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더굳뉴스0스티브잡스4-수정-web.jpg
 
더굳뉴스0스티브잡스6-수정-web.jpg
 

'슬럼독 밀리어네어' 대니 보일 감독, '소셜 네트워크' 아론 소킨 각본, 마이클 패스벤더 & 케이트 윈슬렛 주연으로 기대를 모으는 영화 '스티브 잡스'가 오는 10월 9일 북미 개봉을 확정 지으며, 티저 예고편을 5월 18일 전격 공개했다. 티저 예고편의 목적은 고객에게 영화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고 단순히 영화가 곧 개봉될 예정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티저 광고(Teaser廣告)는 요소를 고객에게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관심을 끌려고 하는 상업 광고의 한 방법이다.

이번 예고편에서는 "당신은 프로그램 개발 못 해. 엔지니어가 아니잖소"라는 남자의 말에 "연주자들은 악기를 연주한다. 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 난 차고에 앉아 미래를 창조했소"라는 스티브 잡스(마이클 패스벤더)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리고 예고편 영상은 "그 누구도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라는 말로 끝난다.

이어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연단으로 올라 청중을 바라보는 잡스의 모습이 그려진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바꿔라. 사람은 애초부터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래서 문제를 더 키우는 경향이 있다. 자기 자신을 냉철한 자세에서 바라볼 때 문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쟁회사였던 IBM이 '애플은 썩은 사과(애플)'이란 제목으로 기사를 내자 애플은 다음 날 '애플은 썩은 부분을 도려낸 사과'라고 기사를 냈고, 이때부터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과를 누군가 한 입 베어 문 듯한 그림의 애플 회사 마크가 만들어졌다.

2005년 아직 건강할 때 스티브 잡스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 졸업식에서 세계를 감동시킨 자신의 모든 것이 담긴 연설을 했다.

