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길자연과 김영우의 취임선서-웹.jpg
 

일만 교회의 성직자를 배출하는 
총신 총장 길자연 취임 사태 
배후 김영우

나는 2013년 12월 30일자 기독신문에 실린 두 사람의 선서 모습이 철부지 얘들이 하는 하이파이브를 하는 줄 착각했다. 감히 하나님과 총회장이 안 계신 자리에서 지들끼리 하는 유구한 역사의 총신 총장 취임식에서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인 줄 알았다. 총회 기관지 기독신문에 실린 사진이 그런 걸 다 찍다니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방학이라 학생도 없고 개혁주의자들이라 자처하는 교수들도 없는 자리에서 총장 취임식을 치렀다. 자리와 감투 차지에 왕성한 왕성교회 원로 길자연 씨는 교단 신학교총회를 대표하는 총회장도 안중에 없는 김영우 씨 앞에서 총장 선서를 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총회장이라는 사람이 사당동 법이 있고 대치동 법이 있다고 말할 정도이니 할 말이 없다. 총회장은 ‘우연은 없다’는 제목의 설교를 했는데 정말 절묘한 제목이었다. 그날 그때 그들이 우연히 길자연 씨를 총장 후보에 추천하고 당선까지 시켰을까. 길자연 씨가 씨를 뿌린 덕에 생긴 제비뽑기 총회장의 수준이란 게 이런 정도니 길자연 씨 얼마나 흐뭇했을까. 그런 판에 길자연 씨 이런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행복하다."

한약 버무리다가 신약 구약 마음대로 뒤섞는 목사 되어 여러 요직을 거쳐 이제 총신대학교 총장이 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제까지도 건강을 챙겼지만 이제는 더 건강을 챙겨야 돼. 코의 진액도 열심히 뽑고 몸에 좋다는 것도 더 열심히 먹어야지. 총회 정년 70도 지났지만 저 꾀돌이 재단이사장 덕분에 총회법을 뭉개고 일반 사학법 적용으로 이 자리에 오르다니. 김영우는 참으로 재주꾼이야. 그러니 서천읍교회도 격주로 내려가 설교하면서도 건재하고 노회도 꽉 쥐고 총대 자리를 유지하니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야. 나는 그 정도까지는 노회나 교회에서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서울에도 총회 소속이 아닌 몇 교회나 더 관리하고 있다니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야. 암 그래야지 그래야 그 역시도 70 넘겨 총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이 은혜를 나도 갚아야지.

신림동 산 언덕에 있던 교회 뒤로 도로가 나고 지하철이 안 들어왔다면 내가 어찌 되었을까. 대합동교단 총회장, 한기총회장, 칼빈대 학장, 총신대 총장이 되고 내 아들에게 그 큰 교회까지 물려주다니 참으로 나는 대단한 사람이야. 암 나는 위대한 사람이야. 아 글쎄 총회장 때 우리 교회에서 군목 파송예배를 드리는데 예배 시간에 늦어도 교인이나 총회 총무 목사나 누구 하나 찍 소리도 못하더라구. 뭐니뭐니해도 돈이 머니 즉 돈이 최고야. 이번에 총장이 되는 힘을 보라지. 전직 총회장들 현직 총회장 다 말이 없고 웃고 축하까지 하잖나. 총회법 그게 무슨 대수야. 그거 지키는 자들은 돈이 없는 자들이야. 게다가 돈이 돈을 벌어준다지 않아. 총장 연봉이 얼마며 주무를 수 있는 돈과 처리할 수 있는 이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그 잘난 총신 교수들 내 앞에서 빌빌 거리는 모습을 날마다 볼텐데. 아 정말 오래 살아야 될텐데 그런데 누가 나를 금권 선거했다고 검찰이나 경찰에 고발하면 어쩌지. 무슨 그럴 일이 있겠어. 그래도 누가 알아. 칼빈대에서처럼 웬 미친놈이 총회법 어겼다고 총장직무정지 소송 걸면 어쩌지. 좀 시끄럽겠네 아무렴 어때 그때그때 헤쳐나가야지. 그 시절의 대제사장들처럼 말이야. 거저 목사 권위는 사람들 무릎을 꿇게 하는 거야. 목사 참 좋은 거야 회개하자며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 꿇으라 하면 아 글쎄 이명박 대통령도 배길 재간이 없더라고. 목사 부흥사 되어 지내던 시절 나는 신 그 차체였어. 한약이나 버무리던 내가 이 사당 총신 나와 이제-총장이 되다니 아 위대한 길자연이여 그리고 꾀돌이 김영우 정말 고맙다. 내 이번에도 인사는 좀 했다만 정말이지 이 은혜 너한테 꼭 갚아주마. 

