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껄껄껄! 깔깔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웃을까. 중국 사람들은 하하(哈哈) 허허(呵呵) 웃는다. 일본에선 쾌활하게 웃는 소리를 가라카라(からから) 게라게라(げらげら)로 표현한다. 태국은 숫자 ‘55555’로 웃음소리를 나타낸다. 숫자 5를 뜻하는 태국어 발음이 ‘하(haa)’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 표정, 소리에 따라 웃음을 표현하는 말이 많다. 눈웃음, 입 웃음, 코웃음, 목 웃음, 얼굴 웃음, 입술 웃음은 기본이다. 큰소리로 시원하게 웃는 너털웃음, 볼살을 움직여 얼굴 표정을 지으며 웃는 살웃음,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웃는 겉웃음, 여러 사람이 함께 웃는 뭇웃음, 염소처럼 채신없이 웃는 염소웃음엔 독특한 말맛이 있다. 시늉말을 보면 무릎을 탁하고 치게 된다.


상그레·성그레·생그레·싱그레·쌩그레·씽그레는 눈웃음 짓는 모습이다. 입으로는 방그레·방시레·방글방글·방실방실·상긋방긋 생글생글 웃는다. 해죽해죽·쨍긋쨍긋은 얼굴 웃음을 그린다. 어린아이가 귀엽게 웃는 모습인 방글방글은 글자만 봐도 사랑스럽다. 입을 작게 벌리고 소리 없이 예쁘장하게 웃는 모양인 봉싯봉싯 역시 아이의 앙증맞은 표정이 떠올라 크고 환하게 웃는 함박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오후 6시였던가, 국기 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길을 걷다가도 모두들 멈춰서 가슴에 손을 얹었지만, 내 기억 속의 그 장면은 엄숙하다기보다는 살짝 코믹한 것이었다. 애국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표정은 ‘이 노무 거, 언제까지 해야 하나’, 뭐 그런 쪽이었다. 나는 TV 속 태극기 앞의 근엄한 사람들보다 어쩐지 이들이 더 미더웠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 금 모으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때 A니 C니 하는 채널 이름보다 훨씬 나을 성부른 ‘에이 씨∼’ 하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던 그분들이었을 것이다.


국가주의를 대하는 일본인들의 태도는 이보다는 훨씬 진지했다. 코믹한 분위기도 삐딱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진지함이 지나치다 보니 국가와 천황과 나를 동일시하며 무슨 사교 집단처럼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까지 만들어 버렸다. 한국의 유신정권도, 타이완의 계엄정권도, 중국의 공산정권도, 심지어는 북한의 김씨 정권도 이르지 못한 경지다. 아마 북한은 전쟁 전 일본 국가주의와 가장 비슷한 체제일 것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북한 체제를 전쟁 전 일본 천황제의 유산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다.


조선시대 ‘백성’이 ‘국가’에 대해 갖는 감각은 그 종류도 강도도 오늘날의 ‘국민’과는 퍽 달랐을 것이다. 근대의 발명품인 국민국가(nation state)는 ‘백성’에게 국가라는 존재를 주입 시키려는 시도를 줄기차게 해왔고 그 결과 ‘국민(nation)’이 형성되었음은 이제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 방법은 국기, 국가, 국경일의 제정, 의무교육, 징병제 등 비슷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나라마다 다양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인 1870년대에는 취학률이 25∼50%에 머물렀지만, 1890년대에는 90%를 넘어섰고, 러일전쟁 무렵인 1905년에는 남아의 98%, 여아의 93%가 취학했다. 이런 영향이 그토록 단기간 내에 국가가 국민 속에 스며들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맞다. 허나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쌓아왔다고 하긴 어렵다. 광복 후 그저 미국 따라 받아들였을 뿐이라는 것이 솔직한 말일 것이다. 그 후 80년간 민주주의는 마치 기독교의 ‘교의(敎義 Dogma)’처럼 그저 떠받들어졌을 뿐, 지적 탐구와 비판의 과녁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4·19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겪었고 6·3사태 등을 접하면서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깊이 관여하고 1966년 서울대 졸업 후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운동에 동참한 김지하(金芝河, 1941년 2월 4일~2022년 5월 8일)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긴 했다.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그의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것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게 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을 반대한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되어 4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1970년 정치인과 재벌 관계의 부패와 비리를 질타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의 연루자로 지목 체포되고 긴급조치 4호 위반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해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김지하의 구명을 위해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미국의 노엄 촘스키 등 해외 문인 및 지식인들과 연대해 김지하 시인에 대한 '사법 살인'을 막자고 나섰고 그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75년 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대의정치란 여러 소인의 가슴속(胸腹)에 있는 ‘사리사욕’의 덩어리를 국회와 총회라는 큰 냄비에서 끓이고 다시 끓이듯 숙고와 숙의(熟議)를 거듭해 공지를 도출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제오늘의 민주화운동 세력이라는 민주당이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총회 행태를 보면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맨정신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신학·철학·정치학·역사학적으로 들여다본 적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한국보다 반세기 이상 빨리 서구 대의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일본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자유, 헌법, 정당과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수용 범위를 정하는 지적 고투를 거쳐야 했다.


정당들은 단순히 정치적 견해를 같이하는 것을 넘어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며, 김종혁 목사같이 진리를 중시하는 계파와 같은 정당이 국회를 조직하고 그들이 ‘토의’를 거듭할 때 공지에 다다를 수 있다. 진정한 당은 “다른 당에 옳은 바가 있음을 알아차린 때는 갑자기 뜻을 고쳐 이를 따라도 조금도 마음에 개의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의(議·토의)’가 사(私)를 공(公)으로 바꾸는 작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08회 총회에서 오정호 총회장의 경우에서 보듯 다수결이 공지(公志)를 도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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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총회장 오정호)는 신년하례회를 1월 4일 총회회관에서 거행하면서 이런 설교도 했다고 기독신문은 전했다.


오정호 총회장은 총회 개혁의 시발점이 될 선관위 뇌물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오 총회장은 “선관위 뇌물 사건이 깨끗하게 끝나지 않았다. 회개할 줄 모르는 목사와 장로는 가짜 목사, 가짜 장로다. 잘못했으면 회개해야 한다. 왜 회개한다는 이 한마디를 못 하는가. 왜 우리 총회가 돈 문제로 시달려야 하느냐.”


그는 신년사를 통해 이런 말도 했다.


"올해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총선이 실시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먼저 혈연, 지연, 학연의 관행을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하여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주님 앞에서 열어갑시다.


사람도, 이념도, 환경도 가변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영원불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십니다. 주님과 매 순간 동행하는 올 한해로 가꾸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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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2024-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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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과 오정호의 자유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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