배하는 종교적 정치와 같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는 상대적으로 유치하다. 그저 개개인이 더 자유롭고 더 잘살기를 바랄 뿐이니 말이다. 멋진 의도를 가졌지만 언제나 가난과 독재로 끝나는 플라톤의 정치. 반대로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결과에 집중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결과와 의도,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총회 지도자로서 자질을 갖춘 사람은 목사와 장로들이 꿈꾸는 미래와 부합하는 모습으로 총회를 이끌어 갈 신학과 신념을 소유한 자다. 즉 미래의 목사와 장로 각 사람의 삶과 우리가 살아갈 한국 교회 전체의 모습을 분명히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권력을 획득해 돈 버는 것이 정치의 전부인 사람은 필요하다면 신학과 신념을 팽개치기도 한다. 믿지 못할 총회 정치인이다. 권력만 추구하는 자가 옳지 않은 신념으로 잘못된 곳으로 총회를 이끌어 가면 더 큰 낭패일 것이다. 그래서 정치꾼은 허공(許公)처럼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당면한 위험을 피하려는 우유부단한 군주는 중립노선을 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우는 대개 파멸에 이른다。운이 좋아서 지도자가 된 사람은 그 자리를 지키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작금의 제102회 총회 임원회는 마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며 외친 말을 실행하는 것 같은 모습을 2018년 1월 4일 제2차 실행위원회에서 보여주었다. 한강 상류로 올라가면 개울이 흐르듯 카이사르가 건넌 루비콘 강도 어느 지점이 개울처럼 흐르는 곳을 무장을 해제하지 않고 건넌 것이다. 어쨌든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상이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1월 4일 제2차 실행위원회 석상에서 김종필에게서 정치를 배웠다는 전계현 총회장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증경총회장님 말씀하시니까 생각이 나네요. 여러분 사유화라는 말에 개념 정리를 잘 해야 합니다... 총회의 제도를 벗어나서 다른 집단이 움직이면 사유화입니다. 개인이 재산등록해서 사유화가 아니라는 개념을 좀 정리하십사 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렇다면 허활민 패가 총신 재단이사회를 차지해 총신을 농단했다면 어찌 됐을까. 총회 정치 조정이나 각종 분쟁 건의 재판 개입이나 자신의 산서노회 전횡에서 드러났듯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권력에의 의지와 금권(金權)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총회 정치의 전부일까. 미국의 정치학자 이스턴은 정치란 사회적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라 했다. 공권력을 기반으로 정부정책을 결정하고 국가경제를 관리하고 이끌어 가는 국정관리가 정치라는 것이다. 이에 부합하는 총신 지도자는 오랜 총신관리의 경험과 깊은 경륜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독일 헌법학의 대가이자 나치 당원이었던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그렇기에 '정치 신학'이라는 책에서 모든 정치는 결국 종교라고까지 주장했다. 하나님을 통한 존재적 구원을 약속하는 칼빈의 개혁신학과 같이 합동 교단 총회 정치는 총회와 총신을 중심한 현실에서의 조정과 해결을 노력한다는 말이다. 제2차 실행위원회에서 젊은 박창식 목사가 발언했다. “대구노회 박창식 목사입니다. 저는 평범한 총대로서 오늘 우리 총회 지도위원들 처리방식들이 참 못 마땅합니다. 오늘 이 장소는 대단히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난 100년의 역사 속에서 배운 교훈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여기에서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또 교수 징계하고 학생들 가운데서 그러면 소위 총신 측 김영우 측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없습니까. 저는 총회 측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만 우리 운영이사장님에게 묻습니다. 교수진들과 학생 진영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김영우 측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가 분열로 가자는 결의입니다. 신학교의 분열은 교단의 분열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징계하고 하는 것 적극적으로 백 프로 지지합니다. 그러나 징계가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르신들 말씀하시는 거 가만히 들어보니까 총신은 물 건너갔다. 그러면 총신 그냥 내버려 두실 겁니까. 오늘 이런 논의해서 안 되고 총신을 다시 어떻게 끌어오는가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 논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학생 한 사람이라도 교수 한 사람이라도 김영우 측을 지지하면 학교를 가지고 갈 수 있는 정당성을 오늘 결정해서 주는 겁니다. 왜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징계하고 쫓아내는 거요 한 달 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보다 더 근본적인 논쟁은 백년의 총신을 우리가 정관 넘어갔으니까 그냥 두면 된다 증경총회장님들 왜 그렇게 발언하십니까. 그거 안 됩니다. 저는 피를 토하고 싶습니다. (김희태 목사 제지한다) 가만 계셔보세요. 저는 누구 측도 지지하지 않고요. 저는 적극적으로 총회를 지지하는 측입니다. 총신을 이렇게 버려둬서는 안 됩니다. (김화경 목사 ‘제 정신이 아니구만’ 외침)” 발언대 주변에 마이크를 놓고 소동이 일었다. 총회장 ‘마이크 끄세요. 들어가세요’라고 말했다. 김희태 목사 ‘그래 김영우 총장 징계했어요...’ 계속 말했다. 총회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찬송했다. 장내가 좀 조용해졌다. 총회장이 말했다. “여러분 조심하세요. 여러분 다 총신 사랑하고 교단을 사랑하고 그래서 얘기하는 건데 무슨 적군 아군 싸우듯이 그러지 마세요. 조심하세요. 총회가 이 수준밖에 안 됩니까. 제가 총회장 될 때 어떤 언론기자한테 들었습니다. ‘총회장님 합동 측이 제일 시끄러워요.’ 다른 교단을 전부 취재를 하러 다녀보면 합동 측이 제일 시끄럽대요. 아들 같은 기자한테 그 얘기 듣는데 염치가 없더라고요. 좀 조심합시다. 김희태 목사 얘기하세요. (계속 김희태 목사에게 발언시킨다고 위원들 항의했다) 발언권을 주는 것은 총회장의 권한입니다. 왜 주냐면 김희태 목사님이 지금 반론을 하고 얘기를 하는 줄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언권 주는 것이지 나는 김희태 목사님하고 지금까지 악수도 안 했어요.” 발언하던 박창식 목사 들어가고 김희태 목사 말을 이었다. “지금 가장 경계해야 할 이론이 화해하자는 겁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화해를 시도하고 포옹하고 악수한 결과가 오늘입니다. 강하게 밀어붙였으면 오늘까지 안 왔어요.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게 하나밖에 없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목사이지만 양심은 기대를 못 해요. 그래도 담임목사이면 당회장권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있어요. 그걸 가지고 총회가 한번 해보겠다는 겁니다. 지금 무슨 좋은 안건 있어요.” 박창식 목사가 말을 받았다. “좋은 안 없습니다. 화해를 조장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어느 측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양분 된 상황 속에서 어떤 한 편에 대한 감정적인 결정을 하면 신학교의 분열과 함께 교단 분열이 온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학생이나 교수가 양 쪽으로 나뉘어 있을 때 우리 총회실행위원들은 여기서 정말 정중동(靜中動)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피아를 구분하고 너무 이렇게 나가면 결국 어떻게 할 겁니까. 총신 백 년 역사를 그냥 버려두고 지금처럼 하고 말겁니까. 운영이사장님 정말 그렇게 하면 역사의 죄인 됩니다.” (소란이 일었다. 총회장이 제지하며 말했다.) “제가 말씀드릴 게요. 아마 가만히 앉아 계시는 분들이 전국 교회에서 지켜보시는 분들이 말할 겁니다. 총회장 뭐 하는 거냐. 총회 때 쇼도 잘 하더만. 뭐 하는 거냐. 임원들은 뭐 하는 거냐. 지금 긴급하게 돌아가고 법적인 대책 강력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실행위원들이 노회를 대표해서 오셨는데 총회 임원 아무것도 안 하고 총회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로 생각하니까 최소한의 발표만 하는 겁니다.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도 할 게 많지만 발표를 해 놓으면 금방 전국에 퍼지고 이사람 저사람 뒤에서 말하니까 조심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에서 왔지만 활동은 주로 북왕국 이스라엘을 위해서 했다. 그는 목자와 농부였다. 그래서 아모스서는 목가적인 비유들이 많다. 아모스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본거지 벧엘에서 주로 선포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겉치레나 망설임이 결코 없었다 황혼이다. 그리고 102년이 지난 총회에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총신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위 총신 본관에서 머리 짧은 신학생이 문을 밀고 나와 운동장을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그 신학생은 한동안 하늘을 본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황혼은 아래로 내려오고 바람은 건물 하나뿐인 꼿꼿한 총신 뒤편 나무들에게 수평으로 다가온다. 총신과 머리 짧은 신학생은 움직이고 황혼은 흘러 50년 세월을 먹었다.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어디엔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오래도록 걸음을 멈추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손결이 한 번 스치고 지나간 듯 삶에는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내린다. 그 빛에 무엇을 더 보태겠는가. 아모스는 이 머리 짧은 신학생 같은 사람이었다. 아모스라는 이름은 ‘짐꾼’이라는 뜻이다. 50년 전 이 머리 짧은 신학생이 주의 말씀의 짐을 짊어진 채 어디로 라고 묻지 않고 묵묵히 칼빈의 개혁신학을 나르는 주의 종이라는 뜻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총회장 전계헌 목사의 “총회의 제도를 벗어나서 다른 집단이 움직이면 사유화”라는 말처럼 이제 총회와 총신은 ‘칼빈의 개혁신학’이 움직이는 집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제102회 총회 임원회는 개혁신학을 외치는 총신 상대 전국기도회와 금식기도회도 가지고 총회가 가진 행정조치도 다 취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총신 상대 소송비가 얼마나 들기에 총회 목적기금 120억 상당의 돈도 재판 비용에 충당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총회실행위원회 결의까지 받았다. 실행위원 가운데는 ‘다 쓰라’는 덕담까지 건넸다. 그러면 이제 총회는 총회 목적헌금으로 성경적 신앙과 개혁신학도 아랑곳하지 않는 ‘세속 변호사가 움직이는’ 사유화를 할 셈인가. WCC 문제로 1959년 통합 측과 분열까지 했던 총회 정치가 이제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가 아니면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2018-01-22