그런데 정작 이 신학생들에는 뭘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나 걱정할 거 뭐 있어 뭐니뭐니 해도 머니 즉 돈이 제일이고 건강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거야. 그리고 그 살아 있는 역사와 증거를 몸소 보여 주면 되는 거지. 신학교는 뭐 별거야. 나도 이 신학교 나와 이렇게 총장까지 됐는데. 내 아들은 큰 교회 물려받아 떵떵거리고 살고 있는데 이만한 본보기면 신학생들에게 큰바위 얼굴 감 아니겠어. 그리고 내가 지들 선배아니겠냐고. 성경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건 구약학이나 신약학 다루는 선생들 몫이지. 나야 뭐 한약 버무리던 사람인데. 

돈의 문제

총회 기관지 기독신문은 길자연 씨 취임예배가 총신 운영이사장 전대웅의 축도로 마쳤다고 전했다. 그리고 아쉬운 듯 길자연 취임예배는 시종 축하와 박수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는 팽팽한 긴장도 흘렀다고 살짝 흘렸다. 

우리의 문제는 리더가 없다는 것에 있지 않고 리더가 리더를 기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앞의 리더와 뒤의 리더 사이에 연속성이 없는 까닭에 교훈이 시원하게 전승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자 진리의 후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는 리더가 리더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큰 리더인 사도 바울은 신진 리더인 디모데에게 목회 일선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것은 목회가 별 것 아닌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머리말을 시작하는 합동신학대학교대학원 총장 조병수 박사의 저서 리더가 리더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제3장 사람이 되라는 장을 펼쳤다. 거기에 그의 신혼초기 독일에서 겪은 체험을 빌어 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는 사람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짧은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아마도 이 말씀을 활쏘기에 비유한다면 과녁의 한가운데를 관통한 것이리라. 사도 바울은 당대의 교회뿐 아니라 미래의 교회가 봉착하게 될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다보고 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가 돈을 사랑하면 얼마나 무서운 부작용이 일어나는 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돈맛을 본 목사는 성경에서 재미를 얻지 못한다. 이런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의 구석구석에 들어 있는 영롱한 진주 같은 진리를 캐내어 가르치는 것보다 성도들의 호주머니를 열어 돈을 끄집어내기에 적합한 구절들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다. 이런 목사는 기도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기도를 해도 그 머릿속에서 돈 문제를 지우지 못한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런 목사의 기도에서 돈에 관한 제목이 간구의 전부이다. 

돈을 사랑하는 목사에게는 목회가 돈과의 싸움이 된다…

돈을 사랑하는 목사는 영혼의 문제에 관심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이런 목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더 이상 인생을 살 수 없다며 찾아 나온 성도들이 가련한 영혼으로 보이지 않고 돈뭉치로 환산되어 보인다. 

과연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쪼개지는 여러 가지 외면적인 원인 뒤에 실제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돈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특히 이 근본적인 원인의 밑바닥에는 돈에 대한 목사의 야릇한 욕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있을까? 사회를 유지시키는 수단으로서 통화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돈에다 모든 것을 거는 집착심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딤전 6:10). 오죽하면 주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두 주인으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전대를 가지지 말라는 엄한 말씀까지 주셨겠는가?

목사는 돈에 대하여 심정적으로 거리가 멀수록 좋다. 목사는 재물에 가까우면 안 되고, 교회는 은행에 가까우면 안 된다. 목사가 재물에 눈이 밝으면 영안이 닫히고, 교회가 은행에서 힘을 빌리면 영력을 잃는다. 목사의 능력은 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멀리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한마디의 말에 엘리사의 능력이 들어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냐” 왕하 5:26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1980년 총신에서 갈려나와 세워진 합신은 칼빈주의의 표어를 따라 말씀이 진행하는 데서 진행하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 그러나 총신은 돈이 진행하는 데서 진행하고 돈이 멈추는 데서 멈추는 돈 교환하는 환전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2014-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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