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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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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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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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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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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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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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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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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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 4월 총선, 유권자가 세상 바꿀 수 있나
    시인이 말했듯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우한코로나 사태로 국가적 재난 가운데 빠져 있다. 국가적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경제는 기력을 잃고 바닥을 친지 오래고 맨땅에 헤딩하고 있으며, 안보는 불안, 외교는 왕따이다. 거기에 방역실패, 마스크 대란을 보면 고민된다. 국민 대다수가 마스크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 ‘약국 순례'를 하며 거리를 헤매고 있다. 대구의 눈물과 부부가 코로나에 걸려 남편이 사망했지만 장례를 치루지 못한 아내의 참담함, 마스크 하나도 제대로 살 수 없는 나라, 이런 정치 리더십으로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잡을 수 있을까. 국민들은 일상이 뒤틀리고 경제적 피해가 불어나는 고통의 터널에 갇혔다.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큰 고통이다. 집권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투쟁의 3류 정치, ‘정의’니 ‘공정’이니 ‘자유’니 하는 말은 이미 오래전 언어의 유희가 되었다. 21대 국회의원선거를 앞두고 고민이 많아진다. 배신과 협잡의 정치판을 보며 꼭 찍어야 하는 정당도, 꼭 찍고 싶은 후보자도 찾기가 쉽지 않아서이다. 4월 총선은 21대 입법부를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선거다. 한 표로 4년 뒤 국가의 미래가 새롭게 바뀔 수도 있고 반대로 뒤쳐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번 총선의 선택기준은 분명 ‘코로나 리더십’으로, 재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것과 반드시 물갈이나 불판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무서운 줄 모르는 정치에 찌든 직업적 정치인들을 가능하다면 퇴출시켜야 한다. 코메디 같은 정치판을 바꿔야 한다. 선거 때면 나타나 명함 돌리는 선거꾼이나 말 잘하는 아나운서, 목소리 큰 사람 뽑는 선거가 아니다. 총선은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시민의 대변자를 뽑는 것이다. 그래서 ‘중앙정치꾼’이 아닌 주민들이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생활 밀착형’으로 바꿔야 한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온 몸을 던지며 대구로 달려가 의료봉사를 한 어느 정치인을 보며 감동한 바 있다. 그와 같이 생명을 살리려 한 몸을 던져 헌신한 의료진의 봉사와 보건당국의 역할을 기억한다. 그들은 국민의 영웅이었다. 그들의 헌신으로 겨우 버티는 국가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기득권을 누리며 권력의 맛에 찌든 정치인들의 탁상공론도 지켜보았다. 구태 정치인들의 직권남용, 국가 재난 앞에서 편가르기 패싸움 정치가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지 일깨워 주었다. ‘코로나 민심’ 앞에서 정당의 정책도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 투표 전 후보자의 인물, 공약, 삶의 과정 등을 꼼꼼히 살펴보고 한 표를 행사 할 작정이지만 가상현실 같은 상황이다. 매번 선거에서 공약이나 정책을 보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것 같고 지역이 천지가 개벽할 것 같아서 귀가 번쩍이고 마음이 설레이지만 선거가 끝나면 금새 아무 일 없었듯이 빈 공(空)약이 될 것이다. 각 정당의 공천은 그들만의 리그인가. 공천관리위원회가 후보자를 최소한 걸러냈다고 하지만, 지역유권자와의 소통이나 공감 없는 공천이다. 여론조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최종선택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과 병역, 사생활, 막말 등도 검증하고 선택해야겠지만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경제위기 극복 대안 제시 능력을 더 높이 주목하고 싶다. 후보자들이 마스크 사기 위하여 줄 서 본 적이 있는가. 한국교회나 ‘한국교회유권자연합’이 공명선거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성도들을 지도하는 제 기능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특정 정당 지지는 곤란하다. 훌륭한 인물이 선출되길 바라는 기도, 기독교적 세계관과 관점으로 정치보기,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 설교, 또 하나님보다 정치인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마음 지키기, 가짜뉴스 생산하거나 유포하는 행위 자제, 선거결과에 대한 승복과 후보자나 당선인의 공약 실천 유무 파악하기 등은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비례후보자들도 주목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언론이나 신앙의 자유까지 제한되는 상황에서, ‘예배 중단’이나 ‘교회 폐쇄’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 같은 오만한 후보나 정치권에 줄서기보다는 해당 후보의 정책과 가치관을 검증하고 선택하도록 지역사회를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쏟아내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 찬성, 반대하는 발언이 선거에선 경계의 대상이다. "우파 지도자가 당선돼야"라고 설교한 목사 12명이 고발당한 바 있다. 매주 칼럼에 독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메일이나 SNS 문자로, 온.오프라인 신문 지면에서 칼럼을 읽는 이가 많을 땐 25만 명을 넘어서다 보니 반응이 즉각 적이다. 더 신중해지고 어느 교수처럼 ‘민주당 빼고’ 식의 정치적 칼럼을 쓰지는 못한다. 사실 4월 투표도 잔인하다. 전염병의 한복판에서 치러진다. 전혀 소통없는 선거, 후보가 누구인지, 투표소를 가야 할지, 줄서기도 부담스럽고 투표소 안에 들어가기도 꺼림직하다. 투표율이 폭락할 가능성이 높다. 투표율이 낮으면 표의 왜곡 현상이 생긴다. 민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대면접촉이 없는 선거를 치루니 선거가 사이버 게임같이 가상현실이 된다. 