    • G.OPINION
    2018-02-09
  • 김삼환 목사 정년과 후계
    장로교회의 목사 시무 전통 특별히 사면해야 할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종신제 1980년 7월 20대 후반 김삼환명일동의 소리 명성교회 개척 20년 뒤 장로교 최대 교회 10만명 세계 유명(有名)한 소리 명성(名聲) 교회로 성장 소강석 목사는 문재인 정부의 현 대북 평화정책 노력에 대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게세상의 공의를 위한다 설교 좌파 성향의 투쟁적인 노조 기업의 세습을 반대하지 않아 목사 세상과 사람 앞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목사 정년 성경 근거로 폐지해야 정년 폐지 총신 정관 19조 지지 세계 3위의 갑부 워런 버핏(88)이 마침내 2018년 1월 10일(현지시간) 2명의 후계자 후보를 동시에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버핏이 대주주이자 최고경영자(CEO)를 맡은 버크셔헤서웨이에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한 것이다. 버핏은 이번 인사를 “승계 과정의 일환”이라고 소개했다. 고향인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금융투자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62년 만에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앞으로 버핏이 사망하거나 은퇴할 경우 둘 중 한 명이 버핏의 뒤를 이어 CEO에 오른다. 두 사람은 출신이나 경력 등에서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나이 차이도 크게 난다. 그레고리 아벨 부회장은 올해 56세로 캐나다 앨버타주 출신이다. 고향에 있는 앨버타대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버크셔헤서웨이에 입사한 것은 1992년이다. 2014년부터 버크셔헤서웨이 에너지 부문 회장을 맡았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에서 발전소를 운영하면서 태양광·풍력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 사업에도 진출했다. 아지트 자인(67) 부회장은 인도 오리사주 출신이다. 인도 카라그퍼공과대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다. 1986년 버크셔헤서웨이 재보험 부문에 입사해 줄곧 보험 사업을 맡았다. 버핏은 그룹을 크게 둘로 나눠서 두 사람에게 맡겼다. 아벨 부회장은 비보험 부문, 자인 부회장은 보험 부문을 각각 총괄한다. 직원 수는 비보험 부문이 압도적으로 많다. 아벨 부회장 밑에는 32만3000명이 근무 중이다. 자인 부회장 밑에 있는 직원은 4만4000명이다. 로이터·블룸버그 등 외신들은 버핏의 후계자로 아벨 부회장이 더 유력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를 강점으로 꼽았다. 하지만 외신들이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를 꺼리는 또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인다. 인종과 종교 문제다. 블룸버그는 인도 출신 자인 부회장에 대해 “자이나교를 따르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라고 소개했다. 기독교 전통의 미국 주류사회에선 캐나다 출신 아벨 부회장을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버핏은 후계 경쟁이 과열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두 사람은 서로를 잘 알고, 서로를 좋아하고, 서로 다른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후계 경쟁이) 경마식 경주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신은 “매우 건강한 상태”라고 자신했다. 가까운 장래에 은퇴할 계획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올해 88세의 버핏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한 찰스 멍거 부회장도 버핏보다 여섯 살 많은 94세다. 누가 후계자가 되더라도 버핏의 후광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버핏은 20세기 ‘투자의 전설’이다. 시작은 미약했다. 26세였던 1956년 고향에서 ‘버핏 어소시에이츠’라는 투자조합을 만들었다. 7명의 조합원 가운데 2명은 고모와 누나였다. 이렇게 모은 종잣돈은 10만5100달러였다. 10일 현재 버크셔헤서웨이의 시가총액은 5000억 달러(약 535조원)가 넘는다. 버핏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분수령은 1965년 버크셔헤서웨이란 회사를 사들인 것이었다. 원래는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섬유업체였다. 당시 망하기 ‘1보 직전’의 부실기업이었다. 버핏은 산업 경쟁력이 낮아진 탓도 있지만, 경영진의 무능이 더 큰 문제라고 봤다. 결국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회사의 경영권을 차지했다. 이후 버크셔헤서웨이는 투자회사로 변신했다. 버핏은 시장에서 낮게 평가됐지만, 잠재력이 뛰어난 기업을 골라서 사들이는 ‘가치투자’로 연이어 대성공을 거뒀다. 버핏 자신도 큰 부자가 됐다. 현재 세계 갑부 순위에서 3위에 올라 있다. 블룸버그가 평가한 버핏의 재산은 884억 달러(약 95조원)에 달한다. 버크셔헤서웨이는 애플의 5대 주주지만 버핏은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다. 버핏은 1월 10일 방송 인터뷰에서 삼성의 폴더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내가 아이폰을 사면 최후의 1인이 아이폰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교계에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지대한 김삼환 목사에 대한 비난을 보다 못해 이 글을 쓴다. 세상 인물에 견주건대 세계 3위의 갑부 워런 버핏(88) 같은 성공을 거둔 김삼환 목사다. 그는 1945년 1월 7일 그 시절 가끔 호랑이 새끼가 나온다는 산악 지대의 경상북도 영양군 벽촌에서 태어났다. 영양군은 청송군, 봉화군과 더불어 경상북도 북부 오지 중 하나로서, 군 전체 인구는 읍 설치 기준에도 못 미친다. 울릉군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이다. 현재도 그러니 김삼환 목사가 태어나던 73년 전에는 어떠했겠는가. 그는 현재 서울특별시 강동구 명일동 소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명성교회의 당회장목사로 있다가 2017년 11월1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그는 이십대 후반 전도사 시절 경기도의 한 공장 사목을 하다 사장 부인 권사의 눈 밖에 나 1980년 7월 명일동의 한 건물 치과(치과 의사인 용산고등학교 동창 소유) 자리에 명성교회를 세웠다. 말이 난 김에 김삼환 목사의 무명(無名) 시절 그 교회를 기억하는 목사가 한분 있다. 그는 제주도 이도교회 담임 김성욱 목사다. 그 사연은 이렇다. 2015년 4월 8일 수요일 동광교회 김희태 목사 배려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이도교회 김성욱 목사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는 앞이 잘 안 보이는 약시(弱視)의 소유자다. 그와는 내가 총회 전도국장 시절 일만교회 운동 때문에 제주도를 찾은 계기로 알게 되었다. 김성욱 목사는 총신 졸업여행 때 제주도에 올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서울 달동네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고 있던 그는 구미 상모교회(김승동 목사)에서 파송을 받아 1989년 7월 11일 제주 이도교회를 설립해 자체 건물의 자립교회로 성장시켰다. 제주시 구남로에 있는 제주 이도교회에서 수요 예배 후 당회장실에서 김성욱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구미공고를 졸업하고 염색공장 해양산업에 취직했는데 그 안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공장에 처음 간 날이 수요일이었는데 찬송소리가 들렸어요. 그런데 입사서류에 예배 참석 서약서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데 하는 반발심이 있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마지못해 사인을 했습니다. 아침 7시에 날마다 30분 예배를 드리는데 한 주일에 예배를 일곱 번이나 드려야 하는 겁니다. 예배시간은 그냥 시간 때우기로 일관했죠. 기도를 할 줄 압니까. 성경을 읽습니까. 성탄절이나 여름성경학교 때 과자 얻어먹고 연극 보느라고 일 년에 두세 번 교회에 갔었죠. 그러던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믿어지게 됐어요. 내가 예수님을 언제 영접했느냐 하면 빌리 그래함 집회(1973년 5월 30일 저녁부터 6월 3일 저녁까지 12만 평의 여의도광장에 51만6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와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세계인을 열광시킨 유창한 영어 설교를 김장환 목사의 시원한 통역으로 진행되었다) 때였습니다.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70명 되는 교회의 청년 몇 명이 전도사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어 통역을 통한 초정에 일어나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사실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당시 인솔 전도사님이 현재 서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님이셨습니다. 명일동에 교회 개척하기 전에 김삼환 목사께서 하일동 망월리의 해양산업 내에 있는 해양교회에서 10여년 사역을 하셨는데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해양교회 장로님 부인 권사님이 좀 까다로우셨거든요. 