오늘 저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학의 한 곳을 졸업하면서 새 출발을 하는 여러분들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이 제가 대학 졸업식이라는 곳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우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 인생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그저 세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점(點)을 잇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리드 대학이라는 곳을 첫 6개월 다닌 후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 동안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완전히 자퇴를 했습니다. 제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야기는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제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는데, 저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생모는 제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부부에게 입양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났을 때 절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꿔,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의 양부모님은 한밤중에 “우리가 예기치 않은 사내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원하느냐”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흔쾌히 입양을 수락하셨습니다. 저의 생모는 나중에야 양어머니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의 생모는 이런 이유로 최종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님이 저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저는 정말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시에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평범한 노동자였던 저의 양부모님은 저축한 모든 돈을 제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저는 그만한 돈을 쓰는 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삶에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 데 어떤 도움을 줄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저의 부모님은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놓은 모든 돈을 학비로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제가 호기심과 직관을 따라서 한 일들은 나중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큰 가치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다녔던 리드대학은 그 당시 미국에서 최고의 서체 교육 기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캠퍼스 전체를 통해 모든 포스터, 모든 표지물들은 손으로 그려진 아름다운 손글씨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정규과목들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글자체들을 어떻게 만드는지를 배워 보려고 서체과목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세리프나 산세리프 활자체를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체를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것은 과학이 알아내지 못하는,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매료되었습니다. 당시 저에겐 이런 모든 것이 제 삶에 실제로 응용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최초의 매킨토시 컴퓨터를 만들 때 그 모든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맥 컴퓨터는 아름다운 글자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가 되었습니다…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잇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되돌아 볼 때 그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점을 이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은 지금 잇는 점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의 내면, 운명, 인생, 카르마, 그 무엇이든지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접근법은 저를 결코 낙담시키지 않았고, 제 삶의 모든 변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저의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이른 시기에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한 행운아였습니다. 우즈와 저는 애플을 우리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애플은, 우리 둘만의 차고에서 20억 달러에다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985년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해고를 당할 수 있겠느냐고요?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잘 맞는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잡스는 애플의 성장을 위해 펩시 사장인 존 스컬리를 애플에 영입할 때, 대기업의 사장자리를 버리고 신생기업으로 가기를 망설이던 스컬리에게 "인생 끝날 때까지 설탕물을 팔겠나, 나한테 와서 세상을 바꾸겠나?"라고 하자 존 스컬리는 망설임 없이 애플로 이적했다고 한다.) 첫해는 그럭저럭 잘 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미래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내부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회사 이사회는 그를 지지했고, 저는 서른 살이 된 해에 그렇게 쫓겨났습니다…저는 공식적으로 실패한 사람이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 맘속에 무언가가 천천히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을 꺾지 못했습니다. 저는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저의 일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새롭게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일은 저에게 일어날 수 있었던 일 중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제가 성공의 중압감을 벗어나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을 되찾게 해줬고,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들어갈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이후 5년 동안 저는 NeXT, 그리고 Pixar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만들었고, 지금의 제 처가 된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로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놀랍게도 애플은 넥스트를 사들였고 저는 애플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넥스트에서 개발한 기술은 애플의 현재 르네상스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로렌과 저는 함께 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저가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 가운데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쓰디쓴 약이었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란 때로 여러분들을 고통스럽게 하지만, 신념을 잃지 말기 바랍니다. 저를 이끌어간 유일한 힘은, 제가 하는 일을 사랑했다는 것에서부터 나왔다고 믿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매일을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 당신은 대부분 옳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저는 그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후 33년 동안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제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는 것을 하게 될까?”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그 답이 ‘아니오’라고 나온다면, 저는 어떤 것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제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약 1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30분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췌장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이것이 치료가 거의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라면서 제가 길어봐야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집으로 가서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해 줘야 하는 말을 단 몇 달 안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임종 시 가족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모든 것을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습니다. 그날 저녁 늦게 저는 목구멍을 통해 내시경을 넣는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세포를 췌장에서 떼어내 조사를 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나중에 아내가 말해 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 밝혀져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건강해졌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래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그는 자신의 모든 걸 이 책에 불어넣었습니다. 그 책이 나온 게 1960년대로,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도 PC 출판도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은 타자기와 가위, 폴라로이드 사진들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종이책 형태의 구글 같은 것이었는데, 구글이 나타나기 35년 전의 일입니다.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이 책을 여러 번 개정했고, 수명이 다할 때쯤에야 최종판을 냈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의 나이 때입니다. 그 최종판의 뒷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요.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을 공동 창업하고, 애플 2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를 대중화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그림으로 된 화면 위의 물체나 틀, 색상과 같은 그래픽 요소들을 어떠한 기능과 용도를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사용자를 위한 GUI(그래픽 사용자 접속기:graphical user interface)와 마우스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내다보고 애플 리사와 매킨토시에서 이 기술을 도입했고, 1985년 경영분쟁으로 애플에서 나온 이후 NeXT 컴퓨터를 창업하여 새로운 개념의 운영 체제를 개발했고, 1997년에는 임시 CEO로 애플을 다시 이끌게 된 이후 다시금 애플을 혁신해 2001년 아이팟을 출시하여 음악 산업 전체를 뒤바꾸어 놓았고, 2007년 아이폰 을 출시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을 바꾸어 놓았고, 그리고 2010년 아이패드를 출시함으로써 포스트PC 시대를 열었던 스티븐 폴 스티브 잡스(Steven Paul "Steve" Jobs, 1955년 2월 24일 ~ 2011년 10월 5일)는 2011년 10월 5일 56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스티브 잡스의 사망에 대해 애플은 공식성명을 냈다.

“애플은 명확한 비전과 창의성을 지닌 천재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정말 놀라웠던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스티브와 함께 일하는 행운을 누렸던 저희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늘 영감을 주는 멘토였던 그를 잃었습니다. 이제 스티브는 오직 그만이 만들 수 있었던 회사를 남기고 떠났으며, 그의 정신은 애플의 근간이 되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이룬 사람이었다.

