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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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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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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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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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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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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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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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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이 삶이 되다_ MERRY CHRISTMAS, 평강의 왕 오시다
    주신 말씀_ 누가복음 2:14, 이사야 9:6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MERRY CHRISTMAS, 평강의 왕 오시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드디어 평강의 왕이 오신 기쁨의 아침이 밝았다. 그 소란하던 세상은 다 고요하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며 땅에는 영존하시는 ‘평강의 왕’이 오신 기쁨의 찬송이 가득하게 울려 퍼졌다. 성탄절 축하 예배에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주시는 예수님’의 제목으로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역설하신다. 과연 그렇다! 우리 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연 ‘평화’일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어떤 평화인가?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시는 평화이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높게 가로막은 ‘사망’의 벽을 허무시고 그 자리에 사랑과 평강의 에덴의 동산을 복원하시려고 ‘아기 예수’를 보내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아기 예수님이 받으신 사명은 화목제물로 십자가 죽으심이다. 둘째,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마귀의 간계에 의해 갈라 질대로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만들고 미움, 증오, 분노, 원수 된 것으로 지옥이 된 세상을 용서와 사랑과 섬김으로 평강을 이루시려고 오신 ‘아기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시라! 거룩하고 기쁜 날, 세상 사람들이여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다 찬양할지어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지어다! ‘그는 모사라 기묘자라 전능의 하나님이시라 온 세상은 모든 영광을 아기 예수께 돌릴지어라’ 할렐루야! 아멘.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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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2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4_ 바다로 간 아이들
    바다로 간 아이들 푼푼한 햇살에 목련이 피고 농익은 봄바람에 꽃이 진다. 자고새면 개혁이 일으키는 바람에 몸살을 앓는 사람을 뜬금없이 발견하게 된다. 시절 좋던 때에 맘껏 비리를 저지르며 그게 세상사는 법인 양 느물거리던 사람들이 바람에 나는 검불처럼 날리고 있다. 뭔가를 보여주겠다던 웃기는 짜장은 국민이 뽑아준 자리 내팽개치고 다시 술집 사장으로 돌아갔다. 나와서는 안 될 곳에 나왔고 그만두지 말아야될 것을 그만둠으로 그는 두 번 분수에 맞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런데 뭔가를 다시 보여줄 것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던 분이 놀라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기름 부음 받은 몸으로 국가수반이 되신 분이다. 요즈음 신자들마다 그분을 위해 기도가 절로 나온다고 하니 신명 나는 세상이다. 배를 탄 소년 십자군 독일에도 소년 십자군 소식이 전해졌다. 니콜라스라는 소년이 독일에서는 선봉장이 됐다. 거개가 열두 살 먹은 소년들이 떼를 지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심지어 여자애들도 끼어 눈길을 끌었다. 독일 얼라들은 처음 출발할 때 찬송을 부르며 출발했다. 여행 앞머리에 발걸음은 가벼웠고 길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라인강 계곡은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도시와 마을이 많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아름다운 스위스 삼림을 지나기 위해 라인강을 벗어나자마자 험한 고생이 시작됐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길이 시작된 거나 진배없었다. 스위스는 자리가 잘 잡힌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식량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엎치고 덮친 격으로 강도와 야수들이 들끓었다. 숲속에 웅크리고 있던 강도와 야수들은 먹을 것을 찾으러 아이들이 대열에서 떨어져 헤매면 영락없이 덮쳤다. 마침내 알프스 산자락이 아슴하게 자태를 드러냈다. 깎아지른 절벽들을 보자 걸음을 돌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앞으로 계속 전진하다가 알프스의 하얀 눈 덮인 등성이에 뼈를 묻는 아이들로 솔찬했다. 그럼에도 알프스를 안전하게 넘어 북부 이탈리아 평원에 도달한 아이들이 수천 명이나 됐다. 