오랜 정치 생활을 하였거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으면 당연히 당선된다고 착각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투표 독려로 투표율을 높여야겠지만, 코로나 위험으로부터 유권자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도 제시해야 한다. 투표소의 방역이나 소독과 더불어 현장 투표자 전원에게 마스크를 지급하거나, 투표소를 최대한 늘려 분산시키는 방법도 고려돼야 한다. 가능하다면 교회가 주민들의 투표소로 제공되었으면 한다. 코로나로 느끼는 지금의 참담한 현실과 공포를 잊지 말자.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 교회, 교회가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면 유권자로서 바꿔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혁명’이 아니라 ‘투표’로 바꾸는 시스템이다. 한 표가 얼마나 엄중한지, 그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투표’뿐이다. 사실 단 한 표 차이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뀐 사례는 많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결정짓는 것은 ‘투표참여’가 답이다. 지금 이대론 더 이상 안 된다. (사회구조적 모순 앞에) 침묵하지 말고 외쳐라. 분노하라. 저항하라. 그리고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참여하라. 그 어느 때 보다 한 표가 절실하고 중요하다. 표류하는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구할 것인가. 코로나 위기 가운데서도 유권자들이 적극적으로 투표에 임해야 하는 이유다. 한 표가 미래를 결정짓고 세상을 바꾼다. 글쓴이: 이효상 (칼럼리스트/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근대문화진흥 원장/ 한국교회유권자연합 기획위원장) 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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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김종희 칼럼 - 정기노회 연기와 총대 파송 문제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정기노회를 연기하는 노회들이 있다. 법리적으로 노회를 연기하는 것과 또한 노회를 연기하여 선출한 총대의 자격에는 하자가 없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정기노회 연기하여 소집할 수 있다. 각 노회마다 정기노회를 소집하는 날짜가 노회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나 금번 코로나19 사태와 같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노회를 연기하려면 노회 규칙을 잠정하고 연기를 하는데 노회원이 동의(同意)하면 가능하다. 노회가 만든 규칙이기에 노회가 잠정할 수 있다. Ⅱ. 정기노회를 연기하여도 총대 파송에 하자가 없다. ① 헌법정치 제22장 제1조 총회 총대자격 1항 “총회 총대는 총회 전 정기 노회에서 선택할 것인데 총회 개회 6개월 이상을 격하여 택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6개월을 격하여 택하지 못한다는 것는 총회 개회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택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노회를 연기할 때 6개월을 벗어나면 문제가 되지만 6개월 이내가 되므로 하자가 없다. ② 오히려 6개월 전에 총대를 선택하여 놓거나 영구총대를 정해 놓는 것은 위법이다. Ⅲ. 정기노회 연기시한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 ① 헌법 정치 제12장 제2조 총회의 조직에 있어 “총회는 각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와 장로로서 조직하되 목사와 장로는 그 수를 서로 같게 하고 총대는 각 노회 지방의 매 7당회에서 목사 1인, 장로 1인씩 파송하되 노회가 투표 선거하여 개회 2개월 전에 총회 서기에게 송달(送達)하고 차점 순(順)으로 부총대 몇 사람을 정해둔다.”라고 되어 있다. ② 그러므로 총회 개회 2개월 전에는 총대 보고를 총회 서기에게 송달해야 한다. 총회규칙 제7장 제22조 “총회는 매년 9월 3차 주일 후 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규칙에 따르면 올해 총회는 9월 21일(월요일) 오후 2시에 개회해야 한다. 그러면 총대 보고를 7월 21일 전에는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노회를 열어 총대를 선출해야 한다. ③ 그러나 총회 임원이나 선출직 출마자가 있는 경우는 노회를 더 빨리 열어야 한다.(총회 선거규정 제13조 1의 4) “총회 임원 입후보자는 소속교회 당회의 추천을 받아 당해 연도 7월 임시노회에서 본인이 참석하여 추천을 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마시한이 총회선거규정 제4장 제16조에 의하면 “총회임원은 7월 둘째 주일 후 월요일 오후 9시부터 둘째 주 금요일 17시까지 등록한다.”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 기관장은 7월 셋째 주일 후 월요일 9시부터 셋째 주 금요일 17시까지 등록한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7월 임시노회를 열어 출마자를 추천하려면 정기노회는 6월 중으로는 해야 할 것 같다. 올해와 같은 특별한 경우는 정기노회가 늦어지는 만큼 혹 7월 초순에 정기노회가 열린다면 별도의 임시노회를 열지 않고 정기노회에서 출마자들이 추천을 받을 수 있도록 총회 임원회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특단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본다. Ⅳ. 총대 파송에 사문화된 법을 급히 적용할 수 없다. ① 본 교단 총회 안에는 3월에 정기노회를 개최하는 노회들이 있다. 3월 21일 전에 개최되는 노회는 총회 개회 6개월을 격하여 총대를 선출하는 것이 되기에 법에 맞지 않다. 금번에 코로나19 사태로 노회 연기를 검토하며 총대 파송에 문제가 없나 살펴보다가 오히려 3월 노회에서 6개월을 격하여 택하는 것이 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같다. ② 그러나 이 법은 이미 사문화 되어 지금까지 3월 정기노회에서 선출된 총대를 그대로 인정하여 왔다. 계속 그대로 인정하든지 이번 기회에 이 법을 살리기 원한다면 제105회 총회에서 3월 노회를 모두 4월 노회로 변경하여 모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권리와 의무 등과 관련이 있는 법을 제정, 개정, 폐지할 경우는 입법예고가 필요하며 이미 사문화 된 법을 부활하여 시행하고자 할 때도 계도 기간이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③ 예로 경비업법 제7조 “경비업자는 허가받은 경비업무 외의 업무에 경비원을 종사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 제15조 “누구든지 경비원으로 하여금 경비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를 하게 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경비원에게 재활용 쓰레기장 관리, 불법 주차 단속, 택배수령 업무 및 기타 잡무를 고유 업무로 맡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미 정착된 지 오래다. 지금 당장 법대로 어기고 있는 경비업체나 경비원을 처벌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경찰청이 5월까지 계도 기간을 두고 6월 단속을 예고하였다. 같은 맥락으로 이미 사문화되어 있는 법을 갑자기 살려 시행하므로 불이익을 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④ 정치문답조례 제635문에 보면 ‘총회가 개회하기 7개월 이전에는 총대를 정할 수 없다.’