날마다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면, 언젠가 당신은 아주 확실하게 바른 사람이 될 것이다(If you live each day as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SAM_4212-web.jpg
 
SAM_9196-web.jpg
 

스티브 잡스 같은 인생 여정을 사는 목사가 있다. 전병욱 목사(田炳旭, 1963년 ~ )다. 그는 총신대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다시 재수해 연세대 경영학과를 입학해 졸업했다. 목사가 되라는 할아버지의 유언과 달리 그의 아버지는 장로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은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면의 꿈틀거리는 소명 의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한 갈망을 접고 목사가 되기 위해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총신 대학원 재학 때 신반포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그는 7년을 재직하는 가운데 50여 명의 대학부를 500여 명으로 부흥시켰다. 그는 그 교회에서 이화여대 사범대 출신의 부인도 만났다.

그런 그를 눈여겨 본 삼일교회 당회는 후임 목사 청빙을 놓고 어려움을 겪던 차에 당시 신반포교회의 부목사로 청년 목회의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전병욱 목사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54년 세워진 삼일교회는 한때 용산 일대에서 교회당을 가진 어엿한 교회였다. 그러나 1976년 7월 16일 김영규 목사가 2대 위임 목사로 부임한 이후 90년대 들어 출석교인 80여 명의 약한 교회가 되었다. 그러다 김영규 목사가 목회보다 칼빈신학교에 전념하게 되어 1992년 사임하자 담임목사마저 1년 이상 공석이어 교회는 더욱 어려웠다.

1993년 12월 25일 그의 나이 31세 때 어려운 삼일교회의 담임이 된 전병욱 목사는 부임 당시 80여 명에 불과했던 삼일교회의 예배 참석자 수를 2008년 10월 기준으로 1만 6천여 명까지 성장시켰다. 15년 만에 200배로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늘어난 교회 출석자들 중 청년층의 비율이 높았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숫자가 줄어든 대한민국 개신교계 청년층 목회의 선두주자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10년에는 2만 3천여 명까지 늘어나고 특히 20~30대 청년층이 전체 신자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젊은 교회’로 우뚝 섰다. 세계에서 청년이 제일 많이 모이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 복음을 제일 열심히 전하는 복음으로 활활 불타는 교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전병욱 목사는 목회에 있어서 모든 일에 선두에서 사도 바울처럼 먼저 모범을 보였고 교회 재정과 행정에 맑은 투명성을 실천했다.

그는 헌금의 절반 이상을 선교와 구제비용으로 사용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는 한 달 100여 권의 책 구매를 하고 카니발 승용차를 타고 설교 준비와 목회 행정에 지치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호사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는 1년 100회 이상의 집회 강사 사례비도 교회에 전액 헌금했다. 그는 전국 미자립 1000교회에 매월 100만 원씩 후원을 위한 저수지 교회 1000억 기금 마련을 위해 단돈 10원도 아끼고 투명하게 처리했다. 그는 교회를 사임하고 홀연히 떠나는 2010년 12월 21일까지 헌금만으로 마련된 현금 252억 원이 교회 통장에 예금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고 자신의 청춘을 바친 교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요즘 문제 교회의 관행과는 전혀 다르게 교회세력 간의 갈등이나 재정적 다툼과 협상을 하지 않았다.

칩거하며 가족과 친척 30여 명이 모이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숙과 회개와 기도와 묵상으로 보낸 지 1년 7개월이 지난 2012년 6월 17일 전병욱 목사는 홍익대학교 캠퍼스 근처 마포구 상수동 지하철역에서 가까운 건물 2층에 홍대 근처의 새로운 교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으로 홍대새교회라는 이름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것은 그의 메시지를 사모하는 교인들의 열망을 외면할 수 없고 목자가 없이 떠도는 그들의 안타까움을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100여 명으로 시작한 홍대새교회가 2년여에 2300명까지 성장했다가 작년 10월부터 느닷없는 삼일교회와 외부 불순세력의 준동(蠢動)에 15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삼일교회 안정과 성장을 위해 사임한 전병욱 목사의 바람과는 다르게 2012년의 2만 3천여 명의 삼일교회가 현재는 5천 명에서 6천 명 사이의 교인들이 회집한다고 한다. 주일날 삼일교회 근처를 지나다보면 전병욱 목사 당시의 활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 여파로 근처의 집값도 떨어졌다고 한다.