그들은 영락없는 거지 몰골로 평원을 가로질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줄 바다로 행진했다. 그러나 정작 그 바다는 충정 어린 소년 십자군을 위해 모세 때의 홍해처럼 뒤로 물러가 갈라지지를 않았다. 억장이 무너진 아이들은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이탈리아인으로 성장한 수도 꽤 됐다. 나머지는 터덜터덜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로마 교황을 찾아갔지만 거룩한 아버지는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아이들을 다독거릴 뿐이었다. 스데반 휘하의 프랑스 아이들은 마르세이유 항구로 몰려갔다. 물론 거기서도 그들을 위해 바다가 쩍 갈라져 주지는 않았지만 독일 아이들과는 형편이 좀 나았다. 친절하게도 아이들을 위해 배를 선선히 내준 상인들이 있었다. 상인들은 일곱 척의 배를 내놓았다. 각 배에 칠백 명씩 승선했다. 근 5천 명 아이들이 신나라 하며 깡충깡충 배에 올랐다. 배는 출항했지만 18년 동안 그들의 소식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프랑스 소년 십자군은 바다로 출항한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회교국 군주가 방면한 한 생존자가 집에 돌아와 소식을 전하기까지는 말이다. 2021-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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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2-21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주신 말씀_ 누가복음 2:10~14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이 나신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얼마 안 떨어진(9km) 작은 동네이지만 그곳은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한편으로는 보아스와 룻의 동화처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어떤 성경 학자의 이야기로는 그곳은 지구를 몸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심인 인간의 배꼽과도 같은 곳이라 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동네이지만 세상의 중심이 되는 곳 ‘베들레헴’에 드디어 7백 년 전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이렇게 7백 년 전에 예언이 되신 메시아 탄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오시는 메시아는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소식’ 그 자체이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는 분이시며 그분의 정체는 ‘상고에 영원에’ 있으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신데 그 지극히 귀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으며 그것도 상상도 할 수 없는 낮은 곳, 천한 곳, ‘말구유’ 위에 놓여 오신다는 것이 상상이 될 일인가? 왜? 하나님은 그 천한 곳으로 가장 낮게 오셨을까? 구유 위에 뉘이신 예수님을 그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해 보자! 첫째, 세상의 모든 사람을 포용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세상에 난 자 중에 말구유 위에 놓여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비천한 자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안으시며 섬김의 본이 되시기 위해 주님이 말구유 위의 비천함을 스스로 택하심 때문이다. 둘째,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할 ‘대속 제물’로서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오셨기에 스스로 가장 낮은 신분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당신이 구원하실 인간은 귀하게 여기시고 자신은 가장 비천한 죄의 제물이 되려 하셨기에 왕궁의 침대가 아닌 말구유를 택하신 것이다. 셋째, 탄생하시는 자리마저 좋은 곳, 좋은 자리는 사람에게 차지하게 하시고 당신은 말구유를 택하심으로 ‘섬김’의 시작부터 본을 보이신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넷째, ‘이처럼’ 사랑하심의 증표를 보인 것이다. 말라기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말 1:2) 하는 냉담한 반응에 서운함을 느끼신 하나님은 그후 4백 년간 침묵하시다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시며 ‘이처럼의 사랑’을 말씀하셨다. 말구유에 뉘어서 오시는 ‘이처럼의 사랑’, 이는 하나님의 세상 사랑하심의 증표요, 확증하심이라. 다섯째,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시기 위하여 육신으로 솔선수범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세상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가르치시고 끝내 당신의 몸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심을 보이셨으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4)고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는 단 하나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중에 속하여 있는가? 단연코 들어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대강절을 보내면서 설레이는 그리움 속에 기다림에 젖어 사는 것이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202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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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4_ 십자군 전쟁