라고 하여 7개월까지 기한을 주고 있다. 물론 헌법이 우선이기에 이 조례를 따를 수는 없지만 3월 노회를 하여 총대를 선출한 노회도 7개월을 넘지는 않으므로 참조해 줄 수는 있다 Ⅴ. 결론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노회 연기 개최는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노회를 연기하여 총대를 선출하고 파송하는 것도 문제는 없다. 다만 늦어도 7월 초순까지는 정기노회를 열어야 한다. 선출직에 출마자가 있는 노회는 6월 중에는 정기노회가 열리고 7월에 임시노회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금번에 총대선출 6개월을 격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3월 노회를 여는 노회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해 나온 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사문화된 법을 살리려면 계도 기간을 주고 총회에서 짚은 다음에 법대로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봄 정기노회를 연기하여 여는 만큼 가을 노회와의 간격이 6개월이 안 됨으로 6개월 법리에 어긋나는 사안이 발생할 수 있지만 노회에서 유연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빨리 코로나19가 종식되도록 다 함께 기도해야 한다. 김종희 목사(정치부장역임. 성민교회)202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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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배재군 칼럼 - 이재명 경기지사의 비뚤어진 사고방식
    중국발 우한 폐렴(코로나 바이러스19)으로 인한 전염이 지역으로 확산 될 경우 그 해당 교회에 피해에 따른 보상 및 구상청구권(?)을 청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이 지사의 해당교회에 피해 보상 및 구상청구권 행정명령은 합법적, 합리적, 합당한 조치라고 할 수 없다. 그 이유, 1) 이에 따른 일차적 책임은 중국발 우한 폐렴의 근원지인 중국 정부에 피해 보상 및 구상청구권(?)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국민과 교회를 대표해서 이 지사가 중국 정부에 피해 보상 및 구상청구권(?)을 요청할 의사는 없는가? 2) 중국발 우한 폐렴의 확산 책임은 현 정부에 있지 아니한가? 정부의 잘못된 조치로 인하여 대한민국이 초토화된 사실을 외면하고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가? 3) 정부의 잘못된 판단과 행위로 입게 된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피해자 된 국민(교회)에게 방역 피해 보상 및 구상권 청구 운운하는 행정명령이란 불법, 무법한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이 지사 자신과 정부 관계자들이 책임을 통감하여 자신들의 소유 일부를 청산하여 피해를 보게 된 국민과 교회에 보상할 의지는 없는가? 2020-03-18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동원교회 담임목사 배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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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9
  • 위기 시대 지도자 책임
    총회 기관지 기독신문 기자 박민균은 상대에 사실관계 확인 없이 일방적 허위사실 작성 연 12프로 월 1프로 5900만원 고리 사채업 은급재단 18년 납골당 착취 제100회 총회 제101회 총회 결의에 따른 납골당 합법적 매매 계약 성사18년 총회 적폐 해소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 심각한 명예훼손 다 같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과정이 묘한 결과를 만든다. 합창은 내 목소리만 내서 되는 게 아니다. 각자 템포와 호흡이 다르기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조화로움을 이룰 수 없다. 튀어서도 안 되고 자신 없다고 입만 뻥끗거려서도 안 된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 하나 된 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합창단을 하거나 노래를 같이 부르는 이들이 쉽게 친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물 세계의 늑대 무리를 이끄는 대장 늑대는 이런 합창을 통해 모래알처럼 흩어지려는 마음을 하나로 모은다고 한다. 잘 되는 조직에는 분열을 예방하고 방지하는 나름의 장치가 있다.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게 있다. 그것이 리더다. 총회 지도자들은 마음을 열고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부정과 불의가 득세하는 총회 은급재단은 박상범이나 유장춘이나 소재열 등의 간신 같은 사람들 말만 듣고 자기 확신 즉 편향된 생각을 갖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름 자기 확신이 생긴 겁 많은 총회장이 아주 편향된 생각을 ‘조국’ 사태에 대한 문재인처럼 납골당 매매 계약 건을 처리했다. 그 반증이 2019년 10월 15일자 기독신문 박민균이 취재해 게재한 기사이다. 18여 년 총회 적폐를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가 해소한 납골당 적폐 건을 다시 적폐로 회귀한 고리 사채업자 총회 은급재단 이사회의 10월 14일 회의 관련 기사였다. 104회 총회 파회 후 첫 번째 은급재단 이사회 전체회의가 10월 14일 총회회관에서 열렸다. 신임 이사장 김종준 목사는 사전에 총회본부 담당직원에게 납골당 관련 상황과 소송 진행 과정을 보고받은 듯, 중요한 안건들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결정했다. 현재 은급재단은 3건의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납골당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했다. 패소한 최춘경과 온세교회 김장수가 9월 6일 대법원에 상고(대법원 2019다272046)한 상황이다. 은급재단이 1심과 2심에서 완벽하게 승소했고, 현재 최춘경 측에서 판결을 뒤집을 특별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까지 승소할 가능성이 높다. ... 은급재단 이사들은 재판 상황 보고를 받고 최종 승소할 때까지 계속 소송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아울러 동업계약서를 어기고 납골기 판매금과 관리비를 분배하지 않은 최춘경을 형사고발하는 소송까지 검토해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101회기 은급재단 이사회에서 중단시킨 청산 및 명도 소송도 변호사와 검토해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3년 동안 진행하지 못한 최춘경 관련 안건들을 한꺼번에 처리한 것이다. 이사장 김종준 목사는 “은급재단의 납골당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오늘 결정한 내용을 104회기에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 한편 장부 등 열람허용 가처분 소송을 바탕으로 10월 8일 상임이사 최우식 총무를 비롯해 은급재단 육수복, 유장춘 이사와 이민호 감사,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와 세무법인 티앤티 직원 등 17명이 납골당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예상한 대로 지난 2월 현장조사처럼 용역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막혀 납골당 내부에 진입을 하지 못했다. 