그분(김삼환 목사)이 7개월간 나한테 전도를 하고 믿음의 기초를 세워 주셨어요. 1980년에 명일동에 명일동의 소리라는 뜻으로 명성교회를 세웠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주도에 와서 목회를 하는데 명성교회가 새벽기도회로 유명해져서 여기 계신 목사님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그 근처에 방을 잡고 하룻밤을 자면서 수요저녁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수요저녁예배 때 설교 말씀하시는 게 해양교회 전도사 시절 모습과 아주 비슷한 겁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도 흐름과 스타일이 같고 그 시간에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말하시는 겁니다. 김삼환 목사님이 가장 존경하는 분이 바로 방지일 목사님이시거든요. 예전에는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이실 때도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셨는데 이제 큰 교회 목사님이 되셨는데도 또 방지일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말씀하는 폼이나 여러 가지가 너무나 흡사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놀라워하면서 아는 체 할 엄두도 못 내고 제주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주도로 관광오신 명성교회 집사님에게 물어봤더니 김삼환 목사님이 옛날 전도사 시절 해양교회에 사목으로 계셨다는 겁니다.” ―해양교회가 어디 있었어요.“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에 있었습니다. 하일동 바로 옆입니다. 김용기 장로님의 가나안농군학교에서 조금 더 들어간 곳입니다. 강 건너 맞은편은 신앙촌 덕소죠. 김삼환 목사님이 제주도에 연합집회 강사로 오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더니 감동을 받으시고 저희 교회도 한번 방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방문하실 때 11년 된 그레이스로 모시니까 시동도 잘 안 걸리고 그랬습니다. 저희 어머니 기도도 해 주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저에 대해 기억을 하시는 겁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기억을 아주 잘하세요. 김삼환 목사님이 떠나실 때 저한테 서울 명성교회 사무실에서 연락이 오면 한번 들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뒤 연락이 와서 명성교회에 들렸더니 차를 한 대 준비했다 주시는 겁니다. 신앙과 목회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20대 전도사 시절 이런 사연을 가진 김삼환 목사가 1980년 7월 시작한 명일동의 소리 명성교회는 6개월 만에 불어나는 교인을 감당 못해 수차례 옮겨 다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00년대에 장로교 최대 규모 교회 교인 10만 명에 이르는 전 세계의 유명(有名)한 소리 명성(名聲)교회로 성장했다. 그 성장의 비결은 김삼환 목사는 설교가 구수하고 성경의 핵심을 잘 전할 뿐만 아니라 교인의 어린아이도 업고 봐 줄 정도로 자상한 목회와 워렌 버핏 뺨칠 정도의 경영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위대함과 영광도 잠시 세월이 흘러 그는 은퇴해야만 했다. 기업인이나 가톨릭 교황이나 대통령과 달리 영적 지도자인 목사의 신분에 대한 장로교회 헌법 70세 정년 규정에 따라 위대한 김삼환 목사도 자신이 세우고 성장시킨 명성교회 담임목사직을 2015년 12월 속절없이 사임을 하고 후임자 없이 애간장을 태우며 명성교회를 은퇴했다. 2011년 미국 뉴저지 드루대 박사과정에 진학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줄곧 명성교회 청년대학부 담당 사역자로 활동하던 사랑하고 완벽한 자격을 갖춘 장남 김하나 목사(42)가 있었지만 말이다. 이제 44세가 된 그 아들은 김삼환 목사의 전도사 시절 사목으로 일하던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현재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1년 도미 매사추세츠 주립 대학 애머스트 캠퍼스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이어 뉴저지 프린스턴 신학교와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쳤다. 2011년 미국 뉴저지 드루대 박사과정에 진학해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소저너스, 1971∼2005 : 미국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평화와 정의관’이다. 2014년 3월 김하나 목사는 명성교회 후원으로 개척한 새노래명성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데 그의 아버지보다 자격이나 자질이 훨씬 나은 김하나 목사의 교회는 3년 만에 재적 교인 3000명의 규모로 급성장했다. 2015년엔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턴 신학교 이사에 선임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김 목사는 다보스포럼 영글로벌리더로도 선정돼 국제적 면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김삼환 목사 은퇴 무렵 꾸려진 청빙위원회가 후임자를 정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난 2017년 3월 명성교회는 공동의회를 열어 '새노래명성교회와 합병' '김하나 목사 청빙' 두 가지 안건을 투표에 부쳐 각각 70%가 넘는 찬성을 받았다. 그러나 김하나 목사는 새노래명성교회를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주변에 알렸고, 절차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7개월 뒤 2017년 10월 명성교회는 '김하나 목사 청빙안'을 장로교 지역 조직인 서울동남노회에 제출했고 10월 24일 통과됐다. 그리고 후계자를 정했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는 세게 3위의 재벌 88세의 워렌 버핏보다 훨씬 젊은 72세의 김삼환 원로목사의 명성교회 후임 위임목사로 2018년 1월 12일 그의 장남이자 한국 최고의 목사 자격과 지질을 갖춘 김하나 목사가 취임했다. 그러나 문제는 교단의 헌법. 2013년 예장 통합 교단은 총회에서 '교회 세습 금지'를 1033명 참석자 중 84%의 찬성으로 결의했고, 교단 헌법도 개정했다. 이 조항에 대해 지난 9월 서울북노회 소속 한 목사가 교단 헌법위원회에 '위헌 청원'을 제출했다. "목사 청빙은 성도(신도)들의 권리"라며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였다. 이 청원은 9월 말 예장 통합 102회 총회에서 받아들여졌으나 아직 교단 헌법이 바뀌지는 않았다. 성경적이라기 보다 인본적이고 진보적인 정의라는 미명하에 반기독교 성향의 개신교 단체들이 "현행 헌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기는 것은 위법"이라며 김하나 목사 청빙을 반대해왔다. 2017년 10월 24일 노회에서도 이 조항을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그 결과 반대 인사들이 퇴장한 가운데 김하나 목사 청빙안은 통과됐고 반대 인사들은 비상대책위를 결성하고 교단 재판국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사실 이 조항은 2017년 예장 통합 헌법위원회 해석에 따라 효력을 잃었다. ‘목사 70세 정년제’를 제일 먼저 도입한 통합측에 대한 신문 기사가 1969년 8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렸었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알려진 대로 한국교회에 정년제를 최초로 도입한 분들은 통합측의 한완석 목사와 임택진 목사이다. 두 분은 이미 작고하였으나 생전에 존경 받던 분들로 솔선수범(率先垂範)하여 정년제를 실천하신 분들이다. 임택진 목사의 경우 정년을 몇 년 앞두고 조기 은퇴(早期隱退) 하였다. 이 분들이 정년제를 주창하였을 때 한국 교회는 이를 좋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제101회 예장합동 총회장 김선규 목사의 고희 감사예배가 2017년 8월 10일 오전 11시 잠실 롯데호텔 2층 라세느 부페 식당에서 드렸다. 허활민을 비롯한 70여명의 총회 주요 인사들이 모여 김 총회장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고 축복하는 예배에서 총회 대쪽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가 설교를 했다. 백 목사는 욥기 42:16-17 본문의 간략한 설교에서 교회의 세습방지와 70정년제가 모세와 갈렙 등을 예로 들어 성경적이 아니라는 깊은 뜻을 전했다. 70세 정년제 본래 취지는 1960년 말 사회 형편에 따라 70세까지 목사가 열심히 목회하면 된다는 조치였다. 그런데 그 취지와 달리 금주법처럼 예기치 않은 폐해가 생겼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목회자가 65세만 되면 은퇴와 후임자 문제로 자신의 교인과 당회의 눈치를 보게 되어 70세까지 목회를 힘껏 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연륜과 능력을 겸비한 목회자가 은퇴를 앞두고 실수할까 두려워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교회 재정은 은퇴 시 받아갈 몫으로 생각해 재정 지출도 되도록 삼가는 경향이 생긴다. 그리고 후임자 선정 문제로 당회장보다 당회의 장로 권한이 더 강화되는 기현상도 생긴다. 어차피 새로운 후임자에게 교인과 당회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70세 정년제는 성경적 근거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교회의 필요성(必要性)에 의해 만들어진 법이다. 따라서 교회의 상황(狀況)이 바뀌면 이 법 또한 수정(修整) 혹은 폐지(廢止)될 수 있는 법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한번 제정(制定)하였다고 해서 진리 문제가 아닌 이상 영구(永久)해야 한다고 고집할 필요는 없다. 상황이 바뀌어 고쳐야 할 형편이 되면 고쳐야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법을 제정할 때에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를 묻고 그 다음은 교회에 유익이 있는 가를 물어야 한다. 정년제는 성경적 근거로 만든 법이라기보다는 교회의 유익(有益) 차원에서 인본적으로 세상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임택진 목사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항존직에 정년을 규정한 것은 시대적 차이와 후배의 양성과 자신의 휴식을 위하고 교회의 보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한 것이다.” 이처럼 정년제란 그 입법 취지와 목적이 목회자에게 휴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교회의 유익을 도모(圖謀)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제정(制定)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술이 악하다고 금지하기 위해 제정한 미국의 금주법이 갱들의 밀주(密酒)로 더 많은 사회적 폐해를 낳은 것처럼 목사의 정년제도 예기치 않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그 문제는 교회 성장 둔화와 교단 발전 답보 더 나아가 교회 분쟁까지 낳고 있는 실정이다. 