    Combat deuxième croisade 십자군 전쟁 남자들만큼 싸움을 즐기는 생명체가 이 지구상에 그닥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 『죄와 벌』에서 한 인물을 통해 이런 넋두리를 늘어놓게 한다. 『사람을 하나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범인이 되지만 많이 죽이면 영웅이 되어 존경을 받게 된다.』 우르바누스 2세가 아돌프 히틀러 마냥 선동적인 연설을 한 그해 겨울 전쟁준비가 본격 가동됐다. 김일성 노인네가 누구를 겁주고 죽이려고 원자탄을 만드는지 모르지만 유럽의 공격 목표는 확실했다. 대장장이의 둔중한 망치 소리가 달궈진 쇠를 땅땅 내리쳤다. 흠씬 두들겨 맞은 쇠들은 칼과 방패와 갑옷과 말등자로 변해 번들거렸다. 여러 지역에서 군사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군대는 여러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방으로 진군했다. 때아닌 무기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드디어 1099년 예루살렘을 기독교도들이 탈환했다. 이교도와 무신론자들은 무참히 살육됐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 거리는 피로 흥건히 젖어 흐를 정도였다고 한다. 1099 jerusalem 십자가를 색실로 팔소매에 아로새긴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께서 매장됐다고 여겨지는 곳에 세워진 홀리 세펄커(성묘) 교회에서 환호성을 올리며 승리의 예배를 드렸다. 로마 교황청에서 승리를 보고 받은 교황은 감사미사를 장엄하게 드렸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교황의 강력한 권위에 새삼 고개를 숙이고 경배했다. 그런데 막상 성지를 점령하고 보니 빼앗는 것 보다 다스리고 장악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괘씸한 터키인들은 심심하면 침략을 일삼았다. 새로운 십자군 원정군이 편성됐다. 이때 용맹을 떨친 인물이 바로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 해서 사자왕으로 불린 영국 왕 리처드였다. 그러나 첫 번째 십자군 원정과 달리 그 뒤의 십자군 원정은 오랜 성공을 거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기면 단시일에 끝나는 승리였다. 지리한 공방전이 계속 이어졌다. 세 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났다. 유럽에는 우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바로 그때 스데반이라는 이름의 코맹맹이 프랑스 소년이 홀연히 나타나 놀라운 말을 해댔다. 이를테면 그는 계시받은 소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그리스도께서 내게 나타나시어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어린애들이 성취해야 한다. 어른들의 칼과 강한 오른팔을 믿지 말고 십자군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고 바다를 갈라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해줄 만군의 여호와를 믿으라. 이 약속을 사람들한테 전해 믿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나는 받았습니다.』 스데반은 순례자들이 붐비는 곳에서 연단을 세우고 프랑스 소년들에게 새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라고 외쳤다. 어린애들은 무슨 신나는 놀이라도 생긴 양 모여들었다. 수천을 헤아렸다. 부모들은 막무가내로 집을 나서는 아이들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부모들은 기가 막혀 한숨만 쉬거나 망연히 먼 하늘만을 응시했다. 이 소동은 유럽 전역을 들끓게 했다. 202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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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2-14
  • 성경이 삶이 되다_ 하나님이 인정하는 종
    주신 말씀_ 욥기 1:6~12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이 인정하는 종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언급하시며 칭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시며 신뢰하셨고... 모세는 칭찬은 하지 않으셨으나 직접 대면하여 말씀하실 만큼 가깝게 대한 사람이였으며... 다윗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내 종 다윗’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여기에 비하면 욥은 하나님의 더 큰 절대적 신뢰를 받고 아낌없는 칭찬을 받은 사람인 듯하다. 그는 하나님께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세상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사람을 파괴하려고 간계를 부리는 사탄 앞에서 하신 칭찬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내 사탄은 딴지를 걸었다. 그토록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욥을 무너뜨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사탄의 속성이었으며 하나님의 욥에 대한 신뢰를 무색하게 만들겠다는 계교가 발동한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사탄의 잔인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욥은 시련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신뢰를 지켜낸 것이다. 사람에게는 치명적으로 아픈 곳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식들과 평생을 일궈 온 재물일 것이다. 사탄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욥이 정신 차릴 기회도 안 주고 다짜고짜 열 명의 딸 아들과 전 재산을 쳐버렸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원망함은 물론 자신도 살 의욕을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오히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이다”(욥 2:21) 하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함과 믿음을 지킨 것이다. 그리고 사탄의 두 번째 공격과 세상 친구들의 조롱과 비난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하나님의 인정하심과 같이 그는 뼛속까지 하나님을 신뢰한 의인이었다. 아멘. 202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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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3_ 우르바누스 교황