은급재단 관계자들에게 고함과 욕설을 하면서 진입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육수복 이사가 강하게 대응을 하면서 물리적 폭력 상황 직전까지 이르렀다... 사무국 관계자는 “법원에서 장부를 열람할 수 있는 기간을 30일 주었다. 계속 납골당 현장조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민균 그 과정을 잘 알지만 표리부동한 유장춘과 육수복의 활약상을 현장 취재 없이 기록한 납골당 기사 말미에 이름을 당당히 밝힌 기독신문 기자 박민균은 이 기사를 상대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 없이 일방적인 허위사실을 썼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해마다 바뀌는 총회장 주재의 추악한 은급재단과 18년 연 12프로 고리와 행정적인 횡포에 시달린 납골당 측과 제100회 총회와 제101회 총회 결의에 따라 합법적 매매 계약을 성사시킨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에 대해 심각한 명예훼손을 했다. 그에 대한 민 형사 상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더하여 김선규 총회장 이후 작금의 은급재단이 얼마나 추악한지 그 일면을 보자. 전계헌 때 2017년 9월 8일 제출한 김성태 이사 은급재단 이사 사임서를 은급재단 고위 관계자도 뜬금없다는 도달주의 운운하며 해가 바뀐 2018년 5월 법원에 임기 끝난 총무 김창수가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다. 법인 국장 대우 박상범이 기안해 올리고 김상윤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 당사자 전계헌이 공모내지 방조 혐의가 짙은 그날 전결 처리했다는 사문서 위조 서류를 전 울보 총무 김창수가 법원에 2017년 9월 18일 이사회 당일 김성태 이사 출석 호명 실수였다는 진술서를 첨부해 법원에 제출했다. 그 서류의 동행사로 그들은 법원 업무를 방해하고 납골당 매매계약 이행 청구 1, 2심 소송을 이겨 총회 결의와 일반 상거래에도 역행하는 대법원 판결도 났다. 시민단체 ‘행동하는 자유시민’과 변호사단체 ‘한반도 인권과 통일을 위한 변호사 모임’ 등은 10월 16일 명재권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를 직권남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이들 단체는 또 윤석열 검찰총장이 건설업자 윤중천씨로부터 접대를 받았다고 보도한 한겨레신문·한겨레21 관계자 등도 이날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이들은 “보도내용과 편집 등을 보면 한겨레 측은 매우 의도적으로 기사를 최대한 퍼뜨리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면서 “공직자의 사회적 평판을 저하시킴으로써 독자들이 그의 직무수행에 대한 신뢰와 공무원의 품위를 의심하게 했다”고 했다. “언론의 본질적 기능인 건전한 여론 형성을 저해한 것”이라고도 했다. 한겨레는 검찰이 ‘윤 총장도 강원도 원주 별장 접대 대상에 포함됐다’는 진술을 윤씨로부터 확보하고도,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수사를 마무리했다고 지난 11일 보도했다. 이어 14일에는 윤씨가 대검 검찰과거사진상조사단과 면담하며 ‘사업가 임모씨 소개로 윤 총장을 알고 지냈다’는 등 구체적인 진술을 했으며, 이런 내용이 조사단 최종보고서에 담겼다고 후속 보도했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사람들을 참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므로 참된 사람이 아니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총회 지도자 자신이 믿음의 참된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을 총회 정치의 첫째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참된 사람은 겸손하다. 참된 사람이 총회장이 되면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훌륭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받들고 존중한다. 그렇게 하면 일반 총대들도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며 닮으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가 되면 사람들이 차츰 훌륭해진다. 문재인 치하에서 국격과 국민적 자존심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국격 상실 위에 기독교의 사회적 가치관 빈곤까지 합쳐진 것이 국민 전체의 자부심을 병들게 하고 정신적으로 지탱해야 할 사회윤리 질서마저도 위협받는 현실이 됐다. 나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으며 책임은 제3자에게 있다는 기독교계의 지도자들과 정치인이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과 대한민국의 배신자임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 3800여 년 전 바빌론 광장 비석에 새겨진 함무라비법의 중심 원칙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작금의 총회 지도자들과 은급재단 시레기 이사들과 달리 대부분의 보통 사람은 책임만큼 행동한다. 2020-03-14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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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4
  • 문재인 무리로부터 구해주소서
    류광수 목사 그의 목회 중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성경의 증거를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류광수의 효율적 전도를 위한 천사 동원령 주장을 한다. 왜냐하면 류광수는 천사 angel의 원뜻은 전령 messenger를 의미해 그에게 훈련받은 많은 전도자를 동원해 창세기 3:15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성경 말씀을 중점적으로 전하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이런 천사 동원령 주장을 이단의 한 근거로 주장하는 이도 있다. 어쨌든 류광수의 제자 김서권 목사가 목회하는 서초동 예수사랑교회에서 설교를 들어보고 그 활동을 살펴보면 사도행전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지상명령 전도 실천을 위한 그들의 신앙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둘째, 나는 하나님의자녀 모든 문제 끝(창세기 3:15에 근거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를 치셨기 때문에). 셋째, 마귀야 가라. 반면 총회규칙과 결의를 기만하고 사법을 속인 거짓말쟁이 전 울보 총무 김창수가 류광수 이단 정죄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데 그의 총회 총무로서의 행적에 비해 이율배반적이다. 어쨌든 이단이라고 정죄한 류광수와 교단 정치꾼들을 비교해보면 정말 누가 이단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어쩜 그렇게 길자연을 쏙 빼닮은 교단 정치꾼들의 사역 중심이 거짓의 아비 마귀(요 8:44)를 따라 거짓과 허울을 전하고 실천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단 정치꾼의 말을 들어보면 순간적으로 그 당시는 그럴듯한데 예수는 그리스도이시기에 그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절절한 고백이 없고 재판국 판결과정이나 기독신문 외 기자 입회를 회의 등에서 드러난 그들의 행동과 말은 신앙을 벗어난 사리사욕의 위선과 거짓으로 넘친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행태를 살펴보면 거짓의 아비 마귀 자식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요즘 영화 밀정의 주인공 모델이자 북한의 6.25남침 주범 김일성 측근 김원봉을 변호사 출신 대통령 문재인이 국군 뿌리라 주장했다. 