정년을 맞거나 조기 은퇴를 한 목회자 휴식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영동중앙교회 전동운 목사는 정년 7년을 앞두고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는 정년 5년을 앞두고 조기 은퇴해 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게 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 실상과 결과는 전혀 딴판이다. 전자의 전 목사의 조기 은퇴는 마음과 달리 드센 장로들과 타협한 퇴진이었고 후자의 옥 목사는 능력이 넘치시는 데도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능력을 땅에 묻는 결과를 초래했고 기대와 달리 수명도 단축되고 말았다. 장로교회에는 본래 정년제가 없었고 종신제가 전통적으로 실시되어 왔었다. 그래서 담임목사가 연로(年老)하여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게 되면 자연스레 시무 사면을 내고 은퇴(隱退)하였고 노회는 다음 후임자를 청빙 절차를 밟아 정하여 교회를 이어서 시무토록 했다. 핫지(J. A. Hodge) 박사의 ‘무엇이 장로교 헌법인가’(What is presbyterian law)를 한국교회 초대 선교사이고 ‘설교학’ 명저를 남긴 곽안련 박사가 번역하였다. 그 번역서를 참조하여 박병진(朴炳珍) 목사가 이를 ‘교회정치문답조례’(敎會政治問答條例)라는 이름으로 새로 발간하였다. 그 책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위임목사는 한 지교회나 1구역(4지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종신토록 시무한다. 위임목사가 본교회를 떠나 1년 이상 결근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그 위임이 해제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장로교회의 목사 시무 전통(傳統)은 특별히 사면해야 할 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종신제였다. 이 종신제가 70정년제로 바뀐 것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였다. 벌써 그 정년제 실행 시기도 50년에 육박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성경에 따른 종신제로 돌아가야 한다. 그 이유는 목사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이지 회사의 직원이나 국가 기관의 공무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70세 정년제가 폐지되면 목회자가 구약의 제사장과 신약의 사도와 초대 교회의 서머나의 폴리캅이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제네바의 칼빈처럼 힘껏 사역하다가 옥한흠 목사나 김인중 목사처럼 조기(早期)든 모세나 칼빈처럼 죽을 때까지 종신(終身)이든 목회자 자의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면 목사의 은퇴와 후임자 문제를 해결하게 하면 교회와 목회자의 성장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교단도 발전이 정체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실천한 인물이 있다. 그는 50년을 총신을 위해 살아온 제7대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이다. 그는 총신 재단이사회(재단이사장 대행 김승동 목사)를 통해 2017년 9월 15일 개혁신학의 영속성과 발전을 위해 교단과 총신의 발목을 잡던 정년제 규정 조항을 총신대 정관 19조에서 아예 삭제해 버렸다. 지난주일 1월 28일 시인이고 가인 그리고 기독교 목회 생태계 선구자 소강석 목사는 시편 85편 10-13 본문 ‘평화와 희망의 열차를 달리게 하라’ 제목을 통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것이 세상의 공의를 위한다”라고 문재인 정부의 현 대북 평화정책 노력에 대해 긍정적인 지지 를 보내는 설교를 했다. 좌파 성향의 투쟁적인 노조도 기업의 세습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목사인 우리가 목회생태계 선구지 소강석 목사와 달리 우리 자신의 발목을 잡는 목사와 교회에 대한 반대와 비난을 일삼는다. 우리 목사는 세상과 사람 앞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목사의 정년은 성경에 근거해 폐지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총신 정관 1조와 19조를 지지하는 것이다. 명성교회를 위해 벽돌 한 장 돕지 않은 통합 교단의 일부 목사들이 이단이나 칼빈이 적그리스도라고 몰아부치는 가톨릭은 도외시하고 통합 측 총회장까지 지낸 위대하지만 WCC 가입 교단 헌법과 성경 사이에 끼어 속절없는 김삼환 목사를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닦아세우고 있다. 견디시다 정 안되면 삭개오같은 장대영이 세습이라는 말일랑 아예 말라며 세습금지를 아예 폐지헌 우리 합동 측 교단으로 오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통합 측의 그 무례한 목사들 그리고 교회를 허물고 목사의 영적 권위를 깍는 데 혈안인 반기독교 성향의 허울뿐인 기독교 비판단체들의 모세처럼 그 기력이 쇠하지 않은 김삼환 목사를 비난하는 행위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니라 마태복음 7:15, 19 2018-01-29
    • G.OPINION
    2018-01-29
  • 103회 맞는 총회와 총신의 템포
    오늘 연습한 템포 내일 다르고 다음 날 다시 바뀌는 지휘자단원들 그 지휘 신뢰하지 않아 연주자들을 때로 설득하고 때로 연습시키고 때로 양보하고 때로 기 싸움을 해가면서 지휘자의 가장 중요한 일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템포로 이끌어가는 것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끌어내는지휘자 같은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그 다음 총회와 총신을 지휘해야 나에게는 낡은 성경이 한 권 있다. 검정 가죽표지가 하도 낡아 오래 전부터 그 성경을 바라보기만 한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하나님 말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위로로 배열해 주던 그 성경에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성경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놀란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성경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믿음을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성경이 한 권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신비한 소리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믿음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의심투성이의 누런 믿음은 구름이다. 어떤 의심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세상에서 말 한마디 가져가라고 그 말을 고르라고 한다면 ‘믿음’이라고 하겠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다. 믿음이 아팠다. 믿음으로 산 사람 믿음이란 말 총회로 가져가라. 그러면 다른 오는 총대 믿음이란 말 들고 총회로 와야겠네. 한 총회가 가고 또 한 총회가 오면 세상은 나날이 그렇게 새로운 믿음일 걸. 오랜 묵은 믿음으로 호흡하고 맥박 치자. 믿음의 통증과 성장은 믿음의 출산과 양육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믿음에는 목숨이 들어 있고 앓는 마음이 산다. 믿음을 가져갈 수 없어 돈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지고 마지막 길을 가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호흡을 만드는 폐와 맥박을 뛰게 하는 심장을 우리는 다 가슴이라 부른다. 그러나 우리 목사 된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폐와 맥박을 뛰게 하는 심장을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한다. 결혼식 사회자가 “신부 입장”하고 외치면 그 날의 여주인공이 웨딩드레스를 끌면서 등장한다. 흔히 그의 아버지와 손을 잡고 ‘매우 천천히’ 걸어 들어온다. 이때 가장 많이 쓰이는 음악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신부의 합창’(흔히 웨딩마치라고 부른다)이다. 이 아름다운 곡의 빠르기 지시는 실은 ‘보통 속도로’이다. 실제로 연주회에서나 오페라 공연에서 이 곡의 빠르기는 결혼식에서보다 훨씬 빠르다. 그런데 신부가 ‘매우 천천히’ 들어온다고 느낀 나의 느낌은 어디서 근거한 것일까. 아마 그것은 사람들이 걷는 보통 속도를 기준으로 비교한 것일 터이다. 보통 속도라고 얘기하지만 이 역시 주관적이긴 하다. 나는 1분에 80~90보를 걷는 속도면 보통이라고 느낀다. 음악에서 모데라토(보통 속도로) 역시 이 정도의 빠르기를 말한다. 작곡가들이 음악에 빠르기를 지시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크 시대였다. 그 이전에는 춤음악 외에는 빠르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따로 지시가 없어도 관습적으로 그 빠르기를 알 수 있었고 춤음악 경우에도 춤의 이름만 밝혀 놓으면 그 빠르기가 정해졌다. 기악이 발달하고 음악의 표현이 다양해지면서 빠르기를 분명하게 정할 필요가 생겨 ‘빠르게’, ‘보통 속도로’, ‘느리게’ 등의 지시가 악보에 적히기 시작했다. 템포의 지시를 써넣게 되자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빠르게’가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인지는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크 시대 이후에 음악은 훨씬 다감하고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게 되어 빠르기의 지시도 더 세분될 필요가 생겼다. 베토벤 시대에 메트로놈이라는 템포기계가 고안되어 1분에 들어가는 비트, 즉 박(拍)을 숫자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M.M.♩=60은 1분에 4분음표 60개가 들어가는 속도이다. 그렇다면 한 비트가 1초니까 보통의 걸음걸이보다는 느리다. 아마 조금 빠르게 입장하는 신부에게 맞는 템포가 아닐까 싶다. 요즈음에는 악보 소프트웨어가 있어서 작곡한 곡을 입력해 놓으면 컴퓨터가 음악을 연주해 들려준다. 빠르기도 지정할 수 있어서 들어보면서 템포를 정한다.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 곡을 실제로 연주할 때면 템포가 작곡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작곡자의 템포감은 주관적이다 못해 밤에 다르고 낮에 다르다. 작곡자는 이렇듯 변해도 지휘자는 그럴 수 없다. 그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를 하나의 템포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지휘자의 동작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비트와 박자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멋을 부리고 개성을 나타내는 것은 그 다음이다. 흥분해서 빨라져도 안 되고 단원들에게 휘둘려도 안 된다. 지휘자가 반드시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지만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템포감은 꼭 필요하다. 오늘 연습한 템포와 내일 연습한 템포가 다르고 다음 날 다시 템포가 바뀌는 지휘자를 단원들은 귀신같이 안다. 그리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면 더 이상 그의 지휘를 신뢰하지 않는다. 지휘자가 등장한 이래 약 200년 동안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그 규모와 내용이 매우 크고 복잡해져서 지휘자의 존재가 없으면 연주는커녕 연습을 시작하기도 어렵다. 저마다 자신의 음악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들은 나름대로 템포와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또 단원 중에는 지휘자가 제시하는 템포와 리듬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또 하나의 복잡한 세상이다. 이런 연주자들을 때로 설득하고 때로 연습시키고 때로 양보하고 때로 기 싸움을 해가면서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지휘자가 끌어내듯 교인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목사의 일이다. 그런 목사가 자신의 교회를 이끌고 그 다음 103회를 맞는 총회와 총신을 지휘해야 할 것이다. 2018-01-25
