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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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만큼 생전에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가 사후에 그렇게 많은 조명을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고흐는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에 있는 한 마을의 개신교 목사의 육 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외톨이 성향을 빼면 별로 눈에 띌게 없는 소년이었다.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했으나 졸업을 하지 않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그는 1879년 벨기에의 가난한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가서 광부들에게 선교를 했다. 그는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파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비참한 생활에 충격을 받고 그 자신도 갱으로 내려가서 일을 했다. 그곳에서는 남자만 아니라 여자와 아이들도 일주일에 엿새 동안 하루 12시간씩 중노동을 했다. 고흐는 교단에서 지원받는 자신의 쥐꼬리만한 생활비 대부분을 이들에게 썼다. 그는 누더기를 걸친 채 땅 아래와 땅 위에서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잘 사는 완전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부르짖었다.
 
고흐의 이런 행동은 교단의 반감을 샀다. 교단은 그를 해고했다. 그러나 고흐는 보리나주에 일 년을 더 머물렀다. 그의 생활은 굶주림과 좌절감으로 파멸 직전까지 갔다. 그는 삶의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다. 나는 어디든 쓸모가 있을 것이다. 내 속에서는 무언가 꿈틀거린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고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보리나주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스물일곱 나이로 아직 10년의 여생이 남아 있던 시점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는 연필과 숯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베꼈고, 교재를 샀고, 잿빛 하늘 아래 검은 석탄 자루를 질질 끄는 광부들을 스케치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이 깊은 절망의 상황에서 생명의 활기가 다시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이제 여기서 내 모든 게 바뀌고 있어.
 
고흐의 그림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최초의 걸작으로 꼽히는 《감자 먹는 사람들》(1885)도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다. 그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 어려움들을 겪었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만을 그리기 위해 1886년 봄 파리로 갔다.
 
그러나 1888년 2월 19일, 반 고흐는 2년에 걸친 파리 생활을 접고 남쪽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인상파 화가들의 최신 경향을 배우기 위해 찾아온 파리였지만, 워낙 극단적인 그의 성격을 받아들여 주는 화가들은 거의 없었다. 주변의 몰이해에 지치고 낙담한 화가는 가방 하나만을 든 채 무작정 파리를 떠났다. 하루를 꼬박 기차에서 보내고 이튿날 그가 내린 곳은 지중해가 멀지 않은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아를이었다.
 
반 고흐가 처음 아를에 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마을은 차가운 겨울 대기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나 3월이 되어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자 과수원의 꽃나무들이 마법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반 고흐는 새로운 의욕과 희망에 부풀어서 꽃나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3월 24일과 4월 21일 사이 그가 완성한 꽃나무 그림만 열네 점에 이른다. 그는 별안간 약동하며 피어나는 온갖 색채의 향연에서 생명의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출하는 생명력을 힘찬 터치로 캔버스에 옮기며 새삼 살아 있다는 기쁨에 충만했으리라. 그는 서른일곱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지 10년 동안에 8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살아있을 때 그의 그림이 팔린 것은 단 한 점뿐이었다.
 
고흐가 죽기 직전 한 비평가가 미술잡지에 고흐의 그림에 대해 처음으로 그를 가리켜 “환상적인 에너지와 격정적인 도취”를 보여 준 탁월한 외톨이 화가로 격찬했다. 그러나 고흐는 이 사실도 모르고 죽었다. 고흐는 사후 40년이 지난 1930년부터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해서 오늘날에는 그의 전시회장만큼 북적거리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가 그림을 그리던 아를에서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진 티셔츠와 넥타이와 볼펜 등이 팔리고 있고, 그가 묻힌 오베르 마을의 묘지는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바울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임하는 구원의 순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우리를 그의 자녀가 되도록 예정하시고,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그리고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라고 했을 때 그 부르심이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일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 사람들을 예정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 부르심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전 1:9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의 행위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을 ‘유효한 소명’ 즉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한다.
 
오늘 아침 총회장의 눈총을 받는 교단의 사설 신문들을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부활절 하루 전이고 고난주간 마지막 날인 4월 4일 토요일 총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서울 송파구 가락동 작은 상가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제99총회 본부직제 및 구조조정 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이고 총회 재판국의 실세인 허활민 목사의 주신교회 위임목사 예식 순서를 맡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간 맡고 있던 대구 외진 곳의 호렙산 교회는 사임하고 새로이 서울의 주신교회로 청빙을 받은 모양이다.
 
허활민 목사의 주신교회의 위임목사로서의 ‘유효한 소명’ 즉 ‘효력 있는 부르심’을 기리기 위해 총회장 백남선, 부총회장 박무용 등의 촌음을 쪼개 쓸 정도로 바쁜 사람들이 광주와 대구 등지에서 부활절 하루 전 고난주간 마지막 날 서울로 달려왔다. 도저히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은 50여개의 화환들을 보내 고난주간의 위임예식을 빛내 준 모양이다.
 
사설 언론에 보니 박무용 목사(부총회장)가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의 위임목사 허활민에게 이런 권면을 했다고 한다.
 
“신앙 명문가 출신이고, 연륜 있는 목사이므로 완숙하고 영글어지는 목회를 하고 헛되지 않은 수고로 아름다운 보상이 있기를 바란다.”
 
2015-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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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사 반 고흐와 위임목사 허활민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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