그런 문재인의 하야를 용감히 주장하는 전광훈이 우리 교단을 이단이라 규정하는 망언을 했다. 그 망언에 기관지 기독신문은 안 썼다, 그런데 그들의 심정을 이제 이해하게 됐다. 총회 부패한 정치꾼들이 거짓의 아비 마귀를 닮아 거짓을 일삼는 이단 성향을 비난할 수 없는 그들 나름의 이해관계에 얽힌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위 교계 언론계의 단면이 이런 지경이니 거짓의 아비 마귀를 어떻게 경계하고 교계 부정을 막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총신을 어엿이 졸업해 지나친 전도 열정과 사소한 흠결 탓에 전 울보 총무 김창수의 고발에 류광수를 이단으로 몰았다는 정황이 있다. 그런 류광수는 우리 교단에서 배격당한 그 덕에 그 자신 교회의 성장은 물론이고 어엿한 한 교단을 일궈 우리의 이단 정죄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세계를 향해 맹렬한 전도를 펼치고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제103회 총회 2017년 9월 18일 20년 적폐 해소를 위한 김선규 제101회 총회장의 제100회 총회 결의에 따른 합법적인 납골당 매매계약 위업을 명품가방 수수 무임승차 제102회 총회장 전계헌이 거부하는 난동을 부렸다. 그럭저럭 또 해가 바뀌어 진행하게 된 납골당 매매계약 이행을 위한 소송을 막기 위해 전 울보 총무 김창수가 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은급재단 이사 김성태 장로 사임서를 총회장이고 은급재단 이사장인 김선규 목사에게 사전이든 사후든 보고 없이 전결 처리한 사문서위조 의혹의 서류를 전 울보 총무 김창수의 이름으로 법원에 제출했다. 그것은 거짓의 아비 마귀(요 8:44)를 따르는 마귀 자손의 지시나 공모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의혹이 짙다. 우리가 거짓을 말하거나 행해서 안 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 우리는 어떤 손해나 심지어 순교도 무릅쓰는 신앙을 생명의 규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 간에도 금해야 될 행위를 거룩한 총회가 급기야 국가의 법원을 상대로 위조서류를 냈으니 그 신앙과 양심을 어떻게 감당하고 유지할 것인가. 작금의 문재인이나 총회 부폐 패거리의 말이나 행위를 보면 그들이 거짓의 아비 마귀 자식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우리 스스로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가 전광훈의 망언대로 이단인지 아닌지를. 그래서 우리가 이단이라는 생각이 들면 류광수나 전광훈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류광수와 우리는 다를 바 없는(류광수는 반대하겠지만) 이단인 것이고 우리가 이단이라는 전광훈의 망언이 맞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문재인 반대 운동을 펼치다 선거법위반 명목으로 영어의 몸이 되기는 했지만. 그의 외침대로 2020년 4월 15일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어질 것인가. 하나님 당신을 부인하고 법도 무시하고 자행자지하는 문재인 무리가 설치고 시진핑의 우한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는 이 하나님의 나라 국민을 도와주시고 구원해주소서. 2020-0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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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3
  • 신천지와 총회 은급재단
    연 12프로 고리 불법 사채업 운영자 겸 불법 사문서위조 단체 총회 은급재단이 최춘경 권사 측에 제소한 '납골당 직무정지 및 직무대행자 선임 가처분 직무집행정지및 직무대행자선임가처분'(대법원 2019마6646)이 2020년 2월 7일 대법원 기각 판결이 났다고 한다. 이 결정은 향후 총회 은급재단의 납골당에 대한 불법 고리 사채 비리와 불법에 코로나19처럼 먹구름과 번개를 동반하게 될 것이다. 많은 국민이 신종 폐렴에 대해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확진자와 사망자 숫자들이 매일 보도된다. 대체 이 숫자들의 의미가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숫자가 아니다. 한 명 한 명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나이·병력 등 수많은 요인이 함께 발병 확률 및 감염 위험을 좌우한다. 그러니 숫자 때문에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 우리의 면역 시스템에도 좋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마음과 태도다. 40대 이상은 입장을 거절하는 "연령 차별주의" 호스텔에선 배낭족들이 "여행자의 세 가지 질문"을 서로 던진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어느 곳에서 오는 길인가. 어디로 갈 예정인가." 인생은 흔히 여행에 비유된다.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갈지 알 수 없으며 그 끝도 모른다. 누구나 생이 시작된 순간부터 주어진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모두에게 공평한 죽음이 찾아온다. 그런 세상 옛날에 우리 총회가 타산지석으로 삼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조선 왕 선조의 장남 임해군은 악명 높은 사이코패스였다. 백성들의 재물 약탈을 일삼고 노비나 궁녀들을 내키는 대로 겁탈하고 죽였다. 애첩을 빼앗기 위해 수하들을 화적떼로 위장시켜 특진관 유희서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특진관은 왕의 고문격인 데다 유희서는 영의정을 지낸 유전의 아들이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형조와 포도청의 공조수사 결과 배후에 임해군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임해군을 처벌하라는 상소가 잇달았지만 선조는 귀를 막았다. 그 사이 포도청에서 수사 받던 범인들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임해군은 무고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 승정원에 재조사를 지시한다. 승정원이란 왕의 비서실 아닌가. 선조의 뜻대로 포도대장 변양걸과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 대한 문초가 이뤄지고, 이들이 장을 맞고 유배에 처해지는 것으로 결말이 뒤집히고 만다. 400여 년 전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조국 사태와 은급재단 사문서위조 및 동행사와 총회장 공모내지 지시 혐의가 오버랩 되는 까닭이다. 사건이 뒤집힌 뒤 영의정 이덕형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소를 올렸다. 그러자 선조는 발끈해 비망기를 내린다. 비망기는 임금이 의중을 글로써 밝히는 정치행위다. 사관은 실록에 이를 기록한 뒤 평을 남겼다. 그것이 참으로 서늘하다. 결론으로 대신할 만해 길지만 인용한다. “사신은 논한다. 예부터 충성스럽고 곧은 말 하는 선비는 대부분 배척당했지만 오늘날처럼 심한 경우는 없었다. (...) 성상께서 가상하게 받아들여 용납하는 분부를 내렸다면 천심을 돌리고 여론을 통쾌하게 해 국가 형세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박하게 자존심만 내세우고 배척하면서 종이 가득히 반대하는 말만 낭자했다. (...) 이런데도 과연 임금의 말이라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주변의 방자함을 단속하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겠는가. (...) 