    • G.OPINION
    2018-01-25
  • 합동총회 정체성 망각
    합동총회 정체성 잃고 성경적 개혁신학 부재 부패의 틀 안에 갇혀 합동측 제102회 총회장 전계헌 목사 통합측 증경 총회장 이성희 목사 초청연동교회 담임목사인 그의 축사 “제 마음속에 1959년 분립될 때의 연동 측이라는 이름 가져 부담합동과 통합이 통합과 합동이 하나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 1957년 제42차 총회 즈음 박형룡 박사 ‘신학지남’에 WCC 반대 견해 밝혀 “WCC는 교리적으로 혼란한 자유주의 정책적으로 세계 단일교회 구성 목표 복음주의 교회의 전통적 신앙 보수교회와 신도 이 운동 따라갈 수 없어” 증경회장단 회장 최병남 대신 참석스페어타이어 서기행 목사 말해 “제가 일 년에 삼십 번 정도 통합측 총회장 이성희 만나면벌떡 일어서 절을 해” 2012 WCC대책위원회위원장 서기행 “WCC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WCC 문제 바로 짚지 않으면 1959년 합동과 통합 분열보다 훨씬 큰 어려움 한국교회에 닥쳐” 합동측 서기행 WCC측 이성희에게 2018년 1월 4일 허리 접어 큰 절 합동측 목사 장로 실없이 웃어 겨울은 간다. 2018년 1월 4일 오전 11시 총회회관 2층 창틀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목소리가 변하는 총대들은 총신 열풍(熱風)에 말려 모나게 휘어진다.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여전도회관 옅은 그늘 속을 허우적이며 10시 반 들어선 지 30분 얼마 안 있어 송은혜 사모 특송 같이 밀려드는 예배. 강대상 위에는 뽀얀 심사(心思) 성경에 눌리고 허공(許公)에 꽂혀 있는 저 희미한 봉투들은 어느 쓸쓸한 교회의 헌금일까. 흐린 형광등 아래 엉망으로 상심한 총대는 몇 해 전 총회장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는 자신의 믿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몇 번인가 회개할 때 그랬듯이 습관적으로 주르르 눈물을 흘렸을 뿐 끌어안은 무릎 사이에서 기도의 기억은 내용물 없이 떠오르고 강당은 무서우리만치 고요하다, 누구일까 바가지 속에 삶은 달걀처럼 잠긴 얼굴은 겨울이 가면 그뿐 양심은 몇 장 지전(紙錢)속에서 구겨지는데 몇 개의 언덕을 넘어야 저 총대들은 믿음 속으로 하나둘 섞여들는지. 어둠에 싸인 적막한 도시의 밤거리에 카페의 불빛만이 거리를 비추고 환하게 불 켜진 간이식당 안에 중절모를 쓴 정장 차림의 남자 두 명과 한 여인이 커피 잔을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앉아 있다. 대형 수족관처럼 내부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식당이다. 주인 혼자 일하고 있는 가운데 손님이라곤 남녀 한 쌍과 홀로 온 남자뿐이다. 어두운 거리에서 실내조명에 밝게 물든 식당 내부만 훤하게 드러나 있다. 한 남자의 코는 날카롭고 새의 부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그 남자의 곁엔 붉은색의 옷을 입은 여자가 앉아있다. 식당 주인은 손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뭔가 작업 중이다. 그리고 홀로 떨어져 앉아 등을 관객 쪽으로 보인 채 웅크리고 있는 사내가 보인다. 총회와 총신의 요즘처럼 삶의 고독과 우수가 절로 느껴진다.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1882~ 1967)의 그림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보여준 현대사회의 사실적이면서 몽환적인 풍경이다. 한 칠면조가 있었다. 나름대로 과학적 사고를 좋아하는 칠면조였다. 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해서 다음 날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것이 취미였으니까. 999일 동안의 기록과 관찰을 마친 칠면조가 친구들에게 말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배불리 먹고 뚱뚱해지는 거야. 여태껏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관찰한 결과, 주인은 매일 밥을 주고, 우리는 계속해서 살이 찌거든.” 하지만 1000일째 되던 날은 바로 추수감사절이었고 칠면조들은 모두 예측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은 미래를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현재까지 누적된 정보들만 본다. 어제와 다름없이 오늘을 살고 내일도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사실 우리 뇌의 농간이다. 우리의 뇌는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내일 당장 죽을지라도 우리의 뇌는 총회실행위원회처럼 오늘 사과나무를 심고 싶어 한다. 삶 속에서 규칙성을 찾고 그 안에서 안정을 느끼고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융(C. G. Jung)이 1930년대 어느 강연에서 말했다.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점성술이 오래 전에 폐기 처리되었기에 한껏 비웃어도 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최근 점성술이 사회 저 깊은 곳에서 탈출하여 300년 전 쫓겨난 대학 문을 다시 두드리고 있다. 모든 점성술사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노력과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한 개인의 길흉화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이러한 본질적 의문은 인류의 시작부터 있어왔다. 그 답은 성경에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2018년 1월 4일 오전 11시 총회회관 2층에서 2018신년감사예배 및 하례회를 갖고 힘차게 출발은 했다 총회불꽃 서기 권순웅 목사의 힘 있는 목소리 “묵도하심으로” 예배는 시작됐다. 피아노 선율을 따라 1장 찬송이 흐르고 그는 먼저 에베소서 1:11-12 말씀을 낭송하며 기도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경배합니다. 영광을 돌려드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모든 예배 순서를 주님께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 다 같이 신앙고백 후 부총회장 최수용 장로가 기도했다. 총회 부서기 김종혁 목사가 요한계시록 22:7, 12, 20-21 성경봉독을 했다. 권순웅 목사 시무 주다산교회 여성중창단과 송은혜 사모의 특송에 이어 총회장 전계헌 목사가 새해 벽두 다소 어둡고 몽환적인 제목 ‘주 예수님 오소서’의 설교를 했다. 정작 그는 세속 정부의 교회에 대한 납세로 건방진 자세에 대한 불쾌함, ‘총회의 개혁신학의 교의적 지도하에’를 정관에 박아 총신을 사유화했다는 것에 대한 절망, 총회유리창 김선규 총회장이 총회결의와 실행위원회 결의에 따른 납골당 매매를 뒤집은 것에 대한 회개가 아닌 걱정 등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총회가 해 놓은 것도 받지 못하고 총신이 개혁주의를 외치며 부패하고 개혁주의 정체성을 잃은 총회 간섭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자 ‘주 예수님 오소서’만 말하면 속절없이 세월은 다음 총회를 향해 가는데 어쩌란 말인가. 에드워드 호퍼(1882~ 1967)의 그림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보여준 어둔 밤의 사실적이면서 몽환적인 풍경처럼 말이다. 그래도 총회장은 품위 있게 설교했다. “... 왜 총회장이 하고많은 성경 중에 신년감사예배를 드리면서 신년하례회를 하면서 요한계시록의 주님이 곧 오시겠다는 말씀을 본문으로 정하고 신년예배를 드릴까 저 자신이 많이 숙고하고 이 말씀을 선정했을까. 예수님을 처음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의 몸을 입고 나셨고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시고 이 땅에 재림해 오실 줄로 우리가 같이 믿고 있습니다. (총회장이 좋아하는 강일구 목사 아멘) 언젠가부터 우리는 신앙이 무슨 관성의 법칙처럼 자동으로 굴러가고 있습니다. 기도도 잘하고 설교도 잘하고 가르치기도 잘하지만 우리의 생활과 모든 모습을 보면 정말 저 사람이 주님 재림하심을 믿고 있는 사람인가 정말 저 목사님 저 장로님이 예수님 재림을 믿는 사람일까 하는 의혹심이 든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 살 것 같이 보이고 하나님도 안 믿는 사람 같이 보이는 모습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삶속에 반영되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가 보는 교회는 지도자의 모습은 너무나 권위가 실추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거룩한 일을 많이 하고 대 사회 봉사와 구제를 많이 함에도 불구하고 별로 인정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수많은 목사님들이 현실에서 매일매일 순교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데도 불구하고 몇몇의 부패하고 타락하고 추악한 모습이 비쳐져 한국 교회 지도자가 다 그런 것처럼 모든 성도가 다 몰락된 것처럼 그렇게 보여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 납세 목회자 납세 문제도 거의 통과하지를 않습니다. 내 생명을 불사하고 법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목사되어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납세 신고 양식을 보면서 너무나 어처구니없고 기가 막혀 교회가 등록할 교회이름은 교회가 아니라 사업장입니다. 목사는 목사(牧師)가 아니라 사업(事業) 대표(代表)입니다. 