    Chatillon Urbain2 우르바누스 교황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고 부활 찬송을 연습할 즈음이면 아지랑이처럼 떠오르는 교수님이 한 분 계시다. 그분은 독일에서 철학을 전공하셨다. 어둑해지면 호롱불을 밝혀야 했고 교통도 불편한 후미진 곳에 자리한 신학대학 시절이었다. 밤이면 양쪽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개구리가 합창을 해대던 목가적인 때이기도 했다. 바닥 처리가 안 돼 시멘트가 툭툭 불거진 강의실에 안경을 이마에 걸친 철학 교수께서 들어오셨다. 그 날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고난 주간 금요일이었다. 그는 빤히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찬송을 몇 곡 불러달라 하셨다. 지휘자도 없이 부르는 학생들의 찬양은 성가대를 능가하는 화음으로 교실을 메웠다. 고난 찬송이 끝나자 그는 수난 성구를 몇 군데 읽으셨다. 그런 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안경을 벗어들고 학생들을 향했다. 『여러분,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날 우리가 실존주의니 하이데거니 뭐니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철학박사이고 장로이기도 한 교수님은 조용히 교실을 떠났고 학생들은 말 없는 감동으로 가라앉았다. 우르바누스라는 이름의 교황이 교회 역사에 솔찬히 많지만 개중에 우르바누스 2세가 걸출하다. 마치 옛날 왕의 아버지한테 주어지던 칭호로 대원군이 있었는데 유독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원군으로 가장 유명한 것처럼 말이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우르바노 2세 1088년 3월 12일 교황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2세는 능변이었다. 그는 교황의 위신과 영향력을 크게 고양시킨 귀족 혈통의 성직자였다. 프랑스인이기도 한 우르바누스 교황은 1095년부터 태양처럼 빛나게 되었다. 1095년 프랑스 크레르몽에서 교회회의가 열렸다. 그는 한껏 위의를 갖추고 프랑스로 가서 고위 성직자와 귀족들로 가득 메운 회의장에서 명연설을 했다. 선동적인 연설에서 그는 터키인들의 잔학한 행위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저주받은 종족이 동방 땅을 침략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노예로 삼고 고문을 하고 살해했습니다. 검사들은 목이 단칼에 베어지는지를 시험해보려고 성도들을 연습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교회들을 마구간으로 삼거나 파괴하거나 회교도 기도소로 만들었습니다. 찬양받으실 성모마리아 교회가 저주받은 족속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습니다. 무기와 군대로 여러분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한테 보복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교만으로 배가 불러 서로 으르렁거리며 조각조각 물어뜯고 있습니다. 이제는 모든 걸 떨치고 그리스도를 수호하러 나아갑시다. 반목과 적의는 잊어버리십시오. 무신론자들과 싸웁시다. 여러분 앞에는 거룩한 전쟁으로 인도하는 기수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보이지 않는 기수와 지도자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의연하게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모든 청중은 일제히 소리쳤다.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신다.』 유럽에 짙은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웠다. 거룩한 전쟁,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다. 십자군 원정(crusade)이라는 말은 십자가(cross)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소맷자락을 색실로 십자가를 수놓았기 때문이다. 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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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2-06
  • 성경이 삶이 되다_ 찍힌 바 된 참 감람나무 유대인
    주신 말씀_ 로마서 11:17~24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찍힌 바 된 참 감람나무 유대인 아브라함을 택하신 후 천육백 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그동안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셨던 소회를 말씀하셨으나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 후 피폐하고 지리멸렬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대답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사뭇 냉소적이며 원망 가득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하나님은 이들의 대답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듯 그 후 4백 년 동안 침묵하신다. 갑갑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항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하시며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세상에 보내시는 ‘이처럼의 사랑’을 답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께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서인지 그들은 그 많은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표적과 기적을 보면서도 메시아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었다. 