언로를 막고 구차하게 침묵을 지키는 것을 장려함으로써 사론을 위축시키고 국세를 날로 깎이게 하였으니 신은 국가가 필경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그래서 연초의 흰 무지개가 큰 재변이 아니라 오늘의 비망기가 곧 나라를 망칠 분명한 증거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선조 37년 3월 27일) 총회 은급재단이 국장 박상범과 전 총무 김창수 주도의 김성태 이사 사임 전결 처리 위조사문서로 소송에 이긴 것을 정당시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위조 사실 자체의 인정도 거부했다. 더더욱 전국 교회와 총대들에게 사과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은폐하고 기관지 기독신문에 그 사실을 허위 과장까지 했다. 우리는 그동안 세상과 교계 할 것 없이 얼마나 성장 신화에 매몰돼 살아왔던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에 정신과 영혼을 팔아버린 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잡식동물이 된 인간 군상을 우리는 세상 권력과 교권을 쥔 사람들의 민낯을 통해 목도하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신천지는 맞춤형 심리상담 설문조사 등으로 마음을 얻으며 접근한다는데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상처가 많은 젊은이들이 속수무책이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신천지에 빠지는 사람은 대부분 기존 교회에 비판적이고 ‘말씀’ 공부에 목마른 기성 신도들이다. 7개월간 하루 세 시간씩 주 4회 교리 공부를 하고 시험을 통과해야 신천지 입교가 가능하다고 한다. 이 같은 종교적 열정을 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신천지 청년들처럼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세태를 위해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다시금 되새기고 실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실로 그러하다. 모든 죄의 근원은 탐욕이다.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 같은 탐욕이 타력에 떠밀려 인생을 추락시키는 원흉이다.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면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낙엽 하나 보면서라도 인격의 향내 나는 정직과 진실과 거룩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나라나 총회나 망하는 확실한 증거는 거짓이 횡행하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 마귀를 따르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세상에 대해 말씀환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1​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가짜 금장 시계를 찬 이만희의 거짓에 미혹 당하는 자들 같은 총회 은급재단 이사들은 미국 CIA 슬로건이기도 한 말씀을 되새기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20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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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2
  • 배재군 목사의 코로나 대책 - 이재명 경기 지사의 위험한 발상
    종교집회의 금지는 개인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은 개인의 행복권을 가지며 이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은 각자의 종교 행위를 할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한국교회를 통해 중국발 우한 폐렴을 지역사회에 감염의 영향을 끼친 수치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이 모이는 폐쇄 공간이 감염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폐쇄된 공간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폐쇄해야 할 것이다. 학교 개학을 늦추는 것과 교회 집회 금지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기본적인 의식이 결여된 잘못된 적용이다. 교회 집회를 하위법에 적용하여 금하는 것은 최상위 법인 헌법 정신에 반하는 행위이다. 이 경기 지사가 가지고 있는 기본의식 및 사상이 무엇인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이 경기 지사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임을 인식하는 근본정신을 가지고 있는지 그 발상이 심히 개탄스럽다. 대한예수교장로회 동원교회 담임목사 배재군 203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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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0
  • 더굳뉴스 창간 7년
    마스크 사려고 끝없이 늘어선 행렬, 격리된 사람들, 학교를 못 가는 아이들, 난민처럼 거부당하는 한국 여권, 그리고 도시마다 휑한 거리... 한국은 지금 코로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전쟁이 초래하는 궁핍과 갈등에 숨이 막히지만 억지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나 해보자면 전쟁은 정신력을 단련시킨다는 사실이다. 2020년 3월 5일 오후 1시 납골당 관련 수사 직무유기로 수사관을 고소한 사건의 고소인 진술을 위해 다른 경찰서 수사관 앞에 앉았다. 햇수로 7년 전인 2013년 더굳뉴스를 창간하고 제98회 수원 라비돌 총회 현장에 빌린 카메라를 들고 처음 발을 디뎠다. 그때 2020년 3월 6일 공산주의 국가 대도시 우한 촉발 코로나바이러스 창궐해 하 수상한 시절 더굳뉴스 주필(主筆)로 이 글을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3월 6일 아침 책상 앞에 앉으니 ‘내가 과연 이 자격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로만 보던 역사의 무게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한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느낌이 든다. 일제강점기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하다가 귀향을 앞둔 시점에 항일운동 혐의로 1943년 7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 중 1945년 2월에 옥사한다. 그의 유해는 고향 북간도의 용정(龍井)에 묻혔다. 주기철(1897년~1944) 목사는 일제 강점기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순교했다. 자기 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 설교로 기독교 신앙실천과 배일사상 그리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했다. 복역 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48세에 순교했다. 겨울의 감방 온도는 보통 영하 20도 정도였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는 당시 이들에게 어떤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기 어렵다. 