큰교회는 회장 정도이고 중소교회는 사장 정도 될 만큼 세상에 비치는 교회 모습과 지도자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추락했습니다. 오늘 신년감사예배를 드리고 신년하례회로 모이고 주님이 속히 오시어 이 두루마리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으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읽고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묵상하고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지키는 복된 사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회중 아멘)... 정말 예수 믿는 사회에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면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고 내가 자랑할 것은 약한 것밖에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일 년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회중 아멘)” 부회록서기 진용훈 목사의 ‘총회와 산하 기관 발전과 교단부흥을 위해’ 회계 서기영 장로의 ‘총회 사역과 재정을 위해’ 특별기도를 드리고 역대 총무 가운데 가장 신실한 요셉 같은 총무 최우식 목사의 광고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2018년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고 살아보지도 않았던 새해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심을 감사합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2018년 신년하례예배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 총회장님을 비롯한 임원과 그리고 통합측 이성희 증경 총회장님 기하성 이영훈 총회장님을 비롯한 여러 총무님들도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증경 총회장님들 참석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끝난 뒤 기념촬영이 있고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5월 8일부터 10일까지 그리고 총회가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있게 됩니다. 또 주다산교회 찬양팀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노회장님들께서 세례교인헌금에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총무의 업무를 감당하다 보니 90프로 이상 내는 노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인센티브 20프로를 받아가는 것을 보고 귀한 기회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모두 동참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550장 찬송 후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의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쳤다. 강일구 목사의 기도 소리가 찬양대의 여운을 깼다. 2부 하례회가 회록서기 장재덕 목사 사회로 이어졌다. 먼저 WCC를 지지하는 통합측 직전 총회장이고 1959년 제44회 총회 분열 속회가 열렸던 연동교회 담임 이성희 목사의 잔잔하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축사가 있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성희 목사와 이승희 목사를 발음으로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회중 웃음) 이승희 목사님은 대구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고 제 연고가 대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통합측 총회장 끝나고 합동 총회 부총회장 하느냐고 말합니다. (회중 웃음) 직전 총회장 김선규 목사님하고 잘 지냈습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박수) 새해를 맞이해 합동측 12000여 교회 그리고 300여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 교단이 1월 2일 시무예배 겸 하례예배를 가졌는데 증경 총회장께서 오셔서 좋은 축사 말씀을 해 주시고 그리고 함께 교제를 나눴습니다. 오늘 당연히 우리 교단의 총회장님이 오셔야 되는데 여러 가지 많은 업무상 오시지 못하고 저가 대신 오게 된 것을 양해를 구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분립되어 서울에 올라와 승동 측과 연동 측으로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합동측과 통합측이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가 연동교회 목사입니다. 항상 제 마음속에는 1959년 분립될 때의 연동 측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마음에 부담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합동과 통합이 통합과 합동이 하나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강일구 목사 아멘) 저희가 승동 측과 연동 측으로 갈렸습니다만 승동교회는 아시는 대로 1893년에 설립되었고 연동교회는 1894년도에 설립되었습니다. 그래서 승동교회가 올해 125주년을 맞이하게 되고 연동교회가 124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가 항상 승동교회를 형님처럼 생각합니다. (강일구 목사 할렐루야) 더군다나 승동교회는 종로 2가에 있고 연동교회는 종로 5가에 있기 때문에 승동교회가 3가나 앞섭니다. (회중 웃음) 년도나 거리가 다 앞서니 언제나 형님입니다. 제 마음속은 언제나 합동측을 형님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강일구 목사 아멘) 말씀을 드립니다. 최근에 교단 걱정 교회 걱정을 많이 합니다. 제가 어떤 자료를 보니까 미국의 주요 교단 65퍼센트 정도가 교단을 탈퇴하고 있다면서 탈교단 현상이 많이 일어난다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교단성을 가지고 있는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너무 많은 제약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뭐하면 이단이다 사이비다 시비를 하게 되고 이 교단성에 붙잡혀 교회가 성장하지 못한다 해서 탈교단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하더라고요. 우리나라도 그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 않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최근에 와서 보면 지난 5년 동안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가나안 교인(이 용어는 성경의 나오는 지명인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라는 문자이며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자신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의미)이 2배나 늘었다 합니다. 심각한 문제인데 이런 모든 문제들을 교단이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합동측과 통합측은 두 교단이 합동을 하든 통합을 하든 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강일구 목사 아멘) 그렇게만 하면 두 교단이 하나가 되겠고 또 하나님께서 세계 최대 최고의 장로교단으로 성장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에 김선규 총회장과 제가 아주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정말 형제처럼 동역자처럼 지냈는데 합동과 통합이 함께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102회도 좋은 결과 많아지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2018년도를 함께 감으로 말미암아 한국교회 성장을 위해서 세계교회를 위해서 함께 동행할 수 있는 좋은 교단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회중 박수) WCC를 지지하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이고 여의도 순복음교회 담임 이영훈 목사가 축사했다. “... 2018년 우리 앞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놓여있습니다. 북한 핵위협은 계속 되고 있고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움직임 이슬람의 침투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 신문 기사를 보니까 영국이 무너지게 된 것은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 이후 이슬람 침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때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던 영국이 지금 가장 침체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보고를 봤습니다. 이제 합동 교단이 앞장서서 우리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신앙 전통을 지켜야 합니다. (강일구 목사 아멘) 어떤 경우에도 동성애 동성혼 합법화를 꿈꾸는 세력을 우리 대한민국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 합니다. 이슬람의 침투와 사이비이단에 대한 경계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복음으로 무장하고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또 합동측이 통합측과 하나 되어서 한국교회를 세계적인 교회로 이끌어나가는데 앞장 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이만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회중 박수) 이어서 증경총회장 서기행 목사가 순서지에 기록된 증경총회장 최병남 대신 격려사를 했다. “차를 타다보면 타이어 바람이 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스페어타이어를 갈아 낍니다. 제가 스페어타이어입니다. 증경회장단 회장님이 최병남 목사이신데 사정이 있어 못 오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제가 일 년에 삼십 번 정도는 통합측 증경총회장 이성희 목사님을 만나서 벌떡 일어서 절을 합니다. 그러면 이성희 목사님이 나한테 왜 이렇게 깍듯이 절을 하느냐고 말합니다. 이성희 목사님 보고 하는 거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이상근 목사님이 (회중 웃음) 주석을 너무 잘 쓰셔가지고 내가 그 주석을 보고 박윤선 목사 다음으로 주경신학자로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서기행 목사는 몸을 돌려 뒤에 앉아 있는 이성희 목사에게 허리를 반 접어 큰 절을 했다. 