그들의 ‘실족’에 큰 덕을 본 사람은 돌감람나무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 11:11) 곧 아브라함 때로부터 참감람나무로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백성은 찍혀 떨어져 나가고 그 덕택(?)으로 우리 이방인이 그 풍성하신 구원의 은혜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큰 쓰임을 받은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늘 가슴에 있어 돌감람나무인 이방인에게 ‘교만’치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원가지도 아끼고 아니하셨은즉...’(21절) 그러나 어찌하랴! 그 참감람나무 유대인들은 주님 오신지 2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님을 영접치 않고 모세에게만 붙들려 있다 하니 혹시 하나님은 아직도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7천 명에게 기대하고 계시지 않는지 궁금하다. 아멘. 2021-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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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2_ 하나님의 휴전
    하나님의 휴전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보면 심판 날이 얼마나 신날지 실감이 난다. 심판 날은 구원 받은 자건 그렇지 못한 자건 다 같이 두렵고 떨릴 줄 알았는데 양자의 느낌이 다를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즉 심판 때 구원 받은 자는 작금 돈 없는 사람처럼 신나고 멸망 받을 자는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신문에 부정축재로 이름이 거명되는 사람처럼 치욕스럽고 당혹스럽고 두려울게다. 어쨌든 신문에 게재되는 고위 공직자들의 흉물스럽고 의뭉한 부정부패의 치부는 치미는 걸 삭이지 못할 정도이지만 신명 나는 건 어쩜인지 모르겠다. 어느 웃기는 사람 말마따나 잘 돼야 할 텐데. 기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종이 나서서 하시는 일이니 이 땅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해달라고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고위 성직자의 업적들은 중세 교회의 명예이다. 고위 성직자는 인간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었다. 그것은 인간 생활에 용기와 소망을 주었고 사람들을 인간답게 살도록 인도했다. 교회가 완전히 선하지도 않았고 절대적으로 지혜롭지도 않았지만 그 어떤 사회나 세력도 그렇게 열심히 인간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많이 일하지도 않았다. 교회는 평화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귀족들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서로 싸웠고 다른 제후의 땅을 황폐하게 했고 상대방의 성을 무차별 파괴했고 그리고 상대방의 종들을 개 끌듯 끌고 갔다. 그러한 관행을 중단시키기가 무척 힘들었다. 교회는 전쟁의 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평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전투를 어느 특정한 지역들 안에서는 억제해야 할것을 요구했다. 성지를 여행하는 순례자 교회 건물들에 대해서 어떤 공격도 해서는 안되며 성직자, 순례자, 상인, 여인과 농부 등에 대해서도 공격을 해서는 안된다. 또한 가축과 농사 기구를 손상시켜서도 안된다. 이 계획이 아주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교회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교회는 일정 기간 모든 전투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이 계획을 하나님의 휴전(the Truce of God)이라고 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수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일체의 싸움을 멈춰야 한다. 또는 한 해의 어떤 특정한 절기, 예컨대 성탄절 한 달 전인 강림절이나 부활절 40일 전인 사순절 등에도 적용됐다. 물론 이 계획도 아주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교황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싸운다면 산자끼리 서로 치고 박고 할게 아니라 그런 힘을 신앙의 적들에게 돌리는 방책을 강구 했다. 괘씸하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도 많고 마누라도 많은 모하메드를 따르는 신앙을 받아들인 터키를 공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터키는 예수님이 사셨고 죽으셨던 성지를 침략했었다. 성지를 여행했던 순례자들은 터키인들이 거룩한 장소들을 제멋대로 취급하는 걸 보고 분함과 애통함을 삭일 길 없었다. 중세 유럽은 민족주의나 국경이나 경제가 문제가 아니라 주된 관심사는 신앙이 문제였다. 그런데 야만적인 터키인들이 개화된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의 신경을 톡톡 건드리고 있었다. 유럽에는 일기예보가 점차 흐려지게 되었다.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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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2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1_ 유럽의 지배자