책상 앞에 앉으며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기독교 교계는 물론 우리 교단에서도 아주 약한 더굳뉴스라는 기독교 언론이 얄팍한 7년째를 맞는 날 논설 책임자로서 신문과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하나를 생각한다. 신문은 멋진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교인을 모으는 설교문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총대들을 솔깃하게 하는 소문을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총대들이 반기고 좋아할 내용만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총회 실세의 마음에 드는 글을 써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필자가 7년째 쫓아다닌 것, 지금도 혼자 매일 찾으러 다니는 것,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든 것,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아닌 것, 왜 찾아다니느냐고 손가락질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찾았더니 믿음과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찾아내 보니 고약한 자를 분노케 해 고소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집단이나 세력의 증오를 사는 것 때로는 총대의 요구와 다른 것,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사실(事實·fact)이라는 것이다. 더굳뉴스의 7년은 한 줄로 줄여 말하면 믿음에 근거한 사실을 찾다가 성공하거나 실패한 기록이다. 한 줄만 덧붙이자면 그러다 박수받고 비난당한 기록이다. 대부분의 사실은 숨겨져 있다. 몇 겹 껍질 아래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기자 생활 전부는 이 껍질을 벗기는 일이었다. 성공도 있었다. 하지만 못 찾아낸 것, 잘못 찾은 것이 더 많았다고 고백한다. 때로는 납골당 같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만 곁길로 흐르는 사실도 있다. 누구나 보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믿음에서 벗어나거나 믿음을 왜곡하는 권력의 위압 때문일 수도 있고 총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행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은 이때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신문으로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사실로 위장한 것들과 벌이는 싸움이다. 위장 사실 가짜 사실은 인터넷을 타고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광우병 괴담, 천안함 괴담, 사드 전자파 괴담, 수돗물 괴담, 미네르바 괴담, 총회장 금권 선거, 총신대 총장 선거 담합, 납골당 관련 가짜 뉴스 등 위장 사실은 수많은 총대를 불신의 늪으로 몰고 다닌다. 대부분 뒤에는 총회 정치 세력이 있다. 언론이 괴담을 만들기도 하고 총대 규모가 커지면 다른 언론들이 편승하기도 한다. 그런 일들로 일부 총대들은 실은 성경이 지적하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많은 경우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화나게도 한다. 이익을 챙긴 자에게 좋으면 사실이고 아니면 거짓이라고 한다. 총대가 솔깃해하는 사실은 허구인 경우가 더 많다. 정말 목말라하는 총대가 아무도 없다고 할지라도 진실을 추구하는 성경적 사실은 그러나 결국 교회와 총회와 역사를 움직인다.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는 사실과 다른 길을 가는 총회가 맞을 결과는 명백하다. 사실은 전투에서 패할 수는 있어도 전쟁에서 지는 법은 없다. 어둠이 빛을 덮을 수 없고 마귀의 거짓이 하나님의 진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반기지 않아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이 사실을 찾는 일은 힘들지만 보상도 없다. 그래서 언론이 없으면 사실도 없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총회를 위한 나의 사명(使命)이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른 소명(召命)이다. 필자의 더굳뉴스에 대한 소망은 더굳뉴스에 났으니 마음엔 안 들어도 사실은 사실일 것이라고 총회 총대와 소수라도 독자들이 믿는 신문이고 싶다. 물론 지금은 못 미친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1㎝씩이라도 하나님과 함께 믿음으로 나아가려 한다. 마라톤의 40㎞ 지점을 선수들이 저력을 발휘해야 할 승부처라고 할 때 세상의 저력은 막판에 발휘하는 뒷심 뚝심의 의미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저력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진짜 힘이라는 의미이다. 평소 갈고닦은 힘, 꼭 필요할 때 발휘되는 힘, 쉽게 얻어지지 않지만 결코 없어지지 않는 본연의 힘이라는 말이다. 사슬의 강도는 가장 약한 고리만큼만 강하다는 격언이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이건 집단이건 결정적 순간에 발휘하는 힘만큼만 힘이 있다고 또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근본 힘이 총회와 총대의 저력이며 위기의 순간에 그 저력을 극대화하는 능력이 총회 지도자의 자격이자 책무이다. 창간 7년째 되는 해에 독자 여러분께 드리는 약속이다. 그러기 위해 늘 이 말씀을 되뇐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2020-03-07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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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7
  • 이효상 칼럼 - 코로나사태와 ‘온라인예배’ 유감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고 확산되면서 종교계의 대처가 여론을 도배하고 있다. 코로나 확산은 신천지를 해체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120만명을 넘어서고, 종교계가 마치 코로나의 진원지처럼 비춰지고 있다. 한국천주교는 16개 모든 교구가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를 중단했다. 한국천주교 236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은 법회, 성지순례 등 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각 종단마다 예배나 미사, 법회를 취소하거나 연기하고, 행사를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국민 모두의 안전을 위해 모든 종교계의 신중한 판단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서울의 대형교회를 비롯해 주요 교회 상당수가 이에 동조했다. “국민들과 성도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온라인으로 예배를 중계했다. 서울의 온누리교회나 확진자가 나온 소망교회·명성교회를 비롯해 새문안·덕수·도림·금란·삼일·서대문·오륜·잠실 교회 등과 경기도의 인천 주안장로교회 등도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교단까지 나선 경우도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는 지난달 26일, 주일예배를 가정·온라인 예배로 드릴 것을 권고하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교단까지 나서 주일 현장예배 자제를 권고한 것이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도 “각 교단 지도 아래 개별교회의 당회가 주일예배를 잠정 중단하는 것을 고려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반해 서울의 영락교회 등 수 많은 교회는 이날 현재 여전히 현장 주일예배를 고수했다. 