전병욱 목사는 말한다.

“제가 교회 이름을 홍대새교회로 정한 것은 정말 새 피조물의 새로운 교회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삼일교회 교인들이 저희 교회로 오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어떤 삼일교회 교인한테도 홍대새교회로 오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그 사실을 고발하는 교인이 나와야 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지금 같이 있는 부목사도 그 교회에서 쫓겨나 갈 데가 없어 같이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정말 잘 되고 교회가 안정되고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청춘을 바친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엉뚱한 교회가 덕을 보고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게다가 왜 요즘 복음의 은혜가 아닌 율법주의로 떠드는 사람들의 말에 교회가 귀를 기울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으로 용서와 회복이 있어야 하는데 율법으로 정죄와 분열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교회를 해보니 교인 1000명만 넘으면 그 하는 일이 1000명이 하는 일이나 3000명이 하는 일이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설교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도 죽을 쑬 때가 있습니다. 준비를 해도 설교가 그렇게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취미가 자전거 타기가 아니라 독서입니다. 자전거 타기나 도보는 독서와 설교준비와 기도로 힘들 때 쉬고 재충전하기 위해 하는 겁니다. 저도 이제는 자연적인 나이가 들어 힘이 예전만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저를 보고 성숙해졌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50이 넘으니 늙은 겁니다.”

세계의 문화를 바꾸는 스티브 잡스 같은 경영의 직관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20~30년 동안 쌓인 문제의 정의와 해결에 대한 경험의 축적에서 스티브잡스가 가지고 있었던 위대한 경영의 직관이 나올 수 있다. 결국 적극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도전의 경험이 쌓인 50대 경영자의 사고에서 위대한 직관이 나올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해결의 경험을 쌓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에게는 인내가 중요하다. 스티브 잡스는 20대부터 애플을 시작으로 중간에 경영권을 빼앗기기도 했지만 넥스트컴퓨터, 픽사 등을 설립하며 도전의 경험을 멈추지 않았고, 다시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잡스는 인류의 문화를 변화시킨 위대한 제품인 아이폰을 그의 직관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직관의 소유자는 놀랍게도 우리의 역사 속에도 있다.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장군이 당시 다른 무관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나가며 이를 기록하는 습관이었다. 당대의 라이벌이라 불리웠던 원균은 이러한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과 용맹에만 의존한 원균 장군과 20년 이상의 세월을 인내를 가지고 끊임없이 문제 정의와 해결의 경험을 쌓은 이순신 장군의 직관의 차이는 임진왜란에서 전패와 전승이라는 기록으로 증명됐다.

인내를 통해 획득한 문제 해결의 많은 경험은 직관을 낳는다. 다시 말해 문제해결의 경험이 직관을 만들어내고 경험을 쌓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 인내를 통해 사람을 얻어 리더십을 곤고히 할 수 있고 또 그릇을 키워 승자가 되기 위한 시간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이순신 모두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성공의 원칙은 똑같았다. 전병욱 목사 역시 이제 직관을 발휘할 나이 50대에 이르렀다. 스티브 잡스는 쫓겨난 애플에 복귀해 애플을 세계 제일의 회사로 키웠다. 전병욱 목사는 사임하고 떠난 삼일교회로 다시 돌아갈 일은 없지만 그의 신앙과 인내로 다져진 직관과 설교 능력은 스티브 잡스처럼 새로운 목회 성공의 업적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볼 수 있듯이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단지 복음 전파의 사명만을 위해 살 뿐입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2015-06-19


태그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스티브 잡스 vs 전병욱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