    Pope Innocent III wearing a Y-shaped pallium 유럽의 지배자 봄이 왔으니 산에 들에 꽃이 피겠지. 교회들은 저마다 사순절 맞이에 골머리를 썩힐 게다. 나랏님은 갱제인지 경제인지 하는 문제아의 소생을 위해 부활절이 다가오는 근자에 마음을 비운 자세에서 빈머리를 돌리고 있으실 게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셨으니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높은 자리의 사람들한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말씀으로 채워져 변화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 나라에는 무엇보다 양심과 도덕성 회복이 훨씬 중요해 보이는데 위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상것들은 영판 생각이 다르다. 증권 값이 빨간 막대로 하늘을 찌르고 용인지 미꾸라지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게 되어 공장과 자동차에서 내질러대는 매연을 헤집고 다니는 게 신나 보이는 모양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믿음과 사랑과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데에는 높은 분들의 관심이 그닥 많은 것 같지 않다. 헨리 2세의 눈에는 시건방지게 보여 목이 뎅겅 달아난 토마스 베케트는 성스러운 순교자가 되었다. 순례자들이 순교자의 무덤에 줄을 잇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순례자들은 먼 길의 무료함을 달랠 요량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이야기들을 시인 초오서가 운문으로 엮어 캔터베리 이야기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살며 겪는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담겨 있어 이웃이 잘돼 배가 아프거나 세속 축복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들이 잠 안올 때 읽으면 좋을성 부르다. 하여튼 별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얼마나 많이 이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오는지 캔터베리 대성당에 깔린 돌마루가 다 닳아 반들거리다 못해 곧 땅바닥이 드러날 지경인 모양이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알비 십자군을 통해 카타리파를 평정하였다. 제국과 유럽의 올망졸망한 나라들을 다루는데 교회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때는 위대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 치하의 13세기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어떤 왕이나 황제라기보다는 거의 유럽의 주인에 버금갔다. 유럽은 그의 말 한마디에 왔다 갔다 했다. 군대도 없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서 지니는 말의 권능만으로 굳이 무기라고 해야 출교와 금령만으로 이노켄티우스 3세는 왕국들을 수여하기도 했고 빼앗기도 했다. 대륙에서 교황의 말은 곧 법이었다. 블란서 왕에게 시실리를 주는 교황 영국에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존 왕이 자기 사람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교황은 발끈했다. 교황은 영국에서 가장 고결한 인물 스테픈 랭턴의 선출을 강력히 주장했다. 심사가 뒤틀린 존 왕은 하나님의 위력과 이름을 들먹이며 이를 앙다물고 맹세했다. 『영국에 있는 이태리 녀석들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눈을 뽑아버리고 코를 베어버리겠다. 내가 누구라는 걸 보여주겠어. 교황이 뽑은 녀석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받아들이느니 모든 주교들과 수도사들을 싸그리 내 땅에서 몰아내고 말테다.』 교황은 영국에 대해 금령을 명했다. 성찬을 못 받게 된 왕은 손들고 말았다. 다시는 반항하지 않겠고 교황청에 매년 솔찬한 돈도 내겠노라 약속했다. 교회는 많은 과오와 실패를 범하긴 했지만 중세 세계의 정의와 질서를 수호하는 가장 큰 세력이었다. 2021-11-2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1-11-22
  • 성경이 삶이 되다_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주신 말씀_ 마태복음 5:22~24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 한국인들에게는 서양의학에도 없는 ‘홧병’이라는 게 있다 한다. ‘분노’를 참아내서 생기는 병이다. 분노의 조절 기능이 원활치 못한 사람은 각종 충동적 사고를 일으키고 급기야 ‘살인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오늘 주님이 가르치시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이 삶 속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구약 율법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살인한 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는 거와 같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도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매우 강화된 심판의 기준을 제시하셨다. 어찌 사람이 인생을 사는 동안 정서적 문제인 ‘노’를 발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다. 심지어 주님은 형제에게 ‘욕을’ 하면 공회에 잡혀가고 ‘미련한 놈’이라 하면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셨다. 미련한 놈? 내 일상의 기준으로는 그 정도는 큰 욕도 아닌 듯한데 매우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형제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형제는 피를 나눈 육신적 형제와 믿음 안에 맺어진 영적 형제가 있으리라. 육신적 형제든 영적 형제든 화목한 관계가 언제나 지속 되면 무슨 문제가 있으랴마는 내 경우만 보더라도 육신적 형제인 동생과는 한때 원수 못지않은 갈등이 있었고 지금 교적을 둔 교회 내에도 성도들 간 적잖은 다툼이 일어나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당연히 분노와 심한 말까지 서슴없이 오간다. 주님은 이런 불화와 원망의 문제가 있으면 예배에 앞서 먼저 ‘화해’할 것을 강하게 권고하시는 것이다. 마음에 ‘분노’를 지니고 드리는 예배는 경건할 수 없고 청결하지 못하여 상달이 안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오직 형제는 ‘사랑’의 대상이다! 아멘. 2021-11-20
    • G.Q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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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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