영락교회는 ‘목회 서신’을 통해 “주일 낮 예배는 1~5부 예배를 정상적으로 드린다”며, 임시당회 열어 중단없는 예배 지속을 결정했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예배는 유지되어야 한다’, ‘한번 중단된 예배는 쉽게 재개되기 힘들다’, ‘예배중단이 길어지면 교회공동체가 와해되거나 회복이 힘들 정도로 약화될 것이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바이러스로 인한 예배중단은 인류 근세 종교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것은 전쟁만큼 더 무서운 일인 것 같다. 개인의 위생이나 이단 사이비에 대한 이처럼 경각심을 가지고 전 세계가 각성한 계기도 드물 것이다. 생명과 신앙 사이에서 한쪽을 택하여 예배를 중단하거나 온라인으로 대체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교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배드리는 곳이다. 그러기에 예배는 교회의 기본이다. 지금까지 교회가 예배를 중단한 경우는 없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교단이 폐쇄를 당한 경우는 있었지만 예배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생(生)과 사(社)의 6.25 전쟁의 포탄 가운데서도 예배는 중단되지 않았다. 요즘 한국교회를 향한 시선이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주일예배를 드리면 나쁜 교회이고, 주일예배를 안 드리면 좋은 교회’라는 이상한 프레임이 퍼지고 있다. 이런 프레임은 ‘주일’과 ‘예배’에 대한 거부감을 키우는 일이다. 여기에 헌금문제까지 거론되면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다. “진정으로 국민들, 성도들의 건강과 안전을 생각한다면, 과감한 결단을 내려 예배를 중단해야 한다”는 소리를 높이는 목사 장로가 있는가 하면,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주일 대예배 중단 의견’을 묻는 여론 조사를 진행하는 목회자 기관까지 등장했다. 또 “우리의 신앙형식이 세상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이기심이지 이 세상을 향하신 생명의 하나님 뜻은 아니다”고 강조하며 하나님의 뜻까지 들고 나온 연합기관도 나타났다. 신앙이나 예배는 이단이나 사이비가 아닌 이상 누구도 간섭하거나 억압할 수 없는 선택사항이다. 주일성수의 신앙은 자유이고 자율의 영역이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처럼 소중한 예배에 참석하고 안하고는 선택적 자율의 문제이다. 교회는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예배중단은 ‘바이러스가 올 수 있다’는 염려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안 올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다. 교회가 정부와 달리 국민 전체의 위생과 예방, 확산을 방지할 책임이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지만, 본질적으로 정부의 책임을 교회에 돌리려 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교회가 방역체계에 협조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방역을 최대한 하여 예배 참석과 출입시 세정 및 방역마스크, 체온체크 등 할 수 있는 예방을 다하면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나 목회자, 성도 모두 예배를 위해 모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플까. 멕시코 난민들과 부르는 노래 가운데 ‘돈데보이(어디로 가야만 하나요? Donde voy)’가 있다. 힘겨운 삶을 벗어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미국 국경을 넘어야 하는, 그리고 어렵게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멕시코 난민들의 애환을 담은 절규의 노랫말이다. 이처럼 주일이면 문 열린 예배드리는 교회를 찾아 ‘어디로 가야만 하나요?‘(Donde voy)’묻는 수많은 신자들의 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처럼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은 적도 없는 것 같다. 교회의 예배중단과 온라인예배라는 표현은 유감이다. 갑작스런 코로나19로 교회가 예배를 쉰다는 것과, 예배를 유튜브, 인터넷, 스마트폰, 방송으로 드린다는 결정은 교회의 존립 대한 또 다른 문제를 낳게 된다. 그럼 주일예배를 대체하는 것은 ‘온라인중계’인가?, ‘온라인예배’인가? 온라인중계를 ‘예배’로 인정할 때부터 예배당은 존재가치를 잃게 된다. 앞으로 예배는 방송시설만 있으면, 아니 스마트폰으로 찍어 SNS로 발송 중계하고 헌금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그럼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안나가신자’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공교회의 온전한 예배는 ‘회중’이 필수적이다. 회중이 모이지 않으면 예배가 성립되지 않으며, ‘성도의 교제’가 없는 예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코로나19로 하나님 앞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신앙 지키는 일과 세상에 불어 닥친 생명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일 사이에서 교회의 고민이 크다. 교회는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생명과 안전 못지않게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영혼과 신앙의 길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20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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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0-03-04
  • 배재군 목사의 예배 대책
    예배 모임을 위해, 어리석은 자와 같은 나의 생각? 로마 기독교 박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모임을 갖기 위해 생명 내걸었지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카타콤이 그 증거이며, 믿는 자들이 생명 내걸고 어느 장소에 함께 모여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며 회집을 가졌던 것이 과거 공산당 시절에 소련 및 중공에서의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었나요? 그것이 예배 공동체였으며 가정교회였습니다. 결코 개별적으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생명 내걸고 예배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로마시대에 그리스도인 됨을 알리는 물고기 표시가 왜 필요했을까요? 오늘의 교회가 예배 모임을 위해 생명을 내걸었던 초기의 가정교회로 해체하여야 할까요? 동원교회 담임목사 배재군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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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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