회중은 실없이 웃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회중 아멘) 목사들은 많이 실수해요. 장로님들보다 목사님들 실수가 많습니다. 장로님들은 성도님들보다 조금 덜 실수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예수님 쳐다보고 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이 자리에 참석하신 분들도 우리 교단 여러 가지 상처로 자칫하면 실수하게 됩니다. (실수를) 안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교단을 지켜주시고 지켜주셨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전계헌 목사 아멘) 저는 시편 23편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단의 목자가 되신 줄 믿고 그렇게 사시기를 격려합니다. 감사합니다.” (회중 크게 환호 아멘) 교단 산하기관 인사 시간인데 시간 관계상 개별적으로 시간을 주는 대신 다 나와 일렬로 서 인사를 했다. 장재덕 목사가 차례로 호명했다. “총신운영이사회 이사장 강진상 목사 총신운영이사회에서 선출한 총신대학교 총장 김형국 목사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찬곤 목사 그리고 외부인사입니다. CTS 사장 고장원 장로 전국남전도회 회장 전국청장년면려회 회장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전국여전도회 회장 전국장로연합회 회장 강의창 장로 전국합동장로회 회장 이이복 장로 앞으로 나오시겠습니다.” 모두 나와 일렬로 줄을 서 인사를 했다. 총신 제7대 김영우 총장과 재단이사장 박재선 목사는 불참했다. 총신 사당캠퍼스와 양지캠퍼스에 재단이사장과 나란히 있던 총신운영이사장 책상은 이제 없고 김형국 목사 자리도 없다. 사회를 보는 장재덕 목사 직권으로 순서에 없는 본 교단 속한 신문 관계자들도 나와 인사를 하게 했다. 김화경 목사 사이비들은 들여보내라고 이죽거렸다. 송삼용 목사 이름까지 거명하며 들어오라고 했다. 2018년 1월 4일 신년감사예배에 에스겔서 47:1-5 환상에 나타난 물에 찬 성전처럼 망각의 강 레테의 물줄기가 거세게 흐른 모양이다. 왜냐하면 레테(Lethe)는 그리스 신화 속의 강으로 망자가 하데스가 지배하는 명계로 가면서 레테의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게 되는데 강물을 마신 망자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된다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까지 들먹인 그 전말은 이렇다. 통합측 직전 총회장이고 연동교회 담임 이성희 목사가 축사에서 말했듯이 1959년 제44회 총회는 통합측의 분열이 있었다. 이는 WCC라는 신학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에큐메니칼(WCC)운동은 각 교파가 지니고 있는 교파 간의 특성이나 교리들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적어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모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하여 세계를 정치적이든, 경제적으로든 또한 인종 갈등에서든, 종교 갈등에서든 해방시켜서 세계교회를 구현하고 화해를 삼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세계 교회 협의회(普世敎會協會,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세계적인 에큐메니컬 운동 단체이다. 1948년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첫 총회를 시작으로 결성되었다. 교회 일치주의(Ecumenism)는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교회의 보편적 일치 결속을 도모하는 신학적 운동이다. 어원은 그리스어인 오이쿠메네(Οικουμ?νη)로부터 유래하였다. 1910년 에딘버러에서의 제1회 세계선교회의를 통해 세계교회 일치운동을 발족하게 됐다. 기독교 교회 일치운동은 2차 대전 이후에 구체화되었다.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총회로써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결성되어 개신교(성공회 등)와 동방 정교회가 참여하였고,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협력과 일치도 시도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 최대 교파인 예장합동과 예장고신 등 많은 보수 교단들은 신학적 차이로 교회일치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WCC 가입 문제는 한국의 개신교 최대교파인 장로교회를 두 조각으로 분열시켰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WCC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운동이라고 판단하며 반대하는 예장합동과 WCC 가입에 찬성하는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한국의 예장 총회는 1956년 9월에 열린 제 41회 총회에서 WCC 문제로 찬성파와 반대파가 크게 대립하자 이 운동을 연구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 8명을 발족했다. 여기에 선정된 위원은 한경직을 위원장으로 유호준 안광국 박형룡 박병훈 환은균 정규오 등 7명이었는데 앞의 세 사람은 WCC에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뒤의 네 사람은 반대파였다. 이들은 다음해 열린 42차 총회에 발표한 첫 보고서에서 단순한 친선과 협조라는 측면에서는 WCC를 지지하지만 교회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즈음 박형룡 박사는 합동총회 신앙노선과 총신 신학의 지남침 역할을 하는 총신대 발간 ‘신학지남’에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이렇게 주장했다. “WCC는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 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와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합동측과 통합측의 분열은 WCC라는 신학적인 사상 문제 때문이었다. 에큐메니칼(WCC)운동은 각 교파가 지니고 있는 교파 간의 특성이나 교리들의 장벽을 뛰어 넘어서 적어도 그리스도라는 이름 아래 모이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협력하여 세계를 통합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치적이든, 경제적으로든 또한 인종 갈등에서든, 종교 갈등에서든 해방시켜서 세계교회를 구현하고 화해를 삼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의 성경 중심 개혁신학을 따르는 많은 목사와 장로들은 많은 비판을 하고 반대하게 되었다. 1959년 9월 24-28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총회장 양화석)는 WCC의 에큐메닉스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비상 정회가 됐다. 그리고 WCC의 에큐메닉스 신학에 찬동하는 통합측은 44회 속회를 곧바로 1959년 9월 29-30일 서울연동교회당에서 열었다. 그러나 두 달 뒤 WCC의 에큐메닉스 신학에 반대하는 합동측은 44회 속회를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속회했다. 그리고 WCC를 영구히 탈퇴하기로 결의했다. 통합측과의 분열이었다. 그래서 WCC를 찬성하는 측은 연동측이라 하고, 반대하는 측은 승동측이라 했다. 그 뒤 WCC를 찬성한 연동측은 WCC에 중립적인 측과 통합했다고 해서 통합측 교단이 됐다. 반면 WCC를 반대한 승동측은 1951년 분열한 고신측과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 교단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 분열은 WCC에 대한 사상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사상(思想)이란 생각이나 사유라고도 하며 신학 철학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인지과학 등 분과에서 판단이나 추리를 통해 생긴 의식 내용 또는 논리적 정합성을 가진 통일된 판단 체계를 말한다. 합동측 제102회 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통합측 증경 총회장 이성희 목사를 초청했다. 연동교회 담임목사이기도 한 이성희 목사는 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항상 제 마음속에는 1959년 분립될 때의 연동 측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마음에 부담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합동과 통합이 통합과 합동이 하나 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예장합동에서는 WCC 신학은 기독교만이 참 종교임을 포기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임을 부인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내포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또 WCC는 전 세계적으로 많은 회원교단들이 있는데 그 모든 교단들을 하나의 연합체 안에 모두 수용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교리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개혁주의 교회론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를 주장하지만 WCC의 교회론은 머리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교회의 본질보다 기능적인 차원의 교회론이기 때문에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에 참여하는 기독교 단체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있으며, 회원 교단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기독교한국루터회, 대한성공회,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한국정교회 등 총 9개 교단이 가입되어있다. 현재 통합은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따르는 제한속죄론에서 벗어나 바르트의 '초월론적 변증신학'을 따르는 통전적이며 성서적인 복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다. 통합은 장로교회의 대표적인 신앙고백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옛 문서화하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만을 사용하며 대요리문답은 사용하지 않는다. 2013년 10월 30일 부산 벡스코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WCC 부산 총회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로 11월 8일까지 10일간 열렸다. WCC에 반대하는 합동교단으로서 이 행사에 대응해 결성된 총회WCC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 된 서기행 목사는 2013년 4월 13일 총회회관에서 회의를 갖고 목사장로기도회 개회 예배 후 WCC대책위원, 총회임원, 지역협의회 대표 등이 단상에 올라 WCC를 반대하는 총회의 의지를 표명하기로 했다. 그런 서기행 목사가 5년 뒤 WCC를 지지하는 통합측 총회장이었고 1959년 분열 현장 연동교회 담임목사인 이성희 목사에게 큰 절까지 했다. 그 이유가 WCC를 지지하는 이상근 목사를 통합측 주경신학자로 치켜세우며 존경하기 때문이란다. 그 이상근 박사의 아들 이성희 목사에게 WCC를 반대하기 위해 2013년 총회WCC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이었던 서기행 목사가 WCC 반대 본산 합동교단 본부 강단에서 총회 임원들과 실행위원들 면전에서 허리를 반절로 꺾고 머리 숙여 신사참배하듯 절했다. 그리고 그 현장의 합동측 목사와 장로들은 실없이 웃기까지 했다. 합동총회 정체성을 잃고 성경적 칼빈주의 신학 부재와 부패의 틀 안에 갇힌 총회2012년 WCC대책위원회 위원장 서기행 목사는 말했다. “9월 총회 전까지 WCC 반대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총회에서 WCC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총회적 의지를 분명히 결의토록 해야 한다. WCC 반대라는 명제를 기치로 우리 교단이 최근 흐트러져 있는 보수권의 연합을 꾀하도록 하자. 부산에서 제10차 WCC 총회가 유치된 것을 한국교회의 경사요 기독교의 올림픽인 것처럼 얘기하고 한국교회가 다 찬성하는 것 같이 WCC 한국준비위원회(위원장 김삼환 목사)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합동교단이 볼 때 WCC는 비성경적이며 비신앙적이어서 토론이 필요하다. WCC 문제를 바로 짚지 않은채 2013년이 지나가면 1959년 예장합동과 통합이 분열됨으로 초래했던 것보다 훨씬 큰 어려움이 한국교회에 밀어닥칠 것이다.” 증경총회장 서기행 목사가 아무리 스페어타이어로 왔어도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는 태어나면서 믿기 시작해 최고령 목사가 된 원로 목사이다. 이젠 허리 굽어지고 머릿결 하얗게 세었으나 천국 전입 명단에 이름 나붙지 않았으니 여전히 현역 목사이다. 나의 목회는 삶이다. 전쟁은 전쟁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무도 없는 삶이 없기에 싸워야 할 적이 없는 삶도 없다. 현역으로 늙는다는 건 역경을 경력으로 수고를 고수로 바꾸는 성화(聖化)의 체득 과정이다. 평생을 통해 읽어갈 성경을 오래 살았기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깨우쳤고 젊은 목사들이 아직까지 읽지 못한 심오한 말씀을 읽어왔기에 앞으로 내 삶의 목회는 더 좋아질 것이다,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목회를 노래하는 목사가 되어 삶을 살고 싶다. 최고(最古)가 최고(最高)가 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합동총회 정체성을 잃고 성경적 칼빈주의 신학 부재와 부패의 틀 안에 갇힌 총회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무의 좋고 나쁨은 그 열매로 안다 마태복음 7:20 2018-01-10
    • G.OPINION
    2018-01-10
  • 2018, 위기앞의 한국교회
    2018, 위기앞의 한국교회 2018년 새해가 밝았다. 밝은 태양처럼 한국교회의 미래도 밝았으면 한다. 새해를 맞아 신년 인사로 여러 목회자들을 꾸준히 만나보면 목회현장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생각외로 크다. 전임과 후임, 목사와 장로의 갈등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분쟁과 내홍으로 주저앉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의 정체와 침체가 회복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최윤식 박사가 말한 경제적 위기만이 아니다. 다음세대 문제와 외적으로 추락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할 길도 그리 만만하지 않다.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과거 성공담으로는 새로운 시도가 불가능하다. 교회는 덩치로 이야기하는 곳이 아니다. 덩치는 큰데도 한국사회의 주류종교로서 그 방향과 역할을 감당하지 못해 대사회적 영향력도 사라지고 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영향력이 있다. 사실 교회가 처절한 회개와 자성으로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길만큼 지름길은 없다. 사회는 교회와 크리스천에게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다. ‘다시 거룩한 교회로’ 돌아가고 ‘다시 세상속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일 것이다. 교회는 이런 세상의 소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고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면서도 고백과는 상관없이 ‘사교회’화 현상은 더 심화되고 있다. 마치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부끄럼이 가려질까? 동성애나 에이즈처럼 사교회화도 전염성이 크다. 단지 한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뚝이 무너지면 개혁교회가 지탱해온 모든 성벽이 함께 무너질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이다. 그런데 계속 모른척 외면하고 그런 행위를 용인 반복하며 그렇게 개혁할 그런 의지나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개혁교회’라는 간판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고 연합운동과 연합사업은 제대로 하고 있는가? 지난해 교단장을 중심으로 빅텐트를 치겠다고 정치적 이합집산을 도모하며 결과적으로 분열의 열매인 제4기구를 만들었다. 그들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자평하지만 혹자는 연합운동 무용론과 해체까지 회자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 일하지 않는 연합사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합기관이 세상 패거리 정치와 다른 어떤 감동을 전해주고 있는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연합일까. 그런데도 70년대의 ‘노인’은 있지만 ‘원로’가 없고, 중재하고 조정할 ‘어른’이 없다. 한국교회가 진정 이렇듯 일회용 이벤트가 아닌 100년이 멀다면 향후 50년, 10년의 청사진을 가지고 준비하고 있는가? 의문이다. 이렇듯 2018년, 한국교회는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 한국교회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 하나는 공교회의 사교회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합사업의 실종과 더 나아가 마땅한 지도자가 없는 지도력의 공백현상이다. 한국교회를 이끌 교계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몇 해전 일반잡지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사회에 영향력을 준 종교지도자로 개신교에서는 지난 10년간 조용기 목사와 한경직 목사 두 분이 나왔다. 그 이후 뚜렸한 지도자가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지도자가 나지 않는 한 교회의 번창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영웅도 가고 장수도 가고, 이제는 남이 먹여주는 젖으로만 자랄 시기는 지났다. 반대로 남을 먹이고 남을 기를 만한 장성한 지도자가 나와야 할 시점이다. 교계 인사들을 만나면 ‘사람이 없다’고 한다. 사람을 키우지 않았으니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사람은 없다. 타종교는 정책적으로 인물들을 키우고 사회와 소통하는 40~50대 지도자를 만드는데 열심이다. 가능한 모든 언론 방송 수단을 통해 자력이든, 타력이든 띄운다. 그러다 간혹 사라지기도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지도자로 부상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으니 한국사회에 그 역할과 할 말도 못하게 된다. 낡은 레퍼토리로는 미래가 없다. 누가 지도자인가? 요즘 소위 교계 지도자라고 명함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소위 자칭(?) 지도자라고 본다. 창조적 상상력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무슨 새로운 역사가 기대하겠는가? 교계에서 그들이 한국교회의 미래와 그 방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본적이 없다.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과 레퍼토리를 개발해야 한다. 다음세대와 교회를 이끌 지도자가 있는가? 당면한 위기속에서 그렇다고 건강한교회로 나가기 위해 진정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복음을 복음답게 하며, 그러면서도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개혁적 목회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어쩌다 몸부림치는 목회자가 더러는 눈에 띄지만 개교회에 머물러 ‘한국교회’라는 큰 산은 보지 못하고 작은 숲속에 갇혀 그렇게 사는 것이 목회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 같다. 설령 개혁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목회현장에서 지속적으로 그 정신을 실천하고 적용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은 점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런 희생없이 어떻게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커 갈 수 있을까? 결국은 지도자와 지도력이 해답이다. 지도자가 없는 교회에 사람이 모일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한국교회를 이끌 인재가 있는가? 모이로 키우는 양계장에서 독수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한국교회는 시대와 역사를 이끌 걸출한 지도자를 내 놓아야 한다. 2018년, 한국교회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위기에 해답을 만들어야 미래가 있다. 진정 향후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20년, 30년을 준비하고 있는가? 지금 이대로 더 추락할 것인가? 다음세대를 이끌 지도자가 없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들 턱이 없다. 해답은 지도자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아골 골짜기로 십자가를 지고 가며 미래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여럿 출현해야 희망이 있다. 2018. 01. 01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 G.OPINION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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